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에게 나는 누구인가
최봉영(한국항공대학교수)
〡우리의 정체성 알기〡 (1)
"한국인이 쓰는 말 가운데 어느 하나도 그냥 쓰는 것은 없다. 말은 생겨난 까닭과 쓰이는 방법을 바탕으로 이 말과 저 말이 함께 어울려서 거대하고 장엄한 말씀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한국말은 한국인이 함께 살아오면서 갈고 닦아온 재주와 슬기를 오롯이 담아놓은 보물창고와 같다."
1. 왜 ‘나’를 말하는가
한국인이 배우고 쓰는 수많은 낱말 가운데서 가장 소중한 낱말 하나를 꼽으라고 한다면, 그 것은 아마 ‘나’ 라는 낱말일 것이다. 내가 있기에 세상의 모든 것이 뜻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없다면 세상의 모든 것은 그저 모든 것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내가 누구인지 알고서, 나를 나답게 가꾸어갈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을 것이다.
오늘날 한국인은 나에 대해서 수많은 말을 하지만, 정작 내가 누구인지 말하려면 매우 어렵다. 나에 대한 생각을 뒤로 밀어둔 채, 마냥 바쁘게 정신없이 살아가기 때문이다. 내가 누구인지 묻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되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헤맨다. 이로 말미암아 많은 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한국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율이 세계에서 으뜸이다.
오늘날 한국의 학자들은 아(我), 자기(自己), 자신(自身), 자아(自我), 자성(自性), 에고(Ego), 셀프(Self)와 같은 것을 빌려서 나를 말한다. 이들은 중국이나 서양에서 빌려온 낯선 개념이나 이론으로써 나를 풀어낸다.
이 때문에 이들이 나를 풀어내는 말을 일반인들은 잘 알아들을 수가 없다. 이제까지 어떤 학자도 한국인이 말하는 나, 낱, 남, 나이, 나름, 나다, 내다, 낳다와 같은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묻고 따지고 풀어본 적이 없다. 학자들에게 한국말은 그냥 일상적으로 쓰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의 학자들은 한국말이 중국말이나 서양말에 못지않게 대단한 말이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중국인이나 서양인이 저의 말을 갈고 닦아왔듯이 한국인도 그렇게 해왔다. 한국인이 쓰는 말 가운데 어느 하나도 그냥 쓰는 것은 없다. 말은 생겨난 까닭과 쓰이는 방법을 바탕으로 이 말과 저 말이 함께 어울려서 거대하고 장엄한 말씀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한국말은 한국인이 함께 살아오면서 갈고 닦아온 재주와 슬기를 오롯이 담아놓은 보물창고와 같다.
한국의 인문학자는 중국이나 서양에서 가져온 말을 높이 받들면서 한국말을 업신여기는 버릇을 갖고 있다.
이 때문에 한국인은 한국말에 담겨 있는 논리체계, 인식체계, 가치체계, 인간관, 세계관 따위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한국인이 갖고 있는 한국말에 대한 관심은 기껏 한국말을 글자로 적는 도구인 한글에 대한 것이 고작이다. 이러니 아직도 많은 사람이 한국말과 한글의 관계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여 한국말 사전을 한글 사전으로, 한국말 연구를 한글 연구로, 한국말 사랑을 한글 사랑으로 말하고 있다.1)
한국인이 나를 나답게 만들어가는 바탕은 한국말에 있다. 한국인은 나, 저, 우리, 너, 남, 맛, 멋, 어짊, 모짊, 바름, 그름 따위와 같은 한국말을 터전으로 삼아서 나를 나답게 만들어가는 삶의 차림판을 엮어나간다. 사람들은 이러한 차림판을 바탕으로 정신을 차릴 수 있음으로써, 생각이 있고 분별이 있는 사람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
한국인은 이러한 차림판이 흐려지면 정신을 차리기 어렵기 때문에 생각이 없는 상태가 되어서 염치, 체면, 예의, 살림, 가게, 회사 따위를 차리는 일 또한 제대로 할 수가 없다.
한국인은 나를 나답게 만들어가는 바탕인 삶의 차림판이 어떻게 엮여 있는지 잘 알지 못한다. 한국인이 나를 더욱 나답게 만들어가고 싶다면 한국인이 오랫동안 함께 갈고 닦아온 삶의 차림판이 어떠한 것인지 깊이 살펴보아야 한다. 정약용은 일찍이 이런 점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일깨운 바 있다.
‘사람이 지려(知慮-깊은 생각)로써 미루어 알아내는 것은 한계가 있고, 교사(巧思-교묘한 생각)로써 파고들어 갈고닦는 것은 조금씩 이루어진다. 이런 까닭에 비록 성인(聖人)이라고 하더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논의한 것을 당할 수는 없으며, 비록 성인(聖人)이라고 하더라도 하루아침에 그 아름다움을 다 이룰 수는 없다.
이러므로 사람의 무리가 더욱 많이 모이면 그 기예(技藝)가 더욱 정밀해지게 되고, 시대가 더욱 아래로 내려가면 그 기예가 더욱 교묘해지게 된다.’2)
우리가 몇몇 성인의 특별한 말이 아니라 수많은 한국인이 함께 가꾸어온 일상의 말에서 삶의 차림판을 찾아내고 드러내는 일은 어떤 것보다 값진 일이다.
1) 한국말과 한글의 관계가 이상하게 된 것은 한국말을 연구하는 학자들, 특히 해방 이후에 조선어학회를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꾼 분들의 책임이 크다. 1949년에 조선어학회가 한글학회로 이름이 바뀌게된 것은 조선어학회에서 그동안 한글맞춤법연구와 한글보급운동에 힘써온 점과 함께 해방 이후에 남북의 분단으로 학회의 간부로 있던 김두봉과 같은 이들이 북한으로 넘어가고, 북한이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을 쓰게 되면서였다.
한국말을 연구하는 대표적인 학회의 이름이 한글학회가 된 이후로, 한국말을 연구, 계몽, 교육하는 일반 단체들 또한 한글이라는 이름을 주로 붙이게 되었다. 한글사랑, 한글지킴이, 한글운동, 한글운동시민연합과 같은 말을 쓰고 있다.
2) 정약용, <技藝論(기예론)>, 知慮之所推運有限(지려지소추운유한), 巧思之所穿有漸(교사지소천유점), 故雖聖人不能當千萬人之所共議(고수성인불능당천만인지소공의), 雖聖人不能一朝而盡其美(수성인불능일조이진기미), 故人彌聚則其技藝彌精(고인미취즉기기예미정), 世彌降則其技藝彌工(세미강즉기기예미공).
2. 나
사람이 하는 모든 말은 서로 엮임으로써 저마다 뜻을 갖는다. 홀로 떨어져 있는 말은 아무런 뜻도 가질 수 없다. 예컨대 솔나무는 여러 가지 나무들 가운데서 ‘솔’이라는 나무를 가리키고, 이러한 솔나무는 참나무, 감나무, 배나무, 버드나무와 다른 성질을 갖는 어떤 나무로서 뜻을 갖는다. 그리고 솔나무의 솔은 사람이 풀을 칠하거나 먼지를 털어내는 솔과 엮여 있고, 활을 쏘아서 맞추는 과녁인 솔과 엮여 있고, 구멍을 내거나 뚫는데 쓰이는 송곳과 엮여 있다.3)
어떤 사람이 때죽나무나 고죽나무를 말하면, 한국인은 그것이 어떤 나무를 뜻하는 것으로서 받아들인다. 그런데 때죽나무는 소나무나 참나무와 견줄 수 있는 어떤 나무로서 산이나 들에 자라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부르는 이름으로서 구실할 수 있지만, 고죽나무는 소나무나 참나무와 견줄 수 있는 어떤 나무로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름으로서 구실할 수 없다. 고죽나무가 이름으로 구실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과 엮여서 구체적으로 말해질 수 있어야 한다.
한국인이 말하는 ‘나’라는 말 또한 다른 것과 함께 엮임으로써 뜻을 갖는다. 한국말에서 ‘나’ 라는 말과 가장 가깝게 엮여 있는 것들이 나다, 난 것, 난 데, 나이, 낳다, 낳은 것, 내다, 낸것, 낱, 낱낱, 나름, 난 이, 난 놈과 같은 것들이다. 이들은 나와 뿌리를 같이 하는 것들로서, 이들과 ‘나’가 어떻게 엮여 있는지 살펴보게 되면 나의 바탕을 알 수 있다.
한국말에서 나는 ‘나다’와 뿌리를 같이 하는 것으로서, 나는 ‘난 것’이나 ‘나 있는 것’을 뜻한다고 말할 수 있다. 예컨대 ‘김윤정’으로 불리는 나는 1952년 1월 6일 세상에 ‘난 것’으로서, 2012년 5월 13일 아침 6시 11분인 이제까지 줄곧 ‘나 있는 것’으로 있어온 나를 일컫는다.4)
한국인은 어떤 것이 세상에 난 뒤로 이제까지 나로서 있어온 모든 것을 싸잡아서 ‘나이’라고 부른다. 나이는 내가 처음으로 세상에 난 뒤로 이제까지 나로서 있어온 나의 시간과 공간을 말하는 동시에 내가 살면서 겪어온 모든 자취를 말한다. 나이는 나의 모든 것을 통째로 담아내는 말이다.
지금의 나는 흘러가는 시간 속에 있는 한 순간의 나를 말할 뿐이고, 나의 모든 것은 나이에 담겨 있다. 한국인이 '나는 나다‘라고 하는 말은 '나는 나이다'라고 하는 말과 같다.
한국인이 ‘나이’라고 말하는 것은 ‘나고 나서’에 바탕을 두고 있다. ‘나고 나서’에서 앞의 ‘나고’는 처음에 난 것을 말하고, 뒤의 ‘나서’는 처음에 난 뒤로 이제까지 이어져 온 과정을 말한다.
한국인은 ‘나고’에 ‘나서’를 붙여서 그 뒤로 이어진 시간을 담아낸다. 이러한 ‘나서’는 ‘가고 나서’, ‘보고 나서’, ‘듣고 나서’, ‘주고 나서’와 같은 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나서’는 ‘나다’와 ‘나’와 ‘나이’가 하나로 엮여 있음을 잘 보여준다.5)
3) 한국인은 솔나무의 잎이나 줄기로써 솔을 만들었다. 솔나무의 뾰족한 잎을 묶어서 만든 솔은 김에 기름을 바르거나 솥의 바닥을 쓸어내는데 썼고, 솔나무의 가느다란 뿌리를 묶어서 만든 솔은 길쌈을 하는데 썼다. 솔나무의 나이테는 활을 쏘아서 맞추는 과녁의 모습과 비슷한 까닭에 과녁을 솔로 말하고, 솔나무의 잎이 송곳처럼 뾰족한 까닭에 송곳을 솔옷으로 말한 것으로 볼 수 있다.
4) 한국말에서 나와 나다의 관계는 다른 말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신과 신다, 길과 길다, 안과 안다, 다와 다다, 일과 일다, 속과 속다 따위가 있다.
5) 한국말에서 나이는 나인 것을 말하는 까닭에 나이를 말할 때, ‘나는 나이가 열 살이다’라고 한다. 이때 나인 것을 뜻하는 나이와 햇수를 뜻하는 살은 뿌리가 다른 말이다. 중국말에서 나이는 단지 햇수를 말하는 까닭에 나이를 말할 때, ‘我十歲(아십세-나는 열 살이다)’ 또는 ‘我年齡十歲(아년령십세-나는 햇수가 열 살이다)’라고 말한다. 이때 나이가 햇수이고, 햇수가 나이이다. 영국말에서 나이는 단지 햇수를 말하는 까닭에 나이를 말할 때, ‘I am ten years old’ 또는 ‘My age is ten’라고 말한다. 이 때 나이는 햇수이고, 햇수가 나이이다. 한국인이 나이와 살을 구분해서 말하는 것은 중국인이나 영국인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다.
나는 난 것으로 있기 위해서 반드시 난 데가 있어야 한다. 난 데는 나 있는 것이 비롯한 터전으로서 나 있는 모든 것은 언제나 난 데를 가져야 한다. 예컨대 난 데 없이 하는 말은 터무니가 없는 말로서, 그것의 뜻을 제대로 살필 수가 없다.6) 이런 까닭에 난 데를 모르는 상태에서는 ‘잘 했다’는 말이 칭찬을 하는 말인지, 비난을 하는 말인지, 그냥 하는 말인지 뜻을 알아 차릴 수 없다.
한국말에서 어떤 것의 난 데를 밝혀주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내다’이고 다른 하나는 ‘낳다’이다.
‘내다’는 어떤 것이 밖으로 모습이 드러나도록 하는 것을 말하고, ‘낳다’는 어떤 것을 이루어서 밖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을 말한다.
한국말에서 ‘내다’는 ‘나+이+다’가 줄어든 말로서, 어떤 것을 낼 수 있는 힘을 가진 임자가 어떤 것이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도록 하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하느님이 나를 냈다’는 것은 하느님이라는 임자가 내가 밖으로 모습을 드러나도록 한 것을 말한다. 이때 하느님은 내가 나게 한 난 데를 가리키는 말이다. 나의 쪽에서 나를 보게 되면 나는 난 것이지만, 하느님의 쪽에서 나를 보게 되면 나는 나게 한 것이다.
한국말에서 ‘낳다’는 ‘나+히+다’가 줄어든 말로서, 임자가 어떤 것을 이루어서 밖으로 모습을 드러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어머니가 나를 낳았다’는 것은 어머니라는 임자가 나를 이루어서 밖으로 모습을 드러나게 한 것을 말한다. 이때 어머니는 나를 나게 한 난 데를 가리키는 말이다. 나의 쪽에서 나를 보게 되면 나는 난 것이지만, 어머니의 쪽에서 나를 보게 되면 나는 낳은 것이다.
하느님과 어머니는 모두 난 데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나게 하는 방법에서 다르다. 하느님은 어떤 것이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도록 하는 임자이기 때문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모든 것이 하느님이 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때문에 한국인은 세상에 널려 있는 모든 것을 하느님이 낸 것으로 말하는 일이 많다. 이때 하느님은 모든 것이 밖으로 모습을 드러내도록 하는 바탕이나 까닭을 뜻한다.
반면에 어머니는 어떤 것을 이루어서 밖으로 모습을 드러나게 하는 임자이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과정을 밟아서 밖으로 나온 것만이 어머니가 낳은 것이 될 수 있다. 이 때문에 한국인은 알이나 새끼와 같은 것만을 어머니가 낳은 것으로 말한다.7)
나는 난 데가 없이 난 것이 아니라 난 데가 있이 난 것이기 때문에 나는 언제나 난 데와 이어져 있다. 난 데는 내가 비롯한 터전이자 뿌리로서 내가 누구인가를 밝혀주는 실마리이다.8)
이 때문에 내가 난 데를 저버리고 나를 오로지 하는 것은 나의 터전과 뿌리를 떠나는 일과 같다.
한국말에서 난 것이 난 데와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잘 보여주는 말이 나오다와 나가다이다.
난 것은 난 데에서 나간 것이면서 동시에 난 데에서 나온 것이다. 사람이 난 것을 난 데의 안에서 보게 되면 나간 것이 되고, 난 데의 밖에서 보게 되면 나온 것이 된다. 예컨대 방의 안에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 문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게 되고, 방의 밖에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 문안에서 나오는 것을 보게 된다. 어떤 사람이 문밖으로 나가는 것과 문안에서 나오는 것은 하나이다.9)
한국인이 말하는 난 것과 난 데와 낸 것과 낳은 것은 내가 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다른 것과 함께 하는 것임을 말한다. 이는 나라는 존재가 낱낱으로 따로 하면서 모두로서 함께 하는 존재임을 말한다.
6) 한국인은 어떤 것이 일어난 까닭을 이해하기 어려울 때에 ‘난 데 없다’, ‘뜬 금 없다’, ‘터무니없다’, ‘어이가 없다’, ‘어처구니가 없다’와 같은 말을 한다. 이는 어떤 것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일이 터진 난 데, 뜬 금, 터무니, 어이, 어처구니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난 데는 일이 생겨난 곳을, 뜬 금은 일이 터진 금을, 터무니는 일이 터진 무늬를, 어이는 칼과 같은 것으로 파놓은 흔적을, 어처구니는 맷돌을 돌리는 자루를 뜻한다.
7) 옛날에 쓰인 시조나 가사나 소설에는 ‘아버지가 나를 낳으시고, 어머니가 나를 기르셨다’는 구절이 자주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말은 한국인이 흔히 ‘어머니가 아기를 낳았다’, ‘어미가 새끼를 낳았다’, ‘암컷이 새끼를 낳았다’라고 말하는 것에 비추어볼 때 뭔가 이상한 말이라는 느낌을 준다.
한국인이 아버지가 나를 낳은 것으로 말하게 된 것은 <시경(詩經)>에 나오는 ‘부혜생아(父兮生我), 모혜국아(母兮鞠我)’를 ‘아버지가 나를 낳으시고, 어머니가 나를 기르셨다’라고 옮겼기 때문이다.
중국인은 하늘이 모든 것을 낸 것처럼 아버지가 나를 낸 것으로, 땅이 모든 것을 기르는 것처럼 어머니가 나를 기르는 것으로 보아서 ‘父兮生我, 母兮鞠我’라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중국인은 나다와 내다와 낳다를 모두 생(生)으로 말하기 때문에 아버지와 어머니를 억지로 구분하게 되자 어쩔 수 없이 부(父)에게 생(生)을 붙이고 모(母)에게 국(鞠)을 붙여서 ‘아버지는 나를 낳고, 어머니를 나를 기른다’로 말하게 되었다.
한국말의 본뜻을 살려서 ‘父兮生我, 母兮鞠我’를 옮긴다면 ‘아버지가 나를 내고, 어머니가 나를 낳다’로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내가 난 데인 것을 또렷하게 담아낼 수 있다.
8) 시작을 뜻하는 비롯하다는 빌어서 하다의 뜻을 지니고 있다. 어떤 것이 시작하는 것은 곧 다른 것을 빌어서 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다른 것의 힘을 빌어서 어떤 것이 일어나도록 바라는 마음에서 하는 행동이 ‘빌다’이다.
9) 이러한 것은 어떤 것이 난 뒤로 이제까지 겪은 일을 보기에 따라서 지나온 일이 또는 지나간 일로 말하는 것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제까지 살아온 과정을 잣대로 보게 되면 지나온 일이 되고, 이제까지 흘러간 시간을 잣대로 보게 되면 지나간 일이 된다.
3. 나의 갈래
한국인은 어떤 것이 나는 것을 여러 가지로 나누어서 말한다. 한국인은 나는 것을 생겨나다, 태어나다, 솟아나다, 돋아나다, 피어나다, 일어나다 따위로 말한다. 생겨나다는 것은 생겨서 나는 것을 말하고10), 태어나다는 타고서 나는 것을 말하고, 솟아나는 것은 솟아서 나는 것을 말하고, 돋아나는 것은 돋아서 나는 것을 말하고, 피어나다는 피어서 나는 것을 말하고, 일어나다는 일어서 나는 것을 말한다.
나 있는 것은 모두 나인 까닭에 세상에는 생겨나고, 태어나고, 솟아나고, 돋아나고, 피어나고, 일어난 것으로서 무수히 많은 나가 있다. 세상에 널려 있는 온갖 것이 다 나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나는 저마다 가지고 있는 자질이 서로 다르다. 한국인이 말하는 ‘나’를 그것이 가지고 있는 자질에 따라서 갈래를 나누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나 가운데서 좋음, 싫음, 어짊, 모짊, 귀신, 천사, 하느님과 같은 것은 형체를 갖고 있지 않은 나인 반면에 흙, 돌, 물, 풀, 나무, 나비, 개, 사람과 같은 것은 형체를 갖고 있는 나이다.11)
우리는 일반적으로 앞의 것을 비물질적인 것, 뒤의 것을 물질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둘째, 형체를 갖고 있는 나 가운데서 흙, 돌, 물과 같은 것은 스스로 나를 이루어나가지 못하는 나인 반면에 풀, 나무, 나비, 개, 사람과 같은 것은 스스로 나를 이루어나가는 나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앞의 것을 무생물, 뒤의 것을 생물이라고 부른다.
셋째, 스스로 나를 이루어나가는 나 가운데서 풀이나 나무와 같은 것은 제가 나인 것을 알지 못하는 나인 반면에 나비나 개와 같은 것은 제가 나인 것을 아는 나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앞의 것을 식물, 뒤의 것을 동물이라고 부른다.
넷째, 제가 나인 것을 아는 나 가운데서 나비나 개와 같은 것은 나를 나로서 말하지 못하는 나인 반면에 사람은 나를 나로서 말하면서 나를 이루어가는 나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나를 나로서 말하지 못하는 나비나 개를 벌레나 짐승으로, 나를 나로서 말하면서 나를 이루어나가는 사람을 모든 것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것으로서 ‘만물(萬物)의 영장(靈長)’으로 부른다.
한국인은 갖가지로 난 것 가운데서 임자로 여길만한 것을 ‘난 이’, ‘난 놈’ 따위로 높여서 부른다. ‘잘난 이’, ‘못난 이’, ‘잘난 놈’, ‘못난 놈’이라고 부르는 ‘난 이’와 ‘난 놈’이 바로 그것이다.
‘잘난 이’와 ‘잘난 놈’은 잘 나 있는 것을, ‘못난 이’와 ‘못난 놈’은 잘 나있지 못한 것을 말한다. 사람은 세상에 널려 있는 숱한 ‘난 이’나 ‘난 놈’가운데서 가장 으뜸이 되는 ‘난 이’와 ‘난 놈’이다. 이 때문에 사람은 잘 나고 못 나는 것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여긴다.
사람은 나를 나로서 말할 수 있게 되면서, 온갖 나를 생각하고 이루고자 할 수 있게 되었다.
사람은 힘 있는 나, 힘 없는 나, 슬기로운 나, 바보스런 나, 멋 있는 나, 멋 없는 나, 좋은 나, 싫은 나, 어진 나, 모진 나, 옳은 나, 그른 나, 맞는 나, 틀린 나 따위를 생각하고, 그 가운데서 제가 바라는 나를 이루어보려고 한다.
10) 생기다는 본디 삼다에 바탕을 둔 삼기다로 쓰였다. 그런데 한자 낱말인 생(生)이 널리 쓰이게 되자, 삼기다의 삼이 생으로 바뀌어 생기다로 쓰이게 되었다. 오늘날에는 삼기다는 쓰이지 않고 삼다와 생기다가 쓰이고 있다.
11) 좋음, 싫음, 어짊, 모짊, 귀신, 천사, 하느님처럼 형체를 갖고 있지 않은 것은 다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형체를 가진 것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 좋음, 싫음, 어짊, 모짊 따위가 있고, 오로지 생각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으로 귀신, 천사, 하느님 따위가 있다.
한국인은 어떤 것이 밖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을 내다라고 말한다. 예컨대 뜻을 내다, 성을 내다, 욕심을 내다, 의견을 내다, 회비를 내다에서 말하는 내다는 뜻, 성, 욕심, 의견, 회비를 밖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을 말한다. 내다는 나이다가 줄어서 된 낱말로서 임자가 어떤 것을 밖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을 말한다.
한국말에서 나다는 어떤 것이 나고 있는 현상을 그냥 드러내는 낱말인 반면에 내다는 어떤 것이 나도록 하는 임자를 드러내는 낱말이다. 예컨대 ‘나는 성이 나다’는 나에게서 성이 드러나고 있음을 말하고, ‘나는 성을 내다’는 나라는 임자가 성이 드러나도록 함을 말한다. 사람은 그냥 나 있는 임자에서 어떤 것을 나도록 하는 임자가 됨으로써 임자를 뚜렷이 드러낸다.
사람은 말로써 생각을 내는 것을 바탕으로 온갖 뜻을 내고, 꾀를 내고, 욕심을 내고, 심술을 낼 수 있게 됨에 따라서 갖가지 것들을 만들어 내어 쓸 수 있게 되었다. 예컨대 사람은 형체를 가진 흙, 돌, 물, 풀, 나무, 나비, 개와 같은 것으로써 온갖 것들을 만들어 내어 쓸 수 있도록 할 뿐 아니라 형체를 가지지 않은 좋음, 싫음, 어짊, 모짊, 귀신, 천사, 하느님과 같은 것으로써 온갖 것들을 만들어 내어 쓸 수 있도록 한다.
사람은 이러한 것에 기대어 문화를 일구어왔다. 사람은 뜻, 꾀, 욕심, 심술 따위를 낼 수 있는 힘을 갖게 됨에 따라, 나를 나답게 만들어보고자 하는 꿈을 갖는다. 사람이 나를 나답게 만드는 것은 나의 몸과 마음을 아름답게 만드는 일로서 이루어진다.12) 사람은 몸과 마음을 아름답게 만들어 나를 나답게 함으로써 사람다움으로 나아가게 된다.
한국인은 나 있는 것을 하나하나로 일컬을 때 낱이라고 말한다. 낱은 나다와 낳다에 뿌리를 둔 말로서, 스스로 난 것이면서 누군가 낳은 것을 뜻한다. 한국인은 여러 개의 낱을 하나하나로 일컬을 때 낱낱이라고 말한다. 낱낱은 나 있는 것들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을 말한다.
한국인은 낱낱이 지니고 있는 자질이나 자격을 나름이라고 말한다. 예컨대 ‘그것 나름으로 뜻이 있다’, ‘제 나름대로 할 수 있는 만큼 했다’라고 말할 때 나름이 그것이다. 낱낱은 나름으로서 저마다 독자성을 가질 수 있다. 나름으로, 나름대로는 낱을 낱으로 부를 수 있는 바탕을 가리킨다.
12) 한국인이 말하는 ‘아름답다’는 낱낱의 개체 또는 개체성을 뜻하는 ‘아름’과 어떤 것을 다한 상태를 뜻하는 ‘답다’가 어울린 낱말이다. 몸이 아름다운 것은 몸을 이루고 있는 여러 가지 것들이 잘 어울리는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하고, 마음이 아름다운 것은 마음으로서 나의 밖에 있는 다른 것과 함께 잘 어울리는 상태에 있는 것을 말한다.
4. 나와 남
세상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난 것들이 여기저기에 널려 있다. 이렇게 널려 있는 난것은 낱낱이 따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어울려 일어나고 있다. 곧 세상은 모든 것이 끊임없이 함께 어울려서 생겨나고, 태어나고, 솟아나고, 돋아나고, 피어나고, 일어나는 곳이다. 따라서 난 것으로서 있는 나의 본질은 갖가지로 펼쳐지는 남, 곧 생겨남, 태어남, 솟아남, 돋아남, 피어남, 일어남에 있다.
한국인은 함께 어울려서 갖가지로 펼쳐지는 남으로 있는 것, 곧 함께 어울려서 생겨남, 태어남, 솟아남, 돋아남, 피어남, 일어남으로 있는 것을 남으로 부른다. 사람들이 ‘남남으로 태어나다’, ‘남남으로 살아간다’라고 말하는 남이 그것이다. 세상은 온통 갖가지 남으로 가득 차 있다.
남은 함께 어울려서 새롭게 나는 것이기 때문에 남과 남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남과 남은 함께 하나의 우리를 이루다가 다시 남과 남으로 갈라서는 일을 거듭하면서 끊임없이 생겨나고, 태어나고, 솟아나고, 돋아나고, 피어나고, 일어나는 일을 한다.
한국인에게 세상은 함께 어울려서 끊임없이 생겨나고, 태어나고, 솟아나고, 돋아나고, 피어나고, 일어나는 남으로 이루어져 있다. 세상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남이 함께 일을 벌이는 때와 곳이다.
한국인은 세상에 난 뒤로 이제까지 나고 있는 하나의 남을 임자로서 일컬어서 나라고 말하면서, 나의 밖에 남아있는 나머지의 남을 모두 싸잡아서 남들이라고 부른다. 이런 까닭에 나라는 임자의 처지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면, 세상은 하나인 나와 수많은 남들로 이루어져 있다.
사람이 어떤 것을 나와 남을 나누기 이전에 나와 남은 남과 남으로서 같은 것이다. 이런 까닭에 남과 남이 나와 남으로 나뉘더라도, 나와 남이 갖고 있는 같은 뿌리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나와 남이 본디 같은 뿌리에서 비롯하고 있음을 잊는 것은 바탕을 저버리는 일이다. 내가 나와 남이 같은 뿌리에서 비롯함을 잊게 되면 나의 바탕을 저버리게 된다.
내가 어떤 것을 남으로 말하는 것은 나와 남이 뿌리를 같이 하는 만큼 내가 남을 나처럼 알아주어야 함을 말한다. 예컨대 내가 어떤 것을 남의 쌀이라고 말하는 것은 내가 남의 쌀과 나의 쌀이 모두 쌀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함께 내가 남의 쌀을 다루는 일을 나의 쌀을 다루듯이 해야 함을 말한다. 이것이 바로 나와 남을 윤리적으로 묶어주는 바탕이 된다. 내가 남을 남으로 말하면서 남을 남으로서 여기지 않는다면, 나는 남에 대한 윤리를 생각하지 않게 된다.
나와 남은 모두 난 것으로서 서로 기대어 나고, 피고, 지고, 살고, 죽는 일을 되풀이하는 관계에 있다.
이런 까닭에 내가 나답게 되려면, 남이 남답게 되어야 한다. 예컨대 내가 나답게 되기 위해서는 바람이 바람답게, 물이 물답게, 풀이 풀답게, 나무가 나무답게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내가 바람, 물, 풀, 나무의 힘을 빌려서 나를 나답게 만들어갈 수 있다. 바람, 물, 풀, 나무가 허물어져 제답게 되지 못하면, 나를 나답게 하는 일 또한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나는 언제나 하나이지만 나의 밖에 있는 남은 적어도 하나 이상이다. 실제로 나의 밖에 있는 남은 아무리 헤아려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나는 남을 바탕으로 나고, 살고, 죽는 존재이다. 이 때문에 나는 남에게 기대어, 그리고 남을 잣대로 나답게 될 수 있다. 한국인은 내가 기대고 있는 남을 잣대로 삼아서 내가 남처럼, 남만큼, 남같이, 남보다, 남부럽지 않게, 남 못지않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때 남은 나를 비추고 재는 거울이자 잣대이다.
한국인은 남 가운데서 내가 마주하고 있는 남을 너라고 부른다. 너는 나의 너머에 있는 사람으로서, 내가 나를 넘어가면 곧바로 너와 마주하게 된다.13) 나는 언제나 나이지만, 나를 넘어서 있는 너는 상황에 따라서 이리저리 바뀔 수 있다. 내가 어느 쪽으로 넘어가느냐에 따라서 이쪽이 너가 될 수도 있고, 저쪽이 너가 될 수도 있다. 나는 나와 곧바로 마주하고 있는 이쪽을 너라고 부르고, 비스듬하게 마주하고 있는 저쪽을 저라고 부른다. 내가 마주하는 바에 따라서 이쪽의 너와 저쪽의 저는 계속 바뀔 수 있다.
13) 너는 넘다, 넘치다와 뿌리를 같이하는 낱말로 볼 수 있다.
내가 남을 마주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차원이 있다. 하나는 내가 남을 단순히 대상으로서 마주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내가 대상을 임자로서 마주하는 것이다.
첫째, 나는 오로지 나의 뜻에 따라서 남을 단순히 대상으로서 마주한다. 예컨대 내가 살아서 꿈틀거리는 낙지를 먹을 때, 나는 오로지 나의 뜻에 따라서 낙지를 단순히 대상으로서 마주한다. 내가 죽어가는 낙지의 아픔을 알아주게 되면 차마 그것을 먹을 수가 없다. 이런 까닭에 나는 갖고, 먹고, 쓰고, 버리는 많은 것을 오로지 나의 뜻에 맡겨진 대상으로서 마주한다. 이때 나와 남이 뿌리를 함께 하는 것은 그저 세상에 함께 나 있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인은 남을 단순히 대상으로서 마주하고 싶을 때, 그것을 ‘~ 것’으로 말하는 일이 많다.
나는 아무 것도 담고 있지 않은 ‘것’에 무엇이든 담아서 ‘~ 것’으로 일컬을 수 있다. 나는 ‘~것’을 통해서 뜻을 오로지할 수 있는 임자로 설 수 있다. 예컨대 ‘먹는 것’인 경우에는 나는 그 것을 먹고 싶은 대로 다룰 수 있고, ‘노는 것’인 경우에는 나는 그것을 놀고 싶은 대로 다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런 까닭에 사람들은 상대하는 사람을 마구 다루고 싶을 때는 사람조차 ‘~ 것’으로 끌어내려서 ‘상 것’, ‘잡 것’, ‘아래 것’과 같은 말로써 일컫고자 한다.
둘째, 나는 남을 나와 같은 임자로서 뜻을 같이 하여 마주한다. 예컨대 내가 다른 사람과 더불어 물건을 사고파는 일을 할 때, 나는 다른 사람을 나와 같은 임자로서 뜻을 같이 하여 마주한다. 또한 내가 집안에 귀여운 개를 키울 때, 나는 그 개를 나와 같은 임자로서 뜻을 같이 하여 마주한다. 이때 내가 남을 나와 같은 임자로서 알아주는 것은 오로지 나에게 달려 있다. 나는 남이 나와 같은 임자임을 깨달고 그렇게 여기는 데까지만 남을 임자로서 알아줄 수 있다.
나와 남이 임자로서 마주하게 되면, 나는 뜻을 오로지 할 수 없고, 일을 함부로 할 수 없는 관계에 놓인다. 나는 남이 임자인 만큼 남을 임자로서 대접해야 한다. 나는 좋은 것과 싫은 것, 고운 것과 미운 것을 남과 함께 해야 한다.14) 이 때문에 뜻을 오로지 하고 일을 함부로 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임자로서 마주하는 것을 꺼리게 된다. 이들은 어쩔 수 없는 경우에만 남을 임자로서 마주하려고 한다. 개인주의, 자유주의, 계약주의, 공리주의는 이런 것이 바탕에 깔려있다.
영국인과 나
영국인은 나를 그냥 I로 말한다. 영국인은 I를 언제나 대문자로 써서 크게 돋보이게 하려고 한다. 한국말과 다르게 영국말에서 나를 가리키는 I와 낳다를 가리키는 bear가 아무런 직접적인 연관을 갖고 있지 않다. 나를 가리키는 I와 나이를 가리키는 age도 아무런 직접적인 연관을 갖고 있지 않다. I는 I이고, bear는 bear이고, age는 age이다.
한국인이 나를 난 것으로 말하는 것과 달리 영국인은 나를 나아진 것, 곧 be born으로 말한다. 영국인에게 나는 스스로 난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낳아진 존재이다. bear는 ‘견디다(to endure)’의 뜻을 지니고 있는데, be born은 견디는 과정을 거쳐서 낳아진 것을 말한다. 이는 기독교에서 천지만물을 모두 하느님에 의해서 ‘지어진(be created) 존재’로서 말하는것과 비슷하다.
14) 한국인이 말하는 ‘차마 그것을 볼 수 없었다’, ‘차마 그를 두고 올 수 없었다’에서 차마는 참아를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참아는 내가 남의 처지나 형편을 알아주는 마음을 갖고 있기 때문에 뜻이나 일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을 참고서 남과 함께 더불어 하고자 하는 것을 말한다.
내가 참아 하는 마음을 갖고 있어야 나와 남이 뜻이나 일을 함께 할 수 있게 되고, 따라서 나와 남이 하나의 우리를 이룰 수 있다. 반면에 내가 참아 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 않으면 나는 뜻이나 일을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기 때문에 나와 남은 하나의 우리를 이룰 수 없다. 그런데 내가 참아하는 마음을 갖고 있더라도, 언제나 그것을 제대로 이루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나는 차마 그것을 볼 수 없었지만, 참고서 보았다’, ‘나는 차마 그를 두고 올 수 없었지만, 참고서 두고 왔다’와 같은 경우이다. 나는 참아 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지만 행동은 그것과는 반대로 이루어졌다. 이런 경우에도 나는 참아 하는 마음을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거침없이 또는 막무가내로 행동하지는 않는다. 참아는 한국인이 갖고 있는 윤리의식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실마리이다.
중국인과 나
중국인은 나를 아(我), 오(吾) 따위로 말한다. 아(我)는 ‘손(⺘-수)에 창(⼽-과)을 잡고서 나를 지키고 있는 모습’ 또는 ‘톱니 모양의 날이 붙은 무기의 모습’을 뜻하는 글자이고, 오(吾)는 언(言)과 뿌리를 같이 하는 글자로서 ‘사람이 입으로 남에게 말하는 모습’을 뜻하는 글자이다.
이런 까닭에 나를 뜻하는 아(我)나 오(吾)는 나다를 뜻하는 생(生)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 그런데 중국인이 ‘나다’를 뜻하는 생(生)을 ‘난 것’의 뜻으로 쓰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선생(先生), 학생(學生), 시생(侍生), 중생(衆生)에서 생(生)은 ‘난 것’으로서 살아가는 임자를 뜻한다.
한국인이 나다와 내다와 낳다를 분명히 나누어서 쓰는 것과 다르게 중국인은 생(生)을 나다, 내다, 낳다에 두루 쓴다. ‘생일(生日)’이라고 말할 때에 생(生)은 나다를 뜻하고, ‘생기(生氣-화를 내다)’라고 말할 때에 생(生)은 내다를 뜻하고, ‘생자(生子-자식을 낳다)’라고 말할 때에 생(生)은 낳다를 뜻한다. 중국인은 이러한 생(生)을 바탕으로 생명(生命), 생식(生殖), 생활(生活), 생성(生成), 생산(生産)과 같은 낱말을 만들어서 쓴다.
중국인은 한국말의 낳다와 비슷한 뜻을 가진 낱말로서 산(産)을 쓴다. 한국인은 산(産)을 ‘낳을 산(産)’으로 새긴다. 그런데 한국말에서 낳다는 주로 어떤 것을 낳는 과정을 뜻하는 반면에 중국말에서 산(産)은 주로 낳은 것의 결과로서 있게 된 것을 뜻한다. 예컨대 생산(生産)은 생기어 낳아진 것을 말하고, 재산(財産)은 낳아진 것으로서 쓰임을 갖는 재물을 말한다.
한국인이 사람이 나서 이제까지 나 있는 것을 두고서 나이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게 중국인도 일생(一生), 생평(生平), 평생(平生), 생애(生涯)를 나이로 말하는 경우가 있다.
5. 저와 우리
한국인은 나를 두 가지로 나누어서 저 또는 우리로 일컫는다. 저는 낱낱으로서 따로 하는 나를 말하고, 우리는 모두로서 함께 하는 나를 말한다.
한국인은 어떤 때에는 나를 둘로 나누어서 저와 우리로서 갈라서 말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저와 우리를 하나로 묶어서 나로서 어울러서 말하기도 한다. 이런 까닭에 한국인은 마누라를 놓고서 때에 따라서 ‘제 마누라’, ‘우리 마누라’, ‘내 마누라’라고 말한다.
한국인 가운데 어떤 이는 우리 마누라가 우리들의 마누라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서 나의 마누라를 우리 마누라라고 말하는 것이 틀렸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한국말의 우리를 영국말의 we와 같게 여겨서, 우리 마누라를 our wives로 풀이하기 때문에 그런 생각을 한다. 영국말에서 our wives는 우리들의 마누라들로서 한국인이 말하는 나의 마누라가 아니다.
한국인이 말하는 우리 마누라는 my wife를 가리킨다. 한국말의 우리와 영국말의 we가 어떤 점에서 같고 다른지 제대로 살펴보지 않으면, 앞선 것처럼 이상한 주장을 펼치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한국말에서 우리는 나와 남이 임자로서 함께 하는 것을 말한다. 나와 남은 우리가 됨으로써 나와 남을 넘어서 하나의 모두를 이룬다. 그런데 한국인이 우리 마누라, 우리 가족, 우리 학교, 우리 이웃, 우리 나라, 우리 세상 따위로 말하는 우리에는 몇 개의 갈래가 있다. 우리의 갈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① : 따로하는 우리
한국인은 나와 남이 저마다 따로 하는 바탕 위에, 어떤 뜻도 같이 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냥 함께 하고 있는 우리를 말하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한국인이 ‘우리 고장’, ‘우리 세상’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아무런 뜻도 같이 하지 않은 상태에서 나와 남이 시간과 장소를 함께 하는 정도로 매우 느슨하게 엮여 있다. 이러한 우리는 같은 고장이나 같은 세상을 바탕으로 우리를 이루고 있지만, 뜻에서는 저마다 따로 하는 남남의 상태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둘째, 우리② : 같이 하는 우리
한국인은 나와 남이 저마다 따로 하는 바탕 위에, 어떤 뜻을 같이 하는 상태로서 함께 하고 있는 우리를 말하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한국인이 ‘우리 사회’, ‘우리 나라’라고 말할 때, 우리는 나와 남이 사회적으로 또는 국가적으로 뜻을 같이 하는 관계로 묶여 있다. 이러한 우리에서 나와 남은 뜻을 같이 하는 만큼 책임을 지는 동시에 권리를 갖는다. 나와 남은 주어진 책임을 지지 않거나, 권리가 아닌 것을 가지려고 하면 비난이나 처벌을 받는다.
셋째, 우리③ : 닫힌 우리
한국인은 나와 남이 이쪽과 저쪽으로 함께 어울려서 하나의 모두를 이루고 있는 우리를 말하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한국인이 ‘우리 남편’, ‘우리 가족’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나와 남이 저마다 따로 하는 것을 넘어서 이쪽과 저쪽으로 함께 어울려 있는 것으로서, 하나의 모두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우리에서 나와 남은 모든 것을 우리라는 바탕 위에서 하게 된다. 나와 남은 책임을 지는 일과 권리를 갖는 일을 우리로서 모두 함께 한다. 나와 남이 우리로서 모두 함께 하기 때문에 상황에 따라서 이쪽 또는 저쪽이 더할 수도 있고, 덜할 수도 있다. 이러한 우리에서 나와 남은 우리를 위해서 하지 않을 때 비난이나 처벌을 받는다.
우리③이 가리키는 우리는 나와 남이 오로지 우리끼리만 함께 하는 닫힌 우리를 말한다. 남편과 아내가 오로지 우리끼리만 하는 까닭에 서로 ‘우리 남편’, ‘우리 아내’라고 부를 수 있다.
이러한 우리는 안으로 닫혀 있는 까닭에 우리의 밖에 있는 남을 단순한 대상으로 여기기 쉽다.
예컨대 한국인이 ‘우리 자식만을 위해서’, ‘우리 가족만을 위해서’, ‘우리 회사만을 위해서’ 남을 생각하지 않고 저들끼리만 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③에 볼 수 있는 닫힌 우리이다.
넷째, 우리④ : 열린 우리
한국인은 나와 남이 이쪽과 저쪽으로 함께 어울려서 하나의 모두를 이룬 가운데 우리의 밖에 남아 있는 나머지 것들과 다시 함께 하려고 하는 우리를 말하는 경우가 있다.
예컨대 한국인이 ‘모든 우리’, ‘우리 모두 다함께’라고 말할 때, 우리는 나와 남이 우리로서 함께 하나로 어울리는 것에 머물지 않고 우리의 밖에 있는 나머지 것들과 다시 함께 어울리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우리는 동심원을 그리면서 계속 밖으로 커져나가는 열린 우리이다. 열린 우리에서 나와 남은 우리의 안에 있는 것을 고루고루 하고, 우리의 밖에 있는 것을 두루두루 하려고 한다. 열린 우리는 고루고루와 두루두루를 통해서 우주의 끝까지 뻗어나갈 수도 있다.
한국인은 저마다 따로 하는 나와 남이 함께 어울려 하나의 우리를 이루어 살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이 때문에 한국인은 모든 것을 하나인 우리에 담아서 우리 마누라, 우리 남편, 우리 자식, 우리 가족, 우리 학교, 우리 고장, 우리 회사, 우리 나라, 우리 세상 따위로 말한다.
나와 남이 함께 어울려 하나의 우리를 만드는 까닭에 나와 남이 달라지면 우리 또한 달라진다. 한국인은 달라지는 우리에 맞추어 나와 남의 지위를 끊임없이 바꾸어나간다. 이 때문에 한국인은 내가 그에게 말한 것을 두고서도 우리를 이루고 있는 임자의 지위에 따라서 말을 달리 한다.
예컨대 한국인은 ‘나는 그에게 말했다’, ‘나는 그분께 말했다’, ‘나는 그분께 말씀을 드렸다’, ‘제가 그분께 말씀을 드렸다’, ‘제가 그분께 말씀을 올렸다.’ 따위로 말을 달리한다.
한국인은 어울림에 바탕을 둔 우리 속에서 나와 남의 지위를 계속 바꾸어 가기 때문에 나를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인 것으로 본다. 이 때문에 한국인에게 나는 끊임없이 일어나는 존재로서 매우 역동적이다. 한국인은 이러한 역동성이 줄게 되면 처지고 가라앉아 우울에 빠진다.
한국인은 나와 남이 우리를 이루고 있을 때, 내가 남을 나보다 더 살뜰하게 여길 때, 남을 님으로 높여서 부른다. 한국인이 부모님, 형님, 아우님, 아주버님, 아주머님, 도련님, 선생님, 사장님, 회장님 따위로 부르는 님이 바로 그것이다.
내가 남을 님으로 끌어 올려서 우리로서 함께 어울리게 되면, 나는 님이 갖고 있는 고움과 미움을 함께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고운 것과 미운 것을 함께 정으로 받아들임으로써 님을 기리고 받들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고운정과 미운정이다. 나에게 님은 좋아도 님이고 나빠도 님이며, 즐거워도 님이고 괴로워도 님이다.
김소월은 이러한 님을 <진달래꽃>에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 고이 보내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이 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오리다’라고 읊고 있다. 내가 님을 기리고 받들어 우리로서 함께 어울리는 일은 나를 더욱 큰 나로 만들어나가는 지름길이다.
영국인과 우리
영국인은 저마다 따로 하는 낱낱의 나를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영국인은 저마다 따로 하는 셀프(self)나 에고(ego)에 바탕을 둔 개인주의(Individualism)를 터전으로 삼아 낱낱의 나를 실현하려고 한다.
영국인은 저마다 따로 하는 낱낱의 나가 이루고자 하는 것을 최대한으로 많이 이룰 수 있도록 자유(freedom), 평등(equality), 권리(right), 의무(duty) 따위를 엄격히 규정하려고 한다.
영국인은 필요가 있을 때에만 저마다 따로 하는 낱낱의 나를 한 개의 모두로 만들려고 한다.
이들은 저마다 따로 하는 낱낱의 나를 한 개의 모두로 묶기 위한 필요와 방법을 명확히 해야한다. 영국인은 이러한 것을 자유, 계약, 권리, 권한, 책임, 의무 따위로 분명히 하려고 한다.
영국인이 저마다 따로 하는 낱낱의 나를 나의 바탕으로 삼는 까닭에 일인칭 대명사인 I의 복수형으로서 말하는 We는 나와 같은 것으로 이루어진 나들을 뜻한다. 이런 까닭에 영국인이 말하는 we는 한국인이 말하는 우리①과 우리②에 가깝다.
영국인이 ‘We had a copious rainfall this summer(금년 여름에는 비가 많았다)’라고 말할 때 we는 그냥 함께 하는 우리로서 우리①에 가깝다. 영국인이 ‘We are brothers of same blood(우리는 핏줄을 나눈 형제이다)’, ‘We should take more care of our historic buildings(우리는 우리의 역사적 건물을 더욱 잘 보살펴야 한다)’라고 말할 때 we는 뜻을 함께 하는 우리로서 우리②에 가깝다.
영국인이 ‘We are brothers of same blood’라고 말할 때에도 we는 저마다 따로 하는 형제들이 하나의 핏줄임을 말한다. I의 복수형인 we, Be의 복수형인 are, brother의 복수형인 brothers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다.
영국인이 아무리 개인주의를 중요하게 여긴다 하더라도, 실제의 삶에서는 한국인이 말하는 우리③과 우리④가 있을 수밖에 없다. 사람이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 일은 어디서건 비슷한 바탕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영국인은 우리③과 우리④를 우리②에 담아서 포괄적으로 말한다. 이런 까닭에 we는 매우 넓은 뜻을 담고 있어서 문장을 잘 따져봐야 그 뜻을 제대로 알 수 있다.
중국인과 우리
중국인은 저마다 따로 하는 낱낱의 나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중국인은 낱낱의 나를 확실하게 지키려고 한다. 중국인이 낱낱의 나를 서로 잘 지킬 수 있도록 하는 수단이 예(禮), 예의(禮義), 예의(禮儀), 예절(禮節) 따위이다. 반면에 한국인은 나와 남이 가까워지면 예의나 예절을 허물이 없는 상태로 나아가려고 한다.
중국인은 저마다 따로 하는 낱낱의 나를 그대로 두면 다툼과 싸움이 일어난다고 생각하여 반드시 한 개의 모두를 만들려고 한다. 저마다 따로 하는 낱낱의 나를 한 개의 모두로 만들기 위해서 음양(陰陽), 태극(太極), 동포(同胞), 대동(大同), 천하(天下) 따위를 강조하는 것이 중국인의 집단주의이다.
중국인은 오랫동안 하늘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을 하나로 묶는 사람을 뜻하는 천자(天子)를 받들어 왔다. 천자는 하늘의 아들로서 정치와 교화를 통해서 세상을 하나로 만드는 구실을 한다.
중국인의 집단주의는 내가 남을 나에게 담아서 나와 남을 하나처럼 만드는 것을 말한다. 이런 까닭에 중국인은 세상의 모든 것을 아(我-나)에 담아서 아처(我妻-내 처), 아가(我家-내 집),아학교(我學校-내 학교), 아공사(我公司-내 회사), 아국(我國-내 나라), 아세계(我世界-내 세상) 따위로 말한다.
중국인은 영국인이 we에 담아서 말하는 것조차 아(我)에 담아서 말하려고 한다.
중국인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나와 같게 만들어서 나를 벗어나지 못하게 하려는 욕망이 매우 강하다. 중국인이 말하는 중심(中心), 중화(中和), 중용(中庸), 중화(中華), 중국(中國), 천하(天下), 천자(天子), 일통(一統), 대동(大同), 물아일체(物我一體)와 같은 것은 모두 이러한 욕망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이러한 욕망에 기대어 중국인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강력한 제국을 이루어왔다.
중국인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나와 같게 만들기 위해서 먼저 몸과 마음을 갈고 닦아서 나를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보았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어야, 나와 같아진 사람들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내가 나쁜 사람인 경우에는 나와 같아진 사람들도 나쁜 사람이된다.
이런 까닭에 중국인은 나의 몸과 마음을 갈고 닦는 일을 매우 강조해왔다. 이러한 바탕에서 나온 것이 바로 중국인이 말하는 ‘나를 닦아서 남을 평안케 하는 일(修己以安人)’이나, ‘나를 닦아서 남을 다스리는 일(修己治人)’이나 ‘나를 닦아서 가정을 다스리고 나라를 다스리고 천하를 평안하게 하는 일(修身齊家治國平天下)’이다.
중국인이 말하는 아문(我們)은 나와 같은 것들로 이루어진 나들을 뜻한다. 아문(我們)은 나와 같은 사람이기는 하지만, 아직 나와 함께 하나가 되지 못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말한다. 이 때문에 중국인이 말하는 아문(我們)은 한국인이 말하는 그냥 함께 하는 사람으로서 우리①에 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