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상/장자

장자(외편) 변무

rainbow3 2019. 10. 15. 00:30


♣ 장자(외편) 변무 1 - 인의 덕성의 존중과 논리는 쓸 데 없다

 

엄지발가락과 둘째 발가락이 붙어버린 변무나 손가락이 여섯인 육손이는 자연에서 나온 것이지만 정상적인 인간의 본성에서 보면 군더더기이다. 사마귀나 늘어진 혹은 몸에서 나왔지만 인간의 본성에서 보면 군더더기이다. 인의를 너무 중시하고 그것을 주장하는 사람은 그것이 오장에 딸려 있는 것이라 해도 도덕의 올바른 형태가 아니다. 발가락이 달라붙는 것은 쓸데없는 살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며, 손에 손가락이 하나 더 있는 것은 쓸데없는 손가락이 하나 더 붙어 있는 것이다.

오장의 진실한 기능에 쓸데없는 것을 덧붙여서 존중하는 사람들은 인의의 행위에 지나치게 치우치려고, 밝은 귀와 밝은 눈의 사용을 너무 존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눈밝음이 너무 지나친 사람은 오색에 혼란을 일으키고 아름다운 무늬에 빠져 파란색, 노란색과 무늬의 화려함을 만드는 것이다.  이주 같은 사람이 그 예이다.

귀밝음이 지나친 사람은 오성(五聲)에 혼란을 일으키고 육률(六律)에 빠져, 쇠나 돌과 실과 대로만든 악기와 황종과 대여와 같은 음악을 만드는 것이다. 사광 같은 사람이 그 예이다.

인(仁)을 쓸데없이 중시하는 사람은 덕을 빼내고 본성을 뽑아내며 세상사람들에게 따를 수 없는 법도를 받들라고 부추기는 것이다. 증삼과 사추 같은 사람이 그 예이다.

변설을 중시하는 사람은 탄알을 쌓아놓고 새끼줄로 묶으려는 것처럼 말귀를 따지려 들고, 궤변에 마음을 쓰며 애써 쓸데없는 말을 기리는 것이다. 양자나 묵자 같은 사람이 그 예이다.

그러므로, 이런 것은 모두가 쓸데없는 것을 존중하고 소용없이 덧붙은 것을 존중하는 도이며, 천하의 지극한 올바른 도는 아니다.

 

 

장자(외편) 변무 2 - 학의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마라

 

올바른 경지에 이른 사람은 그의 본성과 운명의 진실함을 잃지 않는다. 그러므로 합쳐져 있다 해도 쓸데없이 들러붙지 않고, 갈라져 있다 해도 소용없이 덧붙어 있지 않고, 길다 해도 남는 것이 없고, 짧다 해도 부족하지 않다.

물오리의 다리는 비록 짧지만 길게 늘여주면 걱정하게 될 것이며, 학의 다리가 비록 길지만 짧게 잘라주면 슬퍼하게 될 것이다.

본성이 길면 잘라주지 않아도 되고, 본성이 짧으면 이어주지 않아도 된다. 아무것도 걱정할 것이 없다.

인의는 사람의 진실한 모습이 아니다. 어진 사람이란 얼마나 많은 걱정을 지니고 있는가? 또한 엄지발가락과 둘째 발가락이 붙어 있는 사람은 그것을 갈라주면 아파 울 것이다. 손가락이 하나 더 달린 육손이의 덧 달린 손가락을 잘라주면 또한 아파 울 것이다. 이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숫자상 남음이 있고, 한 쪽은 부족함이 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의 걱정은 한가지이다. 지금 세상의 어진 사람들은 눈을 멀쩡히 뜨고서 세상의 환란을 걱정한다. 어질지 않은 사람들은 타고난 본성의 진실한 모습을 버리고 부귀를 탐내고 있다. 그러니 인의는 사람의 진실한 모습이 아니다.

 

 

장자(외편) 변무 3 - 인위적인 행위는 사람의 본성을 해친다

 

하나라·은나라·주나라 이 삼대 이후로 세상이 얼마나 시끄러워졌는가.

갈고리와 먹줄과 그림쇠와 굽은자를 써서 나무를 바로잡는 것은 나무의 본성을 손상시키는 일이다.  새끼와 끈과 아교와 옻칠로 단단히 만드는 것은 본래의 형태를 손상하는 것이다. 예의와 음악을 번거롭게 찾고, 인의로 달래어 세상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사람들도 역시 그의 일정한 본연을 잃은 것이다.

천하에는 일정한 본연이 있다. 일정한 본연이란 것은 굽어 있어도 갈고리로 굽힌 것이 아니고, 곧아도 먹줄로 곧게 한 것이 아니고, 둥글어도 그림쇠로 둥굴게 한 것이 아니고, 모가 났어도 굽은자로 모나게 한 것이 아니다. 붙어 있으나 아교나 옻칠로 붙인 것이 아니고, 묶여 있으나 줄이나 새끼로 묶은 것이 아니다.

천하에 이끌리듯이 모두가 살고 있지만 살게 된 까닭은 알지 못한다. 다같이 모두가 자기 모습을 지니고 있지만 자기 모습을 지니게 된 까닭은 알지 못한다. 그런 것은 예전부터 지금까지 변한 것이 아니니 사람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또 인의로 아교나 옻칠로 붙이고 줄과 새끼로 묶듯이 하여 도와 덕의 세계에 노닐려 하는가? 그것은 세상 사람들을 미혹시킬 뿐이다. 작게 미혹된 것이라면 방향이 틀린 것이다. 크게 미혹된 것이라면 본성을 잃은 것이다.

무엇으로 그것을 알 수 있는가? 순임금이 인의를 내걸고서 천하의 인심을 어지럽힌 후로 세상사람들은 모두가 목숨을 걸고 인의의 편으로 달려가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인의로써 그들의 본성을 잃게 만든 것이 아닌가.

하·은·주 삼대 이후부터 천하는 모두 물건 때문에 본성을 잃었다. 선비들은 명예를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대부들은 국가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시켰다. 성인은 천하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시켰다.  이런 사람들의 행위는 내용도 다르고 그것에 의해 얻은 명성도 다르지만, 그들이 자기 몸을 희생하면서 자기 본성을 손상시켰다는 점에서는 같다.

하인과 하녀가 함께 양을 치러 갔다가 둘이 모두 자기의 양을 잃어버렸다. 하인에게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고 물으니, 책을 읽고 있었다고 말했다. 하녀에게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고 물으니 놀이를 하며 놀았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한 일은 다르지만 자기가 지키던 양을 잃어버린 것은 같다.

백이는 수양산 아래에서 명예를 위해 굶어죽었다. 도척은 동릉 위에서 이익을 위해 죽었다. 두 사람이 죽은 상황은 다르지만 그들이 자기 삶을 해치고 자기 본성을 손상시킨 점에 있어서는 같다. 어째서 반드시 백이는 옳고 도척만 잘못되었다 할 수 있겠는가?

세상사람들은 모두 자신을 희생시키고 있다. 인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면 사람들은 그를 군자라 부른다. 그가 재물을 위해 자신을 희생시키면 세상 사람들은 그를 소인이라고 부른다. 그들이 자기 몸을 희생한 것은 같은데 어떤 이는 군자가 되고 어떤 이는 소인이 된다.

삶을 해치고 본성을 손상시킨 점으로 보면 도척이나 백이나 다를 것이 없다. 그런데 어째서 그들 중 군자와 소인을 가려야 하는가?

 

 

장자(외편) 변무 4 - 모든 인위적인 것은 훌륭한 것이 못된다

 

본성을 인의에 종속시켰다면 증삼이나 사추처럼 통달했다 해도 내가 말하는 훌륭한 것은 못된다.  본성을 다섯 가지 맛에 종속시켰다면 유아처럼 통달했다 해도 내가 말하려는 훌륭한 것은 못된다.  본성을 다섯 가지 소리에 종속시켰다면 사광처럼 통달했다 해도 내가 말하는 귀밝은 것은 못된다.  본성을 다섯 가지 색깔에 종속시켰다면 이주처럼 통달했다 해도 내가 말하는 눈밝은 것은 못된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훌륭한 것이란 인의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가 타고난 것의 훌륭함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훌륭한 것은 이른바 인의 같은 것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성명(性命)의 진실함에 맡겨두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려 하는 귀밝음이란 남의 것을 듣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듣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눈밝음이란 남의 것을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스스로 보지는 않고 남의 것만을 보고, 스스로의 것을 지니지 않고 남의 것을 지니는 것은 남이 지니는 것만을 지니려 들고 자기가 지녀야 할 것은 스스로 지니지 않는 것이 된다.

남의 편안함만을 편안히 여기고 자신의 편안함은 스스로 편안하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남의 편안함만을 편안히 여기고 자신의 편안함은 스스로 편하지 않다고 하는 점에 있어서는 도척과 백이 같은 사람들도 다같이 지나치게 한 쪽으로 치우친 것이다.

나는 이점에서 도와 덕에 있어 부끄럽다고 여기고 있다. 그래서 위로는 감히 인의와 절조를 지키지 못하고 있고, 아래로는 감히 지나치게 한 쪽으로 치우친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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