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상/노장자

『莊子』의 形神論에 대한 고찰

rainbow3 2019. 12. 6. 23:29


『莊子』의 形神論에 대한 고찰


이 재 봉 (부산외대 영상미디어학과 교수)



1. 머리말

2. 形心論과 形神論

   1) 形心論

   2) 形神論

3. 形精論과 形德論

   1) 形精論

   2) 形德論

4. 맺음말



<국문 요약>


『장자』에서는 한편으로는 外生을 이야기하고 遺生을 이야기하여 생명을 버릴(잊어버릴) 것을 주장하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養生을 이야기하고 長生을 이야기하고 있다. 『장자』가 버리고자 하는 생명은 어떤 것이며, 기르고 지속시키고자 하는 생명은 어떤 것인가? 다시 말해『장자』에서 말하는 생명의 실상은 무엇인가?


우리는『장자』에서 인간생명을 표현하는 여러 방식을 확인할 수 있다. 形心론, 形神론, 形德론, 形精론 등이 그것인데, 여기서 생명의 본질적 요소는 心, 神, 德, 精 등이다.

形心론은『장자』전 편에 걸쳐 등장하는데, 따라서『장자』시대에 일반적인 생명 이해라 할 수 있다. 하지만『장자』에서 心은 形과 더불어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것은 心의 작용이 흔히 形을 포함한 인간적 특수성에 사로 잡히기 때문이다. 따라서 形心론 이외에 인간생명에 대한 다른 설명방식이 필요하게 된다. 形神론은『장자』 <외⋅잡편>에 등장하는데, 따라서『장자』 전체에서 보면 그것은 形心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제시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장자』에는 생명의 본질, 실체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形精론과 形德론이 등장한다. 精과 德은 생명의 본질, 실체에 대한 탐색의 결과로서 養生의 실질적 대상이 된다.


形神론의 神은 철학적 사유의 등장에 의하여 격하되었던 원시적, 종교적 神 관념이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재등장한 것이다. 과거 천지만물을 지배한다고 여겨지던 神이 철학의 시대에 이성적 사유에 의해 극복되었다가, 道, 氣 관념을 바탕으로 생명의 실체이며 의식작용의 주체인 神으로 다시 등장한 것이다. 다시 말해 종교적 神(혹은 天) 관념을 극복한 결과 유가(孔孟)에서처럼 인간의 心이 강조되었으나, 도가에서는 인간의 한계를 지적하면서 心이 다시 극복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 결과『장자』에서는 인간적 한계를 넘어 우주적 생명에 동화되는 생명의 본질적 요소로서 神 관념을 사용하게 된 것이다. 이때 神은 만물의 근원적 생명력(생명에너지)인 精(精氣) 혹은 德 관념을 기초로 하며, 모든 생명활동의 기초가 된다.

形神론의 神 관념이 心, 精, 德 관념을 모두 포섭하고 있음은 神의 다른 표현인 神明과 精神 개념을 통해 잘 드러난다. 이와 같이『장자』의 形神론은 인간 생명을 우주적 차원에서 이해함으로써『장자』에서 지향하는 절대적 자유 혹은 생명의 지속을 추구하는 데 유효한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였다.


주제어: 莊子, 形神, 德, 精, 神.



1. 머리말


구체적인 생명요소를 가지고 이야기하면, 『장자』에서 우리는 形心론, 形神론, 形精론, 形德론 등의 생명관을 확인할 수 있다. 1] 위 네 가지 구분에서 形은 공통적이므로 실제 생명을 설명하는 데 있어 관건이 되는 개념은 心, 神, 精, 德이다. 『장자』에는 外生, 遺生의 관념도 등장하고, 2] 養生, 長生의 관념도 등장하는데,3]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기를 것인가 하는 것은 곧 위 개념들이 인간생명의 본질을 얼마나 잘 설명하고 있느냐 하는 것과 관련된다. 따라서 形心론, 形神론, 形精론, 形德론 등의 구분이 다소 억지스러울 수도 있지만, 나누어서 살펴보고 다시 합쳐서 살펴보는 작업은『장자』의 생명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이야기하면『장자』에서 대표적인 생명관은 形心론과 形神론이다. 전자는『장자』전 편에 걸쳐 등장하고 후자는 <외⋅잡편>에 등장하므로, 形心론은『장자』당시 일반적인 생명관이며, 形神론은 形心론보다 나중에 등장한 것이며『장자』의 특징적인 생명관이라 할 수 있다. 달리 이야기하면 心은『장자』에서 많은 경우 극복의 대상으로 간주되므로 形神론은 形心론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한, 『장자』의 대표적 생명관이라 할 수 있다.


한편『장자』에서 추구하는 것이 결국 정신적 자유라고 한다면 形心론으로 충분할 수도 있다. 하지만 養生을 이야기하면 생명의 실체에 관해 이야기해야 한다. 形精론과 形德론은 이러한 맥락에서 제시된 것이다.

『장자』에서는『老子』를 계승하여 道를 천지만물의 근원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생명도 당연히 道와 德을 가지고 설명한다. 이때 德은 생명의 원리로서의 道가 구체적으로 작용하는 힘, 곧 생명력으로, 생명체는 德을 가짐으로써 생명현상을 유지할 수 있다.『老子』에서 생명의 기초는 또한 精으로 표현되는데 그것은 氣의 특수 상태로 이해될 수 있다.『장자』에서도 역시 생명의 실체로서 精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德을 得으로 이해할 때 德은 곧 精을 얻은 것이다. 따라서 생명의 본질은 精 혹은 德이 된다. 形精론과 形德론은 <내편>에서부터 그 원형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 둘은 최종적으로 形神론으로 마무리되었다. 그것은 精과 神의 관계, 德과 神의 관계에 대한 고찰을 통하여 확인될 것이다.


본문에서는 形心론과 形神론, 形精론과 形德론으로 나누어 살펴볼 것인데,4] 결국은 形心론, 形精론, 形德론이 모두 形神론으로 귀결되고 있음을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1]이 글에서 形心론 등으로 분류한 것은『장자』의 원문 가운데 한 문장 안에서 形과 心, 形과 神, 形과 精, 形과 德이 함께 사용된 경우들이다. 形心론은『장자』전 편에 걸쳐 등장하고, 形神론은 <외⋅잡편>에서 등장하며, 形精론은 <외편>에서, 形德론은 <내편>에서 확인할 수 있다.

2]“九日而後能外生”(「大宗師」), “遺生則精不虧”(「達生」)(『莊子』의 인용은 편명만 표시)

3]“吾聞庖丁之言, 得養生焉.”(「養生主」), “善養生者, 若牧羊然, …”(「達生」), “…, 非所以完身養生也.”(「讓王」), “…, 乃可以長生.”, “…, 形乃長生.”(「在宥」), “…, 所以長生安體樂意之道也.”(「盜跖」)

4]곧 心과 神의 관계, 精⋅德과 神의 관계를 살펴보는 순서가 될 것이다.



2. 形心論과 形神論


1) 形心論


形心론은『장자』전반에 걸쳐 확인할 수 있는데, 먼저 <내편>에서 사용된 예는 다음과 같다.


① 形은 마른 나무와 같고, 心은 식은 재와 같아질 수 있는가? 5]

② 形이 점차 쇠락해지면 心도 따라서 그렇게 되니 크게 슬프지 않은가? 6]

③ 形(몸가짐)은 공손한 것이 가장 좋고, 心은 和順한 것이 가장 좋다. 7]

④ 形의 변화가 있어도 心의 손상은 없고, … 8]

⑤ 形을 힘들게 하고 心을 괴롭히는 것이다. 9]

5]「齊物論」: “形固可使如槁木, 而心固可使如死灰乎?”

6]上同: “其形化, 其心與之然, 可不謂大哀乎?”

7]「人間世」: “形莫若就, 心莫若和.”

8] 「大宗師」: “且彼有駭形而无損心, 有旦宅而无情死.” 『淮南子⋅精神訓』에서는 “有戒形而無損於心, 有綴宅而無耗精;”이라 하였다.

9] 「應帝王」: “是於聖人也, 胥易技係, 勞形怵心者也.”


<외⋅잡편>에서 形心의 구분을 사용한 경우는 다음과 같다.


⑥ 形을 힘들게 하고 心을 괴롭히는 것이다. 10]

⑦ 저는 군주께서 形을 벗어버리고 가죽[皮]을 제거하며, 心을 깨끗이 하고 욕심을 제거하여 아무도 없는 들판에서 노닐기를 바랍니다. 11]

⑧ 形은 마른 해골과 같고 心은 식은 재와 같아, 참된 지식에 근거하고 자신의 생각에 집착하지 않는다. 12]

⑨ 사물을 갖추어 形을 기르고, 근심을 담아두지 않아 心을 기르며[生心], 안으로 조심하여 바깥 일을 처리한다. 13]

⑩ 形은 마른 해골같이 될 수 있고, 心은 식은 재같이 될 수 있는가? 14]

⑪ 지금 사람들이 그 形을 다스리고, 그 心을 다스리는 것은 … 15]

⑫ 心을 힘들게 하고 形을 피로하게 함으로써 ‘생명의 본래 상태’[眞]을 위태롭게 한다. 16]

10]「天地」: “是胥易技係, 勞形怵心也.”

11]「山木」: “吾願君刳形去皮, 洒心去欲, 而遊於无人之野.”

12] 「知北遊」: “形若槁骸, 心若死灰, 眞其實知, 不以故自持.”

13]「庚桑楚」: “備物以將形, 藏不虞以生心, 敬中以達彼.”

14] 「徐无鬼」: “形固可使若槁骸, 心固可使若死灰乎?”

15]「則陽」: “今人之治其形, 理其心, 多有似封人之所謂, 遁其天, 離其性, 滅其情, 亡其神, 以衆爲.”

16]「漁父」: “苦心勞形以危其眞.”



이상이 『장자』에 등장하는 形心론의 용법들인데, 그것들을 유형에 따라 분류해보면 다음과 같다. ②, ③, ⑤, ⑥, ⑪, ⑫은 일반적인 心身론에 해당한다. ⑧, ⑩은 ①을 옮겨 적은 것인데, 形과 心을 제거(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본 것으로 形心론의 대안으로 形神론이 등장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된다. ⑦도 같은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⑨는 養生의 대상으로 形心을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形神론과 통할 수 있다. ④는 形이 사라져도 心이 지속될 수 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으므로 전통적인 영혼불멸의 사고를 계승한 것이고, 또한 形神론으로 연결될 수 있다.


「庚桑楚」에서는 形과 心 대신에 身과 心이라는 표현도 사용하고 있다.


"어린아이는 움직여도 무엇을 하는지 모르고, 가도 어디로 가는지 모르니, 身은 마른 나무 가지와 같고 心은 식은 재와 같다. " 17]

17] 「庚桑楚」: “兒子動不知所爲, 行不知所之, 身若槁木之枝而心若死灰.”


여기서 心身론은 위의 ①, ⑧, ⑩과 같은 내용이다.

形, 身은 일차적으로 형체, 신체를 가리킨다. 유가에서는 개인적 완성과 사회적 실천을 위해 도덕의 실천을 통한 修身을 이야기하고, 修身의 주체로서 心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신체에 대해서는 특별한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18] 이에 비하여 도가에서는 생명의 유지와 확장을 강조하고 신체를 생명의 기초적 부분으로 긍정하였다.19] 따라서 形과 心을 함께 나열하였는데, 곧 形에 일정한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다시 말해 유가에 비하면 形의 유지, 곧 養形의 정당한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장자』의 養生은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 한편으로는 養形을 긍정하면서 한편으로는 養形을 넘어서는 것이다. 이것이 곧 우리가『장자』의 생명관을 살펴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장자』에서는 몸을 가리키기 위하여 形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가?

그것은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다.『老子』에서부터 강조된 有와 無의 관계에서 形은 有의 영역을 나타내는 기본적인 징표가 된다.20] 有, 곧 有形의 것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유한한 것이다. 따라서 신체적 생명의 한계를 인정해야 한다. 한편 形은 身에 비하여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천지만물)에 대해 보편적으로 쓸 수 있는 용어가 된다. 그 효과는 신체를 대상화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체를 중심으로 한 개체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달리 말하면『장자』에서는 생명을 인간을 넘어서 우주적 차원으로 확장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또한 보통 身이라고 할 때는 자신, 개인이라는 의미를 가지므로 形과 心을 포괄한다. 다음 구절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18]孔孟에서 身이라 할 때는 개체(개인), 자신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몸을 이야기할 때는 體, 四肢 등으로 표현하였다.

19]『老子⋅44』: “名與身孰親? 身與貨孰多?”

20]無는 곧 無形이고 無名이며 無物이다.



"경계하고 조심하여 그대 자신[身]을 바르게 할지니라. 形은 공손함만 못하고, 心은 화순함만 못하다. " 21]

21] 「人間世」: “戒之, 愼之, 正汝身也哉! 形莫若就, 心莫若和.”


여기서 形은 곧 몸가짐이다. 「盜跖」편에서는 體와 心의 구분도 등장한다.


"질병과 안일은 體로부터 기원하는 것이 아니고, 두려움과 기쁨은 心으로부터 기원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하는지는 알지만 왜 그렇게 하는지는 모른다. --- 聲色滋味權勢에 대하여 心은 배우지 않아도 즐거워하고, 體는 모방하지 않아도 편안하게 여긴다. " 22]

22]「盜跖」 : “慘怛之疾, 恬愉之安, 不監於體; 怵惕之恐, 欣懽之喜, 不監於心; 知爲爲而不知所以爲, 是以貴爲天子, 富有天下, 而不免於患也. … 且夫聲色滋味權勢之於人, 心不待學而樂之, 體不待象而安之.”


위에서 살펴본『장자』形心론의 용법들에서 形은 형체(신체)와 감각작용 등을 가리키고, 心은 의지, 욕망, 감정, 사유, 지식 등을 가리킨다. 일반적인 분류법에 따르면 心은 欲⋅情⋅知 혹은 知⋅情⋅意를 포괄한다.

心은 形의 세계를 초월하는 방향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23] 기본적으로는 形의 세계에 예속되는 성격을 가진다. 心이 形 혹은 이에 대응하는 物의 차원에서, 그것들을 위하여 발휘될 때는 극복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장자』 形心론의 기본적 성격이다. 물론 그 내용이 유가식의 인간 중심적, 사회적 성격을 가진 것일 때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장자』의 形心론을 대표하는 의미는 거듭 등장하는 “形은 마른 나무와 같고 心은 식은 재와 같다”는 말이 되고, 그 의미는 곧 감각작용과 사유작용이 멈추는 것이고, 형체를 중심으로 한 개체의식이 사라지는 것이다. 「大宗師」편에서 ‘外生’이라고 할 때 生의 내용이다. 24]


이와 같이 생명을 이야기할 때 形은 기본적으로 유한의 세계에 속하므로 극복되어야 한다면, 따라서 形을 위해 발휘되는 心도 역시 극복의 대상이 된다면, 생명의 본질적 요소로서 남는 것은 무엇인가?

보통의 경우 心은 기본적으로 기능과 작용이라는 의미를 가지므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의 실체가 필요하다. 『장자』에 의하면 그러한 생명의 실체는 바로 精, 德, 神이다.

 따라서 우리는 形精론, 形德론, 形神론 등을 이야기할 수 있는데, 그 출현순서를 가지고 이야기하면 形德론, 形精론이 形神론보다 앞선다고 볼 수 있지만, 形神론을 먼저 서술한 다음 形精론과 形德론을 서술함으로써 神 개념이 精, 德 개념을 어떻게 포섭하고 있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23]遊心이라고 쓴 경우가 그러하다.

“且夫乘物以遊心, 託不得已以養中, 至矣.”(「人間世」),

“夫若然者, 且不知耳目之所宜而遊心乎德之和;”(「德充符」),

“汝遊心 於淡, 合氣於漠, 順物自然而無容私焉, 而天下治矣.”(「應帝王」),

“吾遊心於物之初.”(「田子方」),

“知遊心於無窮, 而反在通達之國, 若存若亡乎?”(「則陽」)

다음의 경우에는 遊心이 다른 의미를 가진다.

“騈於辯者, 纍瓦結繩竄句棰辭, 遊心於堅白同異之閒, 而敝跬譽無用之言非乎?”(「騈拇」)

24]「大宗師」: “已外物矣, 吾又守之, 九日而後能外生.”



2) 形神論


『장자』에서 形神론은 <외⋅잡편>에서 등장한다. 먼저 「在宥」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며, 神을 지켜[抱神] 고요하면 形이 저절로 바르게 된다.

반드시 고요하고 맑아, 形을 힘들게 하지 말고 精을 흔들지 않으면 장생할 수 있다.

눈으로는 보는 것이 없고, 귀로는 듣는 것이 없으며, 心으로는 아는 것이 없게 하여, 神이 形을 지키면 形이 장생한다. " 25]

25] 「在宥」: “无視无聽, 抱神以靜, 形將自正.

必靜必淸, 无勞汝形, 无搖汝精, 乃可以長生.

目无所見, 耳无所聞, 心无所知, 汝神將守形, 形乃長生.”


이 구절의 종착지는 形의 長生이다. 形은 장생할 수도 있고 장생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形이 아니다. 形 자체가 곧 生이 아니라면, 生은 形에 무엇이 더해져야 한다는 말이 된다(形과 生의 관계는 뒤에서 다시 언급한다). 따라서『장자』에서는 養生을 이야기하면서 養形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문장에서 생명(생명현상)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바로 神(혹은 精)이다. 「德充符」에서는 形과 ‘形을 부리는 것’[使其形者]을 구분하였는데,26] ‘形을 부리는 것’이 곧 神이다.


위 인용문에서는 먼저 神과 形을 상대시키고 있다. 고요하면 형체는 저절로 바르게 된다고 하였는데, 고요한 것은 곧 神이 움직이지 않는 것인데, 구체적으로는 耳目과 心이 작용하지 않는 것이다. 耳目과 心의 작용은 곧 神의 작용이다. 「德充符」에서 말하는 外神 27] 은 곧 대상을 향해 耳目과 心이 작용하는 것이다.

抱神의 抱는 중요한 것을 지키고 간직하는 것이다. 抱神하는 이유는 神이 생명의 본질, 중심(유지력)이기 때문이다.


그 다음 形과 精을 상대시키는 부분은 다음 장(形精론)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神이 形을 지키면[守] 形이 장생한다고 하였는데, 神이 形을 지킨다는 것은 神이 形을 통제한다는 것과 神이 形을 떠나지 않는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長生은 곧 神과 形이 함께 있어야 한다. 28]

神이 形을 떠나면 形은 소멸한다(비록 形이 남아 있어도 생명현상을 발휘하지 못한다). 神이 形을 통제하는 부분은 見⋅聞⋅知가 없게 하는 것, 곧 耳⋅目⋅心이 작용하지 않는 것이다. 29]

耳⋅目⋅心은 곧 形과 心이다. 따라서 神은 形과 心을 넘어서는, 혹은 形과 心의 작용의 기초가 되는 생명력이다. 이와 같이 神은 생명의 존재와 활동의 근간이 된다.

 

25]「在宥」: “无視无聽, 抱神以靜, 形將自正. 必靜必淸, 无勞汝形, 无搖汝精, 乃可以長生. 目无所見, 耳无所聞, 心无所知, 汝神將守形, 形乃長生.”

26] 「德充符」: “仲尼曰: ‘丘也嘗使於楚矣, 適見㹠子食於其死母者, 少焉眴若皆棄之而走. 不見己焉爾, 不得類焉爾. 所愛其母者, 非愛其形也, 愛使其形者也.’”

27]「德充符」: “今子外乎子之神, 勞乎子之精,”

28]「天地」편에서는 ‘形體保神’이라 하였다. “形體保神, 各有儀則, 謂之性.”

29]形心론에서 버려야 할 것으로 간주되는 形과 心은 결국 聰明과 知로 대표되는 인지작용들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위 인용문을 통해 볼 때 形神론이 形心론을 대체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天地」편에서는 또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대가 장차 神氣를 잊어버리고, 形骸를 떨쳐버리면 거의 (도에) 가깝게 될 것이다. " 30]

30] 「天地」: “汝方將妄神氣, 墮汝形骸, 而庶幾乎!”


여기서는 神氣와 形骸를 상대시켰는데, 역시 形神 이분법에 속한다. 神을 神氣로 쓴 것은 形을 形骸로 쓴 것에 대응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아울러 神과 氣의 관계를 직접 표명하고 있다.

『장자』에서 形骸는 또한 形體, 形軀로 쓰이고 있다.31] 神은 또한 神明, 精神으로 쓰이는데,32] 明, 精, 氣는 곧 神의 속성 및 특징을 나타낸다.


이곳에서 神氣는 形骸와 더불어 모두 버려야 할(妄=忘, 墮) 대상이 된다.

그렇다면『장자』에서 주장하는 守神, 養神 관념 33] 에 위배되지 않는가? 따라서 이때의 神氣는 「大宗師」편의 “墮肢體, 黜聰明, 離形去知” 34] 의 경우처럼 버려야 할 聰明, 知에 대응하는 것인데, 구분하자면 神氣는 聰明, 知 작용의 기초가 되는 것이다. 35] 곧 위의 「在宥」편 인용문에서 말한 耳目과 心의 작용이다.

『장자』의 氣론에 따르면 모든 생명활동의 기초는 氣인데,36] 神氣라고 할 때에는 氣가 모든 생명활동(특히 의식활동)의 기초가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31]“墮爾形體, 黜爾聰明, 倫與物忘;”(「在宥」), “形體保神, 各有儀則, 謂之性.”(「天地」),

“齊七日, 輒然忘吾有四枝形體也.”「達生」), “向者先生形體掘若槁木, 似遺物離人而立於獨也.”(「田子方」),

“頌論形軀, 合乎大同, 大同而无己, 無己, 惡乎得有有!”(「在宥」), 「“汝得全而形軀, 具而九竅, 无中道夭於聲盲跛蹇而比於人數, 亦幸矣, 又何暇乎天之怨哉!”(達生」)

32]神明은 총 6회 등장한다.

“勞神明爲一”(「齊物論」), “合彼神明至精”(「知北遊」), “配神明 … 稱神明之容.”, “澹然獨與神明居”, “神明往與!”(「天下」)

精神은 <외⋅잡편>에서 총 7회 등장한다.

“而況精神!”(「天道」), “精神四達並流”(「刻意」), “懆雪而精神 … 精神生於道”(「知北遊」), “敝精神乎蹇淺, … 歸精神乎无始而甘瞑乎无何有之鄕.”(「列禦寇」), “獨與天地精神往來而不敖倪於萬物.”(「天下」) 「天地」편에서는 神生이라는 표현도 보이는데(“純白不備, 則神生不定; 神生不定者, 道之所不載也.”), 보통 神性으로 해석된다.

 純白과 神生을 魄과 魂으로 풀이한 경우도 있다.

“‘純白’卽純然之魄, 全然完整之魄, 魄貴守一不散, 故云‘純白’; ‘神生’卽魂, 魂貴栖止于形体, 也卽貴‘定’(定, 止也); 魄不守一則魂不定, …”(國光紅, 「殷商人的魂魄观念」, 『中華文物』, 1994年第3期, 15쪽)

33] 「刻意」: “純粹而不雜, 靜一而不變, 惔而无爲, 動而天行, 此養神之道也. … 純素之道, 唯神是守.”

34]「在宥」편에서는 “墮爾形體, 黜爾聰明, 倫與物忘”이라 하였다.

35]成玄英은 聰明의 작용이 실은 心에 속한다 하였다. “雖聰屬於耳, 明屬於目, 而聰明之用, 本乎心靈.”(『莊子集釋』上, 285쪽)

36]다음의 표현들을 통해 氣가 생명 혹은 생명작용의 기초임을 알 수 있다.

“無聽之以耳而聽之以心, 無聽之以心而聽之以氣.”(「人間世」), “汝遊心於淡, 合氣於漠,”(「應帝王」),

“雜乎芒芴之間, 變而有氣, 氣變而有形, 形變而有生,”(「至樂」), “人之生, 氣之聚也;”(「知北遊」),

“欲靜則平氣, 欲神則順心,”(「庚桑楚」)



「徐无鬼」편의 다음 구절에서 우리는 形神론을 단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군주의 神과 形을 위로하려는 것입니다.

… 군주께서는 큰 나라의 주인이 되어 한 나라의 민중을 괴롭게 하여 이목구비를 기르지만, (군주의) 神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무릇 神은 和를 좋아하고 姦을 싫어하는데, 姦은 곧 병이므로 위로드리는 것입니다. " 37]

37]「徐无鬼」: “曰: 勞君之神與形.

… 君獨爲萬乘之主, 以苦一國之民, 以養耳目鼻口, 夫神者不自許也.

夫神者, 好和而惡姦; 夫姦, 病也, 故勞之.” 勞는 慰勞, 慰問의 뜻이다.


‘이목구비를 기르는 것’은 곧 養形이다. 구체적인 생명은 形과 神을 포괄하지만 그 중심이 되는 것은 神인데, 따라서 그 생명활동이 神의 본질적 속성에 위배되면 養神하지 못한 것이다. 養形은 했으나 養神하지 못하면 곧 養生하지 못한 것이고, 병이 난 것이다.

神은 왜 和를 좋아하는가? 그것은 神의 기초가 氣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기초는 生氣이고, 生氣는 곧 和氣이다.38] 和는 살리는 것이고, 姦은 다투는 것이다. 「人間世」편에서는 心의 和를 강조하였는데,39] 心은 神의 작용이다.


37] 「徐无鬼」: “曰: 勞君之神與形. … 君獨爲萬乘之主, 以苦一國之民, 以養耳目鼻口, 夫神者不自許也. 夫神者, 好和而惡姦; 夫姦, 病也, 故勞之.” 勞는 慰勞, 慰問의 뜻이다.

38]老⋅莊에서 和를 언급한 구절들은 다음과 같다.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老子⋅42』),

“至陰肅肅, 至陽赫赫; 肅肅出乎天, 赫赫發乎地; 兩者交通成和而物生焉.”(「田子方」),

“若正汝形, 一汝視, 天和將至; 攝汝知, 一汝度, 神將來舍.”, “生非汝有, 是天地之委和也.”(「知北遊」)

39]「人間世」: “正汝身也哉! 形莫若就, 心莫若和.”



한편 「知北遊」에서는 形과 精神으로 구분하였다.


"밝음[昭昭]은 어두움[冥冥]에서 생기고 질서[有倫]는 無形에서 생기며, 精神은 道에서 생기고 形은 精에서 생겨서, 만물은 形으로써 서로 낳는다. "40]

40]「知北遊」: “夫昭昭生於冥冥, 有倫生於无形, 精神生於道, 形本生於精, 而萬物以形相生, 故九竅者胎生, 八竅者卵生.”


精神과 形을 상대시키고 있으므로 곧 形神론이다. 그 각각의 근원으로 道와 精을 이야기하고 있다. 형체와 정신, 곧 몸과 마음의 근원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식적이다. 앞에서 인용한 「在宥」편의 구절에서(각주 25) 神과 形, 形과 精의 구분이 있었던 것처럼 여기서도 精神과 形, 形과 精의 구분이 있다. 곧 精神과 精이 함께 등장한다. 이때 精神과 精은 아무래도 구분되는 것이라 해야 할 터인데, 精을 神이라 하면 形이 곧 神에서 나온다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形과 精의 관계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한다.


神을 精神이라 한 것은 (神氣와 더불어) 神의 존재적 특징을 나타낸 것이다. 精은 존재의 깊은 차원(미세한 존재), 작용의 정미함 등 다의적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곧 존재론적 성격과 기능론적 성격을 함께 나타낼 수 있다. 精神이라 말하는 것은 有에서 無, 거친 것에서 미세한 것으로 들어갈 때 (인간의) 神은 아주 미세한 존재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고, 그 작용에 있어서는 아주 미세한 것(有形을 넘어서는 것, 有形 이전의 것)을 인식할 수 있는 41] 능력을 가진다는 것이다(물론 有形의 세계를 인식하는 것도 神의 작용이다).

후자의 의미는 기본적으로 神明이라는 개념을 통해 잘 드러난다.42] 위 인용문에서 “精神이 道에서 생긴다”는 말은 그 앞의 “밝음[昭昭]은 어두움[冥冥]에서 생긴다”는 말의 다른 표현인데, 곧 精神이 밝음과 관계되어 神明과 같은 의미를 가짐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장자』에서 단일 문장 속에 形과 神이 함께 등장하는 形神론에 대해 살펴보았다.

形神론은『장자』의 생명론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앞에서 언급했듯이 形心론은『장자』전 편에 걸쳐 등장하고, 形神론은 <외⋅잡편>에서 등장한다. 그렇다면 形神론이 形心론에 비하여 더 나중에 등장한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왜 形神론이 필요한가? 心과 神의 관계에서 神은 그 존재적 의미에서는 心의 기초가 되고, 그 인식작용이라는 의미에서는 心을 넘어서는 것이 된다.

『장자』에는 靈府, 靈臺 등의 개념이 등장하며,43] 그것들은 인간생명에 대한 원시적 사유의 흔적이라 할 수 있는데, 곧 몸 속에 영혼이 머무는 공간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때 靈(魂)은 곧 心이 작용하는 기초가 되는데, 形神론에서는 神이 곧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때 神은 원시적 영혼(혼령) 개념에 비해 (天地)神明 혹은 天地精神과 동격이 될 수 있는 격상된 개념으로 이해된다.


이와 같이 形神론의 神은 존재와 기능(생명활동)의 측면에서 생명의 실체가 되는데, 『장자』에서 생명의 실체에 대한 또 다른 논의는 精과 德에 대한 관념에서 나타난다. 다음에서는『장자』에 나타나는 形精론과 形德론이 어떻게 形神론과 연결되는지 살펴보도록 한다.


40]「知北遊」: “夫昭昭生於冥冥, 有倫生於无形, 精神生於道, 形本生於精, 而萬物以形相生, 故九竅者胎生, 八竅者卵生.”

41]“神之又神而能精焉.”(「天地」), “見小曰明, 守柔曰强.”(『老子⋅52』)

42]『장자』에서 神明의 의미는 拙稿 「『莊子』의 神明에 대한 고찰」(『대동철학』제49집)에서 살펴본 바 있다.

43] 「德充符」: “故不足以滑和, 不可入於靈府.”, 「達生」: “工倕旋而蓋規矩, 指與物化, 而不以心稽, 故其靈臺, 一而不桎.”, 「庚桑楚」: “不足以滑成, 不可內於靈臺. 靈臺者有持, 而不知其所持, 而不可持者也”



3. 形精論과 形德論


1) 形精論


『장자』에서 처음 精神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으며, 따라서『장자』에 등장하는 精이라는 단어들에 대해 흔히 精神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이 글에서는『장자』에서 精을 단독으로 사용하고 있는 경우 일단 神과 구분하여 그 의미를 추적해보고자 한다. 그 근거는 精神이라는 단어가 아직 등장하지 않는 <내편>에서 다음과 같이 神과 精을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44]


"道가 모습[貌]을 주고, 天이 形을 주었으니, 好惡의 감정을 가지고 안으로 자신을 상하게 해서는 안 된다. 지금 그대는 그대의 神을 밖으로 나가게 하고 그대의 精을 피로하게 하며, 나무에 기대어 읖조리고 책상에 기대어 잠이 든다." 45]


成玄英은 神과 精을 각각 神識과 精靈으로 풀이하였다.46] 그것을 둘 다 形을 넘어선 의식의 영역으로 본 것이다. 하지만 精과 神의 관계를 체와 용의 관계로 해석하면, 이 말은 의식활동이 많으면[外神] 생명력이 소모된다[勞精]는 것으로, 精은 神의 활동기초가 된다. 形과 神을 포괄하는 생명, 달리 말해 육체적 활동과 정신적 활동을 포괄하는 생명활동의 공통기초가 되는 생명력이 바로 精이다.47] 이러한 精을 소모한 결과 ‘잠들게’[瞑] 48] 되는 것이다.


44]<내편>에서는 비록 神과 精을 분리하여 다른 의미로 이해하고 있다 하더라도, <외⋅잡편>에서 精神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는 精을 神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45] 「德充符」: “道與之貌, 天與之形, 無以好惡內傷其身. 今子外乎子之神, 勞乎子之精, 倚樹而吟, 據(槁)梧而瞑. 天選之形, 子以堅白鳴!” 貌와 形에 대하여 成玄英은 相貌와 形質로서 같은 뜻으로 풀이하고, 呂惠卿은 動作威儀와 六骸九窺로, 阮毓崧은 視聽言動과 五官百骸로 풀이한다.(崔大華, 『莊子岐解』, 212쪽 참조)

46] 『莊子疏』: “疏外神識, 勞苦精靈. … 是以形勞心倦,”

47]成玄英도 위 각주에서처럼 ‘形勞心倦’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 精은 곧 形心의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력이다.

48]宣穎은 瞑을 잠드는 것으로 해석하는 데 반대하였다. “倚樹而吟, 高歌也; 据槁梧而瞑, 琴瑟嫻熟, 效瞽師之不用目. 二句言惠以技能自衒也. 旧解作睡眠, 可笑.”(崔大華, 『莊子岐解』, 213쪽 재인용)



形心론에서 形神론으로 넘어가는 것은 결국 생명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인간생명의 본질, 실체는 무엇인가? 『장자』에서 우리는 形과 生을 구분하는 언급들을 확인할 수 있는데, 形과 生을 구분하는 것은 形 이외에 생명의 실체, 본질적 요소가 따로 있다는 말이 된다. 「達生」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生의 실상[生之情]에 통달한 사람은 生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은 하지 않는다.

… 形을 기르려면 반드시 먼저 物이 있어야 하지만, 物이 여유가 있어도 形을 기르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生이 있으려면 반드시 形이 있어야 하지만(形을 떠나서는 안 되지만), 形이 있어도(形을 떠나지 않았지만) 生이 없는(사라진) 경우가 있다.

… 세상사람들은 形을 기르면 족히 生을 보존할 수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形을 기르는 것이 生을 보존하는 데 부족하다면 … " 49]

49] 「達生」: “達生之情者, 不務生之所无以爲;

 養形必先之以物, 物有餘而形不養者有之矣; 有生必先无離形, 形不離而生亡者有之矣.

 … 世之人以爲養形足以存生; 而養形果不足以存生, 則世奚足爲哉! 雖不足爲而不可不爲者, 其爲不免矣.”


‘生의 실상’을 이야기하는 것은 곧 생명의 본질적 요소가 무엇인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形의 기초, 곧 形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物인데, 物은 形의 유지를 위한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그리고 形은 生의 필요조건이지만 충분조건은 아니다. 이와 같이 養形만으로 生을 유지할[存生] 수 없다면, 生은 形에 무엇이 더해져야 하는가? 위 인용문의 뒷 부분 문장에 의하면 形 이외에 生을 보증하는 것은 곧 精이다.


"일을 버리면 形이 피로하지 않고, 生을 버리면(生에 집착하지 않으면) 精이 훼손되지 않는다. 形이 온전하고 精이 회복되면[形全精復] 하늘과 하나가 된다.

… 形과 精이 훼손되지 않으면[形精不虧] 능히 생명을 지속할 수 있다[能移]. " 50]

50]上同: “棄事則形不勞, 遺生則精不虧. 夫形全精復, 與天爲一. 天地者, 萬物之父母也, 合則成體, 散則成始.

形精不虧, 是謂能移.”


‘形全精復’, ‘形精不虧’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形과 精이 인간생명의 두 구성요소들이며, 이 두 가지가 다 온전해야 생명을 온전하게 유지한 것이 된다는 ?장자? 양생사상의 기본방향을 알 수 있다.51]

形과 精 가운데 비록 생명의 핵심은 精이지만 그것을 담는 그릇으로서의 形 혹은 그것을 표현하는 도구로서의 形이 있어야만 비로소 인간생명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이와 같이『장자』에는 形과 精을 가지고 생명을 설명하는 경우를 여러 곳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곧 形精론이라 할 수 있다. 이때 精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精은 그 일차적 의미에서 미세한 존재, 존재의 깊은 부분이라는 뜻을 가지므로 形과 精은 각각 거친 것[粗]과 미세한 것[精]이 된다. 한편 생명의 실체인 미세한 것은 흔히 氣 혹은 神으로 이해된다.

成玄英은 위 구절의 해석에서 精을 곧 神으로 풀이하였다.52] 과연 精을 곧장 神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한가? 앞에서 이미 인용했던 「在宥」편의 구절을 다시 보자.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며, 神을 지켜 고요하면 形이 저절로 바르게 된다. 반드시 고요하고[靜] 맑아서[淸], 그대의 形을 힘들게 하지 말고, 그대의 精을 흔들지 않으면 장생할 수 있다. " 53]

53] 「在宥」: “无視无聽, 抱神以靜, 形將自正. 必靜必淸, 无勞汝形, 无搖汝精, 乃可以長生.”


여기서 精은 보통 精神으로 해석되지만, 한 문단 안에서 神과 精을 구분해서 쓴 것이 전혀 무의미하지 않다면, 精은 생명활동의 기초로서 精氣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생명활동을 정신적 활동과 신체적 활동으로 구분할 수 있지만, 精은 그 모든 생명활동의 공통기초가 되는 것이다.

“形을 힘들게 해서는[勞] 안 되고, 精은 흔들어서는[搖] 안 된다”고 하였는데, 곧 생명력을 보존하고 지키는 것이다. 无勞, 无搖는 곧 앞 부분에서 말한 靜, 淸이어서, 靜은 形과, 淸은 精과 관계된다고 해석할 수 있다. 形과 精은 그릇과 물의 관계와 같다. 따라서『장자』에서 비록 精氣라는 단어가 쓰이지는 않았지만, 54] 精의 淸을 이야기한 것은 곧 氣의 淸濁 관념과 연결되어, 精을 精氣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神과 精의 관계는 다음과 같이 생각될 수 있다. 精과 神은 체와 용의 관계로서 精이 없으면 神도 없거나, 혹은 神의 존재는 精에 의존하지 않지만 그 활동은 精에 의존한다. 여기서 神은 의식활동이고, 精은 생명력 혹은 생명에너지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위 인용문에는 形神론과 形精론이 함께 등장한 셈이다. 55]


앞에서 인용했던 「知北遊」편의 구절에서는 精神과 精을 구분하여 쓰고 있다.


51]정신적 자유를 주장한다고 이해되는 <내편>에서도 신체를 포함한 생명의 온전함, 자연적 수명의 온전한 마무리에 대해서 역시 이야기하고 있다. 「養生主」: “緣督以爲經, 可以保身, 可以全生, 可以養親, 可以盡年.”

52]『莊子疏』: “棄世事則形逸而不勞, 遺生涯則神凝而不損也. --- 形神全固, 故與元天之德爲一.”

54]『장자』에서는 精氣라는 단어는 사용되지 않고, 「在宥」편에 ‘六氣之精’이라는 표현은 보인다. “雲將曰: ‘天氣不和, 地氣鬱結, 六氣不調, 四時不節. 今我願合六氣之精以育群生, 爲之奈何?’”

55]후대의 內丹 사상에 의하면 사람이 태어날 때 한 점 元神이 몸 속에 깃든다고 한다. 그 후 神의 활동은 精에서 에너지를 공급받는다. 神은 元神과 識神으로 구분되는 바, 각각에 대응하는 元精(先天精)과 後天精이 있다. 元精과 元神은 원래는 통일적이었다. 한편 鍊精化炁, 鍊炁化神, 鍊神還虛를 이야기하면, 精과 神 사이에는 精粗의 관계가 설정된다.



"밝음[昭昭]은 어두움[冥冥]에서 생기고 질서[有倫]는 無形에서 생기며, 精神은 道에서 생기고 形은 精에서 생겨서, 만물은 形으로써 서로 낳는다." 56]

56]「知北遊」: “夫昭昭生於冥冥, 有倫生於无形, 精神生於道, 形本生於精, 而萬物以形相生,”


精神과 形을 구분하는 것은 곧 形神론인데, 그 각각의 근원을 道와 精으로 구분하고 있다. 道와 精의 관계는『老子』21장에서 그 단초를 확인할 수 있다.57]

  “形이 精에서 생긴다”는 것은 ‘有(유형)는 無(무형)에서 생긴다’ 58]는 말의 구체적 표현이다.

거친 것[形]은 미세한 것[精]에서 나온다(미세한 것이 모인 것이다). 「至樂」편의 “氣變而有形”이라는 말과 연결하면, 미세한 것은 곧 氣이다. 따라서 形이 근본하는 精은 곧 氣이고, 氣의 精이라 할 수 있다.59] 精은 미세한 원질이면서 생명력의 기초가 되는 그런 것이다.


57]『老子⋅21』: “道之爲物, 惟恍惟惚. 惚兮恍兮, 其中有象; 恍兮惚兮, 其中有物. 窈兮冥兮, 其中有精. 其精甚眞, 其中有信.”

58]『老子⋅40』: “天下萬物生於有, 有生於無.” 「在宥」편의 원문은 “有倫生於无形”이다.

59]「則陽」편에서는 形과 氣의 관계를 천지와 음양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다. “是故天地者, 形之大者也; 陰陽者, 氣之大者也.”



「刻意」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形은 피로하게 하고 쉬지 않으면 해어지고[弊], 精은 쓰고 그치지 않으면 마른다[竭]. 물의 본성은 섞이지 않으면 맑고, 움직이지 않으면 平靜하다. 막혀서 흐르지 않으면 또한 맑을 수 없다. " 60]

60]「刻意」: “故曰, 形勞而不休則弊, 精用而不已則竭. 水之性, 不雜則淸, 莫動則平; 鬱閉而不流, 亦不能淸; 天德之象也.”


形과 精을 함께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역시 形精론이다. 精이 마른다고 하였으므로 그것을 물과 같은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신체 속의 생명력(에너지)으로서 精은 물과 같이 고갈될 수 있는 것이다.

形이 마른 나무(마른 해골) 같이 된다는 표현의 바탕에는 이러한 생각이 깃들어 있다. 61] 精을 미세한 氣라고 하면, 精이 고갈된다는 것은 곧 氣가 고갈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생명력 혹은 생명의 기초로 이해될 수 있는『장자』에서의 精(形精론의 精)은 곧『老子』21장의 “其中有精. 其精甚眞”의 精에서 유래한다.62]

『老子』55장에는 또한 精과 和 개념이 등장하는데,63] 둘 다 생명의 기초(생명력, 생명의 에너지, 생명의 알맹이)의 속성과 상태를 이야기하는데, 精은 그 미세함을 이야기하고, 和는 그 중화적 상태 64] 를 이야기한다. 곧 精氣와 和氣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精은 만물(有)의 공통기초인 미세한 존재이면서 동시에 생명의 기초이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形(형체의 존재 및 활동)의 기초가 되는 精인데, 「知北遊」에서 ‘形本生於精’이라고 할 때의 精이 곧 그것이다. 이차적으로는 의식활동으로서 神과 연결되어 『장자』에서 精神 개념으로 발전하는 精인데, 이때 精과 神은 생명의 깊은 영역이며 본질적 요소라는 점에서 연결된다. 精이 기본적으로 精粗의 관념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면 神은 形에 비하여 확실히 精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精과 神을 구분할 때 精은 神의 (존재와) 작용의 기초가 된다.


만물 혹은 생명의 기초로서 精은 곧 氣로서 이해되고, 氣의 층차(청탁)를 이야기하면 곧 精氣((『管子』에서 말하는)가 된다. 氣를 가지고 생명을 설명할 때 氣의 거친 것은 形이 되고 氣의 미세한 것은 神이 된다는 것이 形神론이라 할 수 있다. 神을 精神이라 한 것은 원시종교적 神 관념이 그 신비적인 (혹은 불합리한) 성격을 제거하고 존재의 보편적 기초인 氣 관념을 바탕으로 인간 내부에서 생명활동의 주체로 작용한다고 인식된 것이다. 따라서 精神 개념은 神氣 65] 개념과 함께『장자』에서 神이라는 실체 혹은 작용을 氣 관념과 연관지어 이해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61]“形固可使如槁木”(「齊物論」), “向者先生形體掘若槁木”(「田子方」), “形若槁骸”(「知北遊」), “身若槁木之枝而心若死灰”(「庚桑楚」), “形固可使若槁骸”(「徐无鬼」)

62]盧育三에 의하면 精의 해석에는 精氣, 情, 精微, 生命力, 精神 등이 있지만, 生機 혹은 能生, 能動의 因素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 하였다. (『老子釋義』, 天津古籍出版社, 1987, 112~113쪽)

63]『老子⋅55』: “骨弱筋柔而握固, 未知牝牡之合而朘作, 精之至也. 終日號而不嗄, 和之至也.”

64]『老子⋅42』: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65]『장자』에서 神氣는 두 번 사용된다. “汝方將妄神氣, 墮汝形骸, 而庶幾乎!”(「天地」), “夫至人者, 上闚靑天, 下潛黃泉, 揮斥八極, 神氣不變.”(「田子方」)



이와 같이 精과 神이 결합하여 精神 개념이 등장하지만, 「在宥」, 「刻意」, 「達生」편에서처럼 形과 精을 상대시키는 경우 그 精을 곧장 神으로 연결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精을 생명의 알맹이, 실체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精은 形과 神의 공통의 기초가 될 수 있다. 생명의 근원, 미세한 그 무엇으로서의 精은 한편으로 氣이고, 한편으로 神인데, 따라서 精⋅氣⋅神 셋은 모두 생명체, 형체의 본질, 알맹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러므로『장자』에서 形과 상대되는 精은 기본적으로는 생명의 기초(원질)로서 精氣이고, 그것은 생명의 기초라는 점에서 神의 존재 및 활동의 기초이기도 하다. 이 말은 精이 精神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를 가진다는 말이 되기도 한다. 66]


66] 「達生」편에서는 精의 虧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刻意」편에서는 神의 虧를 이야기하고 있다. 따라서 精과 神은 모두 그 순수성(온전함)을 지켜야 하는 것이고, 손상되면 회복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되고 있다. 곧 생명의 본질적 요소들이다. “棄事則形不勞, 遺生則精不虧. 夫形全精復, 與天爲一.”(「達生」),

“平易恬惔, 則憂患不能入, 邪氣不能襲, 故其德全而神不虧.”, “故素也者, 謂其无所與雜也; 純也者, 謂其不虧其神也. 能體純素, 謂之眞人.”(「刻意」)



形精론과 形神론의 관계는 어떠한가? 「至樂」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 처음을 살펴보니 본래 生이 없었고, 生이 없을 뿐만 아니라 본래 形도 없고, 形이 없을 뿐 아니라 본래 氣도 없었다. 황홀한 가운데 뒤섞여 있다가, 변하여 氣가 존재하고, 氣가 변하여 形이 존재하고, 形이 변하여 生이 존재하며, 지금 또한 변하여 죽으니[死], … " 67]

67]「至樂」: “察其始而本无生, 非徒无生也而本无形, 非徒无形也而本无氣. 雜乎芒芴之間, 變而有氣, 氣變而有形, 形變而有生, 今又變而之死, 是相與爲春秋冬夏四時行也.”


氣 - 形 - 生의 단계를 제시하였다. 여기서 生은 生死의 生이지만, 死는 생명의 소멸이므로 生을 곧장 생명으로 풀이해도 상관없을 것이다. 먼저 氣와 形의 관계에서 氣는 形의 기초가 된다(氣가 모여서 形이 된다). 비록 문장 구조는 동일하지만, 形과 生의 관계는 이와 다르다. 形을 生의 기초라 할 수는 없다. 「知北遊」편에서는 氣의 聚散을 가지고 생사를 설명하였는데,68] 生의 기초를 氣로 본 것이다. 그러므로 氣는 形과 生의 공통의 기초이다. 이러한 氣는 곧 精으로 표현될 수 있다. ‘形이 변하여 生이 있다’는 말에는 이 절을 처음 시작할 때 인용했던 「達生」편의 내용처럼 形과 生을 구분하면 形에 무엇이 더해져야 生(생명현상, 생명활동)이 가능하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이와 같이 氣 개념은 궁극적으로는 生의 기초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形의 기초라는 의미가 강하기 때문에 形 이후에 生을 가능하게 하는 그 무엇이 필요한데, 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 形神론의 神이다. 神은 좁게는 의식활동(의 주체)을 가리키고, 넓게는 모든 생명활동을 포괄하는 개념이 된다.


精을 만물의 근원이 되는 원초적인 그 무엇이라 하면, 精 개념은 氣와 神 개념을 포괄할 수 있으며, 따라서 精氣와 精神이라는 개념이 생겨나게 된다. 따라서 形精론과 形神론이 동의어가 될 수도 있지만, 形神론은 形精론에 비하여 생명활동에 있어 신체적 활동과 정신적 활동을 더욱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는 관념이라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形精론이 생명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부각시킨다면, 形神론은 생명의 실체가 의식활동을 본질적 내용으로 하는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68] 「知北遊」: “人之生, 氣之聚也; 聚則爲生, 散則爲死.”



2. 形德論


위에서는『장자』에서 생명의 실체로서 精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한편『장자』에서는 또한 생명의 온전함을 표현하기 위해 德이라는 관념을 사용하고 있다. 德의 온전함은 곧 생명의 온전함이다. 「天地」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 道를 붙드는(지키는) 사람은 德이 온전하고, 德이 온전하면 形이 온전하며, 形이 온전하면 神이 온전하다. " 69]

69]「天地」: “執道者德全, 德全者形全, 形全者神全.”


뒷 부분은 形과 神의 온전함을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形神론이다. 形神, 곧 생명이 온전하기 위해서는 德이 온전해야 한다. 道德 관념을 통해 만물을 설명하는 ?老子?의 기본적인 사유방식을 따른 것이다. 생명과 관련하여 德은 구체적으로『장자』에서 어떻게 쓰이고 있는가? 形德론을 통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내편>에서 우리는 形과 德을 대비시킨 경우를 확인할 수 있다.


"무릇 그 形이 支離한 사람도 족히 그 몸을 길러 수명을 다할 수 있는데, 하물며 그 德이 支離한 사람은 오죽하겠는가! " 70]

70]「人間世」: “夫支離其形者, 猶足以養其身, 終其天年, 又況支離其德者乎!” 成玄英은 支離其形과 支離其德을 각각 忘形과 忘德으로 풀이하고 있다.


"形의 보전도 이와 같은데, 하물려 德을 보전하는 사람은 오죽하겠는가!" 71]

71]「德充符」: “形全猶足以爲爾, 而況全德之人乎!”


"그러므로 德이 뛰어나면 形은 잊어버린다. 사람들은 그 잊어버려야 할 것은 잊지 않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잊어버리니, 이것을 ‘진실로 잊어버린 것’이라 한다. " 72]

72]上同: “故德有所長, 而形有所忘. 人不忘其所忘, 而忘其所不忘, 此謂誠忘.”


위 구절들은 形과 德을 상대시키고, 德이 인간생명에서 본질적인 요소임을 강조하고 있다. 곧 形德론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德의 내용, 의미는 形을 넘어서는 능력, 힘인데 기본적으로 정신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德의 의미는 생명력이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이해될 때 ?장자?의 사상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된다. 「應帝王」편의 ‘德機’라는 개념에서 우리는 그 실마리를 확인할 수 있으며,73] <외⋅잡편>에서 본격적으로 그러한 생각들을 확인할 수 있다.


道와 德을 가지고 만물의 근원을 이야기한 것은『老子』에서 비롯되는데,74] 『장자』 「天地」편에서는 形과 生의 기원을 道와 德에서 찾고 있다.


"形은 道가 아니면 생기지 않고(생명을 가지지 못하고), 生은 德이 아니면 밝지[明] 않다. 形을 보존하고 生을 다하며[存形窮生], 德을 확립하고 道를 밝히니 德이 성하지 아니한가."75]


形과 生의 구분은 앞에서도 살펴보았는데, 여기서 ‘形을 보존하고 生을 다한다’[存形窮生]는 말은『장자』의 양생사상을 전제한 생명관을 잘 드러낸다. 형체를 전제로 한 생명의 온전한 실현이다.

‘生을 다한다’는 말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는 그 수명[天年]을 다하는 것이고, 하나는 생명의 기능을 온전히 발휘하는 것이다. 하지만 앞 부분에서 ‘生의 밝음[明]’에 관해 이야기했으므로 후자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더욱 적절할 것이다. 아울러 ‘形非道不生’의 生은 단순히 形이 생겨난다는 의미가 아니라 생명을 가지게 된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道는 생명의 원리이고, 德은 생명력이라 할 수 있다.


73]「應帝王」: “壺子曰: ‘鄕吾示之以地文, 萌乎不震不止. 是殆見吾杜德機也. 嘗又與來.’” 德機는 生機로 풀이할 수 있다.

74]“道生之, 德畜之, 物形之, 勢成之.”(『老子⋅51』),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42」), “道者萬物之奧.”(「62」)

75] 「天地」: “故形非道不生, 生非德不明. 存形窮生, 立德明道, 非王德者邪!”



‘生非德不明’의 明은 知와 관계된 개념인데, 지각과 지식(감각과 인식)을 포괄한다. 그것은 생명체[生]와 대상[物]이 소통한 결과이다.76] 혹은 소통 능력이다. 생명체가 知의 작용을 할 수 있는 것은 心 혹은 神의 영역인데, 여기서는 德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形과 生의 차이는 德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달리 이야기하면 形에 德이 갖추어져야 生의 기능, 곧 明의 작용이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形神론에 따르면 ‘生非德不明’의 明은 곧장 神明 개념과 연결되어, 生이 밝을[明] 수 있는 것은 神, 곧 神明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德과 神 개념이 서로 통함을 알 수 있다.


『老子』이전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만물의 근원은 神으로서의 天인데, 『老子』에서부터 天의 자리에 道 관념이 들어선 뒤 道의 작용으로서의 德이 天의 작용으로서의 神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道와 德 관념에 의해 종교적 의미를 가지던 神 관념이 퇴조했다가『장자』의 形神론에서는 神이 초월적 존재로서의 성격을 버리고 만물의 공통기초인 精 혹은 氣 관념에 바탕하여, 만물에 내재한다는 보편적 성격을 가지고 인간 생명활동의 기초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德과 神은 생명활동의 기초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것을 우리는 위 인용문의 明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일차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知北遊」편에서는 “精神生於道, 形本生於精”이라 하였는데, 그 말을 위 「天地」편의 “形非道不生, 生非德不明”과 묶어서 이해하면 어떠한가? 각각 精神과 形, 形과 生을 상대시켰는데, 形이 공통적이므로 生과 精神이 같은 차원의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精神, 곧 神은 生을 生이게 하는 生의 본질적 내용이다. 形이 生을 가지게 하는(생명작용을 하게 하는) 것이 곧 神이다. 따라서 神이 깃들면 形은 살고(생명을 가지고) 神이 떠나면 形은 죽는다.


“精神生於道, 形本生於精” 에서 생명의 요소인 精神과 形의 각각의 근원은 道와 精이다. ‘形精론’에서 살펴본 것처럼 形의 기초로서의 精은 곧 精氣로 이해될 수 있다. 形과 精의 관계는 유형과 무형의 관계, 거친 것과 미세한 것(精粗)의 관계이다. 따라서 ‘有倫生於无形’이라 하였다. 精神이 道에서 생기는 것은 ‘昭昭生於冥冥’이라 하였다. 道는 깊고 깊은 것, 보고 들을 수 없는 것이므로 冥冥이라 하고, 精神은 知의 세계이므로 昭昭라 하였는데, 곧 神明이라는 개념이 그 특징을 잘 드러낸다.


道와 精의 관계는 곧 道와 氣의 관계이고, 후자가 구체적 실체라면 전자는 그것의 원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관계는 또한 道와 德의 관계에 상응하는 것이다. 생명의 근원을 탐구하는 데 있어 道는 그 원리, 법칙의 측면에서 이야기하는 것이고, 德은 그 작용, 힘의 측면에서 이야기하는 것이고, 精은 그 실체(구체적 존재)의 측면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앞에서 道를 생명의 원리, 德은 생명력이라 하였는데, 精은 생명력의 실체이다. 德을 得(획득, 획득한 결과)으로 이해하면 德은 道를 얻는 것이기도 하고, 77] 精을 얻는 것이기도 하다.


76]「外物」: “目徹爲明, 耳徹爲聰, 鼻徹爲顫, 口徹爲甘, 心徹爲知, 知徹爲德.” 徹은 곧 通이고, 明, 聰, 顫, 鑑, 知, 德은 모두 明이라는 용어로 포괄할 수 있다.

77]「漁父」: “且道者, 萬物之所由也, 庶物失之者死, 得之者生,”



「天地」편에서는 形, 德, 神 등의 개념을 가지고 생명의 발생과정과 구성요소에 대해 말하고 있다.


"태초에는 無가 있고 有도 名도 없었다. ‘하나’[一]가 생겨나자, ‘하나’만 있고 아직 形이 없었다.

物이 얻어서 생기는(생명을 가지게 되는) 것을 德이라 한다.

아직 形이 없는 것이 구분은 있으나 여전히 사이가 없는 것을 命이라 한다.

움직임이 멈추어 物을 낳으며, 物이 이루어진 뒤 理가 생기면 形이라 한다.

形體가 神을 간직하면 각각 고유한 질서[儀則]를 가지니 性이라 한다. " 78]

78]「天地」: “泰初有无无有无名; 一之所起, 有一而未形.

物得以生, 謂之德;

未形者有分, 且然无間, 謂之命;

留動而生物, 物成生理, 謂之形;

形體保神, 各有儀則, 謂之性. 性脩反德, 德至同於初.”


먼저 ‘하나’가 생기고, ‘하나’에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이것은『老子』42장의 “道生一”을 부연설명한 것이다. 79] ‘하나’는 ‘道生一’의 ‘하나’이다. 따라서 一氣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은 精이다. ‘하나’는 아직 무형의 단계이다. 아직 형태가 없고 구분은 있지만 사이가 없는(無形, 有分, 无間) 상태를 命이라 하였는데, 그것은 곧 二氣이다. ‘一生二’에 해당한다. 구분이 있으므로 二이지만, 사이가 없으므로 또한 一이다.

그러므로 命은 곧 氣이다. 뒷 부분에서 性과 神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생명의 본질을 추상적으로 말하면 性과 命이고 구체적 실체를 가지고 말하면 神과 氣이다.80] 神을 정신적 활동, 생명의 총체적 기능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형체가 神을 간직한다고 하였으므로 실체로 간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움직임이 멈추어[留動] 物을 낳는다’고 하였는데, 움직이는 것은 命이고 따라서 그것이 氣를 가리키고 있음이 명백하다. 운동성과 변화성은 氣의 특징이다. 物은 氣가 모여서 이루어진 것이고 본래의 상태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운동성이 떨어진 것이다. 物에 理가 더해진 것이 形이다. 이때 理는 「養生主」에서 말하는 天理와 같은 것이다. 81]


物이 이를 얻어 생긴(생명을 가지게 된) 것을 德이라 하였는데, 物이 얻는 것은 무엇인가? 『老子』39장에서 “만물이 하나를 얻어서 생긴다” 82] 하였는데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도 ‘하나’를 얻은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하나’는 “道生一”의 ‘하나’이다.

『老子』의 “道生一, 一生二”에서 ‘하나’는 곧 道이며, ‘둘’은 陰陽이 아니라 天地라는 해석도 있지만,83] 이미 『老子』에서 氣와 精이라는 개념을 사용하고 있으므로,84] 만물창생의 원리인 道에서 처음 생기는 것은 곧 精으로서의 氣라고 이해해도 무리는 없을 것이다. 「至樂」편에서도 말하기를 ‘처음에는 氣가 없다가 어느 순간에 생기며, 氣가 변하여 形과 生이 생긴다’ 85] 고 하였으니, 『老子』의 “道生一, 二生三, 三生萬物”과 같은 생각이고, 一을 氣라고 해석한 것이다. 『老子』의 一, 二, 三을 一氣, 陰陽氣, 和氣로 해석하면, 생명의 직접적인 기초는 和氣라 할 수 있다. 86]


79]“『莊子⋅天地篇』의 ‘泰初有無, 無有無名, 一之所起, 有一而未形, 物得以生, 謂之德.’ 이것은 ‘道生一’에 대한 최초의 해석이다.”(盧育三, 『老子釋義』, 191쪽)

80] “『장자』 <내편>에는 비록 性이라는 글자가 없지만, … 內七篇 중의 德이라는 글자는 실제는 곧 性이라는 글자임을 알 수 있다.” (徐復觀, 『中國人性論史⋅先秦篇』, 369쪽)

81]「養生主」: “依乎天理, 批大卻導大窾因其固然, 枝經肯綮之未嘗微礙, 而況大軱乎!”

82]『老子⋅39』: “昔之得一者, 天得一以淸, 地得一以寧, 神得一以靈, 谷得一以盈, 萬物得一以生, 侯王得一以爲天下貞.” “萬物得一以生”의 구절은 “严遵本, 帛书『老子』甲乙本均无此句. 羅振玉说: ‘敦煌戊本无此句.’”(盧育三, 위의 책, 174쪽)

83]“도는 ‘一’의 위에 건립되는 것으로, ‘一’을 떠나면 도가 없다. 어떤 사람은 ‘一’이 元氣라 하는데, 근거가 없다. 춘추전국 시기에는 아직 元氣의 개념이 없으며, 漢代에 이르러서야 元氣 개념이 출현하였다.

… ‘二’는 天地를 가리킨다. ‘二’가 음양을 가리키고 천지가 아니라는 사람이 있지만 이것은 사실에 부합하지 않는다.

… 先秦 시기에 무릇 우주생성론을 이야기하는 것은 모두 먼저 천지가 나오고 그런 후에야 음양이 나오며, 혹은 음양을 천지에 부속시켜, 천지의 氣가 된다.

… 漢代에 이르러 비로소 먼저 음양이 나오고 나중에 천지가 있다는 설법이 있었다.

… 이 때문에 老子의 ‘二’를 음양으로 해석하는 것은 근거가 없는 것이며, 당시에는 또한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漢代 사람들의 인식을 가지고 老子를 해석할 수 없는 것이다.”(盧育三, 위의 책, 192~193쪽)

84]“其中有精. 其精甚眞”(『老子⋅21』),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42」), “… 精之至也.”(「55」)

85] 「至樂」: “察其始而本无生, 非徒无生也而本无形, 非徒无形也而本无氣. 雜乎芒芴之間, 變而有氣, 氣變而有形, 形變而有生,”

86]“骨弱筋柔而握固, 未知牝牡之合而朘作, 精之至也. 終日號而不嗄, 和之至也.”(『老子⋅55』)에서 생명의 기초는 精이고 和인데, 곧 精氣, 和氣 혹은 氣의 精, 氣의 和이다.



이상『장자』의 形德론에 대하여 살펴보았는데, 形神론, 形精론과 함께 정리할 때 이들 생명론에서 생명의 본질은 결국 德, 精, 神이다. 그것들의 관계는 어떠한가?


德은 이를 얻어 만물이 생명을 가지게 되는 것이라 하였으니, 精을 생명의 실체라 하면 德은 곧 精을 얻은 것이다. 精은 존재의 기초인 氣의 특수 상태(시원적 상태)로서『老子』에서부터 언급된 ‘하나’이다. ‘하나’라는 것은 그러한 존재의 시원성과 통일성을 동시에 의미한다. 「至樂」편에서는 ‘形은 氣가 모여서 이루어진 것’[氣變而有形]이라 하고 또한 ‘形이 변하여 生이 된다’[形變而有生] 하였는데, 生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知北遊」편에서는 生이 氣가 모인 것이라 하였으니,87] 形도 氣가 모인 것이고, 生도 氣가 모인 것이다. 따라서 形 이후의 生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氣 개념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그 결과 「天地」편에서처럼 神 관념을 도입할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88] 神은 그 미세한 존재와 작용이라는 면에서 精과 결합하여 精神이 되고, 생명작용[明]의 실체라는 면에서 神明이 되는데, 德은 생명력(생명의 기초)을 얻어 생명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 하면, 德의 구체적인 내용을 또한 神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知北遊」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齧缺이 被衣에게 道에 관해 물었다. 被衣가 말하기를 “그대의 형체를 단정하게 하고 시각을 전일하게 하면 天和가 장차 이를 것이다. 그대의 인식작용[知]을 거둬들이고 헤아림을 전일하게 하면 神이 장차 와서 깃들 것이다. 德은 장차 그대를 위해 아름다울 것이고, 道는 그대를 위해 머물 것이니, 그대는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순진하여 그 까닭을 따지지 않게 될 것이다.” " 89]


여기서 天和 90] 와 神, 道는 모두 나(생명체)에 이르러 머무는 것으로 되어 있다. 곧 같은 차원의 그 무엇이다. 德이 아름답다는 것은 곧 생명력이 충만한 것이다. 따라서 생명력인 德과 생명원리인 道는 결국 같은 것이다. 형체, 감각작용, 의식작용 등이 안정되면 자연히 생명력이 충만한데, 그것은 구체적으로 和氣, 德, 神이 충만한 것이다. 이 구절은 곧 생명의 본질이 德, 氣, 神 등의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87]「知北遊」: “人之生, 氣之聚也; 聚則爲生, 散則爲死”.

88] 「天地」: “形體保神, 各有儀則, 謂之性.”

89] 「知北遊」: “齧缺問道乎被衣, 被衣曰: 「若正汝形, 一汝視, 天和將至; 攝汝知, 一汝度, 神將來舍. 德將爲汝美, 道將爲汝居, 汝瞳焉如新生之犢而无求其故!”

90]成玄英은 自然和理라 하였고, 林希逸은 元氣라 하였다. 和는 기본적으로 氣의 和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4. 맺음말


『장자』의 생명관에는 먼저 形心론과 形神론이 있다. 形心론은 전 편에 걸쳐 확인되고, 形神론은 <외⋅잡편>에서 등장한다. 그 가운데 形神론은 形과 神의 雙全을 이야기함으로써 養生을 이야기하는 도가 사상의 기본적인 생명관이 된다. 形心론과 形神론에서 생명의 본질적 요소는 心 혹은 神이다.

形心론은 당시 보편적인 추세에 따라 心을 중심으로 인간생명을 설명한 것이고, 形神론은 神을 중심으로 인간생명을 설명하는 것인데, 그 神 관념은 고대의 종교적인 神 관념이 변형⋅발전한 것이다. 그것은 원래 자연신이었던 神 관념이 氣 관념을 바탕으로 보편적인 생명력으로서 인간에 내재하는 것으로 이해된 것인데(물론 모든 생명체에 내재한다), 그것은 유교에서 종교적 성격의 天(天神, 天命)이 인간에 人性으로 내재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장자』에서는 또한 생명의 실체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形精론과 形德론이 등장한다. 그 관념들의 단초는 『老子』에서 확인할 수 있다. 形精론은 생명의 실체를 精으로 간주하는 것인데, 그것은 결국 氣를 바탕으로 인간생명을 설명한 것이다. 形德론은 道와 德을 가지고 생명을 설명하는 것인데, 이때 道는 생명의 원리이고 德은 생명력이라 할 수 있다. <내편>에서는 形을 버리고 德을 취할 것을 이야기하다가 <외⋅잡편>이 되면 形과 德을 함께 온전히 할 것을 이야기한다. 形精론과 形德론은 결국 形神론으로 포섭된다.


『장자』의 근본취지를 養生으로 규정하고 이에 따라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形心론이든 形神론이든 形을 함께 이야기하는데, 그것에는 養生이 存形을 기초로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개체를 의미하기도 하는 身이라는 표현과 달리 形은 전적으로 형체(혹은 그 기능)를 의미하므로 양생은 養形을 넘어선다. 특히 <외⋅잡편>에 비하여 <내편>에서는 形에 큰 비중을 두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즉 死生一如를 주장하거나 形과 德을 대비시키는 것이 그러하다. 실제『장자』에서는 形과 生을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生의 중심은 形이 아닌, 心 혹은 神(혹은 精, 德)이 될 것이다.


유가(孔孟)에서는 心을 인간생명의 본질적 부분으로 강조하였다. 하지만 도가(老莊)의 입장에서 보면 좀 다르다. 그들이 지향하는 것은 온전한 생명의 유지와 지속이었다. 특히『장자』에서는 인간적 생명의 한계를 넘어 우주적 생명과 하나 되기를 추구하는데, 보통의 경우 心은 形을 위하여 발휘되거나, 인간적 특수성, 곧 사회성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그것은 기본적으로 극복해야 할 대상이 된다. 구체적인 心의 내용은 知⋅情⋅意, 欲⋅情⋅知 등인데, 『장자』에서 心의 작용은 知로 대표된다. 이때 知는 유형[物]의 세계를 그 대상으로 하고,91] 따라서 知는 배격의 대상이 된다. 92]


形과 心이 모두 유한하여 극복해야 할 대상들이라면, 양생의 궁극적 대상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곧 生의 본질은 무엇인가?


『老子』에서부터 우주만물은 道에서 비롯된다고 여겨진다. 『老子』에서 道를 강조한 것은 그 이전에 모든 가치의 근원, 존재의 근원으로 여겨지던 天(天神, 上帝, 天地)의 지위를 부정하는 것이고, 그 작업은 곧 우주의 보편적 법칙, 근원적 생명력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道는 만물의 근원이기는 하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원리, 법칙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곧 생명의 원리이고 존재의 법칙이다. 구체적으로 생명의 기초가 되는 것은 氣 혹은 精이다. 모든 구체적인 존재는 氣로 이루어지고, 미세한 존재로서의 氣는 精으로 표현된다. 氣가 엉긴 것이 物이 되므로, 氣를 매개로 미세한 精과 거친 物은 통일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이와 같이 精은 道에서 만물로 전개되는(道가 만물을 낳는) 과정에서 만물의 공통의 기초가 된다. 따라서 모든 생명은 이 공통의 기초를 통하여 서로 연결될 수 있으며, 인간은 또한 이 精을 통하여 인간적 한계를 넘어 우주와 하나가 될 수 있다. 『장자』에서 形과 精을 이야기할 때는 곧 이 생명의 알맹이(생명의 에너지, 생명력의 원천)인 精을 간직하고 기르는 것이 생명을 유지하고 지속하는 방법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장자』에서는 또한 생명을 德으로써 설명하고 있다. 생명체는 생명의 기초인 精을 얻어야 생명을 가진다. 이 생명의 알맹이를 얻어 가지는(가진) 것이 德이다. 생명이 있다는 것은 곧 德이 있다는 것이고, 생명이 왕성한 것은 곧 德이 왕성한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생명이 생명의 기능을 온전히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바로 德의 온전함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93] 이것이 形德론이다.


이상과 같은 形心론, 形精론, 形德론 등이 形神론으로 귀결되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도 있다. 『장자』는 한편으로는 인간의 특수성을 극복하고자 하고, 한편으로는 인간의 특수성을 강조한다.

전자의 입장에서는 心의 특수성(다른 존재와의 차별성)을 극복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心은 인간적 조건(인간이라는 존재, 사회적 요인들)의 제약을 받으므로 자유롭지 못하다. 『장자』에서는 도처에서 儒家의 한계를 지적하는데, 유가에서 강조하는 것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 도덕적 주체로서의 인간이며, 그것을 보증하는 것이 心의 기능이었다. 한편 心은 기본적으로 신체를 기초로 하는 욕망의 주체로서 작용하는데, 그것은 유가와 도가에서 공통적으로 극복의 대상이 된다.


후자의 입장, 곧 인간의 특수성을 강조한다는 것은 인간이 形의 유한성을 인식하고 生의 무한성을 추구하는 데 있다. 생명의 본질, 실체에 대해 인식함으로써 생명을 지속, 확장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神人을 이야기하고 長生을 이야기하는 것은 곧 인간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극복의 가능성은 생명의 기초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다. 氣의 특수한 상태라 할 수 있는 精은 미세함이라는 의미를 바탕으로 만물의 시원, 생명의 기초가 된다. 또한 모든 존재는 그것을 얻어야 생명을 가진다는 의미에서 德이라 부른다. 인간생명을 形과 心으로 구분하면 德은 心의 영역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치지 않고 神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생명 자체의 보존과 지속, 곧 養生(全生保身)을 이야기하면 생명을 形心으로만 이야기하는 것은 부족하다. 心을 통해서 정신적 자유[遊心]를 이야기할 수는 있지만, 한편 그러한 자유는 또한 心(知⋅情⋅意)의 제거를 통해 이루어진다. 94] 이것이 곧 心의 이중성이다. 心을 기본적으로 인간적 제약을 가진 작용으로 간주하여 그러한 心을 제거하고 나면 여전히 생명의 주체(중심)가 필요하다.95] 따라서 생명의 본질, 실체로서 精, 德을 강조하게 되고, 다시 그러한 생명의 실체이면서 동시에 정신적 작용을 설명할 수 있는 神 관념을 도입하여 생명의 주체와 작용을 포괄적으로 나타내고자 한 것이 바로 形神론이라 할 수 있다.


인간생명의 주체로서 神 관념이 등장하게 된 과정은 다음과 같다. 인간 생명의 중심(본질)은 의식활동이다. 매사를 神(神들)에게 물어보던 시대를 지나 인간의 의식이 깨이게 되면 더 이상 神에게 물어보지 않고 인간이 스스로 판단하게 되는데, 인간의 心이 그 역할(예지, 의사결정)을 담당하였다. 하지만『장자』에 와서 인간적 한계의 극복을 강조하였을 때 心은 인간적 한계의 중심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그 대안으로 과거 숭배의 대상이었던 초월적인 神이 이제는 인간에 내재하는 神으로 다시 등장하여 의식활동의 주체가 된다. 그것은 神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규정이다. 물론 그러한 神은 과거에는 인간에게 없던 무엇이 인간에게 새로 생긴 것도 아니고, 이전에는 밖에 있던 것이 이제는 안에 있는 것도 아니다. 기실 神은 魂(靈)으로서 이미 인간에 내재하고 있었다. 96] 魂이라거나 心이라는 개념 대신에 神이라는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과거 숭배의 대상이던 神이 가지던 능력을 이제 인간이 가진다(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장자』의 神 관념은 神明과 精神이라는 개념을 통해 그 의미를 확인할 수 있다. 精神이 神에 대한 존재론적 이해라면, 神明은 神에 대한 작용론적 이해라 할 수 있다. 精神 개념은 神이 氣(혹은 精)를 바탕으로 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神明 개념은 그 작용이 밝음 곧 인식(지식, 지혜)으로 드러남을 보여준다.

『장자』에서는 한편 우주적 정신(우주적 생명의 실체)이라는 의미에서 神明과 天地精神의 관념을 사용한다. 97] 神明은 인간의 神明이거나 천지의 神明이거나 그냥 神明이라 하고, 精神은 인간의 경우에는 그냥 精神이라 쓰고 천지의 경우에는 天地精神이라 쓴다.

따라서 神明 관념은 천지의 神明이라는 관념이 먼저이고, 精神 관념은 인간의 정신이라는 관념이 먼저였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전자가 神에 대한 원시종교적 관념을 계승하여 인간의 인식능력을 강조하게 된 것이라면, 후자는 인간의 의식작용을 생명의 실체(氣를 바탕으로 한 것)로 이해한 뒤 그것을 우주에 확대 적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장자』의 形神론은 인간과 자연을 통일적으로 이해하는 것인데, 그 중심이 되는 것은 神 관념이고, 神 관념은 心, 德, 精 관념을 다 아우르는 것이다. 생명의 실상(실체)은 추상적으로는 道와 德이고, 구체적으로는 精(精氣, 精神)이다. 의식작용인 心은 곧 神의 작용이다.


形神론은 기본적으로『장자』의 양생 사상에 부합하는 생명관이다. 양생 사상은 생명의 유지와 지속을 추구하는 것이다. 形(형체)은 기본적으로 생멸(氣化, 氣의 聚散)에 종속되므로 지속과 영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形을 중심으로 하는 개체성(유한성)이 극복되어야 한다. 神은 생명의 보편적 실체인 精을 바탕으로 영원할 수 있다. 神은 처음부터 인간의 形으로부터 자유로운(形을 초월하는) 존재였다. 따라서 形神을 이야기함으로써(곧 神을 이야기함으로써) 形의 한계를 넘어서 생명의 지속 가능성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神의 지속을 통해서 形도 함께 지속될 수 있다는 생각이 長生사상이다.98] 이때 神은 생명을 지속시키는 힘(중심)이 된다.


91]“孰肯分分然以物爲事.”(「逍遙遊」), “彼且何肯以物爲事乎!”(「德充符」)

92]“夫徇耳目內通而外於心知, 鬼神將來舍, 而況人乎!”(「人間世」), “墮肢體, 黜聰明, 離形去知, 同於大通, 此謂坐忘.”(「大宗師」)

93]「天地」: “執道者德全, 德全者形全, 形全者神全.”

94] 「達生」: “忘是非, 心之適也;”

95]『장자』에 등장하는 靈府, 靈臺라는 표현은 그런 생각을 담고 있다.

"故不足以滑和, 不可入於靈府."(「德充符」), "不以心稽, 故其靈臺, 一而不桎."(「達生」),

"備物以將形, 藏不虞以生心, 敬中以達彼, 若是而萬惡至者, 皆天也, 而非人也, 不足以滑成, 不可內於靈臺. 靈臺者有持, 而不知其所持, 而不可持者也."(「庚桑楚」)

96]원시종교적 사고에 따르면 인간의 의식주체인 魂은 사후 鬼가 되어 자연신[神]과 더불어 숭배의 대상이 된다. 곧 鬼神관념이다. 『장자』에서는 魂 개념이 形, 心, 神 개념과 함께 쓰이기도 하고, 魄과 함께 쓰이기도 한다. 魂魄 개념은 인간의 영혼을 의미하여 殷商 시대에 이미 쓰이고 있었다.

97] “合彼神明至精, 與彼百化”(「知北遊」), “配神明, 醇天地”, “澹然獨與神明居”, “天地竝與, 神明往與! … 獨與天地精神往來而不敖倪於萬物”(「天下」)

98] 「在宥」편에서는 形의 長生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必靜必淸, 无勞汝形, 无搖汝精, 乃可以長生. 目无所見, 耳无所聞, 心无所知, 汝神將守形, 形乃長生. … 我守其一以處其和, 故我修身千二百歲矣, 吾形未常衰.”



<참고 문헌> -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