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배철현

배철현의 성서 오디세이-신10

rainbow3 2019. 10. 11. 11:17


배철현의 성서 오디세이-신의 위대한 질문⑩

 

인간아, 무엇이 선한 것인가?”(미가서 6장 8절)

 

배철현 서울대 인문대학 종교학과와 서아시아언어문명학과 교수

 

신이 인간에게 원하는 것은 ‘성공’이 아닌 ‘위대함’

… 정의·인애(仁愛)·겸손으로 약한 자에 대한 배려를 실천해야

 

 

예루살렘 구 도시 안에 있는 성벽. 예루살렘의 귀족과 사제들은 값비싼 제물을 바치며 신을 찬양하고 예배했지만 정작 신이 원했던 정의와 선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다

 

 

인간에게 ‘착함’이란 무엇인가? 인간 스스로 착할 수 있는가?

인간존재의 의미를 파격적으로 보여준 작품이 바로 알베르 카뮈의 장편소설 <이방인>이다. 주인공 뫼르소는 프랑스령 알제리에 사는 평범한 샐러리맨이다.

 

 

프랑스의 실존주의 작가 알베르 카뮈. 그의 작품 <이방인>에는 삶의 부조리 속에 부유하며, 삶의 진실을 끝내 발견하지 못하는 주인공 뫼르소가 그려진다.

 

 

뫼르소는 어머니 장례식을 치른 후 여자친구와 해수욕을 하며, 희극영화를 본 뒤 하룻밤을 같이 지낸다. 주인공은 사회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통념을 혐오한다. 뫼르소는 “어머니가 오늘 돌아가셨지. 아니, 어제인가. 확실하진 않다”라고 말한다. 희로애락 할 줄 모르는 인간!

 

자신의 삶에도 어떤 존재 의미가 없기에 주위사람에겐 더 관심이 없다. 인간은 모두 언젠가는 죽기 때문에 인생의 의미를 찾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자식으로서 애도의 감정을 보여야 하며, 장례식이 끝난 다음에는 어느정도의 근신 기간을 가져야 하지만, 그는 여자친구 마리의 눈치를 보아, 빈말로라도 사랑한다고 말해야 하고 직장에서는 승진하고 싶어한다는 시늉을 해 보여야 한다.

 

그는 레이몽이란 아파트 이웃이 포주라서 별로 친해지고 싶지않았다. 그러나 “그가 나보고 ‘우리 서클에 들어오라’고 묻자 ‘나는 그럴 수도 있다’”라고 말한 후 레이몽의 친구가 되고, 그 친구와 반목하고 있는 아랍인과 마주쳐 대치하다가 대낮의 사정없이 내리쬐는 태양 때문에 눈이 아물거려서 아랍인을 사살하게 된다. 체포된 뫼르소는 재판에 회부되어, 왜 죽였느냐는 재판관의 질문에 당치도 않게 “태양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판사는 사형을 선고한다.

 

뫼르소는 이 재판도 얼마나 부조리하고 우스꽝스런 것인가를 느끼고 사제가 권하는 속죄의 기도도 거절하고 자기는 과거에나 현재에나 행복하다고 느낀다. 그는 모든 기성의 가치와 습관에 무관심하며 인생에는 어떠한 의미도 없다고 생각한다. 카뮈에 의하면 인간이 가진 합리성과 세계의 불합리성은 부조리를 생산하지만, 대부분 인간의 ‘의식’은 졸고 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 부조리를 인식할 수가 없다.

 

대부분의 인간은 새해가 되어도, 생일이 지나가도, 그저 습관에 따라 기계적으로 일상생활의 쳇바퀴를 돌며, 인생의 뜻이 있는지 없는지 문제삼지 않는다. 과거는 순간이다. 아련한 수십 년의 기억들도 순간 안에서 존재한다. 지금부터 1년 후 오늘도 그 시점에서 생각해보면 순간이다. 뫼르소는 인생의 어떤 의미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삶이 허무하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다는 의미를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이런 자신만의 삶이란 굴레에서 무의미한 삶을 추구하는 전통을 기원전 3세기에 등장한 고대 그리스의 스토아철학에서 찾을 수 있다. 스토아철학에서 최고의 인간을 ‘호모 아파세티코스(homo apatheticus)’라고 정의했다. 즉 인간의 이성을 흔드는 감정과 충동은 인간의 행복을 해치는 일이기에 항상 금욕생활을 통해 평정심(아파테이아, apatheia)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대 이스라엘에는 스토아 철학과 정반대의 부류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남들, 특히 사회의 약자 편에 서서 그들의 삶을 자신와 일치시키고 강자들에 대항하여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는 자들이다. 기원전 10세기부터 고대 이스라엘에 등장한 이들은 예언자라 부른다.

 

‘예언자’는 ‘평정심’이 아니라 ‘신의 분노(iradei)’를 자신의 삶으로 투영시켜 자기가 살고 있는 공동체 문제를 자기의 문제로 여겨 주저하지 않고 토로하는 인간, 즉 ‘호모심파세티코스(homo sympathetikos)’다.

예언자는 점쟁이처럼 미리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오히려 공동체를 위해 신의 의지를 대신 말하는 ‘대변자(代辯者)’다. 예언자는 자신과 공동체를 위해 할 일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우주의 기운을 감지하고 인간에게 그 내용을 전달하는 매개자다.

 

 

BC 8세기 앗시리아의 건축자재 운반선 부조.

마가는 앗시리아가 유다제국을 침공한 BC 8세기 무렵 활동한 예언자다.

 

 

미가, 호모 심파세티코스(共感人間)의 전형

 

미가는 기원전 722년 앗시리아 제국의 산헤립왕이 북이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를 파괴하고 그 여세를 몰아 701년 남(南)유다를 공격하기 시작할 때 활동한 예언자이다.

 

구약성서 미가서는 “모레셋 사람 미가에게 임한 야훼신의 말씀 곧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한 묵시”라고 시작한다. 그 이름의 의미는 “누가 야훼와 같은가?”이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남서쪽으로 32㎞ 떨어진 모레셋이란 시골마을 출신이다. 이곳은 기원전 15세기부터 이집트가 세운 전략도시였다.

 

그는 기원전 737∼690년 거의 50년 동안 예루살렘에 거주하여 안주하는 정치인과 종교인들에 대한 비판과 예언을 주저하지 않았다.

 

미가는 예언자로 소명을 받아 설교하면서 사마리아(북 이스라엘)와 남유다가 멸망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특히 그는 남유다의 수도 예루살렘이 그 도시의 사회적 약자들로부터 탈취한 불법적인 돈으로 예루살렘 성전이 화려하게 장식되고 개축되는 것을 보고 신의 분노를 자신의 입을 통해 표출한다.

 

예루살렘 왕족과 귀족들, 그리고 사제들은 예루살렘에서 웅장한 성가대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의 값비싼 제물을 바치면서 신을 찬양하고 예배했다. 평상시 시장에서는 속임수로 공적인 일에서는 뇌물과 부패로 돈을 벌었다. 이들은 어떻게 돈을 벌든, 신에게 정성껏 제사만 잘 지내면 된다고 생각했다.

 

미가는 신이 원하는 것이 ‘예배’나 ‘제사’, 혹은 ‘기도’가 아니라고 말한다. ‘종교’는 무엇인가? 흔히 ‘종교’라 하면 특정 종교의 창시자가 있고, 그 창시자가 선포한 내용을 정리한 일정한 ‘경전(經典)’이 존재하며, 경전의 내용을 나름대로 정리해 핵심적인 사항을 ‘교리’라는 이름으로 고백한다. 그리고 특정한 날들을 정해 정기적으로 ‘경전’의 내용을 알리고 신을 찬양하며, 그 종교가 신봉하는 신을 경배하는 정교한 의례를 행한다. 이런 것들은 사실 부수적이다.

 

예배, 헌신, 경전, 교리가 신을 대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신을 묘사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상징·은유·기호를 사용하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이런 상징들이 신을 대치하게 되어, 정작 신이 원하는 것을 잊어버리게 된다. 인간은 자신이 경험한 신을 역사적이면서 구체적으로 묘사하기 마련이며, 자신과는 달리 묘사한 사람들을 판단할 기준을 만들어 ‘이단’이라고 폄하한다.

 

 

 

 

 

내 어머니가 고귀하면 이웃의 어머니도 고귀하다

 

개별 종교에서 말하는 신들이, 만일 그 종교만의 신이라면 가짜일 것이다. 신은 인간이 묘사할 수 없는 큰 분이기 때문이다. 한 알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고 움을 틔워 싹을 내고 커다란 나무로 자라는데, 인간을 그것을 객관적이며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이 하는 일은 그 과정을 우리의 경험적 지식의 한계 안에서 설명을 시도할 뿐, 어떻게 그 조그만 씨가 커다란 나무가 되는지, 풍성한 가지를 내어, 새들이 둥지를 트는지 상상할 뿐이다. 그래서 성인들이 등장하여 그 신비를 자신들의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 비춰 설득력 있게 설명한다. 이들은 깊은 자기성찰을 통해 그것을 깨닫고 자신의 행동을 통해 그 깨달음을 거침없이 선포한 자이다. 핍박과 죽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런 신은 누구나 만나고 싶고 닮고 싶은 삶의 모델이다. 신은 경전에서 어머니 혹은 아버지란 상징으로 설명된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어머니가 세상에서 한 분밖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내 어머니의 소중함과 유일성은 다른 사람들의 어머니도 소중하고 유일하다는 것을 이해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만일 내 어머니만 유일한 진리이고 상대방의 어머니는 가짜이며 거짓이라고 주장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은 없을 것이다. 내 어머니의 유일성은 내가 만나보지 못한 에스키모인의 어머니나, 아프리카 원주민의 어머니의 유일성을 이해하기 위한 렌즈이다.

 

한국의 진돗개는 자기 주인을 일생 동안 섬긴다고 한다. 그 주인이 무슨 옷을 입든, 어떤 변장을 하든 간에, 진돗개는 주인을 냄새로 안다. 주인이 어느 날 아랍복장을 한다고 해서 알아보지 못하는 진돗개가 있을까? 진돗개는 주인이 무슨 옷을 입든, 어떤 화장을 하든 상관없이 주인을 알아본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신이 섬기는 신이 역사의 변천에 따라 어떤 문화적인 옷을 입든, 그 주인을 알아볼 수 있다.

 

20세기 초에 등장한 종교근본주의는 자신의 종교만이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고 주장한다. 이 근본주의 종교는 마치 자기 어머니만 진짜이며 상대방의 어머니는 가짜라고 주장하는 사람과 같다. 내가 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지만, 내 어머니가 내게 위대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어머니도 그들에게 위대하다고 짐작하고 그들을 존경해야 한다. 만일 내 어머님만 “유일하며 진정한 어머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개만도 못한 존재가 된다.

 

미가는 당시 예루살렘에서 신을 경배하는 이스라엘인들을 이런 근본주의적 종교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신은 내가 지은 장소에 계시며, 내가 정한 시간에 예배드리면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신을 자신이 원하는 우상으로 만들어 정해진 시간과 장소 안에 감금시킨 채, 제 편의대로 섬긴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맛있는 송아지인 1년 된 송아지를 번제로 바치면 신이 좋아하리라고 생각한다. 혹은 값비싼 올리브기름을 바치면 신이 나의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착각한다. 1년 된 송아지나 올리브기름은 세상에서의 성공을 상징한다.

 

 

 

 

신은 우리가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바라는가? 세상에서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신이 버린 자들인가? 심지어는 자신이 생각하기에 신앙의 최고점이라 생각하여 자신의 아들을 번제로 바치려고 한다.

정말 신은 무엇을 원하시는가? 신이 원하는 것은 성공이 아니라 ‘위대함’이다.

 

그 위대함을 신은 ‘선’이라고 말한다. 신은 ‘인간아! 선한 것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한다.

인간은 누구인가?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을 두 발로 걷기 시작하여 허리를 펴고 ‘하늘을 응시하는 자’라는 의미로 ‘엔스로포스(Anthropos)’라고 불렀다.

 

고대 로마인들은 인간을 ‘호모’라고 불렀는데, 이는 인간이 바로 ‘후무스(흙)로부터 나온 존재’라는 의미다. 이 구절에서 ‘인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아담’이다. ‘인간’은 만세 전부터 ‘흙’이었다가 잠시 생명이 부여됨으로 순간의 삶을 살다가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존재라고 여겨, ‘아담’ 즉 ‘흙으로 만든 존재’라고 불렀다.

 

신이 원하는 것은 타인의 고통 공감하는 선(善)

 

‘아담’이란 명칭에는 삶의 덧없음에 대한 아쉬움이 스며있다. 기원전 6세기 소아시아 에베소 출신 헤라클리투스는 ‘판타 레이(panta rhei)’, 즉 “만물은 변한다”라는 세상을 설명하는 하나의 시선을 최초로 주장했다.

 

만물을 하나로 설명하는 방식, 이것이 철학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탄생과 소멸을 반복하듯 인간도 그 과정의 일부다. 하지만 인간은 그 과정을 인식하는 유일한 동물로, 흘러가 잡을 수 없는 세월을 의미 있고 아름답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왔다.

 

우리는 흙이었다. 우리 부모님도 잘 모르는 어떤 신비함으로 우리는 세상에 와서 영원히 살 것처럼 착각하다가 순간의 삶을 살다 흙으로 돌아간다.

인간은 죽는다는 사실을 아는 유일한 동물이면서도 영원히 살 것처럼 몇 가지에 목숨을 걸면서 산다.

 

첫째는 직업이다. 인간은 직업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려 한다. 내가 하는 일을 통해 돈을 벌고 가족의 생존을 보장하지만 정작 정년이 되어 자신이 하던 일을 그만두게 되면, 자아상실감에 빠져든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지속적으로 하는 일, 직업 이상으로 자신이 일생을 통해 반드시 이뤄야 할 삶의 목표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직업도 이 삶의 목표를 위해 존재하는 과정으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둘째는 명성이다. 다른 사람들이 평가하는 내가 곧 내 자신이라고 착각한다. 우리는 흔히 과거에 내가 이런 위대한 일을 했다고 자랑하며, 과거의 추억으로 존재한다. 과거는 오늘의 나를 위해 존재하는 영적이며 정신적인 여정이다. 오늘의 내가 그 여정의 목적지를 알지 못했을 때, 그는 길을 헤매고 만나는 사람에게 자신의 과거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고 자랑하다 일생을 마치게 된다.

 

셋째는 부(富)다. 내가 번 돈의 양이 내 인격이라고 착각한다. 필자는 2013년도 서울대 신입생 입학 전 오리엔테이션에서, 희망에 차 있는 신입생들에게 “여러분은 운이 좋은 사람들입니다”란 말로 강의를 시작했다. 이들은 각고의 노력으로 서울대에 입학한 우수한 인재이지만, 그 나이 인간으로 대한민국이란 최적의 환경에 태어난 것은 순전히 운(運)이다. 대부분의 동년배 친구는 교육환경이 열악한 아프리카 적도 지역 혹은 중앙아시아의 개발되지 않은 한 나라에서 태어나, 그 환경을 자신의 카르마로 생각하고 일생을 살아간다.

 

그들은 운 좋게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문명의 이기를 마음껏 누리고 최고의 교육을 제공받는 자들이다. 이런 행운에는 반드시 자신들보다 못한 환경에 태어난 자들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책임이 따른다. 인간에게 분명한 것은 그 어느 누구도 죽음을 피할 길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고대 히브리인들은 인간을 ‘아담’ 즉 ‘흙’이라 했다.

 

당시 이스라엘인들은 신을 예배하는 방법을 제사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마음대로 정한 장소에서 시간을 정해 놓고, 그곳에서 신에게 제사 의식을 행하는 것이 예배라고 생각한다.

고대 이스라엘인들은 1년 된 송아지를 완전 연소하여 그 향기를 신에게 바치곤 했다. 이런 제사의식을 히브리어로 ‘올라’라고 한다. ‘올라’라는 히브리어 단어는 ‘제물을 완전히 태워 그 연기가 올라감’을 의미한다.

 

영어로는 ‘홀로코스트(holocaust)’라고 하는데, 이 단어도 본래 의미는 ‘완전 연소’이며, 후대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의미하는 단어로도 사용되었다. 미가는 인간이 수많은 송아지나 숫양, 혹은 당시 가장 비싼 기름을 바친다 할지라도 신은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단언한다. 심지어는 자신의 잘못을 회개하면서, 자신의 자식을 죽여 신에게 드린다 해도 신은 기뻐하지 않으신다고 말한다.

 

 

상대방이 느끼기에 좋은 것이 선(善)이다

 

‘예배’는 일상생활이다. 히브리어 단어 중 가장 이해하기 힘든 단어 중 하나가 바로 ‘예배’를 의미하는 히브리 단어 ‘아보다’이다. 이 단어는 동시에 ‘노동, 직업’이란 의미도 지닌다. 우리에겐 전혀 다른 두 개의 개념, 즉 ‘신을 경배하고 예배하는 것’과 ‘직업으로 노동하거나 일상생활을 하는 것’이 고대 히브리인에게는 서로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개념이다. 그러니, ‘예배’는 바로 ‘노동’이며 ‘일상생활’이고 ‘예배’와 ‘노동’이 분리된다면 그것은 성서가 바라는 ‘예배’도 아니고 ‘노동’도 아니다.

 

영국 국왕 제임스 1세의 명령으로 50여 명의 성직자와 학자로 구성된 번역위원이 구약성서와 신약성서를 그 원전에서 영어로 직접 번역하여 1607∼1611년에 완성한 성서가 바로 ‘흠정역’이다. 학자들은 ‘아보다’란 히브리 단어의 다중적 의미를 감안하여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 단어를 고안해냈다. 그 단어가 바로 영어단어 ‘service’이다. 그래서 영어 단어 ‘service’는 ‘예배’이면서 ‘노동’을 뜻한다. 미가는 선을 다음 3가지로 정의한다.

 

고전 히브리어로 '선‘ 은 ‘토브’라고 부르며 창세기 1장에 이 단어가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창세기 1장 기록에 의하면 신이 삼라만상을 6일 만에 창조했다. 성서 저자는 하루가 지날 때마다 신은 자신이 창조한 우주를 보고 ‘좋았다’라고 했다고 기록한다. ‘좋았다’에 해당하는 단어가 바로 ‘토브’다. 창세기 1장에서 ‘토브’는 개별 천체들이 우주 전체와 조화를 이룬 모습을 묘사하는 단어다. ‘토브’는 독립적인 개념이 아니라,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고 그 역할을 충실하게 이행하는 개체에게 부여되는 특징이다.

 

‘토브’의 보다 본질적인 의미는 인간의 오감과 깊이 연관돼 있다. 인간의 오감으로 경험할 수 있는 최선을 이르는 단어이다. ‘토브’는 맛과 향기가 ‘달콤하며’ 보거나 듣기에 ‘즐거운’ 것이다. 최고 요리사가 만든 만찬이나 어머니가 손수 만들어주신 구수한 된장국의 향기나 맛을 ‘토브’라고 한다. 선‘ ’은 그것을 접하는 상대방이 느끼는 어떤 것이다. ‘토브’는 또한 위대한 성악가나 가수의 아름다운 목소리며 예술가의 조각이나 그림, 대자연의 장관을 형용하는 단어다.

 

다시 말하자면 “보기에 좋고, 듣기에 좋고, 냄새가 좋고, 맛이 좋고, 촉감이 좋은” 상태를 ‘토브’라 한다. 여기에서 ‘토브’는 전적으로 주체가 아닌 객체의 느낌에 달려 있다. 내가 생각하기 좋은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느끼기에 좋은 것이 바로 선이다. 그 기준은 절대적으로 상대방에 달려 있다. 신이 인간에게 원하는 것은 종교나 교리, 정교한 의례 행위가 아니라 한 종교인이 다른 종교를 믿는 사람들에게, 혹은 무신론자나 불가지론자에게 인간적으로 매력이 있는가의 여부다.

 

인격적으로 느낌이 좋은 사람이 바로 신이 원하는 종교인상이다. 현대사회에서 종교집단이 점점 매력이 없어지는 이유는, 그들이 누구도 맡고 싶지 않은 고약한 냄새를 풍기기 때문이다. 나비와 벌은 좋은 향기를 내뿜는 꽃에 아무리 멀더라도 날아오기 마련이다.

신은 가장 매력적인 향기를 잔잔하게 내뿜을 수 있는 세 가지 비밀을 알려주었다.

이 세 가지가 바로 ‘정의실천(正義實踐), 인애희구(仁愛希求), 그리고 겸손생활(謙遜生活)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그의 저서 <국가>에서 정의란 서로 갈등하는 인간이나 도시들 간의 조화로운 관계라고 말했다. 정의로운 사람은 자신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서 최선을 다하고 자신에게 요구된 일만큼 정확히 완성하는 자다. 미국 철학자 존 롤스는 진리가 사유 체계의 첫째 덕목인 것처럼 정의는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고 주장한다.

 

정의는 자비나 관용보다 근본적인 개념으로 종교에서는 신의 섭리나 심판 사상과 관련돼 있다. 정의는 우주의 원칙을 알고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다. 정의를 공정성과 연관시키는 시도는 역사적으로 드물 뿐만 아니라 현대 서구사회의 창작물이다. 그는 로크의 <사회계약론> 이후 정의가 공정성의 한 형태인 배분적 정의가 되어 그 본질을 흐렸다고 주장한다. 정의는 인간을 위한 최선이라 말한다.

 

‘과부·고아·이민자·가난한 자’에 대한 지속적인 돌봄

 

미가는 첫 원칙으로 “정의를 실천하라”라고 주문한다. 히브리어 원문 표현은 “아쇼트 미쉬파트”로 직역하자면 “정의 실천하기”이다. 정의라고 번역된 ‘미쉬파트’의 가장 기본적 의미는 ‘사람을 차별 없이 대하는 것’을 의미한다. 미쉬파트의 어원적인 의미는 ‘공평하게 판단하다, 재판하다’이다.

 

고대 이스라엘 법에서 미쉬 파트는 그 사람의 국적, 성별, 사회적 지위, 인종과는 상관없이 그 해당 사건만을 기초로 판단을 내리는 원칙을 지칭한다. 소극적 의미의 미쉬파트는 ‘무전유죄 유전무죄’가 아니라 잘못한 행위에 대해 그에 해당하는 동일한 처벌을 받는 것을 뜻한다.

 

미쉬파트는 잘못한 것에 대한 벌을 넘어 사람들에게 각각 자신에게 걸맞은 권리를 보장한다. 미쉬파트에는 ‘공평하게 판단하다’ 이외에 적극적인 사회정의적 의미도 포함한다. 성서에서 ‘미쉬파트’가 등장하는 모든 예에, 특정한 부류의 사람들이 그 대상으로 등장한다. 성서는 지속적으로 미쉬파트는 ‘과부, 고아, 이민자, 그리고 가난한 자’에 대한 지속적인 돌봄과 그들의 바람을 사회에 펼칠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을 포함한다.

 

근대 이전 농업사회에서, 아니 오늘날까지 이 네 부류의 사회집단은 소외계층으로 가뭄, 전쟁, 그리고 사회가 불안할 때, 가장 먼저 영향을 받는 취약계층이다. 오늘날 외국인 노동자, 노숙자, 한부모가정, 노인계층들이 포함된 기초생활자, 차상위계층이 미쉬파트의 대상이라 할 수 있다.

 

그 사회의 성숙도와 정의실현 정도는 그 사회가 이 계층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렸다. 이 계층에 대한 소홀이나 무관심은 자비의 부족이 아니라 신의 제1명령인 미쉬파트를 범하는 죄악이다. 신은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가장 취약한 계층을 사랑하고 돌보시며, 우리 모두에게 그것을 요구한다. 고대 이스라엘의 시인은 자신들의 신을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다”라고 소개한다.

 

이런 정의는 당시 고대사회에서 파격적이고 혁명적인 개념이었다. 고대사회에서 신은 그 사회의 엘리트, 즉 왕·귀족·사제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대사회에서는 이 지도자들을 부정하는 것이 곧 신을 부정하는 셈이었다. 그러나 고대 이스라엘의 신은 정반대로, 그 사회의 소위 잘나가고 힘있는 남성편이 아니라, ‘고아, 과부, 그리고 이방인’의 신으로 소개한다. 역사는 신이 이 소외계층이 점점 힘을 얻도록 돕는 과정이다. 이런 점에서 고대 이스라엘의 신은 당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신들과는 달랐다.

 

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악한 자의 집에는, 속여서 모은 보물이 있다. 가짜 되를 쓴 그들을, 내가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느냐? 틀리는 저울과 추로 속인 사람들을, 내가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느냐? 도성에 사는 부자들은 폭력배들이다. 백성들은 거짓말쟁이들이다. 그들의 혀는 속이는 말만한다.”

 

신은 고대 이스라엘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는 예배행위를 다 외면한다. 이스라엘의 신은 신앙심이 넘쳐 자신의 아들의 목숨을 신에게 바칠 만한 ‘신앙’을 역겹다고 말씀하신다.

신이 인간에게 원한 첫째 명령, 신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첫째 ‘선(善)’은 사회의 취약계층의 처지를 역지사지(易地思之)하여 그들을 차별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해결해주는 것이다.

 

그것이 신을 위한 가장 위대한 ‘예배행위’라고 주장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종교인과 마찬가지로 고대 이스라엘인들도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성대한 예배를 드리면서, 자신이 진정한 신앙인이라고 주장했다. 이 뻔뻔함에 신은 호통치고 있는 것이다. 평상시의 조그만 선행(善行)이 성전에서의 예배보다 중요하지 않은가?

 

어머니의 사랑이 신으로 도약하는 이타적 유전자

 

둘째로 신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인애를 간구하라”이다. 이 구절에 대한 히브리어 원문 “아하보쓰 헤세드”을 보면 그 의미를 좀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먼저 ‘희구하라’에 해당 단어는 ‘아하보쓰’인데 보편적으로 ‘사랑하다’라고 해석한다. 이 단어는 특히 ‘인간들 간의 사랑’ 즉 부부·자녀·친구들 간의 사랑과 우정 혹은 인간이 신에 대한 정성을 의미한다. ‘아하보쓰’는 인간적인 감정이 내포된 상대방에 대한 관심으로 ‘간구(懇求)’라고 번역할 수 있다.

 

그런 간구의 대상이 ‘헤세드’이다. ‘헤세드’는 보편적으로 ‘인애(仁愛)’라고 해석하는데 그 정확한 의미를 현대어로 표현하기는 힘들다. 영어로는 ‘steadfast love(변치 않는 사랑)’, ‘kindness(친절)’로 번역하여 그 본래 의미를 파악하기 어렵다. ‘헤세드’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하는 충성이나 사랑이 아니라,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베푸는 사랑으로 한자로 표현하자면 ‘총애(寵愛)’ 정도이다.

 

특히 신이 인간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응원하고 믿어주고 끝까지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리스어로는 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아가페’(agape)가 이에 해당한다. 신만이 인간을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할 수 있는 존재인데, 그런 사랑을 인간에게 요구한다. 그래서 신은 “신적인 사랑인 인애(仁愛)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행동으로 옮기려고 노력해라”라고 주문한다.

 

인간은 신적인 사랑을 어머니의 뱃속에서 나오면서 수년 동안 경험한 모성애를 통해 간접 경험한다. 새끼 원숭이는 출산 후 일정시간이 지나면 어미의 털을 잡고 젖을 먹는다. 그러나 인간의 경우는 다르다. 인간은 털이 없기 때문에, 어머니는 아기를 안고 수유한다. 아이가 어머니 삶의 중심이 되며, 어머니는 자기 자신을 온전히 잃어버리는 ‘무아(無我)’의 상태로 진입한다. 어머니가 아이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을 바로 ‘헤세드’라고 한다.

 

모든 인간의 생존은 바로 어머니의 헤세드를 통해 가능하게 되며, 어린아이는 어머니를 통해 전해 내려오는 ‘헤세드’가 인간을 신적인 존재로 도약하게 하는 이타적 유전자라는 사실을 서서히 배운다. 동서고금의 성인들, 철학자들, 그리고 혁신가들은 인간이 이기적인 유전자에도 불구하고 이타적인 유전자를 설파하고, 그것을 인류에게 감동적으로 전달하고 행동으로 옮긴 자들이다.

 

신은 우리에게 자기희생적인 사랑을 목표로 삼고 행동으로 옮기기를 힘써야 한다고 주문한다. 정의는 ‘실천’하지만, 자기희생적인 사랑인 헤세드는 ‘희구’하라는 명령이다. 신은 사회적 약자에게 관심을 가질 뿐만 아니라 그들을 위해 자신의 희생을 감수하며 그들을 위한 삶을 갈구해야 한다고 명령한다.

 

헤세드는 관심의 단계를 넘어선다. 헤세드를 베푸는 주체는 그것을 받는 주체와 일치해 상대방의 희로애락을 함께 느끼고 그것을 해결하려는 노력을 동반한다. 또한 그 노역이 강압적이지 않고 자신의 몸에서 자연스럽게 배어 나와 주체와 객체의 구분이 사라진다. 어머니가 아파하는 갓난아이의 고통을 자신도 느끼듯, 인간은 헤세드를 통해 나와 다른 사람들의 일상을 내 삶으로 인식한다. 신은 그런 삶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헤세드를 ‘희구, 간구’하라고 주문한다.

 

겸손하게 바라보면 인생은 놀랍고 신비하다

 

신이 요구하는 셋째 명령은 “너의 신과 함께 겸손히 생활하라!”이다. ‘겸손’이라 하면 자기비하적인 면과 동시에 자기 안에 숨겨진 위대함을 발견하는 시발점이다. 일찍이 노자는 도덕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강과 바다가 백 개의 계곡 물을 다스릴 수 있는 까닭은 강과 바다가 계곡 물보다 낮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이 강과 바다가 백 개의 계곡 물을 지배하여 왕이 될 수 있는 이유다. 이것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싶은 성인이 항상 말을 겸손하게 하여 자신을 낮추는 이유이기도 하다.”

 

노자는 성인이 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겸손을 언급한다.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도 겸손을 “자기 자신을 의존적이며 오염되었다고 여기지만, 능력이 있고 가치가 있는 이성적인 인간으로 (자신을) 생각하는 삶에 대한 태도”라고 정의한다. 칸트에게 겸손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덕인 셈이다.

 

신은 인간이 겸손하게 생활하기 위해 필요한 한 가지 조건을 제시한다. 그 겸손함은 ‘자신의 신’을 찾아 매일매일 일상생활을 할 때 발견되는 보화이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 짧은 인생을 살면서 지혜를 얻게 되면 삼라만상은 인간에게 알 수 없는 신비한 세상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소크라테스는 “내가 아는 사실은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밖에 없다”라고 말함으로 서양철학이 시작됐다. 그 의미는 아마도 대자연의 섭리와 인간 생명의 오묘함을 인간이 완벽하게 알 수 없고 그 지극한 일부만을 발견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작은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죽고 봄이면 싹을 틔워 줄기를 내고 시간이 지나면 커다란 나무가 되어 가지를 내고 새들이 둥지를 트는 보금자리가 된다. 어떤 과정과 생명력으로 그렇게 되는지 인간은 단순히 감탄할 뿐이다. 어찌 보면 인간이 이해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남녀가 만나 사랑을 나누고 그 씨가 자라나 인간의 모습이 되어 세상에 나오는 과정은 신비일 뿐이다. 인간이 의도하지도 않았고 아무리 과학이 발달한다 해도 지극한 일부를 관찰할 뿐이다. 그래서 고대 이스라엘의 현자는 “지식의 근본은 삼라만상에 대한 경외심이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여기서 ‘자신의 신’이란 삶의 존재 이유 같은 것이다. 대부분의 현대인은 자신을 잃어버리고 직업, 명성, 그리고 재산을 자신으로 착각한다. 늘그막에 이것들을 상실한 후 허무에 휩싸여 생을 마감한다. 혹은 남에 의해 강요된 신을 숭배하고 그 신에 대한 여러 의견을 ‘교리’라는 이름으로 신봉한다.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리며 그 종교가 자신을 구원해줄 것이라고 막연히 기대하고 일생을 정신 없이 살아간다. 신은 우리 모두에게 먼저 ‘자신만의 신’을 찾을 것을 요구한다. 그 신을 찾으려는 과정에서 우리는 각자의 신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신을 만나는 첩경이다. 그 신을 찾게 되면, 인간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종교와 이데올로기가 점점 우리의 삶을 풍요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피폐하게 만드는 이유는 우리가 각각 생각하기에 편리한 신을 우리가 정한 규칙대로 신봉하려 하기 때문이다. 신은 예언자 미가를 통해 신이 원하는 것은 그런 ‘종교행위’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신이 원하는 이상적인 삶은 ‘선함’이며, 그 선함은 우리 사회의 약자들에 대한 관심과 역지사지하려는 마음가짐과 행동(정의실천)이다. 그들의 희로애락을 우리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온전히 느끼고자 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약간 손해 보는 삶을 바라고(인애간구), 신을 발견하며, 놀라움과 신비함으로 가득한 인생을 겸손하게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