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적 상황과 정체성(Ⅰ)
인문학 강의 _ 격동의 시대와 자아의 인식
한국적 상황과 정체성을 이해하려면 역사를 근거로 하는 수직적 측면, 시대적 상황을 근거로 하는 수평적 측면 두 가지를 모두 적용하는 입체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한국은 분단된 상황에서도 선진국으로 약진했다는 평을 받지만 이는 국가 발전론적 차원에서, 지속적이고 구조적인 것인지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경제적으로는 가난한 사람이 적어야, 정치적으로는 정의 사회가 구현돼야, 문화적으로는 국민들의 정신적·도덕적 수준이 높아야 발전된 국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은 이 모든 조건에 도달하지 못했다. 국가적 차원에서 정체성의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한국 정부의 탄생은 태동기부터 순탄하지는 않았고, 60년 이상 통일을 외치고 있는 실정이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인 한국에서는 이념적 갈등이 국가 정체성의 문제와 직결된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반세기 동안 산업화와 민주화에 있어 급성장했다는 것은 괄목할 만한 현상이다. 하지만 무조건 빨리 달린 탓에 경제적 발전은 분배와 복지 차원에서 문제를 가져왔고, 물질 중심적인 가치 추구 현상이 주입돼 정신문화가 극도로 피폐해져 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 소크라테스의 자아 인식, 즉 비판적 합리성은 한국적 상황에 시급하게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민족 사상과 비판적 종합
우리 민족 문화는 수많은 이질적 문화를 접하면서 끊임없이 변신을 거듭해 왔지만, 한반도라는 문화의 해변에 일정한 형태의 문양을 남겼는데 이것을 ‘비판적 종합(critical synthesis)’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비판적 종합은 우리 민족의 기질과 천성을 기준으로 유불선 등 외래 사상을 능동적으로 수용하며 창의적으로 수정하고 보완함으로써 변증법적 종합의 형태를 이룩했다. 이것이 함축하는 의미를 요약하면
첫째, 비판적 종합으로서의 한국 사상은 대체로 단군신화가 지닌 세 가지 요소, 즉 현세 중심적이고 인본주의적이며 융화 지향적인 특성을 보여 주고 있다.
둘째, 그러한 특성은 역사의 전개에 따라 사상사적 배경과 시대정신을 창출하고 주도한 사상가들의 기질, 역량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지만 유불선의 사상을 수용하고 발전시킴에 있어서 주요 사조들의 공통적 요소로 나타난다.
셋째, 그러나 주요 사상가들에 의해 전통적으로 시도된 비판적 종합은 그 심도와 수준에 있어서 다소 미흡한 경향이 있다.
넷째, 이 분석이 옳다면 현대 한국 사상계의 과제는 비판의 심도를 강화하고 그 종합의 수준을 한층 높이는 것이다.
다섯째, 현대에는 전통적 고유 사상에 대한 현대적 이해뿐만 아니라 다양한 현대 사조에 대한 체계적 검토와 주체적 수용의 중요성이 더욱 심각하게 부각된다.
전통사상에 나타난 융화정신
이종후와 윤명로는 전통사상에 나타난 융화정신이 나타나는 방식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한국사상사 연구』 162~163p)
우선 자기가 신봉하는 어떤 사상을 바탕으로 다른 사상들을 하나로 융합시키려 하거나, 여러 사상들 사이의 경계를 넘나들며 이들을 융화시키려 하는 혼합적 사유방식(syncretism)이 있다. 신라, 고려, 이조 각 시대마다 이 방법을 자각적으로 수행해 유불선 3교의 융합, 유·불, 양대 사상 간의 융화를 도모한 사상가가 배출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신라 말 유학자 최치원이다.
절대적인 진리의 입장에서 자비롭게 모든 입장들을 부정도 하고 긍정도 하며 그것들로 하여금 서로, 융화, 회통시키고자 하는 ‘변증법적 사유방식’도 있다. 이는 대승불교 특유의 진리탐구 방법이며, 전형적인 예는 원효의 화쟁 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화적 사유방식’은 서로 사상적 입장을 달리하는 탐구자들이 대화하며 서로 상대편의 사상을 이해하고 비판하며, 그리고 상대편의 비판을 받아들여 자기 성취와 자기비판의 계기로 삼는다. 가령 김시습은 유교와 불교를 넘나들면서 유학자로서의 자기와 선사로서의 자기 사이에 끊임없는 대화를 지속시켰다.
이렇게 융화 사상은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나지만, 서로 배타적인 관계도 아니고 반드시 세 가지에 국한시킬 필요도 없을 것이다.
민족 현실과 민족적 자아
현대 사회를 간단하게 규정하자면 자본주의적 상업주의, 개인주의적 자유주의, 그리고 기술주의적 과학주의 정도로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가치의 상대주의와 사회구조의 다원화, 효용성 위주의 사고방식, 무분별한 관능적 쾌락의 추구 등으로 이어졌다. 그래서 현대인은 과학기술적 접근 방법에 몰두하고 실용성을 강조하는 등 사물의 본질과 현상의 구조를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파악하게 됐다. 이는 인간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만들어 버렸고, 현대인은 자기 정체성의 위기를 맞이하게 됐다.
현대인이 당면한 정체성의 위기(identity crisis). 우리는 바람직한 인간관을 창출하고 가치관을 다시 정립함으로써 정체성을 회복해야 하는데, 현대의 문명적 위기는 주로 전통적 인간관이 무너지고 새로운 가치관이 정립돼 있지 않은 과도기적 상태에서 생긴 문제다.
하지만 무엇보다 우리의 현실은 ‘분단의 구조’라는 역사적 상황과의 연관 속에서 분석되고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3·1운동 이후 본격적 문화 정책이 시도되면서 사상의 과도기적 공백 상태에 돌입했고, 외세의 영향력에 의한 해방과 동시에 분단이 이뤄졌다. 자연히 공산주의적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적 자유주의라는 이질적 이데올로기로 분단이 심화됐다.
문화적으로는 분단 이래 서구의 문물이 쏟아져 들어와 식민지 시대에 조장된 정신적 공백과 분단구조가 조장한 상태를 가득 채우고 있다. 교육 또한 도구적 가치 중심으로 상업화돼가고, 종교마저 자의식을 마비시켜 가치의 전도와 무질서를 바로잡기가 매우 어려운 지경에 도달했다.
우리의 정체성 문제가 본질적으로 이 분단 구조 탓이라면, 그 회복은 당연히 이 구조를 극복함으로써 이뤄져야 할 것이다. 그것은 피히테(j. g. fichte)가 독일 국민에게 고했듯이 ‘민족적 자아’를 새롭게 형성하고 그것을 분명히 확인함으로써 시작해야 된다고 믿는다.
‘민족적 자아’를 확인하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묻는 일이다. 우리가 누구인가를 확인한다는 것은 우선 오랜 역사를 공유하며 동고동락했다는 사실을 통해 일체감과 동질성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또 우리가 지금 단 하나의 민족으로 동질성을 유지하며 생존해 있다는 것은 강력한 의지와 능력의 소산이며, 이는 고귀하고 소중하기 때문에 자긍심의 근거로 작용할 수 있다.
나의 행복이 곧 민족의 행복이요, 민족의 행복을 위해서 우리가 모두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한국인으로서의 우리가 누구인지를 확인함으로써 그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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