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배철현

배철현의 성서 오디세이 2

rainbow3 2019. 10. 7. 02:07


배철현의 성서 오디세이 - 예수의 위대한 질문②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마태복음 6장 25절)

 

배철현 서울대 인문대학 종교학과 교수

 

신이 자신의 의지를 인간의 DNA 속에 숨겨놓은 섭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신이 요구하는 ‘의(義)’를 찾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것이다

 

 

세례 요한이 처형된 마캐루스 성채의 헤롯궁전. 요한은 요단강 계곡에 밀려드는 유대인들에게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고 외치며 그들의 영적 쇄신과 각성을 촉구했다. 

 

질문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답을 기대하는 질문과 질문을 받는 사람의 실력을 측정하기 위한 질문, 혹은 상대방의 무식을 꾸짖는 “정말 모른단 말이야?” 같은 질문도 있다. 이런 질문들과는 목적이 또 다른 종류의 질문이 있다. 수사학(修辭學)적 질문이다.

수사학적 질문은 즉답이나 정답을 요구하지 않는다. 그 질문은 오히려 질문을 받은 사람을 고민에 빠뜨려 자신만의 답을 찾도록 유도한다.

 

그 답은 질문에 대한 의도를 깊이 생각하도록 유도하고 자신의 삶에 비추어 자신에게 맞는 답을 찾으려 노력할 때 서서히 그 신비한 모습을 드러낸다.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난 예수도 수사학적인 질문을 통해 자신을 따라다니던 유대인들에게 삶에 대한 성찰과 그 시각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사실 신앙은 분명한 해답이 아니라 자신이 당연하게 여기던 세계관과 신앙관의 끊임없는 파괴이며, 새로운 세계로의 과감한 여행이고, 그 세계에 대한 한없는 의심이다.

 

신앙인의 표상인 욥이 그러했다. 욥은 기원전 5세기경 아라비아 쪽에 살았던 인물인데, 성서에서 신이 인정한 가장 완벽한 인간이었다. 욥은 또한 동방의 최고 부자였다.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과 자식을 잃고 자신은 몹쓸 피부병에 걸리면서, 자신이 그렇게 확신하던 신앙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확신하는 그런 신앙은 대개의 경우 극단적인 이기심인 경우가 많다.

 

욥의 신앙은 신도 인정한 최고의 신앙이었지만, 신이 “내가 세상에 기초를 놓았을 때, 네가 어디에 있었느냐?”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의 세계관과 신앙은 한순간에 무너진다. 그는 신의 알 수 없는 질문에 자신이 그렇게 매달리던 신앙을 버리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주님의 뜻을 흐려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 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을 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라고 고백한다. 

 

평범하나 인간 존재의 허를 찌르는 질문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팔레스타인 베들레헴의 예수탄생 교회를 관광객들이 둘러보고 있다.

 

 

예수도 이런 수사학적 질문을 통해 우리의 이기적인 세계관을 서서히 무너뜨린다. 사실 예수의 첫 질문이 무엇이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에게 전해진 <신약성서>를 통해 그 질문을 찾을 뿐이다. 예수의 말과 행적에 관한 내용은 그리스도교가 전통적으로 사용해온 경전인 <신약성서>와 기원후 2∼4세기 초대 그리스도교 교부들에 의해 ‘이단’으로 낙인 찍힌 문서들, 특히 ‘영지주의’ 문서들이 최근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되면서 새롭게 조명되기 시작하였다.

 

그리스도교의 경전인 <신약성서>에는 예수의 일생에 대해 서로 다른 시각에서 기술한 4권의 복음서가 있다. 4권의 복음서는 각자 자기들 혹은 자기가 속한 공동체가 이해한 예수를 자기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기술하였다. <신약성서>를 공부하기 시작하면, 이 다양한 서술형태가 예수를 이해하는 데 혼란을 가중하기도 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이 네 권의 복음서 사이에 그 내용의 유사점도 발견되고 자기만의 독특한 서술도 눈에 띈다.

 

전통적으로 <마태복음>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은 ‘공관복음(共觀福音)’이라 부른다. 예수라는 인물을 자신들과 그들이 속한 신앙공동체가 다른 시선으로 해석했기 때문이다. 이 세 권의 복음서에는 동일한 내용들도 발견된다. 학자들은 <마가복음>의 내용이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도 다소 변형된 형태로 등장하기 때문에 <마가복음>을 가장 먼저 기록된 복음서라 추정한다.

 

그리고 학자들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 공통적으로 발견되지만 <마가복음>에 발견되지 않는 내용이 존재하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기록한 저자(들)는 <마가복음>과는 별도의 자료를 참고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 내용을 처음 연구하기 시작한 독일학자들은 이 별도의 자료를 독일어로 ‘원자료’라는 의미를 지닌 ‘크벨레(Quelle)’의 첫 글자인 Q로 불렀다. 공관복음서, 즉 <마태복음서> <마가복음서> <누가복음서>가 모두 기록한 예수 일생의 최초의 사건은 예수가 당시 요단강에서 요한이라는 인물로부터 세례를 받는 사건이다.

예수에 관한 족보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기술되었고,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사제인 동방박사가 예수를 찾아온 사건은 <마태복음>에만 수록되었다.

 

<신약성서>에 등장한 예수의 첫 질문은 <마태복음> 6장에 등장한다. 그 질문은 신학적으로 철학적으로 난해한 질문이 아니라, 너무 평범하여 아무도 질문이라고 여길 수 없는 허를 찌르는 물음이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아니, 먹고 마시는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데, 그 문제에 신경을 쓰지 말라는 이 질문의 의도는 무엇인가?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를 삶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생각한다. 만일 1세기 팔레스타인에서 주택문제가 오늘날과 같이 자기 정체성을 드러낼 만큼 중요했다면, 예수는 음식과 옷뿐만 아니라 주택문제에 대해서도 “어디에서 사는지 걱정하지 말라”라고 충고했을지 모른다.

예수는 왜 이런 질문을 했는가? 예수의 이런 질문을 이해하기 위해 예수가 어떤 인물인지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수의 어린 시절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다만 예수는 태어나자마자 쫓기는 신세였다고 <마태복음>은 전한다. 헤롯(기원전 73년 경∼기원전 4년)은 로마제국으로부터 유대 지방을 치리(治理)하라고 임명된 분봉왕이다. 그는 로마제국이 유대를 간접 지배하기 위해 유대의 왕으로 임명한 자다. 헤롯은 오늘날 요르단의 산악 지방인 에돔에서 태어났다.

 

외국인으로 유대를 치리해야 했던 헤롯은 유대인들의 마음을 사려고 예루살렘에 성전을 다시 세우고 대규모 수로시설 공사를 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유대의 왕가였던 하스몬 왕조의 공주 미리암과 결혼하여 유대교 제사장 가문의 전적인 후원을 받았다. 그는 로마와의 긴밀한 관계를 통해 유대의 왕이란 칭호를 유지한다.

 

 

이탈리아 북부의 바닷가 마을 리미니에 조성된 예수탄생 재현 모래 조형물. 예수는 탄생 30년 후 자신에게 주어진 신의 미션을 수행하기 위해 고난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세례와 금식이 예수의 삶을 바꾼 계기

 

그는 또한 <마태복음> 2장에 등장하는 동방박사와 예수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에서 어린 아이들을 죽이라고 명령한 왕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학살은 <마태복음> 이외에는 등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당시 어떤 역사적인 기록도 발견되지 않고 유대의 본봉왕인 헤롯이 유아학살에 대한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마태복음> 저자의 특별한 의도가 들어간 글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는 예수를 <구약성서>의 모세처럼 묘사하고자 한 것 같다. 예수시대의 유아학살은 <구약성서> <출애굽기> 모세시대의 유아학살과 유사하고, 예수의 가족이 이집트로 도망쳤다가 헤롯이 죽은 후 갈릴리로 돌아왔다는 이야기는 모세가 파라오로부터 도망쳐 시내반도 미디안으로 도망쳤다가 파라오가 죽자 이집트로 돌아온 이야기와 일치한다. <마태복음>의 저자는 예수를 히브리인들을 구원한 모세처럼 1세기 이스라엘 사람들을 구원할 메시아라고 믿었다.

 

어린 시절 예수는 나사렛이란 작은 시골동네에서 30년간 살았다.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사마리아 산간 지방을 지나 134㎞ 지점에 있는 산골동네이다. 오래전부터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되어 당시 이곳에는 유대인들의 경전인 토라를 배우는 학교가 있었다. 시므온 벤 쉐탁(기원전 120∼40년)은 유대 전역에 아이들의 토라학교를 만들었다. 당시 유대 아이들은 토라에서 유대인의 실제 삶에 적용하여 다시 풀이한 ‘미쉬나’를 배웠다.

 

토라의 언어인 히브리어는 6세기경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의해 멸망할 때 소멸하였다. 히브리어는 경전을 기록한 고전어로만 존재하였고 일상생활 언어는 아람어였다.

당시 유대인 회당에서 토라를 읽을 때, 같은 구절을 세 번 반복했다고 전한다. 랍비는 토라의 언어인 이미 사어가 된 히브리어로 토라를 한 번 낭송하고, 그 후에 유대인들의 구어인 아람어로 두 번 번역하여 낭송했다고 전한다.

 

예수의 언어는 아람어이며 자신의 생각을 아람어로 표현했음이 분명하다. 우리에게 전해 내려온 <신약성서>에 담긴 예수의 어록들은 아람어를 당시 학자들의 언어인 그리스어로 번역된 것이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말들을 히브리어로 읽는 것과 마찬가지다.

 

예수는 아버지 직업을 이어받아 목수 일을 하며 연명했을 것이다. <누가복음> 2장에 예수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등장한다. 예수의 부모는 매년 유대인 절기 유월절을 기념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134㎞ 이상 먼 거리를 걸어야 하기 때문에 아무리 빨리 걸어도 사흘 넘게 걸리는 장거리 여행이다. 예수가 열두 살이 되던 해 예수의 부모는 친척들과 함께 모두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났다.

 

예수의 부모는 유월절 절기를 지내고 예루살렘에서 나사렛으로 한참 가는 길에 소년 예수가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 그것도 하룻길을 간 뒤에나 발견했다고 전한다. 예수의 부모들은 급히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예수와 떨어진 후 사흘째 되던 날 예수를 찾았는데,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에서 랍비들과 토론하고 있었다고 전한다.

 

더욱이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에게 “얘야, 이게 무슨 일이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느라고 얼마나 애를 태웠는지 모른다”라고 말하자 예수는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알지 못하셨습니까?”라고 대답하였다고 전한다. 12세 어린아이치고는 버릇없는 예수다.

<누가복음> 저자는 예수는 어릴 때부터 남달랐다는 표현을 이 에피소드를 통해 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

 

평범하게 갈릴리 시골 마을 나사렛에서 목수 일을 하던 예수가 어떻게 오늘 우리가 아는 위대한 인물로 탈바꿈하였을까? 자연인 예수에서 카리스마가 넘쳐 만나기만 하면 사람을 변화시키는 예수로 탈바꿈한 결정적인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자연인 예수와 메시아 예수 사이에는 결정적인 두 가지 사건이 있었다.

이 두 사건은 바로 세례와 40일간의 금식이다. 공관복음서 모두 예수가 세례를 받은 사건을 그가 향후 2000년 동안 세계사에 족적을 남긴 인물의 시발점으로 보고 있다.

 

또한 복음서는 예수의 세례와 곧바로 이어지는 40일간의 금식을 기록하고 있다. 1세기 팔레스타인의 시골청년 예수는 이 두 가지 결정적인 사건을 통해 목수로 연명하던 자연인에서 카리스마가 넘치는 영적인 지도자가 되었다.

 

 

요한이 세례를 통해 동시대 인물의 영혼을 구제하려 했던 요단강의 최상류 지점. 아직도 요단강 세례를 받기 위해 몰려드는 기독교도들의 모습을 목격할 수 있다.

 

 

세례는 자기중심의 이기심을 과감히 버리는 행위

 

예수와 동시대 인물로 세례 요한이란 자가 있었다. <신약성서>의 네 복음서 모두 세례 요한의 활동을 자세히 기록할 뿐만 아니라 <누가복음>에서는 예수와 친척관계로 묘사한다. 세례 요한은 그의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그리스도교의 세례의식을 처음으로 만들어 실행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물은 혼돈의 상징이지만, 물을 갈라 마른 땅이 드러나게 하는 사건이 바로 창조행위이다. <출애굽>에서도 오합지졸의 히브리인들이 ‘갈대바다’를 건널 때, 바닷물이 벽처럼 서서 바다의 바닥이 드러나고, 이들이 바다를 건넌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 민족이 탄생한다.

 

세례 요한이 요단강가에서 세례를 베풀며 회개를 촉구하고 있었다. 그는 낙타털로 된 옷을 입고 가죽 띠를 찼으며 메뚜기와 야생 꿀로 연명하며 들에서 살았다. 고대 이스라엘의 전형적인 예언자 스타일이었다. 누구나 그의 모습을 보면 신의 분노가 이 땅에 도래했음을 간접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예수가 이전에 세례 요한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는 거의 먹거나 마시지 않아 몸이 너무 말라 사람들은 그를 귀신처럼 유대 광야를 끊임없이 배회했다고 전한다.

 

당시 예루살렘 주민들과 모든 유대인은 이 괴상한 사막의 지도자에게 끌렸다. 사람들은 줄지어 이 괴팍한 예언자의 말을 경청하기 위해 요르단 계곡으로 모였다. 세례 요한은 카리스마가 넘쳤으며 수백 명의 유대인이 그의 설교를 듣고 자기의 과거를 부정하고 새롭게 출발하는 상징으로 물세례를 받았다. 그는 당시 여느 예언자나 설교자처럼, 후에 예수나 예수의 제자들처럼 기적을 행하지 않은 점이 흥미롭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금욕적이며 신에 헌신하는 삶의 모습과 거기에 들어맞는 말로 많은 사람을 움직였다.

 

그는 사막에서 낮에는 살인적인 더위를 참고 밤에는 추위와 들짐승들의 위협에 시달리며 자신과 유대인들을 영적으로 치료하기 위한 처방을 고민한다. 그는 요단강 계곡에 계속 밀려드는 유대인들에게 외쳤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

이 외침으로 그는 수많은 사람을 움직였고 그중에 한 명이 바로 예수였다. 이 외침이 뭐길래, 그토록 많은 사람, 특히 예수의 마음을 움직여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을까?

 

세례 요한은 예수가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러 올 때 그의 존재를 몰랐거나 그가 메시아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하여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다”라는 구절은 예수가 자신의 임무를 깨닫고 소위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선포한 첫 번째 말이었다.

 

‘회개하라’ 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회개’는 보통 자신의 잘못을 시인하고 뉘우치는 행위로만 알고 있다. ‘회개’에 대한 잘못된 인식은 이 단어에 대한 라틴어 번역에서 시작했다.

라틴어 성서는 이 단어를 ‘파이니텐티아(paenitentia)’ 라고 번역하였다. ‘파이니텐티아’는 신‘ 의 은총을 얻기 위해 행하는 고행성사’이다. 초대 교회 교부들은 인간이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신의 은총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이 단어를 사용한 것 같다.

 

이 단어는 원래 <신약성서>가 기록된 그리스어 원문에는 그리스어로 ‘메타노이아’ 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메타노이아’ 는 어떤 종교적인 권위가 있는 신부나 목사에게 가서 죄를 고백하고 ‘신의 은총’으로 자신의 죄를 용서받는 ‘파이니텐티아’와는 전혀 다른 의미가 숨어 있다. 이 단어는 자신의 삶에 대한 깊은 성찰을 통해 자신의 생각, 말, 그리고 행동을 바꾸다’라는 의미이다.

 

‘메타노이아’는 단순히 말의 고백을 넘어서 자기 삶에 대한 정교하면서도 자비로운 묵상을 전제로 한다. 그 묵상을 통해 자신의 타성적인 세계와 이기적인 성향을 벗어나, 깊은 사고를 통한 이상을 따라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는 결단을 의미한다.

 

 

헤르몬산 설원에서 녹아 내리는 물이 요단강을 이뤄 갈릴리 호수로 흘러간다. 가버나움 북쪽 지역 폭이 좁은 요단강의 모습으로 양쪽 강안에 겨자풀 숲이 우거졌다.

 

 

회개는 모든 걸 버리고 새 단계로 진입하는 결단

 

우리는 익숙한 생각과 말과 그리고 행동에 길들여져 있다. 다름을 경험한 적도 없고 그것을 찾으려고 깊이 묵상해본 적도 없기 때문에 타성에 젖은 그 모습, 그 습관화된 모습이 바로 죄이다.

‘메타노이아’는 바로 그 소용돌이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깊이 뉘우치라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참모습이나 반드시 해야 할 일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을 바꿀 수 없다’.

 

‘메타노이아’를 예수가 사용하던 아람어로 다시 번역하면 무슨 단어일까?

예수는 ‘회개하라’를 어떻게 말했을까? 아람어로 ‘회개하라’라는 단어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단어는 구약시대에도 예언자들이 회개를 촉구할 때 사용했다.

히브리어로는 ‘슈브’이고 아람어로는 ‘타브’이다. ‘회개하다’를 의미하는 아람어 단어 ‘타브’는 ‘돌아오다’ 혹은 ‘회복하다’이다.

 

아람어 ‘타브’는 그리스어 ‘메타노이아’에서는 발견할 수 없는 또 다른 차원의 의미를 선사한다.

그것은 ‘회개’는 ‘신이 모든 인간에게 각각 맡긴 그 미션을 깨달아 알고, 그 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 깊이 숨겨져 있는 신의 DNA를 회복하라’는 명령이다.

‘타브’는 우리의 DNA 안에 있는 신의 형상을 삶을 통해 사람들에게 드러내라는 촉구이다.

 

예수는 자신의 고향 갈릴리를 떠나 요단강으로 세례 요한을 찾아와 세례를 받는다. 요한은 예수를 보고 “내가 선생님께 세례를 받아야 할 텐데, 왜 선생님께서 내게 오셨습니까?”라고 말한다.

예수는 자신이 아직 활동할 때가 아니라면서 세례를 받았다. 예수가 몸을 요단강에 담근 후 뭍으로 올라오니 하느님의 영이 내려오는 것을 보았다.

 

예수는 세례라는 의례를 통해 오래된 과거, 30년 동안 자신과 식구들을 위해 생계를 유지하던 목수 일을 요단강에 흘려 보냈다. 그는 이제 그 누구도 할 수 없었던, 꼭 이루어야 할 미션을 찾는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그는 누구도 볼 수 없었던 강력한 바람과 같은 신비한 영이 자신 위에 임하는 것을 보게 된 것이다.

 

그 순간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라는 소리가 들렸다.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유대인들, 심지어는 세례 요한도 못 듣던 신비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영의 귀’가 열린 것이다.

이 소리는 이전에 아브라함과 이삭이 신의 명령을 받고 이삭이 스스로 희생제사의 제물이 되고자 했을 때, 신이 갑자기 등장하여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들려준 것과 똑같은 소리이다. 예수는 분명 요셉과 마리아의 육신의 아들이지만, 이 순간부터는 신의 아들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모든 인간은 부모를 통해 이 세상에 오지만, 동시에 인간에는 신의 속성이 내재한다는 사실을 예수가 깨달은 것이다. <구약성서>에서 이삭에게 한 이 구절이 예수가 세례를 받으면서 다시 한 번 반복된 이유는 이삭의 삶과 예수의 삶이 깊이 연관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예수는 세례 사건을 통해 영적으로 최고의 경지에 도달했다. 그 순간, 신은 여지없이 자신이 사용할 인물이 정말 위대한지 항상 시험한다. 

 

금식은 인간의 한계를 시험할 뿐만 아니라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을 버리기 위한 혹독한 훈련이다. 모세는 40일 동안 두 번 금식기도를 감행하였다. 한 번은 신으로부터 십계명을 받기 위해 산에 머물 때다. 다른 한 번은 산에서 내려와 이스라엘 사람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숭배하는 모습을 보고 화가나 십계명이 새겨진 돌 판을 부순 후에 다시 십계명을 받기 위해서였다.

 

또한 엘리야도 북이스라엘 아합 왕의 부인 이세벨로부터 시내산으로 도망가 40일 동안 금식 기도하였다. 엘리야는 이 경험을 통해 신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천둥, 번개 혹은 지진과 같은 커다란 천체의 변화에 계신 것이 아니라, 이런 것들 뒤에 아무도 들을 수 없고 볼 수 없는 ‘조그만 침묵의 소리’에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요한복음> 2장의 혼인잔치가 열린 가나(Cana)에서 서남쪽으로 큰 고개를 두 개 넘으면 접시처럼 큰 분지의 동네가 나타난다. 여기가 바로 예수가 태어나고 자라난 나사렛이다.

 

 

신의 음성은 ‘침묵의 소리’에 숨어 있다

 

예수가 세례를 받을 때 하늘에서 영적인 기운이 그를 알 수 없는 곳으로 인도한다. 그것은 식물 한 포기 없는 사막이었다. 그 기운이 그를 그 어느 것도 살아남지 못하는 사막으로 데려간 이유는, 예수를 시험하기 위해서다. 이 시험의 주체는 신이지 사탄이 아니다.

 

사탄은 단지 신이 시키는 일을 수행할 뿐이다. 성서의 위대한 인물들은 반드시 시험을 받았다. 그것도 너무나 가혹한 시험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75세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버리고 미지의 세계로 가란 명령을 받았고 100세에 기적적으로 얻는 아들을 신에게 번제로 바쳐 죽이라는 시험을 받았다.

 

예수는 이제 40일 동안 금식하면서 새로운 인간으로 태어난다. 영적인 기운이 예수를 사막으로 데리고 간다. 그리스어로 이 사막을 ‘에레모스(eremos)’라고 부른다. 이 단어는 ‘사막’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그 본래 의미는 ‘사람이 거주하지 않는, 버려진, 비어있는 공간’이란 의미다. 세상과 떨어져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공간이다. 이 단어는 고대 히브리어로는 ‘미드바르(midbar)’이며 예수의 언어인 아람어로는 ‘미드바라(midbara)’이다.

 

성서에서 40일은 상징적인 의미로 과거의 자아를 완전히 없애는 오랜 기간을 의미한다. 예수는 아무도 없는 비어있는 공간, 그러기 때문에 자신의 참 모습을 직시할 수 있는 공간에서 애벌레에서 나비가 태어나듯이 새로운 존재로 태어난다. 이 경계단계는 죽음을 경험하는 순간으로, 인간이 측정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신비한 순간이다.

 

예수는 세례를 통해 과거를 단절하고 40일의 묵상을 통해 미션을 받는다. 묵상(黙想)은 기도와 다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간절히 바라는 ‘기도’는 마치 다섯 살 꼬마가 사탕가게에 들어가 모든 사탕을 사달라고 부모에게 떼쓰는 꼴과 마찬가지다. 한국에서도 입시 때만 되면 종교 시설들이 바빠진다. 우리는 매년 ‘학력고사를 위한 100일 기도’를 보면서 자신의 욕망이 투영된 삐뚤어진 모습을 본다.

 

기도는 사실 자신을 되돌아보는 행위이다. 동방기독교 전통에서 묵상은 그리스어로 ‘쎄오리아(theoria)’이다. 영어에서 ‘이론’이란 의미를 지닌 ‘theory’가 이 단어에서 유래했다. ‘쎄오리아’의 본 뜻은 ‘자신의 마음을 깊이 보기’이다. 필자가 원하는 기도의 모습을 라틴어 단어 ‘contemplatio’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단어는 영어에서 ‘contemplation’으로 차용되어 보통 ‘묵상(黙想)’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독수리의 눈으로 자신의 모습을 찍어보는 연습’이다.

 

라틴어 ‘contemplatio’는 ‘contemplari’라는 동사에서 유래했는데, 그 본래 의미는 ‘가만히 보다; 관찰하기 위해 공간을 표시하다’이다. ‘contemplari’는 ‘-과 함께’라는 의미를 지닌 ‘con-’과 ‘점을 치기 위한 장소’라는 의미를 지닌 ‘templum’의 합성어다.

 

‘신전’이란 의미를 지닌 ‘temple’이 유래한 라틴어 ‘templum’은 ‘하늘에 나는 새의 모양을 보고 길흉화복의 점을 치는 장소’이다. 그러므로 ‘묵상’이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이 신의 섭리에 맞는지 ‘독수리의 눈으로 자기를 보는 연습’이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내가 가고 있는 길이 올바른 길인지 스스로 관찰자가 되는 연습’이라고 할 수 있다.

 

내 자신이 그렇게도 집착했던 ‘에고’라는 자아에서 벗어나 ‘무아(無我)’ 상태로 진입하는 수련이 바로 기도이다. 이 수련을 통해 내가 네가 되고, 내가 그것이 되기도 한다.

예수는 40일 묵상을 통해 자신의 삶을 통해서 해야 할 미션을 깨닫는다. 예수는 과거 욥의 고백처럼 신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눈으로 확인한다. 예수는 신비라는 ‘절대타자’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게 된 것이다.

 

공중에 나는 새와 들판에 핀 백합화를 보라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의 첫 질문은 우리의 의식주에 관한 내용이다. 사실 평범한 우리는 의식주를 확보하기 맹목적으로 하루하루를 산다. ‘당신은 왜 사십니까?’라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사람은 이 질문에 대답하기를 피한다. 십중팔구는 생각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는 충격적으로 우리에게 어떻게 먹고 살 것인지 걱정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또는 무엇을 마실까 걱정하지 말고,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말아라.” 그리고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으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으냐?”라고 질문한다.

예수는 당연한 질문을 하고 있다. 당연히 목숨이 음식보다 중요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한데, 왜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일까?

 

예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자세히 풀지 않고 오히려 전혀 다른 예를 들어 설명을 시도한다. 예수는 공중에 나는 새와 들판에 핀 백합화로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나누려 한다. 세상에는 1만종 이상의 새가 있는데 이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길을 따라 살아갈 뿐이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대부분의 새는 그렇게 살다가 죽어간다. 예수는 새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곳간에 모으지도 않는다는 점을 통찰한다.

 

또한 예수는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고 말한다. 예수는 “들의 백합꽃이 어떻게 자라는가를 살펴보아라. 수고도 하지 않고, 길쌈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온갖 영화를 누린 솔로몬도 이 꽃 하나만큼 차려 입지 못하였다”라고 갈파한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모든 부와 권력을 소유했던 솔로몬, 특별히 시바의 여왕이 그의 지혜를 확인하려 찾아왔던 솔로몬의 영광도 이 무명의 백합꽃보다 못하다고 말한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들어갈 들풀도 신이 이렇게 화려하게 입히시는데, 만물의 영장인 인간이 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느냐고 나무란다.

 

이 말은 어떻게 보면 힘들게 하루하루 살아가는 우리에게 현실을 도피하는 무책임한 충고처럼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는 인간이 신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짧은 인생을 살면서 자신이 꼭 해야 할 일을 찾으라고 요구한다. 우리의 삶에서 의식주 해결보다 근본적인 임무를 예수는 ‘신의 나라’를 지금 여기서 이루려고 노력하고 ‘신이 요구하는 의’를 행하라고 주문한다. ‘신의 나라’는 신의 뜻이 편만(遍滿)한 상태를 의미한다.

 

여기서 ‘나라’는 장소가 아니라 어떤 원칙이 지켜지는 경지를 의미한다. 신의 원칙은 바로 그 뒤에 등장한 ‘신이 요구하는 의’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여기에서 ‘의’란 옳고 그름의 기준에서 옳은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의 삶에서 벗어나 내 이웃과 자연에서 신의 흔적을 찾아 경외심을 가지며, 이웃과 자연에 대한 자비의 마음이다.

 

우리는 신이 요구하는 ‘의(義)’를 찾기 위해 이 세상에 오지 않았는가?

우리는 새가 낳은 조그만 알에서 매년 8만㎞ 이상을 이주하는 북극제비갈매기를 보고, 조그만 씨앗에서 그 아름다운 백합화를 만드는 자연의 법칙을 보고 감탄한다.

신의 의지를 인간의 DNA 속에 숨겨놓은 섭리, 우리가 순간의 삶에서 꼭 이루어야 할 ‘의’를 찾도록 만든 신의 섭리가 무엇인지 깊이 묵상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