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진리, 그리고 삶
- 니체의 여성 은유에 대한 해석
임건태(우송대학교)
[주제분류] 독일철학, 사회철학,
[주 제 어] 니체, 여성, 은유, 사랑, 진리, 삶
[요 약 문]
이 글에서는 니체가 여성에 대한 일련의 논의를 통해 궁극적으로 목표로 하고 있는 지점이 어디인지를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내려는 시도를 할 것이다. 니체에게 여성에 대한 언급과 주목은 산발적이지만 지속적으로 여러 맥락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특히 크게 세 가지 주제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니체가 주장하는 바에 따라 사랑이 여성에 대해 갖는 의미에 주목해 볼 것이다. 그리고 이는 채찍 언명이 등장하는 장면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려는 시도와도 일맥상통한다. 다음으로 니체가 여성을 진리와 무관하고 비진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서술하는 동시에 여성이 그럼에도 진리를 나타낼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데서 확인할 수 있는 외견상의 모순을 집중적으로 조명해 볼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니체가 제시하는 진리관의 특징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여성이 비진리와 진리를 동시에 상징할 수 있는 근거를 삶으로서 여성이라는 은유에서 찾아볼 것이다. 이는 그러한 모순을 해소할 수 있는 한 가지 가능성을 모색하는 일이기도 하다.결국 이러한 과정을 통해 우리는 니체가 단순한 여성혐오주의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여성성을 새롭게 평가하고 삶의 이중성에 대한 긍정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위해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1. 들어가는 말
니체는 많은 여성주의자(feminists)에 의해 여성혐오주의자(misogynist)로 취급되어 왔다. 그리고 사실상 니체가 하고 있는 여성에 대한 여러 가지 언급들 가운데 그러한 혐의를 받을 만한 것들이 적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서양 철학사에서 등장하는 철학자들 중 니체만큼 명시적으로 여성에 대한 논의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 사람은 거의 드물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니체는 그의 저작 곳곳에서 구체적인 여성 개인의 문제에 대해 주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추상적인 차원의 여성성에 대해서도 심도 있게 논의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니체가 여성 문제를 그의 철학 속에 폭넓게 끌어들임으로써 궁극적으로 겨냥하고 있는 바가 과연 무엇이었는지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이 물음에 대답하기 전에 일차적으로 필요한 것은 니체에 대한 페미니스트들의 공격이 과연 얼마나 정당한지를 간략하게나마 평가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여기서는 세 가지 사항에 초점을 맞추어 볼 것이다.
우선, 여성에 대한 니체의 전반적 태도가 결코 적대적이지 않았다는 증거를 제시할 것이다. 이 점이 입증된다면 여성을 무조건적으로 혐오한 철학자로 니체를 낙인찍는 것은 너무 성급한 매도라는 것이 밝혀질 것이다.
둘째, 니체를 여성혐오주의자로 규정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소위 채찍 언명, 즉 “여성에게 갈 때는 채찍을 잊지 말아라.”라는 진술이 과연 일반적으로 인정되듯이 그러한 표면적 의미만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는지 물어볼 것이다. 만약 그러한 진술이 다른 식으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니체를 일방적으로 폭력적 마초로 규정하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게 될 것이다.
셋째, 이처럼 니체를 단순히 여성에 대한 경멸적이고도 적대적 태도를 지닌 가부장적 폭군으로 파악하지 않기 위해 기울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니체의 저술에 여전히 불가피하게 남아 있는 여성 혐오적인 언급들을 설명할 수 있는 한 가지 방안으로 고려해 봄직한 것은 그러한 논의들을 니체 개인의 체험, 즉 루 살로메와의 관계 속에서 경험하게 된 실연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는 것이다.1)
만약 이러한 점이 설득력을 얻게 된다면 우리는 니체의 저술속에서 여성에 대한 철학적 수준의 논의와 개인적인 체험에서 비롯하는 여성에 대한 부정적 언명들을 구분해서 논의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를 마련하는 셈이 된다.
다음으로 니체가 여성에 대한 일련의 논의를 통해 궁극적으로 목표로 하고 있는 지점이 어디인지를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내려는 시도를 할 것이다.
니체에게 여성에 대한 언급과 주목은 산발적이지만 지속적으로 여러 맥락에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여기서는 특히 크게 세 가지 주제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니체가 주장하는 바에 따라 사랑이 여성에 대해 갖는 의미에 주목해 볼 것이다. 그리고 이는 채찍 언명이 등장하는 장면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려는 시도와도 일맥상통한다. 다음으로 니체가 여성을 진리와 무관하고 비진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서술하는 동시에 여성이 그럼에도 진리를 나타낼 수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데서 확인할 수 있는 외견상의 모순을 집중적으로 조명해 볼 것이다. 이를 통해 니체가 제시하는 진리관의 특징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여성이 비진리와 진리를 동시에 상징할 수 있는 근거를 삶으로서 여성이라는 은유에서 찾아볼 것이다. 이는 그러한 모순을 해소할 수 있는 한 가지 가능성을 모색하는 일이기도 하다. 결국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니체가 단순한 여성혐오주의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여성성을 새롭게 평가하고 삶의 이중성에 대한 긍정이라는 궁극적 목표를 위해 그것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1) 물론 이에 대하여 익명의 한 심사자가 지적하고 있듯이, 과연 원한의 인간을 비판하고 있으며 스스로에게 엄격했던 철학자 니체가 그러한 개인적 체험을 여과 없이 자신의 저술에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고 단정할 수 있는지 하는 의문을 충분히 제기할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이 문제에 대해서 좀 더 설득력 있는 논증을 즉각 제시하는 일은 현재로서는 힘에 부친다. 다만 그러한 작업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앞으로 이 부분을 보완할 것을 약속할 수 있을 뿐이다.
2. 비판적 페미니스트로서 니체
1874년 7월 10일 바젤 대학 교수위원회는 여성의 대학 입학을 허가하는 문제를 결정하기 위해 모임을 가졌다.2) 이 모임은 라이프치히 출신 루빈슈타인(Rubinstein)이라는 여성이 고전학과 박사 과정에 지원함으로써 열린것이다. 두 시간의 논의 끝에 위원회는 6대4로 입학을 불허했다. 위대한 역사가이자 니체 자신의 영웅이었던 부르크하르트(Jacob Burckhardt)가 입학불허에 동의했던 반면, 니체는 입학을 허가하는 편에 속해 있었다.
이 같은 짧은 에피소드는 여러 가지 표면적인 언급만 갖고 니체를 반(反)페미니스트로 단정 짓는 것이 매우 성급한 일임을 암시한다. 그 밖에도 니체를 그렇게 규정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는 사실은 또 있다.
즉 유럽에서는 1848년 노동자 봉기 기간 동안 여성 해방이 처음으로 이슈화되었는데, 그 봉기를 지지했던 여성들은 여성의 권리에 대한 요구와 노동자의 권리에 대한 요구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주장했고, 페미니스트이자 사회주의자였던 마이센버그(Malwida Meysenbug)는 그러한 여성들 중 하나였는데, 니체는 1876년 바이로이트 축제 개막식에서 그녀를 만났으며, 그녀의 도덕적 이상주의에 크게 감탄했다.
니체는 그 후에 줄 곧 그녀를 어머니 같은 친구로 삼았다.3) 특히 니체와 마이센버그의 관계에서 주목할 점은 니체가 소렌토(Sorrento)에 있는 휴양지에서 그녀 및 몇몇 친구들과 함께 읽고 걷고 먹으면서 지낸 몇 달간의 모임 속에서 “자유정신들을 위한 수도원”4)을 감지했으며, 이러한 감흥은 결국 자유정신을 위한 책이라는 부제가 붙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출간으로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바로 이 책에서부터 니체는 여성 문제를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하고 있다.
물론 이 저술에서 니체가 여성을 모두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여성에 대한 긍정적 태도와 외견상 부정적으로 보이거나 애매한 태도가 혼재되어 있다고 하는 편이 적절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니체가 기존의 전통적인 철학에서 파악한 여성상과는 분명히 차별화되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점은 충분히 분명하다. 우선 여성 자체의 능력이나 자질과 관련하여 니체는 여성이 남성보다 모든 면에서 열등하다는 편견과는 달리 오히려 “완전한 여성은 완전한 남성보다 더 높은 유형의 인간”5)이라고 적시한다. 또 여성이 어리석다는 비난에 나름대로 대응하려는 듯 니체는 많은 사람들이 대개 여성들이 남자처럼 어리석다고 말한다는 사실을 실마리로 삼아 “어리석음은 여성에게 여성답지 않은 것”(MA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MA) Ⅱ, 2. Der Wanderer und sein Schatten Nr. 273,KSA 2, 671쪽)이라고 단정한다.
셋째, 니체는 남성이 지성적이고 여성이 감성적이라는 통념을 깨고 오히려 “여성이 지성을 갖고 있으며, 남성들은 감정과 정열을 갖고 있다”(MA Ⅰ, Nr. 411, KSA 2, 272쪽)고 이해한다. 이 같은 세 가지 사항을 종합해 볼 때 니체는 여성의 지적 능력을 비교적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해석을 해 볼 수 있다.
이어서 남성과 관계된 여성에 대한 논의를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니체는 여성의 사랑이 남성과 관련하여 갖는 힘을 인정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자기경멸이라는 남성의 질병에 확실히 도움이 되는 것은 현명한 여성에게 사랑받는 것이다.”(MA Ⅰ, Nr. 384, KSA 2, 266쪽) 더불어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 여성이 보여주는 모습이 철저하게 계산된 것이라는 점에서 여성의 관계 능력이 남성보다 한 수 위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여성이 갖고있는 정신이 남성을 두려워하게 만들 것이라는 확신은 자신들의 정신적인 예리함을 스스로 기꺼이 거부하며, 근시안적이라는 평가를 의도적으로 떠맡기까지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여성은 남성으로 하여금 더 친밀감을 느끼게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MA Ⅱ, 2. Der Wanderer und sein SchattenNr. 270, KSA 2, 670쪽)
다른 한 편 여성 일반을 비하하는 듯이 보이는 주장들에 대해 그러한 혐의를 완화할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그런 주장들을 특정한 여성들에 대한 비난으로 국한시키는 것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언급은 이러한 전략이 적용될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상류계급 여성들은 만약 어떤 것에 대하여 사교 모임에서 말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 일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한다.”(MA Ⅰ, Nr. 383, KSA 2, 266쪽)
여기서 니체는 여성들의 수다스러움이나 허영심을 꼬집고 있지만 직접적 공격 대상은 특정한 부류의 여성이다. 따라서 그러한 비난을 일반화시키는 것은 과도한 해석이다.
혐의를 완화시키는 또 한 가지 방안은 여성에 대한 폄훼를 여성의 현재상황에 대한 비판으로 보는 것이다.
여성해방이라는 제목의 다음과 같은 아포리즘에서 등장하는 니체의 언급은 일단은 여성을 비하하는 발언 이외의 의미로 받아들이기 힘들어 보인다.
“도대체 학문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는 한명의 여성보다 더 희귀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가장 우수한 여성들마저도 마치 자신들이 그 무엇에 의해서 학문보다 우월한 것처럼, 가슴속에서는 은밀하게 학문에 대한 경멸에 가까이 가고 있다.”(MA Ⅰ, Nr. 416, KSA 2, 274쪽)
하지만 니체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마지막에 한 마디를 덧붙인다. 그것은 바로 “당분간은 그러하겠지만 이 모든 것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MAⅠ, Nr. 416, KSA 2, 274쪽)
아포리즘의 제목과 관련시켜 볼 때 이 구절의 의미는 여성의 이 같은 상태를 타개하고 모든 것을 달라지게 할 수 있는 길이 바로 여성해방 속에 있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6)
그러나 니체가 여성해방을 지지한다고 해서 페미니즘을 무조건 옹호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선악의 피안? 아포리즘 144번에서 니체는 통속적인 여성혐오주의자의 명제처럼 들리는 말을 하고 있다.
즉 여성이 학자적인 의도를 갖는 경우, 여성의 성적 특성에는 대개 잘못된 어떤 것이 존재하게 된다는 것이다. “한 여성이 학자적인 성향을 갖고 있을 때, 그녀에게는 성적인 결함이 있는 것이 보통이다.”(Jenseits von Gut und Böse (=JGB), Nr. 144, KSA 5, 98쪽)
하지만 니체가 학자 일반이 정신적이고 창조적인 과정과 물리적인 과정을 겪고 생산하는 것을 가로막는다고 비판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니체의 주장은 여성의 특성과 능력을 단순히 비하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여성이 부정적 의미의 학자가 됨으로써 창조적 생산을 할 수 있는 진정한 여성성이 훼손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메시지로 읽는 것이 더 적합할 것이다.
그래서 통속적 페미니즘이 만약 이처럼 여성성을 온전하게 살려내지 못하는 방향으로 진행된다면 니체는 당연히 거기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같은 점은 같은 책 아포리즘 238번에서 다시 한 번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거기서 니체는 남성과 여성의 대립을 무시하고 동등한 권리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멍청하다고 주장한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근본적인 문제를 잘못 생각하고, 여기에 있는 헤아릴길 없는 대립과 그 영원히 적대적인 긴장의 필연성을 부정하며, 여기에서 아마 평등한 권리와 교육, 평등한 요구와 의무를 꿈꾼다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임을 나타내는 전형적인 표시이다.”(JGB, Nr. 238, KSA 5, 175쪽)
이 발언 역시 맹목적 페미니스트들에게는 매우 적대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니체의 진정한 의도는 남성과 여성은 물리적이거나 정신적으로 차이가 날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같은 방식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남성과 여성의 이 같은 차이를 무시하는 여성주의 운동은 여성의 탈여성화나 타락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그래서 니체가 여성과 남성의 소박한 평등을 주장하는 페미니즘을 비판하는 이유는 그러한 운동이 결국 여성의 남성화를 가져옴으로써 여성의 자연적인 창조성을 잃게 만들고 긍정적 생산 능력을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니체는 강력한 여성성을 보존하는데 관심을 기울이고 있으며, 그러한 과정속에서 소박한 의미의 페미니즘 운동이 단순히 여성의 남성화를 목표로 함으로써 또 다른 형태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전락할 수 있음을 강하게 경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니체를 비판적 페미니스트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2) 이 에피소드에 관해서는 Julian Young, “Nietzsche and Women”, The Oxford Handbook of Nietzsche, Oxford 2013, 46쪽 참조.
3) “니체의 누이동생 엘리자베스는 마이센버그의 모성성이 니체가 그녀에게 끌리게 한 특징임을 올바르게 지적하고 있다.”, Carol Diethe, Nietzsche’s Women, Berlin, New York 1996, 77쪽.
4) Friedrich Nietzsche, Nietzsche Briefwesel. Kritische Gesamtausgabe, in 25 Bänden, Band Ⅲ.1, (Hg) G. Colli u.a., Berlin 1975-2004, 471쪽. 이하에서는 본문 괄호 안에 KGB, 권수및 쪽수로 표기함.
5) Friedrich Nietzsche, Menschliches, Allzumenschliches Ⅰ, Nr. 377, Nietzsche Sämtliche Werke. Kritische Studienausgabe in 15 Bänden(=KSA), Bd 2, (Hg) G. Colli u.a., München 1999, 265쪽. 이하에서는 본문 괄호 안에 KSA, 권수 및 쪽수로 표기함.
6) 니체와 페미니즘을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는 국내 논문으로는 김정현, 「니체와 페미니즘- 데리다와 코프만의 논의를 중심으로」, 『철학』67권, 한국철학회, 2001, 79-102쪽 참조.
3. 채찍 언명의 이면
“여자들에게 가려는가? 그러면 채찍을 잊지 말아라!”(Also sprach Zarathustra(=Za),Ⅰ, Von alten und jungen Weiblein, KSA 4, 86쪽)7)
이 구절은 니체가 여성혐오주의자였을 뿐만 아니라 폭력적 마초이기도 하다는 강한 인상을 심어주기에 아주 안성맞춤이다. 즉 여성들을 강제로 복종시키기 위해서는 채찍으로 상징되는 폭력적 수단이나 힘이 반드시 요구된다는 식의 관점이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이 언급을 받아들였던 해석 방식이었다고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과연 이 같은 표면적 해석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 물어볼 필요가 있다. 제일 먼저 주의해야 할 사실은 위의 발언을 한 주체가 누구인가 하는 점이다. 만약 그러한 발언의 주체가 차라투스트라라면 그 내용을 자기 것으로 마음속에 품고 있는 자 역시 차라투스트라이며, 그것을 니체의 입장과 동일시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즉시 드러나는 점은 위 발언의 주체는 차라투스트라가 아니라는 점이다.
발언의 주인공은 오히려 차라투스트라와 대화하는 늙은 여성이다. 다시 말해 차라투스트라가 여성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한 다음 끝으로 늙은 여성에게 그 나이에 터득한 작은 진리를 말해달라고 하면서 결국 듣게 되는 이야기가 바로 위에 나온 언급이다. 따라서 위에 나온 발언을 차라투스트라의 입장에 귀속시킴으로써 그것을 니체의 직설적 생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정당화될 수 없다.8)
Happy birthday, Friedrich Nietzsche (15 October 1844 — 25 August 1900) — pictured above with Lou Andreas-Salome (left) and Paul Ree (center)
다음으로 채찍 언명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중요한 근거로 들 수 있는 것이 바로 니체 자신이 직접 연출한 유명한 사진 한 장9)이다. 그 사진에는 작은 장난감 채찍을 들고 있는 젊은 여인과 그 옆으로 그녀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두 명의 남자가 등장한다.
이 젊은 여인은 루 살로메이며, 두 남자는 니체와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파울 레이다. 1882년 5월에 세 사람은 루체른(Luzern)에 머물고 있었는데, 스튜디오에서 사진 찍는 날짜를 정하고 세부적으로까지 관여한 것은 바로 니체였다. 좀 더 자세히 사진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건초마차 앞쪽에는 파울 레가 서 있고, 그 뒤에 니체와 루 살로메가 있는데, 그녀는 말오줌나무 꽃다발로 장식된 부드러운 작은 채찍을 흔들고 있다. 배경에는 융프라우가 나타나 있다.
그런데 이 같은 장면은 우리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나온 채찍 언명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심각한 잘못일 수 있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왜냐하면 이 사진은 우리가 채찍 발언에서부터 추리할 수 있는 장면과는 전적으로 반대되는 모습을 의도적으로 연출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여기서는 채찍을 들고 지배권을 행사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남성들이 아니라 여성이다. 이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전통적인 지배 관계를 전복시키는 도발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더욱이 니체가 이 사진을 연출해서 찍은 것이 채찍언명이 등장하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1부를 비롯하여 2부와 3부까지 나온 1883년보다 일 년 전이었다는 사실까지 감안한다면, 채찍 언명의 의미는 지금까지 받아들여져 왔던 것과는 완전히 달리 파악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충분히 개연성이 있다.10)
이제 차라투스트라의 채찍 발언을 재고할 여지는 충분히 마련된 셈이다.
여기에 이처럼 논의를 계속 진행할 수 있는 중요한 한 가지 근거를 덧붙이자면 니체는 스스로 여성적인 것에 대한 전문가임을 자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니체는 자신의 독특한 전기적 에세이에서 스스로 “영원하고 여성적인 것(Ewig-Weiblichen)에 대한 최초의 심리학자”(Ecce homo(=EH), Warum ich so gute Bücher schreibe Nr. 5, KSA 6, 305쪽)임을 자부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여성적인 것에 대한 전문가로서 니체가 여성을 폭력으로 다스려야한다고 아주 소박하게 주장하는 것으로 단정하기는 정말 어려워 보인다. 그렇다면 여성적인 것의 전문가로서 니체가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통해 진정으로 전달하고자 한 내용은 무엇일까?
마지막 채찍 발언이 등장하기 전에 차라투스트라는 여성에 관해 이야기해달라는 늙은 여인의 요청에 따라 이야기를 시작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여성이란 위버멘쉬를 낳을 수 있는 임신이라는 해결책을 가진 수수께끼임을 주장하면서 여성에 대해 제대로 말하기 위해 그와 대립적인 위치에 있는 남성에 대해 더욱 분명하게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남성은 어린아이와 전사의 혼합물로서 전쟁과 놀이를 원한다. 그리고 여성은 그런 남성의 장난감이다. 그런데 남성은 그런 여성을 두려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랑하는 여성은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기 때문이며, 그밖의 모든 것은 그녀에게 무가치하기 때문이다.”(Za Ⅰ, Von alten und jungen Weiblein, KSA 4, 85쪽) 물론 남성은 이런 위험에도 불구하고 여성을 원하고 추구한다.
그래서 남성의 행복은 나는 원한다는데 있고, 여성의 행복은 그가 원한다는 데서 성립한다.
차라투스트라가 한 여기까지의 언급을 살펴볼 때 남성과 여성의 전통인 위계질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오히려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내용을 통해 볼 때 여성이 남성과의 관계 속에서는 우위를 점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위버멘쉬를 낳는 능력을 갖춘 것도 여성이며, 사랑으로 무장한 여성은 남성에게 두려움을 주고, 그를 지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 아이와 비유된다는 측면에서도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추측할 수 있는 니체의 견해는 여성을 아이처럼 유치하게 보아왔던 기존의 전통적 가치관과는 큰 차이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차라투스트라가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한 뒤 늙은 여성이 그에게 한 채찍 발언은 그녀가 차라투스트라의 이야기를 충분히 납득한 결과 스스로 체득한 진리를 선언하고 있는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진리란 차라투스트라의 말대로 여성과 남성의 세력 관계에서 여성이 우위에 설 수밖에 없으므로 여성에게 다가갈 때 약자로서 남성은 항상 채찍이라는 도구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요컨대 강자는 장난감 채찍 말고 진짜 채찍은 필요 없다고 할 수 있다.11)
7) 이 구절의 영역(英譯)이 오해를 부추기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즉 한 영어 번역자는 위의 구절에서 채찍(die Peitische)을 your whip로 번역함으로써 그것이 여성에게 가는 남성의 소유임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독일어 원문에는 영어의 소유대명사에 해당되는 단어가 없고 단지 정관사만 붙어 있으며, 따라서 채찍의 소유자를 반드시 남성이라고 단정할 이유 역시 없는 셈이 된다. 요점은 채찍이 반드시 남성에게 속하고, 따라서 그것이 여성에게 사용될 수밖에 없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에 대해서는 C. Diethe, 앞의 책, 64쪽.
8) 뿐만 아니라 백번 양보해서 설사 그러한 발언이 차라투스트라의 생각을 반영한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왜냐하면 차라투스트라와 니체를 전적으로 동일한 인물로 파악할 수 있는지 여부도 아직까지 그리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게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이 같은 사항까지 고려하게 되면 우리가 주목해야 할 문제의 범위가 너무 넓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여기서는 일단 이 정도의 환기로 그치고, 차라투스트라와 니체 사이에 차이보다는 동일성이 더 크다는 것을 전제로 앞으로의 논의를 전개시켜 갈 것이다.
9) Julian Young, A Philosophical Biography Friedrich Nietzsche, Cambridge 2010, photography 25.
10) 가령 이 사진을 바탕으로 채찍 언명의 의미를 추측하기 위해 물어볼 수 있는 물음은 다음과 같은 것이 될 수 있겠다. “여성의 노예로서 남성이 자신을 길들이는 도구를 가져다주어야 하는 것이 바로 장난감 채찍을 흔들고 있는 여성인가? 그래서 지배적인 초인의 철학자 니체는 그의 친구 레와 마찬가지로 진짜 노예들이며, 더 젊은 살로메가 실제로는 그들의 여주인인가? 혹은 니체는 살로메와의 실망스런 체험 후에 최소한 문학적인 방식으로 힘의 관계를 역전시키고자 했는가?”, Florian Roth, “Du gehst zu Frauen? Vergiss die Peitische nicht! -Nietzsche, die Frauen und die Liebe”, Vortrag an der Münchner Volkshochschule, 18.Februar 2013, http://florian-roth.com
11) 물론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대응도 가능하다. 즉 여성이 채찍을 맞아야 하는 대상이 되든지 아니면 여성이 채찍을 들어야 하는 대상이 되든지 간에 어차피 남성적 규율로 이루어진 위계질서는 변함이 없다는 의미에서 니체 혹은 차라투스트라는 여기서 여전히 전통적인 가부장적 편견을 선포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J. Young, 앞의 책, 49쪽.
4. 루 살로메와의 관계를 통해 본 니체 여성관의 변화
여러 가지 방향에서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차라투스트라의 채찍 발언 이후 여성에 대한 니체의 태도는 매우 적대적으로 돌변한다. 특히 『선악의 피안』에 등장하는 여성에 대한 언급들은 니체의 입장에서 그렇지 않다고 명확하게 변명하기가 정말 어려울 정도로 여성혐오주의적인 반페미니스트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준다.
우선 니체는 여성의 특성에 대해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여성에게는 현학적인 것, 천박한 것, 학교 선생 같은 것, 하찮은 오만, 하찮은 무절제와 불손함이 많이 숨어 있다.”(JGB, Nr. 232,KSA 5, 171쪽)
그리고 이러한 기질적 특성은 여성들 자신도 스스로 자신들을 경멸하게 만든다.
“일찍이 여성 스스로 여성의 머리에 깊이가 있고 여성의 가슴에 정의가 있다고 인정한 적이 있던가?”(JGB, Nr. 232, KSA 5, 172쪽)
니체는 여성에게 존재하는 이런 부정적 특성들을 “장갑 안에 숨겨진 호랑이 발톱”(JGB, Nr. 239, KSA 5, 178쪽)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조금 더 심하게는 “위험하고 아름다운 고양이”(같은 곳)에 비유하고 있다.
그리고 결국 니체의 이 같은 입장은 여성을 소유물이나 사유재산으로 간주하는 동양적 사고방식이 합리적이라는 주장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JGB, Nr. 238, KSA 5, 175쪽)
그렇다면 니체가『선악의 피안』을 집필하게 될 시기에 과연 어떤 원인이 여성에 대한 이 같은 독설을 쏟아내게 했을까? 이에 대한 답으로 여기서는 니체가 루 살로메와의 관계 속에서 겪은 쓰라린 경험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사건이 있었던 것은 1882년이었다.12) 루 살로메(Lou Salomé)는 당시 21살의 아름답고 총명한 여성이었다. 그녀는 교육을 받기 위해 유럽으로 가도록 집안의 허락을 받았으며, 취리히 대학에서 강의를 들었다. 그녀는 총명한 남자들과 교류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교육 과정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었다.
1882년 봄에 니체는 그의 친구였던 파울 레에게서 편지를 한 통 받았는데, 거기서 레는 철학에 관해 커다란 자질을 보이고 있으며, 니체를 만나고 싶어 하는 아름답고 젊은 러시아 여성이 마이센버그와 함께 머물고 있는 로마로 올 것을 니체에게 권했다. 1882년 3월 26일 레는 니체와 살로메를 서로 소개시켰다.
니체는 사랑에 빠졌고 레에게 그를 위해 그녀에게 결혼 제안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니체는 모르고 있었지만, 레는 살로메와 그의 친구 니체 사이에 사랑을 맺어주는데 관심이 없었다. 이미 그 와중에 레 자신이 살로메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레는 한 달 전 자신이 한 제안처럼 니체의 결혼 제안이 정중히 거절당했을 때 내심 안심했다. 이 같은 복잡한 상황 속에서도 세 사람은 함께 읽고 쓰기 위한 공동생활의 장소를 구해야 한다는데 동의했고, ‘자유정신을 위한 수도원’을 세우기 위해 소렌토로 돌아가기로 합의했다.
5월초 세 사람은 로마에서 루체른으로 여행을 시작했고, 그 도중 사크로몬테(Sacromonte) 산책길에서 니체는 살로메와 키스했다. 그런데 살로메는 나중에 이 일을 더 이상 기억할 수 없다고 회고하고 있다.13)
어찌되었든 니체는 루체른에 도착하고 나서 다시 한 번 살로메에게 결혼제안을 하지만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거절당한다. 여기서 세 사람은 사진 스튜디오를 방문하고 거기서 유명한 채찍 사진을 찍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이 사진에는 채찍을 든 살로메가 두 마리 말(니체와 레)이 끄는 마차 앞에서 있다. 세 사람의 연애 사건과 관련시켜 니체가 사진을 이처럼 연출한 의도를 살펴보면 그것은 비교적 분명하다.
즉 니체 자신과 레가 살로메에게 종속되어 있음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사진의 진의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한 번 환기하자면 이 에피소드 이후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타난 채찍 언명은 강자인 여성이 갖고 있는 장난감 채찍과는 달리 약자인 남성이 여성에게 갈 때는 진짜 채찍을 지참하는 것을 결코 잊지말라는 경고로도 충분히 읽힐 수 있는 것이다.
5월 16일 세 사람은 루체른을 떠나 각자의 목적지로 향했다. 니체와 레는 이제 그들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는 편지 공세를 살로메에게 퍼부었으며, 이로써 그들의 신뢰는 돌이킬 수 없이 금이 갔다.
이 상황에서 그럼에도 살로메는 니체와 타우텐부르크(Tautenburg)에서 철학 공부를 하기 위해 만나기로 했다. 그리고 니체에게 함께 가기 위해 살로메는 1882년 6월 말 바그너의 파르지팔(Parsifal) 첫 공연이 열리던 바이로이트에 있던 후원자이자 니체의 누이동생이었던 엘리자베스와 만났다.
그런데 니체, 레, 살로메 세 사람 간의 관계에 더욱 악영향을 미쳤던 것은 바로 여기서 등장한 엘리자베스였다. 살로메는 엘리자베스에게 큰 매력을 느끼지 못했고, 엘리자베스는 오빠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방해하는 그 아름다운 여인을 격렬하게 질투했다. 바이로이트에서 타우텐부르크로 가는 길에 아주 심한 언쟁이 벌어졌다.
엘리자베스는 살로메를 여자색정광(nymphomania)이라고 노골적으로 비난했고 거기에 대해 살로메는 처음 결혼 이야기를 꺼낸 것은 네 오빠라고 응답했다.
살로메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즉 “잠시라도 내가 네 오빠에게 관심이 있다거나 그와의 사랑에 관심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라. 나는 어떠한 과격한 생각을 하지 않고서도 그와 같은 방에 잘 수 있을 것이다.”(KGB Ⅲ.7/1: 912-918)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우덴부르그 방문 계획은 예정대로 진행되었다.
살로메는 니체가 당시 방금 쓴 『아침 놀』이란 저술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자신이 당대의 지도적 사상가와 교류할 기회를 가졌음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물론 이 와중에서도 그녀는 레의 질투심을 내심 즐기면서 매일 매일 진행되는 일을 그에게 편지로 적어 보냈다.
타우텐부르크에서 니체와 살로메는 후원자인 엘리자베스를 노골적으로 무시했으며, 둘은 둘만의 긴 대화를 이어갔다. 니체는 이 과정에서 살로메가 자신의 학생이 아니라 계승자라고 결정했다. 타우텐부르크 방문 이후 엘리자베스는 니체의 마음이 그녀의 최대 라이벌에게서 돌아서게 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경주했다.
엘리자베스는 살로메가 바이로이트에 있는 그의 적들 사이에서 니체를 비웃고 다닌다고 알렸으며, 니체를 천박한 이기주의자라고 비난한다고 전했다. 또 그녀는 니체가 지적인 가면을 쓰고 나중에 살로메와 성적인 관계를 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는 루머를 레가 퍼뜨렸음을 니체에게 확신시켜주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난관에도 불구하고 이들 세 사람은 10월 초에 라이프치히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다.
그러나 니체는 레와 살로메가 형제자매 사이로 함께 살기 위해 떠난 후 그들 셋이 함께 꿈꾸었던 공동생활의 이념이 말뿐이었음을 깨달았다.
니체는 좌절했으며, 여섯 달 남짓 되는 기간 동안 그의 가장 친한 친구와 그의 누이동생에 대한 사랑, 그리고 더 나아가 삶에 대한 사랑까지도 잃어버렸다. 이후부터 니체는 자신의 분노와 비난을 표현하는 편지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 분노는 가끔은 레를 향한 것이었으나 대부분 살로메를 향한 것이었다.
그녀는 “더러운 원숭이”(KGB Ⅲ. 1: 435)였으며, “그녀가 가진 훌륭한 두뇌에도 불구하고 가장 낮은 수준의 인간에 속한”(KGB Ⅲ. 1: 362)다는 것이다. 그리고 니체는 그녀를 반복해서 고양이라고 칭하고 있다.
즉 그녀가 응분의 대가를 치르지 않고 니체의 두뇌를 이용하기로 한 결정을 가리켜 니체는 “사랑할 수 없는 고양이-이기주의”(KGB Ⅲ.1 : 347, 348)로 표현하고 있기도 하다.
이 같은 루 살로메와의 사건을 통해서 볼 때 우리는 대략적으로 1883년 이후 여성에 대한 니체의 태도와 평가가 급변하게 된 주요 원인은 그가 이 사건을 통해서 극심하게 겪은 고통과 좌절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말해 다른 어떤 방식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니체의 여성 비하와 여성 혐오는 그의 철학적 입장에서 나오는 것이라기보다는 그의 전기적 경험 속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해석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만일 이 같은 해석이 설득력을 얻는다면, 역으로 여성에 대한 니체의 철학적 견해를 좀 더 진지하게 다루어볼 수 있는 길이 마련되었다고 할 수 있다.
12) 이하에 나오는 니체와 루 살로메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J. Young, 앞의 책, 51-55쪽을 참고해서 나름대로 재구성한 것이다. 살로메 사건에 대한 좀 더 상세한 논의는 C. Diethe, 앞의 책, 49-61쪽 참조.
13) 실제로 거기서 일어난 일이 무엇이든 간에 이 수수께끼 같은 사건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결과를 가져왔다고 한다. 즉 하나는 니체가 마음속에만 간직하고 있던 사랑이 현실적 사랑으로 바뀐 것이고, 두 번째는 산책에서 돌아온 후 살로메는 화가 났고 레는 퉁퉁 부어 있었기에 다음 번 그들이 다시 모이는 모임이 약속보다 늦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J. Young, A Philosophical Biography Friedrich Nietzsche, Cambridge 2010, 342쪽.
5. 여성의 모든 것으로서의 사랑
니체의 여성관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나온 채찍 발언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여성의 최고 명예는 사랑에 있다는 차라투스트라의 언급이다.
이는 “여성에게는 사랑이 모든 것이며, 여성의 힘이자 본성임”14)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사랑하는 여성은 남성에게 두렵고 위험한 존재이다. 왜냐하면 여성은 이 상태에서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에서는 남성과 여성 간의 비동일성이 성립한다. 단적으로 말해 여성은 오직 사랑하고자 할 뿐이며, 남성은 사랑받고자 한다.
“남성과 여성은 각자의 사랑으로 어떤 다른 것을 이해하며, 하나의 성이 다른 성에게서 사랑이라는 동일한 느낌, 동일한 개념을 전제하지 않는다는 점이 양성에 있어 사랑의 조건에 속한다. 여성이 사랑으로 이해하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즉 어떠한 고려도, 어떠한 유보도 없는 헌신, 영혼과 몸을 통한 완전한 헌신이 그것이다.
…조건들의 이러한 부재라는 측면에서 그녀의 사랑은 바로 믿음이다. 여성은 다른 어떤 것도 갖고 있지 않다.
남성은 그가 여성을 사랑할 때, 그녀로부터 바로 이런 사랑을 원하며, 따라서 그는 그의 인격 자체에서 여성적 사랑의 전제와 가장 멀다.”(Fröhliche Wissenschaft(=FW), Nr. 363, KSA 3, 611쪽)
사랑을 이해하는 방식의 차이는 또 다음과 같은 측면으로도 나타난다.
즉 남성은 스스로 자신이 원하는 여성의 모습을 만들어내며, 여성은 이러한 모습에 따라 자신을 형성한다. 남성은 원하고, 여성은 그 남성이 원하는 것을 원한다. 그런데 이렇게 보면 여성은 남성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노예적 존재로 전락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는 너무 단순한 이해 방식이다.
오히려 실상은 여성에게는 노예적 측면만이 아니라 폭군적 측면도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아주 오랫동안 여성에게는 노예와 폭군이 숨겨져 있었다. 따라서 여성은 아직 우정의 능력이 없다. 그녀는 오직 사랑만을 알고 있다. 여성의 사랑 속에는 그녀가 사랑하지 않는 모든 것에 대한 부당함, 맹목성이 있다.”(Za, Die Reden Zarathustras, Vom Freunde, KSA 4, 73쪽)
더불어 여성의 노예적인 면모 역시 오히려 여성이 사랑에서 진정한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즉 여성은 남성의 이상적 여성상에 맞추기 위해 자신의 현명함을 통해 스스로 꾸미고 위장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명함이 바로 여성의 힘이다. 이런 면에서 사랑의 영역에서는 여성이 완전히 주인이고, 최고의 힘을 발휘하는 반면 남성은 손님이라고 말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사랑 역시 자연의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투쟁이고, 노예적인 겉모습에도 불구하고 그 투쟁에서 항상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이 여성이라면 그러한 여성을 남성과 같은 수준으로 만드는 것은 오히려 여성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위에서도 잠시 언급했듯이 니체가 통상적 여성 해방 운동을 여성을 약화시키는 병으로 비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여성의 “동일한 권리를 위한 투쟁은 사실상 질병의 징후이다.”(EH, Warum ich so gute Bücher schreibe, 5, 306쪽)
그런데 방금 언급했듯이 니체가 바라보는 사랑이 투쟁이고, 그러한 투쟁이 모든 자연 세계를 설명할 수 있는 특징이라면, 여성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사랑이란 바로 자연과 통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사랑은 자연이고, 자연은 투쟁이다.”15) 다시 말해 헤라클레이토스를 따라 니체가 이 자연의 모든 것이 투쟁을 통해 성립한다고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사랑이 투쟁이라면 사랑도 마찬가지로 자연에 속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사랑에 모든 것을 거는 여성은 남성보다 훨씬 더 자연에 가깝다.
이런 맥락에서 니체가 “여성이 복수와 사랑에서 남성보다 더 야만적이다.”(JGB, Nr. 139, KSA 5, 97쪽)라고 지적하는 것은 바로 여성이 남성보다 자연에 더 친숙함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볼 수 있다.
여성과 관련하여 니체가 자연과 투쟁을 강조하는 것은 더 나아가 여성은 전통적인 의미의 진리와는 무관하다는 점을 함축한다. 자연과 자연 속의 투쟁 속에서는 진리가 아니라 거짓이나 간계를 통해 쟁취해야만 하는 승리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여성은 진리가 아니라 위장이나 가상, 허구, 거짓말을 통해 사랑이라는 전쟁터에서 성공해 왔다는 의미에서 그런 여성은 자연의 특성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피상적으로 보면 여성을 비하하는 것으로 들리는 다음 아포리즘의 진의는 바로 그와 같은 것이다.
“처음부터 여성에게 진리보다 더 낯설고, 거북하고, 적대적인 것은 없었다. 여성의 가장 위대한 기술은 거짓말이며, 여성의 최고 관심은 가상과 아름다움이다. 우리남성들은 다음을 인정한다.
즉 우리는 여성에게서 바로 이러한 기술과 본능을 존경하고 사랑한다는 것을.”(JGB, Nr. 232, KSA 5, 171쪽)
요컨대 “니체는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여성을 폄하하는 대신 이 같은 점을 존경할 필요가 있는 미덕으로 간주하고 있는 셈이다.”16) 그렇다면 이 같은 상황에서 남성의 역할은 무엇인가?
남성은 자연의 완성이자 실현인 여성과 대조적으로 그 불완전함을 통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즉 “여성은 성취하고, 남성은 약속한다. 여성을 통해 자연은 그녀가 지금까지 인간의 모습을 만드는데서 완성한 것을 보여준다. 남성을 통해 자연은 여기서 극복해야만 하는 것을 보여준다.”(MA Ⅱ, 1. Vermischte Meinungen und Sprüche Nr. 274, KSA 2, 495쪽)
그러나 여성을 진리와 무관하며, 진리와 적대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있는 니체의 견해는 곧장 전적으로 그와 대립적인 언명과 부딪힌다. 그러한 언명은 여성이 진리라고 가정해보자는 니체의 제안이 담긴 아포리즘에서 등장한다. 여성이 진리와 무관하며 진리를 원치 않는다고 강조하는 동시에 그런 여성이 오히려 진리일 수 있다는 주장을 과연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우선 아래에서는 여성을 진리라고 가정하고 있는 니체의 명제 속에 담긴 의미를 짚어보고, 계속 이어서 여성이 비진리와 진리를 동시에 상징하는 모순적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여성을 삶의 은유로 볼 수 있다는 니체의 언급을 통해 찾아볼 것이다.17)
14) F. Roth, 앞의 글.
15) F. Roth, 앞의 글.
16) Abey Koshy, “The Feminine and the Question of truth in Nietzsche’s Philosophy”, Indian Philosophical Quarterly, Vol. ⅩⅩⅥ No. 1, January 1999, 92쪽.
17) 니체의 진리 개념 비판과 여성관을 연결시켜 논의하고 있는 글로는 김미기, 「니체의 진리 개념 비판에서 본 예술과 여성의 본질」, 『니체연구』, 3집, 1998, 41-72쪽 참조.
6. 여성이 만약 진리라면?
우선 니체는 1887년 『즐거운 학문』2판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진리에 관한 명제를 제시한다.
“아마도 진리는 여성, 즉 그 근거들을 보지 못하게 만드는 근거들을 가진 여성일 것인가? 아마도 그 여성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말해 바우보(Baubo)일 것인가?”(FW, Vorrede zur zweiten Ausgaben 4, KSA 3,352쪽)
여기서 바우보란 데메테르(Demeter) 신화에 나오는 인물로 자신의 딸 페르세포네를 잃은 데메테르에게 자신의 생식기를 보여줌으로써 그녀를 위로한다. 즉 그리스어로 여성의 생식기를 뜻하는 바우보(Baubo)가 취하는 이러한 제스처는 새로운 탄생 가능성을 뜻하며, 결국 이러한 행위로 인해 데메테르는 웃음을 웃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신화에서 바우보는 자신의 생식기를 보여주는 인물로 나타나므로 분명 어떤 것을 보이게 만드는 근거들을 갖는 여성이다. 그런데 이렇게 본다면 니체의 이 진리 언명에 나타난 가정은 이와 오히려 정반대되는 사태를 가리킨다.18)
왜냐하면 니체가 지적하고 있는 바우보 혹은 진리는 신화의 직접적 내용과는 반대로 자신의 근거들을 보이지 않게 만들 근거들을 가진다고 가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바우보나 여성과 진리를 이런 식으로 동일시하는 니체의 입장은 무엇일까?
우선 니체의 가정을 도외시하고 액면 그대로 해석하면, 진리는 그리스어로 알레테이아(aletheia), 즉 탈은폐를 뜻하므로 바우보가 그 자신의 생식기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행위를 한다는 점을 통해 볼 때, 여기서 그녀를 그러한 의미의 진리를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은 어느 정도 정당화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니체의 가정을 좇아보면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능할것이다. 즉 여기서 진리가 전통적인 의미의 형이상학적 진리가 아니라 니체가 본래 염두에 두고 추구하는 것, 즉 소위 말해서 참된 삶이라면, 그러한 진리가 여성이라는 말은 인간의 삶이 여성의 자연적인 생산성과 유사한 특징을 통해서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는 사실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이해할 때, 자신의 근거들을 드러내지 않는 근거들을 갖는 것으로서 여성이자 삶의 진리가 중요하다. 다시 말해 삶과 관련된 그러한 진리는 의식되지 않고 은폐될 경우에만 그 기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진리란 탄생 및 죽음에 관한 지식이며, 우리는 그런 지식을 단순히 있는 그대로는 견뎌낼 수 없으며 그것을 견디기 위해서는 가상과 환상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렇게 보면 니체가 이 문장에서 지칭하는 진리란 우리 삶에 관한 진리이며,삶의 의미와 가치에 관한 진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한 진리를 깨닫고 나서도 여전히 기꺼이 살아가야 하는 것이 관건임을 알 수 있다.
이는 역으로 말해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논리적 진리나 사실 언명들에 관한 진리나 거짓이 아니라 의미의 물음임을 뜻한다. 이 같은 점을 좀 더 분명히 확인하기 위해 우리는 니체가 바우보에 관한 동일한 언급을 하고 있는 아포리즘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니체의 최후 저술이라고 할 수 있는 『니체 대 바그너』에서 등장한다.
“아마도 진리는 자기의 근거들을 보여주지 않을 근거들을 갖고 있는 여성이 아닐까?
……아마도 그녀의 이름은 그리스어로는 바우보가 아닐까?
……오오, 이 그리스인들! 이들은 삶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럴 수 있으려면 표면과 주름과 표피에 용감하게 머무는 일, 가상에 대한 숭배, 형식과 음조와 말과 가상의 올림포스 전체를 믿는 일이 필요하다!
이런 그리스인들은 표피에 머무른다. 그들이 깊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으려는가? 현대 사상의 가장 높고도 가장 위험한 정상에 오르고 거기서 우리를 둘러보았으며 거기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던 우리, 대담한 정신이여. 바로 이 점에서 우리는 그리스인이 아닌가? 형식과 음조와 말의 숭배자들이 아닌가? 그래서 바로 예술가가 아닌가?
……”(Nietzsche contra Wagner(=NW), Epilog 2, KSA 6, 439쪽)
여기서 드러나는 사실은 삶 혹은 죽음의 진리를 파악하고서도 니힐리즘에 빠지지 않고서 그것을 충분히 견디기 위해서는 반드시 표면에 머무르면서 가상을 숭배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가상을 숭배하고 가상을 신격화하는 것을 통해서 이 세계는 바로 니체의 초기 정식화를 빌어 표현하자면, 미적으로 정당화되는 셈이다.
다른 한 편 니체는 『선악의 피안』의 한 아포리즘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진리가 여성이라면 어떨 것인가? 철학자들이 독단론자들인 한해서 모든 철학자들은 여성에 대해 아주 비전문가였으며, 그들이 진리에 대해 접근하는 수단으로서 어두운 진지함과 서툰 주제넘음은 여성의 마음을 얻는데 곤란하고 매우 부적절했다는 의심을 할 근거들이 존재하지 않는가?
확실한 것은 여성이 스스로 쟁취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으며, 모든 종류의 독단론은 좌절된 채 남는다는 사실이다.”19)(JGB, Vorrede, KSA 5, 11쪽)
여기서 여성은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디오니소스적인 다원적 현실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그러한 여성이 진리라는 것은 우리가 결국 마주해야 하는 궁극적 대상이 바로 그러한 다원적 현실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현실에 대해 지금까지 독단론적인 철학자들은 제대로 접근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진리로서 여성이 상징하는 다원성은 기존의 형이상학에 의해서는 결코 파악될 수 없었던 셈이다. 물론 독단적 철학자는 스스로 그가 그녀를 얻었으며, 그녀의 본질을 발견했다고 믿었다. 하지만 실제로 여성으로서의 진리는 발견되어야 할 어떤 본질도 갖지 않는다.
요컨대 여성에 접근하여 그녀의 사랑을 얻는 적절한 방법을 알지 못하는 비전문가라고 독단적 철학자를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 중요한 점은 니체가 아포리즘 끝에 덧붙이고 있듯이, 철학자들이 이론이나 개념을 통해 파악하기 위해 노력해왔던 현실적 세계, 즉 다원적이며 변화무쌍한 디오니소스적인 세계 혹은 형이상학적인 진리와는 다른 진리로서 여성이 상징하는 삶자체가 오늘날까지도 여전히 형이상학이나 전통 철학의 파악 방식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여성을 철학자들이 제대로 접근하지 못했던 진리라고 가정하는 것은 그러한 여성이 바로 전통적인 철학으로 포괄하기 어려운 다원적이고 가변적인 현실이자 디오니소스적인 자연 혹은 삶을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여성으로서 다원적이고 가변적인 디오니소스적인 삶의 현실은 독단적 철학의 그물로 그녀를 잡으려는 시도에서 벗어난다. 이런 맥락에서 여성을 진리의 문제와 연결시키려는 니체의 가정은 그의 철학 내에서 여성적인 것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다원적인 현실이자 디오니소스적인 자연 혹은 삶으로서 여성을 진리(전통적인 의미의 진리가 아닌 진리)로 가정하는 것은 여성을 추방과 혐오의 대상에서 긍정의 대상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다.
이제 니체에게 여성은 가상적인 아름다움의 세계 밑에 깔린 다원적이고 가변적인 삶에 대한 긍정까지도 상징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니체는 이 같은 점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세계는 아름다운 것들로 넘치지만, 아름다운 순간들이 되어 이러한 것들의 베일이 벗겨지는 순간은 그럼에도 드물고 아주 드물다. 그러나 아마도 다음과 같은 점이 삶의 가장 강력한 마력일 것이다.
삶은 황금으로 짠 베일로 덮여있으며, 즉 아름다운 가능성들을 지닌 베일로 덮여있으며, 약속, 저항, 가혹함, 조롱, 동정, 유혹으로 넘쳐난다. 그렇다. 삶은 여성이다!”(FW, Nr. 339, KSA 569쪽)
그럼에도 삶에 대한 전통 철학자의 관계는 여성과 서툰 유혹자의 관계와 같다. 이 두 사람은 그녀의 사랑을 얻기 위해서는 여성 혹은 삶이나 가변적이고 다원적인 세계 자체가 있는 그대로 사랑받고 긍정되어야 한다는 점을 알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기존의 방식대로 그녀를 소유하고 지배하는 것은 그녀를 얻기 위한 적절한 수단이 결코 아니다. 이는 세계에 대한 과학적 접근 방식의 특징에 대한 비판이자 계몽적 사유에 대한 비판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니체의 텍스트에서 진리로서 여성은 삶을 그 삶이 가진 모습 그대로 긍정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상황이 이렇다면 역으로 삶과 세계를 있는 모습 그대로 영원히 긍정하기 위해서는 바로 여성 역시 삶의 형상으로 긍정될 필요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원하고 여성적인 것에 대한 심리학자로서 니체는 진리로서 여성이 상징하는 삶의 영원성을 사랑한다.
“내 아이들을 낳아줄 만한 여인을 나는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내가 사랑하는 이 여인 말고는. 나,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오, 영원이여! 나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오, 영원이여!”(Za Ⅲ, Die sieben Siegel 1, KSA 4, 287쪽)
논리적인 방식으로 세계를 파악하고자 한 전통 철학에 결여된 것은 바로 이 같은 삶이나 세계의 영원성에 대한 긍정의 욕망이다. 그리고 전통 철학과는 달리 니체가 결국 주목했던 것이 바로 삶과 여성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가변적이고 다원적인 차원의 진리였던 셈이다.
이제 그렇다면 여성을 비진리인 동시에 진리를 상징하게 하는 근거라 할 수 있는 삶의 은유를 좀 더 분명하게
밝히기 위해 위에서 방금 언급했던 『즐거운 학문』의 핵심적 아포리즘을 좀 더 자세히 분석해 보자.
18) 이 같은 점에 주목하여 Baubo의 모순적 의미를 밝혀내려는 시도를 하고 있는 논의로는 Günter Schulte, “Vielleicht ist die Wahrheit ein Weib”, Vortrag im Rahmen der Ringvorlesung “Was ist Wahrheit?”, am 12. April 2000 an der Universität zu Köln.
19) 피핀(Robert B. Pippin)은 니체가 이 구절을 통해서 플라톤이 『향연』에서 디오티마(Diotima)의 입을 통해 말하고 있는 아름다움 자체에 대한 사랑과 같은 것이 실제로는 불가능하며, 철학자들이 진리에 대한 사랑을 그와 같은 방식으로 이해해 왔기 때문에 그들은 여성으로 상징되는 진리를 제대로 사랑함으로써 그 진리를 얻는데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요컨대 이 구절에서 “분명 니체는 전통적인 혹은 플라톤적으로 생각된 플라톤적 철학자들이 실제로는 서툴고 아마추어적인 구애자들(lovers)라는 점을 암시하면서 아이러니한 방식으로 플라톤적인 여운을 불러일으키려 하고 있다.”, Robert B. Pippin,Nietzsche, Psychology, and First Philosophy, Chicago 2006, 16쪽.
7. 삶으로서의 여성(Vita femina)
위에 나온 아포리즘을 본격적으로 분석하기 전에 니체가 삶을 여성으로 은유하고 있는 것이 단순히 우발적인 파격이 아니라는 점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 같은 사실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 중 하나는 그의 주저라고 할 수 있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3부의 「다른 무도가」라는 부분이다.
니체는 거기서 삶의 오묘하고 복잡다단한 성격을 보여주면서 그러한 삶 자체를 여성과 동일시하고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네(삶)가 가까이 있으면 나 네가 두렵고 멀리 있으면 네가 그립다.
…네가 쌀쌀맞게 굴면 마음에 바람이 불고, 네가 미워하면 유혹을 받고, 네가 달아나면 묶여버리고 네가 비웃으면 감동한다.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자, 휘감고 있는 자, 유혹하고 있는 자, 탐색하고 있는 자, 찾아내고 마는 자, 너, 위대한 여인이여, 그 누가 너를 미워하지 않으랴!
너 천진난만하며 참을성 없는, 바람처럼 날렵한데다 티 없는 어린아이의 눈을 가진 죄 많은 여인이여, 그 누가 너를 사랑하지 않겠는가!”(Za Ⅲ, Das andere Tanzlied 1, KSA 4, 282-283쪽) (괄호 안은 필자의 첨가)
더 나아가 니체는 여성에게 갈 때는 채찍을 잊지 말라는 채찍 언명을 연상시키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이 부분을 마무리한다.
“내 채찍 소리에 맞춰 춤을 추며 외쳐대야 할 것이다! 나 채찍을 잊지는 않았는가? 천만에!”(Za Ⅲ, Das andere Tanzlied 1, KSA 4, 284쪽)
여기서 주의할 점은 우리가 여성을 삶의 은유로 파악할 수 있다면 이 같은 구절 역시 단순히 여성에게 폭력이 필요하다는 식의 피상적인 해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위에 나온 해석과는 또 다르지만 여전히 개연성 있는 방식으로 파악하는 것이 충분히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즉 니체가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통해 잊지 말라고 강조하고 있는 채찍이란 우리가 삶으로 진입해서 그것을 살아내기 위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일종의 무기인 셈이다. 그리고 그러한 무기는 실제 물리적인 도구라기보다는 어떠한 가혹함에도 불구하고 삶을 무한히 긍정할 수 있는 운명애적인 태도의 상징이 아닐까 싶다.
?즐거운 학문? 아포리즘 339번 제목은 라틴어로 되어 있으며, 그것은 ‘Vita femina’이다. 이 말을 그대로 풀면 삶은 여성이라는 것이다.20) 따라서 니체가 삶을 여성과 은유적으로 동일시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추측해 볼 수 있다. 가령 여성은 자신의 출산 행위를 통해 새로운 생명을 낳는 고유한 특징을 지니고 있으므로 그러한 점이 삶을 여성으로 은유하기 위한 중요한 한 가지 조건이 될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 아포리즘의 첫 부분은 이 같은 상식적 기대를 보기 좋게 배반한다. 오히려 여기서는 아름다움에 관한 미적인 차원의 논의가 진행된다. 즉 한 작품이나 행동, 혹은 인간 아니면,자연 등 어떤 것이든 그것의 궁극적인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서는 아주 지극히 드문 우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니체는 이러한 사실을 우리가 구름에 가려진 산봉우리를 감상하기 위해 반드시 요구되는 조건을 언급함으로써 보여 주고자 한다. 산봉우리를 보기 위해서 우리는 우선 거기에 적합한 장소에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영혼 역시 그러한 장면을 원하고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 할 것이다. 또 바로 그런 순간에 구름이 벗겨져 태양이 빛나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것들이 모두 한꺼번에 일어나는 일은 아주 극히 드문 순간적 사건일 뿐이다. 그래서 니체에 의하면 그리스인들이 아름다운 모든 것들이 두 번 세 번 주어지기를 신에게 간절히 호소했던 것은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셈이다.
이어서 위에서 잠시 인용했던 구절이 뒤따른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세계는 아름다운 것들로 넘치지만, 아름다운 순간들이 되어 이러한 것들의 베일이 벗겨지는 순간은 그럼에도 드물고 아주 드물다. 그러나 아마도 다음과 같은 점이 삶의 가장 강력한 마력일 것이다. 삶은 황금으로 짠 베일로 덮여 있으며, 즉 아름다운 가능성들을 지닌 베일로 덮여있으며, 약속, 저항, 가혹함, 조롱, 동정, 유혹으로 빛난다. 그렇다. 삶은 여성이다!”(FW, Nr. 339, KSA 3, 569쪽)
니체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으나 자신의 아름다움을 쉽사리 드러내지 않는 세계 자체를 삶과 동일시한다. 여기서 세계 혹은 “삶이 쓰고 있는 황금의 베일은 마야이며, 환상이고, 아폴론적인 것”21)의 세계이자, 필연적인 쇠퇴나 죽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그러한 삶의 베일은 우리에게 약속하고, 저항하기도 하며, 조롱도 하고, 유혹까지 한다. 그러한 여러 가지 다양한 작용 덕분에 우리는 삶의 영역에 아직도 묶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작용은 남성이 여성과 관계할 때 경험하게 되는 여성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니체는 다양한 가상을 통해 우리를 살도록 유혹한다는 점에서 삶 자체를 여성에 은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측면은 사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여성이란 통상적인 의미의 진리와는 무관하며 오히려 가상이나 거짓의 세계를 대변한다는 해석과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이런 의미에서 여성은 비진리이자 가상을 상징하며 진리와는 무관하다.
그러나 다른 한 편 아주 극히 우연적이고 희소하기는 하지만 삶을 가리고 있는 가상적이고 아름다운 가능성들의 베일이 벗겨짐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아름다움이 개시되는 순간이 생겨날 수 있다. 그런데 그러한 순간 드러나는 것은 바로 아폴론적인 가상으로 구성된 현실의 밑바탕에 파괴될 수 없이 깔려 있는 디오니소스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그러한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지닌 참된 아름다움을 목격한다는 것은 그러한 차원과 하나가 되는 환희를 느낀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 이 같은 디오니소스적인 차원이란 일상적 의미의 이론적 진리가 아니라 생성의 세계를 진정으로 대변한다는 의미에서 니체가 결국 염두에 두고 있는 진리의 세계라고 칭해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삶이 펼치고 있는 베일의 변화무쌍한 작용들이 그것을 여성과 비유할 수 있게 했다면 이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그러한 비유는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남성이 서투르게 관계를 맺음으로써 피상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여성의 가상적 모습은 진짜가 아니며, 오히려 그러한 모습 뒤에 감춰진 내면의 진정한 여성적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이 항상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삶과 은유될 수 있는 여성은 삶이 지닌 이중적 측면에 걸맞게 가상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는 동시에 그것을 가능하게 하고 그 바탕에 놓여 있는 생성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서 진리의 세계 역시 동시에 상징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니체는 여성을 삶에 은유함으로써 여성이 자신이 구상하고 있는 비진리(가상)와 진리를 동시에 상징하게 만드는 한 가지 독특한 방식을 제안하고 있는 셈이라고 할 수 있다.
20) 이 아포리즘을『즐거운 학문』에 나타난 일련의 아포리즘들과 함께 관련시켜 논의하고 있는 곳으로는 Frances Nesbitt Oppel, Nietzsche on Gender: Beyond Man and Woman, Charlottesville and London 2005, 89-117쪽 참조.
21) F. N. Oppel, 앞의 책 111쪽.
8. 맺는 말
여성에 대한 니체의 태도는 항상 논란의 중심에 있어 왔다. 다시 말해 니체는 한 편으로 여성을 비하하는 여성혐오주의자로 악명을 떨쳤으며, 다른 한 편에서는 여성성에 대한 아주 드문 지지자로 인정받았다.
따라서 니체의 입장에 대해 해석자들은 크게 양분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즉 통상적 페미니즘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니체의 견해를 전통적인 가부장적 편견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그를 매도했던 반면 그와는 다른 편에서는 니체를 진정한 여성성을 회복하고자 시도한 선구적 인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처럼 니체의 여성관에 대해 양분된 입장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니체 자신이 스스로 제공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니체는 어떤곳에서는 극단적인 여성혐오주의의 경향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지만, 또 다른 곳에서는 기존의 형이상학적 독단론과 가치관을 전복시킬 수 있는 결정적 실마리로서 건강한 여성성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다고 보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이 글에서는 양극단을 피하는 제3의 전략을 선택함으로써 니체의 진의를 파악하고자 시도해 보았다. 우선 니체를 일방적으로 여성혐오주의자로 치부하는 것이 성급한 판단일 수 있는 근거들을 몇 가지로 제시했다. 그것은 니체가 자신의 일상적 삶 속에서 여성 일반에 대해 가진 태도가 비교적 긍정적이었으며, 여성 해방에 대한 그의 관점 역시 겉보기와는 달리 비판적 지지의 태도에 가까웠고, 흔히 니체를 비난하기 위해 단골로 등장하는 채찍 발언을 기존의 해석과는 달리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 등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울 수 없는 오점들, 즉 여성에 대한 악의적인 주장들은 여전히 니체에게 남아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를 해명하기 위한 방법으로 여기서 제안하고 있는 것은 그러한 주장들을 루 살로메와의 쓰라린 경험으로 인해 생겨난 것으로 간주해 보자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제안이 설득력을 갖는다면, 니체가 여성에 대해 온전히 철학적으로 고찰하는 부분을 지금까지보다 더욱 진지하게 문제 삼을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 같은 과정을 통해 우리는 니체가 자신의 철학 속에서 여성에 대한 논의를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탐구할 수 있는 여지가 생겨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한 목표를 탐구하기 위해 이 글에서는 크게 세 가지 주제를 다루고자 했다.
우선 여성에게 최고의 가치라고 할 수 있는 사랑과 그러한 사랑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거짓 혹은 비진리에 주목해 보았다. 이를 통해 니체는 형이상학적 진리를 맹목적으로 추구해 온 철학에 대해 비판적 거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니체는 여성이 비진리나 거짓의 차원을 상징한다고 주장하는 동시에 여성이 진리일 수 있음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 니체가 염두에 두고 있는 진리란 그가 비판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형이상학적인 진리가 아니라 오히려 아폴론적 가상을 가능하게 하고 그 바탕에 놓여 있는 디오니소스적인 차원의 진리를 의미한다고 할 것이다.
끝으로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모순처럼 여겨지는 이 같은 상황, 즉 니체가 여성을 비진리와 진리를 동시에 상징한다고 주장하는 논의를 일관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방안으로 이 글에서는 니체가 삶 자체를 여성에 은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시해 보았다. 즉 여성이 진리인 동시에 비진리를 상징할 수 있는 근거는 여성이 바로 삶 자체를 상징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사는 삶은 살아가기 위해 거짓이나 비진리를 요구할 수밖에 없지만, 그러한 아폴론적 차원의 바탕에 진정으로 존재하는 참된 세계의 모습은 바로 디오니소스적인 삶이자 세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항상 외면의 아름다움으로 우리를 매혹시켜 살게 하는 동시에 드물기는 하지만 그 내면에 감추어진 진정한 아름다움과 진리의 세계를 간직하고 있는 존재로서 여성은 바로 삶의 이 같은 이중적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니체가 자신의 철학에서 여성성에 대해 심도 있게 논의함으로써 도달하고자 한 한 가지 주요 목표는 삶의 이 같은 이중성에 대한 절대적 긍정으로 볼 수도 있을 듯싶다.
참고문헌 -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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