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오규 소라이․다자이 슌다이와 정약용 인성론의 비교
- 논어(論語) 「양화(陽貨)」편 2-3조목의 해석을 중심으로-
백 민 정
** 연세대학교 국학연구원 전임연구원
【주제분류】일본유학, 조선후기실학
【주요어】논어 , 성삼품설, 상지․하우, 기질지성, 성인
【요약문】논어고금주 에서 가장 중요한 조목 중 하나는 <성상근(性相近), 습상원(習相遠)> 조목이다. 이곳에서 다산은 성기호설로 불리는 자신의 인 성론을 피력하기 위해 주희뿐 아니라 오규 소라이와 다자이 슌다이 같은 일본 고문사학자들과도 철학적으로 논쟁한다. 주희는 본연․기질로 상징되 는 형이상학적 인성론을 전개했고, 소라이와 슌다이는 본연지성 개념을 폐 기하는 대신 기질지성만으로 성삼품설을 주장했다.
한편 정약용은 본연․ 기질론과 성삼품설을 함께 비판한다. 고문학사자인 소라이와 슌다이는 특히 논어를 정치적으로 독해했으며, 성인을 문명제도를 제작한 창조자, 절대적 권위를 지닌 자로 이해했다. 그러나 다산에게 성인은 모든 사람과 동일한 윤리적 역량[性]을 가진 존재였다. 그는 성인인 공자 또한 위대한 정치가, 문물의 제작자라기보다 우선 윤리적 인격자라고 이해했다. 일본 고문사학자들과 대비되는 다산의 인성론은 모든 인간의 주체적 노력과 의지를 옹호한다는 측면에서 보다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Ⅰ. 들어가는 말
정약용(丁若鏞:1762-1836)은 종종 자신의 사유체계를 수사(洙泗) 의 학문이라고 표방했다. 이것은 그가 우선 공자와 맹자로 상징되는 선진유학의 정신을 새롭게 복원하려고 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 결 과로 나온 것이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 를 포함한 유학 경전들에 대한 일련의 주석서들이다. 그러나 다산의 시대를 지배하고 있던 주 자학은 여전히 공자와 맹자의 정신을, 즉 도통(道統)의 맥을 계승하 고 있다고 자부하지 않았는가? 또한 그 당시 누가 사서집주(四書集注) 를 비롯한 주희(朱熹:1130-1200)의 경전해석 방법을 철저히 부 정할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공맹의 정신을 다시 되찾겠다고 한 정약용의 생각, 그리고 그의 주석서들은 주자학이 공맹을 해독하는 데 있어 부적절했다는 점을 선언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산의 경전해석 방법은 과연 주희의 관점과 얼마나 멀어져 있었 을까? 이 문제를 숙고해볼 때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대상 이 바로 공자의 언행이 담겨 있는 논어(論語) 라는 경전이다. 선진 유학의 정신은 논어 라는 경전 하나에 응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 이 아닐 것이다. 그는 자신의 중형(仲兄) 정약전에게 보내는 서신에 서 다음과 같이 논어고금주 의 탄생을 알리고 있다. “평소 논어 에 대한 고금의 여러 학설들을 수집하였던 것이 많지 않았던 것은 아닙 니다. 그렇지만 한 장씩 대할 때마다 고금의 여러 학설들을 모조리 고찰하여 그 중에서 좋은 것을 취했다가 간략히 기록하고, 그 중에서 의견이 대립되고 있는 것을 취했다가 논평하여 단정했으니, 이제야 이 밖에 새로 더 보충할 만한 것이 없다고 말하겠습니다.”1)
1) 平生蒐輯論語古今諸說, 不爲不多. 每臨一章, 盡考古今諸說, 取其善者而節錄之, 取其訟者而論斷之, 始謂此外無可新補者.( 詩文集「答仲氏」20:29)
논어고금주는 단순한 문헌학적 주석서가 아니라 철학적 논쟁서로도 기억될 필요가 있다. 정약용은 고금의 여러 학설들을 단순히 모 으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해 자신이 가진 철학적 입장 을 적극적으로 개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필자는 논어고금주 가운데서도 특히 공자가 말한 다음 구절이 매우 의미심장하다고 보 았다. “성은 서로 가깝지만 습관은 서로 멀다. 오직 상지와 하우만이 옮겨지지 않는다.”2)
앞으로는 편의상 이 구절을 간략히 <성상근(性相近)> 조목이라고 부르겠다. 이 조목은 주희의 사서집주 에서는 논 어(論語) 「양화(陽貨)」편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조목으로 분리되어 있다. 필자가 이 조목에 대한 다산의 평가에 주목했던 것은 우선 다음 과 같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는 <성상근(性相近)> 조목에 대 한 정약용의 해석이 그 양에 있어서도 논어고금주 의 다른 조목들 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상당한 장문이라는 점이다.
둘째는 이 조 목에 대한 정약용의 논평이 주희는 물론이려니와 일본 고학파 유학 자들인 오규 소라이(荻生徂徠:1666-1728), 다자이 슌다이(太宰春臺:1680-1747) 등과의 철학적 논쟁을 담고 있다는 점이다.3)
2) 子曰, “性相近也, 習相遠也. 唯上知與下愚不移.”( 論語「陽貨」)
3) 다산과 일본 고학파 유학자들과의 관련성은 강재언(1986) 교수의 논문을 필두로 해서, 그 이후 여러 연구자들에 의해 주목받아 왔 다. 특히 김언종(2002), 하우봉(2002a / b) 교수가 집중적으로 일 본 고학파에 대한 다산의 입장 변화를 여러 서신들과 다산의 시, 다산 저술의 일부 내용 등을 바탕으로 규명해왔다. 김언종 교수 는 다산과 소라이학파, 즉 훤원학파 사이에 나타난 유사한 관점들을 논어고금주 의 특정한 조목들을 중심으로 분석한 반면, 하우봉 교 수는 다산 전후 실학자들의 일본관을 전반적으로 다루고 있다. 또 한 다산과 고학파 유학자들 사이의 분명한 입장 차이도 함께 분석 했다. 한편 금장태(2004) 교수는 논어 가 아닌 대학 과 중용 이 란 텍스트를 통해 다산과 오규 소라이의 입장 차이를 설명한 바 있다. 금장태 교수는 다산이 심성론적 수양과 사회제도의 정비를 동시에 중시한 반면 소라이는 성인의 역할을 예악형정을 정비하는 외재적 측면의 업무로 한정했다고 총평한다. 그러나 어떤 결론에 이르더라도 위의 연구자들은 모두 다산이야말로 당시 누구 보다도 일본 유학의 긍정적 측면을 깊이 고려했던 핵심 인물이라고 보고 있다. 중국 중시와 일본 경시의 당연한 시대적 정서 속에서 일본의 학문과 사유경향을 배우려고 했다는 점에서 다산을 높이 평가한 것이다. 본 글에서도 이런 선행 연구자들의 문제 의식을 이어 받아 다산과 소라이학파 사이의 인성론적 입장 차이를 좀 더 규명해보고자 한다.
<성상근(性相近)> 조목을 분석하면서 다산은 우선 기질지성(氣質之性) 개념과 관련된 주희의 관점을 소개하고 있다.4) 그렇다면 주자학 의 경전 해석방법을 넘어서려고 했던 다산이 관심을 가질 비판의 표적은, 주희 자신이 강조했던 본연과 기질에 대한 논의였을 것이다. 그런데 본연과 기질에 대한 논의를 비판하면서도 동시에 다산은 주 희 자신이 이미 한계가 있다고 평가한5) ‘성삼품설(性三品說)’을 집중 적으로 문제 삼고 있다. 그렇다면 왜 다산은 또 다시 성삼품설을 공 격하려고 했던 것일까? 때늦게 그가 한유(韓愈:768-824)에 의해 제안된 성삼품설을 다시 공격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것은 한유의 주장이 일본 고문사학에서의 사유 전통,6) 특히 다자이 슌다이의 논어 해석에서 강하게 되살아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4) “여기(<성상근> 조목)에서 성이라고 말한 것은 기질을 겸하여 말한 것이다. 기질지성에는 본래 좋고 나쁨의 차이가 있다.”[此所謂性, 兼氣質而言者也. 氣質之性, 固有美惡之不同矣.]( 論語集注「陽貨」)
5) “가령 맹자의 경우 성선에만 집중했으니 이것은 얼마간 성만을 논한 것이니 기를 논하지 못함이 있었다. 한유의 삼품설의 경우 이것은 기만을 논한 것이지 성을 논하지는 못하였다.”[若孟子專於性善, 則有些是論性不論氣. 韓愈三品之說, 則是論氣不論性.] 朱子語類59:47
6) 일본의 고학 전통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첫째는 이토 진사이가 표방한 것으로 인간의 내면성을 강조하던 고의 학(古義學)이라고 불리는 전통이고, 두 번째는 오규 소라이와 다자이 슌다이가 표방한 것으로 고대 경전들의 절대성 혹은 객관성을 강조하던 고문사학(古文辭學)이라고 불린 전통이다. 고학 전통 에서 고의학과 고문사학의 연속성과 불연속성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고할 수 있다: 마루야마 마사오, 김석근(옮김), 일본정치 사상사연구 (통나무, 1995), p. 189-197.
본 글은 우선 다자이 슌다이와 정약용 사유의 차이점을 해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지금까지의 평가에 따르면 다산이 직접 살펴본 것으로 분명히 확인되는 것은 일본 고학파 경전 주석서인 슌다이의 논어고훈외전(論語古訓外傳) 한 종류밖에 없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 다.7) 그러나 사실 슌다이의 관점은 대부분 그의 스승인 오규 소라 이8)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따라서 인성과 관련된 정약용과 슌다이 사이의 철학적 차이점은, 결국 정약용과 소라이 사이의 차이점으로 환원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본 논문을 통해 소라이와 슌다이가 어떻게 인성을 이해했기에 성삼품설을 다시 복원시키게 되었는지, 나아가 정약용이 성삼품설을 비판하는 논리가 무엇인지를 해명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정약용의 인성론이 지닌 고유성을 보다 분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7) 김언종 교수는 다산이 쓴 「일본론1」에서 그가 ‘古學先生 伊藤氏 가 지은 글’이라고 표현한 것을 볼 때 정약용이 슌다이의 논어 고훈외전 외에도 이미 고학파 선배인 이토오 진사이의 글 또한 보았을 것이라고 가정했다. 특히 다산이 본 글이란 1717년 일본 에서 간행된 고학선생시문집 일 것이고, 통신사행원들을 통해 들어온 이 저서를 다산이 보았을 것이라고 가정했다.(김언종 (2002), p.78) 그런데 같은 글 다른 곳에서는 다산이 입수한 확실 한 서적으로는 슌다이의 논어고훈외전 밖에 없어 보이지만, 이 저작에는 진사이와 소라이의 견해가 부분씩 모두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다산이 직접 진사이, 소라이 글의 원본을 보지 못했다고 해서 다산의 집대성적 가치가 경감되는 것은 아니라고도 설명하 고 있다.(김언종(2002), p. 81)
한편 하우봉 교수는 다산의 시작 품, 서신, 일본관계 저술들, 경전 주석서들을 엄밀히 살펴본 결과 다산이 여러 종류의 일본 유학서적을 살펴본 것이 확실하지만, 직접 일본유학 관계 저술을 언급하고 다산이 논평한 것으로 지 금까지 분명하게 확인된 것은 다자이 슌다이의 논어고훈외전 하나라고 밝히고 있다.(하우봉(2002b), p.222 주석43번 참조)
8) 오규 소라이의 성장배경과 어린 시절의 사상적 경향에 대한 흥미로운 연구로는 다음 책에 실려 있는 쿠로즈미 마꼬토(黑住眞) 의 글을 참고해볼 수 있다: 竹內整一(外), 古學の思想(ぺりかん社, 1994), p. 74-107.
Ⅱ. 다자이 슌다이와 정약용의 정치적 입장 차이
논어고금주 를 집필할 때 정약용은 슌다이의 논어 주석서인 논 어고훈외전(論語古訓外傳) 9)을 상당히 많이 참고했다. 이 점에서 슌다 이의 논어고훈외전 은 정약용의 입장에서 볼 때 논어 에 대한 ‘최 근의 주석’, 즉 ‘금주(今註)’를 대표하는 것 가운데 하나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필자가 이 글에서 중점적으로 다루 려고 하는 <성상근> 조목에서는, 슌다이의 논어고훈외전 을 상징하 는 “슌다이가 말했다(純曰)”는 표현이 등장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필 자는 정약용이 이 조목과 관련해 주희가 이미 비판했던 ‘성삼품설(性三品說)’을 다시 집요하게 문제 삼은 데에는 분명 성삼품설을 새롭게 제기했던 슌다이의 입장이 연관되어 있다고 가정해 보았다.
논어고훈외전 자체를 통해서 우리는 슌다이의 성삼품설이 어떤 논리로 구성되어 있는지 어렵지 않게 복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다산의 논어고금주 를 통해 슌다이와 정약용의 정치철학적 입장 차이를 먼저 살펴볼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 중국철학사에서 인성론과 정치철학은 매우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전개되었다. 가령 성 선설은 개체의 자율적인 수양 능력을 최대한 긍정하기 때문에, 결국 덕치라는 정치이념과 궤를 같이 하게 되었다. 한편 성악설은 개체의 수양 능력을 부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결국 예치나 법치 같은 정치 이념을 강조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인성론과 정치철학 사이의 연관성을 염두에 두면, 슌다이와 정약용의 정치 이념을 비교하는 것 은 인성론을 다루는 데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줄 것이라고 본다.
슌다이와 정약용의 정치 이념을 살펴보기 위한 실마리는 논어 「태백(泰伯)」편에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공자는 백성들을 따라 오게 할 수는 있지만 알게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10) 공자가 말한 이 구절을 읽어보면 그가 일종의 우민(愚民) 정책을 제안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성인으로 칭송받는 공자가 어떻게 우민 정책에 해당되는 입장을 피력할 수 있었겠는가? 그래서 주희는 정이(程頤: 1033-1107)의 다음과 같은 해설을 인용하면서 이런 종류의 혐의를 깨끗이 해소하려고 한다.
9) 현재 이 책은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과 국립중앙도서관에 1745 년이라고 기록된 목판본으로 인쇄된 것이 보관되어 있다: 太宰春臺, 論語古訓外傳(전20권), 江都書肆嵩山房刊本, 1745
성인이 가르침을 펼 때 집집마다 모두 깨닫기를 원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러나 성인은 백성들로 하여금 알게 ‘할 수는 없었고(不能使)’ 단지 그들로 하여금 따라오게 할 수 있었을 뿐이다. 만일 성인이 백성 들로 하여금 알게 ‘하지 않았다(不使)’고 말한다면, 이것은 후세의 조 삼모사의 기술이지 어찌 성인의 마음이겠는가?11)
주희의 인용문을 살펴보면, 정이가 결국 성인인 공자는 우민 정책 을 지지하지 않았다고 주장한 것을 알 수 있다. 결과적으로 우민 정 책처럼 보이게 되는 것은 오히려 백성들의 무지 때문이라고 보는 관점도 잠시 엿볼 수 있다. 성인이 최선을 다해 노력을 했지만 끝내 백성들로 하여금 알게 ‘할 수는 없었기(不能使)’ 때문이다. 이곳에서 정이는 알게 “해서는 안 된다(不可使)”라고 풀이될 수 있는 논어 의 원문을 알게 ‘할 수 없었던’ 일로 변형시키면서 성인의 태도를 가장 긍정적인 방식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만약 정이의 이런 해석이 타당 하다면, 공자는 우민 정책을 피력했던 인물이 아니라 깨우쳐 주려고 해도 끝내 알게 할 수는 없었던 백성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한 인물로 그려진다. 그렇다면 논어 에서의 이 구절에 대한 슌다이와 정약용의 이해 방식은 어떠했을까? 우선 슌다이의 경우를 먼저 살펴 보도록 하겠다.
10) 子曰, 民可使由之, 不可使知之.( 論語「泰伯」)
11) 聖人設敎, 非不欲人家喩而戶曉也, 然不能使之知, 但能使之由之爾. 若曰聖人不使民知, 則是後世朝四暮三之術也, 豈聖人之心乎?( 論語集注「泰伯」)
대개 천하 사람들에는 군자도 있고 소인도 있다. 반드시 한 사람의 군자가 여러 백성들을 다스린 뒤에야 천하가 다스려진다. 만약 천하 사람들을 집집마다 깨닫게 하여 백성들이 모두 군자가 되게 한다면, 이것은 천하에 백성들이 없게 되는 것이다. 백성들이 없다면 국가도 없다. 그러므로 비록 요순의 세상이라고 할지라도 백성들은 스스로 백성들일 뿐이니, 윗사람이 그들을 깨우쳐줄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진나라 사람들이 백성들을 어리석게 만든 것과 같은 경우는, 백성들 을 깨닫도록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12)
주희나 정이의 입장과는 달리 슌다이는 지금 공자가 우민 정책을 강력하게 피력했던 것처럼 이 문맥을 해석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가 공자를 폄하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단지 그는 공자를, 위대한 도덕군자라기보다는 위대한 정치철학자로 보고 싶었을 뿐이다. 물론 이러한 슌다이의 관점은 자신의 스승 오규 소라이의 독특한 성인(聖人)관으로부터 출현한 것이다.13)
소라이에게 있어 성인은윤 리적 존재라기보다 오히려 통치의 규범, 즉 도(道)를 창조한 제작자 를 의미했기 때문이다.14) 자신의 스승과 마찬가지로 슌다이에게 있어서도 정치란 기본적으로 군주정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군주정은 한 사람의 군주와 다수의 백성들로 구성되며, 모든 권력과 교육은 군주 일인으로부터 나온다는 점을 긍정하는 정체(政體)이다.
사실 슌다이가 스승을 따라 우민 정책을 긍정했던 이유는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만약 백성들 모두의 동등한 자발적 수양 능력을 긍정할 경우, 이런 관점은 결국 통치자, 즉 군자의 사회적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슌다이가 오직 군자만 이 자발적으로 깨우칠 수 있는 존재이고, 백성들은 그런 군자들에 의해 타율적으로만 교육받을 수 있는 존재라고 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15) 그러나 흥미로운 점은 우민 정책 자체가 백성들의 자율성을 어느 정도 전제해야만 작동 가능하다는 점이다. 만약 백성 들이 본성적으로 이미 어리석기만 하다면, 그들을 어리석게 만들려는 정치적 의도 또한 무용지물이 되고 말 것이다. 바로 이런 관점에서 정약용은 슌다이의 입장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슌다이의 생각은) 잘못되었다. 공자는 자신의 입으로 말하길 ‘가르치는 데는 구별이 없다’고 하였는데, 여기서 이와 반대로 ‘백성들이 알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면, 어찌 이런 이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 성인의 마음은 지극히 공정하고 사사로움이 없다. 그러므로 맹자는 ‘모든 사람이 요임금과 순임금처럼 될 수 있다’고 말했던 것이다. 어찌 차마 한 개인의 사사로운 욕망으로 백성들을 어리석게 만들어 자신의 지위를 굳건히 하고 다른 사람이 요임금과 순임금이 될 수 있는 길을 막을 수 있겠는가? 가령 자신의 지위를 굳건히 하고자 한 다면, 또한 마땅히 백성들을 예의로 가르쳐서 군주를 친하게 여기고 어른을 위해 죽을 줄 알도록 만들어야 할 것이다. 그런 뒤에야 자신의 국가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백성들을 어리석게 만들어 자신의 지위를 굳건히 하고자 한다면, 일 년도 못되어 그 국가는 반드시 멸망 하게 될 것이다. 진나라의 경우가 그 증거이다.16)
12) 夫天下之人, 有君子焉有小人焉. 其必一君子治衆民, 然後天下治. 若使天下之人, 家諭戶曉, 而民咸爲君子, 是天下無民也. 無民, 非國也. 故雖堯舜之世, 民自民矣, 非上之人不能喩之. 如秦人愚黔首然, 以其不可故也.( 論語古今註4:4)
13) 오규 소라이에게 ‘성인’이란 존재는 절대적인 진리의 근거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몇몇 학자들은 성인에 대한 소 라의 관념을 성인에 대한 ‘신앙’이라고까지 이야기하기도 한다: 미나모토 료엔, 박규태․이용수 옮김, 도쿠가와 시대의 철학사 상 (예문서원, 2000), p. 84-87.
14) “선왕의 도는 선왕이 만든 것이지 천지자연의 도가 아니다.”[先王之道, 先王所造也, 非天地自然之道也.]( 弁道4)
15) 하우봉 교수는 다자이 슌다이가 ‘君子=士大夫, 小人=庶民’의 고정된 도식을 가지고 봉건적인 정치적 입장에서 논어 를 분석한 반면, 다산은 군자와 소인이 모두 중인(中人)에 해당하는데 오직 자신의 수양 노력에 따라서만 구분될 뿐이라는 평등적인 인간관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고 설명했다.(하우봉(2002b), p.259 주석 103번 참조) 한편 조성을 교수 역시 기호남인계 실학자인 다산과 일본 고학자 다자이 슌다이의 입장을 비교하면서, 슌다이가 군자와 소 인의 관계를 신분적 차이로 설명한 반면 다산은 도덕적 자질과 능 력에 따른 차이로 설명했다고 지적했다.(조성을(2005), p.74)
16) 非也. 孔子親口自言曰有敎無類, 而又反之曰不可使知之, 有是理乎? (…) 聖人之心, 至公無私. 故孟子曰人皆可以爲堯舜. 豈忍以一己之私欲, 愚黔首以自固, 阻人堯舜之路哉? 設欲自固, 亦當敎民以禮義, 使知親上而死長. 然後其國可守. 眞若愚黔以自固, 則不踰朞月, 其國必亡. 秦其驗也.( 論語古今註4:4)
정약용은 슌다이의 독해에 대해 단호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우선 그는 슌다이가 생각하고 있던 성인의 이미지가 옳지 않다는 점을 지적한다. 슌다이의 생각이 옳다면 결국 군자는 자신의 정치적 지위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 백성들을 어리석도록 만드는 기만적인 존재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약용은 어떻게 성인이 그 런 기만적이고 이기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지 반문하고 있다. 이 점에서 볼 때 우선 정약용이 생각하고 있던 성인과 슌다이가 바라 본 성인의 모습이 판연히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전자에게서 성인이란 윤리적으로 완성된 인격체를 의미한다면, 후자에게서 성인 은 우선 정치적 실권자를 가리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필자가 좀 더 눈여겨보고 싶었던 것은 다산이 슌다이를 비판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은근히 국가를 공고하게 할 수 있는 다른 종류의 방법을 제안하고 있다는 점이다. 정약용은 예의로써 백성들을 가르친다면, 그들로 하여금 군주를 위해 그리고 어른을 위해 자발적으로 죽음을 불사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다시 말해 백성들을 예의로 가르쳐야 결과적으로 군주는 자신의 국가를 오래도록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정약용이 “모든 사람이 요임금과 순임금처럼 될 수 있다”는 맹자의 말을 인용하고는 있지만, 그에게 있어서도 여전히 백성들은 예의를 통해 감화되어 군주에게 기꺼이 순응하는 존재로서 그려졌던 것이다.
그렇다면 사실 정약용의 이런 생각은 본인이 비판했던 다자이 슌 다이의 정치적 입장과도 어느 정도 연결될 수 있는 측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17) 슌다이도 오직 윗사람만이 백성들을 깨우쳐줄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슌다이의 우민 정책이란 사실 군주 한 사람이 백성들을 깨우쳐주기 위해서 요청된 것이었다. 만약 그렇지 않고 백 성들이 스스로 깨닫게 된다면, 정치와 교육의 주체로서의 군주의 사회적 지위가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약용에게 있어서도 백성들은 군주를 통해 예의를 배워야만 하는 일종의 정치적 객체로 이해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물론 그가 백성들 역시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원론적인 주장을 굽히지는 않았지만, 백성 의 존재를 군주를 통해서 예의를 익혀야 하는 대상으로 기술했던 점에 대해서는 좀 더 심각하게 숙고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우선 기본적인 관점만을 총괄하자면, 정약용과 슌다이 두 사람 사이의 입장 차이는 결국 성인이나 군주를 바라보는 시선의 차이로 귀결될 수 있다고 본다. 다산에게 성인이란 수양을 통해 윤리적 주체로 완성된 사람을 의미한다면, 슌다이에게 성인이란 무엇보다도 먼저 정치적 헤게모니를 가진 군주로서 통치에 도움이 되는 예의 혹은 형벌 제도 등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정치가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17) 조성을 교수는 다산과 슌다이 사상과의 유사점을 언급하면서, 다 산이 맹자 계열의 인성론뿐만 아니라 순자 계열의 예치와 교육 을 강조하는 인성론에서도 강한 영향을 받았음을 지적한 바 있 다(조성을(2005), p.76 / p.83) 그리고 바로 이런 측면에서 두 학자간의 유사성을 언급할 수 있다고 말한다.(조성을(上同), p.83) 아 마도 다산이 부분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있는 순자 계열의 인성 론 혹은 정치철학적 입장은, 소라이학파 학자들과 다산 간의 연 속적 측면을 설명하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Ⅲ. 오규 소라이와 다자이 슌다이의 성삼품설
논어 「태백」편에 대한 정약용과 슌다이의 해석을 통해서 우리는 두 사람의 정치철학적 입장 차이를 살펴볼 수 있었다. 물론 두 사람 의 철학적 차이를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어떤 인성론적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지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전통 동양사상에서 정치철학과 인성론은 동전의 양면처럼 항상 붙어다니는 주제였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성상근> 조목을 이해하는 슌다이와 정약용의 서로 다른 인성론적 입장들이 중요하다고 본다. 바로 이 대목을 통해 필자는 양자 간의 정치적 입장이 사실 철학적으로는 보다 큰 차이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을 살펴볼 것이다.
현재 다산의 <논어고금주>에는 기재되지 않은 슌다이의 관점들은, 그 자신의 작품인 <논어고훈외전>을 통해 어렵지 않게 확인될 수 있 다. 이 주석서는 슌다이가 자신의 스승 오규 소라이의 <논어징(論語徵)>을 확대․부연 설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8) 이 점에서 슌다이가 피력했던 성삼품설은 분명 소라이의 인성론으로부터 유래한 것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본다. 여기서는 먼저 <성상근> 조목에 대한 다자이 슌다이의 생각을 살펴보고, 이어서 그것을 철학적으로 기초해 주고 있는 소라이 특유의 인성론을 검토해보도록 하겠다.
18) 분명 다자이 슌다이는 자신의 스승 오규 소라이로부터 강한 영 향을 받은 인물이다. 그렇지만 또한 나름대로 그는 자신의 스승 과는 별도의 입장을 발전시켰다는 점이 연구자들에 의해 지적된 바 있다. 두 사람 사이의 사상사적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고해 볼 수 있다: 이마지 쥰․오자와 도미오(편), 한국일본사상 학회(옮김), 논쟁을 통해 본 일본사상 (성균관대출판부, 2001), p. 220-236.
한편 고학파에 대한 일본 자체 내의 연구자들은 특히 오규 소라 이로부터 시작되는 독특한 일본의 사상 경향을 일본 ‘근대’의 출 현이란 측면에서 매우 비중있게 다루고 있다(中村春作(2005), p. 348~p.349). 뿐만 아니라 일본 근대성과 관련해 소라이학을 다 루는 이들은 바로 이 고문사학파의 등장으로 인해 과거 일본 주 자학의 성격 역시 분명하게 드러날 수 있었다고 평가한다.(中村春作(上同), p.352~p.353)
사람의 성(性)은 만 가지로 다르지만 세 가지 품격이 있는 것 같다. 세 가지 품격이란 상품, 중품, 하품이다. (…) 송나라 유자들은 맹자의 성선론을 좋아하였고 이어서 성즉리(性卽理)도 이야기하였다. 그렇지 만 성선론에는 통하지 않는 바가 있었다. (그래서 송유들은) 이에 성 (性)을 둘로 나누고 드디어 본연과 기질이란 조목을 수립하여 후학들 을 미혹시키게 되었다. 비록 맹자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한다 할지라 도 실제로는 불교의 가르침이니, 어찌 공자를 배반한 것이 아니겠는가! 대개 사람이란 반드시 기질(氣質)이니 그런 뒤에야 성(性)을 가질 수 있다. 어찌 기질을 제외하고 이른바 본연지성이란 것이 다시 있을 수 있겠는가! 송나라 유자들이 도에 밝지 않은 것이 심하구나. 이른바 성에 세 가지 품격이 있다는 것은 순자가 처음으로 이야기했고, 한유에 이르러서 매우 상세해졌다.19)
슌다이에 따르면 인성은 기본적으로 선천적인 기질의 차이에 따른 일종의 개별성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볼 때 사람의 수만 큼이나 많은 성(性)이 존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양한 성을 사회적으로는 세 가지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다고 보았다. 물론 이 점은 최고 통치자, 중간계층, 그리고 일반 백성들이라는 사회적 위계질서를 반영한 생각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성삼품설은 당시에 현존하던 일본의 정치․사회적 구조를 인성론적으로 정당화하고 있었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서 주목해보아야 할 것은, 슌다이가 자신의 인성론을 피력하면서 주희의 본연(本然)․기질 (氣質) 논의를 이용하고 있다는 점이다.20) 주희에게서 본연지성(本然之性)이란 모든 인간들, 나아가 모든 사물들에 대해 공통적인 본성으로서 사유된 것이라면, 반면 기질지성(氣質之性)은 개체들의 다양성을 함축하는 개념이었다.21) 인성을 일종의 개별성으로 이해하고 있는 슌다이는 당연히 주희의 기질지성만을 인정했고, 본연지성이란 개념에 대해서는 ‘불교적’이라는 이유로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본연지 성이란 “모든 개체에게 부처가 될 수 있는 불성(佛性)이 존재한다”고 보는 불교의 불성론과 다를 바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슌다이의 성삼품설은 결국 철학적으로는 기질지성이란 개념 하나에 기초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은 바로 슌다이가 자신의 스승 오규 소라이22)로부터 배웠던 점이다. 아래에서는 오규 소라이가 인성의 문제, 특히 기질지성에 대해서 어떻게 사유하고 있 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23)
19) 人性萬殊, 若有三品. 三品者, 上中下也. (…) 宋儒悅孟軻性善之論, 因謂性卽理. 然性善之說, 有所不通, 於是分性爲二, 遂立本然氣質之目, 以惑後學. 雖曰本孟子, 其實釋氏之道也, 豈不叛孔氏哉! 夫人必氣質, 然後有性. 豈氣質之外, 更有所謂本然之性者哉! 甚矣, 宋儒之昧於道也. 所謂性有三品者, 筍怳始言之, 至韓愈詳矣.( 論語古訓外傳17卷: 陽貨篇)
20) 주희의 인성론에서 본연과 기질이 어떤 철학적 논리를 가지고 있 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책을 참고해 볼 수 있다: 陳來, 朱熹哲學硏究(文津出版社, 民國 79), p. 162-170.
21) 주희가 본연지성과 기질지성 두 개념을 설명했을 때도 이것은 확 연히 따로 분리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다음의 주장을 통해 주희의 이런 입장을 살펴볼 수 있다: “‘말라죽은 사물에는 단지 기질의 성만 있고 본연의 성은 없다’고 했는데 이 말이 더 욱 가소롭습니다. 만약 이와 같다면 이것은 사물에는 하나의 본성이 있지만 사람에게는 도리어 두 개의 본성이 있다는 것입니 다. 이 말은 너무도 잘못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기질의 성은 다만 이 본성이 기질 가운데 떨어져 있어서 기질을 따라 스스로 하나 의 본성이 되므로 바로 주자(周子)께서 ‘각각 그 본성을 하나로 한다’고 말한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원래 본연의 성이 없다고 한다면 이 기질의 성은 또한 어디에서 올 수 있었 겠습니까?”[謂枯槁之物, 只有氣質之性, 而無本然之性, 此語尤可笑. 若果如此, 則是物只有一性, 而人却有兩性矣! 此語非常醜差. 蓋由不知氣質之性, 只是此性墮在氣質之中, 故隨氣質而自爲一性, 正周子所謂各一其性者. 向使元無本然之性, 則此氣質之性又從何處得來耶?]( 朱熹集(58:25)「答徐子融」)
22) 오규 소라이의 사상을 알려주는 원문과 그 번역문은 다음 책을 저본으로 한 것이다: 吉川幸次郎․丸山真男․西田太一郎․辻達也 (校注), 日本思想大系36: 荻生徂徠, 岩波書店, 1973
23) 이 문제점을 살펴보고자 할 때 필자는 특히 오규 소라이의 弁道라는 문헌이 중요하다고 보았는데, 弁道에 대한 철학적 분 석으로는 다음 책을 참고했다: 相良亨(編者), 日本思想史入門 (ぺりかん社, 1984), p. 266-285.
기질(氣質)이란 것은 하늘의 성(性)이다. 인력으로 하늘을 이기기를 바라면서 어긋나게 하니, 반드시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 들이 할 수 없는 것으로써 사람들에게 강제한다면, 마침내 반드시 하 늘과 그 부모를 원망하는 데 이르게 될 것이다. 성인의 도는 결코 이 렇지 않았다. 공문(孔門)에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 매 경우 그들의 재 질에 따라서 완성시켜주었다.24)
오규 소라이에게 있어서 다양한 기질, 즉 개별성 자체는 하늘에 의해 절대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이것은 기질지성이 파괴될 경우 개체로서의 자기동일성이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소라 이는 “기질을 변화시켜야 한다[變化氣質]”는 주희의 주장을 거부했던 것이다. 선천적으로 주어진 삶 자체라고 이해될 수 있는 기질을 변화시키는 것은, 소라이가 볼 때 인력으로 하늘을 이기려고 하는 불가능한 시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지로 사람들로 하여금 기질을 변화시키라고 한다면, 이것은 끝내 사람들을 절망에 빠지도록 하는 일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런 절망은 소라이의 말처럼 “하늘과 부모를 원망 하는데 이르게 될 것이다.” 이 대목에서 소라이는 성인인 공자의 도가 주희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역설하고 있다. 소라이에 따르면 공자는 제자들의 재질, 즉 타고난 기질의 차이에 따라서 그들을 완성시켜 주었던 성인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공자는 주희와는 달리 “기질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강권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소라이의 이와 같은 기질지성론은 다음의 인용문에서 보이는 세 가지 형태의 인성론, 다름 아닌 성삼품설과도 직접적인 관련성을 갖고 있다. 군주정의 위계 구조라는 사회적 관점을 도입하자마자, 기질의 차이에 따른 개별성들이 결국 다음과 같은 세 등급의 인성들로 분명하게 구획되어 버린 것이다. <성상근> 조목에 대한 오규 소 라이의 관점을 통해 이 문제를 좀 더 살펴보도록 하겠다.
공자는 또한 말하길 “상지와 하우는 옮겨지지 않는다”고 했으니, (상지와 하우를 제외한) 다른 자들은 모두 선으로 옮겨갈 수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 사람의 성은 만 가지로 다른데, 강하거나 유약 하거나 경박하거나 중후한 것, 더디거나 빠르거나 활발하거나 고요한 것 등은 변화시킬 수가 없다. 그러나 모두 선으로 옮기는 것을 자신의 성으로 여기니, 선을 익히면 선하게 되고 악을 익히면 악하게 된다. 그러므로 성인은 사람들의 성을 이끌어서 가르침을 세우고, 배워서 익히도록 하였다. 그들이 덕을 이룸에 이르러서도 강하거나 유약하거 나 경박하거나 중후하고, 더디거나 빠르거나 활발하거나 고요한 기질 상의 차이는 또한 각각 자신의 성을 따라서 다르게 되었다. 오직 하우 만이 옮겨질 수 없었으므로 공자는 “백성들은 따라오게 할 수는 있어 도 알게 할 수는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기질은 변화시킬 수가 없고 성인은 배워서 이를 수가 없다.25)
24) 氣質者, 天之性也. 欲以人力勝天而反之, 必不能焉. 强人以人之所不能, 其究必至於怨天尤其父母矣. 聖人之道必不爾矣. 孔門之敎弟子, 各因其材以成之.( 弁道14)
오규 소라이는 다자이 슌다이에 앞서 성삼품설에 해당되는 자신의 인성론적 주장을 전개하고 있다. 여기서는 최고 통치자와 일반 백성들을 제외한 중간 계층만이 선(善)으로 옮겨갈 수 있다고 본 그의 주장이 특이하다. 소라이는 공자가 ‘알게 할 수 없는’ 대상이라고 말한 것을 곧 하우(下愚)로서의 백성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백성들이란 그의 경우에도 성인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따라올 수밖에 없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런데 소라이의 입장을 보다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선(善)’이란 개념과 ‘성(性)’이란 개념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성(性)이 절대적인 것으로 주어진 개체의 개별성을 의미한다면, 소라이에게 있어 선(善)은 성인이 제작한 도(道)에 의해서 비로소 규정되는 것이었다. 소라이는 도(道)를 성인이 만든 예악형정(禮樂刑政) 을 통해 구체화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26) 그리고 성인이 제정한 도를 따르면 그것이 바로 선이고 그렇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악이라고 간주했다. 따라서 ‘선으로 옮긴다’는 일은 각자의 기질을 변화시키는 과정이 아니라, 성인이 제작한 도를 학습하고 따른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25) 孔子又曰上知與下愚不移, 亦言其他皆善移也. (…) 人之性萬品, 强柔輕重, 遲疾動靜, 不可得而變矣. 然皆以善移爲其性, 習善則善, 習惡則惡. 故聖人率人之性以建敎, 俾學以習之. 及其成德也, 强柔輕重, 遲疾動靜, 亦各隨其性殊. 唯下愚不移, 故曰民可使由之, 不可使知之. 故氣質不可變, 聖人不可至.( 弁名「性情才七則」1)
26) “도라는 것은 포괄적인 명칭이다. 예악형정을 들어 선왕이 건립한 것을 모두 합하여 규정한 것이다. 예악형정을 떠나서 이른바 도라 는 것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道者, 統名也. 擧禮樂刑政, 凡先王所建者, 合而命之也. 非離禮樂刑政別有所謂道者也.]( 弁道3)
“상지와 하우는 옮겨지지 않는다”는 공자의 말로부터 소라이는 상지나 하우가 아닌 중간계층은 “선으로 옮겨갈 수 있다”는 주장을 끌어낸다. 소라이에 따르면 중간계층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질을 바탕으로 성인의 도에 참여할 수 능력을 어느 정도 가진 사람들이다. 소라이가 ‘덕을 이루도록 한다’고 설명한 것도 바로 이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이렇게 소라이는 최고 통치자, 중간계층, 그리고 일반백성들 사이의 차이를 선천적으로 규정하면서, 통치자의 기질, 중간계층의 기질, 일반백성들의 기질 자체는 결코 변할 수 없는 것이라고 보고 있다. 이로부터 통치자, 즉 성인은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다시 말해 성인이란 이미 선천적으로 성인으로 태어나게 된 존재라는 말이다.27)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이런 성인의 지혜에 힘입어 만들어진 도(道), 즉 예악형정의 길을 따르면 될 뿐이다. 이 것이 바로 소라이의 성삼품설이 가진 핵심적인 의미였다고 본다.
27) “대개 선왕은 총명하고 지혜로운 덕으로 천명을 받아 천하를 다스렸다. 그의 마음은 한결같이 천하를 안정시키는 것을 임무로서 삼았다. 그러므로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여 이 도를 만들어 서 천하의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이 길로 말미암아 걸어가도록 했던 것이다.”[蓋先王以聰明叡知之德, 受天命, 王天下. 其心一以安天下爲務. 是以盡其心力, 極其知巧, 作爲是道, 使天下後世之人由是而行之.]( 弁道4)
Ⅳ. 성삼품설에 대한 정약용의 비판 논리와 그의 인성론
논어 의 <성상근> 조목을 해석하면서 정약용은 슌다이와 마찬가 지로 주희의 본연(本然) 개념을 신랄하게 공격한다.28) ‘본래부터 그러하다’는 의미의 본연(本然)이란 불교에서 할 수 있는 말인지는 몰라도 유학이 인간의 본성을 설명하는 방식에는 부합될 수 없다고 이해한 것이다. 그러나 이 조목과 관련해 정약용은 주희의 본연․기질 논의만큼이나 성삼품설도 집요하게 문제 삼고 있다.29)
필자는 다산이 이 문제를 다시 집요하게 거론하게 된 것은 앞서도 언급했듯, 당시 일본 고학파의 논어주석서, 즉 <논어고훈외전>을 보면서 비롯된 일이라고 본다. 이미 주희에 의해서 비판받은 관점을 다산이 새삼스럽게 문제 제기한 데는 그럴 만한 다른 연유가 있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에 필자는 정약용의 인성론을 주희와의 거리에서 뿐만 아니라, 소라이 그리고 슌다이 등 일본 고학파 학자들과의 거리에서도 재조명할 필 요가 있다고 생각한다.30) 우선 정약용이 어떻게 <성상근> 조목을 해석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논증 방식은 어떤 구조를 갖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28) “내가 일찍이 생각해보니, 하늘이 이 마음을 내려준 것은 반드시 육체를 배태한 이후이니 어찌 ‘본연(本然)’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 가? 불교에서 말하는 청정법신(淸淨法身)이란 시작도 없는 때로부터 본래 저절로 있었다는 것이다. 하늘의 만듦을 부여받지도 않고 시작도 끝도 없기에 그것을 일러 ‘본연’이라고 했으니 본래 부터 저절로 그러한 것을 말한다. 그러나 육체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시작이 없다고 말할 수 없고, 성령(性靈)이란 천명(天命)에 의해 받은 것이니 시작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 ‘시작이 없다’고 말할 수 없다면 ‘본래 그러하다(本然)’고 말할 수 없으니, 이것이 바로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竊嘗思之, 天之降衷, 必在身形胚胎之後, 何得謂之本然乎? 佛家謂淸淨法身, 自無始時, 本來自在. 不受天造, 無始無終, 故名之曰本然, 謂本來自然也. 然形軀受之父母, 不可曰無始也, 性靈受之天命, 不可曰無始也. 不可曰無始, 則不可曰本然, 此其所不能無疑者也.]( 論語古今註9:11)
29) “(성을) 상중하 세 품급으로 나눈 설명은 밖으로는 공정하게 균 형을 이룬 것 같지만 사람들이 선을 향하는 문을 막아버렸고, 사 람들이 자포자기하는 길을 열어놓았다. 이 설명이 천리(天理)를 손상시키고 인도(人道)를 해친 것이 매우 유독하고 무자비하다. 그 재앙은 홍수나 맹수보다 더욱 심하니, 이에 논변하지 않을 수 없다.”[上中下三品之說, 外若勻停, 而塞人向善之門, 啓人自暴之路. 其傷天理而害人道也, 至毒至憯. 其禍有浮於洪水猛獸, 斯不可以不辨.]( 論語古今註9:19)
30) 하우봉 교수는 소라이와 슌다이의 고문사학파 입장과 다산의 입 장 간의 유사점 및 차이점을 언급하면서 논어 의 여러 조목들 을 함께 열거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특히 인성론과 우민정책이란 양 측면에서 주로 접근하고 있다. 그리고 인성론의 문제를 해명할 때 역시 「양화」편 <성상근> 조목을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한 바 있다.(하우봉(2002b), p.253~P.258) 필자 또한 본 논문 에서 이 주제를 보다 깊이 다루어보기 위해 소라이와 슌다이의 성삼품설에 대한 다른 설명들을 좀 더 추가하였다.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은 지혜의 우열일 뿐,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이 성(性)의 모습은 아니다. 상지(上知)․하우(下愚) 한 단락은 습관에 의 해 멀어진 측면에서 말한 것이지, 성품이 가깝다는 측면에 첨가해서 말한 것이 아니다. 상지와 하우라도 그 성은 또한 서로 같지만, 다만 지혜로움과 어리석음에 있어 우열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효자를 예 로 들어 묻는다면 순도 선하다고 이야기하고 도척 또한 선하다고 이 야기할 것이다. 배반한 신하를 예로 들어 묻는다면 순도 악하다고 이 야기하고 도척 또한 악하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자신을 청렴하다고 칭찬하면 포악한 사람 또한 기뻐할 것이고, 자신을 음란하다고 꾸짖 으면 곱게 단장한 부인 또한 부끄러워할 것이다. 상지와 하우가 모두 같은 성을 지닌 것이 이와 같다. 오직 순은 완고하고 어리석은 것을 익숙하게 보고도 그것에 물들지 않았고, 도척은 유하혜의 화평함을 익숙하게 보고도 그것에 감화되지 않았는데, 이것이 이른바 ‘옮겨지지 않는다(不移)’는 것이다.31)
슌다이나 소라이에게 있어 공자가 말한 ‘상지’와 ‘하우’는 타고난 성(性)이 확연히 다른 것을 의미했다. 상지는 하늘이 허용한 빼어난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인물이고, 하우는 열등한 기질을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나 정약용은 이와 같은 관점을 전면적으로 부인하면서, 상지나 하우의 성(性)은 모두 같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공자는 어떻게 상지와 하우라는 구분에 대해 설명할 수 있었던 것일까? 다산은 그런 구분이 다만 지적인 능력, 즉 지혜(知慧)의 차이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다산이 성(性)이란 개념을 설명할 때 선천적인 지적 능력을 강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 시 말해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선척적인 경향성 혹은 욕구로서의 성[嗜好性]32)을 강조했을 뿐, 지적인 판단 능력을 성(性)의 중요한 특성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아니 오히려 도덕적 욕구로서의 성(性)과 지적인 능력으로서의 지혜로움 및 어리석음은 서로 배치되기까지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33)
그렇다면 상지이든 하우이든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다고 이해된 정약용의 성(性)은 어떻게 규정될 수 있을까? 그가 위의 인용문에서 언급한 사례를 통해 생각해보도록 하겠다. 효자의 경우를 예로 들어 어떤 사람이 선한지 악한지를 질문한다고 해보자. 그러면 순임금 같은 사람이나 도척 같은 사람 모두 그 질문의 대상을 선하다고 판단 할 것이다. 정약용에 따르면 이렇게 모든 사람이 효자를 공통적으로 선하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동일한 윤리적 경향성, 즉 성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록 악한 사람이라고 할지라 도 윤리적으로 선하다는 칭찬을 받을 경우, 그는 반드시 기뻐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이 점 역시 인간에게는 모두 선을 좋아하고 악을 싫어하는 윤리적 경향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31) 知愚者, 知慧之優劣, 知愚非性也. 上知下愚一節, 只就習遠上立論, 非就性近上添說也. 上知下愚, 其性亦相同, 特其知慧有優劣耳. 執孝子而問之, 舜曰善, 跖亦曰善. 執叛臣而問之, 舜曰惡, 跖亦曰惡. 譽之曰廉則暴客亦悅, 罵之曰淫則冶婦亦恥. 上知下愚之同一性如此. 惟舜習見頑嚚而不爲所染, 跖習見惠和而不爲所化, 斯其所謂不移也.( 論語古今註9:9-10)
32) “옛날 경전에서는 허령한 본체로서 말하면 그것을 대체(大體)라고 했고, 대체가 드러난 것으로서 말하면 그것을 도심(道心)이라 고 했으며, 대체의 좋아함과 싫어함으로서 말하면 그것을 성(性) 이라고 했다.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란 사람을 낳는 처음에 하늘이 그에게 덕을 좋아하고 악을 부끄러워하는 성을 허령한 본체 안에 부여해준 것을 말한 것이지, 성을 본체로써 이름 지어 말했던 것이 아니다. 성이란 좋아하고 싫어함을 통해 이름 지은 것이다.”[其在古經, 以虛靈之本體而言之則謂之大體, 以大體之所發而言之則謂之道心, 以大體之所好惡而言之則謂之性. 天命之謂性者, 謂天於生人之初, 賦之以好德恥惡之性於虛靈本體之中, 非謂性可以名本體也. 性也者, 以嗜好厭惡而立名.]( 論語古今註9:10)
33) “천하에 가장 선한 자라고 해도 반드시 총명하고 민첩하며 지혜로운 것은 아니고, 천하의 가장 악한 자라고 해도 반드시 총명하지 못하고 어리석은 것은 아니다. 천지의 맑고 밝은 기를 받은 자라고 해서 반드시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며, 천지의 탁하고 더러운 기를 받은 자라고 해서 반드시 악한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다.”[天下之大善, 未必皆聰明敏慧, 天下之大惡, 未必皆聾瞽魯鈍, 則受天地淸明之氣者, 未必爲善人, 受天地濁穢之氣者, 未必爲惡人.]( 論語古今註9:13)
그런데 문제는 이런 동일한 윤리적 경향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이 현실적으로는 다르게 나타난다는 점이다. 왜 이런 차이가 벌어진 것일까? 정약용은 여기서 습관[習]의 문제를 제기한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동일한 윤리적 경향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습관에 따라 악에 물들 수도 있고 아니면 선에 물들 수도 있다. 정약용은 “오직 상지와 하우만이 옮겨지지 않는 다”는 공자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있다. 가령 순임금은 악을 익숙하게 보았지만 끝내 그 악에 물들지 않았고, 도척은 선을 익숙하게 보았지만 끝내 그 선에 감화되지 않았다. 바로 이런 사례를 들어 다산은 “옮겨지지 않는다”는 공자 말의 의미를 해석했던 것이다. 그 런데 “옮겨지지 않는다”는 공자의 이야기를 얼핏 들으면, 우리는 상지와 하우가 천성적으로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는 존재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런 인상은 오해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이어지는 정약용의 주장을 통해 분명해진다.
만약 덕에 나아가는 수양의 등급으로 말하자면, 순이 밭을 갈고 농사짓고 질그릇 굽고 고기잡던 때로부터 황제가 되기까지 다른 사람들 이 선을 행하는 것에서 취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한 걸음 한 걸음 옮겨가서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았으니, 어째서 (악으로) ‘옮겨지지 않는다’고 말했는지 알 수 있다. 악한 사람이 나날이 악으로 나아가는 것 또한 당연히 이와 같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성숙하여 다시는 옮겨가지 않아도 되는 자가 있겠는가? 군자는 위로 향해 나아가고 소인은 아래로 향해 내려가지만, 근본은 모두 중간 상태로 부터 출발하는 것이다.34)
순임금이 결과만 두고 볼 때 환경적 영향을 받지 않은 선한 인간인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그가 부단히 주체적으로 선을 행하려고 노력 했던 과정을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반면 도척이 환경적 영향을 받지 않고 애초부터 악한 인간인 것처럼 보이는 까닭은, 그가 부단히 악을 행하고 악에 빠지려고 했던 과정을 살피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약용은 모든 인간에게 있어 부여받은 성(性)은 같다는 근본적인 테마로 다시 되돌아온다. 순임금이든 도척이든 모든 사람은 선을 좋아하는 성을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 순임금은 악을 보면서도 결코 그 것으로 옮겨가지 않았기 때문에 상지(上智)일 뿐이며, 도척은 선을 보면서도 결코 그것으로 옮겨가지 않았기 때문에 하우(下愚)가 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만약 순임금이 더 오래 살아서 선을 행하려는 노력을 중지하거나 혹은 도척이 더 오래 살아서 악을 행하려는 노력을 중지한다면, 더 이상 순임금은 반드시 상지라고 할 수 없을 것이고 반대로 도척 또한 반드시 하우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상지와 하우를 끊임없는 자기 수양의 결과로 보는 입장, 즉 악으로 옮겨가지 않으려는 자[상지]와 선으로 옮겨가지 않으려는 자[하우]로 이해하는 관점이야말로 다산의 독특한 인성론의 일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광인과 성인의 성(性)은 본래 서로 같다. 잘 생각해서 선에 익숙해지면 위로 올라 성인이 되고, 생각하지 못해서 악에 익숙해지면 아래로 떨어져 악인이 된다.【비록 성인이 될 수 있는 사람이라도 생각하지 못하면 광인으로 옮겨가고, 비록 쉽게 미칠 수 있는 사람이라도 잘 생각하면 성인으로 옮겨간다.】기꺼이 (선으로) 올라가려고 하지 않는 자를 가장 어리석은 자[下愚]라고 부르고, 기꺼이 (악으로) 떨어지려고 하지 않는 자를 가장 지혜로운 자[上智]라고 부른다.35)
34) 若論其進德修業之層級, 則舜自耕稼陶漁, 以至爲帝, 無不取於人爲善. 其步步移動, 一息不停, 可知何以謂之不移也. 惡人之日進其惡, 亦當如此. 世豈有生來成熟, 無復可移者乎? 君子上達, 小人下達, 其本皆自中層起程也. 論語古今註9:10
35) 狂聖之性, 本只相同. 克念而習於善, 則升而爲聖, 罔念而習於惡, 則降而爲惡.【雖可聖之人, 罔念則移於狂, 雖易狂之人, 克念則移於聖.】其不肯升者, 名曰下愚, 其不肯降者, 名曰上智.( 論語古今註9:16)
결국 정약용에게 있어 선(善)이라는 것은, 우선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윤리적 경향성인 성(性), 그리고 윤리적 경향성을 따르려는 주체의 부단한 노력, 이 두 가지 요소를 통해서 결정되는 것이었다. 이 점에서 볼 때 정약용이 생각한 성(性)은 선을 행할 수 있는 충분조건이 아니라 하나의 필요조건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에게는 동일한 성이 부여되어 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보다 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사람들은 성을 따르려는 지속적인 윤리적 노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약용이 “세상에 어떤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성숙하여 다시는 옮겨가지 않아도 되는 자가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던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다산은 소라이와 슌다이가 제창했던 성삼품설 역시 극복할 수 있게 된다. 다산의 관점과 달리 그들은 성(性)을, “어떤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성숙하여 옮겨가지 않는” 절대적으로 주어진 것으로서 사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약용은 성삼품설이 일종의 결과론적 해석에 불과한 것이라고 보았다.36)
다산에 따르면 동일한 성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이 자신의 주체적 노력에 따라 군자가 될 수도 있고 혹은 소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슌다이나 소라이는 이런 결과물을 추상해서 마치 처음부터 군자의 성, 소인의 성, 그리고 그 사이에 중간계층의 성이 따로 존재했던 것처럼 잘못 생각했다. 이 때문에 정약용은 <성상근> 조목을 통해서 주희의 본연․기질 논의뿐만 아니라, 다시 성삼품설을 비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가 보기에 슌다이와 소라이 등 일본 고문사학자들의 사유는 지나치게 인간이 가진 주체적 결단과 노력의 가능성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36) “(성을) 상중하 세 품급으로 나눈 것은 곧 잘못된 논의이기 때문 에 다시 서술할 필요가 없다. (…) 훌륭한 명문 집안에서 어떤 사람이 태어나 그 집을 망하게 하면, 모든 악이 그에게 돌아가고 사악한 말들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나는 우리나라의 일로 그것을 논증하고자 한다. 허균(許筠)이 처형되었을 때 다음과 같은 말이 있었으니, ‘허균이 처음 태어날 때 어린아이와 같은 붉은 귀신이 떡시루에 앉은 채 그의 집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허균이 가문 을 침몰시켰을 때 다음과 같은 말이 있었으니, ‘허균의 아버지 허적이 큰 뱀을 죽이자 그 뱀이 혓바닥을 날름거렸는데, 허균이 태어나서 울 때 그의 혀를 보니 뱀의 혀와 같았다’는 것이다. 이 런 것들은 모두 집안이 멸망한 뒤에 호사가들이 만든 것일 뿐이 다.”[上中下三品, 仍是謬義, 不足再述. (…) 奕奕名門, 有一夫出而亡之, 則衆惡所歸, 邪說本起. 余以東事證之. 許筠之伏誅也, 有曰筠之初生, 有赤鬼如嬰兒, 坐餅甑而入門. 許堅之湛宗也, 有曰許相國積, 殺大蛇, 其舌舕然, 堅之初呱, 視之蛇舌也. 斯皆覆亡之後, 好事者爲之耳.]( 論語古今註9:18)
Ⅴ. 나가는 말
<논어고금주>가 중요한 이유는 이 책이 단순한 주석서라기보다 하나의 철학적인 논쟁서였기 때문이다. 이 안에는 선진유학을 형이상학적으로 체계화했던 주희의 사유, 주희를 비판했던 청대 고증학자들의 사유뿐만 아니라, 정약용과 마찬가지로 주희의 형이상학을 극복하려 고 했던 일본의 고문사학자들의 사유까지도 다양하게 포함되어 있다.
이 점에서 논어고금주는 정약용이 살았던 당시까지 논어에 대해 다양한 사유를 전개했던 동아시아 사상가들의 격전장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37) 특히 논어고금주의 조목들 가운데 그 양에 있어서나 질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조목의 하나는 바로 <성상근> 조목이라고 생각한다. 이 부분에서 정약용은 자신의 인성론, 흔히 성기호설(性嗜好說)을 피력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옹호하기 위하여 주희뿐만 아니라 소라이와 슌다이 같은 일본 고문사학자들까지 철학적으로 논평하고 있기 때문이다.38)
<성상근> 조목이라는 짧은 구절을 통해 주희는 본연․기질로 상징되는 형이상학적 인성론을 전개했고, 소라이와 슌다이는 본연지성 개념을 폐기하는 대신 기질지성 개념만을 취하여 성삼품설을 주장했다. 더 나아가 정약용 역시 자신만의 특유한 인성론을 전개하기 위해 이 조목에 의존하고 있다. <성상근> 조목을 통해 전개되는 주희와 정약용 사이의 철학적 논쟁도 하나의 중요한 테마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본연․기질의 구분에 대한 다산의 비판은 여러 차례 논의된 바 있다. 그래서 이 글을 통해 필자는 다산이 왜 다시 성삼품설을 공격하고 있는지, 이 문제를 일본 고학파와의 관계 속에서 철학적으로 해명해보고자 했다. <성상근> 조목에 대한 해석을 중심으로 고문사학자들과 정약용이 보이는 가장 큰 차이점 크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볼 수 있다. 첫째는 논어를 어떻게 독해하느냐의 문제이고, 둘째는 성인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의 문제이다.
우선 첫째 측면을 살펴보면, 소라이와 슌다이 같은 일본 고문사학자들은 논어를 특히 정치적으로 독해하려고 고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소라이는 공자의 도가 선왕의 도이며, 선왕의 도는 천하를 안정시키는 도라고 주장한다.39) 나아가 소라이는 공자가 제왕이 되려고 하였지만 끝내 제위를 얻지 못한 사상가라고도 보고 있다.40) 그렇다면 소라이에게 있어 논어라는 텍스트는 선왕의 도를 이어받은 공자가 피력한 정치철학뿐만 아니라, 그의 정치적 좌절을 기록한 텍스트였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약용은 이와 같은 논어 에 대한 철저한 정치철학적 독해에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다.41) 다산이 보기에 공자는 단순한 정치적 야망가라기보다는 우선 윤리적인 인격자였기 때문이다. 물론 정약용도 윤리적 인격자가 정치를 맡아야 한다는 전통적인 입장을 견지했던 사상가이다. 그러나 그는 윤리의 영역을 철저하게 정치의 영역으로 환원시키려고 한 일본 고문 사학자들의 생각에 동의할 수 없었다.
37) 다산 논어고금주 의 이러한 성격과 관련해 김언종 교수는 다음과 같이 평가한 바 있다. “다산이 한대로부터 송․명․청대에 이르기까지의 중국학자들이 쓴 고금의 주요 주석서들의 정수를 거의 집대성하였고, 더하여 당시까지만 해도 중국과 조선의 그 누구도 포용하지 못하였던 일본 고의학파의 논어설까지도 선별적으로 수용하고 있으므로, 논어학사에 있어서 집대성적인 불후의 거저라는 찬사를 보내기에 인색할 필요가 없다.”(김언종(2002), p.70)
38) 과거 박홍식 교수는 다산에게 있어 이등인재, 적생조래 같은 고학파 학자들의 학문이 갖는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 바 있다. “공맹정신의 현재적 부활과 경학의 해석학적 방법에서 주된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다산에게 있어서는 중국 일변 에서 벗어나 일본 고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적 파트너의 발견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의미일 것이다”(박홍식(2005), p.221)
39) “공자의 도는 선왕의 도이다. 선왕의 도는 천하를 안정시키는 도이다.”[孔子之道, 先王之道也. 先王之道, 安天下之道也.]( 弁道2)
40) “공자는 평생 동방의 주나라를 만들려고 하였다. 그는 제자를 가르칠 때 그들 각각의 재질을 완성하여 장차 그들을 등용하려고 하였다. 마침내 그가 제위를 얻지 못하게 되자 그 후 육경을 편수하여 전하게 되었다. 육경은 곧 선왕의 도이다.”[孔子平生欲爲東周. 其敎育弟子, 使各成其材, 將以用之也. 及其終不得位, 而後脩六經以傳之. 六經卽先王之道也.] 弁道2
41) 하우봉 교수는 다산이 비록 논어 를 경세(經世)적인 실천적 측면에서 해석했던 것은 사실이나 고학파 유학자들처럼 지나치게 논어에 대해 정치적 해석을 내리는 것에 대해서는 경계했다는 점을 설명한 바 있다. 그는 다산이 논어 를 실천적인 윤리규범 으로 이해했다고 평가한다.(하우봉(2002b), p.243)
고문사학자들과 정약용이 생각하고 있던 성인의 이미지는 논어 독해 방법과도 밀접하게 연관된 것이었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고문사학자들에게 성인이란 기본적으로 문명제도를 제작한 창조자를 의미했으며, 따라서 성인의 권위 역시 구체적인 개인의 힘을 넘어서는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되었다. 반면 정약용에게 성인이란 기본적으로 구체적인 개인들과 동일한 역량[性]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이다. 어떤 사람이 성인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성이 선천적으로 성인의 성으로 결정되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가 누구에게나 주어진 윤리적 경향성에 따라 선을 행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고문사학자들은 성인을 절대적이고 초월적인 지위로 승격시킨 반면, 다산은 성인을 우리가 노력해서 될 수 있는 윤리적 인격자로 상정하게 되었다. 이 점에서 필자는 논어고금주 에 등장하는 <성상근> 조목이 매우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한다. 이 조목에 대한 해석을 통해 정약용은 고문사학자들의 성삼품설을 공격하면서 자신의 인성론이 가진 타당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윤리의 영역에 있어서 주체의 의지나 결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할 수 있었다. 그 렇다면 <논어고금주>는 단순히 주자학을 문제 삼기위해 고안되었다 보다 주자학, 고증학, 더 나아가 일본 고문사학자들의 해석과도 철학적으로 논쟁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정약용 이전 조선의 지식인들이 무의식적으로 갖고 있었던 중국 중시와 일본 경시 태도가 다산에서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이것은 정약용이 일본과 그곳 지식인들에 대한 해묵은 편견을 넘어서서, 객관적이고 철학적인 지평에서 일본 사상계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는 하나의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42)
42) 여러 연구자들은 다산이야말로 일본 유학의 입장을 본격적으로 자신의 저서[특히 논어고금주 ]에 반영한 당대의 유일무이한 인물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다산보다 앞서 성호 이익이 일본 주자학 자들에 대해 언급했고(강재언(1986), p.146-p.149), 순암 안정복이 진사이의 동자문에 대해 논평한 바 있으며(하우봉(2002b), p.130 -131), 이덕무가 여러 편의 저술에서 일본 유학자와 그들의 사상 에 대해 설명하고 있지만(하우봉(상동), p.175-182), 단편적인 논평에 그치지 않고 경전 주석을 통한 자기철학의 체계에 일본 유학자들을 심도 깊게 반영한 인물은 다산이 거의 유일한 경우라고 평가한 것이다.(하우봉(上同), p.218-p.219) 이들 연구를 통해 볼 때 다산은 일본에 대해 결코 이적시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들의 제도, 문물, 학문 등을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개방적인 입장을 취했음을 엿볼 수 있다.(하우봉(2002b), p.197 / 금장태 (2004), 머리말 / 김언종(2002), p.110~111)
참고문헌 :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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