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상/기타

제 2장 - 양심 없음, 수치심 없음. 들뜸, 탐욕

rainbow3 2020. 4. 13. 10:03



2. 아히리까(Ahirika) - 양심 없음 

 

도덕적으로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것을 아히리까(ahirika)라고 한다. 부도덕하고 불선한 모든 행위는 똥과 같다. 아히라까(ahirika)는 마을의 돼지와 같다. 똥은 매우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것으로 똥이 묻어 있으면 사람들 앞에서 아주 당황하게 된다. 반면에 돼지에게는 똥은 좋은 먹을거리다. 돼지에게 똥은 혐오스러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똥으로 더렵혀졌다고 해서 당황할 필요가 없다. 돼지는 확실히 똥 속에서 뒹굴면서 똥을 먹는 것을 즐거워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선량한 사람에게는 생명을 죽이는 것 등의 악행(duccarita)은 혐오스러운 것이다. 선량한 사람은 설사 무의식중에 그러한 행동을 했다하더라도 부끄럽게 생각한다. 하지만 아히리까는 악행을 혐오하지 않고 악행에 대해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마음의 작용이다. 사실,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들끼리 악행을 자랑거리로 생각한다. 

 

모하(moha)가 일어나면 아히리까(ahirika)로 발전한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도 어리석음에 휘둘리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래서 현명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말하는 바의 진실성을 체험으로 판단해봐야 한다.  

 

하리따 선인의 이야기 

 

하리따 선인의 그릇된 행동에서 아히리까가 잘 드러난다.(어리석음에 대한 이전 장을 참조할 것) 선인은 이미 신통지(abhiññā)를 성취한 초보적 덕성의 성자였지만 왕궁의 위층 침실에서 왕비의 시녀들이 있는데도 아랑곳없이 창피스러운 음행을 저질렀다. 품위를 실추하는 선인의 그러한 행동은 모하(moha)와 아히리까(ahirika)에서 비롯된 것이다. 

 

모든 불선업은 부끄러운 일이다. 비단 선인의 부끄러운 행동뿐만 아니라 남을 헐뜯고, 노발대발하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더럽고 상스러운 말을 쓰고, 헛된 자만심에 꽉 차있고, 바보 같은 자존심으로 남을 깔보고, 악의적인 시기, 질투 등에서 넌지시, 간접적으로 남을 비난하는 행동등도 혐오스럽고 부끄러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불선한 행동은 부끄러운 것이라고 알아야 한다. 이 아히리까(ahirika)와 함께 일어나는 마음을“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마음, 비양심적인 마음”이라고 하며 악행을 짓는 사람을“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 사람, 양심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3. 아놋땁빠(Anottappa) - 수치심 없음 

 

아놋땁빠(anottappa)란 두려움이나 무서움이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도덕적으로 두려워하지 않음을 뜻한다. 모든 악행은 거침없이 타오르는 불과도 같다. 아놋땁빠는 나방과 같다. 사실 타오르는 불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하지만 나방은 타오르는 불꽃을 무섭게 생각하지 않고 아무 거리낌없이 불속으로 날아들어 간다. 바로 이와 같이 악행은 수많은 고통을 초래한다. 그래서 악행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어리석음(moha)때문에 이러한 고통을 보지 못하고 아놋땁빠(anottappa)로 인하여 악행을 무섭게 여기지 못한다. 이러한 마음의 작용은 악행을 대범하게 하도록 부추긴다. 악행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위험이 뒤따른다. 

 

1. 자신을 비난하는 두려움 - 아따누와다봐야(Attānuvāda-bhaya): 자신을 비난하거나 책망하고, 체면과 자부심 깍이는 두려움이다. 악한 사람은 이러한 생각에 사로잡힐 것이다. “비록 많은 사람들이 나를 선량한 신사로 생각하지만 나는 내 자신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사실 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선량한 사람이 아니라 남몰래 악행을 일삼는 사악한 놈이다.” 

 

2. 남들의 비난을 받는 두려움- 파라누와다봐야(parānuvāda-bhaya): “너는 불선한 행동, 악행을 일삼는 못된 놈이다.”라고 남들에게 비난과 책망을 받는 두려움이다. 

 

3. 처벌받는 두려움 - 단다봐야(daṇḍa-bhava): 살인을 저질러서 사형당하거나. 남의 물건을 훔치다가 주인에게 두들겨 맞거나, 불륜을 범했다가 살해당하거나, 다른 여러 범법행위를 저지르다가 감옥에 가는 것과 같은 고통과 처벌의 두려움이다. 

 

4. 사악처에 떨어지는 두려움 - 두가띠봐야(duggati-bhaya): 임종직전 몰려오는 악행에 대한 엄청난 후회와 내생에 사악처에 떨어질 거라는 고통스러운 생각에서 오는 두려움이다. 

 

악한 사람은 간계, 책략, 술수를 써서 악행으로 초래되는 처음 세 가지 두려움은 용케 피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생에 사악처에 떨어지는 두려움까지 피할 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악행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다. 하지만 아놋땁빠(anottappa)가 마음에 자리 잡으면 평소에는 악행을 무서워하던 현명한 사람도 부끄러워하는 마음이나 두려움 없이 끔찍한 행동을 저지르게 된다. 

 

하리따 선인의 이야기에서 명심해야 할 점 

 

여기서, 보살(하리따 선인)의 경우를 한 번 더 살펴봐야 한다. 이 이야기에는 참으로 무서운 사실이 많다. 말할 필요도 없이. 선인은 자신의 체면이 깎이고 자신을 비난하는 두려움(attānuvāda-bhava)으로 괴로워했다.“왕의 스승인 선인이 왕비와 불륜을 저질렀다.”라는 나쁜 소문이 왕이 없는 동안 온 도시로 퍼졌고 선인은 남들의 비난을 받는 두려움(parānuvāda-bhava)으로 괴로워했다. 

 

아난다의 전생인 왕이 바라밀을 닦는 선량한 사람만 아니었다면 불륜을 저지른 선인의 목숨을 풀잎만큼도 고려않고 바로 사형에 처했을 것이다. 선인이 겨우 사형에 처해지는 것을 모면하게 된 것은 바로 왕의 덕성 때문이었다. 선인에게 아놋땁빠(anottappa)가 일어나자 극형도 두려워하지 않고 거리낌 없이 불륜을 저질렀던 것이다. 이러한 무모함과 함께 일어나는 마음을 수치심 없는 마음(anottappa-citta)이라고 한다. 

 

마치 마을의 돼지가 똥을 혐오하지 않는 것처럼, 수치심(ottappa)이 없는 사람은 악행을 창피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마치 나방이 활활 타오르는 불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수치심이 없는 사람은 악행을 두려워하지 않는다.(위바위니 띠까에서) 

 

4. 웃닷짜(Uddhacca) - 들뜸, 안절부절, 갈팡질망 

 

웃닷짜(uddhacca)는 들뜸을 뜻한다. 또는 안절부절못하는 마음상태라 하기도 한다. 마치 잿더미에 돌을 던지면 아주 미세한 재의 분말이 사방으로 휘날리는 것처럼 들떠있는 마음은 쉽사리 한 대상에 머물지 못하고 이 대상 저 대상을 왔다 갔다 한다. 웃닷짜와 함께 일어나는 마음을 들뜬 마음이라고 한다. 마음이 들떠 있으면 떠돌이, 뜨내기, 건달, 목적의식 없는 사람이 되어 버린다. 

 

난다 장로가 마음을 집중하지 못한 이유 

 

젊은 왕자 난다가 자나빠다 깔리야니와 결혼하려 할 때 부처님은 난다를 승원으로 데려와 출가를 시켰다. 난다는 마음이 산란하여 법에 집중할 수 없었고 수시로 나나빠다 깔리야니를 생각했다. 이 이야기에서 법에 마음을 집중할 수 없었던 난다 왕자의 마음 상태가 들뜸의 좋은 예이다. 

 

들뜸이 가지고 있는 미약한 힘 

 

들뜸은 어떠한 대상에도 확고하게 마음을 집중하지 못하는 것이다. 마음이 산란하기 때문에 마음은 이리저리 방황한다. 들뜸이 불선법이긴 해도 실제적으로 악행을 하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탐욕, 성냄, 어리석음처럼 우리를 사악처로 떨어뜨리는 힘은 없다. 

 

5. 로바(Lobha) - 탐욕

 

로바(Lobha)는 탐욕으로 감각적 쾌락을 갈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열반을 얻고자 한다든지, 법을 얻고자 한다든지. 뭘 배우고자 한다든지, 가난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기 위해 재산을 얻고자 하는 것은 탐욕이 아니다. 이러한 것은 열의, 즉 찬다(chanda)라고 하며 나중에 살펴볼 것이다.  

 

로바(Lobha)의 다른 이름 

 

로바(Loba)는 페마(pema), 딴하(taṇhā), 라가(rāga). 사무다야(samudaya)라고도 한다. 페마(pema)라는 말은 아들과 딸, 형제와 재매, 남편과 부인. 가족의 일원, 친척 간에 주고받는 사랑이나 애정을 가리킬 때 쓰인다. 그래서 페마는 진정한 사랑을 뜻한다. 그래서 페마는 진정한 사랑을 뜻한다. 이 진정한 사랑은 속박을 뜻하는 삼요자나(saṁyojana)라고도 한다. 삼요자나는 한 사람을 다른 사람에게 밧줄처럼 옭아매서 그 사람과 떨어지지 못하게 한다. 

 

사람들이 갈망하고 기뻐하는 형상[色], 소리[聲], 냄새[香], 맛[味], 감촉[觸]의 다섯 가닥의 감각적 대상이 있는데 이를 깜마구나(kāmaguṇa)라고 한다. 

  

마치 배고픔과 목마름처럼 일반적 욕구를 훨씬 뛰어넘는 감각적 대상에 대한 강렬한 욕망을 딴하(taṇhā)라고 한다. 이성(異性)을 못내 갈구하는 사람은 “애욕에 미쳤다.”고 분류한다. 딴하는 갈애(渴愛)또는 굶주림을 뜻한다. 다섯 가지 감각적 대상가운데 몸의 감촉(성관계)을 가장 갈구하는데 이를 라가(rāga)라고 한다. 이 라가는 어떤 것을 애착하거나 집요하게 매달리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마치 염색한 옷감에 색깔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라가는 바로 어떤 사람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로바(lobha)이다. [이는 사전적인 의미가 아니고 흔하게 사용되는 대로 분류한 것이다.] 

 

사성제의 분류에서 로바(lobha)는 괴로움의 원인이나 괴로움이 예정됨을 뜻하는 사무다야(일어남, 集, samudaya)로 불린다. 로바를 없애지 못하는 중생들은 모두 윤회의 수레바퀴 속에서 괴로움을 겪으면서 계속 헤메고 다녀야 한다. 

 

중생들이 겪는 크거나 작은 괴로움은 이 갈애(taṇhā), 탐욕(lobha), 일어남(samudaya)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탐욕이 크면 클수록, 괴로움은 커지고, 탐욕이 적을수록 괴로움도 적어진다. 로바와 함께 일어나는 마음을 탐욕스런 마음, 갈망하는 마음, 애욕에 찬 마음, 붙들린 마음이라 하고 그러한 마음을 가진 사람을 탐욕스런 사람, 갈망하는 사람, 애욕에 찬 사람, 족쇄를 찬 사람이라고 한다.  

 

탐욕은 줄지 않는다. 

 

만약 갈애나 욕망이라고 불리는 탐욕을 법(Dhamma)으로 제어하지 않고 그대로 놔두면 탐욕은 절대로 줄지 않는다. 송아지가 자라면서 그 뿔이 점점 솟아오르듯이 사람의 탐욕도 태아단계에서부터 함께 해온 사람의 탐욕도 나이가 들면서 점점 증가한다. 탐욕을 제어하지 못하는 늙은이는“머리카락은 굵기가 점점 가늘어지건만 어리석음은 나이와 함께 커가는 구나.”라고 손가락질을 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