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적 자아 인식(Ⅱ)
인문학 강의 _ 격동의 시대와 자아의 인식
도덕적 추론과 변증술
소크라테스가 진리에 가까이 가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오늘날 널리 알려진 ‘논증’의 한 방식인데, 그것은 대화를 통한 ‘문답법’ 형식을 취한다. 초기에는 ‘논박술(elenchus)’이라고 불렀으며 후에 ‘변증술(dialectike)’로 발전했다. 문답법은 어떤 사람이 어떤 주제에 관해 제시한 주장을 검토하는 과정이다.
이 주장에 대해 그 의미를 명확하게 하고 진위를 확정짓기 위해 계속 질문이 던져진다. 이 질문에 대답하다 보면 흔히 자기모순에 이르게 되는데 이런 이유로 그것은 일종의 ‘반박술’ 성격을 띠게 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대답자가 아니라 질문자가 대화를 주도한다는 사실이며 서로 동의함으로써 새로운 사실을 인식하고 동시에 영혼을 고양시킨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영혼을 정화하는 방법은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환상의 차이를 잘 이해하고 삶의 실상에 대한 지식에 근거해 자신의 신념과 사상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런 지식을 획득하고 자신의 영혼을 잘 다스리는 사람은 참다운 도덕적 가치에 따라 행동하게 될 것이다. 그는 참다운 지식을 획득하는 방법으로 언어의 의미를 분석하고 그것을 명료화하는 일에 착안했다.
소크라테스에게 변증술은 대화의 기술이자 동시에 바람직한 삶의 방식이기도 했기에, 그는 겸허하고 포용력 있게 선한 삶을 위한 조건들을 이해하고 거기에 순응하는 올바른 방식에 대한 끊임없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가 비록 실제 학문적 추종자라는 의미의 ‘제자들’을 거느린 적은 없었지만 적어도 플라톤의 철학적 삶을 위한 지표가 됐고, 또한 어떤 저술도 남기지 않았지만 그의 사상은 플라톤을 비롯한 여러 사상가들에 의해 계승되고 체계화됐다.
소크라테스의 변증술이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서 ‘지행합일설’로 가장 실감나게 표현된 것은 bc 399년 그의 나이 70세로 기소돼 독배를 마시는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다.
철학적 순교자로서의 지식인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시고 ‘철학적 순교’의 제물이 됐지만 그는 그 누구보다도 모순과 역설로 가득 찬 인물로 늘 다시 태어난다. 그는 국가의 공동체적 가치관과 신념에 도전하면서도 누구보다도 시민으로서 국가에 헌신했으며, 철학을 포기하라는 국법의 명령에 맞서면서도 법치를 존중하고 실정법을 옹호함으로써 회피할 수도 있었던 처형 집행을 받아들였다.
한 평생 질문을 던졌을 뿐 남을 가르친 적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바로 그런 가르침 때문에 기소됐고, 말재주가 없다고 고백했으나 뛰어난 연설로 더욱 유명했고, 글쓰기를 거부했지만 그의 언행이 후세에 광범위한 기록으로 남게 되었고, 소피스트가 아니라고 부르짖었지만 바로 그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도덕 철학을 창시해 신에게서 부여받은 사명을 수행한다고 주장했지만 청년들을 타락시켰다는 이유로, 그리고 불경죄 혐의로 기소됐다.
이런 인물을 재판하기는 오늘날에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당시 아테네도 단순히 부정과 부패, 불의와 타락으로 가득찬 무지와 불모의 땅이 아니었다. 아테네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이 전통 질서를 파괴한다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표현의 자유를 소중히 여겼으며 민주제를 정착시켰고, 가장 비판적인 인물들에 대해서도 관용을 베풀었다. 무엇보다 소크라테스 같은 피고인들이 국익을 대변하는 500명 시민들로 구성된 배심원단 앞에서 자기주장을 내세우고 자신의 사명을 설파할 수 있는 사법체계를 확립했다.
판결 결과가 비록 유죄로 나오기는 했지만 그 내용이 280대 220이었다는 것은 아테네인들이 얼마나 성숙한 시민들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더구나 소크라테스의 태도에서 지나치게 도발적이고 사변적이며 완고할 뿐만 아니라 오만한 측면이 있었다고 생각하면 평범한 아테네 시민들에게 그 이상의 결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에 대해 콜라이아코(j.a. colaiaco)는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와 법정에 대해 변명하고 화해를 시도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철학적 사명을 분명히 밝히는 과정에서 오히려 아테네인들을 법정에 세웠다”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까지 극단적인 태도를 취한 이유는 무엇일까?
콘포드(f. conford)가 『소크라테스 이전과 이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역시 소크라테스는 ‘영혼(psyche)’이란 개념을 인간의 사고체계에 전면적으로 부각시킴으로써 그 이전과 이후의 도덕적 사고에 굵은 선을 그었으며, 인간의 삶을 외면적 출세와 영달이 아니라 내면적 양심과 존엄성에 근거해서 정립할 것을 가르친 최초의 철학자였다. 이 경우 그의 구원은 예수와 달리 내세에서가 아니라 현세에 있었고, 불멸성을 의미하지만 그것이 어떤 형태로 나타날 것인지 석가처럼 심화할 수도 없었으며, 공자처럼 구체화할 수도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그저 자신의 무지 때문에 그런 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갖고 있지 못하다고 고백할 뿐이었다.
그는 내면의 진정한 자아를 발전시키기 위해 영혼을 돌봐야 한다고 믿고 모든 타협을 배제했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아테네인들을 설득시키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분노만을 자극한 것이었다. 더구나 당시는 아테네가 스파르타에게 궤멸되다시피 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난 직후여서 개인들이 각자 자유롭게 양심의 명령만을 따르면 국가 존립 자체가 위협받는 시기였다. 결국 소크라테스와 아테네의 대결은 비극적인 국면으로 접어들 수밖에 없었다.
포퍼(k. popper)는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자기비판을 할 수 있도록 시민들을 교육하는 것이 도시국가의 정치를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가르침은 소크라테스의 아테네에서뿐만 아니라 오늘날 어느 사회에서도 쉽게 수용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럼 소크라테스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이미 언급한 대로 『변명』에서 찾을 수 있다.
"아테네 시민들이여. 나는 여러분을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그러나 나는 신에게 먼저 복종할 것입니다. 내게 생명과 힘이 있는 한 철학을 실천하고 가르치는 일을 결코 중단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아테네 시민을 경멸하거나 정치제도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여러 곳에서 아테네인의 위대함과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치제도에 대해 찬양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철학적 이상과는 여전히 거리가 멀다. 그리고 아테네는 철학의 실천을 허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아테네 민주정치와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이상은 공존과 모두의 승리를 위해서 그가 죽음을 택하는 길밖에 없다. 그에게는 그 선택만이 곧 신의 명령에 복종하는 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동시에 우리가 소크라테스와 아테네의 비극적 대결에서 얻은 결론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는 신을 존중하고 준법정신이 강했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여기서 평등사상과 인간존중 개념이 부각되는데, 이런 사상은 당시 관습과 율법에 어긋나며 격동의 시대에 파격적이고 파괴적인 요소로 해석될 수도 있다. 또한, 소크라테스는 “영원하고 불변하며 절대적인 진리는 존재하지만 인간에게 그것을 파악하거나 획득할 능력은 없다”고 말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대화’를 통해서만 그쪽 방향으로 접근할 수 있을 뿐임을 강조한다.
이런 태도는 격동의 시대에 흔히 나타날 수 있는 상대주의적 회의론과 신비주의적 독단론을 동시에 극복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둔다. 더불어 소크라테스는 ‘대화’는 이성에 호소해야 하고 자아의 확립을 전제로 하며 개선된 삶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므로 그것은 합리성, 자율성 및 도덕성 실현을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는 민주사회의 바람직한 시민으로서의 덕목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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