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상징
제4부 시각예술에 나타난 상징성
아닐라 야페
신성한 상징-돌과 동물
상징의 역사는, 모든 사물에 상징적 의미가 부여될 수 있음을 가르치고 있다. 말하자면 자연물에는 물론 인공적인 사물도 상징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전 우주가 하나의 잠재적인 상징의 덩어리인 셈이다.
인간에게는 상징을 만드는 경향이 있어서 무의식적으로 물건이나 형태를 상징으로 변용시키고 이를 종교나 미술로 표현한다. 즉 상징으로 변용시킴으로써 심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종교와 예술이 서로 긴밀하게 짜인 역사는 유사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 선조들이 남겨 놓은 의미심장하고 감동적인 상징의 기록이다. 현대회화나 현대조각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예술과 종교의 상호 관계는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우선 예술이 지니는 상징성과 그러한 상징성의 특징을 예시하기 위해 모든 시대를 통해 되풀이해서 나타나는 세 가지 모티브를 가려 뽑아 보기로 한다. 이 세 가지 모티브란 돌, 동물, 원의 상징이다.
이 세 가지 모티브는, 인간의 의식을 표현하기 시작한 먼 옛날부터 형태가 극도로 세련된 20세기 미술에 이르기까지 심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모양을 다듬지 않은 돌까지도 옛날의 원시 사회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많은 원시인들은 가공되지 않은 자연석을 정령이나 신의 거처로 믿어왔고, 많은 자연석을 묘석이나 경계석, 혹은 종교적인 숭배의 대상으로 삼아 왔다. 이러한 돌의 사용을 조각의 원시적인 양식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말하자면 단순한 우연성이나 자연성 이상의 어떤 표현력을 돌에 부여하려는 최초의 시도였다고 볼 수 있다.
많은 조각에서 이렇듯 <정신>을 강조하는 것은 종교와 예술의 경계가 가변적이며 불확정적인 것임을 말해 주는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때로는 종교와 예술이 전혀 분리되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 양립성은 또 하나의 상징적 모티브, 즉 고대의 예술 작품에 나타나는 동물의 상징체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동물 그림은 빙하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세기 말, 프랑스와 스페인의 동굴 벽에서 빙하시대의 그림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이 그 그림의 중요성을 깨닫고 그 의미를 문제 삼은 것은 20세기에 들어와서이다. 고고학자들의 연구는, 그 존재조차 생각해 본 적이 없던 옛날의 문화 현상을 밝혀내기에 이른다.
이런 동굴은 대개의 경우, 좁고 어둡고 눅눅한 통로로 이어지다가 현대인이 찾으면 문득 벽화가 그려진 커다란 <방>을 불쑥 보여 주는 것이 보통이다. 접근이 어려운 통로는, 일반인이 시선에서 동굴을 보존하고 그 신비성을 지켜보려는 원시인들의 의도임직하다. 접근하기 어렵고 으스스한 통로 뒤에서 불쑥 나타나는 예기치 못한 광경은 원시인들에게 어떤 위압적인 인상을 주었을 것임에 분명하다.
구석기 시대의 동굴벽화는 거의 대부분이 동물 그림인데, 이들 동물의 움직임이나 자세는 자연 속에서 관찰된 그대로의 모습으로 대단한 예술적 기교를 통해 표현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런 동물 그림은 자연의 재현 이상의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인간은 이전처럼 온몸을 완전히 동물로 변장하는 대신 동물이나 악마의 가면만을 사용하게 되었다. 원시인들은 이 가면은 만드는데 모든 예술적 기교를 송두리째 기울여 왔기 때문에 그 표현에 보이는 강렬함이나 격렬함은 오늘날의 예술품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탁월하다.
이 가면은 신이나 악마와 마찬가지로 숭배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동물의 가면은 스위스 등 많은 현대 국가의 민속 예술이나 현대 일본에서 아직까지도 무대에 오르는, 표현이 풍부한 노가쿠의 가면 등에서 볼 수 있다. 가면의 상징적 기능은 온몸을 송두리째 동물로 가장하던 시절에 존재하던 상징적 기능과 같다. 가면을 쓰면 인간다운 표정은 사라져 버리면서 동물의 영이 지니는 위엄과 아름다움(그리고 소름끼치는 표정)을 지니게 된다. 심리학적 용어로 말하자면 가면은 그것을 쓰고 있는 사람을 원형적 이미지로 변용시켜 버리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동물의 모티브는 인간의 원시적이고 본능적인 성질을 상징한다. 문명인이라고 하더라도 무의식에서 분출된 자율적인 정서 앞에서는, 그 자율적 정서가 뿜어내는 난폭한 본능적 욕구에 손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원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원시인의 경우는 의식이 발달되어 있지 않고 정서의 폭풍에 대한 제어 장치도 보잘것없기 때문에 그 정도가 훨씬 더하다.
제1부에서 융 박사는 인간의 내성을 발달시키는 방법을 논하면서, 분노한 나머지 사랑하는 어린 아들을 죽이고 나서 정신을 차린 뒤에는 비탄과 회한의 눈물을 뿌렸다는 어느 아프리카인을 예로 들었다.
이 아버지의 경우는, 갑자기 분출한 파괴적인 충동이 그의 의식된 의지와는 무관하게 제멋대로 작용해 버린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동물 악마>는 주로 이런 충동을 적절하게 나타내는 상징이다.
<동물 악마>의 이미지는 생생하고 구체적이기 때문에, 사람은 그 이미지를 자기 속에 있는 압도적인 충동의 표현으로 삼아 그것과의 관계를 설정한다. 즉 그 이미지를 두려워하면서 재물이나 의식을 통해 그것과 친화할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시대를 불문하고 종교나 예술에는 항상 동물 상징이 풍부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이들 동물은 단지 상징의 중요성만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의 정신적 내용물인 본능과 삶의 통합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준다. 동물은 그 자체만으로는 선한 것도 아니고 악한 것도 아닌, 단지 자연의 일부일 뿐이다. 동물은 그 본성 밖에 있는 것은 원하지 못한다. 바꾸어 말하면 동물은 신비스러워 보이는 본능에 순종한다. 그러나 동물의 본능만 신비로운 것이 아니다. 인간의 생명에도 이와 비슷한 것이 있다. 인간 본성의 바탕을 이루는 본능이 그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내부에 있는 <동물적 존재>(인간의 내부에 본능적 심성으로 존재하는)는, 그 존재의 임자가 이것을 인식하고 자기의 삶 속으로 통합시키지 않으면 대단히 위험한 존재로 변용한다.
인간은 스스로의 의지로 동물적 본능을 억제하는 힘을 가진 유일한 생물이지만, 동시에 본능을 억제하고, 왜곡하고, 거기에 상처를 입히는 존재이기도 하다. 은유적으로 말하자면, 상처를 입은 동물만큼 난폭하고 위험한 존재는 없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억압당한 본능은 인간을 지배할 수도 있고 때로는 인간을 파멸시킬 수도 있다.
우리는 종종 동물에 쫒기는 꿈을 꾼다. 이것은 대체로 의식에서 단절되어 있던 본능이 삶 속으로 통합되어야 하거나 통합되고자 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꿈으로 해석된다.
꿈속에 나타난 동물의 행동이 위험하면 위험할수록 꿈을 꾼 사람의 본능적이고 원시적인 영혼은 그만큼 의식화하지 않는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원시적 본능을 삶 속으로 통합시켜야 위험을 피할 수 있다.
억눌리고 손상당한 본능이 문명인을 위협하는 존재라면, 억제되지 않은 충동은 원시인을 위협하는 존재이다. 어느 경우든, <동물>이 그 진정한 존재 양태에서 소외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같다. 문명인에게나 원시인에게나 동물의 영혼을 수용하는 일은 전체성을 실현하고 생명을 자유롭게 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원시인은 자기 내부에 있는 <동물>을 길들여 유용한 동반자로 삼아야 하며 문명인은 내부의 <동물>이 입은 상처를 치료하여 친구로 삼아야 한다.
원의 상징
폰 프란츠 박사는 원(혹은 구체)을 <자기>의 상징으로 설명한다. 원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를 포괄하면서 다각적이고 다면적인 마음의 전체성을 표현한다. 이 원의 상징은 원시인의 태양 숭배나 현대 종교, 혹은 신화나 꿈, 티베트 승려가 그린 만다라나 심지어는 도시 계획도에도 나타나고, 옛날의 천문학자가 생각했던 구형 개념에서도 발견된다. 말하자면 원은 항상 생명이 지닌 유일 지상적 측면, 즉 생명의 궁극적인 전체성을 나타내어 왔던 것이다.
브라마와 석가의 공간 정위(定位)는 마음의 방향성을 필요로 하는 인간의 특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융 박사는 앞에서 의식의 네 가지 기능(사고, 감정, 직관, 감각)에 대해 설명했는데, 이 기능은 인간이 내적․외적으로 받고 있는 세계에 관한 인상을 처리하기 위해 구비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자기의 경험을 이해하거나 그것을 자기의 것으로 동화시키는 것은 바로 이 네 가지 기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고, 경험에 반응하는 것도 이 네 가지 기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브라마가 우주의 네 방향을 바라본 것은 인간이 이 네 가지 기능을 통합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인도나 극동의 미술에서 네 개, 혹은 여덟 개의 방향성을 지닌 원은 일반적으로 종교적 이미지로 명상에 필요한 도구 노릇을 한다. 특히 티베트의 라마교에서는 이와 유사한 만다라가 중요한 몫을 한다. 일반적으로 만다라는 신성한 힘과 관련된 우주를 나타낸다.
삼각형 얀트라와, 시바와 샤크티의 합일을 나타내는 조각적 표현은 항상 대극성 사이의 긴장 관계를 강조한다. 그래서 그런 작품에서는 많은 경우 에로틱한 분위기, 혹은 정서적인 어떤 분위기가 느껴진다. 작품에 담긴 이러한 역동성이 전체성의 창조, 혹은 전체성의 실현과정을 뜻한다면 넷 혹은 여덟의 방향성을 지닌 원은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전체성을 나타낸다.
추상적인 만다라 표상은 유럽의 기독교 예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중 두드러지는 것은 교회의 둥근 장미창이다. 둥근 꽃 모양의 창은 인간의 <자기>를 우주적 차원으로 드높인다. 종교화에 자주 그려지는 그리스도와 성자들의 후광에서도 우리는 만다라를 접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후광은 대개 네 갈래로 나뉘는데, 이것은 사람의 아들로서의 고뇌와,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이라는 고통을 암시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분화된 전체성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초기 로마네스크 양식 교회 벽에도 추상적인 원 그림이 더러 보이지만, 이것은 이교적 영향권에서 유래한 것인 듯하다.
고전적인 건축에서나 원시적인 건축에서나 만다라 평면도가 사용되는 것은 미적․ 경제적 관심 때문이 아니다. 만다라 평면도가 사용되는 것은, 도시를 하나의 질서 정연한 우주로 바꾸고 중심부가 피안의 세계와 연결되는 신성한 장소로 변용시키기 위함이다. 이러한 변용은 종교인들의 마음 밑바닥에 깔린 감정이나 요구와 일치한다.
성속(聖俗)을 불문하고, 만다라식 평면위에 세워진 건축물은 모두가 외계로 투사된 인간의 무의식 세계에서 나온 원형적 이미지이다. 도시, 성곽, 사원은 마음의 전체성을 상징한다. 이 때문에 이러한 건축물은 그곳을 방문하거나 그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각별한 영향을 미친다.
(건축에서까지 순수한 무의식적 과정을 통해 정신적 내용물이 투사되고 있는 것은 물론이다. 융 박사는 다음과 같이 썼다. <이것은 머리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망각의 심층에서 이루어진 것이고 오직 그럴 때만 의식의 가장 심오한 통찰과 영혼의 가장 고상한 직관이 표현 가능해진다. 이로써 현대의 특수한 의식과 아득한 옛날부터 전해 오는 인류의 과거가 융합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 미술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는 상징은 만다라가 아니라 십자가, 혹은 그리스도의 수난상이다. 십자가도 카롤링거 왕조 시대까지는 등변형 십자가, 혹은 이른바 <그리스 십자가>인 것이 보통이었다. 그래서 그때의 십자가에는 만다라 의미가 간접적으로나마 표현돼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십자가의 중심부가 점점 위로 이동하고 가로대와 기둥의 형태를 띠면서 오늘날과 같은 라틴십자가 모양을 이루게 된다.
십자가의 이러한 변천은 기독교 정신이 중세의 융성기에 이르기까지 내적인 발달을 이루어 온 과정에 대응하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 간단하게 말하면, 십자가의 이런 변천은 인간의 중심과 인간의 신앙이 대지에서 정신적 영역으로 <상승>한 과정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내 나라는 이 세상이 아니다>라고 한 그리스도의 말을 구현하려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니까 지상의 삶과 이승과 육체는 마땅히 극복되어야 하는 대상이었다. 중세의 희망은 이 같은 피안의 세계를 향하고 있었는데, 그 까닭은 희망이 성취된다는 약속은 천국에서만 이루어 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기하학적인, 혹은 <추상적>인 원의 상징은 오늘날 다시 그림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인 표현양식이 그대로 재현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인과 관련된 실존적 딜레마에 따라 끊임없이 그 성격을 변용시켜 나간다. 원은 더 이상 전 세계를 포괄하고, 그림을 지배하는 유일한 요소,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아니다.
예술가들은 때때로 이 원을 지배적인 위치에서 끌어내리고 대신에 비슷한 원형군을 느슨하게 배치하기도 한다. 더러는 비대칭적인 원을 등장시키기도 한다.
원은 마음을 상징한다(플라톤도 마음을 구체에 견주고 있다). 정사각형(때로는 직사각형까지)은 땅에 뿌린 내린 것, 즉 육체와 현실을 상징한다. 대개의 현대 예술에서는 사각형과 원이라는 두 가지 근본적인 형태 사이에 관련이 거의 없거나 대체로 엉성한 배치 속에서만 등장한다. 원과 사각형의 분리는 20세기 사람들의 마음 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현대인의 영혼은 뿌리를 잃고 분열의 위험에 직면한 것이다.
이 분열은 오늘날의 세계정세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이 때문에 결국 세계는 철의 장막을 사이에 두고 둘로 나누어지고 만 것이다.
그러나 사각형과 원이 어쨌든 상당히 자주 회화에서 표현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서 사각형과 원이 상징하는 생명의 기본적인 요소를 의식화하려는 인간 마음의 지속적인 심리적 충동을 엿볼 수 있다. 오늘날의 어떤 추상화(채색된 구성이나 일종의 <원초적 물질>을 표현하는 그림)에서는 이러한 형태가 흡사 흙에서 갓 돋아난 싹인 것처럼 표현되기도 한다.
한편 원의 상징은 현대에 이르러 과거와는 매우 다른 역할을 맡기도 했으며 오늘날에도 종종 그 증거를 볼 수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몇 해 동안 <비행접시> 혹은 UFO에 대한 <공상적인 소문>이 전 세계에 유행했다. 융은 이 UFO가, 인류의 역사 내내 원이 상징해 왔던 마음의 내용(즉 전체성)이 투사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바꾸어 말하면 오늘날 많은 꿈에서 볼 수 있듯이 <공상적인 소문>은 원이 상징을 통해 이 계시의 시대가 지닌 분열을 치료하려는 무의식적인 집단적 심리적 기도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상징으로서의 현대 회화
나는, 어느 시대에서든 예술가는 그가 속한 시대정신의 표현 수단이며 대변자라고 하는 심리학적 사실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예술가의 작품이 개인의 심리적 차원에서 이해되는 것은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예술가는 시대의 특성이나 가치를 유형화하는 존재이다. 그러나 역으로 시대의 특성이나 가치가 예술가를 만들기도 한다.
사람이 어떤 사물에 매혹되는 것은 무의식이 움직일 때만 일어나는 현상이다. 현대 예술이 야기하는 효과는 눈에 보이는 형태만으로는 충분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고전적>인, 혹은 <감각적>인 예술에 길이 든 사람들에게 현대 예술은 분명히 새롭고 위화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비구상적 예술 작품에는 그 세계를 바라보는 관람객의 경험과 시선이 전혀 고려되어 있지 않다. 작품 어디에서도 관람객의 일상생활을 둘러싸고 있는 사물과, 사람과 동물의 친숙한 형태를 찾아 볼 수 없다. 예술가가 창조한 세계는 우리를 환영하지 않으며, 보는 사람의 눈과 영합하려는 기도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의심할 나위 없이 여기에는 인간을 하나로 묶는 어떤 굴레 같은 것이 있다. 보는 사람의 감정과 정서에 대한 호소력은 이런 작품이 감각적인 작품보다 오히려 더 강렬할 수 있다.
현대 예술가의 희망은 인간의 내적인 환상이나 생명의 바탕이 되고 있는 정신, 혹은 세계를 표현하는 것이다. 현대 예술은 바로 이 희망을 성취하기 위해, 구체적이고 <자연스러운> 감각 세계의 영역뿐만 아니라 개인의 영역까지도 버리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고도의 집단성에 집착하게 되는데, 바로 이 집단성이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결국 현대 예술에서 예술가 개인의 몫으로 남는 것은 표현의 양식과 스타일과 품격이다. 예술가의 의도가 순수한지 순수하지 못한지, 자발적으로 표현된 것인지 모방에 따른 것인지, 작품이 노리는 효과가 어떤 효과인지 문외한이 알기는 어려울 때가 많다.
문외한이 이런 것을 알아내려면 우선 새로운 종류의 선이나 색채에 버릇 들지 않으면 안 된다. 외국어를 공부할 때 문법을 익히는 것처럼 이런 선이나 색채를 공부해 두어야 비로소 작품에 표현된 의미를 알 수 있다.
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벌거벗은 대상(곧 물질)과 벌거벗은 비대상(곧 정신)에 대한 두 가지 몸짓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이전부터 상징적인 표현의 바탕이 되었던 정신의 균열을 반영한다. 이 균열은 르네상스 시대에 이미 지식과 믿음의 갈등으로 나타났던 것이기도 하다. 이 균열은 세월이 흐르고 문명이 점진적으로 진보함에 따라 정신과 본능, 자연과 정신, 의식과 무의식이 균열로 발전하는데, 현대 회화가 표현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이 양자의 대립에 따른 정신의 상황인 것이다.
사물의 내밀한 혼
그러나 연금술사들이나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마음 일부가 사물이나 무생물에 투사되고 있다는 심리학적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러니까 마음의 일부가 투사되었기 때문에 그런 사물에 <신비스러운 생명>이 깃들어 있어 보였고, 잡동사니가 고귀한 가치를 지닌 것 같아 보였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자기네 마음의 어두운 측면을, 현세적인 그림자를, 그들 자신과 그들이 살던 시대가 방기해 버린 마음의 내용을 그런 물건에 투사했던 것이다.
위에서 인용한 여러 예술가들의 말은, 금속이나 무생물의 내부나 그 배후에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믿던 옛 연금술사들의 이른바 <물질 속의 정신>이라는 사고방식을 연상시킨다. 심리학적으로 해석할 때 이 <정신>이란 곧 무의식에 다름 아니다. 무의식은 언제나 의식이나 합리적 지식이 한계에 부딪히고, 거기에 신비가 개입해 올 때 그 모습을 드러낸다. 그 까닭은, 인간은 설명할 수 없는 것, 신비스러운 것은 자기 무의식으로 채워 버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인간은 무의식의 내용을 내부가 텅 빈 캄캄한 그릇에 투사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대상은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다. 하나는 일반적 측면이다.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식하는 측면이자, 누구에게나 보이는 측면이다. 다른 하나는 영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측면인데, 이 측면은 극히 소수의 사람만이 통찰의 순간이나 형이상학적인 명상의 순간에 볼 수 있다. 예술 작품은 가시적인 형태로는 드러나지 않는 것을 전달해야 한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게 변해 버린 이 세상에서도 마음, 인간의 사랑, 그리고 신비스러운 것을 이해하려는 인간의 노력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시가 그러하듯이 그림 역시 신성한 역할을 지니고 있다. 옛날과 다름없이 인간은 오늘날에도 그림의 이러한 역할을 절감한다.
그러나 이런 실험 과정은 결국 무의식의 흐름에 통로를 열기만 할 뿐, 의식이 맡아야 할 중요한, 어찌 보면 결정적일 역할은 무시되고 만다. 융 박사가 제1부에서 지적했듯이 무의식이 중요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열쇠는 쥐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의식이고, 이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맡는 것도 의식이다. 이미지의 의미를 규정하고 현실에서 그 이미지가 개인에게 지니는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도 의식만의 기능이다.
그러니까 무의식은 의식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서야 자체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고 무의식 자체만의 공소함(공허의 우울함)에서 벗어날 수 있다. 만일 무의식이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활동을 방치해 두면 지나치게 강력해진 나머지 파괴적인 측면만을 노출시키는 경우가 있다 이렇게 되면 대단히 위험하다.
이런 것에 유념하고 초현실주의자가 그린 그림을 보면, 풍부한 공상성과 무의식적인 심상이 지니는 압도적인 힘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대부분은 이런 그림에서 무의식적인 심상이 지니는 압도적인 힘뿐만 아니라 종말론적 공포와 그 상징성의 표현을 동시에 경험한다. 결국 무의식은 자연이기 때문에 자신의 긍정적인 자질을, 자연이 그러하듯, 넉넉하게 분출한다. 그러나 방치된 무의식, 인간 의식과 상호 작용이 없는 무의식은 그러한 긍정적 자질을 파괴함으로써 조만간 절멸의 위기에 몰린다.
<우발성 >은 프랑스의 장 아르프의 작품에서도 중요한 몫을 한다. 나뭇잎 같은 것들이 아무렇게나 배열된 목판화는 그의 말에 따르면, <외관의 세계 밑에서 침묵하는 숨겨진 원초적 의미>를 찾기 위한 탐색의 표현이다. 그는 이것을 <우연의 법칙에 따라 배열된 잎사귀와 우연의 법칙에 따라 배열된 사각형>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작품에 깊이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우연이다. 우연이란, 우리로서는 그 정체를 알 수 없는 능동적인 질서와 의미의 원리를 가리킨다. 이 원리는 <대상>속에서 <숨겨진 영혼>으로 나타난다.
에른스트의「박물지」나 장 아르프의 우연한 구성은 심리학자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다. 심리학자들은 우연한 구성이, 어느 때고 그리고 어디에서고 이것과 교우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 것인가 하는데 주의를 기울였다. 이 문제를 던진다는 것은 곧 인간과 의식이 사물(혹은 작품) 한가운데 들어옴을 뜻하며, 이로써 의미가 가능해진다.
우연적인 구성이나 배열이 산출한 그림은 아름다울 수도 있고 추할 수도 있고, 조화정연할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으며, 내용이 풍부할 수도 있고 빈곤할 수도 있고, 잘 된 그림일 수도 있고 잘못된 그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림 자체의 가치는 이러한 요소에 따라 결정되겠지만 심리학자들의 관심은 그림 자체의 가치에 있지 않다. 형태의 창조를 통해 최상의 만족을 얻는 예술가들로서야 한심하게 여기겠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심리학자들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발적인 배열에 깃들어 있는 <암호>를 탐구하고 이것을 해명하려고 한다. 아르프가 아무렇게나 긁어모은 여러 가지 물체의 숫자나 형태는 에른스트의 공상적인 프로타주 못지않게 우리에게 많은 의문을 던진다. 심리학자들에게 이런 작업에 쓰이는 물체는 모두 살아 있는 상징이고, 그렇기에 이들을 느끼는 것이 가능함은 물론 어느 정도까지는 해석도 가능하다.
오늘날 분열증적 상태와 예술가의 환상이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 되었다. 나는 메스칼린 같은 약품에 대한 과거의 실험들도 이러한 세론의 변화에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이런 약품은 색채와 형태에 대해 강력한 환상을 일으키게 하는데, 그런 면에서 정신분열증과 상당히 흡사하다. 오늘날 이런 약품을 이용하여 영감을 얻으려 하는 예술가는 한둘이 아닐 것이다.
1]카를 G. 융 외 지음,「인간과 상징」이윤기 옮김, (열린책들)
2]Ibid, 357.
23] Ibid, 404.
현실로부터의 후퇴
이제 인과의 법칙은 어느 범위를 넘어서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즉 전체적으로 엄청나게 달라진 새롭고 비합리적인 현실이, 고전 물리학의 법칙이 통용되던 우리의 자연스러운 세계 뒤에서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물리학의 시공간 연속체와 집단 무의식은, 밖으로 드러난 현상의 배후에 존재하는 또 하나의 현실의 외면과 내면을 이루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리학과 마음이라는 두 세계의 배후에 존재하는 이 세계의 특징은 그 법칙이나 작용 과정이나 내용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 이것은 현대 미술을 이해하기 위해서 대단히 중요한 전제가 된다. 그 까닭은 현대 미술의 주제 역시 이 세계의 정체처럼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예술가들이 사물의 배후에 있는 생명에 가시적인 형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해 온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술가들은 이 같은 작품을 통해 물리 현상과 심리 현상 양쪽의 공통되는 배경적 기반인 하나의 생명을 표현한 것이다.
물체 세계로부터의 유리 현상을 경험한 칸딘스키는 〈나는 예술이 자연으로부터 점차 물러나는 것을 확실히 본 것 같다〉고 했다.
또한 프란츠 마르크도 예술의 목표는 모든 것의 배후에 숨은 비현세적 생명을 드러내는 것으로〈예술가는 형태로 표현된 작품보다 형태를 부여하는 힘 쪽에 훨씬 더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몬드리안에 따르면 추상화의 궁극은 끝없이 변천하는 자연의 형태 배후에는 불변하는 순수 현실이 있기 때문에, 주관적 감정이나 관념에 좌우되지 않는 순수 형태의 창조를 통해서만 달성된다고 하였다. 추상 예술가들의 목표는 생물이나 물체의 중심,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불변의 기반과 내적 확실성이었다.
예술이 곧 신비주의가 된 것이다. 중세기의 연금술과 마찬가지로 현대 예술은 대지의 정신에 뿌리내린 신비주의이다. 따라서 우리는 현대 예술을, 기독교를 보완하여 우리 시대의 정신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칸딘스키는 자신의 작품을 〈색채와 형태의 하모니라면서 형태는 아무리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것이라고 하더라도 하나의 내적 울림을 지니는바, 형태는 그 형태와 온전하게 부합되는 효과를 지닌 정신적 존재이다〉라고 썼다.
시인의 혼을 지닌 현대 화가로 불리는 클레는 〈예술가의 사명은 원초의 법칙이 은닉하고 있는 신비의 지반을 최대한 침투하는 것이다. 고동치는 우리의 심장은 우리를 아래로 아래로 침잠하게 함으로써 그 원초의 지반으로 가라앉게 한다〉라고 했다.
예술가는 이 원초적 지반으로의 여행 중에 만나는 것을 시각적인 형태로 표현하되, 적절한 예술의 표현 수단을 선택해 이와 완전히 융합하는 과정에서는 은밀히 인지한 것을 시각화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더없이 신중해야 한다. 클레의 작품은 그 지반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그의 작품에서 자연의 정신과 무의식적 정신을 분리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바로 이 두 가지 요소가 마법의 원 속으로 클레를, 그리고 우리를 끌어들이는 것이다.
플록의 그림은 무의식중에 그려지는 것이나 다름없지만 거기서는 끝없는 격정이 넘쳐 나온다. 세상 만물을 품고 있는 〈無〉즉 무의식을 표현하고 있다. 의식이나 존재가 대두되기 이전의 모습을, 또는 의식이나 존재가 사멸한 뒤 생명의 시대가 지니게 될 환상적인 풍경을 나타내는 듯이 보인다.
상징이라는 것은 우리가 익히 아는 물체로,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엇인가를 암시한다. 즉 표현 불가능한 것의 생명과 느낌을 표현하는 우리가〈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정신의 심층은 어두운 곳으로 내려갈수록 개체적 독자성을 잃게 되어 집단적인 것으로 변모하다가 마침내는 육체의 물질성인 화학 물질로 보편화하면서 결국 그 특이성을 잃어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도 그 〈최하층〉으로 내려가면 곧 〈세계〉 자체이지, 더도 덜도 아닌 것이다.
추상화와 물질의 현미경 사진을 비교해 보면 상상적 예술에 보이는 철저한 추상적 표현이 놀랍게도 어느 틈에 자연주의적이 되었으며 20세기 초에 떨어졌던 〈위대한 추상성〉과 〈위대한 사실성〉이 여기에서 다시 만나는 것이다. 현대 추상 회화가 이 〈목적지〉, 즉 통합의 지점에 도달한 것이다.
결국 예술가에게는 자기가 생각하는 만큼의 창작의 자유가 없다는 것이다. 예술가가 무의식으로 작품을 만든다면 그 작품은 자연의 법칙에 지배되는 것이며, 이 자연의 법칙은 심층적으로는 마음의 법칙과 일치하는 것이고, 역으로 마음의 법칙 역시 자연의 법칙에 일치하는 것이다.
빌헬름 보링거는 추상 예술을 일종의 형이상학적 근심이나 불안의 표현이라고 해석했다. 형이상학적 불안은 이미 현대 세계의 보편적 특징이 되었다고 한다. 클레는 세계가 뒤숭숭할 때면 예술은 추상적이 되고, 그 반면 평화로운 세계는 사실적 예술을 창조한다고 일기에 썼으며, 프란츠 마르크는 추상화야말로 이 사악하고 추악한 세계로부터의 피난처였다고 고백한 바 있다.
1958년 이탈리아의 조각가들의 테마에서는 기수가 말 잔등에서 팔을 벌리고 몸을 뒤로 젖힌 모습을 하고 있다가 세월이 감에 따라 고전적인 자세가 차례로 무너지더니 주제는 추상화해 갔다. 작품을 통해 〈나날이 심화되어 가고 있는 공포와 절망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화가 조각가 마리니는 말했다.
민담이나 신화에서 〈승리하는 영웅〉은 우리가 지닌 의식의 상징이다. 영웅의 패배는 개인의 죽음을 의미하며 개인의 죽음은 사회적으로는 개인이 집단 속으로 매몰되어 가는 현상을 통해 나타나며, 예술에서는 인간적 요소의 쇠퇴로 나타난다.
감각적 예술이 추상의 방향으로 변용해 간다는 것은 현대회화 전람회를 본 사람이면 다 알고 있을 터이다. 그림이자 조각의 고뇌가 보여주는 형이상학적 불안 역시 종말의 운명을 안은 세계에 대한 절망에서 비롯된 것일 터이다.
이 내적인 고뇌의 바탕에는 의식의 후퇴가 깔려 있다. 의식의 경험을 통해 무의식이 평형을 찾지 못하면 길을 잃은 무의식은 무자비하게 의식과는 정반대되는 혹은 부정적인 측면을 드러낼 것이다. 지식의 끝과 세계의 파괴, 이 두 가지는 자연의 원초적인 기반의 발견을 통해 드러나는 양면이다.
융 박사는 인간의 의식이 중요한 만큼이나 인간의 무의식이 위험할 수 있음을 잘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그는 그래서 인류에게 파국에 대항하는 유일한 무기를 제공할 수 있었다. 의식에는 탁월한 실용적 기능이 있다. 의식을 통해서만 惡이 우리 정신의 내용물로 존재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질투, 번뇌, 육욕, 거짓말 등의 악덕은 무의식이 지니는 부정적이고 어두운 면인데, 이것은 두 가지의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 정신을 두 얼굴을 가진 메르쿠리우스라고 부른다.
긍정적인 의미에서의 현대 미술은 심원한 자연적 신비주의의 표현이다. 반대로 부정적 의미에서는 사악함, 혹은 파괴적인 정신의 표현으로 해석되기도 하는데, 이런 두 가지 면이 서로 표리일체를 이룬다는 역설이 바로 무의식의 본질적 특성이며 그 내용인 것이다.
對極의 合一
시대정신이라고 하는 것은 흐르는 강 같은 것이어서 부단히 변화된다는 점이다. 20세기 중반, 회화에 하나의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는 추상 회화의 가변적인 테두리 내에서 꾸준히 지속되고 있다.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젊은 예술가들은 가장 가까이 존재하는 것인데도 그때까지는 간과했던 것을 자연과 인간 가운데서 발견한 것이다. 이들은 선배들처럼 회화로 자연을 재현하는 대신 자연에 대한 정서적 경험을 표현하는 데 관심을 기울이게 된다.
“예술가에게 진정한 현실은 인간으로서 자신의 중요성을 회복하는 일이다. 나는 예술가가 자기 자신으로 돌아와 자신의 중요성을 재발견하고 이를 강화함으로써 세계의 외적 현실에 이르려면 먼저 자기의 위치를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믿는다.”
프랑스의 화가 알프레드 마네시에는 예술의 목적을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실제로 오늘의 예술가들이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생각은, 자기 자신의 내적 현실과 세계 및 자연의 현실을 의식적으로 재통합하는 것,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의 중요성을 합일시키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으로서의 예술가가 자신의 중요성을 회복하는 일인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우선 작품이 지니는 분위기의 변화로 비칠 터이다. 이들의 작품이 추상적임에도 불구하고 세계에 대한 신념이 배어 나오며, 이런 작품이 강렬한 감정을 지니고 있는데도 형태와 색채는 평화롭게 조화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우리는 클레의 작품에서 형태와 색채의 평화와 조화를 발견한다. 그는 이제 악을 부정할 필요도 느끼지 못한다. 악한 것 역시 승자나 패자로서의 적이 아니라 전체 속에서 함께 작용하는 하나의 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유의해야 할 것은 현대 회화가 대극의 합일을 인식할 정도의 수준에 이르게 되면서 종교적인 주제를 다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형이상학적 공허가 극복된 것처럼 보인다. 이와 더불어 교회가 어느 틈에 현대 예술의 후원자가 되는 일이 일어났다.
현대 미술이 교회로 들어간 것은 기독교와의 관계에서 현대 회화가 맡은 역할이 변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대단히 상징적이다. 과거 연금술 운동에 의한 보상 작용이 협조를 가능케 하는 길을 연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대극의 합일 분위기가 적극적이고 바람직한 결과를 낳을지, 그 과정에서 더 많은 비극과 혼돈을 경험하게 될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다. 예술의 영역에서나 사회에서나 불안과 공포는 여전히 지배적인 요소를 자리하고 있다.
예술가들은 무의식적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웬만한 것을 표현해도 사람들은 반발하지 않는다. 개인의 영역까지 침범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프랑스 화가 피에르 술라주가 그린 그림은 이런 것을 상징하는 희망의 빛이다. 그가 그린 그림에서는 검은 서까래가 자유분방하게 배치된 뒤로 푸른빛과 황금빛이 밝아 오고 있다. 바야흐로 어둠 저쪽에서 날이 밝아 오고 있는 것이다.
개인 분석에 나타난 상징
분석의 시작
어떤 젊은이가 현실에 대한 적응을 어렵게 여기고 꺼릴 경우 공상에 안주하거나 어린 시절에 머물려고 하는 경향을 보일 수 있는데, 이 경우 무의식 속에서 예기치 못하던 풍부한 광맥을 찾아내고, 이 광맥을 의식 세계로 도입하여 자아를 강화하고, 성숙한 인간이 되는 데 필요한 정신적 에너지를 얻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꿈의 강력한 상징적 기능이라고 할 수 있다.
〈헨리〉라고 하는 25살 난 젊은 엔지니어의 예를 들어 분석이 어떻게 개성화 과정을 도울 수 있는지 점검해 볼 것이다.
프로테스탄트 농민 집안 출신인 그의 아버지는 일반 개업 의사이다. 엄격한 도덕 기준을 갖춘 사람이나 교제에는 서툰 상당히 폐쇄적인 사람이었으며 아들에게보다는 환자들에게 훨씬 아버지다웠다고 설명한다.
헨리의 어머니는 내주장이 강했다. 어머니는 엄격했지만 교양 있고 예술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가정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정신적 시야가 대단히 넓은 데다 다소 충동적이고 로맨틱한 데가 있었다. 자기는 카톨릭 가정에서 자라났으면서 아이들은 남편의 종교인 프로테스탄트를 따르게 했다. 헨리는 누나가 하나 있었는데 남매 사이는 상당히 좋은 편이었다.
내향적이고 부끄럼을 많이 타는 청년인 헨리에게서 어머니와의 관계가 인생에 자신을 던져 넣는데 대한 두려움이 은폐되어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면접을 신청한 편지에 써 있는 내용을 분석하면 약간 불안정하고 그래서 현실성이 다소 모자라는 젊은이로 만족하고 살 것인지, 스스로 다소의 모험을 각오하고라도 독립적이고 분별 있는 어른이 될 것인지 선택해야 할 입장에 몰린 셈이다.
나이에 비해 책을 많이 읽어 심미적 지성주의 경향을 보이는 그는 일찍이 무신론 시기를 겪은 뒤 엄격한 프로테스탄트가 되기는 했지만 중립적인 종교관을 갖게 되었다.
분석을 시작하기 2년 전, 헨리는 스위스의 프랑스어권 출신의 카톨릭 처녀와 약혼을 했는데 자신이 결혼이라는 책임이 따르는 단계에 발을 들여야 할지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회의로 인해 어떤 결론에도 이르지 못하고 있었다.
헨리는 의식 세계에서는 자신을 이상이 높고 지적 야심이 있는 어머니의 현실과 동일시하는 반면에 무의식 세계에서는 어머니와의 밀착 관계가 지닌 어두운 면의 영향을 받고 있어 〈어머니라는 감옥〉에서 빠져나오려는 욕구가, 실제로는 어머니에 대한 적대적 반응과 무의식적 여성성의 상징인 〈내적 어머니〉에 대한 거부감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결국 그는 성장을 바라는 자신의 내적 충동 속에 어머니로부터 분리될 필요성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제시한 꿈은 모두 50개였다. 단기간 분석은 헨리의 경우처럼 에너지로 충만해 있는 꿈이 개인의 발달 과정을 가속화할 때만 가능하다.
융 학파의 견해에서 본다면, 분석의 성패와 분석 기간의 길고 짧음은 아무 관계도 없다. 문제는 무의식이 산출하는 소재와 그 무의식의 메시지를 받아들여 내적인 진실을 알아내고자 하는 개인의 자세인 것이다.
헨리 자신의 일상 생활과 어린 시절 이야기를 정기적으로 나누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의 꿈과 그 꿈이 암시하는 내적 생활에 대한 탐구를 시작했는데 그의 꿈이 자주 그 자신의 정신적인 발달을 호소하는 데 놀라고는 했다.
꿈을 분석하다 보면 꿈 상징이 꿈꾼 당사자에게 폭발적으로 작용할 때가 있으므로 분석가는 언제나 신중해야 하며, 말 또한 아껴야 한다. 상징으로 이루어진 꿈의 언어에 과도한 양의 빛을 비출 경우, 꿈을 꾼 당사자는 불안에 사로 잡힌 나머지 자신을 합리화하거나 더 이상 그것들을 소화할 수 없게 된다.
첫 번째 꿈
“잘 모르는 사람들과 소풍을 간 이야기”
"사마덴에서 출발해서 한 시간 정도 걸은 뒤 캠프를 마련하고 연극을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출연자 하나가 유달리 기억에 남는다, 혼자 산마루까지 올라가다가 계곡에서 길을 잃고 난감했지만 묻는 것이 싫었는데, 노부인이 길을 가르쳐 주어 톱니 꼴 철도를 끼고 올라가다가 쉴 새 없이 지나가는 자동차를 만났는데 죽은 사람들이 타고 있었다. 불안해서 걷고 있는데 다행히 일행이 나를 기다리고 있어 숙소로 돌아왔는데 폭우가 쏟아졌고 내 배낭과 오토바이가 없는 것이 아쉬웠지만 아침까지 기다리면 찾을 수 있을 거라고 말해 그 충고를 따랐다."
융 박사는 분석으로 보고되는 꿈 중에 첫 번째 꿈이 가장 중요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첫째 꿈은 종종 앞으로의 분석에 대한 예상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가치를 지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분석을 받겠다는 결심이 원형 상징의 연못이라고 할 수 있는 마음의 심층 차원을 휘저어 버리기 때문에 첫 꿈은 종종 전체 분석 과정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고, 분석가에게 꿈꾼 사람의 심적 갈등에 대한 통찰의 열쇠가 되는 〈집단적 이미지〉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사마덴: 17세기 스위스의 독립투사 위르크 예나치의 고향으로 유명한 마을 이름
-예나치: 헨리의 인적사항과 많이 비슷함. 헨리가 어머니와의 관계와 인생에 대한 두려움에서 자신을 해방시켜야 했듯이 예나치도 점령국 프랑스로부터 자기의 조국을 해방시켜야 했다 헨리의 무의식이 헨리 자신을 예나치에게 견준다는 것은 헨리의 투쟁이 승리를 쟁취하게 될 것임을 암시하는 희망적인 징조로 해석할 수 있다.
-연극: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를 연상시킴
-현명한 노부인: 분석가 상징
-톱니 꼴로 되어 있는 철도: 헨리 자신이 어릴 때 만들었던 창고
-소풍: 분석을 받기로 한 헨리의 결심
-산을 오르는 것: 인생 여정의 무의식에서 자아의 보다 높은 관점으로의 상승
-연극: 관객은 연극에 동화되는 한편 계속해서 자기만의 공상에 빠질 수도 있다. 모레노에 의해 시작되어 치료에 이용되고 있는 심리극도 바로 자기 동일시를 통한 카타르시스를 그 출발점으로 삼는다. 헨리가 이 같은 연극 관람을 통해 내적 발전을 이루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기억에 유달리 남은 여자 출연자: 헨리 자신의 어머니 모습을 연상시키며, 헨리의 무의식에 있는 여성적 측면의 화신이라고 볼 수 있다. 헨리의 마음속의 대극은 합일에 이르기는 고사하고, 아직 구별도 될 수 없을 정도의 미분화 상태에 있는 것이다.
-산마루에 오르는 일: 새로운 마음에 이르는 〈전환의 계기〉로 꿈속에 자주 나타나는 상징이다. 헨리는 장비를 두고 출발한다. 이것은 마음의 장비를 짐으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주는 행동으로 사물을 다루는 지금까지의 방법을 바꿀 필요가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방향을 잃고 헤매다가 골짜기에 되돌아오게 된다: 헨리의 자아는 독자적인 행동을 감행한다. 그러나 다른 정신적 요소는 수동적인 옛날의 상태에 머물면서 자아를 따르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묻는 것이 싫었는데: 궁지에 몰렸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망설임
-노부인의 충고: 영원한 여성성의 지혜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노부인에게 도움 받는 것을 망설이는데 먼저 지성의 희생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헨리의 일상생활에는 물론 그의 분석 과정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원칙이다.
-자동차가 뒤에서 추돌해 올까 봐 걱정한다: 헨리 자신이 자기 자아의 배후에 있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푸른 옷을 입은 죽은 사람들: 기계 장치에 의해 끌어내려지고 있는 빈약한 지적 사고를 상징, 헨리의 정신 속에 깃들어 있는 생명력이 없는 내적인 내용물을 상징할 수도 있다.
-누군가 그들은 죽은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러나 꿈 속에서 헨리는 혼자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누군가의 목소리이다. 꿈 속에서 목소리가 들릴 때 이것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융은 꿈속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자기〉의 개입으로 해석한다. 헨리는 자기가 기술자로서 지나치게 전념해 온 도식들이 〈죽어 있음〉을 깨닫는데, 이러한 통찰이 꿈속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마련한다. 방향을 바꾸어야 할 지점에 마침내 다다르고, 이 지점에서 의식과 외계를 향하는 오른쪽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그리고 거기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을 발견하는 것은 자기 개성의 다른 측면들을 의식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폭우를 만난다: 비는 하늘과 땅의 사랑의 결합을 뜻하는 것으로 종종 이해됐다. 이렇듯이 비는 예부터 〈해결〉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산에서 내려온 헨리는 배낭이나 오토바이로 상징되는 보편적인 가치와 다시 만난다: 다시금 사회와 접촉할 느끼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다음 날까지 기다렸다가 장비를 챙기라는 동료들의 말을 수용한다. 처음에는 노부인의 충고, 즉 원형적인 상으로서의 주관적인 힘을 따르고, 두 번째로는 집단 양식, 즉 보편적인 행동 유형에 따르는 것으로 성숙을 향한 도정의 첫 관문을 지난다.
대극을 이루는 양자를 통합하기 위해서 우선 혹독한 시련을 몇 차례 겪어야 할 것이다.
-상승하려는 의식적 충동/ 수동적인 명상의 경향
-길고 하얀 옷을 여성상/ 푸른 양복을 입은 퉁퉁 부은 시체들
무의식에 대한 공포
근본적으로 헨리는 결혼을 두려워하고 있다. 결혼이 책임 있는 관계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면적 감정은 어른의 세계 문턱에 당도하는 청년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다. 이러한 경향은 외적인 삶이나 현실을 두려워하는 내향적인 사람에게서 자주 볼 수 있다.
“군대 생활, 장거리 구보... 나는 홀로 나의 길을 간다.”
"아무리 달려도 목적지에 이르지 못하지만 낯익은 곳이다. 목가적인 개울 쪽은 사람의 발길을 멈추게 하기에 충분할 만한 경치이다. 조용한 시골길은 취리히의 작은 마을로 통한다.
버드나무로 둘러싸인 개울을 지나 숲속으로 들어가니 도망치는 암사슴 한 마리를 본다. 오른쪽 길로 접어들려고 하다가 다리는 캥거루 다리, 몸은 개와 돼지가 반반씩인 동물 세 마리를 만난다."
이 꿈의 전체 상황은 평범한 남성의 운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꿈 속에서 그는 그런 생활에 순응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어디서 보았던 것 같다는 느낌-가시감을 느낄 즈음의 생각은 그의 심한 열등감을 반영하고 있다.
헨리의 의식적인 태도를 보상하려고 하는 경향이었다.
꿈은 대체로 꿈꾼 사람의 의식적인 태도를 보상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헨리가 지닌 무의식적 본능의 세계는 여성적인 것으로 상징된다. 숲은 그 무성함으로 동물을 안아 기르는 곳, 곧 무의식 세계를 상징한다.
암사슴은 부끄럼을 잘 타고, 겁이 많고, 민첩하고, 순진한 여성을 상징하는데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린다. 이어서 세 동물의 모습이 섞여 있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는 동물들을 본다. 이 동물들은 미분화된 본능을 상징하는 것 같다. 아직 의식의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상스러운 성욕을 연상시키는 돼지 난교의 대명사쯤으로 불리는 개, 감싸고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모성을 상징하는 캥거루 이런 동물들이 기본적인 특성만을 내보이며 뒤섞여 나타나 원초적인 무의식의 덩어리를 상징하는 것 같다. 이 원초적인 무의식의 덩어리에서 개인의 자아가 출현하여 성숙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자기가 동물로 가장했던 것처럼 그 동물들도 가장한 데 지나지 않는다며 위안하려하지만 그가 공포를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무의식의 심층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범선의 선실 급사로 일하고 있다”
"돛대를 고정시키는 데 필요한 밧줄을 붙잡고 있는 일이다. 이상하게도 난간은 석판의 벽으로 되어 있는데 이 벽이 물과 배의 경계선 역할을 하고 있다. 밧줄을 붙잡고 있지만 수면을 들여다보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이 꿈에서 헨리는 심리적인 경계 상황에 위치해 있다.
난간은 그를 보호하는 벽인 동시에 그의 시계를 차단하는 벽이기도 하다. 그는 수면을 보아서는 안 된다는 지시를 받았는데 이것은 헨리의 의혹이나 공포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헨리처럼 내면에 있는 심층과의 교류를 두려워하는 남자는 현실의 여성에게 망설이는 것은 물론, 어떤 순간에는 여성적인 것에 매료당하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거기에서 달아나려고 한다.
어머니의 굴레를 강하게 의식하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있는 일이지만 헨리도 한 여성에게 감정과 관능을 동시에 느끼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대여섯 살 때의 어린 시절”
"당시 내 친구는 나에게 공장장과 음란한 짓을 했다면서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친구가 공장장의 성기에 손을 올려놓으니까 성기도 따뜻하게 되고 자기 손도 따뜻해지더라는 것이다. 공장장이 박식한 사람이어서 좋아했지만 만년 청춘인 척하는 것을 비웃었다."
헨리의 꿈속에 여전히 이런 것들이 선명하게 나타나는 것은 그가 그런 경험에 죄의식을 느끼고 강하게 억압하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이런 종류의 감정과 여성과의 영속적인 관계에 대한 두려움 사이에 관계가 있는지도 모른다. 수동적인 성향과 내향성으로의 은신, 결혼의 전도에 대한 불안, 꿈속에 나타난 남녀의 분리- 이것은 모두 헨리의 의식 뒤에 도사리고 있는 의혹의 증상임에 분명하다.
성자와 창부
“좁은 산길을 걷고 있다”
"깊은 왼쪽 사면은 계곡으로 이어지고 오른쪽은 암벽으로 가로막혀 있는 길옆에는 바위를 깎아 만든 동굴들이 있다. 이 동굴 안에 반쯤 몸을 가린 창부가 숨어 있다. 창부의 몸은 해면체 같다. 호기심이 동한 나머지 뒤에서 창부의 엉덩이를 집적거려본다. 그 순간 창부가 남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눈앞에서 이 인물은 어깨에 진홍색 겉옷을 걸친 성자로 모습을 바꾼다. 그는 사면을 내려가 동굴로 들어간다. 그는 동굴 속 사람들과 나를 내쫓고는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그 동굴에 자리를 잡는다."
창부에 관한 연상에서 작지만 육감적인 「빌렌도르프의 베누스」를 떠올린다.
베누스상은 자연신, 풍요의 여신으로 엉덩이를 만지는 것이 풍작 기원제의 의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성자의 겉옷에 대한 연상은 약혼녀의 외투와 비슷했다는 것이다. 융의 꿈이 무의식의 자기 표출이라면 성자의 꿈 만큼 헨리의 심리 상태를 잘 나타내는 꿈도 드물 터이다.
동굴은 인간이 바위를 쪼아낸 노력의 성과를 의미한다. 의식 안에 생긴 빈틈과 비슷하다. 동굴은 어머니 대지의 자궁을 상징하는 곳인 동시에 변용과 재생이 이루어지는 신비스러운 곳이기도 하다.
외계가 힘들게 느껴질 때 의식 속에 존재하는 동굴로 도피하고 거기에서 독자적인 공상에 빠지는 헨리의 내향적 뒷걸음질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동굴에서 본 여성상은 그의 무의식 속에서 억압되고 있는 결코 일상에서 접촉할 수 없었던 여성의 이미지로 어머니와는 정반대되는 존재이다. 모성 콤플렉스가 있는 남성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경향으로 이런 아들의 마음속에는 어머니 때문에 다른 여성을 금기시하는 경향이 아주 공고하게 남아 있는 것이 보통이다.
뒤에서만 볼 수 있는 것은 감히 앞에서는 창부를 볼 수 없는 것으로 인간성이 가장 드러나지 않는 쪽 즉 엉덩이를 본다는 뜻이다.
엉덩이에 손을 대는 것은 방어 혹은 저주일 수 있다. 손을 대는 순간 남창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은 자신의 성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며, 헨리가 성을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남창에서 성자로 변신하는 변화에서 성적인 이미지가 걷히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관능의 세계에서 도피하는 방법은 육욕의 부정을 통해 금욕적인 삶을 사는 길밖에 없다고 느끼는 헨리의 심리 상태를 암시하며 변성을 통해 어떤 대극도 서로 뒤바뀔 수 있음을 보여주려는 듯한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육욕의 세계에서 도피하려는 성향은 젊은이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 못 된다. 성이라고 하는 것은 종의 보존에 필수 불가결한 것이기 때문이다. 꿈은 이 점을 깨우치려하는 듯하다.
성자가 길을 내려가 들어가게 되는 동굴은 초기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피하여 숨어든 초대 교회의 예배당을 연상시키는데 성스러운 치유의 장, 명상의 장, 육체를 영혼으로 변용시키는 신비스러운 장인 것으로 보인다.
헨리는 성자를 따르지 못하고 그 동굴에서 쫓겨난다. 영적인 세계나 종교적인 정신생활에 몰입하기 전에 먼저 세상에서 사는 방법을 익혀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17] Ibid, 448-453
분석의 진행과정
" 우리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호숫가 방파제가 있는 곳에서 최근의 전쟁 때 가라앉았던 기관차가 호수 얕은 곳으로 인양되고 있다. 처음에는 기관차의 보일러로 보이는 커다란 원통이 드러나더니 다음으로는 녹슨 화차가 모습을 드러낸다. 약간은 무시무시한 광경이면서도 낭만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일단 인양된 것들을 가까이 있는 기차역의 철로와 케이블 밑으로 옮겨졌다. 기관차가 이렇게 인양되자 호수의 바닥은 푸른 풀밭으로 변해 갔다."
기관차(다분히 에너지와 능동성을 상징) - 가라앉은 무의식속에 억압되어 있다가 바야흐로 태양 아래로 인양. 화차 - 귀한 짐(심리적 특성)을 운반할 수 있는 교통기관을 상징.
캄캄하던 호수의 바닥이 푸른 풀밭으로 변함 - 적극적 행동에 대한 그의 잠재 능력을 암시.
성숙을 향한 <고독한 여행>에서 헨리는 자기내부의 여성적인 측면의 도움을 받기도 한다.
스물 네 번 째 꿈에서 그는 <꼽추처녀>를 만난다.
"나는 겉모습이 작고 가냘픈, 그러나 곱사등을 가진 어느 처녀와 학교에 간다. 다른 많은 사람들도 나와 함께 학교로 간다. 다른 사람들이 성악 교습을 받느라고 이곳저곳으로 흩어질 동안 나는 처녀와 작은 정사각형 탁자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는다. 나는 처녀에게 개인적으로 성악교습을 받는다.
나는 처녀에게 연민을 느낀 나머지 입을 맞춘다, 그러면서도 나는 이 같은 짓이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하더라도 내 약혼자에게는 성실하지 못한 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성악 - 직접적인 감정표현의 한 방법.
정사각형 탁자 - 완전성의 상징. 노래와 정사각형 탁자의 관계는 그에게 정신적 전체성에 도달하려면 우선 <감정>의 측면을 통합해야 한다는 것을 상징하는 것 같다.
처녀와의 입맞춤 - <마음속의 여성>과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된 것.
그 다음에 나타난 꿈은 꼽추처녀가 헨리의 내적 발달에서 맡고 있는 역할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잘 모르는 남자 학교에 있다. 수업시간에 나는 아무도 몰래 학교 건물로 숨어 들어간다. 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조그만 4각 옷장 뒤에 있는 방으로 숨어든다. 복도로 나가는 문은 반쯤 열려 있다. 발각될까 두렵다. 어른이 지나가지만 나를 보지는 못한다. 그런데 꼽추 처녀가 들어오더니 단번에 나를 찾아낸다. 꼽추처녀는 나를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
학교 - 자신의 내적 발달에 도움이 되는 무엇인가를 배워야 한다. 그런데 그는 지식에 대한 욕구를 만족시키면서도 사람의 눈에 띄지 않고 수동적으로 남아 있기를 바라는 듯하다.
꼽추처녀 - 아름다움을 감추기 위한 변장으로 헨리자신의 영혼의 상징일 수 있으며 유능한 안내자임을 암시. 따라서 헨리는 이 처녀를 <마법>에서 풀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신탁몽(神託夢)
"혼자서 남아메리카를 여행하는 도중 문득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산위에 있는 낯선 도시에서 나는 직관적으로, 도시에서 가장 높이 위치한 지역 한가운데에 철도역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그쪽으로 가려고 한다. 이미 늦은 건 아닐까 염려스럽기도 하다.
다행히도 나는 오른쪽으로 줄지어 선, 중세의 건물을 연상시키는 집들 밑을 지나치는 아치형 통로가 눈에 뛴다. 빼곡하게 들어선 집들은 일종의 벽을 이루고 있어서 그 통로가 아니었으면 건물들 뒤에 있을 철도역에 닿지 못 할 터이다.
눈앞의 전경은 그림처럼 아름답다. 밝은 색을 칠한 집 정면들이 보이고, 어두컴컴한 통로의 그림자에 가린 채 인도에 앉아 있는, 누더기를 걸친 네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통로 쪽으로 간다.
그때 갑자기, 덫 사냥꾼 같은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난다. 그 역시 기차시간에 맞추려고 서두르고 있는 것 같다. 우리가 가까이 가자 네 명의 중국인 문지기가 우리를 저지한다. 우리는 몸싸움을 벌인다.
중국인 한명의 긴 왼 발톱에 나는 그만 왼발을 다치고 만다. 바야흐로 신탁을 통해 그들이 우리에게 길을 열어 줄 것인가, 아니면 우리가 생명을 잃어야 하는가가 결정되는 위기의 순간을 맞는다.
먼저 내 차례가 된다. 중국인은 나의 동행을 묶어 어디론가 끌고 가고, 그 동안 남은 이들은 조그만 상아 막대기 다발로 신탁을 받는다. 네게 불리한 판정이 내려진다. 그러나 나는 다시 한 번 기회를 얻게 된다. 동행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끈에 묶여 끌려가고, 이제 내 동료가 내 자리를 대신한다. 그가 있는 자리에서 신탁으로 다시 한 번 내 운명을 가늠하는 것이다. 이번에는 좋은 괘가 나온 덕분에 나는 목숨을 건진다."
헨리가 이 무의식의 산물에 대해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을 보고 꿈의 작용을 그에게 직접 체험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고, 꿈에 대한 해석을 보류했다.
대신 헨리에게 유명한 중국의 신탁서인 [역경]을 읽고, (꿈에서 중국인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역을 따르라고 말해주었다. [역경]을 배우고 나서 몇 주 동안 헨리는 반신반의하면서도 나의 제안에 따라 동전을 던졌다. 우연의 일치<동시성적>로 동전에서 얻은 괘는 <몽>, 즉 <어려서 어리석다>라는 괘였던 것이다.
<어리석은 젊은이에게 가장 절망적인 것은 무의미한 공상에 빠지는 것이다. 그 같이 비현실적인 공상에 매달리면 매달릴수록 남은 것은 굴욕뿐일 터>라는 경구이다.
그 외에도 여러 측면에서 이 괘사는 헨리의 문제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듯 했다. 신탁의 괘사가 자기를 붙어 다니다는 것을 알고 다시 한 번 [역경]을 읽어 보려 했다. 꿈속에서 신탁을 두 번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몽>의 괘사는 명백히 답을 두 번 구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흘째 되는 날 두 번째 위대한 힘을 지닌 명쾌한 꿈 이미지가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헨리는 다시 [역경]을 무작위로 펼쳤는데 놀랍게도 <집착은 불인데, 이는 갑옷과 투구, 창과 무기를 뜻 한다>는 괘이다. 헨리는 그제야 신탁에 대한 두 번째의 의도적인 질문이 금지되어 있는 까닭을 이해했다.
즉 꿈에서 두 번째 질문을 통해 신탁을 받는 것은 덫 사냥꾼이었을 뿐, 그 자신의 자아는 신탁에 대한 두 번째 질문에서 배제되었던 것이었다. 요컨대 무작위로 [역경]을 펼치고 두 번째 질문에 대한 괘사를 얻은 것은 헨리의 반 무의식적 행동이었는데, 바로 이 행동을 통해 헨리는 꿈에 본 환상과 일치하는 상징을 보게 된 것이다. 헨리의 마음이 거기까지 흔들린 것으로 보아 나는 인격의 변용을 암시하는 그 꿈을 해석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등장인물 6인은 그의 정신적 특질의 화신으로 해석되어야 할 듯하다. 이 같은 꿈은 비교적 드물지만, 이런 꿈들을 일컬어 <인격 변용의 꿈>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남아메리카 - 헨리가 일자리를 얻고자 하는 계획이 실패한 나라, 그의 무의식 영역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한 폭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오랫동안 헨리가 동경하던 본연의 <그림자 나라>이다.
그러나 곧 그는 이 나라가 있을 만한 곳이 못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꿈속에서 그는 지하의 어둡고 모성적인 힘(남아메리카로 상징되는)에서 자기 어머니와 약혼녀가 있는 밝은 빛 쪽으로 돌아온다.
즉, 헨리는 문득 그들로부터 아득하게 떨어진 채 <낯선 도시>에 고립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런 의식 세계의 강화가 꿈에서 <보다 높은 곳>으로 상징된다.
꿈 속 도시는 산위에 있다. 그래서 헨리는 <그림자의 나라>에서 의식을 향해 <기어오르고>, 정상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찾으려> 한다.
산은 종종 변용과 변화를 위한 계시의 장으로 상징된다.
<산위의 도시>는 <영혼의 영역>을 나타내는데, 그 중앙에는 <자기>(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중심과 전체성)가 있다. 놀라운 것은 헨리의 꿈에서 <자기>의 위치가 사람이 모이는 왕래의 중심(철도역)으로 나타나는 점이다. 이것은 <자기>가 일반적으로 (꿈을 꾼 사람이 젊고 정신적 발달이 비교적 미숙할 경우) 개인의 경험적 의식 내에 있는 사물(종종 꿈꾸는 사람의 원대한 포부를 보상하는 평범한 사물)로 상징되기 때문일 것이다. 헨리는 그 역이 있는 곳이 정확하게 어디인지 알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가장 높은 지점에 있는 도심 중앙에 역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여기서 그는 무의식의 원조를 받는다.
헨리의 의식적인 마음은 엔지니어인 그의 직업과 동일시되어 있고, 그래서 그는 자기의 내면세계도 철도역처럼 합리적인 문명의 산물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를 바란다. 그러나 꿈은 이러한 그의 태도를 거부하고 전혀 다른 방향을 가르쳐 준다. 그 길은 <밑으로> 향하는, 어두운 통로로 이루어진 길이다.
아치모양의 통로는 문지방, 죽 위험이 도사리는 곳, 혹은 분리하는 동시에 통합하는 공간을 상징한다. 헨리는 자신이 기대하던 곳, 미개한 남아메리카를 유럽과 연결해 줄 철도역 대신 어두운 아치 밑에 선 자신을 발견한다. 중국인들은 <자기>에 이른 길을 가로막고 있는 헨리 자신의 무의식의 남성적인 측면을 상징한다.
헨리는 바로 이 중국인 때문에 길을 지날 수 없다. <자기>에 이르려면 헨리는 막혀 있는 이 길을 뚫어야 한다. 이 길을 뚫지 않으면 그는 여행을 계속할 수 없다. 곧 닥칠 위험을 눈치 채지 못한 헨리는 역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출입구를 향해 걸음을 재촉한다. 그러나 도중에 그는 <그림자>를 만난다.
소박하고 거친 덫 사냥꾼 모습으로 나타난 이<그림자>는 아직 빛을 보지 못한 헨리의 원시적인 면을 상징한다. 헨리의 내향적인 자아가 헨리 자신이 억압하고 있는 감정적, 비합리적 경향을 나타내는 외향적인과 결합되었음을 뜻할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림자 이미지가 의식의 자아를 제치고 먼저 앞쪽으로 나아간다. 여기서는 그림자는 무의식 특성의 작용과 자율성을 의인화한다. 따라서 이 그림자는 헨리 운명의 적절한 조종자가 되어 모든 일이 이 그림자를 통해 일어나게 한다.
꿈은 절정을 향해 진행된다. 헨리의 왼발은, 중국인 가운데 하나가 기르고 있는 왼쪽 발톱에 긁혀 상처를 입는다. 중국인들은 <황토의 대지>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이 흙내 나는 지하적인 요소야말로 그의 무의식 속 남성적 전체성은 의식적 지적 측면이 갖추지 못한 지하적 측면을 갖추고 있다. 누더기를 걸친 중국인을 인식했다는 것은 헨리가 자기가 맞서게 될 대상의 특질에 대한 한층 강화된 내적 자각을 획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헨리가 중국인들의 발톱에 그의 <왼발>이 할퀴었다는 것은 그가 (두려워하는 여성적, 무의식적인 측면의 관점 혹은 입장) 중국인에게 상처를 입는다. 그러나 이 <상처> 자체는 헨리에게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못한다. 인간으로 홀로서고, 한 사람의 구성원으로 무리에 끼려면 상징적인 죽음의 고통을 체험해야 한다. 인생에 대한 새로운 태도가 출현하기 위해서는 헨리의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엔지니어로서의 태도 또한 붕괴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엔지니어의 내부에서 <불합리한> 모든 것은 억압되기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불합리한 것들이 꿈 세계의 극적이고 역설적인 문법을 빌려 꿈으로 나타나는 법이다.
헨리의 경우에는 인간의 운명을 결정하는 불가사의한 중국의 <신탁게임>으로 등장한다. 말하자면 헨리의 합리적인 자아는 선택의 여지없이 자기 <지성의 희생>을 통해 무조건 항복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미개한 덫 사냥꾼이 자기를 대신해서 신탁을 받는 동안 헨리의 의식적이고 문명화한 자아는 묶여서 옆으로 밀려난다는 점이다.
자아가 고립된 채 감금당할 때 그림자로 인격화한 무의식의 내용이 해결책을 구하는 수도 있다.
이것은 꿈을 꾼 당사자가 무의식 내용을 인식하고 그 힘을 경험 할 때만 가능하다. 우리가 만일 이것을 의식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이것은 우리의 대단히 유용한 반려가 될 수 있다. 헨리도 자신의 그림자인 사냥꾼이 신탁게임에서 이겼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있게 된다.
불합리한 요소와의 만남
"내방에 홀로 있다. 기분 나쁜 풍뎅이가 구멍에서 까맣게 기어 나와 제도대위로 기어 올라온다. 나는 무슨 마술인가를 부려 풍뎅이를 다시 구멍 속으로 쫒아 버리려고 한다. 거의 다 쫓았는데, 네댓 마리가 남아 제도대에서 방 전체로 퍼진다. 그러나 더 이상은 쫓고 싶다는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별로 혐오감이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풍뎅이 집에 불을 지른다. 불길이 오르자 방으로 옮겨 붙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
검은색풍뎅이 - 악마적인 것을 상징 따라서 헨리는 본능적으로 마술을 사용해서 풍뎅이와 싸우려함.
<혼자> 자기 방에 있다 - 내향적이거나 음침한 상태가 되기 쉬운 상황.
네 마리 - 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에 두려움과 혐오감을 느끼지 않음.
불을 지른다 - 변용, 재생으로 이어지는 것을 상징한다.
헨리는 꽤 진취적인 것 같으나 활력을 효과적으로 적용하는 법은 터득하지 못한 것 같다. 그의 다른 꿈을 하나 더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이 꿈이 그의 문제를 보다 확실하게 보여 줄 것 같기 때문이다.
"한 노인이 숨을 거두려 하고 있다. 주의에는 친척들이 있다. 나도 그 중에 끼어 있다. 사람들이 차례로 그 커다란 방으로 몰려 들어가 분명한 어조로 자신들을 소개한다. 40명 정도가 모인다.
노인은 신음하면서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의 딸은 자기 아버지의 참회를 편하게 해 줄 생각에서, <제대로 살지 못했다>는 말이 문화적 구속 탓에 삶을 누리지 못했다는 것인지, 도덕적 구속 탓에 삶을 누리지 못했다는 것인지를 묻는다. 노인은 대답하려고 하지 않는다.
딸은 나를 옆에 있는 작은방으로 데려가 내게 트럼프 점으로 그 해답을 찾아보라고 말한다. 카드 패에서 <9>를 뽑아 그 색깔을 보면 해답을 알 수 있을 거라고 한다. <9>카드가 쉽게 나오리라고 생각하고 카드를 뽑는다. 그러나 한동안 각종 <킹>과 <퀸>만 나올 뿐이다. 나는 실망한다. 그 다음에는 트럼프게임과 무관한 종잇조각만 연달아 나온다. 결국 카드는 한 장도 남지 않았다. 남은 것은 봉투와 종잇조각뿐이다. 내 누나도 마침 함께 있다. 우리는 둘이서 카드를 찾아본다. 결국 교과서인지 노트인지, 좌우지간 그 아래서 카드 한 장을 발견하다. 바로 <스페이드9>이다. 카드는 나에게 한 가지 사실을 암시하는 듯하다. 즉. 노인이<자기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했던 것>은 도덕적인 구속 때문 이었던 것이다."
이 기묘한 꿈은 헨리에게 인생을 제대로 살지 못하면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를 보여 주면서 경고하고 있다. <노인>은 죽음에 처한 <지배원리>(그의 의식을 지배하는 원리가 분명하나 그 자신은 그 원리의 성질을 모르고 있다)를 상징한다.
40명 - 헨리의 심리적 총화를 의미. 노인이 빈사상태 - 헨리의 마음속의 남성적 인격이 최종적 변용 단계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
딸 - 중개역할을 맡은 여성적 원리, 즉 아니마의 화신이 그 대신 행동을 취해야한다.
본채와 떨어져 있는 방 - 그의 의식적인 태도와 상당히 거리가 있는 곳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고 있음을 암시한다.
<킹>과 <퀸> - 힘과 부에 대한 젊은이의 동경을 나타내는 보편적 이미지로 헨리의 내적 세계의 상징이 고갈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누나 -여성적인 측면의 도움을 얻는다.
교과서나 노트 - 헨리의 전공분야인 저 무미건조한 지적 공식을 나타낸다.
<9> - 3의 3배수, 즉 세배로 드높여진 삼위일체의 완전한 형이다.
스페이드와 카드 색 - 죽의 색깔, 생명이 없는 죽어버린 잎을 나타낸다. 스페이드라는 말은 칼, 창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스파다>에서 유래한다. 이런 유의 무기는 지성이 지니는 투철하고 예리한 기능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이로써 노인이 인생을 <제대로 못 산> 까닭이 명백해진다.
노인은 <도덕적> 구속 때문에 인생을 재미없게 산 것이다. 헨리의 경우 이 <도덕적 구속>은 인생에 자신을 던져 넣는 데 대한 두려움. 약혼녀와의 책임 있는 관계를 승인하면 어머니에게 불성실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데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즉, 꿈은 이러한 이미지를 통해. 재대로 살지 못한 인생은 죽음에 이르는 병과 다를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마지막 꿈
"우리 넷은 사이좋게 무리를 지어 다음과 같은 것을 경험한다."
저녁 - 우리는 길고 거친 목재 테이블에 앉아 세 개의 다른 술잔에서 술을 따라 마신다. 독주 잔으로는 투명하고 달콤한 황색 독주를, 포도주 잔으로는 진홍의 캄파라를, 그리고 전형적인 찻잔 모양의 커다란 잔으로는 차를 마신다. 우리 네 사람 외에도 조심스럽고 섬세한 소녀가 하나 더 있다. 소녀는 잔에 있던 독주를 차에 붓는다.
밤 - 성대한 주연에서 돌아온다. 넷 중 하나는 프랑스 공화국의 대통령이다, 우리는 그의 궁전에 있다. 궁전 발코니로 나간 우리는 눈 쌓인 도로에서 술에 취한 채 오줌을 누는 그를 발견하다. 그의 오줌 누기는 끝날 줄을 모른다. 그는 또 아이를 갈색 모피에 싸서 안고 있는 노처녀의 뒤를 보고는 아이의 소행이거니 여긴다. 노처녀는 서둘러 발길을 옮긴다.
아침 - 겨울태양으로 눈부신 길을 흑인이 걷고 있다. 아름다운 몸을 가진 그는 벌거벗고 있다. 그는 동쪽, 즉 베른(스위스의 수도)쪽을 향해 걷고 있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스위스 프랑스어 지구이다. 우리는 그를 방문하기로 결정한다.
정오 - 자동차로 적막한 설경 속을 오래 여행한 뒤 마을에 도착. 흑인이 투숙하고 있는 어두운 집으로 들어간다. 그가 얼어 죽지나 않았을까 걱정스럽다. 그러나 그만큼 피부색이 검은 그의 하인이 나타나 우리를 맞는다. 흑인도 하인도 벙어리이다. 우리는 등에 지고 온 배낭을 열고, 흑인에게 줄 선물이 없을까 하고 각자 가방을 뒤적거려 본다. 선물은 문명적인 것이어야 한다. 네 명 중 내가 가장 먼저 마음을 정하고는, 바닥에 있던 성냥을 집어, 경의를 표하면서 흑인에게 내민다. 선물 증정이 모두 끝난 후, 우리는 흑인과 유쾌하고 왁자지껄한 술자리를 함께 한다.
꿈을 구성하는 <4막>을 통해 남성성이 확대되어 가는 모양은 기하학 도형, 즉 만다라 기본구조의 하나를 상기 시키다. 태양의 궤도에 따라 의식의 정점으로의 상승을 통해 더욱 강조되고 있다.
<1막> 저녁 무렵
헨리의 4친구 - 마음속에서 개화하는 정신의 남성성을 상징하는 것 같다.
저녁 무렵 -무의식의 충동이나 이미지가 의식으로 넘쳐 나오기 좋은 시각이다.
소녀 - 네 명이 공유하는 아니마 상.
모양과 내용물의 색깔이 다른 3개의 잔 - 오목한 모양은 여성의 수용성을 상징하고 네 사람이 모두 잔을 사용하는 것은 네 명이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보여주며 모양과 내용물의 색깔이 다른 것은 대립되는 요소들이 고루 뒤섞여 있다. 이것을 마심으로써 다섯 사람은 하나가 된다. 즉 무의식적인 성찬을 통해 소통의 세계로 빠져들어 가는 것이다.
<2막> 밤
네 사람의 구분이 생긴다.
파리 - 스위스인 들에게는 파리는 관능과 제약 없는 환희와 사랑의 도시 상징.
공화국대통령 - 자아의 그림자 부분에 깃든 힘과 부의 상징.
오줌 누기 - 창조적인 생명력을 상징. 세례를 희화함.
<노처녀> - 성모마리아를 연상.
<아기> - 구세주를 연상.
갈색의 모피 - 대지의 색깔로 지하세계의 이미지.
황급히 떠남 - 세례의식에 의해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지만 떠나면서 꿈은 더 이상 보여주지 않는다.
<3막> 아침
하얀 눈과 검은 흑인의 대비 - 새로운 세계에서 각자의 방향을 잡아야한다. 그들이 있는 곳도 바뀐다. 파리로 향하던 길이 뜻밖에도 헨리의 약혼녀가 사는 스위스의 프랑스어 지구로 가는 길이 된다.
초기에 무의식적인 정신의 내용에 압도되어 변화를 겪었던 헨리가 이제야 마침내, 약혼녀가 살던 곳에서부터 자기가 가야 할 길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4막> 정오
의식이 가장 명료한 상태로 의식적으로 결단을 내릴 수 있는 힘이 생긴다.
겨울 - 감정의 따사로움이 모자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고 지적으로 매우 차갑다.
자동차여행 - 자기 발전에 대한 오랜 모색의 과정을 상징.
흑인과 하인이 벙어리 - 의사소통을 위해 신들에게 제물을 바쳐 흥미와 환심을 사는 것처럼 <지성의 희생>이 필요.
성냥 - 잘 저장된 불, 관리되고 있는 불, 언제든지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불꽃을 피울 수도 있고 끌 수도 있는 훌륭한 수단이다. 따뜻함과 사랑, 감정과 정열을 상징.
흑인에게 선사 - 헨리는 자기 의식적 자아내부의 고도로 발달된 문명의 산물과 흑인으로 상징되는 자신의 원시성 및 남성적 힘의 중심을 상징적으로 결합하면서 끊임없이 접촉해야 한다.
사이좋게 음식을 먹음 - 헨리의 남성적 전체성이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음. 이제 그의 자아는 안정을 되찾아 보다 큰 원형적 인격을 의식적으로 그리고 자유롭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헨리는 꿈속에서 벌어진 변화는 일상생활에서도 벌어졌다. 헨리는 자신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재빨리 마음의 결단을 내리고 결혼 문제에도 성실하게 접근했다. 정확하게 분석 시작 9개월 뒤 그는 서부 스위스의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다음날 부인을 대리고 캐나다로 떠났다. 마지막 몇 개의 꿈을 꿀 즈음 캐나다의 어느 회사에 취직한 것이다. 그이후로 그는 대회사의 관리 직원으로, 한집안의 어른으로 활동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살고 있다.
결론
과학과 무의식
융 박사는 1부에서, 원형적인 관념에서 가설은 단순한 도구, 새로운 발견을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개념은 무의식의 발견을 통해 열린 새로운 현실 영역의 탐색에 필요한 연장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정신 현상 중에 어떤 것이 의식적인지 무의식적인지, 그리고 <실질적인>외부 현상이 의식적으로 지각되는지 무의식적으로 지각되는지 끊임없이 의심해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무의식의 강력한 힘은 임상적 소재 뿐 만 아니라 신화나 종교나 예술, 그리고 인간이 스스로를 표현하는 그 밖의 문화적 영역에 확실히 나타난다. 만일 인간이 정동적․정신적 양식(융의 미른바<원형>)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면, 인간 전체의 활동 분야에서 그 행동양식의 산물이 발견되는 것도 당연하다. 인간의 문화적 활동 영역을 통해 가장 확연히, 혹은 즉각적으로 확인된다.
융 박사의 개념은 자연과학의 분야에서도 사물에 대한 새로운 견해의 지평을 넓힌다. 물리학자 파울리는 생명의 진화개념은 새로운 발견을 통해 수정되어야한다고 지적한다. 즉, 무의식적인 마음과 생물학적 과정의 상호 작용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한 것이다. 의미 있는 적응이나 돌연변이가 우발적인 돌연변이에 필요한 시간보다 더 짧은 기간에 일어날 수 있는 까닭을 설명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는 원형이 작용할 경우 의미 있는 <우연의 일치>가 생기는 예를 적지 않게 알고 있다. 그 중에 가장 유명한 예가 다윈과 종의 기원에 관한 이론이다. 말레이의 몰루카 제도에 있던 윌리스는 자연과학자로서의 다윈을 알고 있었지만, 다윈이 몰두하고 있던 이론적인 작업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이 두사람 다 나름의 직관적인 번득임을 통해 가설에 이르고 그 가설을 이론화했던 것이다.
결국 원형은 이른바 <연속적인 창조>의 동인이 되었던 것이다. 융 박사의 이른바 <동시성적 사건>도 사실은 <시간상에서 이루어지는 창조행위>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동물도 극심한 압박을 받거나 긴박한 욕구를 느끼면 외부의 물질 구조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데 융 박사의 동시성 이론은 어쩌면 그 까닭을 설명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미래에 가장 유망한 연구 영역은 미시물리학분야 쪽으로 열릴 듯하다. 미시 물리학과 심리학의 두 학문과의 상호관계를 확실하게 보여주는 측면은, 물리학의 많은 기본개념(공간, 시간, 물질, 에너지, 연속체 혹은 장, 소립자 개념 등)이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직관적, 반신화적, 원형적인 개념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17세기 데카르트는, 인과율의 절대적 가치는 <신은 자기 결단과 행동을 바꾸지 않는다>는 사실로 생각했다. 독일의 천문학자 케플러도 <삼위일체>라는 관념에 비추어 공간은 3차원보다 복잡한 것도, 단순한 것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원형적인 개념이 반드시<객관적>인 사실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객관적인 성질을 탐구하거나 발견하는 대신 물리학자 하이젠베르크의 말마따나 <인간은 자기 자신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볼프강 파울리 등의 과학자들은 과학적 개념의 영역에서 원형적 상징체계의 역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파울리는 우리의 외적 객체에 대한 연구와 과학적 개념의 내적 기원에 관한 심리학적 연구는 병행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과학자는 이제 외적인 대상의 그 어떤 측면이나 성질에 대해서도 완벽하게 <객관적>으로 기술 할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현대의 많은 물리학자들은 미시 물리학 실험에서 관찰자의 의식적 관념이 맡는 역할은 제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관찰자가 실험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의 정도를 측정할 수 없고 제거할 수는 더더욱 없다는 것이다. 미시물리학자는 <통계적 확률에 따르면 이러저러한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을 뿐인 것이다. 이것은 과학자는 이제 외적인 대상의 그 어떤 측면이나 성질에 대해서도 완벽하게 <객관적>으로는 기술할 수 없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보어의 상보성개념은 융 학파 심리학자들의 관심을 끈다. 그 까닭은 융 박사 자신이 의식적인 마음과 무의식적인 마음의 관계를 상호 대립하는 상보적인 한 켤레의 마음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무의식이라고 하는 것은(미시물리학의 소립자처럼) 역설적 개념에 의해서만 묘사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무의식 <자체>의 본질을 알 수 없는 것은, 물질에서 소립자 <자체>의 본질을 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심리학과 미시 물리학의 유사점은 한 단계 더 확대될 수 있다. 융 박사가 <원형>(혹은 인간의 감정적 정신적 행동패턴) 이라고 부른 것은, 결국 파울리가 말한 정신반응의 <일차적 기능성>과 마찬가지이다. 무의식이라는 정신적 영역 속에서 나타나는 심리적 내용도 하나의 질서를 따른다. 18세기 독일 수학자 가우스는 무의식의 이 같은 질서의 경험에 관한 한 가지 흥미로운 예를 발견하되 <피를 말리는 노력>을 통해 발견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발견했다고 한 바 있다. 그는 수수께끼는 번개가 번뜩하는 순간에 해결되었다. 프랑스의 과학자 푸앵카레는 이 현상을 보다 명료하게 제시했다. 그는 잠 오지 않는 밤. 마음의 내부에서 수학적 표상이 서로 합치되고, 그 중 몇 가지가 <안정된 관계>를 이루는 것을 봤다고 썼다.
융 박사는 자신이 무의식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기물 구조와 어떤 관계가 있다고 확신했다. 순수하게 심리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물질적이기도 한 측면을 보인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동시성적 현상이란 결국 내적 심리적 사실과 외적 사실의 의미 있는 배열에 다름 아니므로) 이 같은 일원론적 견해를 가능하게 했다.
수학자 역시 우리가 미처 깨닫기도 전에 우리의 심리적 표상은 이미 배열되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무의식은 연상과 연합이 가능할 뿐만 아니라 <판단>도 가능하다. 이 무의식의 판단은 직관적인 것이지만 적당한 환경 아래서는 대단히 정확하다는 것이다.
심리학적 측면에서 보면 자연수는 원형적 표상임에 분명하다. 그 까닭은 자연수 앞에서는 일정한 형태의 연상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가령 의식적으로 그에 대해 생각을 안 해 본 사람이라도 <2>가 소수 중 유일한 짝수라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수는 계산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다른 원형상징과 마찬가지로 무의식의 자연 발생적․자율적 산물인 것이다.
<창조적 관념>이라는 것은 마치 열쇠 같아서 지금까지 해명이 불가능하던 많은 사상의 관계를 밝혀주고, 사람을 생명의 신비 속으로 파고들어 갈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참으로 가치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융 박사의 사고가 과학의(그리고 일상생활) 많은 분야에서 새로운 것을 발견하거나 해석하는 데 필요할 것이라고 확신하는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보다 형평하게, 보다 도덕적으로, 보다 넓게 보게 하는데도 이바지할 것으로 믿는다.
'인문철학 > 심리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쟈크 라캉의 주체 개념 (0) | 2020.03.09 |
---|---|
정신역동과 인지행동치료 (0) | 2020.03.09 |
인간과 상징 : 제3부 개성화 과정. 칼 구스타브 융 (0) | 2020.03.07 |
인간과 상징 : 제2부 고대신화와 현대인 . 칼 구스타브 융 (0) | 2020.03.06 |
인간과 상징 : 제1부 무의식에 대한 접근 : 칼 구스타브 융 (0) | 2020.03.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