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배철현

배철현의 성서 오디세이-신12

rainbow3 2019. 10. 11. 23:55


배철현의 성서 오디세이- 신의 위대한 질문⑫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아모스 7장 8절)

 

배철현 서울대 인문대학 종교학과와 서아시아언어문명학과 교수

 

사회정의를 실현하지 않는 사람들의 예배는 가짜… ‘고아와 과부와 외국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그 사회의 도덕적 기초다

 

 

히브리인들은 끝없이 펼쳐진 사막을 건너 새로운 정착지를 찾아야 하는 운명이었다. 그들의 운명은 이 세상 모든 약자들의 입장과 처지를 대변하는 상징이다. 

 

“너는 다른 사람의 시각으로 사물을 보기 전에, 네가 마치 그 사람의 살갗 밑으로 들어가 그와 함께 살기 전에 그를 정말 이해할 수 없다.”

 

이 말은 하퍼 리(1926)의 소설 <앵무새 죽이기>에서 강직한 변호사인 아티커스 핀치가 그의 딸 스카우트에게 한 말이다. 우리는 사건이나 사람을 볼 때 우리가 가진 경험의 지식, 즉 편견 안에서 판단한다.

<앵무새 죽이기>는 미국의 대공황시절에 앨라배마주 메이콤이란 시골 동네에서 일어난 일이다.

 

주인공인 6세 소녀 스카웃 핀치는 오빠 젬과 함께 인권 변호사 아버지 아티커스와 산다. 스카우트의 엄마는 세상을 떠났다. 스카웃과 젬은 매년 여름 메이콤에 있는 이모 집을 방문하는 딜이라는 소년과 친하게 지낸다. 이 어린아이들의 눈으로 미국의 가장 첨예한 문제 중의 하나인 인종과 ‘정의’의 문제를 다룬 소설이다.

 

세 아이에겐 신비한 존재가 하나 있다. 집 건너편에 사는 부 래들리라는 이웃은 세상과 단절한 채 은둔하는 사람이다. 아이들은 그가 두려운 존재이긴 하나, 그가 누구인지 궁금해 한다. 메이컴 주민들도 그에 대해 말하기를 기피하고, 그를 본 사람은 거의 없다.

 

아티커스는 메이엘라 어웰이란 젊은 백인여성을 강간하려 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톰 로빈슨이라는 이름의 흑인을 위한 국선 변호인으로 임명된다. 인종주의 편견으로 오염된 메이콤 주민들은 아티커스를 혐오하게 되고, 그 도시 아이들은 스카우트와 젬을 ‘니거 러버’, 즉 ‘깜둥이 애인’라고 괴롭힌다. 스카웃은 아버지의 용기를 존경한다. 한번은 스카웃이 아티커스가 메이콤 사람들이 톰 로빈슨에게 집단적으로 폭력을 행사하려는 것을 막으면서 곤경에 처한 장면을 목격한다.

 

‘정의’ 란 상대방의 입장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것

 

위험에 빠진 아버지를 본능적으로 구하고자, 스카웃은 아버지와 성난 군중들 사이에 섰다. 어린 소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지만, 군중 속에서 학교 친구 커닝햄의 아버지를 발견한다. 스카웃은 커닝햄 아저씨에게 “당신이 죽는다면, 집에 있는 커닝햄은 어떻게 살겠어요? 톰 로빈슨도 가족이 있습니다. 그의 가족이 아버지가 죽으면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스카웃은 군중들이 자신의 아버지 아티커스의 입장, 그리고 톰 로빈슨의 입장에서 상황을 상상해볼 것을 요구한 것이다.

 

그러자 군중들은 아티커스도 톰 로빈슨도 해치기를 원치 않는다. ‘정의’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공자도 수제자 자공이 ‘인(仁)’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기소불욕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이라고 말한다. 이 말은 ‘자신이 바라지 않는 것을 남에게 행하지 말라’라는 뜻으로 논어 안연편에 나오는 말이다. 중국의 최고지도자로 등극한 시진핑의 신조이기도 한다.

 

아티커스는 톰 로빈슨의 재판이 아이들을 위험에 빠뜨릴 것이라고 생각하고 방청을 허락하지 않는다. 스카웃, 젬, 그리고 딜은 아버지 몰래 백인들을 위한 재판석에 들어가 전 과정을 지켜본다. 이 재판에서 아티커스는 고소인 메이엘라와 그녀의 아버지인 술주정뱅이 밥 이웰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특히 메이엘라를 성적으로 학대한 자는 톰 로빈슨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밥이었다.

 

배심원들은 메이엘라나 밥 이웰의 증언이 아니라, 톰 로빈슨이 흑인이기 때문에 기소하려 한 것이다. 톰 로빈슨은 자신이 메이엘라를 자주 도와준 이유는 그녀가 불쌍하기 때문이었다고 말한다. 이 말을 들은 배심원들은 아연실색한다. 흑인 남성이 백인 여성을 불쌍하게 생각한다는 말을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티커스는 톰 로빈슨의 무죄를 확신했지만, 배심원은 유죄를 선고한다.

 

아티커스는 항소하면 무죄를 선고받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로빈슨은 감옥에서 총알을 17발이나 맞고 살해된다. 교도소 경비들은 톰 로빈슨이 탈출을 기도했기 때문이라고 증언한다. 인간은 옳고 그름을 사실 여부와는 상관없이 자신의 편견이나 선입관을 기초로, 혹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판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심지어는 그런 이기심을 위해 정교한 공부로 무장한다. 한국의 인문학 열풍도 가만히 보면 남의 입장에서 자신을 바라보질 않고, 자아의 전시 혹은 자신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을 보면 슬프기 그지없다.

 

밥 이웰은 톰 로빈슨이 죽고 난 후, 자신의 성공에 흡족하고 그의 불행에 고소해 한다. 자신이 법정에서 창피를 당했다고 생각하여 복수를 시작한다. 그는 아티커스의 얼굴에 침을 뱉고 판사 테일러 집에 무단 침입하려 했고, 심지어는 톰 로빈슨의 미망인을 위협한다. 그는 이것으로 성이 차지 않자, 스카웃과 젬을 칼로 살해하려 한다. 밥은 그들이 학교 할로윈 축제 행렬에서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목격한다. 밥이 스카웃과 젬에게 칼을 휘두르는 과정에서 젬의 팔이 부러진다.

 

그러나 다행히도 어둠 속에서 누군가 나타나 그들을 밥으로부터 구해준다. 스카웃과 젬은 갑자기 나타난 자가 부 래들리란 사실을 알게 된다. 마을 보안관인 헥 테이트가 현장에 도착하고 밥 이웰을 발견했을 때는 그는 이미 죽은 상태였다. 보안관은 젬과 부가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밥 이웰이 자신의 칼에 넘어져 45분간 피를 흘리다 죽었다고 보고한다.

 

스카웃은 자신과 동생 젬의 목숨을 구해준 부를 생각해본다. 스카웃은 부의 현관 앞에서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아빠가 정말 옳았다. 언젠가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 보지 않고서는 그 사람을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하신 적이 있다. 래들리 아저씨네 집 현관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헌신하는 자가 약탈과 폭력의 대상되는 이율배반

 

이 소설에서 ‘앵무새’는 중요한 것을 상징한다. 하퍼 리가 책 제목 <앵무새 죽이기>라고 삼을 정도였으니. 앵무새는 젬과 스카웃이 반짝반짝 빛나는 공기총 사용법을 맨 처음 배울 때, 아버지 아티커스가 말한 내용에서 등장한다. 아티커스는 그들에게 쏘는 법을 가르치지 않고 한 가지 지켜야 할 사항을 말한다.

 

“나는 너희들이 뒷마당에서 차라리 깡통을 쐈으면 좋겠어. 너희들이 새들을 쫓아다닐 것을 알고 있지만. 너희가 명중시킬 수 있다면, 원하는 모든 파랑새들에게 총을 쏴 봐. 그러나 명심해야 할 것은 앵무새를 죽이는 일은 죄란 사실이야.”

아티커스의 말의 의미는 그의 이웃이며 스카웃의 롤모델인 모디 아킨슨의 말에서 찾을 수 있다.

 

그녀는 스카웃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앵무새들은 우리가 즐겁도록 음악을 만드는 일만 해. 앵무새는 사람들 정원을 망치지 않고 옥수수 창고에 둥지도 만들지 않아. 앵무새는 우리를 위해 마음을 열어 노래만 하지. 그러기 때문에 앵무새를 죽이는 일은 죄야.”

 

이 소설에서 앵무새는 톰 로빈슨이라는 흑인을 의미하기도 하도, 젬과 스카웃, 혹은 부 래들리를 의미하기도 한다. 혹은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그리고 경제적으로 중심으로부터 밀려난 약자를 의미한다. 한 사회가 기능하기 위해서는 이들의 노동력과 헌신이 필수적임에도 불구하고 쉽게 약탈과 폭력의 대상이 되는 집단들이다.

 

이들은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사회적인 장치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인류가 문명을 이루고 정착생활을 한 이후, 항상 착취의 대상이 되었다. 고대 근동지방에서는 이들을 ‘히브리인들’ 즉 정착할 곳이 없어 항상 나그네처럼 돌아다니는 떠돌이들이라고 불렀다.

 

‘히브리인’이란 용어는 고전 히브리어에서 유래했다. 히브리어 동사 ‘아바르’는 ‘광대한 지역이나 강을 건너가다’이다. 고대 근동사회에서 도시는 강주변이나 강줄기를 새로 만든 수로 근처에 건설한다. 대부분이 사막이기 때문에 그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의 이동은 끝없이 펼쳐진 사막이나 강을 건너야 한다. 고대사회에서 자신의 고향이나 도시를 떠나는 일은 죽음이다. 이렇게 자기가 속한 공동체를 떠나는 사람들을 히브리어로 ‘이브리’라 불렸다.

 

이 단어는 고대 그리스어로는 ‘Hebraios’, 그리고 라틴어로는 ‘Hebraeus’라고 번역되어, 후대에 영어 ‘Hebrew’가 되었다. 고대 전승에 의하면 노아의 아들 셈은 ‘에베르’ 자손들의 조상으로 후대 아브라함이 ‘히브리인’으로 불린다.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은 자신이 살던 우르 지방에서 떠나 시리아, 이집트, 그리고 다시 가나안에 정착한 전형적인 ‘히브리인’이다. 히브리인을 요즘 말로 바꾸면 ‘임시 외국인 노동자’ 혹은 ‘나그네’ 정도가 될 것이다. 대한민국에 와 있는 동남아 노동자들을 히브리어로 하면 바로 그들이 ‘히브리인’들이다.

 

이들의 이동이 본격적으로 이집트 고고학적인 자료들, 벽화나 기록에 등장하는 시기는 기원전 19세기경부터다. 고대 이집트 문헌에서는 이들은 ‘샤수(shasu)’라고 불렀는데, 고대 이집트어에서 그 의미는 ‘맨발로 이동하는 자’란 뜻이다. 기원전 13세기 파라오 메르넵타 석비에선 이들이 ‘이스라엘’이란 명칭으로 등장한다.

 

이 석비에 고대 이집트어로 ‘이스리이르 페케트 벤 페르테프(ysriar fk.t bn pr.t f)’, 즉 “이스라엘은 초토화되었고 그 자손은 더 이상 없다”라는 문장이 등장한다. 샤수는 모압, 에돔, 그리고 이스라엘 왕국지역 출신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다. 이집트어 문헌에 샤수 이외에 ‘하비루(Habiru)’라는 명칭이 등장한다. 기원전 13∼2세기에 아마르나 문헌에 등장한 이 용어도 히브리인들과 어원적으로 사회학적으로 연관이 있는 용어다.

 

히브리인들은 하퍼 리 소설 <앵무새 죽이기>에 등장하는 앵무새들이다. 대부분 고대 근동 도시의 소작농으로 있다가 왕이나 귀족들에게 세금을 바치지 못하자, 고향을 떠나 외국으로 도망한 자들을 이른다. 성서에서는 이들이 이집트에서 노동자들로 살다가 모세라는 지도자와 함께 탈출한 자들, ‘온갖 잡족’(히브리어, ‘에레브 라브’)이라고 표현한다. 이들은 이집트란 당시 최고의 문명국에서 하층민으로 살다가 이들을 변호하는 신이 있다는 모세의 말을 듣는다.

 

 

감람산에서 바라본 예루살렘. 아모스는 예루살렘에서 빈익빈부익부의 정의롭지 않은 사회의 타락상을 목격했다.

 

 

사회의 약자 위한 신을 유일신이라 불러야

 

그 신은 다른 나라들의 왕들이나 귀족들을 위한 신이 아니라, 히브리인들의 고통을 귀로 직접 들으며, 그들의 고생을 눈으로 직접 보는 신이다. 그 신의 이름은 ‘야훼’이며, 그는 ‘고아와 과부, 그리고 가난한 자’를 위한 신이다. 이들에게 ‘야훼신이 유일신’이란 표현은 다른 민족들이나 집단들이 믿는 신을 인정하지 않고 자신들의 신만을 유일한 신으로 섬기는 배타적인 신이 아니라, 사회의 약자를 위한 신이 유일하게 신이라 불려야 한다는 신앙관에서 출발한다.

 

<시편> 68편에서 이스라엘의 신은 “고아의 아버지, 과부를 돕는 재판관”으로 표현한다. 특히 <시편> 82편에서 이스라엘 신이 법정에 나와 신들을 모아놓고 재판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다른 신들과는 달리 이스라엘 신만이 ‘고아와 과부를 변호해주고, 가련한 사람과 궁핍한 사람’을 돌보는 신으로 등장한다. 이들을 돌아보지 않는 신들은 거짓이며, 그 신들은 인간들처럼 죽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기원전 8세기에 등장한 아모스라는 예언자는 바로 그 사회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이 소외된 자들의 복지와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의’는 바로 이들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한다. 예언자 아모스는 기원전 793∼753년 사이에 북이스라엘에서는 여로보암 2세가, 남유다의 우찌아가 왕으로 다스릴 때 활동했다. 이 당시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은 전례 없는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었다.

 

아모스가 다른 예언자들과 다른 점은 그는 예언자가 아니라, 가난한 농부이자 목동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남유다의 도시 베들레헴에서 8㎞ 떨어진 테코아 출신이다. 그는 거친 광야에서 양떼를 몰고 다니며 남유다뿐만 아니라 북이스라엘의 초원에도 수없이 돌아다니며, 예루살렘이나 베델과 같은 대도시에서 발생하는 부익부빈익빈 현상을 현장에서 목격한다.

 

그는 별이 쏟아지는 사막에서 동료 인간들이 종교와 결탁한 왕족과 귀족에게 고통당하는 것을 보고 가슴 아파한다. 어떻게 하면 이들의 고통을 대변할 수 있을까? 그는 사막 한가운데서 신의 음성을 듣는다. 신은 아모스에게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와 그의 예언자들을 향해 심판과 저주의 말씀을 전하라는 미션을 준다.

 

신은 북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 2세가 국가의 번영이 신의 축복의 상징이라고 자화자찬하는 그 자만심을 꾸짖으라고 명령한다. 남유다의 무명인사인 아모스에게 북이스라엘로 가서 신의 경고를 전하라는 요구는 터무니없는 것처럼 보였다. 아모스는 깊은 묵상과 기도를 통해 자신과 같이 ‘히브리인들’을 위해 진리의 말을 선포하기 위해 북이스라엘 베델로 향한다.

 

고대 이스라엘의 경제구조는 ‘나할라’라는 특별한 체계를 통해 지탱된다. ‘나할라’는 보통 ‘유산’(遺産)이라고 번역되는 히브리어로 히브리인들이 가나안에 정착하여 이스라엘 공동체를 세운 후, 모든 부동산은 이스라엘의 12지파들로 배분되고, 다시 각 지파에 속한 친족들에게 나뉘고, 그리고 친족들 밑에 아버지를 중심으로 한 가족인 ‘베이트’에게 할당된다. 이 직계가족에게 속한 ‘나할라’는 양도 불가한 부동산이다.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의 땅을 청지기처럼 가꾼다. 이들은 야훼가 ‘나할라’의 주인이라고 생각했다. 토지는 몇몇 귀족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이들에게는 자신들이 사는 성문 앞에 모든 마을 주민이 참여하는 법정이 있었다. 이 법정은 사회의 약자들을 보호하는 장치로 주민이 선출한 10여 명의 원로가 그들의 고충을 직접 듣고 결정한다.

 

 

히브리대학 교정에서 예루살렘을 바라보는 희랍정교회 신부. 신앙의 조상 아브라함은 자신이 살던 우르 지방을 떠나 가나안에 정착한 전형적인 히브리인이다.

 

 

유대인 공동체 상류층의 도덕적 타락

 

 

 

 

아모스는 이 ‘나할라’ 제도가 왕족, 그리고 왕족과 결탁한 귀족들, 그리고 이들의 편의를 위해 존재하는 사제와 예언자를 위해 존재하고 ‘히브리인’은 가난과 곤경에 빠져있는 실정을 목격한다. ‘나할라’의 주도권은 모든 이스라엘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히브리인을 경제적으로 억압하는 몇몇 탐욕스러운 중앙 관리에게 넘어갔다.

 

이스라엘의 신은 그들이 이집트에서 종살이 할 때 선택했고, 이스라엘을 지탱하는 버팀목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배려와 사회정의였다. 자꾸 늘어가는 불의는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 그 기반 자체를 흔드는 정신적인 재난이었다.

 

아모스에게 신과의 계약은 본질적으로 동료 인간에 대한, 특히 사회 약자에 대한 배려와 직결돼 있다. 아니 그 약속은 약자에게 베푸는 관심과 선행으로 완성한다. 그는 유대의 모든 구성원들의 죄를 낱낱이 고발한다. 중산층, 정부, 왕, 권력기관, 그리고 종교인은 자신들의 성전 안에서만 신을 섬기는 척한 것이다.

 

아모스 4장은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의 부유한 여성들에 대한 예언이다.

 

사마리아 언덕에 사는 너희 바산의 암소들아, 이 말을 들어라.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빈궁한 사람들을 짓밟는 자들아, 저희 남편들에게 마실 술을 가져 오라고 조르는 자들아, 주 하나님이 당신의 거룩하심을 두고 맹세하신다. 두고 보아라. 너희에게 때가 온다.

사람들이 너희를 갈고리로 꿰어 끌고 갈 날, 너희 남은 사람들까지도 낚시로 꿰어 잡아갈 때가 온다.

너희는 무너진 성 틈으로 하나씩 끌려 나가서 하르몬에 내동댕이쳐질 것이다.”

 

불의와 도덕불감증을 신성모독으로 받아들인 아모스

 

아모스는 사마리아의 부유한 여성들을 ‘바산의 암소’라고 부른다. 바산은 실제로 요단강 건너편 곡창지대를 이른다. ‘바산의 암소’라는 명칭은 사실 비하하는 용어는 아니지만, 결국은 도살장에 끌려가 살해당하고 갈고리에 꿰어 매달릴 운명이다. 지금은 호의호식하며 즐겁게 사는 귀부인들처럼 행동하지만, 멀지 않아 그들은 비참한 운명을 맞이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아모스 6장은 북이스라엘뿐만 아니라 남유다 수도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다. 이들은 가난한 자들의 고통엔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안락한 삶을 즐기는 자들이다.

 

“너희는 망한다! 시온이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거기에서 사는 자들아,

사마리아의 요새만 믿고서 안심하고 사는 자들아, 이스라엘 가문이 의지하는 으뜸가는 나라, 이스라엘의 고귀한 지도자들아, 너희는 망한다!

상아 침상에 누우며 안락의자에서 기지개 켜며 양 떼에서 골라잡은 어린 양 요리를 먹고, 우리에서 송아지를 골라 잡아먹는 자들, 거문고 소리에 맞추어서 헛된 노래를 흥얼대며, 다윗이나 된 것처럼 악기들을 만들어 내는 자들, 대접으로 포도주를 퍼 마시며, 가장 좋은 향유를 몸에 바르면서도 요셉의 집이 망하는 것은 걱정도 하지 않는 자들, 이제는 그들이 맨 먼저 사로잡혀서 끌려갈 것이다. 마음껏 흥청대던 잔치는 끝장나고 말 것이다.”

 

최근 고고학자들은 사마리아에서 상아로 만든 각종 장식품과 가구를 발견했다. 상류층의 사치스러운 도덕 불감증, 탐욕, 탐닉은 사회의 불의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들은 기껏 한다는 말이, “초하루 축제가 언제 지나서, 우리가 곡식을 팔 수 있을까? 안식일이 언제 지나서, 우리가 밀을 낼 수 있을까? 되는 줄이고, 추는 늘이면서, 가짜 저울로 속이자.”

이들은 경제 교란범들이다. 속임을 통해 부를 축척한 자들이다. 이들은 인신매매도 서슴지 않고 행하는 자들로 헐값에 가난한 사람들을 사고, 신 한 켤레 값으로 빈궁한 사람들을 매매하는 자들이다.

 

신이 비난하는 범죄는 우리가 아는 살인, 강간, 혹은 폭력 등이 아니다. 이 범죄들이 분명히 사회의 도덕을 현저하게 파괴하는 중대 범죄이지만, 아모스는 모든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여 항상 발견되는 사회에 만연한 죄를 지적한다. 이 죄는 잘 드러나지 않고 특히 가진 자의 자발적인 노력과 행위를 통해 견제되는 것이다. 이러한 범죄들은 나라 전체를 멸망시킬 정도로 신을 화나게 하는 범죄이다.

 

우리가 주위에서 항상 보는 뇌물 주기, 속이거나 끼워 팔기, 가난한 자 학대하기, 그리고 채무자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이다. 특히 부도덕한 마음과 행동은 사회전체를 위험에 빠뜨린다.

아모스는 도덕은 제의나 종교적 의무처럼 중요한 사항으로 부각되지 않으나, 도덕성이 신앙심보다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야훼신에게 예배드리기 위한 전제조건은 도덕성의 확보다.

 

<아모스> 5장 21∼24절은 도덕성이 결여된 위선적인 종교인들을 비판한다.

 

“나는, 너희가 벌이는 절기 행사들이 싫다. 역겹다. 너희가 성회로 모여도 도무지 기쁘지 않다.

너희가 나에게 번제물이나 곡식제물을 바친다 해도, 내가 그 제물을 받지 않겠다.

너희가 화목제로 바치는 살진 짐승도 거들떠보지 않겠다. 시끄러운 너의 노랫소리를 나의 앞에서 집어치워라! 너의 거문고 소리도 나는 듣지 않겠다.”

 

야훼신은 아무리 사람들이 모여 성대한 예배를 드리고, 값진 예물도 드리고, 오케스트라를 동원한 연주와 찬양을 드려도 받지 않겠다고 선포한다. 그는 그런 위선적인 예배가 역겹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사회정의를 실현하지 않는 사람들의 예배는 가짜다.

 

아모스에게 불의와 도덕불감증은 신성모독이다. 야훼신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계약의무를 이행할 때 유지된다. 그 의무가 바로 사회정의다. 사회정의를 행하지 않는 이들이 드리는 의례나 예배는 웃음거리다.

사실 예배라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복을 내리고자 하는 은총이지 신에게 필요한 제도가 아니다. 인간은 의례를 통해 신의 존재를 자신의 공동체에 확인시키고 자신들이 잘못한 행위에 대해 용서를 빈다.

 

이스라엘인들은 점점 자신들이 신에게 많은 제물을 바치면서 호의를 베푼다고 생각하기 시작했고 자신들이 어떻게 행동하든, 형식적인 의례만 화려하게 치르면 된다고 생각했다. 성대한 의례도 가만히 생각해보면 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이 신이 그들 편이라는 정신적인 쾌감을 누리기 위한 장치다.

 

아모스는 도덕성을 가장 중요한 절대적인 종교적 가치로 해석했다. 신의 본질은 그의 도덕적인 본성이다. 동료인간에게 의롭고 자애로운 자는, 그 자신이 의롭고 자애로운 자가 된다. 자신과 동료인간에게 도덕적인 자는 그 자신 안에 신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가 된다.

 

아모스는 영적인 눈을 통해 신이 보여주는 새로운 세계를 본다. 아모스는 환상 중에 신이 재앙에 쓰실 메뚜기 떼를 만들어 땅 위의 푸른 풀 모두를 먹어버리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러자 아모스는 신에게 간청한다.

“주 하나님, 용서하여 주십시오! 야곱이 어떻게 견디어낼 수 있겠습니까? 그는 너무 어립니다.”

 

그러자 신이 메뚜기 떼를 통한 심판을 돌이키신다. 아모스의 두 번째 환상은 가뭄에 관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심각한 가뭄으로 지하수와 농경지가 말라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된다.

그러자 이번에도 아모스는 신에게 간청한다. “주 하나님, 그쳐주십시오! 야곱이 어떻게 견디어낼 수 있겠습니까? 그는 너무 어립니다.” 그러자 이번에도 신은 자신의 뜻을 거두셨다.

 

아모스는 세 번째 환상을 본다. 이번엔 성벽 곁에 야훼신이 서 계시는데 손에는 다림줄이 들려 있었다.

그러자 야훼께서 “아모스야, 네가 무엇을 보느냐?” 하고 물으셨다.

내가 대답하기를 “다림줄입니다” 하니, 주께서 선언하신다.

 

“내가 나의 백성 이스라엘의 한가운데, 다림줄을 드리워놓겠다. 내가 이스라엘을 다시는 용서하지 않겠다.

이삭의 산당들은 황폐해지고 이스라엘의 성소들은 파괴될 것이다. 내가 칼을 들고 일어나서 여로보암의 나라를 치겠다.”

 

 

1 이라크 니므릇 왕궁에 들어서는 왕의 전용통로에 세워진 2.5m 높이의 릴리프. 앗시리아 왕의 차림을 한 신인이 보인다. 타락한 북이스라엘 왕국은 앗시리아 제국에 의해 멸망한다.

2 구약의 세계에서는 예루살렘 성전만을 기도의 중심처로 생각했다. 그러나 B.C. 6세기 바빌론으로 잡혀간 유대인들은 옛 율법을 지키고자 모세5경을 읽고 토론하기 시작했다. 바로 이런 공부장소가 회당(시나고그)의 시작이었다.

 

 

사회적 강자 편에 선 이스라엘 성직자의 타락

 

다림줄은 건물을 지을 때 건축사가 그 건물이 수직이 되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무게추를 실에 달은 건축용구이다. 야훼가 다림줄을 들고 모든 사람들을 공평하게 심판한다. 아모스는 야훼가 메뚜기 떼나 가뭄으로 심판하려 했을 때에는 그를 설득하여 그런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했지만, 다림줄로 심판하겠다는 야훼는 막지 않는다.

 

건물에 다림줄을 대면, 그 건물이 수직인지 아니면 기울어졌는지 판단하는 것처럼, 야훼가 다림줄을 대기 전까지는 사람들에게 반듯한 건물로 보이는 착시현상을 바로잡으려 한다. 아모스는 그럴듯하게 포장하여 신이 원하는 바를 행동으로 옮기고 있다는 이스라엘 상류층의 종교행위에 심판을 내린다.

 

이스라엘 사회가 도덕적 불감증과 불의의 늪에 빠진 가장 큰 이유는 종교인이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은 사회의 강자 편에 서서 자신의 세속적 이윤만 바라는 속물이 되었기 때문이다.

북이스라엘에 가장 큰 성전이 있는 도시는 베델이었다. 과거 신앙의 조상 야곱이 사막 가운데 신을 만나 ‘사다리 꿈’을 꾼 후, 이곳을 ‘베델’ 즉 ‘신이 계신 집’이 되었다. 베델은 원래 특정한 장소가 아니라, 신을 간절히 만나려고 사람에게 신이 자신을 드러내는 그 어느 장소라도 잠정적으로 ‘베델’이다.

 

북이스라엘 사람들은 남유다의 예루살렘과 맞먹는 웅장한 성소를 베델에 지었다. 이들은 신이 그 웅장한 성소 안에만 계신다고 확신하고 이스라엘인들을 성전으로 불러 모아 헌금을 징수하기에 급급했다. 베델의 대제사장인 아마샤가 골칫거리 아모스에 대해 여로보암 2세에게 보고한다.

 

“아모스라는 남유대 출신 가난한 농부가 있는데, 자신의 나라도 아닌 북이스라엘로 잠입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라고 왕에게 보고한 후, 아모스를 찾아간다. 그가 아모스에게 말한다.

 

“선견자야, 사라져라! 네 고향 유다 땅으로 돌아가 거기에서나 예언을 하면서, 밥을 빌어먹어라. 다시는 베델에 나타나서 예언을 하지 말아라. 이곳은 임금님의 성소요, 왕실이다.”

 

도덕적 기초와 희망은 ‘어머니의 마음’에서 출발

 

여기서 아마샤는 아모스를 ‘선견자’로 부른다. 이 용어는 히브리어로 ‘호째’인데, 그 기본적인 의미는 ‘세상을 상식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자’란 의미다. 새로운 시대에 요구된 예언자는 더 이상 환상을 보고 가난한 자들에게 형이상학적이며 삶과 유리된 말을 고상하게 포장하여 헌금을 걷어가는 자가 아니다.

 

아마샤는 아모스에게 고향으로 돌아가 그런 종교 노릇을 하며 밥을 빌어먹으라고 종용한다. 그는 베델이 왕이 계신 곳이기 때문에, 절대권력 왕에게 거스르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이 구절에서 당시 북이스라엘 종교의 타락상을 볼 수 있다. 종교는 돈을 밝히는 세속 직업이 되었고, 종교는 정치와 유착되어 그 시녀 노릇을 하고 있었다.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한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집짐승을 먹이며, 돌무화과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러나 주께서 나를 양 떼를 몰던 곳에서 붙잡아내셔서,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로 가서 예언하라고 명하셨다.”

아모스는 자신이 흔히 종교인이라고 불리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로 훈련을 받기 위해 문하생 노릇을 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요즘 말로 하면 신학교에 다닌 적이 없다는 말이다. 자신을 사막에서 어렵게 집짐승, 즉 양과 염소를 치는 사람이며, 사막에서 자라는 돌무화과 나무를 다듬는 보통사람이라고 소개한다.

자신이 양떼를 몰던 중, 야훼께서 아모스를 소명하여 예언하라고 명하셨다. 기성종교가 타락하니, 왕실에서 신학교를 세워 종교인들을 대량생산하니, 야훼는 예언자를 농부나 목동 가운데 선택하신 것이다.

 

아모스는 아마샤에게 비극적인 미래를 선포한다.

 

“너희들 아내는 이 도성에서 창녀가 되고, 네 아들 딸은 칼에 찔려 죽고, 네 땅은 남들이 측량하여 나눠 차지하고, 너는 사로잡혀간 그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꼼짝없이 사로잡혀 제가 살던 땅에서 떠날 것이다.”

 

아모스는 앞으로 다가올 민족의 대수난을 직감하고 있었다. 실제로 기원 후 722년에는 북이스라엘이 앗시리아 제국에 의해 멸망하고 기원전 586년에는 남유다가 바빌론제국에 의해 멸망한다.

이 두 제국의 정복정책은 ‘정복-추방’이라는 공식으로 진행한다. 이들은 나라를 잃고 2500년 동안 디아스포라로 다시 떠돌이 생활을 해야 할 다가오는 급박한 위기 상황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히브리어와 아랍어에 등장한 ‘자비’라는 의미를 지닌 ‘레헴’은 본래는 ‘(어머니의) 자궁’이란 의미다. 어머니가 자식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사랑인 ‘레헴’이 위대한 점이, 어머니는 항상 아이의 눈으로 상황을 파악하여 일을 처리하기 때문이다. 아무런 힘이 없는 아이가 바로 하퍼 리의 ‘앵무새’이다.

 

바로 이 아이를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히브리인’이라고 명명했고, 기원전 10세기 이스라엘이란 국가를 건립한 후엔 사회의 약자들, 즉 ‘고아와 과부와 외국인’들이다. ‘정의’는 이들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는 촉구다.

아무런 힘이 없지만 그 사회의 도덕적 기초와 희망은 바로 이들을 돌보는 어머니의 마음, ‘자비’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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規矩<규구>

 

“도끼를 잘 갈아야 장작을 팰 수 있다(磨好了斧子才能劈開柴).”

 

리커창(李克强) 중국 총리가 최근 한 말이다. 이 말에 ‘성장의 도끼(增長之斧)’ 논쟁이 뜨겁다. 도끼는 도구다. 성장 환경을 잘 갖추자는 취지다.

 

도구는 무릇 네 가지가 기본이다.

원을 그리는 컴퍼스 규(規), 사각형을 그리는 곱자인 구(矩), 수평(水平)으로 평평함을 재는 준(準), 길이를 재는 줄인 승(繩)이다. 이 넷을 합한 규구준승(規矩準繩)은 목수의 필수품에서 나아가 생활의 규범으로 통했다.


 

그중 규구(規矩)는 통치의 상징이었다. 중국 고대 벽화에서 보이듯 창조신 복희(伏羲)와 여와(女媧)가 손에 들었던 것이 규구였다. 법이란 의미다.

 

한비자(韓非子)는 법치를 강조했다.

“저울대에 걸어야 균형을 알 수 있고 컴퍼스를 갖춰야 원을 알 수 있다. 이것이 완벽한 길(夫懸衡而知平 設規而知圓 萬全之道也)”이라며 “컴퍼스를 버리고 기교에 맡기고, 법을 버리고 지혜에 맡기는 것은 혹되고 혼란으로 가는 길(釋規而任巧, 釋法而任智, 惑亂之道也)”이라고 ‘식사(飾邪)’편에서 말했다.

 

반대론도 나왔다. 

구당서(舊唐書)  열전 가운데 정치가 육지(陸贄·754~805) 편에서다.

“무릇 중하에도 성쇠가 있고 오랑캐에게는 강약이 있다. 일의 기미에는 이로움과 해로움이 있고 일처리에는 안전과 위험이 있다. 따라서 틀림없는 규칙은 없고, 오랜 기간 옳기만 한 법 또한 없다

(夫中夏有盛衰, 夷狄有强弱, 事機有利害, 措置有安危, 故無必定之規, 亦無長勝之法).”

 

여시구진(與時俱進)이라 했다. 영원한 법규는 없다는 말이다.

규가 무뎌지면 누규(陋規)가 된다. 악습을 말한다. 목수의 동반자가 훼방꾼이 되는 건 순간이다. 철 지난 규제를 치워야 하는 이유다.

 

약법삼장(約法三章)이라 했다. 살인·상해·도둑만 금한 법치의 이상(理想)이자 유방(劉邦)이 항우(項羽)를 물리친 비결이다. 중국이 행정 간소화, 규제 철폐를 뜻하는 간정방권(簡政放權)에 나섰다. 지난해 416건의 규제를 없앴다. 올해 200건 철폐를 약속했다.

 

한국 역시 나쁜 규제 철폐에 나섰다. 이른바 창조경제를 위함이다. 단, 바른 법규조차 허수아비로 만들려는 몰염치범(沒廉恥犯)을 엄벌로 다스림은 잊어선 안 될 터다.

 

신경진 중국연구소 연구원

 

/ 중앙SUN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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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어느 영화가 나왔을 때 한국판 "앵무새 죽이기"라고 하던 생각이난다. 웃어야하나?

위대한 지도자의 '성지'도 만들어 순례하게 하고 신격화는 왜 안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