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배철현

배철현의 성서 오디세이 3

rainbow3 2019. 10. 7. 13:46


배철현의 성서 오디세이 - 예수의 위대한 질문③

 

남의 눈 속 티는 보면서, 네 눈 속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마태복음 7장 3절)

 

배철현 서울대 인문대학 종교학과와 서아시아언어문명학과 교수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자신의 숨겨진 악을 감추는 일

…예수는 우리가 타인을 심판하는 그 잣대로 심판 받을 것이라 경고한다

 

 

1931년 건립돼 세계7대 불가사의에 선정된 리우 거대 예수상.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시 코르코바두 언덕 정상에 있는 38m 높이의 예수 석상이다.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이를 실천하는 행위가 예수에 대한 진정한 믿음이다.

과거의 ‘자아’를 살해하고 새로운 ‘자아’를 만나기 위해서는 문을 두드려야 하는데, 그 문이 너무도 좁고 험한 것임은 부정할 수 없다. 

 

예수는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40일간 사막에서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는 수련과정을 거쳐 사람과 사물을 보는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된다. 이 새로운 시각으로 사물과 사람들, 자신의 입장뿐만 아니라 그 대상의 입장에서, 더 나아가 제 3자의 입장에서 볼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가 만나는 모든 것들, 햇빛·달빛·바람·꽃·모래·비와 같은 일상적인 것들이 자신이 더 이상 파악할 수 없는 ‘신비’이며 삼라만상 안에서 ‘경외’를 발견할 수 있는 정결한 마음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런 마음을 통해 인간은 자기중심적인 이기심에서 벗어나게 된다. 이 이기심은 ‘무식’이다.

아무리 많이 배운 사람이라 할지라도, 동서양의 심오한 사상을 섭렵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아도취와 남에 대한 배려가 없는 자아 전시적인 인간은 ‘무식’한 사람이다.

 

‘무아(無我)’ 상태로 진입해야 구원에 이른다

 

우리는 자기가 경험한 세계를 통해 습득한 세계관을 통해 다른 사람과 사물들을 판단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모두 지극히 제한된 장소에서 태어나 생활하고 인생을 마친다. 우리는 그 우연의 장소에서 나름대로 배움을 통해 세계관을 형성한다. 이렇게 형성된 세계관으로 각고의 노력을 통해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지 못한다면 자신의 이기심이라는 렌즈로 세상을 보기 마련이며, 아무리 노력한다 할지라도 상대방을 이해하기란 힘들다. 자신이 생각하는 최선과 상대방이 생각하는 최선에는 간극이 있다.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자기에서 벗어나는 각고의 ‘무아(無我)’ 상태로 진입해야 한다. 그 길은 어렵고 험난한 길이다. 에베레스트산 정상에 오르기 위해 오랜 기간 훈련이 필요한 것처럼 인간에게 구원이란 단순히 어떤 교리를 고백함으로 쉽게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마음에 도사리는 장애물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틀리다고 쉽게 생각해버리는 습관은 에베레스트산보다 훨씬 험준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생명으로 이끄는 문이 너무나도 좁고 험하다고 말한다. 사실 일반적인 눈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길이다. 사람들은 그런 길의 존재조차 모르고 인생을 산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사람들은 넓은 문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문’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로 로마신화에 야누스(Janus)라는 신이 있다.

 

야누스 신은 그리스 신화에는 등장하지 않은 로마인들만의 독특한 신이다. 이 신은 ‘문의 신’이며 ‘시작과 끝을 관장하는 신’이다. 인도유럽어 어근 ‘ei-/ya-’는 ‘가다’라는 의미를 지닌다. 산스크리트 ‘yanah’는 길이라는 의미이다. ‘야누스’라는 말 자체가 ‘문; 통로’라는 의미이다.

 

야누스신의 신체적인 특징은 두 얼굴을 가졌다는 점이다. 한 얼굴은 과거를 보고, 다른 얼굴은 미래를 본다. 야누스신은 영어에서 1월에 해당하는 ‘January’와 문지기에 해당하는 ‘janitor’와 깊이 연관되어 있다. 새해를 시작하는 첫 시간을 바로 야누스 즉 문의 신이 지켜보고, 문을 지키는 사람을 ‘janitor’라고 한다.

예수는 우리에게 좁은 문과 넓은 문을 설명한다. 그는 넓은 문은 바로 멸망으로 이어지지만, 그 길이 넓고 잘 닦여 있고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것 같아 대부분의 사람이 그 길로 간다는 것이다.

 

넓은 문은 매력적이고 우리를 매혹시킨다. 그 길에서 빠져나오기는 힘들다. 로마신화에는 이 문에 무시무시한 괴물이 지키고 있다고 전한다. 이 괴물의 의무는 일단 이 길에 들어선 사람들이 그 길에서 도망치지 못하게 막는다. 이 괴물은 세 개의 머리를 가진 케르베루스(Cerberus)라는 괴물이다. 스틱스강을 건너 지하세계로 가는 사람들을 지켜본다. 케르베루스의 존재는 일단 넓은 길에 들어선다면, 그 길에서 빠져나와 다른 길로 가기가 힘들다는 것을 단적으로 표현한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 그 문에 들어서면 오늘 당장 목숨을 내놓아도 행복할 그 어떤 문이다. 예수는 그 문을 ‘좁은 문’이라고 말한다. 예수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우리 일상에서 ‘좁은 문’이라는 메타포가 무엇인가 알려주지 않는다. 다만 좁은 문은 생명으로 이끄는 문이며 “그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험해서, 그곳을 찾아오는 사람은 별로 없다”라고 말한다.

 

예수는 사람들이 꺼리면서 별로 선택하고 싶지 않은 좁은 문을 왜 선택하라고 명령했을까? 특히 그 길은 너무 좁아 폐쇄공포증을 유발하고 생명에 위협을 줄 정도로 가파르고 장애물이 많아 사람들이 오지 않는다고 한다. 예수는 마조히스트인가? 인간에게 왜 이런 고통을 주려하는 것일까?

 

앙드레 지드 <좁은 문>의 메타포

 

프랑스 작가 앙드레 지드(1869∼1951)는 신약성서 <마태복음> 7장 14절에 등장하는 이 구절 ‘좁은 문’에서 영감을 얻어 <좁은 문>이라는 단편소설을 썼다. 이 성서구절은 실제로 소설 1장에서 등장인물이며 주인공인 알리사가 자신의 어머니가 다른 남자와 바람이 나 실의에 빠져있을 때 교회에서 들은 설교에 등장한다.

 

또 다른 주인공이자 알리사의 외사촌 오빠인 제롬은 알리사와 함께 교회에서 이 설교를 듣고 알리사와 결혼할 것을 꿈꾸며 자신이 의롭게 살 것을 결심한다. 그러나 알리사는 ‘좁은 문’을 지상의 모든 즐거움, 특히 제롬과의 결혼이 가져다 주는 행복의 포기라고 나름대로 해석한다.

 

지드는 인간이기 때문에 가질 수밖에 없는 한계를 <좁은문>을 통해 묘사한다. 지드는 1905년, 그러니까 그가 46세에 <좁은 문>을 쓰게 되었다. 14세 때 자기를 자식처럼 키워 준 가정교사 안나 새클톤(Anna Shackleton)의 죽음을 지켜본 충격을 기억하며 30여 년 후에 소설을 발표한 것이다.

 

<좁은 문>은 <좋은 죽음에 대한 논문> 혹은 <클레어 여사의 죽음>으로도 불린다. 지드는 안나 새클톤을 ‘제대로 존경받지 못했던 영혼’이라고 표현한다. 14세인 지드는 어머니와 허약한 안나 새클톤을 양로원으로 데리고 간다. 지드는 양로원에서 쓸쓸히 죽어가는 새클톤을 ‘신의 구원으로부터 버림받는 간절한 울음’이라고 자서전에서 묘사한다. 이 무드는 사실 <좁은 문>의 마지막 장에 수놓아져 있는 감정이다.

 

지드는 실제로 <좁은 문>의 일부를 자신의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새클론의 화장대 거울 앞에서 썼다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통해 책을 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말하려는 내용은 내 살아있는 모든 힘을 앗아갔고 내 모든 덕을 사용해버린 그런 이야기입니다.”

 

지드는 <좁은 문>을 이렇게 시작한다. 소설의 1인칭 화자인 제롬은 미모의 외사촌 누나 알리사를 흠모한다. 알리사는 치명적인 매력과 사치, 그리고 관능적 쾌락을 추구하는 어머니 ‘뤼실 뷔콜랭’으로부터 간접적으로 세속을 경험한다. 그러나 자신의 어머니가 젊은 애인을 따라 남편과 자녀를 버리고 몰래 도망치자, 어머니에 대한 인륜적 배신감을 경험하고 자신만은 육체적인 행복을 초월하고자 종교에 귀의한다.

 

자신의 세속적 욕망을 억제하면서 신에게 날마다 힘들게 다가간다. 알리사의 여동생 줄리에뜨도 제롬을 남모르게 사랑하게 되지만 언니에게 제롬을 양보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을 한다. 알리사는 성서의 가르침대로 일생을 통해 ‘좁은 문’을 지향하고 통과하려 노력한다. 알리사는 제롬에 대한 사랑을 단념하고 그 대신 신에게 헌신한다. 그는 신과의 합일의 경지까지 도달하려고 애쓴다.

 

그러나 알리사가 노력할수록 제롬에 대한 사랑도 커갔다. 알리사는 제롬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된다. 사실 신에 대한 사랑도 제롬 없이는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지만 기약 없는 신과의 서약을 위해 점차 제롬을 만나는 횟수를 줄인다. 알리사가 선택한 마지막 장소는 수도원이었다.

 

알리사는 지드의 가정교사 새클톤처럼 수도원에서 쓸쓸히 죽는다. 어찌 보면 알리사와 제롬은 좁은문을 통해 천국에 들어가려 했던 것이다. 제롬은 알리사의 침대방으로 들어가는 길이 천국으로 가는 좁은 문이라 상상했고, 그 길은 두 명이 함께 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리사가 가고자 하는 길은 너무 좁아 한 명밖에 갈 수 없는 길이었다. 그녀가 천국에 가고자 한다면 홀로 가야 한다.

 

지드는 <좁은 문>에서 인간의 억압된 욕망, 성 그리고 숭고함 같은 인간이 지니고 추구하는 본성에 관해 적나라한 슬픈 러브스토리를 전개하였다. 인간은 구원받기 위해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

제롬과 알리사에게 행복한 결말은 무엇일까? 지드는 이 자서전적 소설에서 자신 안에 존재하는 두 마음의 갈등을 표현한 것이다. 그 갈등은 도덕적이며 심지어는 청교도적인 심리적 억압과, 자신이 추구하는 지적인 자유 사이의 투쟁이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자신에게 만족할 정도의 정신세계를 구가할 수 있을까?

 

 

9·11 테러의 표적이 됐던 세계무역센터를 안고 있는 예수 조각상이 희생자 유족들의 주문에 의해 만들어졌다. 높이 1.7m, 무게 1t의 이 조각상은 2006년 미 뉴욕 브루클린의 성 에프렘 교회로 옮겨져 일반에 공개됐다.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장님 아닌 장님

 

우리는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오늘 아침부터 지금까지 당신을 지나쳤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상상해보라. 필자는 교수이기 때문에 오늘 수업 중에 30명 이상의 학생과 한 공간에서 1시간 15분 동안이나 있었다.

 

점심시간에는 식당에 수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내가 기억하는 사람들은 필자와 항상 점심식사를 같이하는 세 명의 교수뿐이다. 나는 10년 이상 학교에서 거의 매일 이 일을 반복하고 있지만, 내가 기억하는 사람들은 불과 몇 명뿐이다.

 

우리는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장님이다. 위대한 예술가들은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남다른 관찰력의 소유자들이다. 화가들은 자신들이 인식할 수 없는 것들을 그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프랑스 화가 앙리 마티스는 파리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을 그리는 연습을 종종 했다고 알려졌다.

 

파리의 한 카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의 실루엣을 스케치하였다. 처음 보는 사람의 움직임을 유심히 관찰하여 그의 신체적 특징이나 심지어는 풍기는 인상까지 화폭에 담았다. 화가는 바로 자신이 그리고자 하는 대상 안으로 몰입하여 그 대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을 드러내는 데 천부적인 재질이 있는 사람이다. 만일 우리가 그 자리에 앉아 스케치한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거나 혹은 이상한 모습을 그 행인의 특징으로 그렸을 것이다.

 

예수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그 잣대로 심판 받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신이 인간을 심판하는 기준은 인간이 십계명과 같은 규율을 어겼느냐가 아니라, 한 사람이 동료 인간을 심판하는 행위를 했느냐 여부에 달려 있다.

예수는 우리가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심판하지 말 것을 요구한다. 예수는 “어찌하여 너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라고 말한다.

예수는 자신의 편견으로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자들을 ‘위선자’라 부른다.

 

예수는 그런 위선자, 자신의 편견으로 상대방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사람을 동물과 비교한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아라. 그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되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이 문장에서 한 가지 문맥상 어울리지 않는 단어가 있다.

 

그 단어는 바로 ‘거룩한 것’이라는 단어이다. 이런 시적인 어구의 생명은 바로 병행 단어들인데, 개와 돼지는 의미상 대구(對句)가 되지만 ‘거룩한 것’과 ‘진주’는 대구가 아니다.

‘거룩한 것’이란 단어가 왜 전혀 문맥에 어울리지 않게 첨가되었을까?

‘거룩한 것’을 예수가 사용하던 아람어로 환원하여 문제점을 추적하며 그 의문이 풀린다.

 

아랍어에서 ‘거룩한 것’을 의미하는 단어는 ‘카드샤(qadsha)’이다. 그러나, ‘카드샤’는 ‘거룩한 것’이란 의미 이외에 ‘반지’라는 의미를 지닌다. 실제로 기원전 100년경에 기록되었다고 추정되는 사해사본에서 ‘카드샤’라는 아랍어 단어의 뜻은 ‘반지’이다.

 

마태복음을 기록한 저자는 이 아랍어 단어 ‘카드샤’를 보고, 그 이중적인 의미 즉 ‘거룩한 것’과 ‘반지’를 잘못 이해하여 그리스어로 거룩한 것을 의미하는 ‘하이기오스(haigios)’로 번역하였다.

마태복음 기자의 잘못된 번역을 잡는다면, 이 구절은 “반지를 개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아라” 정도로 번역해야 하지 않을까?

 

 

‘다른 사람을 위한 공간’이 없는 세계

 

 

1 남수단 톤즈에서 의술을 통해 ‘예수의 삶’을 실천한 고 이태석 신부가 마을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환하게 웃고 있다.

2 2010년 개봉된 영화 <마태복음>에서 그려진 고난 받는 예수의 모습. <마태복음> 7장 3절은 ‘타인에 대한 심판’을 ‘자신의 숨겨진 악을 감추는 행위’로 파악한다.

3 서기 1500년경에 그려진 예수화. 인간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 가득한 표정을 담았다. 

 

위선자는 편견으로 눈이 멀어 있다. 사람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상대방을 통해 보고 싶은 욕망을 볼 뿐이다. 우리는 상대방에 대한 선입견을 그 사람에게 투과하여 결국 내가 투영한 이미지를 확인할 뿐이다. 예수는 우리 눈 안에 들보가 있다고 말한다. 들보란 ‘방의 칸과 칸 사이를 가로질러 두 기둥 또는 두 벽체 위에 놓이는 구조목’이다.

 

‘들보’라는 그리스어 단어는 ‘도코스(dokos)’이다. ‘도코스’는 ‘집의 지붕을 떠받치는 기둥’이란 의미다. 집은 들보가 없이 지붕을 얹을 수 없다. 들보가 없이는 비바람과 눈보라를 막을 수 없다. 그러나 ‘도코스’의 또 다른 의미는 ‘괴상하게 삐져나온 기둥’ 혹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막는 성가신 나무’라는 의미도 있다.

 

내가 가진 들보가 나에겐 내 삶을 유지하는 중요한 자산이지만, 그 자산이 남에게도 동일하게 유효하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내게 소중한 ‘들보’가 다른 사람에겐 성가신 장애물이 될 수 있다. 나의 지위와 명예와 부를 가져다 주는 소중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해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보는 연습이다. 이 서보는 연습을 ‘공부’라고 한다. 인간은 모두 시간과 장소의 산물로 경험할 수 있는 범위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내가 만일 문명과 동떨어진 남미 아마존 정글에 태어났다고 가정해보자. 나는 문명의 이기를 알 수도 없고 다른 신앙이나 종교도 접해보지 못하고, 내가 경험한 정글만이 우주라고 살다가 죽을 것이다.

 

정글을 방문한 외부인을 만났을 때, 나는 그 외부인을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할지 모른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의 들보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들보가 될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산다. 순진하지만 무식한 이 생각이 사실 여성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와 같은 사회·정치·경제적 차별의 근원이다. 가장 큰 죄는 자신이 이기적이며 무식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자랑스러운 들보를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눈 안에 있는 ‘티끌’을 보며 비웃는다. 이 티끌을 신약성서에서 그리스어로 ‘카르포스(karphos)’라고 기록했다. 카르포스는 날리는 겨와 같이 거의 무시해도 되는 먼지이다.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은 자신이 정의롭고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남들에게서 발견되는 지극히 작은 먼지를 발견하는 천부적인 능력이 있다.

 

우리는 그래서 일생을 통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여기서 다른 사람이란 우리의 이웃일 수 있고, 원수일 수도 있다. 중요한 점은 우리와 다르다는 점이다. 이 다른 면의 정점에 바로 신이 있다. 스위스 종교학자 루돌르 오토는 신을 ‘절대타자(das ganz Andere)’라고 정의하였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보는 연습이 사실 어렵다. 종교는 사실 삶에 대한 획기적인 시선전환 훈련이다.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가 얼마나 내 경험과 신념을 주위 사람들에게 무자비하게 강요하고 다른 사람들에겐 티끌만한 공간도 주지 않았는지 깨닫게 된다.

 

우리는 개인적인 차원뿐만아니라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무식을 발휘한다. 우리가 경험하지 않은 문화들, 예를들어 종교, 정치구조나 체계, 그리고 심지어는 다양한 결혼형태들을 자신이 모른다고 솔직히 고백하고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거룩한 공간’을 마련하지 않는다. 이들에 대해 얄팍하고 부정확하며 경멸하는 성급한 판단을 내린다.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의 정신을 설파한 공자. “내가 당하기 싫어하는 일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것으로 예수의 ‘황금률’과 같은 의미다.

 

 

구하고, 찾고, 두드려라!

 

그 판단은 대개 풍문에 의지한 틀린 정보들이다. 현대사회는 그런 독선을 인터넷, 신문 그리고 방송과 같은 매체를 통해 급속하게 전파시킨다. 우리의 삶을 통해 중요한 문제들은 거의 답이 없다. 진리가 무엇인가?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행복한 삶은 무엇인가? 사람은 왜 태어나고 죽는 것일까?

 

인생은 이 삶에 대한 답을 추구하지만 깊이 생각하면 할수록 삶에 대한 질문만 늘어난다. 이 질문이 바로 답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과학만능주의자들은 과학이 우주와 자연의 비밀뿐만 아니라 삶의 비밀을 밝혀줄 것이라고 믿고 있지만, 인간이 이것들에 대해 아는 지식은 그야말로 미천하다.

 

앞으로 100년 아니 1000년 후에도 인간 지식의 미천함은 지속될 것이다. 인간은 해답이 없는 문제에 봉착하여 깊이 사고할 때 가장 인간적이다. 만일 종교나 과학이 이 문제를 해결한다고 주장하면 그것은 가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종교는 신을 가장 잘 이해하기 위해 교리를 만들었다지만, 교리는 우리와 다른 교리를 품은 사상이나 종교를 거짓이라 매도하는 경향이 있어 위험하기도 하다.

 

예수는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 무아상태에 진입하여 다른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보라고 주문한다. 그는 말한다.

 

“구하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열어주실 것이다. 구하는 사람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주실 것이다.”

 

예수는 다시 ‘문’ 메타포를 사용한다. 문지방은 바깥과 집 안을 표시하는 경계다. 이 경계에 무시무시한 케르베루스와 같은 삼두견이 있다. 문지방을 건너가기 위해서는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예수가 세례와 40일 금식을 통해 새로운 지평에 도달했듯이, 우리가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보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그 무시무시한 문을 통과해야 한다.

 

먼저 ‘구해야’ 한다. 우리 인생의 가장 큰 문제점은 무엇이 문제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인생의 목표가 다른 사람들이 설정해 놓은 돈-명예-권력을 좇다 보면 자신이 왜 사는지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저 매일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듯 인생을 낭비한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삶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모르고, 그 타성에 젖어 인생을 산다. 깊이 묵상하는 연습, 생각의 근육을 키우는 부단한 노력을 경주해야 한다.

당신은 무엇을 구하고 계십니까? 당신은 무엇을 구해야 할지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만일 우리가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을 찾게 된다면 가장 행복하다.

 

복음서의 비유 중에 소작농이 밭을 갈다 보물을 발견하면, 집에 돌아가 자신의 모든 재산을 팔아, 그 밭 주인 몰래 그 밭을 산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 길을 열심히 찾다 보면, 내가 노력하는 이 순간과 이 장소가 바로 목적지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 온다. 이 단계에 진입하면 과거의 ‘자아’를 살해하고 새로운 ‘자아’를 만나기 위해 문을 두드려야 한다. 그 문에 들어서면, 우리는 새로운 존재로 태어난다. 나 중심의 삶에서 벗어나 다른 시선에서 세상을 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구원은 바로 이 순간에 시작된다.

 

예수는 그 구원에 도달하는 원칙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최근 중국의 국가주석 시진핑이 멕시코를 방문해 자신의 가훈을 소개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소불욕물시어인(己所不欲勿施於人)’.

이 구절은 논어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공자의 제자 중궁이 중국철학의 핵심인 ‘인(仁)’에 대해 물으니 공자는 ‘인’은 다름아닌 “내가 당하기 싫어하는 일을 남에게 강요하지 말라”는 것이라 간결하게 정의한다. 인간은 종종 자신이 당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전가한다.

 

찰스 다윈의 생각을 신봉하여 우리가 사는 사회를 이기적 유전자를 지닌 사람들로 구성된 약육강식의 세계로 보며 여기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힘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19세말 다윈의 사상은 유럽사회를 지배했고 오귀스트 콩트의 이타주의는 환상에 불과하다고 폄하되었다.

 

최근 <이기적 유전자>를 저술한 리차드 도킨스는 다윈주의 전도사로 인간의 이타주의는 환상이라고 주장한다. 하버드 생물학자 E.O. 윌슨도 인간사회엔 비유전적인 ‘밈(meme)’이라는 요소가 있어 이타주의를 실천하기도 하지만 결국은 자신이 혜택을 바라고 하는 ‘호혜적 이타주의(reciprocal altruism)’라고 주장한다.

 

예수와 동시대를 산 가장 위대한 랍비 힐렐도 이 황금률의 중요성을 간결하게 전한다. 1세기 유대인들은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후에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신이 성전 안에서 존재한다고 믿었던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이 로마 군인들에 의해 비참이 무너지는 것을 목도하고 그 안에 계신 신도 살해되었다고 생각했다.

실의에 찬 유대인들에겐 새로운 영적인 가르침이 필요할 때 두 명의 위대한 유대교 사상가가 등장한다. 한 명은 심마이(Shimmai)다. 그는 유대인에게 재난이 온 이유를 그들이 유대법을 철저하게 준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한 명 힐렐은 유대교를 개혁할 새로운 프레임을 짜고 있었다. 탈무드에 의하면 한 이교도가 심마이를 찾아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전한다. “당신이 한 발로 서 있는 동안, 토라 전체를 암송할 수 있다면 제가 유대교로 개종하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심마이는 막대기를 들고 그를 쫓아버렸다고 한다.

 

심마이는 위대한 사상을 담은 유대인의 경전을 짧은 시간 안에 암송하라고 요구하는 행위는 유대교를 무시하는 행위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이교도는 다시 똑같은 질문을 하러 힐렐을 찾아갔다. 이 질문을 받은 힐렐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당신 스스로에게 혐오스러운 일을 이웃에게 하지 마시오. 이것이 유대인 경전 토라의 전부이고 나머지는 각주일 뿐 입니다. 가서 이것을 공부하시오.”

 

이 도발적인 발언을 들은 이교도는 깊은 생각에 잠긴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토라는 수많은 감동적인 이야기, 천지창조 이야기, 출애굽 이야기와 613개 법률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힐렐은 이것들을 하나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 모든 이야기는 그저 읽지 않고 참고만 해도 되는 각주일 뿐이다. 중요한 점은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보는 것, 그것이 핵심이다.

 

종교라고 하면 그저 배타적인 교리나 생각하는데, 이런 것들은 사실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중요한 점은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의 마음이다. 만일 종교가 이 배려의 마음을 고무시키지 못하고 조장하지 않는다면, 그 종교는 가짜거나 곧 사라질 운명이다. 힐렐은 이 황금률을 단순히 아는 수준에서 벗어나 그것을 실생활에서 실천하라고 촉구한다.

 

슈바이처가 실천한 예수의 ‘좁은 문’

 

예수는 황금률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실천의 문제라고 주장한다. 아브라함 종교에서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소위 ‘바른 행동’을 위해 교리가 존재한다. 자신의 믿음이 행동으로 표현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4세기 이후 로마제국의 종교가 되면서 실천보다는 신조(信條)를 강조하였다.

 

우리가 아는 지식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그것은 알지 못하는 것보다 더 악한 것일 수 있다. 예수는 실천의 중요성을 말한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고, 나쁜 나무는 나쁜 열매를 맺는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그 사람들을 알아야 한다.”

 

알버트 슈바이처(1875∼1965)는 1875년 독일의 알자스 지방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음악과 철학에 남다른 관심이 많았다. 그는 24세에 소르본느 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그 다음 해엔 신학박사학위를 받는다. 그의 역사적 예수연구는 이런 연구의 모태가 되었다. 특히 유럽의 귀족들은 그의 파이프 오르간 연주에 매료되어 그는 유럽에서 가장 존경받는 신학자이자 오르간 연주자가 되었다.

 

인생의 전환점은 29살 되던 해 일어났다. 그는 아프리카 가봉에 있는 원주민들이 전염병에 시달린다는 소식을 듣고 모교의 의학과에 입학한다. 입학한 지 7년 만에 의사자격증을 따고 아내 헬레네와 함께 아프리카 가봉으로 가 닭장을 병원으로 개조하여 환자들을 진료하기 시작한다.

 

많은 사람이 고상하게 아프리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을 때, 그는 아프리카를 위해 자신이 할 일을 새롭게 개척한다.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의사가 된 것이다. 자신이 이기적인 삶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들을 대접하기 위한 삶은 말을 넘어서 행동으로 옮겨져야 비로소 완성된다. 유럽의 학계와 예술계, 그리고 유럽의 귀족들은 그를 최고의 대학과 연주장에서 보기 원했지만, 슈바이처는 그 유혹을 초개처럼 버리고 아프리카로 떠난 것이다. 누가 보아도 훌륭한 열매를 맺은 것이다.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우리 자신 안에 숨겨진 악을 감추는 일이며 다른 사람들이 마땅히 누려야 할 은총을 빼앗는 행위다. 예수는 우리에게 촉구한다. 우리 자신으로부터 과감히 나오라고…. 우리로 하여금 다른 시선으로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라고 애원하고 있다. 특히 우리가 그렇게도 소중하게 여기는 나의 ‘들보’를 허물라고 말한다. 우리의 들보는 사실 남들이 보면 그리 멋있지도 않은 성가신 자기도취이자 자아전시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예수는 우리가 남이 싫어하는 일을 삼갈 뿐만 아니라, 우리가 대접받고 싶은 그 만큼 남에게 대접하라고 우리의 이기적인 귀에 호소한다. 이기심으로부터 탈출하여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보는 연습. 이 연습이야말로 우리를 알버트 슈바이처처럼 행동하기 위한 위대한 첫 발걸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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