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일반

사랑을 통한 갈등해소와 보편성 실현의 가능성 탐구

rainbow3 2020. 3. 10. 03:11


사랑을 통한 갈등해소와 보편성 실현의 가능성 탐구*

 

■김 석 ■

 

 

요약문

 

본 연구는 자크 라캉이 말하는 에로스, 사랑, 이웃사랑의 개념에 근거해 한국사회의 갈등해소와 보편성의 실현가능성을 탐구해보는 시론이다. 사랑은 한편으로는 주체를 소외시키는 나르시시즘적 정념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주체의 진리를 드러내는 욕망의 중재자이기도 하다.

상상계에 속하는 나르시시즘은 쉽게 공격성으로 표출되는데 그 중심에 하나가 되고자 하는 자아가 있고 소외감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에로스와 달리 진정한 사랑은 언어속에서 탈존 하는 존재를 겨냥한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론적 전환을 통해 타자와의 진정한 관계를 확립할 수 있다.

사랑이 존재의 진리를 드러내는 철학의 조건이라는 것은 알랭 바디우도 강조한 바 있다. 사랑이 주체화의 가능성뿐 아니라 보편성의 실현까지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더 발전된 개념인 ‘이웃사랑’ 덕분이다.

추상화된 보편성이 아니라 개체성을 보존하면서 동시에 보편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주체와 타자의 올바른 관계가 선행되어야 하는데 이웃사랑 개념은 이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이웃사랑은 사랑의 확장도 아니고 이타심도 아니다. 이웃사랑은 자아가 무화시킬 수 없는 타자(Autre)를 통해 존재의 되찾음을 가능하게 하며, 타자의 향유를 통해 주체가 잃어버린 대상인 ‘물’로 향하게 하는 적극적 작업이다. 사랑과 이웃사랑은 관용이나 차이의 철학과는 다르게 주체화를 통해 갈등을 풀고 새로운 보편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이다.

 

주 제 : 사회철학, 정신분석, 존재론, 휴머니즘
검색어 : 라캉, 바디우, 사랑, 이웃사랑, 주체, 나르시시즘, 갈등

 

* 이 논문은 2009년도 정부재원(교육부 인문사회연구역량강화사업비)으로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NRF-2009-327-A00213).
▪ 김 석|건국대학교 자율전공학부

 

 

1. 사랑의 두 측면과 존재를 여는 힘

 

“태초에 사랑이 있었다”(Lacan 1991: 11)

 

본 논문은 사회갈등, 특히 한국 사회에 만연한 비합리적이고 폭력적인 이념갈등 해소를 위한 대안의 하나로 ‘사랑’(amour)이 지니는 상호주체적 관계의 함의를 밝히면서 이를 통해 새로운 보편성(universalité)의 실현 가능성을 모색해보는 시론이다. 여기서 보편성은 하나의 유기체를 구성하는 통합이 아니라 개별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공통적인 것을 위해 협력하는 연대적 일치감에 가깝다.

언뜻 사랑을 갈등 해소와 보편성 실현을 위한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지극히 원론적이고 별로 새로울 것 없어 보일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통상적 의미의 사랑이 아니라 라캉이 『세미나 7, 정신분석의 윤리,L’éthique de la psychanalyse』와 『세미나 8, 전이, Le Transfert』에서 핵심주제로 다루는 ‘사랑’(amour)과 ‘이웃사랑’(amour du prochain) 개념에 근거해 논의를 전개하려고 하는데 이 개념들은 욕망(désir)만큼이나 풍부한 실천적 중요성과 정신분석 윤리의 바른 방향을 보여줄 수 있는 적극적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그간의 연구에서 많이 조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라캉은 거의 모든 세미나에서 입버릇처럼 ‘사랑’을 언급한다. 심지어는『세미나 20, 앙코르, Encore』에서는 “분석적 담론에서 우리가 하고 있는 유일한 일은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1)이라고 말하면서 사랑에 특별한 지위를 부여하기도 한다.

 

물론 정신분석의 기본 대상이 섹슈얼리티임을 고려하면 라캉이 사랑에 대해 자주 언급하는 것이 일견 당연해 보이지만 그것의 숨은 의미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2) 라캉이 말하는 사랑은 육체적 성애나, 종교적 의미의 박애, 자기를 희생하고 모든 것을 내 던지는 숭고한 윤리적 희생과 거리가 멀다.

오히려 그것은 시니피앙과의 관계에서 소멸되고 다시 나타나기를 반복하면서 소외를 태생적 구조로 지닐 수밖에 없는 주체가 언어를 통해 존재와 맺는 비틀린 운명이기도 하고,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의 복잡한 상호작용의 그물망이 만들어 내는 상호주체성(intersubjectivité)을 가능하게 해주는 실천적 개념이다.


사랑은 한편으로는 주체를 소외시키는 나르시시즘적 정념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언어가 감추는 존재의 진리를 드러내는 중재적 개념이기도 하다. 또 사랑은 한편으로는 성애적 쾌락을 통해 하나가 되고자하는 정념이지만 또 한편으로 쾌락원리를 넘어 주이상스(jouissance)에 연결되기도 한다.

이것은 사랑이 상상적 차원과 실재적 차원의 두 가지 영역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3)사랑이 존재의 발견과 보편성을 가능하게 하는 실천적 함의를 지니는 것은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에 대해 강조하기 전에 그것의 개념을 명확히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자아가 중심이 되는 상상적 사랑을 플라톤적 에로스로, 실재적 차원에 연관된 것을 사랑으로 구분하면서, 특히 후자로부터 갈등해소와 보편성의 실현 가능성의 단초를 끌어내보려고 한다.


물론 사랑의 힘을 라캉만 예찬한 것은 아니며, 기독교처럼 사랑을 통해 보편성을 구축해보려는 시도도 이미 존재했다. 필자는 이하에서 특히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고어의 사랑 개념과 반-주체와 해체론이 득세하는 시대에 주체의 실천과 보편성을 주장하는 알랭 바디우의 ‘사랑’개념을 라캉의 그것과 비교하고 부분적으로 차용하면서 사랑이 왜 보편성의 가능 근거가 될 수 있는지 살펴보려고 한다.

특히 라캉은 프로이트가『문명 속의 불만』에서 언급하는 ‘이웃사랑’(amour du prochain) 계명을 법과 향유(jouissance)와 연관시켜 재해석하면서 그것이 정신분석의 윤리와 접목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사랑의 존재론적 함의란 그것이 주체가 자신과 맺는 근본적인 결여의 관계를 통해 ‘무’로서의 존재의 진리를 드러낸다는 의미이다. 사랑은 또한 상호적인 것으로 타자와의 관계를 매개해주는 관계 개념이다.

필자는 이하에서 에로스, 사랑, 이웃사랑의 세 개념을 중심으로 그간 잘 조명되지 않았던 사랑 개념의 실천적 유용성을 탐구할 것이다. 이를 통해 사랑개념이 기표에 의해 소실되는 존재를 여는 능동적 힘이라는 것, 그리고 존재의 정립과 진정한 타자의 현존을 가능하게 만드는 이웃사랑 개념이 새로운 보편주의의 실현까지 가능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제안하려 한다. 이런 작업을 통해 사랑의 본질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왜 라캉이 그렇게 자주 사랑에 대해 언급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 Lacan 1975: 77. 라캉에 따르면 사랑은 정신분석 뿐 아니라 철학 담론의 중심에 있다. 그것은 사랑이 궁극적으로 ‘존재’(être)를 겨냥하기 때문이다. 라캉의 존재 개념에 대해서는 François Balmès,『라캉이 존재에 대해 말한 것,Ce que Lacan dit de l'être』을 참조하라. 프랑스와 발메는 라캉의 존재 개념이 데카르트와 하이데거 두 원천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설명하면서 존재 개념을 철학적으로 분석한다.

2) “성 관계는 없다”는 라캉의 유명한 말을 상기해 보라. 라캉은 남녀의 성애적 에로스에 대해 그것이 성차와 성적 합일을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고 비관적 진단을 내린다.
3) “사랑은 한편으로 실재, 즉 쾌락을 조절하는 장에 또 한편으로는 나르시시즘 장에 뿌리박고 있다. Lacan, Le Séminaire XIII, Objet de la psychanalyse, Séminaire inédit 1965-66.

 

 

2. 에로스의 본질과 한계

 

‘사랑’(amour)개념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고 상호 연대와 공존을 보장하는 보편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랑 개념을 보다 엄밀하게 정의하고 정화할 필요가 있다. 사랑(eros)4)은 그 자체로는 맹목적이며 위험하다. 사랑은 본래 나르시시즘적 본성을 지니고 있으며 자아가 주인인 상상계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라캉에 따르면 사랑은 본성상 나르시시즘이고 무능한데 그것이 비록 상호성을 지향해도 하나가 되고자 하는 욕망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모르기 때문이. 이러한 나르시시즘적 사랑은 결국 두 성의 관계를 확립하는 데 반드시 실패한다(Lacan 1975: 12 참조).

또 사랑개념을 순화시킬 필요가 있는 것은 성 토마스도 지적했듯이 사랑에는 언제나 자기애와 연관된 탐욕적 측면과 타자와 연관된 자애적 측면이 함께 있기 때문이다.

사랑을 통해 갈등을 해결하고 보편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랑의 부정적 측면을 조망하면서 이를 경계할 필요가 있다.5) 존재를 여는 사랑의 힘은 나르시시즘을 극복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사랑의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특별히 라캉의 이론에 기대려고 하는 것이 이 때문이다.

라캉은 사랑의 두 차원을 엄밀하게 구분하면서 사랑이 새로운 상호주체성과 보편성 실현을 위한 토대가 될 수있는 하나의 가능성6)을 열어 놨기 때문이다.

라캉은 성 토마스가 말한 자기애적 사랑을 ‘나르시시즘적 정념’ 혹은 ‘상상적 사랑’이라고 정의하는데 이 사랑은 존재의 진실을 알지 못하는 오인(méconnaissance)이며 타자를 수단 삼아 자신을 사랑하는 태도를 말한다. 나르시시즘은 상상적으로 부풀려진 자아가 주도하며 자아이상을 목표로 삼지만 진정한 사랑은 오히려 “존재, 즉 언어 속에서 가장 자신을 숨기는것”(Lacan 1974: 40)을 겨냥한다.7)

상상계에 속하는 정념적 사랑은 쉽게 공격성으로 표출되기 쉬운데 그 근원에 하나가 되고자 하는 이기적 욕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Lacan 1974: 12 참조). 하나가 되려는 나르시시즘은 타자를 타자 그 자체로 인정하지 않고 자아가 중심이 된 대상관계 속에 통합하려고 하기 때문에 쉽게 폭력이나 증오로 변질되기 마련이다.8)

 

4) eros나 amour는 둘 다 사랑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본고에서는 갈등해소와 보편성 실현이라는 전략을 위해 두 개념을 구분하려고 한다. 에로스는 프로이트가 말하는 나르시시즘적 성 충동에 가깝지만 사랑은 존재의 진리를 드러내는 적극적 개념으로 라캉적이다. 프로이트에게 에로스는 마르쿠제가 분석했듯 삶의 본능으로 항상 리비도 경제에 기초한 성욕의 질적, 양적확대를 의미한다. 이것은 에로스가 사회적 가치가 인정된 대상으로 향하는 승화(sublimation)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에로스에 대한 해설은 마르쿠제 2004: 233-39 참조하라.
5) 플라톤은 에로스가 자기애에만 머무는 게 아니라 선과 연관된 아름다움이나 이상적 덕을 추구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에로스의 가장 큰 문제는 본성이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서병창은 「카리타스에 의한 에로스와 아가페의 종합」에서 초자연적 은총인 신에 대한 사랑으로 에로스와 아가페를 종합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두 종류의 사랑을 질적으로 엄밀하게 다르게 개념화하는 것이 더 현명한 전략일 것이다. 4장에서 언급할 키에르케고어도 에로스와 사랑을 나누면서 사랑의 본질을 옹호한다.
6) 물론 라캉은 사랑개념을 보편성을 가능하게 만드는 실천적 범주로 제시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아직은 소극적 가능성이다. 라캉은 사랑이 존재의 장을 드러낸다는 것을 강조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공동체적 관계 속에서 새로운 보편성을 창출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더 이상의 논의를 하지 않는다. 이 작업은 오히려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그는 사랑을 진리생산의 네 공정의 하나로 규정하면서 사랑은 “우연의 순전한 특이성에서 보편적 가치를 지니는 한 요소로의 이행을 가능하게 하는 경험”(바디우 2011: 27)이라고 말한다. 『사도바울』에서는 새로운 그리스도적 주체들이 실현하는 ‘보편적 개별성’(singularité universelle)개념을 주창한다. 바디우가 명시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지만 필자가 보기에 바디우가 말하는 ‘둘이 등장하는 무대’(바디우 2011: 41)라는 개념은 라캉이 성차 공식에서 말한 ‘전체 아님’(pas-toute)의 여성적 위치와 상당히 통한다. 여성적위치는 ‘남근적 향유’가 기대고 있는 허구적 전체성을 거부하고 절대적 타자를 그 자체로 포용할 수 있는 ‘타자의 향유’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서용순, 「바디우의 철학과 오늘날의 사랑」 알랭 바디우『사랑예찬』<해제> 참조. 물론 라캉과 바디우의 이론적 차이도 무척 크다.
7) 라캉이 보통 사랑이라고 말할 때는 나르시시즘적 사랑을 일컫지만 소외된 욕망과 순수욕망을 구분하는 것처럼 존재를 겨냥하는 진정한 사랑에 대해서도 여러 곳에서 강조한다. 두 가지 사랑의 차이와 본질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김석, 「정념, 욕망의 목소리: 세 가지 정념을 중심으로」을 참조하라.
8) 나르시시즘이 공격성과 갖는 연관성에 대해서는 김석 「한국 사회 이념 갈등의 심리적 근원 분석: 라캉의 이자관계와 지라르의 모방적 욕망이론을 중심으로」을 참조하라. 이 논문은 주체가 자아와 맺는 거울단계의 이자관계가 결국 소외를 불러일으키고 그러한 소외와 분열이 공격성의 기원이 되며 욕망의 모방과 경쟁을 통해 집단으로 확산되어 간다고 말한다.

 

 

이러한 사랑을 우리는 순수한 존재를 겨냥하는 사랑과 구별하기위해 플라톤과 프로이트가 말한 ‘에로스’(eros)로 부를 수 있을 것이다.9) 플라톤은『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의 입을 빌려 양성 인간의 신화를 얘기하면서 에로스의 본성이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하나가 되려는 열망이라고 말한다.10)

프로이트는 에로스를 성애에 기반한 자기애로 규정한다. 즉 에로스는 육체적인 것에 뿌리를 두지만 단순한 생식 기능을 넘어 자아를 보존하고 쾌락을 추구하는 포괄적 의미의 자기애라 말할 수 있다.11)

에로스가 육체적 조건에 규정되는 한 그것은 ‘쾌락원리’(principe de plaisir)에 근거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에로스는 양적으로 확장되더라도 결국 타자를 통해 자아의 확장과 쾌락을 추구하는 육체적 정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또 에로스가 추구하는 것은 둘을 하나로 만들어 이를 통해 인간 본성을 치유하는 통합이다. 여기서 에로스는 몸을 매개로 삼은 남녀의 성애적관계에서 그 전형이 두드러지지만 꼭 남녀 간의 관계에만 국한 되는것이 아니라 자아가 중심이 되어 하나(Un)를 이루려고 하는 이상화된 정념일반(우정, 헌신, 조국애 등)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에로스가 나르시시즘에 기반 하는 한 그것은 자아 중심이라는 본질적인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키에르케고어도 비슷한 진단을 하는데 그는『사랑의 역사』에서 에로스적 사랑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들은 축복하는 사랑이 알고 보면 자기사랑이고,

또 자기 자신보다 남을 더 사랑한다는 그들의 사랑도 결국 자기도취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에로스적인 사랑이란 아직 영원한 것이 못된다.

그것은 무한성이 빚어내는 아름다운 현기증에 불과하다”(키에르케고어 2011: 39).

 

이처럼 에로스적 사랑은 자아가 중심이 되어 자신을 적극적으로 보존하고 확장하면서 상상적 관계 속에 타자를 포섭하는 모든 나르시시즘적 정념으로 정의할 수 있다.12)

나르시시즘적 사랑은 자아의 상상적 동일시에 그 근원이 있으며, 이러한 동일시가 다시 세계에 대한 상상적이고 리비도적 애착 관계를 가능하게 만든다(Lacan 1974:144 참조).


하지만 에로스는 “대타자, 근원적 대타자, 그 자체로서 대타자를 표상하지 못한다”(Lacan 1973: 176)는 점에서 본질적 한계가 있다.
에로스는 타자를 향하지만 이를 자신을 위한 보충물로 생각하기 때문에 타자를 동일시의 논리 속에 희생시키는 유아론적 사랑이다. 에로스가 겨냥하는 타자는 언제나 자아의 이상이 반영된 상상적 대상이다. 타자가 진정으로 존재론적 차원에서 보장되기 위해서는 그것의 보증자인 상징적 대타자(Autre)가 먼저 작동해야 하는데 이러한 것을 상상계가 가로막는다.

라캉에게 상상계가 통합과 절대적 이상화의 영역이라면 상징계는 차이를 본질로 삼는 기표(signifiant)와 기표의 특이성을 그 자체로 인정하는 법의 영역이다. 그리고 이러한 상징계의 담지자가 바로 진리의 보증자로서 대타자인데 에로스는 애초부터 이러한 대타자를 표상하지 못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우리는 오직 하나라는 불가능한 명제”(Lacan 1975: 46)에 매달리면서 존재의 메울수 없는 틈을 합일을 통해 봉합하려고 한다.

여기서 타자는 이러한 틈을 메울 수 있다고 가정되는 도구화된 상상적 타자, 즉 상상적 대상(objet)으로 전락한다.


에로스적 사랑은 타자에 대한 절대적 헌신이나 박애의 형태로 발현되어도 그 본성에서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는데 그 중심에 자아가 있기 때문이다. 자아의 이상에 흡수되지 않는 타자의 존재는 자아에게 항상 위협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러한 나르시시즘적 정념은 항상 사랑과 미움이라는 양가적 감정을 그 본질로 삼게 된다.13)결국 사랑의 긍정성이 발휘되기 위해서는 나르시시즘의 효과에 불과한 에로스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9) 프로이트는 플라톤의 에로스를 그 자신의 리비도 개념과 동일시한다. “그런데 정신분석은 사랑의 이 ‘더 확장된’ 이해에 대해 독창적인 것을 추가하지는 않았다. 철학자 플라톤이 말한 에로스는 그 기원, 그 기능 및 성적인 사랑의 관계에서 정신분석이 말한 사랑의 힘, 즉 리비도와 완전히 일치함을 보여준다.” 프로이트, 「집단 심리학과 자아의 분석」, 『문명속의 불만』99쪽, Freud, GW XIII, p. 99. 보통 라캉이 사랑에 대해 말할 때는 프로이트와 플라톤이 말한 에로스를 염두에 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라캉은 존재와 관련해 사랑이 갖는 긍정성도 인정한다는 것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10) 플라톤, 『향연』 93-97 참조. 라캉은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가 존재의 쪼개짐(Spaltung)을 통해 사랑의 본성을 얘기하는 것에 주목한다. 이 쪼개짐이 인간 안에 채울 수 없는 결여를 낳고 그것이 결국 사랑을 낳기 때문이. Lacan 1991: 144 참조.
11) 프로이트는 유아성욕의 전형적 예로 아이가 자기 손을 빠는 행동을 들면서 그것이 자기를 보존하려는 기능들 중 하나에 속하며, 나중에는 쾌감을 주는 성감대의 형성에 기여한다고 말한다. 에로스는 자아를 보존하고 대상을 통합하려는 것으로 해체와 파괴의 충동인 타나토스와 대립한다. 프로이트,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 74-81 참조.

12) “자신에 대한 그런 관심이 사랑으로 표현된 형태가 바로 플라토닉 러브이다.” 볼프강 라트 1999: 48. 프로이트는 에로스의 본성이 유기체를 더 큰 통일체로 결합시키려는 노력이라고 말하면서 자아의 나르시시즘적 보존본능에도 리비도적 힘이 작동한다고 말한다. 프로이트, 「쾌락원리를 넘어서」, 『정신분석학의 근본 개념』 315, 327-28, Freud 1940: 45, 53. 56-57 참조.

13) 박병준은 「정의와 사랑: 사회적 갈등 해소를 위한 모색의 차원에서」에서 선과 악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이념화된 정의의 문제점을 비판하면서 사랑을 대안으로 제시하지만 사실 에로스적 사랑은 양가성에 기초하기 때문에 쉽게 폭력화된 정의의 모습으로 변질되기 쉽다. 라캉은 사랑의 이중성을 보여주기 위해 l’hainamour(미움-사랑)이라는 신조어를 만들기도 한다. 갈등해소를 위해서 무조건 사랑을 강조할 게 아니라 주체화를 가능하게 만들고 이 주체가 연대하는 양태로서 사랑의 이념을 구체화할 필요가 있다.

 

 

3. 사랑의 존재론적 가능성과 사명

 

사랑이 상호주체적 보편성의 실현을 위한 출발점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라는 이상에 매달리는 에로스가 아니라 타자를 그 자체로 인정하는 존재론적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

존재론적 방향전환이란 주체가 자신의 진정한 자리14)를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진정한 사랑은 자신을 상상적 나르시시즘의 대상인 자아(ego)가 아니라 관계적 항인 주체(sujet)로서 정립하는 것이며, 다음으로 이에 기초해 타자(Autre)를 도구가 아니라 나와 같은 주체로 인정하는 태도를 말한다(Lacan 1991: 66 참조).

결국 상상계적 소외로부터 벗어나 상징계구조 속에 자리를 잡고 이것을 기점으로 타자와 소통할 수 있는 상호 주체적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다름 아닌 주체화(subjectivation)의 과정이다.

라캉은 이러한 작업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주체적인 것, 그것은 또 다른 주체에 대해 유효한 것으로서 하나의 주체 속에 자리를 잡는 것이다.

다시 말해 소통이라는 생각자체가 가능한 가장 근본적인 이 지점으로 가는 것이다” (Lacan 1991: 281).

 

주체화는 진정한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이것은 사랑에 부여된 존재론적 사명을 재발견하는 작업이다.15)그런데 사랑의 존재론적 사명은 역설적으로 사랑이 텅 비어 있음16)을 분명히 할 때 가능해진다.

다시 말해 사랑은 에로스적인 충만함이 아니라 존재의 결여와 충족 불가능성을 드러내는 궁핍, 텅 빈 무에 대한 순수정념이어야 한다. 사랑에 대해 많은 철학자들이 얘기했지만 라캉의 특이성은 충만함을 찬양하지 않고 사랑은 그것이 비어 있기 때문에 타자와 관계를 가능하게 함을 분명히 한 점에 있다. 사랑이 욕망과 결합할 수 있는 것도 이 지점이다.17)

주지하듯 욕망은 존재결여(manqueà-être)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 결여를 채우기 위해 타자에게 어떤 요구를 발하는 순간 욕망과 사랑이 발생한다. 욕망이 대상과의 관계에서 주체의 위치를 드러낸다면 사랑은 타자와의 관계에서 그 주체에게 발생하는 감정, 정념, 태도에 더 관계된다고 할 수 있다.

욕망이나 사랑은 상징계에서 주체가 차지하는 독특한 위치, 즉 분열의 구조에서 비롯된다. 분열의 구조란 한편으로는 상징계의 구성요소로 포함되면서 또 한편으로는 그것에서 벗어나는 주체의 모순적 위치를 말한다.

라캉은 이러한 자리를 ‘탈-존’(ex-sistence)18)이라고 명명했는데 욕망과 사랑은 이러한 분열적 위치에서 발생한다.

 

14) 라캉이 주체에 대한 위상학적 설명에서 제일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상징계의 구멍이면서 동시에 그 구멍을 통해 상징계가 작동하는 구조라는 것이다. 주체의 자리는 항상 구멍으로 표현된다. 이것의 모형이 바로 라캉이 후기 위상학에서 강조하는 ‘원환체’(tore)이다.
15) 바디우는 라캉이 강조하는 사랑이 궁극적으로 ‘타자의 존재’에 접근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라캉이 사랑에 존재론적 사명을 부여했다는 말은 바디우의 말이다. 바디우 2006: 339 참조. 하지만 본문에서 존재론적 사명이란 바디우적 맥락이 아니라 라캉이 욕망과 사랑의 긴장관계를 통해 설명하려는 존재의 진리에 더 가깝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이 존재는 욕망이 겨냥하는 비어 있는 대상으로 주체와 타자에 다 관계 된다. 하지만 바디우는 사랑을 관계적 맥락으로 이해하는 것에 비판적이다.

16) “사랑은 그것이 오직 비어 있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Lacan, Le Séminaire XXIV, L'insu que sait de l'une-bévue s'aile à mourre, Le 15-03-77, Le Séminaire inédit.
17) 라캉은 사랑과 욕망을 대립시키기도 하지만 그것을 비슷하게 보기도 하는데 둘 다 결여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사랑은 이 결여의 주위에서만 작용할 수 있으며, 그것이 욕망을 하기 때문에 사랑은 단지 결여만을 가질 수 있다”(Lacan 1991: 151). 우리는 이것을 개념적으로 구분하기 보다는 기능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
18) 하이픈(-)은 그것이 내재적으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외재(ex)한다는 이중성의 표시이다. Lacan 1966: 11 참조.

 

 

라캉은 세미나 8권 『전이, Le Transfert』에서 플라톤의 『향연』을 텍스트 삼아 여러 유형의 사랑을 분석하면서 종국적으로 사랑이 감춰진 보물인 ‘아갈마’(agalma)를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 주목하는데 이 대상은 욕망의 대상인 ‘오브제 a’19)이기도 하다.

라캉은 알키비아데스가 소크라테스를 사랑하는 것은 그의 겉모습이 아니라 속에 있는 ‘아갈마’를 겨냥20)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외양이 아닌 내면의 진정한 어떤 것을 바라는 사랑이다.

하지만 알키비아데스의 사랑은 여전히 나르시시즘 요소를 갖고 있는데 소크라테스를 이상화하며 끊임없이 무언가를 갈망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알키비아데스가 욕망하는 이 대상(아갈마)은 소크라테스의 본래적 존재가 아니라 신적인 형상, 즉 완전함이나 충만함의 환상과 연관이 있다. 알키비아데스의 사랑에 깔려 있는 나르시시즘 요소를 완전히 탈피해 진정한 존재를 겨냥하기 위해서는 아직 더 나아가야할 길이 있는데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계속된 대화를 통해 사랑의 본 모습을 아주 잘 일깨워주고 있다.

라캉은 소크라테스가 사랑은 “자기가 결여하고 있고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사랑하는 것”21)이라고 말한 것을 상기하면서 소크라테스가 알키비아데스의 사랑을 거부한 이유를 다음처럼 해석한다.

 

“소크라테스가 거절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소크라테스)에게는 사랑할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의 본질은 이 우덴(οὐδέν), 이 공백, 이 틈인데 나중에 신플라톤주의와 아우구스티누스적 사유 속에서 사용된 용어를 빌자면 이 케노시스가 바로 소크라테스의 중심적 위치이다”(Lacan 1991: 185).

 

『향연』에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을 향한 알키비아데스의 사랑을 거절하면서 진정한 사랑은 텅 빈 자리와 관계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분석가 역할을 한다. 주체가 먼저 자신과의 진정한 관계가 확립될 때 타자도 그 자체로 인정할 수 있는데 타자역시 결여이기 때문이다.

사랑에서 중요한 것은 주체와 타자가 아니라 둘 사이에 있으면서 둘을 연결시키는 결여자체이다. 주체의 결여 때문에 타자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또 타자의 결여를 채우기 위해 주체가 욕망을 가지는 것도 아니다.

어떻게 보면 주체와 타자에게 있는 결여 자체가 둘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데 라캉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것을 통해 나는 장소로서 그것이 지탱하지 못한다는 것, 여기에 하나의 틈, 구멍, 상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A(대타자)의 바로 이 자리에 하나의 차원을 덧붙인다. ‘오브제 a’ 는이 상실에 대해서 작동하게 된다”.22)

 

여기서 ‘오브제 a’는 소외와 분리의 과정을 통해 주체가 자신이 잃어버린 것으로 대타자의 장에서 다시금 선취한 것, 그리고 동시에 대타자의 결여를 지시하는 대상으로 욕망의 원인이자 대상의 기능을 수행한다.

성공적인 분리를 통해 ‘오브제 a’가 작동하기 시작하면 비로소 주체는 욕망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이처럼 결여를 중심으로 주체와 대타자가 맺는 관계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사랑의 힘이다.


결국 사랑의 존재론적 사명은 이처럼 공백과의 관계를 가지는 것 속에서 완수될 수 있으며 공백을 공백으로 유지하게 만든다. 이 공백을 통해 욕망이 시작되고, 그것이 다시 주체를 주체로서 만든다. 이것은 또 비존재를 존재로 승화시키는 작업이기도 하다. 이렇게 본다면 라캉이 정신분석의 핵심 개념의 하나인 ‘전이’(transfert)에서 사랑에 관해 집중적으로 말하는 것은 결국 분석의 최종 목적으로 설정하는 ‘주체의 궁핍’(destitution subjective)23)과 관계가 있다.

주체의 궁핍이야말로 존재를 존재 자체로 확보하는 길이고 정신분석적 치료의 궁극적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랑의 존재론적 사명은 개별주체의 실존성 확보에 머무는 게 아니라 궁극적으로 보편성의 실현으로 나아가는 데서 구체화 된다. 그러기 위해서 사랑은 총체성의 환상을 가로질러 ‘주체의 궁핍’이라는 험난한 통로를 뚫고 가야한다. 바디우가 적절하게 지적했듯 사랑이 동일성과 하나 됨의 기만적 논리에 사로잡힌 이기적 자아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고통스러운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24)

 

19) ‘오브제 a’는 주체가 기표에 의해 탄생할 때 잃어버린 부분이자 대타자로 부터 분리한 부분이다. 분리는 주체의 희생, 즉 거세를 대가로 하는데 이렇게 잃어버린 부분에서 주체의 욕망이 시작되고 그 욕망 덕분에 주체가 구성된다. ‘오브제 a’가 욕망의 원인이면서 대상인 것은 이 때문이다.
20) 알키비아데스는 다음과 같이 소크라테스를 찬양한다.

“나는 그분이 조각가의 작업장들에 앉아 있는 이 실레노스(사튀로스)들과 가장 비슷하다고 주장하네. 목적이나 피리를 들고 있는 것으로 장인들이 만들곤 하는 그것들 말이네. 그것들을 양쪽으로 열어젖히면 안에 신들의 상들을 갖고 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되지.”

플라톤, 『향연』, 153-54 쪽. 이 신들의 상이 아갈마로 소크라테스의 지혜로움을 말하지만 라캉은 이를 외연에서 벗어난 본래적 존재의 은유로 해석한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에게 아갈마가 있는데 그것이 알키비아데스의 사랑을 촉발한다”(Lacan 1991: 179).
21) 플라톤, 『향연』, 121 쪽. 라캉에 따르면 사랑은 ‘자기가 갖지 않은 것을 주는 것’이다.

22) Lacan 1975: 31. 세미나 11에서는 ‘소외와 분리’의 과정을 말하면서 이렇게 설명한다. “…주체는 타자 안에서 감지해낸 결여의 지점에 자신의 사라짐을 위치시킨다……하나의 결여가 또 다른 결여와 중첩된다.” Lacan 1973: 194-95.

23) 라캉은 세미나 11에서 소외와 분리를 통해 욕망의 역동성을 얘기하는데 나중에는 이를 ‘주체의 궁핍’으로 정식화한다. 파울 페르하에허, 「전-존재론적 비-실체의 원인과 궁핍」, 『라캉 정신분석의 핵심 개념들』, 228 쪽 참조. ‘주체의 궁핍’이란 상상계의 정념과 상징계의 기표적 동일시를 벗어나 존재의 본래 영역인 실재의 ‘무로부터’(ex-nihilo)로 추락하는 것이다.
24) 바디우는 사랑이 전쟁이자 고통이라고 진단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랑의 절차는 난폭한 물음, 견디기 힘든 고통, 우리가 극복하거나 극복하지 못하는 이별 따위를 동반합니다. 사랑의 절차는 주체적인 삶의 가장 고통스러운 경험들 가운데 하나이며, 이러한 사실을 반드시 인식해야만 합니다.” 바디우 2011: 71.

 

 

4. 보편성 실현의 단초로서 이웃사랑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진정한 사랑은 상상적 소외를 넘어 주체화를 가능하게 하는 동력이 될 수 있는데 그것이 사랑에 부여된 존재론적 가능성이자 사명이다. 그렇다면 사랑이 개별주체의 주체화를 가능하게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어떻게 보편성의 실현까지 가능하게 할까?

여기서 보편성은 주체의 개체성을 말살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대주의와 차이를 가로질러 공동체적 관계를 구축할 수 있는 그런 수용적 보편성을 말한다. 이런 보편성 추구의 시도가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철학자 헤겔은 ?법철학?에서 근대 시민사회의 자유개념을 고대 그리스 공동체가 추구했던 인륜성(Sittlichkeit)의 가치와 결합시키려고 하였다. 헤겔은 개별주체가 갖는 의지의 자기 규정적 측면, 즉 자유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공동체의 이성적 규범인 인륜성의 절대성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헤겔의 역사 철학은 개별자의 특수성을 절대이성이 자기를 실현하는 소외된 일시적 단계의 모습으로 파악하는 한계를 지닌다.

단계적 접근이 아니라 개체성과 보편성이 함께 공존하는 모델은 현대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보편적 개별성’(singuralité universelle) 개념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그는 이러한 이념의 전형을 바울이 구상하는 그리스도 공동체에서 찾는다.25)


바디우는 오늘날 자본의 세계화 과정과 화폐중심 상품경제가 지배적인 질서로 자리 잡으면서 추상화된 동질성의 논리가 강요되는 현대 사회의 현상을 비판하면서 바울을 소환해 새로운 주체화와 공동체적 관계의 전형을 모색하려고 한다. 바디우에 따르면 기독교가 유대교의 배타주의를 벗어나 보편종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개체성을 보편성의 가치와 조화시켰기 때문이다. 바울을 통해 그 이념이 구체화된 그리스도적 공동체는 선민이라는 예외성을 전제하는 유대담론과 우주적 질서의 총체성을 강조하는 그리스 담론을 뛰어 넘는 새로운 그리스도교 담론26)과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사건적 주체의 충실성을 통해 가능해진다.


바디우의 입장은 ‘존재론적으로 하나 형식적으로는 다수’라는 구호로 존재의 일의성을 제창했던 질 들뢰즈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내재성의 철학을 옹호하는 들뢰즈는 개별성을 일자의 총체적 표현이자 힘의 강도로 설명하기 때문에 일의성의 철학에 뿌리를 둔다.

반면에 바디우는 진리를 생산하는 과정으로 사랑을 강조하는데 이 사랑이 진정한 복수성을 보장하는 출발점이 되기 때문이다. 바디우의 논의가 흥미로운 것은 새로운 공동체적 관계의 모색을 라캉과 마찬가지로 ‘사랑’에 기초해 탐색한다는 것이다.

바디우는 보편성의 실현에서 먼저 둘을 둘로 만드는 진리 공정으로서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물론 이 사랑은 에로스적 사랑이 아니라 전 인류를 향한 초월적 사랑인 ‘아가페’적 사랑으로 그 출발점에는 둘이 존재한다는 경험이 있다.

 

“사랑은 둘이 있다는 후사건적 조건 아래 이루어지는 세계의 경험 또는 상황의 경험이다.”27)

 

플라톤이『향연』에서 예찬한 에로스가 일자를 향해 상승하는 고양된 숭고한 힘의 표현이자 하나 됨의 의지라면 바디우가 말하는 사랑은 보편주의를 강조하면서도 개체성을 동시에 끌어안는 과정자체이자 존재에 대한 인정이라 할 수 있다. 인류가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너(여자)와 나(남자)의 구분과 분리가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사랑을 통해 가능하다.28)바디우에 따르면 이 분리는 지식이나 의식의 대상이거나 관찰된(표상된) 그런 분리가 아니라 실재적 분리이다.
사랑은 둘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둘을 둘로 만드는 존재론적 진리 공정이다.


그렇다면 사랑을 통한 보편성의 실현이 라캉에게도 가능할까? 명시적으로 라캉이 공동체적 관계나 보편주의를 옹호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보편성의 이념과 통할 수 있는 개념적 단서를 ‘사랑’에서 찾을 수 있다. 이 단서는 ‘이웃사랑’(amour du prochain)이다.29)

이웃사랑이 타자와의 관계를 가능하게 하면서 이러한 상호관계를 통해 보편성의 실현을 추구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주체화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주체화의 과정에서 타자를 그 자체 타자로 인정30)하는 것이 이웃사랑의 본질이다.


라캉은 자신이 가장 애착을 가졌던 『세미나 7권 정신분석의 윤리』에서 승화(sublimation), 사물(Chose), 주이상스(jouissance)를 중심으로 정신분석의 윤리가 실재를 향함을 강조하는데 주이상스와 관련된 한 장의 소제목이 바로 ‘이웃사랑’이다.

라캉이 말하는 이웃사랑은 공동체의 이익과 선을 중시하는 공리주의 전통이나 타자에 대해 자애심과 배려를 강조하는 종교적 전통의 이웃사랑 개념과는 거리가멀다. 이러한 이웃사랑은 주체의 동정심이나 선을 실행한다는 만족(쾌락)을 위해 타인을 끌어안으려는 나르시시즘적 정념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나르시시즘은 쾌락원리에 의거하는데 쾌락원리는 현실에서 계산 가능한 고통과 쾌락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제한적이며, 유아론의 한계를 절대 초월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랑이 존재론적 의미를 부여 받기 위해서는 이 쾌락원리의 한계 너머를 지향할 필요가 있으며 이 지점에서 쾌락원리를 거슬리는 주이상스가 진정한 사랑의 토대가 될 수 있다.

라캉은 이웃사랑이 쾌락원리가 아닌 주이상스에 연결됨을 강조한다.


라캉이 말하는 이웃사랑은 무화시킬 수 없는 타자의 현존에 대한 순수한 인정을 뜻하는데 이러한 인정의 대가가 크기 때문에 그것은 무조건적 계명31)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타자의 현존은 타자가 자아의 상상적 욕망과 에로스의 대상이 아니라 어떻게 할 수 없는 주이상스의 주체로서 우리 삶에 침투할 때만 분명해진다. 타자의 주이상스를 중심에 두고 이웃사랑을 해석한다면 그것은 근원에서 불편함과 두려움에 더 가깝다.

프로이트가『문명 속의 불만』에서 이웃사랑에 대해 보인 주저하는 태도에 대해 논하면서 라캉은 이웃사랑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이타주의자가 되는 것이 선의 본성이다. 하지만 이것은 이웃사랑이 아니다. 프로이트는 이것을 충분하게 논의하지 않았지만 알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는 이 개념을 강제함 없이 제 자리에 두기 위해 시도할 것이다.

우리는 프로이트가 이웃사랑이라는 계명의 결과 앞에서 매번 두려워하면서 멈출 때 마다 그것에서 드러나는 것에 기초하려고 한다. 그것은 이 이웃에게 깃들어 있는 아주 근본적인 악독함의 현존이다”(Lacan 1986: 219).

 

이 악독함은 타자 뿐 아니라 주체에게도 있는 것으로 오히려 자아의 이타주의가 감추고 있는 쾌락적 요소를 깨뜨리고 가식을 벗겨낼 수 있는 적극적 행동의 원천이기도 하다.

라캉이 향유(jouissance)와 관련해 이웃사랑에 함축된 적극적 의미를 설명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라캉에 따르면 나의 이웃은 나에게 더 이상 어떤 욕망이나 정념을 일으키는 구체적인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되고 순수한 타자가 되어야한다는 것이 이웃사랑에 깔린 전제이다. 이것은 키에르케고어가 말하는 이웃사랑 사상과 상당히 통한다. 키에르케고어는 이웃사랑을 연모나 우정과 구별하면서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연애는 대상에 의해 규정되고, 우정 역시 대상에 의하여 규정된다.
다만 이웃에 대한 사랑만이 사랑에 의해 규정된다. 우리의 이웃은 곧 모든 사람이기 때문에 대상에서 모든 차별이 제거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랑은 그 사랑의 대상에는 어떤 구체적인 특정 차별 규정도 없다는 것으로 인지될 수 있다. 이것은 곧 이웃에 대한 사랑은 사랑에 의해서만 인지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것은 최고의 완전성이 아닐까.”32)

 

키에르케고어가 말하는 사랑은 대상의 특이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무차별적 사랑이며 오직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에만 충실하기위해 자기를 부정하는 순수한 결단을 말한다. 유신론적 실존주의 입장에서 사랑을 통해 어떤 보편주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키에르케고어의 입장이 라캉이 입장과 전적으로 같지는 않지만 이웃사랑이 자기부정을 전제한다는 점33)과 무차별적으로 모든 사람을 사랑하는것34)을 강조하는 점에서 통하는 게 있다. 하지만 라캉은 이웃사랑을 통해 단순히 자기부정에 머무는 게 아니라 쾌락원리를 넘는 향유의지를 강조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라캉은 이웃사랑을 항상 ‘신의 죽음’35)과 연계시켜 설명한다. ‘신의 죽음’은 욕망과 사랑을 상상적 나르시시즘의 장에서 끌어내어 상징적 관계 속에서 실현할 수 있는 토대인 ‘법’(Loi)을 보장한다. 이 법이 보증하는 타자는 이제 자아의 상상적 파트너인 타자 이미지(autre imginaire)가 아니라 그 정체와 그 존재를 알 수 없고 무화시킬 수 없는 타자 자체, 즉 대타자(Autre)이다.

그리고 이런 타자와의 관계에서 법은 필연적으로 주체를 쾌락원리 너머까지 가게 한다. 법은 주체를 타자와의 관계 속에 정립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법에 대한 위반을 통해 주체의 향유를 불러내면서 그로 하여금 쾌락원리 넘어 ‘물’(Chose)36)의 영역으로 향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웃사랑의 실현은 결국 타자(Autre)를 통한 주체의 자기 정립을 가능하게 하며, 타자의 향유를 통해 새로운 관계 맺기의 가능성을 열수 있다. 라캉이 말하는 대타자는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항상 ‘죽은 신’의 형상이며, 결여로서 작동하면서 주체의 향유를 부르는 그런 심연이다.

이러한 이웃은 결국 나에게 공포와 혐오를 주기도 하지만 내존재 발견의 가능한 조건이 된다. 이렇게 보면 타자에 대한 관용과 차이의 존중을 강조하는 여타의 철학보다 라캉의 ‘이웃사랑’은 주체와 타자의 관계에서 더 근본적이다. 결국 ‘신의 죽음’과 ‘법’은 새로운 보편성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25) 이 공동체를 바울은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와 여자의 구별도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입니다”(갈라디아서 3장 27절).

26) 바디우에 따르면 유대 담론과 그리스 담론은 서로 대립하는 것 같지만 상호 의존적이며 지배라는 동일한 형상의 두 측면이다. 두 담론은 세계 안에서 아버지가 준 구원을 가정하는 아버지의 담론이며 예외(유대인의 선민의식)와 총체성(그리스인의 보편주의)의 은밀한 공모 관계에 의존하면서 공동체를 수직적 복종 형태로 속박한다. 반대로 기독교 담론은 지배자의 형상을 쇠퇴시키며 특수주의와 전체성 논리를 벗어나 진정한 보편주의를 실현할 수 있는 아들의 담론으로 그것이 새로운 공동체의 모델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바디우 2008: 84-87 참조.
27) 라캉도 사랑에 대해 많이 언급을 하지만 바디우는 사랑이 철학의 조건이 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 사랑 개념에 큰 중요성을 부여한다. 바디우에 따르면 사랑은 진리의 보편적 말 건넴으로서 사유로서의 주체(죽은주체)를 삶의 위치로 되돌리는 놀라운 주체화의 능력이다. 바디우 2008: 168.
28) 바디우는『조건들』‘5장 철학과 사랑’에서 사랑을 진리와 연관된 철학적 범주로 승화시키는데 5장 논문의 소6장 제목이 ‘둘의 무대인 사랑은 분리의 진리를 드러내고 인류의 하나를 보장한다’로 바디우의 입장을 잘 요약한다. 바디우 2006: 346 참조.
29) 라캉이『세미나 8, 전이』에서 강조하듯 타자와의 관계를 가능하게 만드는 사랑의 적극적 본질은 유대-기독교적 전통에서 말하는 ‘이웃사랑’의 개념에서 찾을 수 있다. Lacan 1991: 186 참조. 현재까지 ‘이웃사랑’이란 주제를 다룬 논문은 홍준기, 「누가 우리의 이웃인가」이 유일하다. 홍준기는 유대-기독교 전통의 핵심사상인 이웃사랑 계명이 현대 도시 및 국가 공동체의 이론적, 실천적 근거로 기능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사상적 유산이라고 강조한다. 이 논문은 향유를 중심에 두고 이웃사랑 개념의 함의를 밝히고 있는데 필자는 존재 발견과 보편성 구축을 위해 사랑 개념이 유용하다는 존재론적 맥락을 더 강조하고 싶다.

30) 물론 정신분석 윤리의 최종 목표는 대타자의 인정이 아니라 오히려 대타자의 결여를 확인하면서 그것을 폐지(무화)하는 것이다. 이것은 존재의 부정이 아니라 주체궁핍화의 필연적 귀결로서 시니피앙의 질서 너머의 실재를 향하는 더 적극적 행위(acte)이다. 이것이 분석의 목표인 비존재로서 존재의 발견이자 증상과의 동일시인데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먼저 타자를 자체로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31) 이웃사랑은 무조건적이라는 점에서 칸트의 정언명제와 유사한 지위를 가진다. Lacan 1986: 227-29 참조.

32) 키에르케고어 2011: 76. 강조는 필자. 지젝은 키에르케고어의 이웃사랑에 대해 분석하면서 대상의 무차별성이 실현되려면 대상은 죽은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웃은 나를 참을 수 없게 만드는 ‘향유’의 과잉이 제거된 그런 이웃이어야 한다. 이렇게 보면 이웃사랑은 결국 사랑의 불완전함을 감추는 수단으로 지젝은 키에르케고어의 사랑이 기만적이라고 한다. 슬라보예 지젝 2006: 116-121.

하지만 키에르케고어가 말하는 사랑은 ‘모든’ 사람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것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라캉은 이웃사랑을 죽은 이웃이 아니라 향유와 대타자의 법을 근거로 해서 설명한다. 다시 말해 지젝의 해석과 반대로 과잉된 향유의 주체로 침투해오는 이웃이 이웃사랑의 대상이며 그것을 통해 보편성의 실현으로 가는 길을 열수 있다.
33) 키에르케고어 2011: 104.
34) 지젝은 키에르케고어의 이웃사랑에 대해 설명하면서 기독교적인 이웃 사랑과 돈 후앙의 연쇄적 유혹이 대상에 대해 무차별적이라는 점에서 통한다고 설명하면서 그것이 결국 죽은 이웃이라고 강조한다. 지젝 2006:
114-16 참조. 그러나 이것은 사랑이 대상에 대해 독립적이며 병리적 정념을 초월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35) ‘신의 죽음’은 『세미나 7, 정신분석의 윤리』13장의 제목이다. 라캉은 ‘신의 죽음’에서 법과 향유의 관계를 설명한 후 이를 다음 14장 ‘이웃사랑’에 연결시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신의 죽음과 이웃사랑은 역사적으로 연관성이 있다”(Lacan 1986: 227). ‘신의 죽음’은 프로이트가 『토템과 터부』에서 언급한 ‘원초적 아버지 살해’의 신화에 대한 라캉의 재해석으로 주체를 가능하게 만드는 법과 초자아의 출발점이 된다.

 필자는 ‘신의 죽음’이 법의 도입(S/)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 대타자의 결여(S(A/ ))의 의미까지 포함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데 두 결여의 겹침을 통해 보편성을 실현할 수 있는 길이 열리기 때문이다.
36) ‘물’은 주체가 잃어버린 대상의 형상으로 존재의 은유이기도 하다. Lacan 1986: 55-70 참조.

 

 

5. 갈등을 넘어 보편성을 향해

 

이상으로 사랑이 지닌 존재론적 함의와 그것이 이웃사랑이라는 실천적 전략을 통해 보편성의 가능한 조건이 될 수 있음을 살펴보았다. 거듭 말하지만 여기서 이웃사랑은 나로부터 시작되는 게 아니라 타자의 어찌할 수 없는 주이상스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리고 그러한 인정은 주체와 타자의 구조인 공백(결여, 상실)을 삶의 조건으로 구조화하는 작업으로 발전해야 하며 그것이 욕망의 윤리기 지향하는 것이다.

필자가 사랑을 전면에 부각시킨 것은 그것이 갈등을 해소하면서 동시에 개별주제의 실존과 공동체적 관계를 함께 보장할 수 있는 하나의 이념적 대안으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사회처럼 모든 사회적 갈등이 쉽게 보수와 진보, 세대간, 지역 간 갈등처럼 진영논리에 빠지며 과잉이념화 되는 현실에서 나르시시즘적인 에로스와 사랑을 구분해 그로부터 사회 통합을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한국사회의 이념갈등과 대립이 이토록 심화된 것은 지나친 에로스의 팽창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하나의 이념, 하나의 가치, 하나의 정치체제에 대한 맹목적 신념과 그것에 편입되지 않는 것에 대한 폭력적 배척이 나르시시즘적 통합의 의지를 키우면서 사회갈등을 격화시키기 때문이다. 여기서 정신분석이 말하는 사랑에 대한 성찰이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


흔히 정신분석 이론은 주체 분열이나 인간 소외, 그리고 무의식적 증상에만 초점을 맞춘다고 오해하지만 라캉이 여러 곳에서 강조하는 사랑은 개체성을 말살하지 않으면서 타자와 연대할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이러한 접근은 관용, 차이, 자유, 소통에 더 초점을 맞추면서 갈등해소를 주장하는 기존의 여러 논의와는 맥을 달리한다.37) 물론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관용이나 존재자의 차이를 강조하는 것은 오늘날처럼 다원화된 사회에서 매우 중요하기는 하다.


하지만 동일성 논리에 근거한 서구 형이상학 전통이 과도한 이성중심주의 폭력을 낳은 현상을 비판하면서 오히려 차이만을 대안처럼 부각하거나 타자의 절대성을 강조하다보면 자칫 주체의 실존이나 사회적인 것의 중요성을 무시할 수 있다.


예컨대 질 들뢰즈는 차이를 절대시하면서 본질상 ‘미세-다양체(micro-multiplicité)’인 욕망하는 기계들의 자유로운 탈주와 연결적 종합만을 주장하고 모든 형태의 주체주의와 구성주의에 반대한다.

레비나스는 문명의 전체주의적 속성을 데카르트적 코기토의 필연적 귀결로 보면서 주체를 구성하고 윤리적 책임을 부과하는 절대적 외재자로 타자의 지위를 승화시킨다. 여러 성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현대철학은 전체주의, 유아론, 이성주의에 대한 반발로 차이와 타자를 절대화화는 경향이 있다. 이런 입장에서 관용은 차이에 대한 존중이지만 자칫 무관심이나 또 다른 배제로 귀결될 수 있다.


여기서 갈등의 해소와 연대를 위해 관용과 차이를 강조하는 것 못지않게 보편성의 실현을 위해서는 주체화의 작업을 선행적 조건으로 강조할 필요가 있으며, 이것을 통해 주체와 타자의 관계를 새롭게 구축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존재의 열정인 사랑개념을 강조할 필요가 있으며 본 논문은 그러한 작업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보편성의 구축과 연대를 위한 노력이 폐쇄적인 공동체 주의나 획일화되고 추상화된 보편성 논리로 흐르지 않기 위해서는 결여에 근거한 주체화가 필요하고, 이것의 조건으로 타자의 주이상스를 전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본 논문의 골자이다. 보편성을 보장하는 상호주체성은 역설적으로 주체의 궁핍과 결여로서 주체의 실존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하며 우리 삶을 규정하는 법의 영역을 전제하면서도 그것을 넘어서려고 하는 향유 의지를 통해 가능할 수 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사랑’과 ‘이웃사랑’ 개념의 존재론적 사명 못지않게 그를 위한 정치적 대안과 실천의 방안도 구체적으로 제시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본 논문에서 부족한 부분으로 이를 위해서는 공동체적 관계에 필요한 정치적 담론의 구체적 내용까지 논의를 발전시켜야 한다. 공동체 구축을 위한 구체적 방향 제시는 무의식과 욕망이 지니는 정치적 함의38)를 발굴하고 실천적 대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을 통해 가능할 수 있을 텐데 그것은 차후 연구과제로 남기려 한다.

 

37) 예를 들어 윤은주는 「다름의 인정과 차이의 지양」에서 정치의 의미를 자유에서 찾는 한나 아렌트에 기대면서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사적영역의 안정성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면서 공동체적 차원에서 함께 자유를 실현할 것을 주장한다. 이외 나은경, 「다양성에 기초한 민주주의」, 장동진, 백성욱, 「차이의 인정과 도덕적 보편주의」 등의 논문도 참조하라.

38) “무의식 그것은 정치적이다.” Lacan, La logique du fantasme, Séminaire inédit, 67년 10월5일.

 

  

참고문헌 -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