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유학자들의 동기감응론 인식
박정해**․한동수***
1. 머리말
2. 동기감응론의 語源과 다양한 논의
3. 동기감응론의 비판적 시각
4.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풍수에 대한 양면성
5.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동기감응론 인식
6. 맺음말
<국문초록>
본 연구는 風水의 구성논리에서 중요한 위치를 확보하고 다양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동기감응론에 대한 조선 유학자들의 인식에 대해서 살펴본다.
주자의 학문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던 조선의 유학들에게 있어서 주자의 『山陵議狀』을 비롯한 동기감응론의 수용은 전적으로 받아들이기도 그렇다고 부정할 수도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 그래서 조선의 유학들은 풍수를 전적으로 부정하기 보다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를 견지한다. 왜냐하면 동기감응론을 부정하던 자신들의 주장을 스스로 부정하는 우를 범할 수도 그렇다고 주자의 의견을 부정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조는 조선왕조 내내 조선 유학자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정한 영역에서는 유학자들의 의식 속에도 동기감응론을 부정하기 보다는 일부 수용하는 생각은 존재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꼭 풍수서와 같은 길흉화복의 형태가 아닐지라도 또 다른 형태의 동기감응론은 존재하고 있었다.
명확한 신분사회에서 벼슬길에 나가 권력을 가져야만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환경적인 요인은 획기적인 신분 상승의 기회를 찾아야만 했다. 따라서 돌파구를 풍수에서 찾고자 하였고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는 음택 풍수는 상당히 매력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당장 눈으로 확인하기 어렵고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을 해결하는 신비한 마력을 가진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유교에 바탕을 둔 조상숭배사상과의 결합은 음택풍수에 대한 폭발적인 수요를 불러일으키기에 이른다. 따라서 자기 자신만 아는 현대인들에게 있어 아쉬운 조상 섬김과 효 사상을 보완한다는 측면에서 음택 풍수를 통한 동기감응론의 장점은 나름의 가치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 주요어: 동기감응론, 풍수, 조선 유학자, 실학자, 문화
* 본 논문은 한양대 풍수대토론회에서 “조선유학자들의 동기감응론 인식”이라는 주제로 발표한 논문을 추가 보완하여 작성하였음.
** 연구책임자, 교신저자: 한양대학교 건축학과 박사과정 수료
*** 공동연구원: 한양대학교 건축학부 교수
1. 머리말
風水는 일종의 민족문화로서 자연과학의 한 분야라 할 수 있다. 자연에 순응하여 자연을 해석하고 더 나아가 자연을 이용하며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개조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포함하고 있다. 실내외의 자연환경이 유기적으로 조화를 이루어 인간의 주거환경을 개선하는 환경적인 요소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이러한 주거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으로는 바람과 물, 교통, 조경, 그리고 다양한 환경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게 된다.1)
또한, 풍수는 땅을 인간의 生母로 간주하는데서 출발한다. 땅은 곧 인간을 생육하는 여성, 즉 어머니로서 역할과 능력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찾는 것이 풍수이다.2) 곧 풍수는 인류의 오랜 역사를 통해 최적의 환경을 찾아내기 위한 환경과학으로서 그 위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활용가치는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전통적인 사고의 바탕에는 천·지·인 삼합사상이 주 구성논리로서 자리하고 있으며 우리민족 인식의 뿌리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1) 石建國, 『玄空風水實例精講』, 北京 大衆文藝出版社, 2009, 1쪽.
2) 村山智順, 崔吉城 옮김, 『朝鮮의 風水』, 民音社, 1990, 27쪽.
風水는 東晋의 郭璞(276~324)에 의해『葬書』가 출간되면서 이론적 바탕을 구성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또한 ‘葬者 乘生氣也’라는 굉장히 유명한 명언을 만들어내고 있다. 사람이 생기로서 태어난 이상 死骨일망정 생기 속에다 안장한 후라야 死者의 안위는 물론이요 자손의 복록도 바랄 수 있는 것이라 했다.3)
즉, 인간이 생명을 유지하는 동안에 하늘로부터 양의 에너지 천기를 흡수하여 魂이 길러져 우리의 정신을 관장하고 땅으로부터 음에 해당하는 지기를 흡수하여 넋(魄)을 길러 육신을 관장하면서 정신과 육체의 조화를 꾀한다는 것이다. 즉 하늘의 양기와 땅의 음기를 흡수하여 음양의 조화 속에 인간의 기가 형성된다는 천·지·인 삼합사상은 전통 유학 사상의 핵심을 이룬다.
그 외에도 ‘부모의 유골이 기를 받으면 자식이 음덕을 받는다(本骸得氣 遺體受蔭)’라는 명제를 던지고 있다. 여기에 덧붙여서 張說등은 註釋을 통해 구리 광산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기는 서로 감응하기 때문에 마치 사람이 그 부모로부터 몸을 받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氣相感應 猶人受體於父母)’라고 하여 동기감응론의 당위성을 제시하고 있다.
『朝鮮王朝實錄』에도 『地理辨妄』을 인용하여 “천지의 사이에 이것은 理가 있다면 이 같은 物이 있고, 이 같은 物이 있다면 이 같은 應이 있는 것이다.”4)라고 하여『葬書』와 같은 주장을 수용하고 있다. 이러한 동기감응론은 천·지·인 삼합사상에 바탕을 둔 유학의 효친사상과 절묘한 조화를 통하여 상당히 발전적인 모습을 보인다. 그러면서도 風水의 구성논리에서 중요한 위치를 확보하고 다양한 논쟁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또한 다양한 비판과 수용이 이루어졌으며 결론을 도출하기 위한 노력들이 진행되고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동기감응론의 다양한 논의와 더불어 조선 유학자들이 그것을 어떻게 수용하고 인식했는지 고찰해 보고자 한다.
3) 朴奉柱, 『韓國 風水理論의 定立』, 관음출판사, 2002, 32쪽.
4) 『世宗實錄』卷92, 23년 5월 19일(갑인) 6번째 기사
2. 동기감응론의 語源과 다양한 논의
풍수이론은 땅에 천지만물을 생성하는 원리로 氣가 있다고 생각했다.5)
인체의 혈관에는 혈기가 있고 혈맥이 있듯이, 땅에도 지기가 있고 지맥이 있어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가 된다. 이런 땅의 맥이 인간의 길흉화복에 영향을 미친다는 의식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동기감응론은 꾸준한 생명력을 바탕으로 풍수이론의 핵심으로 자리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동기감응론을 부정하게 되면 풍수이론은 성립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5) 안기수, 『한국 전통문화탐방』, 보고사, 2007, 152쪽.
동기감응론은 단순히 풍수에서만 주장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아니다. 동양사상의 근본을 이루는『周易』「乾」 卦의 내용 중에는 孔子(BC 552∼BC 479)의 말을 빌려 동기감응론에 입각한 설명을 하고 있다. 즉 같은 소리는 서로 應하고 같은 氣는 서로 구한다고 하는 “同聲相應 同氣相求”라는 표현을 통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동기감응론에 상응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같은 소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氣는 서로 구한다. 물은 습한 곳으로 흐르고 불은 마른 곳으로 나간다. 구름은 용을 따르고 바람은 범을 따른다.
성인이 나타나면 만물이 바라본다. 하늘에 바탕을 두는 자는 위로 친하고 땅에 바탕을 두는 자는 아래로 친한다. 각기 자기와 같은 무리를 따르기 때문이다.’
나는 용이 하늘에 있는 경우는 하늘의 덕에 위치하는 경우이다. 대저 대인은 천지와 그 덕을 함께하고 일월과 그 밝음을 함께 하며 사시와 그 순서를 함께 하고 귀신과 그 길흉을 함께 한다.
하늘보다 먼저 할 경우에는 하늘이 그를 어기지 아니하며, 하늘보다 늦게 할 경우에는 하늘의 운행 상황을 받든다. 하늘도 어기지 아니하는데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랴 하물며 귀신에 있어서랴.6)"
6) 이기동, 『주역강설』, 성균관대학교 출판부, 2008, 90~91쪽,
“九五 飛龍在天 利見大人 象曰飛龍在天 大人造也 文言曰九五曰飛龍在天利見大人 何謂也
子曰 同聲相應 同氣相求 水流濕火就燥 雲從龍 風從虎
聖人作而萬物親 本乎天者 親上 本乎地者 親下 則各從其類也
飛龍在天 上治也 飛龍在天 乃位乎天德 夫大人者 與天地合其德 與日月合其明 與四時合其序 與鬼神合其吉凶
先天而天弗違 後天而奉天時 天且弗違而況於人乎 況於鬼神乎.”
이러한 공자의 ‘同聲相應 同氣相求’는 풍수의 근간을 이루는 동기감응론의 語源에 해당되며 가장 오래 된 논리적 구성이다. 또한 꾸준히 인용되고 발전하여 董仲舒(BC 170∼BC 120?)는『春秋繁露』에서 “온갖 사물도 다른 것과 함께 하는 것을 떠나 그 같은 것과 함께하는 것을 따르는 것이다.그러므로 기가 같으면 모이게 되고 소리가 견주게 되면 응하는 것은 그 징험이 명백한 것이다.”7)라고 하여 확신하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그에 앞서 秦代의 呂不韋( ? ~BC 235)는『呂氏春秋』에서 부모와 자식 간은 ‘骨肉之親’이라는 유명한 말로 서로가 같은 뿌리에서 나왔으나 몸만 따로 존재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7) “百物其去所與異 而從其所與同 故氣同則會 聲此則應 其驗皦然也.” 董仲舒,『春秋繁露』,남기현 역,『春秋繁露』「同類相動」, 자유문고, 2005, 384쪽.
"부모의 자식에 대한 관계는 몸은 하나로 같이 하면서 형체만 둘로 나뉘어 있고 기운은 하나로 같이 하면서 숨만 달리 쉰다. 마치 풀에게 꽃과 열매가 있는 것처럼 그리고 나무에게 뿌리가 있는 것처럼 비록 처해 있는 것은 달리 하더라도 서로 통하여서 숨은 의지는 서로에게 미치고 아파서 앓는 것은 서로를 구해주고 근심은 서로를 움직이며 살면 서로 기뻐하고 죽으면 서로 슬퍼하니 이를 일컬어 뼈와 살을 나눈 혈육이라 한다.
정기는 한쪽의 참마음으로부터 나와 다른 쪽 마음에서 감응되어 양쪽의 정기가 서로를 얻게 되는 것이니 어찌 말을 기다리겠는가?8)"
8) “故父母之於子也 子之於父母也 一體而兩分 同氣而異息. 若草莽之有華寶也 若樹木之有根心也 雖異處而相通 隱志相及 痛疾相救 憂思相感 生則相歡 死則相哀 此之謂骨肉之親.
神出於忠 而應乎心 兩精相得 豈待言哉?” 呂不韋, 김근역, 『呂氏春秋』,「精通」, 민음사, 1993, 412~413쪽.
부모와 자식 간은 비록 몸은 떨어져 있으나 서로 통하고 같은 기가 서로에게 작용한다는 것으로 동기감응론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산자와 산자간의 관계성만을 제시하고 있으며 산자와 죽은 자와의 관계성 까지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氣는 서로가 통한다는 논리를 부모와 자식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한발 더 나가 북송시기의 程子는『二程集』의 「葬說」과 「葬法決疑」에서 葬事를 통한 길흉론과 함께 동기감응론에 입각한 다양한 주장을 쏟아내고 있다.
특히 「葬說」에서는 “부조와 자손은 기운이 서로 같으니, 그쪽이 편안하면 이쪽도 편안하고 그쪽이 위태하면 이쪽도 위태한 것 역시 뿌리와 지엽의 관계처럼 당연한 이치이다.”9)라고 하여 동기감응론에 입각하여 산자와 죽은 자와의 관계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정자의 주장은 주자에게 영향을 미치게 되고10) 주자의 인식은 조선 유학들에게 또 다른 인식을 심어주게 된다.
그래서 『承政院日記』에는 “‘하늘과 사람이 한 가지 이치이고 드러난 현상과 오묘한 이치 사이에 간격이 없으니, 吉凶의 감응이 어찌 없겠는가.’라는 내용은 실로 乾卦 文言의 이른바, ‘천지와 그 덕이 부합하며 일월과 그 밝음이 부합한다.’는 말에 딱 들어맞으니, 아, 성대합니다.”11)라고 하여『周易』건괘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하여 동기감응에 정확히 부합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가장 신봉하였던 朱子도 동기감응론을 완전히 동의하고 수용하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朱子語類』「性理一」에는 다음과 말하고 있다.
9) 程子, 『二程集』, 「葬說」, 中華書局, 2011, 623쪽, “父祖子孫同氣 彼安則此安 彼危則此危 亦其理也.”
10) 程子는 중국 북송시기의 程明道(1032~1085) 程伊川(1033~1106) 형제를 말하는 것으로,周簾溪에게 배우고 理를 최고의 범주로 삼아 도학을 체계화하고 발전시켰다. 주자는 명도의 학문을 비판적으로 이천의 학문을 전적으로 수용하여 주자학의 골격을 세웠다.
11) 『국역승정원일기』, 인조 3년 9월 25일, “聖旨所謂天人一理 顯微無間 休咎之應 豈無所感者 實與《乾》之《文言》所謂與天地合其德 與日月合其明者同符 吁其盛矣.”
"하늘이 낳은 만물은 어느 하나라도 거짓된 것이 없다.
세상에 본성이 없는 것은 없다. 생각건대 어떤 것이 있으면 곧 그 본성도 있으며, 어떤 것이 없다면 그 본성도 없다.12)"
12) 黎靖德, 『朱子語類』, 허탁․이요성 역, 『朱子語類』, 「性理一」, 도서출판 청계, 2000, 504 쪽, “天地生物也 一物與一無妄 天下無無性之物 蓋有此物 則有此性 無此物 則無此性.”
주자는 ‘하늘이 낳은 만물은 어느 것 하나도 거짓이 없다’라고 하면서 ‘본성이 없는 것이 없고, 본성이 없다면 그 본성 자체도 존재할 수 없다’라고 하여 부모 없이 자신이 존재할 수 없다는 논리로 동기감응론과 일치하는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 또한,『山陵議狀』에도 이러한 논리의 전개는 계속되고 있다.
"죽은 이의 형체를 온전하게 하고 신령의 편안함을 얻게 하기 위하여 (중략) 반드시 소중히 하고 삼가면서 정성과 공경하는 마음을 다하여, 오래도록 편안하고 영원히 쉴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할 것입니다. 이렇게하면 그 자손은 융성하고 제사는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의 이치입니다.13)"
13) 朱子, 『山陵議狀』, “使其形體全而神靈得安 (중략) 以子孫而藏其祖祖考之遺體 則必致其謹重誠敬之心 以爲安固久遠之計 則氣子孫盛而祭祀不絶 此自然之理也.”
즉 죽은 이의 형체를 잘 보존하면 제사는 끊이지 않고 보존할 수 있다
이것이 자연의 이치라는 것이다. 이것은 주자가 풍수에 대한 깊은 식견을 바탕으로 자신의 소견을 밝힌 것으로 동기감응론에 바탕을 둔 풍수이론에 대하여 확고한 믿음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의식의 한 부분을 차지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 그는 찾는 손님들과 즐겨하는 이야기 소재가 풍수였다14)라고 하는데 풍수와 함께 하는 그의 일상생활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4) 이훈 飜譯, 『山陵議狀』, 김두규 풍수이야기, 2002, 풍수고전강독 해설.
“宋나라 조여치가 지은 『賓退錄』에 ‘朱文公嘗與客談世風水’ 라고 적고 있다.
<표 1> 聖賢들의 同氣感應論 認識比較
區 分 | 孔子 | 董仲舒 | 程子 | 朱子 | |||||
同氣感應論 | 受容 | 受容 | 受容 | 受容 | |||||
葬事問題 | - | - | 受容 | 受容 | |||||
具體性 | - | - | 一般論 | 상당히 具體的 |
살펴본 바와 같이 孔子를 비롯한 程子 그리고 朱子는 동기감응론을 전적으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공자가 말한 동기감응에 대한 인식은 풍수에서 말하는 죽은 자를 길지에 묻음으로써 발생하는 동기감응을 논한 것은 아니지만 충분한 개연성을 가진 주장을 하고 있다. 반면에 정자나 주자는 묘지풍수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바탕으로 동기감응론에 대해서 논하고 있다. 따라서 방법론과 대상에서는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동기가 감응한다는 논리에 있어서는 조금의 차이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러한 동기감응론을 풍수서에는 聖賢들의 주장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논리와 구성을 바탕으로 그에 따른 발복론까지를 제시하고 있다. 또한 죽은자와 산자의 구분을 통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는 현상들과 특징을 소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조상의 유골을 통해서 후손에서 영향을 준다는 음택 풍수와 자신이 거주하는 주택의 주변 환경이 생활하는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는15) 양택 풍수는 각자의 이론적 근간을 구성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 풍수경전의 최고봉인『靑烏經』에는 동기감응에 대해서 음택 풍수의 논리에 바탕을 둔 주장을 하게 된다.
15) 배상열, 앞의 논문, 22쪽.
"인생 백년에 죽음을 맞게 되니 형체를 벗어나 본디로 돌아가고 精과 神은 門으로 들어가며, 뼈는 뿌리로 돌아가는데, 그 뼈가 길한 기운에 감응하면 많은 복이 사람에게 미치리라.
동쪽 산에 불빛이 오르면 서쪽산에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 혈이 길하고 온화하면 부귀가 끊임이 없을 것이니 혹 그렇지 못하면 자손은 외롭고 가난해질 것이다.16)
16) 작자미상, 『靑烏經』, 崔昌祚 譯,『靑烏經·錦囊經』, 民音社, 1993, 25쪽,
“百年幻化 離形歸眞 精神入門 骨骸反根 吉氣感應
東山吐焰 西山起雲 穴吉而溫 富貴延綿 其或反是 子孫孤貧.”
『錦囊經』도 『靑烏經』과 같은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사람은 부모에게서 몸을 받는다. 부모의 遺骸가 氣를 얻으면, 그 남긴 바 몸인 자식은 蔭德을 받는다.
經에 이르기를 氣가 鬼에 감응하면 그 福이 살아 있는 사람에게 미친다고 하였다. 그것은 구리 銅山이 서쪽에서 무너지는데 영험한 종이 동쪽에서 응하여 울림과 같은 것이다.
봄이 되어 나무에 꽃이 피면, 방안에 있던 밤송이도 싹이 튼다.17)"
17) 郭璞, 『葬書』, 崔昌祚 譯, 앞의 책, 59~69쪽,
“人受體於父母 本骸得氣遺體受蔭
經曰 氣感而應鬼福及人 是以銅山西崩靈鐘東應
木於華春栗芽於室.”
광산이 무너지고 종이 울린 일화에 대해 唐代 사람 張說이 註釋을 달아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張說이 말하기를, 한나라 미앙궁 궐내에서 어느 날 저녁 아무런 이유없이 종이 저절로 울렸다.
동방삭(BC.154~BC.93)이 말하기를, 필시 구리 광산이 붕괴되는 일이 있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머지않아 서측 땅 진령에서 동산이 붕괴되었다는 소식이 왔다. 이 날짜를 헤아려 보니 바로 미앙궁 종이 스스로 울린 그 날이었다.
이에 황제가 동방삭에게 묻기를, “어떻게 그 일을 알았느냐”고 하였다. 그러자 동방삭이가 대답하기를 “무릇 구리는 동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기는 서로 감응하기 때문에 마치 사람이 그 부모로부터 몸을 받은 거와 같은 이치입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탄식하기를 “미물도 오히려 이러 할 진대 하물며 사람에게 있어서는 어떠하겠는가! 하물며 귀신에게 있어서야 어떠하겠는가! 하였다. 또한 말하기를,” 구리는 동산에서 나오는 것이니, 산이 무너지자 종이 스스로 우는 것처럼 마치 부모의 유해가 기가 같은 자손에게 복을 입히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것이 자연의 이치인 것이다.”라고 하였다.18)"
18) 崔昌祚 譯, 앞의 책, 64쪽,
“張曰 漢未央宮中一夕 無故而鐘自鳴
東方朔曰 必有銅山崩者 未幾 西蜀秦銅山崩 以日揆之正未央鐘鳴之日
帝問朔 何以知之 朔曰 盖銅出於銅山氣相感應 猶人受體於父母
帝歎曰 物尙爾 況於人乎 況於鬼神乎 又曰 銅出於銅山之 山崩而鐘自鳴 亦猶本骸同氣子孫 蒙福 自然地理也.”
오히려 현재의 지사들이 표현한 것보다 더 강한 어조를 사용하였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당시 사람들이 느끼고 인식하고 있던 동기감응론에 대한 상황설명을 정확하게 소개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상에는 사람을 산천의 기가 피워낸 꽃과 같은 존재로 인식하고 있으며 하늘이 성현을 낼 때에는 때를 맞추었는데, 나라를 중흥시킨 임금은 그 이전에 훌륭한 조상의 무덤이 있다고 하여 음택 풍수에 입각한 설명을 『疑龍經』은 제시하고 있다.
"무릇 사람은 산천의 기가 피워낸 꽃과 같은 존재인데, 하늘이 성현을 낼 적에 때에 맞추어 태어나게 한다. 나라를 중흥시킨 임금에게는 반드시 그 이전에 그 조상의 훌륭한 무덤이 있기 마련인데 아주 오래가는 산천의 영기를 얻은 자리이다.19)"
19) 楊筠松, 『疑龍經』, 김두규 譯, 『撼龍經·疑龍經』, 비봉출판사, 2009, 273쪽, “大抵人是山川英 天降聖賢爲時生 祖宗必定有山宅 占得山川萬古靈.”
胡舜申의 『地理新法』에는,
"무릇 그 땅에다가 집을 세우고 뼈를 묻게 될 때 받는 것은 땅의 기운이다. 땅의 기운에 있어 아름답고 그렇지 않음의 차이가 이와 같은 즉, 사람은 그 기를 받아 태어나기 마련인데, 어찌 그 사람됨의 말고 흐림과 똑똑함과 멍청함, 착함과 악함, 귀함과 천함, 부자와 가남함, 장수와 요절의 차이가 없겠는가?20)"
20) 胡舜申, 『地理新法』, 김두규 譯, 『地理新法』, 장락, 2001, 146쪽, “夫 旣於其地 立家植骨 則所受者 地之氣 地之氣 佳否之異 如此 則人受其氣以生 亦豈能無淸濁 賢愚 善惡 貴賤 貧富 壽夭之異乎.”
라고 하였고, 『發微論』 「感應篇」에는,
"땅을 구하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덕을 쌓는 積德함으로써 근본을 이루어야 한다. 만약에 그러한 덕을 두텁게 이루면 하늘은 반드시 吉地로써 감응해 오는 것이니 福祿이 자손에게 미친다고 하는 것이다.
마음이 악함으로 가득차서 이뤄졌다면 하늘은 반드시 凶地로서 감응해 오는 것이니 殃禍가 자손에게 미친다고 하는 것이다. (중략) 대개 마음은 氣의 주체가 되는 것이니 氣는 德에 부합하는 것이다.21)"
21) 蔡成禹, 『發微論』, 魯炳漢 譯,『發微論』 「感應篇」, 안암문화사, 2006, 500~501쪽,
“是故求地者 必以積德爲本 親必以吉地應之 是所以福其子孫者
其惡果盈 親必以凶地應之 是所以禍其子孫者 盖心者氣之主 氣者德之符.”
라고 하여 적덕하여야 길지를 얻고 복록을 누릴 수 있고 악한 마음은 흉지를 얻게 되고 자손에 殃禍가 생긴다는 다분히 勸善懲惡的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즉, 佛家의 一切唯心造에 바탕을 둔 논리를 전개하여 풍수에 불교적인 요소를 끌어들여 善함과 惡함을 因緣論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기가 덕에 부합하여 행위에 대한 결과를 길지로 보상받는다는 경이적인 요소를 불교적인 특징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雪心賦』에도 이와 비슷한 언급을 하고 있다.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데 팥 난다는 논리의 전개는 길지에서 반드시 합당한 발복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발복론이 현대적인 의미에서 반드시 과학적인 근거가 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풍수를 지탱하는 큰 바탕임은 부인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러한 주장을 문헌자료를 살펴본다. 먼저『地理五訣』에는 다음과 같다.
"大地는 大發할 것이오, 小地는 小發할 것이다. 누차로 실험하여도 단연코 틀림이 없으리라.22)"
22) 趙廷棟,『地理五訣』 卷3, 「穴訣倂言」, “大地大發小地小發屢試屢驗斷無不淮.”
하였고 『明山論』에는,
"산이 비옥하면 사람이 살이 찌고, 산이 척박하면 사람이 굶주리고, 산이 맑으면 사람이 깨끗하고, 산이 부서지면 사람에게 불행이 생기고, 산이 멈추어 기가 모이면 사람들이 모이고, 산이 직진하여 기가 모이지 않으면 사람들이 떠나고, 산이 크면 사람이 용감하고, 산이 작고 산이 밝으면 사람이 지혜롭고, 산이 어두우면 사람이 미련하며, 산이 부드러우면 효자가 나오고, 산이 등을 돌리고 있으면 사기꾼이 나오는데, 산과 물 이 두 가지는, 산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의 산의 모양(砂形)을 서로 따르며, 길함과 흉함, 그 근본이 바로 여기서 시작하므로, 잘 살피지 않을 수 없다.23)"
蔡成禹, 『明山論』, 김두규 역, 『明山論』, 比峰出版社, 2004, 162~163쪽,
“人充人肥 山瘦人飢 山淸人貴 山破人悲 山歸人聚 山走人離 山長人勇 山縮人低 山名人智 山暗人迷山順人孝 山背人欺 山之與水二者 相隨砂形 吉凶 其本自此 不可不察也.”
라고 하였는데 『地理五訣』과 『明山論』은 내용상에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지리가 인간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기본방향은 같다. 즉, 좋은 환경과 좋은 터는 반드시 인간의 생활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친다는 전제는 같다. 따라서 이들의 주장에서 차이를 찾기는 어렵고 오히려 주장의 동질성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明山論』에서 사람의 몸에 비유하는 설명을 하게 되는데, 이와 비슷한 언급이 풍수가가 아닌 실학자 홍대용(1731~1783)의 저서『毉山問答』에도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상당히 흥미 있는 상황연출이다. 왜냐하면 홍대용은 풍수를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던 인물이라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다.
살펴본 바와 같이 각 풍수서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동기감응론에 바탕을 둔 논리와 발복론을 제시하고 있다. 이를 핵심적인 요소만을 추려보면 <표 2>와 같다.
<표 2> 風水書 別 同氣感應論 認識比較
風水書 | 同氣感應論 認識 | ||||||||
『靑烏經』 | 『靑烏經』과 같이 血緣關係로 설명 | ||||||||
『疑龍經』 | 聖賢出現과 山川精氣의 關聯性을 제시 | ||||||||
『地理新法』 | 땅의 氣運에 의해 人才가 出現한다는 논리 | ||||||||
『發微論』 | 勸善懲惡的인 要素를 反映 | ||||||||
『地理五訣』 | 땅의 氣에 의한 發福의 差異가 발생한다는 논리 | ||||||||
『明山論』 | 山의 形狀에 의해 左右된다는 논리 |
또한 각 풍수서들은 자연지리를 사람의 인체에 끌어들여 자연과 인간이 별개가 아닌 하나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이것은 天·地·人 三合思想과 부합하는 것으로 길지에 묻히고 살아야만 후손이나 혹은 거주하고 있는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미친다는 동기감응의 논리에 정당성을 제공하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또한 조상의 유골이 땅에서 氣를 받아 그 氣가 살아있는 후손에게 영향을 마친다고 하는 논리와 대동소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 수밖에 없는데 앞서 언급한 것처럼 동기감응론을 부정한 상태의 풍수이론의 성립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풍수서에서 주장하는 내용을 비판하기에 앞서 그와 같은 주장이 일관성을 가진 배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에서 생성한 음식을 먹고 살아가기 마련으로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는 가장 자연스런 이치를 단순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왕이면 보다 좋은 곳 편안한 곳 안전한 곳 편리한 곳을 선택하였고 거기에서 더 발전하게 된 것이 바로 나만이 아닌 우리 가족 더 나아가 후손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바람 기원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그래서 조상이 후손에게 물려줄 것이 없는 상황에서 조상으로서 후손에서 해주고 싶은 깊은 바람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치열한 생존논리의 또 다른 표현 중에 하나라 할 수도 있다.
3. 동기감응론의 비판적 시각
길지를 통한 죽은 자와 산자와의 관계를 통해 산자의 삶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동기감응론은 풍수가 온통 吉凶論으로 점철되는 모순에 빠지는 중요한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風水가 가지는 다양한 합리적인 요소들이 부각되기도 전에 미신으로 매도되기에 이른 주요인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수서는 죽은 자와 산자와의 사이에서 같은 기로 감응하는 메카니즘을 설명하는 데 한계를 보이고 있다. 단지 같은 氣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극히 관념적인 의미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요소들을 바탕으로 논리를 구성하고 있다. 또한 죽은 자와 산자의 관계를 통한 발복론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고 하는 것 보다는 산자가 안전하고 편안한 공간을 찾는 과정에서 발생했다는 설이 보다 설득력을 얻는다는 점에서 발생근거가 미약하다.
그렇다면 풍수의 동기감응론의 발생은 어떤 과정에서 탄생한 것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성이 있다.
첫째, 『葬書』를 쓴 郭璞(276~324)이 살던 東晋時期의 시대상을 살펴 볼 필요성이 있다. 魏晋南北朝 시기는 내란과 부침이 계속되는 중국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고통의 시기였다. 이때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과 가족이라는 울타리였을 것은 자명한 것이었고 뭔가 의지하고픈 마음이 컸으리라 생각된다. 따라서 같은 기를 가진 조상으로부터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고 더 나아가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절실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때 곽박의『葬書』에 등장하는 동기감응론적인 요소들은 크게 호응을 받을 만한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었다. 둘째, 곽박의 개인적인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곽박은 老莊哲學에 바탕을 둔 詩人으로도 유명하다. 그러나 정치적인 사건에 연루되어 죄 없이 斬刑을 당한 뒤 시체는 물속에 던져진24) 비운의 인물이었다.
자연에 바탕을 둔 노장철학에 심취한 그가 자연과 교감한다는 의식은 자연의 일부인 죽은 자와 산자의 교감을 노래한 것으로 ‘장사는 생기를 받아야 한다. 오기가 땅속으로 흐른다. 사람은 부모로부터 몸을 받고 본해가 기를 받으면 유체는 음덕을 받는다(葬者乘生氣也. 五氣行乎地中. 人受體於父母.本骸得氣.)’라는 주장을 펼치게 되었다고 보인다.
24) 丁若鏞,『茶山詩文集』, 卷11, 「論」, 風水 5條, 한국고전종합DB, “郭璞 以非罪誅身埋水中.”
後漢時期에 살던 王充(27~100?)은 당시에 유행하던 신비적인 요소가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讖緯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낸다. 이러한 연장선에서 왕충은 동기감응론이 가지는 신비하고 명확하지 못한 요소들에 대해 자신의 저서 『論衡』에서 신랄히 비판하고 있다.
"사람의 죽음은 마치 불의 소멸과 같다. 불이 소멸하면 빛은 비추지 못하듯이, 사람이 죽으면 의식은 작용하지 못한다. 이 두 가지는 의미도 같고 실질도 똑같다. 논자들이 여전히 죽은 사람도 지각이 있다고 여기는 것은 迷惑이다. 사람이 병들어 죽는 것이 불이 소멸하는 경우와 무엇이 다른가.
불이 꺼져 빛이 사라지면 초만 남듯, 사람이 죽어 정기가 없어지면 시체만 남는다. 사람이 죽어도 의식은 있다는 주장은 불이 꺼져도 빛은 있다는 말과 같다. 한겨울에 찬 기운이 작용하면 물은 응고하여 얼음이 되고, 다음 해 봄에 기운이 따뜻해지면 얼음은 녹아 물이 된다. 사람이 천지간에 생긴 것도 마치 얼음과 같다.
음양의 기가 응고하여 사람이 되고, 나이가 차서 목숨이 끊어져 죽으면 다시 기가 된다. 무릇 봄에 녹은 물이 다시 얼음이 될 수 없듯이 죽은 넋이 어떻게 다시 육체가 되겠는가.25)"
25) 王充, 『論衡』, 「論死篇」,
“人之死 猶火之滅也 火滅而燿不照 人死而知不惠 二者宜同一實. 論者猶謂死有知 惑也. 人病且死 如火之且滅何以異.
火滅光消而燭在 人死精亡而形存. 謂人死有知 是謂火滅復有光也 隆冬之月 寒氣用事 水凝爲氷 踰春氣溫 氷釋爲
水. 人生於天地之間 其猶氷也.
陰陽之氣 凝而爲人 年終壽盡 死還爲氣. 未春水不能復爲氷 死魂安能復爲形.”
王充의 주장은 사람이 태어나 죽으면 자연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산자와 같은 지각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 핵심논리이다. 이것은 왕충의 자연주의적 사상 관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다. 왕충의 위의 견해에 따른다면 죽은 자와의 동기감응은 성립조차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일치하는 논리로 실증적 추구에 힘썼던 왕충도 이른바 命을 주장했고 符瑞(상서로운 징조)의 설을 주장했으니 시대의 영향은 막대하여 특출한 학자라도 벗어나기 힘들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26)
따라서 왕충이 말한 주장을 보다 자세히 살펴 볼 필요성이 있다. 먼저 죽음은 곧 어떠한 관계성도 가질 수 없다고 하였기 때문에 동기감응론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주장을 엄밀히 따져보면 동기감응론을 완전히 부정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죽은 자가 지각을 가질 수 없다고 하였지 같은 기를 교감할 수 없다고 단정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다음으로 음양의 기가 응고하면 사람이 되고 죽으면 다시 氣가 되는데 어찌 다시 육체가 될 수 있는가 라고 반문하고 있다. 이것은 사람을 氣로 인식하고 죽은 자가 다시 원위치할 수 없음을 부정한 것으로 같은 氣가 서로 반응한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정황을 종합해 보면 죽으면 이승과 같은 지각과 형체를 가질 수 없음을 부정한 것으로 같은 氣가 서로 감응한다는 논리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죽은 자라 하더라도 산자와 같은 氣로 교감한다는 점을 핵심 논리로 구성하고 있는 풍수적 논리에서 볼 때에는 상당히 부정적 시각이라 할 수 있다.
26) 박헌영, 『도선국사 풍수사상연구』, 원광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7, 14쪽.
동기감응론을 부정하는 듯한 왕충의 시각은 程子도 일정부분 수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程子가 말하기를 “묏자리를 잡는다는 것은 그 자리의 좋고 나쁨을 보고 잡는 것인데, 가리는 자는 더러 자리의 방위를 보고 날짜의 길흉을 가리는가 하면, 심한 자는 조상을 잘 받들 생각은 하지 않고 오로지 후손의 이득만 생각하니, 이는 무덤을 편히 모시려는 효자의 마음 씀씀이가 아니다.”27)라고 하여 조상묘소의 발복만을 추구하는 세태를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27) 程子,『二程集』, 「葬說」, 中華書局, 2011, 623쪽, “而拘忌者或以擇地之方位 決日之吉凶 不亦泥乎 甚者不以奉先爲計 而專以利後爲慮 尤非孝子安厝之用心也.”
洪大容(1731~1783)도 『湛軒書』에서 “택조의 길흉과 자손의 화복이 한 기로 감응된다고 하는데 과연 그런 이치가 있습니까? 답하기를, 중형을 당한 죄수가 옥에 있을 때 겪는 고통이 견딜 수 없다 하여, 옥밖에 있는 그 죄수의 아들이 몸에 약한 병이 생겼다는 말을 듣지 못했거니와 하물며 죽은 자의 혼백에 있어서랴”28)라고 상당히 신랄히 비판하고 있다.
한발 더 나아가 茶山 丁若鏞(1762~1836)은 풍수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다.
『經世遺表』에 따르면 “郭璞 이래로 풍수설이 날로 새롭고 달로 성해져 묘역을 널리 차지하고 길운을 오로지 하고자 한다. 무릇 묘역 수백 보 안은 다른 사람이 와서 장사하는 것을 금하는데 혹 壓脈이라 하며 또는 對衝이라 일컬어서, 두들겨 싸우며 파헤치기도 하여 옥송이 자주 일어난다.”29)라고 비판한다.
또한 어버이를 장사지낼 때 지사를 맞아다가 묏자리를 정하는 것에 대해 『茶山詩文集』의 「風水論1」에는 “이는 禮에 맞는 처사가 아니다. 어버이를 매장하면서 복을 바라는 것은 효자의 마음이 아니다.”30)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세상에 썩은 뼈를 묻어놓고 저주함으로써 사람에게 앙화를 끼칠 수 있다고 하자. 그렇다면 썩은 뼈를 묻어서 사람에게 복을 받게 할 수 있겠는가. 간사하고 요망한 무당이 이 술법으로 사람을 속여서 악의 구덩이로 빠뜨리고야 마는데, 이 술법으로 복을 맞아들인 사람이 있는가. 비록 여기에 이치가 있다고 해도 君子는 이런 짓을 하지 않는 법이거늘, 하물며 절대로 이치가 없는 데야 말해 뭐하겠는가.”31)라고 하면서 동기감응론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28) 洪大容,『湛軒書內集』 卷四, 補遺, 毉山問答, 한국고전종합DB, “宅兆有吉凶 子姓有禍福 一氣感應 亦有其理乎 實翁曰 重囚在獄 宛轉楚毒 至不堪也 未聞重囚之子身發惡疾 况於死者之體魄乎.”
29) 丁若鏞,『經世遺表』卷2, 「秋官刑曹, 掌域署」, 한국고전종합DB, “郭璞以來 風水之說日新月盛 廣占塋 以專吉氣 凡在數百步之內者禁人來葬 或謂之壓脈 或謂之對衝 鬪毆發掘 獄訟繁興.”
30) 丁若鏞, 『茶山詩文集』 卷11, 「風水論」 1, 한국고전종합DB, “非禮也 薶其親以徼福 非孝子之情也.”
31) 丁若鏞, 위의 책, 卷11, 「風水論」 1, 한국고전종합DB, “世之迷者 至云薶胔以詛人 亦有驗其理 可旁通也 鳴呼斯豈所忍冒者 雖然吾且冒之 世有薶胔以福人者 其有薶胔以福人者乎 邪鬼妖巫 爲此術以岡人 使陷於惡巳矣 有以是徼臨者乎 雖有理君子不爲 况离离無此理哉.”
여기에 그치지 않고 「風水論」 5에는,
"郭璞은 죄 없이 斬刑을 당한 뒤 시체는 물속에 던져졌으며, 도선과 무학 등은 모두 중이 되어 자신의 宗祀를 끊었으며, 李義信과 湛宗은 일점의 血肉도 없다.
지금도 이런 자들과 생각을 같이하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일생토록 빌어먹고 사는가 하면 자손들도 번창하지 못한다. 이것은 무슨 이치인가.
지사의 아들이나 손자로서 홍문관 교리나 평안도 관찰사가 된 사람을 몇 명이나 볼 수 있는가.
사람의 마음은 다 같은 것이다. 내 땅에 발복될 수 있는 묘지가 있는 것을 알았는데, 이를 한 꿰미의 돈 때문에 눈이 어두워 남에게 선뜻 내어줄 사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재상으로서 풍수술에 빠져 여러 번 부모의 묘를 옮긴 사람치고 자손있는 사람이 거의 없고, 士庶人으로서 풍수술에 빠져 여러 번 부모의 묘를 옮긴 사람치고 괴이한 재앙을 받지 않은 사람이 없다.32)"
32) 丁若鏞, 앞의 책, 卷11, 「風水論」 5, 한국고전종합DB,
“郭璞 以非罪誅身埋水中 道詵無學之等 皆身爲髡覆其宗祀 李義信湛宗 無血胤
今之滔滔者 皆終身丐乞 而其子孫不昌 斯何理也
幾見地師之子若孫 爲弘文館校理 平安道觀察使者乎
人情一也 我有地可以發福 我旣之知矣 有爲一絹饅所賣 輕人予人者乎
宰相惑於風水 累遷其父母之墓者 多無子姓 士庶人惑於風水 累遷其父母之墓者 多奇福怪覞.”
라고 하여 한층 더 수위를 높이고 다양한 각도와 방향에서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러나 다산의 비판은 여러 면에서 논리구성에 문제를 드러내고 있다.
첫째, 효 사상에 바탕을 조상 섬김에 대한 인식을 도외시하고 있다. 살아서는 부모님께 효도를 다하고 돌아가셔도 부모를 편안한 곳에 모시고자 하는 효 사상의 당연한 이치를 도외시한 채 마치 풍수를 통한 발복만을 추구하는 것으로 매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둘째, 극단적인 상황을 일반론으로 주장하고 있다. 곽박이나 도선과 무학 등과 같은 분들의 예를 들고 있으나 이들이 풍수서를 쓰고 풍수에 뛰어난 모습을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이러한 극단적인 상황과 직접적인 관련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출가한 후에 풍수를 접한 것이며 곽박도 풍수서를 집필하였다고 하지만 정치적인 이유로 참형을 당한 것을 바로 연결시키는 우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신분사회의 한계성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조선사회는 지사가 되는 조건을 中人 이상으로 규정하고 있었고 中人身分으로 고위직으로 진출하는 것은 분명한 한계성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풍수와 바로 연결시키고 있다.
넷째, 이장하는 문제를 풍수적인 관점과 발복론만으로 한정하고 있다. 조선에서 왕릉의 천장은 비단 풍수적인 이유만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거기에는 풍수를 빙자한 고도의 정치적인 목적이 숨어 있었고 실제로 활용된 예는 많이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다산의 비판은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 측면이 강하다고 할 것이나 지나치게 편향된 주장을 담아서 풍수를 비판하는 것은 풍수의 장점과 본래의 모습을 왜곡하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받을 여지가 있다고 할 것이다.
4. 조선 유학자들의 풍수에 대한 양면성
조선사회의 지식인들에게 풍수는 어떤 가치와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을까? 이에 대한 명쾌한 해답은 세종의 말에서 한 자락을 엿볼 수 있다. ‘풍수는 무조건 믿을 수 없으며(不可盡信) 그렇다고 모두 버릴 수도 없다(不可盡廢)’33)라고 하여 당시 조선 유학자들의 풍수인식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서 세종은 “風水書라는 것이 믿을 것이 못되는 것 같으나, 옛 사람들이다 그것을 썼다”.34)라고 하여 그들이 써온 배경에는 그만한 이유가 존재한다는 것을 긍정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풍수를 흔쾌히 수용하지 못하였을까? 그 배경에는 무엇이 존재할까?
첫째, 풍수가 가지는 呪術的인 요소 때문이다. 유학자들은 천문지리와 같은 잡학을 鄙陋한 학문이라 조소하면서도 교양과목정도로는 배워야 했다.35)
『襄敏公集』에는 “문신으로 천문·지리·음양·율려·의약·복서·詩史 이 일곱 가지의 배움을 나누어 익히도록 하고 있습니다.”36)라고 하여 풍수를 사대부들이 수학하고 있다는 것을 밝히고 있다.
이유는 무릇 “儒者라 하더라도 天文 地理 醫藥 卜筮를 모두 알아야 비로소 通儒라고 할 수 있다.”37)라는 인식을 가진 군주가 있었고 또한 유학자들 자신도 그러한 생각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는 않았다.
비단 어느 한 군주의 생각이라기보다는 조선 왕조의 거의 모든 군주들의 공통된 견해이기도 했다. 그래서 조선을 건국하고 수도를 천도하는 과정에서 風水는 절대적인 위치를 가지고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모든 궁궐과 관공서 그리고 능지의 선정에 있어서 풍수는 확고한 지위를 확보하고 있었고 풍수를 빼고 터를 잡는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조선왕조가 끝나는 순간까지도 끊임없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이를 입증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풍수가 완전히 믿을 것이 되지 못한다.’라는 애매한 평을 들어야만 하는 이유는 명쾌한 해답이 즉시 나타나지 않고 사람에 따라 각자의 해석이 다를 수 있다는 점은 공격의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가 자리를 잡아가고 완전한 유교국가로의 변신이 이루어지면서 집권층을 형성하고 있는 유학자들의 인식에 약간의 변화가 오기 시작한다. 즉 풍수가 필수 과목이 아닌 교양과목정도로 전락하게 되고 그들의 인식에서 차츰 풍수는 하나의 呪術的인 학문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래서 차츰 직업적인 술사들의 영역에 해당하는 학문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동시에 확인할 수 있다.
33) 이상인, 『조선시대 주거문화의 풍수지리적 특성 연구』, 원광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9,96쪽 참조.
34) 『世宗實錄』卷106, 26년 12월 21일(丙寅), “風水之書 似未可信 然古人皆用之.”
35) 이화, 「조선조 유교사회에서의 풍수담론」, 『민속학 연구』 17호, 실천민속학회, 2005, 61쪽.
36) 孫昭, 『國譯 襄敏公集』, 「啓-論七」, 學問 與 金宗直 合啓, “今以文臣 分肄天文 地理陰陽 律呂 醫藥 卜筮 詩史 七學.”
37) 『世祖實錄』 卷33, 세조 10년 4월 26일(戊申).
둘째, 길흉화복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낸다. 程子의『二程集』「葬說」에는 “터를 잡는 다는 것은 그 땅의 좋고 나쁨을 정하는 것이지, 음양가들이 말하는 화복을 추정하는 것이 아니다.”38)라고 하였는데, 朱子 뿐만 아니라 조선조 사대부 유학자들이 암송하였던 글이다.39) 이와 같이 조선의 풍수는 길흉론을 배제하고자 하였으며 풍수의 정도를 이해하고 활용코자 하였다.
따라서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난 길흉론으로 대변되는 풍수는 상당한 거부감을 갖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풍수서적이 길흉화복을 기본적으로 논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주 극단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고 사용하고 있다. 현실에서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난 사례와 일어난 경우를 명확히 입증하기 어려운 측면이 강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와 같은 현상이 즉시 그리고 반드시 일어날 것처럼 강한 표현 일변도인 것이 사실이다. 이것은 풍수를 받아들이게 하는 확실한 요소로 작용하는 반면에 주 공격의 요소로서도 작용하고 있는데 『朝鮮王朝實錄』에서 그 단편을 살펴본다.
38) 程顥 程頤, 『二程集』, 「葬說」, 中華書局, 2004, 623쪽, “卜其宅兆 卜其地之美惡也 非陰陽家所謂禍福者也.”
39) 김두규, 「김두규의 풍수이야기」 (www. korea-fengshui.com) 고전강독(검색일: 2011.7.16.)
"지리의 설은 중국의 三代 이전에는 없었던 것이므로, 의례는 주공이 지은 것으로서 오직 묏자리를 점쳐 보고 날짜 점쳐 볼 따름이었고, 공자도 말하기를, ‘宅兆를 점쳐서 편안히 장사한다.’하였는데, 兩漢 으로 내려오면서 처음으로 풍수술이 있게 되어서 각기 제 나름대로 길흉화복) 설을 세워서 세상을 미혹하게 하고 백성을 속이는 것이 심하였나이다..40)"
40) 『世宗實錄』 卷106, 26년 12월 21일(丙寅).
이런 魚孝瞻(1405-1475)의 상소문은 조선 사대부들의 의견을 대표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상당히 보편적인 시각에서 작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周公과 孔子는 묘 자리를 점쳐서 잡았는데 그것은 길흉화복에 대한 점을 친 것이 아니라고 한다. 이에 대하여 『孝經』에는 ‘宅兆를 점 친다’ 라고 한것은 ‘땅의 길흉을 분별하기 위하여 葬事전에 점을 치는 것이 아니다. 장례를 마친 다음에 일정기간의 시간이 지나 장지의 상태가 변화해서 시신이 훼손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으로 거북점을 치는 것이다’라고 풀이하였다.
『舊唐書』에는 “음양술이 발달하여 장례법이 덧붙여지면서 혹은 시간의 편리를 가지려고 혹은 墓田의 원근을 따지면서 그중에 하나의 일이라도 잘못되면 화가 죽은 사람과 산사람에게 두루 미치는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41)라고 비판한다. 또한, 정자의 주장과 주자의 학설 등을 종합해서 조목조목 비판하고 있는데 상당히 의미있는 주장이라 생각된다.
41) 『舊唐書』 卷79, 「列傳」 제29, 呂才傳, 中華書局, 1997년, 2723쪽, “加之陰陽葬法 或選年月便利 或量墓田遠近 一事失所 禍及死生.”
셋째, 天命이 아닌 地理運命說에 대한 거부감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유학자들의 인식 속에는 天人合一思想이 절대적인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다.
즉, 사람이 하늘과 하나라는 인식과 하늘에 의해 운명이 결정된다는 天命說을 바탕에 깔고 있는 유학자들에게 자신의 길흉이 지리에 의해 결정된다는 풍수이론은 상당한 거부감을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正祖의『弘齋全書』에서 아주 구체적인 사례를 살펴볼 수 있다.
"王業이 흥기하고 쇠퇴하며 국운이 길고 짧은 것은 오로지 天命과 人事에 달린 것입니다. 세상에 符讖의 설을 주장하는 자들이 왕기라는 두 글자를 만들어 내고는 땅의 기운이 쇠퇴하고 왕성함에 따라 제왕의 운이 결정된다고 하고 있는데, 이는 아마도 풍수가가 지어낸 말일 것입니다.42)"
42) 正祖, 『弘齋全書』卷115, 「經史講義」 52, 綱目 6, 梁孝元帝, 한국고전종합DB, “王業之興替 國祚之脩短 惟係天命與人事耳 世之爲符讖之說者 刱出王氣二字 乃謂地氣之衰旺 而帝王之運隨之 其亦風水家之作俑也.”
따라서 그들은 풍수이론에서 주장하는 명당의 발복에 의한 길흉화복을 수용하는 데 제한적인 요소가 많다고 인식하고 있었기에 드러내놓고 논의하는 것은 상당히 꺼려하게 된다. 또한 후세에 선비들이 풍수를 금하기도 하지만 세상은 오히려 적극적으로 풍수를 사용하고 있다. 그것은 어떤 정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용되고 있다는 해석을 가능케 한다. 마치 세상을 달관한 듯한 어조로 담담히 적은 그의 글은 객관성을 바탕으로 어떤 편견 같은 것을 배제하고 접근하고 있다. 당시 학자들이 이와 같은 생각을 전적으로 하였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상당수가 공감하고 있었고 실제로 행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림 1> 朱子 五代祖墓(출처: 人子須知)
<그림 2> 朱子 母親墓 (출처: 人子須知)
조선의 유학은 주자의 학문을 숭상하고 연구하는 주자학이었다. 따라서 주자는 절대로 본받아야만 하는 표상과 같은 존재였기에, 주자의 학문 외에도 그의 가족과 주변의 환경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5대 조모의 산소가 굉장한 명당으로 알려져 있었고,43) 주자에 의해 조성되었던 모친의 산소와 부친의 산소를 두 번 이장44)하는 일련의 풍수와 관련된 일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라 생각된다.
실제로 주자는 풍수에 상당한 관심과 식견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며, 그 유명한『山陵議狀』은 주자의 풍수를 평가해 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朝鮮王朝實錄』에 따르면 주자의『山陵議狀』은 중요한 풍수 지침서로서 인용되고 활용되고 있다. 따라서 조선의 풍수는 주자의『山陵議狀』에 바탕을 둔 형세풍수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지만 조선의 유학자들은 풍수를 주자의 학문과는 달리 전적으로 수용하는 자세를 보이지는 않는다.
43) “官亢龍은 勢가 특이하고 穴이 높으며, 뭇산이 坎離方에 모였으며 精華하게 交媾된 筆峰이 하늘 밖까지 聳起하였으니 富는 陶朱에 까지는 미치지 못할 것이고 貴는 五府를 지나지 못할 것이나 반드시 賢人이 나와 聰明함이 孔子와 같으리라.” 하였다. 徐善繼 徐善述, 김동규 역, 『地理人子須知』, 명문당, 1992년, 267쪽.
44) 『顯宗實錄』 卷21, 14년 10월 12일(戊申) 1번째 기사.
송시열의 상소문에 나오는 문구로 朱子가 부친의 산소를 두 번 이장하였음(朱子再遷父墳)을 알 수 있다.
5. 조선 유학자들의 동기감응론 인식
주자의 학문을 금과옥조처럼 여기던 조선의 유학들에게 있어서 주자의 『山陵議狀』을 비롯한 동기감응론의 수용은 전적으로 받아들이기도 그렇다고 부정할 수도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 그래서 조선의 유학들은 풍수를 전적으로 부정하기 보다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를 견지한다. 왜냐하면 동기감응론을 부정하던 자신들의 주장을 스스로 부정하는 우를 범할 수도 그렇다고 주자의 의견을 부정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조는 조선왕조 내내 조선 유학자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일정한 영역에서는 유학자들의 의식 속에도 동기감응론을 부정하기 보다는 일부 수용하는 생각은 존재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꼭 풍수서와 같은 길흉화복의 형태가 아닐지라도 또 다른 형태의 동기감응론은 <표 3>과 같이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유학자들의 문집을 통해서 보다 구체적인 주장과 인식을 살펴본다.
<표 3> 조선 유학자들의 동기감응론 인식 비교
이름 | 趙 翼 | 李 瀷 | 洪大容 | ||||||
著書 | 『浦渚集』 | 『星湖僿說』 | 『湛軒書』 | ||||||
認識 | 聖人시대에 聖人이 출현하는 것은 같은 기가 통하기 때문이라 주장 | 磁石의 성질을 이용해 동기감응론을 입증코자 함 | 풍수 길지에 의한 인재 탄생론을 주장 | ||||||
이름 | 崔漢綺 | 宋時烈 | 李 穡 | ||||||
著書 | 『神氣通』 | 『宋子大全』 | 『牧隱文藁』 | ||||||
認識 |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 통한다는 논리주장 | 同氣끼리 同聲끼리 통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 | 서로 비슷한 氣는 서로가 서로를 찾는다는 논리 | ||||||
이름 | 崔岦 | 李珥 | 丁若鏞 | ||||||
著書 | 『簡易集』 | 『栗谷全書』 | 『經世遺表』 | ||||||
認識 | 지역의 특성에 따른 인물의 출현을 주장 | 자식과 부모는 하나라는 인식 | 禮가 아니라 하면서 동기감응론 자체를 부정 |
먼저 조선 유학자 중에서도 풍수에 가장 적극적인 생각을 가졌던 趙翼(1579~1655)의 『浦渚集』을 살펴본다.
"기린이 나오는 것은 반드시 聖人이 통치자의 지위에 있을 때이니 기린은 성인을 위해서 나오는 것이요, 또 기린이 나오면 성인이 반드시 알아보는 법이라고 창려가 말하였다. 이것은, 성현이 반드시 성인이 在位할 때에 나오는 것은 즉 성인을 위해 나오는 것으로서 氣脈이 비슷하여 서로 감응하기 때문이요,45)
성인이 반드시 성현을 알아보는 것 역시 기맥이 비슷하기 때문에 알아본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대개 성인이 통치자의 지위에 있을 때에는 반드시 성현을 찾아서 그와 함께 공동으로 천하를 다스리게 마련인데, 오직 성인만이 성현을 알아볼 수 있는 까닭에 성현이 나오는 것은 반드시 이때에 있게 되는 것이다.46)"
45) 성향이 같기 때문에 서로 의기투합하는 것을 뜻한다. 『周易』 「乾卦, 文言, 九五」의 “같은 소리끼리는 서로 응하고, 같은 기운끼리는 서로 찾게 마련이니, (중략) 이는 각자 자기와 비슷한 것끼리 어울리기 때문이다.[同聲相應 同氣相求 (중략) 則各從其類也]”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46) 趙翼,『浦渚集』卷23, 「著, 十一首」, 麟解에 대해서 해설한 글, 한국고전종합DB, “其言麟之出 必有聖人在乎位 麟爲聖人出也. 聖人者必知麟 喩聖賢之出 必在聖人在位之時 卽是爲聖人出也. 以氣類相感召也. 聖人必知聖賢 亦以類故知也. 蓋聖人在位 則必求聖賢 與之共治天下 而唯聖人知聖賢 故聖賢之出 必在此時也. 夫其德與聖人類也. 常人不知 而唯聖人知之 聖人之所必求也. 聖人之所與共治天下也. 其亦可貴也歟 此一段 言其可貴之實也.”
기맥이 같은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감응하고 그래서 서로 같은 시기에 등장하여 천하를 안정되게 이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것이 풍수서에서 주장하는 동기감응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하여도 같은 기가 서로 감응한다는 내용은 전적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고 있다.
동기감응론의 허구성을 질타하였던 星湖 李瀷(1681~1763)은 『星湖僿說』에서 같은 기가 서로 통하는 관계성을 입증하기 위하여 자석을 이용한 실험을 하고 있다. 그러면서 선조와 후손이 동일한 기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통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주장을 한다.
"귀신은 형체는 소멸되어도 기운은 남아 있고, 사람이 정성들이는 것도 기운으로 작용하는 것이니, 死生이 비록 다르더라도 기운은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 磁石이 바늘을 끄는 것은 기운이 상통하기 때문이니,자석 기운을 바늘에 옮겨 주면 10년 토록 자석 기운이 남아 있어 남북을 틀림없이 가리키는데, 하물며 선조와 후손은 同一한 기운임에랴! 이제 바늘을 鐵匣 속에 넣어 자석을 약간 가까운 거리에 놓고 자석을 그냥두면 바늘도 가만히 있되 자석을 움직이면 바늘도 움직여 철갑이 그 기운을 막지 못하는 것이니, 이른바 “동일한 기운이 서로 구한다[同氣相求].”는 것을 여기에서 증명할 수 있다.47)"
47) 李瀷, 『星湖僿說』 卷11, 「人事門, 鬼神情狀」, 한국고전종합DB, “鬼神者形滅而氣存 人之致誠亦以氣爲用 死生雖別氣無所不通 如磁石引鍼氣相近也 石氣燻鍼十年未洙南北不差況先祖後孫之同一氣耶 令以銕匣藏鍼以石稍近石靜鍼靜石 動鍼動鐵匣不能礙阻 所謂同氣相求者於此可明.”
즉 생사를 넘나들어 기운은 통하지 않는 곳이 없다고 하였으니, 茶山이 맹렬히 비난하였던 ‘죽어 썩은 시신을 통해서 무엇을 얻을 수 있겠냐’라고 한 주장과는 상당히 相沖되는 주장을 하고 있다.
성호 선생도 죽은 조상을 길지에 매장하여 후손들이 얻고자 한 소위 발복론에 대해서는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으나, 같은 기가 서로 감응한다는 점은 인정하고 있으며 오히려 입증하기 위해 다양한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한발 더 나아가 洪大容(1731~1783)은『湛軒書』「補遺」에서 “물과 산이 靈氣를 모으매 선량한 사람을 탄생시켰다.”48)라고 하여 일정부분 풍수 길지에 의한 인재 탄생론을 수용하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는 자세를 『湛軒書』에서 보이고 있다. 즉, “중국의 人才는 남방에서 많이 나고, 남방의 인재는 江浙에서 나왔으니, 이는 산천이 명랑하고 수려하기 때문이다. 지리는 속일 수 없는 것이다.”49)라고 하여 인재와 풍수의 뗄래야 뗄 수 없는 등식을 성립시키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崔岦(1539~1612)의『簡易集』「序」에서도 또한 같다.
48) 洪大容, 『湛軒書』 內集 卷4, 「補遺」, 한국고전종합DB, “河嶽鍾靈. 篤生善良”
49) 洪大容, 『湛軒書』 外集 卷3, 「杭傳尺牘」, 한국고전종합DB, “中國之人才 多出於南方。南方之人才. 多出於江浙. 盖山川之明秀. 地理有不可誣也.”
"산동 지방에서는 재상이 나오고 산서 지방에서는 장수가 나온다(山東出相 山西出將)는 말도 있는데, 적어도 옛날에는 그러했던 것이 또한 사실이었다. 그리고 인물을 논할 때면 흔히 ‘父祖의 기풍을 지니고 있다’느니, 혹은 ‘外叔과 너무나도 닮았다’느니 하는 표현을 쓰는 것을 볼 수 가 있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韓子가 공자 성인으로부터 36세손이 되는 어떤 사람을 위해 지어 준 銘文에도 “아직까지도 흡사한 점이 있어 누구와도 비교할 수가 없다.(其尙類也 莫與之倫)”는 표현을 구사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가 있다. 그러니 氣類에 대한 설 역시 참으로 무시할 수 없는 점이 있다고 하겠다.50)"
50) 崔岦,『簡易文集』卷3, 「序, 送李正郞子敏湖西試官序」, 한국고전종합DB,
“然如山東出相 山西出將 在古則然 而談人物者率曰 有乃父祖風 亦有酷類其舅者 至韓子銘孔氏去 聖人卅六世者曰 其尙類也. 莫之與倫 氣類之說 誠不可廢也.”
이것은 지역적인 특성과 가풍 그리고 공자의 후손인 韓子(BC 280?∼BC233)의 예를 들면서 이런 동기감응론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은 조선유학자를 포함해서 가장 적나라하게 풍수에 의한 인재 탄생론이다.
같은 기가 서로 감응한다는 또 다른 논리를 살펴볼 수 있는데, 상대의 마음을 읽어내 그에 따른 대비책을 세우게 되면 서로가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는 神氣가 생긴다고『神氣通』「變通」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상대의 언론을 속으로 헤아리고 상대의 안색을 살펴 그에 대한 대비책과 꾸짖는 말을 동기를 따라 발한다면, 이도 역시 상대의 신기를 통하여 나의 신기에 감응하는 것이다. 여기에 남과 내가 서로 상대하는 무한한 변통이 신기로부터 생겨난다.51)"
51) 崔漢綺,『神氣通』卷3, 「變通」, 한국고전종합DB, “相對 則機微之際 彼我神氣各分 揣摩其言論 詳察其顏色 備禦之策 切責之言 隨機而發 是亦通彼之神氣 而應我之神氣也. 於是 人我之相接 無限變通 從神氣而生.”
이 말은 현대인들이 흔히 사용하는 telepathy와도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누구나 상대가 꼭 말을 해야만 아는 것이 아닌 느낌으로 느끼는 경우에 해당될 수 있다. 딱히 telepathy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아도 누구나 느끼고 흔하게 경험하는 사항이라 생각된다. 이러한 현상들이 형체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결코 무시될 수 없는 요소이듯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氣質과 다양한 요소들이 어떤 과학적인 잣대로 예측되지 않는다 하여도 결코 무시될 수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같은 氣를 가진 조상으로부터 보이지 않게 전달되는 영향도 또한 가볍게 여길 수 없다. 이와 같은 생각에 동의하는 생각들은 무수히 많으며 반드시 풍수에서 주장하는 동기감응론과 상황논리에 꼭 들어맞지 않는다 하여도 같은 맥락은 유지하고 있다.
『朝鮮王朝實錄』에 자신의 이름을 3,000번 이상 등장시킨 宋時烈(1607-1689)의 주장은 『宋子大全』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同氣끼리 서로 모이고, 同聲끼리 서로 應하는 것은 바로 당연한 이치인 것이다.52)"
52) 宋時烈, 『宋子大全』, 「序, 樂靜集」, 한국고전종합DB, “同聲同氣相應相求者”
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고려 말 조선 초 고려에 대한 義理를 끝까지 시킨 대학자 牧隱 李穡(1328~1396)도 자신의 문집『牧隱文藁』에서 “국화가 꽃 중의 隱者라고 한다면, 산골 물[澗]은 물중의 幽者라고 할 것이다. 은자는 유자를 찾게 마련이고 유자는 또 은자를 불러들이게 마련이니, 이는 대개 그 기운이 서로 비슷하기 때문이다.”53)라고 하여 같은 맥락의 주장을 펴고 있다. 『朝鮮王朝實錄』에도 같은 기가 통하는 것은 당연한 천지의 이치라고도 하고 또는 같은 기가 통하는 것을 同氣相救라 한다는 기록들이 보인다.
53) 李穡, 『牧隱文藁』 卷3, 「記, 菊澗記」, 한국고전종합DB, “菊 花之隱者也. 澗 水之幽者也。隱必乎幽 幽必乎隱 蓋其氣類也.”
"同氣가 서로 감응하는 것은 천지의 이치이기 때문입니다54)"
54) 『明宗實錄』卷20, 11년 5월 11일 (戊辰), “氣感相應, 天地之理也”
"이는 같은 氣가 서로 감응되는 것으로 이른바 同氣相求라는 것입니다.55)"
55)『宣祖實錄』卷4, 3년 7월 21일(丁亥), “此氣類相感, 所謂同氣相求也.”
라고 하여 때만 다를 뿐 함께 사용되고 있다. 『周易』에 등장한 말이니 객관성을 가지고 활용되었을 것이지만 유학자들에게 있어 아주 당연시 되던 용어이기도 했던 것이다. 세상의 이치가 아주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아주 단순한 구조를 가진다. 그것은 자신의 조상으로부터 받은 영향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드물 것이다. 보고 배우고 느끼며 자란 환경과 함께 피를 통해서 전달된 기질은 절대로 달라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조상을 떠나 자신이 존재할 수 없는 이치는 매 한가지이고 당연한 결과일 수밖에 없다.
栗谷 李珥(1536~1584)도 『栗谷全書』에서 “숨을 쉬어 호흡할 때에 기와 맥이 서로 통하니 이 몸은 내 사사로운 것이 아니요, 바로 부모가 남긴 기이다.”56)라고 하여 부모와 자식은 하나라고 하였다.
56) 李珥, 『栗谷全書』 卷27, 「擊蒙要訣, 事親章第五」, 한국고전종합DB, “喘息呼吸 氣脈相通 此身非我私物 乃父母之遺氣也.”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는 충효가 주요 실천 덕목이었기 때문에 살아서는 부모를 잘 모시고 돌아가시면 편안한 길지에 부모님을 잘 모시는 것 또한 당연히 실천하여야 하는 효 실천항목이다. 이런 사상을 바탕에 두고 발전을 거듭한 것이 음택 풍수를 통한 동기감응론이었다고 한다면 원래의 취지를 벗어난 측면도 없지 않겠으나 큰 틀에서는 당연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온 가문의 영광을 계속해서 유지하여야 한다는 뜻을 실천하는 방법 중의 하나로 인식하였으며 오히려 그것이 조상을 중하게 여기는 효사상과 결합되어 발전되었던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권장되어야 할 부분도 있다고 생각된다. 자기 자신만 아는 현대인들에게 있어 아쉬운 조상 섬김과 효 사상을 보완한다는 측면에서 음택풍수를 통한 동기감응론의 장점은 나름의 가치성을 가진다.
6. 맺음말
朱子의 사상과 학문을 연구하던 조선유학자들에게 있어 주자의 풍수사상은 전적으로 수용되지 못하고 있었다. 일정부분 효용성과 가치는 인정하면서도 선뜻 받아들이지 못하는 배경에는 풍수가 가지는 呪術的인 요인과 吉凶禍福에 대한 拒否感 그리고 天命이 아닌 地理運命說에 대한 거부감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조선의 유학자들의 의식 속에 풍수는 다양한 형태로 자리하고 있었고 국가대사를 비롯한 자신들의 사적인 영역에서는 절대적인 위치를 확보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왕조 내내 유지되었으며『山陵議狀』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활용되고 있었다.
꾸준한 생명력을 바탕으로 풍수이론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면서 가장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이 바로 동기감응론이다. 또한 동기감응론을 부정하게되면 풍수이론은 성립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동기감응론은 단순히 풍수에서만 주장하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周易』에서도 孔子의 말을 빌려 동기감응론에 입각한 설명을 하고 있다. 程子의 「葬說」에는 ‘나무뿌리를 북돋워 주면 그 가지나 잎이 무성한 이치를 조상과 그 후손과의 동기감응에 비유하여 조상의 유골이 편안하면 그 후손이 편안하고 조상의 유골이 불편하면 그 후손이 불편하다’라는 말은 동기감응론을 대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던 주자도 동기감응론을 완전히 동의하고 수용하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朱子語類』와 『山陵議狀』을 통해서 거침없이 동기감응론에 입각한 발언을 쏟아 내게 된다.
한발 더 나아가 풍수가들조차 주장하기 힘든 내용까지도 포함하게 되는데, 이것은 동기감응론에 바탕을 둔 풍수이론에 대하여 확고한 믿음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며 그는 평소 그를 찾는 손님들과 즐겨하는 이야기 소재가 풍수였다고 하는 그의 일상생활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풍수경전의 최고봉인 『靑烏經』에도 동기감응에 대해서 한 치의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다. 『錦囊經』도 『靑烏經』과 같은 논리를 전개하고 있으며 『疑龍經』과 『發微論』 『雪心賦』『地理新法』『地理五訣』과 『明山論』등은 내용상에 약간의 차이를 보이지만 지리가 인간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기본 방향은 같다.
즉, 좋은 환경과 좋은 터는 반드시 인간의 생활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친다는 전제는 같다. 따라서 이들의 주장에서 차이를 찾기는 어렵고 오히려 주장의 동질성을 강하게 느끼게 된다.
한편 유학자들의 의식에도 동기감응론에 대한 인식은 존재하였고 그것이 꼭 풍수서와 같은 길흉화복의 형태가 아니라 서로 같은 시기에 등장하여 기맥이 같은 사람은 서로가 서로를 감응하여 천하를 안정되게 이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것은 같은 氣가 서로 감응한다는 내용으로 풍수이론에서 주장하는 동기감응론의 허구성을 질타하였던 성호선생의 『星湖僿說』에서의 주장이 훨씬 더 풍수서에서 주장하는 동기감응론과 같은 기조의 발언을 하고 있다. 한발 더 나아가 洪大容은 『湛軒書』 「補遺」에서 중국남방의 인재론을 피력하며 인재와 풍수의 뗄래야 뗄 수 없는 등식을 성립시키고 있다.
宋時烈은 지역적인 특성과 가풍에 대해 韓子의 예를 들면서 이런 동기감응론을 절대 무시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있다고 하였다. 『朝鮮王朝實錄』에도 같은 기가 통하는 것은 당연한 천지의 이치로 같은 기가 통하는 것을 同氣相救라 한다고 동기가 감응한다는 논리의 틀을 유지하고 있다.
반면에 실학파의 茶山 丁若鏞은 풍수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고 있으나 풍수가 가지는 다양한 장점과 방향성을 단지 음택풍수를 통한 길흉화복론에 집중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이와 같은 비판 속에서도 풍수는 끈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오랜 세월동안 생명력을 가질 수 있었던 바탕에는 풍수가 가지는 논리와 근거가 만만치 않았다는 것이다. 결코 무시될 수 없는 허접한 이론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천문과 지리, 그리고 음양오행, 『周易』, 태극도설, 도교, 불교 등에 바탕을 둔 풍수이론에 대하여 논리적인 허구성을 입증하지 못하고 다만 지나치게 음택풍수에 집착하여 파생된 문제점을 지적하고 걱정하고 있을 뿐이다.
명확한 신분사회와 함께 벼슬길에 나가 권력을 가져야만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환경적인 요인은 획기적인 신분 상승의 기회를 찾아야만 했다. 따라서 돌파구를 풍수에서 찾고자 하였고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는 음택 풍수는 상당히 매력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당장 눈으로 확인하기 어렵고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을 해결하는 신비한 마력을 가진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유교에 바탕을 둔 조상숭배사상과의 결합은 음택 풍수에 대한 폭발적인 수요를 불러일으키기에 이른다. 따라서 자기 자신만 아는 현대인들에게 있어 아쉬운 조상 섬김과 효 사상을 보완한다는 측면에서 음택풍수를 통한 동기감응론의 장점은 나름의 가치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참고문헌 - 제외
'동양사상 > 일반'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반야심경』명상과 심리치료 (0) | 2019.10.17 |
---|---|
동양사상 속의 행복 개념과 한국사회의 ‘행복’ 현상 (0) | 2019.10.16 |
『春秋』의 現代的 讀法 (0) | 2019.10.15 |
활인심방(活人心方)의 마음공부법 (0) | 2019.10.14 |
'九正易因' 에서 본 李贄의 易學과 그 세계관 (0) | 2019.10.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