배철현의 성서 오디세이 예수의 위대한 질문④
- “깊은 곳으로 가라” (누가복음 5장 4절)
배철현 서울대 인문대학 종교학과와 서아시아언어문명학과 교수
인간이 ‘고치’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
…예수가 시몬에게 말한 것처럼, ‘두려워 말고 변화하는’ 새해 맞이해야
예루살렘 구 도시 안에 있는 기독교 성당인 성묘교회(聖墓敎會:Church of the Holy Sepulchre).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고 시신이 묻혔다 부활한 곳으로 지금은 그리스정교회의 예루살렘 총대주교청의 역할을 한다.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의 주인공 산티아고는 절망과 위기의 순간에 다른 어부들은 결코 할 수 없는 놀라운 선택을 한다. 그는 다른 어떤 어부도 가보지 않는 망망한 바다 끝으로 배를 몰고 간다. 여기에서 예수의 위대한 메시지, 존재의 근원을 혁신하는 자기 결단의 순간을 본다. ‘깊은 곳으로 가야 한다’는 계시이다.
권태. 이 단어는 우리 모두가 지닌 영적이며 정신적인 병이다. ‘권태’나 ‘지겨움’은 자신에게 익숙한 환경에 무의식적으로 동화되어 좀처럼 새로운 것을 시도하지 못하게 하는 장벽이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한 사회적 회로나 혹은 자신의 편견과 습관이 만들어놓은 ‘골방’에 갇혀 오랫동안 쳇바퀴 돌듯 제자리에서 열심히 뛰고 있다.
우리가 가장 무서워하는 것은 ‘미지(未知)’라는 세계다. 경험해보지 않고 예측 불가능하기 때문에 좀처럼 그 세계에 발을 내디디려 하지 않는다. 이 두려움이 또 하나의 막이 되어 우리는 대개 권태라는 ‘애벌레’로 안주한다. 애벌레가 고치의 과정을 거쳐 나비가 되어야 하지만, 영원히 애벌레로 남게 되면 죽고 만다. 애벌레의 특징은 역설적이게도 ‘관심’과 ‘무관심’으로 무장한다.
자신이 21세기에 왜 태어났는지, 하필이면 대한민국에 태어났고,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부모 아래 태어났는지,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스멀스멀 몸과 마음에 체득된 편견과 습관에 안주하여 지내보면 자신에게 익숙한 보잘것없는 종교, 이데올로기, 이념, 물질적인 욕망에 맹목적으로 매달리는 과도한 ‘관심’으로 매일매일을 연명한다. 우리의 또 다른 특징은 ‘무관심’이다.
자신이 경험한 세계가 우주가 창조할 때부터 내 자신을 위해 정교하게 기획됐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어 설득하고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다른 것’이 아니라 열등하거나 틀린 것으로 상정하고 적대적인 ‘무관심’으로 폄하한다. 사실 보통사람이 ‘다른 세계’로 진입하기는 참으로 어렵다. 우리는 자신의 세계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의 세계를 무심한 눈으로 보기 위해서 치열하게 공부한다.
매미 우화(羽化)의 순간. 매미는 애벌레로 땅속에서 3~7년 정도 지내다가 여름 한철을 살기 위해 몇 시간 동안의 산고를 이기며 성충으로 변한다.
“애벌레는 나비가 되지 않으면 죽는다”
권태를 극복하는 힘은 자신이 경험한 익숙한 세계를 넘어서는 행위다. 우리는 이 행위를 ‘용기’라고 부른다. 용기가 넘치는 말이나 행동은 외적인 충격을 통하거나 오랫동안의 경험을 통해 몸에 배어 있는 행동이다.
우리는 이 권태를 안전하고 쾌적하게 벗어나기 위해 직접적인 충격이 아닌 간접적이며 내적인 충격을 시도한다. 이 내적인 충격이 바로 ‘배움’이다. 우리는 동서고금의 위대한 작품들을 공부함으로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우리가 공부하는 목적은 따로 있다. 내 자신이 경험한 세계가 ‘옳다’는 것을 주장하고 자기중심적인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공부한다. 우리는 공부하는 숭고한 의미를 잃고 자아전시를 위해 무서운 무기로 무장하기 위해 공부한다. 우리 사회에서 학력 좋은 사람들이 학력이 덜 좋은 사람들보다 사회에 악을 끼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고자 하는 이유를 물어보면 십중팔구는 좋은 직장을 갖고 자신과 어울리는 배우자를 만나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다. 이것들은 분명히 인간적 삶에 중요하고 필수적인 요소이지만, 이런 삶은 자신만의 고치를 떠나지 못하는 애벌레의 삶이다.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해서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고치를 깨고 나와야 한다. 또한 나비가 자신이 빠져나온 그 고치를 깨끗이 먹고 훨훨 날아가듯이, 우리도 우리가 안주하는 ‘고치’를 흔적도 없이 먹어치우고 하늘로 올라가야 한다. 자연의 모든 동식물의 탄생과정에는 반드시 위대한 변신이 있다. 애벌레는 나비가 되기 위한 단계를 준비하고 있는 셈이다.
만일 애벌레가 변신하려 하지 않고 애벌레로 살기로 작정하는 순간 그 애벌레는 자연의 이치를 역행할 뿐만 아니라, 그것 자체가 죽음이다. 모든 생물은 이 순환의 이치를 우주의 질서에 맞게 순응한다. 인간이 ‘고치’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각고의 노력이 필요하다.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는 ‘애벌레’ 상태의 인간이 변신을 거쳐 아름다운 ‘나비’와 같이 자신의 정체성을 지닌 자유로운 인간으로 되는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소설은 ‘산티아고’라는, 늙었지만 경험이 많은 어부와 그가 잡아야만 하는 위대한 청새치와 벌이는 흥미진진한 대결 이야기다.
산티아고는 쿠바의 어부이다. 이 가난한 어부는 인생의 우여곡절을 다 겪은 우리의 초상이다. 사랑하는 아내는 오래전에 죽고 두 딸은 도시로 시집을 보내 홀로 생활한다. 인생의 황혼을 맞아 별로 할 일이 없는 노인이 이 소설의 주인공이다.
1 미국이 낳은 위대한 작가 어네스트 헤밍웨이. 그는 대표작 중의 하나인 <노인과 바다>를 통해 한 어부의 위대한 각성과 변화의 순간을 그렸다.
2 스펜서 트레이시의 중후한 연기와 쿠바, 갈라파고스섬 등에서 촬영한 바다 풍광으로 유명한 영화 <노인과 바다>의 포스터.
‘사막의 뒤편’까지 가리라는 결심
그가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는데 어부들 사이에는 전설처럼 내려오는, 갈 수 없는 곳에 서식하는 청새치를 어획하는 일이다. 그는 쿠바의 가장 유능한 어부 중의 하나이지만 지난 84일 동안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하고 돌아왔다. 그가 사는 이 조그만 어촌의 어부들은 산티아고를 비웃는다.
그들은 평상시 산티아고의 자신만만한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산티아고는 동료 어부들에게 겸손한 사람이지만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과, 그에 부합하는 실력을 갖춘 어부다.
그는 지난 수십 년간 바다에 나가 바다의 광활함과 자연의 위대함을 몸으로 익혔다. 그는 바다와 그 안에서 살아 숨쉬는 수많은 물고기를 자신이 생계를 위해 잡아야 하는 ‘먹이사슬’ 안에서 생각하지 않았다. 바다와 물고기, 그리고 날씨는 산티아고가 자신의 삶을 이해하는, 아니 자신의 삶의 모든 것이다. 그가 경외심을 가지고 바다와 바다에 사는 생물들을 대하니, 바다는 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알려주었다.
그가 비록 오랫동안 물고기를 잡지 못해, 자신의 명성에 먹칠한 것 같지만, 이 기간은 오히려 위대한 일을 위한 준비단계라고 생각하였다. 산티아고만큼 바다와 그 안의 생물들에 대해 더 많이 아는 어부는 없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비웃음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이 위대한 어부라는 사실을 증명해줄 전설적인 물고기를 기다린다.
이 절망과 위기의 순간에 산티아고는 다른 어부들과는 달리 상상할 수 없는 놀라운 선택을 한다. 그는 다른 어떤 어부도 가보지 않는 망망한 바다 끝으로 배를 몰고 간다. 거기엔 모든 사람이 상상하지도 못한 커다란 물고기가 존재하리라고 막연히 기대한다. 기원전 13세기 이집트에 살던 ‘모세’라는 인물이 신을 만나게 된 기회도 바로 자신이 정해놓은, 남들이 정해놓은 범주를 넘어설 때, 조심스럽게 모습을 드러낸다.
구약성서에 의하면 모세는 떠돌이 노예인 ‘히브리’인으로 이집트에 태어나, 동료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인들에게 학대당하는 것을 보고, 그 이집트인들을 살해하고 사막으로 도망친다. 사막에서 목동으로 40년간 무료한 일상을 보내다 큰 결심을 한다.
그는 지난 40년 동안 사막에서 자신의 마음을 보고 사막의 모래바람과 태양, 그리고 가축들의 생로병사를 지켜보면서 우주가 돌아가는 이치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 어느 날, 그는 자신이 매일매일 가던 그 범주에서 벗어나 ‘사막의 뒤편’까지 가리라고 결심한다. 이 사막의 뒤편에서 모세는 신을 만난다. 우리는 신을, 우리가 익숙한 일상을 벗어날 때 종종 마주한다.
산티아고의 지혜와 용기, 그리고 그의 자존심의 깊이는 그의 다소 ‘무모한 감행’에서 드러난다. 이 결정은 산티아고의 운명을 바꾼다. 산티아고 자신은 남들이 생각하는 자신이 아니라 오랜 경험을 통해 체득한 ‘그 자신’을 찾기 위한 일생일대의 모험을 시작한다. 산티아고에게 삶이란 죽음과 파괴가 시퍼렇게 도사리는 회로이다.
이것을 견디는 힘은 인내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 세상에는 이것을 해결하는 두 가지 길이 있는데, 하나는 패배를 인정하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파괴될 때까지 견디는 인내의 삶이다. 산티아고는 지나간 자신의 삶을 돌아보았다. 지난 84일 동안 바다 한복판에서 하루하루 동물처럼 연명하는 자신을 묵상해보았다.
산티아고는 자신의 한계를 시험할 전설적인 ‘어획’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단순히 생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어부로서 연마한 기술을 다시 한번 증명하여 그 어촌의 어부들에게 존경받기를 원했다. 특히 그는 마놀린이라는 이름의, 어부가 되려는 자신의 어린 제자의 ‘인생 멘토’가 되고자 한다.
무게 500㎏이 넘는 거대한 청새치의 모습. 헤밍웨이 <노인과 바다>에 나오는 청새치는 어부가 일생을 바쳐 추구한 ‘삶의 진실’을 상징한다.
무시무시한, 결코 이길 수 없는 괴물
마놀린은 산티아고를 사랑하고 존경한다. 헤밍웨이는 ‘마놀린’이란 이름을 통해 이 소설의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하려 한다.
‘마놀린(Manolin)’이란 이름은 ‘구원자’라는 의미를 지닌 ‘Emmanuel’이란 영어에 해당하는 스페인어 ‘Manuel’의 축소형 명사다.
마놀린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이 산티아고를 40일 동안이나 함께 바다로 가서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해 동네의 웃음거리가 되기보다는, 다른 어부에게 어부 수업을 받으라고 강요한다.
마놀린은 산티아고의 ‘예상되는 성과’와 상관없이 고기를 잡으러 나가겠다고 선언한다. 산티아고는 85일째 조그만 돛단배에 몸을 싣고 섬의 얕은 물을 떠나 깊은 곳으로 향한다. 플로리다와 쿠바 사이에 흐르는 강력하면서도 한 치도 예측할 수 없는 조류가 흐르는 해협인 ‘걸프 스트림(Gulf Stream)’까지 나아간다.
걸프 스트림은 파고가 높고 물살이 빠른 대서양 난류로 미국 플로리다 끝에서 시작하여 미국과 뉴펀드랜드의 동부 해안가를 따라가다가 대서양을 가로지른다. 겨울에는 따뜻하게, 여름에는 시원하게 만드는 코발트블루 색의 바다다. 커다란 포식성 물고기들이 계절에 맞추어 이동하는 경로이기도 하며, 100km 정도 너비에 1km 수심으로로 이뤄진 ‘깊은 곳’이다. 그는 미끼를 커다란 바늘에 끼워 바다 깊이 드리운다.
600 패덤(fathom), 그러니까 180m 정도 깊이 그 줄을 내렸다. 머리 위로 태양이 내리쬐는 정오에, 청새치가 그 미끼를 덥석 물었다. 산티아고는 그 물고기를 솜씨 있게 낚아채지만 끌어당길 수가 없었다. 힘이 좋은 청새치는 배를 끌기 시작한다. 팽팽한 낚시 동아줄을 묶을 수 없게 되자 산티아고는 허리, 등, 그리고 손을 이용하여 단단히 줄을 잡는다. 이틀 동안 밤낮으로 배를 끌고 다니더니, 3일째 되던 날 힘이 빠져 이제 물살에 몸을 실어 천천히 움직인다.
청채치가 잡아당기고, 뛰어오르고, 혹은 달아나려고 몸부림칠 때마다, 낚시 줄을 감고 있는 손의 상처는 깊어만 간다. 산티아고는 다치고 피곤했지만, 그 청새치를 자신의 고통을 함께하는 친구로 생각한다.
셋째 날, 청새치가 힘이 빠졌을 때 3일 동안 한숨도 잠을 자지 못한 산티아고도 탈진상태에 이르렀다.
힘겹게 청새치를 수면 위로 끌어올려 작살로 사력을 다해 깊게 찌른다. 배 옆에서 죽어 떠오른 청새치는 산티아고가 본 물고기 중 가장 큰 놈이다. 무게는 860㎏, 길이는 무려 5.5m이다. 인내를 통해 진실한 자기의 모습을 밝혀줄, 제2의 자아라고도 할 수 있는 무시무시한, 결코 이길 수 없는 괴물이었다.
이 괴물은 신화에 종종 등장하여 새로운 경지로 들어오려는 사람들을 막는 존재다. 자신을 초월해 새로운 땅으로 들어오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의례가 바로 이 괴물이다. 그 물고기는 너무 커서 배 안으로 끌어당길 수가 없다. 산티아고와 청새치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씨름하기도 하고 서로 ‘연대하기도 하면서’ 줄다리기를 한다. 청새치를 관통한 창에 달린 동아줄은 산티아고와 청새치의 연결고리다. 이 둘을 하나로 만드는 끈이다. 육지로 돌아오기까지의 여정이 3일이다.
구약성서의 요나도 신의 명령을 거부하고 자신의 뜻대로 배를 타고 도망간다. 풍랑을 맞은 선원들은 누군가를 희생해야만 파도가 잠잠해질 것이라고 믿고 제비를 뽑아 낙점된 요나를 흉흉한 바다에 던진다. 구약성서 <요나서>에서도 커다란 물고기가 등장한다. <노인과 바다>의 청새치처럼 큰 물고기가 바다에 떨어진 요나를 한입에 집어삼킨다. 요나는 삼 일 밤낮을 이 물고기 뱃속에서 자신을 돌아보며, 신의 말씀을 거역한 도망자 요나에서 신의 말씀을 목숨을 걸고 선포하는 위대한 예언자로 탈바꿈한다.
산티아고는 그것을 배에 바싹 묶고 조그만 돛대를 올려 집으로 향한다. 산티아고는 생선시장에서 이 물고기를 팔고 받을 돈을 생각하니 흐뭇했지만, 한편으로는 이 물고기를 먹는 사람들이 이 물고기의 위대함을 모를 것 같아 속상해 한다. 3일 동안 산티아고는 청새치를 매달고 육지로 항해한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영웅적인 의지와 인내를 보여준다. 거의 십자가상의 예수가 보여준 인내이다.
청새치와 연결된 줄을 잡은 산티아고의 손바닥은 깊게 파여 뼈가 보일 정도이며 왼쪽 손과 허리는 거의 마비되어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 이 육체적 고통은 청새치가 그의 인내를 시험하는 최고의 적이며, 그 고통을 통해 그는 자신이 ‘괜찮은 어부’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증명한다. 청새치로부터 흘러나온 피 냄새를 맡고 상어떼가 몰려온다. 가장 먼저 청상아리가 공격한다. 산티아고는 작살로 그 청상아리를 죽이지만, 그 결과 작살과 거의 모든 밧줄을 잃게 된다.
구약성서 <민수기> 20장에 보면 모세가 반석을 쳐 물을 나오게 하는 장면이 있다. 그 생명수가 콸콸 쏟아지는 바위가 바로 이 근처에 지금도 있어 ‘모세의 샘’으로 불린다. 모세는 사막에서 목동으로 40년간의 일상을 보내다 궁극의 깨달음을 얻고 신을 만난다.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
산티아고가 육지에 도착했을 때 청새치에게 남은 것은 앙상한 뼈뿐이었다. 산티아고는 청새치에게 한없는 연민을 느끼며 마치 자신의 살점이 모두 떨어져나간 것처럼 슬퍼한다. 마놀린은 산티아고로부터 청새치를 찌른 창을 물려받으면서 그의 삶을 계속 이어나갈 것을 약속한다. 산티아고는 자신이 너무 멀리 나간 것을 후회하고 자신의 가장 위대한 적인 그 청새치를 죽인 것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새벽에 겨우 도착한 산티아고는 자신의 오두막으로 돌아가 깊이 잠든다.
그 다음날 아침 동네 어부들은 아직도 배에 묶여 있는 청새치의 뼈대를 보고 감탄한다. 이들은 생사를 넘나든 산티아고의 투쟁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심지어 근처 카페에 있는 관광객들은 이것이 걸프 스트림에서나 잡을 수 있는 청새치란 사실을 전혀 모르고, 그것을 상어의 뼈대로 잘못 생각한다. 3일 동안 돌아오지 않은 산티아고를 보고 마놀린은 울음을 터뜨린다.
마놀린은 산티아고에게 커피와 뉴욕 양키스의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의 득점 기록이 보도된 신문을 가져간다. 산티아고와 마놀린은 ‘동업하기로 동의하고’ 산티아고는 잠이 든다.
그는 잠에서 아프리카의 해변에서 놀고 있는 사자꿈을 꾼다. 이 산티아고와 같은 인물이 바로 예수의 첫 제자인 시몬이다. 시몬은 예수를 만난 후 베드로로 개명했다.
예수는 40일 동안의 금식과 명상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통찰하는 영적인 지혜로 가득 차게 되었다. 바로 고향 나사렛으로 내려가 자신이 어릴 때부터 다니던 유대교 회당에 들어갔다. 그곳에서 예언자 이사야의 글이 적힌 두루마리를 건네 받아 읽는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 구절은 메시아 등장을 언급하는 내용이다. 예수는 이 두루마리를 다시 말아서 시중드는 사람에게 돌려주고는 “이 성경 말씀이 오늘 이루어졌다”라고 말한다.
예수를 어린 시절부터 보아왔던 마을 어른들은 “이 사람이 그 목수 요셉의 아들 아닌가?”라고 말하여 비웃는다. 예수는 “예언자는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유대인들은 단단히 화가 났다. 자신들이 그렇게도 기다리는 메시아라고 떠버리는 예수를 참을 수 없었다. 이것은 몰염치한 신성모독이다. 그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들고일어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밀치며 내쫓았다.
그들의 동네가 산 위에 있으므로, 그들은 예수를 산 벼랑까지 끌고 간 것이다. 몇몇 사람이 옷을 찢으면서 자신을 메시아라고 말한 예수가 유대 율법을 어겼으니 돌로 쳐죽여야 한다고 말한다. 아니 그럴 필요도 없이 예수를 가파른 절벽으로 밀어서 죽이자고 말한다. 옥신각신하는 가운데, 예수는 겨우 그들 사이에서 도망쳐 나왔다.
예수가 깨달은 우주의 비밀은 인간 안에는 ‘신의 형상’이라는 위대함의 유전자가 숨겨져 있으며, 신의 형상을 회복하는 자는 모두가 신의 자녀이며 심지어는 신과 같은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예수는 바로 이 산티아고와 같은 제자를 찾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넘어 깊은 바다로 나아가 커다란 청새치를 마주할 수 있는 인간, 그 과정을 통해 영적이며 위대한 존재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인간이다.
예수가 제자를 찾으러 간 곳은 게네사렛 호숫가다. 게네사렛은 갈릴리 바다 북서쪽에 있는 평야다. 예수의 말을 들으려고 수많은 사람이 이곳까지 따라왔다. 예수는 자신이 전하는 내용이 당시 종교인이나 정치가들의 귀에 거슬리기 때문에 소크라테스처럼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예수는 소크라테스와는 달리 제자들을 당시 종교정치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서 찾지 않았다. 기존의 철학과 종교가 아닌 인간 안에 내재한 신의 형상을 발견하고 새로운 영성운동을 시작할 수 있는 인물을 찾고 있었다. 예수가 하늘나라에 관해 말을 마친 후 고개를 돌리니 배 두 척이 그때 막 호숫가로 들어오고 있는 참이다. 어부들이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해변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깊은 곳으로 들어가라!”
예수는 그물을 씻고 있는 어부의 배에 올랐다. 그 배는 시몬이란 사람의 소유다. 시몬은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러 나갔으나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허탈한 상태였다. 예수가 무리들과 함께 시몬의 배 앞에 와서 말한다.
“내가 당신 배 위에 올라가 무리에게 말을 전해도 됩니까?”
이전의 시몬 같으면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의 이런 무례한 부탁을 단번에 거절했을 것이다.
시몬은 한숨도 잠을 자질 못해 집에 돌아가 곯아떨어질 참이었다. 시몬은 무리를 몰고 온 이 신비한 청년에 대해 소문을 들을 적이 있었다. 직업은 어부였지만 시몬은 남의 말을 듣기 좋아하고 어른 말에 잘 순종하는 그런 착한 사람이었다. 그의 이름 시몬은 원래 히브리어 ‘심온(shim’on)’에서 유래했다.
‘심온’이란 단어는 ‘듣다; 순종하다’라는 의미를 가진 ‘샤마(shama)’라는 동사의 현재 분사형으로 ‘듣는 사람’ 혹은 ‘순종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예수는 시몬의 배에 올라서 배를 뭍에서 조금 떼어놓으라고 하시고 배에 앉아 무리를 가르치셨다. 예수는 그들에게 ‘이기심’이란 섬에서 과감히 떠나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는 밑에서 유심히 듣고 있었던 시몬에게 말한다.
“당신은 매일 바다로 가서 그물을 내려 물고기를 잡습니다. 당신은 내가 원하는 곳으로 가서 그물을 내려보시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사실 시몬도 예수의 말을 듣고 평생 처음 지금까지 살아온 과거를 뒤돌아보았다. 이곳에서 어부생활을 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수십 년을 다람쥐 쳇바퀴 돌듯 똑같은 생활을 반복하고 있었다. 시몬은 이 카리스마 있는 청년에게 “제가 어디로 가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었다.
시몬은 속으로 “내가 이 갈릴리 바다 구석구석을 다 아는데, 이 랍비와 같은 젊은이가 물고기를 많이 잡는 곳을 알려준다고?”라고 의심하면서 비웃는다. 예수는 시몬에게 말한다.
“해변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깊은 곳으로 들어가라! 그리고 고기를 잡기 위해 네 그물을 내려라!”
이 구절에 대한 한글 성서번역은 보통 “깊은 데로 나아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아라”이다 성서 원문의 뜻을 전혀 살리지 못했다.
이 구절에 대한 영어 번역본만 보아도 한글 번역과는 사뭇 다르다. 영어본은 “Launch out into the deep, and let down your nets for a draught”이다. 깊은 곳으로 가기 위해서는 해변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야 한다는 말이다. 라틴어 번역본은 “Duc in altum” 즉, “네 자신을 인도하여 깊은 곳으로 진입하여라!” 이며 그리스어 원문은 “에파나가게 에이스 토 바쏘스”이다. 첫 번째 동사 ‘에파나고’의 원래 의미는 ① (해변으로부터 떨어져) 먼 곳으로 진출하다, ② 돌아오다, 두 가지다.
그러므로 이 그리스 원문의 번역은 “(해변으로부터 떨어져) 애써 나와 깊은 곳으로 진입하여라”, 혹은 “깊은 곳으로 다시 돌아오라”이다. 예수는 이 명령을 분명 자신이 사용하던 아람어로 사용했기 때문에, ‘에파나고’를 원래 예수의 구어인 아람어로 재구성한다면, 그 단어는 ‘아바르’이다. ‘아바르’라는 아람어 단어는 히브리어에서도 발견되는 단어인데, 그 의미는 “제한 구역을 넘어서다; (법, 관습을) 어기다”라는 심층적 의미를 내포한다. 예수는 시몬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따분한 일상으로부터 애써 탈출해보라고 명령한 것이다.
‘에파나고’라는 그리스 동사의 숨겨진 핵심적 의미는 자신의 익숙한 환경으로부터 과감히 떠나는 일, 단절하는 행위다. 산티아고가 다른 어부들과는 달이 84일 동안 한 마리 물고기도 잡지 못했지만, 걸프 스트림이란 자신의 익숙한 세계로부터 과감히 탈출했듯이, 예수는 시몬에서 다른 동료들처럼 해변가에서 물고기 잡는 일로부터 탈출하라고 명령한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에게 익숙한 환경, 그리고 습관처럼 영위하는 일상생활이 행복하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혁신이나 창조적인 일을 위한 첫걸음은 자신에게 편한 과거의 모든 것을 과감히 유기하는 용기로부터 시작한다. 그러면 해변가에 있는 익숙한 어장으로부터 떨어져 어디로 가란 말인가? 예수는 ‘깊은 곳’으로 가라고 명령한다. 이에 해당되는 그리스 단어는 ‘바쏘스’이다. 보통 ‘깊은 곳’, 혹은 ‘바닥이 없는 심연’으로 번역된다.
이에 해당하는 라틴어 단어‘altum’은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깊음 그 자체이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에서 ‘에멕(emeq)’ 혹은 아람어로 ‘암카(amqah)’이다. 기본적 의미는 ‘심연;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이다. 고대 근동신화에서 ‘심연’은 무시무시한 바다의 여신으로 등장한다. 이 무질서한 바다는 어떤 생물도 다 삼켜버리는 괴물이다. 이 심연은 산티아고가 갔던 걸프 스트림과 같은 장소이다.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 시몬에서 시몬 베드로로 이름을 고친 베드로는 예수 앞에 엎드리며 인생의 회한을 고백한다.
“그대로 하니, 많은 고기 떼가 걸려들었다”
예수는 시몬에게 다른 어부들이 가는 흔한 장소를 넘어 ‘깊은 곳’으로 가라고 말한다. 시몬은 이 ‘깊은 곳’을 한 번도 간 적이 없다. 도무지 어디인지 모른다. 시몬은 자신이 가 본 적이 없고, 당연히 그곳에서 물고기를 잡은 적이 없기 때문에,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예수에게 항변한다. 예수에게 “깊은 곳으로 애써 가도 소용없다”고 말한다. 시몬은 어제 밤새도록 물고기를 잡으려 시도했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몬이 예수에게 투덜댄다.
“유대 랍비처럼 허튼 소리는 안하는 사람 같지만 당신은 어부 생활을 잘 모릅니다. 우리가 멍청해 보입니까? 어제 밤새도록 애를 썼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했습니다. 당신 체면을 생각해서, 당신이 명령하는 장소가 어디인가 가 봅시다.”
예수와 시몬이 탄 배와 시몬의 동생들이 탄 다른 배가 뒤따랐다.
해변에는 어부들과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이 서 있었다. 이들은 배를 타고 한참 나갔다. 자신들이 매일 고기를 잡던 어장을 훨씬 지나, 자신들도 알 수 없는 그런 곳으로 간 것이다. 시몬이 한 번도 간 적이 없는 장소, 그래서 그가 어떻게 그물을 내려야 할지 모르는 장소에 온 것이다. 시몬은 예수의 얼굴만 보고 있었다.
그때 예수가 사방을 둘러보더니 시몬에게 그물을 내리라고 명령한다. 시몬은 별 기대하지 않고 그물을 내렸다. 성서에서는 이 광경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대로 하니, 많은 고기 떼가 걸려들어서,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배에 있는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자기들을 도와달라고 하였다. 그들이 와서, 고기를 두 배에 가득히 채우니,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 되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 30세가 될 때까지 조그만 동네 목수로 일한 사람이 하루아침에 어업의 전문가가 되었다는 말인가? 일생 동안 어부였던 시몬보다 바다와 생물에 대해 더 많이 안다는 말인가?
이 에피소드에 숨겨진 의미는 시몬의 반응에서 찾을 수 있다.
<누가복음> 저자는 이제 시몬이 더 이상 자연인 시몬이 아니라 심연이란 경계를 통과한 새로운 인간으로 표현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시몬 베드로(누가복음 5장 8절)로 고친다. 시몬이 새로운 이름 베드로를 얻은 것이다. 시몬은 바로 배 안에 서 있는 예수 앞에 엎드린다. 과거의 시몬을 버리는 행위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주님, 나에게서 떠나주십시오. 나는 죄인입니다.”
왜 시몬은 자신을 죄인이라고 말했을까? 시몬이 무슨 죄를 지었다는 말인가?
그리스어 원문에 ‘죄인’은 ‘하마르톨로스’이다. 고전 그리스에서 ‘죄’의 개념은 그리스 비극에 종종 등장한다. 그리스 비극의 영웅들은 자신이 의도하지 않은 실수를 하게 된다. 이 실수를 ‘죄(하마르티아)’라고 부른다. 그러나 ‘하마르티아’의 기본적인 의미는 궁술과 관련이 있다.
궁수가 과녁을 겨냥하여 활을 쏘았으나, 그 활이 과녁을 빗나가는 것을 지칭하는 용어가 ‘하마르티아’이다. 다시 말하자면 궁수가 의도한 활이 날아가는 정확한 궤적이 있다. 그 궤적으로 활이 날아갈 때 과녁에 명중할 수 있다. 궁수는 과녁에 명중하기 위해 평상시 몸을 단련하고 오랫동안 연습해야 한다. 또한 활을 쏘는 순간에도 숨을 멈추고 정신을 집중하여 무아상태로 진입해야 한다. 이러한 준비단계에서 하나라도 소홀히 한다면 명중시킬 수 없다. 이 비켜나감을 그리스어에서 ‘하마르티아’라고 했다.
활을 쏘는 순간, 무엇을 할 것인가?
예수가 사용하던 아람어에서도 ‘죄를 짓다’라는 동사는 ‘하타’인데, 이 동사도 그 숨겨진 의미가 “(활이) 과녁을 빗나가다”이다. 신은 우리에게 각자가 묵묵히 걸어야 할 길을 주었다. 그 길은 태어나면서부터 몸에 밴 자기중심적인 삶으로부터 떠나 과감히 심연을 찾는 여행에서 시작한다. 베드로가 자신을 죄인으로 지칭한 이유는 자기가 살아온 인생에 대한 회한에서 나온 고백이다.
초대교회 역사를 보면 베드로는 설교를 통해 하루에 3천 명을 회개시키고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교의 기초를 놓은 사람이다. 베드로는 하루에 천 리를 달릴 수 있는 천리마(千里馬)인데, 지금까지는 짐을 싣고 동네만 왔다갔다하는 짐꾼의 말로 산 것이다. 천리마가 집짐승으로 산다면 그것은 직무유기다. 베드로는 하루에 3000명을 회개시키고 그들을 새로운 삶으로 인도하는 위대한 신앙인인데, 평생 자기식구 3명만 먹었으니 그는 직무유기의 죄를 지은 죄인이다.
시몬과 그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은, 그들이 잡은 고기가 엄청나게 많은 것에 놀랐던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발견한 것이다. 자신이 알게 모르게 만든 경계를 넘어야만 일어나는 기적이다. 그 옆에 있던 시몬의 동료인 야고보와 요한도 이 광경을 보고 깊이 깨닫는다. 예수가 시몬에게 말한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을 낚을 것이다.”
이들은 모두 배를 뭍에 댄 뒤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갔다고 전한다.
예수는 시몬에게 <노인과 바다>의 청새치와 같다. 걸프 스트림에만 존재하는 청새치는 산티아고가 자신의 경계를 허물고 과감하게 여행을 감행함으로, 또한 3일간의 사투를 통해 자신을 완전히 죽여야만 얻을 수 있는 대상이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3일 동안 청새치가 자신의 살을 모두 상어들에게 뜯긴 것처럼, 앞으로 펼쳐질 예수의 삶도 그러하다.
시몬은 <노인과 바다>의 산티아고와 유사하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삶의 의미를 잃은 산티아고가 자신 안에 숨겨진 위대함이란 보물을 ‘깊은 곳’으로의 여행을 통해 확인한 것처럼, 시몬도 예수가 전한 인생의 소중한 조언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그 곳으로 여행했을 때, 비로소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다.
예수라는 청년이 2000년 전 어부 시몬에서 질문한 것처럼 2014년을 맞이한 한국인들에게 묻는다.
“당신은 깊은 곳에 가 봤습니까?”
우리가 그곳에 가보지 못한 까닭은 이런 질문을 받아본 적이 없고 일상이라는 공간과 시간에 몰입되어 다른 세계를 볼 수 있는 영적 오감의 기능이 고장 났기 때문이다.
시몬은 우리가 그런 획기적인 시도를 하지 않는 것이 자신의 삶에 대한 모욕이며 ‘죄’라고 고백한다. 예수가 시몬에게 말한 것처럼, 두려워말고 변화하자. 2014년을 그 변화로 사람들이 감동을 받아 연쇄 변화하는 새로운 변화의 원년으로 삼으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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