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일반

현대 상담이론 및 심리치료적 접근의 철학적 배경

rainbow3 2020. 3. 9. 18:01



현대 상담이론 및 심리치료적 접근의 철학적 배경*

 

노 성 숙(한국상담대학원대학교)

 

 

【주제분류】상담철학, 철학실천
【주 요 어】프로이트의 무의식, 쇼펜하우어의 의지, 인지치료, 소크라테스적 대화, 실존주의 실리치료, 인간중심치료, 하이데거의 인간관과 세계관


【요 약 문】현대사회는 상담에 대한 요구가 급증함에 따라 상담학이 새로이 정립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논문은 “상담철학”의 새로운 과제에 초석을 다지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상담에 전제가 되는 인간관과 세계관을 논의한다.


우선적으로 2장에서는 정신분석에서 다루어지는 무의식, 본능과 쇼펜하우어 사상에서의 의지의 연관성을 밝혀본다.

3장에서는 상담의 인지적 접근, 즉 벡의 인지치료와 엘리스의 합리정서행동치료의 근원적 배경이 되는 소크라테스의 대화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나아가 4장에서는 상담의 실존주의적 접근이 태동하게 된 문제의식을 밝혀보고 난 뒤, 하이데거의 인간관과 세계관에 주목하면서 실존주의 심리치료와 인간중심치료의 근간이 되는 실존주의 사상을 고찰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본 논문은 오늘날의 상담 및 심리치료의 근본전제가 되는 인간관과 세계관을 탐색함으로써 내담자과 상담자 모두에게 필요한 철학적 자양분을 제공할 것이며, 나아가 학제적인 관심과 더불어 오늘날 철학의 새로운 쓰임을 위한 발판을 마련할 것이다

 

* 이 논문은 2012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 (NRF-2012S1A5A8024476)

 

 

1. 들어가는 말

 

오늘날 상담 및 심리치료에 대한 급증하는 수요는 현대인들의 삶이 고단함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인간은 누구나 단절로부터 벗어나 타인들과 소통하고 또한 온전한 자기로서 이해받고 싶은 욕구를 지닌다.
인터넷과 SNS 등의 현대식 도구와 장치들은 이러한 욕구를 해소하는 데에 크게 기여했으며, 각 개인의 편리한 소통을 전지구적으로 가능케 했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네트워킹의 가능성은 공간을 쉽게 넘나들면서 소통할 수 있도록 했을 뿐 아니라 언제든지 접속가능한 속도감을 가속화시킴으로써 새로운 교제 가능성을 낳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또 다른 측면에서 인간의 유한성, 즉 시공간적인 제약성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는 면대면의 만남은 축소되고 있는 경향을 보이며, 각자 고립된 채 외로움을 느끼는 현상이 더욱 커지고 있다. 따라서 더 이상 병리적인 정신질환의 차원만이 아니라 현대적 삶의 방식이 자아내는 일상적인 고립감을 벗어나 온전한 존재로서의 자신을 이해받고자 하는 심리치료나 상담에 대한 욕구들도 더욱 많아지고 있다.
이와 같이 현대적인 삶의 방식이라는 맥락에서 볼 때, 현대인들은 상담을 통하여 우선적으로 자신이 겪고 있는 고립감으로부터 벗어나거나 당면한 고통으로부터 위로받고자 하며, 나아가 자신이 직면하고 있는 문제의 성격을 이해하고 또한 제대로 이해받고자 한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상담자로서 혹은 내담자로서 ‘상담’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며, ‘상담’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이고, 또한 ‘상담’에 대해 근본적으로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매우 근원적이지만, 이미 오랫동안 상담이 이루어졌을지라도 상담자나 내담자에게 한 번도 제기되지 않기도 한다.

왜냐하면 상담자나 내담자가 상담에 임할 때에 이미 전제로 하고 있다고 믿어지기 때문이다. 최근 상담에 임하는 근본적인 태도 및 상담자의 가치관 등 상담의 윤리적 차원에 대해서는 상담학계 안에서 새로운 논의들이 많이 생겨나고 있다. 그러나 ‘상담활동’의 근본적인 토대나 ‘상담학’의 성립가능성에 대한 철학적 논의들은 거의 전무한 상황이다.

 

상담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나 상담에 기반이 되는 인간관과 세계관은 이미 상담을 넘어서는 철학적인 성찰을 필요로 하며, 상담철학(philosophy of counseling)이라는 분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1)

‘상담철학’은 상담에 대한 철학이자 상담을 위한 철학적 성찰이다.2)

상담학은 ‘상담’에 대한 제반현상을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는 반면에, “상담철학”은 ‘상담학’의 학문적 가능성에 대한 질문과 함께 ‘상담학’이 전제로 하고 있는 ‘상담 그 자체’를 규정하는 근원적인 특성, 상담이 전제로 하고 있는 가치관, 인간관, 세계관 등을 다루는 분야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철학”3)이라는 용어들의 각 분야와 마찬가지로 “상담철학”은 ‘상담’ 및 ‘상담학’의 토대와 의미를 근원적으로 탐구하는 ‘철학’의 새로운 한 분야로 자리매김해야 한다. 즉 상담에 대한 메타적이고 이론적인 성찰로서 “상담철학”은 상담에 근간이 되는 전제들, 학문성, 상담의 가치관, 인간관, 세계관 등에 대한 철학적 탐구이다. 상담에 대한 요구가 나날이 증대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새로운 철학적 분야로 개척되어야 할 “상담철학”은 앞으로 해결해야할 많은 과제들을 안고 있다.


각 상담이론이나 심리치료이론에 영향을 준 철학적 배경 및 철학적 사유의 갈래는 다양하지만, 본 논문은 “상담철학”의 새로운 과제에 초석을 다지기 위한 학제적 작업의 일환으로 주요 상담이론에 전제가 되는 인간관과 세계관을 논의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기존의 상담적 접근이나 심리치료 및 상담이론과 그러한 접근 및 이론에 전제가 되는 주요 사상가의 연관성을 중심으로 양자를 비교할 수 있는 핵심개념을 찾아내고 난 뒤, 그 사상적 배경과 철학적 사유의 내용을 다루고자 한다.

우선적으로 2장에서는 정신분석에서 다루어지는 무의식,본능과 쇼펜하우어 사상에서의 의지의 연관성을 밝혀본다. 3장에서는 상담의 인지적 접근, 즉 벡의 인지치료와 엘리스의 합리정서행동치료의 근원적 배경이 되는 소크라테스의 대화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나아가 4장에서는 상담의 실존주의적 접근이 태동하게 된 문제의식을 밝혀보고 난 뒤, 실존주의 심리치료와 인간중심치료의 근간이 되는 실존주의 사상을 하이데거의 사상을 중심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그리하여 본 논문은 오늘날의 상담 및 심리치료의 근본원리가 되는 인간관과 세계관을 논의함으로써 내담자과 상담자 모두에게 필요한 철학적 자양분을 제공할 것이며, 나아가 학제적인 관심과 더불어 오늘날 철학의 새로운 쓰임을 위한 발판을 마련할 것이다.

 

1) 간혹 상담자에게 “당신의 상담철학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이 질문은 상담자로 하여금 상담을 이끌어가는 근본적인 모토를 묻고 있다. 그러나 정작 상담자에게 상담철학을 교육시켜 주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2) 상담철학을 철학상담과 혼동하기도 하는데, 양자의 구분에 대해서도 논의가 필요하다. 최초의 철학상담자로는 소크라테스를 들 수 있지만, 오늘날 새롭게 부상한 철학상담은 1981년 최초로 독일의 게르트 아헨바흐(Gerd B.Achenbach)에 의해서 “철학실천”(Philosophische Praxis)이라는 이름으로 창안되었다. (노성숙(2009), p. 7)
3) 상담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와 유사한 ‘-철학’이라는 용어들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철학이라는 학문이 지닌 ‘보편학’이자 ‘기초학’으로서의 독특함을 엿볼 수 있다. 각각의 개별학문들, 예를 들어서 ‘사회학’이나 ‘심리학’은 ‘사회’나 ‘심리’라는 경험세계의 한 부분에 국한하여 그 경험세계를 다루며, ‘사회’ 및 ‘심리’라는 자신의 대상을 특정한 관점 아래에서 그리고 특정한 방법론에 의해 접근한다. 그런데 개별적인 사회현상이나 심리현상들만이 아니라 ‘사회 그 자체’, ‘심리 그 자체’에 대해 총괄적으로 묻고자 하거나, 또는 ‘사회학 및 심리학은 과연 어떻게 가능한가?’, ‘그 학문적 정당성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등을 계속해서 메타적으로 묻고자한다면, 그것은 이미 각각의 개별적인 경험과학의 영역을 넘어서는 “사회철학”, “심리철학”의 질문이 되고 만다.

 

 

2. 정신분석과 쇼펜하우어의 인간관 및 세계관

 

2.1. 정신분석에서의 ‘무의식’


정신분석적 치료의 주요 내용은 정신적인 삶 속에 있는 무의식적이고 억압된 측면들, 즉 “비합리적인 힘, 무의식적 동기, 생물학적 본능적 충동”4)이다. 그것들 대부분은 내담자의 생후 6년 동안에 전개된 것으로, 이 기간에 인격이 형성되고 행동에 동기를 부여하는 요소들이 마련된다.

인격체의 구조적 기반은 이드, 에고, 슈퍼에고로 이루어져 있는데, 건강한 개인에게는 이것들 모두가 ‘정상적인’ 상태로 나타난다. 정신분석의 초점은 정상적인 인격 발달로부터의 일탈에 맞춰지는데, 이 때 정상적 발달의 기준은 성 심리발달 단계의 성공적인 해소 및 통합에 근거한다.

정신분석적 상담의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내담자로 하여금 갈등에 빠지도록 하는 무의식적 혹은 억압적 힘의 정체를 파악하고 그것의 원인을 해독해내는 작업, 즉 ‘무의식적 동기를 의식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상담자는 내담자의 ‘의식적인’ 현상 아래에 감추어져 있는 진정한 ‘무의식적인’ 의미를 해석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프로이트 정신분석의 핵심을 이루는 ‘무의식’의 존재는 과연 어떤 것인가? 그는 이전의 철학적 입장에서 의식적인 현상만이 정신이고, 의식적이지 않은 것은 신체적, 또는 물리적인 특성으로 존재한다는 철학적 입장을 반박하는 가운데 자신의 입장을 전개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어떤 표상이 의식에 나타나지 않지만 의식에 영향을 미치거나 혹은 나중에 어떠한 형태로 의식에 나타날 때, 그 표상은 “잠재적인 상태로” 또는 “무의식적으로” 존재한다.5)

프로이트는 이러한 잠재적 표상 또는 무의식의 존재에 대해 충분히 증거를 확보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최면 후 암시’(post-hypnotic suggestion)라는 실험의 예를 든다.

피실험자는 최면에서 깨어난 후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오고 나서 어떤 정해진 시간에 그가 최면 중에 받은 명령을 수행하는데, 그의 의식에는 의사의 지시, 명령, 최면상태에 대한 기억 등이 남아 있지 않다. 이러한 예에서 알 수 있듯이, 프로이트에 따르면, 인간의 행위는 비록 인간에게 의식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잠재되어 있는 거대한 무의식의 층위에 의해 이끌린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무의식에는 여러 본능적 충동들이 있는데, “그와 같은 원초적 본능들을 ‘자아본능’ 혹은 ‘자기 보존 본능’과 ‘성적본능’, 이렇게 두 그룹으로 구분해야 한다”.6)

물론 후기 저서에서 그는 ‘무의식’을 ‘원초적 자아’(Es, id)라고 규정하고, 인간의 본능을 ‘죽음본능’(Thanatos)과 ‘삶의 본능’(Libido)으로 나눈다. 그런데 프로이트에게서 삶의 본능인 리비도개념은 “단순히 생물학적 의미의 성적인 ‘본능’(Instinct)이 아니라 자아보존의 욕구 이외의 모든 쾌락 욕구를 표현하며, 단순히 일시적인 성적 ‘충동’이 아니라 지속적인 성적 에너지”7), 즉 성욕(Sexualität)을 나타내는 충동(Trieb)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와 같이 정신분석의 핵심을 이루는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성욕’이라는 것은 과연 어디에서 유래한 개념일까? 프로이트는 “자기에 대한 묘사”(Selbstdarstellung)에서 쇼펜하우어가 감정의 우위와 성욕의 중요성 및 억압을 먼저 깨닫고 있었다고 고백한다.8)

 

4) 코리 (2010), p. 65.

5) 프로이트 (2003a), p. 29.
6) 프로이트 (2003b), p. 110.

7) 주성호 (2007), p. 176.
8) 프로이트 (2006), p. 263.

 

 

2.2. 쇼펜하우어의 ‘의지’개념을 통해 본 인간관과 세계관

 

쇼펜하우어는 프로이트에 앞서서 ‘본능’과 ‘무의식’의 차원에 대해 성찰했다. 그의 대표작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바로 그의 새로운 철학적 통찰을 잘 대변해 준다. 프로이트의 ‘무의식’과 ‘자아’개념은 쇼펜하우어에게서 각각 ‘의지’와 ‘지성’ 혹은 ‘오성’개념과 유비적 관계에서 해석될 수 있다.

그런데 쇼펜하우어의 이러한 개념들은 그에게 고유한 인간관과 세계관에 기초해 있다. 그는 세계를 ‘의지로서의 세계’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로 나눈다. 후자의 세계는 ‘표상들’, 즉 감각적 존재자들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감각지각들 더미의 현상세계를 말한다. 이러한 표상들은 물질적인 대상들로부터 얻어지며,‘오성’에 의해 좌우되는 ‘충족이유율’(der Satz vom zureichenden Grund), 즉 공간, 시간, 인과관계들에 의해 형성된 법칙에 종속되어 있다.


그런데 쇼펜하우어 철학의 독특성은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표상’ 의 세계, 즉 인식론적인 세계가 단지 원초적인 ‘의지’의 세계를 객관화한 데에 불과하다는 통찰에 있다. 그에 따르면, ‘의지(Wille)’는 세계 및 인간의 근간을 이루는 가장 핵심적인 것이며, 그 의지가 오히려 이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우리가 흔히 경험하고 살아가는 ‘표상’ 의 세계이다. 따라서 의지의 세계야말로 표상으로 이루어진 세계의 배후이자 참된 세계라 할 수 있다. 의지는 그것을 바로 그들 자신이도록 하는 어떤 힘인데,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의지를 현상적으로는 지각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 의지는 충족이유율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의지는 개별화의 원리인 시간과 공간의 밖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일자이자 원초적인 의지(Urwille)이며, ‘삶에로의 맹목적 의지’(der blinde Wille zum Leben)이다.

 

쇼펜하우어의 이러한 ‘의지’에 대한 이해 및 ‘의지의 형이상학’은 헤겔과 동시대를 살았으면서도, 그 당시 주류를 이루었던 헤겔의 이성철학 및 데카르트 이래로 ‘지성’을 강조했던 주지주의에 대항하는 입장을 취한다.

 그리하여 그는 주의주의를 내세웠고, 의지와 지성의 위치를 새롭게 정립했다. 그에 따르면, “내면적으로나 심리학적으로 의지는 뿌리이고 지성은 맨 위에 비교될 수 있다. 그러나 외형상으로나 생리학적으로 보면 성기가 뿌리이고 머리는 꼭대기이다.”9)


이러한 쇼펜하우어의 사상은 “성애의 형이상학”(Metaphysik der Geschlechtsliebe)을 통해 더욱 발전되는데, 우리는 그 안에서 프로이트와의 긴밀한 연관성을 엿볼 수 있다.

프로이트는 쇼펜하우어로부터 충동의 변증법, 즉 삶에의 의지인 에로스(Eros)와 삶을 부정하려는 의지인 타나토스(Thanatos)의 변증법을 배웠다고 말한다.10)

그의 ‘리비도’ 개념은 쇼펜하우어의 ‘삶에의 의지’와 밀접한 연관성을 지닌다. 왜냐하면 쇼펜하우어도 역시 삶에로의 맹목적 의지가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현상이 성욕(die Begierde des Geschlechts)이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쇼펜하우어는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성충동은 삶에의 의지의 핵심이며, 따라서 모든 욕구하는 것이 집중된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바로 이 텍스트에서 성기를 의지의 핵심이라고 명명했다. (...) 성충동은 삶에의 의지의 가장 완벽한 표시이며, 그것이 가장 분명하게 표현된 그 형태이다.”11)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각 개인들이 성애에 의해 서로에게 이끌려서 성충동을 표현하는 행위를 하는데, 이는 사실상 ‘종의 유지를 위한 충동’의 각 단계라고 할 수 있으며, 결국 그 안에 삶에의 의지가 가장 완벽하게 드러난다. 다시 말해 각 개인의 성애에 이끌린 행위는 종을 유지시키는 것이자 그 가장 밑바닥에 놓인 삶에의 의지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성애에 따른 에로스의 행위만을 말한 것은 아니다.

그는 인간이 삶에의 의지를 표출하는 방식으로 성애만이 아니라 잔인하고 파괴적인 성향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현존의 계속되는 고통에 의해 더욱 분노를 일으키게 된 삶에의 의지는 그 자신의 고뇌를 낯선 자가 일으킨 것이라고 함으로써 덜어 내고자 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에서 그 삶의 의지는 점차로 본래적인 악과 잔인함으로 전개되었다.”12)

 

이와 같이 쇼펜하우어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악하고 잔인한 부분을 지니고 있으며, 그에 따라 자기에게나 타인에게 파괴적인 행동을 하고 괴로워하면서 그것을 즐기기도 한다고 보았다.
삶에의 의지가 이와 같이 파괴적인 충동으로 표출되는 것은 프로이트가 말한 타나토스적 충동과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과연 이와 같이 파괴적인 충동에 휘둘릴 때, 그것으로부터 어떻게 벗어날 수 있는가?


쇼펜하우어에 따르면, 개인들이 성충동에 따른 성애의 행위나 또는 파괴적인 행동을 하는 이유는 단순히 각 개인의 현상적인 차원에서 개별적인 원인이 있기 보다는 보다 근원적으로 인간 모두에게 있는 ‘삶에의 의지’에서 비롯된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관과 세계관에 따르자면, 의지가 ‘현상의 세계’에 객관화되어 드러날 경우, 다양한 유기체, 즉 이 사람, 이 개, 저 고양이 등의 형태를 띠겠지만, 의지 그 자체는 하나이며 분할되어 있지 않다. 또한 의지는 공간과 시간, 인과적 관계들로부터도 자유로우며, 방향도 목표나 목적도 없는 순전한 투쟁 그 자체일 뿐이다. 따라서 인간은 살아있는 한, 욕망 그 자체로서 투쟁하고 갈망하는 힘이자 활동 그 자체인 의지로부터 놓여날 수도 없고 피할 수도 없다. 따라서 그 의지가 일으키는 충동에 휩싸여 단지 그것을 충족시키려 노력하는 가운데, 결핍과 박탈을 겪고 또한 그 충동들이 충족되는 순간에도 권태와 포만감을 겪도록 운명 지워져 있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쇼펜하우어를 염세주의로 평가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입장을 단순히 결정론으로 단정짓는 데에 그치거나 아무런 처방책을 내놓지 않은 데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프로이트에 앞서 인간 삶의 행위들을 움직이는 근원적인 충동을 성애적 차원과 파괴적 차원에서 검토했을 뿐 아니라, 다양하고 개별적인 ‘현상’의 세계의 근거인 ‘의지’의 세계를 밝혀내고 난 뒤, 인간 모두에게 해당될 수 있는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성충동과 죽음의 충동을 벗어날 수 있는 윤리적, 미학적, 종교적 길을 모색했다. 특히 그가 각 개인의 충동에 사로잡힌 에로스로부터 동정(Mitleid)의 윤리학, 인간애(Menschenliebe)의 실천을 이끌어 내고자 노력한 점은 훗날 아들러의 심리치료에서 도덕적인 인식과 타인에 대한 배려행위에 대한 요구로 발전된다.13)


이와 같이 볼 때,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형이상학’은 오늘날 상담 및 심리치료이론들이 등장하기에 앞서서, 특히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 핵심적 개념들인 ‘무의식’, ‘이드’, ‘리비도와 타나토스’ 등에 대한 이론에 앞서서, 철학적인 인간관, 세계관, 가치관에 입각하여 그 지적인 자양분을 매우 심도있게 제공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다양한 ‘현상’들의 지성적 세계에서 발생되는 여러 고통의 근원지가 ‘의지’라는 형이상학적이고 근원적인 힘이라고 할 경우, 각 개인들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구체적인 치유방안은 과연 무엇이며 또한 오늘날 정신분석적 상담이론과 어떻게 대비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앞으로의 연구들이 다루어야 할 것이다.

 

9) Schopenhauer (2006a), p. 592.
10) 김정현 (1998), p. 131.

11) Schopenhauer (2006a), pp. 596-597.
12) Schopenhauer (2006b), p. 195.

13) 김정현 (1998), p. 140.

 

 

3. 상담의 인지적 접근과 소크라테스의 대화

 

3.1. 인지치료의 소크라테스식 대화와 합리정서행동치료의 논박

 

인지치료(cognitive therapy)와 합리정서행동치료(rational emotive behavior therapy)는 전통적 행동치료로부터 유래하며, 한편으로 조작적(능동) 조건 형성과 모델링, 행동 연습과 같은 행동적 기법들을 사고의 주관적 과정과 내적 대화에 적용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인지의 재구성’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행동치료에 새로운 확장을 가져왔다.
우선적으로, 인지치료의 핵심내용을 고찰해보면 다음과 같다.

벡은 인간의 행동을 ‘정상적인 것’과 ‘병적인 것’으로 구분하지 않고 연속적인 것으로 보았으며, 진화론적 이론체계를 적용하여 증상을 포함한 모든 행동을 적응이라는 맥락 속에서 이해하고자 했다. 그의 인지치료는 정보처리모델에 근거하는데, 이 모델은 “위계적으로 이루어져있는 인지적 구조뿐만 아니라 적절한 정보를 선택적으로 받아들이거나 걸러내는 인지적 기제”14)를 가정하고 있다.


벡에 따르면, 인지적 구조는 여러 단계로 나뉜다. 우선적으로 가장 자각하기 쉬운 인지인 의도적인 사고(voluntary thoughts), 자각이 어려운 자동적 사고(automatic thoughts), 더 깊은 수준에서의 개인의 가정과 가치관(assumptions and values), 자각이 가장 어려운 깊은 수준에는 인지도식(schema)이 있다.

인지도식은 구조화된 원리(organizing principles)라 할 수 있으며, 이 원리는 개인의 세계관, 자기에 대한 신념, 타인과의 관계에서 작동된다. 이는 ‘핵심신념들의 연결망’, ‘암묵적인 신념’으로 간주되는데, 이 신념들은 그것과 연관된 특정한 생활사건에 의해 촉발되어 활성화될 때까지 드러나지 않은 채, 잠복한 상태로 존재하지만, 일단 촉발되어 활성화될 경우, 매우 강한 감정을 수반하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인지도식은 어린 시절의 학습경험에 의해 형성된다.

인지치료에서는 심리적인 문제가 어린 시절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반복적으로 영속되는 이유는 현재 재학습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즉 개인이 새로운 정보를 조작해내는 방법에 특정한 편파(bias)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이러한 편파가 체계적으로 일어나고 인지적 전환(cognitive shift)을 가져오는데, 그 안에 인지적 취약성(cognitive vulnerabilities)이 들어 있다.
인지치료는 인지도식의 활성화를 통해서 다른 체계로의 변화를 유도하고자 노력한다. 인지가 정서, 동기, 행동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한편 엘리스는 애초에 합리적 사고와 심리적 적응의 연관성에 관심이 많았으며, 처음에는 자신의 접근법을 ‘합리적 치료(Rational Therapy)’라고 칭하다가, 정서적 문제의 발생과 치료에 사고의 역할을 강조하기 위해서 ‘합리적 정서치료(Rational-Emotive Therapy: RET)’로 바꾸었고, 1993년 치료에서 행동적 기술과 숙제의 활용을 강조하기 위해 ‘합리정서행동치료(Rational Emotive Behavior Therapy: REBT)’로 재차 달리 명명했다.15)

 

엘리스는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선천적인 경향성을 지니고 있다고 전제했으며, 그 경향성으로부터 되도록 행복하고 편안한 삶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 타인, 주변 환경에 대한 가설을 발전시킨다고 보았다. 그 가설이 곧 ‘신념’인데, 그 신념은 각 개인의 삶에 토대를 이루는 철학을 구성한다.

엘리스는 심리적 혼란과 건강을 위해 합리적인 신념과 비합리적인 신념을 구분한다. “합리적인(혹은 기능적인) 신념은 인간의 복지와 만족, 행복에 기여하는 것으로 여긴 반면, 비합리적(혹은 역기능적인) 신념은 상당한 정서적 혼란 및 역기능적인 행동의 일화를 유발하는 것으로 본다.”16)

후자는 절대적이고 엄격한 요구로 구체화되며, ‘해야 한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하는 것은 당연하다’와 같은 형태로 표현되는 반면, 전자는 개인의 선호, 요구, 욕망, 희망을 반영한다.

합리적 신념은 주로 논리적 일관성을 지닌 반면에, 비합리적 신념은 거의 항상 경험적으로 현실과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검증된다.


그런데 엘리스는 바로 그 비합리적 신념이 원치 않는 정서를 일으키고 또한 행동으로 이어지게 되며, 또한 다른 인식과정이나 인식 그 자체에 큰 영향을 끼친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는 비합리적 신념과 건강치 않은 부정적 정서 사이에 구체적인 연관성이 있다고 보고, 이를 ABC 모델로 제시한다.

A는 개인에게 영향을 주는 사건이나 상황에 대한 그 자신의 지각 및 추론으로서 ‘선행사건(activation event)’이며, B는 특정한 선행사건에 대해 개인이 지니는 합리적 및 비합리적 신념을 통칭하는 의미의 ‘신념(belief)’이고, C는 개인이 B에서 특정한 신념을 지님으로써 경험하게 되는 ‘정서적 결과(emotional consequences)’ 혹은 행동적 결과를 말한다.

또한 엘리스는 ABC 모델에서 개인이 초기의 정서적 문제에 대한 이차적인 정서적 문제가 생겨날 수 있다고 보았으며, 더 나아가 A, B, C, 상호간에 더욱 복합한 상호관계가 성립될 수 있음을 밝혀냈다.


엘리스는 신념과 평가로부터 정서가 나온다는 기본 가설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치료과정을 통해서 내담자는 과거에 획득되어 자기 구조화되어 지금은 스스로 주입하여 유지하는 비합리적 신념들을 규명하고 논박하기 위한 도구를 찾는 기술을 배운다. 내담자는 비효과적 사고방식을 효과적이고 합리적인 인지로 대체하며, 그 결과로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정서적 반응을 변화시키게 된다.”17)

 따라서 치료의 강조점은 감정표현보다는 사고와 행동에 있으며, 상담자는 논박을 통해서 비합리적 신념이나 인지왜곡을 수정하며, 일종의 ‘교사’의 역할로 내담자로 하여금 논박으로 통해서 새롭게 사고 전략을 배우고, 현실의 문제상황에 직면하여 실천할 수 있도록 돕는다.


오늘날 상담의 인지적 접근을 대표하는 벡의 인지치료와 엘리스의 합리정서치료의 핵심원리와 주제내용에 따르자면, 정서적인 혼란이나 심리적으로 건강하지 못함의 이유는 인지적 왜곡, 비합리적 신념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벡은 내담자의 정서반응을 유발하는 개인적 관념인 ‘자동적 사고’를 이용하여 내담자의 생각방식을 변화시키고, 도식을 재구성하도록 돕는다. 또한 엘리스는 신념, 정서, 행동이 상호작용을 하고 서로 중첩되지만, 비합리적 신념이 역기능적인 정서 및 행동의 바탕이 되기 때문에, 비합리적 신념을 포기하도록 돕는 데 집중한다. 그리하여 내담자에게 비합리적 신념을 논박하도록 가르친다.


벡의 인지치료나 엘리스의 합리정서치료는 인지와 정서의 상호작용에 기반하고 있는데, 이들의 철학적 배경과 사상적 자양분의 시발점으로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사상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이미 벡은 인지치료자가 인지적 변화를 촉진하기 위해 질문을 하는 방식을 지칭하기 위해서 “소크라테스식 대화(socratic dialogue)”라는 용어를 사용한 바 있다.18)

또한 엘리스가 말하는 비합리적 신념에 대한 논박도 역시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연상시키기에 충분하다. 엘리스는 고대 그리스와 스토아 철학자들, 특히 에픽테투스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사상에 심취했으며, “인간은 어떤 사물이나 일 때문에 혼란을 겪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대하는 자신의 관점 때문에 혼란을 겪는다”는 에픽테투스의 격언을 자신의 합리정서행동치료의 기본 원칙으로 삼았다.

그런데 에픽테투스는 소크라테스로부터 영감을 받아서 그의 철학을 계승하면서, “나를 나이게끔 해주는 것은 무엇일까?”의 문제 의식에서 ‘자아문제’에 집중한 철학자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인지치료나 합리정서행동치료 등의 인지적 접근을 좀 더 근원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이러한 접근의 바탕이 되는 소크라테스의 대화 및 논박술에 대해서 고찰해야만 한다.

 

14) Beck (2007), p. 118.

15) 앤쿠라 & 드라이든 (2011), p. 44.
16) 앤쿠라 & 드라이든 (2011), p. 70.

17) 코리 (2010), p. 291.

18) Beck (2007), p. 182.

 

 

3.2. 소크라테스의 대화에 나타난 인간관과 가치관

 

소크라테스는 “검토(성찰)되지 않은 삶(ho anexetastos bios)은 인간에게 살 가치가 없다”19)고 외치며, 고대 그리스 아테네 광장에서 많은 젊은이들, 현인들과 함께 대화를 나누었다. 그가 질문을 하고 대화를 나누던 활동을 ‘엘렝코스(elenchos)’라고 하는데, 이는 두 측면, 즉 논리적 측면과 윤리적 측면으로 나누어서 고찰할 필요가 있으며, 그에 따라 흔히 전자는 논박술(refutation), 후자는 산파술(midwifery)이라고 불리운다.


먼저 논박술의 측면에서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분석해 보자면, 문제를 제시하는 쪽은 그의 대화상대자이며, 소크라테스는 그들에게 끊임없이 물음을 던짐으로써 그들이 뭔가 안다고 생각하면서 갖고 있는 믿음들을 ‘테스트’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무엇보다도 그 믿음들이 가진 비일관성, 서로 모순됨을 드러냄으로써 그들이 자신의 무지를 깨닫는 것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대화에서 대화자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삶의 전제들로부터 결론을 이끌어 내는 과정에서 모순을 동반하는 추론을 하게 됨으로, 무지의 지를 고백하고 결국 난국(aporia)에 빠지게 된다.

그런데 이 난국은 파국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난국에 처한 대화자들은 평소에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한 삶의 진리를 실제로는 알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며, 이와 동시에 계속해서 자신의 삶을 검토하고 또한 재검토하려는 욕구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대화자들이 탐구적 삶을 살도록 촉구하는데, 대화자들은 단순한 도덕적 의견과 지식의 차이를 깨닫게 되고, 지식을 갈망하면서 진실한 의견과 신념을 계속 검토해나가게 된다. 소크라테스가 논박을 할 경우, 그의 최대의 관심사는 대화자의 삶을 구성하고 있는 신념, 가치관, 믿음을 테스트하여 그의 영혼의 부조화, 즉 영혼 속에 일관되지 않는 모순을 제거하는 데에 있다. 따라서 그의 대화는 소피스트처럼 대화자가 논박을 통해서 단순히 논쟁에서 이기느냐에만 초점이 있지 않고, 대화자의 의견과 그의 삶 사이에 놓인 연관성이 중요하며, 그리하여 대화자의 영혼을 치유하는 것을 궁극목표로 한다.

 

여기서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대화, 즉 엘렝코스의 두 번째 측면인 산파술(midwifery)의 면모에 더욱 다가서게 된다. 대화자는 논박에 의한 무지의 자각을 한 뒤, 소크라테스와 같은 위치에서 함께 대화를 나누는 활동을 통해서, 참된 앎과 새로운 진리를 스스로 산출해야 한다. 이러한 산파술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솔직함(parrēsia)’, ‘생각하는 바를 그대로 말하기’, ‘정직성에 바탕을 둔 신뢰’이다.

소크라테스의 엘렝코스는 개인의 가치를 둘러싸고 이를 ‘시험’하고 ‘평가’할 수 있는 객관적인 면과 ‘수치심’과 ‘치욕’ 등의 주관적 면을 모두 지닌다. 왜냐하면 대화를 통해서 대화자가 주장하는 윤리적 덕목과 가치관에 대한 검증하려는 탐구의 과정에서 소크라테스에게 논박당한 사람은 자신의 신념이 논박당하는 것에 대해 수치심과 분노를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과정은 소크라테스와 함께 탐구하고 성찰하려는 사람들이 영혼의 정화를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와 같은 것이다.20)

소크라테스의 논박은 결국 주장하고 있는 명제 자체를 겨냥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명제를 주장하는 대화자를 향하고 있다. 즉 대화자의 윤리적 신념, 태도, 나아가 그 신념 위에서 영위해 온 대화자의 삶 자체를 논박하는 것이며, 논박의 진정한 효과는 대화자의 논리적 오류를 지적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참이라고 믿어왔던 것이 거짓으로 드러남에 따라 영혼이 겪게 될 충격인 수치심과 분노에서 찾아야 한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통해서 우리는 한 개인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한 실천과 그로부터 비롯된 심리상태를 모두 검토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이 볼 때 소크라테스의 대화가 지니는 산파술의 궁극적인 의미는 ‘영혼을 이끌어 가는 기술(psyagogia)’21)이자 진리발견의 방법임을 알 수 있다. 대화자에게 있어서 논박술에 의한 무지의 자각이 아직 새로운 진리는 아니므로, 새로운 진리는 스스로 산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소크라테스와 대화자 모두가 자기의 무지함을 자각하여 그릇됨을 없애고,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 문답함으로써 참된 앎과 진리를 산출하기 위한 것이다. 지적이고 논리적인 검증방법이자 비판적 방법으로서 논박은 한편으로 논리적 검토에 의해 가상의 지혜를 벗겨내어 무지함을 일깨워 주며, 다른 한편으로 지적인 독단을 정화시켜서 지적인 충동, 호기심, 지에 대한 사랑의 이념을 고취시켜서 지혜에 대한 사랑의 길로 들어서게 함으로써 진리를 발견하게 한다. 이때 진리는 신비의 영역이 아닌 광장에서 누구나 탐구할 수 있고, 검증할 수 있는 것이며, 자유로운 토론과 논쟁의 과정을 거쳐 보편적으로 소유되어야 하는 지식으로 인간답게 살기 위해 소유해야 하는 필수적인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검토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는 말을 뒤집으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삶을 성찰해야하며, 그럴 능력과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영혼을 지닌 존재이며, 영혼의 주된 기능으로서 이성적 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삶의 가치와 규범을 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한편으로 윤리적 논제를 단순히 검토하려는 논리적 측면, 즉 논리구조, 논박적 지식의 성격, 오류추리의 문제 등을 검토하는 작업과, 다른 한편으로 대화자의 신념과 태도를 검토함으로써 논박을 통한 영혼의 정화라는 윤리적 목표를 이루고자 하는 산파술적인 측면을 지닌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에게서 이 두 측면은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한 측면만을 추상해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후자의 목표없이 단순히 논박술의 성취는 소피스트의 논쟁술, 수사학과 다를 바가 없다. 따라서 소크라테스의 대화는 단순히 논리적인 탐구방식이나 절차를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철학적 삶의 방식과 태도, 즉 윤리적이고 실존적인 측면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대화는 내담자의 삶에 기반이 되는 윤리적 태도, 신념, 가치관을 검토함으로써 삶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화자의 문제나 신념의 참, 거짓의 여부를 논리적으로 검토하는 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논리적 검토를 통해서 그 문제나 신념의 바탕이 되는 대화자의 삶을 성찰하려는 데에 그 목표가 있으며, 이를 통해 대화자의 올바른 삶, 진정한 행복을 위한 ‘영혼에의 배려’22) 및 ‘영혼의 정화’를 궁극적으로 이루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산파술의 실존적 측면에 맞닿을 때에, 비로소 논박술은 힘을 가질 수 있다. 다시 말해 소크라테스의 대화에서 논리적 차원은 산파술로 이루려는 도덕적 목적에 종속된다. 소크라테스는 대화자들의 삶 자체를 검토하고 비판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좀 더 도덕적으로 훌륭하게 만들기 위해 고심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인지치료나 합리정서행동치료 등 상담과 심리치료의 인지적 접근에 가장 근원적인 바탕이 되는 소크라테스의 대화에 대해 알아보았다. 소크라테스의 대화가 대화참여자 모두가 무지의 지를 자각하고,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 문답함으로써 참된 앎과 진리를 산출하기 위한 것임을 감안해본다면, 벡이 왜 그토록 질문을 중요시했으며, 그의 환자와의 “협동적 경험주의(collaborative empiricism)”를 주장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신념을 철학적으로 논박하기보다는 “환자의 인지를 실증적으로 검증하는 치료방법을 도입”하여
“인지적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서 행동적 기법을 통합”23)하는 과정은 소크라테스가 산파술을 강조하는 입장과는 분명하게 구분되는 지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엘리스가 자신의 합리정서행동치료에 핵심기법으로 쓰고 있는 “비합리적 신념을 논박하기”는 소크라테스로부터 유래하고 에픽테투스가 계승한 부분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박을 통한 그의 목표와 도식화 및 학문적 정당성의 주장은 소크라테스와 매우 큰 차이를 보인다.
엘리스의 목표는 내담자의 신념이 “(1) 비논리적이고, (2) 현실의 왜곡이며, (3) 정서적 혼란과 자기 파괴적 행동을 유발시키기 때문에 쓸모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24)이라는 점을 밝히려는 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앞서 고찰한대로 소크라테스의 논박술은 윤리적인 명제 또는 주제와 연관되어 있으며 산파술과의 연결됨으로써만 그 의의를 지닌다는 점을 돌이켜 본다면, 엘리스의 합리정서행동치료는 인지적 논박에 너무 치중되어 있으며, 사고, 감정, 행동 간의 관계를 매우 단순화시켜 ABC라는 틀 안에서 환자들의 부적응적 감정과 행동을 제한적으로 검토하도록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엘리스가 합리적 사고의 생물학적 토대를 주장한다는 점에서 소크라테스와의 거리감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와 같이 볼 때, 오늘날 상담과 심리치료의 인지적 접근에서 ‘소크라테스의 대화’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생겨났을 뿐 아니라 핵심기법으로 사용되고 있음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다.

그러나 과연 소크라테스의 대화가 ‘행동치료’의 일환으로서 인지-정서의 관계에서 인지의 우선성에 따른 행동의 변화를 염두에 둔 실증주의 및 구성주의의 접근으로 제한될 수 있을지, 또한 애초에 소크라테스의 대화가 지닌 산파술로서의 의미와 윤리적 측면에 대한 성찰은 오늘날 상담과 심리치료에 어떤 의미를 지닐지에 대해서는 앞으로 더 많은 관심과 논의가 필요하다.

 

19) 『소크라테스의 변론』38a.

20) 김유석 (2009), pp. 77-78.
21) 남경희 (2007), p. 67.

22) 『소크라테스의 변론』29e.

23) Beck (2007), p. 292.
24) Ellis (2011), p. 112.

 

 

4. 상담의 실존주의적, 인본주의적 접근과 실존주의적 인간이해

 

4.1. 실존주의 상담 및 심리치료의 태동과 실존에 입각한 인간관

 

실존치료(existential therapy)와 인간중심치료(person-centered therapy)는 1960년대와 1970년에 걸쳐서 정신분석과 행동주의접근에 대한 대안적인 치료의 모색으로 전개되었다. 프랭클(Frankl)은 의료만으로 해결될 수 없는, 소위 “임상을 뛰어넘는 문제들”(meta-clinical problems)이 단순히 신경증적인 징후라기보다는 인간들이 지닌 철학적 문제임을 인식한 뒤, 실존주의 철학을 적극 수용하여, ‘로고테라피’(Logotherapie)를 창안한 바 있다. 이를 통해 그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나 행동주의 치료가 지닌 한계를 넘어서고자 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은 신경질환을 어떤 정신역동의 결과로 보고, 이에 대해 다른 정신역동을 가동시키는 반작용을 시도함으로써, 즉 일종의 건강한 감정전이의 관계를 통해서 환자를 치료하는 반면, 행동주의 치료는 신경증을 특정한 학습, 조건화 과정의 탓으로 보고, 신경증에 대한 재학습, 조건변화를 통해서 치료한다.

그러나 프랭클은 정신분석이 신경증의 가면을 벗겨내었고, 행동주의가 신경증을 비신화화하는 데에 기여한 점은 충분히 인정하지만, 양자는 여전히 환원주의적 시도를 함으로써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그가 보기에, 인간의 현실은 단순히 조건화의 과정이나 조건반사된 결과로만 이해될 수 없으며, 특히 인간들의 ‘의미를 향한 소리없는 절규’(the unheard cry for meaning)를 귀담아 듣지 않는다면, 현대사회의 집단신경증(mass neurosis),사회원인성 신경증(sociogenic neurosis)은 결코 치료될 수 없다.25)


프랭클에 따르면, ‘실존적인 공허(existential vacuum)’,26) 혹은 실존적 좌절은 정신질환의 징후가 아니라 인간으로 이룰 수 있는 성과이고 성취이다. 그의 로고테라피는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세 개념에서 출발한다.

즉, 그는 이전의 정신의학이나 심리학의 결정론적인 입장에 반대해서 ‘자유의지’(freedom of will)를 중요시하며, 인간은 어떤 조건에 처하든지 자신의 태도를 결정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고 보았다.

또한 인간의 의지는 곧 의미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 ‘의미를 찾으려는 의지’(will to meaning)이며, 여기서 의미는 결국 다름아닌 ‘삶의 의미’(meaning of life)와 가치를 말한다.

따라서 그의 로고테라피는 인간의 자유와 선택을 중시하고, 삶의 의미를 탐색하려는 실존주의 사상과 깊은 연관이 있으며, 그 스스로도 밝힌 바와 같이 다양한 철학사상으로부터, 즉 하이데거의 ‘현존재분석론’과 야스퍼스의 ‘실존조명론’, 그리고 셸러의 ‘철학적 인간학’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실존주의 심리치료가 적극적으로 등장하기에 앞서서 메이(May)는 유럽의 실존주의적 인간이해에 입각하여 정신분석 및 기존의 정신의학을 비판한 바 있다. 그는 정신치료 및 심리치료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진찰실이나 상담실에서 이론적인 공식으로는 도저히 진정시킬 수 없는 불안을 겪고 있는 위기에 처한 개인들의 순수한 실재에 직면했을 때”, 자신들이 인간을 이해하는 방법에 큰 결함이 있음을 경험한 바 있다고 고백하고, 이는 “과학적 연구로 극복할 수 없는 문제”라고 주장했다.27)

그보다 앞서 이미 많은 정신의학자나 심리학자들이 정신분석에서의 인간관이 지닌 한계와 난점을 자각하고는 있었지만, 특히 메이는 좀 더 근원적으로 문화적이고 사회적 차원에서 실존주의와 정신분석이 공유하고 있는 시대적 배경을 검토함으로써 기존의 인간관을 폭넓게 비판하고 나섰다. 그는 인간을 주관이나 객관의 양자택일로 볼 것이 아니라, 실제 살아있고, 실존하는 인간으로 보아야 한다는 실존주의적 통찰에 동의하면서, 정신분석의 한계를 넘어서서 자신만의 ‘실존 심리학’(existential psychology)에 근거한 치료를 새롭게 구상한다. 그의 실존적 심리치료는 인간을 ‘인간다운’ 존재로 만드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 기초하며, 그에 따라 보다 깊고 폭넓은 ‘존재론적’ 차원에서 인간을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운동이고, “심리치료를 기술적 이성과 동일시하려는 경향에 저항하는 운동”28)이다.


나아가 메이, 프랭클 등으로부터 많은 사상적 영향을 받은 얄롬은 실제 자신의 치료과정 속에서 실존적 통찰력의 중요성을 깨닫고, 로이트주의자들의 정신역동과는 달리 실존적인 정신역동을 강조하기에 이른다.

 그는 인간존재의 ‘깊은 구조’에 내재되어 있는 궁극적인 관심을 네 가지,  “죽음”, “자유”, “소외”, “무의미”로 구분한다. 그러고 나서 이러한 네 가지 궁극적 관심이 실존적 정신역동의 본체를 이룬다고 보고, 이와 연관된 ‘실존주의적 심리치료’(existential psychotherapy)를 제안한다.

 

이상에서 살펴 본 프랭클, 메이, 얄롬 등의 정신의학자들은 단순히 기존의 의학적 지식과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성취해온 작업의 의미를 전적으로 무시하려고 시도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작업의 문제점들을 밝혀내고 환자들에게 더욱 잘 다가갈 수 있는 치료를 내놓고자 했다. 왜냐하면 정신분석이 애초에 틀에 박힌 의료사업에 대항해서 비판적인 저항으로 시작되었지만, 이와 반대로 ‘인간들을 매우 의심스럽게 만드는 치유기술, 효과적이고, 고도로 전문화된 치유기술의 명령에 복종하게 되었으며, 그러한 진보의 결과로 현대의 의학이 인간을 하나의 퍼즐조각들로 파편화시키거나 혹은 부분들로 분석적인 해체를 감행하는 지경’29)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얄롬은 “인간은 그 자신의 부분들의 합보다 더 위대하다”30)고 명시적으로 주장한다.


그런데 앞서 언급한 정신의학자들보다 먼저 실존주의사상, 특히 하이데거의 철학을 의료에 적용시킨 스위스의 빈스방거(Binswanger)나 보스(Boss)도 있다. 또한 영국에서도 쿠퍼(Cooper)는 기존에 통용되어 온 정신 질병의 개념과 치료에 비판적 태도를 취한 바 있으며, 반 도젠(Van Deurzen)은 ‘심리상담과 치료의 새 학파’(The New School of Psycho Therapy and Counseling)를 구성하고, 영국에서 전통적 치료에 대한 대안으로서의 실존주의적 접근을 보급하기 위해 지대한 공헌을 했다. 이들 모두는 인간을 부분들로 파편화시키는 ‘의학적’이고 ‘심리적인’ 표준과 기술만으로는 인간이 겪는 심리적 장애, 혹은 심리적으로 유발된 신체적 장애들을 근원적으로 치료할 수 없다는 사실에 실제로 직면한 당사자들이었다.

이들 각자가 기존 치료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채택한 구체적인 해결책들은 각기 다르지만, 그럼에도 이들 모두는 기존의 의학적, 심리학적 방법론이나 그에 기반하고 있는 전문기술이 환원주의적이고, 결정론적인 인간관을 전제로 하고 있음이 문제가 있다는 데에는 인식을 같이 한다.

따라서 이들은 이러한 제한성을 벗어나기 위해, 의학이나 심리학적 지식을 넘어서는 인간이해, 즉 좀 더 근원적이고 포괄적인 철학적 인간이해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들이 필요로 했던 새로운 인간이해에서 핵심을 이루는 “실존”의 개념은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

우선적으로 실존(existence)이라는 개념은 ‘부각되다, 드러나다’의 뜻을 지닌 라틴어 동사 ‘ex-sistere’ 에서 유래한다. 원래 라틴어로 ‘existentia’인 실존은 ‘essentia’인 본질과의 대비를 통해서 정의되어 왔다.

전통 철학에서 ‘본질’은 ‘무엇이-있음(Was-sein), 즉 정의 안에서 또는 개념 안에서 파악되는 한 사물의 무엇임’을 뜻하며, ‘사물이 변하는 소용돌이 속에서도 변하지 않고 머물러 있는 필연적인 것, 초개체적ㆍ보편적인 것’을 말한다. 이에 반해 ‘실존’은 ‘한 사물이 있다는 그 사실(Daß-sein), 그 사물이 우연하게 실제적으로 눈앞에 있음(Vorhandensein)과 실제로 있음(Wirklichsein)’ 을 뜻한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해 볼 것은 실존주의 사상이 전통철학, 특히 전통적 형이상학에 대한 반대 움직임으로서 등장했다는 점이다.
즉 ‘실존’을 ‘본질’에 반대하여 논쟁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사물이 아닌 오직 인간에게만 ‘실존’이라는 말을 쓸 수 있고, 인간이 실존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존으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31)


이와 같은 ‘본질 대 실존(essentia-existentia)’의 개념적 대비를 인간에게 적용시켜 볼 경우, 우리는 인간에 대해 두 가지로 구별되는 의미와 관심을 가지게 된다. 한편으로 우리가 ‘본질’만을 인간의 진리로 받아들일 경우, 그 진리는 영원히 변치 않고 머물러 있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그 영원을 향한 ‘상승’의 과정을 중시하게 되고, 시간과 시간적인 존재자들을 극복함으로써 그 영원성의 진리에 도달하고자 주력한다. 그 과정에서 진리의 교사나 전달자는 그저 상승을 위한 어떤 시간적인 동기유발의 기능정도만을 수행하면 될 뿐이며, 이들 역시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지금 여기의 존재로서의 중요성을 띨 필요는 없다. 이와 같은 본질의 진리는 보편적인 과학법칙과 같다.
쉬운 예를 하나 들자면, 사과 3개와 5개를 더하는 것과 실제로 존재하지 않지만 그림책에 나오는 금화 3잎과 5잎을 더한 진리는 똑같으며, 어느 교사나 전달자가 어디에서 가르치든 그 진리는 같은 것이다.
또한 논리학에서 삼단논법도 본질의 진리에 대한 하나의 예가 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이다.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이러한 삼단논법은 대전제와 소전제에서 도출되는 결론을 포함하는데, 여기서의 진리도 역시 시공간을 초월해서 어디서나 타당성을 지니는 것으로 주장된다.

 

그런데 과연 그와 같이 영원하고 불변하는 본질의 진리를 안다고 하더라도 ‘지금 여기(hic et nunc)의 나’, 더욱이 ‘죽어야 하는 유한자로서의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톨스토이가 ?이반일리치의 죽음?이라는 작품에서 탁월하게 묘사한 바와 같이, 이반일리치도 삼단논법을 배운 적이 있다.

그러나 그는 모든 인간이 죽고, 소크라테스만이 아니라 자신이 죽는다는 인간의 본질에 해당하는 진리를 안다고 해서 그것이 지금 여기서 죽어가는 나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고백한다.

이와 같이 실존의 진리는 이전에 인간이 추구했던 ‘본질’의 진리를 비판하면서 등장한다. 죽어야할 존재로서 유한한 인간에게 영원한 진리는 단절되어 있는 반면에, 실존의 진리는 각 개인들로 하여금 그 자신의 시간을 초월하지 않고 오히려 역사적 요청을 떠맡으며 시간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도달될 수 있다.

역사적 요청은 각 개인이 만나게 되는 결단의 순간이며, 실존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에게는 “지금 여기”, 즉 시간과 공간 속에서 주어진 이 순간 실재하는 존재의 역동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 역동성 속에서는 흔히 이론적 작업이나 본질의 진리가 전제로 하고 있는 주체와 객체로 분리될 수 없는, 즉 생생하게 살아있는 체험이 담길 수 있기 때문이다.

 

25) Frankle (2005), pp. 10-15.
26) Frankle (1970), p. 83.
27) May (1983), p. 37.

28) May (1983), p. 87.
29) Achenbach (2010), p. 152.

30) 얄롬 (2007), p. 36.

31) Zimmermann (1977), p. 5.

 

 

4.2. 하이데거의 인간관과 세계관: 현존재와 세계-내-존재

 

실존주의 사상을 전개한 주요사상가로는 키에르케고르, 니체, 하이데거, 사르트르, 부버 등이 있다. 이 중에서도 하이데거는 이전의 실존주의 사상을 잘 종합했을 뿐 아니라 자신만의 독자적인 존재론을 전개했으며, 이후 실존주의에 입각한 심리치료에 많은 반향을 일으켰다. 따라서 그의 견해를 중심으로 “실존”의 개념을 좀 더 심도있게 이해해 보고자 한다. 그가 실존개념을 전개했던 ‘현존재분석론’(Daseinsanalytik)은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세계관을 담고 있으며, 실제로 빈스방거,보스, 프랭클, 메이 등에게 직접적으로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이들은 이전의 심리치료나 상담에 근간이 되어 온 생물학적 이론이나 심리학적 이론, 혹은 기계론적 이론을 통해서 더 이상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하이데거의 ‘현존재분석론’과 실존이해를 바탕으로 새로운 치료 및 상담의 방향전환을 꾀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다른 존재자와 달리 자신의 존재에 대한 물음을 지닌다. 그는 그의 주저 ?존재와 시간?에서 이러한 존재물음을 지닌 존재자를 ‘현존재’(Dasein)라고 칭하고, 그 현존재를 분석함으로써 존재의 의미를 해명하고자 시도한다. 현존재는 인간에 대한 존재의 관련성을 강조적으로 표현한다.

그렇다면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존재와의 연관성을 이중적 계기, 즉 “피투성(被投性, Geworfenheit)”와 “기투(企投,Entwurf)”로 설명하는데, 이는 인간의 실존이 지니는 제한성과 가능성을 잘 보여준다.

 

우선적으로 피투성은 내가 존재하고 있으며,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Daß ich bin und nicht nicht bin)을 말한다. 즉 모든 규정성들 이전에, 그 어떤 규정으로도 환원될 수 없는 무조건적으로 자신이 존재하고 있다는 현사실성(Faktizität)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와 같이 자신의 존재를 현사실로 인정함으로써 깨닫는 지점은 잘 돌아가고 있던 익숙한 일상의 세계가 갑자기 멈춰 섰을 때이며, 그 때에 이미 세상에 ‘내던져있는 자신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이, 그야말로 있는 그대로의 현사실로 인식하게 된다.

사르트르의 ?구토?의 주인공인 로캉탱처럼 일상에서 떨어져 나오는 왠지 모를 구토의 체험, 실연의 상처나 그로인한 고독감, 권태, 절망 등은 자신이 원치 않았던 세상에 내던져져 있다는 사실에 대한 피투성의 존재체험을 잘 드러낸다. 이와 같이 피투성의 현사실에 의한 존재체험은 그 자체로 경험되기 보다는 오히려 모든 구심점이 완전히 무너져 버려서 친숙했던 주위세계는 물론 그 자신마저도 낯설게 되는 계기를 통해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현존재의 실존은 이와 같은 낯선 현사실이나 내던져있음 안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이미 다 규정해 놓은 채 단순히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절망 속에서조차 인간은 다른 존재가 되고 싶어 하며, 자신이 원하는 바로 인해 고통스러워한다. 즉, 처해진 자신의 현실적이고 피할 수 없는 상황을 인식함과 동시에 그 처해진 상황 속에서의 자신의 모습과는 달리 되기를 원하는 소망에 관여함으로써 자신만의 삶의 과제를 떠안고, 그것을 실현하기 위해 기획투사 한다.

그리하여 자신의 본래적 존재를 드러낼 수 있거나 또는 자신의 본래적 존재를 하나의 가능성으로 지니고 그 가능성과 관계할 수 있다. 이를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존재해야 함(Zu-sein)”, “존재가능(Seinkönnen)” 또는 “기투”라고 표현하는데, 이 가능성은 현존재가 지닌 기능이나 속성이 아니라 현존재가 각기 그 자신의 가능성을 마주하고 있으며, 그 자신의 존재자체의 가능성을 이행해나가고 추구해야할 과제로 삼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와 같이 볼 때, 현존재로서의 실존은 그 어느 하나로만 환원될 수 없는, 하이데거의 표현에서처럼 “피투된 기투”(geworfener Entwurf)32)의 이중적 측면을 지니고 있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재의 실존을 규정하는 또 하나의 독특한 근본구조는 세계와의 연관성에 있다. 인간은 가능성을 지닌 실존에로의 이행 속에서 나름대로 세계와 특정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즉, 현존재는 이미 그 자신을 오직 세계와의 관련 안에서만 실존하는 것으로 의식한다.

현존재의 세계관련성은 그가 실존하는 데에 매우 중요한 구성요소이다. 왜냐하면 실존의 이행은 어떤 세계 밖의 존재자가 나중에 추가적으로 세계 안으로 들어가면서 관련을 맺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의 가능성들에 상응하거나 그것을 부인하는 나 스스로의 세계관련성에 따른 규정이며, 이 규정이 하나의 상황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실존은 순수 이론적인 관찰과는 달리 항상 “상황” 속에서 이행되며, 실존은 이 상황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만약 벗어난다고 하더라도 또 하나의 다른 상황 안에 놓이게 된다. 실존이 상황에 얽매여 있다는 이 사실은 실존의 유한성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다. 현존재의 유한성은 소위 “한계상황” 속에서 가장 두드러지는데, 가장 극단적인 한계상황은 다름아닌 죽음이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실존이 비본래적으로 혹은 본래적으로 자신과 관계맺는 양상을 “세계-내-존재”(In-der-Welt-sein, Being in the world)라는 개념을 통해서 설명한다.

 여기서 내존재(In-sein)란 어떤 세계 인식이나 지각에 의해 설정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러한 것의 전제로서의 세계와 친숙해 있음, 세계에 가까이 있음, 세계 안에 있음을 말한다. 인간이 세계 안에 공간적으로 “포함되어 있다”는 의미도 아니며, 세계없는 주체로 존재하다가 세계, 대상들과 관계 맺기 위해 자신의 내적 영역에서 빠져 나온다는 의미도 아니다.

세계는 어떤 인식대상으로 표상된 외연적 물체, 또는 존재자의 총체가 아니며, 현존재 자체의 근본구조 내지 존재구성틀로서 “현사실적 현존재가 현존재로서 ‘그 안에서 살고 있는’ 그것”이다.

슈트라우스(Straus)가 “강박증 환자를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의 세계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라고 말했을 때, 이는 모든 유형의 환자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도 적용된다. 왜냐하면 함께 존재한다는 것은 같은 세계 내에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안다는 것은 같은 세계라는 의미와 목적의 맥락을 통해서 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존을 통한 인간이해에서 중요한 것은 한 개인을 ‘세계-내-존재’, 즉 그의 목적연관성 및 의미연관성의 세계 안에 있는 존재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세계-내-존재”로서 실존적 인간을 재발견하려는 노력은 심리치료나 상담에서 왜 중요한 것일까? 메이에 따르면, 세계는 세 가지 양태를 띤다.

첫째로 환경세계(Umwelt, world around)는 생물학적 세계, 환경세계를 의미한다. 이 세계에서 인간은 생물학적 욕구, 충동, 본능을 지닌 존재이며, 적응과 순응을 중요시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실존주의 사상가들은 인간에게 환경세계가 실존의 유일한 양태처럼 취급하거나, 인간경험을 환경세계에만 적용될 수 있는 범주들로 획일화시키는 것은 인간을 너무나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둘째로, 공동세계(Mitwelt, with world)를 들 수 있는데, 이는 자기 자신과 같은 부류의 존재로 이루어진 세계, 동료들과의 세계, 인간의 상호연관성, 관계성의 세계를 말한다. 여기서 세계는 세계 안에 있는 인간들의 상호 관계성에 의해 형성되는 의미구조 포함하고 있으며, 관계성의 본질은 서로의 만남(encounter)속에서 인간이 서로 변화된다.

셋째로 자기세계(Eigenwelt, own world),자기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세계가 있다. 이 세계는 자기의식과 자기 관계성을 전제로 하며, 오직 인간에게만 독특하게 나타나는 세계의 양태라 할 수 있다.

메이는 현대인이 자신의 세계와 더불어 공동체 경험을 잃어버리고 말았는데, 이는 단순히 대인관계의 부족이나 동료간에 의사소통의 부재가 문제인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주객분열이 극단화됨으로써 자아와 세계가 양극화되었고, 이는 자기세계의 상실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계-내-존재”로서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인간의 자아와 세계가 항상 변증법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해서, 상호 연관된 존재로서의 인간과 자기세계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그 가운데 “세계는 인간이 그 안에 존재하고, 참여하며 창조하는 의미있는 관계구조”라 할 수 있다.33) 세계는 우리가 받아들이거나 적응해야만 하는 정적인 대상이 아니다. 한편으로 세계는 과거의 사건들에 의해 영향 받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미래의 가능성에 열려져 있다.

따라서 극단적 유한성, 한계상황인 죽음에 직면해서도 인간은 의미와 목적의 총체적 연관성인 “세계-내-존재”로서 현존재이며, 그에 따라 자신의 세계를 새로이 구축할 수 있는 잠재력과 미래의 가능성을 지닌 실존적 존재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하이데거의 “세계-내-존재”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빈스방거의 “현존재분석(Daseinsanalyse)”은 “세계기투(Weltentwurf)”라는 개념으로 환자를 이해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그가 환자를 단순히 기계론적이고 유물론적인 입장이 아닌 인간학적 입장에서 바라보려고 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며, 환자를 단순히 객관화된 관찰대상으로서가 아니라 ‘현존재’라는 구조전체로, 즉 환자의 세계 그 자체와 함께 총체적으로 접근하고자 했다는 사실은 최근 인간중심심리치료 및 철학상담의 입장에서 매우 환영받을 일이다. 그는 정신분석에서 현존재분석으로 패러다임전환을 감행함과 동시에 정신분석의 주요 주제였던 신경증적 불안을 넘어서서 특히 정신분열증 환자의 세계이해에 매우 많은 관심을 가지고 치료에 임했다.34)

 

32) Heidegger (1972), p. 148.

33) May (1983), pp. 126-132.
34) 노성숙 (2011), p. 70.

 

 

4.3. 실존주의적 인간이해와 인간중심치료

 

실존주의 사상은 빈스방거, 보스, 프랭클, 메이, 얄롬 등의 정신치료 및 실존치료의 토대가 되었으며, 특히 하이데거의 “현존재”, “실존”, “세계-내-존재”의 개념은 기존의 정신의학과 심리치료의 인간이해에 획기적인 방향전환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런데 이러한 실존주의적 인간이해는 비단 실존치료에만 영향을 끼쳤을까?

로저스(Rogers), 매슬로우(Maslow) 등으로 대표되는 “인본주의 심리학” 및 “인간중심치료”도 역시 기존의 정신치료나 심리치료, 즉 과학적 실증주의의 행동주의나 정신분석학이 기반으로 하는 ‘인간이해’에서 진정으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중요한 것들이 빠져있음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나선 바 있다.

 

로저스는 인간과 모든 유기체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에 근거하여, “인간은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자기 개념,
기본적인 태도, 자기 주도적인 행동을 변화시킬 수 있는 방대한 자원을 자신 안에 갖고 있으며, 어떤 토양(정의 내릴 수 있는 촉진적인 심리적 태도)이 제공되기만 한다면 그 자원을 일깨울 수 있다”35)고 주장한다.

그는 인간의 성장을 촉진하는 토양을 위한 세 조건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첫째, 진정성(genuineness), 진실성(realness), 일치성(congruence),

둘째, 무조건적인 긍정적 관심(unconditional positive regard),

셋째, 공감적 이해(empathic understanding)이다.

로저스의 이와 같은 새로운 접근법은 기존의 지시적 상담과 달리 “비지시적 상담”, “‘내담자-중심치료”, “인간중심상담”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상담과 치료의 기반을 마련하는 데에 기여했다.


이와 같이 로저스의 심리치료는 그야말로 ‘인간을 중심에 둔 치료’ 로서 실존주의와 공통적인 토대를 지닌다. 즉, “내담자의 주관적인 경험을 존중하고, 긍정적이고 건설적이며 의식적인 선택을 할 수 있는 내담자의 능력을 신뢰한다”는 면에서 실존주의 사상과 매우 큰 유사점을 지니고, “자유, 선택, 가치, 개인의 책임능력, 자율성, 목적, 의미” 등의 개념을 강조한다.36)

물론 실존주의 심리치료와 인간중심치료는 다음의 차이점을 지니기도 한다. 한편으로 전자는 자기 정체성을 창조하기 위한 선택을 강조하고 선택에 앞서서 느끼는 불안을 매우 중요시 한다. 이에 반해 후자는 인간의 타고난 잠재력에 대한 강조와 함께 불안을 별반 중요시하지 않으며, 인간 스스로의 가능성이 실현되는 과정에 대해서도 매우 낙관적인 견해를 지닌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실존주의 심리치료나 인간중심치료는 기존의 정신분석, 행동주의의 환원론에 대항하는 인간관을 토대로 한다는 점에서 매우 근본적인 공통점을 지니며, 바로 그 지점에 전통철학의 본질주의에 대항하는 ‘지금 여기의 실존’으로서의 인간이해가 깊숙이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5) 로저스 (2007), p. 131.
36) 코리 (2010), p. 177.

 

 

5. 맺음말

 

본 논문은 현대사회에서 상담에 대한 요구가 급증함에 따라 상담학이 새로이 정립되고 있는 상황에서 각 상담이론의 철학적인 배경을 다루었다. 최근 각 상담이론이나 심리치료이론은 결정론적 인간관의 한계를 인식하고, 인간이해의 근간이 되는 철학사상과 가치관 등을 발굴해내어 각 이론에 도입하거나 치료에 적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상담에 대한 관심과 요구가 계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앞으로 ‘상담에 대한 철학적 성찰’도 함께 증대될 전망이다. 따라서 철학자들이나 철학학계는 이러한 움직임에 그저 동떨어져 머물고 있을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과제에 부응하는 “상담철학”을 활발히 전개해나가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논문은 현대의 상담이론과 철학의 만남을 주선하려는 의도로 양자가 접목될 수 있는 지점들을 탐색해보았으며, 특히 현대의 상담이론에 전제가 되는 철학적 원리 및 인간관과 세계관을 집중적으로 고찰해 보았다.


그리하여 본 논문은 쇼펜하우어의 ‘의지의 형이상학’이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드’, ‘리비도와 타나토스’ 등에 대한 이론에 앞서 이미 정신분석의 이론에 기반이 되는 철학적인 인간관, 세계관을 제공하고 있었음을 밝혀 보았다. 또한 벡의 인지치료나 엘리스의 합리정서치료는 이미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치료에 적극 활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즉 상담 및 심리치료의 인지적 접근에서 인지적 변화를 촉진하기 위한 질문의 방식이나 비합리적 신념의 논박의 근원에는 소크라테스의 대화가 보여주는 철학적 요소가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나아가 본 논문은 빈스방거와 보스의 현존재분석, 프랭클의 로고테라피, 메이와 얄롬의 실존주의 심리치료, 로저스의 인간중심치료는 이전의 심리치료나 상담에 근간이 되어 온 생물학적 이론이나 심리학적 이론, 혹은 기계론적 이론을 통해서 더 이상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는 비판적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었을 뿐 만 아니라, 실존주의 사상과 특히 하이데거의 ‘현존재분석론’에 입각하여 새로운 치료와 상담을 시도했음을 주목해 보았다.


이와 같이 본 논문은 현대의 각 상담이론에 바탕이 되는 철학적 원리, 철학적인 인간관, 세계관, 가치관 등을 탐색하는 첫 시도로서 현대의 상담이론과 접목될 수 있는 철학적 자양분들을 밝혀 보았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이러한 상담이론들과 대비를 보이는 철학적 입장들과 논쟁점이 새롭게 대두된 것도 사실이다. 앞으로 이러한 논쟁점들에 대해 철학적으로 더욱 심도있는 논의들을 전개해가야 할 것이며, 학제적으로도 더욱 생산적인 논의들이 이끌어내야 할 것이다. 이미 상담이나 심리치료이론 등에서는 자신들의 학문적 토대나 인간학적 한계로부터 철학적인 요소들을 필요로 하고 있으며, 실제로 철학을 활용하고 있다.

이에 부응하여 오늘날 철학자들은 이와 같이 새롭게 철학을 필요로 하는 상담 및 심리치료분야의 소리를 귀 기울여 듣고, 오랜 시간동안 숙성되어 온 철학의 맛을 나눌 수 있는 새로운 학문적 기회로 적극 활용해야 하지 않을까?

 

  

참고문헌 -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