孟子思想의 現代的 照明 * 琴 鏞 斗
1. 序 論
우리사회는 지금 西歐文物의 무분별한 도입으로 인간의 本性은 파괴되고 개개인의 가치관이 개인주의 사상의 蔓延으로 우리의 전통사상인 가족중심의 共同體 사상인 倫理와 道德이 붕괴된 불확실한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부인하지 못하고 살아간다.
어느 서구의 東洋학자는 ‘儒敎르네상스’라는 자기의 관점을 취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유교는 구시대적 사회의 원리 그 자체이므로 死藏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復活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精神만은 살아 있는데 그것은 사장된 유교의 靈安室에 보존되고 있다. 이 영안실이란 것이 죽은 유교를 昇華 시켜 유교정신이란 하나의 엑기스를 만들어 내는 체계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은 서구사회의 개인주의 사상이 지금 인간을 산산 조각내어 大同 사회를 崩壞로 까지 몰아넣고 있다고 하는 위기의식을 강하게 품고 있다. 따라서 유교의 정신을 共同體主義나 儀禮主義라는 反個人主義의 관점에서 파악하려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이 학자는 또한 이렇게도 말하고 있다. “유교가 결정적으로 사장되었기 때문에 近代化와 矛盾되지 않으면서 새로운 思惟樣式속에 그 정신을 재투자 할 수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
유교는 과연 죽었는가? 그렇다면 儒敎資本主義, 儒敎社會主義, 儒敎共産主義라는 造語는 무슨 말인가?
이것이 과연 유교가 죽은 뒤에 유교정신의 재투자 속에서 생겨난 말인가. 아니면 아직도 유교는 죽지 않고 살아있어 이러한 말들이 생겨날 수 있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인가?
어느 것이든 간에 무가치한 瓦礫은 버리고 珠玉만을 걸러 취해 새롭게 再構成해야 할 일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몫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 유교를 비롯한 동양의 傳統文化에 대한 새로운 관심도는 날로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 정치사회적으로 불안하고 가장 혼란했던 戰國時代를 살아가며 치열하게 자기사상을 펼치려 노력했던 孟子의 사상을 현대적 관점에서 조명해 보기로 한다.
2. 孟子는 어떤 사람인가.
孟子(B.C 372~289경)는 중국 戰國時代의 大儒學者로서 성은 孟, 이름은 軻, 字는 子輿, 혹은 子居(子車라고도함)이며 鄒나라 사람이다. 그러나 字에 대해서는 모두 魏晉時代 이후의 說로서 확실하지는 않다. 어려서 어버이를 여의고 어머니 伋氏로부터 교육을 받았다고 하지만 이것도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하기도 한다.
<春秋演孔圖)1] 와<闕里志>2] 등의 책에서는 孟子 부친의 이름은 激이고 字는 公宜이며, 모친의 姓은 仉이라고 하였는데, 이는 荒唐無稽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그 어머님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西漢 韓嬰의 <韓詩外傳>에는 “孟母斷機” 3]와 “買東家豚肉” 4]과 “不敢去婦” 5] 등의 이야기가 실려있고, 劉向의 <列女傳>애도 孟子어머니의 “孟母三遷” 6]과 去齊 7] 등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그가 어머니의 가르침과 훈도에 도움을 받은 바가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孟子의 生卒年月은 상고할 수가 없어 역대로 여러 가지 억척이 있었다. <孟子>라는 책을 대조 검토해보면 우리는 그가 周 나라 安王 17(B.C 385)년 전후에 태어났다고 하는 설이 비교적 합리적임을 알 수 있다.8]
元나라 程復心의 <孟子年譜>등의 책에서는 모두 그가 “84세를 살았다”고 말하고 있다. 만약 이를 믿을 수 있다면, 孟子卒年은 마땅히 周나라 赧王 11(B.C 304)년 전후가 된다. 孟子가 태어났을 때 孔子는 서거한지 이미 근 백년이나 되어 공자 문하의 제자들은 한 사람도 살아 있지 않았다.
<列女傳>과 趙岐의 <孟子題辭>에서는 공자의 손자인 子思가 그의 스승이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史記 孔子世家>에 근거하면 자사의 부친 伯魚는 50세를 살아 공자가 70세 때 죽었다고 하였는데, 그 때는 자사가 적어도 10여세는 되었을 것이다. 자사의 수명을 <사기>에서는 62세라고 하였는데, 후인들은 일찍이 魯나라 繆公이 자사에게 尊禮한 사실을 가지고 추정하기를 “<사기>에서 자사의 나이를 62세라고 한 것은 혹 82세의 잘못인 것 같다”고 인식하였다. 만약 자사가 82세 까지 살았다 하더라도 孟子의 출생과는 10여년의 차이가 있다. 따라서 이러한 설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孟子外書>9] 에서는 “자사의 아들이 子上 인데 孟軻가 일찍이 배웠다”라고 하였다. 우선 <孟子外書>가 僞書임을 말하지 않더라도 <史記>에 기록된 “자상은 나이 47세”라는 말을 근거로 추산해 보면 반드시 孟子의 스승이 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孟子는 일찍이 “나는 공자의 문하에서 배우지는 못하였으나 나는 공자 문하의 여러 사람들을 통하여 그분에게 私淑하였노라”.10] 라고 하였는데, 孟子가 말한 사숙이 누구인지 말한 적은 없지만, 반드시 매우 명망 있고 덕이 있었던 사람인 것은 아니며, 또한 반드시 공자의 직계자손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荀子. 非十二子>에는 子思와 孟子를 一派로 나열하였으니, 이것은 孟子의 학설이 반드시 자사에게서 나왔다는 것이다. <史記. 孟荀列傳>에 “孟子는 子思의 門人에게 수업하였다” 11] 라고 하였는데 이치에 합당하다. 12] 이와 같이 자사의 문인에게 수업하면서 공자의 道를 독실하게 믿게 되었다.
학문을 성취한 뒤에는 濟世救民의 뜻을 품고 여러 나라를 遊說하였다. 처음에는 鄒에서 벼슬하야 士가 되었다가 추에서 나와 齊나라로 가서 宣王(B.C342~324)의 客卿이 되었으며 후에 사퇴하고 추나라로 돌아 왔다.
그 후 宋, 薛을 거쳐 滕나라로 갔는데, 등의 文公은 자기 동생으로 하여금 孟子門下에 들어가 수업하게 하는 등 恭敬과 禮儀를 베풀어 孟子의 高見을 듣고자 하였다. 그러나 등 나라는 협소하고 强國사이에 끼여 있어 孟子가 자신의 포부를 실행할만한 여건이 좋지 못했다.
따라서 孟子는 梁 나라 惠王(B.C 370~335재위)이 賢士를 초빙하여 자국의 敗戰에 대한 雪辱을 기도한다는 소식을 듣고 양나라로 갔다. 그러나 혜왕과 서로 의견 일치를 보지 못하고 더구나 얼마 있지 않아 혜왕이 죽고 襄王(B.C 334~319재위)이 즉위하자 그의 용렬함을 보고는 다시 梁나라를 떠났다.
그후 孟子의 제자 樂正子가 魯나라에 벼슬하여 平公(B.C 314~296재위)의 신임을 얻었는데, 그가 孟子를 평공에게 천거하였으며 평공 또한 孟子를 초빙할 뜻이 있었으나 평공이 총애하던 臧倉의 저지로 초빙되지 못하였다. 이때 孟子는 “내가 노나라 임금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하늘의 뜻이다” 13] 라고 하며 탄식을 하였다.
이에 孟子는 자신의 도가 세상에 행해지지 않음을 매우 실망하였고 한편으로는 나이도 많았고 또 자신의 주장을 실현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만 “오백 년에 반드시 왕자가 나오니 그사이에 반드시 세상에 이름을 날리는 자가 있다. 周나라가 있은 이래 칠백여년이 되었으니 그 년 수로 보면 지났고 그 시기로 살펴보면 지금이 가하다. 대저 하늘이 천하를 태평하게 다스리고자 하지 않는 것이다 만약 천하를 태평하게 다스리고자 한다면 지금 세상에 나 말고 누가 하겠는가” 14] 라 하고 仕官을 그치고 고향으로 돌아 왔다.
孟子는 이때에 나이가 이미 70여세였다. 周遊天下를 단념한 孟子는 萬章등의 門徒와 더불어 詩經. 書經을 강론하고 공자의 뜻을 밝히면서 <孟子>七편을 지었다.15]
孟子 사후 北宋 元豊연간에 가서야 鄒國公으로 追贈하고, 다음해에 孔子廟에 從祀되었다. 그리고 元 文宗시에 鄒國 亞聖公으로 封하고, 明 世宗시에 亞聖孟子라 改稱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은 唐 韓愈가 <原道>에서 제시한 道統說의 영향으로 宋學이 크게 이러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性理學의 발달로 孟子는 尊崇받게 되었으며 그가 지은 <孟子>도 四書의 하나로 지위를 확보 하였다.
1]緯書(미래의 일이나 길흉화복을 예언한 책)의 일종. 공자 만년에 하늘에서 내려온 서찰이라고 하는데‘ 천하 장래의 정세와 시정의 요체를 드러낸 책.
2] 총 24권으로 明나라 陳鎬가 찬하였고, 이후 공자의 65세손인 孔允植이 정정하여 보충한 일종의 지리지.
3]孟子가 공부를 도중에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오자 마침 베틀에서 베를 짜고 있던 孟子의 어머니는 학문은 중도에 그만두면 짜던 베를 중간에 끊는 것과 같다하여 짜던 직기의 베를 끊어 孟子를 훈계했다는 고사.
4]小學 稽古篇에 “孟子 幼時 問東家殺猪 何爲 母曰 欲啖汝 旣而悔曰 吾聞古有胎敎 今適有知而欺之 是 敎之不信 乃買猪肉 以食之”라는 내용이 보인다.
5]안방에서 두 다리를 벌리고 드러 누워있는 아내를 본 孟子가 예의없는 아내를 친정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하자, 孟子어머니는 인기척도 내지 않고 안방으로 들어간 네가 예의없는 잘못이지 며느리가 예의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친정으로 보낼 수 없다며 孟子를 꾸짖었다는 이야기.
6]孟子 어머니가 孟子를 잘 가르치기 위하여 환경이 좋은 곳을 택하여 세 번이나 이사를 하였다는 유명한 이야기. ‘孟母三遷之敎’라고도함. 小學 稽古篇에 이 내용이 보임.
7]孟子가 齊나라에 살 때,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하고 안타까워하며 제 나라를 떠나야겠다고 어머니에게 말하자, 평생을 제 나라에 살았지만 여자는 三從之道가 있으니 아들의 말을 따라야 한다고 하고 제나라를 떠나기로 한 이야기.
8]淸代 周廣業의 <孟子出處時地考>와 魏源 <古徵堂外集>의 <孟子年表>와 宋翔鳳 <過庭錄>의 <孟子事跡考>를 참고할 수 있다.
9]지금 전하는 <孟子七篇>외에, 이보다 다르게 <性善辯>, <文說>, <孝經>, <爲政>등의 4편을 묶어 <孟子外書>라고 하였다. <孟子>와는 내용이 많이 달라 후인의 위탁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책은 일찍이 망실되었으며, 지금 전하는 판본은 明代 누군가에 의해 다시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10]孟子離婁下 22 “予未得爲孔子徒也 予 私淑諸人也”
11]孟子 序說에 “史記列傳曰 孟軻 騶人也 受業子思之門人”
12]상기 ‘孟子는 어떤 사람인가’의 내용 중 일부는 중문출판사 (2005.8.25) 孟子譯注 ‘서론’ 일부를 발췌했음.
13]孟子 梁惠王 下 16 “吾之不遇魯侯 天也”
14] 孟子 公孫丑 下 13 “五百年 必有王者興 其間 必有名世者 由周而來 七百有餘歲矣 以其數則過矣 以其時考之則可矣 夫天 未欲平治天下也 如欲平治天下 當今之世 舍我 其誰也”
15]孟子 序說 “退而與萬章之徒 序詩書 述仲尼之意 作孟子七篇”
3. 『孟子』는 어떤 책인가
<孟子>는 유교의 기본경전인 四書중 하나로 戰國時代 사상가 孟軻의 言行을 기록한 책이다. <孟子>라고 명칭 한 것은 自作與否의 문제는 있지만, 작자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이 책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해서 孟子의 自著인가, 아니면 門人들에 의해 편집된 것인가의 문제는 古來로 異說이 많지만 작자에 대한 견해는 현재까지 대체로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 견해는 <孟子>는 孟軻 자신이 지은 것이라 여기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論據는 史記의 <孟荀列傳>을 들 수 있다. 전에 의하면 “孟子는 鄒인이다. 子思의 문인에게 배웠다. 학문이 완성된 뒤에 齊, 梁, 魏, 滕, 魯나라 등 주유천하 하면서 유세를 하였으나 諸王들은 孟子의 주장이 현실과 떨어진 즉 迂闊하다고 여겨 그의 주장을 믿거나 채택하지 않았다. 그 당시는 소위 覇道정치의 戰國시대이기 때문에 온 천하가 合縱連橫의 계책에만 힘써 攻伐만을 훌륭한 통치 수단으로 여겼다.
이러한 시대에 孟子는 二帝三王의 王道정치의 德을 말하고 다녔다. 따라서 가는 곳 마다 그의 주장은 시대의 흐름에 맞지 않았다. 그리하여 孟子는 자기의 뜻을 이 시대에 실현 할 수 없음을 알고 물러나 제자 萬章등과 함께 詩書를 序하고 仲尼의 뜻을 서술하여 <孟子> 7편을 지었다.”라고 되어 있다. 이것이 孟子 자작 설을 주장한 최초의 자료이다. 이 설을 따르는 사람들은 趙岐, 應召, 朱子, 閻若璩, 焦循, 何異孫, 金履祥, 郝敬, 魏源등이 자작설의 견해에 따르는 사람들이다.
조기의 <孟子題辭>중에 “이 책은 孟子가 지은 것이다”라고 하였고, 초순의 <孟子正義>에서 元 나라 하이손의 <十一經問對>에서 이설을 闡明한것을 인용하여 “<論語>는 여러 제자들이 여러 가지 좋은 이야기를 기록하여 편찬하였기 때문에 <論語>라고 이름 하였지 <孔子>라고 부르지 않았다. <孟子>는 <荀子>와 같이 자신이 지은 책이기 때문에 <孟子>라고 불렀다.” 고 하였다.
宋나라 주자는 문장 風格의 일치성으로 인해 <孟子>는 孟軻 자신이 지은 것임을 論證하였다. 비록 그는 때때로 약간의 절충하는 논조도 있어 “그러나 그 중간에 ‘孟子는 性善을 말하였고, 말에는 반드시 堯舜을 칭하였다’는 것과 같은 언급도 있으니, 아마도 그의 門下生이 기록하였고, 孟子가 일찍이 增減하고 바로 잡았음이 틀림없는 듯하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 의론은 여전히 “<論語>는 문하의 제자들이 모은 바가 많았기 때문에 말을 할 때 길고 짧음이 비슷하지 않는 곳이 많이 있었다.
<맹자>는 아마도 자신이 지은 글이기 때문에 처음과 끝의 문자가 한 가지 체제이며 약간의 하자도 없는 것이다. 자신의 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면 어찌 이렇게 좋을 수 있겠는가? 또한 일곱 편의 필세를 보면 鎔鑛爐에서 쇠를 녹여 만드는 것과 같으니, 여기 저기 모아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 말하고 있다. 16]
元나라 김이상과 明나라 학경의 견해도 朱子와 같았다.
淸代의 염약거는 <孟子>에는 <論語)에 보이는 저자에 대한 容貌風格을 논한 글이 전혀 없다는 것을 두고 孟子의 자작설이라고 <孟子生卒年月考>에서 근거로 제시 하고 있다. 위원도 “<孟子> 일곱 편 중에 孟子의 용모나 언동에 대한 서술이 없으나, <論語>에는 제자들이 스승의 생김새가 보통 사람들과는 다르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孟子>는 마땅히 孟子 자신이 저술하였음을 의심할 수 없다”라고 <孟子年表考>에서 밝히고 있다.
두 번째 견해는 예로부터 孟子 자작 설을 懷疑하여 孟子 자신의 자작이 아니라 그 문인 들이 편집 했다는 설이다. 이설을 따르는 사람들은 韓愈, 張籍, 林愼思, 蘇轍, 晁公武, 崔述, 周廣業, 張說之등과 우리나라의 실학자 李瀷도 이설을 따르고 있다.
唐代 韓愈의 <答張籍書>와 장적의 <上韓昌黎書>에 이설을 제기했으며, 임신사의 <崇文總目>과 소철의 <古史孟子傳>에 보이고 있으나 이들 모두는 증거를 열거 하지 않았다. 조공무는 <郡齋讀書志>에서 “이 책은 한유가 제자들이 모아 놓은 것이지 孟子자신이 지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였다. 지금 이 책을 고찰해 보면 孟子가 만난 제후들의 諡號를 기록한 것을 보면 孟子 자신이 저술하지 않은 것은 확실 하다”라고 하였다.
그후 淸 나라 최술도 <孟子事實錄>에서 편중에 문장의 부실한 점과, 그리고 “제자들에게 子라는 칭호를 쓴 것을 보면 孟子 자신이 지은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追述 한 것이 분명하며, 만약에 孟子 자신이 저작하였다면 제자들에게 子라고 칭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광업 또한 <孟子>는 孟軻 자신이 지은 것이 아니라고 인식 하였다. 그는 <孟子出處地時考>에서 “이 책은 수십 년의 일을 차례로 서술하였고, 수십 인의 문답을 종합하여 서술 하였으니, 孟子 자신이 한 때에 편집하거나 자기 혼자의 손에서 나온 것이 결단코 아니다.”라고 하였다.
우리나라 실학자 星湖 李瀷선생은 <孟子疾書>의 서설에서 <孟子>는 그의 제자인 樂正子, 屋廬子,의 문도들이 저작한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세 번째 견해는 史記 <孟荀列傳>에 보이는 “물러나 만장의 무리들과 함께 孔子의 뜻을 서술하여 <맹자> 일곱 편을 지었다”고 한 말을 근거로 하여 孟子 혼자서 지은 것이 아니라 제자 중에 일부와 함께 저술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孟子>라는 저작은 비록 제자 중에 일부가 참여하기는 하였지만 주된 작자는 孟子자신이었으며 孟子생전에 이미 기본적인 개념은 완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설에 대해 현재에도 견해를 달리 하는 학자도 있으나, 그러나 가장 년대가 이른 太史公의 말이 그래도 가장 믿을 만 하다고 생각 한다. 아무튼 이 책이 孟子의 言說. 行實을 충실하게 전한 文獻이라는 데에는 이론이 없다. 그것은 <孟子>가 四書가운데 가장 저자의 筆勢가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孟子>의 편수는 사기에는 7편이라 하였고, <漢書> “藝文志”에는 11편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後漢 조기는 <맹자> 7편, 즉 梁惠王, 公孫丑, 滕文公, 離婁, 萬章, 告子, 盡心편을 각각 상하로 나누어 14권으로 만든 것이 지금까지 그대로 정착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일찍이 三國時代에 <孟子>가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孟子>가 諸子書에 속해 있었는데, 新羅가 통일 후 國學에서 제자 서를 가르쳤다는 기록이 보인다. 본격적으로 <孟子>가 연구된 것은 麗末鮮初에 朱子學의 전래와 함께 朱熹의 <孟子集註>가 전해지면서이다. 대표적인 주석서로는 趙瀷의 <孟子淺說>, 正祖의 <御製孟子條問>, 朴世堂의 <孟子思辨錄>, 찬자 미상의 <孟子講義>, <孟子大文>, 栗谷의 <孟子栗谷先生諺解>등 다수의 연구서가 전해 온다.
4. 孟子의 思想
孟子는 孔子가 歿한지 백여 년 뒤에 출생했다. 孟子가 살았던 당시는 列國이 覇道와 무력으로 雌雄을 다투던 戰國時代로 백성들은 塗炭에 빠져 어려웠으나, 思想界에 있어서는 유래 없는 이른바 百家爭鳴의 활약 시대였다. 당시 東遷한 周王朝의 권위는 날로 쇠미해져서 왕권을 회복할 가망이 거의 없었으며, 秦, 楚, 燕, 齊, 韓, 魏, 趙의 戰國七雄이 覇權을 경쟁하고 있는 한편, 魯, 衛, 鄭, 宋, 薛, 滕등의 소국이 그 사이에 끼여 있으면서 存立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의 君主가 즐겨 듣고자 한 것은 蘇秦과 張儀의 合縱連橫策, 商鞅, 吳起등의 富國强兵策, 戰勝術등 이었으며, 혹은 戰亂의 세상을 구제하기 위한 방법 등이었다.
당시의 여러 학파는 班固의 <漢書> “藝文志”에 의하면 儒家, 道家, 陰陽家, 法家, 名家, 墨家, 縱橫家, 雜家, 農家, 小說家등 이었는데, <孟子>에 등장하는 사상가들로서는 楊朱, 墨翟과 묵가 계통의 宋牼, 농가계통의 許行, 도가계통의 陳仲子, 종횡가의 公孫衍, 장의, 辨說家인 淳于髡, 人性論을 말한 告子등이 있었다.
그 당시 시대상황이 이러한 때에 孟子가 唐虞三代의 德 을 말하고 王道를 밝히며 仁義를 역설하는 것 같은 주장은 그 시대와 맞지 않는 迂闊한 생각이라 하여 空論으로 여겨 받아 들여 지지 않았다. 더구나 孟子는 出處進退의 義를 엄격하게 하였으므로 임금을 보좌하는 재능을 펴보지 못했다.
孟子의 사상을 개괄해 보면 사람의 本性은 善하므로, 王은 仁義에 입각한 王道政治를 하여야 하며, 왕이 왕도정치가 아닌 覇道政治를 행하면 그것은 왕이 아니라 일개 凡夫에 지나지 않으므로 쫓아낼 것을 주장하였다.17] 결국 孟子의 관심은 백성에 대한 군주의 사랑이었기 때문에 “백성들과 함께 즐거워해야 된다.” 18] 고 하였다. 이를 위해 孟子는 무엇보다도 백성들이 경제적으로 안정되어야 변하지 않는 마음이 생겨난다. 19] 고 믿었다. 이러한 孟子의 정치관은 “백성이 가장 귀하고 社稷은 그 다음이며 君主는 가벼운 것이다.” 20] 라는 말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孟子는 비록 스스로 孔子 學統의 계승자라고 생각하였으나 시대가 이미 백여 년이나 떨어졌고 시대 상황 또한 매우 큰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孟子는 공자의 학설에 취사선택하였을 뿐만 아니라 발전시킨 것도 있었다.
그래서 孟子의 사상은 기본적으로 孔子의 仁政학설과 倫理사상을 답습하여 더 한층 발전시켰다고 할 수 있다. 공자는 사람의 본성이 善하다고 분명히 말하지는 않았지만 道德實踐을 강조한 바 있다. 한편 孟子는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더욱 분명하게 주장하면서 인간이 인간다운 것은 사람에게 선으로 나아가려는 自覺이 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孟子는 도덕실천 방면에서 인간본성 가운데 “惻隱之心, 羞惡之心, 辭讓之心, 是非之心” 21] 의 四端을 실제 행동에서 실행하면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몸 밖에서 도덕의 원칙을 찾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孟子는 仁을 실천함이 마음속으로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하였다. 孟子는 이러한 사랑으로 백성들을 아껴야 한다고 주장 하였다.
孟子는 “어진 마음은 남에게 나쁜 짓을 하지 못하는 마음이고, 어진 정치는 남에게 차마 나쁜 짓을 하지 못하는 정치로서 임금 된 자가 이러한 어진마음을 사용하고 어진정치를 행한다면 천하를 손바닥에 놓고 움직일 수 있을 것이다.” 22] 라고 주장 하였다. 또한 孟子는 군주가 만약 어진 정치를 행하여 민심을 얻을 수 있다면 “강대국의 군대와 대적 할지라도 승리 할 수 있다” 23] 라고 생각하였다.
孟子는 또한 전쟁으로 국토를 확장하고 백성을 증가하는 수단으로 삼는 것을 반대하였다. 孟子가 관심을 갖고 있던 것은 백성들의 생활이 편안하고, 경작하는 자가 그 田畓을 소유하고 凶年이나 貧困을 근심하지 않는 戰亂이 없는 사회였다. 그래서 孟子의 정치사상은 정권의 정통성을 강조함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백성들을 근본으로 하는 사상에 표현되고 있다. 孟子는 또한 임금과 신하의 관계가 상대적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이러한 점은 孔子사상보다 가일층 발전한 것이다. 孟子의 民本사상이 당시에 확실히 進步적인 정치사상을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겠다. 孟子의 政治思想은 民本主義와 仁政論 이 중요한 바탕이 되고 있고 性善說이 그 사상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이 孟子가 주장한 性善說은 仁과 義라는 두 가지 덕목으로 나타난다. 인이 따뜻하고 포용적인 사랑을 의미한다면 의는 옳고 그름을 분명하게 구분하는 사회적 정의를 말한다. 인의는 모든 인간의 내면적 本性이지만 孔子가 仁을 강조한데 비하여 孟子는 한 단계 더 나아가 仁義를 강조하였다. 그래서 梁惠王이 利를 물었을 때 “왕은 하필 利를 말씀하십니까? 또한 仁義가 있을 뿐입니다” 24] 라고 대답했다. 이것은 孔子가 살았던 당시보다 더욱 혼란해진 戰國時代의 상황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正義를 밝힘으로서 현실 사회의 혼란을 극복하려는 孟子의 意志가 담겨진 진보적인 사상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孟子는 또한 사람의 마음은 자연적인 本性 이외에도 先天的으로 良知良能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했다. 良知란 사람이 생각하지 않아도 잘 알 수 있는 것이고, 良能은 사람이 배우지 않고서도 잘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으로 양지와 양능이 없다면 動物과 다를 바 없으므로,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본성에 내재된 양지와 양능을 통해 자신의 道德的 완성을 위해 노력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孟子는 양지양능에 대해 “지금에 사람들이 갑자기 어린아이가 장차 우물로 들어가려는 것을 보고는 모두 깜짝 놀라고 惻隱해 하는 마음을 가지니, 이는 어린아이의 父母와 교분을 맺으려고 해서도 아니며, 鄕黨과 朋友들에게 인자하다는 명예를 구해서도 아니며, 잔인하다는 惡名을 싫어해서 그러한 것도 아니다.” 25]라고 해서, 생각하지도 않고, 배우지 않아도 인간은 이미 선천적으로 善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태어났으므로, 이러한 전제하에 이를 잘 보존하고 드러날 수 있게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상으로 孟子思想에 대해 性善說, 王道政治, 與民同樂, 良知良能, 仁義, 四端說에 개괄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러한 사상이 현대에 끼친 영향에 대해 검토해 보기로 하자.
16]이상의 인용문은 모두 <朱子大全>에 보인다. 중문출판사 孟子譯注 서론 15P
17]孟子集註 萬章 下 8 “君有大過則諫 反覆之而不聽則易位”
18]孟子集註 梁惠王 下 1 “與民同樂也”
19]孟子集註 梁惠王 上 7 “若民則無恒産 因無恒心 (有恒産而有恒心)”
20] 孟子集註 盡心 下 14 “民 爲貴 社稷 此之 君 爲輕”
21]孟子集註 公孫丑 上 6 “惻隱之心 仁之端也 羞惡之心 義之端也 辭讓之心 禮之端也 是非之心 智之端也”
22]孟子集註 公孫丑 上 6 “先王 有不忍人之心 斯有不忍人之政矣 以不忍人之心 行不忍人之政 治天下 可運之掌上”
23]孟子集註 梁惠王 上 5 “王而征之 夫誰與王敵 故 仁者 無敵”
24]孟子集註 梁惠王 上 1 “王 何必曰利 亦有仁義而已矣”
25]孟子集註 公孫丑 上 6 “今人 乍見孺子將入於井 皆有怵惕惻隱之心 非所以內交於孺子之父母也 非所以要譽於鄕 黨朋友也 非惡其聲而然也”
5. 孟子思想이 현대에 끼친 영향
孟子는 앞에서도 언급 한바와 같이 孔子가 세상을 떠나고 100여 년이 지난 뒤 세상에 태어났다. 孔子의 탄생년도와 탄생지가 비교적 명확한 것에 비해 孟子에 대한 기록은 사실 많은 부분에서 불확실 하다. 이것은 孟子가 가난한 士 집안에서 태어났고, 또한 편모슬하에서 자라나서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보이나 아버지에 대한 기록은 없는 것이 기록의 逸失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공자가 세상을 떠난 뒤 공자의 門人들은 각지로 흩어져 學派를 형성하거나 政治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였는데, 儒家에서 공자의 學說을 제대로 전수한 이는 孟子라 할 수 있다. 史記에 전하는 것과 같이 孟子가 살았던 시대에는 楊朱나 墨翟의 학문이 盛行하였으며, 愼到, 宋鈃, 張儀, 蘇秦등도 각각 자기의 설을 주장하여 儒學은 많은 도전을 받고 있었다. 이러한 諸子百家의 설이 橫行할적에 孟子는 異端을 물리치고 유학을 지키기 위하여 百家와 다투었다.
孟子도 공자와 같이 각국을 두루 유세하고 다녔으나, 당시 諸侯들이 원하는 것은 富國强兵이나 外交的인 策略이었으므로, 孟子가 내세우는 道德的 王道政治는 당연히 현실과 동떨어진 理想主義로 여겨졌다. 孟子는 만년에 제자교육에 전념하였고 著述도 하였다고 전해진다. 孟子는 唐 나라 韓愈가 堯-舜-禹-湯-文王-武王-周公-孔子-孟子로 道學淵源 즉 道統이 이어 졌다고 推尊함으로 인해 北宋 五子와 南宋 朱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므로 孟子의 사상이 비로소 經書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이장에서는 孟子思想의 中樞를 이루는 性善說을 중심으로 孟子의 주요사상이 현대에 끼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먼저 孟子思想에 앞서 孟子어머니의 敎育觀을 잠깐 살펴보자. 孟子 어머니는 孟子를 위해 이사를 세 번이나 하였다는 이야기인 ‘孟母三遷之敎’와, 孟子가 공부를 중도에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오자 孟子 어머니가 짜던 베를 끊었다는 이야기인 ‘孟母斷機之敎’, 그리고 어린 아들을 속여서는 안 된다고 뉘우치고 돼지고기를 사왔다는 ‘買東家豚肉’, 그 외 ‘不敢去婦’, ‘去齊’등의 이야기는 孟子의 어머니가 위대한 교육관을 지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자녀교육에 있어서 환경이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말해주고, 어린 자녀들을 교육할 적에 어린 아이들은 부모가 곧 거울이기 때문에 부모가 속임수를 쓰면 자녀들은 자연히 자라서 남을 속이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이다.
東西古今을 막론하고 위대한 어머니가 위대한 자식을 낳아 기른다는 것은 明若觀火한 일이다. 이러한 孟子어머니의 교육관이 孟子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므로 孟子라는 위대한 철학자가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요즈음 자녀들을 교육 시키는 어머니들에게 시사 하는바가 매우 크다 할 수 있다.
孟子는 스스로 孔子의 충실한 신도였다고 인식하였고, 자기 자신에게 “내가 원하는 바는 공자를 배우는 것이다” 26] 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孟子는 공자의 학통을 이었다고 하나, 그러나 공자가 평생을 仁을 위한 학설을 펼쳤다면 孟子는 공자의 仁사상을 더 발전시켜 仁義로 자기사상의 중심이 되게 하였다. 공자가 사람의 生命을 중시하였다면, 孟子는 사람들의 생존 권리를 더욱 중시하였다.
朱子는 仁義를 “仁은 마음의 덕이자 사랑의 원리이고, 義는 마음을 제재함이고 일의 마땅함” 27] 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공자가 말하는 仁은 사람이 사람의 도리를 다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 실천은 忠恕에 있으며 내면적으로 자기의 마음을 다하고, 외면적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이해하는 마음 즉 推己及人의 마음이다. 孟子는 공자의 인을 확충시켜 仁義와 王道政治를 역설하였다.
유가의 이상적 정치는 聖王의 德이 백성들과 함께 즐기고, 그 은혜가 禽獸에 까지 미칠 만큼 太平한세상을 만드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맹자는 梁나라 惠王이 “어진사람도 기러기나 사슴보기를 좋아 합니까” 28] 라고 물으니 “백성이 군주와 함께 죽기를 원한다면, 동산이나 조수가 있다고 한들 어찌 혼자서 즐길 수 있겠는가?” 29]라고 해서 與民同樂이후에야 즐길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與民同樂은 바로 孟子의 民本思想이 잘 드러나 있는 내용이다.
이러한 사상은 君主도 백성들이 원하지 않으면 바꾸어야 된다는 논지나. 백성들이 가장 귀하다는 民本사상은 오늘날 爲政자 들이 새겨야 할 德目이리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孟子가 君臣間의 상호관계를 보는 관점 또한 孔子보다 進步的인 면이 없지 않다. 孔子는 다만 “임금은 예로서 신하를 부리고, 신하는 충성으로서 임금을 섬긴다.” 30] 라고 했을 뿐이지만, 맹자는 오히려 “군주가 신하보기를 내 손발과 같이 하면 신하가 군주보기를 내 배와 가슴같이 하며, 군주가 신하보기를 개와 말 같이 하면 신하가 군주보기를 길가는 나라 사람같이 여기며, 군주가 신하보기를 짓밟는 흙과 풀같이 여기면, 신하가 군주보기를 원수와 같이한다.” 31] 라고 하였다.
이러한 사상은 후대의 理學家가들이 “임금이 신하가 죽기를 바란다면 신하는 죽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한 것 보다 몇 배나 고명하고 선진적인지 모른다.
26]孟子集註 公孫丑 上 2 “乃所願則學孔子也”
27]東洋思想 孟子와 荀子사상 75P “仁者心之德愛之理 義者心之制事之宜也”
28]孟子集註 梁惠王 上 2 “顧鴻雁麋鹿曰 賢者 亦樂此乎”
29]孟子集註 梁惠王 상 2 “民欲與之偕亡 雖有臺池鳥獸 豈能獨樂哉”
30]論語集註 八佾 19 “君使臣以禮 臣使君以忠”
31]孟子集註 離婁 3 “君之視臣 如手足則臣視君 如腹心 君之視臣 如犬馬則臣視君 如國人 君之視臣 如土芥則臣視 君 如寇讎”
孟子의 이러한 백성들과 함께한다는 民本思想은 오늘날 僞政자들에게 警鐘을 울리는 본보기가 될 것이다.
孟子는 “性 의 善함을 말했다” 32] 라 하고 또한 “사람은 모두 다른 사람을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와 “측은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수오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사양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시비지심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33] 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만물이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다” 34] 라고도 하였다. 이러한 孟子의 本性은 착하다는 性善說은 그 실제적 의미가 사람들마다 모두 선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孟子가 한 말을 사용한다면 “하늘로부터 타고난 정으로 본다면 善 하다고 할 수 있으니, 이것이 내가 말하는 본성은 선하다는 것이다. 선하지 않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타고난 재질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35]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가장 주의할 만한 것은 첫째 孟子는 환경이 사람의 사고와 의식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인정하였다. 孟子는 “풍년에는 젊은 자제들이 대부분 게으르고, 흉년에는 젊은 자제들이 대부분 난폭해지니,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자질이 이와 같이 다른 것이 아니라, 환경이 그들의 마음을 나쁘게 바꾸어놓았기 때문이다.” 36] 라고 말하였다.
둘째 孟子는 사물은 제각각 객관적인 규율이 있으며 또한 마땅히 객관적인 규율에 의거하여 일을 한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孟子는 “천하의 사람들이 성이 무엇인지 알려면 다만 자연히 그러한 지난자취를 탐구하면 될 뿐이다. 자연히 그러한 바를 탐구하는 것은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다. 우리가 지혜를 싫어하는 것은 그것이 穿鑿과 牽强附會에 쉽게 빠지기 때문이다.
만일 물의 성질을 잘 알아 물을 잘 다스렸던 禹王과 같은 지혜로움이라면 이러한 지혜에 대해서는 반드시 싫어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왕이 물의 성질을 잘 알아 물을 잘 다스린 것은 그 일삼음이 없는 것을 행하여 자연의 순리를 따르고 형세에 따라 유도하신 것이다. 만일 지혜로운 사람도 그 무사함을 행할 수 있어서 자연히 그러한 것을 위반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 할 수 있다면 그 지혜 또한 위대한 것이다. 하늘이 지극히 높고 별들이 멀리 있지만, 다만 자연히 그러한 것을 탐구할 수 있다면, 천년후의 冬至도 가만히 앉아서 미루어 알 수 있다.” 37] 라고 말하였다. 孟子는 일체의 모든 사물은 각자의 객관적인 규율이 있어서 그 객관적인 규율에 의해 일을 하기에 ‘그 무사한 일을 행하여도 천착하지 않는다.’고 인식하였다.
孟子는 다만 사람에게는 惻隱, 羞惡, 辭讓, 是非의 마음이 있다고 말하였는데, 이 네 가지 마음이 仁, 義, 禮, 智의 四端이 된다고 말하였다. 端은 그 어떤 일의 실마리, 발단, 또는 가능성이라고 이야기 할 수 있다.
사람에게 어떤 가능성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사람이 어떠한 사상 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는 결코 같지 않다. 孟子는 “화살 만드는 사람은 오로지 사람을 상하게 하지 못할까 두려워하고, 갑옷을 만드는 사람은 오로지 사람을 상하게 할까 두려워한다.” 38]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그들 직업의 관계로 인한 것이므로, 인생이 모두 仁人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孟子는 사람의 본성은 ‘모두 나에게 갖추어져 있다’라고 한 것은 自我修養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구하면 얻고 버리면 잃는데 이 구함은 얻음에 유익함이 있으니 이는 자신에게 있는 것을 구하기 때문이다. 구함에 도가 있고 얻음에 운명적인 것이 있는데 이 구함은 얻음에 유익함이 없으니 이는 밖에 있는 것을 구하기 때문이다.” 39]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로 보았을 때 孟子는 ‘仁義道德’은 ‘구하면 얻을 수 있으며’ 그것은 ‘나에게 있는’ 사물이라고 인식하였다. 반면에 ‘富貴榮達’은 ‘얻음에 命이 있으며’ 그것은 ‘나에게 있지 않는’ 사물이라고 인식하였다.
유교 사상을 완성한 孟子의 사상은 전국시대의 정치 사회적 혼란과 사상적 위기 상황 속에서도 공자의 가르침을 지켜 계승하고, 그것을 현실 정치에 접목시켜 왕도정치를 이룩하려 했던 孟子 사상은 그 당시에는 우활 했던지 모르나, 수천 년이 지난 지금의 정치상황에서도 시사 하는바가 큰 것은 우리 모두 느끼는 점일 것이다.
32]孟子集註 滕文公 상 1 “道性善”
33]孟子集註 公孫丑 上 6 “人皆有不忍人之心, 無惻隱之心 非人也 無羞惡之心 非人也 無辭讓之心 非人也 無是非之心 非人也”
34]孟子集註 盡心 上 4 “萬物 皆備於我矣”
35]孟子集註 告子 上 6 “乃若其情則可以爲善矣 乃所謂善也 若夫爲不善 非才之罪也”
36]孟子集註 告子 上 7 “富歲 子弟多賴 凶歲 子弟多暴 非天之降才 爾殊也 其所以陷溺其心者然也”
37]孟子集註 離婁 下 26 “天下之言性也 則故而已矣 故者 以利爲本 所惡於智者 爲其鑿也 如智者 若禹之行水也 則無惡於智矣 禹之行水也 行其所無事也 如智者 亦行其所無事 則智亦大矣 天之高也 星辰之遠也 苟求其故 千歲之日至 可坐而致也”
38]孟子集註 公孫丑 上 7 “矢人 惟恐不傷人 函人 惟恐傷人”
39]孟子集註 盡心 上 3 “求則得之 舍則失之 是求 有益於得也 求在我者也”
6. 結 論
지금까지 孟子思想에 대해 槪括的으로 살펴보았다. 孟子는 공자보다 한 발 앞선 仁儀를 강조 하였는데 당시의 시대 상황은 富國强兵을 이야기 할 뿐이었다. 그러나 孟子는 오히려 “그러므로 전쟁을 잘하는 사람은 마땅히 극형을 받아야하고, 제후들에게 合縱連橫을 유세하는 사람은 마땅히 일등의 형벌을 받아야 하며, 세금을 더 많이 거두어들이기 위해 백성들에게 황무지를 개간하여 토지를 나누어 주는 사람은 마땅히 그 다음의 형벌을 받아야 한다.” 40]라고 하였다.
이러한 몇 가지 언급은 당시의 형세가 급박하여 여러 대국들이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각 나라들은 나라대로 전쟁을 잘하는 장군이 없으면 안 되고, 백성들 또한 수백 년 동안의 크고 작은 전쟁이 그치지 않아 고통을 감내 하기 힘들어 王道정치든 覇道정치든 전쟁을 종식시키고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갈망이 표출되던 시대에 孟子의 사상은 제후들에게 자기들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孟子의 사상이 인정받지 못했다. 그러나 孟子가 주창한 사상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 있어서 한층 더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또한 주지의 사실이다.
孟子사상을 요약해보면 인간이 착한 본성을 잃지 않고 四端을 확충하여 본래의 인간성을 실현시키면 누구나 堯舜같은 성인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사람은 사사로운 혈기나 이기적인 욕심 때문에 선한 본심이 가려지기도 한다. 사람이 본심을 회복하려면 是非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고, 언제나 옳은 일을 추구하여 仁義를 실행할 수 있는 지극히 크고 굳세며 올곧은 도덕적 氣槪인 浩然之氣를 잘 기른다면 大丈夫가되고, 大人이되며, 聖人의 경지에도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世衰道微하여 風俗이 頹廢하는 요즈음에 孟子의 사상이 風俗敎化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후래 학자들에게도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필자의 바람이다.
40] 孟子集註 離婁 上 14 “故 善戰者服上刑 連諸侯者次之 辟草萊任土地者次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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