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배철현

배철현의 성서 오디세이-신11

rainbow3 2019. 10. 11. 17:30

배철현의 성서 오디세이 신의 위대한 질문⑪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이사야서 6장 8절)

 

 

우주 삼라만상을 움직이는 원초적인 힘은 ‘거룩함’

… 내면의 거룩함 찾아야 자기 극복의 위대한 길 보인다

 

 

가장 오래된 성서인 사해사본 중 이사야서의 복사본. 이사야는 기원 전 8세기 무렵부터 남유다 정치와 종교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다. 

 

소명(召命)이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다른 사람들의 일보다 특별하거나 훌륭하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만의 달란트와 소질, 그리고 능력을 통해 자신과 자신이 속한 사회에 최선을 이룰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소명은 자신의 기질과 재능이 그 사람의 열정과 합쳐져 발생한다. 성서에 등장한 인간은 모두 이 세상에 특별한 임무를 띠고 태어났다는 믿음에서 출발한다.

 

각자는 자신이 지닌 소질과 능력을 발견해야 하고, 그 소명을 위해 교육을 받고, 결혼을 하고 직업을 가진다. 이 소명의식은 나라를 이끄는 대통령이나 큰 기업의 회장뿐만 아니라 소규모 상인들과 일반인들로 자신에게 주어진 짧은 삶을 의미가 있고 아름답게 살기 위해 꼭 필요한 의식이다.

 

인간은 이런 소명을 일깨워줄 선생(先生)이 필요하다. 선생은 사람들에게 소명을 찾기 위한 자신만의 여행을 촉구하고, 그들에게 자신감과 용기를 북돋아주는 존재이다.

선생은 그들에게 그들 각자 안에 숨겨진 보화를 캐내도록 강하게 요구하고, 그들이 상상하지도 못한 위대한 인물들의 삶을 보여주고, 그들 자신이 그러한 삶의 위대한 여정을 감행할 것을 가르친다.

 

인간은 대부분 자신과 자신의 이익에 탐닉하고, 어영부영 인생을 살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지구상에 발길을 디뎠던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의 가슴 깊은 곳에 숨은 ‘위대함’이라는 ‘거룩한 씨앗’의 존재를 알지도 못한 채, 그 존재를 말해주는 선생도 만나본 적도 없이, 자신의 경험한 지극히 왜곡되고 폐쇄된 조그만 세계 안에서, 자신에게 익숙한 세계를 선(善)으로 상정하고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덜 익숙하거나 모르는 우주공간과 같이 광활한 낯선 세계를 악(惡)으로 여기며 매일매일 방향도 없이 살다가 죽어간다.

 

바퀴벌레가 설탕조각을 찾으면 그것에 쾌락을 느끼고 정신 없이 사는 것처럼, 우리 인간도 편안함과 익숙함이란 설탕조각을 일생 동안 찾아 헤매다 결국은 만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것이다. 우리 주위의 모든 매체와 교육기관이 성공이란 설탕조각을 신(神)으로 상정하고, 그 신을 맹신하는 교도들을 대량생산하고 있다.

 

소명의식은 내면의 침묵 들어야 발견한다

 

위대함은 자신이 꼭 해야 할 일에 대한 깊은 묵상, 인생의 목적에 대한 깊은 성찰에서 시작한다. 남들이 정해놓은 성공이란 달콤한 함정에 빠져 일생 동안 헤어나오지 못한 사람이 너무 많다. 미국 속담에 “Be a voice, not an echo!”라는 표현이 있다. “메아리가 되지 말고, 목소리가 되어라!” 정도로 번역할 수 있다. 자신만의 독창적인 목소리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자신의 내면의 침묵을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소명이 필요하다.

 

기원전 8세기 유대에서 활동한 이사야(기원전 740∼698년)는 위대한 예언자이다. 그의 전체 이름은 ‘이사야 벤 아모스’, 즉 ‘아모스의 아들 이사야’다. 그는 고대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예언자로 자기만족이란 잠에 빠져있는 남유다왕국을 도덕 재무장과 신에 대한 헌신으로 깨우려고 일생을 헌신한 인물이다.

이사야는 도덕불감증과 이기심처럼 유대사회에 만연한 남을 속이는 행위가 종교심을 오염시킬 뿐만 아니라 신이 가장 혐오하는 죄라고 외친다.

 

그는 종교를 지키는 행위가 추상적인 혹은 정신적인 믿음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자기가 손해를 보더라도 지키려는 올곧음과 정의로 드러나야 한다고 선포한다. 이사야는 남유다 정치의 중심에 있었다.

그는 기원전 8세기부터 웃시아왕(기원전 769∼733년), 요담왕(기원전 758∼743), 아하즈왕(기원전 743∼727), 그리고 히즈키아왕(기원전 727∼698년) 시대에 활동하였다. 그는 특히 요담왕과 아하즈왕 시절에는 유대 궁중의 최고의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웃시아왕이 죽던 해, 즉 기원전 733년에 소명을 받아 예언자의 삶을 시작하여 웃시아 왕조가 끝나는 히스키아왕이 죽던 해에 죽는다. 구약성서 <이사야서>는 66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중 1∼39장이 기원전 8세기에 살았던 이사야의 기록이다. 학자들은 이사야서 1∼39장을 ‘제1 이사야’라고 부른다. 이사야서 1∼39장은 주로 앗시리아 제국의 위협을 다루고 있고 40장 이후는 유대 역사에서 훨씬 후에 등장하는 바빌론 포로기를 다루기 때문이다.

 

이사야는 자신이 그렇게 신봉하고 유다왕국을 위험한 국제정세 안에서 생존하게 만들 수 있는 지도자라 여겼던 웃시아왕이 죽은 후, 실의에 빠졌다. 웃시아왕은 남유다왕국의 가장 성공한 왕들 중 한 명이었다. ‘웃시아’라는 이름은 ‘야훼가 힘이다’라는 뜻이다. 웃시아는 자신의 이름의 의미를 유감없이 발휘한 왕이었다. 그는 16세 나이에 유다의 11번째 왕이 되어 52년 동안 치리(治理)하였다. 그는 유다왕국의 국경을 굳건히 지켰으며 그 시절 유대는 전례 없는 태평성대를 구가하였다. 그는 뛰어난 전략가이자 발명가로 무기를 고안하여 생산하였다.

 

이 위대한 왕의 마지막은 비극이었다. 그는 예루살렘성 안에 안치된 왕들의 분묘에 묻히지 못하고 성 밖 들판에 쓸쓸히 묻혔다. 웃시아의 위대한 업적을 고려한다면 충격적인 사실이다.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었다. “그는 문둥병자였다.”

웃시아는 자신의 성공과 부가 자신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착각하기 시작하였다. 다른 성공한 왕들처럼, 그도 자만심의 유혹에 무릎 꿇고 말았다.

 

이스라엘의 역사기록인 <역대기>라는 책에선 웃시아가 마음이 교만해져 자신이 사제역할을 하며 향단에 스스로 분향하려 했다고 기록한다. 그 당시 사제 80명이 우시아왕의 진입을 막으려 했지만 그는 막무가내로 성소도 들어가 향로를 잡고 분양하려다 말고 주위에 서있는 사제들에게 화를 냈다. 성서는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을 기록한다. “야훼의 성소 안, 향단 곁 제사장 앞에서 이마에 문둥병이 발했다.”

 

야훼신을 대면하고자 지성소로 들어간 이사야

 

웃시아에겐 왕이라는 몫이 있고 제사장에게 다른 몫이 있다. 인간은 자신만의 몫을 찾아 최선의 노력을 경주할 때 위대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웃시아왕은 왕이라는 몫을 통해, 자아를 전시하기 위해, 권력을 남용한 것이다. 웃시아왕이 권력자에게 요구되는 최선은 ‘겸양’이란 사실을 망각하자, 신의 저주의 상징인 ‘문둥병’이 걸렸다고 기록한다. 제사는 자신의 에고를 신에게 바치는 의식인데, 그는 제사를 통해 자신을 과시하려다 변을 당한 것이다. 웃시야왕은 죽는 날까지 문둥이가 되었고, 예루살렘에서 쫓겨나 별궁에 홀로 살다가 쓸쓸히 죽어간 것이다.

 

기원전 750년, 웃시아는 한순간의 자만심으로 실패한 왕으로 사라진다. 이 시기가 고대 오리엔트에서 중요한 이유는 앗시리아 제국이 새로운 강자로 등장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앗시리아 왕 티글랏-필레세르는(기원전 745∼727년)은 팔레스타인 정복 야욕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유다의 태평성대 시기가 사라지자, 궁중의 최고 고문 이사야는 세상 권력자들의 본질에 대해 깊게 생각한다. 이사야는 야훼신을 대면하기 위해 지성소로 들어가기로 마음먹었다. 지성소는 예루살렘성전 안에 위치한 특별한 장소로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을 보관했다는 궤(軌)가 위치한 장소이다.

 

후에는 그 궤가 없어지고 야훼신이 좌정할 수 있는 단 위에 설치되었다. ‘지성소’라고 불리는 이 장소는 대제사장이 이스라엘 종교축제일인 대속죄일만 들어갈 수 있는 장소다.

이곳은 대제사장만이 들어가 번제를 드리는 장소와 커텐으로 분리되어있다. 대제사장은 1년에 한번 대 속죄일에 들어가 가운데 있는 보좌에 희생의 피와 향을 피운다.

 

지성소는 예루살렘성전 왼쪽 끝에 위치한 가로-세로 4.5m, 정사각형 공간으로 빛이 하나도 없는 어두운 공간이다. ‘지성소’의 원래 명칭은 ‘코데쉬 핫-코다쉼’으로 영어로 직역을 하자면 ‘holy of holies’이다. 이 구문은 히브리 언어의 관용구로 최상급을 표현할 사용하는 방식으로 ‘가장 거룩한 장소’라는 의미다. 신을 일생 동안 간절히 믿는다 할지라도 이곳에 들어갈 수 없다.

 

이 공간은 신이 인간 가운데 존재한다는 특별한 표식이다. 이곳과 필적할 만한 장소는 16억 인구 무슬림의 순례 종착지인 메카에 있는 검은 돌 ‘카바’이다. 신와 인간이 만나 하나가 되는 장소, ‘신적인 합일(unio mystica)’이 가능한 유일한 공간인 지성소에 이사야는 들어선다. 지성소는 제사장이 희생의례를 행하는 성소와 구분하기 위해 두꺼운 장막을 친다.

 

이사야가 지성소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밖에선 볼 수 없었던 새롭고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한다. 그는 신이 높게 들어 올린 보좌에 앉아 있고 그 신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 찬 것을 본다. 그에게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비밀스러운 세계가 열렸다. 자신의 삶의 터전인 일상적인 공간을 벗어난, 인간의 오감을 넘어서는 신비한 공간이다. 지상의 공간이지만 그 안에서 천상의 공간, 서로 섞일 수 없는 ‘상극의 장소’가 이사야의 환상에서 하나로 합쳐진 ‘신비한 합일의 장소’가 되었다.

 

고대 이스라엘에서 신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존재로 묘사되어 있지만, 이사야는 신을 볼 수 있는 새로운 제3의 눈으로 우주를 주관하는 ‘주인(主人)’이 천상의 의자에 앉아계신 것을 목격한다. 이것은 신을 찾으려는 몇몇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별한 선물로 ‘일상의 숭고함(sublimity of the mundane)’의 경험이다.

 

‘제3의 눈’ 혹은 ‘마음의 눈’은 일반인들이 간과하는 우주와 인생의 중요한 상징을 읽어내는 능력이다. 이것을 12세기 스페인에서 등장한 유대교 신비주의 까발라에서는 ‘호크마’, 즉 ‘지혜’라고 부른다.

인도 힌두교 전통에서는 이런 특별한 비젼을 ‘아즈나(ajna)’ 혹은 ‘차크라(chakra)’라고 부른다. 생리학자들은 이것을 ‘송과체’(pineal gland)라고 부른다.

 

송과체는 두뇌 한복판에 있는 기관으로 솔방울처럼 생겼다고 붙여진 이름이다. 송과체에 빛을 비추면 실제로 빛을 감지할 수 있고, 이 부분을 활성화하면 모든 감정과 관념에서 벗어나 무지상태에 이룰 수 있다고 한다. 인도에선 제3의 눈을 활성화한 사람을 ‘르시’ 즉 ‘시인(視人)’이라 부른다.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제3의 눈’은 세상을 구분하는 이원론적인 세계를 넘어서는 신비의 눈으로, 삼라만상의 핵심을 간파할 수 있는 영적인 눈이다.

 

 

 

 

이사야, 생명의 신비 조절하는 주인 발견하다

 

이사야가 보니 ‘(우주의) 주인’이 왕좌에 앉아 있고, 그 왕좌는 지상으로부터 높이 들려져 있으며 성전은 그의 옷으로 덮여있었다. 그가 마음의 눈으로 본 자는 신이 아니라 ‘우주의 주인(히브리어로 adon)’이었다. ‘아돈’이란 히브리 단어는 ‘주인’이란 단어로 고대 이스라엘에서는 노예와 대비되는 ‘집주인’ 혹은 신하와 대비되는 ‘통치자’를 의미한다.

 

그는 우주와 역사를 지배하는 삼라만상에 숨겨진 존재를 찾은 것이다. 웃시아왕은 이스라엘의 ‘주인’이자 ‘통치자’라고 생각했지만, 이사야는 지상의 통치자는 불과 잠깐 동안 ‘왕’으로 위임받은 것이지 ‘주인’이 아니었다는 점을 인식한다.

 

그는 모든 동식물의 희로애락을 가능하게 하는 삶의 원동력이자 신비로서의 존재, 우주천체를 움직이게 하는 숨어 있는 어떤 존재를 확인한다. 이사야는 조그만 씨앗에서 커다란 나무로 자라가 만드는 생명의 약동과 암수 동물의 씨로 모든 생명을 배태시키는 생명의 신비를 조절하는 그 주인을 본 것이다.

 

이 주인은 지상의 건물이지만, 하늘 높이 천상에 거주하는 존재다. 고대 사회에서 ‘옷’은 그것을 착복하는 존재를 상징하는 물건이다. 고대사회에서 왕은 그가 착용하는 왕관과 왕복으로 표시된다.

신의 표식인 그의 옷이 예루살렘 성전에 가득 차 있었다. 이사야의 주인이자 영웅이었던 웃시아는 문둥병이 걸려 비참하게 사라지고 일상 속에 숨겨져 있는 숭고한 주인을 발견하였다.

 

그 보좌 위에는 여섯 날개가 달린 스랍이란 존재가 있었다. 이들은 두 날개로는 자신의 얼굴을 가려 신을 직접 볼 수 없게 만들고, 다른 두 날개로는 자신의 발, 즉 성기를 가려 신에게 최고의 존경을 표시하고, 나머지 두 날개는 자유롭게 두어 신의 명령을 신속하게 처리하였다. ‘스랍’은 후대에 천사로 발전하는 천상의 존재이자 신에게 시중드는 존재이다.

 

‘스랍’의 어원는 ‘불타다’라는 히브리 동사 ‘사랍’에서 유래했다는 가설과 ‘날아다니는 뱀’을 의미하는 ‘사랍’에서 유래했다는 가설이 있다. 스랍은 이집트 피라미드를 지키는 스핑크스나 불교사원의 입구를 치키는 사대천왕처럼 영적으로 정결하지 않은 사람들의 진입을 막기도 하고, 신의 명령을 수행하기도 하는 존재들이다. 영어에서 괴물을 의미하는 ‘monster’도 이런 존재들이다. 거룩한 공간과 일상 공간의 중간에서 서서 ‘그 경계를 표시하는 자’란 의미이다.

 

그들은 신을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라고 부른다. 다른 언어의 용법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단어를 세 번 반복하는 것은 최상급을 표시한다. 한마디로 신은 ‘가장 거룩한 분’이란 의미이다. 여기서 ‘거룩’이란 히브리 단어는 ‘코데쉬’인데, 그 본래 의미는 “(일상으로부터) 구분된, 분리된, 다른”이란 의미이다.

 

독일 종교학자 루돌프 오토(Rudolf Otto)는 ‘거룩’이란 개념을 “비-이성적이며 비-감각적인 경험 또는 자신을 넘어선 중요하면서도 갑작스런 대상에 대한 감정”이라고 정의하면서 ‘절대타자(絶代他者): das ganz Andere’ 라고 불렀다. ‘거룩’ 즉, 절대타자는 내게 익숙한 ‘에고’에서 나와 무아상태로 진입할 때, 비로소 드러나는 ‘다름’이다. 자신의 부과권력, 그리고 자신의 전시인 명례를 위해 분투하는 현대인들은 ‘다름’ 자체인 ‘거룩’을 경험할 수 없다.

 

이사야는 그 ‘다름’은 천체를 창조한 분이라고 선포한다. ‘만군의 여호아’라 흔히 번역되는 문구는 ‘야훼 쩨바오쓰’라는 히브리 문구에서 왔는데, 그 원래의 의미는 ‘천체를 창조하시는 (분)’이란 의미다. 이 히브리 문장에서 ‘야훼’는 미완료 3인칭 단수 동사이며 ‘쩨바오쓰’는 ‘하늘의 별들, 천체’라는 의미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부모의 몸을 빌려 세상에 왔다. 부모도 자식이 그렇게 생명으로 태어날 것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육체뿐만 아니라 지성과 영성을 지닌 존재가 된 과정을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은 그저 신비일 뿐이다. 뿐만 아니라 밤하늘을 수놓는 수많은 별도 왜 그 자리에서 반짝이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이사야는 이제 삼라만상은 야훼신이 신비가 숨어 있는 거룩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고, 사방이 온통 신의 영광이 가득 찼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이와 같은 깨달음으로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 인간과 동물, 그리고 인간과 자연을 가로막았던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무너지기 시작한다.

 

‘제3의 눈’으로 우주의 신비를 목격한 이사야의 세계관은 무참히 무너졌다. 이사야는 “오, 나는 망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다!”라고 외친다. 이사야는 이제 자신이 알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그 가시적인 세계를 조절하고 지배하는 신비한 세계를 목격한 후, 자신은 망했다고 외친다. 이사야가 신을 경험한 첫 외침이 ‘나는 망했다’라는 점이 흥미롭다.

 

자신의 인식의 한계를 인정하는 서양철학의 시조인 소크라테스(기원전 470∼399)의 가르침과 유사하다. 그는 자신이 지혜로운 이유는 ‘자기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는 당시 지식인들에게 자신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무엇인가를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보다 더 똑똑할 가능성이 높다고 주장한다.

철학의 시작은 바로 내가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논리적 난점인 ‘아포리아’를 경험하는 순간이다.

 

 

 

 

 

이전의 자신의 세계관이 무참하게 무너지는 그 시점이 바로 ‘거룩’이다. 이런 자기 발견과 자신을 완전히 변화시키려는 의지가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는 시발점이다. 이 경험을 ‘회개’라고 한다.

 ‘회개’는 자신의 잘못을 고해성사하는 것이 아니라, 신비한 세계, 경의로 가득한 세계를 경험하고 자신의 세계관을 완전하게 부수고, 미지의 세계로 그 감격적이며 설레는 여행을 감행하는 것이다.

 

그리스어로 ‘회개’가 메타노이아(metanoia)인데, 그 의미도 “오래된 자아를 새로운 자아로, 나를 넘어선 자아로 대치하는 행위”이다. ‘회개하다’는 히브리어로는 ‘슈브’이며 예수가 사용하던 언어인 아람어로는 ‘타브’인데, 이 동사의 의미는 “신이 인간에게 심어놓은 신의 형상, 신의 DNA를 회복하는 것”이란 의미이다.

 

이사야는 자신이 신을 대신하여(pro) 사람들에게 신의 뜻을 말하는 사람(phet)임에도 불구하고, 신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신의 거룩한 말을 담을 수 없는 ‘입술’을 지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전에 신을 빙자하여 유다인들에게 신의 말씀을 전달하였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이 모두 부질없는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회개한다. 또한 ‘제3의 눈’을 지니게 되어 신을 목도하니, 자신은 이제 죽게 되었다고 느낀다. ‘터부’를 경험한 인간에게 요구되는 의례는 바로 정화의례다.

 

 

위에서부터 시계방향으로 1596년 함부르크판 히브리어 역대기, 1543년 파리판 히브리어 창세기, 1913년 파리판 히브리어 신·구약성경.

 

 

신이 속삭이는 ‘미세한 침묵의 소리’ 들어야

 

바로 그 순간, 스랍 중의 하나가 제단에서 활활 타고 있는 숯을 가지고 날아온다. ‘활활 타고 있는 숯’을 가져왔다면 이사야의 입술은 다 타버렸을 것이다.

 

이 숯은 신에게 바쳐진 거룩한 물건이 이사야에 입술에 닿으면서, 이사야의 입술로 상징하는 이사야의 모든 것이 정화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사람의 마음에 있는 생각이 입술을 통해 전달되기 때문에 입술이 정화될 때 마음도 정화되었다. 스랍은 말한다.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없어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다.”

 

인간이 신을 만나 자신의 에고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진입하게 되면 두 가지 현상이 일어난다.

첫째는 ‘악’이 사라진다. ‘악’이란 것이 인간의 생각 속에 존재하는 ‘나쁜 마음’일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 남에게 비춰지는 ‘고약한 냄새’이기도 한다. 

 ‘악’이란 히브리 단어는 ‘라’인데, 그 근본적인 의미는 ‘악취’이다. 만일 동료들이 어떤 사람에게 쉽게 가까이 가려 하지 않는다면, 바로 그 사람은 ‘악한 사람’이다. 무아상태로 진입하면, 다른 사람들이 그 사람과 친해지려 한다.

 

왜냐하면 그가 향기가 나는 ‘선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어에서 ‘선’을 의미하는 ‘토브’는 당연히 ‘향기나 나는’이란 의미다. 둘째, ‘죄’가 사라진다. ‘죄’라는 히브리어 ‘하타’의 원래 의미는 ‘신이 마련한 삼라만상의 원칙을 인정하지도 않고, 그 원칙의 길에 들어서지 않는 행위’이다. 신을 만나면, 인간은 자신이 짧은 인생 동안 꼭 해야할 일을 깊은 묵상으로 찾아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때 이사야는 신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와 신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긴다. 이사야는 이제 자신을 정화하여, 인간의 일상적인 삶으로부터 분리된 후, 신을 감지하게 된다. 인간의 마음이 자신만을 위한 이기심으로 가득 찬다면, 우리는 신이 속삭이는 ‘미세한 침묵의 소리’를 들을 수 없다.

 

이 시점까지 이사야가 신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없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이사야는 처음으로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사실은 신은 우주의 삼라만상의 신비를 통해 자신을 계시에 왔으나 인간들은 자신들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장소에서만 신을 만나기를 기대하기 때문에, 신을 발견할 수 없다. 신의 미세한 침묵의 소리까지 들을 수 있는 이사야는 다음과 같은 천상의 장면을 목격한다.

 

이사야는 야훼신과 세라핌들이 모여 천상에서 회의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고대 오리엔트에서는 우주와 지상에 관한 중요한 일을 결정할 때 야훼신이 홀로 결정하지 않고 다른 신적인 존재들을 불러 모아 회의를 주재한다. 이와 유사한 대표적인 장면이 <욥기> 1장에 등장하는 천상회의 장면이다. 야훼신이 천상의 존재들(신의 아들들)과 함께 회의하는 장면이다. 천상의 존재들에는 인간의 잘못을 고발하는 존재인 사탄도 포함되어 있다.

 

‘사탄’이란 의미는 악마가 아니라, 신의 선택을 받은 인간이 그 일을 소홀히 할 때, 야훼신에게 ‘고발하는 자’라는 뜻이다. 이사야는 천상회의 장면을 ‘제3의 눈’뿐만 아니라 신의 섭리(攝理)를 들을 수 있는 영적인 ‘제3의 귀’를 통하여 듣게 된다.

 

한자에서 ‘섭리’에서 ‘섭(攝)’자는 ‘손 수(手)’자와 인간이 지닌 육체의 두 귀뿐만 아니라 제 삼의 귀(耳)와 함께 조성된 글자로, 그 의미는 인간이 제3의 귀를 손으로 기울여 들을 수 있는 영적인 속삭임인 것 같다.

이사야는 “내가 누구를 보내고,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리스도 신학자들이 이 구절에서 “우리”를 삼위일체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교리로 고대 이스라엘 문헌을 해석하는 시대착오적인 해석이다.

 

이사야가 이런 천상회의의 장면을 목격했을 때, 그의 반응은 신속하고 단호하다.

“저는 항상 준비되어 있습니다. 나를 보내십시오.”

성서의 위대한 인물들은 신의 명령을 받았을 때, 바로 지체 없이 대답한다. 그들은 한결같이 ‘힌네니(hinneni)’라고 말하는데, ‘힌네니’라는 히브리어 문구는 흔히 ‘내가 여기 있습니다(Here I am)’라고 번역되나, ‘나는 신의 말씀을 듣고 바로 실행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I am ready to obey your command immediately)’라고 번역하는 것이 ‘힌네니’라는 단어의 본래 의미를 더 살린 해석이다.

 

 

 

 

 

신의 위임을 받은 자로 재탄생한 이사야

 

‘힌네니’의 용법을 잘 드러내는 성서의 다른 장면이 <창세기 22>이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 신이 아브라함을 시험하려고 ‘아브라함아!’라고 부르니, 아브라함이 대답하기를 ‘힌네니’, 즉 ‘저는 당신의 말씀을 듣고 바로 실행한 준비가 되어있습니다’라고 말한다. ‘힌네니’에는 신을 볼 수 있는 영적인 눈과 신의 미세한 침묵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영적인 귀를 지닌 인간이, 신의 명령을 듣자마자 취하는 자발적인 반응의 외침이며, 그 안에는 즉시성과 완벽한 승복이 담겨 있다.

 

이사야는 더 이상 다른 여느 예언자들과는 달리 신의 뜻을 위임받아, 그 뜻을 자신의 삶의 목표로 삼고 최선을 다하는 전적인 승복, 오래된 자아를 살해하고 신이 위임하는 일을 통해 자신을 넘어선 새로운 자아를 선물로 받는다. 이사야는 말한다. “저를 보내십시오.”

이사야는 세상에 태어나 그럭저럭 자신의 삶을 사는 존재가 아니라, 신의 위임을 받고 그 일을 자신의 삶의 통해 최선을 다하는 존재로 탈바꿈한다.

 

야훼는 이사야에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유대) 사람들은 내 말을 듣기는 참 잘 듣는 것 같으나, (제 3의 귀가 없어) 이해하지 못하고, 이들이 보기는 참 잘도 보나, (제 3의 눈이 없어) 알지 못한다.”

당신 유대인들이 한마디로 총명(聰明)하지 못하고 혜안(慧眼)이 없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어떤 외국어를 배우고 익히지 않으면, 그 언어를 듣는다 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신이 삼라만상을 통해 자신의 모습과 비밀을 들려주지만, 우리는 그 신의 언어를 판독할 수 있는 문법(文法)을 모르기 때문에 우이독경(牛耳讀經)과 마찬가지다.

 

또한 우리가 아무리 위대한 경전이라도, 그 기록된 언어를 우리 자신이 훈련하여 배우지 않는다면, 그 경전은 낙서에 불과하다. 모든 생물, 동식물이 생성되는 과정은 인간의 인식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그 과정을 관찰하는 것이지, 왜 생명이 발생하는지는 알 수 없다. 조그만 씨에서 어떻게 싹이 트고 나무가 되는지 그것은 기적일 뿐이다. 모든 인간도 알 수 없는 신비의 과정을 거쳐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아랍어에 ‘이교도’를 의미하는 단어인 ‘카피르(kafir)’는 ‘모든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뻔뻔스러움 인간’ 즉 ‘불신자’이다. 우리가 눈을 들어 주위를 보면, 모든 동식물, 특히 거울에 비친 자신이 우연히 인간으로 태어나, 혼자의 힘으로 오늘날까지 왔다는 생각을 ‘무식’이라 한다.

 

우리는 매일매일 우주의 신비를 마주하지만,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없어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배은망덕한 존재다. 야훼는 그런 인간들을 “들기는 들어도 이해하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한다”라고 표현한다. 이 구절은 신약성서에서 예수가 누누이 제자들에게 경고한 문구이기도 하다.

 

유대인의 자만심 일깨워줄 예언자로 소명받은 이사야

 

야훼는 자신이 선택한 유대민족에 대한 실망이 너무 커 체념상태이다. 야훼는 말한다.

“내가 이 백성을 마음에 기름이 많이 끼게 만들고, 그들의 귀는 진실을 들을 수 없게 막고, 그들의 눈은 신비를 볼 수 없게 덮을 것이다. 이들이 자신들의 영적인 눈으로 신비한 세상을 인식하고, 영적인 귀로 신의 소리를 들어 마음으로 모든 것을 이해하지 못하도록 만들 것이다. 그들이 과거의 길로부터 돌아와 회개하여 자신들의 영적인 병이 고쳐지도록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야훼가 단단히 화나셨다.

 

이사야는 이 말을 듣고, “언제까지, 그럴 작정이십니까?” 하고 묻는다. 야훼는 “도시는 거주하는 사람들이 없어 피폐해지고, 가옥들은 사람이 없어 버려져, 땅이 완전히 황폐해질 때까지”라고 말한다.

야훼는 완전히 바닥을 쳐, 갈 때까지 가서 유대민족이 절실하게 깨달을 때까지 방치하겠다고 말한다.

 

새로운 역사는 과거에 대한 완전한 청산에서 시작한다. 야훼는 유대민족이 외세의 침입으로 10분의 1이 남는다 할지라도 다 불태워 전멸시키겠다고 말한다. 그는 남아있는, 구원의 가능성이 있는 유대민족을 밤나무와 상수리나무에 비유한다. 밤나무와 상수리나무는 사막에서 유목민들에게 쉴 곳을 마련해주는 잎이 무성하고 커다란 나무다.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이 이 상수리나무 아래서 낯선 자들을 대접하여 아들 이삭의 출생을 약속받는다. 이 나무들이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어, 그 그루터기에서 다시 줄기가 뻗고 가지를 치고 잎을 풍성하게 낼 것이라고 말한다. 야훼는 ‘거룩한 씨’가 바로 이 그루터기라고 선포한다.

 

‘거룩함이라는 씨앗(seed of holiness)’이란 히브리어 문구는 ‘쩌라 코데쉬’다. ‘쩌라’는 동식물의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원초적인 힘’, 즉 ‘정자, 난자 혹은 씨앗’을 의미한다. ‘쩌라’ 자체로는 도저히 후에 펼쳐질 생명의 신비를 가늠할 수 없는 보잘것없는 것이지만, 이 씨앗을 통해 모든 생명이 존재할 수가 있다. 야훼는 우주 삼라만상을 존재하게 하고 활동하게 하는 원초적인 힘을 바로 ‘거룩함’이라고 지칭한다.

 

‘거룩함’이란 히브리 단어 ‘코데쉬’의 본래 의미는 ‘다름, 분리됨’이다. 인간 모두에게는 일상의 진부성과는 전적으로 다른,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분리된, 신이 모든 인간을 창조할 때 DNA 속에 숨긴 ‘거룩함’이란 씨앗이 있다.

 

이사야의 역할을 곧 다가올 유대민족의 멸망을 준비하면서, 과거의 안이한 삶의 모습들, 특히 자신들만이 야훼신을 섬기고 구원받았다는 자만심과 아둔함을 일깨워줄 예언자로 소명을 받는다.

우리는 모두 가슴속 깊이 숨어있는 ‘거룩함이란 씨앗’을 찾은 적이 있는 스스로 물어야 한다. 이 ‘거룩함이란 씨앗’은 우리를 자신을 넘어 위대함으로 인도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