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상/장자

장자(내편) 대종사

rainbow3 2019. 10. 14. 11:41


♣ 장자(내편) 대종사 1 - 지식이란 완전한 것이 못 된다

 

하늘이 하는 일을 알고 사람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은 지극한 사람이다. 하늘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은 천연(天然)대로 살아간다. 사람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은 그의 지각(知覺)이 아는 일로 그의 지각이 알지 못하는 것을 양성해 나가는 것이다.

타고난 나이대로 다 살면서 중도에 일찍 죽지 않는 사람은 곧 앎이 지극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함이 있다. 앎이라 하는 것은 의거하는 데가 있어야 판단에 들어맞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의거하는 곳은 전혀 안정되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 어찌 내가 말하는 하늘이 사람이 아닐 수가 있겠는가? 어찌 사람이 하늘이 아님을 알 수가 있겠는가?

 

 

장자(내편) 대종사 2 - 참된 앎이란 앎이 없는 것이다

 

참된 사람이어야만 참된 앎을 지니게 된다. 참된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가?

옛날의 참된 사람은 작은 일에도 거스르지 않고, 성공을 뽐내지 않으며, 일을 꾀하지도 않았었다. 이런 사람은 실패하는 일이 있어도 후회하지 않고, 잘 되어도 스스로 득의양양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높은 곳에 올라가도 떨리지 않고, 물에 빠져도 젖지 않으며, 불 속으로 들어가도 뜨거워하지 않는다. 앎이 도에까지 승화되어 이 같은 위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옛날의 참된 사람은 잠을 자도 꿈을 꾸지 않고, 깨어 있어도 근심이 없었다. 음식은 좋은 것만을 찾지 않고, 숨쉬는 것은 여유가 있었다. 참된 사람은 발꿈치로도 숨을 쉬지만, 보통사람은 목구멍으로만 숨을 쉰다. 남에게 굴복 당한 사람들은 목에서 나는 소리가 물건을 토해내는 것과 같고, 욕심이 많은 사람은 타고난 기틀이 천박하다.

참된 사람은 삶을 기뻐할 줄도 모르고, 죽음을 싫어할 줄도 모른다. 세상에 나옴을 기뻐하지도 않고 저승으로 들어가는 것을 거부하려 하지도 않는다. 의연히 가고 의연히 올 따름이다.

그는 삶의 시작을 꺼리지도 않고, 삶의 종말을 바라지도 않는다. 삶을 받아도 그것을 기뻐하고 그것을 잃어도 기뻐한다. 이것이 자기 마음으로써 도를 저버리지 않는 것이며, 사람으로써 하늘을 돕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이를 두고 참된 사람이라 부른다.

 

 

장자(내편) 대종사 3 - 사물에 지배당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산다

 

참된 사람은 그의 마음을 잊고 있고, 그의 얼굴은 적막하며, 그의 이마는 넓다. 쓸쓸하기가 가을과 같고, 따스하기가 봄과 같다. 기쁨과 노여움의 감정은 사철의 변화와 통하고, 만물과 잘 조화되어 그 한계를 알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성인이 군사를 일으키게 되면 나라는 멸망시켜도 그 나라 사람들의 마음은 잃지 않는다. 이익과 은혜로운 혜택을 오래도록 베풀어지게 하면서도 사람들을 편애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만물에 통달함을 즐기는 것은 성인이 아니다. 따로 친근한 사람이 있는 것은 어짊이 아니다. 때에 앞서는 것은 현명한 것이 아니고, 이로움과 해로움이 같이 통하지 않는 것은 군자가 아니다. 명성을 쫓아서 자기를 잃는 것은 선비가 아니다. 자신을 망치면서도 참되지 않은 것은 남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다.

호불해·무광·백이·숙제·기자·서여·기타·신도적 같은 이들은 남에게 부림을 당하고, 남을 즐겁게 하면서도, 스스로 즐기지는 못한 사람들이다.

 

 

장자(내편) 대종사 4 - 참된 사람은 모든 것을 한가지로 본다

 

참된 사람은 그의 키가 크다 해도 흐트러진 모습을 하지 않으며, 무엇이 부족한 듯하지만 남에게 받는 것이 없다.  편안히 행동하는 것이 모난 듯도 하지만 고집하는 일은 없다. 넓게 텅 비어 있지만 화려하지는 않다. 평화롭고 즐거워 언제나 기쁜 듯하다. 또한 행동하지 않을 수 없을 때에만 행동을 한다.

그의 얼굴빛은 윤기가 더해가고, 그의 덕은 점잖게 지극한 선에 머물러 있다. 넓게 큰 듯하고, 높아서 제어할 수가 없다. 느릿느릿하여 한가함을 좋아하는 듯하고, 멍하니 말을 잊고 있는 듯하다.

법도로써 본체를 삼고, 예의로써 날개를 삼는다. 앎으로써 때에 알맞게 하고, 도로써 자연을 따른다. 법도로써 본체를 삼는 것은 그의 관찰이 밝기 때문이다. 예의로써 날개를 삼는 것은 세상에서 행동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앎으로써 때에 알맞게 하는 것은 일을 부득이하게 처리하기 때문이다.

덕으로써 자연을 따른다고 하는 것은 발이 있는 사람들이 언덕을 오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데도 사람이 참되려면 힘써 행실을 닦아야만 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좋아하는 것도 한가지이고, 좋아하지 않는 것도 한가지이다. 그들에게는 한가지 것도 한가지이고, 한가지 것이 아닌 것도 한가지이다. 그처럼 한가지라는 것은 하늘과 한 무리가 되는 것이고, 한가지가 아니라는 것은 사람과 한 무리가 되는 것이다.

하늘과 사람은 서로 다툴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을 참된 사람이라 부르는 것이다.

 

 

장자(내편) 대종사 5 - 삶을 잘 사는 것이 죽음을 잘 맞이하는 길이다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다. 밤과 낮이 일정하게 있는 것은 천연이다. 사람들이 관여할 수 없는 그런 일이 있는 것은  모두가 만물의 실정인 것이다.

그들은 특히 하늘을 아버지처럼 여기면서 몸소 그것을 사랑하고 있다. 더욱 뛰어난 것에야 어떻겠는가? 사람들은 특히 임금은 자기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몸소 그를 위해 목숨을 바친다. 하물며 참된 사람에게야 어떻겠는가?

물이 마르면 물고기들은 모여 서로 물기를 뿜어주고 서로를 물거품으로 적셔준다. 그러나 강물이나 호수 속에서 서로를 잊고 있던 때보다 못하다.

요임금을 기리고 걸왕을 비난하는 것은 차라리 두 사람을 모두 잊고 올바른 도로 동화되는 것만 못하다.

대지는 우리에게 형체를 부여하고 삶을 주어 우리를 고생스럽게 하고 있다. 늙게 만듦으로 우리를 편안하게 해주고, 죽음으로써 우리를 쉬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기의 삶은 잘사는 것은 곧 자기의 죽음을 잘 맞이하는 길인 것이다.

 

 

장자(내편) 대종사 6 - 인위적인 것보다는 자연스러움이 소중하다

 

배를 골짜기에 감추어 두고 어살을 연못 속에 감추어 두면 든든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밤중에 힘있는 사람이 그것을 짊어지고 달아날 수도 있다는 것을, 어리석은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크고 작은 것을 감추어두기 적당한 곳이 있지만, 그래도 다른 곳으로 옮겨질 곳 또한 항상 있다. 만약 천하를 천하에 감추어 둔다면 옮겨질 곳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영원한 만물의 위대한 실정인 것이다.

사람들은 사람의 형체를 타고난 것만으로도 기뻐한다. 사람의 형체 같은 것은 여러 가지로 변화하여 처음부터 한이 없는 것이다. 그것을 즐거워한다면 즐거울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물건이 딴 곳으로 옮겨갈 수 없는 곳에 놓임으로서 모든 존재를 인정한다.

일찍 죽는 일에도 잘 대처하고, 늙는 일에도 잘 대처하며, 시작하는 일에도 잘 대처하고, 끝맺는 일에도 잘 대처하여 사람들이 그를 본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만물이 관계되어 있고, 또 일체의 변화의 근거가 되는 것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겠는가?

 

 

장자(내편) 대종사 7 - 도는 만물의 근원으로 어디에나 있다

 

도에는 정수(精粹)가 있고 실효(實效)가 있지만, 작위(作爲)도 없고 형체도 없다. 그것은 마음으로 전할 수는 있으나 물건처럼 받을 수는 없다. 그것을 체득할 수는 있으나 볼 수는 없다. 스스로 근본적인 것이어서 하늘과 땅이 생기기 전의 옛날부터 엄연히 존재했다.

귀신들은 신령스럽게 하고, 황제들은 신성케 했으며, 하늘을 생성하고 땅을 생성시켰다. 하늘 위 가장 높은 곳에 있으면서 높은 듯하지 않고, 땅 아래 가장 낮은 곳에 있으면서 깊은 듯하지 않다. 하늘과 땅보다도 먼저 생겼으면서도 오래 된 것 같지 않고, 태고보다 오래되었으면서도 늙은 듯하지 않다.

희위씨는 그것을 얻어 하늘과 땅을 연결시켰으며, 복희는 그것을 얻어 음양을 화합시켰다. 북두는 그것을 얻어 영원히 어지러워지지 않았으며, 해와 달은 그것을 얻어 영원히 쉬지 않고 돌고 있다. 배감은 그것을 얻어 곤륜산으로 들어갔고, 풍이는 그것을 얻어 큰 강물에서 노닐게 되었으며, 견오는 그것을 얻어 큰산에 거처하게 되었다. 황제는 그것을 얻어 하늘로 올라갔으며, 전욱은 그것을 얻어 현궁에 거처하게 되었다. 우강은 그것을 얻어 땅의 북쪽 끝에 서게 되었고, 서왕모는 그것을 얻어 소광산에 좌정했다.

그 시작도 알 수 없거니와 그 종말도 알 수 없는 것이다.

팽조는 그것을 얻어 순임금 시대부터 오패의 시대까지 살았다. 전설은 그것을 얻어 무정의 재상으로써 온 천하를 다스렸으며, 동유를 올라타고 기숙의 꼬리를 차지하여 여러 별들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장자(내편) 대종사 8 - 도는 인간적인 욕망의 초월에서 얻어진다

 

남백자규가 여우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나이가 많으면서도 얼굴빛이 아이들과 같으니 어찌 된 일입니까?”

여우가 대답했다.

“도에 관해서 얘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남백자규가 말했다.

“도는 배울 수 있는 것입니까?”

여우가 말했다.

“당신은 그럴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복양의라는 사람은 성인의 재질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성인의 도는 지니고 있지 못했습니다. 나는 성인의 도는 지니고 있지만 성인의 재능은 지니지 못 했습니다. 나는 그를 가르치려 하였지만 그가 성인이 되기를 기대할 수는 없었습니다. 기대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성인의 도를 가지고 성인의 재질이 있는 사람을 가르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나는 그에게 도를 닦게 하며 가르쳐 주었습니다. 사흘 뒤에는 천하를 잊게 되었고, 천하를 잊게 된 뒤 또 도를 닦게 하니 물건을 잊게 되었습니다. 물건을 잊게 된 뒤 다시 도를 닦게 하니 구일 뒤에는 삶을 잊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삶을 잊은 뒤에는 아침 햇살처럼 깨달음이 열렸고, 깨달음이 열린 뒤에는 유일한 도를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도를 볼 수 있게 된 뒤에는 시간의 변화가 없게 되었습니다. 시간의 변화가 없게 된 뒤에는 불사불생의 경지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을 사멸시키는 변화의 도리는 그 자체로서는 사멸하지 않습니다. 살아 있는 것에 생명을 주는 조물주는 그 자체로서는 생성하지는 않습니다. 나고 죽음의 배후에 있는 도는 나고 죽음을 넘어선 것입니다. 이 도는 사라져 가는 것은 사라져 가는 그대로 보내고, 오는 것은 오는 그대로 맞아들입니다. 멸하는 것은 멸하는 그대로 맡기고 생겨나는 것은 생겨나는 대로 맡겨둡니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맡겨두는 것입니다.

이 도의 상태를 영녕이라 부릅니다. 영녕이란 스스로는 만족하여 정지하면서 만물은 생성하는 것입니다.”

남백자규가 말했다.

“선생님은 어디서 그런 얘기를 들으셨습니까?”

여우가 말했다.

“부묵의 아들에게서 들었습니다. 부묵의 아들은 낙송의 손자에게 들었고, 낙송의 손자는 첨명에게 들었고, 첨명은 섭허에게 들었으며, 섭허는 수역에게 들었고, 수역은 어구에게 들었으며, 어구는 현명에게 들었고, 현명은 참료에게 들었으며, 참료는 의시에게 들었다고 합니다.”

 

 

장자(내편) 대종사 9 - 신체의 변화도 자연의 변화의 일부이다

 

자사·자여·자려·자래 네 사람이 모여 얘기했다.

“누가 무(無)를 머리로 삼고, 삶을 척추로 삼고, 죽음을 궁둥이로 삼을 수 있겠는가? 누구든 삶과 죽음과 존속과 멸망이 한가지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와 더불어 친구가 될 것이다.”

네 사람은 서로 바라보면서 웃고 뜻이 맞아 서로 친구가 되었다.

얼마 되지 않아 자여가 병이 나서 자사가 문병을 가니 자여가 말했다.

“조물주는 참으로 위대하구나. 내 몸을 이토록 오그라들게 만들다니, 등은 곱사등이 되고, 오장의 힘줄은 위쪽으로 올라가고, 턱은 배꼽 아래로 감추어지고, 어깨가 머리끝보다 높고, 목덜미는 하늘을 가리키게 되었구나.”

음과 양의 기운이 어지러워져 있었으나 그의 마음은 한가롭고 맑아 아무 일도 없는 듯했다. 자여는 비틀거리며 우물가로 걸어가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면서 말했다.

“조물주가 나의 모습을 이토록 오그라들게 만들다니....”

자사가 말했다.

“당신은 그렇게 된 것이 싫습니까?”

자여가 대답했다.

“아닙니다. 내가 어찌 싫어하겠습니까. 나의 왼팔을 조금씩 변화시켜서 닭으로 만들어 준다면 나는 사람들에게 새벽을 알려 줄 것입니다. 나의 오른팔을 조금씩 변화시켜 화살로 만들어 준다면 나는 새를 맞추어 구워 먹을 것이고. 나의 궁둥이를 조금씩 변화시켜 수레바퀴를 만들어주고 정신을 변화시켜 말로 만들어 준다면 나는 그대로 타고 다닐 것입니다. 따로 수레에 말을 멜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또한 몸을 타고나는 것은 때를 얻은 것이며, 삶을 잃는 것은 자연의 변화에 따르는 것입니다.

때에 한정되고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면 슬픔이나 즐거움이 끼여들 사이가 없게 됩니다. 이것이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인 것입니다. 그런데 속박으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지 못하는 것은 사물이 그를 동여매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물이 하늘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오래된 진리입니다. 내가 어찌 싫어하겠습니까?”

 

 

장자(내편) 대종사 10 - 삶과 죽음은 변화하는 자연현상일 뿐이다

 

자래가 병이 나서 숨을 몰아쉬며 죽으려 했다. 그의 처자들은 그를 둘러싸고 울고 있었다.

자리가 문병을 가서 말했다.

“조용히 하고 저리들 가시오. 변화를 슬퍼할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방문에 기대어 자래에게 말했다.

“자연의 조화는 참으로 위대합니다. 당신을 또 무엇으로 만들려는 것일까요? 당신을 어디로 가게 하려는 것일까요? 당신을 쥐의 간으로 만들려는 것일까요? 벌레의 발로 만들려는 것일까요?”

자래가 말했다.

“부모가 자식에게 동서남북 어디로 가라고 하든 그대로 따를 뿐입니다. 천지음양의 조화가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부모의 명령정도가 아닙니다. 음양이 나에게 죽음을 요구하는데도 내가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난폭한 자가 되겠지만 음양에게야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천지는 나에게 형체를 주어 삶으로써 나를 힘들게 하고, 늙음으로써 나를 편안케 하고, 죽음으로 쉬게 합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삶을 잘 사는 것이 곧 자기의 죽음을 잘 맞이하는 것입니다.

대장장이가 쇠를 녹여 주물을 만들려고 하는데, 쇳물이 튀면서「나는 반드시 막야의 명검이 되겠다」고 말한다면 대장장이는 불길한 쇠라고 말할 것입니다. 한번 사람의 형체를 타고났다고 해서「사람이어야 한다. 나는 사람의 모습으로만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조물주는 반드시 불길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하늘과 땅을 커다란 용광로라 생각하고 조물주를 대장장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디로 가게 된들 문제될 것이 있겠습니까? 깜빡 잠들었다가 문뜩 깨어날 뿐인 것입니다.”

 

 

장자(내편) 대종사 11 - 삶은 군살이고 죽음은 고름을 짜는 것과 같다

 

자상호와 맹자반과 자금장이 어울려 지내고 있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말했다.

“누가 서로 관계가 없는 데서 서로 관계를 가지며, 서로 작용이 없는 데서 서로 작용할 수가 있겠는가? 누가 하늘로 올라가 안개 속을 노닐며 무한히 돌아다니고, 모든 것을 잊고 살면서 끝나는 곳이 없을 수가 있겠는가?”

세 사람은 서로 쳐다보며 웃고 마음이 맞아 서로 친구가 되었다. 그 후 아무 일 없이 얼마동안 지내다가 자상호가 죽었다. 장사를 지내기 전에 공자도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자공을 보내어 일을 돕도록 했다. 자공이 가서 보니 맹자반과 자금장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누에 채반을 엮고 있고, 한 사람은 거문고를 타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상호여, 상호여, 그대는 이미 참된 세상으로 돌아갔는데, 우리는 아직 이 세상에 남아 있네.”

자공이 말했다.

“시체를 앞에 두고 노래를 하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하십니까?”

두 사람은 서로 쳐다보고 웃으며 말했다.

“저 사람이 어찌 예의 뜻을 알겠는가?”

자공이 돌아와 그 사실을 공자에게 말했다.

“어찌 된 사람들이 세련된 행동이란 없고, 자신의 육체를 도외시하고 있었습니다. 시체를 앞에 두고 노래를 하면서도 얼굴 빛 조차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공자가 말했다.

“그들은 세속의 밖에서 노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나는 세속의 안에서 놀고 있다. 이 세상의 밖과 안은 서로 미칠 수 없는 것인데도 내가 너에게 가서 문상을 하게 하였으니 내가 부족했다. 그들은 조물주와 벗이 되어 하늘과 땅의 한 기운 속에 노닐고 있다. 그들은 삶을 군살이나 혹처럼 여기고, 죽음을 고름을 짜거나 종기를 찢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런 사람들이 어찌 죽음과 삶에 앞서고 뒤서는 것이 있음을 알겠느냐?

물체를 빌림으로써 세상에 존재하고 있지만, 사실은 본체에 자신을 기탁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의 간이나 쓸개까지도 잊고, 자기의 귀와 눈도 염두에 없다. 처음과 끝이 되풀이되고 있지만 그 끝이 어디인지도 알 수가 없다. 아득히 티끌 세상 밖을 왕래하면서 하는 일 없는 무위의 일에 종사하면서 노닐고 있다. 그들이 어찌 번거롭게 세상 풍습의 예를 따르면서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타내겠느냐?”

 

 

장자(내편) 대종사 12 - 도의 세상에서는 서로를 잊는다

 

자공이 말했다.

“선생님께서는 세상의 안과 밖 중 어느 곳에 계시려 하십니까?”

공자가 말했다.

“나는 하늘의 벌을 받은 사람으로 세속의 안에 얽매어 있다. 그렇지만 나도 너희들과 함께 세상 밖에서 살려고 한다.”

자공이 말했다.

“세속의 밖으로 나가는 방법이 있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물고기는 물에서 살아가고, 사람들은 도에서 살아간다. 물에서 사는 것들을 위해서는 못을 파주면 먹고 살 수 있게 되고, 도에서 사는 것을 위해서는 아무 일 없이 안정되게 살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물고기는 강과 호수에서는 서로를 잊고, 사람은 도의 세계에서 서로를 잊는다고 하는 것이다.”

자공이 말했다.

“기인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공자가 말했다.

“기인이란 사람으로써는 기이하지만 하늘에 대하여는 어울리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소인은 인간 세상에서는 군자가 되며, 인간 세상의 군자는 하늘에서는 소인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장자(내편) 대종사 13 - 죽음과 삶의 실체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안회가 공자에게 물었다.

“맹손재는 그의 어머니가 죽었을 때, 곡을 하면서 눈물도 흘리지 않고 마음 속엔 슬픔이 없는 듯 했고, 상을 지키며 서러워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런 세 가지 예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는데도 상을 잘 치렀다는 평판이 노나라에 파다합니다. 이것은 상을 잘 치르지도 않고서 좋은 평판을 얻은 것이 아닙니까?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맹손씨는 도리를 다했고, 예를 아는 사람들보다 훌륭했다. 사람들은 상을 간단히 치르려 해도 되지 않는데, 그는 이미 간단히 치르고 있다. 맹손씨는 살게 된 까닭을 알지 못하고, 죽게 된 까닭도 알지 못했다. 먼저 태어나는 것도 알지 못하였고, 뒤에 죽는 것도 알지 못했다. 자연의 변화에 따라 사람이 되었으니 자기는 알지 못하는 변화를 따를 뿐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이다.

또한 살아서 변화하고 있는 지금 어찌 변화하기 전의 상태를 알겠느냐? 변화하고 있지 않는 지금 어찌 변화한 뒤의 일을 알 수 있겠느냐? 나나 그대나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 않은 자들이 아닐까? 또한 그는 형체의 변화가 있다 해도 마음을 손상시키지는 않는다. 마음을 기탁한 몸의 변화가 있다 해도 마음은 정말로 죽는 일이 없다.

맹손씨는 독특한 깨달음이 있어서 남들이 곡을 하니 자신도 곡을 하기는 하지만 자기에게 합당한 방법으로 한 것이다. 또한 사람들은 모두 지금의 몸을 가리켜 자기라고 하지만 그들이 어찌 자기들이 생각하는 자기가 진실한 자기임을 알겠느냐?

또한 그대가 꿈에 새가 되어 하늘을 날아 오르거나, 물고기가 되어 물 속에 잠겼었다면,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 꿈에서 깨어난 것인지,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 꿈속에서 말하는 것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즐거운 상황에서 꼭 웃으려 할 것도 없으며, 이미 웃음이 나왔다면 그것을 안배할 것도 없는 것이다. 자연의 안배에 편안히 지내면서 변화를 따른다면 비로소 텅 빈 하늘과 일체가 되는 경지에 이르게 될 것이다.”

 

 

장자(내편) 대종사 14 - 깨우쳐 노력하면 바른길로 갈 수 있다

 

의이자가 허유를 만나니 허유가 말했다.

“요임금이 당신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었습니까?”

의이자가 말했다.

“요임금이 나에게 말씀하시기를「그대는 반드시 어짊과 의로움을 몸소 닦고, 옳고 그름을 밝게 말해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허유가 말했다.

“당신은 무엇 때문에 왔습니까? 요임금이 이미 당신에게 어짊과 의로움이란 먹물을 몸에 새기는 형벌을 주었고, 옳고 그름이라는 코 베는 형벌을 내린 셈입니다. 그런데도 당신은 어찌 거리낌 없이 자유로우며 변화 많은 도에 노닐려 하십니까?”

의이자가 말했다.

“그렇지만 저는 그런 경지 안에 노닐고 싶습니다.”

허유가 말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장님에게는 이목과 얼굴의 아름다움이 상관없고, 또한 여러 가지 채색과 무늬의 고움이 상관없는 것입니다.”

의이자가 말했다.

“무장이 그의 아름다움을 잊고, 거양이 그의 힘을 잊고, 황제가 그의 앎을 잊었던 것은 모두가 노력을 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조물주께서 먹물을 몸에 새긴 형벌을 지워주시고, 코 베인 형벌을 보완해 주시어 제가 완전한 몸으로 선생님을 따르게 할지 누가 알겠습니까?”

허유가 말했다.

“알 수 없는 일입니다. 나의 스승께서는 만물을 이룩해 주면서도 의로움이라 여기지 않으셨고, 만세에 은혜의 혜택이 미치게 하면서도 어짊이라 여기지 않으셨으며, 태고 적부터 살았으면서도 늙었다 여기지 않으셨고, 하늘과 땅을 위 아래로 만들고 여러 가지 형체들을 조각하였으면서도 교묘하다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노닐 경지입니다.”

 

 

장자(내편) 대종사 15 - 좌망이란 모든 차별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안회가 말했다.

“저에게도 한 가지 발전한 것이 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무슨 뜻이냐?”

“저는 어짊과 의로움을 잊게 되었습니다.”

“그렇다 해도 아직은 부족하다.”

훗날 안회가 공자를 만나서 다시 말했다.

“제에게 한 가지 발전한 것이 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무엇이냐?”

안회가 말했다.

“저는 예와 음악을 잊게 되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아직도 덜 되었다.”

뒷날 다시 만나 안회가 말했다.

“저에게도 발전한 것이 있습니다.”

공자가 말했다.

“무엇이냐?”

안회가 말했다.

“저는 좌망(坐忘)을 하게 되었습니다.”

공자가 놀란 듯이 되물었다.

“좌망이란 어떤 것이냐?”

안회가 대답했다.

“자신의 신체나 손발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눈이나 귀의 움직임을 멈추고, 형체가 있는 육체를 떠나 마음의 지각을 버리며, 모든 차별을 넘어서 큰 도에 동화하는 것이 좌망입니다.”

공자가 말했다.

“도와 일체가 되면 좋아하고 싫어하는 차별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변화에 그대로 따르면 일정한 것만을 추구하는 마음이 없어진다. 과연 현명하구나. 나도 너의 뒤를 따르며 배움을 얻어야겠다.”

 

 

장자(내편) 대종사 16 - 모든 것은 운명이며 자연의 필연적인 힘이다

 

자여와 자상이 친구로 지내고 있었다. 마침 장마비가 열흘 간 내리니 자여가 자상이 병이 났을지도 모른다며 밥을 싸 가지고 그에게 주러 갔다. 자상의 집 문 앞에 닿으니 노래하는 것도 같고, 곡하는 것도 같은 목소리로 거문고를 타며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인가. 어머니인가? 하늘의 짓인가. 사람의 짓인가?”

그는 힘겹게 나오는 목소리로 가사만을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자여가 들어가 말했다.

“자네의 노래가 어째서 그 모양인가?”

자상이 말했다.

“나를 이런 궁지에 몰리게 한 것이 누구인가 생각해 보았지만 알 수가 없네. 부모라면 어찌 내가 가난하기를 바라시겠는가? 하늘은 사사로이 어떤 개인만을 덮어주지 않고, 땅은 사사로이 어떤 개인만을 길러주지 않으니, 하늘과 땅이 또한 나를 가난하게 만들었을 리는 없지 않은가? 나를 이렇게 만든 자를 찾아보았지만 찾지 못하였네. 그러나 이토록 궁지에 몰리게 되었으니 운명인 모양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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