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의 구조와 그 한계(I)
인문학 강의 _ 격동의 시대와 자아의 인식
우리가 질병 진단을 받으면 처방이 따라오고, 그 다음 치료를 하게 된다. 이 과정은 의사가 담당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한 시대나 사회의 질병은 매우 복합적이고 광범위하기 때문에 의사 혼자서 모든 것을 담당할 수는 없다.
사회가 위기에 처한 것을 가장 먼저 감지하는 부류는 예술가와 인문학자, 그리고 시인들이다. 이들은 탁월한 감수성과 상상력으로 사회에 나타날 징후를 미리 예감하고, 그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고발한다.
그 다음 경험과학자들이 전문성을 보여준다. 또한 자연과학자는 자연현상에 대해 가설을 설정하고, 검증을 통해 법칙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한다. 한편 사회과학자와 역사학자는 이런 작업을 문화 전반에 관해 수행해야 한다.
하지만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에게 자기 치유가 핵심인 것처럼, 자아 인식은 이 땅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 각자의 몫이다. 격동의 시대에는 사람들이 상황 판단에 무뎌지고, 개념적 혼동을 일으켜 정의와 불의, 선과 악, 그리고 행복과 쾌락을 구별하지 못하게 된다. 그럴수록 자아의 인식과는 거리가 멀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 사회에 만연된 ‘행복’이라는 이름의 쾌락을 추구하는 사태를 주시하고, 소크라테스적인 자세로 진정한 의미의 행복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규명해야만 격동의 시대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것이다.
행복의 의미
인간은 누구나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하지만 행복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선뜻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렇다면 행복의 개념을 조금이나마 명확히 규정하기 위해서는 어떤 부분을 규명해야 할까?
첫째, 행복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개인이 특정한 상황에서 경험하는 심리적 개념이다. 고대철학에서 중국의 양자(楊子)뿐만 아니라 그리스의 아리스티푸스(aristipus)나 에피쿠로스(epicuros)도 개인적 차원의 쾌락이 행복의 조건이라고 주장한 것은 이러한 측면을 강조한 것이다.
둘째, 행복은 본질적으로 선악의 가치가 개입된 윤리적 개념이다. 윤리적 차원에서 우리는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으로서 바람직한 것인지를 묻게 되는데 이 문제는 인간으로서 고유한 방식으로 살아야 한다는 당위를 함축하게 된다.
셋째, 행복은 체계적인 인생 계획, 그 실현과 관계되는 합리적인 개념이다. 롤즈(john rawls)는 “사람은 어느 정도 유리한 조건 밑에서 세워진 인생의 합리적인 계획이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수행되고 있는 동안에, 그리고 자기의 의도가 실현될 수 있다고 무리 없이 확신할 때 행복해진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할 때, 우리는 행복이란 ‘합리적인 인생 계획을 가진 사람이 윤리적인 차원에서 자기의 의무나 당위를 이행하는 동안 총체적 자아에서 우러나온 소망을 성취시켰을 때 얻는 만족감’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한 만족감을 경험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결국 어느 정도의 행복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게 된다. 자신의 총체적 자아가 무엇인지 가늠하고, 인생 계획을 설계하는 데 있어서 합리적인 태도를 유지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사람들은 행복을 항상 산 너머 저 편에 걸려 있는 무지개처럼 아득하고 먼 그 무엇으로 느끼고, 행운을 염두에 두게 되는지도 모른다.
행복의 구체화
행복의 추구를 구체화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세 가지 점을 고려해봐야 한다. 하나는 과학기술이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가의 문제이고, 다른 하나는 각자의 기질에 따라 자유의 유형이 다르고 이 유형에 따라 행복의 종류도 달라진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행복은 궁극적으로 개념의 규정이나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우연과 행운이 개입하는 섭리(攝理)의 문제라는 것이다.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행복은 어떤 개인의 소망이나 욕구가 충족됐을 때 느끼는 심리적 만족감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편안한 정도에 정비례해서 만족도가 높아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가령 평균 수명이 거의 두 배로 연장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로장생을 갈구하며 더 나은 의식주를 찾아 동분서주할 뿐 아니라, 자유와 평등과 인권이 많이 신장됐지만 오히려 투쟁과 갈등은 더욱 심해진 것이 우리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과학 기술은 현대인의 행복에 긍정적 요소로 작용했지만, 자아의 확립에 부정적인 효과를 제공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이제 우리는 행복의 전제 조건인 ‘자유’의 개념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과학 기술은 현대인에게 생활의 불편을 덜어 줌으로써 자유를 제공했지만, 내면적으로는 오히려 고독과 불행을 느끼는 이유가 뭘까? 여기서 우리는 자유의 의미가 적어도 두 가지임을 알 수 있다.
상식적으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억압이나 명령, 혹은 강제나 구속을 받지 않을 때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의 자유를 행동의 자유라고 부른다. 자유민주주의 체제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추구하는 자유나 과학 기술이 가장 많이 제공한 자유가 주로 이 행동의 자유이다.
한편 우리는 아무리 행동의 자유를 누린다고 해도, 답답함을 느낄 때가 있다. 동물적인 충동과 욕구를 이겨내고 누릴 수 있는 자유를 우리는 ‘의지의 자유’라고 할 수 있으며 이것은 행동의 자유와 전혀 다른 개념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현대인이, 특히 우리 한국인이 주로 행동의 자유를 추구하는 데 심혈을 기울이며 이러한 자유를 얻음으로써 행복을 얻고자 한다는 사실이다. 오늘날 행복의 추구가 더욱 추상적인 것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끝으로 행복의 섭리적 측면을 살펴보자.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행복은 우리에게 항상 산 너머 저편에 걸려있는 무지개 같이 아득하고 먼 그 무엇으로 남아 있다는 느낌을 준다. 행복의 개념을 이해하고 그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는 우리에게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행운’과 ‘축복’뿐이다.
어쩌면 이것이 ‘행복(幸福)’이라는 어휘가 담고 있는 가장 중요한 요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행복의 개념 속에 명확히 규정할 수 없는 섭리적인 우연성의 요소이다. 물론 우리는 행운과 축복을 얻으려고 노력할 수 있지만 그것을 보장받을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행복은 분명히 이론적인 개념의 규정과 실천적인 의지의 결단을 넘어서는 그 무엇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행복의 참다운 의미를 실감하기 위해 신의 지적 사랑을 얻어낼 수 있도록, 혹은 좋은 수호신을 가질 수 있도록 간절히 기원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무엇보다 죽음의 문제와 연관돼 있고 결국은 종교와의 관계를 통해 더 많은 답변을 얻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종교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고 그것을 온전하게 실천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을 인식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그러한 마음가짐이나 생활태도를 가진 사람이 현세에서 행복을 누릴 것이라고 해석하면 그 가르침은 일종의 처세술로서 장기적인 포석에 지나지 않으며, 신앙의 형태도 한낱 구복의 방편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하게 된다. 만약 종교적 신앙의 계기를 현세의 행복에서 찾고 그 가르침을 약삭빠른 처세술로 이해한다면, 구원이나 해탈은 그만큼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우리가 합리적 차원에서 인생을 설계하고, 의지의 영역에서 그것을 실현하려고 최선을 다하면서도 궁극적인 행복을 미지의 섭리에 맡겨두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결국 행복은 직접적으로 추구해야 할 삶의 목표가 아니라 자기의 욕구와 능력을 확인하고 의무를 이행하면서 성실하게 살아갈 때, 그림자처럼 다가오는 ‘자아 인식의 부산물’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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