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심리학

인간과 상징 : 제1부 무의식에 대한 접근 : 칼 구스타브 융

rainbow3 2020. 3. 5. 06:56


인간과 상징

 

 

이 책의 의의

 

칼 구스타프 융은 이 책을 완성한 달에 삶을 끝마쳤다. 그러니까 이 책은 독자들에게 물려주는 그의 유산인 것이다.

 

그는 모든 시대를 꿰뚫는 위대한 의사이자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그의 목적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자각하고 그러한 자각을 통해 스스로를 계발하여 인생을 보다 충실하고 풍부하게 경영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잘 이해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었다.

 

텔레비전에 대담이 나간 뒤로 융 박사 앞으로 많은 시청자들의 편지가 날아든 이후 이 책이 쓰여지게 되었다. 여느 때 자기가 접촉했던 의학적 심리학적 훈련을 받은 적이 전혀 없는 일반인이었기에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융 박사는 만년의 대부분을 이 책에 바쳤다.

 

그의 가장 가까운 학문적 동지이자 친구인 취리히의 마리루이제 폰 프란츠 박사, 미국 내 융 학파 학자 가운데 가장 우수하고 신뢰할 만한 조지프 헨더슨 박사, 경험이 풍부한 분석가이며 융 박사의 비서이자 전기 집필가인 아닐라 야페 여사, 융 박사 다음으로 집필 경험이 풍부한 욜란데 야코비 박사가 이 책의 공동 집필자로 융 박사에 의해 선정되었다.

 

융 박사의 사상은 현대 심리학 세계를 새로운 개념으로 채색하고 있다. 그의 압도적인 공헌은 무의식에 대한 그의 개념에서 이루어진다. 융의 무의식은 억압된 욕구의 어지러운 서랍과 같은 세계가 아니라, 한 개인의 일상적인 삶 속에서 의식적인 자아가 [사유하는] 세계만큼이나 생생하고 현실적인 세계, 무한히 넓고 풍부한 세계이다.

 

융 학파에 따르면 무의식의 언어이자 [민족]이 바로 상징이요, 의사 소통의 수단이 바로 꿈인 것이다.1]

 

 

제1부 무의식에 대한 접근

 

1. 꿈의 중요성

 

일상생활에서 종종 마주치는 용어나 이름이나 한 장의 그림 따위가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명백한 의미 외에도 특정한 함의를 지니고 있는 경우 우리는 그것을 상징이라 부른다. 상징은 모호하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 우리에게는 감추어진 무엇인가를 내포하고 있다.

 

(영국 교회에 장식되어 있는 독수리, 사자, 황소 조각은 영국인들이 동물을 숭배하기 때문이 아니라, 에제키엘의 환상에서 유래한 네 사도의 상징인 동시에 이집트의 태양신 호루스 및 그의 네 아들과 대응한다.)

 

이같이 말이나 형상이 명백하고 직접적인 의미 이상의 무엇인가를 내포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것을 상징적인 것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상징성은 완전하게 설명될 수 없는 [무의식적 측면]을 지닌다.

 

이 세상에는 인간의 이해 범주를 넘어서는 것들이 무수히 존재한다. 모든 종교가 상징적인 이미지나 언어를 사용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런 것들이 완벽하게 정의되거나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볼 수 있다. 그러나 얼마나 정확하게 들을 수 있는지, 촉감으로 무엇을 알게 되는지, 무엇을 어떻게 맛보는지는 그가 지닌 감각의 양과 질에 따라 달라진다. 그렇기에 감각은 주변 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각을 제약한다. 어떤 기구를 사용하더라도 인간은 확연성의 범위를 벗어나게 되는 법이다.2]

 

우리의 현실 지각에는 무의식적인 측면이 존재한다. 현실의 사상은 어느 정도 현실의 영역에서 마음의 영역으로 옮겨간다고 하는 점이다. 일단 마음의 영역으로 옮겨가면 이 현실의 사상은 심적 사상으로 변하는데, 이 심적 사상의 궁극적인 정체는 알 수 없다.

 

게다가 이 세상에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지각하지 못하는 사상도 존재한다. 우리에게 기왕에 있었던 경험이기는 하나 인지되지 않은 채 이미 잠재의식에 동화되어 있는 사상을 말한다. 이러한 경험은 한순간의 직관을 통해 인식되거나, 깊은 사색을 통해 후에 그러한 일이 발생했음을 깨달을 수 있으며, 이후 어느 시점에서인가 뒤늦게 무의식에서 분출된다.

 

가령 이런 것은 꿈을 통해 분출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무의식에 동화된 경험은 꿈에서 상징적인 이미지를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낸다.

 

많은 과학자나 철학자들은 두 개의 인격이 있다는 말이냐며 무의식의 존재를 부정하지만 현대인의 치루고 있는 곤욕 가운데 하나는 분리된 인격으로 인한 곤욕이고, 인격의 분리 현상은 병적인 징후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볼 수 있는 지극히 정상적인 현상이며 지극히 일반적인 무의식적 징후이며 거부하기 어려운 인류 공통의 유산이다.3]

 

인간은 기나긴 세월을 지내 오면서 아주 힘겹게 의식이라는 것을 계발해 왔다. 게다가 인간 마음의 많은 부분이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기에 이 진화의 역사는 끝나려면 아직 멀었다. 우리는 우주에 대해 알고 있다. 그러나 우주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을 모두 안 것일까? 그런 것은 아니다. 우리의 마음은 자연의 일부, 끝없는 수수께끼의 연속이다. 다만 우리가 추정한 바를 적고 그것들이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최대한 설명하고자 노력할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 마음 속에 미지의 영역이 존재한다는 개념에 저항해 온 데엔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 자연이 〈의식〉이라는 것을 획득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 아직 〈실험적〉상태에 있었기에 갖가지 위험에 노출되어 있어 언제고 손상될 수 있다. 많은 미개 민족은 인간에게는 인간 자신의 혼뿐만 아니라 초원의 혼도 깃들어 있다고 믿으며 일종의 심리적 동일성을 느낀다.

개인이 무의식중에 다른 사람이나 다른 사물을 자기와 동일시한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심리학적 사실이다. 미개 종족 중에는 사람에게는 여러 개의 혼이 있다고 믿는 종족도 있는데, 우리는 여기에서 개인의 마음이라는 것이 안전하게 결합된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억제할 수 없는 감정 앞에서는 쉽게 허물어질 수도 있을 것이라는 미개인들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4]

 

우리 역시 정신의 분열을 통해 우리의 정체성을 잃는 수가 있다. 자기 통제라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닌 대단한 미덕에 속한다. 고도로 발달했다는 문명 속에서도 인간의 의식은 적당한 연속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은 인간의 의식이 연약하고 조각나기 쉬운 때문이다.

 

자기 마음의 일부분을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은 유익한 능력으로, 이런 능력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주의를 끄는 여타의 일은 무시한 채 한 번에 한 가지 일에만 정신을 집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내 마음의 일부를 분리시키고 일시적으로 억제하겠다고 의식적으로 결심하는 것은 문명의 소산이지만, 내가 깨닫지도 못한 사이 내 동의도 없이 그렇게 되는 것은 미개인들의 영혼의 상실에 다름 아니며 심지어는 신경증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어떤 관점에서 보면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은 대단히 바람직할 수 있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자신을 다스리는 상태가 지나치면 다양하고 다채로우며 다정한 인간관계를 불가능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상당한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5]

 

무의식적 측면을 제일 먼저 경험적으로 탐구한 선구자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이다. 그는 꿈이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의식적인 생각이나 문제와 관련되어 있다는 가정 아래 연구를 진행했다. 이 가정은 저명한 신경학자들(피에르 자네)의 이른바 신경증의 증상은 어떤 의식적 체험과 관련되어 있다는 결론에 그 바탕을 둔 것이었다.

 

20세기가 시작되기 전에 프로이트와 요제프 브로이어는 이미 신경증의 증상(히스테리, 모종의 통증, 비정상적인 행동)이 상징적 의미를 가진 데 의견을 같이 했다. 이들에 따르면 신경증의 증상은 무의식이 꿈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내듯이 무의식이 스스로를 표명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따라서 꿈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대단히 상징적이다.

 

"예를 들면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는 어떤 환자는 음식물을 삼키려 할 때마다 심한 경련성 발작을 일으킨다. 그는 그 음식물(로 상징되는 상황)을 삼킬(용납할)수 없는 것이다." 6]

 

프로이트가 창안한 〈자유연상법〉을 이용하면 꿈은 몇 가지 양상으로 요약된다.

 

꿈을 꾼 사람에게 그 꿈의 이미지나 그 이미지가 마음에 환기시키는 생각들에 대해 계속해서 이야기하게 하면, 환자가 말한 것이나 의도적으로 말하지 않은 것을 통해 그병의 무의식적 배경을 밝혀낼 수 있다는 것이다.

환자가 숨기고 감추려 할수록, 도리어 그가 하는 모든 말이 그 자신이 처한 곤경의 핵심을 가리키기 마련이다. 의사는 삶의 불쾌한 이면을 심심치 않게 맞닥뜨리기 마련이다. 환자가 이야기를 하면서 흘려보낸 많은 암시를 불편한 심기 혹은 의식의 징표로 해석한 경우에도 의사의 그런 해석은 진실에 상당히 근접해 있기 마련이다.

 

이렇기에 지금까지는 아무도, 억압과 욕구 충족이 꿈 상징의 원인으로 보인다는 프로이트의 이론을 반박할 이가 없다. 7]

 

융은 꿈에 특수하면서도 보다 의미 있는 기능이 있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꿈은 명확하고 의미심장한 구조를 지니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그러한 구조를 통해 그 밑바닥에 있는 생각이나 의도를 드러낸다. 이 때문에 프로이트의 자유연상법이 아닌 꿈의 형태와 내용에 주의를 더 기울여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꿈의 실체에서 자꾸만 멀어지게끔 만드는 사고의 연상 작용을 좇는 대신 꿈 자체에서 연상되는 생각과 이미지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꿈에 대한 융의 태도가 달라짐에 따라 분석 방법도 달라졌다. 의식적으로 서술하는 이야기에는 시작이 있고 전개가 있고 끝이 있는 법이다. 그러나 꿈의 경우는 시간과 공간상의 좌표가 전혀 다른 것이다. 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모든 면에서 그것을 조사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되도록 꿈 자체에 가깝게 접근하고 그 꿈이 불러일으킬지도 모르는, 꿈의 실체와는 관련이 없는 관념이나 연상은 모조리 배제하려고 했다. 그러나 한 개인이 지닌 전인격의 심리적인 삶의 과정을 알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꿈과 상징적인 이미지가 보다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8]

 

가령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성적인 행위를 상징하는 이미지는 얼마든지 있다. 이런 이미지는 연상 과정을 통해 성교에 대한 생각이나, 한 개인이 성적인 태도 속에 지닌 콤플렉스에 이르게 할 수 있다.

여기에서 융은 꿈이라는 것은 성적인 비유 이외의 다른 정보도 담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 시작했고, 이렇게 되는 데엔 뚜렷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기에 이르렀다.

 

"어떤 남자가 열쇠 구멍에 열쇠를 찔러 넣는 꿈, 묵직한 몽둥이를 휘두르는 꿈, 혹은 커다란 철 망치로 문을 때려 부수는 꿈을 꾸었다. "

 

이 세 꿈은 모두 성적 비유로 분석할 수 있다. 그러나 꿈꾼 사람의 무의식이 스스로 특정 이미지 중 하나(열쇠, 몽둥이, 쇠망치)를 골랐다는 사실 또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리고 이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때때로 꿈이 표현하고 있는 바가 성행위가 아닌, 전혀 다른 심리적인 문제임을 깨달을 수도 있을 터이다.9]

 

이러한 추론에 근거하여 해석에는 꿈에 명백하게 나타난 소재만을 사용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자유연상은 꿈을 꾼 사람을 꿈의 내용물로부터 유리시켜 버리고 말지만 융은 오히려 중심에 꿈의 이미지를 두고 그 주위를 빙빙 도는 것 같은 방법이다.

 

" 예를 들어 환자 가운데 꿈속에서 술에 취해 머리카락을 풀어헤친 여자를 본 사람이 있었다. "

 

꿈 속에서는 이 여자가 그의 부인으로 나타났는데 실제 그의 부인과는 전혀 다르며 표면적으로 보면 이 꿈은 충격적이리만치 진실과 거리가 멀었고 그래서 환자는 그 꿈의 이미지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다.

 

이것은 꿈을 꾸는 사람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타락한 여자와 관계가 있는 관념을 나타내는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이 같은 불쾌한 이미지를 동반한 꿈이 실제로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다른 조사부터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생리학자들이 중세 시대에 이미, 〈모든 남성은 그 자신 안에 한 여성을 지니고 있다〉는 말이 있었듯이, 융이 아니마라고 부르는 것은 모든 남성이 지닌 여성적 측면인데 이 여성적인 측면은 여성과의 관계에서 일종의 열등한 기능을 나타내므로 이 여성적 측면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물론이고 타인에 대해서도 주의 깊게 은폐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바꾸어 말해서 모든 사람은 눈에 보이는 인격은 매우 정상적일지라도 그 내부에 내적인 여성이라는 처참한 상황이 도사리고 있는데, 타인의 눈에 띄지 않게 감추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 환자의 여성적인 면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았던 것이다. 꿈은 그에게 실제로 〈너는 어떤 점에서는 타락한 여자처럼 처신하고 있다〉고 말했던 것이고 이것은 그에게 적절한 충격을 주었다.10]

 

이런 사례를 보면 꿈을 꾼 사람이 꿈의 메시지를 거부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의식이라고 하는 것은 무의식적인 것에 저항한다. 새로운 것을 직면하는 데서 오는 충격에서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심리적인 방벽을 쌓는다. 이것은 꿈을 통해 나타난 의외의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경우 꿈을 꾼 사람이 보이는 반응에서도 쉽게 확인된다. 심리학은 과학 가운데서도 가장 연륜이 짧은 학문이며 무의식의 역할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극단적인 쇄신 공포증과 맞서 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11]

 

 

2. 무의식에서의 과거와 미래

 

꿈을 다루는 데는 두 가지 근본적인 원칙이 있다.

 

첫째는 꿈을 하나의 사실로 다루어야 하며 꿈이 어떤 식으로든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 이외에는 어떤 전제도 사전에 상정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고,

두 번째는 꿈이라는 것이 무의식의 고유한 표현이라는 점이다.

 

꿈이라는 것이 정상적으로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가정한다면, 반드시 그것이 인과적인지 혹은 꿈 현상이 어떤 목적을 지니고 있는지, 혹은 이 두 가지 모두 참인지를 따져봐야 마땅하다.

 

" 조금 전까지 할 말이 분명히 있었는데 그것을 말하려는 순간 갑자기 생각나지 않는다든지, 친구를 소개하려고 그의 이름을 말하려는데 갑자기 생각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이때 우리는 〈생각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생각나지 않는 상태〉는, 생각이 무의식이 되었기에, 또는 적어도 잠깐이나마 의식에서 분리되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

 

이러한 현상이 생기는 것은 우리의 주의력이 증가하거나 감소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지, 소리 자체가 변화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 아니다.12]

 

그러나 무엇인가 우리의 의식에서 빠져나갔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은 아니다. 이것은 길모퉁이를 돌아 우리 눈앞에서 사라져 버린 자동차와 마찬가지이다. 나중에 그 자동차가 다시 우리 눈앞에 나타날 수 있듯이, 우리는 일시적으로 사라졌던 생각들을 차후에 다시 맞닥뜨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이처럼 무의식의 한 부분은 일시적으로 불명확하게 되어 버린 생각이나 인상이나 이미지가 겹쳐 이루어져, 사라져 버린 것인데도 불구하고 의식 부분에 영향을 계속 미친다.

 

"주의가 산만한 사람이 무엇인가를 가지려고 방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다 그는 우뚝 그 자리에 서버린다. 무엇을 가지러 들어갔는데 무엇을 가지러 들어갔는지를 잊어버린 것이다. 그 자신은 무엇을 찾아야 할지 모르는데도 무의식이 그의 손을 이끄는 것이다. 그러다가 그는 자기가 무엇을 가지러 들어갔던가를 깨닫는다. 그의 무의식이 그에게 귀띔해 준 것이다."

 

신경증 환자의 행동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그가 명료한 목적을 갖고 의식적으로 행동을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행동들에 대해 질문해 보면 그가 자신의 행동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음을, 혹은 행동과 무관한 딴 생각에 빠져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많은 의사들은 히스테리 환자들이 하는 말을 거짓말로 치부하고, 이런 환자들이 우리보다 더 많은 허구를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런 허구를 거짓말이라고 부르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이런 환자의 경우 예측 못할 무의식의 간섭으로 의식이 장애를 일으켰을 가능성이 크고, 바로 이 때문에 이들의 정신 상태가 행동을 불확실하게 하는 것이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13]

 

의사는 환자에게 최면을 걺으로써 환자가 자기의 감각 상실 또는 마취 상태에서 일어난 일을 모두 지각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무의식의 표명 형식은 정신 병리학 문제에만 속한다고 생각하며, 무의식의 표현이라면 무엇이든 신경증적인 혹은 정신병적인 것이며, 정상적인 정신 상태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이라고 속단한다.

 

그러나 신경증적 현상은 오로지 병적인 것의 산물만은 아니라 정상적인 현상이 병적으로 확대, 또는 과장된 것에 지나지 않고, 정상적인 상태보다 눈에 두드러지는 것일 뿐이며, 히스테리 증상은 모든 정상적인 사람들에게서도 볼 수 있는데 그 정도가 극히 미약하기 때문에 미처 못 보고 지나쳐 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일 뿐이다.

 

이를테면 망각만 해도 그렇다. 잊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주의가 다른 곳으로 옮겨가 버렸기 때문에 의식적 사고가 일시적으로 특정 에너지를 잃는 데서 오는 지극히 정상적인 과정이다. 그러나 잊는다고 해서 그것이 존재하기를 그만두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잊힌 기억들은 의지로 재생할 수는 없지만 잠재의식 속에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다가 어느 때고 임의로 소생된다. 14]

 

우리가 보거나 듣거나 냄새를 맡고 있으면서도 이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경우 역시 비일비재한데, 이러한 경우에도 우리의 무의식은 그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기록하여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상황이나 인간에게 반응하는 우리의 태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예: 학생과 시골길을 걷고 있던 교수가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게 된 이유- 거위 냄새- 어린 시절 거위 농장에서 보낸 사람으로 농장을 지날 때 거위 냄새를 맡았고, 무의식적 지각이 오랫동안 잊고 있던 어린 시절의 경험을 상기시킨 것- 의식적으로 지각하지 못했던 것은 그 자극이 강하지 못했기 때문- 그런데도 그 미약한 자극은 무의식을 자극하여 〈잊어버리고 있던〉기억을 환기할 수는 있었던 것"

 

실마리 혹은 방아쇠 효과: 시각과 후각 혹은 청각이 과거의 상황을 떠올리게 하는 상황- 신경증 증상의 발단을 설명할 때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예: 건강 상태가 퍽 좋은 한 처녀가 사무실에서 일을 하다가 갑자기 심한 두통을 느낀다면서 다른 고통도 받고 있다는 징후를 드러냄- 일을 하다가 멀리서 울리던 고동 소리를 들은 것으로 밝혀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토록 잊으려고 애쓰던 애인과의 불행한 이별을 무의식적으로 떠올렸던 것"15]

 

니체가 말했듯이 자존심이 좀처럼 고집을 굽히지 않으면 기억이 오히려 길을 비키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잊어버린 기억 가운데서, 그 불쾌감과 견딜 수 없음 때문에 잠재의식화한 기억을 적지 않게 보게 되는데 이런 것들을 〈억압된〉내용이라고 부른다.

 

"예: 자기 고용주의 동료를 질투하는 어느 여비서는 번번이 모임에 이 사람을 초대하는 것을 잊어버리고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몰랐다고만 대답하며 그 사람의 이름을 누락한 진짜 이유를 결코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의도적인 내용은 자아 인격에서 발휘되는 것이고, 비의도적인 내용은 자아와 동일한 것은 아니지만 자아의 〈다른 한 측면〉인 마음의 어떤 상태에서 유래하는데, 위 사례에서 여비서가 초청자 명단에서 고용주의 동료 이름을 빠뜨린 것은 바로 자아의 〈다른 한 측면〉때문이다. 16]

 

우리가 인지하거나 경험한 것을 잊어버리는 데엔 많은 이유가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다시 우리 마음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양상 또한 다양하다.

 

-잠복 기억: 보통 책을 쓰는 사람들은 처음에 세운 계획에 따라 논의를 진행시키고 이야기의 줄거리를 발전시켜 나가다가 갑자기 옆길로 새는 수가 있다. 새로운 생각이 솟아올랐거나 곁가지 줄거리 하나가 새로 생긴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쓰는 사람 자신은 탈선의 요인을 설명하라는 말을 들어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의식되지는 않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무의식에 기억되는 순수 기억이 발생한 경우이다.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중 1886년의 항해 일지 보고 이야기- 1835에 발행된 책의 뱃사람 이야기 표절- 니체의 누나에게서 확인

 

-음악가가 어린 시절에 들었던 노래가 어른이 되어서 자신이 작곡하고 있는 교향곡 악장의 테마로 그런 곡들을 떠올리는 경우.

 

이 잠재된 내용물로부터 우리의 꿈 상징이 자연스럽게 산출되는데, 이 잠재된 내용물들은 모든 충동, 욕구, 의도, 모든 지각과 직관, 합리적 혹은 비합리적인 사고, 결론, 귀납, 연역, 전제, 그리고 그 밖의 다양한 감정으로 이루어진다. 이 가운데 일부가 또는 이 모두가 합해져 부분적이거나 일시적이거나 영속적인 무의식의 형태를 취한다. 이같은 내용물이 대개 무의식화하고 마는 까닭은 의식에는 이런 것들이 들어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이렇게 잠재의식화하는 것은 그 생각이 우리의 흥미나 관심을 끌기에는 미흡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우리가 의도적으로 의식의 영역 밖으로 밀어내려고 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17]

 

따라서 〈잊어버린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며 반드시 필요한 일이기도 한데 그래야만 우리의 의식에 새로운 인상과 생각이 들어설 공간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만약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가 경험한 모든 것이 의식 세계에 남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우리 마음은 혼란스러울 정도로 산만해지고 만다.

 

의식적인 내용이 무의식 속으로 사라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내용물이 무의식 속에서 〈솟아오르는〉경우도 있다. 〈무슨 기척이 느껴진다〉〈뭔지는 모르지만 이상한 냄새가 난다〉고 느낄 수가 있는 것이다.

 

무의식이라는 것은 단순한 과거지사의 창고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심적 상황이나 앞으로 떠올리게 될 생각들의 씨앗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무의식에서는 먼 과거의 기억뿐 아니라, 전적으로 새로운 생각과 창조적인 관념도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 만나는 딜레마가 전혀 예기치 못했던 새로운 아이디어로 아주 손쉽게 해결될 때가 종종 있다. 이 때문에 많은 예술가, 철학자, 심지어는 과학자들까지 무의식에서 솟아오른 영감을 통해 놀랄 만한 업적을 이루어 내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이다.

 

증거: 프랑스의 수학자 푸앵카레, 화학자 케쿨레의 과학적 발견은 무의식에서 문득 솟아난 회화적〈게시〉 덕분이었다고 한다. 프랑스의 철학자 데카르트의 〈신비적〉체험 또한 한순간에 〈모든 과학의 질서〉를 깨닫게 되고만 돌연한 계시와 관련이 있다. 영국의 작가 스티븐슨은 자신이 갖고 있던 〈인간의 이중성에 관한 강한 느낌〉과 맞아떨어질 이야기를 찾기 위해 수년을 보내던 중 꿈속에서 『지킬박사와 하이드』의 줄거리를 계시 받았다.

 

이 같은 소재를 무의식에서 산출해 내는 인간 심리의 능력이 대단히 중요한데 이러한 능력은 꿈 상징을 연구함에 있어 특히 유의미한 까닭은 융이 이 방면의 전문적인 연구에 종사하면서 꿈에 나타나는 이미지나 관념들이 기억만으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다는 사실을 수차례 발견했기 때문이다.

 

꿈은, 우리 의식의 문턱에는 아직 발도 디디지 않은 전혀 새로운 생각들을 표현하고 있다.18]

 

1]칼 G 융 지음, 이윤기 역, 「인간과 상징」, 2011. (열린책들), 7-15

2]Ibid, 21-23 3]Ibid, 23-26실 4] Ibid, 26-28 5]Ibid, 27-29 6]Ibid, 29-30 7]Ibid, 29-31 8]Ibid, 32-35 9]Ibid, 35 10]Ibid, 35-38 11]Ibid, 38-39 12]Ibid, 40-41 13]Ibid, 42-44 14]Ibid, 44-45 15]Ibid, 46-47 16]Ibid, 47-48

17]Ibid, 48-49 18]Ibid, 49-51

 

 

 

1. 꿈의 기능

 

꿈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다. 꿈속에서는 서로 모순되거나, 우스꽝스러운 이미지가 꿈꾸는 사람에게 쇄도해 온다. 정상적인 시간 감각이 사라지면서 상식적인 것들이 대단히 매력적인 모습 혹은 무시무시한 모습을 하고 나타나는 수도 있다. 꿈을 깨어 있을 때 경험에 견주어 생각하면 도무지 의미가 파악되지 않는다. 1]

 

그러나 우리가 깨어 있을 때 우리가 다루는 관념은 언뜻 보면 정확하고 잘 통제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우리가 믿고 있는 것만큼 정확한 것도, 잘 통제되고 있는 것도 아니다. 깨어 있을 때의 관념의 의미(그리고 그것이 개인에게 주는 정서적 의미)라는 것을 검토하면 검토할수록 모호해진다. 그 까닭은 우리가 듣거나 경험한 것은 무엇이든 곧 잠재의식화(말하자면 무의식 속으로 들어가 버리기)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의식 속에 간직하고 있고, 우리가 의지로 기억해 낼 수 있는 것조차 회상될 때마다 무의식의 바탕 색깔을 띠고 있기 마련이다.

우리의 의식적인 인상은 우리 자신에게 심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무의식의 의미요소를 동시에 띠게 된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런 잠재적 의미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할 뿐 만 아니라, 이러한 잠재적 의미가 어떻게 일상적인 의미를 확장하거나 혼란스럽게 만드는지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물론 이 같은 심리적 바탕 색깔은 사람에 따라 다르다. 사람은 누구나 추상적인 혹은 일반적인 개념을 받아들이되 자기가 처한 특수한 심리상황에서 이것을 받아들이고, 개인적인 방법으로 이해하고, 자기 삶에 적용한다. 따라서 이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사회적, 종교적, 정치적, 심리적 체험이 서로 다를 경우 이 의미의 차이는 더욱 커진다.

우리는 이 같은 의미의 차이를 나날의 필요와는 별 관계가 없는 군더더기, 혹은 버려도 상관없는 여분의 뉘앙스로 여기려 한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이러한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의식의 가장 현실적인 내용물조차 벌써 그 주위에 불확실한 그림자를 거느리고 있음을 말해준다. 요컨대 우리 의식 속의 모든 개념은 그 자체의 심리적 연상을 지닌다. 이런 연상은 그 강도가 서로 다를 수 있기는 하지만(우리의 전인격이 수용하는 그 개념의 상대적 중요성에 따라서, 혹은 그 개념이 우리의 무의식에서 연상시키는 관념이나 콤플렉스에 따라서) 연상 자체는 그 개념의<정상적>인, 즉 원래의 성격을 바꿀 수 있다. 심지어 그 개념은 의식의 레벨 아래로 흘러 들어가면서 전혀 다른 것으로 변모할 수도 있다. 2]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지닌 이러한 잠재적인 측면은 일상생활에서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심리학자는 꿈의 분석에서 무의식을 다루는데, 이 꿈의 분석에서는 잠재적인 측면이 대단히 중요하다. 그 까닭은, 잠재적 측면이야말로 우리의 의식적 사고의 보이지 않는 뿌리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때문에 일상적인 사물이나 사고가 개인의 꿈속에서는 강렬한 심리적 의미를 갖게 될 수 있다. 꿈속의 이미지는 깨어 있을 때 맞닥뜨리게 되는, 그러한 이미지에 상응하는 개념 또는 경험보다 훨씬 회화적이고 생생하다. 그 까닭 중 하나는, 꿈속에서는 이러한 개념들에 담긴 무의식적인 의미가 표현 가능해 지기 때문이다.

의식적으로 사고하는 상태에서는 우리는 의미의 표현을 합리적 표현이라는 한계 안에 가두어 버리려고 한다. 의식의 언어적 표현이 생동감을 잃는 것은 우리가 여기에서 심리적 연상을 제거하고 있기 때문이다.3]

 

꿈속에서 한 사내가 내 뒤로 다가와 내 등위에 올라타려고 했다. 나는 그 사내에 대해서는, 그가 어디선가 한 말을 주워듣고서는 그 말의 의미를 내 의도와는 상관없이 괴상하게 왜곡해 버린 사람이라는 것 이상은 알지 못했다. 그런데 나는 이 사실과 사내가 꿈속에서 내 등에 올라타려고 시도했던 것 사이에 어떤 관련이 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다만 내가 몸담고 있는 이 전문적인 학문세계에서는 내가 진술한 내용이 오해되는 일이 종종 있다. 그래서 내가 이런 오해에 대해 신경절적으로 반응했는지, 그러지 않았는지는 모르겠다.

말하자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의식적으로 자기 감정적 반응을 조절하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고, 나는 내 꿈 역시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관용구를 회화적인 이미지로 번역해 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

오스트리아 사람들의 일상회화에 자주 등장하는 표현인 ‘내 등에 기어오르려면 기어올라’ 이 말은 <네가 뭐라고 하건 나는 개의치 않는다.>라는 뜻이다. 이런 관용구도 꿈속에서는 실제로 호수에 풍덩 뛰어드는 이미지로 나타날 수 있다.4]

 

이 꿈의 이미지는 상징적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 까닭은 꿈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내가 바로 이해할 수 없는 은유적인 방법을 써서 간접적으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이 생기는 까닭은(이러한 현상은 참 빈번히 일어난다) 꿈이 의도적으로 의미를 <위장해>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감정이 있는 회화적인 언어를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우리는 일상의 경험에서 어떤 사실을 되도록 정확하게 표현하는 방법을 배우고, 언어에서든 사고에서든 공상적인 요소는 버려야 한다고 배운다. 바로 이 때문에 우리는 원시적 심성의 특질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원시인들은 아직도 이 같은 심리적 특징이 존재함을 인지하고 있다. 식물이나 여느 돌이나 바위에,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영성(靈性)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를 상실하고 말았다. 대부분의 현대인은 어떤 사물이나 관념이 지닌 공상적, 심리적 연상은 모두 무의식의 영역에 쓸어 넣어 버렸다. 그래서 우리 의식의 경계 저쪽에 잠복하고 있던 이런 것들이 이따금씩 의식의 표면으로 떠올라도 우리는 뭔가가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떠오르는 것으로 여기고 만다.5]

 

교육도 많이 받고 지능도 높은 사람들이 이상한 꿈이나 공상, 때로는 환상에 충격을 받고 상담하러 나를 찾아온 예가 몇 번 있다. 이런 사람들은 마음이 건강하다며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현상이 자기에게도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을 때 이 신학자가 얼마나 놀랄 것인가를 상상해 볼 만하다.

우리는 합리적인 것으로 보이는 세계에 너무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미개인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도 자기의 정신 건강을 의심하기에 앞서 주물(呪物)이나 정령이나 신을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감정의 움직임은 우리에게나 미개인에게나 다 마찬가지이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정교한 문명에서 유래한 여러 공포는 미개인들이 악령의 탓으로 돌리는 공포보다 훨씬 더 위협적일 수도 있다.6]

 

현대인과 미개인의 차이점 비교는 인간의 상징형성의 경향, 그리고 그러한 상징의 표현에서 꿈이 맡는 역할을 이해하는 데 대단히 중요하다. 많은 꿈이 미개인의 사고, 신화, 또는 제의와 유사한 이미지 혹은 심리적 연상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이 꿈의 이미지를 <고태의 잔재>라고 불렀다. 이 용어는 꿈의 내용이 아주 먼 옛날부터 인간의 마음에 잔존해 온 심리적 요소임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무의식을 의식의 부속물쯤(혹은 회화적으로 표현하자면 의식에서 거부된 것을 쏟아 넣는 쓰레기통 쯤)으로 보는 사람들의 관점이다.7]

 

연상과 이미지는 무의식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는 것이고, 누구의 꿈에서든 -교육을 받은 사람이든 받지 못한 사람이든, 똑똑한 사람이든 멍청한 사람이든- 이런 종류의 연상과 이미지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연상이나 이미지는 우리 생각의 의식적인 표현 양식과, 보다 원시적이고 보다 다채로운 회화적 표현 양식 사이에 하나의 다리를 놓아준다. 즉 합리적인 의식세계와 본능의 세계를 잇는 다리 노릇을 하는 것이다.

우리는 문명화한 생활을 영위하는 동안 여러 가지 관념에서 정서적 에너지를 깡그리 제거해 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그 관념에 진솔하게 반응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우리의 태도나 행동에 변화가 일어날 만큼 강한 느낌을 갖게 하자면 그 이상의 어떤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이상의 어떤 것이 바로 <꿈의 언어>이다. 꿈의 상징체계는 어마어마한 심리적 에너지를 지고 있어서 누구나 그것에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8]

 

꿈의 일반적인 기능을 꿈 소재를 산출함으로써 심적 평형을 회복시키데 있다. 꿈은 이로써 섬세한 방법으로 심리적인 균형을 이루게 한다. 우리 심리구조에서 꿈의 보완적 역할이라고 부른다.

비현실적인 이상에 사로잡힌 사람, 자기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사람, 자신의 능력과 어울리지 않게 과대한 계획을 세우는 사람들이 하늘을 날거나 추락하는 꿈을 꾸는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하늘을 날거나 추락하는 꿈은 그들의 인격적 결함을 보상해 주는 동시에 목하 그들이 겨냥하고 있는 계획이나 걷고 있는 도정이 위험한 것임을 경고한다. 그런데 꿈의 경고가 무시되면 실제로 사고가 발생하는 것이 보통이다.9]

 

정신적 안정을 위해, 나아가서는 생리적 건강을 위해 의식과 무의식은 총체적으로 연결돼 있어야 하고 서로 평행을 이루며 작용해야 한다. 만일 이 양자가 서로 분리되거나 <분열>되면 심리적 장애가 오게 된다.

이런 점에서 꿈 상징은 인간 마음의 본능적인 부분이 합리적인 부분에 보내는 중요한 메시지의 전달 부호인데, 이것을 해석하면 빈곤한 의식을 풍부하게 할 수 있고 잊었던 본능의 언어를 다소 소생시킬 수 있다. 10]

 

되풀이해서 꾸는 꿈은 한번쯤 주목해 볼 필요가 있는 현상이다. 이런 꿈은 꿈꾼 사람의 생활태도에 어떤 결함이 있어서 무의식이 그 결함을 보상하기 위해서 보내는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2. 꿈의 분석

 

기호는 그것이 나타내는 개념에 미치지 못하는 것인 반면, 상징은 분명하고도 직접적인 의미 이상의 어떤 것을 나타낸다. 더욱이 상징은 자연 발생적이다. 꿈속에선 상징이 저절로 만들어진다. 꿈은 생기는 것이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꿈은 상징을 얻을 수 있는 보고라 할 수 있다.

이점은 꿈의 해석에서도 아주 중요한 방향을 제시한다. 많은 사람들은 꿈을 충동적인 생각이나 감정의 <위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일 꿈을 상징적인 것이라고 믿게 되면 해석은 달라진다.

분석가에게 꿈이 지닌 특수한 메시지(즉 의식에 대한 무의식의 공헌)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은 치료적인 의미에서 대단히 중요하다.11]

 

꿈에 임상분석에 관한 대단히 중요한 점을 보여 준다. 꿈의 분석은 어디에서 배워와 규칙에 맞게 적용하는 하나의 기술이 아니라, 두 인격 사이에서 일어나는 변증법적 상호 교환의 과정인 것이다.

꿈에 분석이 기계적인 기술로 취급된다면 꿈을 꾼 개인의 독특한 심리적 인격은 사라지고 치료의 문제는 단순한 질문의 차원으로 환원되어 버리고 만다. 말하자면 <분석가와 꿈꾼 사람 중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지배하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변질되고 만다는 것이다.

나의 목적은 환자의 존엄과 자유를 지키고 보존하여 그가 자신의 뜻에 따라 삶의 길을 갈 수 있게 만들어 주는데 있다. 개인이야말로 유일한 현실이다. 그 개인에서 분리되어 인류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향하며 향할수록 우리가 오류에 빠질 가능성은 그만큼 높아진다. 세상의 모든 일을 바르게 조망하기 위해서는 한 인간의 현재뿐만 아니라 그의 과거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신화나 상징의 이해가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2. 유형의 문제

 

꿈은 개별적인 취급을 필요로 하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심리학자가 다수의 개인을 연구할 경우, 수집된 소재를 분류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일반화 작업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우리는 개인의 성격을 분류함에 있어 성격이 <외향적>이냐 <내향적>이냐, 이런 식의 비교적 단순한 분류법에 따라 구분을 지을 수가 있다. 이것은 여러 가지로 가능한 일반화 가운데 하나에 지나지 않지만, 이 예만 보더라도 분석가의 성격이 그중 한 유형에 속하고, 피분석자의 성격은 다른 유형에 속할 경우 치료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어려움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꿈을 심층 분석할 경우, 분석가라는 두 개인 간의 대면은 불가피하기에, 이들의 성격유형이 같고 다름에 따라 큰 차이가 생긴다. 양자가 같은 유형에 속할 경우, 분석 작업은 한동안 순조롭게 진행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쪽이 외향적이고 다른 한쪽은 내향적일 경우에는 서로 다른 관점, 때로는 대조되기도 하는 관점이 곧바로 충돌하는 수도 있다. 특히 양자가 각각 자기의 성격유형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때, 혹은 자기의 유형을 정당한 것이라고 확신할 때 이 충돌은 필연적이다. 꿈의 해석에서는 반드시 이러한 인격의 차이가 고려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분석가는 심리학의 이론과 기술이 인간의 정신을 두루 파악할 수 있는 절대적인 진실이라는 가정이 가능할 때만 피분석자보다 우월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 같은 가정을 대단히 위험스러운 것이기 때문에 분석가 자신이 확신을 가질 일은 아니다. 그래서 자기 삶의 정체성을 동원하여 피분석자의 전인간성을 직면하지 않고, 이론이나 기술(단순한 가설이나 시도에 지나지 않는)만으로 피분석자를 대할 경우 말 못 할 의혹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분석의 과정에서, 피 분석자의 인격에 충분히 대응할 수 있는 것은 분석가 자신의 전인격뿐이다. 분석가 자신도 시험대에 오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석가와 피분석자의 인격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 갈등하고 있는가, 혹은 상보적으로 작용하고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 하는 것은 분석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12]

 

네 가지 기능의 유형은 의식이 그 경험의 방향잡이에 사용되는 수단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감각>(즉, 감각지각)은 우리에게 어떤 존재 여부를 알려주고, <사고>는 그 존재하는 것의 정체를 알려주며, <감정>은 그 존재하는 것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알려 주며, <직관>은 그 존재하는 것이 어디에서 유래하여 어디를 지향하는가를 알려 주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유형에 관한 이 네 가지 규준이 의지력, 기질, 상상력, 기억력 등의 개념 가운데 네 가지 관점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 유의하기 바란다. 이 기준은 자신의 편견을 이해하는 데도 유용하다.13]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꿈을 이해하려면 자기의 편애를 희생하고 자기의 편견을 억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분석가가 자기 자신의 입장을 판단하고 상대성을 인정하는 노력에 소홀하면, 피분석자의 마음에 대한 올바른 정보를 얻을 수도 없으며 통찰을 할 수도 없다. 지금까지 설명으로 꿈 해석에 관한 한 일반적인 법칙은 있을 수 없다는 점이 분명하게 이해되었을 것이다. 나는 앞에서 꿈에는 의식적인 마음의 결합이나 삐뚤어진 것을 보상하는 기능이 있을 것이라고 한바 있다.14]

 

내 환자 중 한사람은 자기 자신을 상당히 과대평가했다. 그러나 과대평가만 할 줄 알았지. 알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자기의 그 고상한 체하는 태도를 역겨워한다는 사실은 알지 못했다.

그는 나에게 꿈 이야기를 했다. 꿈속에서 술 취한 주정뱅이가 하수구로 굴러 떨어지는 것을 봤다는 것이었다. 그는 꿈속에서 자기가 본 광경에 대해 친절하게도, <인간이 그렇게 까지 천해질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무섭더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바로 불쾌했다는 느낌이 중요하다.

이 꿈은 불쾌한 메시지를 전함으로써, 자신을 과대평가하는 그의 그릇된 판단을 상쇄시키려고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이상의 무엇인가가 그 꿈에는 있었다.

나는 곧 그 아우가 알코올 중독자로 폐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러니까 꿈은 그에 대한 또 한가지 사실을 시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환자는 외부적인 존재로서의 동생과 자기 내면에 존재하는 동생의 모습을 동시에 보상하기 위해 그러한 거들먹거리는 태도를 보인 것이다. 15]

 

우리는 우리 인격의 <그늘>진 측면만 간과하고 무시하고 억압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긍정적인 면도 간과하고 무시하고 억압한다. 이와 관련하여 또 한 사람이 생각난다.

 첫인상부터 아주 겸손하고 자기 과시를 않는 것처럼 보였던 그 사람은 행동거지 또한 정중했다. 이 사람이 나에게 자기는 꿈 속애서 항상 나폴레옹이나 알렉산드로스 대왕 같은 위대한 역사적 인물과 만난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이 꿈에는 또 다른 암시가 엿보였다.

즉, 도대체 <그>가 누구이기에 그렇게 유명한 사람들이 꿈에 나타나느냐는 점이다. 다시 말해 그 꿈은 그가 자신의 열등감을 상쇄하는 과대망상증의 경향 또한 지니고 있음을 내비친다.

바로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위대하다고 여기는 과대망상증이 그로 하여금 자신이 속한 환경의 현실에 소극적이게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의무로 여겨지는 것들이라도 자기에게는 면제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기의 뛰어난 판단이 뛰어난 자질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자기에게든 타인에게든 증명해 보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그는 무의식적으로 신경증적이라 할 만한 장난을 하고 있었던 셈이고, 꿈은 그의 이러한 증상을 기묘하게도 막연한 방법으로 그의 의식 수준까지 끌어올리려고 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꿈은 왜 이보다 노골적으로, 그리고 직접적으로 그것을 시원하게 고발해 버리지 않는지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16]

 

꿈은 의식에 접근하는 과정 중에 정신의 잠재적인 내용이<부분적으로 삭제>되는 것처럼 보인다. 잠재의식 상태에서 관념이나 이미지가 지니는 긴장감은 의식 상태에서 지니는 긴장감보다 훨씬 낮다. 그래서 잠재의식 상태에서는 관념과 이미지 이미지가 정의의 명확성을 상실한다. 그래서 관념이나 이미지관계의 필연성이 약화되고, 모호하게 혹은 유비적으로 변질되어 대단히 <난해>해진다.

우리의 꿈이 대단히 우의적인 표현을 사용하는 이유, 하나의 꿈 이미지가 다른 꿈 이미지 속으로 섞여 들어가는 이유, 꿈에 우리가 깨어 있을 때의 논리적 시간적 척도를 적용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꿈이 취하는 형태는 무의식의 본연에 충실하다. 무의식 속에서 모든 충동이 지니는 본연의 모습이다. 꿈이 명확한 생각을 산출할 수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만일 꿈이 명백해지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의식의 경계를 넘어온 것이기 때문에 이때부터는 꿈이 아닌 것이다.

우리는 꿈의 상징이 대체적으로 의식으로는 제어할 수 없는 심리세계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의미와 목적성은 의식만이 누리는 특권은 아니다. 이 의미와 목적성은 생명체 안에서 고스란히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17]

 

이렇게 해서 우리가 지닌 본능적인 힘은 꿈(그리고 모든 종류의 직관, 충동, 그리고 그 밖의 자연발생적인 사건)을 통해 의식의 활동에 영향을 미친다. 통상 의식화되어야 하는 것 중 너무 많은 것이 무의식의 영역에 들어가 있을 경우, 무의식의 기능은 왜곡되거나 한 곳으로 치우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진정한 본능과는 상관없는 행동 동기가 나타난다. 즉, 억압하거나 무시함으로써 무의식에 떠 넘겨 버렸기 때문에 생겨난 것에 불과하지만 그런 억압의 결과 심리적 중요성까지 띠게 된 행동 동기가 나타난다.

바로 이런 행동 동기들이 무의식에 꽈리를 틀고 있다가, 기본적인 상징과 모티브를 표현하려는 무의식에 자연스러운 의도를 왜곡한다. 이 때문에 분석가는 정신 장애의 원인에 관한 환자 자신의 어느 정도 자발적인 고백을 끌어내고, 환자가 두려워하거나 불쾌하게 여기는 바를 파악한 뒤에 비로소 치료를 시작해야 하는 것이다.18]

 

모든 사람에게 고루 적용할 수 있는 치료 기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치료를 받는 개개인이 바로 그 사람만의 특수한 경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상징을 해석하려는 사람에게 이것은 진리에 가깝다. 두 사람이 같은 꿈을 꿀 수도 있다. 이런 일은 임상적으로 쉽게 경험할 수 있는 일인바, 여느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진기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예컨대 그 꿈을 꾼 두 사람 중 한사람은 젊고 한 사람은 늙었다면 그 의미는 다르게 해석된다. 따라서 이 두 개의 꿈을 같은 방법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19]

 

그런 꿈이 있었다.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말을 타고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가는 꿈이다. 꿈을 꾼 사람은 맨 앞에서 달리면서 물이 흘러넘치는 도랑에 이르러 가까스로 이 장애물을 뛰어 넘었다. 그러나 그 뒤를 따르던 이들은 모두 도랑에 처박히고 만다. 처음 이런 꿈을 꾸었다고 한 환자는 젊은이였다. 그는 매우 조심스럽고 내향적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나는 한 노인에게서도 이와 똑같은 꿈 이야기를 들었다. 이 노인은 다소 무모한 데가 있고, 활동적이며 모험이 넘치는 삶을 살아 온 사람이었다. 이 꿈을 꿀 당시 노인은 환자였는데 그의 치료를 맡은 의사와 간호사는 그 때문에 골머리를 않고 제멋대로 굴다가 큰 부상을 당했다고도 했다.20]

 

나는 이 꿈이 젊은이에게 전하는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그러니까 꿈은 젊은이에게, <젊은이가 마땅히 해야 할 바>를 일러주고 있었다. 그러나 노인에게 전한 메시지는 다르다, 꿈은 노인에게, <아직도 그런 짓을 하고 있으니 봉변을 당할 것>이라면서 경고하고 있었다. 의기소침한 젊은이를 이 꿈은 격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노인에게는 그런 격려가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노인의 내부에 남아 꿈틀거리는 모험심 자체가 매우 위험한 파멸의 불씨였던 것이다. 이 사례는, 꿈이나 꿈 상징의 해석이 꿈꾼 사람의 개인적인 상황이나 마음의 조건에 따라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잘 보여 준다.

 

  Ibid, 97

 

 

 

6. 꿈 상징에 나타나는 원형

 

꿈이 보상적일 수 있다는 가정은 꿈이 정상적인 심리현상이며, 무의식의 반응이나 자연 발생적인 충동을 의식에 전달하는 것임을 뜻한다. 대개의 꿈은 꿈을 꾼 사람이 진술하는 꿈 이미지에 대한 연상이나 꿈 이미지의 문맥을 통해 꿈의 전 측면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상당히 강박적인 꿈이라든지, 精動性이 강한 꿈일 경우에는 만족스러운 해석을 내리는 데 꿈꾼 사람의 개인적인 연상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이런 경우 우리는 그런 꿈에는 개인적인 것이 아닌 것, 또는 꿈을 꾼 사람의 개인적인 경험이 환기시킬 가능성이 없는 요소가 자주 나타난다는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요소가 프로이드는 <고태의 잔재>로 개인의 삶과 관련된 것만으로는 그 존재의 내력을 설명할 길이 없는 대단히 원초적이고, 내재적이고, 유전돼 내려온 인간의 심리 형태인 것으로 보인다.

 

심리학자는 실제적인 의미에서는 꿈을 비롯한 무의식의 산물에 관해 경험을 넉넉하게 쌓아야할 뿐만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는 신화에 대한 지식도 쌓아야 한다. 이런 준비가 없이는 아무리 심리학자라고 하더라도 사례간의 유사성을 알아보지 못한다. 그러니까 무의식의 산물과 신화에 대한 지식 없이는 강박 신경증 환자와 신들린 환자 사이의 유사성을 가려 낼 수 없는 것이다.

 

원형이라는 것은, 하나의 모티프를 어떤 표상으로 형성시키는 경향이다. 그 표상은 기본적인 패턴을 잃지 않으면서 세부적으로는 다양하게 변하다. 이를 테면 형제상잔(兄弟 相殘)의 모티브를 나타낸 표상은 다양하지만 모티프 자체는 같은 것이다. 나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내가 <유전된 표상>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원형이라는 개념은 미신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만일 원형이 우리의 의식에서 유래한 것이라면 그 원형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그 원형이라는 것이 우리 의식으로 문득문득 떠올라도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아야 한다. 원형에는 본능적인 <경향성>이 있어서 새가 집을 짓는 충동이나 조직적으로 무리를 이루는 개미의 충동만큼이나 뚜렷한 나름의 충동을 지닌다.

 

본능은 생리적인 충동으로 주로 감각을 통해 지각되며, 공상 중에도 나타나되 대개의 경우 상징적인 이미지로만 나타난다. 바로 이 <나타남>을 원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우리는 원형이라는 기원을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이 원형은 이 세상 어디에서나, 언제나 되풀이해서 나타난다. 상속에 의한 유전이나 이주에 의한 <잡교 수정>이 이루어진 일이 전혀 없는데도 나타난다.

 

어느 정신과 의사의 열 살 난 딸이 여덟 살 때 꾼 꿈의 모티프

 

1. <마수> 즉 뿔이 여러 개 달린 뱀과 비슷한 괴물인데 이 괴물이 다른 모든 동물을 죽여 삼켜 버린다. 그러나 하느님, 실제로는 네 종류의 각각 다른 하느님이 네 귀퉁이에서 달려와 죽은 동물을 살려 놓는다.

2. 천국에 오르니 이교도의 무도회가 한창이다. 지옥에 내려가니 천사들이 자선을 베풀고 있다.

3. 작은 동물 무리가 꿈꾼 아이를 위협한다. 동물들은 엄청난 크기로 자라는데 그중 한 마리가 소녀를 삼켜 버린다.

4. 조그만 쥐 한 마리 속으로 송충이, 뱀, 물고기,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이 들어간다. 이리하여 쥐는 사람이 된다. 이것은 인류 기원의 네 단계를 나타낸다.

5. 한 방울의 물이 현미경에 비친 듯이 보인다. 소녀는 이 한 방울의 물에 나뭇가지가 가득 들어차 있는 것을 본다. 이것은 세계의 기원을 나타낸다.

6. 나쁜 소년이 흙 한 덩어리를 들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던진다. 그래서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나쁜 사람이 된다.

7. 술에 취한 여자가 물에 빠지더니 정신을 차리고 기운을 회복한 채 물 밖으로 나온다.

8. 장소는 미국인데, 많은 사람들이 개미의 습격을 받고 개밋둑 위를 뒹군다. 꿈을 꾸는 이 소녀는 너무 놀라 강물에 빠진다.

9. 달 표면에 사막이 있는데, 여기에서는 소녀는 흙 속으로 빠져 들어가 마침내 지옥에 이른다.

10. 소녀는 빛나는 공의 환상을 본다. 소녀가 손을 대자 공에서 증기가 뿜어져 나온다. 남자가 와서 소녀를 죽인다.

11. 소녀는 자기가 아주 위험한 병에 걸린 꿈을 꾼다. 돌연 새 떼가 소녀의 살갗에서 날아 나와 소녀의 몸 전체를 덮어 버린다.

12. 모기떼가 해를 가리고 달을 가리고, 별 하나만을 남기고 모두 가려 버린다. 그 남은 하나의 별이 소녀의 머리위로 떨어져 내려온다.

 

열두 개의 꿈 가운데 아홉 개는 파괴와 복원의 테마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고, 이중 어떤 꿈에도 기독교적인 교육이나 여향을 받은 흔적이 없으며 오히려 원시 신화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구세주로서의 그리스도라는 일반적인 관념은, 기독교가 존재하기 이전부터 세계에 널리 퍼져 있던 구세주로서의 모티프에 속한다. 이러한 영웅 신화는 대부분은 괴물이 영웅을 삼키는 것으로 되어 있으며, 그 삼킨 괴물이 어떤 괴물이든 간에 영웅은 그것을 기적적인 방법으로 역전시키고 되살아난다. 이런 모티프가 언제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문제를 어떻게 연구할 것인지, 그것도 우리는 알지 못한다.

확실한 것은 모든 세대가 앞 시대로부터 전승으로 그것을 물려받아 알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영웅 신화는, 인간이 영웅 신화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던 시대, 인간이 말을 하면서도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의식적으로 반성할 줄 모르던 시대에서 <기원했다>고 밖에는 추정할 수 없다. 그러니까 영웅상은 원형으로서 태곳적부터 있어 온 것이다.

 

소녀의 꿈은 삶과 죽음에 대한 새롭고 무시무시한 면을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이미지는 통상 미래를 바라보는 아이들 꿈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자기 삶을 돌아보기 시작하는 노인의 꿈에서나 나타나는 이미지인 것이다.

 

상징으로 표명된 개개의 형태는 개인적이지만 이 형태가 보이는 일반적인 패턴은 대단히 <집단적>이다. 이 상징은,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결국 이바지하는 목적은 똑같을 수밖에 없는 동물의 본능과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갓 태어난 동물이 개별적으로 학습한 바에 따라 그 본능을 창조한다고 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각기 태어날 때마다 인간 특유의 삶과 방법을 만들어 낸다고는 볼 수 없다. 동물의 본능과 마찬가지로 사람의 마음이 지니는 집단적인 사고 형태도 타고나는 것. 아득한 옛날부터 이어받아 온 것이다. 이렇게 이어진 집단적인 사고 형태는, 필요한 때가 오면 모든 인간에게 대게 같은 방법으로 기능한다.

 

마음을 의식과 동일시하면 우리는 중대한 오류에 빠질 수 있다. 즉 사람은 빈 마음으로 태어나 살아가면서 개인적인 경험으로 이 빈 것을 채우게 된다는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것은 의식 이상의 어떤 것이다. 동물에는 의식이 거의 없는 듯하지만 많은 충동과 반응으로 보아 마음은 있는 듯하다.

 

의료심리학자들은 상당히 지적인 사람인데도 이따금씩 엉뚱하거나 예측 못 할 행동을 하고, 그런 말이나 행동을 하고 있다고 느끼지 못하는 환자를 대한다. 겉으로 보면 그러한 반응이나 충동은 엉뚱한 짓이거니 하고 넘어가 버린다. 그러나 이것은 인류의 특성으로 아득한 옛날에 형성된 본능의 구조에 뿌리를 두고 있다.

 

심지어 인간의 반성 능력이 강렬한 정동의 충돌에서 기인한 고통스러운 결과에서 기원했을 가능성 마저 있다.

 

정동적인 체험의 충격이 사람들의 의식을 각성시키고자 자기가 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는데 필요한 것은 분명하다. 갑작스런 변화를 겪는 사람의 경우, 우리는 원형이 오랫동안 그 사람의 무의식에 영향을 미쳤으며, 이 같은 극적인 고비로 그 사람을 이끌기 위해 상황을 교묘하게 연출해 왔음을 증명할 수도 있다.

 

그 꿈이 감추고 있는 메시지를 이해한다면 꿈을 꾼 원인도 명백해진다. 모르고 있는 것은 우리의 의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이미 알고 있어서 꿈이 표명하고 있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다. 논리적인 분석은 의식의 특권이다 우리는 이성이나 지식을 이용해서 사물을 선별한다. 그러나 무의식은 주로 본능적 경향에 따라 작동하는 듯하다. 이 경향은 여기에 상응하고 사고 형태, 즉 원형의 문법에 따라 표현된다.

어떤 병의 병과를 기록할 경우 <감염>, <열>이라는 합리적인 개념을 사용한다. 그러나 꿈에서는 병든 몸은 인간이 사는 금생의 집으로, 열은 그것을 파괴하려는 불꽃으로 나타난다.

 

무의식은 미지와 다를 바 없는 성질을 지닌 것을 직관적으로 파악하고 원형적으로 처리한다. 원형적인 심성이 의식적인 사고의 추론 과정을 대신해 예측의 기능을 수행하는 듯하다. 원형은 자체와 주도권과 에너지를 가지며, 주도권과 힘이 있기 때문에 의미심장한 해석이 가능하고, 원형자체의 충동과 사고 형태를 통한 상황에의 개입이 가능한 것이다. 이점에서 원형은 콤플렉스와 같은 기능을 발휘한다. 즉 마음 대로 나타났다가 마음대로 사라지는가 하면, 더러는 우리의 의도를 몹시 당혹스러운 방법으로 저지하기도 하고 수정하기도 하는 것이다.

 

기본적인 신화의 관념은 유사 이전의 어느 시대에, 현명한 노철학자나 예언자에 의해<만들어지고>, 그 뒤에 아무 말이나 잘 믿고 비판이라곤 할 줄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믿어져 왔다>는 것이 신하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이다. 또한 권력 지향적인 성직자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는 <진실>이라기보다는 <소망충족을 위한 사고>라고들 말한다.

 

동물이나 식물이 스스로를 만들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를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이나 정신은 그 자체가 바로 발명자이며 창조자라고 믿는 사람은 많다. 실제로 도토리에서 나온 싹이 나중에 떡갈나무가 되고, 파충류가 포유류로 진화한 것과 마찬가지로 마음과 정신은 오랜 세월 동안 발전해 왔고 지금도 발전을 계속하고 있다. 우리는 외부의 자극에 따라서도 움직이고, 내적인 힘에 따라 자의적으로도 움직이는 것이다. 이 같은 내적인 행동의 동기는 심층에 있는 심원한 원천에 비롯된다. 이 원천은 의식이 만든 것도, 의식의 통제를 받는 것도 아니다.

 

 

7. 인간의 영혼

 

문명화된 의식은 인간 본능에서 점차 분리돼 버렸다. 그러나 이 본능은 사라져 없어진 것이 아니다. 본능은 우리 의식과 접촉할 수단을 잃고 이제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자기의 존재를 확인시킬 수밖에 없게 되었다.

본능의 드러남은 생리적인 증상, 설명하기 어려운 어떤 기분의 경험, 문득문득 찾아오는 망연자실한 순간, 뜻밖의 말실수 등의 돌발 사태로 나타난다.

 

인간은 자기 영혼의 주인이고 싶어 한다. 그러나 자기의 정서를 제어할 수 없는 한, 무의식적인 요인이 갖가지 방법으로 우리의 계획이나 결정에 개입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인간은 자기 영혼의 주인이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무의식적인 요인이 생기는 것은 원형이 자율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자기 분열 상태를 인식하지 않기 위해 칸막이 체계로 자신을 보호한다. 그러니까 외부생활과 자신의 행동 영역의 특정 부분을 각각 다른 서랍에 넣어 놓고 서로 대면시키지 않은 것이다.

 

우리 자신을 상대로나 세계를 상대로, 나쁜 것은 항상 <저들>(즉 우리의 적대자들)이라고 주장하는 한 아무 효과도 없는 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악덕과 어두운 그림자 (우리 본성의 그늘진 측면)를 인식하는 일이다. 자기 본성의 그늘진 측면을 인식할 수 있어야 비로소 우리의 윤리적, 정신적 감염에 대한 면역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모든 감염 현상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다. 그 까닭은 우리 역시 저들과 똑같은 일을 해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의 악덕에다 훌륭한 예의범절의 허울을 씌워두고는 이러한 사태를 보려고 하지도, 인식하려고도 하지도 않으므로 우리에게는 저들보다 약점이 하나 더 있는 셈이다.

 

인간의 현실적인 삶이 냉혹한 대극성(對極性), 즉 밤과 낮, 탄생과 죽음, 행복과 불행, 선와 악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은 슬픈 진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대체 어느 쪽이 대해 우세한지, 정말 선이 악을 무찔러 이기는지, 쾌락이 고통을 무찔러 이기는지 그것조차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인생은 싸움터이다. 전부터 그래 왔으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실존이라는 것은 이 땅에서 종말을 고하고 말 것이다.

 

과학적으로 따지는 사람에게 상징이라는 현상은 대단히 성가신 존재이다. 상징 해석은 지적 논리적으로 만족할 만한 공식화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리학에서 볼 때, 지적 논리적인 공식화가 불가능한 것은 상징뿐만 아니다. 마찬가지로 해석의 장애는 감정이나 정서 현상에도 언제든지 가능하다, 심리학자들은 이런 것들을 결정적인 정의로 파악하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이런 현상을 합리적으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생명 그 자체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정서나 상징적인 관념을 만들어 내는 것은 바로 생명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현장의 심리학은 현장의 경험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상징의 예

기독교에서 십자가⇒다양한 모습과 사상과 정서를 나타냄

명부의 이름 뒤에 십자표시⇒ 사망했음의 부호

힌두교의 남근상⇒만물을 두루 싸안는 상징

거리의 장난꾸러기 벽의 남근상 ⇒성기에 대한 흥미 반영

유아기 사춘기의 공상 ⇒성인이 된 뒤에도 지속되기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도 성적인 의미를 지니는 꿈을 자주 꾸게된다. 이 꿈을 다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이와 같이 이미지의 산출은 꿈을 꾼 사람의 성숙도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꿈이나 상징의 해석은 지성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해석 능력을 기계적인 것으로 바꾸어 놓거나 상상력이 부족한 사람의 머리에 집어넣어 줄 수 없는 일이다. 상징을 해석하려고 할 때, 우리는 상징 그 자체뿐만 아니라 그 상징을 산출한 당사자의 전체성과도 대결해야 한다.

 

상상력과 직관력도 상징 이해에서는 필수적이다. 고도로 정밀해야하는 과학의 경우일수록 상상력이나 직관력은 합리적인 지성이나, 특정 문제에 대한 지성의 적용을 보조하는 것으로 중요한 몫을 한다. 응용과학 가운데서 가장 엄밀한 물리학조차 무의식을 통해 작용하는 이 직관에 놀라울 정도로 의지하고 있다.

 

상징체계의 해석에서 직관력은 거의 필수적이다. 꿈을 꾼 사람이 많은 경우 그 상징을 곧바로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직관 덕이다. 그러나 이러한 운 좋은 직감이 주관적으로 설득력을 지닐 수 있을지는 몰라도 이는 동시에 대단히 위험한 것일 수도 있다. 직관이 남용되면, 꿈을 꾼 사람과 해석자의 관계를 비교적 용이하게 하고, 그러한 안일한 관계를 계속 이어 나가도록 유혹할 수 있다. 또한 치료를 끝마치더라도 그것은 치료가 아닌 두 사람이 공유된 몽상에 불과 할 수 있다. 직관이라는 것은, 사실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그러한 사실들 간의 논리적인 고리에 대한 이해로 환원시킬 수 있을 때만 상징을 설명하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알아야 하는 것을 모두 알았다는 믿음은 우리 인간의 공통으로 지니는 환상이다. 과학적인 이론도 이런 취약성에서 자유롭지 않다. 과학적인 이론은 사실을 증명해 보려는 일시적인 시도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 만고불면의 진리일 수는 없다.

 

 

8. 상징의 역할

 

<자연적 상징>은 마음의 무의식적인 내용물에서 파생한 것이고 그래서 근원적인 원형 심상의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대개의 경우 자연적인 상징의 고대 기원을 추적할 수 있다. 그러나 문화적 상징은 영원한 진리를 표명하기 위해 사용된 것인데, 아직도 이러한 상징은 여러 종교에서 쓰이고 있다. 이 문화적 상징은 수많은 변용의 과정과 어느 정도 의식적인 발전 과정을 거쳐 문명사회에 수용되면서 집단적 이미지가 된다.

 

문화적 상징은 아직도 그 본래의 신성한 힘 혹은 마력을 지니고 있다. 이 상징은 어떤 사람에게는 깊은 정서적 반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심적 변화를 통해 이 상징들은 편견과 비슷한 작용을 한다. 문화적 상징은 우리 정신 구조의 중요한 구성 요소이고, 인간의 모듬살이를 가동시키는 원동력이다. 따라서 심각한 손실을 감수하지 않는 한 이것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억압당하거나 무시당하면 문화적 상징이 지닌 특유한 에너지는 무의식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그 결과, 예측 못할 결과를 낳기 마련이다. 사라져 버린 것 같이 보이던 이 정신적 에너지가 사실은 무의식의 상위 계층을 소생시키거나 강화해 버리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는 유익할 수 있는 경향도, 일단 억압을 받으면 도깨비 같은 모습으로 탈바꿈한다. 악의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무의식을, 심리학을 두려워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현대인은 저희가 자랑하는 <합리주의>(현대인에게서 신성한 힘이 있는 상징과 관념에 반응하는 능력을 빼앗아 버린 원흉)가 인류를 심리적 <지하 세계>의 처분에 맡겨 버린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인류는 이제 <미신>에서 해방되었다고 말한다. 해방되는 과정에서 인류는 지극히 위험한 수준까지 그 도덕적, 정신적 가치를 상실하고 말았다. 도덕적 또는 정신적 전통이 붕괴된 순간부터 인류는 이 세계적인 규모의 방향 감각 상실과 분열을 그 대가로 치르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신비와 누미노스(신성한 힘)는 이제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이제 거룩한 것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마음속에서 본능적인 생각이 넘쳐나던 먼 옛날에, 인류의 의식은 그 생각들에 일관성 있는 무늬를 부과해 정신으로 통합할 수 있었다. 그러나 <문명>인은 이미 그럴 수 없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언필칭 <개화한> 의식은 본능과 무의식의 보조적 기능을 저 자신과 동화시킬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내동댕이쳐 버린 것이다. 이 동화와 통합의 수단이 바로 인류가 하나같이 거룩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던 누미노스한 상징인 것이다.

 

과학적인 이해가 발달함에 따라 우리의 세계는 끊임없는 비인간화의 길을 걸어왔다. 이렇게 느끼는 까닭은 인간은 더 이상 자연에 관여하지 못하고 인간과 자연 현상 사이의 <무의식적 동일성>을 상실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과 자연의 교감은 끝났다. 이 교감은 끝나는 것과 때를 같이해서 이 상징적 인연이 공급해 온 심오한 정동적 에너지 또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 엄청난 손실을 보상하는 것이 바로 꿈 상징이다. 꿈 상징은 우리가 지니고 있던 본래의 성질(본능이나 고유의 사고)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꿈은 그 내용을 자연의 언어로 나타낸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낯설어 보이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꿈 상징을 현대어의 합리적인 용어와 개념으로 번역해야 하는 일과 만나게 된다. 신성한 것들을 표현하던 옛날의 그 언어에는 이제 힘도 영광도 남아 있지 않다.

 

현대인은 인류 정신이 오랜 시간에 걸쳐 발달해 오는 과정에서 습득한 여러 가지 특성이 뒤범벅되어 이루어진 불가사의한 혼합물이다. 이 혼합물로서의 존재가 인간과 그 상징이기에 우리는 이 인간 정신의 소산을 주의 깊게 검토해야 한다. 인간 속에는 회의와 과학적 확신이, 오래된 편견과 시대착오적인 사고와 감정의 버릇, 완고한 오해와 무지가 공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상징과 상징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중요한 것은 상징의 표상이 순전히 개인적인 경험과 관련된 것인지, 어떤 목적이 있어서 꿈이 의식적으로 축적한 지식에서 선택한 것인지를 먼저 알아내야 한다.

 

원형이라는 것은 이미지인 동시에 정동이다. 이 두 가지 측면이 동시에 존재하는 경우에만 원형에 관해 논의할 수 있다. 단순한 이미지에 지나지 않을 경우, 그것은 그림으로 서술된 언어에서 더도 덜도 아니다. 그러나 이 이미지에 정동이 작용하면 비로소 여기에 신성한 힘(심적 에너지)이 생긴다. 이때부터 이 상징은 역동성을 지니게 되는데, 여기에서는 반드시 어떤 의미가 산출된다.

 

원형이라는 것은 생명 그 자체의 조각들(정동이라는 교량을 통해 살아 있는 개인과 불가분으로 연결돼 있는 이미지들)이다. 이 때문에 어떤 원형도 우리가 임의로(혹은 보편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원형은 원형과 관련된 개인의 전체적 삶의 문맥 안에서만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원형이 지닌 특수한 정동적 색조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은 원형을 신화적 개념이 뒤범벅된 잡동사니쯤으로밖에는 보지 못한다. 따라서 아무 의미도 읽어내지 못한다. 원형이라고 하는 것은 살아있는 인간과 마찬가지이다. 즉 특정인에게 의미가 있고,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아내려고 애를 쓸 때만 원형은 비로소 생명력이 있는 존재로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가 무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근원적인 마음의 일부분을 형성하던 원시적 특성을 보존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꿈의 상징이 항상 우리에게 전하려고 하는 메시지가 바로 이 특성이다. 무의식은 마음이 그 발전 도상에서 버렸던 온갖 옛것들(환상, 공상, 구태의연한 사고형태, 기본적인 본능 따위)을 되찾으려고 하는 듯하다.

 

사람들이 무의식인 것에 접근할 때 저항을 느끼거나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인 것 같다. 무의식이 되찾으려고 하는 것, 두려움과 저항을 느끼는 이 잔재는 가치중립적인 것도 아니고, 무관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내용물은 상당한 에너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잔재에 대해 불쾌감, 심지어는 공포를 느끼기 까지 한다. 바로 이러한 잔재는 억압되면 억압될수록 신경증의 형태로 개인의 전인격 속으로 퍼져 나간다.

 

무의식의 이러한 노력이 중요한 것은 여기에 심적 에너지가 있어서 정신에 활력소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 상태를 경험한 사람은 자기의 기억 속에 빈틈(의식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사건이 있기는 있었다는 느낌 같은 것)이 있음을 인식하는 수가 있다. 유아기 기억의 빈틈이란, 그보다 막대한 손실, 즉 원시 심성의 상실에 의한 징후에 지나지 않는다.

 

어린아이의 마음이 원시 심성과 근본적으로 동일한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대단히 복잡하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진화 단계가 태아에 의해 되풀이되는 것처럼 < 원시 심성>은 어린아이의 마음속에서 기능하고 있다. 어른이 되어서도 유아기의 기억을 회상해 낼 수 있다면, 이 기억은 당사자에게 심각한 심리적 장애가 될 수 있고 당사자를 기적적으로 치료하거나 종교에 귀의하게도 할 수 있다.

 

<개성화 과정>이라고 불리는 이 과정에서 상징의 해석은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맡는데 그 까닭은 상징이 우리 마음속에 있는 대극을 조화시키고 재통합하려는 자연스러운 시도이기 때문이다.

 

꿈을 해석할 때는 이 원형의 정동적 가치를 염두에 두고, 해석의 전 과정을 통해서도 항상 이점을 고려해야 한다. 사고와 감정이 도식적인 대립관계에 있어서 사고는 거의 자동적으로 감정의 가치를 무시하고 감정도 사고를 무시하기 때문에 이 점을 항상 고려하지 않으면 정동적 가치는 쉽게 허물어지고 만다. 심리학은 가치 요인(곧 감정)을 고려해야 하는 유일한 과학이다. 감정을 고려해야 하는 것은 이 감정이 곧 신체적 현상과 생명을 잇는 연결고리이기 때문이다. 이점 때문에 심리학은 종종 과학적이 아니라는 비난을 받는다.

 

24] Ibid, 148.  p 98~148

 

 

 

분열의 치유 2]

 

옛날 우리가 기도하던 신들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세계의 위대한 종교들은 바야흐로 나날이 악화되어 가는 악성 빈혈증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인류를 돕던 신령은 숲이나 강이나 산이나 동물한테서 사라져 버렸고 신인(神人)은 무의식의 지하세계로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리석게도, 신인들이 그 지하세계에서 우리 과거의 유물에 둘러싸인 채 불명예 속에 존재하고 있다고 철썩 같이 믿는다.

지금 인류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이성>의 여신이지만 사실은 이 이성의 여신이라는 존재야말로 인간의 가장 거창하고 비극적인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런 이성의 도움으로 <자연을 정복했다>고 확신한다.

 

어떠한 변화든 시작점이 있어야 하기 마련인데, 이러한 변화를 경험하고 전파하게 되는 것은 결국 개인이다. 그래서 변화는 개인에게서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 중 어느 누구로부터 시작되어도 좋다. 자기가 하기 싫은 일을 남이 시작해 줄 것을 바라는 마음으로 주위를 둘러보고만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뾰족한 수가 없는 듯이 보이는 만큼, 이 시점에서 우리 모두가 스스로의 무의식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유용하지는 않을지 자문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더욱이 우리의 의식은 이 점에서 우리에게 유용한 충고를 해주지 못할 듯이 보인다. 인류는 오늘날, 위대한 종교도 다양한 철학도, 이 세계가 현재 처한 상황을 직시하는데 필요한 심적 안녕의 밑바탕이 될 만한 강력하고 생생한 관념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이 대답은 문제의 핵심을 제대로 짚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너무나 주관적인 의식의 세계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하느님이 꿈이나 환상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는 지극히 오래된 진실을 잊어버리고 있다.

보라. 불교도는 무의식적인 환상세계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허깨비라고 부르며 배척하고 있지 않은가?

기독교도들은 자신과 무의식 사이에 교회와 성서를 끼워 넣고 있지 않은가?

뿐인가. 합리적인 사람, 지적인 사람도 자기의 의식이 정신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직까지도 알지 못하고 있다. 70년 동안이나 무의식은 기본적인 과학적 개념이며, 심리연구에서 빠질 수 없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이 확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무지는 여전히 지성인들을 지배하고 있다.

 

1] 카를 G. 융 외 지음,「인간과 상징」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2] Ibid, 149.

 

나는 자연의 상징 연구에 반세기 이상을 보낸 사람이다. 그 결과 나는 꿈과 그 상징은 터무니없는 것도, 무의미한 것도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다. 나는 꿈이라는 것은 그 상징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에게는 정말 흥미로운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다고 해서 꿈이 그 사람의 생업을 도울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인생의 의미는 비즈니스 라이프로만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깊은 욕망 또한 은행의 저금통장으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인류가 에너지라는 에너지는 모두 자연의 탐구에 쏟아 넣고 있는 이 시대에도 인간의 본질, 즉 인간의 마음에 대한 연구에는 이렇다 할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다. 물론 의식의 작용에 관한 연구는 없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의 본질은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에 있다. 인간의 마음은 참으로 복잡한 것이다. 상징을 산출하는 이 복잡하고 생소한 부문에 대한 탐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보아도 좋다.

밤마다 이 무의식이 보내오는 신호를 감청하면서도, 소수에 불과한 이들을 제외한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커뮤니케이션의 의미를 해독하는 일은 어렵고도 지루한 일로만 여기고 있다니, 가히 놀라운 일이다.

인간이 지닌 가장 복잡하고 중요한 장치라고 할 수 있는 이 마음이 너무나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심하게도 <심리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은 <아무것도 아니다>는 말과 동의어로 쓰이고 있다.

 

이 같은 현대의 관점은 지극히 일방적이고 부당하다. 이러한 관점은 이미 알려진 사실에 비추어 보아도 부당하다. 무의식에 관해 우리 인류가 실제로 알게 된 바에 따르면 그것은 엄연한 하나의 자연 현상이고, 자연 그 자체와 마찬가지로 <가치 중립적>이다.

무의식은 인성의 모든 측면-빛과 어둠,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 심원함과 어리석음-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상징의 연구는 집단적인 측면은 물론이고 개인적인 측면도 중요하지만 그 범위가 너무 방대해서 그런지 아직은 거둔 성과가 크지 않다. 그러나 주사위는 던져졌다. 상징의 연구는 초기의 결과가 고무적인 것으로 보아 머지않은 장래에 현대의 인류가 풀지 못한 수많은 의문의 해답을 제시해 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