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심리학

인간과 상징 : 제2부 고대신화와 현대인 . 칼 구스타브 융

rainbow3 2020. 3. 6. 00:36


인간과 상징

 

 

제2부 고대신화와 현대인 - 조지프 헨더슨-

 

영원한 상징

 

융 박사가 이 책의 제1부에서 지적했지만, 인간의 마음은 자기의 역사와 전 단계에 이르는 진화의 흔적을 내부에 지니고 있다. 더욱이 무의식의 내용물은 마음의 모습을 빚어내는 작업에도 기여해 왔다. 물론 우리는 의식적으로 무의식의 그러한 영향력을 무시할 수 있다. 그러나 무의식적으로는 그 영향력과, 그 영향력이 표출되는 방식인 무의식의 상징적 양식-꿈을 포함한-에 언제나 반응한다.

 

분석가는 상징의 의미를 알아내어 환자를 도와주기 전에 먼저 상징의 기원이나 의미에 대해 폭넓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까닭은 이렇다. 오늘날의 정신질환자의 꿈속에 나타나는 내용과 고대 신화는 대단히 유사한 측면이 있는데, 이 측면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것이 우연의 일치가 아닌 까닭은, 현대인의 무의식은 아직도 원시인들의 신앙이나 제의에 나타나는 상징 형성 능력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능력이 그들의 정신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우리가 인식하는 것 이상으로 상징이 전달하는 메시지에 의존하고 있고, 우리의 태도나 행동 또한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지 않다.

 

상징 중에는 유아기와 관련된 것도 있고, 청년기 직전의 과도기와 관련된 것도 있는가 하면, 성숙기와 관련된 것도 있고, 죽음을 준비해야 하는 노년기의 체험과 관련된 것도 있다.

제1부에서 융 박사는 여덟 살배기 소녀의 꿈이 어떻게 해서 노년기를 연상시키는 상징으로 가득 차 있었는지 그 까닭을 설명한 바 있다. 말하자면 이 소녀의 꿈은 삶으로부터의 입문의례가 죽음으로의 입문의례와 똑같이 원형적인 것임을 드러내고 있다. 이런 예만 보아도, 상징 개념의 발달이 고대 사회의 의례에서 그랬던 것처럼 현대인의 무의식 속에서도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웅과 영웅의 창조자

 

영웅 신화는 세계 도처에서 가장 널리 알려져 있고, 그래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신화 체계이다. 영웅 신화는 그리스나 로마의 고전적인 신화에서는 물론이고 중세 신화, 극동의 신화, 심지어는 현대의 미개 사회 부족의 신화에서도 볼 수 있다. 이 영웅 신화는 우리의 꿈속에서도 그 모습을 나타낸다. 명료하고, 극적이고, 매력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 경우도 있고, 다소 명료하지 못하게 나타나는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든 대단히 중요한 심리학적 의미를 지니는 것은 분명하다.

 

영웅 신화는 모두 대체로 다음과 같은 일들을 되풀이해서 이야기한다.

즉 영웅은 언제나 기적적으로, 그러나 비천하게 태어나 생애의 초기에 초인적인 힘이 있음을 증명하는데, 그로 인해 영웅은 아주 짧은 기간에 두각을 나타내거나 권력을 쥐게 되고, 악한 무리와의 싸움에서 이들을 무찌르고, 그러다가 오만의 씨앗을 마음속에 키우고, 이윽고 배신행위 혹은 <영웅적>인 희생으로 몰락의 내리막길을 걷고, 결국 이로써 죽음을 맞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사신적(疑似神的)인 보호령은 사실상 그 영웅의 마음 전체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이 상징적인 존재는 영웅의 자아에 결여되어 있는 것을 보충하는 존재이지만 궁극적으론 영웅 자신과 동일한 존재이기도 하다. 이 보호령들의 역할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영웅 신화의 보편적 기능이 영웅 개인의 자아의식, 즉 자신의 장단점에 대한 인식의 계발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영웅은 이런 보호령의 도움으로 자기 자신을 인식해 가면서 세상이 마련하고 있는 문제와 부딪쳐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개인이 이런 입문 의례를 치러내고 인생이 성숙기에 접어들면 영웅 신화는 그에게 더 이상 의미를 지니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영웅의 상징적 죽음이 개인에게는 성숙의 성취인 것이다.

 

그러나 영웅 신화는 전 생애를 아우르는 동시에, 성숙과정의 각 단계에서도 특정한 형태를 띠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러한 단계별 특징은 한 개인이 자아의식의 발달과정 중 어느 단계에 도달해 있느냐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모습을 갖는다. 따라서 영웅상이 발달해 가는 과정은 인간의 인격 발달 단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라딘 박사는 영웅담 전개를 특징에 따라 네 주기로 분류하고 이것을 각각, <장난꾸러기 주기>, <산토기 주기>, <붉은 뿔 주기>, <쌍둥이 주기>라고 이름 붙였다. 라딘 박사가 이 대목에서 쓴, <이 영웅담 군은 바로 영웅담이라는 환상의 도움을 빌려 성장에 대처하는 우리의 노력을 표현하고 있다>는 구절은, 그가 영웅 신화의 발전에 숨어있는 심리를 얼마나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붉은 뿔>주기나 <쌍둥이>주기에서 주로 볼 수 있듯이 여기에 등장하는 영웅은 하나같이 도에 넘치는 자부심을 느낀다. 즉 <오만>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영웅은 바로 이 <오만>의 허물을 희생, 혹은 죽음으로써 지른다. <붉은 뿔>주기에 대응하는 문화 수준을 가진 다른 원시 사회는 인신을 희생시킴으로써, 말하자면 인신 공희제로써 이 잔혹한 운명과의 화해를 시도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주제는 매우 중요한 것으로 인류의 역사 속에서는 계속해서 되풀이된다. 위네바고족도, 이로쿼이 족이나 몇몇 알곤킨족처럼, 바로 이 개인주의적이고 파괴적인 충동을 완화시키는 토템 숭배 의식으로 인간의 고기를 먹었을 것으로 보인다.

 

영웅과 용의 싸움은 보다 의욕적인 형태의 영웅 신화라 할 수 있다. 영웅 신화의 이러한 형태는, 퇴행 현상에 대한 자아의 승리라는 원형적인 주제를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인격이 어둡고 부정적인 면은 의식되지 않은 채로 남는다. 그러나 영웅은 반대로 그림자의 존재를 인정하고 거기에서 어떤 힘을 끌어낼 수 있음을 자각해야 한다.

영웅은 용을 때려눕힐 정도로 강자가 되려면, 그 파괴적인 힘과 새로운 관계를 맺어야 한다. 즉 먼저 그림자를 극복하고 동화시킬 수 있어야 자아에게 승리를 안길 수 있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환자가 <검은 옷을 입은 젊은이>라고 했던 것이 바로 이런 무의식적인 측면이다.

인격의 그림자 부분과 그 그림자의 강력한 잠재력, 그리고 괴물과의 건곤일척의 싸움을 벌일 수 있도록 영웅을 준비 시키는 그림자의 기능을 환기시키는 것은 이 꿈의 첫 부분에 등장한 모티브가 이후에 등장하는 희생적인 영웅이라는 테마로 전환하기 위한 필수 과정이다.

이 <잘생긴 젊은이>는 청년기 후기의 <자아 형성 과정>과 관련된 일종의 영웅주의를 나타낸다. 인간은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자신을 변화시키는 동시에 타인과의 관계를 변화시키는 데 필요한 자기 내면의 힘을 자각하면서 자기 삶의 이상적인 원칙을 표명하기에 이른다. 이때 그는 생의 절정에 있고, 매력적이며 에너지도 충만하고 이상주의에 젖어 있다. 그런데 왜 자신을 인신공희의 제물로 바치고 있는 걸까?

 

일반적으로 영웅 상징에 대한 요구는 자아의 강화를 필요로 할 때 생겨난다고 할 수 있다. 즉 무의식의 도움 없이 의식의 힘만으로는 어떤 과제를 해결할 수 없을 때 생겨난다는 것이다. 내가 논의해 온 꿈속에는 전형적인 영웅 신화의 중요한 측면-위험에서 아름다운 여자를 구하거나 여자를 보호하는 영웅 모티프-에 대응하는 모티프는 보이지 않는다. 이런 모티프는 신화나 꿈에서 <아니마>가 인격화하는 방식 중 하나이다.

 

이렇듯이 여성을 구출하는 모티프는, 탐욕스러운 어머니의 이미지로부터 자기 아니마상을 해방시키는 것을 상징한다. 이러한 해방이 달성되지 않는 한, 남성은 여성과의 관계에서 진정한 남성적 능력을 발휘할 수 없다.

꿈꾼 사람이 어머니로부터 자기 아니마를 충분히 해방시킬 수 없었다는 사실은 그의 다른 꿈에서 강조되고 있다. 그 꿈에서 그는 용을 만난다. 이 용은 그를 쫓아온다. 그러나 무기가 없기 때문에 그는 몹시 불리한 입장에 몰린다.

 

그런데 의미심장하게도 이 꿈속에는 그의 아내가 나타난다. 그리고 아내가 나타나는 것과 때를 같이해서 그 용은 아주 작고 초라한 존재로 변해 버린다. 꿈속의 이런 변화는 꿈을 꾼 사람이 늦게나마 자기 결혼 생활을 통해 어머니에 대한 애착을 극복하고 있음은 암시한다. 바꿔 말하면 여성과의 성숙한 관계를 이루기 위해서는 모자관계에 묶여 있는 심적 에너지를 해방시킬 수단을 찾아야 했던 것이다. 영웅과 용의 싸움은 이 <성장>과정의 상징적 표현이다.

 

이 꿈이나 많은 현대인의 꿈에 나타나는 영웅 신화 모티프는, 영웅으로서의 자아가 자기중심적인 인물이라기보다는 본질적으로 문화의 운반인임을 보여 준다. 상당히 왜곡되어 있고, 또 맹목적이라는 점도 없지 않지만, <장난꾸러기>조차 원시인들이 이해하기로는 우주에 대한 나름의 공로자인 것이다.

나바호족의 신화에서는 코요테로 등장하는 <장난꾸러기>는 창조 행위의 하나로 하늘에 별을 던져 올림으로써 죽음이라는 필연적인 우연성을 강조한다. 그리고 탈출의 신화에서는, 홍수의 위험에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갈대숲 속으로 인도한다. 이로써 사람들은 이 갈대숲을 통해 한 세계에서 그 위에 있는 다른 세계로 도망칠 수 있고, 바로 여기에서 홍수의 위협에서 벗어나 평화를 누릴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여기에서, 창조적인 진화 형태가 처음에는 유치하고 전前의식적이며 동물적인 수준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진정한 문화 영웅은 자아를 효과적인 의식수준으로 상승시키게 되는데,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진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소년기나 사춘기의 자아는, 부모의 기대라고 하는 압박에서 자신을 자유롭게 함으로써 개성을 획득한다.

이러한 의식 향상 과정의 일부로 영웅과 용의 싸움이 되풀이해서 벌어지는 것인데, 바로 이런 싸움을 통해 에너지가 해방되고, 그 에너지를 통해 인간은 혼돈상태로부터 문화의 패턴을 형성해 나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한 개인 안에서 완전하게 이루어질 경우, 완성된 영웅상은 일종의 자아의 힘으로 나타난다. 이렇게 되면 이 자아는 더 이상 괴물이나 거인들을 퇴치할 필요가 없다. 그 까닭은 이때에 이르면 마음속 깊은 곳에 잠재되어 있던 힘이 인격화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에 이르면, 개인의 마음속에 잠재해 있는 여성적인 요소는 용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여인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때가 되면 개인의 성격이 지닌 부정적인 측면, 즉<그림자>는 더 이상 무시무시한 괴물의 형태를 띠지 않게 된다.

 

 

입문 의례의 원형

 

심리학적인 입장에서 영웅상을 자아 그 자체와 동일시할 수는 없다. 영웅상은 자아가 유아기 초에 부모의 이미지로 환기된 원형에서 자신을 분리시키기 위한 정상적인 방편이라고 설명하는 편이 나을 것으로 보인다. 융 박사는, 원래 인간에게는 전체성에 대한 감각, 다시 말해 완전한 자기 지각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개인이 성장함에 따라 이 자기-마음 전체-로부터 개인화한 자아의식이 출현한다는 것이다.

 

고대의 역사나 현대의 미개 사회 의식에는 입문 의례의 신화나 의식에 관한 자료가 풍부하게 남아 있다. 바로 이런 의식을 통해 젊은 남녀가 부모로부터 유리되고 강제적으로 그 씨족이나 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어린아이의 세계와 결별함으로써 젊은이들이 갖고 있던 원초적인 부모 원형은 상처를 받게 되는데, 이 상처는 집단생활에의 동화라는 과정을 통해 치료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집단은 상처받은 원형의 노릇을 대신하게 되는 동시에 제2의 부모가 된다. 바로 이 새 부모를 위해 이 젊은이들은 상징적인 희생제의를 치른 바에 다름 아니지만, 그 결과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

 

물론 이러한 입문 의례가 청년의 심리학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개인이 삶의 새로운 단계를 맞을 때마다 개인 내부에서는 자기의 요청과 자아의 요청간의 이러한 원초적 갈등이 반복되기 마련이다. 특히 이 갈등은 성인기 초기에서 중년에 이르는 과도기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리고 중년기에서 노년기로 이행할 때도 개인은 다시 한 번 자아와 마음 전체 사이에 차이가 있음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자기의 삶이 죽음 앞에서 무너져 가는 것에 대항하여 영웅은 자아의식을 방어할 최후의 소명을 받는 것이다.

 

이런 결정적인 시기에 입문 의례의 원형은, 세속적 성격이 강한 청춘기의 의식보다 정신적으로 훨씬 만족스럽고 의미심장한 전환을 가능케 한다. 이러한 종교적 의미에서의 입문 의례의 원형적인 형태는 태어날 때, 결혼할 때, 혹은 죽을 때 특별한 예배의 형식을 요구하는 모든 교회 의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영웅 신화와 입문 의례 사이에는 한 가지 놀라운 차이가 있다. 전형적인 영웅의 상은, 그 야망을 달성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끝에 모든 에너지를 고갈해 버린다. 결국 오만 때문에 벌을 받거나 죽음을 당하기는 하지만 일단 최초의 목적을 이루는 데 성공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와는 반대로 입문 의례의 신래자는, 고집스러운 야심이나 욕망은 포기하고 집단이 부여하는 고통의 길을 따를 것을 강요당한다.

다시 말해 신래자는 성공할 것이라는 희망 없이 이 시련을 받아들일 각오를 해야 한다. 이 시련이 가벼운 것이든 고통스러운 것이든 그 목적은 언제나 동일하다. 말하자면 죽음의 상징적인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재생의 상징적인 느낌을 경험하게 하자는 것이다.

 

물론 나이로 보자면 그는 이러한 이행의 단계가 끝나 있을 나이이다. 그러나 그의 경우는, 자아의 발달이 저지되면서 시간이 지나다 보니 이행이 정지되어 버린 것이고 이것 때문에 신경증으로 고통을 받다가 치료를 받으러 왔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꿈은 그에게 미개인 부족의 주술사라도 해줄 수 있는 훌륭한 충고를 해준다.

즉, 산을 오름으로써 자기 힘을 증명할 것이 아니라, 성인의 새로운 도덕적 책임을 준비시키는 의례에 동참하여 입문 의례적 변신을 할 때가 되었음을 일러 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남성은 여성의 존재를, 여성은 남성의 존재를 제대로 인식하게 되는 입문 의례의 한 측면에 이르게 된다. 남성 대 여성의 원초적인 대립은 이러한 종류의 입문 의례를 통해서만 해소가 가능하다. 남성과 여성의 원초적인 대립은 남성의 이성과 여성의 관계성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이 양자의 결합은 고대의 밀교에서 발생한 이래 입문 의례의 핵심을 이루어온 결혼이라고 하는 상징적 의식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인이 이 유구한 원형적 상징의 의미를 파악하기는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많은 현대인들은 우여곡절을 겪은 뒤에야 그 의미를 이해한다.

 

결혼의 면사포 뒤에 아버지나 어머니의 존재가 반드시 어른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신경증적 두려움의 경우만 예로 들 필요는 없다. 정상적인 젊은이들에게도 결혼이라는 것은 얼마든지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여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본질적으로 결혼은 여성을 위한 입문 의례이므로, 남성에게 무엇인가를 정복한 영웅이 된 느낌을 줄 리가 만무하다. 그렇기에 부족사회에서 신부의 유괴나 겁탈이라는 이른바 공포에 대항하는 의례를 보게 되는 것도 그리 놀라운 일은 아니다. 남성은 결혼과 함께 결혼의 책임을 떠맡는 동시에 그 순간부터 배우자에게 순종해야 한다. 그래서 남성은 이러한 유괴하거나 겁탈하는 행위를 통해 바야흐로 결혼과 함께 황혼을 맞게 되는 영웅적인 행위의 불씨를 한번 지펴 보는 것이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주제는 그 자체가 대단히 의미 깊은 보편적인 이미지를 지니고 있다. 결혼은 남성이 아내를 얻는 동시에 자신이 마음속에 있던 여성적 요소를 구체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상징적인 장치이다. 그래서 남성들은 적절한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나이를 불문하고 이 원형과 만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형적인 형식으로서의 결혼은 여성의 심리학에서 지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실제로도 여성들은 청춘기에, 통과 제의적 성격을 지닌 예비적인 일련의 사건을 통해 결혼을 준비하게 된다.

  

2] Ibid, 149.   29] Ibid, 204.

 

 

4. 미녀와 야수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서는 소녀도 남성의 영웅 신화에 참가하고 있다. 그 까닭은 소년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는 소녀도 교육을 받고 자아 정체성을 확립해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아주 오래된 층이 있는데, 바로 이 층이 의식의 표면으로 올라가서 소녀들을 유사남성이 아닌, 진정한 여성으로 만드는 듯하다. 그런데 이 오래된 마음의 내용물이 의식의 표층으로 떠오르면 오늘날의 여성은 이것을 억압해 버린다.

바로 이 내용물이 남성과의 대등한 친분 관계, 현대 여성의 특권이라고 할 수 있는 남성과의 경쟁 기회를 빼앗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 억압한 상담한 효과를 거두어 여성으로 하여금 학교나 대학에서 배운 남성적인 지적 목표에 동화되게 하는 등 일시적인 성공을 거두게 하기도 한다. 대부분의 여성은 결혼하고 어머니가 되어야 한다는 결혼의 원형 심사에서 암암리에 속박을 받는다. 그러나 자유라고 하는 일종의 환상을 버리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상당수의 여성이 자기의 내부에 묻혀 있는 여성상을 재발견해야하느냐, 그대로 주저앉느냐 하는 갈등을 겪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 갈등은 대단히 고통스러운 것이기는 하나 많은 여성들이 갈등의 궁극적인 보상을 받는 듯하다.

 

<젊은 부인의 사례>

-아이가 없으나 하나둘쯤 낳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으나 성적 반응은 안 좋음

-명문여자 대학 우수 졸업한 재원이며, 남편이나 남자 친구들과의 지적 교류 무난

-이따금씩 감정을 폭발시키기도 하고 공격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함.

꿈의 내용-자기 또래의 젊은 여성들과 줄을 서있고 줄 한가운데서 앞쪽을 바라보고 있으며 앞에서부터 단두대에서 목이 잘리고 있으나 아무 공포도 느끼지 않고 태연하게 자기 차례를 기다리고 있음.

융의 해석- 남성적인 영웅의 역할을 희생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남성(또는 남성적으로 훈련된 여성)의 인생이란 영웅적인 의지로 돌격하고 돌파해서 쟁취해야 하는 것이지만 여성의 인생은 자각의 과정을 통해 실현될 때가 가장 좋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러한 자각을 표현한 세계 공통의 신화가 바로 미녀와 야수라고 할 수 있다.

 

상징적 의미를 해석해 보면 미녀(소녀가 되었든 부인이 되었든 마찬가지이다)는 아버지와 감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이 연결은 정신적인 연결이기는 해도 매우 강력하다. 미녀는 착해서 아버지에게 흰 장미 한 송이만을 소원한다. 그러나 여기서 반전이 발생한다. 미녀의 무의식적 의도가 친절함만을 지닌 것이 아니라 잔혹함과 친절함이 뒤섞여 있는 어떤 원리에 처음에는 아버지를 그 다음에는 자기 자신을 바치고 있다. 미녀는 마치, 배타적일 만큼 성숙하고 비현실적인 태도를 요하는 사랑에서 구조되기를 바라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야수를 사랑하게 되면서 미녀는 동물적인(그래서 불완전한), 그러나 순수하게 에로스적인 모습 속에 은폐되어 있는 인간적인 사랑에 눈뜬다. 이것이 바로 관계성의 기능에 대한 자각을 나타낸다.

이 자각을 통해 미녀는 그때까지 근친상간적 공포 때문에 억압되어 있던 근원적인 성적 욕망의 에로스적 요소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미녀는 아버지에게서 떨어지기 위해 근친상간의 공포를 받아들이고, 환상 속에서 그 공포와 공생하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 그리하여 동물적인 인간을 알아가게 되고, 한 여성으로서 그러한 인간의 동물성에 대한 자신의 진실한 반응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미녀는 억압의 권능에서 미녀 자신과, 미녀의 내부에 존재하는 남성상을 해방시키게 되고, 사랑이라는 것은 영혼과 본성을 결합시키는 어떤 관계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미녀의 아버지는 자신의 감정을 담은 순수한 흰 장미를 미녀에게 주려했지만, 야수의 관대한 분노를 일깨우지 않고는 그 장미를 딸에게 줄 수 없었고, 그렇기에 미녀는 아버지에 대한 무조건적 신뢰라는 순진함을 포기하게 된 것이다.

 

1]카를 G. 융 외 지음,「인간과 상징」이윤기 옮김, 경기: 열린책들, 2011. 205

2] Ibid, 205.

 

 

5. 오르페우스와 사람의 아들

 

심리적 경험, 즉 보편적 신비스러움을 제공하는 의례 또는 신화의 대표적인 예로 그리스 로마의 디오니소스교와 이를 계승한 오르페우스교를 들 수 있다. 이 두 종교는 <비의>라는 이름의 의미심장한 입문 의례를 만들었고, 양성적인 성격을 지닌 신인과 관련된 상징체계도 만들었다. 이 신인은 동물과 식물의 세계에 두루 통달하고 있는 인물로 사람들을 그 세계의 비밀로 끌어들이기도 한다.

 

디오니소스교는 소란스러운 제의를 앞세운다. 이 소란에 대해서는 자기의 수성에 몸을 맡겨 <어머니 대지>의 풍요한 생식력을 경험하고자 하는 욕구라는 설명이 가능하다. 디오니소스제의에 포함되어 있는 통과제의의 제 1동인은 술이다. 이는 의식의 레벨을 상징적으로 저하시켜 입문자로 하여금 엄격하게 폐쇄되어 있는 자연의 비밀로 끌어들이는데 술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신비의 본질이 에로스적 충족의 상징으로 표현된 것만 봐도 그렇다. 이 의례에서 디오니소스와 배우자 아리아드네는 성스러운 결혼 의례를 통해 하나가 된다.

 

디오소스교는 정신에서 육체로, 육체에서 정신으로 끊임없이 변전하기 때문에 금욕적이 사람에게 이런 의례는 너무 야만적이고 너무 광폭한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이 같은 사람들은 오르페우스 신앙을 통해 내적으로만 종교적 무아경을 체험하게 된다.

 

초대 기독교 교회가 오르페우스에게서 그리스도의 원형을 봤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못 된다. 이 두 종교는 후기 헬레니즘 세계에 내세의 신성한 삶을 약속한다. 로마 제국의 치하에서 사라져 가는 그리스 문화를 지키려던 대중에게, 신의 중자이자 인간이었던 오르페우스와 그리스도는 미래의 삶에 대한 간절한 소망의 상징이었다.

 

오르페우스교와 기독교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비록 신비스러운 형식으로 승화되어 있기는 해도 오르페우스교의 밀의는 디오니소스교의 전통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오르페우스교의 정신적 기동력은 반신에게서 비롯되는데 여기에는 농업에 그 뿌리를 둔 종교의 중요한 특징이 보존되어 있다. 그 특징은 바로, 계절 주기마다 등장하던 풍요의 신들이 상징하는 오래된 패턴, 다시 말해 영원히 되풀이되는 탄생과 성장과 성숙과 소멸의 순환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가부장적인 유목민족의 목가적 산물이자, 목가적 종교의 개혁자이기도 한다.

 

이 종교의 예언자들은 메시아가 신적 절대적 존재라고 주장한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사람의 아들>은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지만 그 기원은 어디까지나 하늘에 있고, 인간의 몸으로 현현(顯現)하지만 어디까지나 신의 화신이다. 그는 사후에는 하늘나라로 돌아간다. 그러나 그의 돌아감은 일회적이다. 그렇게 돌아간 다음에는 죽은 자들이 소생하는 날, 말하자면 재림의 날 까지 하느님의 오른쪽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다.

 

오르페우스교는 탄생과 죽음이라는 자연의 영원한 순환에 초점을 맞춘 과거 지향적인 종교인 데 반해, 기독교는 입문자에게 전지전능한 하느님과의 궁극적인 결합의 약속을 강조하는 미래 지향적인 종교이다. 그래서 기독교의 핵심적인 교리에서는, <어머니 자연>은 그 아름다운 네 계절을 거느리고 뒷전으로 물러난다.

기독교의 교리가 제공하는 것은 영적인 확신이다. 그 까닭은 <사람의 아들>인 그리스도는 곧 하느님의 아들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디오니소스와 그리스도의 상은 오르페우스 상 안에 융합되어 있다. 그러므로 오르페우스는 디오니소스를 기억하면서도 그리스도를 지향하는 것이다.

 

선한 목자와 중재자를 겸함으로써 오르페우스는 이오니소스 신앙과 기독교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한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디오니소스와 그리스도는 시간적 측면과 공간적 측면에서 보면 각기 다른 방향을 지향하고 있지만(디오소스교는 지하 세계적인 순환 종교이고, 기독교는 청상적인 종말론이나 목적론을 지향하는 종교이지만) 이 양자의 역할은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남성이건 여성이건-특히 서구의 현대 기독교 사회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종교적인 모색에 열중할 때면 여전히 그들 내면에서 서로 우위를 차지하려고 겨루는 중인 기독교 이전의 초기 전통들의 영향을 받기 마련이다. 이것은 곧 이교와 기독교의 갈등이며, 재생과 부활의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의 입문 의례와 기독교 의식과의 관계를 고찰하는 고대 엘레우시스 비의, 즉 풍요의 여신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 모녀를 섬기는 비의는 인생을 풍요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종의 입문 의례를 통해 죽음을 준비하는 과정으로도 이용되었다고 하는 점이다.

 

에스퀄리네 언덕의 콜롬바리움(마타콤 내의 지하 유골 안치소-옮긴이) 근처에 있는 고대 로마 시대의 묘지에서는 입문, 의례의 마지막 단계가 부조된 납골단지가 출토된바 있다. 이 부조에는 입문 의례자가 여신과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나머지 부문은 <자기 정화>를 위한 두 가지 기본적인 의식의 표현에 할애되어 있는데 그중 하나는 <신성한 돼지>를 제물로 바치는 행위와 <성혼례>이다. 이러한 장면들은 죽음에 이르는 입문 의례를 암시하는데, 어디에서도 죽음에 종지부를 찍는 최종적 단계인 애도의 장면은 찾아 볼 수 없다. 이 장면들은 죽음을 통해 영생 불사의 약속에 이르는(대단히 오르페우스적인)후기 밀교적 요소를 강하게 암시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순환적 밀교에서 영생불사는 단순히 재생을 의미하지만 기독교 신자는 천국에서의 영생을 약속하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현대 생활에서도 이 낡은 유형의 상징이 되풀이해서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낡은 상징은 죽음을 맞게 될 사람들에게, 삶을 준비하는 방법을 배웠던 것처럼 순종과 겸손을 통해 죽음을 준비하는 방법도 배워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다.

 

 

6. 초월의 상징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상징은 경우에 따라 다양한 목적성을 띠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자극이 필요한 사람의 경우에는 디오니소스적인 <우레 의식> 같은 격렬한 입문 의례를 경험하는 수도 있고 억제가 필요한 사람은 후기 그리스의 아폴론 신앙을 암시하는 신전이나 신성한 동굴 같은 데 몸을 맡기는 수도 있다.

 

완전한 입문 의례는 앞에서 말한 두 주제를 모두 포괄하고 있다. 그러나 입문 의례의 궁극적인 목적이 젊은이의 성격에 내재해 있는 <장난꾸러기> 같은 거친 측면을 길들이는 데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이 과정에 필요한 의식이 과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과격함의 목적은 과격함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입문자를 문명화하고 탈속 시키는 데 있다.

 

그러나 상징체계 중에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전해 오는 상징체계도 있다. 인생의 과도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해서 이러한 상징체계가 반드시 입문자를 어떤 종교 교리로 끌어들이거나, 세속적인 집단의식에 동화시키는 목적에 봉사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이러한 상징체계는 미숙하고 근시적인, 혹은 지나치게 경직된 상태에서 해방되려는 인간의 욕구를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상징은, 어떠한 형식으로든 인간을 제한하는 존재 양식에서 해방되거나 그 경직성을 초월하여, 보다 초연하거나 성숙한 성장 단계에 이를 수 있게끔 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어린아이는 완전성에 대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자아의식이 출현하면 이 완전함의 감각은 어린아이를 떠난다. 성인이 되어 이 감각을 되찾으려면 마음속 무의식의 내용과 의식을 통합시켜야 한다.

이 통합이 이루어 져야 융 박사가 말한 <정신의 초월기능>이 생긴다. 이 경지에 이르러야 개성적인 자기>가 지닌 가능성을 완정하게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초월의 상징은 그 목표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노력을 나타낸다. 이러한 상징은 무의식의 내용이 의식 속으로 통합되는 수단인 동시에, 그 무의식의 내용의 생생한 표현인 셈이다. 이들 상징의 모습은 다양하다. 이러한 상징은 역사 속에 나타나든, 인생의 결정적인 시기를 앞두고 있는 현대의 남성이나 여성의 꿈속에서 나타나든 지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 상징체계의 가장 오래된 단계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것이 바로 장난꾸러기 주제이다. 그러나 이 단계의 장난꾸러기는 영웅을 자칭하는 무법자가 아니라 어엿한 샤먼이다.

마력과 직관을 두루 갖춘 이 샤먼은 원초적인 입문 의례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그의 힘은 육체를 떠나 새처럼 우주를 날 수 있는 가상의 능력에서 나온다.

 

가장 알맞은 초월의 상징이 바로 새이다. 새는 <영매>를 통해 작용하는 직관의 특이한 성질을 표현한다.

여기에서 영매라고 하는 것은, 접신을 통해 먼 곳에서 일어난 일의 진상을 알아내거나, 의식적으로는 알고 있지 못하던 사실들을 알아내는 사람을 말한다.

 

순례의 길을 주재하는 것은 바로 연민의 정신으로 입문 의례의 <도사>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보다는 <연인>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예가 더 많다. 이 모습이 바로 중국 불교의 <관음보살>, 기독교 그노시스 교리의 소피아. 신화에 나오는 지혜의 여신 팔라스 아테나 같은 최고의 여신상 (즉 아니마)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새의 비상이나 황야로의 순례만이 이 상징성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고, 해방을 예시하는 격렬한 움직임도 이 상징성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인생의 걸음마 단계에서 가족이나 사회 집단에 소속해 있을 때도 이러한 순간을 경험한다. 이 상징적인 순간에 사람은 홀로 삶 속으로 결연히 나서야 함을 배운다.

 

이집트에서 헤르메스 신은 토드 신으로 알려져 있는데 토트신의 머리는 따오기의 머리로 되어 있다. 따라서 이집트의 헤르메스는 초월의 본질인 새로 형상화되어 있다. 올림피아 시대로 접어들면서 헤르메스는 다시 새의 속성을 회복하고, 뱀이 지닌 지하 세계적 상징체계에 이 새의 속성이 덧붙여진다.

그래서 그의 지팡이는 <카투케우스> 즉 메르쿠리우스의 날개 달린 지팡이가 되고, 헤르메스 자신은 날개 달린 모자와 신발을 갖춘 <날아다니는 신>이 된다. 말하자면 초월의 힘을 고루 갖추게 되는 것이다.

지하 세계적인 뱀의 의식에서 출발한 하급 초월성은 지상 현실의 중계자를 통해 마침내 날개를 달고 비행하는 초인이나 초인간적 현실에서의 초월성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러한 복합적인 상징은 날개 달린 말이나 날개달린 용 등의 표상에서도 볼 수 있다.

 

우리는 삶의 길을 가면서 끊임없이 모험과 규율, 악덕과 미덕, 자유와 안정의 갈등을 겪는다. 그러나 이런 대립되는 개념은, 우리를 괴롭히는 것들의 이중성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 말일 뿐, 쉽사리 이러한 갈등을 해소시키는 방법은 나올 것 같지 않다.

 

그러나 길은 있다. 억압과 자유에는 만나는 지점이 있는데, 우리는 그 만나는 지점을 수많은 입문 의례에서 볼 수 있었다. 이 입문 의례는 개인에게도 집단에게도, 내부의 상반되는 힘을 결합시키고 그 삶에 균형을 잡아 주는 일을 가능하게 한다. 이런 의례가 자동적으로 그런 기회를 제공해 주는 것은 아니다.

입문 의례는 개인 또는 집단이 특수한 시기에 만나게 되는 기회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이해하고 그것을 새로운 삶의 양태로 해석하지 않으면 그 기회는 순식간에 지나가고 만다. 입문 의례라고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복종의 의례로 시작되고, 억압의 시기를 거쳐 이윽고 해방의 의례로 진행되는 법이다.

이런 과정을 겪어야 개인은 자신의 인격 속에 잠재되어 있는 모순된 요소를 화해시킬 수 있게 된다. 그래야 개인은 참된 의미에서 인간적일 수 있으며, 참된 의미에서 자기 자신의 주인 노릇에 걸맞은 조화의 상태에 이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