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배철현

배철현의 성서 오디세이-신5

rainbow3 2019. 10. 9. 23:42


배철현의 성서 오디세이-신의 위대한 질문⑤

 

“네 이름이 무엇이냐?”(창세기 32장 27절)

 

신과의 씨름에서 승리를 거두고 부정적 자아를 극복한 야곱… 그는 얍복강가에서 홀로 하룻밤을 지새운 뒤 모든 사람을 마음으로 섬길 수 있는 성스러운 영혼의 소유자로 탈바꿈한다

 

 

 

 

동물의 DNA 속엔 회기 본능이 있다. 연어는 산란기가 다가오면 자신이 살던 바다의 심연에서 강으로 거슬러 올라가고 3200㎞ 이상 목숨을 건 여행을 한다. 암·수컷 모두 먹이를 먹지 않고 짝짓기가 끝난 후 암·수컷은 곧 죽고 부화한 새끼는 바다로 내려가 생활한다. 불과 100g 정도의 몸무게를 가지는 북극제비 갈매기도 매년 무려 7만km 비행을 30년 정도의 수명 동안 감행한다. 이 길이는 지구에서 달까지 거리를 3번 왕복하는 거리다.

 

인간도 명절이 되면 매년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귀성 여행을 습관적으로 해왔다. 인간에게 귀성은 생물학적인 요인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영적인 여행일 것이다. 인간 문명은 기원전 1만년에 농업을 발견하면서 정착생활로 접어들었고, ‘집’이 그 중심이다. 우리는 매일 집으로 돌아간다. 삶의 결정적인 순간에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마음은 연어나 북극제비갈매기 이상으로 인간 무의식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어린아이가 방과 후 집으로 돌아오고, 파병 나간 군인이 고향을 찾고, 가출한 자녀가 집으로 돌아오듯, 집은 우리의 궁극적인 종착지다. 19세기 미국 소설가 허먼 멜빌의 인용을 빌리자면, 고향은 ‘마지막 항구이며, 더 이상 정박할 필요가 없는 곳’이다.

영웅들은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한 죽음 경험이 동반된 기나긴 여행 후에 집으로 돌아온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딧세이’에서 주인공 오디세우스는 트로이와의 기나긴 전쟁 후, 고국으로 떠나기 위해 배에 올랐으나, 이전보다 더 어려운 일에 휘말려 귀국하는 데 10년이 넘게 걸렸다. 그는 자신의 귀향을 방해하는 신과 괴물, 마술사 들을 모두 물리쳐야만 했다.

 

성서 인물 야곱의 귀향을 방해하는 것은 질투하는 신들이 아니라, 야곱 가슴속 깊이 자리한 ‘야곱 자신’이란 괴물이다. 야곱은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타향에서 결혼한 두 명의 아내 레아와 라헬을 설득하고, 삼촌이자 장인인 탐욕스러운 라반의 음모를 벗어난다. 장자 권한을 빼앗긴 데 화가 나 동생 야곱만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는 에서를 대면하고, 무엇보다도 아버지 이삭을 속이고, 형 에서를 속여 수십 년 동안 방랑생활을 하면서 쌓인 야곱 자신의 죄책감을 내려놓아야 했다.

 

야곱에게 귀향은 자신의 불운한 과거와 풀리지 않은 열등감, 내적인 갈등과의 정면대결이다. 야곱은 어느덧 중년이 되어 두 아내와 자녀들, 종들 그리고 수많은 가축이 있었지만, 심리적으로는 나약하고 죄책감으로 가득한 ‘어린아이’와 같았고 영적으로는 깨어나지 않은 알과 같았다.

 

겁쟁이 야곱의 불안한 귀향

 

야곱은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형 에서를 속여 그의 재산과 장자의 권한을 탈취한 후, 평생을 죄책감에 시달렸다. 그는 나이가 들어 형을 만나기 전, 자신을 죽일지도 모르는 형의 마음을 떠보려고 전령들을 보내 다음과 같이 말하라고 명령한다.

 

“당신의 종, 야곱이 주인이신 에서에게 말을 전합니다. 저는 삼촌 라반과 함께 지금까지 지내며 많은 가축과 종을 부리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소식을 전하며, 당신이 나를 괜찮게 생각하기를 바랍니다.”

 

야곱은 자신의 형이 자기를 어린아이가 아니라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며, 자신의 재산이 에서의 분노를 누그러뜨릴 것이라고 추측한다. 야곱의 말을 전한 전령들은 야곱에게 마음속에 걱정했던 최악의 상황을 전달한다. “주인님의 형 에서가 주인님을 만나러 400명의 건장한 청년을 데리고 오고 있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바라던 대답이 아니었다. 야곱은 두려워하며 불안에 떨었다.

 

야곱은 최악의 시나리오가 현실이 된 지금, 자신의 부하 100명은 무장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호구지책으로 400명의 용병을 대항할 방도를 찾는다. 야곱은 종들과 가축, 낙타를 둘로 나누었다. 에서가 한 팀을 공격하면, 다른 팀을 도망갈 속셈이었다. 야곱은 이 위기의 순간에 신을 찾는다.

 

“청컨대, 저를 제 형님의 손에서 구하십시오. 저는 그가 저와 제 아내들, 그리고 아이들로 죽일것 같습니다. 당신께서 제 자식들을 바다의 모래처럼 쉴 수 없게 만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야곱은 기도를 마친 후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순간도 눈을 붙이지 못한 야곱은 아직도 형의 분노를 삭힐 방도가 있다고 생각했다. 야곱은 200마리 암염소, 20마리 숫염소, 200마리 새끼 암소와 20마리 새끼 수소, 30마리 낙타와 그 새끼들, 40마리 암소와 10마리 수소, 20마리 암당나귀와 10마리 수당나귀를 골라 첫째 팀과 함께 일렬로 보냈다.

 

가축들이 에서가 사는 진영에 도착할 때, 야곱의 종들은 “당신의 종 야곱은 우리 뒤에 오고 있습니다”라고 에서에게 말을 전했다. 야곱은 이런 식으로 에서의 마음속에 남은 분노를 누그러트리려 했다. 뒤따라온 팀에 있었던 야곱은 저녁이 되어 얍복강에 도착했다. 이 강만 건너면 에서의 진영이 보인다. 하지만 아직도 과거의 수동적이고 철들지 않은 자아가 야곱을 불안하게 만들어 어린아이와 같은 결정을 내리게 된다.

 

야곱은 겁쟁이였다. 그는 두 아내, 두 여종, 그리고 모든 아이를 먼저 배에 태워 강을 건너게 했다. 만일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야곱은 강 반대쪽으로 도망칠 태세였다. 그는 자신의 모든 재산을 건너 보내고 홀로 남았다. 그는 인생의 마지막 날이 될지도 모르는 그 밤을 홀로 보낼 참이었다.

 

야곱이 얼마나 인간적인지! 야곱의 삶은 영웅적이지 않다. 아브라함이나 이삭처럼, 미래의 위대한 비전이나 자기희생을 그에게는 찾아볼 수가 없다.

아브라함은 낯선 땅으로 가서 자신의 꿈을 실현하는 데 100년을 기다릴 만큼 끈기와 인내의 신앙을 가졌다. 심지어 그는 신에게 어떤 것도 바라지 않았고, 금지옥엽 같은 아들까지도 신에게 바치려 했다.

이삭은 자신이 희생제사의 제물이 될 것을 알면서도 부모를 설득하여, 자신이 제물이 되려고 했다.

 

반면 야곱은 우리와 너무나 닮았다. 그는 어려운 일을 회피하고, 남이 해결해주기를 바라며, 대책도 없이 기다린다. 심지어는 자신의 가장 가까운 사람인 두 아내와 아이들까지 위험에 빠뜨린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고, 신의 명령을 아전인수로 해석하며 신과의 계약을 지키려 하기보다는 자신의 무력함과 나약함을 원망한다.

이 이야기에서 야곱은 전략적인 생존자이다. 그가 신을 의지하긴 하지만, 자기 생존을 위해 자기 나름의 방안을 세운다. 별이 쏟아지는 지중해 사막 한가운데 야곱이 누었다. 밤의 정막은 야곱의 근심과 걱정을 배가시킨다. 인생의 맨 밑바닥, 그 한가운데서 야곱이 별들을 보고 있었다.

 

인간은 종종 가장 우울하고 어두운 순간에 자기 자신의 ‘별’을 발견한다. 우리는 내면 깊은 곳에 들어가 자신이 누구인지 묻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심사숙고하게 되면, 자신이 꼭 해야 할 일을 찾게 된다.

야곱은 인생 여정의 바닥을 쳤다. 다음날 아침까지는 형 에서의 심중을 읽을 수 없다.

 

형으로부터 심판받아야 하는, 도망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야곱은 자신이 누구이며, 자신은 무엇을 해야할지 깊이 생각한다. 그는 이제 자신을 평생 짓눌러온 그 환영과 만날 준비가 되어있으며, 그의 한계를 시험할 준비를 마쳤다. 그는 오랜만에 홀로 사막에 남아 있었다.

 

 

인생의 밑바닥에서 구원은 시작된다

 

야곱은 얍복 강둑에 피곤한 몸을 뉘었다. 40세가 된 야곱은 20년 전 아버지 이삭과 형을 속이고 가출한 일을 떠올렸다. 그 20년동안 무엇을 이루었는지 야곱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버린 세월이 야속했다. 그는 그동안 열심히 일해 부자가 되었지만, 지금 이 순간이 부질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는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신앙을 떠올렸다. 강 건너 야영의 불꽃이 가물가물하며 연기와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은 반짝이는 별들로 아름답게 깊어갔고, 사방은 너무도 조용하여 멀리서 들려오는 야생동물의 울음소리가 가끔씩 그 적막을 갈랐다.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이 밤에서 야곱은 자신의 삶에서 숨기고 싶고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수많은 장면을 떠올렸다. 그 조용한 사막 한 가운데서 야곱 자신을 억눌러왔던 과거의 환영들이 머릿속에서 복잡하게 떠올랐다.

 

야곱은 태어날 때부터 쌍둥이 형 에서와 경쟁관계였다.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나, 그의 이름은 ‘발뒤꿈치’였다. 다시 말해 그는 기회만 주어지면, 자신을 위해서 어떤 일도 서슴지 않는 전형적인 이기주의자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삭은 에서를 편애했다. 그는 에서가 사냥하여 가져다 주는 음식이 늙은 이삭에겐 최고의 즐거움이었고, 재산 상속을 비롯한 모든 권한을 에서에게 주기로 오래전에 결정했다.

 

이삭은 집에서 자신의 아내 레베카의 치마폭에서 마마보이가 된 야곱을 늘 못마땅하게 여겼다. 레베카는 모든 일을 뒤에서 조정하는 보이지 않는 손이었다.

아버지의 편애로 항상 열등감에 사로잡힌 야곱은 집에서 죽을 쑤고 있었는데, 사냥에서 돌아온 형 에서가 죽 한 그릇을 달라고 애원한다. 야곱은 그 순간 기지를 발휘해 “만일 형이 장자권을 포기하면, 음식을 주리다!” 하고 마음을 떠본다.

 

야곱은 그날 죽 한 그릇으로 장자로서 가져야 할 명분을 에서로부터 가로챈 것이다. 이삭은 눈이 점점 침침해지자 죽기 전에 자신의 모든 권한을 에서에게 넘기고자, 그에게 마지막으로 사슴 사냥을 해서 요리를 만들어 오라고 명령한다. 에서가 사슴사냥을 하러 나간 사이, 그 말을 몰래 엿들은 이삭의 아내 레베카는 야곱을 부추겨 눈먼 이삭을 속여 음모를 꾸민다. 레베카는 장자권이라는 명분을 소홀히 여기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에서를 통해서는 신의 커다란 계획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판단했다.

 

레베카는 털이 많은 에서로 변장하기 위해 야곱에게 양 가죽을 뒤집어 쓰게 하고, 자신이 만든 음식을 남편 이삭에게 보낸다. 이삭은 분명히 그가 에서가 아니라 야곱이 양가죽을 덮어 쓰고 들어왔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는 야곱의 목소리를 그 즉시 알아보고,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슴고기 음식이 염소고기 음식으로 대치되었다는 사실을 후각과 미각을 통해 확인했지만 아무것도 모른 체하며 행동했다.

 

이삭은 그 순간 아브라함과 이삭으로 이어진 신앙의 유산이 에서가 아닌 야곱을 통해 성취될지도 모른다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이삭은 짐짓 모른 체하면서, 야곱의 음식을 받고 그에게 모든 권한을 넘겨주었다.

이삭의 장막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레베카는 야곱을 곧바로 삼촌이 있는 하란 땅으로 도망가게 한다.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야곱을 죽일 게 뻔하기 때문이다.

 

나이 스물의 야곱은 정처 없이 떠돌이생활을 시작했다. 집을 떠나 하란으로 가던 중 베델이란 장소에서 하룻밤을 묵어야 했다. 인생은 밑바닥으로부터 구원이 시작된다는 말이 있다.

야곱은 다시는 부모와 형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 눈물지으며 잠이 들었다. 야곱은 이 꿈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다. 사다리 꿈이었다. 그 사다리는 땅에서 시작하여 그 끝이 하늘에 닿았고 신의 천사들이 그 위로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게 아닌가!

 

심리학자 프로이트는 꿈을 ‘억압된 바램에 대한 성취’라고 정의한 바 있다. 신은 ‘바람이 이루어지는 꿈’을 통해 처음으로 야곱에게 나타난다. 신은 그에게 절망에서 빠져나올 ‘사다리’를 선사한다. 땅과 하늘을 이어주는 ‘사다리’는 신이 홍수 이후 노아에게 선사한 무지개와 유사하다.

야곱 앞에 펼쳐질 세상이 험하다 할지라도 야곱은 결코 혼자가 아니며, 자신의 삶에 특별한 목적이 있고, 그의 삶은 여러 가지 돌발적인 행동의 연속이란 사실을 처음으로 깨닫는다.

 

사다리의 끝은 하늘을 향해 볼 수 없지만, 그 다른 끝은 지상에 박혀 있다. 그는 하늘로 올라가려면 지상에서 매일매일 어려운 상황의 계단을 한걸음씩 올라가야 한다. 야곱은 마마보이로서의 과거를 끊고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를 찾을 것이다. 야곱이 사다리의 첫가로대에 올라섰을 때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다. 그는 이전 아브라함과 이삭의 추구했던 영적으로 성숙한 인간으로서 첫걸음을 내디뎠다.

 

 

 

 

 

14년간의 노고로 라엘을 아내로 맞아

 

붓다의 말씀 중에 “해탈하기 전에 물을 나르고 나무를 패고, 해탈한 후에, 물을 나르고 나무를 팬다”라는 구절이 있다. 우리가 영적인 높은 경지에 도달한다 할지라도, 여전히 일상생활에 복귀해야하며 초월적인 경험을 단순하고 사소한 일들과 접목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삶의 진정한 변화는 서서히 일어난다.

 

야곱은 한밤중에 베델에서 신을 만나는 초자연적인 경험을 했지만,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 혼자 삼촌 라반이 있는 하란으로 외롭게 70일 동안 여행했다. 어느 날 야곱은 들판에서 한 우물을 발견했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자, 몇몇 목동이 몰려와 양떼에게 물을 먹이고 우물 입구를 막고 있는 돌을 돌려 우물을 막았다.

 

야곱은 그들에게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어보니, 그들은 하란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야곱은 마침내 삼촌 집에 거의 도착한 것이다. 야곱은 “혹시 나홀의 아들, 라반을 아십니까?”라고 묻자 “잘 압니다. 저기 라반의 딸 라헬이 가축과 함께 오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야곱이 눈을 들어, 멀리서 다가오는 라헬을 쳐다보았다.

 

야곱은 그녀를 한참 쳐다본 후, 바로 우물로 달려가 입구를 막고 있는 육중한 돌을 다시 밀어 라헬의 양떼에게 물을 주었다. 야곱은 가까이 서 있는 사촌 여동생 라헬의 커다란 눈을 다시 쳐다보았다. 그는 라헬의 눈과 목선에서 자신의 어머니 레베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 순간 라헬은 야곱의 소울 메이트가 된 것이다.

 

그런 후 야곱은 라헬에게 입 맞추고 소리 높여 울었다. 자신이 라반의 여동생, 레베카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과거에 아브라함이 종을 보내, 바로 이곳에서 이삭의 부인 레베카를 발견했는데, 수십년 후에 같은 장소에서 다시 야곱이 자신의 아내가 될 라헬을 만난 것이다. 라반은 야곱을 반갑게 맞은 뒤 그곳에 정착하게 한다.

라반은 이재에 밝은 사람이었다. 아무리 친척이라도 야곱의 노동력을 이용해 자신의 재산을 불릴 셈이었다.

 

라반은 야곱이 라헬에게 푹 빠져있는 것을 확인하고 계약을 유도한다. 야곱은 7년간 노동한 대가로, 라헬을 자신의 아내로 허락해 달라고 제안한다. 사랑에 빠진 야곱에게 7년은 며칠처럼 지나갔다. 야곱은 약속한 기한을 채우자, 라반에게 라헬과의 혼인을 허락해 달라고 요구한다. 라반은 혼인 잔치를 열어준다. 야곱은 지난 삶을 돌아보면서 술을 많이 마신 나머지 취해버린다. 밤이 되고 하객들이 각자의 집으로 돌아간 후, 야곱은 비틀거리는 몸을 이끌고 신방으로 간다. 두 사람은 그렇게 첫날밤을 치렀다. 7년간의 노동이 그날 밤에 완성된 것이다.

 

그런데 동이 트고 눈을 떠보니, 잠자리에 라헬이 아니라 라헬의 언니 레아가 누어있는 게 아닌가!

그들은 서로 쳐다보고 놀라 말문이 막혔다. 야곱은 불행의 환영이 그를 덮쳤다고 생각했다. 그는 눈과 귀를 손으로 막고 침묵 속에 빠졌다. 그는 굴욕을 당했다. 그는 어둠 속에서 연정과 술기운에 사로잡혀, 낯선 여인에게 자신의 몸과 영혼을 드러낸 것이다. 야곱은 자신과 같이 라반의 계략에 희생된 라헬의 언니 레아를 보았다.

 

야곱은 신방에서 뛰쳐나와 라반에게 달려갔다. 야곱은 “내가 7년 동안 라헬을 위해 일했는데, 삼촌은 이런 식으로 날 속였습니까?” 라반을 미안한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는 장사꾼처럼 말한다.

“우리 동내에선 둘째딸이 먼저 시집 갈 수가 없네. 결혼잔치가 7일 후에 끝나는데, 자네가 라헬을 위해 7년 동안 더 일하면 어떤가?” 야곱은 분을 삭였다.

 

라헬에 대한 사랑이 삼촌에게 복수하려는 마음보다 훨씬 컸기 때문이다. 야곱은 결국 7년 동안 더 일해 라헬을 얻었다. 라반은 두 딸을 이용해 조카 야곱의 노동력을 착취했다더구나 매력적이지 못한 레아가 자신에게 경제적인 손실을 끼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야곱을 속인 것은 일석이조의 효과였다.

 

이 이야기에서 놀라운 사실은 첫날 밤 욕정에 사로잡혀 레아를 보지 못한 야곱의 영적인 ‘맹목성’이, 자신에게 장자권을 부여한 아버지 이삭의 ‘장님 상태’와 너무 닮았다는 점이다. 두 사람은 모두 어둠 속에서 육체적인 미각, 후각, 촉각에 매료되어 속았다.

이삭은 사슴고기 맛에 집착하여 염소고기를 먹는지도 몰랐고 야곱은 ‘형태가 아름답고, 보기에 기분 좋은’ 라헬과 첫날밤을 보낸다는 마음이 앞서 촌스럽게 생긴 레아와 첫날밤을 지낸 것을 아침이 돼서야 알게 된 것이다.

 

 

 

 

 

 

야곱, 신과 씨름해 이긴 자의 초상

 

이런 과거의 환영들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내일 아침 얍복강을 건너면 무려 20년 만에 형 에서를 만난다. 강을 건넌다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중요한 단계를 넘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 신화에서 스틱스강은 삶과 죽음의 경계이고, 성서에서 요단강도 이 세계와 저 세계의 구분이다. 구약성서에서 홍해는 오합지졸과 광야 40년 생활을 감행할 신앙공동체를 분리시키는 격리대다.

 

로마 장군 율리어스 시저는 루비콘강을 건넌 후, 로마제국의 절대지도자가 되었다. 얍복강은 요단강의 지류로 시혼과 옥이라는 지역의 경계이다. 얍복강은 야곱에게 지형적인 경계 이상이다. 얍복강은 야곱의 청년시절과 성숙한 어른과의 영적인 마지노선이다. 히브리어에서 얍복은 ‘씨름하다’와 어원적으로 같다. 이 신비한 강에서 야곱은 자신을 평생 동안 짓눌러온 오래된 자아를 벗어버리고 새로운 영적 자아를 얻었다.

 

갑자기 어떤 낯선 자가 야곱과 아침까지 씨름을 했다. 그 낯선 자는 힘으로는 야곱을 제압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나서, 야곱의 엉덩이뼈를 쳐서 부러뜨렸다. 그 낯선 자는 “해가 떠오르니, 나는 가야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야곱은 “당신이 나를 축복해주지 않으면 보낼 수 없습니다”라고 단호히 거절한다. 그러자 그 낯선 자는 자신의 뼈가 상했는데도, 자신을 붙들고 있는 야곱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 라고 묻는다.

 

이 질문은 성서에 등장하는 신의 네 번째 질문이다. 그러자 그는 “야곱입니다”라고 대답한다.

낯선 자는 “네 이름은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왜냐하면 너는 신과 씨름하여 이겼기 때문이다.” 이름은 고대 오리엔트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개인의 일부이다.

 

셈족어로 ‘shim-’은 ‘이름·기억·역사’라는 다양한 뜻을 지닌다. 고대인들은 신이 인간 각자에게 맞는 운명을 이름을 통해 알려주었다고 믿었다. 아브라함 종교들, 즉 기원전 4세기경에 등장한 유대교, 기원 후 1세기 그리스도교, 그리고 기원 후 7세기 이슬람교는 모두 셈족인들이 만든 종교다. 이들은 자신을 ‘셈’ 즉 ‘이름’의 후예라고 믿었다.

 

사막의 거친 환경에서 이들의 삶을 가능하게 한 원동력은 신에 대한 ‘기억’으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자기 조상들이 물려준 신앙의 유산을 ‘기억’하여 공동체에 기여해야 한다고 믿었다. 유대인들은 신을 지칭하는 ‘신성사문자(神聖四文字)’인 ‘YHWH’를 ‘하쉠’, 즉 ‘(바로) 그 이름’이라고 부른다.

 

성서의 위대한 인물들은 종종 신을 만난 후에,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야곱은, 내 이름을 개명해주는 이 낯선 자가 누군지 궁금하여 “당신 이름을 알려 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이름 알 필요 없다면서 그 자리를 떴다.

급히 떠나버린 이 낯선 자는 누구인가? 야곱 안에 자리 잡은 과거에 사로잡힌 인간, 과거지향적인 인간, 야곱의 어두운 제2의 자아일 수도 있다.

야곱은 밤새도록 자기 자신 안에 있는 부정적인 또다른 야곱과 씨름한 것이다. 야곱은 이 부정적인 자아를 극복하고 새로운 정체성을 얻게 되었다. 그는 지금까지 수동적인 인간이었다.

 

형 그늘에 가려 사는 마마보이, 아버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삼촌에서 속임을 당하는 소극적이며 우울한 인간이었다. 그런 과거를 극복하고 그는 미래의 새로운 비전을 보았다.

야곱은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당당히 버틴다.

그는 더 이상 ‘발뒤꿈치’ 야곱이 아니라, ‘신과 겨루어 이긴’ 이스라엘이 되었다.

 

낯선 자에 대한 또 다른 해석은 성서이야기에서 드러나듯이 바로 ‘그 신’이었다. 성서에서 신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공중부양해서 우주선을 타고 서울시청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존재가 아니다.

신은 단순히 ‘어떤 사람’일 뿐이다. 성서에서는 이 신을 단순히 ‘이쉬’, 즉 보통 인간이라고 지칭했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신은 커다란 건물을 세워놓고 그 안에서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라, 사막한 가운데나, 신이 등장할 거라 전혀 예상치 못하는 장소에서 느닷없이 등장하는 ‘어떤 사람’이며, 다른 사람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존재다.

 

우리가 신을 만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인간이 정해놓은 시간과 장소에 신을 묶어 놓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사라를 찾아간 ‘세 명의 낯선 이들’이, 그들의 손자 야곱 이야기에서도 등장한다. 야곱은 이 낯선 자를, 그저 지나가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바꿔놓을 수 있는 신이라고 생각했다.

신을 경외한다’는 문장은 우주 삼라만상에 신의 숨결이 숨겨져 있으며, 그 숨결을 찾아 ‘놀란다’는 의미다.

 

 

 

 

 

형 에서를 위해 눈물 흘리는 야곱

 

다음날 동이 트자, 야곱은 얍복강을 건넌다. 야곱은 엉덩이 뼈가 어긋나 고통을 느끼며 절뚝거리고 있었다. 강을 건너가보니 두 아내와 아이들이 살아있는 것이 아닌가!

얼마 되지 않아, 형 에서가 건장한 청년 400명을 대동하고 그에게 오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새로운 이름 ‘이스라엘’이 자신의 삶에 어떻게 영향을 끼칠지 궁금하기도 했다.

 

야곱은 자신의 가족과 종 그리고 가축들을 둘로 나누고, 사랑하는 아내 라헬은 맨 뒤에 서게 했다. 이제 야곱은 맨 앞에 섰다. 그는 더 이상 뒤에 숨는 겁쟁이가 아니었다.

야곱은 스스로 “신과 싸워 이긴 나 이스라엘이 누구를 대적하지 못하겠는가?”라고 생각하면서 다가오는 에서 앞으로 나아가 그가 올 때까지 7번 정성스럽게 절했다.

 

야곱은 절을 마친 후 엉덩이가 아파 겨우 일어났다. 야곱의 쌍둥이 형 에서는 ‘붉은 머리’(에서는 히브리어로 ‘붉은 털’이란 의미)를 휘날리며 다가왔다. 그의 허리춤에 보기에도 섬뜩한 큰 칼이 햇볕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다. 에서는 야곱에게 달려가 그를 껴안고 고개를 떨군 채, 그에게 입맞추었다. 그리고 둘은 한참 울었다.

 

두 사람은 지난 20년 동안 하나밖에 없는 혈육인데도 서로 원수로 여기고 지내온 자신들의 모습, 그리고 상대방이 감내했을 고통의 세월을 헤아리며 울었다. 상대방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는 ‘측은지심’의 상태로 들어갔다. 이 눈물은 자기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무아(無我)의 상태로 진입하여 상대방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는 그런 눈물이다.

 

에서는 야곱에게 “이 많은 사람과 같이 왔느냐?”라고 물었다. 야곱은 “형의 마음을 풀기 위해서 가져왔습니다”라고 말한다. 에서가 “필요 없어. 나도 재산이 많아”라고 하자 야곱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형님, 제발 제 선물을 받으십시오. 형님의 얼굴을 보니 신의 얼굴을 보는 것 같습니다. 신이 나를 좋게 보셔서, 형님이 나를 반갑게 맞이 한 것입니다.”

 

에서는 야곱의 간절한 청을 받아들였다. 얍복강가의 경험을 한 야곱의 눈에, 원수 같고 두려운 존재인 형 에서가 지금은 신처럼 보였다. 야곱의 마음은 이젠 원수까지도 신처럼 보는 존재가 되었다.

야곱 이야기는 ‘발뒤꿈치’로 태어나 평생을 남의 눈치만 보고 살던 인간이 나중에 이스라엘이란 민족의 조상이 된 인간승리의 과정을 보여준다. 야곱의 승리는 자신을 믿고, 자신의 운명 그리고 인생의 고통과 역경을 극복할 수 있는 자기 능력에 대한 믿음에서 시작한다.

 

오래 참음이란 덕은 야곱과 에서를 구분짓는 결정적인 성격이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얻으려고 14년 동안을 인내하면서 기다렸고, 아들을 얻기 위해 다시 5년을 기다렸다.

야곱은 부모와 형으로부터 떠나 20년간 방황했지만 신을 만나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았다. 이스라엘! 신과 겨뤄 신을 이기는 존재란 바로 형 에서를 만났을 때, 자신과 그리고 형을 위해 울 수 있는 사람이다. 비록 발을 절뚝거리는 불구의 몸이 되었지만 그에겐 모든 사람을 신처럼 여길 수 있는 성스러운 마음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