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시간의 역사>의 스티븐 호킹

rainbow3 2019. 10. 13. 00:22


<시간의 역사>의 스티븐 호킹

 

스티븐 호킹은 우리에게 크게 두 가지로 각인돼 있다. 하나는 불치병에 걸렸음에도 불굴의 의지로 버티는, 말 못하는 휠체어 장애인의 모습과 다른 하나는 블랙홀 증발, 양자우주론 등 현대물리학의 이론을 제시한 천재 우주물리학자의 모습이다. 그는 갈릴레오 갈릴레이, 아이작 뉴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계보를 잇는 물리학자로 평가받고 있다. 필자는 여기에다 뛰어난 글 솜씨를 지닌 과학 저술가란 타이틀을 하나 더 붙이고 싶다.
이 글에서는 이 세 가지 모습의 호킹을 간략하게 모두 조명하려 한다.

 

갈릴레오 사망일로부터 3백년 된 날 태어나

 

스티븐 윌리엄 호킹(Stephen William Hawking)은 1942년 1월 8일 위대한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세상을 떠난지 300주년이 되는 바로 그날 영국 옥스퍼드에서 태어났다. 10대 시절 그는 친구들과 초감각 지각을 실험하고 원시적 컴퓨터를 만드는 등 과학에 상당한 흥미를 보였다. 고등학생이 된 호킹은 이미 과학에 대해 상당한 흥미를 느끼고 있었지만 무엇을 전공할 지에 대한 고민을 계속했다. 열대의학을 연구하는 의사였던 아버지와 달리 생물학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물리학을 ‘모든 과학의 근본’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수학에 대한 애정 또한 컸기에 쉽게 진로를 결정하지는 못했다.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모교인 옥스퍼드 대학에 자식을 보내고 싶어 했다. 당시 옥스퍼드 유니버설 칼리지에는 수학 전공이 없었다. 그래서 1959년 10월 17세의 어린 나이로 그는 옥스퍼드 대학 물리학과를 선택했다. 그리고 3년 뒤 케임브리지 대학원에 입학하면서 우주론에 본격적으로 발을 들여놓게 된다.

 

호킹은 케임브리지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21세 때인 1963년, 근육 및 신경계 난치병인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미국 프로야구 뉴욕양키스팀의 전설적인 타자 루 게릭이 이 병으로 숨졌다고 해 대중에게는 루게릭병이란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짐) 진단을 받고 살 날이 2년밖에 남지 않았다는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의사의 이런 진단은 그의 불굴의 의지 앞에 빗나가고 말았다. 비록 이 질병으로 인해 손발을 움직일 수 없어 수학공식을 종이 따위에 써 내려가며 계산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지만 그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물리학과 수학의 여러 복잡한 공식을 일일이 암기하여 계산하는 법을 익혔다. 동료 연구원들은 호킹의 이러한 불굴의 의지와 재능에 크게 감탄했다.

 

불치의 루게릭병 딛고 천재물리학자로 우뚝

 

그는 1974년 서른둘의 나이로 사상 최연소 왕립학회 회원이 되었다. 1978년 이후 영국 과학자로서는 최고 영예이며, 뉴턴이 거쳐 간 케임브리지 대학 루카스 석좌 교수를 맡아 2009년까지 활동했다. 그는 죽음의 고비를 여러 차례 넘겼다. 호킹은 1985년 스위스에 있는 유럽원자핵공공연구소(CERN)로 이동하던 중 폐렴에 걸렸다. 현지 주립병원에서 인공호흡기를 씌워 치료를 하던 중 의료진이 회복할 가망이 없다며 인공호흡기를 떼자고 제안했다. 아내는 이를 거절하고 구급 항공기로 영국 케임브리지로 긴급 이송해 그를 살려냈다. 하지만 원상태로는 돌아갈 수 없었다. 그리고 기관지 절개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이 수술은 호킹의 말하기 능력을 완전히 앗아가 버렸다. 결국 가슴에 꽂은 파이프로 호흡을 하고 휠체어에 부착된 고성능 음성합성기를 통해 대화를 해야만 했다. 이런 힘들고 고통스런 삶을 이어가면서도 학문과 진리를 향한 그의 열정은 결코 식지 않았다.

그는 특이점(特異點) 정리, 블랙홀증발, 양자우주론 등 현대물리학에 3개의 혁명적 이론을 제시함으로써 뉴턴과 아인슈타인의 뒤를 잇는 천재 물리학자로, 우주의 비밀에 가장 가까이 접근하고 있는 이 시대 최고의 물리학자로 꼽히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출생과 성장, 부모 이야기, 결혼과 이혼, 학문 이력 등을 2013년 펴낸 자서전 <나, 스티븐 호킹
의 역사>에서 사진을 곁들여 간결하면서도 솔직담백하게 털어놓고 있다.

그는 이 책 후반부에서 <시간의 역사> 등 그의 명저를 비롯해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 펴낸 책의 내용과 그가 밝혀낸 블랙홀의 비밀 등 우주의 비밀들을 알기 쉽게 요약해 놓았다.

 

 

 

 

호킹이 뛰어난 과학적 업적을 지닌 이론물리학자라는 데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것이다. 호킹이 늘 매달린 화두는 우주를 지배하는 기본 법칙이었다. 그의 대표적 업적은 로저 펜로즈와 함께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 이론이 시간과 공간이 빅뱅에서 출발점을 가지고 블랙홀에서 끝난다는 함축을 가진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일반 상대성 이론과 양자론의 통합이 필요했다. 이러한 통합의 결과 중 하나로 그는 블랙홀이 완전히 검지 않으며 열복사를 방출해서 결국 사라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는 흔히들 호킹 복사로 부른다.

이는 블랙홀이 강한 중력을 지녀 주위의 모든 물체를 삼켜버린다는 종래의 학설을 뒤집은 것이다.
그리고 또 다른 가설로 우주가 허수시간[(imaginary time, 평범한 실시간(real time)의 방향에 수직으로 흐
르는 시간을 말한다]에 가장자리 또는 경계를 가지지 않는다는 것도 내놓았다.

 

 

 

 

 

1천만 부 팔린 <시간의 역사> 과학저술의 이정표 세워

 

이와 함께 그가 과학대중화에 기여한 인물로, 과학 저술가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시간의 역사>(1988년)라는 책 때문이다. 이 책은 40개국 이상의 언어로 번역돼 1천만 부 이상 팔려나갔다. 이 책이 엄청난 호응을 얻자 그는 여기에다 많은 그림과 사진을 곁들인 <그림으로 보는 시간의 역사>(1998년)를 펴냈고 <짧고 쉽게 쓴 ‘시간의 역사’>(2005년)를 펴냈다.

또 <시간의 역사> 후속작이라고 할 수 있는 <호두껍질 속의 우주>(2001년)를 펴냈다. 이 밖에도 <시간과 공간에 관하여>(1997년),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서>(2002년) <블랙홀과 아기 우주>(1993년), <신이 창조한 정수 :역사를 바꾼 수학적 돌파구>(2005년), <위대한 설계>(2010 년) 등 여러 권의 대중서적을 펴냈다.

그는 또 딸 루시와 함께 <조지의 우주로 가는 비밀 열쇠>(2007년), <조지의 우주 보물 사냥>(2009년), <조지와 빅뱅>(2011 년) 등도 펴냈다.

이 책들은 미래의 성인, 곧 어린이를 위해서 과학에 기초를 둔 모험 이야기다. 호킹은 대중에게 과학을 설명하는 책을 내는 이유에 대해 “나는 과학기술의 중요성이 나날이 커지는 세계에서 사람들이 올바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기본적인 과학지식을 보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고 자서전에서 밝혔다.

 

 

 

 

 

그는 “우주의 시초 이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는 질문은 무의미하다”고 말한다. 남극보다 더 남쪽에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주에는 경계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주의 시초에도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았다고 말한다. 또 우주가 무로부터 자발적으로 창조되었음을 이 무경계 조건이 함축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우주의 출발 때 일탈은 매우 미세했지만 그 일탈은 우주가 팽창함에 따라 커져서 결국 은하와 별과 생물을 비롯한 우주 속의 모든 구조물을 만들었다. 무경계 조건은 창조의 열쇠요, 우리가 여기에 있는 이유”라고 밝혔다. 신이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그는 당연히 무신론자이다.

 

“장애인은 장애가 걸림돌이 되지 않는 일에 집중해야”

 

그는 “스물한 살에 루게릭병 진단을 받았을 때 내 삶이 끝났고 내가 느끼는 나의 잠재력을 결코 발휘하지 못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50년이 지난 지금 나는 내 삶에 대해서 평온하게 만족할 수 있다. 나는 두 번 결혼했고 아름답고 자랑스럽게 성장한 자식 셋을 두었다. 대다수 이론물리학자들은 블랙홀에서 양자 방출이 일어난다는 나의 예측이 옳음을 인정할 것이다. 내가 노벨상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보다 더 값진 기초물리학상을 받았다. 나의 장애는 과학연구에 심각한 걸림돌이 아니었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장점이었던 것 같다.

학부생 강의나 교육의 의무도 지지 않았고 따분한 위원회에 참석하지 않아도 돼 오롯이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며 낙관론적인 인생관을 보였다.

 

호킹은 2012년 런던 장애인올림픽 개막식에서 자신의 생애 중 가장 많은 청중을 향해 연설했다. 그리고 세상의 장애인을 향해 짧지만 큰 울림이 있는 이야기를 전한다.

 

“장애인은 장애가 걸림돌이 되지 않는 일에 집중하고 자신이 할 수 없는 일을 아쉬워하지 말아야 한다” 고.

 

 

글_안종주
과학칼럼니스트

글쓴이는 서울대학교 미생물학과 졸업 후 서울대 보건대학원에서 석사・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신문 과학기자, 한겨레 보건복지전문기자를 지냈으며. 현재 <프레시안>에 ‘안종주의 건강사회’를 연재하고 있으며 <내일신문> 에 ‘세상읽기’와 과학・환경 분야 서평을 정기적으로 쓰고 있다.

 

 

THE SCIENCE & TECHNOLOGY

2014 + 03 과학과 기술

 

 

 

 

 

 

 

위대한 설계

 

스티븐 호킹,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 지음,

 

‘시간의 역사’로 우리에게 익숙한 영국의 우주론학자 스티븐 호킹이 ‘춤추는 술고래의 수학 이야기’로 알려진 미국의 물리학자 레오나르드 믈로디노프와 함께 신에 대한 새로운 불씨를 지피기 위한 책을 내놓았다.

현대 물리학의 새로운 발전을 수용하지 못하는 ‘철학은 끝났다’는 도발적인 주장도 있고, ‘신이 우주를 창조하지 않았다’는 더욱 도발적이고 자극적인 주장도 담겨있다. 세계적인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가 몇 년 전에 내놓았던 ‘만들어진 신’에서 우리의 우주와 생명의 복잡성을 설명하기 위해 굳이 초자연적인 신의 존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했던 주장과 맥을 같이 한다.

 

횃불을 든 물리학자들을 따라야

 

스티븐 호킹은 최종 이론의 꿈이 반드시 달성될 것이라고 믿는다. 우주는 언제 시작되었고, 우리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이고, 세상에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존재하고, 실재의 본질은 무엇이고, 자연법칙이 생명의 존재를 허용할 정도로 정교하게 조정된 이유를 밝혀내는 것이 호킹의 꿈이고 소망이다.

이제 물리학이 전통적으로 철학과 신학의 영역으로 여겨져 왔던 영역에 과감하게 도전할 수 있는 준비를 갖췄다는 것이 과격한 호킹의 주장이다. 오늘날 ‘지식을 추구하는 인류의 노력’에서 ‘횃불을 들고 있는 물리학자’들이 찾아낸 ‘진리에 대한 새로운 생각’에 우리 모두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진리에 대한 우리의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에 양자론이 등장하면서부터였다. 우주의 모든 것이 잘 정의된 경로에 따라 움직이고, 분명하고 확실하게 정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전통적인 우주관은 우리가 ‘눈을 뜨고 보는 이성의 세상’을 충분하게 설명해준다. 그러나 20세기가 시작되면서 우리 앞에 나타나기 시작한 원자와 아원자의 세계에서는 전통적인 우주관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새로 펼쳐진 미시 세계가 ‘눈을 감고 보는 감성의 세계’에 속한다고 주장할 수도 없다. 단순히 우리가 미시 세계를 볼 수 있는 새로운 기술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갑자기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도 아니다.

 

역사에 대한 전혀 새로운 인식

 

지금까지 우리가 미시 세계에 대한 양자론의 특성 중에서 가장 가볍게 여겼던 것이 역사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노벨 물리학상을 받고 우리에게 다양한 대중 서적으로 익숙하게 알려진 천재 이론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의 지적이 바로 그런 것이다. 양자역학적인 미시 세계의 시스템은 하나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모든 역사’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시스템의 역사는 우리가 관찰을 시작함으로써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게 되는 기묘한 이야기일 뿐이다.

 

우리의 우주도 예외일 수가 없다. 우주 자체도 단일한 역사를 가진 것이 아니라 심지어 독립적인 존재도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런 결론이 우리의 일상적인 상식과는 맞지 않는 것이고, 눈을 감고 보는 세상에서도 쉽게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의 상식이나 상상의 세계가 미시적인 원자의 세계나 우주 탄생 직후의 과거를 만족스럽게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진실이다. 우리가 그런 진실을 외면하고 우리 자신의 상식과 상상력만 고집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결국 미시 세계와 우주 탄생 직후의 모습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른바 ‘모형 의존적 실재론’을 선택할 수 밖에 없다. 동일한 물리적 상황을 서로 다른 근본 요소와 개념으로 모형화할 수 있다면, 그런 모형들은 모두 대등하게 실재적이라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모형들 중에서 더 편리한 모형을 선택해서 활용할 수밖에 없다.

 

최종이론의 꿈

 

과연 우리가 우주에 관한 최종 이론, 즉 모든 힘을 아우르고, 우리가 관찰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예측하는 이론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언제까지나 조금 더 나은 이론을 발견하는 일만 되풀이하게 될 것인가? 이런 질문에 대한 확정적인 답을 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정말 최종적인 만물의 이론이 존재한다면 그 후보는 당연히 M-이론이 될 것이 틀림이 없다. M-이론은 최종 이론이 갖춰야 할 것으로 생각되는 모든 속성을 갖춘 유일한 모형이기 때문이다. 이제 물리 세계 전체에서 얻어진 관찰을 모두 충실하게 재현해주고 설명해주는 단일한 이론이 존재해야 할 이유는 없다.

 

M-이론이 전해주는 천지창조에 대한 이야기는 충격적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세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우주가 되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그 시작이다. 아무 것도 없는 무에서 무수히 많은 우주들이 탄생할 수 있다는 것이 M-이론의 핵심이다. 양자 요동에 의한 우주 탄생을 위해 초자연적 존재나 신의 개입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 현재와 같은 우주와 생명의 탄생을 위해 반드시 절대적 능력을 가진 초월적 신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우주들의 모습이 모두 똑같은 역사를 걸어야 할 이유도 없다. 우주들마다 과학적으로 예측이 가능한 모든 역사와 모든 미래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경험해서 알고 있는 우주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우주들이 훨씬 더 많을 것이 분명하다. 확률론적으로 그렇다. 그런 우주에 생명이 존재할 가능성은 더욱 낮다.

더욱이 우리처럼 우주와 생명의 기원과 실재의 의미를 알고 싶어 하는 지능을 가진 생명이 존재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소중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호킹은 ‘논리에 대한 추상적인 숙구에 의해서 우리가 보는 놀라운 다양성으로 가득 찬 광활한 우주를 예측하고 기술하는 유일무이한 이론’에 해당하는 우주의 ‘위대한 설계’를 관찰에 의해 입증할 수 있다면 3천 년이 넘게 이어져온 과학적 탐구의 가장 성공적인 결과가 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그리고 M-이론이 우리의 그런 꿈을 실현시켜 줄 것이라고 믿는다.

 

최종 이론에 대한 전혀 다른 주장도 있다. 최근에 다트마우스 물리학과의 석좌교수인 마르셀로 글레이서가 내놓은 ‘최종 이론은 없다’가 바로 그런 책이다.

우주는 태초부터 지극히 복잡하고, 비대칭적이고, 불규칙하고, 불균형적이었고, 그런 우주에서 최종 이론은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고, 그런 이론이 우리의 궁극적인 종착역이 될 수도 없다고 주장한다. 과연 어느 주장이 옳은 것인지는 두고 볼 수밖에 없다. 어쨌든 천지창조를 위한 절대적 존재의 필요성은 그리 크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아안슈타인이 의문을 제기했던 ‘인간을 위한 신’의 존재는 여전히 과학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다.


 

『시간의 역사』 VS 『블랙홀 전쟁』


한 권의 책을 내용 중심으로 소개하던 일반적인 서평 쓰기에서 벗어나 물리학의 역사에서 이정표 역할을 했거나 물리학을 대중화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책들을 중심으로 인물 대 인물, 이론 대 이론, 이론 대 현실(혹은 상상), 명강의 대 명강의 등 두 권의 책을 비교분석하는 코너입니다.

 

 

 

 

블랙홀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호킹 대 서스킨드의 한판 승부!

아인슈타인 다음으로 일반인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물리학계의 슈퍼스타 스티븐 호킹, 그에게 도전장을 던진 인물이 있다?! 우주의 신비 블랙홀, 그 미스터리를 풀고자 몸을 던진 두 과학자의 진검승부를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시간의 역사>와 <블랙홀 전쟁>은 함께 책 대결을 펼치기에 안성맞춤은 아니다.

<블랙홀 전쟁>은 그 제목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듯 뭔가 한 가지 뚜렷한 입장을 내세워 싸움을 걸고 논쟁을 하기 위한 책이지만 <시간의 역사>는 우주와 삼라만상에 대해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개괄적으로 해설한 책이다. 그럼에도 이 두 책이 하나로 묶인 것은 블랙홀 전쟁의 ‘주범’이 바로 스티븐 호킹이었고, 그의 대표저작인 <시간의 역사>를 통해 그가 전쟁을 일으킨 배경을 추적해 볼 수 있을까 해서였다.

 

내가 이 책을 처음으로 읽은 (혹은 읽었다고 기억하는) 것은 20여 년 전인 1990년, 대학 신입생 때였다. 마침 그 해 스티븐 호킹이 한국을 방문했고 나는 그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당시 나는 그의 강연이나 <시간의 역사>를 거의 이해하지 못했다. 그 뒤 10년이 지난 뒤 나는 박사학위를 받았고 그로부터 또 10년이 지나서야 이 책을 다시 읽게 되었다. 지금의 시점에서 20년 전을 되돌아보면 대학 신입생이 <시간의 역사>를 이해한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이었다. 대학 신입생뿐만 아니라 심지어 물리학과 대학원생이더라도 전공자가 아니면 이 책의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쉽지 않으리라는 것이 내 판단이다.

<시간의 역사>를 읽고 조금이라도 좌절감을 느꼈다면, 그것은 여러분 탓이 아니다. 말하자면 한글로 쓰인 외국어 내지 외계어에 가깝지 않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전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됐다는 사실은 분명 미스터리한 일이지만, 물리학을 전공한 입장에서는 대단히 유쾌한(?) 일이기도 하다.

 

<시간의 역사>는 20세기 현대물리학의 위대한 성과를 고스란히 정리했다. 그렇다고 물리학의 모든 분야를 다룬 것은 물론 아니다. 물리학은 말 그대로 만물(萬物)의 이치(理致)를 따지는 학문이다. 만물에는 이 세상 모든 것이 포함된다. 가장 작게는 양성자나 중성자를 구성하는 쿼크 혹은 전자에서부터 크게는 관측 가능한 우주의 저 끝까지 그 모든 것이 물리학이 다루는 대상이다. <시간의 역사>는 그 중에서 역설적이게도 가장 작은 것(즉 쿼크나 전자 같은 기본입자들)과 가장 큰 것(대우주)을 다룬다. 그 중간단계에 해당하는 영역은 고체물리학이나 통계물리학일 수도 있고 혹은 분자 수준에서의 현상을 다루는 화학일 수도 있으며 생물학이나 지질학, 지구과학일 수도 있다.

 

놀랍게도 가장 큰 스케일의 우주와 가장 작은 스케일의 기본입자는 현대물리학의 두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을 통해 서로가 연결돼 있다.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과 여러 관측 결과들에 의하면 우주는 아인슈타인이나 그 이전의 여러 과학자들이 생각했던 것처럼 영원히 정적으로 머물러 있지 않고 시간에 따라 팽창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팽창하는 우주의 발견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발견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우주가 시간에 따라 계속 팽창하고 있다면, 시간을 거꾸로 돌렸을 때 우주는 아주 작았을 것이다. 이런 생각을 끝까지 밀고 나가면 우주는 태초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높은 밀도를 가진 하나의 점에서 시작했다고 추론할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이것이 빅뱅이론이다.

우주가 태초에 밀도가 높은 하나의 점에서 시작했다는 것은 우주의 공간과 시간조차도 그때 함께 태어났다는 말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과 공간의 개념을 가지고서 빅뱅 ‘이전’을 논하기에는 무리한 점이 있다. 만약 우주보다 더 큰 ‘범우주’라는 것이 있어서 범우주의 여기저기에서 빅뱅을 통해 새로운 우주들이 생겨난다면, 그렇게 생겨난 우주의 시간과 공간이 우리 우주의 시간이나 공간과 꼭 같을 이유는 없을 것이다. (심지어 시공간이라는 개념 자체가 있을지도 모르고, 모든 물리법칙조차 다를지도 모른다.)

스티븐 호킹이 ‘시간의 역사’라는, 다소 역설적인 제목으로 이 책을 쓴 것은 우리가 일상에서 경험하는 시간이 빅뱅과 함께 시작되었고 그 역사를 과학적으로 추적할 수 있음을 보이기 위함이었다.

 

원자 이하의 미시세계를 들여다보는 인식의 도구는 양자역학이다. 시기적으로는 양자역학이 1901년 독일의 막스 플랑크가 흑체복사를 성공적으로 설명한 것에서부터 시작되어 1905년 아인슈타인이 플랑크의 가설(광양자 가설)을 받아들여 분석한 광전효과(금속에 빛을 쬐면 전자가 튀어나오는 현상)를 거쳐 1925년과 26년 하이젠베르크와 슈뢰딩거가 각각 행렬역학과 파동역학을 완성한 것으로 구축되었다.

반면 상대성이론은 1905년 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하면서 시작되었고 1915년 역시 아인슈타인이 일반상대성이론을 발표하면서 완성되었다. 일반상대성이론은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을 대체한 현대적인 중력이론이다

 

만약 초기 우주가 원자보다 작은 크기였을 때가 있었다면 그 시기를 설명하는 올바른 과학이론은 기본적으로 양자역학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한편 이 때에는 매우 작은 부피에 엄청난 질량과 에너지가 집중돼 있을 것이기 때문에 중력 또한 무척이나 중요할 것이다. 따라서 초기 우주는 양자역학과 일반상대성이론을 모두 동원해야만 과학적인 분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아직까지 양자역학과 일반상대성이론은 서로를 배척하는 성질이 있어서 하나의 통합된 이론으로 정립되지 못했다. (특수상대성이론은 양자역학과 잘 결합할 수 있어서 양자장론이라는 성공적인 이론을 이미 구축하였다.)

 

꼭 초기우주가 아니더라도 최근에는 소립자 물리학과 우주론이 활발하게 상호침투하면서 각자가 서로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양자역학이 지배하는 미시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결과적으로 우주의 구성물 형성과 대우주의 진화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우주에서 관측한 다양한 결과들이 소립자 물리학에 강력한 제한조건을 주기도 한다. 1970년대 말 이휘소의 말년 작업도 이와 관련이 있었다.

 

지금까지 말한 이유들 때문에 시간의 역사를 기술하기 위해서는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 우주론, 입자물리학이 총동원되어야만 했다.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은 모두 20세기를 대표하는 물리학적 쾌거로 인간 인식의 혁명적 단절을 가져왔다. 그래서 <블랙홀 전쟁>에서 서스킨드가 적절하게 지적했듯이 거시세계에서의 생존에 적합하게 진화해 온 우리가 이 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경회로를 재구성할 정도의 혁신적인 사고의 전환이 있어야만 한다. <시간의 역사> 독자들이 이 책을 어렵게 느낀 근저에는 이런 이유가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시간의 역사>에서도 블랙홀은 빠질 수 없다. 블랙홀은 아마도 인간이 찾아낸 (이론적으로든 실험적으로든) 가장 독특한 천체일 것이다. 호킹의 가장 중요한 업적들 가운데 하나가 블랙홀이 열을 내며 복사한다는 사실이다. 이 현상은 호킹의 이름을 따서 ‘호킹복사’라고 부른다. 호킹복사는 블랙홀과 양자역학을 결합시킨 결과이다. 호킹에 의하면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 정보는 호킹복사를 통해서도 온전히 그대로 빠져나오지 않고 블랙홀 안에서 손실된다. 그러나 양자역학에 의하면 정보는 언제나 보존된다. 블랙홀에서의 정보역설(information paradox)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블랙홀 주변에서의 양자효과를 통해 호킹복사를 발견한 당사자가 양자역학의 기본원리에 반하는 정보손실을 주장했다는 사실 자체도 역설이라면 역설이지 않을까.

아쉽게도 <시간의 역사>에서는 블랙홀에서의 정보손실 및 그와 관련된 역설을 깊게 다루지는 않았다. 일반 독자들에게 시간의 역사를 개괄하는 책에서 그런 골치 아픈 문제까지 내던지기는 싫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시간의 역사>는 초판이 1988년, 개정판이 1996년에 나왔기 때문에 그 이후의 엄청난 과학적 성과들을 반영하지는 못하고 있다. 우선 1998년 초신성을 분석한 결과 우리 우주는 가속팽창하고 있음이 밝혀졌다(2011년 노벨상).

가속팽창이란 우주가 팽창하는 정도가 시간에 따라 점점 더 빨라지는 현상이다. 이 결과는 이후의 다른 관측에 의해서도 뒷받침되었다. 그리고 2001년 발사된 과학관측위성인 WMAP(Wilkinson Microwave Anisotropy Probe)이 수년간에 걸쳐 모은 우주배경복사에 대한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그 이전에 알 수 없었던 많은 사실들과 함께 새로운 의문들을 내던졌다.

먼저, 우주의 나이는 약 137억 년으로, 이 오차는 1%도 채 되지 않는다. 2000년대에 들어서 우주과학은 바야흐로 정밀측정의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또한 우리 우주 속의 에너지 분포는 매우 절묘해서 그 밀도는 중력에 의한 수축이 다시 일어나지 않는 최소한의 밀도와 거의 같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 또한 예전에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높은 정밀도(1% 이내의 오차)로 측정되었다. 중력수축이 일어나지 않는 최소한의 밀도를 임계밀도라고 하는데, 이때 우주의 공간은 평평하여 곡률이 0이다. 만약 에너지 밀도가 임계밀도보다 높다면 우리 우주는 공처럼 곡률이 양인 공간이 될 것이며 임계밀도보다 낮다면 말안장처럼 곡률이 음인 공간이 될 것이다.

 

이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그 에너지 밀도의 구성성분이다.
우리가 아는 물질은 그 중에서 전체의 4.6%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물질(matter)임에는 분명하나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물질, 즉 암흑물질이 전체의 23.3%에 달하며 나머지 72.1%는 반중력의 효과를 내는 암흑에너지임이 밝혀졌다. 우주가 가속 팽창하는 것은 바로 이 암흑에너지 때문이다. 우주상수는 암흑 에너지의 유력한 후보 가운데 하나이다. 우주상수는 아인슈타인이 정적인 우주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방정식에 임의로 집어넣은 항으로서 우주공간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음의 압력을 가진 에너지 밀도에 해당한다.

우주상수는 말 그대로 시간에 대해 항상 일정한 값을 가지는 상수이므로, 암흑에너지가 과연 시간에 대해 일정한 값을 가지는가를 따져보면 “우주상수 = 암흑에너지”인가에 대한 단서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론적인 면에서 보자면 1997년 말다세나가 AdS/CFT를 발표한 것이 가장 큰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AdS/CFT는 반드 지터(Anti de Sitter) 공간에서의 중력이론이 그보다 한 차원 낮은 표면에서의 등각장론(Conformal Field Theory) 사이의 대응관계로서, <블랙홀 전쟁>에서 소개됐듯이 블랙홀 전쟁을 종결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이에 따르면 중력이론과 양자장이론은 근본적으로 동등하기 때문에 블랙홀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양자역학적 이론으로 기술이 가능하다.

 

20세기 말∼21세기 초의 이런 엄청난 과학적 성과들 때문에 나는 <시간의 역사> 개정판이 몇 년 뒤에 나왔으면 얼마나 더 흥미진진했을까 싶은 아쉬움이 있다. 호킹도 아마 새로운 성취들을 잘 알고 있었을 테니까 <시간의 역사>의 저자로서 무척이나 할 말이 많지 않았을까?

 

과학적 활동은 한마디로 말해 What? How? 그리고 Why?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다. What은 어떤 현상이나 대상의 정체에 대한 답이고 How는 그런 현상이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한 답이며 Why는 왜 그런 현상 혹은 대상이 존재하는가에 대한 답이다. 예컨대 암흑물질이나 암흑에너지는 What에 대한 답이 우선 필요한 대상이며 초기 우주의 빅뱅이나 급팽창(inflation)은 어떻게 그런 일들이 일어났는지 How에 대한 답이 필요한 현상들이다. 아마도 종국적으로 우리가 대답해야 할 질문은 “왜(Why) 우주라는 것이 존재하는가?”일 것이다. 호킹이 <시간의 역사> 결론에서 이 질문을 던진 것도 같은 맥락이다.

 

21세기 물리학이 풀어야 할 가장 중요한 문제도 이 질문에 답을 구하는 일일 것이다. 아마도 이 질문에 만족할만한 답을 얻으려면 우주의 시초라고 여겨지는 빅뱅을 더 잘 이해하는 것이 필수불가결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앞서 말했듯이 중력을 양자역학적으로 완전히 이해할 필요가 있다. 최근 이 분야(양자 중력)에 대한 연구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으므로 머지않은 미래에 획기적인 돌파구가 마련되지 않을까 조심스레 기대해 본다. 시간의 역사를 온전히 재구성하는 문제는 그래서 여전히 물리학의 가장 중요한 과제 가운데 하나이다.


“우주와 관련해서 가장 이해하기 힘든 것은 우주가 이해 가능하다는 점이다.” ― 아인슈타인

 

 

블랙홀 전쟁 승전 잔치로의 초대

[서평자 / 이창환(부산대학교 물리학과 교수)]

 

깊이 파려면 넓게 파라는 말이 있다. 기초가 튼튼해야 한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한다. 서스킨드 교수의 <블랙홀 전쟁>은 블랙홀에서의 호킹복사와 정보 보존이라는 특정 주제를 깊이있게 다룬 책인 동시에 양자역학, 상대성이론 및 초끈이론의 폭넓은 내용을 넓은 통찰력으로 쉽게 풀어간 책이다. 또한 이 책은 해결해야 할 문제를 두고 고민하고 노력하는 한 과학자의 삶에 대한 진솔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때로는 오만해 보이기도 하는 저자의 자기 확신은 오히려 저자의 고민과 노력의 산물임을 느끼게 해 주었다. 중간 중간 소개된 물리학자들에 대한 에피소드는 책을 읽는 재미를 더해 주었다.

이 점이 스티븐 호킹의 <시간의 역사>와 크게 대조를 이루는 점이다. 호킹의 <시간의 역사>가 블랙홀, 호킹복사, 빅뱅우주, 시간의 탄생 및 흐름과 같은 우주론의 주요 문제를 모두 다룬 조금 건조한 교양입문서에 해당한다면, 서스킨드의 <블랙홀 전쟁>은 호킹복사와 정보역설(Information Paradox)을 둘러싼 학자들의 논쟁을 다룬 한 편의 다큐멘터리에 해당한다. <블랙홀 전쟁>을 읽으면서 블랙홀 전쟁의 승전 잔치에 초대된 느낌을 받았다.

 

내 전공 분야는 중성자별(Neutron Star)이다. 중성자별에 질량을 더하면 블랙홀로 붕괴할 수 있으므로 블랙홀이 내 전공에 포함이 되어 있지만 <시간의 역사>나 <블랙홀 전쟁>에서 다루는 양자 중력(Quantum Gravity)이나 초끈이론(Superstring Theory)의 관점에서 바라본 블랙홀은 아니다. 처음 이 에세이를 제안 받았을 때 거절을 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 책이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만큼 양자 중력이나 초끈이론을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연관된 분야에서 연구하는 과학자의 의견을 듣는 것도 도움이 되리라 믿는다.

 

대학교 콜로퀴엄이나 중고등학생을 위한 강연을 할 때마다 항상 고민하는 두 가지가 있다. ‘나는 과연 정확한 과학적 사실을 전달하고 있는가’와 ‘청중들이 내 강연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가’이다.

전자가 내용에 관한 고민이라면 후자는 전달과 소통에 대한 고민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종종 비유를 사용한다. 하지만, 비유는 언제나 완벽하지 않아서 또 다른 모순을 포함할 수 있으므로, 강연준비의 많은 부분이 적절한 비유를 선택하는 데 사용된다. <블랙홀 전쟁>에서도 많은 비유를 사용하여 설명을 하고 있다. 저자가 비유를 통하여 복잡한 물리현상을 설명하는 방법을 감상하면서, 물리학 전반에 대한 저자의 통찰력과 대중과 소통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난해한 개념들을 그림과 비유로 풀어가는 명쾌한 논리적 전개에 매료되었다. 저자가 깊이와 넓이를 모두 갖춘 학자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의 모든 내용을 한 번에 이해할 수 있는 독자는 많지 않을 것이다. 이론 물리를 전공한 나로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에세이를 통해 독자들을 블랙홀 전쟁의 승전 잔치로 이끌 수 있기를 희망한다. 역자도 ‘신경망 재배선’이란 용어를 통하여 강조했듯이, 불완전한 인간의 직관보다는 새로운 것에 대한 열린 마음으로 이 책을 읽기를 바란다. 독자들도 이 책의 저자가 보고 있는 새로운 세상을 부분적으로나마 경험하기를 바란다.

 

블랙홀과 호킹복사

 

1974년 호킹은 블랙홀도 빛을 방출하면서 증발(evaporate)할 수 있다는 논문을 발표하여 블랙홀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뒤집었다. 블랙홀에서 빛이 방출되는 현상은 그의 이름을 따서 ‘호킹복사(Hawking Radiation)’로 불려진다. 블랙홀과 호킹복사는 무엇인가.

 

1915년 발표된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General Relativity) 이론에 의해 빛이 중력의 영향으로 휘는 것이 예측되었고, 1919년 개기 일식(total eclipse) 때 별 빛이 태양의 중력에 의해 휘는 것이 관측으로 확인되었다. 현재는 중력렌즈(Gravitational Lens) 효과를 통하여 먼 은하에서 오는 빛이 휘어서 만들어진 아인슈타인 링(Einstein Ring), 아인슈타인 십자가(Einstein Cross), 등을 통하여 빛이 휘는 것이 확인이 되고 있다. 빛이 휘는 정도는 중력의 원인이 되는 천체의 질량에 비례하므로, 질량이 매우 커서 빛조차 빠져 나올 수 없는 블랙홀의 존재 가능성이 예측되었다. 빛이 빠져 나올 수 없는 블랙홀 경계면을 사건의 지평선(event horizon)이라 부르는데, 일반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사건의 지평선 안쪽으로 들어간 어떠한 물체도 밖으로 빠져 나올 수가 없다.

 

현재, 위성탑재 천체망원경 및 광학망원경 관측을 통하여 블랙홀의 존재가 확인이 되고 있다. 우리 은하를 비롯하여 대부분의 은하 중심에는 거대 블랙홀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또한, 태양의 약 10배 질량을 가진 블랙홀들도 다수 관측으로 확인이 되었다. 블랙홀의 존재가 확인이 된 만큼, 블랙홀 주위에서 일어날 것으로 예측되는 현상들은 현대 천체물리 및 우주론의 핵심 주제가 되었다.

 

이론적인 측면에서도 블랙홀 연구에 많은 진전이 이루어졌다. 블랙홀은 질량(mass), 전하(charge), 스핀(spin) 외에는 다른 물리량을 가질 수 없다는 정리(No Hair Theorem)가 제안되었으며, 사건의 지평선 면적은 감소하지 않는다는 블랙홀의 성질이 제안되었다. 블랙홀 사건의 지평선 면적은 질량에 비례하므로 블랙홀 질량이 감소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결과이다.

 

그런데, 1974년 호킹의 제안으로 블랙홀에 대한 기존의 인식이 바뀌게 되었다. 블랙홀이 빛을 방출하여 증발한다는 그의 제안은 블랙홀 연구의 역사를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만 하는 블랙홀이 어떻게 증발할 수 있을까. 그 답은 양자역학(quantum mechanics)에 있다.

 

상대성이론이 빛의 속도로 달리는 물체나 별, 은하, 우주와 같이 거대 세계에 적용되는 법칙인 반면, 양자역학은 핵 및 전자와 같은 매우 작은 세계에 적용되는 법칙이다. 양자역학에 의하면 진공은 입자-반입자 쌍의 생성(creation)과 소멸(annihilation)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공간이다. 이 진공의 변화들은 매우 작은 공간에서 너무 빠르게 일어나 인간 인식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다. 호킹의 위대한 업적은 양자역학적 진공(vacuum)의 성질을 블랙홀 주위 진공에 적용한 것이다. 블랙홀 사건의 지평선 근처의 진공에서는 지평선으로부터의 거리가 조금만 차이가 나도 중력차이가 매우 크다. 사건의 지평선 근처에서 생성된 입자-반입자 쌍 중의 한 입자 또는 반입자가 블랙홀의 강한 중력에 의해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고, 남은 하나가 블랙홀을 벗어날 수 있는 있다는 것이 호킹에 의해 밝혀졌다. 이때 블랙홀은 진공의 입자-반입자 쌍을 깨는데 에너지를 소모하여, 결국 블랙홀을 벗어난 입자 또는 반입자의 에너지에 해당하는 만큼 질량이 줄어들게 되는 것이다. 빛이 가장 가벼운 입자이므로, 블랙홀은 대부분 빛을 방출하면서 질량이 줄어서 결국에는 증발하게 되는 운명을 타고 난 것이다.

 

 

<블랙홀 전쟁>과 <시간의 역사>

 

1983년 샌프란시스코의 한 학회에서 호킹은 “블랙홀이 증발할 때 정보가 사라진다”는 폭탄선언을 함으로서 ‘호킹복사와 정보소실’을 둘러싼 블랙홀 전쟁이 시작되었다. 무엇이 문제인가.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 물체는 많은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
호킹의 이론에 의하면 호킹복사는 진공의 성질에 의해 무작위로 일어나므로 특정한 정보를 포함할 수 없다. 즉, 블랙홀이 호킹복사를 통해 증발하는 과정에서는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 물체의 어떠한 정보도 외부로 방출될 수 없다. 궁극적으로 호킹복사로 블랙홀이 사라진다면, 블랙홀로 들어간 정보 자체가 우리 우주에서 사라지는 것이다. 이것이 ‘호킹복사와 정보소실’ 이다. 블랙홀의 존재가 확인이 된 만큼, 호킹의 이론이 맞는다면 우주 어딘가에서 정보가 조금씩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시간의 역사>에서는 호킹복사와 정보소실 문제를 크게 부각시키지는 않았다.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 우주비행사의 운명과 관련하여, “우주 비행사가 가지고 있는 특성 중에서 (호킹복사로 블랙홀이 증발된 후에) 유일하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그의 질량과 에너지뿐이다”는 표현을 통하여 정보 소실 문제에 대한 그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호킹 스스로가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인 만큼, 승리의 확신에 차서, 문제점을 부각시킬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1988년 첫 출판된 후 1996년 개정된 호킹의 <시간의 역사>에서는, 실시간(real time)을 사용하면 빅뱅의 시작이나 블랙홀의 중심에 특이점(singularity)이 존재하고 이 특이점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물리법칙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즉, 양자역학에 기초한 에너지 보존 법칙을 특이점에서는 적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유한한 에너지를 특이점과 같은 좁은 공간에 가두어 둘 수 없는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uncertainty principle)는 중력과 양자역학을 통일하고자 하는 호킹의 이론에서는 반드시 해결해야 할 문제였다.
호킹은 특이점 문제와 양자 중력의 불확정성 문제를 동시에 해결하기 위하여 허수시간(imaginary time)을 도입하였다. 허수 시간을 도입하면 특이점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허수시간의 물리적 의미는 무엇일까.

 

호킹복사를 통해 정보가 사라질 수 있다는 호킹의 주장은 이론 물리학자들 사이에 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블랙홀 전쟁>의 저자인 서스킨드는 호킹에 반기를 든 대표적인 학자이다.

엑스선 망원경을 통하여 블랙홀의 존재가 확인된 시점에서, 블랙홀을 통하여 정보가 사라질 수 있다는 호킹의 이론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모든 물체의 운동은 반응 전후에 정보가 보존된다는 양자역학에 근거하고 있다. 양자역학에 의하면, 블랙홀도 우주에 존재하는 한 물체이므로, 호킹복사를 통해서도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 물체의 정보가 보존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호킹복사를 통해 정보가 사라지면 양자역학의 기본법칙이 깨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킹의 이론에 모순이 있음을 밝히는 것은 쉬운 작업이 아니어서 오랜 시간의 투쟁을 거쳐야만 했다.

 

20여 년의 전쟁 끝에 2007년 호킹은 호킹복사에서의 정보 소실에 관한 자신의 패배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정보를 잃어버린 호킹복사’가 아니라 ‘정보를 보존하는 호킹복사’가 가능하다는 초끈이론의 결과에 결국 항복한 것이다. 2008년 출판된 (2011년 한글 번역본 출판) 서스킨드의 <블랙홀 전쟁>은 이 전쟁의 역사를 승자의 입장에서 명쾌하게 기술한 책이다.


<시간의 역사>는 블랙홀 전쟁이 끝나기 훨씬 전에 쓰인 고전으로, 호킹 복사가 그림과 함께 쉽게 요약되어 있다. 하지만, 블랙홀 정보 소실과 같은 특이점에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허수 시간은 독자들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 중의 하나이다. 이런 점에서 2008년에 쓰인 서스킨드의 <블랙홀 전쟁>은 보다 명확하고 이해하기 쉬운 방법으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 2007년 호킹이 공식적으로 패배를 인정한 만큼, 전쟁이 끝난 뒤 승리자에 의해 쓰인 <블랙홀 전쟁>이 보다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이다.

 

<시간의 역사>에서 10년 뒤 호킹이 스스로 패배를 인정한 결정적인 계기가 된 초끈 이론의 가능성을 소개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 부분과 비교하면서 <블랙홀 전쟁>의 후반부에 소개된 초끈이론에 관한 최근 연구 동향을 읽는다면, <시간의 역사>가 쓰인 이후의 초끈 이론의 발전사를 엿 볼 수 있을 것이다.

<블랙홀 전쟁>을 읽으면서 초끈으로 뒤덮인 채 나타난 블랙홀을 보는 것은 내겐 너무나 큰 즐거움이었다. 정보를 가지고 있는 이 끈 조각들이 지평선에서 분리되면서 호킹복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다차원 이론인 끈 이론을 멋지게 시각화하는 그의 비유들만으로도 이 책의 가치는 충분하다”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리뷰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바이다. 승리의 무기가 된 초끈 이론의 이중성(duality), 홀로그램(hologram), 등에 대해서는 독자들 스스로 <블랙홀 전쟁>을 읽으면서 그 의미를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기를 바란다.

 

블랙홀 승전 잔치를 향한 바람

 

<블랙홀 전쟁>의 에세이를 써야하는 의무감에서 출발하긴 했지만 이 책의 독자가 된 것은 행운이었다. 내 인식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위대한 두 물리학자 호킹과 서스킨드의 책을 읽으면서 아쉬움이 남았다. 한국인 중에서 이들처럼 세계를 뒤흔들 학자들은 언제 나타날까.

이휘소 박사가 살아있었다면 한국 물리학계의 역사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등등.

 

블랙홀을 둘러싼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이 책에 소개된 전쟁 외에도, 감마선 폭발 천체(Gamma-ray Bursts), 극초신성(Hypernovae), 중력파검출(Gravitational Wave Detection)등 새로운 관측 결과를 둘러싼 크고 작은 전쟁이 오늘도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

 

우리의 젊은 과학자들을 위한 블랙홀 승전 잔치를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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