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상 속의 행복 개념과 한국사회의 ‘행복’ 현상
유 승 무 (중앙승가대 포교사회학과)
1. 머리말
동서고금 그 누구를 막론하고 행복한 삶을 바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희망사항과 다르기 일쑤다. 행복은 고사하고 생존 그 자체에 급급하거나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는 사람도 있다. 한국사회의 경우도 산업화이후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질적 풍요를 행복으로 착각하면서(혹은 강요당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에, 20세기 후반까지도 행복이란 단어는 ‘배부른’ 소리로 치부되는 등 왠지 누려서는 안 될 사치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이러한 상태와 비교하면 최근 한국사회의 행복 현상은 가히 열풍이라 할 만하다. 최근 불어닥친 웰빙의 열기가 아직도 식지 않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마음 수련회와 같은 여가 형태가 새로운 여가 트렌드를 형성해 가고 있으며(유승무, 2009c), 서점가에서 행복 관련 서적들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그렇다면 이 바람은 과연 얼마나 지속될 것이며 그럴 경우 그 사회적 결과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이 바람은, 2000년 이후 우리사회에 불어 닥친 웰빙 바람이 확산되면서 나타난 일시적 현상으로 간주할 수도 있겠지만1), 서구의 경우 60년대 후반부터 이러한 흐름이 지속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2), 장기화될 가능성도 결코 배제할 수 없다. 그리고 비록 서구에 비해 약 40년 정도의 시간의 지체가 존재하지만 오늘날 한국인들도 근대세계의 비인간화 및 소외를 서구인들 못지않게 충분히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3), 이러한 바람의 방향이 탈근대사조4)로 발전될 가능성도 있다. 게다가 최근의 행복 열풍, 그 장기화 가능성 및 그 서구적 타산지석 (他山之石), 그리고 서구의 반문화운동 및 탈현대사조가 , 불교나 노장사상과 같은 동양사상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는 사실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5), 최근 한국사회의 행복 현상이 또 하나의 동양사상 르네상스로 이어질 개연성도 있다.
이렇게 볼 때, 최근 한국의 행복 현상이 과연 또 하나의 동양사상 부흥으로 이어질 것인지 그리고 이어진다면 새롭게 부흥하는 동양사상의 담지자는 누구이고 그 특성은 무엇인지를 탐구할 필요가 있다. 물론 학문적 필요성도 있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갖고 있는 욕구충족 지향의 행복 개념이 서구 근대의 행복논리와 동일하지만6)정서적 차원에서나 일상적 차원에서 느끼거나 체험하는 행복의 내용은 근대 서구인들의 그것과 다른 집단주의적 특징을 내장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왔기 때문에7), 이를 구체적으로 확인해 볼 필요도 있다.
그러나, 시간적으로는 볼 때는 후자가 전자보다 사전에 일어나는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에, 이 글에서는 먼저 동양사상 속의 행복 개념(혹은 동양사상의 행복방정식)이 오늘날 한국사회의 ‘행복’ 현상과는 어떤 관계가 있으며 그러한 관계는 오늘날까지 어떻게 이어져(혹은 단절되어) 왔는지를 따져 본 다음, 최근 한국사회의 행복 열풍이 얼마나 지속될 것인지, 그 사회적 결과가 동양사상의 부흥으로 이어질 것인지 그리고 그렇다면 그 담지자는 누구이고 그 성격은 무엇인지 등을 논의해 볼 것이다.
사회학적 관점에서 다시 요약해 보면, 전자가 동양사상이 행복 현상에 미친 영향을 살피는 것이라면 후자는 행복현상이 동양사상에 미칠 영향을 전망해 보는 논의가 될 것이다.
1) 구재선․김의철(2006)은 ‘2000년도를 전후하여 ...웰빙주의가 사회적으로 확산되어... 웰빙과 개인의 행복추구는 한국인의 공공연한 담론의 대상이 되었고 최대의 관심사로 자리매김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2) 서구의 경우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 국가의 수준에서 일인당 GNP의 증가가 반드시 살 만한 사회로 근접하게 하는 열쇠가 아닐 수 있으며 한 개인의 수준에서도 소득의 증가가 삶의 만족 및 행복감을 항상 높여 주는 것은 아니라는 자각이 사람들의 마음속에 본격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하였다(김명소․한영석,2006).
3) 최근 각종 언론들은 한국인의 행복지수가 상대적으로 낮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보도하고 있는데, 그 원인은 한국인의 소외된 삶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4) 예컨대, 데리다가 이성중심성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거나 들뢰즈가 동일성을 폭력성으로 이해하고 차이성의 인정에서 타자에 대한 배려의 가능성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근대성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거니와 그러한 점에서 탈현대사조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박치완(2009)를 참고하기 바란다.
5) (르누아르, 2002)에 따르면, 서구의 뉴에이지운동을 이끌었던 지도자들이 왜 불교나 노장사상을 물론 요가나 참선 수행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으며, 유승무(2006)는 불교사상과 탈현대사조의 관계를 간략하게 논의한 바 있다. 불교와 탈현대사상의 관련성에 대한 보다 심층적인 연구로는 박치완(2009)을 참고할 수 있다.
6) 서구의 경우도 근대사회 이전까지는 욕구충족이 곧 행복이란 등식은 성립되지 않았다. 심지어 쾌락의 철학을 주장한 에피쿠로스마저도 ‘지족함의 가장 찬란한 열매야 말로 자유다’라고 외침으로써 유교의 안분지족의 행복논리와 동일한 행복논리를 전개하였다. 이에 대한 구체적 자료는 에피쿠로스(1997)를 참고하기 바란다.
7) 이에 대해서는 현경자(2004)를 참고하기 바란다.
2. 약간의 이론적 논의
2.1 선행연구의 비판적 검토
지금까지 한국사회학계에서는 ‘행복’에 관해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행복에 관한 거의 유일한 사회학적 연구는 박성환(2005)인데, 이 연구는 고전사화학자들의 저작을 토대로 하여 서구 근대사회의 행복논리를 잘 정리하고 있다
이 연구에 따르면, 서구 근대사회의 행복 논리는 대체로 세 단계를 거치면서 형성되었다.
첫번째 단계는 근대초기에 형성된 행복의 논리로서, 서구의 전근대사회에서 인간의 행복을 좌우한다고 간주해 왔던 우연, 운명, 신의 의지 등으로부터 벗어나 인간 스스로가 자유의지에 따라 행복을 만들어가는 것으로 인식하는 근대 초기의 계몽의 논리이다8).
두 번째 단계는 절대주의국가에 의한 행복의 창출도 시민의 자유가 전제되지 않는 한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논리가 형성된 세기 말 이후의 단계인데 이 단계에 이르면, 행복은 근대적인 자율적 주체의 창조적 자유의 산물이란 논리가 보다 확고하게 자립 잡게 된다.
세 번째 단계는 오로지 효용성을 인간 행위와 사고의 준거로 삼는 공리주의를 거치면서 형성된 행복의 논리로서, 욕구충족의 논리가 자유의 영역까지도 침범하는 행복의 논리가 완성되었고, 그 결과 근대가 추구하는 행복은 ‘자유로운 욕구충족’으로 변형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서구 근대의 행복 개념은 이미 19세기에 이르면 근대사회의 한계에 대한 성찰과 함께 비판의 대상이 된다. 그 선두에 고전사회학자들이 있었다.
예컨대 뒤르껭에 따르면 물질적 욕구충족은 또 다른 욕구를 자극하기 때문에 인간을 자살과 같은 고통으로부터 구출하기 위해서는 물질적 충족이 아니라 집합의식과 같은 요인을 중시해야 한다.
이와 유사한 논리는 짐멜에게도 관찰되는데, 그는 행복에 다가가면 갈수록 갈망은 커지기 마련이기 때문에 행복에 대한 현대인의 갈망은 거대해지고 이러한 거대한 열망은 명백히 돈(화폐)이 지닌 역량과 성공에 의해 자양분을 얻는다고 주장함으로써(짐멜, 2005), 진정한 행복은 이러한 세속적 성공 너머에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와 유사하게 베버도 행복이 결코 삶의 기술적 지배를 통해서는 제조될 수 없음을 지적함으로써 행복이 자동화된 욕구충족과는 거리가 먼 대상임을 역설하였다. 또한 맑스에 따르더라도, 이기적인 물질적 욕구충족은 물신화와 소외만을 결과하기 때문에 결코 행복을 담보해 주지 못한다.
이렇듯 고전사회학자들은 물질적 욕구충족 지향의 행복논리를 비판하고 진정한 행복을 보장해 줄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을 각각 그 대안으로 제시한다. 그 대표적인 예는 맑스의 대안으로서 자본주의적 질서를 지양한 사회주의사회이다(박성환, 2005)9).
이렇듯 고전사회학자들의 비판적 견해는 매우 유의미한 사회학적 함의를 내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글의 물음을 해명하는데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계몽주의의 산물인 고전 사회학의 거대담론만으로는 행복과 동양사상 속의 행복 논리 사이의 직접적인 인과관계를 도출해 내기도 쉽지 않다.
다만, 유교나 불교를 우리사회의 종교로 간주하고 행복을 일종의 감정으로 간주할 때, 종교와 감정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인간의 사회적 삶을 조명하고 있는 에밀 뒤르껭의 대표적 저작인 “종교생활의 원초적 형태(The Elementary forms of religious life)”는, 동양사상 혹은 동양종교와 한국사회의 행복현상의 상호작용을 파악하는데 빼놓을 수 없는 저작이다10). 그러나 그것마저도 이론적 차원에 한정된다.
8) 기원전 5세기 경에 출현한 붓다는 운명, 우연, 신 등과 같은 외적 절대를 부정하고 자신의 행위와 그 동기에 윤리적 책임을 묻는 업(業)사상을 전개한 바 있고, 그 이후 불교는 이러한 사상을 쭉 계승해 오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서의 진술은 서구의 전근대에 한정된 진술임을 밝혀 둔다.
9) 유승무(2009b)는 맑스와 붓다가 동일한 꿈, 즉 이상사회를 추구하였음을 논의하면서 맑스의 이상사회 즉 사회주의사회에 대해 간략하게 언급한 바 있다.
10)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Jonathan S. Fish(2005)를 참고하기 바란다.
경험연구와 관련해서는 오히려 ‘주관적 안녕“(subjective well-being:SWB)과 관련된 최근의 일련의 연구가 더 유용하다. 이른바 SWB와 경제성장의 관계에 관한 연구, SWB와 불평등의 관계에 관한 연구, 그리고 SWB와 종교적 믿음 및 실천의 관계에 관한 경험적 연구 등은 행복에 대한 경험적 차원과 관련된 풍부한 사회학적 자료와 함의를 제공해 준다.
예컨대, 리차드 윌킨슨(2008)은 SWB와 같은 주관적이고 심리적인 감정도 사회적 불평등 및 그러한 불평등을 야기한 사회체제와 무관하지 않음을 방대한 경험적 자료를 바탕으로 하여 매우 설득력 있게 검증해 주고 있다. 특히 이 연구에 따르면 육체적 고통 및 행복과 직결되는 건강조차도 사회불평등과 무관하지 않음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또한 R.A. Easterlin & O. Sawangfa(2009)는 개발도상국 13 개국의 경험적 자료를 토대로 하여 행복과 경제성장 사이의 관계를 탐구한 대표적인 성과인데, 장기적인 경제성장과 SWB 사이에는 어떠한 일관된 관계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결론은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R.A. Easterlin & O. Sawangfa(2009)와는 달리, B. Headey, J. Schupp, I. Tucci, and G. G. Wagner(2008)은 SWB와 종교생활 사이의 관계에 관한 시계열적 자료로서 1984년부터 독일에서 수집된 자료에 대한 패널연구의 결과인데, 이러한 연구에 따르면 종교적 믿음과 종교생활이 SWB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상과 같은 최근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물질적 부 이외에도 사회적 불평등으로 인한 차별과 불안과 같은 사회심리학적 요인이나 종교적 믿음이나 실천과 같은 다양한 사회적 환경이 특정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체감하는 행복에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암시하는데, 이는 최근 한국사회의 행복 현상도 동양사상을 포함한 사회 환경과의 관계라는 사회학적 관점에서 접근할 때 보다 잘 이해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한편, 사회학계와는 달리 최근 심리학계, 사회복지학계, 그리고 경제학계에서는 한국사회의 행복 현상에 대해 다양한 연구를 시도하고 있다. 특히 심리학계에서는 한국인이 느끼는 행복 개념을 발견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에서 본 연구에 어느 정도 도움을 준다.
예컨대 최근의 토착심리학적 연구에 따르면 사람이 살면서 어떤 요소가 충족되면 행복할 것이라는 믿음과 구체적으로 행복을 체험하는 정서적 경험이나 일상생활 경험 사이에는 큰 차이가 존재하며, 따라서 한국인의 행복 개념은 문화적으로 새롭게 구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구재선․김의철, 2006;한 민․한성열, 2009).
그리고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김명소․한영석(2006)은, 개인주의문화가 발달된 서구 사회에서 개발된 행복개념은 집단주의적 문화전통을 가진 한국인의 행복 개념을 측정하는 적절한 도구가 될 수 없다는 문제의식에 기초하여, 한국인의 행복 개념을 측정할 수 있는 새로운 측정지표의 개발을 시도하고 있다.
그 결과를 보면, 한국인들이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을 가르는 기준으로는 경제력이나 건강보다는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삶에 대한 자부심과 같은 자기 수용감, 문화생활 및 레저 활동에 참여하는 정도, 그리고 타인으로부터 현재의 자신의 사회적 지위, 학력 등에 대해 인정받고 있는 정도 등이 가장 상위 순위를 차지하였다11).
또한 현경자(2004)는 한국인이 느끼는 행복의 근원과 주제가 서구인들의 그것과 다르다는 점을 종단적 자료를 기초로 하여 구체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그 연구에 따르면, 서구의 경우 외향성, 낙관적 성격, 통제감, 자긍심 등 개인적 자질이 강조되지만 이는 한국인이 느끼는 행복의 근원이 아니었는데 반해 '마음의 편안함', '걱정 없음','나쁜 일이나 문제가 없는 생활’, ‘보통의 생활’, ‘의미있는 타인의 존재’, ‘자신이나 가족의 성실함과 충실한 생활태도’, ‘순응적 가치관’ 등은 서구인이 느끼는 행복의 근원 목록에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심리학적 연구는 이러한 차이의 동양사상적 기원을 언급하고는 있지만(현경자, 2004) 그 사회적 관계를 규명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볼 때 그리고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 볼 때, 동양사상과 행복 현상의 사이의 상호관계에 관한 사회학적 논의는 긴요하다.
11) 이 중에서 한국인에게는 여가나 자부심마저도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으려는 일종의 인정투쟁(호네트,1996)의 수단이자 산물이란 점을 고려하면, 한국인은 부모, 가족, 친구, 스승 등 ‘중요한 타자’는 말할 것도 없고 일반화된 타자로부터 인정받고 있는 정도가 그의 행복에 결정적인 요인으로 작용한다.
혈연의식, 학벌, 명품소비, 고급 승용차 및 고급아파트 선호, 성형 및 화장품 소비 열풍 등의 현상도 인정투쟁에서 승리하려는 욕망의 표현에 다름 아니다. 한국인의 인정투쟁과 관련해서는 유승무․박수호․최봉영(2008)을 참고하기 바란다.
2.2 본 연구의 감정사회학적 이론틀
인간은 육체와 정신을 가진 동물이기 때문에 그리고 인간은 이성 이전에 감정에 의해 움직이기도 하지만 감정을 이성적으로 통제하거나 관리하기도 하기 때문에, 물질적 웰빙(material well-being)과 정신적 웰빙(mental well-being)이 모두 행복의 필수적인 구성 요소이다. 때문에 행복을 SWB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은 불가피하지만 그것을 심리학주의로 귀결시킬 필요는 없다. 게다가 한국사회의 행복현상에 관한 심리학적 연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사회학적 시각이 필요하다.
감정사회학적은 이러한 필요를 충족시켜 주기에 적절한 분과학문이다. 그러나 감정사회학 내부에서도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 무엇보다도, 베버가 『직업으로서의 학문』에서 분명하게 지적했듯이, 베버주의적 시각에서는 학문 활동에서 오히려 감정을 배제해야 한다(바바렛, 2007).
뒤르껭의 전통을 잇는 구조주의적 시각에서는 사회적 사실이 감정이 미치는 영향을 강조하지만(J.S. Fish, 2005) 구조결정론의 약점을 내포하고 있다. 또한 맑스주의적 시각에서는 소외나 분노와 같은 감정을 사회경제적 조건에 의해 규정되는 측면을 부각시켜 주지만(J. Girling,2006) 이 시각 역시도 경제결정론의 한계를 갖는다.
이 글에서는, 행복(감정)에 대한 심리학주의와 결정론의 한계를 동시에 극복하기 위해, 미시적 측면(인간의 원초적 감정)을 거시적 측면(사회제도)과 관련시키되 상즉상입(相卽相入)의 관계12) -상호공존과 상호침투-를 갖도록 하는 새로운 이론 틀을 구성하고자 한다.
행복은 인간의 욕망(원초적 감정)과 그 통제메커니즘(사상이나 문화 및 사회제도) 사이의 함수관계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서는 구조이론과 행위이론의 이분법적 대립을 넘어서는 통합이론이 요구되는데, 사회학에서 대립하는 이항 사이의 상호작용을 강조하는 엘리아스(N. Elias)의 결합체 개념(엘리아스, 1987)은 이러한 요구에 어느 정도 부합한다. 다만, 엘리아스의 결합체 개념은 행위자와 행위자의 관계에만 초점을 맞춤으로써 제도와 제도의 관계는 물론 제도와 행위자 사이의 관계를 충분히 고려하지 못한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Robert Krieken, 1998). 바로 이러한 한계 때문에 필자(2006)는 한국의 전통문화와 사회제도의 상호변용을 설명하기 위한 새로운 이론틀을 구성하고 그것을 연기체13)라 명명한 바 있다.
12) 이에 대해서는 유승무(2006)을 참고하기 바란다.
13) 여기에서 연기체(inter-dependently originated one)란, 불교의 연기사상에서 빌어온 것이지만 최소한의
고정성도 부정하는 불교적 의미보다는 최소한의 고정성을 지닌 실체의 개념으로서 작업적으로 정의된 개념이다.
아래 그림 <1> 은 감정사회학적 시각에서 한국사회 행복 현상의 복합적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 원초적 감정과 그 통제메커니즘의 상호작용 관계를 연기체 개념의 논리에 따라 도식화한 것이다.
[그림 1] 한국사회 행복 현상의 연기체적 모형
위 [그림 1]에서 탐․진․치는, 붓다에 따르면, 삼독으로서 고통의 궁극적 원인이며 때문에 행복을 위해서는 수행을 통해14) 반드시 극복해야 할 대상이다. 그 결과가 ‘행복 A’의 영역에 해당된다.
또한 불교의 삼독과 배대된 소유, 지배, 명예는 칸트가 주장하는 열정(passions)인데, 칸트에게도, 이러한 욕망을 어떻게 이성적으로 잘 관리하느냐는 인간의 행복은 물론 사회윤리나 인류문명을 위한 일종의 정언명령이었다. 사회제도는 바로 그러한 과제를 해결하는 사회적 장치인데15), 세 가지 열정을 굳이 사회제도와 연결시켜 보면 경제제도, 정치제도, 사회질서(신분, 지위,사회적 인정 등)가 각각 대응된다. 그 결과로 확보되는 행복 영역이 ‘행복 B’의 영역이다.
결국 [그림 1]에 따르면, 오늘날 한국사회의 행복 현상은 ‘행복A’와 ‘행복B’의 총합인 셈이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행복A’와 ‘행복B’의 관계는 양자택일이나 이항대립의 관계도 아니지만 하나로 통합되는 관계도 아니다. ‘행복A’와 ‘행복B’의 담지자가 각각 다른 사람(혹은 다른 신분이나 계층)이 아니라 동일인이고 그에게는 ‘행복A’와 ‘행복B’가 모두 필요하지만, 그가 느끼는 ‘행복 A’의 순간(혹은 시간)과 ‘행복 B’의 순간(혹은 시간)은 마치 일과 여가의 관계처럼 분화되어 있다.
이에 제 3 장과 제 4 장에서는 인간의 욕망과 동양사상 사이의 관계를 통해 ‘행복A’를 자세하게 밝혀보고자 하며, 제 5 장에서는 인간의 욕망과 사회제도 사이의 관계를 통해 ‘행복B’를 비판적으로 진단한 다음 최근 한국사회의 행복 현상(‘행복A’와 ‘행복B’의 총합)이 동양사상 르네상스(혹은 그 여부)에 미칠 영향을 논의해 보고자 한다.
14) 외적 조건의 무상함을 인정하는 동양사상의 경우 행복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자기 자신의 욕망을 관리하는 방법을 채택할 수밖에 없다. ‘동양은 인간 스스로가 구원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모든 문제의 해결은 인간에게 있다고 보고, 인간의 무기력에 대한 사회구조적 해결의 출발도 인간에게서 찾는다. 그래서 사람이 마음의 평화를 갖느냐 갖지 못하느냐는 사회구조적 측면에 중점을 두기 보다는 인간 개인의 수양을 강조하고 개인의 도덕성을 문제시 해 왔다(유나바머, 2001)’.
15) ‘서양은 기독교 사상의 영향 아래 인간은 죄인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있다. ...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가능할 뿐이다. 여기에서 하나님이 인간에 대한 책임을 갖는 것과 같이 오늘날에는 사회가 그 구성원들에 대한 책임을 맡아야 한다는 논리가 전개된다. 따라서 개인의 무기력함은 사회가 구조적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으로 발전되기 때문에 서양 사회가 다분히 사회주의적 성격을 띠고 사회의 개혁을 통해 인간 구원을 강구하는 것이다(유나바머, 2001)’
3. 동양사상 속의 행복 개념과 행복방정식
동양사상과 행복 현상 사이의 관계는 논의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 관계를 매개하는 행복개념, 즉 동양사상 속의 행복 개념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런데 동양사상 내부를 보면 유교,불교, 노장사상 사이에도 개념상의 차이가 존재한다. 때문에 하나로 통일된 개념으로 표현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그 사상들 속에 내재하는 행복의 논리(혹은 행복방정식의 공식)는 동일하기 때문에, 동양사상의 행복 개념을 논리(혹은 공식)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에 여기에서는 우선 동양사상 속에 나타난 행복 개념을 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이를 동양사상의 행복방정식의 공식으로 환원(혹은 추상)함으로써 공통의 논리를 확보하고자 한다.
한자문화권에서 ‘행복’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것은 서구와의 접촉이 활발해지기 시작한 20세기 전후로 알려져 있다(김양현, 1999). 이는 오늘날 우리가 인식하는 행복이란 용어와 그 의미조차도 20세기 이후의 번역어를 통한 개념형성의 결과임을 암시한다. 그렇다면 20세기 이전 한국사회에서는 오늘날과 같은 행복상태를 어떤 개념으로 인식했으며 거기에 동양사상의 행복방정식은 어떠한 영향을 미쳤을까?
서양사상과 비교했을 때 동양사상은 공통적인 그 무엇을 지니고 있지만, 동양사상 내부만을 보면, 유교, 불교, 노장사상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때문에 바로 그 차이만큼이나 그 각각의 행복 개념도 조금씩 차이를 지니고 있다.
서구의 행복이란 단어와 의미가 상통하는 용어를 유교경전에서 찾아보면 ‘복’(福), ‘열’(悅). ‘낙’(樂) 등이 발견되며(김용남, 1999), 불교 경전에서 찾아보면 ‘고통을 벗어난 상태’임을 알 수 있으며, 노장사상에서는 ‘아무런 구속이나 제약이 없는 자연 상태’임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유교는 현세적 행복을 추구하게 되며16), 불교는 ‘초월적인 그러나 비유신론적인’ 행복을 추구하며(유승무, 2009a), 노장사상은 소요유(逍遙遊)가 상징하듯 마음의 행복을 추구한다17).
또한 그러한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에 있어서도 서로서로 조금씩 다르다.
유교는 내적 거경(居敬)과 외적 성찰(省察)을 통하여 마음이 외적 자극에 의해 산란해지는 것을 막는 공부를 강조하고(최복희, 2003), 불교는 수행을 통해 탐․진․치 삼독의 제거를 강조하는 등 유위를 주장하는데 반해(허우성, 1995), 노장사상은 모든 인위적인 집착을 내려놓음으로써 마음이 만물과 일체가 되도록 하는 무위(無爲)를 주장한다(이강수, 1995).
16) 유교가 얼마나 현세적 즐거움을 벗어난 세계를 경계했는지는 즐거움에서 도교적 색체를 제거하려는 노력이나 불교적 수행 대신에 거경(居敬)을 선택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다. 유교의 즐거움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이승연(2006)을 참고하기 바란다.
17) 실제로 장자(莊子)는 지인(至人)이 되어 무대(無待)의 소요(逍遙)를 누리고자 했다(이강수, 1995).
이는 유교, 불교, 노장사상이 저마다 고유한 행복방정식을 내장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첫째, 유교의 행복방정식은 ‘안빈낙도’(安貧樂道: 도를 추구하는데서 큰 기쁨을 느꼈기 때문에 가난한 처지와 같은 근심걱정으로부터 자유롭다 )라는 표현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
여기에서 도(道)란 인(仁)을 실천하는 행위이며 바로 그러한 사람이 곧 유교의 이상적인 인간인 군자(君子)인데, 군자는 ‘부귀를 누릴 때도 지나친 쾌락을 추구하지 않고, 곤궁한 처지에 놓여도 정도를 벗어나거나 권세 앞에 굴욕하지 않는 사람’이다.
공자는 ‘익자삼락’(益者三樂: 좋아해서 유익한 세 가지 즐거움)을 ‘예악을 알맞게 지키고, 남의 덕을 칭찬하고, 어진 사람을 많이 사귀는 것’이라 했다. 이는 자신과 자신의 관계를 잘 관리함으로써 자신과 타인의 사회적 관계까지도 성공적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즐거움임을 의미한다.
둘째, 불교의 행복방정식에 따르면, 행복은 얻으려고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불행이나 고통의 조건을 피할 때 바로 그 결과로 수반되는 과보이다. 이러한 이치는 깨달음을 얻은 붓다가 다섯 비구에게 최초로 설법한 내용(깨달음의 내용)인 사성제에 잘 나타나 있다. 사성제에 따르면, 붓다는 인생을 고해의 바다로 보았는데, 그 고통의 원인은 인간의 본질적 감정 즉 탐․진․치 삼독이다. 이것이 이른바 사성제 중 첫 번째 진리인 고제(苦諦)이다. 이 고제에 따르면 인간의 본질적 욕망 때문에 생로병사와 같은 근본고(根本苦) 이외에도 다양한 사회고(社會苦)가 수반되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바라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求不得苦)’이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해결책은 무엇인가? 그것은 행위자가 자신의 마음을 닦아서 삼독을 멸해야 하는데 그 방법론이 곧 수행이다. 이것이 사성제의 마지막 진리인 도제(道諦)이다.
이렇게 볼 때 불교의 행복방정식은 수행을 통하여 자신의 욕망을 완벽하게 통제했을 때 도달하는 고요한 마음의 상태이자 불행이나 고통의 조건을 완전히 벗어난 상태, 즉 열반(nirvana)이다. 이렇게 볼 때, 지고의 행복 상태를 의미하는 열반이야말로 불교적 의미의 진정한 행복 상태이다.
마지막으로 노자의 행복방정식은 ‘지족불욕’(知足不辱:만족할 줄 알면 욕을 당하지 않는다) 및 ‘지족지족상족’(知足知足常足:만족할 줄 아는데 만족할 줄 알면 늘 만족할 수 있다)이란 표현에 잘 나타나 있고, 장자의 행복방정식은 ‘지락무락’(至樂無樂: 지극한 즐거움은 즐거움이 없는 것이다)에 잘 나타나 있는데, 여기에 스며있는 행복방정식은 곧 무위(無爲)의 결과로 과욕을 제거됨으로써 마음의 평온을 얻는다는 것이다(매크리디, 2002). 요컨대 노자나 장자의 지락은 무위(도의 본성)의 결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교, 불교, 노장사상에 깃들어 있는 행복방정식의 공식은 동일하다. 무엇보다도 유교사상, 불교사상, 그리고 노장사상은 모든 존재를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지속적인 변화에 놓여 있는 그 무엇으로 이해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이렇듯 동양사상은 인간 외부의 궁극적 주체나 고정된 실체를 전제하기 않기 때문에, 그러한 대상과 관계를 맺는 인간이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외적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관리할 수밖에 없다는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다.
결국 다음과 같은 공식이 성립한다. 즉 오직 주체인 인간 스스로가 자신의 욕망을 얼마나 잘 관리하느냐에 따라 자신과 세계의 만남이 행복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동양에서 수양문화가 특히 발달한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러나 혹은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동양사상적 의미에서 행복에 이를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유교의 경우 선비(혹은 문사계급, 산림처사), 불교의 경우 출가자(방랑하는 계층, 수행자), 도교의 경우 도인이 바로 그들이었다.
동시에 그들은 각 사상의 핵심 담지자였기 때문에 그들이 활동하던 시대의 사회적 환경과 그들의 이해관계 및 실천 사이의 관계에 의해 각 사상은 대중화에 성공하기도 하고 탄압받고 억압당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담지자들 사이에도 하나의 공통점이 발견되는데, 그들이 유한계층이란 점이다.
이렇게 볼 때, 오늘날 이러한 유한계층의 사멸은 동양사상적 행복방정식의 단절로 볼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그 소수의 유한계층이 독점하던 동양사상적 행복을 대중화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기도 하는데, 실제로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점증하고 있는 유한 순간(시간)은 동양적 행복방정식의 대중화(혹은 부흥)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만들어 주고 있다. 또한 이는, 비록 오늘날 동양사상의 담지자였던 유한 계층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동양사상의 부흥이 가능하고 지속할 수 있는 객관적 근거이다.
4. 동양사상적 행복방정식의 연속성과 단절성
이상에서 살펴본 유교․불교․노장사상의 행복방정식은 전통적으로 한국인의 행복관에 큰 영향을 미쳐왔다(이규태, 1983). 또한 이홍우 외(1990)은 한국인에게 행복이란 재앙이나 화가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한국인의 행복 개념이 동양사상의 행복방정식과 무관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심지어 니스벳(2003)은 동서양의 비교에 근거하여 행복의 사상적 뿌리가 근원적으로 달랐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서도 우리는 오늘날 한국인의 행복이 동양사상의 행복방정식과 무관하지 않음을 추론할 수 있다.
“지금부터 2,500년 전의 고대 그리스와 중국은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과 사회구조 면에서 매우 달랐을 뿐만 아니라, 철학과 문명에 있어서도 서로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 그리스인들에게 행복은 ‘자신의 자질을 자유롭게 발휘하는 것’이었지만 중국인들에게 행복이란 ‘화목한 인간관계를 맺고 평범하게 사는 것’이었다.
... 흥미로운 점은 그런 차이들이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동양과 서양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큰 차이를 가져 왔다는 점이다(니스벳,2003).”
니스벳(2003)에 따르면, 사유의 방식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 연속성을 지니기 때문에 동양사상은 오늘날 한국인의 사유방식 혹은 행복 개념과 무관할 수 없다. 그렇다면 동양사상의 행복방정식이 오늘날 한국문화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발현되고 있는지를 살펴보자.
앞에서 살펴 본 동양사상의 행복방정식은 교육을 통해 직접 한국인의 행복관 형성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지만 일상생활 문화를 통해 한국인들의 정서와 느낌과 같은 감성구조의 형성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한국인의 행복관 형성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실제로 한국인의 일상적 인사말에는 상대방의 행복 상태 즉 안부를 묻는 말이 대부분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모두 동양사상과 무관하지 않다.
‘안녕하셨습니까? 가내 두루 평안하셨는지요? 별고 없으셨는지요? 무탈했습니까?’ 등과 같은 인사말 중에서 고통이나 불행이 없었는지를 묻는 인사말은 불교와 무관하지 않으며 가족관계가 원만했는지를 통해 안부를 묻는 것은 유교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아래의 시 ('박준영의 '하루') 와 같이 문학에서는 유교, 불교, 노장사상(혹은 자연주의)등이 모두 동원되어 삶의 행복 문제를 잘 표현하기도 한다.
"한 몸이었다가 서로 갈려 다른 몸이 된/
시집간 딸과 싸웠단다/
서로 상처받고/
듣는 나도 아파온다
약수통 둘러메고 산길로 향한다/
아이 밴 옥수수 일가가/
수수하게 인사하고/
짝을 진 노랑나비 훠어-훨/
아는 체 손짓한다
하양 보라 알맞게 섞어 핀 도라지도/
방긋거리고/
아이잉 벌소리 바쁘고/
새 노래 하늘에 맑다
이렇게 온 세상 하늘이/
마음 하나 비우면/
다 친구인 것을"
위의 시를 보면, 가족 간 불화가 자연을 통해 해소된다는 점은 무위자연을 주장하는 노장사상과 일맥상통하지만, ‘한 몸이었다가 서로 다른 몸이 된’ 이란 표현이나 ‘아이 벤 옥수수 일가’라는 표현에서는 유교의 가족주의문화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그리고 ‘마음 하나 비우면’ 이란 표현은 불교나 노장사상에서 가장 중시하는 표현이다.
실제로 전통사회에서 한국인들이 느끼는 행복은 문학작품의 주요 모티브가 되어 왔다. 특히 권선징악을 주제로 한 문학작품의 경우 행복과 불행이 극명한 대조를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러한 행․불행에 영향을 미친 사상이 바로 유교, 불교, 노장사상과 같은 동양사상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예컨대 업(業)사상을 모티브로 하는 『심청전』의 행복관에는 불교사상이, 여인의 정절을 소재로 한 『춘향전』의 행복관에는 유교사상이, 그리고 『흥부전』에는 두 가지 사상이 모두 담겨져 있다.
특히 과거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그 내용을 알고 있는『흥부전』을 보면, 한국문화 속에 스며들어 있는 동양사상적 행복방정식이 잘 드러난다18). 주지하듯이『흥부전』의 줄거리는 과도한 욕심 때문에 동생을 내쫒고 제비의 다리를 부러뜨린 형 놀부와 형제애를 중시하고 미물(제비)에 대해서도 배려하는 자비의 마음씨를 갖고 있는 착한 흥부에게 제비가 각각 박씨를 물어주어 보답을 하는데 흥부는 흥하고 놀부는 망한다는 내용이다. 이렇듯『흥부전』에는 놀부의 과도한 욕심과 그 귀결로서의 불행이 흥부의 착한 마음씀씀이와 그 인과응보로서의 행복과 극명하게 대비되고 있다는 일반적인 도덕율 외에도 전통사회의 동양사상 즉 유교의 형제애 및 불교의 인과응보사상 등이 반영되어 있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는 과거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과거의 이야기로만 머물러 있지 않고 오늘날의 젊은이들에게로 이어지고 있다.
‘사랑이란 그 말은 못해도, 먼 곳에서 이렇게 바라만 보아도, 모든 걸 줄 수 있어서 사랑할 수 있어서, 난 슬퍼도 행복합니다.’ 이 구절은 이승철의 ‘그런 사람 또 없습니다’의 가사 중 일부다.
이 노래에 담긴 행복 개념은 김소월의 ‘진달래 꽃’의 정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로 김소월의 ‘진달래 꽃’이 대중가요로 작곡되어 불리기도 했다
이는 '말' 이 아니라 말 이전의 '마음'을 훨씬 더 중시하고 그것을 전달하려는 문화문법(cultural code), 즉 ‘살살이꽃 피거든 살짝 떠난 줄 아세요’와 같은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논리19)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20).
18)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김종철(2009)를 참고하기 바란다.
19) 이는 붓다가 제자인 마하가섭에게 염화미소로 수기를 전한 사건에서 비롯된 선불교의 의사소통방식으로서, 언어도단의 상황에서도 속마음을 전하는 대표적인 방법이다. 선불교에서는 이러한 소통방식을, 진리가 교설 이외에 이신전심으로 전해진다는 의미의 교외별전(敎外別傳)이라 부른다.
20) 바로 이러한 마음의 징표 때문에 최근 한국인의 행복 개념의 특수성을 해명하려는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최근 한국인의 행복 개념은 신명(神命)과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고(한민․한성열, 2009), 한국인의 행복 개념이 전통적인 복(福) 개념과 어떤 점에서 같고 어떤 점에서 다른가를 탐구하는 시도도 있었다(이지선․김민영․서은국, 2004).
그러나 정반대의 주장도 가능하다. 실제로 19세기 서세동점 이래 서구만이 아니라 비서구사회도 자본주의적 경제제도 및 자유민주주의적 정치제도를 채택하고 있는데 이는 이제 비서구인도 물질적 조건 등 삶의 구조적 조건의 개선을 통한 행복의 확보라는 근대적 사유의 길을 걷고 있음을 의미한다.
물론 한국사회도 예외가 아니다. 개항과 함께 서구 근대를 수용하기 시작한지 한 세기 이상의 시간이 흐른 지금, 그리고 상품, 정보, 자본, 사람 등이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이른바 세계화시대인 오늘날, 전통사회의 한국인의 일상은 실제로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되었다.
‘어느새 짧은 아침의 기록이 끝났다. 일상 속에서 서구적 양식을 찾아보는 것은 동양적 모습을 발견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 이런 나의 일상 속에서 내가 동양인이란 사실을 의식할 기회는 거의 없다. 솔직히 어떤 모습이 동양인다운 것인지조차 알 수 없다(강정인 외, 2004: 42-43).’
이 글은 어느 대학생이 자신의 일상 속의 서구중심주의를 묘사한 내용의 일부인데, 이는 동양적인 것의 단절성을 의미하며 따라서 이 절 서두의 진술 즉 니스벳의 주장을 반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그렇다면 니스벳의 주장은 틀린 것인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연속성을 보라. 그렇다면 대학생의 생활일기가 현실을 반영하지 않고 있는가? 그렇지도 않다. 오히려 ‘지금 여기’, 두 주장은 모두 사실이고 또 엄연히 공존하고 있다. 한국인의 경우 한 사람의 삶 속에도 두 가지가 공존하고 있다.
결국 한국사회의 ‘행복’ 개념은 <그림 1>에 나타난 것처럼 동양사상 속의 행복 개념뿐만 아니라 서구근대의 행복 논리까지도 포함하는 복합적 개념이며, 그러한 점에서 이중문화적(bicultural) 개념이다.
이는, 오늘날 한국사회에서는 전통적 의미의 유한 계층이 사멸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얼마나 유한시간의 비중이 커질 것이며 또한 주체가 그 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에 따라 한국사회 및 한국인 개개인의 행복의 복합적 구성이 달라질 수 있음을 의미한다.
5. 행복 열풍과 동양사상의 재발견
이상으로 우리는 동양사상 속의 행복 개념이 오늘날 한국사회의 행복 현상에 어떻게 영향을 미쳐왔는지를 논의해 보았다. 그러나 혹은 그렇기 때문에 즉시 추가적인 의문이 수반된다. 즉 최근 한국사회의 행복 열풍이 과연 얼마나 지속될 것이며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지속적으로 동양사상에 대한 관심을 유지시켜 줄 것이며 그렇게 등장한 동양사상의 담지자는 누구이고 그 성격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오늘날 현대인의 행복 찾기가 동양사상 (의 재발견)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새롭게 묻는 것으로서, 앞에서 살펴 본 제 4 장의 내용이 동양사상이 한국사회의 행복현상에 미친 영향을 드러낸 부분(감정사회학의 첫 번째 측면)이라면 이 질문은 오늘날 한국인의 행복 열풍이 동양사상(의 재발견)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묻는 질문이며 지금까지의 논의에서 배제해 왔던 감정사회학의 두 번째 측면과 관련된 질문이기도 하다.
5.1 행복 열풍의 사회구조적 조건과 동양사상의 새로운 담지자
행복 열풍, 그 중에서도 특히 동양사상적 행복 열풍은 크게 세 가지 사회구조적 조건과 무관하지 않다.
첫째는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 생산수단의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증가하였고 그 결과 오늘날 한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선진자본주의사회는 이제 삶의 기본적인 물질적 조건을 충족시키기에 충분한 발전단계에 진입하였다.
둘째는 첫째의 조건이 확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혹은 바로 그 조건을 지속적으로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오늘날 현대인들은 소외된 삶을 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그 결과 삶에 대한 만족도나 행복지수는 높아지지 않는다는 역설이 발생하고 있다.
셋째는 사회의 다수의 사람들이 수양에 필요한 유한의 순간(시간)을 충분히 확보할 수 있어야 하는데, 굳이 제레미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을 언급하지 않아도 오늘날 한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선진사업사회는 생력화(省力化)로 인하여 노동시간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는 반면에 경제적 부의 크기와 무관하게 모든 계층에게 여가시간(혹은 유한의 순간)은 상대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실제로 오늘날 한국사회는 최소한 이 세 가지 조건을 완벽하게 구비하고 있다. 이는 오늘날 한국사회에 동양사상의 새로운 담지자가 등장했음을 의미하며 동양사상적 행복 열풍이 이들에 의해 창조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그들은 누구인가?
두말할 나위도 없이 오늘날 한국사회에는 선비나 도인과 같은 유한신분이나 유한계급이 배타적 집단으로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비록 불교의 출가자집단(이를 승가라 부른다)이 존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숫자는 약 2 만명 정도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극소수에 불과하다. 물론 오늘날 한국사회는 베블렌의 주장하는 과시소비가 가장 번성하고 있는 사회이기 때문에, 부르디외의 문화자본과 같은 개념을 적용하여 유한계급을 추출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산림처사(양반), 출가자, 도인과 같은 전통적 유한 신분집단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신분집단 즉 유한시간을 독점하던 계급이 붕괴한 현대사회에서는, 유한 시간이 시민들에게 대중화되었다. 이는 오늘날 새로운 동양사상의 담지자는 불특정 시민 일반임을 의미한다.
이렇게 볼 때, ‘새로운 담지자가 과연 얼마나 늘어날 것인지 그리고 그들이 자신의 유한 시간을 어떻게 소비해 나갈 것인지?’에 따라 행복 열풍 혹은 동양사상 르네상스는 가능하기도 하고 불가능하기도 하며 지속적이기도 하고 일시적이기도 할 것이다.
5.2 행복 열풍의 지속 가능성
최근 한국사회의 행복 현상은 크게 두 가지 특성을 지니고 있다.
첫째는 행복 열풍의 방향성이 이성(머리, 냉정)에서 감성(가슴, 열정)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이른바 탈현대사조는 그 대표적 추세라 할 수 있는데, 이는 건축계나 예술계는 물론이고 학계에서도 점차 많은 동조자를 확보해 가고 있다. 이는 최근 한국사회의 행복 열풍이 동양사상 르네상스로 이어질 수 있음을 암시한다.
둘째는 행복추구의 관심이 외부대상 지향성(욕구충족지향성)에서 자아 내부 지향성(마음의 평정)으로 변화하고 있다. 실제로 최근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수행 및 주관적 의미 찾기 중심의 여가프로그램, 즉 불교에서 제공하는 단기출가, 템플스테이, 각종 수련회 등이나 고가 및 고택 체험과 같은 유교문화응용 프로그램에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참가하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또한 최근 한국사회의 행복 열풍이 동양사상 재발견에 모종의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강력하게 시사하고 있다.
감성에 대한 이성 우위의 문화인 그리이스문화(헬레니즘)과 인간 외부의 절대자를 설정하고 있는 기독교(헤브라이즘)가 서구문화의 뿌리이자 서구 근대적 행복 추구의 두 축이라면, 동양문화의 뿌리는 유교, 불교, 노장사상이다. 그런데, 이러한 동양사상은 공통적으로 감성과 이성의 이항대립이 아니라 상즉상입(인간과 인간을 넘어선 모든 존재의 상호작용적 결합관계)을 전제하고 있으며 따라서 주체 자신의 내적 마음 상태를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행복을 결정짓는다. 바로 이러한 문화적 잣대를 기준으로 할 때, 최근 한국사회의 행복 찾기 방향은 동양사상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이는 <그림 1>의 ‘행복A’의 영역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고 있으며, 따라서 수행문화나 수양뿐만 아니라 동양사상적 행복방정식에 대한 점점 더 기울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경향은 얼마나 지속성을 가질 것인가? 이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경제학자인 잉글하트의 주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잉글하트에 따르면, 소득수준 1만에서 1만 5천불을 기준으로 그 이하에서는 소득의 증가에 따라 행복지수도 그에 비례하여 증가하지만 그 이상에서는 비례하지 않음을 밝혔고 그 지점을 결별점(decoupling point)라 불렀는데(이정전, 2006;유승무, 2009a), 이는 한편으로는 한 국가의 차원이든 한 개인의 차원이든 일정한 소득 수준에 도달한 집단과 그렇지 않은 집단 사이에는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매우 다름을 의미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오늘날 한국사회의 행복추구의 방향이 더 이상은 물질충족 지향성이 아니라 비물질적 가치나 정신적 양식을 채우는 방향성을 띠게 될 것임을 의미한다.
이렇게 볼 때, 최근 한국사회의 행복 열풍은 일시적 바람이 아니라 장기적 추세로 보이며, 그 바람의 장기지속은 동양사상 르네상스로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5.3 동양사상 르네상스의 성격
그렇다면 이렇듯 장기지속성을 가지는 동양사상 르네상스의 성격은 무엇인가? 우선 많은 학자들이 그것을 일종의 탈현대(성)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동양사상 르네상스는 근대사회의 위기와 근본적인 한계에 대한 대안으로 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 대표적인 연구 성과가 홍승표(2005)이다.
그러나 본 연구의 시각 및 그림<1> 에 따르면, 오늘날 한국인의 행복 영역에서 ‘행복 A’와 ‘행복 B’ 양자택일의 관계가 아니라 상즉상입의 관계를 갖는 두 실체이다.
그 중에서도 ‘행복 A’가 동양사상적 행복 영역인데, 이는 사회구조적 조건 및 담지자의 주체적 의도에 따라 항상 새롭게 재발견되고 재구성되는 ‘열린’ 공간이다. 이렇게 볼 때, 최근 한국사회의 행복 현상과 관련하여 동양사상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것은 근대성에 대한 엔티테제이기 보다는 오늘날의 사회구조적 조건에 부응한 동양사상의 재발견 및 재창조의 결과로 생각된다.
실제로 지금까지 동양사상은 하나의 고정된 실체로 존재하기 보다는 현실적 요구에 부응하여 실용적으로 재발견되어 왔다. 유교, 불교, 도교가 모두 수입된 사상(혹은 종교라)는 사실이 이미 재발견에 다름 아니지만, 그러한 사상조차도 무수한 역사 속에서 당대의 실용적 이유 때문에 다양하게 재발견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한국선’이나 ‘성리학’은 그 산물이다. 또한 근대에 한정하여 보더라도, 동양사상은 우선 서세동점 시기에는 서기(西器)에 대립되는 동도(東道)로 재발견되었고, 일제시대나 서구화 및 산업화 시기에는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로 재창조되기도 했으며, 경제성장기에는 경제성장의 문화적 요인으로 재발견되었고 경제위기에는 경제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재발견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향후 동양사상 르네상스도 그 연속성 상에 위치시켜 봐야하지 않을까?
6. 나오는 말
주지하듯이 대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오늘날 전 지구에 흩어져 있는 대부분의 사회는 서구화된 근대사회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현대 한국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한국사회 속에는 동양사상(혹은 동양종교)과 같은 문화적 요소도 공존하고 있다. 때문에 이러한 한국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현대 한국인의 삶은 물론 사회적 현상도 이러한 이중문화적 요소로부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한국인의 행복 개념이나 한국사회의 행복 현상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이 글에서는 최근 한국사회의 행복 현상과 동양사상 속의 행복 개념의 관계를 사회학적 시각에서 규명하고자 하였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동양사상 속의 행복 개념이 최근 한국사회의 행복 현상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최근의 행복 열풍이 향후 동양사상 르네상스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논의해 보았다.
그 결과, 우리는 한국사회의 이중문화적 성격 때문에 동양사상의 행복 방정식의 공식은 연속성을 지니기도 하지만 동시에 단절성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최근 행복 열풍으로 인한 동양사상 르네상스도 근대성에 대한 반동(Anti-movement)이기보다는 한국사회 속에 내재하는 동양사상적 요소가 최근의 기능적 요구에 부응하여 재발견되거나 재창조된 결과로 해석하였다.
이러한 발견은 행복 현상의 한국적 특수성을 해명하는 의의를 갖는 것은 물론 현대성 및 탈현대성과 관련된 논쟁에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제공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은 과욕으로 인한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 한정된 지면에서 너무 방대한 주제를 소화하는데서 오는 논리적 비약뿐만 아니라 특정한 진술에 대해 충분한 근거를 제시할 수 없었던 한계점이 산견된다. 때문에 이에 대한 보완 연구 . 및 경험적 검증 작업은 이 글의 과제로 온전히 남아있다.
참고문헌 -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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