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물리학자 이휘소의 삶과 죽음
노벨상에 가장 근접했던 한국인
'게이지 이론'과 '매혹입자'로 소립자물리학연구의 선두에 서있던 이휘소박사는 77년 6월16일 급작스런 자동차사고로 사망했는데…
1977년 6월18일 중앙일보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싣고 있다. '소립자물리학의 현대이론을 발전시키는데 기여한 한국 출신의 이론물리학자 벤자민 리 박사(42)가 16일 일리노이주 남부에서 자동차사고로 사망했다. 미국에 귀화한 이박사는 시카고 근처의 국립 페르미가속장치연구소의 이론물리학 책임자였으며 시카고대학교 물리학 교수였다. 페르미연구소가 발표한 성명에 따르면 이박사는 콜로라도주의 한 과학회의에 참석차 여행하다 자동차사고를 당했다 한다. 이박사의 죽음에 대해 국내과학자들은 한결같이 "한국인으로 노벨상을 탈 수 있는 가장 유망한 과학자였는데…"라며 말끝을 맺지 못했다.(후략)'
이어 7월4일 조선일보는 이박사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20일전 미국서 우리 물리학의 거두인 벤자민 리가 '자동차사고로 죽었다'고 로이터 통신이 보도했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상보(詳報)가 없다. '콜로라도주의 과학회의에 가던 길에 일리노이주 남부에서 사고를 당했다'는 페르미연구소의 말만 보도되었다. 며칠전 국회에서 '단순한 교통사고냐'는 질문이 마침내 나왔다. 1968년 미국 시민이 되었으나 4년전 고국을 다녀간 뒤부터 '이제부터는 조국을 위해 일할 때'라고 입버릇처럼 되뇌었으며, 그가 내년 4월 귀국할 것으로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소립자 이론이라지만 그것은 최근 연구가 진척중이고 핵물리학 관리쯤은 이미 마스터한지 오래라는 것, 순수 이론물리학자였던 미국의 오펜하이머가 사실상 2차대전중 원폭제조의 지도자였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의 능력이 어떤 것인가는 쉽게 알 수 있다… 재미 2백50명 과학자들을 위해서도 우발사고인지 분명해져야 한다.'
비운의 물리학자 이휘소
핵개발의 「희생양」이었나?
벤자민 리, 한국명 이휘소(李輝昭). 그는 한국이 낳은 가장 촉망받는 이론물리학자였으며, 당시 물리학분야의 첨단학문이었던 소립자물리학에서 세계 물리학계의 석학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아 '한국인 최초의 노벨상감'으로 기대를 한몸에 모으고 있었다. 그런 과학자가 한창 연구할 42세의 아까운 나이에 미국땅에서 급작스런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휘소의 사망소식이 보도된 이후 항간에는 그의 죽음을 둘러싼 뜬 소문이 무성했다. 처음에는 활짝 피지 못하고 비명에 간 그의 재질을 안타까워하는 얘기들이 주종을 이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당시의 불편했던 한미(韓美)관계와 그의 죽음을 연관시키려는 해석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70년대 후반 박정희 정권은 독자적인 핵무기개발을 추진하고 있었고 미국 정부는 이를 중지시키려고 여러 경로로 압력을 가하고 있었다. 더구나 박동선사건과 청와대 도청사건 등으로 양국 정부는 감정적인 대립으로까지 발전해 있었다. 이런 시기에 미국에서 활약하던 한국인 물리학자가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고 그 경위가 자세하게 국내에 알려지지 않았으니 갖은 억측이 난무할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는 2차대전중 원폭제조를 총지휘했던 핵물리학자 페르미를 기념해 만든 페르미연구소의 이론물리부장이었으며, 당시 활발했던 해외과학자들의 국내유치계획에 따라 '조만간 귀국할 것'으로 알려져 있기도 했다. 따라서 '이휘소가 귀국하면 한국의 핵무기개발에 중추적인 역할을 할 것이고 이를 우려한 미국측이 의도적으로 그를 제거했다'는 소문이 차츰 설득력을 더해갔다.
그러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이휘소란 이름은 역사의 장으로 넘어갔고 세인들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져갔다.
그런데 89년 11월 '핵물리학자 이휘소'란 책이 공석하씨(시인, 덕성여대 평생교육원 교수)에 의해 출간됐다. 책에서 공씨는 박대통령이 수차례 이휘소에게 친서를 보내 핵무기개발을 도와달라고 부탁했고, 이휘소는 이를 받아들여 77년 5월 일본에 들렀을 때 자신의 다리뼈속에 마이크로 필름을 숨겨와 한국정부측에 전달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휘소의 죽음은 사고사가 아니라 이를 눈치챈 미국측이 사고를 위장해 주도면밀하게 살해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제자 강주상의 결혼식 피로연에서(71년). 왼쪽부터 강주상 이휘소 마리안느
공씨, 「픽션」임을 인정
이 책이 나오자 국내에 있는 이박사의 유족들과 제자인 강주상 교수(고대 물리학과)는 공씨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 공씨도 자신이 쓴 책의 상당부분이 허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서점에서 책을 거두어 들였으며 유족들과 강교수에게 사과의 뜻을 전했다.
그렇다고 해서 이휘소의 죽음에 관한 모든 의혹이 말끔히 해소된 것은 아니다. 공씨는 기자와 만났을 때 "박대통령의 친서나 마이크로필름건은 당시 정황을 추측해 픽션으로 만들어 본 것"이라고 시인하면서도 "박대통령 사후 그의 메모록에서 이박사에 관한 짤막한 메모를 본 적이 있다"며 이를 근거로 '가상의 편지'를 집어넣게 됐다고 말했다.
이휘소의 죽음에 관한 의혹을 정리하면 △사고당시의 상황이 어떠했는가 △핵무기개발과 이휘소는 어떤 관계에 있었는가 △당시 그가 국내유치과학자 대상속에 포함돼 있었는가, 또 그러한 교섭이 진행되고 있었는가 등이다.
우선 사고당시의 상황을 살펴보자.
이휘소는 77년 6월16일 아침 콜로라도주 아스펜에서 열리는 한 과학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시카고를 출발했다. 그가 손수 운전했으며 차 안에는 부인과 두 아이가 함께 있었다. 차가 시카고 교외를 지나 일리노이주에 진입했을 때 맞은 편에서 오던 오일트럭에서 바퀴가 하나 빠져 무서운 속도로 이휘소를 향해 날아왔다.
이 바퀴는 차의 앞유리창틀을 때렸고 이어 이휘소의 머리에 치명타를 가했다. 이박사는 경찰에 의해 병원으로 옮겼으나 곧 숨졌다.
이박사 외에 다른 식구들은 별로 다치지 않았다. 이상은 사고직후 강주상교수(당시 미국에 있었음)가 이박사의 부인에게 들었다는 내용이다. 믿기 힘들 정도로 우연한 돌발 사고이지만, 역으로 그렇기 때문에 계획적인 공작이라고 보기는 더욱 어렵다는 강교수의 설명이다.
두번째는 핵무기개발과 이휘소와의 상관관계다. 이박사의 전공이 핵물리학에서 더 발전한 소립자물리학이며, 그가 재직하던 페르미연구소가 원폭제조의 공로자 페르미를 기념해 만들었으므로 이휘소가 원폭제조의 열쇠를 쥐고있는 것처럼 일반인들은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물리학자들은 주장한다.
원폭과 관련된 물리이론은 50년대 이후 모두 공개된 새로운 것이 없는 이론이며 원폭제조의 비결은 제조공정상의 문제에 있다는 것이다. 실제 박대통령은 핵무기개발을 위해 노력했지만, 플루토늄 재처리과정 등 핵공학과 화학공학을 전공한 학자들을 모으는데 관심을 쏟았다.
강주상교수는 "당시 페르미연구소는 출입이 자유로워 국가 기밀에 관한 연구를 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이박사의 연구과제도 이론적인 면에 치우쳐 있었다"고 회고한다.
마지막으로 당시 이박사를 국내에 유치하려는 시도가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이외관련 그의 대학동기인 안영옥씨('오린'대표, 화학공학)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74년 9월 휘소가 '서울대 AID차관단 타당성조사'차 귀국했을 때 대학동기들과 함께 만났다. 이때 휘소로부터 '국내로 돌아오라'는 권유를 받고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아마 KIST(당시 과학기술연구소)소장직을 제의 받은 것 같았다."
당시 이휘소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74.9.21)에서 '두뇌유출문제'에 관한 질문을 받고 "순수이론분야처럼 한국에서 연구하기 어려운 분야의 유능한 과학자에게는 여건이 좋은 외국에서 세계적 명성을 얻을 수 있게 정부에서 적극 도와줘야 한다"고 말해 당분간 귀국할 뜻이 없음을 비쳤다.
한편 70년대 과기처장관으로 해외과학자유치 사령탑이었던 최형섭박사는 "이박사를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그가 귀국하고 싶어 한다는 뜻을 전해들었다"고 말해 다소 상반된 증언을 했다.
아무튼 이휘소는 74년을 전후로 해서 귀국을 권유받거나 스스로 이 문제를 고민한 흔적은 있지만 국내에서는 아직 자신이 연구할 여건이 못된다고 판단한 듯 하다.
이러한 여러가지 정황을 놓고 볼 때 이휘소의 죽음을 70년대 핵무기개발과 연관시켜 해석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 기자가 만났던 과학자들은 대부분 이러한 의혹에 수긍하기 어렵다는 견해를 표명했다.
28세에 펜실베이니어대 정교수
지난해 '과학동아'는 '노벨상, 한국의 도전'(90년 11월호)이란 특별기획을 마련한 적이 있다. 이때 '노벨상에 가장 근접한 한국인이 누구냐'는 질문에 대해 많은 과학자들은 '이제까지 이휘소처럼 노벨상에 가까이 가본 사람이 없다'고 대답했다. 이휘소는 어떤 과학자이며 그의 학문적 업적이 어느 정도였길래 많은 사람들이 '노벨상감'으로 꼽기를 주저하지 않는 것일까.
이휘소는 193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이봉춘씨는 회사를 경영하다 그가 대학 1학년때 병으로 작고했고 소아과의사였던 어머니 박순희씨가 그와 어린 동생들을 길렀다. 그는 경기고 2학년때 학교를 그만두고 검정고시를 거쳐 1952년 서울대 화공과에 입학한다. 그가 입학할 당시부터 10여년간 서울대 화공과는 전국에서 가장 문턱이 높은 학과로 이름을 날렸다. 안영옥씨에 따르면 이박사는 항상 장학금을 받는 우등생이었으나 응용보다 이론에 관심을 가져 화학공학에는 큰 흥미를 못느꼈다고 한다. 어느날 그는 열역학책에서 틀린 부분을 찾아내 교수로부터 그의 지적이 맞다는 대답을 받아낼 정도로 집요하게 한가지를 파고드는 성격이었다. 휴전 직후 어수선한 분위기로 말미암아 당시 서울대생들 가운데 서둘러 미국유학가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이휘소는 55년 2월 오하이오주에 있는 마이애미대학 물리학과에 등록함으로써 유학 생활을 시작한다. 이후 58년 피츠버그대에서 석사과정을 마쳤고 60년 12월 펜실베이니어 대학에서 'K이온 중간자와 핵자현상의 이중 분산 표시에 의한 분석'이란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유학시절 줄곧 A학점을 받아 수석을 뺏기지 않았는데 59년 8월에 치른 박사 학위시험에서는 전체 평균 93점을 받아 차석의 71점을 무려 22점이나 앞질렀다. 이 점수는 펜실베이니어대학 역사 이래 처음있는 일이었다.
이휘소는 60년 1월 아인슈타인이 만년에 활동했던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 정 연구원으로 들어갔으며 약관 28세의 나이로 펜실베이니어대 정교수에 임명됐다. 이 시기에 그는 지도교수였던 크라인교수의 소개로 말레이지아 태생 중국인 마리안느(沈曼菁)와 사귀게 되고 62년 5월 워싱턴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또 62년 여름 이탈리아의 프리에스트에서 열린 '국제 고에너지 물리학회의'에 10명의 미국 대표단 가운데 한사람으로 참가해 물리학계에 널리 이름을 알리게 되는 계기가 됐다.
페르미연구소로 가다
66년 이휘소는 막 설립된 뉴욕주립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학교는 저명한 물리학자 톨이 총장으로 있고 중국인으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35세의 양진녕(楊振寧)박사까지 가세해 한창 연구열기가 달아오르는 곳이었다. 그후 그는 68년 영국의 대학에서 1년간 교수생활을 하고 프랑스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에서 몇번 특강한 것을 제외하고는 73년말까지 스토니 브룩(Stony Brook, 뉴욕주립대학의 校舍)에 머문다.
74년 이휘소에게는 또 한번의 기회가 찾아 왔다. 미국정부는 시카고 근교에 페르미연구소를 설립하고 반경 1㎞나 되는 당시 세계최대의 입자가속기 '테바트론'을 완성했다. 가속기는 입자를 광속에 가깝게 가속시킨 후 충돌시켜 이때 벌어지는 현상을 관찰하는 장치로 소립자연구에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장치다.
이휘소는 페르미연구소의 이론물리학 부장으로 임명돼 가속기를 이용한 소립자연구의 실질적인 책임자가 됐다. 아울러 대학도 가까운 시카고대학 정교수로 옮겼다.
74년 9월 이휘소가 미 국무부 자료조사원의 일원으로 20년만에 귀국했을 때 그는 이미 세계적인 과학자로 국내 매스컴의 표적이 됐다. 미 국무부는 한국이 기초과학진흥자금으로 요청한 AID차관 8백만달러의 지급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수학 물리 화학 생물 등 4분야의 과학자 4명을 파견했는데 이휘소가 한국인으로서 유일하게 선정된 것이다. 당시 이휘소는 "한국과학원(KAIS)이나 KIST같은 응용 위주의 기관이 산업의 초기단계에는 중요하다. 그러나 이제 한국도 일반대학원을 활성화시켜 기초연구를 강화할 단계"라고 지적해 '서울대의 대학원기능강화'를 암시하기도 했다.
이휘소는 강경식(브라운대) 이원용(컬럼비아대) 김정욱(존스홉킨스대)교수 등과 함께 물리학계의 '유학1세대'로 꼽힌다. 그러나 그는 재미 한인과학자들과는 그다지 교류가 활발하지 못했던 것 같다.
73년 재미(在美) 한국과학기술자협회 부회장을 맡기도 했지만, "학회가 끝난뒤 한인 물리학자들끼리 으레 중국음식점에서 갖는 회식자리에 이박사는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고 김제완교수(서울대, 물리학)는 회고했다. 한국인으로 그의 지도를 받았던 제자도 김주상교수 한사람 뿐이다.
페르미연구소에서 기자들과 인터뷰하는 모습. 이박사의 연구결과는 항상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게이지이론」과 「매혹입자」
이휘소는 생전에 1백38편의 논문을 발표했는데 물리학계에서는 그의 업적을 크게 두가지로 꼽는다.
첫번째는 70년대에 확립된 전약이론(電弱理論)에 이휘소가 결정적인 기여를 한 점이다. 전자기력과 약력(弱力)의 통합으로 알려진 이 이론은 67년 미국인 와인버그에 의해 제창됐다. 그러나 와인버그의 전약이론은 두가지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이 이론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중성류(neutral current)가 발견되지 않았으며, 둘째 약작용을 전달하는 W입자의 질량이 양성자의 1백배 정도로 재규격(renormalization)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곧 계산이 불가능한 이론인지 아닌지가 확실하지 않았다. 70년대에 이르러 중성류가 발견됐으며 네덜란드의 대학원생 트후프트가 와인버그의 이론을 재규격화시킬 수 있다는 사실은 증명했다. 그러나 그의 증명은 일반적이지 못했다.
이휘소가 72년에 발표한 논문 '재규격화가 가능한 질량이 있는 벡터 중간자이론-힉스현상의 섭동(攝動)이론'에 의해 이 문제는 명쾌하게 계산되고 증명됐다. 이를 두고 흔히 '게이지(gauge)이론의 재규격화'라고 부른다. 와인버그는 전약이론을 발전시킨 공로로 79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
또하나 이휘소의 업적은 매혹입자(charmed particle)에 관한 것이다.
캘리포니아공대의 겔만교수는 모든 물질과 소립자는 u(업)쿼크 d(다운)쿼크 그리고 전자라는 기본입자로 구성돼있다는 '쿼크가설'을 제안했다. 그후 하버드대학의 글래쇼 교수는 두가지 쿼크외에 c쿼트라는 새로운 쿼크가 있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휘소는 당시 잘 알려져있던 두 입자(Kl과 Ks)의 질량차로부터 c워크의 질량을 계산해냈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c쿼크와 그 반입자로 구성된 매혹입자가 발견됐으며, 매혹입자를 구성하는 c쿼크의 질량은 그가 예언한 것과 같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와인버그와 함께 노벨상을 공동수상한 파키스탄인 살림은 "이박사의 정확하고도 믿을 수 있는 c쿼크의 질량 추정이 없었다라면 매혹입자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그리 빠르지 않았을 것"이라며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글렌엘린」에 잠들어
이휘소도 노벨상에 관해 많이 의식했던 것 같다. 71년 11월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해 노벨상이 입자물리쪽에 주어져 생각하는 점이 많았다며 '능력이 있는대로 연구에 더 주력하겠습니다. 능력 행운 모두 있어야겠지요.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고 적고 있다. 정부측의 연이은 귀국권유를 뿌리친 것도 '노벨상이 목전에 있다'는 나름대로의 판단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휘소박사의 유족으로는 국내에 어머니와 동생들이 살고 있고, 미국에는 부인 마리안느(미생물학 전공으로 시카고 도서관에 근무하다 지난해 퇴직), 아들 이천(李泉, 미국명 Jeoffrey, 현재 워싱턴대학 유전공학 박사과정, 지난해 결혼), 딸 이안(李安, 미국명 Irene, 결혼해 보스톤거주)이 남았다. 이휘소박사의 유해는 시카고 교외 글렌엘린(glen ellyn) 묘지에 잠들어 있다. 이휘소가 생전에 모아두었던 책 강의노트 원고 등은 지난해 부인 마리안느에 의해 고대에 기증됐다.
78년 이휘소 자신이 생전에 기획했던 '고에너지물리 국제워크숍'이 서울대에서 '벤자민 리 기념심포지움'으로 명칭이 바뀌어 열렸다. 그후 과학재단 주최로 매년 '이휘소기념강연'이 열리다가 어느 해부터인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비운의 물리학자 이휘소, 그의 삶과 죽음은 이렇게 잊혀져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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