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병의 세 가지 유형
- 무지⋅욕심⋅습관 -
장진영(張珍寧)**
<요약문>
현대사회의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 물질적 풍요를 향유하고 있지만, 오히려 더 큰 정신적 빈곤과 심리적 고통에 노출되어 있다. 본고에서는 오늘날 인간이 겪고 있는 수많은 심리적 고통, 즉 마음병과 그 원인에 대해 붓다와 소태산의 고통 진단과 그 치유법인 삼학(三學)을 염두에 두고 3가지 유형으로 정리하였다.
마음의 병은 다시 말해 마음 그 자체가 병든 것이 아니라 마음의 작용에 있어서 나타나는 문제로서 “마음을 잘 지키지 못하고, 잘 알지 못하며, 잘 사용하지 못하는 병”이라 할 수 있다.
초기불교에서는 ‘갈애’와 ‘무지’를 꼽았다면, 대승불교 특히 유식에서는 아집과 법집으로 나누어 각각 정서적 측면과 인지적 측면에서 병인을 파악하였다. 특히 유식학에서는 모든 경험과 인식의 내용이 결국 연기된 것, 즉 의타성(의타기성)임에도 허망분별, 즉 분별성(변계소집성)에 빠져 진실성(원성실성)를 보지 못하는 점, 그리고 그러한 허망분별이 자아에 대한 집착과 사견에서 온다는 점에서 마음병의 원인으로 말나식을 주목하였다. 한편 모든 언어분별을 떠난 경계 이전의 마음인 원래 마음(무분별심, 무착심) 등 본성회복 유무와 마음 작용의 분별주착 유무에 따라 인지적・정서적 측면의 병인을 살펴보았다. 이와 함께 주목해야 할 것은 의지작용에 의한 말과 행동 등 구체적인 행위와 습관의 문제이다.
이는 모든 심신작용이 곧 업인이 되고 그 업인에는 반드시 과보가 오는 인과보응의 이치에 따른 것이다. 일단 형성된 잘못된 습관은 오히려 인간의 정당한 마음작용을 구속하게 된다는 점에서 마음병의 한 축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상의 지-정-의 세 가지 측면에서 마음병을 파악한 결과, 이를 무지의 병, 욕심의 병, 습관의 병으로 정리하였다. 각각은 다시 두 가지 측면에서 균형 있게 볼 필요가 있다.
무지의 병에서는 자아에 대한 근본무지와 동시에 현실에 대한 무지도 보아야 한다. 욕심의 병에서는 이기적 욕심(욕구)를 조절하지 못하는 경우와 함께 이타적 욕심(욕구)를 정당하게 세우지 못함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습관의 병에서는 부당한 습관을 반복하는 것과 함께 정당한 실천을 하지 못함도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들 마음병은 결국 마음의 작용에 있어서 자신을 이롭게 하려는 이기적 동기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 근원은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무지에 대한 자각을 통해 늘 깨어있고, 나에 대한 집착을 놓고 본성을 회복하며, 나아가 적극적인 실행의지로서 습관과 기질을 변화시키는 세 가지 방면의 마음공부를 병행하는 것이 필요하다.
주제어 : 마음병, 지-정-의, 무지, 욕심, 습관, 마음공부
* 이 논문은 2010년도 정부재원(교육과학기술부 학술연구조성사업비)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NRF-2010-361-A00008).
** 원광대학교 마음인문학연구소 HK교수
목 차
Ⅰ. 들어가며: 현대사회와 마음병
Ⅱ. 마음작용과 마음병
1. 마음의 인식과 마음병
2. 괴로움의 원인
3. 마음작용과 마음병의 양상
Ⅲ. 지⋅정⋅의와 마음병의 세 가지 측면
1. 지(知)의 측면에서 본 마음병 - 무지
2. 정(情)의 측면에서 본 마음병 - 욕심
3. 의(意)의 측면에서 본 마음병 - 습관
Ⅳ. 나가며: 정당한 고락과 마음치유
Ⅰ. 들어가며: 현대사회와 마음병
오늘날 인류는 역사상 일찍이 경험하지 못했던 물질적 풍요를 누리며 살고 있다. 그 풍요는 인류의 오랜 전통적 가치와 규범을 송두리째 위협하고 있다. 언론 매체에서는 연일 가족 해체, 공동체 붕괴, 인간성 상실 등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더 가슴 아픈 현실은 이러한 무한경쟁 속에 파편화된 인간들의 실상을 보면서도 곧 무덤덤해지고 무기력해진 자신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물질적 풍요 자체가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일 수는 없다. 하지만 그 풍요의 이면에는 인간의 끊임없는 욕구(혹은 욕망)가 도사리고 있다. 인간의 욕구는 한편에서는 인간의 자아를 적극 실현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나아가 국가와 사회, 인류의 이상을 실현하는데 긍정적인 역할을 담당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 욕구가 서로 다른 개인이나 사회, 국가의 욕구와 상충될 때 그것은 조절될 필요가 있다. 거기에는 자신의 욕구뿐만 아니라 상대의 욕구, 나아가 인간 사회의 욕구에 대한 바른 이해와 더 큰 가치에 대한 공동의 노력이 뒤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하지만 자본화된 현대사회에서 인간의 욕구는 무한히 자극되고 무한히 증폭되어 그것을 추구하고자 한다면 스스로를 무한경쟁의 현장으로 몰아가야 한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주변은 물론 스스로를 돌아볼 여유조차 가지지 못한 채 물질적 욕구(혹은 욕망)에 이리저리 끌려 다니는 현실에 처하게 되었다.
일찍이 붓다(Buddha, 佛)는 2600여 년 전 이를 간파하였고, 이 세상을 ‘괴로움의 바다[苦海]’로 규정하였다. 모든 살아있는 생명체는 필연적으로 생⋅노⋅병⋅사의 고통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은 무상(無常)한 것이며, 그로부터 고통이 발생한다. 흔히 알고 있는 생⋅노⋅병⋅사의 사고(四苦)는 인간이 유한한 육체를 지니고 윤회하는 존재라는 점에 기인하는 고통이다. 즉 육체의 필연적 변화로부터 수반되는 신체적 고통이라 할 수 있다. 무상한 것에 대한 집착과 무상의 이치에 대한 무지[無明]로 인하여 고통은 증폭되는 것이다. 결국 스스로가 집착하여 스스로를 괴롭고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다.
인간이 살아감에 있어서 기본적인 생존의 욕구, 번식의 욕구, 자아실현의 욕구 등은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오늘날 마음의 병이 더 중시되는 것은 물질적 풍요에 따른 자극의 다양화와 그 욕구의 강화에 기인한 것이다. 생존에 필요한 것 이상으로 더 많은 것을 가지고도 더 많은 것을 누리고자 한다. 욕구는 더욱 다양해지고 갈수록 강화되고 있지만 인간은 더 큰 빈곤과 결핍에 허덕이고, 스트레스, 우울, 분노, 상실감, 박탈감, 무기력함 등에 시달리고 있다. 급기야는 더 많은 욕구 실현을 위해 벌어지는 무한경쟁의 과정에서 정당한 규칙(rule)을 이탈하고 만다. 어떤 방식으로든 상대방의 이익, 권리, 나아가 생명까지도 빼앗고자 양심,예의염치, 인간성, 도덕성마저 모두 내던진 채, 온갖 불법행위를 스스럼없이 자행하고, 살인과 전쟁까지도 정당화시키는 상황으로까지 치닫고 있다.
이러한 물질적 풍요와 과학문명의 발달에 따라 상대적 빈곤과 정신적 피폐, 그리고 ‘파란고해(波瀾苦海)’를 면치 못하고 있는 현대인의 삶을 소태산 박중빈(少太山 朴重彬, 1891-1943)은 한 마디로 ‘물질의 노예 생활’이라 진단한 바 있다.1) 인간의 고통이 인간의 끊임없는 욕구와 집착에 기인한다는 점에서는 2600년 전의 붓다의 진단이나 100년 전 소태산의 진단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 다만 현대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물질적 조건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더 다양하고 더 강하게 인간의 욕구를 자극하고 나아가 통제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등 현대사회의 교통과 통신기술의 놀라운 발전은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우리의 욕구를 자극하여 그 정신을 빼앗고자 혈안이 되고 있으며, 개인의 이기적 욕구가 실현되는 과정에서 미치는 사회적 영향도 훨씬 증대되고 있다.
본고에서는 붓다와 소태산의 진단에 근거하여 현대사회에서 인간이 겪고 있는 수많은 심리적 고통과 그 병인에 대해 ‘무지, 욕심, 습관’의 세 가지 측면에서 정리해보고자 한다. 이는 마음의 속성을 설명할 때 통용되는 지(知)-정(情)-의(意)의 3방면에 따른 접근을 염두에 둔 것이며, 아울러 심리학에서 인지, 정서(감정), 행동의 측면에서 인간의 심리를 다루고 있는 점과도 서로 상통된다고 생각된다.
이 세 가지 측면은 각각 마음의 속성 중 한 면을 강조한 것이지만 서로 밀접한 연관 속에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함께 논의될 필요가 있다. 동시에 이는 붓다와 소태산이 제시한 치유의 방법(수행법과 마음공부법), 즉 계(戒)-정(定)-혜(慧), 혹은 정신수양(精神修養)-사리연구(事理硏究)-작업취사(作業取捨)의 삼학을 염두에 둔 것이다.
1)『정전』 제1 총서편 제1장 개교의 동기(『원불교전서』, 21쪽).
Ⅱ. 마음작용과 마음병
1. 마음의 인식과 마음병
마음을 한 마디로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먼저 마음을 제대로(온전히) 알기(체험하기) 어렵다는 점이고, 다음은 그것을 체득하여 알았다 할지라도 적절히 표현하여 전달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먼저 생각해야 할 것은 언어의 한계, 즉 언어적 사유방식과 전달체계가 지니는 한계이다. 언어와 명상(名相)을 통하여 형상 없는 마음을 표현하고자 함은 어디까지나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과 같이 하나의 방편이자 상징으로 그 실상을 온전히 드러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는 상대적 언어체계로서 절대적 진리세계를 표현하고 전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지 체험과 인식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며, 그 자리를 언설로 표현하기 어렵다는 것이지 아예 언설로 표현할 수 없다는 것도 아니다.
다음은 체험에 대한 접근방식의 한계를 들 수 있다. 마음을 체험하는 방식이 가지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곧 관찰자와 관찰대상의 일치이다. 즉 마음이(마음으로)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마음은 어떤 자극에 대해 반응하고 그 대상을 지향한다. 그러므로 외부자극에 대해 밖의 대상을 향하기 쉽다. 이때 밖으로 향하려는 마음을 안으로 돌려서 스스로 마음을 성찰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역시 쉬운 일은 아니지만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다만 마음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거나 ‘온전히’ 체험하기 위해 지속적인 수행과 훈련이 필요하다.
물론 막상 어떤 체험을 하였다 할지라도 그것이 어떤 경지인지를 판별하기란 쉽지 않다. (궁극적이든, 현실적이든) 마음의 참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온전히 체험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선입견이나 고정관념, 이기적인 욕심이나 의도 등에 의해 왜곡되지 않아야 한다. 어떤 분별과 주착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상태에서야 비로소 자타, 주객, 시비, 선악의 상대적인 마음을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분별과 주착에 사로잡힌 상태에서는 마음에 대한 단편적 체험이나 치우친 인식만을 얻게 되고 말 것이다.
소태산은 본래 마음(本性)에 대해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입정처(入定處)’, ‘유무초월(有無超越)의 생사문(生死門)’이라 하였다.2) 즉 이 자리는 언어와 명상으로 표현하고 전달할 길이 끊어져서 오직 입정(入定)의 상태에서 비로소 체득하여 알 수 있는 자리이며, 이 자리는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지만 경계를 따라 능히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자리라는 것이다.
이 자리는 생멸거래가 끊어진 자리이며 동시에 천차만별의 생멸변화가 펼쳐지는 자리이다. 그 체성에 있어서는 마음(본성)에 괴로움과 병인이라고 할 만한 것이 따로 없지만, 그 작용에 있어서는 그 마음의 병인에 따라 괴로움이 엄연히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끝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즉 마음 자체가 병드는 것은 아니다. 그 마음을 작용하는데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병은 ‘마음을 잘 알지 못하고, 잘 지키지 못하고 잘 사용하지 못하는 병’이라 정의해도 무방할 것이다. 이하에서는 마음 그 자체의 규명보다는 그 마음이 작용할 때 나타나는 여러 가지 병인(고통을 야기하는 원인)에 주목하고자 한다.
2)『정전』제2 교의편 제1장 일원상(『원불교전서』, 23쪽).
2. 괴로움의 원인
1) 갈애와 무명
마음의 병이란 마음이 작용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괴로움이다. 그것은 본성의 차원에서 적용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병든 마음과 병들지 않은 마음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 그 자체에는 본래 병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 다만 그 마음이 작용하는 과정에서 괴로움[苦, dukkha]이 야기될 경우, 그 괴로움을 야기하는 심리적 병인을 ‘마음병’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3)
이는 붓다의 가르침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붓다는 최초 법륜을 굴리며 네 가지 성스러운 진리, 즉 ‘사성제(四聖諦)’를 통해 마음의 고통과 그 병인에 대해 명확히 밝히고 있다. 고성제에서는 붓다가 바라본 현실세계의 괴로움을, 집성제에서는 그 괴로움의 원인으로서 집착을, 나아가 멸성제에서는 그 괴로움의 소멸을, 도성제에서는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괴로움(고통)이란 무엇인가?
『초전법륜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의 성스러운 진리[苦聖諦]이다.
태어남도 괴로움이다. 늙음도 괴로움이다. 병도 괴로움이다. 죽음도 괴로움이다.
[근심⋅탄식⋅육체적 고통⋅정신적 고통⋅절망도 괴로움이다.]
싫어하는 [대상]들과 만나는 것도 괴로움이다. 좋아하는 [대상]들과의 헤어지는 것도 괴로움이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움이다.
요컨대 취착의 [대상이 되는] 다섯 가지 무더기[五取蘊] 자체가 괴로움이다.4)"
붓다는 괴로움(고통)을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하고 있다. 먼저 인간(을 포함한 모든 有情)이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개인적⋅신체적 고통에 해당하는 생⋅로⋅병⋅사의 사고(四苦)가 있다.
다음에는 개인의 사회적⋅심리적 고통에 해당하는 애별리고(愛別離苦), 원증회고(怨憎會苦), 구불득고(求不得苦), 그리고 오음성고(五陰盛苦) 등 네 가지가 있다.
붓다는 사고에 이 네 가지를 더하여 팔고(八苦)로 밝히고 있다.5) 이는 마지막에 밝힌 오온(五蘊=오음)에 대한 집착(取着)[五取蘊苦]으로 종합될 수 있다.
여기서 인간의 고통을 신체적 통증(pain)과 심리적 괴로움(suffering)으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전자를 일차적 고통, 후자를 이차적 고통이라 한다. 일차적 고통은 시간과 함께 결국 사라지게 되지만, 이차적 고통은 시간과 함께 반드시 소멸되지는 않는다. 이 이차적 고통은 자연적(거역할 수 없는 신체적) 고통이 아니라 마음이 만들어낸 주관적 고통이기 때문에 그 마음을 바꾸지 않는 한 그 고통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다.6)
3) 마음의 병이 몸의 고통을 야기하거나, 몸의 병이 마음의 병을 야기하는 경우에 대해 많은 논의가 진행되고 있지만, 그렇다고 마음의 병이 반드시 몸의 고통을 야기하는 것도 아니며, 몸의 병이 반드시 마음의 고통과 연결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 관련성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반드시 서로 일치하는 것 또한 아니다. 여기서는 어디까지나 ‘마음병’을 마음의 고통을 야기하는 심리적 원인에 한정하고자 한다.
4)『초전법륜경(Dhammacakkappavattana-sutta)』(S56:11),『상윳따니까야』제6권, 각묵스님 옮김, 초기불전연구원, 2009, 385쪽.
5) 여기에 슬픔(soka), 비탄(parideva), (육체적) 괴로움(dukka), (정신적) 괴로움(domanassa), 고난(upāyāsa)의 5개를 포함하여 13가지의 괴로움으로 밝히기도 한다. 붓다고사 지음,대림스님 옮김,『청정도론』제2권, 초기불전연구원, 2004, 545-559쪽 참조. 초기불교의 괴로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정준영, 「붓다의 괴로움과 그 소멸」,『괴로움, 어디서 오는가』, 운주사, 2013 참조.
6) 서광스님,『치유하는 불교읽기』, 불광출판사, 2012, 30쪽.
『화살경』에서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비구들이여, 배우지 못한 범부는 육체적인 괴로움을 겪게 되면 근심하고 상심하며 슬퍼하고 가슴을 치고 울부짖고 광란한다. 결국 그는 이중으로 느낌을 겪고 있는 것이다. 즉 육체적 느낌과 정신적 느낌이다. 비구들이여,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화살에 꿰찔리고 연이어 두 번째 화살에 또다시 꿰찔리는 것과 같다.7)"
여기서 육체의 통증을 첫 번째 화살이라 하고, 마음의 괴로움을 두 번째 화살이라 할 수 있다.
즉 첫 번째 화살은 피할 수 없지만, 두 번째 화살은 피할 수 있음을 밝히고 있다.8) 결국 자신의 노력여하에 따라 마음의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희망은 모든 중생에게 괴로움(고통)의 원인을 진단하고 치유하기 위해 수행과 훈련을 하도록 동기부여를 해준다.
그렇다면 그 괴로움의 원인은 무엇인가? 역시『초전법륜경』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괴로움이 일어남의 성스러운 진리[苦集聖諦]이다. 그것은 바로 갈애이니, 다시 태어남을 가져오고 즐김과 탐욕이 함께 하며 여기저기서 즐기는 것이다. 즉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갈애[無有愛]가 그것이다.9)"
여기서 ‘갈애(渴愛, taṇhā)’를 3가지로 밝히고 있는데, 이 가운데 괴로움의 원인으로 먼저 제거해야 할 대상은 곧 욕애(慾愛)이다. 갈애는 취착(取着, upādāna)의 원인이 되는데, 특히 욕애는 욕취(慾取, 감각적 욕망에 대한 취착)를 일으키는 원인10)이 된다.
한편 괴로움의 원인 중 좀 더 근본적인 것은 바로 ‘무명(無明, avijjā)’이다.『무명경』에서는 “도반이여, 괴로움에 대한 무지, 괴로움의 일어남에 대한 무지,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무지,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에 대한 무지 – 이를 일러 무명이라 한다.”11)라고 밝히고 있다. 즉 사성제의 가르침에 무지한 것을 ‘무명’이라고 한다.
이상의 내용을 12연기설을 통해 보면,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것은 곧 무명(無明), 갈애(愛), 그리고 그것에 대한 취착(取)으로 볼 수 있다. 즉 괴로움[苦]은 오온이 무상(無常)하다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오온은 바로 ‘나[我]’를 말한다. 나라는 존재는 물질[몸, 色], 감각[受], 지각[想], 의지[行], 의식[識]의 무더기[五蘊]일 뿐이다. 그러나 범부들은 오온이 무상하다는 이치에 무지하고 오온을 나라고 갈애하고 취착함으로써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12)
7)『화살경(Sallatha-sutta)』(S36:6),『상윳따니까야』제4권, 434-435쪽.
8) 김재성, 「초기불교의 마음과 실천」, 원광대학교 마음인문학연구소 편,『마음의 인문학- 동서양의 마음 이해』, 공동체, 192쪽, 2013.
9)『초전법륜경(Dhammacakkappavattana-sutta)』(S56:11),『상윳따니까야』제6권, 385쪽.
10) 여기서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慾愛]는 욕계,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는 색계와 무색계의 갈애를 말한다. 기본적으로 갈애는 제거해야 할 대상이지만, 존재에 대한 갈애[有愛]의 경우는 오히려 그로 인해 선처로 인도할 업의 특별한 원인이 되기도 한다.『청정도론』에는 “존재에 대한 갈애에 사로잡힌 사람은 불살생 등 여러 가지 선처로 인도할 업을 짓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번뇌로 불타는 것이 없기 때문에 만족을 주며, 선처로 데려다주기 때문에 자기가 악처에서 경험했던 고통과 피로를 가시게 해주기 때문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붓다고사 지음, 대림스님 옮김(2004), 초기불전연구원,『청정도론』제3권, 40쪽. 그러므로 더 높은 차원의 욕망은 낮은 차원의 욕망에서 벗어나게 하는 긍정적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11)『무명경(Avijjā-sutta)』(S38:9),『상윳따니까야』제4권, 518쪽.
12) 여기서 갈애와 취착 등의 감각적 욕망의 문제, 즉 모든 번뇌가 다하여 아무 번뇌가 없는 상태를 ‘심해탈(心解脫)’이라 하고, 무상⋅고⋅무아의 이치 혹은 사성제를 여실히 통찰하여 무명에서 벗어난 상태를 ‘혜해탈(慧解脫)’이라고 한다.
2) 아집과 법집
한편 유식학(唯識學)에서는 ‘유식무경(唯識無境)’의 입장에서 심층의식까지 이를 확대하고 있다.『성유식론』제1권에서 다음과 같이 저술목적을 밝히고 있다.
"두 가지 공[我空, 法空]에 대해 미혹하고 오류가 있는 자로 하여금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바르게 이해하도록 하는 것은, 두 가지 무거운 장애(번뇌장⋅소지장)을 끊게 하기 위해서이다. 자아와 법으로 집착하기 때문에 두 가지 장애가 함께 일어난다. 두 가지 공을 증득하면, 그 장애도 따라서 끊어진다.13)"
여기서 장애는 곧 괴로움을 말한다. 그 괴로움, 즉 마음의 병리현상을 일으키는 원인으로서 나에 대한 집착[我執]과 법에 대한 집착[法執]을 밝히고 있다. 아집에 의한 번뇌장(煩惱障)은 일종의 정서적 장애로서 탐심과 진심 등 욕망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며, 법집에 의한 소지장(所知障)은 일종의 인지적 장애로서 치심 등 무지의 문제와 관련되어 설명될 수 있다.14) 이는 앞서 초기불교에서 괴로움의 원인으로서 밝힌 갈애와 무지의 문제에 대해 더 깊이 천착해 들어간 것이라 할 수 있다.
유식에서는 모든 것이 식의 전변[識轉變]에 의해 가설[假設]된 것으로 본다.
여기서 식의 자체분[識體]이 전변하여 인식대상인 상분(相分)과 인식주체인 견분(見分)으로 사현(似現)하게 되는데, 이때 범부는 이 견분과 상분을 임시적 표상인 사아(似我)와 사법(似法)으로 보지 않고 실아(實我)와 실법(實法)이라는 분별을 일으켜 집착하게 된다.15) 여기서 사현이라 한 것은 식의 전변에 의해 나타난 것이 인연을 따라 시설된 것이지 그것이 자성을 가지는 실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유식학에서는 ‘오온’을 자아[實我]로 분별하는 것을 제6 의식의 작용이라고 보고, 제8 아뢰야식(阿賴耶識, S. ālaya-vijñāna)의 견분을 자아[實我]로 간주하는 것은 제7 말나식(末那識, S. manas-vijñāna)의 작용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것을 모두 ‘아집’이라고 하는데, 제6식의 아집은 ‘분별아집(分別我執)’이라 하고. 제7식의 아집은 ‘구생아집(俱生我執)’이라 하여 구분한다. 구생아집은 선천적으로 일어난 것이라면, 분별아집은 후천적으로 ‘삿된 가르침과 삿된 분별을 만나’ 학습된 것이다.16)
같은 방식으로 법집의 경우도 두 가지로 구분될 수 있는데, 제6식이 상분에 대해 분별을 일으켜 실법으로 집착하는 것을 ‘분별법집(分別法執)’이라고 하고, 제7식이 아뢰야식의 상분을 실법으로 집착하는 것을 ‘구생법집(俱生法執)’이라고 한다.
이처럼 아집과 법집에 의해 번뇌장과 소지장이 함께 생기는데, 실제 수행을 통해 아공과 법공을 증득하면 그 장애는 함께 끊어지게 된다. 즉 아공(我空)을 증득하면 번뇌장도 따라 끊어져 마침내 참다운 해탈을 얻게 되고, 법공(法空)을 증득하면 소지장도 따라 끊어져 마침내 대보리(大菩提, 큰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17)
13) 김묘주 역주,『성유식론』 외, 동국역경원, 2008, 67-68쪽.
14) 대승불교의 아공과 법공은 입장과 관련하여 초기불교의 경우도 ‘인무아(人無我)’와 함께 제법분별의 입장에서 제법이 무상하고 괴로움[苦]이고 무아임을 밝혀 ‘법무아(法無我)’를 얘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성이 있다. 하지만 이를 법공이라고 하지 않는 것은 유식에서 법공의 문제는 마음(의식) 밖에 법이 별도로 실유(實有)한다는 집착을 하고 있는지 여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목경찬,『유식불교의 이해』, 불광출판사, 2012, 66-69쪽 참조.
15) 김묘주 역주(2008), 72-73쪽 참조.
16) 김묘주 역주(2008), 81쪽.
17) 목경찬(2012), 58-59쪽.
3. 마음작용과 마음병의 양상
1) 분별과 분별성
불교 전통에서는 마음이 어떤 특정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존재(실체)가 아니라 끊임없이 훈습(熏習)되고 현행(現行)하면서 형성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특히 대승불교에 와서는 마음작용을 포함한 모든 것들을 심식(心識)에 의지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그렇다고 유식에서 말하는 아뢰야식을 어떤 실체로 인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디까지나 이전의 모든 경험과 인식내용(인식기관과 인식대상을 포함)의 훈습을 통해 끊임없이 새롭게 형성되고 구성되는 연기적 존재[依他起性]로 이해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연기된 존재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그것에 집착하는 것을 분별성(分別性)혹은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이라 한다. 여기서 ‘분별(分別)’의 문제는 인간의 고통을 해명에 매우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것이다. 분별은 인간의 생존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이기도 한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혹은 의식적으로 나와 나 아닌 것, 나의 것과 아닌 것을 구분하고, 나아가 나에게 이로운 것과 해로운 것을 구분하고, 나아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 등에 대해 구별한다. 그러므로 분별은 인간 생존의 필연적 요구라 하지 않을 수 없다.18)
하지만 이러한 분별을 고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인간의 고통이 근본적으로 시작된다는 점이다. 즉 본래 분별이 없는 존재, 즉 무분별의 존재(어떤 규정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로서 자연히 일어나는 분별에 대해 무명에 가려 잘못 인식하고 거기에 집착하는 순간 그로부터 구속의 생활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붓다는 이를 12연기를 통해 설명하고 있는데, 어떤 분별이 고정된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無知]으로부터 그것을 충족하기 위한 끊임없는 갈망[渴愛]과 집착[取着]이 발생하게 된다는 점이다. 즉 인간의 끊임없는 욕구와 그것에 집착하는 마음이 자신을 한정된 존재로 분별하는 경향에서부터 비롯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모든 것이 변하는 것[無常]이며, 그러기에 고통[苦]이며, 그 어떤 것도 고정된 실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음[無我]을 인정하지 않고 분별로 나타난 것을 실체로 인식함으로써 ‘자아’를 중심으로 모든 분별을 고정화하려는 성향에서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을 ‘분별성(分別性)’이라고 한다.
이는 유식학의 삼성설(三性說)에서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과 같은 의미이다. 세상 모든 존재가 연기된 것으로서 ‘의타기성(依他起性)’임을 제대로 인식하지 않고 이를 실체로 사량함으로써 스스로 진실을 보지 못한 채 허망한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로서 진실성(圓成實性)으로부터 멀어지고 생사 윤회하는 욕망의 세계에 휩쓸려서 오랫동안 마음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한 고통은 반복되어 몸과 마음에 습관이 되고 오히려 스스로 자유를 잃고 구속의 생활을 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묘주는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인간 심성의 본질은 진여⋅불성⋅원성실성이지만, 현상적인 아랴야식은 변계 소집성과 원성실성의 두 성격을 지닌 진망화합식이다. 따라서 아라야식은 진실한 자아(진여)가 아니므로, 비아(非我) 즉 무아이다.
그런데 말나식이 아라야식을 의지처로 하고 그것의 견분을 인식대상으로 함으로써, 자아인 것으로 착각하는 근본무명[我癡]이 야기되는 것이다.19)"
여기서 말나식에 의한 자아 집착 작용의 본질이 결코 본능적 내지 충동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은 진리를 깨닫지 못하는 지적인 작용이다.20) 이처럼 유식학파에서는 이 말나식의 작용이 모든 번뇌나 고통의 근본 원인이 된다고 본다. 말나식은 네 가지 근본 번뇌와 상응하는데, 그것은 아치, 아견, 아만, 아애라고 한다. 이 가운데 아치[무명]가 근본원인이 되어 아견, 아만, 아애의 순서로 근본 번뇌가 생겨나고 모든 번뇌, 즉 심리적 괴로움을 야기하는 마음 작용들이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18) 모든 식은 분별을 한다. 제5식과 제8식은 그 자체에 대해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만, 제6식은 스스로 오온(색수상행식)을 실아(實我)로 여기며 분별아집(과 분별법집)을 일으키고, 제7식은 보다 근본적으로 ‘나’를 위주로 하는 오염된(허망분별에 물든) 의식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때 제7식은 제8식을 사량하여 제8식의 견분(見分, 인식주관)을 ‘나’라고 집착한다. 이를 구생아집(俱生我執)이라고 하는데, 이는 나에 대한 선천적인 집착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제6식의 분별아집은 후천적인 집착이라 할 수 있다.
19) 묘주 지음, 『唯識思想』, 경서원, 1997, 242쪽.
2) 경계와 주착심
흔히 경계를 따라(어떤 조건[緣]이 주어지면 그것이 계기가 되어) 마음이 나타난다고 한다. 즉 마음에 어떤 자극이 주어지면 그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다. 이때 경계는 주로 외적 자극을 말하지만, 그 자극이 내적으로도 주어진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불교에서는 인간의 인식(감각)기관에 대하여 각각 인식대상이 되는 경계를 설정하고 있는데, 기본적으로 눈[眼], 귀[耳], 코[鼻], 혀[舌], 몸[身]의 인식기관[五根]에 각각 물질[色]⋅소리[聲]⋅향기[香]⋅맛[未]⋅접촉[觸]의 인식대상[五境]을 설정하고, 거기에 의근(意根)과 의근의 인식대상인 법경(法境)을 들어 여섯 번째의 인식기관과 인식대상을 설정하고 있다. 보통 경계를 생각할 때, 앞의 오경을 생각하며, 그것을 인식 밖의 세계[환경, 기세간]라고 여긴다. 반면에 법경에는 오근과 오경은 물론 그것의 인식결과인 오식까지를 포함하여 의근의 대상이 되는 일체법이 모두 해당된다.
그런데 여기서 ‘의근(意根)’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즉 제6 의식의 의지처[所依]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유식학에서는 제7 말나식을 등장시켜 답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섭대승론』에서는 ‘의(意, manas)’를 두 가지로 설명한다.21)
첫째는 ‘무간멸의(無間滅意)’이다. 이는 등무간연(等無間緣)이 의지하는 곳으로 의식이 생겨나는 의지처이다. 둘째는 ‘염오의(染汚意)’이다. 이는 아견⋅아만⋅아애⋅아치[무명]의 네 가지 번뇌와 상응하기 때문이다.
현재의 의식은 (현재의 순간에는 이미 소멸해버린) 이전 찰나의 의식(무간멸의)을 의지처(意根)로 하여 일어나는데, 이는 의근에 대한 부파불교(說一切有部 등)의 설명방식22)을 그대로 취한 것이다. 여기에 유식학에서 이 ‘의(意)’가 오염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식은 무간멸의에 의해 생겨나고, 염오의에 의해 오염된다고 한다.
여기서 ‘이전 찰나의 의식’, 즉 이전까지의 의식(마음)에 의지하여 현재의 의식(마음)이 일어나는 것[等無間意]이라 하여 제6식의 의지처로서 의(意)를 오염된 의식(마음)으로 주목하여 제7 말나식으로 명명한 것이다. 이 말나식의 작용에 의해 자아(我)와 법(法)을 사량하여 실아, 실법으로 분별하고 주착하게 되는 것이다.
제7식은 일종의 ‘자아의식’이라 할 수 있는데, 모든 것이 ‘나’를 위주로 사유되고 그것이 모든 집착[아집과 법집]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므로 이는 유식학에서 마음병의 원인을 밝히는데 중요한 부분이 된다.
이러한 제7 말나식과 그것을 의지처로 하는 제6 의식에 따라 아집과 법집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본래 삿된 견해[邪見]를 일으켜서 거기에 집착하다보니 항상 자기 위주의 욕심에 물들고 그릇된 행동에 빠져서 스스로 고통스러운 생활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에 따라 모든 인식활동이나 심신작용을 이기적으로 물들게하여 스스로 끊임없이 이기적 욕심을 채우고자 요란한 마음(정서, 감정)이 일어나고, 어리석은 생각과 잘못된 판단에 빠지고, 그릇된 행동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그때에 눈에 닿는 감각작용은 누구에게나 다르지 않다. 하지만 거기에 그 대상을 하나의 사물로 재구성하는 작업과정이 마음(의식)의 작용에 포함된다. 그러므로 같은 사물을 대할 때 그에 대한 인식은 그 (이전의 경험과 인식내용의 영향으로) 마음의 상태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실제 경계[외경, 환경]에 대해 안⋅이⋅비⋅설⋅신의 5근은 감각작용[受]을 할 뿐 어떠한 생각이나 감정의 작용, 즉 갈애(愛)와 취착(取)을 일으키지 않는다.23)
다만 그것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의근은 ‘이전 찰나의 의식’에 근거하여 ‘수동적으로’ 순수한 감각작용을 확인하고, 이후 생각과 감정을 더하여 스스로 취사선택함에 있어서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능동적으로’ 영향을 주게 된다.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주어진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는 이미 이전에 했던 경험, 그리고 그에 따른 관념(선입견, 편견 등)에 의지하여 나름대로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20) 묘주 지음(1997), 243쪽.
21)『攝大乘論本』권1(『대정장』31, p.133하) “意有二種 第一與作等無間緣 所依止性 無間滅識 能與意識作生依止 第二染污意 與四煩惱恒共相應 一者薩迦耶見 二者我慢 三者我愛 四者無明.”
22)『阿毘達磨俱舍論』권2 “意識 唯依無間滅意.”(『대정장』29, p.12중).
23) 여기서 5경을 외경[환경]으로 보는 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표현할 것일 뿐이다. 실제 유식학의 ‘유식무경(唯識無境)’의 취지에 따르면 외부의 경계라는 것이 마음 밖의 어떤 실체로서는 결코 인정하지 않는 것임을 명심하여야 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식전변에 의해 연기된 것(의타기성)이며, 식(識)의 상분(相分)에 해당하는 것이다.
3) 본성과 마음의 작용
앞서 경계를 따라 마음이 작용한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경계가 주어지기 이전에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경계가 지나간 뒤에 마음은 어떠한가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는 ‘일념미생전(一念未生前)’이라는 화두로도 잘 알려진 내용이다. 이 자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자리라는 점에서 이를 대승불교에서는 ‘공(空)’이라고 언명하였지만, 이후 그 없는 자리에 일체의 공덕이 충만해 있음을 ‘불공(不空)’의 측면에서 의미부여하여 궁극적 진여의 세계에 대한 다양한 언명을 시도하게 된다. 이는 임시로 시설(施設)된 것으로 심신작용을 일으켜 생멸하는 마음작용과는 다르다. 이는 단지 공의 다른 이름으로서 우리의 일상의식에서 모든 분별이 쉬었을 때 비로소 나타나는 청정한 마음(自性淸淨心)이다.
이는 불성(佛性), 자성(自性), 법성(法性), 법신(法身), 성품(性稟), 진여(眞如), 원각(圓覺), 일원(一圓), 진아(眞我), 대아(大我), 양심(良心)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처럼 원래 마음(本性)에 대한 다양한 이명(異名)이 가능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 자리가 언어명상의 모든 분별을 떠난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는 ‘경계 이전의 마음’이다. 분별이 나타나기 이전의 마음이므로 ‘무분별심(無分別心)’이고 어디에도 주착한 바가 없는 마음이므로 ‘무주심(無住心)’ 혹은 ‘무착심(無着心)’이다.
이러한 ‘원래 마음’에 어떤 경계가 자극으로 주어지면 그에 대한 반응으로 마음이 일어난다. 이는 스스로(자연스럽게) 일어난 마음(생각, 감정)이다. 이는 1차 반응이라 하는데, 여기서 경계라는 조건[緣]이 가해짐으로써 이전의 경험과 인식의 의해 훈습되었던 잠재세력이 발동하게 되는 것이다. 내적 원인[因]과 외적 조건[緣]이 만나서 마음을 작용하는 것이다. 이때의 마음작용은 이미 지어놓은 습관과 업력에 의해 자동적으로(스스로) 일어나는 것이다. 이 순간 혹은 요란한 마음이, 혹은 어리석은 마음이, 혹은 그른 마음이 일어날 수 있다.
이때 마음공부의 기회가 주어진다. 바로 2차 반응에서 자신의 심신작용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1차 반응과 2차 반응은 편히상 나눈 것이다.
1차반응은 ‘습관적(자동적, 무의식적) 반응’이라면, 2차 반응은 ‘의지적(선택적, 의식적) 대응’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두 반응은 실제 거의 동시적으로 이루어지며, 혹은 어디 하나의 반응만 일어날 수도 있다.
실제 어떤 자극에 습관적 반응만 있을 수도 있으며, 미리 마음을 챙김으로써 습관적 반응 대신에 의지적 대응만을 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마음이 작용할 때 분별성에 가려 습관적 반응만을 한다면 이는 괴로움의 한 원인이 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나쁜 습관을 제거하거나 좋은 습관을 길들이는 등) 의지적 선택이 필요한 것이다.
먼저 그 순간 내안의 어떤 대상에 대해 습관적으로(자동적으로) 분별하는 성향[분별성]과 그에 대해 주착하는 마음[주착심]을 발견하여 없애는 것이다. 이처럼 내 안의 ‘분별성과 주착심’을 없게 하여 마음이 두렷하고 고요한 경지로 이끄는 ‘정신수양’을 통해 ‘본성회복의 방향’으로 나갈 수도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외부에 주어진 조건[緣]과 주변 환경에 적극 개입하여 직접 변화시키는 활동으로서 ‘작업취사’를 통해 스스로 실행의 힘을 키우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몸, 가족, 사회, 국가, 세계를 변화시키는 행위[보은, 불공]을 통해 ‘도덕(善業) 실현의 방향’으로 나갈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를 통해 자신의 의지에 의해 자율적이고 능동적인 심신작용을 하여 스스로 미래를 열어가는 주체가 될 수 있다. 이때 명상을 통해 원래 마음을 회복하고 그 마음에 근거하여 스스로 정당한 마음을 일으키고 정당한 행동을 하여 자신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4) 행위와 인과
인간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일으킨 심신작용, 즉 모든 행위는 반드시 업(業)이 되는데, 이것은 자신의 몸과 마음에 그대로 기억되고 저장되어 일종의 보이지 않는 세력[業力]과 같은 것이다. 모든 행위는 업력을 형성하였다가 어떤 시점에 적절한 조건이 형성되면 다시 몸과 마음을 통해 나타나게 된다.
이는 심신작용을 한 자신뿐만 아니라 그 심신작용이 영향을 미친 상대방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기억되고 저장되었다가 역시 적절한 조건이 형성되면 발현되어 그 행위의 결과[業報]를 다시 받게 된다. 이것이 지은 대로 받는다는 인과보응(因果報應)의 이치이다.
이는 개인적으로는 분별성과 주착심의 반복학습을 통해 마음과 몸에 습관이 되어 스스로 자유를 잃고 스스로 구속된 생활을 하게 되는 원인이 된다는 점에서 1차적으로 극복해야 할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는 타자와의 관계속에서도 그대로 적용이 될 수 있는데, 모든 관계 역시 서로 주고받는 가운데 인과보응의 이치를 따라 그 관계가 형성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의 마음과 몸뿐만 아니라 나를 둘러싼 모든 것에 의해 내가 때로는 은혜를 입기도 하고 반대로 해독을 입기도 하는 것임을 자각하여야 한다. 이 역시 자신의 지은 바에 따라 받게 되는 인과의 이치에 호리도 틀림이 없는 적용을 받게 된다.
다만 스스로의 몸과 마음에 든 습관을 고치고 안 고치는 것은 나에게 권한이 있으므로 자기치유를 통해 해결이 가능한 것이며, 남에게 베풀거나 저지른 일에 대해 그것을 갚는 것은 그 권한이 상대방에게 있는 것이므로 누군가에 의해 어려움을 당하게 되면 먼저 자신의 잘못은 없었는지 되돌아보고, 잘못이 있다면 반성하여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 것이다. 물론 잘못을 찾을 수 없다하여 무조건 대항하기보다는 그때 빈 마음으로 대하고, 선업을 짓도록 노력하면 오히려 그것이 전화위복이 되어 훗날 좋은 결과로 되돌아오게 될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주변의 좋지 않은 관계를 좋은 관계로 바꿔나가고 나쁜 관계가 생겨나지 않도록 미연에 방지하고 좋은 씨앗을 심어서 훗날을 기약하는 기회도 될 것이다.
흔히 업을 말할 때, 신업, 구업, 의업의 세 가지를 설명한다. 여기서 신업과 구업은 몸으로 짓는 것이라면 의업은 마음으로 짓는 것으로 근본적인 업이 된다고 한다. 즉 의업이 발현된 것이 결국 신업이나 구업이 되는 것이므로 어떤 의도를 가지느냐, 어떤 의지를 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행동까지도 결정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어떤 마음을 품느냐가 이후의 모든 행동을 결정하고 습관과 업력과 인간관계를 형성하는데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때 행동을 선택을 좌우하게 되는 의지의 문제가 중요하게 되는 것이며, 선한 의도, 바른 의지를 갖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된다.
Ⅲ. 지⋅정⋅의와 마음병의 세 가지 측면
이상의 마음의 작용원리에 따라 인간이 겪는 마음의 고통, 즉 마음병의 원인을 어느 정도 살펴보았다. 이를 세 가지 측면에서 정리해보고자 한다. 이는 일반적으로 마음의 세 가지 측면을 지(知)⋅정(情)⋅의(意)로 설명하는 경향과도 맞물리며, 심리학에서 인간의 심리를 접근할 때 인지적 측면, 정서적 측면, 행동적측면에서 각각 제시하고 있는 점과도 상통할 수 있다.
물론 이는 기본적으로 불교가 전통적으로 계-정-혜의 세 가지 측면에서 공부법(수행법)을 제시하여 왔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붓다고사의『청정도론』에서도 엿볼 수 있다.
"계는 오염원들의 위범의 방지를 나타내고, 삼매[定]는 얽매임의 방지를,
통찰지[慧]는 잠재성향의 방지를 나타낸다.
또는 계는 삿된 행위로 인한 오염의 정화를 나타내고,
삼매는 갈애로 인한 오염의 정화를,
통찰지는 사견으로 인한 오염의 정화를 나타낸다.24)"
여기서 밝힌 바와 같이 지-정-의 세 가지 측면에 각각
계(戒) 공부로서 삿된 행위를 정화하는 것은 의(意)의 측면에 해당하고,
정(定) 공부로서 갈애(집착)를 다스리는 것은 정(情)의 측면에서,
혜(慧) 공부로서 삿된 견해(邪見)를 제거하는 것으로 지(知)의 측면에 해당한다.
또한 동양전통의 공부법을 견성-양성-솔성의 측면에서 종합하여 정신수양[定], 사리연구[慧], 작업취사[戒]로서 정리한 소태산의 입장을 고려한 것이기도 하다.25)
소태산은 이 수양-연구-취사의 삼방면의 공부가 각각의 고유한 영역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상호유기적인 관계로서 서로 돕도록 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처럼 고유한 치유영역에 비추어 마음병을 검토해 봄으로써 이후 마음치유의 방법론을 제시함에 있어서 일관되고 종합적인 방향을 모색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24) 붓다고사 지음, 대림스님 옮김,『청정도론』제1권, 제1장 계(戒) §13, 초기불전연구원,2004, 130쪽.
계-정-혜의 공부를 각각 삿된 행위, 갈애, 사견으로 인한 오염을 정화시키는 공부법으로 보고 있다. 즉 마음의 오염원(괴로움을 일으키는 원인)으로서 의(意)의 문제[습관, 행동], 정(情)의 문제[욕망, 감정], 지(知)의 문제[사견, 무명] 등과 관련하여 삼학의 공부법을 연결지어볼 수 있는 것이다.
25) 정산송규(鼎山宋奎, 1900-1962)는 계, 정, 혜의 삼학과 작업취사, 정신수양, 사리연구의 삼학이 그 범위에 있서 차이가 있음을 밝힌 바 있다.
즉 “계는 계문을 주로 하여 개인의 지계에 치중하셨지마는 취사는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의 모든 작업에 빠짐없이 취사케하는 요긴한 공부며,
혜도 자성에서 발하는 혜에 치중하여 말씀하셨지마는 연구는 모든 일 모든 이치에 두루 알음알이를 얻는 공부며,
정도 선정에 치중하여 말씀하셨지마는 수양은 동정간에 자성을 떠나지 아니하는 일심 공부라,
만사의 성공에 이 삼학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니 이 위에 더 원만한 공부 길은 없나니라.” 『정산종사법어』 제6 경의편 13장(『원불교전서』, 842-843쪽).
1. 지(知)의 측면에서 본 마음병 - 무지(無知)
먼저 지(知)는 한 마디로 앎(인식)의 문제이다. 제대로 인식(인지)하지 못하거나 잘못된 인식이 발생할 때, 이를 지적인 측면의 마음병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일상생활에서 요청되는 다양한 지식의 문제와도 관련되어 있는 것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진리에 대한 바른 이해,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한 바른 견해와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의 측면에서 본 마음병, 즉 무지의 병에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근본에 대한 무지[근본무명]이라면, 둘은 현실에 대한 무지를 들 수 있다.
이 가운데 불교는 오랫동안 인간의 무지, 즉 어리석음의 뿌리로서 근본무명의 문제에 주목해 왔다.
이것은 자아인식의 문제와 관련된 것으로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서로 연기된 존재로서 조건에 따라 변하는 무상한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본래 나라고 할 만한 실체가 없음에도 스스로 허망분별을 일으켜서 고정된 실체를 상정하고 이를 ‘나’라고 여기고 ‘나’라고 집착하고 아만과 아애를 일으킨다는 점이다.
이는 표층의 일상의식보다 심층에 자아의식이 있어 모든 것을 자기 위주로 분별하여 보게 함으로써 모든 대상을 있는 그대로 분별하지 못하고 ‘분별성’에 떨어지게 하고 나아가 그에 근거하여 스스로 항상 부족하다는 결핍감에 사로잡혀 갈애하고 집착하는 마음[주착심]을 일으킴으로써 고통에 빠지게 한다.
다음으로는 현실에 대한 무지의 병이다.
근본적인 자아분별에 따른 무지의 문제로서 ‘분별성’의 문제가 해결되었다 할지라도 현대사회에서 일상생활과 직업생활을 통해 바람직한 삶을 영유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지식의 문제가 뒤따른다. 그것은 일상에서 요구되는 지식의 문제이다. 이는 생활상식에서부터 전문지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이를 위해 끊임없이 필요한 지식을 습득해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만약 새로운 지식의 습득에 소홀히 했을 경우 그로인해 고통이 따르게 될 것이다.
이를 포괄하여 소태산은 실제 일상생활에서 고락의 문제에 대해 “천만 사리를 분석하고 판단하는데 걸림 없이 아는 지혜의 힘”을 갖추어야 함을 강조하고 이치의 대소유무와 일의 시비이해를 잘 아는 공부가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즉 사리연구의 목적에서 “우리는 천조의 난측한 이치와 인간의 다단한 일을 미리 연구하였다가 실생활에 다달아 밝게 분석하고 빠르게 판단하여 알자는 것”26)을 밝혀 이치(대소유무)에 대한 무지와 현실(시비이해)에 대한 무지가 결국 우리를 고락에서 벗어날 수 없게 하는 원인임을 밝히고 있다.
진리적⋅이치적 측면[理]에서 혹은 모든 주어진 경계에 대해 ‘대(大)’가 무엇이며, ‘소(小)’가 무엇인지, 그리고 ‘유무(有無)’가 무엇인지까지를 진리의 불변의 측면에서부터 변하는 측면에 이르기까지 세밀히 알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도덕적⋅생활적 측면[事]에서도 모든 일에 있어서 시비이해를 밝게 알아야 한다. 즉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 무엇이 이롭고 무엇이 해로운가?
보통 어떤 일을 할 때 옳은 일은 하고 그른 일은 하지 않을 것 같지만, 내면의 이기심이 해소되지 않은 경우는 오히려 실제 옳은 일을 택하지 않고 눈앞의 이익을 쫓아감으로써 그른 일을 선택하게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즉 ‘시비(是非)’와 상관없이 ‘이해(利害)’에 따라 그 일을 판단하고 선택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시비이해는 반드시 대소유무의 이치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을 경우는 스스로 어리석음에 가려서 당장 이롭고 해로운 것에 끌려 훗날 시비가 가려졌을 때 오히려 더 큰 해를 당하여 괴로움을 겪는 경우가 발생하게 될 것이다. 이치의 무지[理無知]뿐만 아니라 일의 무지[事無知]까지도 해결하여 내외가 겸전(兼全)하는 지혜를 갖추도록 사리연구를 해나가야 지의 영역에서 마음병의 문제를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정리해보면, 지의 측면에서 본 무지의 병은 먼저 근본무명에서 비롯된 분별성에서 벗어나는 공부가 필수적이며, 세상의 변화에 따라 끊임없이 요구되는 생활상식과 전문지식에 대한 바른 지식습득의 공부도 반드시 필요하다. 이를 통해 대소유무의 이치를 제대로 아는 진리적 안목을 갖추고 실제 일상의 취사선택 상황에서 시비와 이해를 정확히 판단함으로써 옳은 일은 실행하고 그른 일은 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26)『정전』제2 교의편 제4장 삼학 제2절 사리연구(『원불교전서』, 48쪽).
“이 세상은 대소 유무의 이치로써 건설되고 시비이해의 일로써 운전해 가나니, 세상이 넓은 만큼 이치의 종류도 수가 없고, 인간이 많은 만큼 일의 종류도 한이 없나니라. 그러나 우리에게 우연히 돌아오는 고락이나 우리가 지어서 받는 고락은 각자의 육근(六根)을 운영하여 일을 짓는 결과이니, 우리가 일의 시⋅비⋅이⋅해를 모르고 자행 자지한다면 찰나찰나로 육근을 동작하는 바가 모두 죄고로 화하여 전정 고해가 한이 없을 것이요, 이치의 대소유무를 모르고 산다면 우연히 돌아오는 고락의 원인을 모를 것이며, 생각이 단촉하고 마음이 편협하여 생⋅로⋅병⋅사와 인과 보응의 이치를 모를 것이며, 사실과 허위를 분간하지 못하여 항상 허망하고 요행한 데 떨어져, 결국은 패가 망신의 지경에 이르게 될지니, 우리는 천조의 난측한 이치와 인간의 다단한 일을 미리 연구하였다가 실생활에 다달아 밝게 분석하고 빠르게 판단하여 알자는 것이니라.”
2. 정(情)의 측면에서 본 마음병 - 욕심(慾心)
정(情)은 정서(情緖) 혹은 감정(感情)을 포괄하는 의미이다.27) 성리학에서 마음(心)을 성(性)과 정(情)으로 나누어 성(性)은 심의 근원에 자리 잡고 자기를 실현하는 보편성을 말하고, 이를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으로 살펴볼 수 있는데, 본연지성의 발현이 사단(四端)이라면 기질지성의 발현은 칠정(七情)이라 할 수 있다.28)
정(情)은 처음부터 좋고 나쁜 것이 정해져 있지않다. 그것이 얼마나 적절하게 표현되느냐에 따라 좋고 나쁨, 그리고 옳고 그름이 결정되는 것이다. 물론 정서와 감정을 나누어 볼 수도 있다.
정서가 초기불교의 오온(五蘊)에 대비해보면, 감각작용을 의미하는 ‘수(受)’에 가깝다면, 감정은 다양한 심리작용들을 포괄하는 ‘행(行)’에 속한다.29)
유교에서 정(情)은 성(性)으로부터 자연스럽게 발현된 것이라면, 의(意)는 인간의 판단과 의지가 개입된 것이다.30) 그러므로 정(情)의 측면에서 마음병을 얘기할 때는 엄밀히 말하면 정서의 문제라기보다는 감정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감정에는 반드시 이기적 욕심(욕구), 즉 심리적 욕구(욕망)로서 ‘갈애(渴愛)’와 관련되어 있다. 어떤 대상이나 일에 대한 욕심이 없다면 거기에 감정이 일어날 이유도 없게 된다.
한마디로 어떤 일에 섭섭할 이유도 없으며, 화낼 이유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욕심이 있는데, 그것이 뜻대로 충족되지 않을 때 거기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감정이 뒤따르게 되며, 그 욕심의 정도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감정의 폭도 달라진다. 그러므로 감정의 문제를 다스리는 것은 어디까지나 감정을 일으키는 이기적 욕구인 ‘욕심의 문제’를 조절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된다.
27) 프리다(Nico Henri Frijda, 1927∼)는 정서(emotion)와 감정(feeling)을 분명히 구분한다.
정서는 우리의 통제범위를 벗어나 저절로 생겨나는 것으로, 공포를 느낄 때 온몸이 굳어버리는 식으로 신체적 감각을 통해 그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래서 프리다는 “정서는 본질적으로 무의식적인 과정”이라고 말한다.
한편, 감정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정서에 대한 우리의 해석으로서, 의식적인 요소가 더욱 많다. 무엇에 대해 감정을 느낄 때 우리는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갑자기 어떠한 정서에 휩싸이듯이, 감정에 휩싸이게 될 일은 없는 것이다. 캐서린 콜린 외, 이경희⋅박유진⋅이시은 공역(2012), 『심리의 책(The Psychology Book)』, 지식갤러리, 325쪽.
28) 문석윤,『동양적 마음의 탄생』, 파주: 글항아리, 2013, 78-79쪽 참조.
29) 각묵스님은 초기불교에서 행(行, saṅkhāra)의 의미를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하고 있다.
첫째, 제행(諸行, sabbe saṅkharā)과 같이 유위법(有爲法, saṅkhata-dhamma)를 뜻하는 경우,
둘째, 오온에서 행온(行蘊, saṅkhāra-kkhandha)과 같이 느낌(受)과 인식(想)을 제외한 모든 심리현상들[心所法]을 포괄하는 경우,
셋째, 12연기의 두 번째 구성요소인 행(行)으로 이 경우는 ‘의도적 행위들’로서 업(業)과 동의로서 사용되는 경우,
넷째, 세가지 행위인 신행, 구행, 의행의 경우인데, 이는 세 번째 의도적 행위로 이해되기도 하지만, 상황에 따라 ‘작용’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여기서는 감정은 두 번째 의미에 포함될 수 있다. 각묵스님,『초기불교의 이해』, 울산: 초기불전연구원, 2010, 127쪽 참조.
30) 문석윤(2013), 79쪽.
전통적으로 불교에서는 ‘이기적 욕구’를 사마타[止]를 통한 정(定)을 통해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 방법으로 가장 보편적인 것이 바로 마음을 한 곳에 집주하는 것[心一境住]이다.
즉 어떤 감정이나 생각을 일어나서 스스로를 괴롭게 할 때 그 감정이나 생각이 일어나지 않도록 제3의 대상을 정하여 마음을 묶어두는 방법이다. 이로써 어떤 사물이나 대상을 접할 때, 감각작용에서 머물러 이기적 욕구에 끌려가는 일이 없도록 하여 정서적으로도 안정이 얻고 감정적으로도 요란함에 끌려가지 않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집착하는 마음이 일어나면 바로 알아차리고 내려놓음으로써 더 이상 그 생각이나 감정에 끌려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이처럼 감정은 조절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행동을 보고 그 사람의 감정을 그대로 알 수는 없다. 어떤 일을 대할 때 거기에 해석이 더해지면서 감정이 증폭되기도 하고, 더 큰 욕구를 충족할 수 있다면 작은 감정들은 오히려 어렵지 않게 사라지기도 한다. 이처럼 마음 작용에는 보이지 않는 욕심(욕구)의 문제가 따라오는데, 이러한 욕심은 근본적으로 결핍에 기인한 것이다.
이는 앞에서 살펴보았던 아(我)와 법(法)에 대한 무지, 본성(眞我)에 대한 무지로 인하여 스스로 집착함으로써 끊임없이 갈애(욕망)하고 취착(집착)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욕심의 문제는 궁극적으로는 아집과 법집 등 ‘분별성’의 타파가 자기결핍과 자기애착 등에 의한 ‘주착심’의 제거와 함께 다뤄져야 근본적으로 해소될 수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작은 욕구(욕심)를 큰 욕구(욕심)로, 부당한 욕구를 정당한 욕구로 대치하는 것이다.
앞에서는 이기적 욕구의 조절 문제였다면, 여기서는 이기적 욕구의 이타적 욕구로의 전환 문제이다. 욕심을 조절한다고 아무 일도 하지않고 산속이나 방안에 눈을 감고 앉아만 있을 수는 없다. 특히 일상의 생활을 영유해야 하는 일반인들은 평소에 정서안정과 감정조절이 가능하도록 단련할 필요가 있다.
소태산은 인간의 욕심과 그것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정신수양을 통해 ‘천만 경계를 응용할 때에 마음에 자주(自主)의 힘’을 갖추는 것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마음이 두렷하고 고요하여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는 경지’인 정신(精神)의 수양을 강조한다. 특히 현대인에게 정신수양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수양은 “먼저 안으로 분별성과 주착심을 없이하며 밖으로 산란하게 하는 경계에 끌리지 아니하여 두렷하고 고요한 정신을 양성함”31)을 말한다.
하지만 정당한 욕구라면 가끔씩 맡겨보는 방법도 나쁘지 않다. 여기서 욕심은 어디까지나 나를 위주로 하는 이기심에 기인한 것이다. 개인을 확장하여 가정을 위해, 학교나 직장을 위해 이기적 욕구를 더 키울 수도 있다. 나아가 이타적 욕구에 의해 작은 욕구들이 조절될 수도 있다.32)
앞서 이기적 욕구의 뿌리가 되는 분별성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그로부터 이타적 욕구가 발현될 수 있다. 대승보살의 서원(誓願)과 자비(慈悲)가 이에 해당할 수 있다.
욕심을 버릴 것이 아니라 더 키우라는 말이 있다. 공성(空性)에 대한 자각과 함께 (이기적) 욕심이 없는 청정한 마음에서 한 마음을 일으킬 때 거기에 이타적 목적을 부여함으로써 이기적 욕심을 제어할 수 있다.
만약 이타적 욕구로서 개인적 욕심이나 감정을 조절할 수 있다면 개개인의 정서적 안정과 감정적 성숙을 물론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감정을 적재적소에 활용하는 능력이 생겨난다.
31) 『정전』제2 교의편 제4장 삼학 제1절 정신수양(『원불교전서』, 46쪽). 그리고 「정신수양의 목적」(47쪽) “유정물(有情物)은 배우지 아니하되 근본적으로 알아지는 것과 하고자 하는 욕심이 있는데, 최령한 사람은 보고 듣고 배우고 하여 아는 것과 하고자 하는 것이 다른 동물의 몇 배 이상이 되므로 그 아는 것과 하고자 하는 것을 취하자면 예의 염치와 공정한 법칙은 생각할 여유도 없이 자기에게 있는 권리와 기능과 무력을 다하여 욕심만 채우려 하다가 결국은 가패 신망도 하며, 번민 망상과 분심 초려로 자포 자기의 염세증도 나며, 혹은 신격 쇠약자도 되며, 혹은 실진자도 되며, 혹은 극도에 들어가 자살하는 사람까지도 있게 되나니, 그런 고로 천지 만엽으로 벌여가는 그 욕심을 제거하고 온전한 정신을 얻어 자주력(自主力)을 양성하기 위하여 수양을 하자는 것이니라.”
32) 이를 원(願)이라고 하며, 대승불교에서는 욕심을 벗어난 마음에서 일어난 발원을 서원이라고 하여 중시한다. 이 원력으로 스스로의 업력을 벗어나 중생을 구제하는 힘을 얻게 된다.
3. 의(意)의 측면에서 본 마음병 - 습관
의는 의지이다.33) 우리말로 옮기면 ‘뜻’이다. 뜻은 마음이 동하여 가는 곳이다.34)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는 말은 뜻이 있는 곳에 마음이 가고, 마음이 가는 곳에 몸이 가고, 몸이 가는 곳에 어느 새 길이 나게 되어 그렇게 습관이 되고 인격이 되고 인생의 방향도 결정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자유의지는 습관개조 및 행동변화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인간의 행동과 관계형성에 깊은 관련을 맺게 된다.
흔히 뜻과 상관없이, 나도 모르게 저절로 몸이 움직였다고 하는 경우가 있다.
이는 본능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몸을 가지고 있기에 생기는 생리적 현상은 어쩔 수 없다하더라도 대부분은 오랫동안 심신작용을 반복함에 따라 그것이 습관이 되어 자동적으로 그런 행동을 하는 경우라 할 수 있다.
어떤 습관이라도 그것이 한 번에 생기는 경우는 없다. 모든 행동은 반복을 통해 학습되고 그것이 마음과 몸에 일정한 경향성으로 굳어지게 되면 의도하지 않았지만 그 상황에 처하면 그 행동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도 있듯이 한번 습관이 들면 쉽게 고쳐지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처음에 한 번 두 번 스스로 뜻을 세워 했던 일이 나중에는 마음으로 하겠다는 뜻을 세우기도 전에 이미 자동적으로 그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이미 몸과 마음에 습관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그른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또한 마음의 의지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물론 반드시 마음의 의지에 따라 고칠 수 있는 것이므로 이를 마음의 병의 한 측면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 이를 해명하기 위해 업보설(業報說)을 주장해 왔다. 유정의 모든 심신작용은 업인이 되고 거기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과보가 따른다는 것이다.
흔히 업하면 신구의(身口意) 세 가지 업을 먼저 떠올린다. 이 가운데 근본이 되는것은 의업(意業)이다.
의업은 곧 내면의 실행의지를 발동하는 것이며, 그것이 입[口業]과 몸[身業]을 통해 외적으로 표출되는 것이다. 의(意)를 행(行, saṇkhāra)의 일종이라 할 수 있는데, 행은 어떤 의도나 의지 및 그것에 따라 이루어지는 모든 심리적 행위[作爲]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을 닦는데[修行], 의(자유의지와 선한 의도 등)의 역할이 중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습관의 병을 논할 때에도 앞서와 같이 두 가지 측면에서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는 악한 의도와 악업(악습관)을 제거하는 것이며, 둘째는 선한 의도로 가지고 선업을 실천하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계(戒) 혹은 지계(持戒)를 통해 행동의 문제, 즉 악습관, 악행을 더 이상 범하지 않도록 하였다. 하지만 지계는 선정과 지혜 공부를 위한 예비적 수행으로 간주되곤 하였다. 하지만 정당한 실행의 문제를 결코 소홀히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특히 생활의 현장에서는 끊임없는 취사선택의 과정이 반복되는데, 그 결과 선업이든 악업이든 행위를 하지않을 수 없으며, 이 과정에서 선악업보의 차별이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악업은 다시 짓지 않도록 하는 지계를 철저히 함과 동시에 일상적으로 바른 의지, 바른 뜻을 세워 선업을 짓도록 해야 할 것이다.
특히 소태산은 작업취사의 공부를 강조하여 “정신을 수양하여 수양력을 얻었고 사리를 연구하여 연구력을 얻었다 하더라도, 실제 일을 작용하는데 있어 실행을 하지 못하면 수양과 연구가 수포에 돌아갈 뿐 실효과를 얻기가 어렵나니”라고 하여 직접 실행하는 공부가 중요함으로 강조하고 있다.
그는 “우리 인류가 선(善)이 좋은 줄은 알되 선을 행하지 못하며, 악이 그른 줄은 알되 악을 끊지 못하여 평탄한 낙원을 버리고 험악한 고해로 들어가는 까닭은 무엇인가.”라고 자문하고 답하기를 “그것은 일에 당하여 시비를 몰라서 실행이 없거나, 설사 안다 할지라도 불 같이 일어나는 욕심을 제어하지 못하거나, 철석같이 굳은 습관에 끌리거나하여 악은 버리고 선을 취하는 실행이 없는 까닭”이라고 하였다.35)
앞서 무지의 문제에서 시비이해를 제대로 아는 공부를 하고, 욕심의 문제에서 욕심을 잘 조절하는 공부를 하고, 마지막으로는 습관을 바꿔서 직접 선업실행에 나서야 한다.
결국 “정의어든 기어이 취하고 불의어든 기어이 버리는 실행공부를 하여 싫어하는 고해는 피하고 바라는 낙원을 맞아 오자는 것”이다.36)
이를 위해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보살(菩薩)의 원력과 같이 강한 이타적 욕구[서원]에 근거하여 이기적 욕심을 단호히 끊고 오랜 습관과 업력에 찌든 생활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개척해가야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의지적⋅행동적 측면에서 마음의 병을 다스리는 데는 단순히 이기적 욕심에 의한 정당하지 못한 행동을 끊게 하는 소극적 방법만이 아니라 이타적인 실천동기를 새롭게 부여함에 따라 정당한 행동, 더 많은 이들을 이롭게 하는 이타적 행동 등 적극적인 실천방법의 제시가 필요하다.
33) 의(意)와 지(志)는 모두 ‘뜻’을 말한다. 의는 내 안에 품고 있는 뜻이라면, 지는 밖으로 표출된 뜻이라 할 수 있으며, 의는 약간 부정적이고 개인적인 측면이 강하다면, 지는 좀더 긍정적이고 사회적인 측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의지라는 측면에서 함께 다루고자 한다.
34)『정산종사법어』제5 원리편 12장(『원불교전서』, 822쪽).
35)『정전』 제2 교의편 제4장 삼학 제3절 작업취사(『원불교전서』, 49-50쪽).
36)『정전』 제2 교의편 제4장 제3절(『원불교전서』, 49-50쪽).
Ⅳ. 나가며: 정당한 고락과 마음치유
지금까지 지-정-의 세 가지 측면에서 마음병을 파악하여 무지의 병, 욕심의 병, 습관의 병으로 이를 정리하였다. 붓다는 마음병을 보다 근본적이고 현실적으로 진단하고 그 처방을 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후 불교 전통의 진단과 처방(수행법)은 출세간 수도인 위주로 흘러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에 소태산은 마음병의 현실적・일상적 측면을 보다 강조함으로써 세간 생활인 위주로 그 진단과 처방을 제시하고자 했다. 실제 현대인의 마음병을 바라볼 때 이 두 가지 측면을 균형 있게 바라 볼 필요가 있다.
무지의 병에서는 자아와 이치에 대한 근본무지와 함께 동시에 현실에 대한 무지도 보아야 한다.
욕심의 병에서는 이기적 욕심(욕구)을 조절하지 못하는 경우와 함께 이타적 욕심(욕구)을 정당하게 세우지 못함도 고려해야 한다.
습관의 병에서는 부당한 습관을 반복하는 것과 함께 정당한 실천을 하지 못함도 주목해야 한다. 이들 마음병은 결국 자신을 이롭게하려는 이기적 동기에 기인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흔히 마음의 괴로움(고통)을 얘기할 때, 그 괴로움을 벗어난 경지가 단지 괴로움의 상대로서 즐거움(쾌락)은 아니다. 괴로움이란 것이 어디까지나 자신과 세상의 무상함에 대한 무지와 그로 인한 집착에 기인하고 있으며, 설령 무상함을 깨쳐 알아서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하지만 오랜 동안 철석같이 굳어버린 몸의 습관과 사회적 통념 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에 기인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붓다는 생사윤회의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을 무위열반의 해탈에 드는 것이라 하였다. 이를 통해 변하는 고락이 아니라 영원한 고락을 추구하며, 부정당한 고락이 아닌 정당한 고락을 수용하는 것이다.
소태산은 「고락에 대한 법문」에서 “우리는 정당한 고락과 부정당한 고락을 자상히 알아서 정당한 고락으로 무궁한 세월을 한결같이 지내며, 부정당한 고락은 영원히 오지 아니하도록 행⋅주⋅좌⋅와⋅어⋅묵⋅동⋅정 간에 응용하는데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기를 주의할 것”37)을 당부했다. 상대적 고락에 일희일비하는 일반적인 범부의 삶에 대해 영원히 고락을 초월한 절대의 심경으로 정당한 고락을 취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인간들은 그 병맥이 깊어 쉽게 그 마음병(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를 소태산은 ‘낙을 버리고 고로 들어가는 원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1. 고락의 근원을 알지 못함이요,
2. 가령 안다 할지라도 실행이 없는 연고요,
3. 보는 대로 듣는 대로 생각나는 대로 자행자지로 육신과 정신을 아무 예산없이 양성하여 철석 같이 굳은 연고요,
4. 육신과 정신을 법으로 질박아서 나쁜 습관을 제거하고 정당한 법으로 단련하여 기질 변화가 분명히 되기까지 공부를 완전히 아니한 연고요,
5. 응용하는 가운데 수고 없이 속히 하고자 함이니라.”38)
여기에는 인지⋅행동⋅정서의 세 가지 측면이 모두 언급되어 있다. ‘고락의 근원을 알지 못함’, ‘실행이 없음’, ‘(습관이) 철석같이 굳음’, ‘(이 몸과 마음에서) 기질 변화가 분명히 되기까지 공부를 완전히 아니함’, ‘수고 없이 속히 하고자 함’ 등은 행복을 갈망하는 모든 이들이 새겨볼 말이다.
정당한 고락은 결국 자아의 참다운 실현과 영원한 행복의 길을 말하는 것이다. 작은 나(이기적인 나)로 있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항상 결핍과 가난한 생활을 하게 될 것이며, 끊임없이 갈애하고 집착함으로서 스스로 괴로운 생활을 하게 될 것이다. 무아로 혹은 진여로서, 본성의 자리에서 살아간다면 어떠한 경우에도 어떠한 고락의 경계가 온다 할지라도 거기에 좌우되지 않고 오히려 고락의 경계가 공부의 기회가 되고 자기실현의 순간이 될 수 있다. 다가오는 괴로움의 무상함을 알고 보면 어떠한 경우에도 그 괴로움에 빠질 염려는 없을 것이다. 그 순간 늘 깨어있고 스스로 육근동작을 알아차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몸(有根信)과 주변 환경(器世間)과 상호작용을 통해 영향을 받으며 끊임없이 형성되고 있는 연기적 존재이다. 마음병도 연기적 존재로서 무상한 것이며, 치유가 가능한 것이다.
이 세 가지 측면의 마음병, 즉 무지, 욕심, 습관은 모두 이기적 동기에 근원한다는 점에서 세 가지 방면의 마음공부(치유)가 병행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마음병의 치유는 자아에 대한 무지와 집착에서 벗어나는 일이 필수이지만, 무지(무명)에 대한 자각뿐만 아니라 이기적 욕심(욕구)에 대한 조절이 필요하다.
이를 통해 나아가 작은 나, 거짓 나의 집착에서 벗어나 본성에 합일하고 참 나를 회복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적극적인 실행의지로 묵은 습관을 고치고 기질을 변화시켜 보다 큰 이타적 욕구[願力]로 이기적 욕심[業力]을 조절하여 선업실천과 도덕실행의 길을 열어가야 할 것이다.
37)『정전』제3 수행편 제14장 고락에 대한 법문(『원불교전서』, 86-87쪽).
38)『정전』제3 수행편 제14장 고락에 대한 법문(『원불교전서』 87쪽).
<참고 문헌> -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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