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배철현

배철현의 성서 오디세이-신6

rainbow3 2019. 10. 10. 00:52


배철현의 성서 오디세이 신의 위대한 질문⑥

 

“네 손에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창세기 32장 27절)

 

배철현 서울대 인문대학 종교학과와 서아시아언어문명학과 교수

 

‘네가 서 있는 그 장소’란 의미를 지닌 히브리어 ‘마콤’은 바로 거룩한 장소, 천상의 장소…

신 을 만나 첫 번째로 알게 되는 진리는 내가 서 있는 이곳이 가장 성스러운 장소라는 사실이다

 

 

 

 

구약 성서에서 신이 선택하여 미션을 부여한 가장 위대한 지도자 두 명은 아브라함과 모세다.

구약성서의 첫 두 권, 즉 ‘창세기’와 ‘출애굽기’에 이들은 하늘의 뜻을 알아내 자신의 목숨까지 기꺼이 바친 인물로 등장한다. 아브라함은 후대 등장하는 유대교·그리스도교·이슬람교의 창시자이며, 모세는 신으로부터 천상의 경전을 내려 받아 아브라함 종교의 경전들, 즉 토라, 바이블, 그리고 꾸란으로 불리는 지상의 경전의 기틀을 마련했다.

 

이들은 모두 모진 시험을 통과해야 했으며, 신과 ‘계약’을 맺고, 신과 얼굴을 맞대고 대화한 인물로 성서는 기록하고 있다. 이들은 분명 가장 위대한 성서의 지도자로 비슷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성격이 달랐다.

 

아브라함은 불굴의 지도자였다. 그는 유일신 사상이 전무한 메소포타미아 사회에서 자랐지만, 스스로 신의 목소리를 들고, 온 가족을 이끌고 새로운 땅을 개척하며 가족 모두를 자신이 확신하는 신앙으로 인도했다. 그는 수많은 반대와 조롱도 아랑곳하지 않고 메소포타미아의 우르라는 도시에서 터키남부 하란으로, 다시 가나안(팔레스타인)으로 이주했다가, 흉년이 들자 이집트로, 그리고 다시 가나안에 정착했다.

 

불굴과 확신의 지도자 아브라함

 

아브라함의 가족들은 일사불란하게 그를 따랐다. 모세도 위대한 지도자였으나, 모세와 그를 따르는 떠돌이 ‘히브리인’들은 아브라함의 경우와는 달랐다. 모세는 ‘불타서 없어지지 않는 가시덤불’에서 신을 만났지만, 신의 명령에 토를 달고 핑계를 대는 인물로 신이 너무 화가나 죽일 뻔할 정도였다. 그를 따르는 히브리인들은 ‘갈대바다’를 건넌 후, 사막에서 지속적으로 모세에게 불평을 늘어놓아 “사막에서 죽는 것보다, 이집트인들을 섬기며 사는 것이 낫다”라고 그를 지속적으로 조롱했다.

 

아브라함은 맨 처음부터 신을 의심하지 않았다. 신이 그에게 요구하는 모든 것을 아브라함은 그대로 실행했다. 예를 들어 신은 아브라함에게 “너의 하나밖에 없는, 네가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라 불리는 지역에 가라. 내가 알려줄 산들 중 하나에 올라, 그곳에서 그를 번제(holocaust)로 바쳐라” 라는 신의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을 받고도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는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모리아에 있는 한 산에 올라 신의 뜻을 그래도 실행에 옮기려 하는 것을 보자, 그때 가서야 신은 숫양을 ‘희생양’으로 마련하여 이들의 신앙을 확인했다.

 

아브라함은 단 한번도 신을 의심한 적이 없었고 자신의 신앙을 증명하기 위해서 심지어는 자신의 자식까지 희생시키려 했다. 그러나 모세는 달랐다. 모세는 생각이 많고 의심도 많았다. 모세가 신을 불타는 가시덤불속에서 처음 만나, 이집트로 가서 어려운 처지에서 신음하고 있는 히브리인들을 해방시키라는 임무를 부여받았을 때, 그는 신의 의지를 의심하고 이렇게 묻는다.

 

“내가 무어라고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인들을 데리고 나옵니까?”

모세는 신의 존재를 자신의 눈으로 직접 확인했지만, 자신을 신의 도구로 선택한 그 신을 의심한다. 다시 말해 “당신께서 저를 잘못보고 선택하셨습니다”라고 대꾸한 것이다.

아브라함의 불굴의 신앙과는 달리, 모세는 처음에는 신앙이 그리 굳건하지 못했다. 나중에는 모세가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을 지니게 되었지만, 그는 불안하고 의심도 많고 그리고 이기적인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다.

 

이들이 신을 만나는 방식에도 차이가 난다. 신은 아브라함을 아무런 경고도 없이, 그리고 이유도 없이 그를 부른다.

“너는 네가 태어난 곳, 네 민족, 네 아버지 집을 떠나, 내가 알려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를 위대한 나라로 만들고 너에게 복을 내릴 것이다.”

 

아브라함은 기도 중에 이 소명을 듣고 신앙의 긴 여정을 떠난다. 그러나 모세는 히브리인들을 이집트에서 해방시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으로 인도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아브라함과 모세는 둘 다 새로운 땅에 대한 약속을 받지만, 모세는 먼저 히브리인들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미션을 받았다는 것이 다른 점이다.

 

아브라함은 신의 미션을 항상 묵상을 통해 받는다. 그는 신과의 깊은 대화를 통해 일을 처리한다. 그는 하갈과 그의 아들 이스마엘에 관한 일도 기도와 묵상을 통해 결정했고,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신의 징벌도 기도를 통해 상의했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는 사건도 신에게 묻는다.

모세도 묵상을 통해 신을 만나지만 신은 그에게 항상 시각적인, 그리고 청각적인 모습으로 등장한다.

 

모세가 양을 치고 있었을 때, 그는 불이란 매개체를 통해 나타났고, 히브리인들을 이끌고 갈대 바다 앞에서 뒤따라오는 이집트 군대로 진퇴양난에 처했을 때, 신은 “너는 왜 내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인들 보고 전진하라고 하여라. 너는 지팡이를 들고 네 손을 바다에 펼쳐, 물이 갈라져 그들이 바다를 건너가게 하라”라고 직접 개입하여 명령한다.

 

‘창세기’는 1~11장까지 우주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를 제외하면, 아브라함이 주인공이다.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 그리고 그의 손자 야곱에 관한 이야기다. 고대 이스라엘인의 신앙에서 이들의 이야기는 후대에 구전전승에 의해 더해진 것이고, 고대 이스라엘인들을 하나로 묶어 신앙공동체로 만든 사건은 바로 ‘이집트(애굽)로부터의 탈출’, 소위 ‘출애굽’이다.

 

이집트는 당시 오리엔트 세계 최고의 문명을 구가했다. 나일강의 정기적인 범람으로 이집트는 먹을 것이 항상 풍족한 곡창지대였고, 당시 파라오는 팔레스타인과 아나톨리아(히타이트), 그리고 남쪽으로는 누비아로 제국을 확장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애굽’이라는 단어는 모든 문명의 이기와 사치, 그리고 편리함의 상징이었다.

그 문화 속에서 노예적 삶을 살았던 히브리인들에게 그 편안한 ‘길’로부터 ‘밖으로 나와’ 새로운 길을 모색하라는 이야기가 바로 ‘출애굽’이다.

 

‘출애굽’이란 영어단어 Exodos는 원래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는데, 그리스어로 ex는 ‘…로부터 밖으로’라는 전치사며, ‘hodos’는 ‘모든 사람들이 가는 길’이란 뜻이다. 성서의 두 번째 책 출애굽기는 그 당시 정착할 곳이 없어 떠돌아다니던 히브리인들이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부터 어떻게 ‘밖으로 나와’ 이스라엘이라는 신앙공동체를 만들었는지를 기록한 대서사시다.

 

이 서사시는 이스라엘 민족의 기원 서사시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21세기 ‘히브리인들’에게 새로운 길을 안내하기 위한 지침서이기도 하다. ‘히브리인’은 기원전 20세기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민족을 지칭하는 경제사회학적인 용어다. 도시국가가 발전하여 국가가 생기고 제국이 등장하는 시기에, 소작농이었다가 70%정도 세금을 지주에게 내지 못해 노예로 전락한 사람들, 외국과의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온 사람들이 자신의 고향을 등지고 비옥한 초승달 지역을 떠돌게 된다. 이들을 지칭하는 단어가 바로 ‘히브리인’이다.

 

히브리, 국경을 넘어 도망치는 자

 

고전 히브리어로 ‘국경을 넘어 도망치는 자’를 ‘이브리(ibri)’라고 부르는데, 이 단어가 영어로 Hebrew, 한국어로 ‘히브리인’이 되었다. 출애굽은 바로 이 떠돌이들이 어떻게 이스라엘이란 신앙공동체를 만들었는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과거의 습관들을 어떻게 버렸는지를 알려준다.

 

이 역사적이면서도 영적인 자기혁명의 지도자가 바로 모세다. 성서는 모세와 히브리인들의 출애굽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히브리인이면서 고대 이집트의 높은 관직에 올랐던 요셉 이야기를 단편소설 형식(창세기 37∼50장)으로 소개한다.

 

모세를 이집트 역사 안에서 조망할 수 있는 성서구절은 출애굽기 1장 8절에 등장하는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이 이집트를 통치하였다”라는 문구다. 이 새로운 왕은 이집트 왕조 중 어떤 파라오인가? 이 구절은 이집트 역사상 처음으로 외국인 통치를 받은 힉소스의 통치가 끝나고 이집트 통치로 돌아간 사건을 의미한다.

 

이집트 12왕조(기원전 1991∼1802) 이후, ‘힉소스’라는 사람들이 몰려와 이집트 북부 삼각주지대에 거주하며 아바리스를 수도로 정하고 150년간 치리했다. 이들은 기원전 1674∼1567년 이집트를 다스렸고, 이집트인들은 이들을 ‘헤가 카세’ 즉 ‘외국인 통치자’라고 불렀다. 그 뒤에 ‘헤가 카세’를 그리스인들이 ‘힉소스(Hyksos)’로 불렀다. 힉소스는 후대에 ‘목자 왕들’이라고 잘못 번역되기도 했다.

 

힉소스는 단일 인종집단이 아니라, 글자 그대로 ‘외국인 통치자’들로 에게해에서 온 인도유럽인들부터, 히타이트에서 넘어온 사람들, 그리고 남부 가나안에서 들어와 정착한 사람을 포함하는 탈민족적 용어다. 이집트인들이 부르는 ‘힉소스’의 일부에는 야곱의 12지파를 포함한 히브리인들이 있었다.

 

힉소스는 자신들의 통치기간 동안 태평성대를 이뤘다. 힉소스는 이집트 종교를 수용했고, 이집트어를 공식어로 사용했으며, 그들에게 새로운 군사 기술과 말, 그리고 전차를 소개했다. 그러나 이집트의 민족주의가 발흥해 남쪽에서 쿠스에 있는 누비아 왕국과 결탁한 이집트 18왕조 파라오 아흐모스 1세(기원전 1549∼1524년)가 기원전 1567년 힉소스를 내쫓기 시작해 투트모세스 3세(기원전 1479∼1424) 때에 완전히 퇴치했다.

 

투트모세스 3세는 힉소스와 이들의 동맹국인 아모리인들과 후리아인들을 물리치려고 메소포타미아의 유프라테스강까지 나아가 전쟁했다. 요셉이 이집트의 고위관직에 등극해 고센지방(삼각주 지방)에 장관으로 임용된 시기는 바로 힉소스 시대이며, 출애굽기 1장8절의 ‘요셉을 모르는 새로운 왕’은 투트모스 3세 이후의 왕 아멘호텝 2세(기원전 1424∼1398년)이나 투트모스 4세 (기원전 1398∼1388) 혹은 19왕조의 첫 번째 왕 람세스 1세(기원전 1292∼1290)의 시대일 가능성이 높다.

 

하여튼 다양하게 구성된 힉소스의 탈민족적 성격만이 이집트인이 아닌 요셉이 외국에서 높은 관직에 오를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 새로운 왕은 그 이전부터 남아있던 히브리인들을 강제노역에 동원한다. 그들은 히브리인들을 부리는 공사 감독관을 두고 강제노동으로 그들을 억압하면서, 이집트가 곡식을 저장하는 성읍, 곧 비돔과 라암셋을 건설하는 일에 끌려나갔다.

 

 

공주의 측은지심이 민족의 운명을 바꿔

 

 

 

 

모세가 태어날 때, 만일 그 시기가 이집트 19왕조 람세스 1세 시기라면, 히브리인들을 포함한 힉소스들은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집트 파라오는 힉소스들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 궁궐이나 신전을 개조했을 뿐만 아니라, 히브리인들의 인구가 늘어나는 것에도 신경을 곤두세운 듯하다.

 

히브리인들 중 ‘요케베드’란 이름의 여인이 있었다. 요케베드는 ‘레위’ 지파로 같은 지파의 남자와 결혼해 아론과 미리암을 낳았다. 파라오는 히브리인의 수가 점점 늘어나자, 모든 사내아이를 나일강에 던져 죽이라고 명령한다. 요케베드는 셋째 아이를 출산하고 3개월 동안 숨긴 뒤, 더는 감출 수 없게 되자 그 아이의 목숨만은 지키고자 갈대 상자를 구해 역청과 송진을 바르고, 아이를 담아 강가의 갈대 사이에 놓아두었다.

 

여기서 사용된 상자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테바’인데, 이 동일한 단어가 노아의 ‘방주’(히브리어 테바) 를 묘사할 때도 사용된다. 마치 노아 방주에 혼돈의 세계에서 새로운 창조의 세계로 인도할 노아 가족이 승선한 것처럼, 갈대 ‘상자’(히브리어 테바)도 떠돌이 히브리인들 가운데 선별해 신앙공동체를 이룰 영웅을 담은 그릇이다.

 

요케베드는 나일강에 위험하게 둥둥 떠가는 갈대상자를 차마 지켜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미리암을 시켜, 그 갈대상자를 지켜 보라 하고 눈물을 머금고 집으로 돌아갔다. 마침 파라오의 공주가 나일강에 목욕하러 시녀들과 왔다가 간난아이 울음소리를 듣는다. 그 애절한 소리는 갈대 숲에 걸려 있는 한 상자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공주는 시녀를 시켜 상자를 가져오게 하여 열어보니, 한 남자 아이가 울고 있었다. 그 아이를 보며 측은지심을 느낀 공주는 그 아이 어머니의 마음을 생각해내고, 그 아이의 운명을 추측하면서 눈물지었다.

공주는 “이 아이는 틀림없이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구나”라고 말한다. 공주는 이 아이가 이집트에 오래전 흘러 들어온 떠돌이의 자식임을 금방 알아차린다.

 

만일 공주가 그 아이의 울음소리를 못 들은 척하거나, 혹은 그 아이가 히브리 자식인 것을 알고 그대로 내버려두었더라면 모세라는 인물도, 출애굽도, 혹은 더 나아가 이스라엘 민족도 없었을 것이다. 공주의 측은지심, 한 사람의 측은지심은 세상을 바꾸는 열쇠다.

 

이 광경을 지켜본 미리암은 공주에게 나서서 “제가 가서, 히브리 여인 가운데서 아기에게 젖을 먹일 유모를 데려다 드릴까요?”라고 말한다. 공주는 그렇게 하라고 하고, 미리암은 자기의 어머니이자 그 아이의 어머니인 요케베드를 유모로 데려와 젖을 먹였다. 그 아이가 젖을 뗀 후, 요케베드가 그 아이를 공주에게 데려다 주니, 공주는 이 아이를 양자로 삼았다. 공주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졌다”고 하면서, 그 이름을 모세라고 지었다.

 

고대 히브리어로 ‘건지다’라는 동사가 ‘마샤’이고, 그 동사의 현재 분사형, 즉 ‘건지는 사람’은 ‘모세’다. 사실 그의 이름은 이집트어일 가능성이 크다. 투투모세스(Thut-mose)나 람세스(Ra-messes)와 같은 이름에 들어있는 ‘ms’는 이집트어로 ‘(태어난) 아이’라는 의미다. 탈무드에서는 이 공주의 이름을 ‘비씨아’ 혹은 ‘테르부씨스’라고 부른다. 모세는 이 공주의 양자로 파라오의 궁궐에서 자랐지만, 직계 자녀가 아니어서 파라오가 될 수 없는 처지였다.

 

모세는 어른이 되면서 대부분 외국인 노동자로 살고 있는 자신의 동료 히브리인들이 한 이집트인에게 학대당하는 것을 지켜보고, 좌우에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 그 이집트 사람을 쳐 죽여서 모래 속에 묻어버렸다. 모세의 정의감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 이튿날 다시 나가서 보니, 이번엔 동족인 히브리 사람 둘이 서로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모세가 중재해서 싸움을 중단시키려 하니 그중 한 히브리인이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재판관으로 세웠단 말이오? 당신이 이집트 사람을 죽이더니, 이제는 나도 죽일 작정이오?”라고 말했다.

 

모세는 자신이 이집트인을 살해한 사실이 탄로난 것을 알고, 정처 없이 사람들이 거의 거주하지 않는 미디안 평원으로 도망한다. 모세는 며칠간을 도망쳐 미디안 평원에 있는 우물가에 도착했다. 모세가 우물가에서 쉬고 있는데, 7명의 여자 목동이 물을 길어 구유에 부어 양 떼에게 물을 먹이려고 하였다. 여자들이 사막에 돌아다니는 일은 매우 위험하기에 이들은 7자매가 모두 함께 물을 길으러 온 것이다.

 

“네가 서 있는 장소가 바로 천국이다”

 

남자 목동들이 등장하여 그들을 내쫓자, 파라오 궁궐에서 무술로 단련된 모세는 그 남자 목동들을 혼내 내쫓아버리고, 그 일곱 여자 목동들을 도와 양떼에게 물을 먹였다. 7자매 목동의 아버지 호밥 (다른 사본에서는 이드로)은 미디안 지역의 제사장이었다. 호밥은 갈 곳 없는 모세를 양자로 삼고 자신의 딸 십보라와 결혼시켜 자신의 양떼를 치게 한다. 모세의 기나긴 40년의 목동시절이 시작된 것이다. 그동안에 아이도 낳아 그 이름을 ‘게르숌’이라 지었다. 그 이름의 의미는 ‘거기에서 나그네가 되었네’이다.

 

기원전 14세기경 시내반도 미디안 지역은 끝없이 펼쳐진 사막과 태고에 일어났던 화산활동으로 만들어진 가파른 산밖에 없었다. 그는 더 이상 이집트의 왕자가 아니라, 살인자이며 떠돌이 히브리인일 뿐이다.

지난 40년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아침에 양떼를 몰고 산에 올랐다 저녁에 내려오는 것이 일과였다. 무명으로 아무런 희망도 없이 지내는 자신이 한심하기도 했다. 모세는 산속에 들어가 끝없이 펼쳐진 사막과 거친 화산을 보면서 자신의 내면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사막’이란 히브리어 단어가 ‘미드바르’인데 ‘바람으로 단단히 다져진 장소’라는 의미도 있지만 ‘신의 말씀이 있는 장소’라는 의미도 있다. 신은 종종 인간이 부수적인 모든 것을 버리고 자신에게 온전히 집중할 때, 신의 ‘말씀’을 들려준다. 40년이나 사막에서 목동생활을 하면서, 이제 모세를 결단의 시간이 오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어느 날 모세는 마음먹고 사막의 언저리가 아닌 끝까지 가보기로 했다. 처음으로 와 본 사막의 언저리에 아주 높은 산, 호렙산이 있었다. 너무 높아 감히 그 누구도 들어가 보지 못한 산, 호렙산에 들어섰다.

 

그 산에 들어서서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니, 사막에서 가장 흔한 식물인 가시덤불이 타고 있었다. 그 가운데 알 수 없는 존재가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불붙은 가시덤불이 열도 나지 않고 연기도 내뿜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모세는 40년 동안 그토록 대면하길 원했던 신, 혹은 자기 자신의 내면의 깊은 곳과 마주친 것이다.

 

신기한 것은 알 수 없는 존재인 신이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특별한 장소를 택한 것이 아니라,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막에 가장 흔한 식물인 가시덤불을 택했다는 점이다.

모세가 보니 떨기에 불이 붙는데도 그 떨기가 타서 없어지지 않아 이 놀라운 광경을 좀 더 자세히 보고, 어째서 그 떨기가 불에 타지 않는지를 알아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겁 없이 다가오는 모세를 보고 신은 불꽃 안에서 말한다.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아라! 네 발에서 샌들을 벗어라. 왜냐하면 네가 서있는 바로 그 장소가 신의 속성인 거룩함이 깃들어 있는 땅이기 때문이다.”

목동에게 샌들이란 자기 겉옷과 함께 재산 목록 1호다. 신은 모세에게 샌들을 포기할 것을 요구한다. 모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포기하면, 신은 그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신다.

그 새로운 세상이란 하늘에 있는 그런 장소가 아니라, 새로운 시각과 깨달음이다. 바로 여기 우리가 서 있는 장소가 거룩한 장소라고 깨닫는 것이다.

 

 

신과 당당히 맞서 진리를 파악한 모세

 

 

 

 

 

유대인들은 히브리어로 ‘네가 서 있는 그 장소’란 의미를 지닌 ‘마콤’을 바로 거룩한 장소, 천상의 장소라고 여겼다. 신을 만나 첫 번째로 알게 되는 진리는 내가 서 있는 이곳이 거룩한 장소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바로 그 신은 자신은 새로운 신이 아니라, 이스라엘 조상 대대로 믿던 바로 그 신이라고 말한다. ‘조상의 하나님’이 하나의 완결된 문구로 고정된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이 후에 이스라엘의 하느님은 바로 이 세 명의 이스라엘 족장의 하나님이 된다. 아브라함은 위대한 비전을, 이삭은 헌신을, 야곱은 깨달음을 각각 상징한다.

 

이 신은 어떤 신인가? 모세는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해 듣는다.

“나는 분명 이집트에 있는 나를 믿는 공동체의 고난을 목격했고 심지어는 그들을 억누르는 자들 앞에서 그들의 울음소리를 내가 들었다.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안다.”

모세에게 자신을 드러낸 이 신은 이전의 신과는 전혀 다른 면모를 보여준다.

 

커다란 신전을 지어 인간들이 시간 맞춰 드리는 제사를 받는 그런 수동적인 신이 아니라, 인간의 고통에 관심이 있을 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낄 수 있는 신이다! 여기서 신은 히브리인들의 고난을 두 눈으로 직접 보았고, 억울한 울음소리를 직접 들었다고 전한다.

한마디로, 이 새로운 신은 인간의 고통에 동참하는 신이다. 신은 모세에게 히브리인들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면서 그럭저럭 배고픔만 채우기보다는 새로운 삶을 모색하도록 이집트에서 이들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신은 모세에게 “나는 너를 파라오에게 보내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에서 이끌어내게 하겠다”라고 말하지만, 모세의 반응은 시큰둥하다.

“저는 무명의 목동입니다. 제가 무엇이라고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겠습니까?”

성서에서 신을 만나는 사람들은 두려워 떨거나 감히 말을 건네지 못하는데, 모세는 자신의 생각을 분명히 전달한다.

 

그리고 그는 “제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고 말하면, 그들이 저에게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고 물을 터인데, 제가 그들에게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라고 당돌하게 묻는다.

 

모세는 신에게 “당신 이름이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한 첫 인간이 되었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상대방의 이름을 묻는 것은 실례인 경우가 많아, 그 대신 명함을 주고받는다. ‘이름’에는 그 상대방에 대한 호칭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전부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모세는 신과 마치 친구처럼 거리낌없이 대화를 주고받는다. 신은 자신의 이름을 출애굽기 3장 14절과 15절에서 세 가지 다른 이름으로 소개한다.

 

첫 번째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히브리어로 ‘에흐에 아쉘 에흐에’), 두 번째 ‘스스로 계신 분’(히브리어로 ‘에흐에’), 그리고 세 번째 ‘야훼’(히브리어로 ‘야훼’)다.

첫 번째 이름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는 문법적으로 성립될 수 없는 문장이다. 문장에서 술어는 주어의 일부분으로 그것을 수식하거나 서술해야 하지만, 이 문장에서는 주어와 술어가 일치한다. 이 문장에 대한 고대 그리스어 번역(ego eimi ho on)이나 라틴어 번역(ego sum qui sum)도 그 의미를 파악하기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두 번째 이름은 첫 번째 이름 ‘에흐에 아쉘 에흐에’에서 주어 부분을 분리해 ‘에흐에’만 사용했다. 세 번째 이름은 전혀 다르다, 우선 1인칭이 아니라 3인칭이 되었다. 흔히 ‘야훼’(yhwh, ‘여호아’라고도 번역되고 한국어로는 ‘주’(主)로 번역한다)는 문법적으로는 ‘존재하다’라는 동사의 사역형으로 ‘존재하게 하다’라는 의미이며, 이 사역동사의 3인칭 남성 단수의 능동미완료형으로 ‘그는 다른 사람/ 사물을 존재하게/ 살맛 나게 하시는 분’이라는 뜻이다.

 

신은 ‘야훼’라는 이름이 자신의 영원한 이름이며, 이것이 바로 너희가 대대로 기억할 이름이라고 말한다.

야훼는 ‘만나면 그 상대방에게 살맛 나게 하시는 분’이라는 의미다. 야훼는 모세에게 이집트인들을 굴복시켜 히브리인들을 해방시킬 것이라고 장황하게 설명한다.

 

 

양치기에서 민족의 구원자로 거듭나

 

 

 

 

자신의 이름까지 말한 야훼신이 장황하게 모세가 해야 할 일을 설명했지만, 모세는 아직도 의심이 많았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다시 야훼에게 질문한다.

“그들이 저를 믿지 않고, 저의 말을 듣지 않고 ‘주께서는 너에게 나타나지 않으셨다’ 하면 어찌합니까?”

아직도 굴복하지 않고 대답하는 모세에게 신은 화를 참으며 질문하신다.

“네가 손에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모세가 대답했다. “양을 치는 지팡이입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던지니 지팡이가 뱀이 되고, 손을 가슴에 품어보니 손이 나병 걸린 사람처럼 희게 되었다가 다시 품으니 원래대로 돌아왔다. 야훼는 이 두 가지 기적을 보여주면서 “그들이, 네가 하는 말도 믿지 않고, 첫 번째 이적의 표징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두 번째 이적의 표징은 믿을 것이다.”

 

그리고 아직도 의심하는 모세가 못 미더워서 “나일강 물을 푸면 마른 땅에서 피가 될 것이다”이라는 예비 표징도 알려준다. 정말 의심 많고 고집불통의 모세를 설득하기 위해, 야훼신은 별별 기적을 다 보여주며, 모세가 믿기만을 기대한다. 야훼가 모세에게 말하는 그 얼굴 표정을 상상해보라. 명색이 신인데, 모세에게 쩔쩔매고 있지 않은가!

 

모세의 “그러겠습니다”라는 대답을 애타게 기다리는 야훼신에게 모세는 아직도 자신이 없어 변명을 늘어놓는다. 약간의 비아냥거림도 있는 대답이었다.

 

“주님, 죄송합니다. 저는 본래 말재주가 없는 사람입니다. 전에도 그랬고, 주께서 이 종에게 말씀을 하고 계시는 지금도 그러합니다. 저는 입이 둔하고 혀가 무딘 사람입니다.”

야훼신은 거의 폭발 직전까지 왔다. 그리고 그는 애원한다.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벙어리를 만들고 귀머거리를 만들며, 누가 앞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거나 앞 못 보는 사람이 되게 하느냐? 바로 나 주가 아니더냐? 그러니 가거라. 네가 말하는 것을 내가 돕겠다. 네가 할 말을 할 수 있게, 내가 너에게 가르쳐주겠다.”

 

이렇게까지 말하는 자신의 부탁을 거절하지는 않겠지 하고 생각한 야훼에게 모세는 절망적인 대답을 한다. “주님, 죄송합니다. 제발 보낼 만한 사람을 보내시기 바랍니다”라고 대답하니 야훼신께서 모세에게 크게 노하셨다.

“레위 사람인 너의 형 아론이 있지 않느냐?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을 할 것이다. 그는 너의 말을 대신 전달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같이 될 것이다.”

모세의 완승이다. 야훼신은 모세를 대신할 말 잘하는 아론을 말하는 사람으로, 모세는 그 뒤에서 모든 일을 관장하는 ‘하나님’과 같은 존재로 삼으신다.

 

모세는 외국인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파라오의 양자가 되었다가, 다시 살인자가 되어 사막에서 40년 동안 도망자로 살았다. 이 40년은 모세를 민족의 구원자로 변화시키는 창조적 시간이었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깊이 묵상하는 가운데 신을 만나, 자신이 있는 그곳이 ‘거룩한 땅’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신을 만나면 알아차리는 첫 번째는 바로 우리가 있는 이 장소가 거룩한 장소이며 천국이란 사실이다. 모세가 이스라엘인들을 구원할 수 있는 장비는 특별한 것이 아니라, 모세가 지난 40년 동안 가지고 다니던 그 지팡이가 민족을 구원할 지표가 된다.

신은 우리 모두에게 “네가 손에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

신은 내가 있는 이 처지를 통해 놀라운 일을 하는 분이며, 그 신은 우리의 처지를 자신의 처지로 공감하고, 우리의 희로애락에 동참해 ‘살맛 나게 하는 야훼’라고 자신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