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상/일반

自我와의 疏通

rainbow3 2020. 3. 4. 02:39


自我와의 疏通

-자신의 내면을 향한 두 가지 목소리-

 

姜玟求*

  

目 次

1. 서론
2. 李奎報의 자아 소통 -진솔과 해학
3. 申欽의 자아 소통 -시련과 맞선 절대 자유
4. 宋時烈의 자아 소통 -自警에 담긴 悔恨의 自嘲
5. 尹愭의 자아 소통 -自嘲가 품은 自負
6. 결론

 

 

1. 서론

 

소통은 자아와 세계 간에 이루어지는 행위다. 그런데 자신을 他者化할 경우에는 자신도 엄연한 소통의 대상이 된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소통하는 것은 의외로 자신이다. 아무리 남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혼자 있는 시간이 더 많기 마련이다. 인지할 수 없는 경우가 많지만, 사람은 대체로 혼자 있을 때 자신과 대화를 나눈다. 따라서 그 어떤 대상보다도 자아와의 진솔하고 건강한 소통이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자아와의 건강한 소통은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을 반성하고 좌절한 자아를 위로하고 일으켜 세워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실천을 다짐하게 만든다.


“나도 내가 왜 그런지 알 수 없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자아와의 소통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아와의 소통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본고는 그 답을 우리의 고전에서 찾아보았다.


우리의 선조들은 자아와의 소통을 매우 중시하였다. 문헌 속에서 스스로 경계한다는 의미의 自警, 自誡류의 글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自警, 自誡류의 글은 대체로 언행을 조심하고 학문에 정진하며 인격의 완성을 위하여 中斷 없이 노력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自警, 自誡류의 내용은 대부분 천편일률적이고 형식적이다.


자아를 他者化하여 자신을 좀 더 냉정하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관조하는 글로 自贊이 있다.1)

自贊은 자신의 화상에 붙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림으로 그려진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을 타자화하기에 용이하다. 또 自贊 중에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자신에게 말을 하는 것도 있다.


자신과 소통하고 있는 또 하나의 형식으로 스스로를 비웃는다는 의미의 自笑, 自嘲류가 있다. 최근에는 自笑시에 주목하여 고려시기부터 조선초기의 自笑詩와 그 창작 배경을 대상으로 작품과 작가의 상호 연관성을 검토하여, “자소시는 작가의 인생에서 의미와 가치를 지녔던 문제들을 문학적으로 형상한 것이며 대다수의 작가들이 주로 자기반성적인 의미의 냉소와 함께 그 문제를 이해하고 수용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2)라고 결과를 제시한 성과도 있다.

 

본고는 선행 연구의 결과를 계승하는 한편 自警, 自誡류와 自贊 그리고 自笑, 自嘲류의 글에서 이루어진 자아와의 소통 양상을 분석하여 현대인에게 바람직한 자아와의 소통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에 본고는 고려의 문인으로 이규보,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신흠, 조선 후기의 문인으로 송시열, 윤기를 연구대상으로 설정하였다. 이들은 당대의 문인으로서 대표성을 지닐 뿐만 아니라 自警, 自誡류와 自贊 그리고 自笑, 自嘲류의 3종류 글 중 2가지 이상을 창작하였다.

이들 3가지 글을 동시에 살펴보는 이유는, 그것들의 기능이 본원적으로 다르기에 그 형식과 내용이 명백히 구분되지만, 뛰어난 사상가와 작가들의 경우는 문체적 규범을 넘나드는 현상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자신의 내면과 진솔하게 소통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본고는 이와 같은 점에 착안하여 자신과 소통하는 작품들의 특징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다.

 

* 경북대학교 한문학과 교수.

1) 自贊류에 대한 선행 연구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왕경언, 「조선후기 自贊 연구」,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석사학위 논문, 2011; 김기완, 「노론의 학통적 맥락에서 본 송시열 초상화찬」, 『열상고전연구』, 제36집, 열상고전연구회, 2012; 임준철, 「한국 화상자찬의 전형과 변주」,『한문교육연구』, 제33호, 한국한문교육학회, 2012.
2) 김영주, 「高麗~鮮初 自笑詩의 展開 樣相 一考」, 『한문교육연구』, 제41호, 한국한문교육학회, 2013.

 

 

2. 李奎報의 자아 소통 - 진솔과 해학

 

고려시대의 대문호인 李奎報(1168~1241)는 자가 春卿이고 호는 白雲居士ㆍ止軒ㆍ三酷好先生이며, 벼슬은 정당문학을 거쳐 문하시랑평장사 등을 지냈다. 그는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최씨 무인 정권 하에서 문필로 종사하였다. 그러나 여러 차례의 무고로 인한 면직과 좌천은 이규보의 마음 깊은 곳에 明哲保身을 자리 잡게 하였다.

 

「自誡銘」
친밀한 사이라고 나의 은밀한 일을 누설하지 마라.

총애하는 처첩도 한 이불을 덮으면서도 생각은 다르다.

하인이라고 말을 경솔히 하지 마라. 겉으로는 뼈가 없는 듯하나 속으로는 어떤 생각이 있다.

더구나 나와 친근한 사람도 아니고 내가 부리는 사람도 아닌 자에게야!3)

3) 無曰親昵而漏吾微,

寵妻嬖妾兮, 同衾異意,

無謂僕御兮輕其言, 外若無骨兮, 苞蓄有地,

況吾不媟近不驅使者乎!(『東國李相國集』, 「自誡銘」.)

 

위의 글은 스스로를 경계하는 「自誡銘」이다.

이규보는 이 글에서 스스로에게 말조심을 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이 글은 여타 사대부들의 自誡와 달리 구체적 경험이 바탕에 깔려 있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일반적인 自誡는 처세에 대한 구체적 지침보다는 원론적 도덕률이 강조되고 있기 때문이다.

위 「自誡銘」의 주제는 ‘말조심’이다.

自誡의 상당수 작품들은 말조심을 주제로 하거나 일부 내용으로 들어 있다. 그 내용은 경전에 근거하기에 대체로 관념적이다. 그런데, 이규보의 「自誡銘」에서는 가까운 사람에게 자신의 은밀한 이야기를 하였다가 그것이 빌미가 되어 곤경을 겪고 아랫사람에게 경솔하게 이야기하였던 것이 앙갚음으로 되돌아왔던 경험과 회한이 느껴진다. 그러한 정황은 다음에 소개할 「自嘲」 시에서 좀 더 분명해진다.

 

「자조」「自嘲」
썰렁한 어깨는 툭 불거졌고    冷肩高磊落
병든 머리털은 짧고 성글다    病髮短蕭疏
누가 네게 혼자 곧으라 하여   誰使爾孤直
세태 따라 처신 못하게 했나   不隨時卷舒
무고도 자주하면 사실 되니    誣成市有虎
너무 청백한 탓에 죄 입었네   正坐水無魚
늙은 농부 되는 게 제격일 뿐  只合作農老
귀향해 날마다 밭이나 일구리 歸耕日荷鋤4)

4)『東國李相國集』, 「自嘲」.

 

이규보는 위의 「自嘲」에서 자신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꾸짖고 있다. 자신이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어깨가 도드라질 정도로 야위고 머리는 성근 병자로, 외모부터 애처로운 심정을 자아낸다.

 이규보는 자신에게 “도대체 누가 너더러 혼자서만 정직하게 살라고 하여 시류에 영합하여 처신하지 못하게 했는가?”라고 따져 물었다. 잘못한 일이 없고 열심히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예상치 불한 불행이 닥치는 이유는 시기하는 이들의 모략과 모함 때문이다. 비록 터무니없는 거짓말일지라도 여럿이 반복해서 말하면 결국 사실로 둔갑한다는 ‘三人成虎’의 고사와 다를 바 없게 된다. 이규보는 모함으로 곤란을 겪은 원인이 자신의 지나친 청렴결백에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대부분의 사대부들이 반복적으로 늘어놓는 원론적 도덕률을 말하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그러한 원론적 도덕률이 자신을 불행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대머리의 자조」「頭童自嘲」


머리 빠져 완전 대머리 되니   髮落頭盡童
비유하자면 민둥산이 이럴까  譬之禿山是
모자 벗어도 창피하지 않고   脫帽得不慙
빗질할 생각은 벌써 없어졌네 容梳已無意
귀밑머리와 수염만 없다면    若無鬢與鬚
참으로 늙은 까까중 같으리   眞與老髡似
갓과 고깔로 정수리 꾸미고   冠弁飾其顚
어거지로 마부까지 거느리고 强自備騶騎
노란 옷 둘이 끌고 가면서     黃裾雙引行
“비켰거라!” 길에서 소리치니 呵喝喧道里
행인들은 비슷한 사람으로 착각하고 行者錯擬人
빨리 내달려 서로 피하지만    䟃走相避
사실은 망령되고 용렬하여    其實乃妄庸
나라에는 이로울 바가 없네   於國無所利

가진 것이라곤 똥똥한 배 하나 徒將一腹皤
國祿만 실컷 먹었을 뿐이라네 多喫國廩耳
게다가 몹시도 낯이 두꺼우니 自尙厚顔深
누군들 비웃고 놀리지 않겠나 人誰不嘲戲
한시 빨리 걷어치우고 들어앉아 不如速卷藏
누가 되는 짓 더하지나 말아야지 無重己之累5)

5)『東國李相國集』, 「頭童自嘲」.

 

이규보는 해학 넘치는 작품을 즐겨 썼는데, 위의 작품처럼 자신을 소재로 삼은 것이 특히 익살맞다.

“해학은 선의의 웃음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조롱이나 풍자와 구분되고 인간에 대한 동정과 이해, 긍정적 시선을 전제로 한다.”고 한다.6) 그러나 해학에 대한 이와 같은 설명은 全面的이지 못하다.

6) 이상섭,『문학비평용어사전』, 민음사, 1995.

 

自嘲와 같이 자신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을 경우에는 자신에 대한 긍정과 이해뿐 만 아니라 긍정적 시선이 전제되며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않기 때문에 선의의 웃음을 유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의 단점을 웃음거리로 삼을 때 그것을 듣는 사람들은 그의 단점을 웃음으로 승화시킨다.
이러한 점에서 해학의 가장 좋은 소재는 자신의 단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중세의 지식인들은 스스로를 조롱한다는 의미의 自嘲나 스스로를 비웃는다는 의미의 自笑를 표방한 시문을 지어 자신의 단점을 웃음으로 승화시켰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단점이 갖는 긍정적 의미를 찾아냈다.

 

위의 시는 이규보가 자신의 대머리를 스스로 조롱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머리가 벗겨지면 부끄러워하고 감추기 마련이건만 이규보는 자신의 단점을 시로 지어 세인들의 웃음거리로 제공하였다. 그는 대머리를 민둥산에 비유하면서 빗질할 필요도 없고 귀밑머리와 수염만 없다면 늙은 중과 다를 바 없다면서 한껏 조롱하였다.

게다가 볼품없는 대머리를 갓으로 가리고 위엄을 부리느라 짐짓 喝道하는 卒奴까지 거느렸지만, 사실은 나라에 도움 될 바 없이 용렬한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고 신랄하게 놀리고 있다. 조롱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무능한 대머리가 가진 것이라곤 하는 일 없이 국록만 많이 먹어서 똥똥해진 배 하나 뿐인데다가 낯이 두꺼워
부끄러움도 모르니 하루 빨리 벼슬을 그만두고 나라에 누를 끼치는 짓을 더 저지르지 말라고 통렬하게 놀렸다.


만약 남을 ‘대머리’, ‘뚱뚱이’, ‘후안무치’, ‘무능력자’라고 놀린다면 어찌 될까? 아무리 솜씨 좋게 표현을 하더라도 당사자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기 때문에 해학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자신의 단점을 숨김없이 조롱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듣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의 진솔하고 호방한 됨됨이에 호감을 갖게 될 것이다. 또 자신은 남에게 숨기고 싶은 단점을 후련하게 털어놓음으로써 오히려 그것들을 극복하고 발전의 계기로 삼을 수도 있는 것이다.

 

「丁而安이 그린 내 화상에 자찬함」  「丁而安寫予眞, 自作贊.」


수염은 거칠게 흐트러지고   髯麤而靡
입술은 두텁고 붉그래하다   脣厚且赬
이 사람은 누군가        此何人者
春卿과 흡사하네         似若春卿
과연 春卿이라면         果是春卿
그림자인가 형체인가   影耶形耶
형체도 오히려 허망해  形尙虛妄
오로지 꿈과 같건만     惟夢之似
하물며 그림자임에랴   何況是影
꿈속의 꿈일 뿐이지     夢中夢尒
육십년 간 부침한        五紀升沈
보잘것없는 한 몸이     區區一身
화폭 속에 들어 있으니 入幅素中

엄연히 사람 같구나     儼然似人
마음 그리기 비록 어렵지만   寫心雖難
화상에 살짝 드러났구나 微露于眞
무릇 나의 자손은          凡我子孫
나의 추한 모습 웃지 말고 毋笑予醜
다만 그 마음을 전하면   但傳其心
조상께 욕되진 않으리    無忝祖考7)

7)『東國李相國集』, 「丁而安寫予眞, 自作贊.」

 

위의 작품은 선비화가인 丁鴻進이 그려준 화상에 붙인 자찬으로, 「頭童自嘲」와 자못 대조적이다.

 「丁而安寫予眞, 自作贊.」이나 「頭童自嘲」나 둘 다 자신을 대상으로 쓴 작품이지만, 「頭童自嘲」는 외모를 선명하게 부각시킨 반면, 「丁而安寫予眞, 自作贊.」은 1,2구에서만 외모에 대하여 말하고 있을 뿐이다.

 「頭童自嘲」에서는 대머리에 배만 볼록하게 나온 자신을 통렬하게 비난하고 있지만, 그런 모습을 바라보는 시각은 오히려 따스하다. 반면 「丁而安寫予眞, 自作贊.」은 그런 단점은 모두 가리고 수염은 호방하게, 입술은 생기 있게 그렸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이규보의 시각은 오히려 냉정하기만 하다. 그림이라는 대상을 바라보고 던지는 말이기에 좀 더 객관적일 수 있다. 이규보는 화상에 그려진 자신의 모습은 60년간 부침을 경험한 보잘것없는 존재로 허망한 꿈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비록 그림이지만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하는 말은 좀 더 관조적이고 냉정한 특성이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규보는 「自誡銘」에서 말조심할 것을 원론적, 관념적 차원을 넘어 구체적 내용으로 당부하였고 ‘自嘲’, ‘自贊’에서는 자신의 단점을 통렬하면서도 해학기 넘치게 폭로함으로 웃음으로 승화시키고 발전적 전기를 마련하였다.

 

 

3. 申欽의 자아 소통 - 시련과 맞선 절대 자유

 

申欽(1566~1628)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관직은 영의정에까지 이르렀다. 호는 玄軒․ 玄翁․ 放翁인데, 象村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7살의 어린 나이에 부모를 여의었으나, 학문에 전념하여 10대에 주요 전적을 독파하였으며 벼슬하기 전부터 이미 文名을 떨쳤다. 신흠은 장중한 성품과 뛰어난 문장으로 신망을 받으면서 항상 文翰職을 겸하여 외교문서의 제작, 詩文의 정리, 각종 의례문서의 제작에 참여하는 등 文運의 진흥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평가되며 조선 중기 한문학의 正宗으로 일컬어진다.


신흠은 「자찬」에서 자신의 정신적 지향과 염원을 말하는데 주력하였다.

 

「자찬」 「自贊」


궤에 기대어 앉으면    隱几而坐
그 형체는 쓰러진듯    頹乎其形
갓을 벗고 누우면       科頭而臥
그 생각은 멍한 듯      嗒乎其情
세상과 무리지어        與世爲徒
그 몸은 벼슬해도       軒冕其身
세상 밖에 노니니       遊方之外
그 정신 물 속 달일세  水月其神
현묘하고도 현묘하니  玄之又玄
누가 그 참모습 알리   孰知其眞
그런대로 가깝도다     庶幾近之
羲皇시대 사람에게     羲皇上人8)

8)『象村稿』, 「自讚」.

 

위 「자찬」의 핵심어는 ‘玄’이다. 신흠은 자호를 玄翁이라 할 정도로 ‘玄’에 심취되어 있었다. ‘玄’은 형상할 수 없는 경지이지만, 굳이 玄이 체현된 모습을 그려본다면 어떤 것일까?

안석에 기대어 있을 때는 그 형체가 맥없이 쓰러진 듯하고 갓을 벗고 자리에 누워 있으면 아무런 생각도 없이 멍한 모양이다. 이는 그 무엇도 집착하지 않고 그 무엇에도 구속되지 않은 상태를 묘사한 것이다.

외물로부터 독립된 경지이기에 비록 육체는 세상 사람들과 섞여 무리지어 살고 벼슬살이를 하고 있어도 정신은 물속에 비친 달과 같이 세상 밖에서 노닌다고 하였다. 몸은 현실에서 격리되거나 무리에서 고립되지 않으면서도 절대적 자유를 구가하고 싶었던 신흠이 스스로에게 주는 이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흠의 그와 같은 바램은 理想, 그 以上이 아니었다.

 

「玄翁自贊 竝序」


내 나이는 쉰둘이니 참으로 노쇠하긴 했지만, 그다지 심한 노인도 아닌데, 法網에 걸린 지 이미 5년이 되어 仕版에서 削籍되고 審理에 회부되고 시골로 추방되고 멀리 귀양을 가는 등 한 가지 죄목에 네 가지 처벌을 받았다. 법망으로 얽는 것이 양에 차지 않으면 또 참소하고 무고하였다.

아, 이러하니 어찌 늙지 않을 수 있겠는가! 거울을 가져다 스스로를 비춰 보니 딴 사람 같다. 이로 인해 自贊하였는데 사실은 스스로를 조소한 것이다.

 

玄翁이라고 한다면 이가 빠지고 머리가 벗겨지고 얼굴이 수척하고 몸이 야위었으니 지난날의 현옹이 아니다. 현옹이 아니라고 한다면 진흙탕에서도 더러워지지 않고 곤궁해도 더욱 형통하니 지난날의 현옹이다.

현옹이 아니라고 한 것이 옳은가? 맞다고 한 것이 그른가?

내가 또 나를 잊어버리면서도 지난날의 나를 잃지 않았으니, 내가 이른바 지난날의 현옹이 아니라고 한 것은 어찌 과연 지난날의 현옹이 아니겠는가?

천지는 하나의 손가락이고 만물은 한 마리의 말이다. 四大가 비록 합해졌어도 무엇이 진짜고 무엇이 가짜인가? 아! 그대 현옹은 하늘에 대해서는 능하고 인간에 대해서는 능하지 못한 자인가?

하늘이건 인간이건 내 장차 큰 조화 속으로 돌아가련다.9)

 

9) 余年五十二, 固衰矣, 而然非甚老者也, 而罹文罔已五載, 削仕版矣, 下理矣, 放歸矣, 竄謫矣, 一辜而四律竝矣. 文致不足則又貝錦焉,

 噫! 如之何不老? 攬鏡自見如他人也, 因以自贊, 實自嘲也.


以爲玄翁也, 則齒缺髮禿面瘦體削, 非昔之玄翁,

以爲非玄翁也, 則泥而不滓, 困而愈亨, 是昔之玄翁,

其非者是耶? 其是者非耶?

吾且忘吾, 而不失其故, 吾所謂非昔之玄翁者, 豈非是昔之玄翁?

天地一指, 萬物一焉, 四大雖合, 孰眞孰假?

噫! 爾玄翁, 能於天而不能於人者耶?

天耶人耶? 吾將歸之大化.(『象村稿』, 「玄翁自贊」.)

 

신흠은 「玄翁自贊」이 52살(1617)에 지은 글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는 이글에서 “5년 전에 법망에 걸려서 한 가지 죄에 적용된 벌이 무려 4가지나될 뿐만 아니라 그것도 모자라서 참소와 모함이 이어지고 있으니 어떻게 늙지 않을 수 있겠냐?”고 되물었다. 시간을 따져본다면, 신흠이 선조로부터 永昌大君의 보필을 부탁받은 遺敎七臣이었던 까닭에 1613년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파직된 사건을 이르는 듯하다.

또 1616년에 신흠은 仁穆大妃의 폐비 및 이와 관련된 金悌男에의 加罪와 함께 다시 논죄된 뒤 춘천에 유배되었다. 그리고 1621년에 이르러서야 사면되었다. 그러므로 이 「玄翁自贊」은 신흠이 자신의 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에 지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신흠은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쉰을 갓 넘긴 나이에 치아가 빠지고 대머리가 되고 얼굴이 수척하게 되고 몸이 야위었다고 한다. 신흠은 너무 나도 변해 버린 이런 모습을 보고 그것이 “정말 자신이 맞을까?”라고 물었다. 그는 그처럼 노쇠해버린 자신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노쇠해버린 외모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린 현실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신흠은 외모를 잃어 버렸을지언정 신념은 잃지 않았으므로, 그것이 자신이라고 인정한다.

더구나 그는 당면한 현실이 너무도 고달프지만, 그것은『莊子』 「齊物論」에서 ‘비록 커다란 천지라도 손가락 하나로 가릴 수 있고 수없이 많은 만물이라도 말 한 마리가 그 이치를 다 할 수 있으므로 시비득실을 따질 수 없다.’고 한 말과 같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불가에서 인간의 몸을 地ㆍ水ㆍ風ㆍ火로 이루어진 四大라고 표현하지만 그것의 존재 여부를 따져 묻기보다는 커다란 조화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하였다.

 

序에서 “自贊의 형식을 빈 글이지만 사실은 自笑”라고 밝힌 것처럼, 신흠은 자신의 우스꽝스런 모습을 숨김없이 드러내 비웃고 있다. 그러나 글의 내용을 전반적으로 잘 살펴본다면 自笑라고 표명한 것과는 달리 혹독한 시련과 장기간 맞서 신념을 굽히지 않고 이겨낸 자신의 모습을 오히려 대견스럽게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자찬」에서 드러낸 자부심과 다르지 않다.

그의 자부심은 또 한 편의 자찬인 「自贊 幷序」에서 더욱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신흠은 이 글에서 黃庭堅과 蘇軾의 반열에 자신을 끼워 넣을 수 있다고 하였으며 그 근거로 “유한한 생명을 가지고 무한한 지식에 장애를 받지 않는 자는 이 玄翁과 二子가 짝을 한다네.”10)라고 하였다.

이처럼 신흠은 평소뿐만 아니라 고난 속에서도 玄妙한 경지에서 노닐고 싶었기에 혼탁한 세상과 시련으로부터 초탈할 수 있었다. 또 자신의 초라해진 모습을 보고도 참된 자아를 지켰기에 그 역시 진정한 자신이라고 일깨우고 있다.

 

10) 嘗見黃魯直贊東坡及自贊文, 奇古超卓, 竊喜之, 且素好兩公爲人, 作小贊以自列於二子之後, 當世者固莫之許, 後豈無子雲, 亦漆園之朝暮遇者夫!
和寡則千載一士, 志契則萬物一致, 穆然而莊者, 摩圍道人, 曠然而達者, 東坡居士, 駕而折軸而无悶, 去而道塞而無憂, 不以有涯之生, 罣乎無涯之知者, 伊玄翁與二子儔.(『象村稿』, 「自贊 幷序」.)

 

 

4. 宋時烈의 자아 소통 - 自警에 담긴 悔恨의 自嘲

 

宋時烈(1607~1689)은 조선 후기의 학문․사상․정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자는 英甫이고 호는 尤庵ㆍ尤齋다. 당시의 여론은 山林에 있는 그에게 좌우되었고 국정도 그에게 물어 결정될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두 차례의 禮訟, 壬申三告變, 己巳換局 등 정쟁의 중심에 있었고 결국 賜死되었다. 이처럼 파란 많은 삶을 살았던 송시열은 자신에게 어떤 말을 하였을까?

 

「또 스스로 일깨워 정정을 구하다」「又自警求訂」


崤山과 函谷關을 막듯 陰氣를 끊어야 하며        絶柔要似閉崤函
善으로 회복함에 누가 輔頰이란 咸卦를 점쳤나  復善誰占輔頰咸
맹자가 두려워하고 조심했던 일을 본받아         看取鄒輿戰兢事
공을 거두는 곳에 이르면 참으로 굉장하리        到收功處儘巖巖

 

주자가 『孟子』의 “大人에게 유세할 때는 그를 하찮게 보아야 한다.”는 말에 대해 논하기를 “이는 하나의 英雄이니 모름지기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데에서 나온다. 만약 혈기의 거칠고 제멋대로 하는 것이 한 점이라도 있다면 이루어지지 않는다.”라고 하였다.11)

11) 朱先生論孟子說大人則藐之語曰: “此一種英雄, 須從戰兢臨履上做出來, 若是血氣麤豪一點使不著也.”(『宋子大全』, 「又自警求訂」.)

 

위의 작품은 『맹자』가 “대인에게 遊說할 때에는 하찮게 여기고 그 드높음을 보지 말아야 한다.”12)라고 한 말에 대하여 주자가 해석한 것을 송시열이 수용하여 자신을 경계하기 위해 만든 自警詩이다.

맹자의 위와 같은 유세법에 대하여 趙岐는 “존귀한 사람을 유세할 때 그의 富貴와 高賢을 하찮게 여기고 두려워하지 않아야 자신의 뜻을 온전히 펴서 다 말할 수있다.”13)라고 주석을 하였다.

이 주석만 본다면 상대의 지위와 재력에 기죽지 않는 호방한 기운이 있어야 大人을 유세할 수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주자는 戰戰兢兢하는 극도의 조심성에서 나오는 힘이라고 설명하였다.14)

 

12) 孟子曰: “説大人則藐之, 勿視其巍巍然.”(『孟子』, 「盡心 下」.)
13) 趙氏曰: “大人, 當時尊貴者也. 藐, 輕之也. 巍巍, 富貴高顯之貎. 藐焉而不畏之, 則志意舒展, 言語得盡也.”(『孟子集註大全』.)

14) 朱晦翁告陳同父曰: “眞正大英雄, 却於戰戰兢兢臨深履薄得之, 若氣血粗豪一㸃使不著也, 與孟子浩然之旨, 正相發. (明 海瑞, 『備忘集』)

 

 

송시열은 北伐論을 주창하였고 평생 수많은 논적과 논쟁을 하였다. 후대에 그의 북벌론은 현실성이 결여된 공허한 선동으로 폄하되었고 그의 논쟁은 소모적 정쟁으로 비난 받았다.

그와 같이 두려움 모르는 사자후는 맹자가 “대인을 설득할 때 그를 하찮게 여겨야 한다.”는 말에 토대한 것이지만, 그것은 두려움을 모르는 용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깊은 연못 앞에 선 것처럼, 살얼음을 걸어가는 것처럼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데서 나와야 한다고 스스로를 경계하였다.

또『周易』 「咸卦」의 “上六은 감동함이 광대뼈와 뺨과 혀다.”15)라는 말에서 용사하여, 다른 사람을 口舌로 감동시키려고 하는 것은 소인의 태도라고 스스로를 경계하였다. 이처럼 「又自警求訂」은 말을 할 때 두려워하고 삼가며 진심을 다하라고 자신에게 다짐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15) 上六, 咸其輔頰舌.

 

 

「스스로 경계하는 시」 「自警吟」


내 나이 이제 팔십인데 我年今八十
평생의 일을 추억하니 追憶平生事
허물과 후회가 산처럼 쌓여 尤悔如山積
붓 하나론 기록하기 어렵네 一筆難可記


어버이 섬길 땐 내 소견대로 하여 事親任所見
허다히 그 뜻을 따르지 못하였고 多不承其志
형님을 따를 땐 사욕에 가려 從兄蔽於私
고집스레 제멋대로 하기 좋아했지 强剛喜自遂


집에 있을 땐 愼獨에 어두워 居室昧謹獨
屋漏에 부끄럽지 않음이 없었고 無非屋漏愧
벗과 사귈 때도 忠厚하지 못해 交友鮮忠厚

그들의 허물을 덮어주지 못했네 不能庇其累


하물며 임금과 신하의 관계에 況於君臣際
감히 의리에 가까웠다 하겠나 敢曰近於義
『書經』에 이른바 ‘오륜’은 書所謂五典
낡아서 좀먹은 끈 같네 損壞如蠡縋


급히 다른 이에게 바로 잡혀야 하니 亟當正於人
남을 바로 잡는 일을 어찌 바랄쏜가 正人安敢企
망령되게도 世道의 책임을 妄以世道責
이 한 몸에 自任하였다네 自任於一己


한 수레의 장작불 치솟는데 一車薪火熾
한 잔의 물로 끌 수 있겠나 詎容一杯水
불에 데기나 하고 適足爲焦爛
조롱이 사방에서 이르네 譏誚四外至
이것을 쫓을 수 없기에 凡玆莫可追
온 마음은 다만 두려울 뿐 一心徒惴惴
멀리 衛 武功의 지혜 생각해보니 緬思衛武睿
구십 살에도 오히려 「抑詩」를 지었고 九十猶賦懿
또 생각하니 위대한 영웅들도 又思大英雄
처음부터 전전긍긍해서 이루어졌네 初由戰兢致


사소한 행동도 삼가지 않으면 細行若不謹
마침내 큰 덕의 누가 되는 법 終爲大德累
외면의 거친 기운이 外面麤豪氣
한 점이라도 부릴 수 있나 何可一點使


아침에 근면하고 저녁에 또 두려워하면 朝乾夕亦惕
움직이거나 쉬거나 반드시 일이 있으니 動息必有事
明哲과 眞誠을 양쪽에서 진보시키고 兩進是明誠
공경과 의리도 함께 세워서 偕立惟敬義
삼가 좌우에 써 놓고 謹當書左右
곤란하거나 다급할 때에도 따르리 顚沛洎造次16)

 

16)『宋子大全』, 「自警吟 丙寅」.

 

위의 「自警吟」은 송시열이 80세 되던 해(1686, 숙종 12년)에 지은 것이다. 만년의 송시열은 여러 가지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1682년 金錫胄․金益勳 등 훈척들이 역모를 조작하여 남인들을 일망타진하려고 했던 壬申三告變 사건에서 金長生의 손자 김익훈을 두둔하다가 서인의 젊은 층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또 이듬해인 1683년에는 제자 尹拯과의 불화로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게 되었다.


위의 「自警吟」에서 송시열은 고집스러운 소신 때문에 불화와 반목이 야기된 것에 대하여 깊은 회한을 하였다. 집에서는 부형 앞에서 소견을 고집하고 사욕에 눈이 가려 그들의 뜻을 올바로 따르지 못하였다. 또 친구간에도 그들의 허물을 덮어주지 못하였으며 군신간의 관계도 의리에 입각하지 못하였다.

노론의 영수로 여론을 좌지우지하며 世道를 바로잡겠다고 자임하였지만, 신중하지 못한 언행으로 오히려 남의 조롱만 받게 되었다고 후회하였다.

“영웅은 戰戰兢兢하는 데서 나온다.”라고 하였으니, 「又自警求訂」에서 강조한 것과 같은 맥락의 말이라고 하겠다. 송시열은 치열한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기에, 그와 같은 다짐은 결코 공허한 말이 아니었다.


한편, 송시열은 80 인생을 돌아보면서 퇴영적 회한만 하지는 않았다. 90세가 넘어서도『시경』에 전하는 「抑詩」를 지어 스스로를 일깨웠다고 하는 衛 武公을 떠올리며, 여생을『중용』에서 말한 “自誠明”과『주역』에서 말한 “敬以直內, 義以方外”에 의거하여 살아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당부하고 있다.


다음의 「自警吟」을 본다면 송시열은 노년에도 정진하였다는 사실을 알수 있다.

 

「스스로 경계하는 시」「自警吟」


비로소 알겠네! “노년보다 편안한 때는 없다”는  始知逸我無如老

이 말은 邵雍이 나를 심하게 속인 것인 줄을      此語堯夫欺我深
병을 진단하고 치료하고 약을 찾아다니고         論病治病尋藥餌
책 교감에, 서적 편찬에, 몸과 마음이 고달프네  校書編書苦身心
현인 될 희망은 절름발이 걷기를 생각하는 격    希賢不翅跛思步
도움을 구하자니 가뭄에 비를 바라는 것 같구나 求助還如旱望霖
아침저녁으로 걱정한들 무슨 일 이루겠나         早夜憂勤成底事
등짐벌레가 무게를 감당치 못하는 꼴 가련토다  堪憐蝜蝂重難任17)

 

위의 「自警吟」도 송시열이 노년에 지은 것인데, 나이가 들어도 일이 많아 쉴 수 없다면서 피로감을 드러내고 있다. 그가 노년에 피곤한 이유는 병과 저술 때문이었다. 특히 그는 저술 때문에 심신이 고달프다고 하였다.
송시열은 宋子로 불릴 만큼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그의 사후에 출간된 경학 관련 저서는 일일이 나열하기 번다할 정도로 많으며 그의 사후에 출간된 문집『宋子大全』은 무려 215권 102책에 달한다.

 「自警吟 丙寅」에서도 토로한 것처럼 그는 世道를 자임하였다. 그러나 질병의 치료, 서적의 교감․저술로 분망하면서, 어떻게 더 큰 일에 눈을 돌릴 겨를이 있겠는가?
이는 마치 제 힘은 헤아리지도 못하고 물체만 만나면 무조건 지려고 안간힘을 쓰는 짐벌레와 다름없다고 자탄하였다. 「自警吟 丙寅」과 「自警吟」은 두 작품 모두 自警을 표명하고 있지만 내용으로 본다면 오히려 자조나 자소의 성격이 강하다.

 

「畫像에 쓴 自警」 「書畫像自警」


사슴과 무리 짓고  麋鹿之羣
오두막에 살면서   蓬蓽之廬
창문 환하고 인적 없는데 窓明人靜
굶주림 참고 책을 보건만 忍飢看書

네 모습은 파리하고  爾形枯臞
네 학문은 엉성하여  爾學空疎
하늘의 충심을 네가 저버리고 帝衷爾負
성인의 말씀을 네가 깔보니    聖言爾侮
의당 너를 둘 곳은  宜爾置之
책벌레의 무리로다 蠧魚之伍18)

18)『宋子大全』, 「書畫像自警」.

 

위의 작품은 ‘自警’을 표방하고 있지만 실상은 畫像自贊이다. 주자가 「書畫像自警」이란 제목으로 화상자찬을 지은 전례를 송시열이 따른 것이다.
송시열은 그림으로 그려진 또 하나의 자신을 보고 말을 건네고 있다. 평생 국왕의 간절한 出仕 요청도 대부분 고사하고 山林에서 학문에 정진하였건만, 그림 속의 자신은 어떤 모습이었던가?

그림 속에는 야위어 앙상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평생 연찬한 학문도 엉성하기 짝이 없다. 그는 현인이 되겠다고 학문을 하였지만 결국은 책이나 파먹는 책벌레 꼴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고 자조하였다. 「自警吟」에서 감당하지도 못할 世道를 자임하다가 결국 온갖 비난을 받고 시련과 좌절을 맛보았기에 그런 자신의 모습을 짐벌레와 같다고 비하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고 하겠다.


송시열은 스스로를 경계한 시문을 남긴 반면 자신을 비웃는 자소나 자조시는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송시열의 자경 시문은 자소나 자조와 흡사하다는 것을 포착할 수 있다. 이로써 글의 목적이 명확히 구분되는 자경과 자소․자조가 작가에 따라 문체적 규범을 넘나들 수도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는 작가의 진솔함이 전제됨으로써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5. 尹愭의 자아 소통 - 自嘲가 품은 自負

 

無名子 尹愭[1741~1826]는 당대의 세태를 잘 알 수 있는 다수의 흥미로운 글을 남겨 주목받는 조선 후기의 문인이다. 그는 가세가 기울어 서울의 변두리로, 변두리에서 다시 경기도로 이사를 가야 할 정도로 빈한하였다. 그는 33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51세에 대과에 급제할 때까지 무려 20여 년간 성균관을 출입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57세의 나이에 藍浦縣監이 되었으나 불과 100일 만에 파직되고 감옥에 갇히기까지 하였다.

또 60세에는 黃山察訪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1년을 겨우 넘기고 해직되었다.19)
이처럼 윤기는 出仕가 늦었을 뿐 아니라 겨우 진입한 벼슬길도 험난하였기에, 자신을 돌아보고 격려함으로써 시련과 맞섰다.

 

「自警」「自警」


슬프구다! 나는   于嗟儂
묵묵히 돌아보니 默反躬
성품이 미련하고 性本憃
습성이 게을러서 習以慵
속은 텅텅 비고  中空空
문득 노인 됐네  奄成翁


진작에 대머리 되고 髮旣童
눈도 흐릿해졌으며  眼且矇
코에도 콧물 흐르고 鼻又齈
귀도 웅웅 울려대니 耳亦(耳+農)
또렷함은 간데없고  失惺( 忄+蔥)
정신이 흐리멍텅     入昏霿

 

입은 여전히 뚫렸고   口尙通
혀라면 따라주어서    舌則從
아침 먹고 저녁 먹고  飧而饔
말은 끊임이 없어      語不窮
가슴에서부터 드러내 發自胷
말하면 번번이 저촉된다 出多衝

 

비록 공부를 해도   縱着工
조심하지 않다가    罔愼戎
나중에야 두려워서 後乃( 忄+雙)
용납될 곳이 없다면 若無容
어떻게 막아서       曷以壅
그 끝을 마칠지      曁厥終20)

20)『無名子集』, 「自警」.

 

윤기는 위의 「自警」 첫머리에서 슬픔과 안타까움이 뒤섞인 탄식을 내뱉고 있다.

그리고 “나란 사람은 누군가?”라고 自問하였다.

윤기는 자신의 타고난 자질이 미련하고 후천적 습관은 게을러서 속이 텅텅 비었고 어느 순간에 노인이 되고 말았다고 개탄하였다. 그리고 노인이 되어버린 자신의 육체가 얼마나 볼품없는지 진솔하게 묘사하였다.

대머리에, 눈이 흐릿하여 잘 보지도 못하고 코에서는 콧물이 줄줄 흐르며 耳鳴 증상도 있다.
또 정신도 또렷하지 못하다고 하였다. 모든 감각기관이 정상적이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유독 입만은 제 기능을 한다고 탄식하였다. 다른 기관과 달리 입은 부지런히 움직일수록 좋지 못하다는 것이 윤기의 생각이다. 입을 부지런히 놀려 말하다보면 자신의 속마음을 숨김없이 발설하여 저촉되는 일이 많아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자신을 돌아보고 통렬히 반성하는 내용이며 그 후반부가 警戒에 해당한다.

 口舌로 인하여 문제가 야기되기 때문에 말조심을 하자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하고 있다.

 

「自贊」「自贊」


생김새는 밉살맞고 面目可憎
이야기는 재미없다 語言無味
이래서 찾아오는 이 없다 是以客無至兮
문밖으로 나가지 않고 不出戶庭
속이고 꾸미기 배우지 않았다 不學欺飾
이래서 세상에 아는 이가 없다 是以世無識兮
도모하여 하는 일 없고 無所猷爲
이럭저럭 밥 먹고 옷 입는다 且食且衣
이래서 춥고 또 배고프다 是以寒又飢兮
일찍부터 성인의 가르침 지켜 惟其蚤服聖人之訓
겉만 근엄하고 속 무른 소인 겨우 면하니 粗免色厲而內荏
처음 받은 본성 잃지 않기나 바란다 尙庶幾不喪乎厥初之禀兮21)

21)『無名子集』, 「自贊」.

 

위의 「자찬」은 「자경」보다도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한층 더 냉정하다. 윤기는 자신을 찾아오는 이가 없어 고독한 이유는 외모가 남에게 호감을 주지 못할 만큼 못생기고 말도 재미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자신이 밖으로 다니며 사교를 하지도 못하고 다른 사람의 비위를 맞추는 말을 하지도 못하기에 자신을 아는 사람도 많지 않다고 하였다. 또 빈궁하여 늘 춥고 배고픈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이익을 추구하는 일을 도모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윤기의 이 글은 자조적으로 보이지만 내면을 잘 들여다보면 자위적인 동시에 자부심마저 풍긴다. 공자가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도록 낯빛을 좋게 꾸미고 말을 꾸며서 좋게 하는 사람치고 어진 이가 없다.”라고 말한 것과 같이 윤기는 자신의 외모와 말을 타인에게 맞추려고 꾸미지 않았고 속이려 하지도 않았다.

또 이익을 도모하려고 애쓰지도 않았고, 安貧樂道하라는 성현을 말을 따른 결과, “얼굴빛은 근엄하면서 마음이 유약한 것을 소인에게 비유하면 벽을 뚫고 담을 넘는 도적과 같으리라.”22)라고 한 공자의 말에 부합된 인간형이 되었다고 자부하고 있는 것이다.

22) 色厲而內荏, 譬諸小人, 其猶穿窬之盜也與!(『論語』, 「陽貨」.)

 

윤기의 자부심은 다음의 글을 보면 더욱 명확히 확인할 수 있다.

 

「거울에 비춘 모습의 자찬」
안색이 온화하고 눈빛이 밝으니, 겉은 부드럽지만 내면은 강한 사람이겠구먼.
입이 도드라지지 않은 듯하며 귀가 희고 수염이 성기니, 말이 어눌하고 행동이 반듯한 사람이겠구먼.
강하고 반듯한 사람은 절대로 하지 않는 일이 있으니, 지조가 굳은 부류이겠구먼.
그러나 聖人의 가르침대로 행동을 조절하지 못하니, 나는 아마도 촌사람에 그침을 면치 못하는 걱정이 있겠구먼.23)

 

23) 色溫而目瞭, 其外柔而內剛者與!

口若不出而耳白髯疎, 其言訥而行方者與! 剛而
方者, 必有所不爲, 其獧者之流也與!

然未得裁之於聖人, 吾其不免於鄕人之憂也與!

 

(『無名子集』, 「照鏡自贊」.)

 

 

위의 글은 윤기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쓴 自贊이다.

 더러 보이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자신의 화상에 찬을 붙이는 것을 감안한다면, 다소 독특한 글이라고 할 수 있다. 또 거울에 비치는 얼굴의 생김새를 통하여 내면의 성격을 추정하는 내용도 하나의 특색이다.

윤기는 자신이 外柔內剛하며 말이 어눌하면서도 행동이 方正하여 하지 않는 일이 있는 獧者의 부류라고 단정하였다. 그리고 그 근거로 제시한 것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다.

공자는 “中道에 맞는 사람을 얻어서 함께 하지 못한다면 반드시 狂者나 狷者와 함께 할 것이니, 광자는 진취적이고 견자는 하지 않는 일이 있다.”24)라고 하였으니, 윤기는 비록 자신이 中道를 행하는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하였지만 절조를 지켜 하지 않는 일이 있는 견자의 수준에는 도달하였다고 자부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맹자에서 “순 임금도 사람이고 나도 사람이건만, 순 임금은 천하에 모범이 되어 후세에 전할 만하거늘 나는 아직도 촌사람이 됨을 면치 못하니, 이 점은 걱정할 만하다.”25)라고 한 말에 의거하여 자신이 성현을 지향하면서도 그 경지에는 도달하지 못한 한계를 인식하며 아쉬워하고 있다.


윤기는 출사가 늦고 환로도 순탄치 않았으며 빈한하였기에 열등감도 많을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그와 같은 열등감이 그의 「자경」과 「자찬」에 선명히 드러난다. 그러나 그의 열등감은 진솔하게 표출되는 과정을 통하여 건강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24) 不得中行而與之, 必也狂狷乎! 狂者進取, 狷者有所不爲也.(『論語』, 「子路」.)
25) 舜人也, 我亦人也, 舜爲法於天下, 可傳於後世, 我由未免爲鄕人也, 是則可憂也. (『孟子』, 「離婁 上」.)

 

 

6. 결론

 

타인과 올바른 소통을 하기 위한 전제 조건은 자신에 대한 객관적 파악이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객관적 파악은 자아와의 소통을 통하여 가능하다. 자아와의 건강한 소통은 세계와의 격리를 의미라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의 합리적 친화를 의미한다.


우리 고전을 살펴보면 중세의 지식인들은 자아와 소통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자아와의 소통에 대한 필요는 자아와 세계간에 심각한 갈등이 발생할 때 더욱 간절하였다. 자아와의 소통은 세계와의 갈등으로 인해 야기된 시련과 좌절을 극복하기 위한 의지의 실천이었다.


자아와의 소통을 선명하게 볼 수 있는 글은 주로 自警․自誡[自戒]․自銘․自箴․自贊․自嘲․自笑 등이다.


自警․自誡[自戒]․自銘․自箴류의 글은 주로 자신에게 준엄하게 다짐을 하는 글이다.

원론적 도덕률을 추상적이고 관념적 차원에서 나열하는 글이 대다수이지만, 구체적 경험을 기반으로 한 글도 다수 있다. 자신의 구체적 경험이 배경이 된 글에는 자신의 단점이 언급되기도 한다.


自贊은 자신의 화상에 스스로 찬을 부기하기 위해 쓴 글인데, 그림 속에 그려진 자신의 모습을 대하면서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대화를 나누는 형식으로 된 작품이 산견된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과오에 대하여 통렬하게 반성하는 한편 그려진 외모 안에 간직된, 그러나 그림으로는 그려낼 수 없어서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자신 만의 品德을 밝히기도 한다. 자신의 단점과 과오를 선명히 부각시킬수록 내면의 미덕이 더욱 설득력을 얻게 된다. 따라서 필자가 자찬에 숨기고 있는 전략은 표현하기 힘든 자신의 장점을 최대한 부각시키는 것이 되기도 한다.


자신의 단점과 과오를 스스로 폭로한다는 목적을 전면에 표방하는 글은 自嘲․自笑 류의 시문이다.

自嘲․自笑류의 시문은 외모, 능력 등에 대한 단점을 숨김없이 폭로하고 통렬하게 비웃음으로써 열등감을 완전 연소시키는 글이다. 그와 같은 통렬한 반성을 통하여 이상적 인간상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자아와 소통하는 시문들이 자신의 단점에 대하여 통렬하게 반성하고 있지만, 그것을 잘 살펴보면 자부의 교묘한 표현인 경우가 많다는 사실에 각별히 주의할 필요도 있다.


본고에서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대표적 작가가 남긴 自警․自誡[自戒]․自銘․自贊․自嘲․自笑류 시문을 검토함으로써 중세 지식인들의 자아와의 소통 방법과 양상을 분석해 보았다. 그들은 자신에게 준엄하게 다짐을 하였다. 한편으로는 애처로운 자아를 변명해 주었고, 과오를 진솔히 밝힘으로써 그것을 극복하고 진일보된 미래를 약속하였다. 이것이 중세 지식인이 자신의 내면과 나눈 두 가지 대화의 목소리라고 하겠다.

 

 

◆ 참고문헌 -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