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철현의 성서 오디세이 - 신의 위대한 질문④
“당신의 부인 사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창세기 18:9)
배철현 서울대 인문대학 종교학과와 서아시아언어문명학과 교수
자신의 ‘에고’에서 벗어나 ‘무아’ 상태로 진입하여 다른 사람의 요구를 내 것으로 만드는 능력…그런 인성(人性)을 지닌 자에게 신은 자신을 현현한다
인류 최초의 건축물 중 하나인 147m 높이의 거대한 피라미드는 2.5t 무게 직사각형 돌을 300만 개 쌓아 올린 정교한 문명의 극치였다. 아브라함은 이집트로 들어가면서, 자신의 아내의 미모가 마음에 걸렸다. 파라오가 자신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고, 아내를 후궁으로 데려가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신이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미래에 큰 민족을 이루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런데 그 약속의 열쇠는 그의 아내 사라가 쥐고 있었다. 이 약속의 성취는 사라의 몸을 통해 자식을 얻어야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사라도 아브라함을 만나 사랑에 빠져, 그의 비전을 공유하고 메소포타미아의 화려한 도시문명을 과감히 포기하고 하란으로 이주했다. 사라는 창세기 20장 12절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이복동생이지만, 유대교 경전 탈무드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동생인 하란의 딸, 즉 아브라함의 조카다.
‘사라’라는 이름은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달신을 모시는 여자 사제이자 여왕을 지칭한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테라는 달신을 섬기는 도시인 우르에 거주하다가 그곳의 정치·경제적 사정이 악화되자, 당시 최고의 대상무역 도시인 하란으로 이주한다. 테라는 아브라함, 사라, 그리고 손자 롯과 함께 하란에 정착하여 제2의 인생을 꿈꾼다. 하란은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도시일 뿐만 아니라, 달신을 섬기는 도시였다.
테라는 달신의 신상을 제작하는 예술가로, 고향 우르에서 쌓았던 것 이상의 명성과 부를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테라가 죽자, 상황은 급속도로 변화한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전혀 새로운 형태로 신의 음성을 듣는다. 이전에는 인간이 하루 세 번 신전에 안치된 신상에 음식을 바치고 제사를 드리고 옷을 갈아입히는 의식을 거행했다.
당시 종교인들은 자신의 이름이 적힌 조그만 신상을 신전에 두고 소원을 빌곤 했다. 어느 날 아브라함과 사라는 자신이 거주하는 그 삶의 장소에서 신의 음성을 듣는다. 그 음성은 누구나 다 들을 수 있는 그런 음성이 아니라, 후에 엘리야 선지가가 들었던 ‘부드럽고 미세한 소리’였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왜 사는지, 인간이 죽으면 그대로 끝나고 마는 것인지, 행복이란 무엇인지를 깊이 성찰하고 있었다. 그는 수많은 자기연민과 묵상의 시간을 통해, 미세하지만 삶을 한순간에 바꾸는 마력을 지닌 소리를 듣는다.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여행을 떠날 것이라고 말한다. 이제 겨우 자리 잡은 하란에서의 풍요로운 생활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았다. 사라는 남편이 거부할 수 없는 어떤 절대자의 목소리를 듣고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떠나는 여행에 동참한다. 그러나 이들이 거주한 하란에 기근이 들어 다시 미지의 세계인 이집트로 이주한다.
메소포타미아나 팔레스타인과는 달리 이집트는 정기적인 나일강의 범람으로 먹을 것이 풍부했다. 이집트로 들어서면서, 아브라함에게는 말 못할 고민이 생겼다.
메소포타미아나 팔레스타인과는 달리, 이집트 왕 파라오는 지상에 살고 있는 신‘ 의 화신’이었다. 파라오는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절대 권력자였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아름다움으로 이집트 땅에서 어려움을 당할 것이라고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파라오의 범접을 막은 사라의 지혜
사자의 몸에 인간의 머리를 한 파라오 아멘호테프 3세의 스핑크스. 이집트의 파라오는 절대권력자였지만 함부로 다른 남자의 여인을 빼앗지 않았다.
파라오가 절대권력자라 할지라도, 남편이 있는 여자를 빼앗을 정도로 파렴치한 인간은 아니었다. 이집트는 기원전 3000년경 고도의 문명을 이루고, 그 후 인류 최초의 건축물 중 하나인 147m 높이의 거대한 피라미드를 쌓아 올린 국가다.
이집트에는 그 문화에 걸 맞은 상식과 법이 있었다. 기원전 2700년경 이집트 고왕국시대 제4왕조 조세르가 통치할 때, 사카라에 처음으로 계단식 피라미드를 세운 건축가이자 수상이 임호텝이었다.
임호텝은 수백만 개의 돌을 쌓아 올리는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그 중심을 파악하는 것이라 생각하여 그 중심에 ‘마아트’라 불리는 타조 깃털을 올려놓았다. 이 의식은 오래된 아프리카 의식으로 우주의 중심을 지상에 표시하는 것이었다.
‘마아트’는 우주의 원칙이자 개개인이 반드시 해야 할 도덕과 의무와 같은 것으로 중국 사상의 ‘중용(中庸)’과 유사하다. 하여튼 파라오는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그의 부인을 가로챌 수는 없다. 반면 파라오는 이방인을 어떤 이유로든 죄명을 씌워 추방하거나 죽일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아브라함은 파라오가 자기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고, 아내를 후궁으로 데려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사라에게 다음과 같이 일렀다.
“여보, 나는 당신이 얼마나 아리따운 여인인지 잘 알고 있소. 이집트 사람들이 당신을 보고 당신이 나의 아내라는 것을 알면 나는 죽이고 당신은 살릴 것이오. 그러니 당신은 나의 누이라고 하시오. 그렇게 해야 내가 당신 덕분에 대접을 잘 받고 이 목숨도 부지할 수 있을 거요.”
이 말을 들은 사라는 남편 아브라함이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자신의 아내를 지키지도 못하는 자가 신의 뜻을 이루겠다며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우습게 보였다. 사라는 자기를 이용하여 한몫 챙기려는 남편이 한심해 보였지만, 이 난관을 자신의 기지로 돌파하기로 결심하였다.
1947년 이스라엘 사해에서 발견된 쿰란 사본들 중에는 이 이야기와 관련된 사본도 있다. 쿰란 제1동굴에서 발견된 <창세기 외경>은 “아브라함과 사라가 자기가 살던 땅의 국경을 지나 함족 자손의 땅인 이집트 땅으로 들어갔다”고 전한다. 당시 이집트는 이집트 남부의 상이집트와 이집트 북부 텔타지역의 하이집트로 나뉘었다. 이 문헌은 당시 하이집트의 파라오를 ‘쪼안’이라고 기록한다. 아브라함은 파라오 쪼안의 신하들을 저녁에 초대하였다.
아브라함의 초대를 받은 이들은 사라의 미모뿐만 아니라 착한 마음씨에 푹 빠져있었다. 사라는 이 낯선 자들을 그늘로 인도하여 시원한 물로 몸을 닦고 목을 축이게 한 후, 어린 양으로 요리한 음식과 온갖 과일과 채소로 대접하였다. 이 신하들은 파라오 쪼안에게 달려가 아브라함의 융숭한 대접뿐만 아니라, 당시 최고로 아름다운 시구를 이용하여 사라의 미모를 극찬하였다.
당시 함족 이집트 여인은 피부가 검은 빛을 띠기 때문에, 셈족 사라의 흰 얼굴은 눈에 띄기 마련이었다. 그들은 파라오 쪼안에게 “사라는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미모에 필적할 만한 지혜도 있다”라고 칭찬하였다. 이러한 부추김은 파라오를 자극하였다. 파라오는 사라를 후궁으로 들이기로 마음먹는다.
파라오는 신하들을 보내 아브라함을 죽이고 사라를 왕궁으로 데려오려고 하자, 사라는 아브라함이 명령한 대로 말한다.
“아브라함은 저의 오빠입니다. 제가 파라오와 결혼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순간 죽은 목숨에서 파라오의 처남이 된 것이다. 파라오는 아브라함에게 큰 재산을 주었다.
성서에서는 아브라함이 “양 떼와 소 떼와 암나귀와 수나귀와 남녀 종과 낙타까지 얻었다”라고 전한다. 사라는 신이 남편과 자신을 통해 이룰 계획을 분명히 알고 있었고, 그 계획을 이루기 위한 과정에서 일어날 여러 가지 어려움을 그 어느 누구도 보여줄 수 없는 깊은 성찰에서 나오는 지혜와 대담한 용기로 극복한다.
파라오 궁전으로 들어 선 사라는 다른 여느 후궁과는 달랐다. 대개 후궁으로 들어오면 파라오의 사랑을 받으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지만, 사라는 아브라함을 통해 신의 계획을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파라오가 자신을 범하여 신의 계획이 물거품이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성서는 이 장면을 “주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의 일로 파라오 집안에 무서운 재앙을 내리셨다”라고 기록한다. 쿰란문서나 탈무드는 신이 ‘악한 바람’, 즉 역병을 일으켜 파라오를 치셨다고 전한다.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으나, 결과적으로 파라오는 사라에게 접근할 수 없었다.
‘파라오 궁궐의 사라’(제임스 티소·프랑스화가·1836-1902)
아브라함에겐 ‘나와 너’ 구분이 없었다
유대교에서는 이상적인 여인을 ‘에세쓰 하일’이라 부른다. 이 구절을 직역하면 ‘용기와 지혜가 넘치는 여인’이라는 뜻이다. ‘하일’에는 큰 뜻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용기’라는 뜻과 어떤 심각한 사건의 근본적인 해결을 위해 심사숙고하여 얻은 심오한 ‘지혜’라는 뜻이 담겨 있다.
사라는 분명 아브라함 못지 않은 신앙의 조상으로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모든 일을 관장하는 ‘에세쓰 하일’이었다. 파라오는 심오하고 아름다운 사라를 대면한 후 아무 말도, 어떤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마침내 사라는 자신이 아브라함의 아내이며, 신께서 자신들을 통해 큰 민족을 이루실 것임을 파라오에게 말하였다.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파라오는 아브라함과 사라를 이집트에서 떠나도록 허용한다.
많은 성서 주석가는 아브라함이 사라를 자신의 동생으로 파라오에게 말한 것에 대해 남성권위주의적이라고 지적해왔지만, 신이 아브라함과 사라를 향한 비전을 공유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두 사람 간의 사랑과 믿음의 결과였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집트를 떠날 때, 하갈이라는 이집트인을 몸종으로 데리고 나온다. 사라는 자신이 불임여성이기 때문에 하갈을 씨받이 삼아 가계를 이어가려 한다. 하갈은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리고 13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아브라함은 이제 99세가 되었고 사라는 89세가 되었다.
신이 하란에서 말씀하셨던 그 약속,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그 말씀, 위대한 민족을 세우시겠다는 그 말씀이 이제는 흘러간 옛 추억처럼 느껴졌다. 마므레라는 지역에서 장막을 치고 적막하게 살았다. 이곳에는 커다란 상수리 나무가 있어 예로부터 이 지역은 ‘마므레의 상수리 나무’라고 불렸다.
아브라함은 그날도 여느 날처럼 상수리나무 밑에 앉아 찌는 듯한 더위를 피해 쉬고 있었다. 하루 종일 앉아 있어도 사람을 거의 볼 수 없는 사막 한가운데, 커다란 상수리 나무 밑에 앉아있었다. 그런데 저 멀리서 섭씨 50도가 넘는 이 더위에 낯선 사람들 세 명이 여행하는 것이 보였다.
아브라함은 이들을 정신 나간 사람처럼 여겼다. 혹은 사람이 다니지 않는 대낮에 나쁜 짓을 하려는 강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고대사회에서 외국인은 위험했다. 외국인은 그 지역의 ‘복수동태법’의 보호를 받지 못했다. 이 법은 ‘피의 보복원칙’으로 살인을 당한 자의 부족이 그 가해자 부족의 한 명을 살해할 수 있는 법이다.
고대 유목사회는 부족 간의 힘의 균형이 각 부족의 생존을 결정하는 핵심이었기 때문에 부족들이 이 법으로 서로를 견제하였다. 외국인은 이러한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존재, 살인이나 약탈의 대상이었다. 히브리어로 ‘나카르’라는 단어는 ‘외국인’인 동시에 ‘살해 가능한 적’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아브라함은 이런 생존법을 초월한지 오래다. 그는 저 멀리 서 있는 이 낯선 자들을 맞이하기 위해 샌들도 신지 않고 달려갔다. 그때 아브라함의 나이 99세였다. 99세 노인이 사막 한가운데서 자신을 헤칠지도 모를 낯선 자들을 맞으려고 뛰어나가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아브라함은 신의 약속이 점점 불가능해 보이는 시점이었지만, 처음 보는 사람들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맞았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세월을 허송세월한 사람이 아니라 주위 사람들, 특히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처지를 자기 일처럼 생각한 배려와 공감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아브라함은 의도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그들을 열렬히 환영한 것이다.
타인의 처지를 자신의 처지처럼 생각하는 심성과 타인의 어려움을 해결하려고 자신의 자존심마저 버리고 선을 행할 수 있는 행동은 하루아침에 습득되지 않는다. 그런 심성과 행동은 수십 년 동안 끊임없이 수련하여 몸에 배지 않고선 나타날 수 없다. 아브라함에게는 ‘나와 너’의 구분이 없었다. 또한 다른 사람의 고통이 곧 자신의 고통이었다.
善의 판단기준은 ‘엑스타시’에 있다
우리는 TV나 인터넷 같은 매체를 통해 세상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사건을 접한다. 자극적인 보도에 익숙해진 시청자는 웬만한 보도에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처럼 무심한 사회에 살고 있다. 교육의 중요한 목적은 자신의 입장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는 수많은 고전을 읽고 감상하고 재현한다.
나에게만 집중된 관심의 폭을 벗어나 남을 이해하고자 외국어도 배우고 그 나라의 예술과 문학작품도 감상해본다. 이러한 행위를 자신의 ‘상태’에서 ‘벗어나기’라고 하여 고대 그리스인들은 ‘엑스타시’(ek ‘밖으로’ + stasis ‘자아에 몰두된 상태’)라고 하였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매년 봄에 디오니소스 축제가 열렸다.
이 축제에 참가하려고 수많은 극작가가 상상을 초월하는 대본으로 마치 오늘날 한국 ‘나가수’ 프로그램의 가수들처럼 경쟁하였다. 대중은 이를 통해 희로애락도 느끼지만(오락적 목적), 자신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인간의 내면에 있는 ‘연민’의 감정을 ‘끄집어내는’ 새로운 경험도 하게 된다(교육적 목적). ‘교육’이란 본래 그런 감정을 ‘밖으로(e-) 인도하는(ducation)’ 행위다.
아브라함은 처음 보는 사람, 낯선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 사람의 입장에 서는 연습을 하란에서 신의 음성을 들은 75세부터 수련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지난 24년간 남의 처지를 이해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제2의 자아가 되는 경지에 이르렀다. 단순히 감정을 일치하는 ‘공감’의 단계를 넘어 남이 아프면 나도 아프고 남이 기쁘면 나도 기뻐하는, 남과 혼연일체가 되는 '신비한 합일’ 즉 신비주의 전통의 최고 단계인 ‘우니오 미스티카(unio mystica)’단계에 진입하였다.
아브라함은 사막에서 만난 처음 보는 낯선 자들을 마치 왕처럼 모시고 그 앞에서 절을 하였다. 그야말로 정상적이며 일상적인 행위는 아니었다. 그리고 말하였다.
“손님들께서 저를 좋게 보시면, 이 종의 곁을 그냥 지나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을 좀 가져 오라고 하셔서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시기 바랍니다. 손님들께서 잡수실 것을 제가 조금 가져오겠습니다. 이렇게 이 종에게로 오셨으니 좀 잡수시고 기분이 상쾌해진 다음에 길을 떠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선(善)의 판단 기준은 내가 아니라 ‘내 밖의 상태’ 즉, ‘엑스타시’의 상태인 ‘당신’에게 있다고 말한다. 그는 “손님들께서 저를 좋게 보시면”이라고 말을 꺼낸다. 이 문장에서 아브라함은 유일신 종교에서 말하는 '선’의 기준을 말한다. '선’은 '신이 인간에게 원하는 덕목’인데, 그 기준이 ‘타인’에게 있다고 말하고 있다.
필자가 가장 좋아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토브’다. 이 단어의 첫째 의미는 ‘선하다’이다.
이 단어의 숨겨진 둘째 의미는 “좋은 향기를 내뿜다”이다. ‘토브’를 풍기는 자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더라고 가장 달콤하고 그윽한 향기가 저절로 나오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그 향기를 맡으면 매료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바로 그 사람의 인품이다. 어떤 사람, 어떤 기업, 어떤 학교, 어떤 종교, 어떤 정당에 대한 판단 기준은 전적으로 다른 사람, 다른 기업, 다른 학교, 다른 종교, 다른 정당에게 있다.
즉 나의 선악 여부를 논할 수 있는 자격은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있는 것이다.
사막에서 오랫동안 여행을 한 낯선 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신선한 물과 음식, 그리고 휴식이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상수리 나무 그늘 아래 널찍한 식탁으로 인도한 후, 물을 주어 목을 축이고 몸과 발을 씻게 하였다. 이 낯선 자들은 자신의 정성을 모아 자신들을 대접하는 아브라함을 보고 잠시 머물기로 결정한다. 그들은 “좋습니다. 정 그렇게 말씀하시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어보면 사실 대접받는 사람들이 할 말이 아니다. 감지덕지해야 할 낯선 자들이 “정말 감사합니다”라고 말하지 않고,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머물러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이런 경우가 종종 있을 것이다. 우리가 정성을 다해 상대방의 자격보다는 넘치는 혜택을 주었을 때, 상대방에 그것을 마치 자신이 당연히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면, 그 혜택을 바로 무효화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낯선 자들의 부적절한 말투는 아브라함의 비위를 조금도 상하게 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이미 ‘도’의 경지에 진입한 것이다.
‘아브라함과 세방문객들’ (마르크 샤갈·러시아 화가·1887~1985)
신의 거대한 뜻 감지한 아브라함과 사라
이 모든 장면을 처음부터 조용히 장막 안에서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다. 아브라함의 부인 사라, 산전수전 다 겪은 사라, 용기와 지혜가 넘치는 사라였다. 이들에게 대접할 물과 음식을 준비하는 것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사라였다. 아브라함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낯선자들을 이런 식으로 항상 대접했지만, 사라는 한 번도 불평한 적이 없었다.
사라는 신이 아브라함과 자신에게 거대한 뜻을 가지고 있음을 감지한 채 아브라함과 한마음으로 살아왔다. 낯선 자들이 올 때마다 아브라함은 바로 사라를 만나러 간다. 아브라함은 장막 안에 서서 기다리던 사라에게 “빨리 고운 밀가루를 가지고 와서, 반죽을 하여 빵을 좀 구우시오”라고 말한다.
만일 남편이 길거리에서 낯선 자 세 명을 집으로 데리고 와 다급하게 빈대떡을 붙여달라고 주문하면,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여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사라는 아브라함의 마음을 이해하였고, 그러한 마음과 행동을 통해 신이 어떤 놀라운 일을 꾸미고 있다고 직감하였다.
사라는 이집트에서 파라오와의 곤경을 지혜롭게 넘겨 아브라함의 목숨을 살린 여인이었다. 사라는 오히려 아브라함에게 들판에 있는 질 좋은 1년 된 송아지를 한 마리 잡아 그들을 대접하자고 제안한다.
유목민에게 송아지는 자기 재산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송아지가 크면 그 가죽으로 천막이나 옷을 만들 수 있고 매일 공급되는 우유는 그들의 섭생이 된다.
고기 맛은 생후 1~2년 송아지가 최고다. 일반적인 유목민은 1년 내내 고기 한 점 먹기 힘들다. 아브라함의 이런 제안을 사라는 수용한다. 성서는 아브라함이 “집짐승 떼가 있는 데로 달려가서, 기름진 좋은 송아지 한 마리를 끌어다가 하인에게 주니, 하인이 재빨리 그것을 잡아서 요리하게 하였다”라고 기록한다.
고대 중동사회에서 낯선 자를 만나는 일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특히 여인은 장막 밖으로 나오면 안 된다. 사라는 낯선 자들을 위해 물을 대야에 떠놓고, 장막 뒤에서 커다란 돌 밑에 조그만 나무를 정렬하여 불을 지핀 후, 야생 이스트로 만든 밀가루 반죽을 올려놓는다. 한참 후에 겉은 바삭바삭하고 검게 그을렸지만 속은 부드럽고 촉촉하고 말랑말랑한 빵이 된다.
사라는 자연발효가 된 엉긴 젓과 우유, 그리고 하인이 잡아 온 송아지 고기로 손님을 대접한다. 아브라함은 사라가 마련한 음식을 하나씩 상수리나무 밑에 앉아 있는 나그네에게 날라 차려놓았다. 그들이 나무 아래서 먹는 동안 아브라함은 멀리 떨어져 서서 시중을 들었고 사라는 장막 안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최고의 대접을 받은 낯선 자들은 아브라함에게 “잘 먹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댁의 부인 사라는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이들은 장막 안에서 음식을 장만한 사라를 먼저 찾는다.
아브라함은 “장막 안에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장막’이란 축자적으로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거주하는 텐트’라는 의미도 있지만, 성서에서는 ‘신이 계신 곳’이란 의미도 있다.
후에 모세가 신의 말씀이 새겨진 십계명을 보관하던 장소도 바로 ‘장막’이다. 아브라함의 대답은 “사라는 신의 말씀 안에 거주하며, 신의 뜻을 실천하고 있습니다”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99세의 아브라함과 89세의 사라는 신의 약속이 거의 파기되는 절망적인 시간에도 신의 뜻을 알기 위해 노력하고 승복한 자들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여행자들을 서둘러 맞이했고 나그네들이 마치 신이나 왕인 것처럼 그 앞에서 절하며 자신의 천막으로 모셨다. 그리고 그가 가진 가장 좋은 것으로 대접했다. 이와 같은 자비의 실재적인 행위는 신을 만나게 되는 단초가 되었다.
이 결정적인 순간에 신비한 일이 일어난다. 아브라함이 그 낯선자들을 보니 이들은 사람이 아니라 신들이었다. 하란에서 24년 전에 목소리만 들었던 그 신들이 이제는 아브라함 눈 앞에서 사람의 모습, 그것도 낯선 자의 모습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 장면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신에 대한 모든 생각과 교리를 산산이 부순다.
신은 공중 부양해서 날라 다니거나 축지법으로 종횡 무진하는 자가 아니라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낯선 자이다.
낯선 자들의 모습으로 나타난 신
우리가 낯선 자를 그냥 지나치거나 아무런 감정 없이 대하면 그는 말 그대로 낯선 자가 되지만, 우리가 그를 내 몸처럼 사랑하고 대접하면 그는 우리에게 신이 된다. 신을 보는 영광은 산골짜기에서 홀로 수련하고 고상한 책을 읽는 자가 아니라 낯선 자를 진심으로 대접하는 자에게 주어진다.
이 이야기에서 아브라함 종교의 신, 다시 말해서 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의 신은 요란하게 천둥번개 속에서 등장하지 않고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일상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신은 자신의 ‘에고’에서 벗어나 ‘무아(無我)’ 상태로 진입하여 다른 사람의 요구를 내 것으로 만드는 능력, 그런 인성(人性)을 지닌 자에게 선물로 다가온다. 나그네들 중 한 명이 아브라함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당신을 내년 이맘때쯤 분명히 방문할 것이며, 당신의 아내는 아들을 가질 것이다.”
이 말을 장막 뒤에서 엿들은 사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웃고 만다. 사라는 속으로 “내 나이가 몇인데… 신도 농담을 하시네!” 하고 웃었다.
사라는 장막 뒤에서 호호하며 웃고 있었다. 이 웃음소리가 어찌 큰지, 마당에 있는 신들이 사라의 웃음소리를 들었다. 감히 신이 한 말에 실소하다니!
신들은 아브라함에게 호통을 친다. 아브라함은 아내를 신들 앞으로 불러낸다. 사라는 본래 낯선 자들 앞에는 나설 수 없지만, 신들 앞에 당당히 섰다.
그들 중 한 명의 이름이 야훼였다. 그가 말하였다.
“나 주가 할 수 없는 일이 있느냐? 다음해 이맘때에 내가 다시 너를 찾아오겠다. 그때에 네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내년이면 90세를 맞는 사라는 앞에 서 있는 야훼의 카리스마에 밀렸다. 신을 처음으로 대면한 사라!
사라는 두려워서 거짓말을 한다. “저는 웃지 않았습니다.”
사라는 야훼께 거짓말을 할 정도의 여유를 가진 여성이다. 이 대화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사라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한 야훼는 마치 순진한 어린아이처럼 사라와 농담하기 시작한다.
“아니, 너 웃었어!”
이 순진한 야훼의 말을 들은 사라는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장 아름답고 '시크'한 신의 얼굴을 보고 그냥 웃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 놀라운 경험을 일생 동안 기억하며 1년 후에 태어날 아이를 ‘웃긴 아이’란 의미를 지닌 ‘이삭’이라고 지었다.
그 낯선 자들, 아니 신들이 떠났을 때, 아브라함과 사라는 그들을 먼 데까지 나가 배웅했다. 이들은 이 지나가는 여행자들의 곤경이 그와는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의 처지라고 생각할 수 있는 능력, 즉 인문학적 상상력을 지닌 자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만을 보호하려는 높은 장벽, 자신만의 이익만 추구하려는 ‘이기적 유전자’를 억누르고 그들을 극진히 대접하니 그들이 그렇게도 만나기를 학수고대했던 야훼가 된 것이다.
‘다름이나 익숙하지 않음’ 을 열등하다든가 단순히 참아줄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성찰의 기회, 자신의 배려의 대상, 자신의 일생의 섬김의 대상으로 만들었을 때, 그 다름이 신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히브리어에서 ‘거룩’ 이란 의미를 가진 ‘카도쉬’의 본래 의미가 ‘다름’ 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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