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상/일반

정약용의 태학지도

rainbow3 2019. 9. 12. 13:05

다산 정약용의 태학지도太學之道

 

김문식 - 단국대 사학과.

 

 

1. 머리말

 

1822년에 회갑을 맞은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은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을 작성했다. 18년간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정약용은 지난 인생을 돌아보며 종합적으로 정리할 기회를 가졌던 것이다. 정약용은 이 때 2종의 묘지명(壙中本, 集中本)을 작성했는데, 그중에서도 집중본에서는 그때까지 완성된 자신의 연구서들을 소개하며 그 내용적 특징을 요약했다.

「자찬묘지명」 집중본에 나타난 ?대학? 관련 연구서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1]

 

① 대학大學(太學)은 주자冑子=국자國子가 배우는 곳으로 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하는 방책을 가르친다.

② 명덕明德은 효제자孝弟慈이다.

③ 격물格物은 물유본말物有本末의 물物을 헤아리고, 치지致知는 지소선후知所先後의 지知에 이르는 것이다.

④ 성誠은 물物의 시종始終을 관철貫徹하는 것이다.

⑤ 정심正心은 수신修身이다.

⑥ 노노老老, 장장長長, 휼고恤孤는 태학太學의 양노養老, 치세자齒世子, 향고자饗孤子이다.

⑦ 군자君子는 귀욕貴欲, 소인小人은 부욕富欲을 가진다. 용인用人이 불공不公하거나 염재斂財가 무절無節하면 나라가 망한다.

 

이상의 7가지는 정약용이 ?대학? 해석에서 탁견이라고 자부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그런데 그 중에서도 가장 특징적인 것은 ①과 ⑥에서 보듯이 대학大學을 태학太學으로 규정하고, ?대학?에는 주자冑子=국자國子가 치국․평천하를 이룩할 방안이 수록되어 있다고 본 점이었다. 대학을 태학에서의 교육으로 보는 정약용의 입장은 ?대학공의大學公議?․?대학강의大學講義?는 물론이고 여타의 경학經學 연구서에서도 일관되며, ?경세유표經世遺表?․?목민심서牧民心書?에 나타나는 경세학經世學 방안도 이러한 해석에 토대로 둔 것으로 나타난다.

본고는 정약용의 ?대학? 해석에 나타나는 특징을 태학지도太學之道로 규정하고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검토하며, 정약용의 경학이 경세학으로 연결되는 방식을 밝히기 위해 작성되었다. 본문에서는 먼저 ?대학?이란 텍스트에 대한 정약용의 견해를 정리하고, 그가 주장하는 태학지도太學之道의 내용을 생도, 교육내용, 교육의 효과로 구분하여 재구성했다. 그리고 맺음말에서는 이러한 정약용의 ?대학? 해석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본고의 자료는 주로 ?대학공의?와 ?대학강의?를 활용했으며, 여타 정약용의 경학 연구서 가운데 취지가 일치하는 자료를 함께 검토했다.

 

1] 「自撰墓誌銘」에 수록된 ?大學? 七條의 내용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實是學舍經學硏究會 譯, ?茶山의 經學世界?, 한길사, 2002, 150~153쪽.

지준호, 「茶山 丁若鏞의 ?大學? 이해와 그 특징 ― 「自撰墓誌銘」의 ‘?大學?七條’를 중심으로 ― 」 ?溫知論叢? 8, 2002.

 

 

2. ?대학? 텍스트에 대한 입장

 

1) 저자

 

?대학?의 저자에 대해 정약용은 자신의 견해를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다. ?대학공의?의 첫머리에서 그는 주희朱熹, 정단간鄭端簡, 완원阮元 등의 학설을 소개했는데, 이는 ① 자사子思, ② 증자曾子, ③ 증자曾子와 그 제자로 구분할 수 있다.

①은 ‘공급孔伋(子思)이 송宋나라에서 어렵게 살던 중 제왕의 도道가 사라져 버릴 것을 걱정하여, ?대학?을 경經으로 하고 ?중용?을 위緯로 했다’는 학설이다. 이는 가규賈逵가 처음 주장한 이래 우송虞松, 정단간鄭端簡이 이를 따랐다. 그러나 정약용은 정현鄭玄의 주注나 공영달孔穎達의 소疏에는 이런 언급이 없는 것을 근거로, 이는 가규가 스스로 지어낸 말로 보았다.2]

②는 ‘?대대례大戴禮?에서 증자 제자들이 스승에 대해 쓴 10편을 뽑아 이를 표장標章한 것’이라는 학설인데, 이는 완원阮元이 주장했다. 정약용은 이 설이 공자의 학문이 증자, 자사, 맹자로 전수된다는 도통론道統論에서 나온 것이지만, 제일 마지막에 있는 「천원天圓」편의 문장을 증자의 저작으로 보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다고 주장했다.3] ③은 ‘?대학?의 경經1장은 공자의 말을 증자가 조술祖述한 것이고 전傳10장은 증자의 뜻을 그 문인門人들이 기록한 것’이라는 학설인데, 주희가 ?대학장구大學章句?에서 주장한 것이었다.4] 정약용은 이 역시 근거가 없는 것으로, 공자의 학문을 계승한 것으로 파악되는 증자․자사․맹자 중에서 유독 증자의 저술이 없었기 때문에, 주희가 그를 ?대학?의 저자로 만들었다고 주장했다. 정약용은 주희의 주장이 절대로 틀렸다고 했다.5]

결국 정약용은 이상의 세 가지 학설을 모두 따르지 않는 입장이었다.

 

2] ?大學公議? 卷1. “鄭端簡所引賈逵之言, 明係僞造, 不可從也.”

?中庸自箴? 卷1. “鄭端簡古言曰, 虞松校刻石經于魏表, 引漢賈逵之言曰, ‘孔伋窮居于宋, 懼先聖之學不明, 而帝王之道墜, 故作大學以經之, 中庸以緯之.’ 〇 鏞案, 此說不見鄭註, 不見孔疏, 而石經大學, 本是僞書, 所引賈逵之言, 亦白撰也.”

3]?大學公議? 卷1. “近聞, 翁覃溪門友阮元, 取大戴禮曾子十篇表章而注解之, 亦道統連脈之意, 然第十天圓篇, 似不雅馴也.”

4]?大學章句大全?. “右經一章, 蓋孔子之言, 而曾子述之. 其傳十章, 則曾子之意而門人記之也.”

5]?大學公議? 卷1. “朱子謂, ‘曾子作經一章, 曾子之門人作傳十章’, 亦絕無所據, 朱子以意而言之也. 朱子以爲, 孔子之統, 傳于曾子, 以傳思孟, 而思孟有著書, 曾子無書, 故第取此, 以連道脈耳, 亦安知其不然哉?”

 

 

2) 사서四書의 출현 시기

 

정약용은 ?대학?과 ?중용?을 전문적으로 공부한 사람은 서한西漢에도 있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대학?과 ?중용?을 본격적으로 표장한 것은 정호程顥․정이程頤에서 시작되며, 사서四書가 확립된 것은 원元의 인종仁宗이 팔비법八比法(八股文)을 창안한 후 ?주자장구朱子章句?로 인재를 뽑으면서 시작되었다고 했다.6] 정약용은 ?예기禮記?의 유래에 대해 유향劉向이 고정考訂한 오례五禮를 양梁의 대덕戴德․대성戴聖이 산정刪定하여 46편으로 만들었고, 여기에 마융馬融이 3편(月令, 明堂位, 樂記)을 추가한 것이 ?예기? 49편이라고 했는데7], 이는 ?수서隋書? 「경적지經籍志」의 내용을 따른 것이었다.8] 정약용은 이처럼 ?예기? 속에 있던 ?대학?과 ?중용?을 뽑아 내어 사서로 만든 것이 남송南宋의 이정二程과 주희였고, 이를 공인한 것은 원元 인종 때라고 본 것이다.

정약용의 주장은 모기령의 설을 반박하는 것이었다. 모기령은 ?수서? 「경적지」에 ?중용강소中庸講疏? 1권이 나오는 것을 근거로, 수대隋代에 ?대학?과 ?중용?을 뽑아내어 ?논어? ?맹자?와 함께 소경小經이라 했었는데, 송대宋代에 와서 이를 사서로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9] 그러나 정약용은 ?당서唐書? 「선거지選擧志」, ?송사宋史? 「선거지選擧志」에 나오는 소경小經에 대한 규정을 인용하면서 모기령의 설을 반박하고10], 모기령은 ?대학?과 ?중용?을 표장한 정程․주朱의 공功을 질투하여 전대前代로 돌렸다고 비판했다.11]

정약용은 ?대학?과 ?중용?을 독립시켜 사서四書로 만든 것은 주희의 공적으로 평가했다. 12]

 

6]?中庸自箴? 卷1. “中庸大學, 已自西京以來, 有專治其義者. 然其別爲一書, 用之科擧者, 自元仁宗始也. 元仁宗, 剏八比法, 始用?朱子章句?取士. ?禮記?四十九篇. 鄭目錄, 「中庸」第三十一.”

?大學公議? 卷1. “大學表章, 自二程始, 大學之列爲四書, 自元仁宗八比法取朱子章句始也.”

7]?中庸自箴? 卷1. “又劉向所考五禮, 梁人戴德․戴聖, 刪定爲四十六篇, 馬融又增三編, 今之?禮記?, 是也.”

8]劉向의 214편을 戴德(大戴)가 85편으로 줄였고, 戴聖(小戴)가 다시 46편으로 줄였다는 것인데, 이에 대해서는 戴震과 錢大昕이 반박했다(林東錫, ?中國學術綱論?, 고려원, 1986, 91~92쪽).

9]?中庸自箴? 卷1. “毛大可曰, ?隋書?經籍志有?中庸講說?一卷, 當時輯經者, 增抽大學․中庸二篇, 幷論語․孟子合稱小經, 而有宋因之, 遂改名四書.”

정약용이 인용한 毛奇齡의 설은 ?大學證文?에 나온다.(卷1??. “自西漢傳?禮記?四十九篇中, 有大學․中庸二書, 竝著爲經. 而其時復有以大中二書, 幷論語․孟子稱小經, 析二書於記, 爲之單行, 因別有大學․中庸之目. …… 然又有以春秋諸經爲大經, 孟子․論語․大學․中庸․孝經爲小經者, 則大中論語․孟子, 在漢唐早已單行, 不始宋儒作四子書也.”)

10]?唐書?, 「選擧志」에서는 ?書?․?易?․?公羊傳?을 小經이라 했고, ?宋史? 「選擧志」에서는 ?論語?․?孟子?․?孝經?을 小經이라 했다.

11] ?中庸自箴? 卷1. “此人心嫉程朱, 欲奪中庸․大學表章之功, 歸之前代, 故屢爲此說.”

12] ?中庸自箴? 卷1. “朱子章句之前, 中庸․大學, 本不能別自爲書.”

 

 

3) 편차

 

정약용은 ?대학?과 ?중용?을 표장한 주희의 공적을 인정했다. 그러나 ?대학?의 편차에 대해서는 주희의 견해와 차이가 있었다.

?대학?의 편차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었다. 하나는 ?예기?에 수록된 고본대학古本大學의 순서를 그대로 인정하는 입장으로, 왕양명王陽明이 가장 대표적이었다. 정약용은 ?대학공의?에서 ‘?대학?에는 착간錯簡이 없었다.’는 왕양명의 설을 소개했다.13] 다른 하나는 고본대학古本大學에는 착간이 있고 순서에도 문제가 있으므로 이를 개정改正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정호․정이와 주희가 대표적이다.14] 주희는 정씨 형제가 개정한 ?대학?의 본문을 경經 1장과 전傳 10장으로 나누고, 격물치지格物致知를 해설하는 전傳 5장 부분이 망실된 것으로 간주하고 이를 보완하는 보망장補亡章(格致補傳)까지 만들었다.15] 그러나 정약용은 고본대학의 편차를 원형으로 보고, ?대학공의?에서도 고본대학의 순서를 그대로 따랐다.

주희가 작성한 보망장에 대해서는 후대 학자들이 많은 논란을 벌였다. 원元의 학자 왕백王柏(魯齋)은 ‘?대학?에 착간은 있을 수 있지만 빠진 글은 없다’고 하면서 주희의 보망장을 비판했는데, 이는 후대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조선에서는 권근權近(陽村), 이언적李彦迪(復古) 같은 학자들이 주희의 보망장을 비판하는 입장이었는데, 이는 왕백의 견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1564년에 이황李滉(退溪)은 보망장을 비판하는 이담李湛(仲九)에게 편지를 보내 보망장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했는데, 이담이 주희가 ?대학?의 경문經文으로 판단한 일부 구절(知止而后有定, 物有本末)을 옮겨 전문傳文을 만드는 것은 ‘정침正寢을 헐어다 행랑行廊을 보수하는 것과 같다’고 비판했다. 16]

 

13]?大學公議? 卷1. “來矣鮮?心學晦明解略?曰, 王陽明以大學未曾錯簡, 是矣. 然又以格物之物, 認爲事字, 敎人先于良知, 而明德二字, 亦依朱子, 又不免少差. 可見天惜聰明, 不肯歸于一人也.[見性理會通]

14] ?二程全書? 卷50, 「明道先生改正大學」 ; 「伊川先生改正大學」.

?大學章句大全?, 經一章. “舊本頗有錯簡, 今因程子所定, 而更考經文, 別爲序次如左.”

15]앞의 책, 傳五章. “右傳之五章, 蓋釋格物致知之義, 而今亡矣. … 間嘗竊取程子之意, 以補之.”

16] ?退溪先生文集? 卷1 1, 「答李仲九」(1564). “近見禹性傳, 云, 公自言近世中國有儒者 覺得大學格致章非闕也. 經文‘知止’‘物有’兩節, 卽格致之簡, 誤脫在此. 此說, 公意以爲如何? 滉所見, 則王魯齋及權陽村, 皆有此說, 李復古公, 亦有此說. 但陽村所稱數家, 不著其說, 每恨無以見其得失. 今公所見, 不知何人, 乞須具首尾謄示. … (別紙) 諸儒徒見此數節中, 有知止知先後知本等語, 意謂可移之以爲格致之傳, 更不思數節之文, 頓無格致之義, 未見補傳之益, 適得破經之罪, 其可乎哉? 今有巨室於此, 正寢輪奐無闕, 而廊廡有一缺處, 大匠見之, 作而補修, 材良制美, 少無可議. 其後有世所謂良工者, 過而相之, 恥己之一無措手於此室也. 於是, 强生意智, 攘臂其間, 折壞其所補處, 撤取正寢數架材來, 圖欲補完其所壞處. 更不計正寢之材, 初非廊廡之材也, 圖完處不見其完, 而寢屋則已成敗屋矣. 此所謂非徒無益, 而又害之者也. 然人情, 大率好立異趨新, 後至之工, 皆不究大匠之神算, 而一向贊歎, 和附於世, 所謂良工之所爲, 悲夫.”

 

 

정약용은 왕백이 위의 몇 구절을 옮겨다가 전傳 5장을 만든 것은 문제가 있지만, “치지致知․격물格物을 설명한 부분에는 망실된 것이 없다”고 한 것은 공정한 견해라고 평가했다.17] 정약용은 이황이 이담을 비판한 것도 그가 왕백처럼 몇 구절을 옮겨 전 5장을 보완했기 때문이며, “?대학?의 경전經傳은 탈자脫字나 오자誤字가 없다”고 했으면 전혀 문제가 없었을 것이라 했다. 또한 정약용은 ?대학? 전체를 하나의 장章으로 본 나여방羅汝芳(近溪)의 견해를 통유通儒의 쾌론快論이라고 극찬했는데18], 이는 ?대학?을 경經․전傳으로 분절分節해서 보는 주희와는 달리 ?대학?의 본문 전체를 하나의 덩어리로 보고 상호 연관되는 의미를 파악했던 자신의 입장과 상통하는 견해였기 때문이다.19]

정약용은 고본대학에는 오자誤字도 없는 것으로 보았다. 정씨程氏 형제는 고본대학을 개정하는 과정에서 원문의 3글자를 오자로 보고 수정했다. 주희도 이를 수용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 [程子曰, ‘親當作新.’]

② 所謂修身在正其心者, 身有所忿懥, 則不得其正, 有所恐懼, 則不得其正, 有所好樂, 則不得其正, 有所憂患, 則不得其正. [程子曰, ‘身有之身當作心.’]

③ 見賢而不能擧, 擧而不能先, 命也; 見不善而不能退, 退而不能遠, 過也. [命, 鄭氏云, ‘當作慢’, 程子云, ‘當作怠’, 未詳孰是.]

 

 

?대학? 원문의 오자에 대해서는 1789년 정조正祖가 주도한 ?대학강의?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질문을 맡은 김희金憙는 대체로 주희의 견해를 수용하는 가운데 ③에서 주희의 대답이 불분명한 이유를 물었는데, 정약용은 ‘명命’자를 그대로 두어도 무리가 없다고 답변했던 것이다.20] 그리고 정약용은 ?대학공의?에서 “정자程子가 수정한 세 글자를 모두 원래대로 두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21]

정약용은 ?예기?에 수록된 고본대학이 편차가 맞을뿐더러, 그 원문은 궐문闕文이나 오자가 없는 완본完本이라는 입장이었다.22] 이는 양명학 계열인 왕양명王陽明, 래지덕來知德, 나여방羅汝芳의 견해를 수용한 것이었다.

 

17]?大學公議? 卷2. “鏞案, 前人謂董槐․葉夢鼎․吳澄諸人, 皆與王魯齋語同. 然魯齋, 以知止有定節, 物有本末節, 子曰聽訟節, 合之爲傳之五章, 而尾曰, 此謂知本此, 謂知之至也, 則其論仍不足以破衆惑也. 然其謂致知格物未甞亡, 則亦公議也.”

18] ?大學公議? 卷2. “李公之說, 欲以經文, 移補傳闕, 故先生非之. 若云, ‘經傳之文, 都無脫誤’, 則先生之答, 未必如是也. 王魯齋之大學本, 亦毁上數節, 移之爲傳之五章. 退溪之云, ‘毁正寢而補廊廡’, 誠確論也. 近日, 羅近溪謂, ‘大學只是一章書’, 亦通儒之快論也.”

19]?大學講義?. “憙曰, ‘此章本有分節, 而亦有他般看得之道耶?’ 鏞曰, ‘分節之法, 本難得當, 必欲穿鑿截斷, 反使照應聯貫之旨, 晦而不顯, 莫如渾全融會, 熟讀詳味之爲有得也.”

20]앞의 글. “憙曰, ‘親作新字, 形相近. 身作心, 文勢固然. 至於命作慢, 則字形文勢俱無近似, 章句亦云, 未詳孰是, 若以命字看, 則果不成耶?’ 鏞曰, ‘知之於賢者, 命也. ?集註?引張子曰, 晏嬰智矣, 而不知仲尼, 是非命耶. 此所謂君子而未仁者也. 據此, 則命字亦不爲無理矣.’”

21] ?大學公議? 卷3. “大學改三字[親․身․命三字], 恐皆當以不改爲善也.”

22] ?大學公議? 卷3. “朱子曰, ‘彼爲善之上下, 疑有闕文誤字.’ … (〇鏞案) 未見其爲闕文.”

 

 

3. 태학의 생도

 

?대학?을 표장하여 사서四書에 위치시킨 정자程子는 “?대학?은 초학자가 덕德으로 들어가는 문로門路”라 했고, 주희는 ‘대학은 대인大人의 학문’으로 규정했다.23] 또한 주희는 「대학장구서大學章句序」에서 15세가 된 천자天子의 원자元子․중자衆子, 공公 경卿 대부大夫 원사元士의 적자適子, 백성 중에서 준수한 자들은 모두 대학에 들어간다고 하여24], 대인大人 즉 성인成人 가운데 준수한 자들은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정약용은 대학大學을 태학太學으로 규정하고 주자冑子와 국자國子만 태학에 입학할 수 있다고 주장하여, 주희와 입장의 차이를 보였다. 그런데 대학의 생도에 대한 정약용의 생각이 처음부터 주희와 달랐던 것은 아니다. 1789년 ?대학강의?에서 정약용은 소학小學은 동자童子의 학문이며, 대학大學은 대인大人의 학문이라고 구분하여, 주희의 입장을 그대로 수용했기 때문이다.25] 다만 이 때 정약용은 소학과 대학을 학궁學宮의 명칭으로도 보아 새롭게 해석할 여지는 남겨두었다.26] 이후 정약용은 경학經學 연구를 계속 진행하면서 주희의 해석에 심각한 문제점이 있음을 발견했다.

정약용은 먼저 ‘대인大人’의 용례를 검토했다. 정약용은 주희가 말한 ‘대인’이란 ‘관冠을 쓴 성인成人’을 말하므로, ‘대인의 학문’은 ‘온 세상 사람들이 두루 배울 수 있는 학문’을 의미한다고 보았다.27] 그러나 정약용이 ?주역?․?맹자?․?춘추좌씨전?을 검토한 결과, 대인은 ① 지위가 높은 사람(天子 諸侯), ② 덕德이 높은 사람, ③ 엄부嚴父, ④ 몸집이 큰 사람이라는 네 가지 뜻으로만 나타났고, 관冠을 쓴 성인이라는 용례는 없었다.28] 따라서 정약용은 주희의 주장을 비판했다.

정약용은 고대古代의 학교에는 태학太學과 향학鄕學이 있었고, 그 생도는 각각 국자國子와 만민萬民으로 명확하게 구분된 것으로 보았다. 정약용은 태학과 향학을 구분하는 근거를 ?상서尙書?와 ?주례周禮?에서 찾았는데, 근거가 된 원문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23]?大學章句大全?. “子程子曰, 大學孔氏之遺書, 而初學入德之門也. … 大學者, 大人之學也.”

24] ?大學章句大全?, 「大學章句序」. “及其十有五年, 則自天子之元子̖衆子, 以至公̖卿̖大夫元士之適子, 與凡民之俊秀, 皆入大學, 而敎之以窮理̖正心修己̖治人之道.”

25]?大學講義?. “對曰, 童子之學, 其節文小, 止於灑掃文字之末, 故曰小學, 大人之學, 其功用, 大至於修齊治平之極, 故曰大學也. (중략) 小學大學之所以分, 雖由學問體用之大小, 而序亦云, 幾歲入小學, 幾歲入大學, 則此是學宮之名也.”

26] 鄭一均, ?茶山 四書經學 硏究?, 一志社, 2000, 178~180쪽.

27]?大學公議? 卷1. “朱子於此, 遂改書名曰大學, 讀之如字, 訓之曰大人之學. 與童子之學, 大小相對, 以爲天下人之通學. 所謂大人者, 冠而成人之稱也.”

28]앞의 글.

 

 

1. 太學

1-1. 夔爲典樂, 以敎胄子(?尙書? 「堯典」)

1-2. 大司樂, 以三敎, 敎國子. 三敎者, 樂德․樂語․樂舞也. 以樂德, 敎國子, 中和祗庸孝友. 以樂語, 敎國子, 興道․諷誦․言語. 以樂舞, 敎國子, 舞雲門․大卷․大咸․大磬․大夏․大濩․大武.(?周禮? 「大司樂」)

1-3. 樂師, 掌國學之政, 以敎國子小舞.(?周禮? 「樂師」)

1-4. 師氏, 以三德敎國子, 一曰至德[爲處本] 二曰敏德[爲行本] 三曰孝德[知惡]. 敎三行, 一曰孝行[親父母], 二曰友行[尊賢良], 三曰順行[事師長]. 凡國之貴游子弟, 學焉.(?周禮? 「師氏」)

1-5. 保氏, 養國子以道, 乃敎之六藝, 禮․樂․射․馭․書․數. 乃敎之六儀, 一曰祭祀之容, 二曰賓客之容, 三曰朝廷之容, 四曰喪紀之容, 五曰軍旅之容, 六曰車馬之容.(?周禮? 「保氏」)

1-6. 諸子, 掌國子之倅[公卿大夫之諸子], 掌其敎治, 凡樂事正舞位, 凡國之政事, 國子存游倅, 春合諸學[太學], 秋合諸射[射宮」, 以攷其藝而進退之.(?周禮? 「諸子」)

1-7. 大胥, 掌學士之版, 以待致諸子[卿大夫之諸子], 春入學舍, 采合舞, 秋頒學合聲.(?周禮? 「大胥」)

1-8. 小胥, 掌學士之徵令, 而比之觵其不敬者.(?周禮? 「小胥」)

 

2. 鄕學

2-1. 契爲司徒, 以敎百姓.(?尙書? 「堯典」)

2-2. 大司徒, 以鄕三物, 敎萬民而賓興之. 一曰六德, 知仁聖義忠和, 二曰六行, 孝友睦婣任恤, 三曰六藝, 禮樂射御書數. 以鄕八刑, 紏萬民. 一曰不孝, 二曰不睦, 三曰不婣, 四曰不弟.(?周禮? 「大司徒」)

2-3. 鄕大夫, 受敎瀍于司徒, 退而頒之于其鄕吏, 使各以敎其所治, 以攷其德行, 察其道藝.(?周禮? 「鄕大夫」)

2-4. 州長, 各屬其州之民, 而讀法以攷其德行道藝.(?周禮? 「州長」)

2-5. 黨正, 正歲屬民讀法, 而書其德行道藝.(?周禮? 「黨正」)

2-6. 族師, 月吉, 則屬民而讀邦法, 書其孝弟睦婣有學者.(?周禮? 「族師」)

2-7. 司諫, 糾萬民之德, 以時書其德行道藝, 辨其能而可任於國事者, 以攷鄕里之治.(?周禮? 「司諫」)

2-8. 司寇, 掌萬民之衺惡過失. 凡民之有衺惡者, 三讓三罰, 恥諸嘉石, 役諸司空. 其有過失者, 三讓三罰, 歸於圜土.(?周禮? 「司寇」)

 

 

정약용은 「요전堯典」에 보이는 태학의 제도가 삼대(하夏 은殷 주周)에도 면면히 계승되었으므로 주周의 국자國子는 우虞의 주자冑子를 말하며, 주周의 제도는 ?주례周禮?에 잘 나타나는 것으로 파악했다. 따라서 그는 주로 ?주례?를 통해 태학의 제도를 고증했는데, 이를 보면 고대의 교육은 전악典樂이 주자冑子를 가르치는 태학太學과 사도司徒가 만민을 가르치는 향학鄕學으로 분명하게 구분되는 가운데, 대사악大司樂․악사樂師․학정學正․대서大胥․소서小胥․사씨師氏․보씨保氏는 태학을 담당하는 관리였고, 대사도大司徒․향대부鄕大夫․주장州長․당정黨正․족사族師․사간司諫․사구司救은 향학을 담당하는 관리였다.29]

정약용은 태학의 생도를 주자冑子=국자國子로 파악했는데, 구체적으로는 ① 천자의 태자太子, ② 천자의 서자庶子, ③ 제후의 적자, ④ 공․경․대부의 적자를 의미했다. 이중에서 ①은 장차 천자가 될 사람이었고, ②는 토지를 분봉分封받아 제후가 되거나 적어도 봉읍封邑을 소유할 사람이었으며, ③은 제후, ④는 공․경․대부가 될 사람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장차 천하를 다스리거나, 자신의 봉토封土를 다스리거나, 천자를 보필할 사람들이었으므로, 반드시 태학에 들어가 치국․평천하하는 대학지도大學之道를 배워야만 했다.30]

그런데 태학의 생도를 주자冑子=국자國子로만 한정하면 ?주례?의 원문에서 누락되는 부분이 생기는데, 1-4의 귀유자제貴游子弟, 1-6의 국졸國倅, 유졸游倅, 1-7의 제자諸子가 그것이었다. 정약용은 이들을 모두 공․경․대부의 서자庶子로 파악하고, 이들은 원하는 경우에는 국자國子와 함께 태학에서 사씨師氏의 교육을 받을 수 있지만, 정령政令은 제자諸子에, 판적版籍은 대서大胥에, 징벌은 소서小胥에 소속되는 것으로 보았다.31] 따라서 엄격히 말하면 공․경․대부의 서자庶子는 주자冑子=국자國子에 포함되지 않았다. 천자와 제후의 자식이라면 적適․서庶의 구별이 없이 모두 태학의 생도가 되지만, 공․경․대부의 자식은 적․서를 구분하며 서자에게는 자격 제한을 두었다는 것이 정약용의 입장이었다.32]

태학의 생도에 있어 마지막 문제는 ‘백성 중에서 준수한 자’에 관한 것이었다. 준수한 백성이 태학에 들어갈 수 있다는 근거는 ?주례?와 ?예기?에 나타났다.

 

3. 民之俊秀者(鄕學에서 太學으로)

3-1. 凡民之俊秀者, 自鄕學而賓興之, 乃升太學.(?周禮? 「鄕大夫」 ; 「大司徒」)

3-2. 樂正, 崇四術, 立四敎, 順先王詩書禮樂, 以造士. 春秋敎以禮樂, 冬夏敎以詩書, 王太子, 王子, 群后之太子, 卿大夫元士之適子, 國之俊選, 皆造焉. 凡入學以齒.(?禮記? 「王制」)

 

 

이상에서 3-2는 주周의 제도가 아니라 후대의 제도임을 밝히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었다. 정약용은 ?예기? 「왕제王制」편은 한漢 무제文帝 때 박사博士가 기록한 것으로, 한대漢代에 옛 제도를 참작하여 새로운 제도를 만드는 가운데 전악典樂과 사도司徒, 대사악大司樂과 대사도大司徒를 하나로 합친 것으로 보았다. 그런데 주희는 ?대학장구?의 서문을 작성하면서 「왕제」를 근거로 했고, 후대 학자들은 주희의 기록을 근거로 대학에서 만민을 가르치는 것이 선왕先王의 법이라고 착각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33] 정약용은 ?상서? 「요전」과 ?주례?에 나타나는 고법古法과 ?예기? 「왕제」에 나타나는 한漢의 제도를 분명하게 구분해야 태학의 진면목을 파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34]

그런데 3-1은 정약용이 주周의 제도로 보았던 ?주례?의 규정이란 점이 문제였다. ?주례?에서는 “백성 중에서 준수한 자는 향학에서 빈흥賓興하여 태학으로 보낸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주자冑子=국자國子가 아닌 만민萬民 중에도 태학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으므로, 정약용의 해석에는 허점이 생겼다. 이에 대해 정약용은 시간에 따라 미묘한 입장의 변화가 나타난다. ?대학공의?에서 정약용은 당학黨學․주학州學에서 학습하는 백성 중에서 준수한 자[賢能]를 선별하여 상급자인 司徒에게 천거[賓興]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이들이 태학에 입학했는지는 거론하지 않으면서 태학이 만민을 교육시키는 곳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는데 중점을 두었던 것이다.35] 그런데 말년에 작성한 ?상서고훈?에서는 “백성 중 준수한 자를 향학에서 천거하여 태학에 올려 보낸다.”고 하여, 일반 백성 중에서 태학에 들어가는 사람이 있음을 분명히 했다.36]

 

29] ?尙書古訓? 卷2, 「堯典」. “虞制無徵, 今以周制言之, 可乎. 虞之冑子, 周之所謂國子也. 古者, 敎人之法, 原有二塗. 一是敎萬民, 司徒主之. 一是敎國子, 典樂主之. 契敎萬民, 是爲鄕學. 夔敎冑子, 是爲太學. 此法歷夏殷周, 猶然不變, 周禮大司徒敎萬民, 而鄕大夫州長黨正族師之所敎, 司諫司救之所糾, 皆此屬也. 大司樂敎國子, 而樂師學正大胥小胥之所敎, 師氏保氏之所養, 皆此屬也.”

30] ?大學公議? 卷1. “天子之太子, 將繼世爲天子, 天子之庶子, 將分封爲諸侯[雖不侯, 皆有封邑」, 諸侯之適子, 將繼世爲諸侯, 公卿大夫之適子, 將繼世爲公卿大夫. 斯皆他日, 御家御邦, 或君臨天下, 或輔弼天子, 道斯民而致太平者也. 故入之于太學, 敎之以治國平天下之道, 斯之謂大學之道, 在明明德在親民也. 寒門賤族, 古法原屬之司徒, 不關於太學.”

31] ?大學公議? 卷1. “夏官, 諸凡卿大夫之庶子, 謂之游倅. 蓋師氏之職, 本敎適子, 而其庶子之游學者, 亦與焉. … 國倅游倅者, 卿大夫之庶子也. 其政令則領於夏官, 其版籍則領於大胥, 其懲罰則屬於小胥, 而若其道藝, 則亦受學於師氏. 故師氏之末云, ‘凡國之貴游子弟, 學焉.’ 貴游者, 游倅也. 師氏之職, 雖主於胄子, 而庶子亦得以與焉.”

32] ?尙書古訓? 卷2, 「堯典」. “天子邦君之子, 適庶皆入太學. 唯所謂游倅者, 乃公卿大夫之庶子[倅貳也], 雖亦受敎於師氏, 領籍於諸子[夏官有諸子], 而仍與適子有別.”

33]?大學公議? 卷1. “王制者, 漢文帝時博士所錄也. 漢儒, 酌古參今, 以制漢法. 故其法, 合夔契而爲一, 合大司樂大司徒而爲一, 與虞法周法, 絕不相同. 學者, 若以王制, 認爲先王之法, 則其失眞, 大矣. … 朱子專據王制, 以作序文. 今之學者, 皆謂先王之法, 本來如此, 故太學之道, 遂認爲敎萬民之法, 殊不然也.”

34]앞의 글. “王制非古法, 必取堯典․周禮, 覈其制度然後, 太學之道, 乃知爲何道也.”

35]앞의 글. “古者, 凡民之俊秀者, 司徒薦之曰賢能, 禮之曰賓興. 其曰賓興者, 鄕大夫爲主人, 賢能者爲賓. 盖自黨學․州學, 升之司徒, 謂之賓興也. 總之, 古者太學, 本非學萬民之地.”

36] ?尙書古訓? 卷2, 「堯典」. “至於凡民之俊秀者, 自鄕學而賓興之, 乃升太學, 鄕大夫有其文也[亦見大司徒].”

 

 

그런데 태학의 생도를 해석하는 정약용의 방식은 청淸의 고증학자인 모기령(老晴)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37] 정약용은 고대 소학小學의 제도를 해석하면서 모기령의 학설을 광범위하게 인용했는데, 여기에는 「왕제」편이 한 문제 때 박사들이 지은 것이며, 소학은 천자의 태자, 제후․경․대부의 적자들이 입학하는 학교이고 서인庶人의 자제는 들어갈 수 없었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38] 정약용은 인용문의 말미에서 모기령이 비록 방대한 자료를 동원했지만 결국 ‘소학小學은 자학字學’이라는 것을 고증한데 불과하며, 모기령의 해석은 매우 편벽된 것이라고 비판했다.39] 그러나 정약용이 태학의 생도를 고증했던 방식은 모기령의 고증 방식과 매우 유사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보듯 정약용은 태학의 생도를 주자冑子=국자國子로 보았다. 물론 공․경․대부의 서자나 백성 중에서 준수한 자는 태학의 생도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입학 자격은 엄격히 제한되었고, 이들이 태학의 생도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낮았다. 그런데 「왕제」편에서 보듯 한대 이후로 태학의 생도가 될 수 있는 범위가 크게 늘어났고, 주희가 대학을 대인지학大人之學으로 해석한 것도 후대의 추세를 반영한 것이었다. 정약용은 봉건제가 사라진 한대 이후로는 태학의 제도가 크게 변하여 백성도 태학에 입학할 자격이 있으므로, 모두 ?대학?의 학습에 힘쓰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다.40] 그러나 정약용이 ?대학? 연구에서 밝혀낸 옛 성왕聖王의 제도는 태학의 생도를 주자冑子=국자國子로 제한할 때 그 진면목이 드러나는 것이었다.

 

37]淸의 毛奇齡과 함께 日本의 狄生徂徠도 大學과 小學을 學宮의 大小로 보고, 일반 백성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고 보았다(금장태, 「大學之道와 德의 개념 ― 茶山과 狄生徂徠의 ?대학? 해석」 ?茶山學? 4, 2003, 204~206쪽). 大學의 제도에 대한 韓․中․日 經學者들의 비교연구가 필요하다.

38] ?小學枝言?. “毛老晴云, ‘小學者, 寫字之學, 非小子之所爲學也.’ … 惟漢文博士作 「王制」, 漢儒伏生作「尙書大傳」, 戴德作?大戴禮?, 賈誼作?新書?, 班固作「漢志」, 始有小學之名, 見于諸書. 然皆係天子太子, 諸侯卿大夫適子之學, 而士庶子弟不得與焉. 故大戴「保傅」篇云, ‘太子少長, 知妃色則入小學.’ 小者所學之宮也. 而?白虎通?謂, ‘八歲毁齒, 始入小學而學書計.’ 此太子之禮. 若?尙書大傳?云, ‘使公卿之世子, 大夫元士之適子, 十有三年而入小學, 二十入大學.’ 而「王制」云, ‘小學在公宮南之左, 大學在郊.’ 則又諸侯之學. 而卿大夫之適子, 得與其間.”

39]앞의 책. “鏞案, 毛氏雜引諸文, 以證小學爲字學. 然字學者, 小學之藝也, 學之敎, 有道有藝, 大學蹍大道習大藝, 小學蹍小道習小藝, 豈必小學有藝而無道乎? 其說, 偏而妄矣.”

40]?大學公議? 卷1. “經云, 大學之道, 是敎胄子之道, 與士萬民, 不同也. 今世之法, 族無貴賤, 咸於此經, 致力焉, 可也”

?尙書古訓? 卷2, 「堯典」. “自漢而降, 爵不世襲, 才不族選, 故其學校之政, 一變古制, 凡民庶姓, 咸造太學, 而鄕學賓興之法廢, 此古今之異也.”

 

 

4. 태학의 교육내용

 

정약용은 태학의 교육은 명덕明德을 실천하는데 있으며, 명덕의 내용은 행사行事이자 인륜人倫인 효孝․제弟․자慈라고 주장했다.

정약용은 태학의 교육 과목이 ?주례?, ?예기?의 「왕제王制」 「제의祭義」 「문왕세자文王世子」, ?대대례?의 「보부保傅」에 잘 나타나는데, 구체적으로는 예악禮樂․시서詩書․현송弦誦․무도舞蹈․중화中和․효제孝弟를 가르쳤다고 했다.41] 또한 정약용은 고대의 교육법에 덕德․행行․예藝 세 조목이 있었는데, 시서詩書․예악禮樂․현송絃誦․무도舞蹈․사어射御․서수書數는 모두 예藝에 속하지 교육의 근본이 되는 덕德(德行)은 아니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태학의 핵심적인 교육 내용은 덕德․행行에 해당하는 효제孝弟였다.42]

그런데 정약용이 강조하는 덕행은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행사行事’를 의미했으므로, 심성心性의 수양을 강조하며 실천력이 떨어지는 성리학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 정약용은 불가佛家와 유가儒家의 특징을 구분하면서, 불가는 치심治心을 사업事業으로 하지만 유가는 사업으로 치심을 한다고 하여, 유가의 특징이 실질적인 사업에 있음을 강조했다.43] 게다가 성리학에서 강조하는 명심明心․부성復性․격물格物․궁리窮理․치지致知․주경主敬은 고경古經에 전혀 보이지 않고, 성의誠意․정심正心에도 학교의 조례條例가 될 만한 명문明文이 보이지 않으므로,44] 성리학의 한계는 더욱 분명했다. 정약용은 ?대학?의 성의誠意와 정심正心은 실제적인 일에서 실천하는 것이지, 불가처럼 벽을 마주보고 앉아 자기 마음속을 들여다보는 좌선坐禪이 아니라는 점을 반복해서 강조했다.

 

성의誠意․정심正心이 비록 학자의 지극한 공부이지만 매번 일로 인하여 성의를 다하고 마음을 바로잡는 것이지, 벽을 향해 앉아 마음을 살피고 스스로 허령한 본체를 검속檢束하여, 허공처럼 밝고 티끌 하나에도 오염되지 않아야 성의․정심이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45]

 

지금 사람들은 치심을 성의라 하여 곧장 허령불매虛靈不昧한 본체를 뱃속에 넣어둠으로써 진실무망眞實无妄한 이치를 돌이켜 살피려고 한다. 이는 평생토록 정좌靜坐하여 묵묵히 내 몸속을 살펴야 비로소 가경佳境이 있는 것이니, 좌선坐禪이 아니고 무엇이랴.46]

 

41]?大學講義? 卷1.

42]앞의 글. “原來先王敎人之法, 厥有三大目, 一曰德, 二曰行, 三曰藝. 大司徒鄕三物所列六德六行六藝, 其細目也. 大司樂敎冑子, 亦只此三物而已. 彼以忠和爲德, 孝友爲行, 而大司樂通謂之德者, 德行可互稱也. 詩書, 禮樂, 弦誦, 舞蹈, 射御, 書數, 皆藝也. 雖其恒業之所肆習, 在於諸藝, 而其本敎, 則孝弟而已.”

43]앞의 글. “佛氏治心之法, 以治心爲事業, 而吾家治心之法, 以事業爲治心.”

44]앞의 글. “格物窮理, 致知主敬等題目, 其在古經, 絶無影響. 竝其所謂誠意正心, 亦無明文可以爲學校之條例者.”

45]앞의 글. “誠意正心, 雖是學者之極工, 每因事而誠之, 因事而正之. 未有向壁觀心, 自檢其虛靈之體, 使湛然空明, 一塵不染, 曰此誠意正心者.”

46]앞의 글. “今人以治心爲誠意, 直欲把虛靈不昧之體, 捉住在腔子內, 以反觀其眞實无妄之理. 此須終身靜坐, 默然內觀, 方有佳境, 非坐禪而何?”

 

 

정약용은 태학의 교육내용을 구체적인 일[實事]에서 실천하는 덕행=명덕으로 보았고, 명덕은 바로 효孝․제弟․자慈라고 규정했다.47] 정약용은 명덕明德=효제자孝弟慈를 입증하기 위해 유학의 도가 요순堯舜→하夏→은殷→주周→공자孔子로 계승되며, ?대학?․?중용?의 연원은 ?상서?와 ?주례?에 있다고 주장했다.48] 정약용의 논지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49]

 

 

4. ?尙書? 「堯典」

4-1. 克明峻德, 以親九族, 以平百姓, 以協萬邦. : ?大學?의 明德․親民이 나옴.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를 말한 것임.

4-2. 夔命汝典樂, 敎冑子, 直而溫, 寬而栗, 剛而無虐, 簡而無傲. : ?周禮? 大司樂의 中和祗庸之敎가 나옴.

 

5. ?尙書? 「皐陶謨」

5-1. 愼厥身修, 敦敍九族, 庶明勵翼, 邇可遠在玆. : ?大學?의 明德․親民이 나옴. 愼厥身修은 誠意以修身을, 惇敍九族은 孝弟慈의 齊家를 말함.

5-2. 寬而栗, 柔而立, 擾而毅, 直而溫, 愿而恭, 亂而敬, 簡而廉, 剛而塞, 彊而義. 彰厥有常吉哉. : ?中庸?의 연원.

5-3. 自我五禮有庸哉 : 敎人以禮樂의 연원.

5-4. 允迪厥德 : ?大學?의 明明德을 말함.

 

6. ?尙書? 「立政」

6-1. 籲俊尊上帝, 迪知忱詢于九德之行. : 皐陶의 九德(5-2)과 상통.

 

7. ?周禮? 「大司樂」

7-1. 以六德敎國子, 曰中和祗庸孝友. : 六德은 ?大學? ?中庸?의 연원. 中和祗庸은 ?中庸?, 孝友는 ?大學?.

 

 

이상에서 보듯 정약용은 ?대학?과 ?중용?은 ?상서? 「요전堯典」 「고요모皐陶謨」, ?주례? 「대사악大司樂」에 연원을 두었으며, ?대학?의 덕행인 효우孝友는 고요皐陶의 9덕九德과 대사악大司樂의 6덕六德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했다. 또한 정약용은 한유漢儒들은 훈고訓詁에 빠져서 「고요모」편이 ?대학?과 ?중용?의 연원임을 밝히지 못했는데 주희가 이를 처음 발명했다고 하여, 주희의 공적을 평가했다.50]

 

47]明德을 孝․弟․慈로 해석한 학자들은 정약용 이전에도 元의 盧孝孫(玉溪), 明의 劉元卿, 來知德, 朝鮮의 尹鑴(白湖), 李德欽(東園) 등이 있었다.

48] ?尙書古訓? 卷2, 「堯典」. “道之大源, 起於堯舜, 歷夏與殷, 流于?周禮?, 終于孔門, 爲中庸大學二書而止. 讀「堯典」而逢此大源, 爲之太息而欷歔也.”

?中庸自箴? 卷1. “堯命舜, 舜命禹曰‘允執其中’, 而皐陶中庸之學, 傳于周公, 以至孔子.”

49]?中庸自箴?․?尙書古訓?․?大學公議?의 내용에서 발췌, 정리한 것이다.

50]?書傳集註? 卷1, 「臯陶謨」. “朱子曰, 克明峻德, 是明明德之意.”

?尙書古訓? 卷2??, 「臯陶謨」. “論曰, 「臯陶謨」一篇, 大學中庸之本源. 漢儒溺於訓詁, 不省大義, 至朱子始發之也.”

 

 

정약용은 ?상서? 「요전」에 나오는 준덕峻德, 5전五典, 5교五敎가 모두 동일한 것이며, 구체적으로는 부의父義․모자母慈․형우兄友․제공弟恭․자효子孝를 의미한다고 보았다.51] 이는 ?춘추좌씨전?에 나오는 노魯의 태사太史 극克의 견해를 따른 것인데52], 5전五典과 5교五敎를 ?맹자?와 ?중용?에 나오는 5상五常(父子有親, 君臣有義, 夫婦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으로 보는 정현鄭玄․채침蔡沈의 견해와는 차이가 있었다. 정약용은 교육을 할 때 부모, 형제, 자식 사이에 이뤄지는 천속天屬의 사랑을 기초로 하여, 군신君臣, 부부, 붕우 사이에 이뤄지는 인합人合의 윤리로 확산시켜 나가야 한다는 취지에서 태사 극克의 견해를 지지했다.53] 또한 정약용은 5교五敎 중에서 부의父義․모자母慈는 자慈, 형우兄友․제공弟恭은 제弟에 해당하므로, 준덕峻德=5전五典=5교五敎는 결국 효․제․자이며, 이는 다시 사군事君․사장事長․사중使衆으로 나타나므로, 효․제․자는 명덕明德인 동시에 친민親民이라고 해석했다.54]

 

이를 정리하면 다음의 <표 1>과 같다.

 

<표 1> 효孝․제弟․자慈의 확산

峻德․五典․五敎

天屬의 사랑

人合의 윤리

子孝

事君

兄友, 弟恭

事長

父義, 母慈

使衆

 

 

51] ?大學公議? 卷1.

52]?春秋左氏傳? 卷9??, 文公 18년. “擧八元, 使布五敎于四方, 父義ㆍ母慈ㆍ兄友ㆍ弟恭ㆍ子孝, 內平外成.”

53] ?尙書古訓? 卷1, 「堯典」. “然大學之孝弟慈, 施之於父母兄弟子則合, 施之於五倫則不合. 蓋孝弟慈, 天屬之愛也. 君臣夫婦朋友, 人合之倫也. 相見必以贄, 相合必以義, 資於事父以事君, 自我內敎推於外. 所以立敎, 先自天屬之愛與.”

54] ?大學公議? 卷1. 정약용은 詩에 나타나는 仁․敬․孝․慈․信은 至善의 제목인 동시에 孝․弟․慈의 덕을 말한다고 했다.(?大學公議? 卷2.?, “詩云, ‘穆穆文王, 於緝熈敬止. 爲人君止於仁, 爲人臣止於敬, 爲人子止於孝, 爲人父止於慈, 與國人交止於信. … 仁敬孝慈信五者, 皆至善之題目, 雖其所列, 錯落不整, 亦可見經所云至善, 乃孝弟慈之諸德, 非此諸德之外別有至善也.”)

 

 

정약용은 명덕明德과 친민親民이 모두 효․제․자이므로, 치국․평천하를 이룩하게 될 주자冑子=국자國子는 자신이 먼저 효․제․자를 실천함으로써 천하에 명덕을 밝힐 수 있다고 보았다.55] 또한 효․제․자를 실천하여 친민을 이루는 방법은 윗사람이 노노老老․장장長長․휼고恤孤, 즉 노인을 노인으로 섬기고, 어른을 어른으로 섬기며, 고아를 구휼하는 것으로 달성될 수 있었다.56] 그런데 정약용은 노노․장장․휼고를 주희의 해석처럼 ‘자수自修의 효․제․자’, 즉 왕실 내에서 실천하는 효․제․자로 본 것이 아니라, 백성의 노인을 노인으로 섬기고, 백성의 어른을 어른으로 섬기며, 백성의 어린이를 사랑으로 기르는 것으로 해석했다. 윗사람이 그런 모범을 실천해 보임으로써 백성들이 이를 보고 각자 효․제․자를 실천하도록 유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57]

 

정약용은 주자冑子=국자國子가 태학에서 실천하는 교육내용을 바로 노노․장장․휼고로 보았다. 정약용은 노노老老는 천자가 기로耆老들을 봉양하는 것이고, 장장長長은 세자世子가 학궁學宮에서 서치序齒를 실천하는 것이며, 휼고恤孤는 천자가 고아들을 먹이는 것인데, 이를 ‘태학의 3례三禮’라고 규정했다.58] 정약용은 ?예기?, ?대대례?, ?서대전書大傳? 등에서 태학의 3례를 고증했는데, 이를 정리하면 <표 2>와 같다.

 

정약용은 주자冑子=국자國子가 태학에서 3례를 실천함으로써 효․제․자의 기풍을 이룰 수가 있으며, 이것이 바로 대학지도大學之道이자 천하에 명덕을 밝히는 방안이라고 주장했다.59] 장차 군주가 되어 치국․평천하를 이룩할 사람들이 태학에서 백성을 상대로 하여 3례를 실천하면, 천하 백성들이 이를 본받아 효․제․자를 실천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천하의 백성들이 효․제․자를 실천하는 세상, 그것은 바로 정약용이 꿈꾸는 이상국가였다.

 

55]?大學公議? 卷2. “胄子他日, 皆有成物化民之責, 故戒之以自明. 恐明明德於天下者, 不先自修, 而强人之明德也.”

56]?大學公議? 卷1. “經曰, ‘上老老而民興孝’, 使民興孝者, 親民也. 經曰, ‘上長長而民興弟’, 使民興弟者, 親民也. 經曰, ‘上恤孤而民不倍’, 使民不倍者, 親民也.”

57] ?大學公議? 卷3. “議曰, 自修之孝弟慈, 己言於上節, 不必再言. 此節之孝弟慈, 皆老民之老, 長民之長, 慈民之幼, 而使民興起自新, 各自爲孝弟慈也.”

58]앞의 글. “老老, 謂天子養耆老也. 長長, 謂世子齒于學也. 恤孤, 謂天子饗孤子也. 此三禮, 皆太學之所有事也.”

59]?大學公議? 卷3. “總之, 上老老者, 太學之養老也. 上長長者, 太學之序齒也. 上恤孤者, 太學之饗孤也. 此三大禮, 爲太學興孝興弟興慈之本, 若去此三禮, 則經所云, ‘大學之道’, 不知何道, 經所云, ‘明明德於天下’, 不知何德. 余所謂, ‘買櫝還珠’, 非敢爲過實之言也.”

 

<표 2> 태학太學의 3례三禮

 

三 禮

內 容

出 典

太學老老之禮

有虞氏(燕禮) : 國老를 上庠, 庶老를 下庠에서 養

夏后氏(饗禮) : 國老를 東序, 庶老를 左學에서 養

殷(食禮)

周(兼用) : 國老를 東膠, 庶老를 虞庠에서 養

禮記 王制

天子의 視學, 東序에 가서 三老 五更 群老를 만남

禮記 文王世子

三公은 朝, 三老는 學에서 거행

禮記 禮運

養老는 五帝의 憲

禮記 內則

三老 五更을 大學에서 食

禮記 樂記

天子가 春秋로 入學하여 國老에게 醬을 대접함

大戴禮 保溥

太學長長之禮

世子가 太學에서 齒하여 父子, 君臣, 長幼의 道를 알게 함

禮記 文王世子

帝가 東學에서 上親 貴仁하면 親踈에 차례가 있게 됨

帝가 南學에서 上齒 貴言하면 長幼에 차등이 있게 됨

帝가 西學에서 上賢 貴德하면 聖智가 제 자리에 있게 됨

帝가 北學에서 上貴 尊爵하면 貴賤의 등급이 있게 됨

帝가 太學에서 承師 問道하면 德智가 자라고 理道를 얻게 됨

大戴禮 保溥

書大傳

大學恤孤之禮

春에 孤子를 饗하고 秋에 耆老를 養

禮記 郊特牲

仲春에 幼少를 養하여 諸孤를 살림

仲秋에 衰老를 養하여 几杖을 줌

禮記 月令

司徒는 春에 孤子 8인을 入朝시켜 春事를 이룸

司空은 冬에 國老 6인을 쉬게 하여 冬事를 이룸

大戴禮 千乘

天子 視學에 群吏에게 ‘東序에서 老幼를 위로하라’고 함

禮記 文王世子

辟雍은 大射 養孤하는 곳, 靈臺은 望氣하는 觀

毛詩 靈臺䟽

事老 養孤하여 化民 升賢하는 자에게 상을 줌

韓詩外傳

顯宗이 有司에게 命하여 尊耆耄 恤幼孤하게 함

後漢書 中元元年

 

 

 

5. 태학 교육의 효과

 

정약용은 태학의 생도인 주자冑子=국자國子는 장차 치국․평천하를 이룩해야 할 책임이 있었기 때문에 ?대학?은 치국․평천하로 결론을 맺은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후대에 사士․서인庶人의 자식이 ?대학?을 공부하여 치국․평천하의 도道를 알기는 하지만 실제로 치국․평천하를 실천하지 못하는 것은 원래의 태학지도太學之道가 아니라고 했다.60] 또한 정약용은 태학의 교육내용을 명덕明德이자 친민親民인 효․제․자를 실천하는 3례로 보았는데, 그중에서도 자덕慈德을 가장 중시했다. 치국․평천하를 한다는 것은 결국 효․제․자를 확충해 나가는 것이지만, 특히 자덕은 대중을 부리고[使衆], 백성을 돌보는데[牧民] 필요한 덕목이므로, 치국․평천하를 이루는데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기 때문이다.61]

정약용은 ?상서? 「고요모」편에 나오는 지인知人․안민安民을 ?대학?의 종지宗旨이자 결론으로 보았다. 앞서 보았듯이, 정약용은 「고요모」편을 ?대학?의 연원으로 보았는데, 지인․안민의 해석을 통해 이 논리를 더욱 강화시켰다. 다음의 <표 3>는 지인․안민을 중심으로 한 「고요모」편과 ?대학?의 관계를 정리한 것이다. 62]

 

<표 3> 「고요모皐陶謨」와 ?대학大學?의 관계

 

皐陶謨

大學

知人則哲 安民則惠

用人 理財

三德 六德 九德

官人之法

艱食 鮮食 內粒63]

惠民之法

 

 

정약용은 군자와 소인이 각자 원하는 것을 얻게 되면 평천하가 이뤄지는데, 그 방안은 바로 지인(用人)․안민(理財)에 달려있다고 주장했다.64] 정약용은 사람에게 두 가지 욕구가 있는 것으로 보았는데, 군자가 가진 귀욕貴欲과 소인이 가진 부욕富欲이 그것이었다. 정치란 바로 이들이 가진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므로, 관리의 등용을 공정히 하면 군자의 귀욕이 충족되고, 백성들의 세금을 가볍게 하면 소인의 부욕이 충족되며, 그 결과 국가는 안정되고 평천하를 이룩한다는 것이 정약용의 기본 입장이었다.

정약용이 평천하를 이루는 방안을 지인․안민을 실천하는 것으로 해석한 것은 ?대학공의?, ?상서고훈?을 비롯한 여러 연구서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65] 정약용은 이런 논지를 유지하면서도 사용하는 용어는 조금씩 달랐는데 이를 하나의 표로 정리하면 다음의 <표 4>와 같다.

 

60] ?尙書古訓? 卷2, 「皐陶謨」. “原夫太學之道, 卽治國平天下之道也. 古唯冑子入太學, 冑子者, 天子之元子衆子[衆子將受封], 卿大夫之適子[將襲其父位], 將躬膺大位, 或佐天子出治, 或分封爲列侯, 無一非身任治平之責者也. 故誠意正心, 以先修身, 而其畢竟結局在於治平, 非如今世匹庶之子, 聊讀其書, 以知治平之道, 而憮然退息者也.”

61]?大學公議? 卷3. “孝弟慈, 大學之敎也. 身治孝弟慈, 以御于家邦, 不必別求他德. 惟此孝弟慈, 推而用之耳. 其中慈德, 所以牧民者, 故繼引「康誥」, 爲國之所重在牧民也.”

?大學講義?. “憙曰, ‘孝弟慈中, 獨言慈道, 何也? … 鏞曰, 不唯是也. 孝弟, 所以事君事長也. 此章是治國之道, 則使衆底當緊, 故必言慈道也.”

62]?大學公議? 卷2.

63] ‘艱食 鮮食 內粒’은 「益稷」편의 원문이다. 丁若鏞은 詩序 100편에 의거하여 「益稷」은 「皐陶謨」에 포함되는 것으로 보았다.

64] ?大學公議? 卷2. “君子小人之各得所願, 非所以平天下乎? 平天下節, 其大義有二, 一曰立賢以御君子, 二曰散財以御小人.”

65]金文植, ?朝鮮後期經學思想硏究?, 一朝閣, 1996, 217~219쪽.

 

 

<표 4> 평천하平天下를 이루는 방안

 

대상

君子 貴族 仕於王朝者

小人 小民 耕於王野者

욕구

貴欲

富欲

원리

知人 用人 賢其賢 親其親

安民 理財 樂其樂 利其利

덕목

官人之德

惠民之德

방법

公選擧 去黨 擧賢 立賢 進賢

薄賦斂 懲貪 豐産 散財 薄賦

결과

朝廷安

野人安

 

 

이상에서 보면 정약용은 인간의 기본 욕구인 귀욕과 부욕을 인정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충족시키는 방향으로의 방안을 제시한 것이 주목된다. 정약용이 인성人性을 기호嗜好로 해석하고 귀욕과 부욕이란 인정人情을 충족시키는 경세학經世學의 방안을 마련했는데, 이는 조선시대의 인성론人性論 논의에 있어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정약용의 해석이 처음부터 이런 논리를 갖춘 것은 아니었다. 정약용은 1789년에 용인用人․이재理財의 의미를 해석하면서, 현자賢者를 등용하면 조정이 편안해지고, 생산이 풍부하면 야인野人이 편안해져서 조야朝野가 잘 다스려지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정약용은 후대에 이를 수정하면서 용인․이재는 군자의 귀욕과 소인의 부욕을 충족시키는 것임을 덧붙였다.66] 정약용의 해석에 이처럼 변화가 생긴 것은 바로 정조正祖 때문이었다.

 

치국治國․평천하平天下의 방법은 9경九經․8통八統이며 그 세목細目은 매우 많은 데 어째서 지인知人․안민安民 두 가지만 중요한가?[선조先朝(正祖)께서는 규장각奎章閣 강의講義에서 매번 이것을 가지고 강관講官들에게 물었는데, 한사람도 제대로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 공선거公選擧․박부렴薄賦斂은 천명天命이 영원하기를 비는 근본이다.[先朝(正祖)께서는 매양 치도治道를 논할 때마다 ‘거당징탐去黨懲貪’ 네 글자를 요지要旨로 삼았는데, 하나는 관인官人의 요체였고, 하나는 안민安民의 요체였다.]67]

 

예전에 선조先朝께서는 새로 선발된 문신文臣이 ?대학?을 진강進講할 때마다 반드시 그 뜻을 묻기를 “진현進賢․박부薄賦는 진실로 국가의 대정大政이 된다. 그런데 9경九經과 5전五典에는 절목이 많은데 어째서 이 두 가지만 중언부언하고 다른 일은 조금도 언급하지 않는가?”라고 하셨다. 여러 신하들이 대답하는 것은 모두 적확한 견해가 없었고, 국왕의 가르침도 본지本旨를 분명하게 선포하신 적이 없이 그저 물러가라고만 했는데, 그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 후 깊은 산속에 물러나 있으면서 밤낮으로 생각하다가, 갑자기 환하게 깨닫는 것이 있어, 나라가 치란흥망治亂興亡하는 원인이 이 두 가지 일뿐이요, 인심人心의 동향과 천명天命의 움직임이 이 두 가지 일뿐임을 알았다.68]

 

66]?大學講義?. “憙曰, ‘禮樂刑政, 治天下之大經大法, 而不少槪見, 只以理財用人立言者, 何也?’ 鏞曰, ‘治天下, 固不出於用人理財, 擧賢則百官修職, 而朝廷安, 豐産則萬姓樂生, 而野人安. 朝野旣治, 禮樂自興, 刑政自平, 將誰與不治乎? … ○今案, 生民之所大欲, 不出於富貴二物, 君子之所大欲在貴, 小人之所大欲在富, 用人理財二事, 所以馭此二情也.”

67]?尙書古訓? 卷2, 「皐陶謨」. “治平之術, 九經八統, 其目甚廣, 奚必斯二者之爲大乎?[先朝閣講, 每以是下問講官, 無一人能對者.] … 公選擧薄賦斂, 爲祈天永命之本.[先朝每論治道, 以去黨懲貪四字爲要旨. 蓋此一是官人之要, 一是安民之要.]

68] ?讀尙書補傳?, 「皐陶謨」. “昔在先朝, 每新選文臣, 進講大學, 必問斯義曰, ‘進賢薄賦, 固爲有國之大政, 而九經五典, 節目尙多, 奚獨此二事, 重言復言, 而略不及於他事也?’ 諸臣所對, 皆無的確之見, 上諭亦未嘗敷宣本旨, 而但命黜退, 不知何故. 其後, 屛居深山之中, 蚤夜以思, 恍然若有悟者, 知國之所以治亂興亡, 只此二事, 人心向背, 天命去就, 只此二事.”

 

 

정약용이 지인․안민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이에 대한 정조의 반복된 질문 때문이었다. 정약용은 정조 치하에서는 그 질문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했으며, 유배기 이후 그 질문을 곰곰이 생각하다가 마침내 지인․안민이 인간의 기본 욕구를 충족시킴으로서 평천하를 이룩하는 방안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정약용의 ?대학? 해석이 정조에 의해 촉발된 것임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정약용은 ?대학?의 마지막 부분이 지인․안민을 실현하는 방법인 입현立賢과 산재散財를 반복해서 강조한 것으로 해석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8. 立賢之戒와 散財之戒

 

8-1. 立賢之戒

詩云, “樂只君子, 民之父母. 民之所好, 好之. 民之所惡, 惡之.” 此之謂民之父母.

詩云, “節彼南山, 維石巖巖. 赫赫師尹, 民具爾瞻.” 有國者不可以不愼, 辟則爲天下僇矣.

詩云, “殷之未喪師, 克配上帝, 儀監于殷, 峻命不易.” 道得衆則得國, 失衆則失國.

 

8-2. 散財之戒

是故, 君子先愼乎德. 有德此有人, 有人此有土, 有上此有財, 有財此有用.

德者, 本也, 財者, 末也.

外本內末, 爭民施奪.

是故, 財聚則民散, 財散則民聚.

是故, 言悖而出者, 亦悖而入. 貨悖而入者, 亦悖而出.

康誥曰, “惟命不于常”, 道善則得之, 不善則失之矣.

 

8-3. 立賢之戒

楚書曰, “楚國無以爲寳, 惟善以爲寳.”

舅犯曰, “亡人無以爲寶, 仁親以爲寶.”

秦誓曰, “若有一个臣, 斷斷兮無他技, 其心休休焉, 其如有容焉. 人之有技, 若己有之, 人之彦聖, 其心好之, 不啻若自其口出. 寔能容之, 以能保我子孫黎民, 尙亦有利哉. 人之有技, 媢疾以惡之, 人之彦聖而違之, 俾不通. 寔不能容, 以不能保我子孫黎民, 亦曰殆哉.”

唯仁人, 放流之, 迸諸四夷, 不與同中國. 此謂仁人爲能愛人, 能惡人.

見賢而不能擧, 擧而不能先, 命也. 見不善而不能退, 退而不能遠, 過也.

好人之所惡, 惡人之所好, 是謂拂人之性, 菑必逮夫身.

是故, 君子有大道, 必忠信以得之, 驕泰以失之.

 

8-4. 散財之戒

生財有大道, 生之者衆, 食之者寡, 爲之者疾, 用之者舒, 則財恒足矣.

仁者以財發身, 不仁者以身發財.

未有上好仁而下不好義者也. 未有好義, 其事不終者也. 未有府庫財, 非其財者也.

孟獻子曰, “畜馬乘, 不察於鷄豚. 伐冰之家, 不畜牛羊. 百乘之家, 不畜聚斂之臣, 與其有聚斂之臣, 寧有盜臣.” 此謂國不以利爲利, 以義爲利也.

長國家而務財用者, 必自小人矣. 彼爲善之, 小人之使爲國家, 菑害並至, 雖有善者, 亦無如之何矣. 此謂國不以利爲利, 以義爲利也.

 

 

이렇게 보면 ?대학?의 끝부분은 입현立賢과 산재散財에 관한 경계가 2번씩 반복되고, 네 구절의 끝은 모두 실국失國으로 맺음으로써, 은미한 말과 오묘한 뜻이 중층적으로 나타난다.69] 정약용은 ?대학?의 저자가 태학 교육의 목표인 치국․평천하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입현과 산재, 지인知人과 안민安民을 실천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국가가 멸망하게 됨을 반복하여 강조했던 것으로 보았다.

 

69] ?大學公議? 卷3. “‘樂只君子’以下, 其微言妙義, 間見層出, 雖若多端, 大約只是四節. 第一節, 立賢之戒, 終之以失國. 第二節, 散財之戒, 終之以失國. 第三節, 申言立賢之戒, 終之以失國. 第四節, 申言散財之戒, 終之以失國, 四節而已. … 其作文之妙, 乃至是矣.”

 

 

6. 맺음말

 

지금까지 정약용의 ?대학? 해석에 나타나는 특징을 태학지도太學之道로 규정하고, 그가 논증한 태학太學의 생도와 교육 내용, 교육의 효과를 정리해 보았다.

정약용은 ?대학?을 이해함에 있어 ?대학?․?중용?을 표장하여 사서四書를 정립했던 성리학자들의 공적을 평가했다. 또한 그는 고본대학古本大學을 완본完本으로 보고, ?대학?의 원문은 경經․전傳으로 구분되지 않는 하나의 장章으로 보았는데, 이는 양명학 계열의 견해를 따른 것이었다.

정약용은 대학大學=태학太學의 생도를 치국․평천하를 이룩할 책임을 가진 주자冑子=국자國子로 보았고, 태학의 교육 내용은 주자冑子=국자國子가 백성들에게 명덕明德=효孝․제弟․자慈를 실천하는 3례 위주였음을 논증했다. 그리고 태학 교육의 효과는 주자冑子=국자國子가 지인知人․안민安民을 실천함으로써 자덕慈德을 실현하는 동시에 치국․평천하를 이루는 것이었다. 그런데 정약용은 태학의 생도를 논증하는 과정에서 모기령毛奇齡의 학설을 많이 수용했고, 지인․안민의 의미를 해석할 때에는 정조正祖에 의해 촉발된 점이 많았다.

정약용의 ?대학? 해석에 있어 정조의 영향은 다양한 측면으로 나타났다. 먼저 정약용의 경학 연구서 가운데 ?대학강의大學講義?(1789), ?중용강의中庸講義?(1790), ?시경강의詩經講義?(1791)는 정조와 직접 문답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고, 정약용의 경학관이 반영된 「대학책大學策」․「십삼경책十三經策」도 정조의 물음에 답하기 위해 작성한 글이었다. 따라서 정약용의 ?대학? 연구는 정조와 인연이 깊었다.

다음으로 정조는 ?대학?을 군주를 대상으로 한 책으로 규정하고, ?대학?의 핵심은 치국․평천하에 있으며, ?대학연의大學衍義?와 ?대학연의보大學衍義補?는 군주가 치국․평천하를 위해 실천해야 하는 구체적 방안이 담겨있다고 주장한 국왕이었다. 이에 따라 정조는 ?대학?과 ?대학연의?․?대학연의보?를 합하고 이를 ?대학?의 8조목 체제에 따라 편집한 ?대학유의大學類義? 21권을 제왕학帝王學 교과서로 편찬했다.70]

정조와 정약용의 ?대학?에 대한 입장은 기본적으로 일치했다. 정조는 ?대학?을 제왕학 교과서로 파악하고 ?대학연의?와 ?대학연의보?에서 군주의 실천 방안을 추출했으며, 정약용은 태학의 생도를 주자冑子=국자國子로 제한하고 치국․평천하를 이룩하는 방안을 ?대학?에서 찾아냈기 때문이다. 이는 정약용이 정조 치하에서 국왕의 지우知遇를 받으며 실무 관료로 활동했고, 정조가 사망한 후에는 정조의 정치 이념을 더욱 논리화하고 구체화했기 때문이다.

정약용의 ?대학? 해석에서 나타나는 또 하나의 특징은 경학 연구를 경세학經世學 연구로 연결시킨 점이었다. 정약용은 경학을 先王의 제도를 파악하는 것으로, 경세학을 선왕의 제도를 변통變通한 제도를 마련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대학?에서 재해석한 지인知人․안민安民을 실천할 수 있는 경세학 연구에 몰두했다. 따라서 정약용의 경세학이란 결국 지인․안민을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 방안을 마련하는 작업이었고, 이는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등으로 나타났다.

정약용은 경학 연구를 바탕으로 경세학을 이론화하고, 구체적인 경세 방안까지 제시했다는 점에서 탁월한 ‘경세학자經世學者’라 하겠다

 

70]金文植, 「正祖의 帝王學과 ?大學類義? 편찬」 ?奎章閣? 21, 1998, 77~80쪽.

 

 

주제어 : ?대학?, 태학太學, 국자國子, 모기령毛奇齡, 정조正祖, 경학, 경세학.

 

 

참고문헌 -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