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적 자아 인식(Ⅰ)
인문학 강의 _ 격동의 시대와 자아의 인식
[독서신문]
잘 알려져 있는 바와 같이 소크라테스(socrates)는 석가, 예수, 공자와 함께 4대 성인 혹은 현자 중 한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들은 서로 다른 시대, 다른 지역에서 태어나 전혀 다른 문화 배경 속에서 활동했음에도 역사와 문화 차이를 뛰어넘는 위대한 교훈을 남겼다는 점에서, 그리고 한결같이 ‘격동의 시대’를 살았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활동하던 상황과 현격한 차이가 있는 현대에도 여전히 이 성현들의 가르침이 우리 심금을 울리고,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더욱 절박하게 요청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어떤 면에서 보면 인간이 전혀 ‘진화’ 혹은 ‘진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을까.
본고에서는 이 현자들 중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조명하고 거기서 현대인, 특히 한국인에게 필요한 덕목이 무엇인지 집중 조명하고자 한다.
특별히 소크라테스를 선택한 이유는 첫째, 소크라테스는 다른 현자들 못지않게 중요한 교훈과 지혜를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그 내용이 익숙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잘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과 둘째, 소크라테스는 다른 현자들과 달리 이른바 구체적인 ‘진리’를 설파한 적이 없고 특별한 제자들을 거느린 적도 없기 때문에 독자적인 종파를 만들거나 배타적인 파벌을 조성하지 않았다는 점 셋째, 소크라테스는 분단구조와 갑작스런 문명적 전환 및 이에 따른 가치관 혼란 등 오늘날 우리 현실과 구조적으로 매우 유사한 고대 아테네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그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자아의 인식’ 이라고 할 수 있는데, “너 자신을 알라”고 한 소크라테스의 말은 스스로 진리에 가까워지도록 노력하라는 의미였고, 우리에게 가장 절실한 덕목인 자율성과 합리성, 도덕성 함양을 강조한 것이다.
자아인식 표류하는 현대 한국사회
오늘날 우리가 처해 있는 입장과 고대 아테네의 역사적 상황 사이에 비슷한 점이 많다고 생각하는 첫 번째 근거는 남북한이 대치하고 있는 우리의 분단현실과 스파르타와 대결 구도에 있었던 아테네의 상황이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아테네와 남한은 경제적으로 급성장해 상업주의가 정착하고 이에 따른 개인주의적 민주화 과정이 급속하게 진전됐다는 것인데, 결국 정치적 민주화는 경제적 상업화의 필연적 결과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상업주의가 팽배해 있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정의실현이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저마다 걷잡을 수 없는 욕구가 분출하고 이해가 충돌해 투쟁과 분규가 끊이지 않으며, 허술한 통치체제를 틈탄 각종 부정부패, 퇴폐향락 등의 현상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것이 아테네와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세 번째 유사점이라고 할 수 있다.
종합해 보면 고대 아테네와 현대 한국은 분단 대결구조 및 퇴폐향락을 조장하는 상업주의 그리고 민주화와 정의, 자유라는 미명하에 혼란만 가중시키는 정치풍토 속에서 사람들은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모른 채 표류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gnothi seauton)’는 외침은 진정한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의식을 일깨우고 자율적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해 우선 자기의 무지를 자각한 다음 자기 위상을 정확하게 파악하라는 가르침이었다. 그러나 아테네 시민들은 그 가르침을 귀담아 듣지도 않았고, 오히려 인류가 낳은 최대의 현자 한 명을 민주파 정권 아래서 민중의 이름으로 처형했다. 스스로 안타깝게 찾아 헤매던 신을 모독했다는 것과 혼신의 정열을 기울여 한평생 열심히 가르쳤던 청년들을 그가 현혹시켰다는 것이 죄목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변명’의 기회를 준 법정에서 다음과 같이 울부짖었다.
"친애하는 아테네 시민 여러분! 나는 여러분을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나는 숨을 쉬고 힘이 남아 있는 한 진리를 추구하고 여러분들을 경고하고 계몽하며,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내가 지금까지 해온 바와 같이 양심적으로 말하기를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가장 친애하는 벗들이여, 가장 위대하고 정신적인 도야로 뛰어난 도시의 시민인 당신들은 돈지갑을 가능한 많이 채움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도덕적인 판단과 진리, 그리고 영혼의 개선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고 또 노력도 하지 않습니다."
부정과 불의로 가득 찬 사회가 마지막 남은 의인마저 제거해 버렸을 때 외부 침략자들은 비로소 회심의 미소를 짓기 마련이다. 결국 아테네는 소크라테스의 최후와 운명을 같이 했다.
이처럼 고대 아테네와 우리 사회가 지니고 있는 구조적 유사성을 부정할 수 없고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절규가 놀라울 정도로 우리의 심금을 울리고 있다고 한다면 특히 이 땅의 지식인들은 그의 가르침을 구태의연한 소리로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이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은 무슨 뜻이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크세노폰은 그의 『소크라테스의 추억』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자기를 아는 사람은 무엇이 적합한지 스스로 알며,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분별하며, 또한 어떻게 할 것인지 아는 바를 해냄으로써 필요한 것을 얻고, 그리고는 모르는 것을 삼감으로써 비난받지 않고 살아가며 또 불운을 피하게 된다네."
이와 같이 윤리적 자아는 나의 욕구와 능력과 의무라는 세 변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삼각형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삼각형의 모습과 크기를 파악하는 것이 곧 윤리적 자아의 인식이라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모습은 우리가 역경에 처했을 때 더욱 분명히 드러난다. 즉, 자기가 원하는 것이 이뤄지지 않았을 때 무엇을 원했었는지 분명해지며, 또한 그것이 자기 능력 부족 때문인지 혹은 자기가 처한 입장에서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등이 비로소 확실해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런 사실을 깨닫는 것이 윤리적 자아 인식에 어떤 역할을 하며 또, 실제로 우리에게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인가.
윤리적 자아의 인식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 제기함으로써 그 출발점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자아를 완전히 인식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성취의 주인공이 바로 자신이기 위해서 자기가 누구인지 분명히 알고, 나를 차분히 가다듬지 않으면 안 된다. 불굴의 신념과 자아 인식 확립을 위해 ‘회의’의 과도기적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고대 아테네의 지적 풍토와 비슷하게 신비주의적 독단과 회의주의적 도피 사이에서 현대인들이 방황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 만큼 무엇보다 무지의 자각을 외치는 소크라테스의 합리적 통찰의 가르침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와 같이 무지의 자각과 동시에 진정한 의미의 ‘윤리적 자아’ 인식이 선행돼야 한다는 것이 소크라테스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첫 번째 ‘길’인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 것이 ‘자신을 아는 것’인지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는 각자가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대화를 통해서 애썼을 뿐이다.
문학 비평가 바흐친(m. bakhtin)이 지적하듯이 소크라테스는 ‘대화’를 통해 인간의 조건을 극복할 수 있으며 초월적인 영역으로 진입할 수도 있음을 보여줬다. 또한 이 방식을 통해서만 인간은 모든 형태의 권위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도 보여줬다. 소크라테스는 『테아이테토스』에서 철학을 “영혼이 영혼 자신과 나누는 대화”라고 규정한 바 있는데, 우리는 그것을 “내가 나 자신과 나누는 대화”라고 이해 할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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