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일반

아름다움과 파괴: 선함

rainbow3 2020. 4. 22. 11:35


아름다움과 파괴: 선함은 삶을 존속시킬 수 있는가,
그리고 그 의미는 무엇인가?

 

마이클 에이겐
뉴욕대학교

 

 

필자는 아름다움이란 윤리의 원천이라고 믿는다. 아름다운 것을 보면 선한 감정이 솟아난다. 선한 감정이 들 뿐 아니라 옳은 일을 하고 싶어지고 정의를 구현하여 세상을 아름답고 감동적인 곳으로 만들고 싶어진다.

아름다움의 눈물. 키츠가 “아름다운 것은 영원한 즐거움”이라고 말했듯이 윤리는 아름다움과 즐거움에 뿌리를 두고 있다. 즐거움과 행복의 눈물은 때로는 경외심을 갖게 한다. 희망찬 세상은 우리를 감화시킨다. 아름다움과 즐거움, 감화, 창조력의 윤리이다.


필자는 지금 캘리포니아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 멋진 암석들을 보며 아름다움과 경외심을 동시에 느꼈던 순간을 생각하고 있다(Eigen 2007: Chapter 1).

요세미티는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어떤 말도 의미가 없었다. 수백 년간 말없이 이어져 온 세상이 눈앞에 있었다. 거대한 암석과 거대한 별들, 신이 창조한 아름다움, 경외의 눈물, 바위의 영혼이 가까이 오라고 말하고 있었다.


이러한 고요함과 경외감을 느끼는 순간과 꿈도 없이 평화롭게 깊은 잠을 자는 순간 사이에는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정신분석학자로서 꿈은 중요하다. 꿈은 정신적 소화, 감정적 소화에 있어서 일정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꿈은 조각조각의 내러티브 구조를 통해 우리에게 이야기를 한다.

요세미티에서 느낀 경외감은 좀더 즉각적인 것이었다. 꿈은 우리가 깨어있는 동안 작업할 수 있는 정서적 내러티브를 우리에게 제공해준다. 꿈이 정지되어 있는 경우는 드물다. 꿈에는 물고기가 물속에서 헤엄치는 것처럼 일정한 속도가 있다.

미처 잡거나 알아차리기 전에 빠져나갈 수도 있다. 때로는 잔물결로 겨우 꿈을 알아차리기도 한다. 요세미티의 깊은 적막과 경외감은 나를 또 다른 세상으로 데려갔다.


우리는 잠을 자면서 꿈을 꿀 뿐 아니라 꿈이 아니라면 갈 수 없는 장소에 가기도 한다. 바이온(W.R. Bion) (1992: pp. 149-150)은 잠이 꼭 필요한 이유 중 하나는 깨어있는 동안은 가질 수 없는 감정적 경험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잠은 깨어있을 때에는 가능하지 않은 경험을 가능케 하고 꿈은 꿈이 허락하는 범위를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한다. 이것은 현재의 삶은 과거이며 꿈은 현재이며 꿈이 없는 빈 공간은 미래라는 힌두교의 믿음과 일맥상통한다.


그렇다면 이것을 만질 수 없고 형언할 수 없지만 꿈 없는 잠 속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경험들이 우리의 삶 속에 스며드는, 말도 없고 이미지도 없는 무의식의 통로라고 불러야 할까?

신이나 자연, 진화가 인간의 손이 닿지 않도록 지켜왔고, 우리의 지배적인 내러티브나 권력욕, 공포감으로도 망칠 수 없는 특별한 형태의 접촉이라고 해야 할까?

그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초점과 선택적인 관심이, 우리가 꾸는 꿈의 초점이 흐려질 때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가 바라보지 않고 있을 때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것이 어떻게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을까? 우리의 존재, 우리의 가소성을 나타내는 당혹스러움이다. 우리에게 미스터리한 느낌을 주는 어떤 것이다(Eigen 2011a, b).


꿈 없는 잠에서 찾을 수 있는 평화로움은 꿈이 우리에게 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갈등과 대립, 공포보다 더 깊은 곳으로 우리를 이끈다. 꿈은 괴로운 요소들, 실생활에서 발생하는 마찰을 과장되게 보여 주는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이 평화로움의 개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하나의 원천은 깊은 수면이라고 본다.

“깊다”는 표현과 수면 간의 연관성은 우연이 아니다. 잠이야말로 일상의 불안감으로는 해소할 수 없는 심오한 평화로움을 우리에게 선사하는 심오한 선물일 수 있다. 깨어 있는 동안에는 느낄 수 없지만 잠에 빠지면 가질 수 있는 평화인 것이다. 우리는 하루의 활동을 마친 후 잠자는 시간을 기다린다. 원기를 회복하기 위해서일 뿐 아니라 휴식과 수면이 가져다 줄 수 있는 깊은 평화를 맛보기 위해서이다. 그것은 우리가 기도와 명상을 통해 누리고자 하는 평화로움과 같은 감정일 것이다.


깨어 있는 삶에는 우리 존재의 형언할 수 없는 배경으로 파문을 일으키는 실타래가 있다. 요세미티의 귀가 먹먹한 고요함, 말이 필요없는 경외감은 지친 삶을 새롭게 해주는 꿈 없는 잠으로의 통로와 연결되어 있는 느낌을 준다. 요세미티의 장엄함을 휘젓는 엄청난 평화로움이다. 깊은 잠과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에 내재되어 있는 평화로움이다. 평화로움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나는 그 중에서도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평화에 관심이 있다. 존재를 휘젓고 생기발랄하게 하는 평화로움이다. 이것은 단지 내가 작은 존재이고 요세미티는 엄청나게 큰 존재이기 때문이거나, 우리 둘 다 변화하고 있고 천천히 또는 빨리 지나가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 둘 다 영적으로 놀라운 존재이기 때문이다. 바위의 위대한 영혼과 바위를 인지한 나의 환희, 동요되고 동요시키는 인지 때문이다. 바위로 인해 감동받고 바위에 압도당해 전율을 느낀 것이다. 일반적인 경험으로 전이된 장엄함, 그것은 일종의 일차원적인 접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심오한 동요와 연계된 위대한 사상이 있다. 나에게는 플라톤의 선에 대한 비전이 그렇고,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고 했던 칸트의 사상이 그렇다. 이러한 사상들은 나누고 돌보며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라는 황금률과도 연관된다.

칸트는 머리 위의 별보다 마음속의 도덕이 더 즐거운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생존의 욕구, 실용주의, 적대감, 권력욕이 지배하는 이런 세상에서 평화로움과 타인에 대한 배려,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는 사상은 과연 어디에서 온 것일까?


에마뉴엘 레비나스(1969; Eigen 2005)는 인간의 얼굴에 대응해 표현된 또 다른 가능성을 탐색했다.
우리의 살 속에 박힌 윤리의식은, 타인, 특히 타인의 얼굴표정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통해 자라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취약함, 무한한 어필, 심지어 결핍에 대해 저술하고 있다. 타인은 우리의 대응을 요구한다.
우리는 이제 타인을 주인이나 노예가 아닌 신 앞에서, 타인 앞에서 벌거벗은 존재, 궁핍하고 위험에 빠진 존재로 인식한다. 우리는 타인에게서 어떤 것을 요구하며 그것은 우리에게도 나누도록 요구되는 것이다.

무한한 요구와 무한한 나눔. 둘 다 결코 고갈될 수 없는 단어이다.

 

레비나스가 얘기하고 있는 것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얼굴의 어필, 보편적인 어필, 경험에 내재되어 있는 구체적인 보편성이다. 경험을 이루고 있는 즉각적인 어필이다. 배제되는 것은 없다.

이것은 보고, 듣고, 느끼는 우리의 신체에 박혀 있는 윤리적 목적, 우리를 고양시키고 우리를 죽음이 아닌 삶에 이르게 하는 목적이다.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느낀다면 칸트가 옳았고 별들이 노래하는 대상은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모든 아이의 마음과 얼굴에 웃음을, 다른 이에게 반응하여 나타나는 즉각적인, 표현력이 풍부하고 감동적인 광채를 생생하게 띠고 있는 자발적인 웃음을 가져다 주는 –뭔가 크게 잘못되지 않았다면- 해프닝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나누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나누어주어야 한다. 우리 자신을 주는 것이다. 다른 누구도 이를 대신할 수 없다. 지금 이순간, 영원 속에 흐르는 시간 중 바로 이 순간 오로지 당신만이 가져다 줄 수 있는 이것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전광석화와 같은 무한함, 즉각적인 무한함, 무한한 즉각성. 엄마의 얼굴을 본 어린 아이의 반응부터 성인들이 서로에게 보이는 반응까지. 무한한 거리, 보살핌뿐 아니라 존중을 요구하는 친밀한 거리를 포용하고 그 중심 안에서 지지하는 무한한 즉각성. 주는 형태로 보고 느끼는 것. 거리라는 것이 어떻게 무한한 즉각성, 고갈되지 않는 보살핌이 될 수 있을까? 거리라는 것은 잔인함부터 온정적인 것까지의 범위를 포괄하는 것이 아닐까?

다르게 사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 대해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추구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즉각성이 아닐까?


우리는 상처가 어떻게 생기는지, 우리 앞에 있는 사람에게 우리가 준 상처를 읽는 법을 배울 시간이 있었다. 적, 낯선 이의 머리를 치고 친밀감을 파괴하는 것. 우리는 이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알고 있다.

우리 인간은 폭력적인 존재이고 고뇌하는 존재이며 고통을 주는 집단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방어적인지 알고 있다. 우리의 유산이면서 온갖 곳에서 우리를 향해 다가오는 고통을 떨쳐버린다. 또한 우리는 어려운 처지의 삶을 응원하는 것이 어떤 일인지 잘 알고 있다.

우리를 통해 도와주는 것. 집단으로서의 우리는 더 큰 만족이 무엇인지 더 큰 설득이 무엇인지에 대해 판단하지 않았던가? 삶을 또 다른 수준에 올려놓는 어필 – 상호적 어필-을 약화시키기로 결정하지 않았던가?


우리에게 더 큰 공포로 다가오는 것은 무엇일까?

잔인하지 않으면 텅 빈 존재가 될 것이라는 두려움일까, 베풀지 않으면 텅 빌 거라는 두려움일까? 우리는 어떤 쪽이건 잃는 것을 두려워한다. 마치 양쪽 모두가 활기와 의존심, 무자비함과 베풂의 변증법에 대한 중독을 느끼도록 해야 한다는 듯 말이다. 자살 폭탄의 강렬한 천재성은 무자비함과 자기 희생이라는 양 극단의 가치가 최대치로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있다.

자신을 신이나 어떤 명분에 바치는 행위. 헌신적인 얼굴, 친구들, 어머니, 동족들에게 응원받고 있다는 기분. 잘못이라면 어떤 얼굴은 인간의 것이고 어떤 얼굴은 아니라고 믿는 것일 것이다.


경제적인 “자살폭탄테러범”은 찾기 힘들다. 그 이유는 자기자신보다 더 큰 명분에 헌신한다는 부분이 빠져 있기 때문이다. 그 더 큰 “명분”이라는 것이 대규모 사업, 돈, 권력 등 소위 말하는 “사리사욕”이라면 경제괴물이 날뛰는 격이 되어 버린다. 부를 창출하고 통제하는데 있어서 성공을 거두면 많은 이들의 복지 파괴로 이어지고, 심지어 “성공한 자”들의 심리적-영적 안정의 파괴로까지 이어진다.

남용을 규제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윤리적이고 실용적인 안전장치는 외면되고 버려졌다. 폭발은 눈에 보이는 폭탄의 형태를 띠는 것이 아니라(경제를 피폐하게 하고 그러면서도 살찌우는 전쟁 기계의 일부가 아니라면) 인간의 영혼과 삶, 자원의 비극적인 부식을 야기하는 재정적 위기주의(brinkmanship)와 고장의 형태를 띤다. 인간적 선을 위해 재정, 기술적 파워라는 광대한 자원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인간 본성의 난제를 감안하면 근본적인 도전과제가 된다.


우리는 경외감과 깊은 평화, 깨어있는 순간과 잠든 순간의 정적, 본성의 측면과 인간의 얼굴에 대한 우리의 대응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는 불가피하게 파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이제 선과 파괴에 대해 이야기해 보겠다.

마치 우리가, 부분적으로는, 나선형 구조로 구성되어 있는 것처럼 그안에서 아름다움에 대한 우리의 대응과 파괴에의 필요가 얽혀 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는, 폭발적인 프로세스로 구성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파괴가 우리의 삶에서 그토록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 놀라운 일일까?

우리는 그것을 개인화하고, 그것에 동기와 명분을 입히고자 할 수 있다. 상처와 고출력, 영토권, 생존, 승리와 패배. “누구”인가는 달라진다.
내가 당신을 누를 때도 있고 당신이 나를 누를 때도 있다. 주체-객체는 달라진다. 하지만 그 연결고리, “상대를 누른다”는 점은 동일하다. X가 Y와 연대하여 N과 연대한 Z에 맞서는 식이다.
X, Y, Z, N은 달라지지만 연대하고 맞서는 것은 똑같다. 파괴의 구조는 똑같다. 조건이 달라질 뿐이다.


때때로 우리가 만들어낸 제품이 우리로 하여금 밀실공포증을 느끼게 하는 것은 아닌가 궁금하다.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낸 것에 의해 우리가 만든 세상에 의해 갇혀있다는 느낌을 받고 파괴는 자유와 같은 느낌을 준다.

우리는 우리의 창조물에 갇힌 느낌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가 창조한 것을 파괴해야 한다.
아름다움이 추한 현실을 감추고 있다는 느낌도 있다. 어떤 것을 봤을 때 겉은 좋아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좀더 가까이 들어다 보면, 마치 눈이 어둠에 익숙해졌을 때처럼, 무덤과 시체와 피와 과격한 부당함 등 근사해 보이는 도시나 얼굴이나 작업을 떠받치고 있는 실체가 보인다. 누군가는 아름다움과 가식을 파괴해야 진정한 현실에 접근할 수 있다고 여긴다.


경제적 사이코패스의 시대에 정신분석학이 어떤 기여를 할 수 있을까? 안타깝게도 기여할 게 많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갈라진 틈을 탐구해볼 수는 있다. 일단은 이전에 사용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맞서고 지탱하고 사람들 간의 파괴에 대해 연구한다. 심오한 분석적 조우에서 나타나는 문제는 두 명의 인간이 서로를 딛고 생존할 수 있는가 이다. 그리고 인간이 자기 자신을 딛고 생존할 수 있는가, 있다면 얼마나 제대로 생존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치료 시에는, 순간순간 감정을 느끼거나 교류하는 것은 숨쉴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가진다. 이러한 느낌의 실타래는 상호 파괴와 연관되어 있다. 내가 당신을 파괴하고 당신이 나를 파괴하는 식이다.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킬러라고 볼 수 있다.

치료 시 우리는 살인 충동을 추적하고 이것이 어떻게 움직이고 작용하며 어떤 형태를 띠는지, 어떻게 기능하는지, 전체적으로 심리에 어떤 기여를 하는지 살펴본다.
자기 파괴와 상호파괴를 애착장애의 산물로 치부해버릴 수는 없다. 후자가 그것을 강화시킬 수 있지만 말이다. 이것은 인간 본성에 뿌리깊이 박혀 있어 우리의 일부를 이루는 것 같다. 인간 본성의 파괴적인 측면으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는 문제로 남아 있다. 현재로서는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으며 대답을 알고 있는 척 해봐야 이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는 일을 뒤로 미루는 결과만 낳을 뿐이다.

예수는 “아버지여 그들을 용서하소서. 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릅니다”라고 말함으로써 그 문제의 해답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며 알고 있는 척하는 것은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 뿐이다.


상대를 죽였지만 상대가 생존한다. 죽음을 당했지만 생존한다. 이것은 치료법을 통한 심리적 파라독스중 하나이다. 죽음을 당했는데 잘 살아간다. 죽였는데 상대방은 잘 살아간다.

치료는 죽음의 훈련이자 삶으로 돌아가는 행위이다. 상호적 죽음이자 삶으로 돌아가는 행위이다. 이 이중적인 움직임은 내가 신념의 리듬이라고 부르는 것의 일부이다. 신념은 이러한 움직임을 견딜 수 있는 것,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그와 동시에 신념은 상호적 완수의 결과인 것이다(Eigen 2004).


여기서 신념이란 믿음이 아니다. 우리는 말 그대로 믿음 때문에 상대를 죽인다. 신념은 경험과 경험의 탐구를 지지한다. 신념은 믿음보다 심오하다. 믿음은 설익은 조직, 신념의 종결로 작용하는 경우가 많다.
신념이 믿음을 넘어서는 한가지 방식은 현실을 여는 미지의 변화, 우리가 느낄 수는 있지만 콕 집어 설명할 수 없는 변화를 구현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명상은 우리를 이름없는 장소로 데려갈 수 있다. 그럴 때에는 우리를 변화시키는 이름없고 이미지없는 움직임에 방해받지 않으려 애쓴다.


치료상의 신념은 파괴적인 충동과의 결합을 지원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생존하는 살인, 이중살인에 관련된 프로세스에 대해 알게 되고, 어떤 “느낌”을 갖기 시작한다.

치료를 받는 두 사람이 서로를 딛고 생존할 수 있을까? 어느 정도의 수준으로 가능할까? 치료는 완수의 수준을 높인다. 당신은 어떤 수준으로 자신을 생존시킬 수 있을까?


치료에 있어서, 우리는 상호적 살인, 죽음, 재생을 통해 서로와 함께 하는 것을 견딜 역량을 구축한다.
실패로 끝나거나 사람들의 삶을 손상시키는 경우가 많은 기본적 리듬이다.

치료 시 살인, 죽음, 재생은 감정적 현실에서 생존한다. 글자 그대로의 실제 살인은 그 과정을 무위로 돌리고 말 것이다. 글자 그대로의 살인은 감정의 영고성쇠를 참아내는 역량의 구축을 간략하게 만든다. 실제 살인은 감정적인 삶을 인내하고 꿈꾸기 시작하며 후자와 함께 일하는 역량을 구축하는 어려운 작업을 대체한다.


우리는 모든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수 있다. 빈곤과 기아, 인종적, 성적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선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데크 위의 루스 카드, 감정적 삶이 구축된 것의 일부라도 파괴할 방법을 찾는다 해도 놀라지 말아야 한다.

나는 Feeling Matters (2007)에서 감정이 2급 시민으로서 작용하는 한 사람들은 2급 시민이 될 것이라고 쓴 적이 있다. 인간의 본성이라는 참호 속에서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우리가 창조하고자 하는 것을 파괴하게 될지도 모른다.


자신과의 투쟁도 하나의 요소이지만 전통적인 “통제” 모델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겠다.

자신의 “동물적” “저속한” 또는 “다루기 힘든” 본성을 통제하는 것은 대중을 통제하고 파괴를 일정 수준 규제하는데 있어서의 얼마간의 가치를 가져왔다. 그러나 전쟁과 투옥이 영원히 재발되고 “상-하”에 관련된 불평등이 악화되는 것은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를 오히려 악화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투쟁은 필요하지만 필자는 투쟁 이상의 것을 말하려고 한다. 심리적 미뢰를 발달시키는 것과 닮은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경험을 맛보고 작업하는 역량을 키우는 것은 경험의 모든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경험이 쌓이도록 하는 역량을 개발하는 것. 파트너쉽보다 덜 통제적인 모델, 우리의 역량과 파트너를 이루어 함께 진화하는 모델이다.


그 어느 때보다 요즘 생생하게 다가오는 영원한 과제는 선함을 일상생활에 암호화하는 시간과 작업이다.

선함이라는 것이 우리의 삶보다 더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우리의 삶에 유용한 정보를 줄 수 있을까?

선한 사람들은 선함이 중요성을 갖도록 만들기 위해 오랜 시간 노력해왔다. 그들은 어느 정도는 성공을 거두고 있다. 삶이 이들이 기울인 노력의 상당 부분을 쓸어가 버린다 해도 말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는 좌절을 한다. 선한 일을 하고자 하는 의지가 해가 되는 경우가 때때로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단순히 삶에 대한 욕망의 이야기일 뿐 아니라 생존에의 의지를 다루고 있다. 이것은 선함이 살아남고 삶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고 서로를 더 나은 방식으로 대하고자 하는 투쟁을 다루고 있다.

성경은 “서로를 죽이지 말라”는 등의 목표를 설정해두고 있지만 그 방법을 우리에게 보여주지는 못하고 있다. 심지어 신도 대노하여 우리를 멸망시키려 했으니까.

나는 분노(Rage)라는 책에서 신의 성격은 우리의 파괴적 현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좋은 예를 제공해주고 있다는 지적을 한적이 있다. 우리를 멸망시키고자 했던 신의 의도는 우리 자신을 멸망시키고자 하는 우리 자신의 경향이다. 마치 파괴를 통해서 파괴 문제를 뿌리뽑을 수 있다는 듯 말이다.


누구도 해답을 알지 못한다. 우리는 결정이나 조치의 결과가 무엇이 될지 미리 알 수 없다.

우리는 과학, 예술, 정치, 삶의 모든 측면에서 많은 종류의 기여가 필요하다.

나는 정신분석이 여기에 무언가를 더 한다고 생각한다. 정신분석을 통해 우리는 파괴에 대해 조금 더 배우게 된다. 감정이 중요하다는 점과,우리는 민감함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느껴야 할 필요가 있는 존재라는 점, 윤리는 우리 자신과 타인에 대한 예민함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배운다.

정신분석이 답을 제시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형태의 대화, 영혼에 대한 새로운 모험과 조사를 탐구할 수 있는 길을 제시해준다. 이것은 최소한 우리의 불가사의하고 꽉 차 있는 정신이 제시하는 어려움과 과제를 강조해준다.


적대감은 사방에 존재한다. 집단과 개인, 가족과 국가간의 경계에, 자기 자신의 내부에도 존재한다.
특정한 적대감은 우리의 정신적 면역체계의 일부이다. 칸트가 말했듯이 우리는 일종의 비사회적인 사회적 집단이다. 우리의 보호적인 적대감은 미친듯이 날뛰게 되기 십상이다. 마치 따뜻하게 해주려고 다가가면 상처를 입히게 되는 고슴도치처럼 말이다.


하지만 우리의 비관적 현실주의의 바다에는 채워질 수 없는 낙관주의의 씨앗이 존재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장비를 사용하는 것, 우리의 역량을 단순히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파트너를 이루는 것,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것에 대해 배우고 계속 배우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이것은 우리가 수천 년 간, 혹은 그보다 오랜 세월동안 하고자 했던 바로 그것이 아닐까? 이것은 진화가 우리를 데려가는 곳, 살인(육체적인 것이건 경제적, 사회적, 영적인 것이건)의 욕구와 반대되는 곳에 한층 가까운 곳이 아닐까? 우리를 구성하고 있는 것과의 투쟁을 포용하고 더 잘하고자 노력하는 것이 한걸음 가까워지는 것이 아닐까?
정신분석은, 통제의 모델을 애정어린 탐구와 정서적 전달의 모델과 결합시킴으로써 우리가 더 많은 상자를 연다면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보고자 하는 하나의 시도이다.

한계와 실패가 무엇이건 간에 정신분석은 반드시 다루어져야 하는 정신적 현실의 측면을 다루고 있다.

정신적 측면을 불법화하거나 금지하려는 시도는 –과학, 영혼, 웃음, 고함, 행동주의, 무대책으로 – 해야 할 일을 지연시킬 뿐이다. 미지의 작업. 우리는 정신적 측면(psyche)을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일축할 수 없다.


우리는,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함께 존재하는 방법을 살펴보고 있다.

서로를 느끼는 방법, 감정적 미뢰를 행사하고, 서로를 패배시키는 것보다 훨씬 흥미로운, 서로를 이해하는 방법을 말이다. 진화의 칼날은 사람들이 함께 존재하는 것이란 어떤 것인지에 관련된 것이다.

정감있는 태도는 우리가 그것을 만들어가면서, 우리를 만들어가는 원재료가 된다. 존재한다는 풍부한 질감의 가능성을 창조하면서 말이다.
경청하고 느끼고 말하는 것, 우리 앞에 놓인 긴 여정은 색깔과 재료의 형태, 유전자, 신경화학물질을 개조하는 것보다 중요성이 덜하지 않다. 듣고 느끼고 말하는 것은 진화의 중요성이 현재 바탕을 두고 있는 것들이다. 가치에 대한 우리의 느낌은 이 진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참고문헌 -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