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상징
제3부 개성화 과정 - 마리루이제폰 프란츠-
1. 마음의 성장패턴
융 박사는 무수한 사람들을 관찰하고 그들의 꿈을 연구함으로써(약8만개의 꿈을 해석한 것으로 추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꿈은 꿈을 꾼 사람의 생활과 관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요소로 이루어진 거대한 조직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일련의 꿈은 하나의 배열이나 패턴을 따르는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이 패턴을 융 박사는 개성화 과정이라고 부른다. 꿈이라고 하는 것은 매일 밤 다른 광경이나 이미지를 산출한다. 따라서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는 한 여기에서 어떤 패턴을 찾아 낼 수는 없다.
그러나 자신의 꿈을 몇 년 동안 관찰하고 연구한다면 반드시 어떤 일정한 내용이 되풀이해서 나타났다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아 낼 수 있다.
우리가 꾸는 꿈은 종잡을 수 없이 복잡한 패턴을 이루어 내는데, 우리의 소질이나 성향은 그 속에서 두서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는 한다. 그러므로 이 복잡한 문양을 장기간 관찰하면 일종의 조절 기능이나 방향성이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조절 기능이나 방향성이 마음의 성장 과정을 눈에 띄지 않게 진행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눈에 띄지 않게 진행되던 변화는, 이로써 보다 성숙한 인격이 나타나는 순간부터 그 기능이 활발해지면 다른 사람의 눈에도 띌 정도가 되기에 이른다. 이 마음의 성장은 의지력이라고 하는 의식적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그래서 이 마음의 성장 과정은 꿈 이미지에서는 종종 나무로 상징된다. 나무의 느리지만 힘찬 발육은 명확한 하나의 패턴을 이루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신세계에서 이 성장 조절의 기능을 맡는 마음의 중심은 핵 원자와 같다. 이 마음의 중심이 바로 꿈 이미지의 창조자, 조직자, 혹은 그 샘이라고 할 수 있다. 융 박사는 이 중심을 자기라고 부른다. 그는 이로써 이 마음의 전체성인 이 자기를 마음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 자아와 구별한다.
인간은 아득한 옛날부터 인간에게 이러한 내적 중심이 있다는 사실을 직관을 통해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은 이것을 인간 내부의 <다이몬>이라고 불렀고, 이집트인들은 <바아의 영혼>이라고 불렀으며, 로마인들은 각 개인이 타고난 특질이라는 말로 불러 왔다. 미개한 사회의 구성원들은 이것을, 동물이나 물신으로 화신한 수호령 이라고 믿는다.
<자기>는 마음속에서 그 마음의 임자를 지휘하고 인도하는 어떤 요소라고 정의할 수 있다. 이 <자기>는 의식적인 인격과는 다른 요소이기 때문에 꿈의 연구를 통해서가 아니면 파악할 수 없다. 꿈은 꿈꾼 사람의 인격을 끊임없이 발달하게 하고, 성숙하게 하는 조정 기능의 중심으로 나타난다.
<자아>는 본래 임의의 욕구를 산출하고 그 욕구를 무한정 따르게 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마음의 전체성이 현실화하는 것을 보조하도록 만들어진 존재인 듯하다. 그렇다면 마음의 모든 체계를 밝힘으로써 <자기>로 하여금 그것을 의식하게 하고 깨닫게 하는 것이 곧 자아인 것이다.
예를 들면 내가 예술적인 재능을 타고났다고 하더라도 나의 자아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면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 말하자면 그런 재능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 재능은 나의 <자아>가 인식할 수 있을 때 비로소 현실화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생래적인 것일 뿐, 사람의 마음에 잠재해 있는 마음의 전체성은 완전히 자각되고, 완전히 실천된 전체성과는 다른 것이다.
개성화 과정은 개인이 그것을 인식하고 의식적으로 살아 있는 관계를 맺고 있을 때만 의미가 있다. 소나무가 그 성장을 인지하고, 자신을 형상 짓는 여러 가지 변화를 즐기는지, 아니면 고통스럽게 받아들이는지 우리로선 알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이 자기의 발전에 의식적으로 참가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인간은 의식적으로 자유롭게 결정을 내림으로써 그 발전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음을 자각할 때도 있다. 이러한 협조도 좁은 의미에서의 개성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에게 개성화 과정은 타협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주관적인 경험으로 어떤 초인적인 힘이 창조적인 방법으로 우리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고, 은밀한 계획에 따라 무의식이 자신을 이끌고 있다는 느낌(나는 그것을 본 적이 없는데도 무엇인가가 우리 자신을 보고 있다는 느낌과 비슷한)을 받을 때도 있다. 이것이 바로 꿈을 통해 나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는 마음속의 <위대한 자>인 것이다.
마음의 중핵이 지닌 창조적이고 적극적인 측면은, 자아가 의도적인 목표를 던져 버리고 보다 깊고 보다 본질적인 존재에 이르려고 할 때만 작용한다. 자아는 어떤 계획이나 목표를 버리고, 성장에의 내적인 요청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고 스스로를 맡기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를 지배하는 강력한 힘(각자의 창조적 자기실현의 충동에서 생기는 힘)에 몸을 맡기고, 이 과정 속에서 되풀이해서 모색하고, 자기에게 고유한 것을 발견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우리 삶의 지침이 될 만한 암시나 충동은 <자아>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정체성, 즉 <자기>에게서 생기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발전시키고 있는 방법을 모방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자기실현이라고 하는 이 과업이 사람마다. 지극히 독자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문제는 대부분 서로 비슷해 보이지만 절대 동일한 것은 아니다. 모든 소나무가 다 비슷하지만 똑같은 소나무는 하나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개성화 과정의 다양한 모습을 요약하기 어려운 것은, 개인의 모습이 끝없이 비슷해 보이면서도 사실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실제로 개인은 어떤 측면에서든 타인과는 다른 것, 결국 자기 자신에게만 고유한 것을 성취하지 않으면 안 된다.
21] Ibid, 250-251.
제3부 개성화 과정
무의식과의 첫 만남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청소년 시절의 특징은 자신과 세계를 서서히 인식하게 되는, 말하자면 점진적인 자각이 시작되는 시기라는 데 있다. 유아기는 정서적으로 매우 강렬한 충동을 느끼게 되는 시기이다. 이 시절의 꿈에서는 종종 마음의 기본적인 구조가 상징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의식의 정상적인 발달 과정에서 방해를 받게 되면 아이들은 외적 혹은 내적 곤란을 피하여 자기의 내적인 요새로 도망쳐 버린다. 이때 이들의 꿈과 무의식을 소재로 한 상징적인 그림에는 종종 정도 이상으로 많은 원이나 사각형이나 중핵의 주제들이 등장한다. 이러한 주제들은 앞에서 이야기한 마음의 중핵, 즉 의식의 구조적인 발달 과정 전체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인격의 가장 중요한 중심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개인의 생활이 위험에 직면할 경우, 중심의 이미지가 두드러진 형태로 드러나는 것은 당연하다. 바로 이 중핵에서 모든 자의식이 확립되고 그 과정의 방향이 결정된다. 자아라고 하는 것은 이 본래의 중심을 복사한 것이거나, 구조상으로는 이 중핵과 등가물인 것으로 보인다. 실제의 개성화 과정은 인격이 상처를 입고 그것을 고통스러워하는 데서 시작된다. 이 최초의 충격은 일종의 계시로 발전하게 된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의 자아는, 이것을 계시로 인식하기보다는 자신의 의지나 욕망이 방해를 받은 것으로 간주하고 그 원망을 외적인 어떤 대상에게 투사하기 마련이다. 즉 자아는 신, 경제 상태, 윗사람, 혹은 배우자를 그 장해의 책임자로 간주하게 되는 것이다.
개인의 삶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다가오는 어둠을 편견 없이 순수하게 대면하고 거기에 은폐되어 있는 목적이 무엇인지, 그것이 자신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 알아내려고 노력하는 방법이다. 우리가 어둠의 정체를 간파하는 방법은 꿈이나 무의식에서 솟아오르는 공상을 통해 확인하는 방법뿐이다. 지레짐작하거나 감정정적인 반응을 보이지 말고 무의식을 찬찬히 주목하면 그것은 종종 대단히 유용한 상징적 이미지의 흐름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항상 나타난다고 볼 수는 없다. 때로 그것은 자기 자신과 자기의 무의식적 태도의 결점에 대해 일련의 고통스러운 지적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바로 이 고통스러운 진실을 받아들임으로써 개성화 과정을 맞지 않으면 안 된다.
2] Ibid, 252.
그림자의 자각
유용한 형태로건 부정적인 형태로건 일단 무의식이 나타나면 의식은 바로 이 무의식에 재적응할 필요성이 생긴다. 이렇게 함으로써 무의식에서 나온 <비난>까지 의식은 수용하려는 자세를 보인다. 이로써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가까이 들어 보지 않으려 하던 자신의 인격의 한 측면을 바로 꿈을 통해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림자가 무의식적 인격의 전부는 아니다. 그림자는 자아의 전혀, 혹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속성을 나타낸다. 이 속성은 개인에게 고유한 것으로 경우에 따라 쉽게 의식화하기도 한다. 어떤 점에서, 그림자는 사생활의 외적인 데서 온 보편적인 요소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한 개인이 자기의 그림자를 대면하려고 할 경우, 그는 그 그림자를 통해 타인에게는 발견되었을 터이지만 자기로서는 있는 줄 도 모르던 성질이나 충동을 만나고는 당혹해하거나 부끄러워하기도 한다. 그림자는 이기심이나 정신적 나태나 무신경일 수도 있고, 비현실적인 공상, 음모, 책략일 수도 있고, 부주의나 비겁, 혹은 정도를 넘는 금전욕이나 소유욕일 수도 있다. 요컨대 별것 아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마찬가질 테니까 눈치채지 못할 것 이라면서 마음에 접어 두었을 것임에 분명한 사소한 죄악이 바로 그림자의 모습이다.
그림자는 의식에서 제거되어 버린 것들로만 구성되는 것도 아니고, 반드시 꿈을 통해 나타나는 것만도 아니다. 그림자는 충동적인 행위나 무심코 저지르는 부주의한 행동을 통해서도 나타난다. 우리는 더러 엉겁결에 험구가 툭 튀어나오는 일을 경험할 때가 있다. 그런가 하면 공연히 속임수를 쓰거나, 엉뚱한 결정을 내리는 바람에 의식적으로는 전혀 바라거나 의도하지 않던 결과와 만나게 되는 수가 있다. 그림자라고 하는 것은 의식적인 인격보다 훨씬 집단적인 감염에 허약하다.
자기의 그림자를 다른 사람에게 투사할 때 또 하나 투사의 주체가 불리해지는 측면이 있다. 어떤 사람이 만일 자신의 그림자를 공산당이나 자본가에게 투사할 경우, 그 사람의 인격의 일부는 바로 그 적대되는 쪽에 머물게 된다.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투사된 쪽을 지지하게 되는데, 결국 이것은 이적 행위나 다름없다. 그러나 반대로, 투사하는 행위 자체를 인식하고 겁을 먹거나 적의를 품지 않고 그 투사의 객체와 의논하고 토론하면 상호 이해하는 기회가 생길 수 있다. 그림자를 적대하느냐, 친구로 대하느냐는 전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 꿈속에서 본 잘 알지 못하는 집이나 프랑스인 무법자의 경우가 그랬던 것처럼, 그림자라고 해서 반드시 꿈꾼 사람과 적대 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그림자라고 하는 것은 좋건 싫건 한 길을 함께 가야 하는 동행인과 같다. 함께 가야 하기 때문에 때로는 져주는 척하면서, 때로는 저항하면서, 때로는 다독거리면서 다스려야 하는 것이다. 그림자는 무시되거나 오해받을 때만 적대적인 힘이 된다.
그림자가 저항하기 어려운 어떤 압도적인 충동의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고 해서 언제나 영웅적인 결단으로 이것을 억압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따금씩 자기의 요청과 동일한 방향을 지향하기 때문에 이 그림자의 힘이 강력해지는 수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내적 압력 세력의 배후에 있는 것이 자기인지 그림자인지 대단히 모호해진다. 무의식에 관한 한, 불행히도 인간은 달빛 아래 있는 것과 같다. 달빛 아래 서면 사물과 사물의 경계가 불분명하게 보일 뿐만 아니라.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한 사물의 시작과 끝이 어딘지 도무지 분명하지 않게 된다. 그림자상이 가치 있는 유용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을 경우에는 억압되기보다 실제적인 체험 속으로 동화되어야 한다. 자아는 자만심이나 우월감을 버리고, 겉으로는 어둡게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그림자의 요소를 의식 안으로 동화시켜야 한다. 이것은 격정을 정복하는 것과 똑같은 정도의 영웅적인 결단을 필요로 한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그 존재의 뿌리로는 자기가 어디로 가야하며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알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얼간이가 때로 너무나 어처구니없이 과격한 행동을 하여 내적인 소리가 그 존재를 알릴 수 없을 때가 있다. 무의식이 보내는 메시지를 이해하려는 모든 노력이 실패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 이런 어려움에 처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 정진하면서 무의식의 암시가 방향을 바꿀 경우 우리도 방향을 바꿀 준비를 하는 일뿐이다. 드문 경우이기는 하지만 끝끝내 인간적이기 위해서는 그 길이 옳은 길이 아닌 줄 알기에 자신을 옭아매는 느낌이 들더라도 무의식의 충동에 저항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 같은 결단을 내리려면 자아에게는 내적인 힘과 내적인 확신이 필요한데, 이 힘과 확신은 우리 내부에 있는 <위대한 자>, 즉 <자기>에게서 나온다. 그러나 이 <위대한 자>는 좀체 자기 자신을 명확하게 보여 주려고 하지 않는다. 어쩌면 <자기>는 자아의 자유로운 선택을 기다리고 있는 지도 모르고, 인간의 의식과 결정이 선행되어야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건지도 모른다. 이처럼 미묘한 윤리적 문제가 개입하는데 어떻게 타인의 행동을 판단할 수 있겠는가. 각 개인은 자기 자신의 문제를 똑바로 바라보고 자기 자신에게 올바른 것이 무엇인가를 결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심층 심리학 분야에서의 이러한 새로운 발견들은 우리의 집단적, 윤리적 전망에 변화를 줄 수밖에 없다. 무의식의 발견은 그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에 있어 현대의 가장 괄목할 만한 대발견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의식의 실체를 인정한다는 것은 곧 가감 없는 솔직한 자기반성과 삶의 전면적인 재편성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무의식의 존재를 인정하기 보다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전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살고 있다. 하기야 무의식을 진지하게 다루고 무의식이 야기하는 문제와 맞서자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그러나 사람들은 너무 무관심한 나머지 의식하고 있는 행위의 도덕적인 측면도 깊이 생각해 보려고 하지 않는다. 요컨대 무의식이 미칠 영향을 고려하기에는 너무 게으른 것이다.
아니마 : 마음속의 여성
어렵고 미묘한 윤리적 문제가 반드시 그림자와 함께 나타나는 것만은 아니다. 말하자면 또 하나의 내적인 상과 함께 나타날 수도 있다. 꿈을 꾸는 사람이 남성인 경우 무의식이 여성으로 인격화하고, 꿈을 꾸는 사람이 여성일 경우 무의식이 남성으로 인격화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니까 그림자의 배후에 있는 이 제2의 상징적인 상이 그림자 뒤에 나타나 또 다른 어렵고 미묘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이 남성상과 여성상을 각각 <아니무스>, <아니마>라고 부른다.
아니마는 남성의 마음속에 있는 여성적 심리 경향이 인격화한 것이다. 한 남성이 지니는 아니마의 특성은 어머니에게서 받은 영향에서 형성되는 경우가 많다. 어머니에게 나쁜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수록 아니마는 흔히 조급하고, 우울하고, 불확실하고, 불안정하다. 아니마가 이럴 경우 당사자는 화를 잘 내는 성격의 소유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남성의 마음속에 있는 이 같은 부정적인 어머니상은 ‘나는 아무 쓸데없는 인간이다.....’ ‘세상만사가 무의미 하다.....’ ‘다른 사람에게는 어떨지 몰라도 내게는 좋은 일이 하나도 없다’는 식의 자기 암시를 끝없이 되풀이하게 한다. 그래서 이런 아니마 무드는 권태감이나 무력감의 원인이 되는가 하면, 혹시 병에는 걸리지 않을까, 사고는 당하지 않을까 하는 등의 쓸데없는 걱정을 하게 하기도 한다. 한편 어머니에 대한 아들의 경험이 긍정적인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전형적인, 하지만 다양한 양태를 띠는 아니마의 영향을 받는다. 이렇게 되면, 아들은 여성스럽게 변하거나 여성의 제물이 되어 인생의 고난과 투쟁하는 힘을 잃어버린다. 아니마의 이 모든 측면은 우리가 그림자에서 관찰한 것과 똑같은 경향을 지닌다. 즉 아니마 역시 투사될 수 있다. 바로 이 때문에 아니마는 남성에게 실제 여성이 지닌 특질로 인식되기도 한다. 남자가 어떤 여자를 처음 만나는 순간, ‘바로 이 사람이다!’ 생각하고 바로 그 순간에 사랑에 빠져 버리는 것은 그 여자의 모습이 그 남자의 아니마 모습과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남자는 그 여자를 오랜 옛날부터 가까이 지내온 사람으로 여기게 된다.
아니마에는 부정적인 만큼의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남성이 올바른 결혼 상대를 찾으려면 아니마의 힘을 입어야 한다. 뿐만 아니다. 한 남성이 논리적인 정신만으로는 자기 무의식 속에 숨겨진 요소를 식별하지 못할 경우 아니마의 역할로는, 남성의 마음을 올바른 가치와 조화시키고 보다 심원한 내적 깊이로 향하는 길을 열어 주는 일을 들 수 있다.
내적 세계로의 안내자로서 아니마는 실제로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아니마에는 긍정적인 기능과 부정적인 기능이 있다. 긍정적인 기능은, 남성이 아니마가 암시하는 감정, 기분, 기대, 공상을 성실하게 받아들이고 이것을 어떤 형태로 정착시킬 때 작용한다. 개인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파악하는 방법은 자기 공상이나 가정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고통스러운(그러나 본질적으로는 간단한)결의가 있어야 한다. 그 까닭은 아니마상이 내적 현실로서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파악하는 방법은 자기 공상이나 감정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길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야 아니마가 본래의 모습을 되찾아 <자기>로부터의 생생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내적인 여성>이 되는 것이다.
아니무스 : 마음속의 남성
<아니무스>는 여성의 무의식이 인격화한 남성상이다. 아니무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속에 숨은 거룩한 신념이라는 모습을 취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신념을 소란스럽고 완고하며 남성적인 목소리로 설교하려 들거나, 난폭할 정도로 격정적인 태도를 내보이면서 다른 사람에게 이 신념을 강요하려 드는 여성을 볼 때가 있다. 이러한 여성의 사고 속에서 아니무스가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테마가 <이 세상에서 내가 바라는 것은 오직 사랑뿐이다. 그런데 그는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다>, 혹은 <이 경우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을 뿐인데, 둘 다 나쁘다>이다.(아니무스는 절대로 예외를 받아 들이지 않는다.) 이 경우 바로 그 여성의 남성성이 드러나고 있다고 보아도 좋다. 아니무스가 표명한 의견은 일반적으로 타당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에 반박할 수 있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그 의견이 개개인이 처한 상황과 맞아 떨어지는 경우 또한 드물다. 따라서 당연한 것 같은데도 주의해서 보면 핵심에서 벗어난 의견이기가 쉽다. 남성의 아니마상이 자기 어머니의 이미지로부터 영향을 받으며 형성되듯이, 여성의 아니무스는 아버지의 이미지로부터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된다.
기묘할 정도로 수동적인 태도, 혹은 감정의 마비증세, 혹은 무가치한 느낌까지 낳을 수 있는 자신감의 부재, 이런 것들은 무의식적 아니무스의 의견 표명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여성의 존재 깊은 곳에서 아니무스는 늘, <너에게 아무 희망도 없고 무슨 일을 해봐야 소용도 없어. 무슨 일을 하건 네게는 아무 의미가 없어. 한다고 네 인생이 개선되는 것은 아니니까>하고 속삭인다. 이 인격화한 무의식 중 한 가지가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을 경우, 우리는 불행히도 우리 자신이 그런 생각과 감정의 주체인 것처럼 느끼게 된다. 다시 말하면 그런 생각과 감정이 무의식의 장난인 줄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자아는 그 무의식의 장난을 스스로의 행위와 동일시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러한 생각이나 감정을 자아와 분리시킬 수도 없게 된다. 이런 상태가 바로 자아가 무의식에서 비롯된 이미지에 사로잡힌 상태인 것이다.
아니무스는 종종 남성의 무리로 나타난다. 이로써 무의식은 아니무스가 개인적인 요소를 암시한다기보다는 집단적인 요소를 암시하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셈이다. 아니무스가 바로 이 집단적인 사고방식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여성은 아니무스가 무의식을 통해 속삭일 때마다 곧잘, ‘사람은.....’이라든지, ‘그들은 ....’ 이라든지, ‘누구나 다....’ 하는 식으로 말을 하고는 한다. 그리고 이런 경우 이들의 이야기에는 ‘언제나....’, ‘반드시.....’, ‘해야 하는 법이야’ 하는 식의 단정적인 의미가 나타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실생활에서 여성이 자기의 아니무스를 만나는 과정도 마찬가지이다. 즉 실제로 여성이 자기의 아니무스에 의식적인 주의를 기울이는 과정 역시 이렇게 험난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니무스에 사로 잡히는 대신 일단 자기 아니무스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 아니무스가 자기에게 무슨 일을 하려고 하는지를 깨닫고, 그 현실을 직시할 수만 있다면 아니무스는 둘도 없는 내적 반려자로 작용하면서 당사자에게 능동성, 용기, 객관성, 영적 지혜 등의 남성적 자질을 부여하고는 한다.
아니무스 역시 4단계의 발전과정을 보인다. 첫 번째 단계에서 아니무스는 단순한 육체적 능력의 인격화로 나타난다. 가령 스포츠의 우승자나 <근육질> 남성이 그 좋은 예이다. 그러다가 두 번째 단계에 이르면 아니무스는 주도적으로 계획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드러내 보인다. 그러다가 세 번째 단계에서 아니무스는 <말씀>이 되어 교수나 목사 같은 사람으로 인격화 한다. 마지막 단계인 네 번째 단계에서아니무스는 <의미>의 화신이 된다. 바로 이 최종단계에서는 아니무스는 아니마가 그랬듯이 삶에 새로운 의미 부여를 가능하게 하는 종교적 체험의 중재자가 되는 것이다. 이단계에 이르렀을 경우 아니무스는 여성의 정신적 기반을 튼튼히 해주고, 외적인 부드러움을 보상할 수 있게 하는 보이지 않는 내적인 힘을 준다.
아니무스의 긍정적인 측면은 진취적인 정신, 용기, 진실, 그리고 지고한 차원의 영성으로 화신할 수 있다. 자신의 아니무스가 제시하는 의견은 비판 대상이 될 수 없다는 믿음을 버릴 때 만 가능하다. 여성은 자신의 믿음은 물론이고, 신성한 확신조차 의심할 수 있는 용기와 내적인 마음의 넓이를 찾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야만 자신의 무의식이 보내오는 여러 가지 제안(아니무스의 의견과 대립되기도 하는 제안까지)을 받을 수 있다. 이때가 되어야 비로소 <자기>의 표현을 받아들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의미까지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19] Ibid, 298
제3부 개성화과정 - 마리루이제 폰 프란츠-
6. 자기 : 마음의 정체성
개인이 아니마, 아니무스와 오랫동안 진지하게 맞서 온 결과 부당하게 아니마, 아니무스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는 폐해를 극복하면 무의식은 다시 그 지배적인 성격을 바꾸어 정신의 가장 심오한 내적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자기>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여성의 꿈에서 이 마음의 중심은 일반적으로 초인적인 여성상(가령 여성 사제나 마술사<어머니 대지>나 자연 혹은 사랑의 여신 같은)으로 인격화하고 남성의 경우에는 입문 의례의 스승이나 수호자(인도의 <구루 : 힌두교, 불교, 시크교 및 기타 종교에서 일컫는 스승으로 자아를 터득한 신성한 교육자를 지칭한다.>) 나이 든 현자, 혹은 자연의 영신 등으로 인격화한다.
<자기>의 화신인 인간의 모습이 젊거나 늙거나 하는 것은 <자기>가 꿈이나 환상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모습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그 연령이 많을 수도 있고 적을 수도 있는 것은 <자기>와 우리는 온 생애를 통해 늘 함께하고, <자기>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인지하고 있는 생명의 흐름을 초월하는 존재임을 보여준다.
<자기>는 전적으로 우리의 의식적인 시간의 경험(우리 시공의 차원)에 포함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존재한다. 심지어 이 <자기>는 시공간적으로 편재하는 존재인 것이다.
즉, 거대한 상징적 인간으로 전 우주를 껴안거나 감싸고 있는 존재로 나타나기도 한다. 만일 개인의 꿈에 이 이미지가 나타난다면 우리는 마음의 중핵이 활동을 개시한 것으로 보아 갈등에 대한 창조적인 해결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신화나 종교 교의(敎義)에 이 같은 우주적인 인간의 상이 자주 나타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이 우주적 인간은 유익하고 긍정적인 것을 표상한다. 신화에 따르면 이 <우주적 인간>은 모든 생명의 (모든 창조의)시작이며 최초의 목표이기도 하다. 개인의 내적 심리 현실은, 궁극적으로 <자기>를 나타내는 이 원형적 상징을 지향한다. 우리의 내적 심리 현실은 단순한 본능의 욕구를 초월해 살아 있는 신비를 드러내고자 하는데, 그 유일한 방법이 바로 상징을 통한 표현이다. 그리고 무의식은 이것을 표현하기 위해 종종 강력한 <우주적 인간>의 이미지를 선택한다. 종종 동물로 상징되는 <자기>는 이로써 우리의 본능적인 성질과 자기와 주변 환경과의 연관성을 보여준다(신화나 옛이야기에 인간을 돕는 동물이 자주 나타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자기>가 그 주변의 자연은 물론이고 우주 전체에 대해서까지 연관을 맺는 것은, 우리 마음의 중핵이 어떤 의미에서는 외적 내적으로 세계 전체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생명의 보다 높은 차원의 <드러남>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시간과 공간의 연속과 조화를 이루면서 살고 있다. 가령 동물에게는 나름의 특정 영역이 있고, 특유의 먹이와 집을 짓는 특정 재료가 있다. 이들은 본능으로써 여기에 적응하고 맞추어 살고 있다. 시간의 리듬 역시 여기에서 중요한 몫을 한다. 그것은 초식 동물의 대부분은 먹이인 풀이 가장 풍부할 때 새끼를 낳는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1] Ibid, 300. 카를 G. 융 외 지음,「인간과 상징」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무의식이 제공하는 특별한 도움은 미개인만 누리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우리의 꿈 가운데 많은 부분은 우리의 외적인 생활이나 환경에 관련되어 있다. 창 앞에 있는 나무, 자기가 타고 다니는 자전거나 자동차, 심지어는 산보하면서 주운 돌 같은 것도 우리 꿈 세계를 통해 상징체계의 수준까지 드높여지면 의미심장한 열쇠가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자신의 꿈에 주의를 기울이면, 은밀하고 질서 정연한 사건들로 가득 찬 우리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다. 이 세계는 냉담하고, 비개성적이고 무의미한 우연의 세계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 꿈의 기본적인 역할이 항상 외적 상황에 적응하는 일을 일차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문명 세계에서 대부분의 꿈은 <자기>를 향한 <올바른> 내적 태도의 발전과 관계가 있다. 그 까닭은 미개인들의 경우와는 달라서 문명인의 경우는 근대적인 사고방식이나 행동 때문에 자기와의 관계가 심하게 손상되어 있기 때문이다. 미개인들은 일반적으로 내적인 중심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은 상태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의 뿌리 뽑힌 의식은 전혀 낯선 외적 사물이며 상황과 뒤얽혀 있다. 그래서 <자기>로부터의 메시지를 감청하는 데 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우리의 의식은 간단없이 명확하게 구성된 <진정한> 외적 세계의 환상을 만들어 내고 바로 이 환상이 우리의 지각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설명은 불가능할지언정, 우리는 무의식적 성질을 통해 우리의 심리적 환경과 육체적 환경에 분명하게 연결되어 있다.
돌이라는 무기물이 자주 <자기>라는 존귀한 존재의 상징물이 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무의식적인 정신>이라고 부르는 것과 <물질>이라고 부르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아직은 알려지지 않은 관계를 말한다. 아직까지 정의도 해석도 된 바 없은 <정신>과 <물질>의 관계(정신과 물질은 하나는 (안)에서 관찰된 것 하나는 <밖>에서 관찰된 것일 뿐 실제로는 동일한 현상일지도 모른다)를 연구하면서 융 박사는 <동시성>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내놓았다. 이 개념은 인과적으로 무관한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의 <무의미 있는 우연의 일치>를 뜻한다. 개인의 삶에서 의미 있는 우연의 일치를 관찰할 때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면 그 개인의 무의식에 깃들어 있는 원형 또한 작용하게 되는 것(그 개인의 꿈이 그런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었듯이)을 확인할 수 있었다.
7. <자기>와의 관계
<자기>라고 하는 생생하게 살아 있는 현실에 날마다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동시에 두 차원에서 사는 것, 동시에 두 세계를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현실에 주의를 기울이는 사람은, 전과 다름없이 외부적인 임무를 다하면서 <자기>가 스스로를 나타내기 위해 꿈과 외부적인 사건에서 양면적으로 사용하는 암시나 신호에 주의를 기울인다.
자기의 내적인 중심에 이르기 위해서는 잡념이 끼어들지 못하게 해야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무 예리하게 신경을 곤두세워도 안 되고 너무 굼떠도 안 된다. 엄밀하게 말해서 정확하게 적절한 지각의 수준이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그 영혼의 통제 본부와의 접촉을 잃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어떤 단일한 본능적 동력이나 감정적 이미지가 당사자를 한 방향으로 고정시키고 그럼으로써 평형을 깨뜨려 버리는 경우이다. 내적 평형은 과도하게 공상에 의지할 때도 깨어진다.
이 경우 공상은 당사자의 특정 콤플렉스를 맴도는 것이 보통이다. 실제로 공상이라는 것은, 당사자를 그 콤플렉스와 잇는 데서 비롯된다. 하지만 그런 동시에 이러한 공상은 당사자의 정신 집중과 의식의 연속성을 위협한다.
두 번째 경우는, 자아의식이 과잉 강화될 때 생긴다. 문명화한 행위에 단련된 의식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우리는 건널목지기가 공상에 빠져 있을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알고 있다).
문명인들이 꾸는 꿈이, 무의식의 중심에 있는 <자기>에 대한 의식적 태도를 수정하려는 시도를 통해 그 수용성을 회복하고자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자기>에 대한 신화적인 표현에 세계의 네 귀퉁이가 강조된다거나 많은 시각 예술에서 <위대한 자>가 4로 분할된 원의 중심에 자주 나타난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융 박사는 이 질서의 구조를 설명하면서 힌두어인 <만다라>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이 구조는 사람의 마음에 있는 <핵 원자>의 상징적인 표현이다
동양에서도 내적 존재를 강화하는 데, 혹은 깊은 묵상에 잠기는 데 같은 종류의 그림이 사용된다. 만다라 명상은 내적 생명이 다시 그 의미와 질서를 되찾았다는 느낌, 이로써 내적 평화가 달성되었다는 느낌을 가져다준다. 만다라가 포함되어 있는 종교 전통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은 현대인의 꿈속에서도 만다라는 같은 느낌을 전달한다. 우발적으로 나타난다면 그만큼 긍정적일 수도 있다. 그 까닭은 전통에 대한 지식이 오히려 자발적인 체험을 약화시키거나 차단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둥근 원은 일반적으로 자연의 전체성을 상징한다. 여기에 반해 사각형은 전체성에 대한 의식의 자각을 나타낸다. 둥근 탁자는 대단히 광범위하게 알려진 전체성의 상징으로 신화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맡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령 아서 왕 신화의 원탁이 그러하다. 이 원탁의 이미지는 최후의 만찬에서 빌려온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사람이 순수하게 내적인 세계를 향하고, 자기 자신을 알려고 노력하면(주관적인 생각이나 느낌을 반추하는 대신 꿈이나 공상 같은 객관적 본성의 표현에 관심을 기울일 경우), <자기>는 언젠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면 자아는 새로운 재생을 가능케 하는 내적인 힘을 발견하게 된다.
<자기>는 마음속에서 가장 강력한 것이기 때문에 <자기>의 어두운 측면은 그만큼 위험하기도 하다.
<자기>의 어두운 측면 때문에 사람은 과대망상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이상하게 <신들린> 상태에서 환상에 사로잡히기도 하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 빠진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흥분한 나머지 우주의 위대한 수수께끼를 풀었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하는 순간부터 당사자는 모든 인간적인 현실과의 접촉을 잃어버린다. 이런 상태가 되면 당사자는 유머 감각이 없어진다든가 사람들과의 접촉을 기피하는 증세를 보인다.
무의식의 상징적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벗어나거나 <잃어버리지>않도록, 정동적으로 자기가 통제할 수 있는 범위 안에 머물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다시 말해, 자아가 정상적인 방법으로 기능을 계속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누구나 평범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불완전함을 의식하고 있어야만 무의식의 의미심장한 메시지의 내용이나 개성화 과정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한 인간이 전 우주와의 일체감을 느끼는 동시에 이 세상의 보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갖는다면 이 긴장감은 참으로 대단하지 않겠는가?
한편으로는, 자신을 비하하여 통계 자료에 불과하다고 할 경우 그 사람의 삶은 의미 있는 삶일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자신이 개인을 넘어서는 보다 거대한 진리의 일부라고 믿게 될 경우 그 사람은 땅에 발 딛고 살기가 어려울 것이다. 이 같은 내적 대극을 어느 한쪽에 극단에 치우치게 하지 않고 올곧게 세우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기는 하다.
8. <자기>의 사회적 측면
개인적으로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들의 부고를 읽을 때마다, 사는 것이 참 허무하다는 생각으로 기가 죽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때야말로 무의식에 주목해야 한다. 왜냐하면 무의식이 산출하는 꿈이야말로, 사람들 삶의 가닥가닥이 의미심장한 전체 삶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 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변적으로 모든 것이 결국 개인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꿈의 이미지에 주목하면 이러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뚜렷하게 체험하는 것도 가능하다. 때때로 <위대한 자>가 우리에게 무언가를 바란다는 느낌, 어떤 특별한 일을 맡기려는 느낌을 강하게 받곤 한다. 이런 경험에서 오는 반응은 엄청난 힘을 줄 수 있다. 이러한 힘은 영혼을 귀중하게 여길 수 있게 해주고, 집단의 편견이라는 흐름을 거슬러 갈 수 있게 해 준다.
물론 무의식에 귀를 기울이고 무의식의 묵시적인 명령을 따르는 일이 늘 유쾌한 일일 수만은 없다. 무의식의 계시를 받아들이고 이에 따르기로 한다면, 우리 의식이 입안한 계획이 방해를 받을 수도 있다는 점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로 이 때문에 개성화 과정에 부수되는 의무가 축복보다는 짐으로 느껴는 것이다.
무의식의 명령을 따르기로 작정한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일만 골라서 할 수 없게 되어 있다. 마찬가지로 타인이 좋아하는 일만 할 수도 없다. 사람은 자신을 발견하기 위해 자신이 속한 무리를 떠나야 할 때가 더러 있다. 항간에, 무의식에 주목하게 되면 사람이 반사회적으로 자기중심적으로 변한다는 말이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 까닭은, 어떤 사람이 이런 태도를 취하게 되는 데엔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어떤 요인, 즉 <자기>의 집단적인 측면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상당한 기간 자기의 꿈을 주목해 온 사람은 그 꿈이 타인과의 인간관계에 관심을 자주 표명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꿈이 지니는 집단적인 측면이다. 꿈이 다른 누군가의 이미지를 등장시키는 까닭에 대해서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 꿈의 이미지는 꿈꾸는 사람의 투사일 가능성이 있다. 즉, 꿈 이미지는 꿈꾼 사람의 내적인 측면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불성실한 이웃을 꿈속에서 만났다고 할 경우, 이 이웃의 이미지는 꿈꾼 사람 자신의 불성실성을 묘사한 것일 수도 있다. 꿈을 해석하는 사람의 임무는, 그 사람이 어떤 측면에서 불성실한가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러나 꿈이 순수하게 타인에 대한 정보를 전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식으로 무의식은 우리의 이해를 뛰어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모든 고등 동물과 마찬가지로 인간은 자기 주위의 생물과 놀라울 정도로 잘 조화되어 있다. 인간은 그래서 자기 주위 사람들의 고통이나 문제, 긍정적 부정적 속성이나 가치를 본능적으로(타인에 대한 의식적인 생각과는 별개로) 감지한다.
전적으로 외계만을 겨냥한 행위나 의무감은 무의식의 은밀한 작용에 장해를 준다. 무의식의 연결고리 혹은 연대감은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을 한데 모아 주는 기능을 한다. 그렇기에 동기가 아무리 이상적이라고 하더라도 광고나 정치적 선전을 통해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자 하는 시도는 파괴적인 결과를 낳기 쉽다.
여론을 움직이고자 하는 사람들이 그 목적을 위해 상징을 악용할 경우, 그것이 진정한 상징인 한 대중에 깊은 인상을 주는 일은 가능하다. 그러나 그들이 대중의 무의식까지 정동적으로 휘어잡을 수 있느냐 여부는 미리 계산할 수 없다. 그것은 결코 합리적으로 계산 가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령 음반을 내는 사람이 대중적인 이미지와 멜로디에 맞게 노래를 만들었다고 해서 그 음반이 인기를 미리 알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무의식에 의도적으로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는 지금껏 한 번도 이렇다 할 성과를 낳은 적이 없다. 집단의 무의식은 개인의 무의식과 마찬가지로 대단히 자율적이기 때문이다.
집단을 억압하면, 개인을 억압할 때와 마찬가지 결과가 생긴다. 즉 집단이 신경증적인 분열이나 심리적인 병을 일으키는 것이다. 무의식의 반응을 억압하려는 이 같은 시도는, 기본적으로는 우리 본능과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실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개성화 과정에 대해 이해한 바로는, <자기>는 특정한 개개인들 간에 첨예하게 드러나는 감정의 유대를 창조하는 동시에 모든 인간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느낌을 조성함으로써 이 같은 소규모 무리를 형성하는 경향을 보이는 듯하다.
이러한 유대가 <자기>를 통해 창조될 때만 시기, 질투, 싸움 그리고 부정적인 <자기> 투사가 그 무리를 파괴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자기 자신의 개성화 과정에 대한 헌신이 최적의 사회적 적응 또한 가능케 하는 셈이다.
신문, 라디오, 텔레비전, 선전 광고 등을 통해 여론에 영향을 미치려는 시도는 두 가지 요소에 기초를 두고 있다.
첫째로 <의견>이나 <욕망>같은 집단적 태도를 나타내는 표본 조사법에 의존한다.
두 번째로 여론을 조종하려는 사람들의 편견, 투사, 무의식 콤플렉스(주로 권력 콤플렉스)가 나타난다.
그러나 통계는 개인을 정당하게 다루어 내지 못한다. 여론을 조종하려는 사람들의 부정적인 무의식이 투영된 시도가 바람직한 것을 산출할 수 없다는 것은 처음부터 명백하다. 그러나 개성화 과정이라는 것은, 한 개인이 여기에 전념할 때 주위 사람들에게 바람직한 전염적 효과를 파급시킨다. 그것은 마치 불꽃이 이리저리 튀면서 벌판으로 번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러한 일은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가 전혀 없을 때, 그리고 종종 아무 말도 하지 않을 때에 일어난다.
우리의 무의식에서 익히 알고 있는 것과 거리가 먼 종교적 상징이 등장할 때마다 이것이 공개적으로 인정되고 있는 종교적 상징을 부당하게 변화시켜 버리거나 지워 버리지 않을까 두려워할 때가 종종 있다.
이러한 두려움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분석 심리학과 무의식 전체를 거부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저항감이나 거부감을 심리학적 관점에서 보아 종교에 관한 인간을 세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자기가 몸담은 종교의 교의가 어떤 것이든 그것을 아직까지 순수하게 믿고 있는 인간형이다. 이러한 상태는 의식적인 생각과는 무의식적인 배경이 비교적 조화되어 있을 때 생겨난다.
두 번째는 신앙을 완전히 잃은 대신에 의식적이고 합리적인 견해를 발전시킨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에게 심층 심리학은 새로 발견된 영역으로 인도하는 안내인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심층 심리학이라고 하는 이 새로운 모험에 뛰어들어 그 진실성을 검증하기 위해서 꿈을 연구할 때도 별로 장애를 느끼지 않는다.
세 번째는, 어떤 부분으로는 종교 전통을 믿지 않지만 다른 부분으로는 여전히 믿고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무의식을 지향할 때마다 장애를 느끼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 까닭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바라는지 자기 자신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의식과 진지하게 만난다고 하는 것은 결국 그 개인의 용기와 통합 능력의 문제인 것이다.
종교적인 관습이 어느 개인이 체험하는 무의식적 계시를 통해 직접적으로 생겨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이렇게 시작된 종교 제의는 여러 문화 집단에 소속된 사람들이 종교 행위를 발전시키고 그 사회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오랜 기간의 발전을 통해 최초의 소재는 언어나 행위를 통한 구성과 재구성을 반복하고 미화되면서 점차 어떤 구체적 형태를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몇 차례고 되풀이된, 그래서 낡을 대로 낡은 종교 전통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무의식에 의한 창조적 변화를 거부하기 마련이다. 때때로 신학자들은 무의식을 통해 종교적 기능을 찾아낼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항함으로써 이들 진정한 종교 상징적 교의를 옹호하려고 들기까지 한다.
새로운 분야에서의 경험을 현실 그대로 샅샅이 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람의 마음과 관련된 사상은 독자성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말로는 일부분밖에 전달할 수가 없다. 말하자면 우리가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고, 그에게 무엇이 올바른 것인가를 말할 수 있다는 환상의 문이 닫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한 보상은 새로 발견된 무의식의 세계에서 찾을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자기>의 사회적 기능인데, 바로 이 기능을 통해 서로 분리된 개개인은 자신의 동류와 연결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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