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배철현

배철현의 성서 오디세이-신7

rainbow3 2019. 10. 10. 12:49


신의 위대한 질문⑦

 

-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욥기 38장 4절)

 

배철현 서울대 인문대학 종교학과, 서아시아언어문명학과 교수

 

 

모든 생명과 사물에 신비가 가득함을 깨달은 욥… 일상에서 신의 은총과 놀라움을 발견하는 자가 행복하다

 

 

 

 

2011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작품은 테렌스 말릭의 <생명나무>다. 말릭 감독은 아마도 살아 있는 미국 영화감독들 중 가장 신비스러운 감독일 것이다. 그는 1973년 <황무지>로 데뷔한 이후 지금까지 다섯 편의 작품만을 찍은 과작(寡作)의 감독이다.

 

그는 하버드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미국 대학졸업생의 최고영예인 ‘로드 스칼라’ 자격으로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그 후 미국에 돌아와 프리랜서로 일하다 MIT에서 철학 교수로 재임하던 중 동료교수의 영화관련 과목을 수강하다 영화에 입문한다.

 

 

 

말릭 감독의 <생명나무>는 종교, 인생, 운명, 가족에 대한 그의 철학적 명상이다. 말릭은 <생명나무>를 욥기에 등장하는 성서 구절로 시작한다.

 

신이 욥에게 한 질문이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욥기 38장 4절)

이 구절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것도 신으로부터 ‘흠이 없고 정직하다’라는 칭호를 받은 동방의 의인 욥이 자신이 왜 고통을 받는 이유를 알 수 없다며 친구들과 논쟁(욥기 3-37장)할 때, 이를 들은 신이 폭풍 가운데 등장하며 던진 질문이다. 말릭 감독은 왜 욥기를 인용했는가.

 

욥은 흔히 ‘의로운 고통을 받는 자’로 알려져 있다. 욥기는 “우스라는 곳에 욥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흠이 없고 정직하였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었다”로 시작한다.

욥기는 기원전 5∼3세기 이전에 구전으로 내려오던 문헌들을 정리하여 기록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기원전 6세기 바빌로니아에 의해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포로로 잡혀간 후, 자신들이 처한 처지를 전통적 신앙 안에서 설명할 길이 없었다. 유대인들을 전통적으로 지탱해온 신앙은 자신들의 신인 야훼는 위대하며, 그 신을 잘 섬긴다면 지상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믿었다.

 

그 믿음이 깨진 상황에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처한 삶의 정황에서 새로운 신앙을 모색하기 시작한다. 욥기는 바로 과거의 신앙과는 다른 새로운 신앙의 길을 모색하는 책이다. 욥은 성서에서 ‘흠이 없고 정직한’ 자로 묘사된 유일한 인물이다.

 

최악 상황에도 신에 대한 경외 버리지 않은 욥

 

‘흠이 없다’라는 표현은 신이 보시기에 온전한 사람이라는 의미고, ‘정직하다’라는 표현은 사람들이 평가하기에도 완벽한 인간이란 뜻이다. 그는 또한 동방 최고의 부자였지만, 큰 잔치를 마치고 나면 그 다음날 일찍 일어나 10명의 자식이 혹시 자신이 모르게 실수한 것까지 헤아려 신에게 제사를 드리는 실로 완벽한 신앙인이었다.

 

이스라엘의 신인 야훼는 이런 욥을 항상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하루는 야훼신이 하늘에서 신들의 모임을 주재한다. 그 신들 중에는 지상에 내려와 신이 선택한 인간을 시험하는 ‘사탄’도 있었다.

 ‘사탄’의 원래 의미는 ‘고발하는 자’다. 사탄은 신의 임무를 맡은 인간을 시험하고 평가해 만일 그 임무를 충실히 행하지 않는다면, 야훼신에게 고발한다. 그래서 성서에서는 신으로부터 시험을 받은 자는 신의 선택을 받은 자다. 성서에서 시험을 받은자들은 아브라함, 욥, 그리고 예수다.

 

욥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야훼는 지상에 다녀온 사탄에게 욥의 근황을 묻는다.

“너는 내 종 욥을 잘 살펴보았느냐? 이 세상에는 그 사람만큼 흠이 없고 정직한 사람,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자 사탄은 야훼신에게 다음과 같이 되묻는다.

 

“욥이, 아무것도 바라는 것이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야훼께서 그와 그의 집과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울타리로 감싸주시고, 그가 하는 일이면 무엇에나 복을 주셔서, 그의 소유를 온 땅에 넘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제라도 주께서 손을 드셔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치시면, 그는 주님 앞에서 주님을 저주할 것입니다.”

 

사탄은 인간들이 왜 신을 믿는지, 인간들이 생각하는 종교의 핵심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욥에 대한 사탄의 평가는 야훼를 움직였다. 야훼는 사탄에게 욥의 시험을 허락한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다 네게 맡겨 보겠다. 다만, 그의 몸에는 손을 대지 말아라!”

사탄은 바로 지상으로 내려가 동방 최고의 부자 욥을 사고를 통해 그의 모든 것을 빼앗는다. 사탄은 욥의 부, 가축, 집, 종들, 그리고 심지어 그의 10명 자녀의 생명도 앗아갔다. 이해할 수 없는 비극을 당하고도 욥은 자신의 신앙을 지킨다.

 

욥은 일어나 슬퍼하며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민 다음에, 머리를 땅에 대고 엎드려 경배하면서 “모태에서 빈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오, 가져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하고 기도한다.

야훼는 욥의 불굴의 신앙을 알고 있었고, 그를 흐뭇하게 생각했다.

 

그 후 야훼는 또다시 사탄을 만난다. 야훼는 그런 고통을 감내하면서도 신앙을 잃지 않는 욥을 사탄에게 자랑한다.

“너는 내 종 욥을 잘 살펴보았느냐? 이 세상에 그 사람만큼 흠이 없고 정직한 사람,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이 없다. 네가 나를 부추겨서 공연히 그를 해치려고 하였지만, 그는 여전히 자기의 온전함을 굳게 지키고 있지 않느냐?”

 

그러자 사탄은 다시 한번 야훼에게 도전한다.

“가죽은 가죽으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생명을 지키는 일이면,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버립니다. 이제라도 주께서 손을 들어서 그의 뼈와 살을 치시면, 그는 당장 주님 앞에서 주님을 저주하고 말 것입니다!”

 

욥에 대한 절대 믿음이 있었던 야훼는 사탄에게 말한다.

“그렇다면 그를 너에게 맡겨 보겠다. 그러나 그의 생명만은 건드리지 말아라!”

이번에 욥의 온 몸에 발바닥에서부터 정수리에까지 악성 종기가 나서 고생하게 되었다. 한때 동방의 최고 부자인 욥이 잿더미에 앉아서, 옹기 조각을 가지고 자기 몸을 긁고 있었다.

욥의 아내가 보기에는 성격이 외곬으로 곧아 융통성이 없는 남편에게 차라리 신을 저주하고 자살하라고 종용한다. 그러나 욥은 이 모든 어려움을 당하고서도, 말로 죄를 짓지 않았다.

 

이때 욥의 세 친구 엘리파즈, 빌닷, 그리고 조파르가 찾아온다. 그들은 처참한 욥을 보고 7일 동안 밤낮으로 욥과 함께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욥이 겪는 고통이 너무나 커서, 한마디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욥이 이런 감당할 수 시험을 받은 이유는 그가 그에 상응하는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세 친구는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인과응보적인 신앙에서 신은 고통을 무작위로 인간에게 부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3-37장까지 욥과 대화하면서, 욥에게 회개를 촉구한다. 그러나 욥은 자신이 잘못한 점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요구를 거절한다.

 

 

 

 

에베레스트의 웅장함 앞에서는 오직 침묵뿐

 

야훼는 욥이 친구들과 논쟁하는 것을 쭉 지켜보다 드디어 욥에게 질문한다. 야훼는 푹풍이 몰아치는 가운데서 욥에게 말씀하신다.

“무지하고 헛된 말로 내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이제 허리를 동이고 대장부답게 일어서서, 묻는 말에 대답해 보아라.”

 

여기서 ‘무지한 말’이라는 용어는 축자적으로 번역하면 ‘지식이 없으면서’이다. 여기서 ‘지식’은 히브리어로 ‘다아트’이다. ‘다아트’는 ‘우주 삼라만상의 원칙에 대한 앎’이다. 예를 들어 하늘에 별이 수천억 개가 존재한다면, 그 별들의 운행원칙과 같은 것이다.

 

1990년대 미국 나사가 더 많은 별을 관찰할 수 있는 새로운 망원경을 개발했다. 이전 망원경으로 관찰할 수 있는 별의 개수는 1000억 개 정도였지만, 새로운 기구로 6000억 개의 별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하늘에 별이 몇 개 정도일까? 사실은 천체에는 6000억 개의 6000억 배 이상의 별이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 6000억 분의 1, 즉 지극히 일부만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다.

 

히브리어의 ‘다아트’에 해당하는 개념이 고대 이집트의 ‘마아트’,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메’, 고대 인도의 ‘다르마’ 그리고 중국의 ‘도(道)’다. 우리가 아는 ‘지식’은 극히 제한적이다. 그 ‘지식’은 인간에게 ‘지혜’와 ‘명철’이란 형태로 드러난다. 여기에서 ‘지혜’는 전체를 파악할 수 있는 직관력이며, ‘명철’은 분석하고 계산하는 능력이다.

 

욥이 아무리 의롭고 지혜롭다고 해도, 그의 ‘지식’은 삼라만상의 운행원칙을 알 정도는 아니다. 야훼가 보기에 욥은 무식하다. 욥이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부르짖는 행위는 허용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우주와 생명의 기원에 대해 떠벌리는 행위는 ‘무식의 소치’다. 짧은 인생을 경험하여 지극히 제한된 지식을 가지 자가 야훼에게 도전한 것이다.

 

그것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산 앞에서 그 산이 만들어진 시기와 생성 과정을 알려고 노력하는 것과 같다. 인간은 그 웅장함 앞에서 그저 침묵하고 경외를 표시하기만 하면된다.

위 문장 “내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에서 ‘생각’은 야훼신의 ‘우주를 운행할 계획’을 의미한다. 욥은 무식한 말로 ‘신의 계획’에 대해 아는 척하면서 지껄인 것이다.

 

야훼는 욥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다시 질문한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이 구절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것도 신으로부터 ‘흠이 없고 정직하다’라는 칭호를 받은 동방의 의인 욥이 자신이 왜 고통을 받는 이유를 알 수 없다며 욥의 친구들과 논쟁할 때(욥기 3-37장) 신이 폭풍 가운데 등장하며 던진 질문이다.

 

영화 <생명나무>는 바로 이 야훼의 질문으로 시작한다. ‘신이 존재한다’고 믿는 유신론(有神論) 체계가 가장 풀기 어려운 질문들 중 하나인 ‘인간고통’의 문제에 대한 묵상이다.

“신이 위대하고 선하다면, 악이 존재할 수 있는가?” 혹은 “왜 착한 사람들이 세상에서 고통을 받는가?”

 

영화 <생명나무>의 주인공인 잭 오브리언(숀 펜)이 어려서부터 어른이 되기까지 그의 영혼을 일생 동안 괴롭힌 화두다. 잭은 그 순진하던 자신의 동생이 죽자 세상을 비관적으로 보기 시작한다. 특히 천사와 같은 잭의 엄마인 오브리언 부인(제스카 차스테인)에게는 아들의 죽음은 바로 벼랑에서 떨어지는 공포의 절망이었다.

 

왜 신의 ‘은총’의 화신이며 그 은총을 가족에게 희생적으로 내려주는 이상적인 여인인 잭의 엄마는 이런 형용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해야만 하는가? 잭은 완벽히 선한 신과 이 세상에 존재하는 악의 화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 없는 고통’을 화해시키기위해 인간존재의 궁극적 의미를 찾는 묵상의 여행을 시작한다.

 

<생명나무>는 이 영적인 여행에 관한 내용이다. 영화에선 최대한 침묵을 유지한다.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효과를 이용하여 잭을 우주창조의 맨 처음에서 시작하여 1950년대 미국 텍사스 교외에서의 청소년 시절을 무심하게 펼친다.

 

테렌스 말릭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창조 과학 소설(Creation Science Fiction)’이라는 전혀 새로운 장르를 창조했다. 말릭 감독은 우주 창조에 관한 웅장하면서도 감동적인 서사시를 보여주기 전에, 영화 전체의 흐름을 잡아주는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잭의 엄마인 오브리언 부인은 R.L.이란 약자로 알려진 자신의 아들이 베트남전쟁에서 전사했다는 전보를 받는다. 그녀는 하늘을 응시하고 속삭인다. “오, 주여! 당신은 어디 계십니까?”

 

이 질문은 우주를 창조한 후, ‘모든 지식의 나무’의 열매를 따먹은 아담에게 한 신의 첫 질문인 “네가 어디 있느냐?”이다. 이제 인간이 그 신의 첫 질문을 신에게 다시 묻는다. “당신, 어디 계십니까?” 라는 오브리언 부인의 질문에 대해 말릭 감독은 ‘창조 과학소설’이라는 새로운 영화 형식으로 대답한다.

 

신이 욥에게 한 위대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숭고한 시각영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언제 샛별들이 (처음 나와) 노래하였고 모든 신들이 기쁨의 노래를 불렀느냐?”

 

신을 의심했던 자, 욥기 38~41장 읽어라

 

욥은 신이 인정하는 의인이었다. 그는 신과 자신 앞에서 흠이 없고, 가족과 이웃이 보기에도 정직한 사람이었다. 인생이 그렇듯이, 욥도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받는다. 고대 동방세계의 최고의 부자가 하루아침에 모든 재산을 날리고, 그의 10명의 자식마저 살해당한다. 욥의 부인은 그런 신이라면 저주하고 죽으라고 부르짖지만, 욥은 자신의 신앙을 고수한다. 신은 더 혹독한 고통으로 시험한다. 욥은 머리에서 발끝까지 몸 전체가 욕창으로 가득 차 길거리에 주저앉자 몸을 기왓장으로 긁는 신세가 되었다.

 

욥은 신에게 자신을 엄습한 고통에 대한 이유를 묻는다. 왜?

왜 욥과 같이 선한 사람이 이 같은 고통을 당해야만 하는가? 왜 신은 의로운 자가 고통을 받도록 허용하는가? 그런 신을 믿어도 되는가? 아니, 그런 신이 신인가?

신의 대답은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이다.

 

이것은 대답이 아니라 질문이다. 신은 욥기 38장부터 41장까지 쉴 새 없이 다시 욥에게 질문한다. 신의 ‘침묵’에 괴로워했던 사람이라면 이 내용을 읽어보라.

욥기 3-37장에 등장하는 욥의 수많은 질문에 침묵하는 신이 일단 입을 열기 시작하니 멈추지 않는다.

 

문제는 전지전능한 신의 장황한 설교에도 욥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을 수 없다. 신은 자신의 의도를 의심하며 질문하는 욥의 무모함에 화가 났다. 신은 욥에게 “네가 대장부답게 허리를 동여매고, 내가 질문할 테니 내게 우주의 비밀을 알려줘라!” 그리고 신은 자신이 과거에 했었고 지금도 하고 있는 놀라운 일을 나열한다.

 

욥은 삼라만상의 창조와 운행에 관련된 수많은 일을 행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원칙을 이해할 수도 없다. 신의 설교가 끝날 때쯤 욥은 자신의 제한된 시각으로는 신의 의지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고 느낀다.

 

신의 질문을 쉽게 풀어 쓰자면 다음과 같다.

“내가 너에게 질문 좀 하자. 내가 세상을 창조했을 때, 너 어디에 있었니? 그때 너 없었잖아.

너 천둥소리 나게 하고 번개 치게 할 수 있어? 어림도 없지!

너 태양이 가는 길 알아? 말 좀 해보시지!

한 시간 후 일어날 일도 모르면서. 너는 내 질문조차 이해하질 못하잖아. 네가 할 일은 침묵하는 일이야. 알았어?”

 

“주님, 왜? 어디에 계십니까?”

 

신은 욥의 질문에 끝내 대답하지 않는다. 오늘 이 순간에도 수많은 어린아이가 기아나 질병으로 죽는다. 왜? 신앙인들은 그들을 위해 도움의 손길을 보내거나 기도를 하지만, 신은 침묵한다. 왜? 이런 일들이 오늘날 세상이 일어나고 있는데, 이것이 신의 섭리인가?

 

만일 굶어 죽어가는 아이가 당신에게 도움을 청한다면, 당신은 수동적으로 가만히 있을 것인가? 왜 욥의 ‘완벽하게 선한’ 신은 침묵하고 있는가? 그는 인간보다 못한 존재인가? 이것이 욥기에 등장하는 욥의 질문이자, <생명나무>에 등장하는 오브리언 부인의 질문이다.

 

이 질문은 오랫동안 신학자들을 괴롭힌 질문이다. 말릭 감독은 욥기 38∼41장의 내용을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영상에 담았다. <생명나무>는 우주 창조를 빅뱅으로 시작한다. 그는 폴란드 작곡자 즈비그뉴 프라이스너의 ‘라크리모사(Lacrimosa)’의 파이프오르간 연주와 슬픈 노래를 배경으로 맨 처음을 노래한다.

 

욥기에서 언급한 것처럼 신이 기뻐 노래한 것이 아니라, 소프라노의 애가는 인류를 위해 눈물을 흘리는 듯하다. 인간의 슬픔, 잭과 오브리언 부인, 그리고 우리의 슬픔의 노래가 빅뱅에서부터 시작한 것이다.

‘라크리모사’의 노래를 배경으로 오브리언 부인은 신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당신에게 우리는 누구입니까? 대답해 주십시오. 우리는 당신에게 울면서 기도합니다. 우리 기도를 들어주십시오.”

빅뱅으로 시작한 우주가 호모사피엔스의 등장으로 이어진다. <생명나무>에서 우주 창조의 절정은 바로 ‘잭’으로 상징되는 인간이다. 그러나 잭은 행복하지 않다.

 

그는 한마디로 삶에 의미를 찾지 못하고 지친 현대인의 표상이다. 잭의 표정과 말로 그의 인생이 편치 않고 오히려 불행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잭은 자기 엄마처럼, 상투적인 말로 중얼거린다. “세상은 엉망이 되었어. 모두 돈에 미쳤어!”

 

도시의 건물들은 걷잡을 수 없는 숲의 나무처럼 잭을 둘러싸 잭의 숨을 조인다. 하늘을 볼 수 없는 도시는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은 스스로 존재하여 자족하며, 저 위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 스스로 영혼을 인정하지 않은, 죽음이 인생의 종착역으로 여기는 문화에서 탈출구를 찾지 못한 채 무료하게 산다. 잭은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 그 길을 잃었다. 잭은 허황된 세계를 자신의 주위에 세우고 진리로부터 자신을 감춘다. 영화에서 잭은 휴스턴의 성공한 건축가이지만, 영적으로 파산지경에 도달했다.

 

그의 영혼은 삭막한 도시 안에서 정착하지 못해 떠돌아다니며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이기적인 사람들과 점점 소외되고, 영혼이 없는 고층건물 안에서 일벌레로 살아간다. 영화는 우주창조에서 다시 잭의 탄생으로 넘어간다. 잭은 다음과 같은 속삭임을 듣는다.

“당신은 내게 그녀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은 하늘과 나무를 통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알기도 전에 나는 당신을 사랑하였고 믿었습니다. 당신이 언제 처음으로 내 마음 속에 오셨나요?”

 

영화는 1950년대 순진함을 차츰 잃게 되는 십대 시절의 잭을 보여준다. 잭은 어린 시절 헌신적으로 보살피는 어머니의 사랑으로 에덴동산과 같은 가정에서 살다가 점차로 세상의 현실을 조금씩 알아간다.

영화의 한 장면에서 잭은 어렸을 때 동네 연못에서 수영을 하다 물에 빠져 거의 죽을 뻔한 소년에 대한 기억으로 죽음에 집착하게 된다.

 

그는 신에게 “당신, 어디에 계십니까? 소년을 죽게 놔두다니. 아무 일이나 생겨도 당신은 상관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선하지 않은데, 내가 선해야만 합니까?”라고 묻는다. 인생의 불확실성은 동생의 죽음으로 극단으로 치닫는다. 동생이 19살 때 베트남 전쟁에서 죽었는지 혹은 자살했는지 영화에서는 알 수 없으나, 잭은 더 이상이 순진할 수 없게 되었다.

 

에덴동산을 표현하기 위해, 말릭 감독은 카메라를 어린아이 눈높이에 맞추어 세상을 보여준다. 카메라는 아이들을 따라다니며, 아이들이 보고 느끼는 세상을 보여준다. 특히 잭은 가족과 친구들과 함께 마당을 뛰어 돌아다니고 더운 여름날 호스에서 물을 받아 마시고 식탁 위에서는 엄격한 아버지(브래드 피트)앞에서 식탁예의를 지키려 노력하고 개구리를 죽이고는 죄책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잭은 사실 ‘우리 모두’의 이미지다.

 

잭의 가정에는 두 개의 서로 다른 세계가 존재한다. 직관적이고 아름다운 엄마의 세계와 세속적이고 실용적인 아빠의 세계다. 엄마 오브리언 부인의 속삭임을 통해 이원론적인 세계를 소개한다. 삶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자연의 길’과 ‘은총의 길’.

 

“당신은 하나를 택해야 한다.

‘은총’은 스스로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무시당하고, 잊혀지고, 미움을 말없이 당한다. 심지어는 모욕과 상처를 입기도 한다.

그러나 ‘자연’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애쓴다. 외부가 자신에게 기쁨을 주기를 바란다.

다른 이들의 주인 노릇을 하고 싶어 한다. 많이 소유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햇빛이 세상을 밝혀도 행복하지 않은 이유를 찾는다. 사랑은 모든것에 미소 짓는다.”

 

이 글은 아마도 말릭 감독이 14세기 독일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태어나 수도자의 영적 수업의 책으로 널리 읽히는 <그리스도를 본받아>(1441년)를 저술한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a Kempis)에서 그 아이디어를 따온 것 같다.

 

“자연은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 노동하고 다른 존재로부터 무슨 이익을 찾을 수 있을까 궁리한다. 그러나 은총은 자신에게 유용하고 편한 것을 구하지 않고 많은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추구한다. 더욱이 자연은 욕심이 많고 주기보다는 받기를 좋아하며 자신의 것을 더 사랑한다. 한편 은총은 친절하며 너그럽고 이기적이지 않으며 적은 것에 만족하고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복이 있다고 믿는다.”

 

‘은총의 삶’으로 ‘자연의 길’을 극복

 

오브리언 부인은 은총을 상징한다. 그녀는 친절하고, 너그럽고, 헌신적이며 항상 용서하고 사랑을 주는 존재다. 그녀는 유대-그리스도교의 이상적인 여인이자 어머니이다. 겸손하고, 남을 돌보며, 헌신적이고 사랑이 넘친다. 그녀는 간단명료하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순진한 말만 한다.

“행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서로 돕고 용서하십시오.”

 

아버지 모브리언 씨는 어머니와 정반대다. 아버지는 자연을 상징한다. 그는 엄하고, 야망이 넘치며, 경쟁적이고 용서하지 않으며 이기적이며 속물이다. 그는 아이들에게 자신을 ‘아빠’가 아닌 ‘아버지’라고 부르라고 요구한다. 그는 자녀들을 세상에 나가 살아남을 수 있도록 준비시키며 말한다.

 

“엄마는 순진해. 너희들이 성공하고 싶으면, 너무 착하게 행동하지마. 정신 차려.”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상, 즉 ‘자연’과 ‘은총’이 잭의 마음에서 갈등한다. 그는 다음과 같이 중얼거린다.

“아빠와 엄마 모두가 내 안에서 씨름하고 있어. 그리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

잭의 내적인 갈등은 어머니의 사랑이 아니라, 자신만만하던 아버지가 점점 무너지는 모습을 보고 해결되기 시작한다.

 

아버지 오브리언은 사업이 실패하자 자신감이 없어지고 감정적으로 약해져 인생에 있어 정말 중요한 것은 가족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처음으로 잭에게 용서를 빌고 “가정을 당연하게 여기고 무시했으며 가정이 가져다주는 영광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라고 고백한다.

 

잭이 아버지의 팔에 처음으로 안긴다. 그 순간 빛이 그의 영혼에 스며들어 혼돈을 걷어내기 시작한다. 그 빛은 바로 우주가 창조될 때, 그 빅뱅을 가능하게 한 바로 그 빛이다. 잭은 아버지를 껴안고 사랑하고 사랑 받는 법을 배운다. 용서는 현실을 해쳐나가는 열쇠가 되었다. 잭은 이제 사랑이 모든 악과 슬픔을 극복할 수 있는 처방전인 것을 깨닫는다. 그는 이제 모든 나무와 잎새, 돌, 태양빛을 사랑할 것이다. 이것이 잃어버렸던 에덴동산으로 가는 길이다.

 

그 길은 우리를 영원한 세계로 인도한다. 어른이 된 잭은 아버지를 용서하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수용한다. 그 영원한 세계로 가기 위해 또다시 흉흉한 바다를 배를 타고 건너야 할지 모르지만, 자신과 가족 그리고 삶에 대한 어렴풋하지만 그 ‘지식’을 얻게 된 것이다.

 

인간은 우주의 한 점에서 한순간을 사는 존재

 

인간의 삶은 ‘무지’라는 불확실성을 대면해야 한다. 그 ‘무지’의 일부가 바로 ‘죽음’이라는 현실이다. 우리가 그것을 다 알 수 없기 때문에 ‘신비’라고 부른다. 인간은 자신들이 모든 것을 조절하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우리는 시공간적으로 지극히 순간적인 삶을 산다. 인간의 삶은 죽음과 고통뿐만 아니라 생(生)과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

 

어른이 된 잭은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영화의 맨 처음에 나왔던 그 문을 다시 통과한다. 그는 인간의 유한한 삶 가운데서 어머니가 남겨준 ‘은총’을 통해 자신을 괴롭혔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그 고통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이제 영원한 세계로 가는 ‘인생항해’를 시작하려고 한다.

 

욥은 야훼신이 보여준 우주와 대자연의 신비를 보면서 자신의 삶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되었다.

욥은 말한다.

“야훼께서는 못하시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이제 저는 알았습니다. 주님의 계획은 어김없이 이루어진다는 것도 저는 깨달았습니다. 저는 사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감히 야훼의 뜻을 흐려 놓으려 한 자가 바로 저입니다. 깨닫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였습니다. 제가 알기에는, 너무나 신기한 일들이었습니다.”

 

욥은 야훼신이 인정하는 동방의 의인이었지만, 자신의 미천한 지식으로 삼라만상을 이해할 수 있다고 떠든 것이 바로 잘못이라는 점을 깨닫는다. 욥은 기껏해야 우주의 한 점에서 한 순간을 사는 존재라는 것을 절실히 인식한다. 욥은 이렇게 고백한다.

“야훼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지금까지는 제가 귀로만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제가 제 눈으로 주님을 뵙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 주장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잿더미 위에 앉아서 회개합니다.”

 

욥은 과거에 야훼신에 대해 남들이 하는 말을 듣고 그 신을 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보는 모든 것들 즉 나무, 잎새, 태양빛, 생명이 신비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 주위를 돌아보자.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놀라움으로 가득한 신비로 가득 차 있다. 아침에 해가 왜 뜨는지, 하늘에서 눈이 왜 내려오는지, 인간은 어떻게 두발로 걷고 뛰는지, 2살 난 아이가 어떻게 말문이 트는지, 전혀 모른 사람들이 만나 어떻게 사랑에 빠지는지, 순간을 사는 인간들이 죽은 후엔 어디로 가는지… 삶은 경외로 가득 차 있다.

 

‘삶의 지혜’란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익숙한 것’을 ‘덜 익숙한 것’으로 보는 시각이며 또한 ‘덜 익숙한 것들’을 ‘익숙하게 만드는 노력’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