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체의 권력 의지와 권력
강용수 (고려대)
“영원한 정의란 없다.” 1]
1. 들어가는 말
권력과 정의는 니체 정치철학의 핵심이 되는 개념이다. 어원으로 보면 권력의지는 권력에 대한 의지를 말한다. 곧 권력의 지향이 바로 니체철학의 형이상학적인 읽기의 근거가 되는 것이다. 니체가 현대철학에서 재해석된 계기는 프랑스 수용을 통해서다. 이러한 과정에서 니체의 권력이론은 독일에서 파시즘의 모태로 이해되는 것에서 벗어나 脫나치화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2] 국내 니체연구자들 사이에서도 Macht를 정치적으로 해석할 것인가, 脫정치적으로 해석할 것인가 논쟁이 격렬했다.
니체의 권력에 대한 해석은 프랑스 철학의 니체 수용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적 성과이다. 3] 권력에의 의지는 유고논쟁을 불러일으킨 책의 제목이기도 할 만큼 많은 연구들이 이루어진 것이 사실이다. 4]
권력에의 의지는 삶의 에너지, 충동(Trieb), 무의식 등과 연결되어 니체를 생철학자, 욕망의 이론가, 프로이트의 선구자로 해석하는 단서가 된 것은 잘 알려졌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동일성, 불변적 고정성, 재현가능성을 뒤집고 그와 함께 반플라톤주의를 표방하면서 세계의 탈신화화 작업에 열중한다. 플라톤 뒤집기는 니체 또한 이미 시도한 작업이기도 하다. 그러나 플라톤주의를 극복하려는 시도는 일원론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지 이원론의 형태로는 극복될 수 없다.
차이의 철학은 동일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사유를 수행하는 것으로 모든 것에 선행하는 존재론적 근본성을 차이로 규정하는 작업을 감행한다. 차이는 개념으로 포섭되어선 안 된다는 것은 들뢰즈 뿐만 아니라 아도르노의 이론에서도 확인된다. 반복의 개념도 동일성의 출현이 아니라 차이의 출현이어야 된다고 들뢰즈는 말하고 있다. 전통철학이 동일성을 말한다면,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은 차이철학이다.
타자성이 무엇보다 강조되는 현대 정치철학에서 동일성을 내포한 이성의 폭력에 맞서 非폭력적인 전략으로서 차이에 대한 강조, 존경, 인정이 다문화주의 정책과 맞물려 크게 유행하고 있다.
니체 정치철학 역시 들뢰즈에 의해 차이의 철학으로 읽히면서 니체가 모더니즘의 선구자로 각인되었다. 니체의 권력은 두 가지 방식으로 작동한다. 들뢰즈가 풍부하게 연구를 하여 보여준 작용적/반동적(active/reactive)라는 개념 짝에 대한 비판적 고찰이 이루어질 것이다. 5]
이 논문은 니체의 권력의지(Wille zur Macht)와 권력의 관계를 분석하면서, 권력에 대한 의지의 지향성을 중심으로 니체의 정의론을 소개하려고 한다. 권력 자체 보다 권력에 대한 의지의 양태를 분석하여 니체 정치철학의 주제를 풀어나갈 것이다.
따라서 정치라는 영역을 넘어 삶 자체의 차원에서 권력이 작용하는 방식에 대해 논의할 것이다. 권력에의 의지가 차이인가, 동일성인가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룰 것이다. 힘에의 의지를 양적인 차이가 아니라 질적인 차이를 통해 살펴볼 때 비로소 니체의 해석학의 전략이 잘 드러날 것이다.
1]“Es gibt keine ewige Gerechtigkeit”. MA I 53; KGW IV/2, p.71; 니체 저서는 통일성을 위해 KGW를 인용하며 개별적인 저서의 약기들은 학계의 일반적 관례에 따라 표기한다. Friedrich Nietzsche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 G. Colli und M. Montinari(Hg.), Berlin/New York 1967ff. (=KGW).
2]Bernhard H. F. Taureck, Nietzsche und der Faschismus, Leipzig 2000 참조.
3]니체를 포스트모더니즘의 대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프랑스 연구자로는, 푸코, 들뢰즈, 데리다, 바타이유 등이 있으며 대부분 니체의 권력 개념을 자신의 이론에 접합하였다. 주목할 만한 경우는 ‘힘에의 의지’를 ‘우연에의 의지’(Volonté de chance)로 바꾼 바타이유의 해석이다. 니체와 바타이유에 대한 비교연구는 졸고 「니체와 바타이유에 대한 철학적 비교연구 -증여와 주권을 중심으로-」, in: ?해석학연구?, 제26권, 한국해석학회 2000, pp.23-50.
4] Günter Abel, Nietzsche: Die Dynamik der Willen zur Macht und die ewige Wiederkehr, Berlin 1998.
5]들뢰즈가 니체에 대해 쓴 책은 두 권은 국내에 번역되었다. 『니체와 철학』, 이경신 옮김, 서울 : 민음사, 1998, 『들뢰즈의 니체』, 박찬국 옮김, 철학과현실사 2007. 이 논문은 두 권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되 번역은 독일어, 영어본을 함께 참고한다.
2. 권력의 계보학
권력에의 의지는 니체 자신이 혼자 창안해낸 개념은 아니다. 서양철학의 전통 안에서 이미 가능태(dynamis)의 개념을 알았으며 더 나아가 그 시대의 과학이론의 영향으로 힘(Kraft), 에너지(Energie), 심리학에서의 충동 등 인간의 경험에 대한 여러 관점들에서 생각해낸 것이다. 6]
권력에의 의지는 무엇보다 그것이 인간의 행동의 근본동기를 결정한다는 심리학적 해석에 가까운 개념이다. 다시 말해서 참으로 순수한 도덕적, 사회적, 미적이거나 종교적인 운동원인은 없고, “모든 인간적인 의욕은 유일한 자극(Impulse)에서 유래하여, 이러한 자극은 힘을 향한 노력”(Streben nach Macht)이라는 것이다. 7] 물리학자가 힘(Kraft)의 개념으로 사물의 외적인 피상적인 관계만을 규정하면서, 모든 사건에 내적으로 작동하는 동기를 간과한다. 힘에의 의지는 모든 존재의 충동력(Triebkraft) 뿐만 아니라, 모든 사건의 에너지적인 자극(energetischer Impuls)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힘에의 의지 개념은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와 함께 형이상학적 전통에 함께 자리 잡게 된다. 권력에의 의지는 “힘에 대한 승리를 말한다”.8] 힘의 극복은 지각으로 드러나는 안과 밖의 구별을 포괄하는 활동성으로 파악한다. 그것이 바로 ‘큰 이성’(große Vernunft)으로서의 몸이 갖는 실천적 자기관계성(praktische Selbstbezüglichkeit)을 뜻한다.
니체의 권력이론은 그의 계보학(Genealogie)에서 찾아볼 수 있다. 권력은 독일어로 Macht를 뜻하는데, Kraft와 구분된다. 곧 Macht는 주체와 관련되는 개념인 반면, Kraft는 자연과학적인 개념으로 非주체적인 것이다. 따라서 니체의 권력이론은 우주론적인 것으로 확대해선 안 되며 형이상학적인 논의에 거치지 말고 인간의 실천적 범주에 제한해야 한다. 곧 해석학의 범주로 파악해야 되며 다양한 관점(Perspektive)의 경쟁이 바로 권력에의 의지의 양상이다.
이와 관련해 니체가 말하는 권력이 주체적인가, 脫주체적인가라는 물음이 니체 권력해석의 핵심이 된다. 하이데거는 니체에 관한 책 2권에서 힘에의 의지를 다른 네 가지 주제와 함께 니체 형이상학의 근간으로 이해하고 있다. 곧 힘에의 의지가 본질이라면, 영원회귀는 그 형식이다. 다른 개념은 이 두 개념에 근거한다.
따라서 위버멘쉬는 권력에의 의지를 실현하는 주체성의 완성이다.10] 힘의 다수성으로 인간을 규정하면서도 권력에의 의지는 주체에 귀속되는 보편적 역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주체와 분리해서 힘에의 의지를 우주의 근원, 세상의 본질 등과 같이 이해하는 형이상학은 우주론적인 차원에 머물러있게 되어 모호성이 생겨난다. 따라서 힘에의 의지는 인간의 실천의 영역에 국한해서 볼 필요가 있다.
6]게르하르트에 따르면 니체 사상에 선행하는 철학자로는 Protagoras, Platon, Aristoteles, Spinoza, Leibniz, Schelling, Schopenhauer가 있다. Volker Gehrhardt, Artikel Wille zur Macht, in: Nietzsches Handbuch, p.354.
7]Volker Gehrhardt, Artikel Wille zur Macht, in: Nietzsche-Handbuch : Leben, Werk, Wirkung, Henning Ottmann (Hrsg.) Stuttgart 2000, p.351.
8]“Der Sieg über die Kraft” (M, Nr. 548, KSA 3, 318).
9]예를 들면, 에너지 보존의 법칙을 근거로 영원회귀를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다. 그러나 Macht와 Kraft를 구분해야 니체의 정치철학의 의미가 잘 드러날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우주론적 논의와 혼동될 위험이 있다.
10]Die vollendete Subjektivität des Willens zur Macht ist der metaphysische Ursprung der Wesensnotwendigkeit des “Übermenschen”. M. Heidegger, Nietzsche Ⅱ, Neske Pfullingen 1961, p.302.
니체해석의 주류를 형성하던 하이데거 해석에 차별성을 보인 것이 프랑스철학자들이다. 이와 관련해 니체의 이론을 수용한 두 학자 푸코와 들뢰즈의 해석을 간단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푸코의 권력론’을 들여다보면, 고고학적인 구조주의 방법론에서 탈피해서 자신을 ‘과격한 니체주의자’라고 말하는 푸코는 계보학의 전략을 「감시와 처벌」을 비롯한 다른 저서에서 지식-권력 연계를 분석하는데 적용하고 있다. 후기에 자기-배려로 넘어가기 전까지 근대사회의 제도화된 권력의 폭력성을 니체의 계보학에 바탕을 두고 비판했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 주체는 권력의 효과일 뿐이다.
‘도덕의 계보’의 앞부분에서 다룬 처벌을 감시와 처벌의 주제로 발전시키면서, 니체와의 차별성이라면 푸코의 경우 권력이 작동하는 방식이 非신체적인 것이란 점이다. 심신에 대한 反플라톤주의 입장에서 이제 몸이 영혼의 감옥이 아니라 영혼, 곧 정신이 몸의 감옥이 된 것이다.
여기서 푸코에게 권력은 담론과 시선을 통해 힘을 갖는다. 예를 들어, 근대적 주체를 구성하는 공간인 감옥에서 실현되는 권력은 “자동적”이며 “익명의 권력”,11] 곧 비인격적인 것이며 억압적인 것이 아니라 “생산적”인 것이다.12] 군주가 소유하던 권력은 이제 어느 누구도 소유할 수 없는 非가시적인 권력이 된 것이다.
‘봄과 보여짐의 구분’, ‘시선의 비대칭성’으로 ‘파놉티콘’이라는 감시체계를 통해 실현되는 무한한 미시권력의 확대를 가져온 것이다. 규율사회에 대한 비판을 다루다가, 푸코가 후기에 들어 권력에 대한 이해가 바뀌지만, ‘자기배려’의 개념에서도 권력은 타자지배가 아니라 자기지배의 형식으로 내면화된다.
푸코가 회귀한 지점은 역설적으로 니체가 부정하고자 했던 금욕주의적 이상이다. 그럼에도 푸코의 권력이론에서 차이, 구분짓기는 강조된다. 즉 공간을 구획할 때 건강과 질병으로 나뉘듯이, 권력은 끊임없이 정상과 비정상의 차이를 생산하는 담론의 효과이다. 非신체적인 권력은 ‘시선’과 ‘담론’으로 신체를 해부하여 공간적 차이로 구획하고 할당하는 것이다.
‘들뢰즈의 권력론’을 들여다보면, ‘니체와 철학’에서 들뢰즈는 독창적인 방식으로 니체사상을 해독하려고 시도한다. 들뢰즈의 권력이해에서 작용적인 것(actif)과 반동적인 것(réactif), 두 개념 짝을 통해 권력의 특성이 차이로 드러나게 된다. 푸코와 유사하게도 권력은 편재적(omnipresent)이며 리좀(Rhizom)과 같이 탈중심적이며 수평적인 연결고리를 만든다는 점에서 분열적이다.
무엇보다, 니체를 “反변증법적, 反헤겔적, 경우에 따라 反맑스주의적”으로 특징지으면서 좌파적 권력이론과는 거리를 두고 있다. 그렇다면 니체의 권력이론은 여전히 보수적인 경향을 지닌 우파의 이론에 가깝다고 오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논자가 볼 때 프랑스의 주석가의 해석과 관련해, 권력보다 더 중요하게 다루어야할 개념은 바로 의지다. 의지는 권력에 앞선 시원적이고 근원적인 차원이다. 철학사적으로 잘 알려졌듯이,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는 쇼펜하우어의 삶에의 의지에서 유래하지만, 차별화를 분명히 한다.
“삶이 있는 곳에 의지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삶에의 의지가 아니라 (...) 권력에의 의지다.” 14]
쇼펜하우어의 삶에의 의지는 그의 염세주의 철학에서 채워질 수 없는 맹목적인 것으로 부정되어야할 대상이다. 그러나 니체는 삶에 대한 부정을 넘어서 권력에 대한 긍정을 바탕으로 새롭게 이론을 정립한다.
니체에게 권력의 본성은 ‘증가’(Plus)를 목적으로 한다.
“우리가 의지(意志)하는 것, 모든 살아있는 유기체의 최소 단위가 의지하는 것은 힘의 증대(Plus von Macht)”이다. 15]
생명은 수동적인 ‘자기보존’(Conatus)에 그치지 않고 성장, 확장, ‘상승’(Steigerung)이며 자신 힘의 끊임없는 극대화이다.
쇼펜하우어의 입장에서는 의지를 ‘개별화의 원리’에서 독립해 ‘물 자체의 세계’로 집어넣으려고 했기 때문에, 의지는 역동적인 원리로서 모든 살아있는 존재뿐만 아니라 존재에 통용되게 된다. 따라서 삶을 의욕하는 개별적 의지의 복수성 뒤에 ‘물 자체로서’의 형이상학적 ‘독특한 추동력’(singuläre Triebkraft)이 자리 잡는다.
쇼펜하우어와는 대조적으로, 니체의 경우 모든 부분이 이미 전체와 관련된다. 권력에의 의지는 자신이 해석하는 단일성(eine sich selbst interpretierende Einheit)이며 안과 밖의 통일성을 규정하는 개념을 통해 뚜렷해진다.
힘을 역동적인 역량으로 파악하면, 외부를 규정하지 않고 항상 안으로 파고드는, 몰아세우면서 스스로 전제하는 내부인 힘은 스스로 살아있으면서 운동하는 의지로서 삶의 근원적 자극(Ursprungsimpuls)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의지는 단순히 삶 안에서 작용할 뿐만 아니라, 삶 앞에 놓여있는 전제가 된다.
“많은 것이 살아있는 것이 삶 자체보다 더 높게 평가되었다. 그래도 평가 자체로서 말하면 – 권력에의 의지다.” 16]
따라서 힘에의 의지는 가치평가의 기준이 된다. 예를 들어, 선과 악에 대한 판단은 삶을 기준으로 상승이나, 하강이냐 하는 징후에 불과하다. 유고에서도 세계는 권력에의 의지로만 구성된다고 강조한다.
“권력에의 의지”는 모든 사건의 근본적인 힘이며, “이 세계”는 “권력에의 의지이며 - 그리고 그 밖에 아무것도 아니다.” 17]
힘(Kraft)과 권력(Macht)의 관계를 니체는 명확히 구별한다. 세계에 설명의 방법을 적용하는 물리학자가 말하는 자연과학적인 힘의 ‘보완’으로 권력에의 의지를 덧붙인다. ‘우리의 물리학자가 신과 세계를 창조한 힘의 개념에 보완이 필요하다. 그것에 내가 힘에의 의지, 다시 말해 권력의 표명을 향한 끝없는 요구로서, 또는 권력의 사용과 실행, 창조적인 충동 등 내적인 세계가 추가되어야 된다. 곧 모든 현상, 모든 법칙은 내적인 사건의 징후로 파악되어야 된다.’ 18]
권력에의 의지는 단순히 세계를 설명하는 원리가 아니라 인간을 해석하는 동력인 것이다. 다시 말해, 권력에의 의지는 인간의 자기해석(Selbstauslegung des Menschen)의 영역으로 넘어오면서 자연과학적, 형이상학적인 해석 틀에서 벗어나게 된다. ‘관점주의’(Perspektivsmus)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의 관점에 따라 세계를 해석한다. 이러한 가치평가는 모든 것이 권력에의 의지이며, 그 외는 아무것도 없다고 받아들일 때 가능한 일이다.
10]Die vollendete Subjektivität des Willens zur Macht ist der metaphysische Ursprung der Wesensnotwendigkeit des “Übermenschen”. M. Heidegger, Nietzsche Ⅱ, Neske Pfullingen 1961, p.302.
11] 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오생근 옮김, 서울: 나남, 2008, p.270.
12]미셸 푸코, Ibid., p.302. “사실상 권력은 생산한다. 현실적인 것을 생산하고, 객체의 영역과 진실에 관한 의식을 생산하는 것이다. 개인과 개인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지식은 이러한 생산의 영역에 속한다.”
13] Nietzsche als antidialektisch, als antihegelianisch, bzw. anti-Marxistisch. Gilles Deleuze, Nietzsche und die Philosophie, München 1976, S. 13f.
14]Za II, Von der Selbst Ueberwindung, KSA 4, p.149; “Nur, wo Leben ist, da ist auch Wille: aber nicht Wille zum Leben, sondern - so lehre ich's dich - Wille zur Macht!”
15] WM. 702. p.473.
16] “Vieles ist dem Lebenden höher geschätzt, als Leben selber; doch aus dem Schätzen selber heraus redet - der Wille zur Macht!” (Za II, Von der Selbst Ueberwindung, KSA 4, p.149).
17] “Diese Welt ist der Wille zur Macht - und nichts außerdem!” (N, 1885, 38 [12], KSA 11,611). 니체도 아리스토텔레스의 dynamis와 자신 이론의 유사성을 찾는다. N, 1887, 9 [92], KSA 12, 387.
18]N, 1885, 36 [31], KSA 11, 563.
3. 권력의 두 가지 발현방식
니체는 권력에 대한 의지의 근원을 밝히는 작업을 계보학이라고 부른다. ‘쟁기날’(Pflugschar) 19] 이라는 도구의 비유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의 내면의 지층을 파헤쳐 내려가 근원을 파헤치는 것이 바로 계보학이라는 방법론이다. 겉보기에는 선과 악, 작용적인 것과 반작용적인 것이 극명하게 대립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인간 삶의 심층에는 ‘권력에의 의지’가 똑 같이 자리 잡고 있다. 중요한 점은, 권력에의 의지가 증가(Plus)만을 추구할 뿐 감소(Minus)를 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계보학의 방법은 무엇(Was)이 아니라 누구(Wer)에 대한 물음이다. 곧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아니라, 누가 그것에 대해 말하는가라는 주체에 대한 메타 물음이다. 그러한 발화행위를 통해 누가 ‘더 많은 권력’을 갖게 되는가를 폭로하는 것이 니체 계보학의 전략의 목표다. 20] 권력에의 의지(Wille zur Macht)는 의지(Wille)와 권력(Macht) 두 개념이 전치사(zu)로 연결되어 있다. 곧 의지가 권력을 향하는 점에서 지향성을 내포하고 있다. 여기서 보편적으로 권력의 핵심은 증가(Plus)를 추구한다는 관성의 경향이다.
권력에의 의지는 자신의 가치를 대상에 투영하여 세계를 구성하는 해석의 힘이다. 즉 힘의 강도에 따라서 세계에 대한 이해가 바뀌게 된다. 강한 힘과 약한 힘은 세계에 대한 상을 나름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따라서 작용적인 것과 반작용적인 것에 대응하는 개념이 긍정과 부정이다. 들뢰즈 역시 이 개념을 하나의 짝으로 구별하고 있다. 작용적인 것은 삶의 긍정을, 반작용적인 것은 삶의 부정을 나타낸다. 그래서 삶을 부정하는 금욕주의, 내세주의, 배후세계론 등에서 니체가 일관되게 비판받고 있다.
그렇다면 부정성이란 무엇인가? 이와 관련해 들뢰즈는 니체의 권력이해가 헤겔의 변증법에 대립한다는 독창적인 견해를 내놓는다. 곧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긍정이지 부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헤겔철학에서 지양의 계기가 되는 부정성은 ‘선택성의 원리’ 21] (de principe sélectif)에 의해 자체적으로 해소되기 때문에 긍정성만이 니체가 허용하는 원칙이다. 들뢰즈는 힘에의 의지의 두 양태인 작용적인 것과 반작용적인 것의 차이를 ‘선택성’이라는 개념을 도입하여 ‘영원회귀’를 통해 존재자의 반복이 결정된다고 보고 있다. 곧 긍정하는 것만이 존재를 선택한다. 영겁회귀는 기계론적, 논리적, 수학적인 반복이 아니라 선택적인 힘을 실행할 수 있는 과정이다. 영겁회귀를 의욕하는 것은 어떤 사건들, 대상들, 관계들. 순간들은 회귀하고 다른 것은 회귀하지 않는다는 ‘선택적 과정’(selective procedure)을 말한다. 이러한 구별을 생성(生成)의 세계에 적용한다면 ‘작용적 생성’만이 영겁회귀의 원리를 구체화하여 존재를 산출한다. 작용적 생성만이 회귀하며 반응적 생성은 회귀하지 않는다. 반응적인 힘은 자기파괴를 통해 스스로 무화되기 때문이다. 22]
19]F. Nietzsche, “도덕군자에 대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옮김, 서울: 책세상, 2003, p.156.
20]예를 들어, 신은 존재하는가는 신의 존재 자체의 증명보다는 그러한 발언을 통해 누가 더 권력을 갖는가라는 물음으로 환원될 수 있다. 이데아가 존재하는가 보다 이데아라는 담론이 가져오는 권력의 효과가 니체의 관심사이다.
21]Gilles Deleuze, Nietzsche et la Philosophie, Paris, 1977, p.77.
22] “영겁 회귀가 ‘반응적(反應的)인 힘 자체의 부정’을 否定하기 때문에 니힐리즘은 더 이상 보존과 약자의 승리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자기 파괴로서 자신을 표현함”으로써 완성된다. “자기파괴 안에서 반응적인 힘 자체는 부인되고 無로 된다. 그러므로 자기파괴는 작용적 파괴 (active destruction) 즉 작용적 조작(active Operation)이라 할 수 있다.” G. Deleuze, Nietzsche and Philosophy, pp.70-71.
反변증법에 따르면 이중부정이란 없고 이중긍정만 있다. 이중부정은 현존의 부정에 근거한 허위 긍정이며, 디오니소스적 긍정만이 참된 긍정이다. 헤겔의 ‘부정의 부정’으로서의 변증법은 현존의 부정에서 출발한다. 헤겔 자신이 말하듯 변증법의 진리는 부정성에 있다. 23]
헤겔에게 변증법의 진리가 부정성인 이유는, 모든 것이 그 진리인 참된 존재, 완전성, 이상성과 떨어져있다는 점에서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존을 부정하고 본질을 향해 나아가는 ‘부정의 부정’을 통해 참된 존재에 다다를 수 있다. 또한 본질이 실현되는 미래를 위해 현재를 즐기지 못하고 현재를 ‘부정하는 노동’을 해야만 된다.
그러나 니체에게 이중부정은 ‘지양’이 아니라 그 자체의 부정으로 소멸되므로 이중긍정만이 삶의 해석학에서 존재를 보장받게 된다.
부정에 대한 비판은 헤겔의 변증법뿐만 아니라, 기독교, 이원론을 비롯해 니힐리즘이라고 명명할 수 있는 현존을 부정하는 모든 종류의 현상에 해당된다. 앞에서 밝혔듯이, 힘에의 의지는 우주적인 에너지24] 와 달리 삶의 상승을 목표로 실현되는 인간의 본성이다. 사회계층에서 보면, 작용적인 것은 귀족(도덕), 반작용적인 것은 노예(도덕)에 그대로 적용된다. 헤겔의 주인과 노예 변증법 25] 은 인정투쟁을 통해 주인과 노예의 자립성의 관계가 뒤바뀐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잘 알려졌듯이,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은 인간의 평등을 추구하는 인정투쟁에 대한 철학적 정당화다. 곧 주인과 노예의 지배관계가 폐지되고 노예가 예속에서 해방되는 과정에서, ‘독자성을 본질로 하는 자립적인 의식’으로서의 주인과 ‘타자에 대한 존재를 본질로 하는 비자립적인 의식’으로서의 노예의 종속관계는 지양되어야한다. 노예는 주인의 자립성을 부정하지 않고 인정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자립성과 타자로부터의 자립성을 함께 인정받는 것을 추구한다. 상호인정이 헤겔의 인정투쟁의 핵심이라 할 때, 이러한 사상은 이웃사랑, 정언명법, 만인평등 등 보편적 윤리사상과도 합치된다.
그러나 들뢰즈가 헤겔을 비판하는 입장은 노예해방의 논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 곧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능동성과 반응성이라는 활동방식으로 나눠지기 때문에 헤겔식의 인정투쟁은 니체에게서 불가능하다. 주인과 노예의 관계는 인간의 관계가 아니라 개인의 힘의 질적 특성, 활동방식, 역랑으로 비유된다. 주인이 고귀함을 덕목으로 능동적, 긍정적인 힘을 갖는 반면, 노예는 반응적, 부정적 의지에 대한 비유이다.26] 주인과 노예의 관계가 능동성과 반응성이라는 다른 역량차이에 의해 구분되면서, 노예해방의 길은 헤겔과는 다른 방향을 갖게 된다. 적극적인 힘은 ‘차이를 긍정’하고 ‘긍정의 대상’으로 만드는 힘이며, 반응적인 힘은 ‘적극적인 힘을 부정하는 힘’이다. 27]
23] “부정성이 참된 변증법을 형성한다.” Hegel, Wissenschaft der Logik, Bd. I, p.51.
24]이러한 점에서 니체의 영원회귀를 우주론적으로 해석하는데는 주의가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곧 에너지는 유한하여 시간은 무한하여 조합은 반복된다는 것은 선택적 존재론과는 부합될 수 없다.
25]헤겔 정신현상학 자기의식 장, 주-노변증법 참조
26]“니체가 우아함, 고귀함, 주인이라고 부르는 것 은 때로는 능동적 힘이고 때로는 긍정적 의지이다. 그가 저속함, 비루함, 노예라고 부르는 것은 때로는 반응적 힘이고, 때로는 부정적 의지이다.” 질 들뢰즈, 『니체와 철학』, 이경신 옮김, p.110.
27] 적극적인 힘은 “할 수 있는 것의 끝까지 가는 힘이며, 자신의 차이를 긍정하고, 그것을 향유와 긍정의 대상으로 만드는 힘”인 반면에 반응적 힘이란 “적극적 힘을 부정하는 힘”이다. 질 들뢰즈, 『니체와 철학』, 이경신 옮김, p.121.
의식과 의식의 관계에서 주인과 노예가 상대편을 자신과 등등한 존재로 인정할 때, 곧 타자 속에서 자신을 파악할 수 있어야 상호인정의 상태가 확보된다. 그러나 헤겔과 주인의 노예변증법은 반응적인 힘들 사이의 관계를 나타낼 뿐이며, 상호인정은 작용적인 힘이 아니라 반응적인 힘 들 간의 관계에만 적용된다. 헤겔의 주-노 변증법은 노예해방을 통해 주인과 노예의 차이를 폐지하고 인간이 모두 평등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으로 나아가지만, 들뢰즈의 입장에서는 부족하다. 곧 진정한 주인 노예 변증법은 동일성(평등)의 인정이 아니라 차이(특이성 singularity)의 인정을 통해 진정한 해방이 이루어질 수 있다. 자신의 차이와 타자의 차이가 함께 인정되어야 된다.
니체에게 중요한 것은 인정(Anerkennung)투쟁이 아니라 르쌍띠망(Ressentiment)의 극복이다. 타자의 인정을 거부하는 태도가 르쌍티망이기 때문이다. 원한(怨恨)으로 번역되는 르쌍티망은 세계와 자신을 포함해 모든 것을 부정하려는 ‘이중감정’(Ambivalenz)이다. 곧 부정이면서도 긍정을 포함하고 있다.
정의심리학에서 니체는 타자의 우월성, 자연적인 위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노예의 폭력성에 주목한다. 플라톤 이후 정의론의 핵심주제인 덕이 부정되는 이유는 타자의 탁월성(덕arete)이 자신에게 원한의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질투, 시기심, 비교감, 열등감, 복수심 등이 원한의 뿌리가 된다. 자학적, 가학적인 르쌍티망이 내면화되면 죄책감(가책)과 양심이 된다.
강자의 덕, 탁월함, 자연적인 우월성은 정의라는 이름인 평등이라는 이념에 가려져 희석화되는데, 이러한 평준화, 균등화의 바탕에는 타자의 덕(arete)을 인정하지 못하는 노예의 부정의 심리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노예도덕의 반란’은 바로 세계에 대한 약자의 해석방식이 강자의 해석방식을 이김으로써 지배권을 행사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
논자가 볼 때, 이러한 원한은 부정성이지만 실제로는 부러움(envy), 28] 존경, 두려움을 함께 포함하는 긍정성을 내포하고 있다. 다시 말해 겉으로는 대립하지만, 본질적으로 부정은 긍정이며 반동적인 것은 작용적인 것이 된다. 도식으로 나타내면 R (=A)이 된다.
은폐된 욕망을 통해 타자의 권력의 부정을 말하는 것은 자신의 권력의 긍정을 말하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앞부분에 귀족과 노예의 세계해석 방식의 차이를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데, 육체의 경멸자, 이 세상의 부정하면서 초월을 말하는 이원론자도 ‘은폐’ 된 방식으로 이 세상을 긍정하고 있다. 29]
이러한 타자의 타자성을 수용하지 않으려는 르쌍티망의 자기극복이야말로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30]
28]논의의 맥락은 다르지만 롤즈와 노직의 정의론에서도 ‘부러움’(envy)을 중요한 주제로 다루고 있다.
29]니체는 피안의 세계로 뛰어오르기 위해 이 대지를 작게 만들어 뛰어 오르려는 벼룩과 같은 인간을 ‘종말인’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결국 뛰어오르기 위해선 땅이 필요할 수밖에 없고 이 삶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
30]감정적 정의론과 관련해 졸고, “감정적 정의론: 정의에 대한 계보학적 고찰 -니체와 케르스팅의 논의를 중심으로-”, 『니체연구』 9권, 한국니체학회, 2006년, pp.175-201 참조.
4. 정의와 차이
디케 여신의 저울이 권력의 분배를 상징하듯이, 전통적인 견해에 따라 니체는 정의를 힘의 균형(Gleichgewicht)의 필요성에서 나오는 요구로 본다. 권력의 증가를 모든 인간이 원한다고 할 때, 권력의 대상(지식, 명예, 부)은 제한되어 있으므로 이것을 갖기 위한 경쟁은 피할 수 없다. 힘의 충돌과 갈등은 협상에 대한 요구를 담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균형이다.
“균형은 정의의 토대이다.” 31]
역사적으로 “공동사회란 처음에는 위험한 세력들과 균형을 이루기 위한 약자들의 조직이었다. (...) 따라서 균형이라는 것은 가장 오래된 법 이론과 도덕론에서 매우 중요할 개념이 된다: 정의의 토대가 되는 것이 균형이기 때문이다.”32]
그러나 권력의 분배를 뜻하는 정의에 대한 요구는 귀족(Active)이 아니라 노예(Reactive)의 요구에 따른 것이다. 곧 힘의 주권을 갖지 못하는 자들이 권력의 균형을 보장받기 위한 보상심리가 바로 정의인 것이다.
강한 자, 귀족에게는 정의의 개념이 원래 존재하지 않는다. 정의는 결국 약자들의 요구, 곧 생명과 재산의 보호 요구에 따른 것이며 자연 자체에는 존재하지 않는 부당함이다.
자연에는 선과 악이 없으며, 따라서 정의 자체도 없다. 인간은 평등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의를 말하는 자는 자신의 생존을 위해 타자와 자신을 동일시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정의는 종종 약함을 감추는 옷이다.” 33]
권력의 비대칭성은 덕에 따라 당연히 인정되어한다는 점에서 니체의 정치철학은 귀족주의 입장이다. 생명과 재산권의 보호를 위해 약자는 강자(귀족)의 권력이 필요하며, 그것을 자유와 평등이라는 근대적 이념으로 사회계약을 형성함으로써 국가가 탄생하게 된다.
그럼에도, 사회계약을 통해 공동체를 구성할 때 법이라는 것은 한계를 갖게 된다.
“수단으로서의 법적 상태-동등한 사람들 사이의 계약을 토대로 하고 있는 법은, 계약을 체결한 사람들의 힘이 똑같거나 또는 비슷한 상황에서 성립하는 것이다; 비슷한 세력 간의 불화와 쓸모없는 소모를 더 이상 하지 않기 위하여 인간의 영리함이 만들어낸 것이 법이다. 그러나 한쪽의 힘이 다른 쪽보다 결정적으로 약해지게 되었다면 마찬가지로 이것 역시 궁극적으로 끝이 난다.” 34]
법이라는 것은 자신의 생존을 위한 약자들의 ‘영리함’ 35] 이 작동될 때까지만 유효할 뿐, 필요성이 없다면 언제나 폐기될 수도 있는 위험이 있다. 공동체의 토대인 국가도 삶의 가능성을 보장하지 못할 수도 있다. 국가를 운용하는 원리는 ‘자신의 담즙을 토해내는 신문(여론), 부의 축적, 권력(권력의 지렛대인 돈)’이며 정치판이란 원숭이들이 서로 높은 지위(왕관)를 차지하려고 싸우는 진흙탕과 같다.36]
31]“Gleichgewicht ist die Basis der Gerechtigkeit” MA 22
32]MA II Der Wanderer und sein Schatten 22, 번역 p.240.
33] "Gerechtigkeit ist häufig Deckmantel der Schwäche" MA 64
34]Der Wanderer und sein Schatten 26, p.245.
35]같은 맥락에서 홉스에 따르면, '이성은 계산이다'.
36] Z. 번역 p.83.
자유주의로 대변되는 현실의 정치에 대해 공산주의는 ‘신 앞의 평등’과 같은 기독교 교리에 바탕을 두고, 시장주의는 경쟁의 투명성과 인간의 자기실현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행복추구를 삶의 궁극적인 목표로 정한다. 그러나 근대 정치이념은 약자가 자신의 이념(금욕적 이상)을 내세워 강자를 지배하기 위해 ‘작은 정치’를 펴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니체가 말한 ‘위대한 정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덕의 인정에 바탕을 둔 ‘귀족주의’를 말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가치는 현상에서는 작용/반작용, 긍정/부정의 대립으로 보이지만 그 근원을 계보학적으로 밝혀내면 힘에의 의지가 공통분모인 것이다. 세계를 해석하는 차이를 보일 뿐이지, 귀족이든 노예든 삶을 긍정하면서 똑같이 힘의 극대화를 추구한다.
노예와 다른 귀족의 존재방식의 차이는 타자에 대한 수용이다. 귀족은 ‘차이의 열정’을 갖는다.
곧 “거리의 열정”(Pathos der Distanz) 37] 은 “영혼 자신 안에서 더 새로운 거리-확대(Distanz-Erweiterung)를 향한 요구”를 갖는다. 거리두기를 통해 자연의 위계를 인정할 뿐만 아니라 타자와의 차이, 위계질서(Rangordnung)를 긍정한다.
그러나 노예는 귀족의 질적 차이, 우월성, 덕, 가치(axia)에 따른 분배를 인정하지 않고 평준화, 동일화하려는 근성, 무리본능을 갖는다. 차이는 귀족의 덕목이며, 동일화는 노예들의 욕망의 자기투사다.
정의 이념의 근간인 자유나 평등은 노예도덕에서만 있을 뿐이다.
세계를 부정하고, 신체를 경멸하고, 타자를 지배하는 노예의 욕구에는 자연적인 위계질서를 부정함으로써 이 세상을 지배(Erdherrschaft)하려는 숨겨진 전략이 있다.
법이란 강자의 삶의 의지, 자연권을 공정성이라는 이름으로 제한하는 규범이다. 계약으로서의 법은 약자의 재산침해의 방지와 생명권 보호라는 차원에서 강자의 권리를 제한하고 축소하는 결과만을 가져왔다.
자유와 평등으로 덧칠된 근대 정치의 이념 뒤에 은폐된 노예도덕이 가져오는 평면화된 정치지형에 맞서 니체는 차이와 덕을 인정하는 새로운 귀족주의적 정치를 구상한다. 대중사회에서 “특수화된 유용성으로 인간이 왜소화되며 이 유용성에 순응하는 것과는 반대의 운동 - 종합적이고 총계화하며 승인하는 인간을 산출하는 운동이 필요”한데, 이러한 인간이 ‘평준화된 인간’에 대해 “거리감”(das Distanz-Gefühl)을 갖는 “좀 더 높은 귀족주의의 형식이 미래의 귀족주의의 형식이다.” 38]
요약하면, 자유주의, 공산주의, 공리주의 등 근대의 정치적 이념이 ‘차이’를 없애고 위계가 없는 사회를 가져온 상황에 맞서, 니체의 귀족주의는 덕과 가치에 따른 위계를 재정립하는 ‘차이의 정치’의 복권을 강조한다. 39]
37]N 2[13]; KGW VIII/1, p.71.
38]N 10[17]; KGW VIII/2, p.129, ?니체 전집? 22, 백승영 옮김, 서울: 책세상, 2000, p.152. 번역 일부 수정.
39]니체의 귀족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에서 논의하는 덕에 대한 재해석이다. 니체에 대한 매킨타이어의 논의는 이진우, 「공동체주의의 철학적 변형 - 공적과 정체성의 개념을 중심으로」, ?철학연구? 제42권, 철학연구회, 1998, pp.243-273 참조.
5. 나오는 말
현대철학에서 정의를 빼놓고 논의하기 힘들 정도로 정의론이 새삼 관심을 받고 있다. 현대의 정의론은 크게 공리주의, 절차주의, 교환주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주지하다시피 현대복지국가에서 영향력이 큰 공리주의의 정의론의 원칙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위해 효용의 극대화를 목적으로 하는 결과주의다.
둘째, 절차주의는 분배의 규칙을 마련하는 계약주의와 동기주의를 원칙으로 내세우고 있다. 공리주의와 충돌하는 쟁점은 공리주의에 따른 쾌락과 고통의 원칙이 계약을 늘 ‘자의적’으로 파기할 수 있다는 위험이다. 따라서 공리주의의 원칙에 반대해 절차적 합리성을 실현하는 법은 칸트의 정언명법에 따라 타인을 수단시하지 않고 인격체로서 존중하는데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셋째, 교환주의는 자유교환을 원칙으로 내세워 국가의 간섭을 최대한 배제하여 자유 시장경제를 너무 낙관적으로 신뢰하는 문제점을 갖고 있다.
지금까지 논의된 니체 정의론의 독특함은 정의를 심리학의 차원에서 다룬다는 점이다. 권력에의 의지를 정치적으로 치우쳐 언어를 사용하면 플라톤의 전통으로 되돌아가는 권력에의 의지의 미학적 함의가 배제되는 것은 큰 희생이다. 권력에의 의지는 세계경험과 자기경험에 대한 해석에 근거해 인간학, 문화이론, 자연철학에서 더 나아가 실천적인 세계해석의 길을 열어놓는다.
권력에의 의지는 플라톤을 비롯한 모든 이원론에 대한 저항이자 감성을 부정하는 금욕주의에 대한 반항이다. 권력에의 의지는 니체 철학이 일원론, 내재론, 몸의 철학으로 일관되게 전개하게끔 하는 바탕개념이다.
대체로, 들뢰즈의 니체해석은 고전적 가치를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작용적인 것과 반작용적인 것의 차이를 통해서 니체를 읽으려는 시도에서 삶의 근원에 있는 충동(동일성)을 다소 간과한 것으로 보인다. 곧 작용적인 것과 반작용적인 것이라는 가치의 대립(다름)은 힘에의 의지라는 근원적인 현상(같음)에서 환원될 수 있다. 마치, 뿌리는 같지만 그 곳에서 자란 나뭇가지가 다른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주인과 노예도 마찬가지로 삶의 해석학이 긍정과 부정으로 갈리지만, 계보학으로 볼 때 노예들이 삶을 부정하는 것은 힘들고 지친 까닭일 뿐, 오히려 삶을 누구보다 더 긍정하는 것이다.
밖과 안을 매개하는 신체의 경험은 해석자의 힘의 강도에 의해 긍정이 되기도 하고 부정이 되기도 하기 때문에, 결국 주체의 역량에 따라 세상은 달리 보이게 마련이다.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는 일원론에 근거한 내재성을 바탕으로 신체(몸)의 해석학을 근거 짓는다. 안과 밖의 접점인 몸(Leib)이 바로 ‘자기’(Selbst)이며 해석의 시선이 자라나는 ‘대지’(Erde)이기도 하다. 세계에 대한 관점을 정하는 힘에의 의지는 주인이나 노예나 같지만, 그 토양에서 자란 가치는 세계를 긍정하기도 하고 세계를 부정하기도 한다. 긍정하는 힘은 차이를 높게 만들지만, 부정하는 힘은 차이를 낮게 만들어 부정하려 한다.
동일성과 차이를 두고 많은 주체가 벌이는 싸움이 바로 권력에의 의지가 만드는 해석의 놀이일 것이다.
니체 해석학의 주제는 ‘세계’(Welt)가 아니라 ‘삶 자체’(Leben)다. 삶의 바깥은 없다. 아무도 삶의 바깥에 서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 한 번도 삶의 바깥에 머무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삶을 넘어 거슬러 올라갈 수 없기에, 삶 자체가 해석의 텍스트이자 창작의 공간이 된다. 부정, 한탄, 슬픔도 모두 삶 안에서만 가능한 사치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삶을 부정할 수 없고 삶을 긍정할 줄만 안다. 부정하는 것도 긍정이기 때문에, 삶에 대한 긍정은 운명과 같다. 그래서 삶에 대해 니체는 운명적인 사랑(amor fati)을 주문한다.
삶은 ‘다른 것’ 같지만, 늘 ‘같은 것’의 반복이자 돌아옴이다. 니체가 말하듯, ‘우리가 삶을 사랑하는 이유는 삶에 익숙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같은 것을 의욕하면서도, 그 지루함을 견뎌내면서 차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니체가 말한 ‘위버멘쉬의 삶’의 태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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