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자(잡편) 칙양 1 - 지혜보다 무위의 덕이 사람을 감화시킨다
칙양이 초나라에 놀러 갔는데, 이절이 그에 관해 초나라 임금에게 얘기했다. 그러나 임금은 그를 만나지 않았다. 이절이 그대로 돌아가자 칙양이 왕과를 보고 말했다.
“선생께서는 어째서 저를 임금님께 소개해 주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왕과가 말했다.
“나는 공열휴만 못합니다.”
칙양이 말했다.
“공열휴란 무엇을 하는 분이십니까?”
왕과가 말했다.
“그는 겨울에는 강에서 자라를 작살로 찔러 잡고, 여름이면 산기슭에서 쉽니다. 누가 지나다가 물으면 그곳이 자기 집이라고 대답한다 합니다.
이절이 임금께 말씀드려도 되지 않았는데 하물며 나 같은 사람이 말씀을 드린다 해서 되겠습니까? 또한 저의 지혜는 이절만 못합니다. 이절의 사람됨은 덕은 없지만 지혜는 있습니다. 스스로 자연에 맡겨 신명으로써 외물을 접하지 않고 본시 부귀를 누리는 지위에 미혹되어 있습니다. 그와 접촉하면 덕으로써 서로를 돕게 되지 않고, 서로의 덕을 없애는 것을 돕는 결과가 됩니다.
헐벗은 사람이 봄에 가서야 옷을 빌리고, 더위를 먹은 사람이 겨울이 되어서도 찬바람을 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초나라 임금의 사람됨은 형식적으로는 존엄합니다. 죄에 대해 용서를 하지 않기로는 호랑이와 같습니다. 말재주가 있고 올바른 덕을 지닌 사람이 아니라면 어느 누가 그를 설득시킬 수 있겠습니까?
성인은 자신이 곤궁할 때에는 식구들이 가난함을 잊게 만들고, 출세했을 때에는 임금이나 대신들이 벼슬과 녹을 잊고 스스로 겸허하도록 만듭니다. 외물에 대해서는 외물과 동화하여 즐기고, 사람들에 대해서는 도가 서로 통하게 하고 즐김으로써 자기의 본성을 보전합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는 말을 하지 않아도 사람들로 하여금 화합하는 마음을 가지게 만들고, 사람들과 나란히 서 있으면서도 사람들을 동화되게 만듭니다. 그들을 모두 아버지와 아들 같은 정으로 귀착하도록 만들어 줍니다. 가만히 들어앉아 있어도 그가 세상에 베푸는 사람들의 마음에 대한 효과는 이처럼 큽니다. 그래서 공열휴에게 부탁을 드려야 한다고 말씀드린 것입니다.”
♣ 장자(잡편) 칙양 2 - 지혜에 의지하면 근심만이 생긴다
성인은 만물의 혼란을 달관하고, 모든 것을 하나로 보고 있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그처럼 통달하고 있는 것을 모르는 것은 천성이기 때문이다. 천명으로 되돌아가 행동하며 자연을 스승으로 삼고 있는데,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성인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지혜를 의지하면 근심만이 생기며 행하는 일도 오래가지 못하여 멈춰지게 될 것이며, 그것은 어쩔 수도 없는 것이다. 나면서 아름다운 사람은 남이 그에게 거울을 주어야 그것을 보고서 자기가 아름다운 것을 알지만 남이 말하지 않으면 자기가 남보다 아름답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을 알든 모르든 그것을 들었든 듣지 않았든 그가 아름답다는 것은 결코 부정될 수 없는 것이며, 사람들이 그의 아름다움을 좋아하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본성이기 때문이다.
성인은 사람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에게 성인이라고 이름을 붙여준 것이다. 그러나 남이 얘기해주지 않으면 그 자신이 사람들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을 알든 모르든, 그것을 들었든 듣지 못했든 간에 그가 사람들을 사랑한다는 사실은 끝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며, 사람들이 그를 통하여 편하게 지내게 된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것은 본성이기 때문이다.
고국이나 고향은 그 곳을 떠난 사람들이 바라보기만 해도 기쁨을 느끼게 된다. 비록 언덕과 초목에 가려서 십분의 일 밖에 보이지 않는다 해도 여전히 마음은 기쁜 것이다. 하물며 옛날 보던 것을 보고, 옛날 듣던 것을 들을 때는 얼마나 큰 기쁨을 느끼겠는가? 옛날에 보던 높다란 누각이 사람들 사이에 보일 때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 장자(잡편) 칙양 3 - 자연을 스승으로 삼아라
염상씨는 자연변화의 원리를 체득하여 되는 대로 자신을 맡겨 만물과 함께 시작도 끝도 없었으며 시간도 없었고 시간의 흐름도 없었다. 매일 만물과 함께 변화해가는 사람이란 전혀 변화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어째서 그런 경지에 들려 하지 않는가? 자연을 스승으로 삼으려 하면서도 자연을 스승으로 삼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밖의 물건을 따라 행동을 하게 되기 때문이니 어찌 하겠는가?
성인에게는 처음부터 자연의 의식도 없었다. 처음부터 사람에 대한 의식도 없었다. 처음부터 시작도 없었고, 처음부터 물건도 없었다. 세상과 더불어 함께 행동하여 거리낌이 없었고, 그의 행동은 완비되어 있어 자기를 손상케 하는 일이 없었다. 그가 자연에 합치됨이 이와 같았으니 어떠했겠는가?
상나라 탕임금은 사어, 문윤, 등항을 스승으로 모셨는데, 스승을 따르기는 하되 얽매이지는 않고 되는 대로 내맡겼다. 그 때문에 뛰어난 명성을 얻었고, 명성에 따를 법도도 무르익어 명성과 법도 두 가지가 함께 세상에 드러났던 것이다. 공자도 사려를 다해 보았으나 결국 자연을 스승으로 삼았던 것이다.
용성씨는 말하기를「날(日)이 없으면 해(歲)도 없고, 안이 없으면 겉도 없다」고 했다.
♣ 장자(잡편) 칙양 4 - 달팽이 뿔 위에서 싸우는 것과 같다
위나라 혜왕 영이 제나라 위왕 모와 맹약을 맺었는데 제나라 위왕이 그 맹약을 깼다. 위나라 혜왕은 화가 나서 사람들을 시켜 그를 죽이려 했다. 위나라 서수 공손연이 그 얘기를 듣고 부끄럽게 여겨 말했다.
“임금님께서는 만승의 군주이시면서 한 남자를 시켜 원수를 갚으려고 하십니다. 제게 이십만의 군사를 주어 제나라를 공격하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제나라 백성들을 사로잡고 소와 말들을 끌어와 제나라 임금이 속이 타 등창이 터지게 만들겠습니다. 그런 뒤에 나라를 빼앗겠습니다. 제나라 장수 전기를 도망치게 만들고 등을 쳐 허리를 부러뜨려 버리겠습니다.”
위나라의 계자는 이 얘기를 듣고서 부끄러워하며 말했다.
“열길 높이의 성을 쌓았을 때, 그 열길 높이의 성을 다시 허물어버린다면 이것을 쌓은 일꾼들이 고생만 한 결과가 됩니다. 지금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지 칠 년이 되었는데, 이것은 정치의 기반입니다. 공손연은 혼란을 일으키는 사람이니 그의 말을 들어서는 안됩니다.”
위나라 화자가 다시 이 말을 듣고서 좋지 않게 생각하며 말했다.
“제나라를 정벌하자는 얘기를 하는 자는 혼란을 일삼는 자입니다. 제나라를 정벌하지 말자고 말하는 자도 역시 혼란을 일삼는 자입니다. 제나라를 정벌하자고 말하는 자와 제나라를 정벌하지 말자고 말하는 자가 혼란을 일삼는 자라고 말하는 자도 역시 혼란을 일삼는 자입니다.”
위나라 혜왕이 말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까?”
화자가 말했다.
“올바를 도를 따르기만 하시면 됩니다.”
혜자가 그 말을 듣고서 대진인을 혜왕에게 소개했다. 대진인이 혜왕에게 말했다.
“달팽이를 알고 계십니까?”
혜왕이 말했다.
“알고 있습니다.”
대진인이 말했다.
“달팽이의 왼쪽 뿔에 나라 하나가 있었는데 촉씨라 불렀습니다. 달팽이의 오른쪽 뿔에도 한 나라가 있었는데 만씨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두 나라가 땅을 서로 빼앗으려고 전쟁을 벌였습니다. 쓰러진 시체가 수만 명이나 되었고, 도망치는 자들을 추격하여 십오일 만에야 되돌아 왔습니다.”
혜왕이 말했다.
“그 무슨 허무맹랑한 얘기입니까?”
대진인이 말했다.
“저는 임금님께서 사실을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사방과 하늘과 땅을 생각할 때 한계가 있다고 여기십니까?”
혜왕이 말했다.
“한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진인이 말했다.
“마음을 한계도 없는 경지에서 노닐게 할 줄 안다면 돌이켜 이 세상의 나라를 생각해 볼 때,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존재가 되지 않겠습니까?”
혜왕이 말했다.
“그렇겠지요.”
대진인이 말했다.
“이 세상에는 위나라가 있습니다. 위나라 가운데 또 양나라가 있습니다. 양나라 가운데 임금님이 계십니다. 임금님이 만씨와 다른 점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혜왕이 말했다.
“다를 것이 없군요.”
대진인이 나가자 혜왕은 멍하니 넋을 잃고 있었다. 혜자가 들어오자 혜왕이 말했다.
“그 손님은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성인이라도 그보다 못할 것입니다.”
혜자가 말했다.
“피리를 불면 피리소리가 나지만, 칼자루 끝에 뚫린 구멍을 불면 바람 소리만 날 뿐입니다. 요와 순은 사람들이 칭송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요와 순을 대진인에게 비교하여 얘기하면 입에서 나는 바람 소리에 불과한 존재입니다.”
♣ 장자(잡편) 칙양 5 - 잘하는 말을 듣는 것조차 수치이다?
공자가 초나라를 가다가 의구산 아래 주막에서 묵었다. 그 때 그 이웃집의 하인 부부가 지붕에 올라가 있었다. 자로가 말했다.
“저기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공자가 말했다.
“그는 성인이면서 하인노릇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는 스스로 백성들 속에 자신을 묻고 밭 두렁 가에 자신을 숨기고 있어서 그의 명성은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그의 뜻은 한이 없는 사람이다. 그의 입은 비록 말하고 있으나 그의 마음은 말을 한 일이 없다. 또한 세상과 멀리 떨어져 그의 마음은 세상과 어울리려 하지 않고 있다. 그는 땅속에 잠기어 있듯이 숨어 지내는 사람이다. 그는 아마도 시남의료일 것이다.”
자로가 가서 그를 불러오겠다고 하니 공자가 말했다.
“그만두어라. 그는 내가 자기를 알아본 것을 알았고, 내가 초나라에 간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내가 초나라에 가서 초나라 임금에게 자기를 부르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는 또 내가 말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말 잘하는 사람의 말을 듣는 것조차도 수치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물며 직접 만나는 것이야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그런데 어찌 그대로 남아 있겠느냐?”
자로가 가서 보니, 이미 그의 방은 텅 비어 있었다.
♣ 장자(잡편) 칙양 6 - 자기 본성을 함부로 다루지 말아야 한다
장오의 경계를 지키는 사람이 자뢰에게 말했다.
“임금이 정치를 할 때는 거칠게 함부로 해서는 안되며, 백성을 다스림에는 소홀히 아무렇게나 해서는 안됩니다. 전에 내가 벼를 심어보니, 밭갈이를 대충 함부로 하니 벼이삭도 대충 내게 보답하고, 김매는 것을 대충하니, 벼이삭도 소홀히 아무렇게나 내게 보답을 했습니다. 다음 해에는 생각을 바꾸어 밭을 깊게 갈고 써레질을 잘했더니, 벼가 잘 자라 많은 이삭을 맺어, 일년 내내 실컷 먹을 수가 있었습니다.”
장자가 이 얘기를 듣고 말했다.
“요즘 사람들이 몸을 다스리고 건사함에 있어서는 대부분 이 경계를 지키는 사람이 말한 것과 비슷한 방법을 쓰고 있다. 사람들은 자연으로부터 도망을 치고, 그의 본성을 떠나 타고난 성정을 없애고, 그의 신명을 잃고서 여러 가지 세상일에 종사한다.
그러므로 그의 본성을 거칠게 함부로 다루는 사람은 욕망과 증오의 움이 터서 그의 성격을 이룬다. 갈대 같은 잡초들이 자라나 처음 싹이 틀 때에는 나의 몸에 도움을 줄 듯이 보이지만 곧 나의 본성을 뽑아버려, 위쪽은 무너지고 아래쪽은 새면서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모든 곳에 퍼져나간다. 그래서 종기와 부스럼이 생기고, 열병에 걸리고, 당뇨병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 장자(잡편) 칙양 7 - 백성들의 죄는 정치인의 책임이다
백구가 노자에게 배우고 있을 때 말했다.
“천하를 다니며 노닐 수 있게 허락하여 주십시오.”
노자가 말했다.
“그만두어라 천하도 이곳이나 같은 것이다.”
그러나 다시 요청하니 노자가 물었다.
“어디서부터 유람을 시작하겠느냐?”
백구가 말했다.
“제나라에서부터 시작하겠습니다.”
백구는 제나라로 가서 처형당한 시체를 보고는 바로 눕히고 자기의 예복을 벗어 그 시체를 덮어주고 하늘을 보며 통곡하여 말했다.
“아! 천하에는 큰 재난이 많은데 그대 홀로 먼저 당하였구나. 그대는 도둑질을 한 것은 아니었나? 살인을 한 것은 아니었나? 영예와 치욕을 따지게 된 뒤에야 고민이 생기는 것이다. 재물을 모으게 된 뒤에야 다툼이 생기는 것이다. 지금 세상에서는 사람들을 고민하게 하는 일들을 내세우고, 사람들을 다투게 하는 것을 모음으로써 사람들의 몸을 쉴 새도 없이 곤궁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그대와 같은 처지를 당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옛날의 임금들은 이득은 백성들에게 돌리고, 손실은 자기에게로 돌렸었다. 정당한 것은 백성들에게 돌리고, 비뚤어진 것은 자기에게로 돌렸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라도 자신에게 실수가 있을 때에는 물러나서 스스로를 책망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숨어서 일을 결정하고는 알지 못하는 자들을 우롱하며, 어려운 일을 하게 하고서 하지 못하는 자들을 벌준다. 무거운 임무를 맡겨 놓고 감당하지 못하는 자들을 처벌한다. 먼길을 가게하고 이르지 못하는 자들을 처형한다.
그리고 백성들의 능력과 지혜가 다하면 곧 허위로 일을 충당한다. 위정자가 날로 허위적인 일을 많이 하게 되면 백성들이 어떻게 허위의 일을 하지 않게 되겠는가? 힘이 부족하면 속이게 되고, 지혜가 부족하게 되면 자기를 놓게 되며, 재물이 부족하게 되면 도둑질을 하게 되는 것이다. 도둑질이 행해지는 것을 누구에게 책임을 물어야 되겠는가?”
♣ 장자(잡편) 칙양 8 - 지혜를 바탕으로 한 시비는 믿을 것이 못된다
거백옥은 나이 육십이 되는 동안 육십 번이나 태도가 바뀌었다. 처음에는 옳다고 했던 일도 나중에는 옳지 않은 일이라고 모두 부정했다. 지금 옳다고 생각하는 일들이 지난 오십구년 동안 부정했던 일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만물은 생존하고 있지만 그 근원을 볼 수는 없다. 만물은 사멸되고 있지만 사멸되어 가는 문은 볼 수가 없다. 사람들은 모두 그의 지혜로써 알고 있는 사실을 존중한다. 그러나 지혜로 알지 못하는 일에 의지해야만 지혜롭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니 크게 미혹되어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 이론도 결국은 그런 시비의 개념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른바 그런 대로 그렇게 지내야만 하는 것인가?
♣ 장자(잡편) 칙양 9 - 어째서 영공인가
공자가 태사인 대도, 백상건, 희위에게 말했다.
“위나라 영공은 술을 마시고 즐기는 것에 빠져 국가의 정치는 돌보지도 않았고, 사냥에 빠져 제후들과의 모임에도 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영공이라는 시호를 붙인 이유는 무엇입니까?”
대도가 말했다.
“그것은 바로 그래서입니다.”
백상건이 말했다.
“영공에게는 세 사람의 처가 있었는데 그들과 같은 욕조에서 목욕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추가 명을 받들어 임금이 있는 곳에 나올 때는 마중 나가 부축하여 주었습니다. 처들과는 터무니없는 짓을 하면서도, 현명한 사람을 만날 때는 그처럼 공경을 다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그에게 영공이란 시호가 주어진 까닭입니다.”
희위가 말했다.
“영공이 죽었을 때, 옛 무덤에 장사 지내려 하니 점괘가 불길하다고 나왔습니다. 모래 언덕에 장사 지내는 것이 길하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모래 언덕을 몇 길 파 내려가자 돌로 된 석관이 나왔습니다. 그 석관을 씻고 보니 다음과 같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자식은 의지할 만한 것이 못된다. 영공이 이 곳을 빼앗는다」
영공에게 신령스럽다는 의미의 영공이라는 칭호가 주어진 지 오래 되었습니다. 앞의 두 사람들이 어찌 이것을 알 수가 있겠습니까?”
♣ 장자(잡편) 칙양 10 - 여론이란 무엇인가
소지가 대공조에게 물었다.
“고을의 여론이란 무엇입니까?”
대공조가 말했다.
“고을이란 성이 다른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풍속을 형성하는 것이다. 각기 다른 요소들을 합쳐 같은 하나로 만든 것이기 때문에 같은 하나를 나누어 보면 각기 다른 것이 된다. 말 몸을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놓고서 말이라고 부르지는 않지만, 말이 우리 앞에 매여 있을 때 몸의 모든 부분이 합치되어 서 있기 때문에 말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덕과 산도 낮은 흙들이 쌓인 것들이 모여 높아진 것이며, 강물도 시냇물이 합쳐져서 커진 것이다.
그처럼 위대한 사람이란 모든 개인을 합쳐서 공(公)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밖에서 어떤 의견이 제시되면 자기의 다른 생각이 있다 해도 자기 생각에만 집착되지 않는다. 그리고 자기가 제시한 의견이 올바르다 해도 남의 의견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사계절은 각기 기후가 다르지만 하늘은 한편에만 치우치지 않기 때문에 한 해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섯 가지 관직은 직책이 서로 다르지만 임금이 어느 하나에만 치우치지 않기 때문에 나라가 다스려지는 것이다. 문인과 무인은 기능이 다르지만 위대한 사람은 한편으로 치우치지 않기 때문에 그의 덕이 완비되는 것이다. 만물은 이치가 서로 다르지만, 도가 사사로이 치우치는 일이 없기 때문에 이름 없는 무명의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다. 도는 무명이기 때문에 무위하다. 무위하지만 어떤 변화나 존재에도 참여하지 않는 것이 없다.
시간은 시작과 끝이 있고 세상에는 변화가 있다. 화와 복은 흘러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는 좋지 않은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좋은 일이 될 수도 있다. 모두가 제각기 따르는 성향이 다르기 때문에 한편에서는 바르다고 인정되는 것이 다른 한 편에서는 잘못된 것이 될 수도 있다. 커다란 늪지에 비교를 하면 갖가지 동식물이 한군데 어울려 살고 있는 것과 같다. 큰산에 빗대어 보면 나무나 바위들이 다 같은 터전 위에 놓여 있는 것과 같다. 이것을 고을의 여론이라 하는 것이다.”
♣ 장자(잡편) 칙양 11 - 말과 지혜로 추구할 수 있는 것은 도가 아니다
소지가 말했다.
“그렇다면 그것을 도라고 해도 되겠습니까?”
대공조가 말했다.
“그렇지 않다. 세상의 물건의 수를 따져 보면 만 가지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만물이라고 말하는 것은 숫자 중에서 많은 단위를 빌어서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하늘과 땅이라는 것은 형체 중에서 큰 것이며, 음과 양이라는 것은 기 중에서 큰 것이다. 도라는 것은 그것들 전체에 대해 공정히 작용하는 것이다. 그것의 위대함을 근거로 하여 그것을 도라고 부른다면 괜찮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도라는 이름을 지니게 되면 곧 다른 물건과 상대적인 것이 될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이 논한다면, 비유를 들면 여론과 도는 개와 말이나 같은 것이 되어 도의 진실함이 멀리 미치지 못하는 것이 된다.”
소지가 말했다.
“사방 천지 사이의 만물의 발생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입니까?”
대공조가 말했다.
“음과 양이 서로 작용하여 서로 해치기도 하고 서로 다스리기도 한다. 사계절이 서로 엇바뀌면서 서로 발생하게 하기도 하고, 서로 죽이기도 한다. 욕망과 증오와 버리고 취하는 생각들이 여기에서 문득 일어나, 암놈과 수놈이 결합함으로써 모든 것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안락과 위험이 서로 바뀌며, 화와 복이 서로 번갈아 발생하고, 더딘 것과 다급한 것이 서로 엇갈리며 모였다 흩어졌다 하는 현상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런 명분과 실태는 조리를 이룰 수도 있으며 그 정미한 작용은 기술할 수도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은 질서를 따라서 서로 다스려지며 운행의 오르내림에 의해 서로 작용을 하여, 궁해지면 되돌아오고 끝나면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이 만물이 지니고 있는 현상이다. 따라서 그것은 말로도 표현할 수 있고 지혜로도 추구할 수 있는 것인데, 물건의 현상을 정리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도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물건이 없어지는 것을 알려고 하지도 않고 물건이 생겨나는 근원을 따지지도 않는다. 이것은 논리로써 논할 수 없이 그만두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 장자(잡편) 칙양 12 - 주재자의 존재는 인간의 지혜로 알 수 없다
소지가 말했다.
“계진처럼 자연의 주재자가 없다는 사람과 첩자처럼 자연의 주재자가 있다는 사람이 있는데, 두 사람의 설 중에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진리입니까?”
대공조가 말했다.
“닭이 울고 개가 짖는 것은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일이다. 그러나 비록 위대한 지혜를 지녔다 해도 그것이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를 말로 설명할 수는 없다. 또 그것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것을 마음으로 추리할 수도 없는 것이다. 이런 현상을 분석해 나가면 지극히 정미한 경지에 이르게 되고, 크게는 한정지을 수 없는 정도에 이르게 된다. 그러니 주재자가 있다거나 주재자가 없다고 하는 이론은 물건의 현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어서 결국은 잘못된 것이다. 주재자가 있으면 작용이 실재적인 것이 되고, 주재자가 없다면 작용도 허무한 것이 된다.
따라서 이름이 있고 사실이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현상계에 집착되어 있기 때문이며, 이름도 없고 사실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현상계를 공허한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말로 표현할 수 있고 마음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이지만, 도란 말로 표현할수록 진실과는 더욱 멀어지는 것이다.
물건이 생겨나기 전에 생겨나지 못하도록 막을 수는 없는 것이며, 이미 죽어버린 것을 죽지 못하게 막을 수도 없는 것이다. 죽음과 삶은 우리로부터 멀리 있는 것이 아니지만 그 원리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주재자가 있다거나 주재자가 없다는 설은 결국 억측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내가 보건대 만물의 근본은 알아보려 해도 끝이 없는 것이다. 내가 추구해 보건대 만물의 종말은 오는 곳이 한정이 없는 것이다. 끝도 없고 한정도 없으니, 그것을 무로써 표현할 때 비로소 물건의 실리와 합치되게 되는 것이다. 주재자가 있다거니 없다거니 하는 것은 이론의 출발점으로써 만물과 더불어 영원히 부침할 것이다. 도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도라는 이름은 가정적으로 그렇게 불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주재자가 있고 없다는 것은 물건의 일단을 놓고 얘기하는 것이지, 어찌 자연의 위대한 도를 놓고서 말할 수 있겠는가? 도를 말로써 충분히 나타낼 수 있다면 하루종일 말하면 도를 형용해 낼 수가 있을 것이다. 도를 말로써 표현해 낼 수 없는 것이라면 하루 종일 말을 해도 물건에 대한 얘기에 그칠 것이다. 도란 물건의 극치이므로 말이나 침묵으로는 표현될 수 없는 것이다. 말도 아니고 침묵도 아닌 경지에서 그런 도의 극치는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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