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사상/불교

眞我~당신이 걸림없이 살고싶다고 말하는이유는 ?

rainbow3 2020. 5. 8. 03:29


*지각이나 사고의 내용은 변화한다 하지만 관찰자는  언제나 그대로이다

나도 자주 반복적으로 그런것을 실감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순간부터 무언가가 변하거나
기쁨이 샘솟지는 않는다 이렇게말하는것은  그렇게 아무런변화도  아무것도 하지않는 (진아)
가 자기내면에 있다하더라도 그로 인한 이점이란 (아무것도 영향받지 않는)것밖에 기대
할수 없기때문이다 하지만 제 아무리  매사에 늘 관조자로 있으면서  초연한들  삶의 어느
한 구석이  환희에 차거나  재미있는것은 아니다

수행자나 명상가들은  자주 몇가지  중요한점을 오해한다

첫번째 오해는 --- 진아를 자각하는것이 진아로 존재하는것을  방해한다는것이다
두번째 오해는 ---眞我니 관조자니 본질이니  진아에 도달하면  무언가가 좋아진다.바뀐다
고요해진다. 적어도 자신은 개선된다 .좋은방향으로 나아간다  라고 기대하는것이다
--내가 아직 이것저것  섭렵하던 20대 당시  이런 기대에 대한  나의 완고한 환상이  나로 하여금
진정한 명상에 들지 못하게 한 가장 큰 원인이었다

즉 想에 눈이 멀어버린 상태로 마음이 잡음을 일으켜서는 명상이 될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마음이 일으키는 잡음은  어지간해서는 알아채지 못할 만큼  미미한 경우가 많은
것도  어려운 점 중의 하나다

화상은 "간단하게 더 많이 얻으려 할 필요는 없다  지금 있는것을 잃어버릴 뿐"이다 라며 가볍게
말하지만  "더 많이"이라는 마음이 그렇게 간단하게 사그러들지 않는다

우리는 어렸을때부터 사방팔방에서 노력하라는 잔소리를  들어왔다
달성하라고 재촉 받았고.사랑하라고 교육 받았다
세간에서 벗어나도 이번에는 노력하지 않는다느니 여유있고 자연스럽게 .하라 고 들어왔다
(되는것이 아니라 존재하는것이다 )라는 말을 아무리 들어도  안으로 성찰하는 습관은 중단
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당신은 존재하는지 .안하는지. 명상이 이대로 좋은지.아닌지 라는
사실을 확인하지 않으면  어떻게해야 좋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 확인 작업이야 말로 세속적인
노력과 명상에 들이는 노력을 포함해서  우리들이 진보할수 있는 거대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상태에 대한  확인 작업이야 말로 가장 큰 장애다  자신을 확인하는것은 결코
에고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편 의식은 그것이 무엇이건 자기확인을 하지 않는다
아마 선승들이나 산야신들은 지금도 여전히 그 환상속에 있을것이다 명상을 하거나 진아로
존재하는것이 자신들의 변용을 위한 수단이나 다리라고 인식하기 쉽다 만약 그렇다면
그걸로 혹 명상에서 모종의 변화가 있다해도 그것을 기뻐하는것은 단지 그들의 자아일
뿐이다. 하지만 명상이란 수단이 아니다. 단지 그곳에서 완결된 "지금"을 말하는것이며
진아에게  당신이 溶(물질펀히흐르는용)解(풀해) 되는것이다.  물론 산야신도 지금이 실재
라고 말할것이다. 하지만 도대체 무엇을 위해 (지금 여기교라는 종교에 빠져든것일까?

애초의 발단은 그들에게도 그리고 당신에게도 자기 개선이라는 목적이었을것이다
아직 그 발단의 욕망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바로 이것이 문제다
자아가 자신을 개선할 목적으로 어떤노력이나 명상을 시도해도 애초 그 발단이 자기만족
을 위한 것인한  그 자아 깊숙이에는 언제 내가 바란 만족이 나타날까 하는 기대심이 감추
어져있다 그나마 그런점을 알아차리기란  정말 어렵다
당신 본인은 굳이 특별한체험을 바라지 않는다고 자신과 타인에게 말할수 있을것이다 물론
대단한 기대는 하지 않더라도  "평안. 아무걸림없기. 휴식.편안해지기"등
극히 아무것도 아닌것에 대한 동경이야말로 사실은 진짜 장애다
즉 명상이든 단순한 휴식이든 무엇을 하든 그 발단 언저리에  {당신자신에대한 불만}이 있는
이상  그것은 몇십년이 지나도  결코 사라지지 않기때문이다  어떤일을 할때부터 당신은 크건
작건 모종의 변화를 꿈꾼다.  즉 구도이든 명상이든  {자기에대한 불만}에서 모든것이 출발한다
그러나 그 자기 불만을 일으킨 당사자로서의 범인은 누구일까? "바로 에고다"

아무리 지고한 수준의 명상을 추구한들  최초로 행동을 일으킨  범인은 어김없이 (당신자신
에 대한 두려움과)(자기자신에 대한 불만)이었을것이다  그렇다면 범인은  에고밖에 없다

불만에서 개선으로 나아가는 행동은 에고가 맡은 분야이기 때문이다 그 연장선에서 지금까지
당신의 일상이  엮어져 왔다면 자기개선 또는 아주 미세한 변화라도 필요한 에고는 줄곧 의식
밑에서 살아있는 셈이다. 즉 명상이나 탐구의 동기는 정말 단순한것이다 이는 진정한 의미에선
정신적인 동기로는 볼수는 없다

게다가 항상 생존에 대한 두려움. 적응에 대한 두려움 . 변화에 대한 갈망. 자기 변화를 바라는
당신의 기대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  즉 불만에서 시작된 최초의 발단이 마지막이라고
해서 결코 만족에 도달할수는 없다.  그러나 말은 그렇게하지만  결국 사람은 잘못된 지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 밖에 없다.  결국 나의 목적은 그 최초의 잘못을 깨우치게 하는데 있다

탐구의 시작인 처음의 잘못을 깨우치게 하는데에 있다  즉 당신의 정신적인 욕망이 잘못이었다

어떤길에 있다한들 달리기 시작한 것은  결코 의식이 아니라 에고다  이렇게 에고는 멈추지
않는다

당신이 걸림없이 살고싶다고 말하는이유는 ?

그 또한 여러가지 사건과 경험이 배경으로 되어 당신에게 그것을 바라게 만들었을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신의 에고가  그 낙관적인 경지를 그곳에서 바라고 있다 탐구자라면 누구도
그것을  에고라고 말하진 않는다 .정신 세계의 그 누구도 당신이  광명이나 안심입명을 동경
하는것을 두고 잘못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잘못이라고  말하는 두사람이
있다  한사람은 에오. 또 한사람은 크리슈나무르티다

그는 말한다  "먼저 바라지 않은것 부터  배워라"

에고가 자기 변화라는 과제를 갖고 있는 한 이상과 현실을 대조하며 명상의 성과를 늘 확인하려
들것이다  이 때문에 명상가가  명상 그 자체속으로 사라질수 없게된다. 당신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확인하고자 한다  즉 완벽하게 眞我가 되지 못하고 진아를 응시한 채 움직이지 못할뿐
이다

또는 그것을 발견 하라든가 그곳에 정지 하라는 말을 들었다  하지만 진아는 영원히 그 누구
로부터도 말을 들어야할 필요는 없다  {그저 그자신으로 존재하는것)이 유일한 존재방법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당신의 에고에게 발견될 필요조차 없다

나는 관조자.진아와 같은  용어를 굉장히 싫어한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본다.입회한다 와 같은
행위가 연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행복하려면 내면을 들여다보거나 마음이나 감정에
대해 관조할 필요조차도 없다  처음부터 누구의 도움도 필요없이 당신의 에고가 기울이는
도움도 없이 스스로 계속 해서 만족한다  그저 당신이 쓸데 없는일을 저지르지만 않는다면

여기서 비로소 에오이즘의  우주론이  문제된다

이는 명상의 함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세계.우주.사람들.영혼의 진화
사랑과 같은것들이 완전하게 목적없음.의미없음이라고 간파된 후 라면  그야말로 명상에는
목적이 없어질것이다. 거기에서는 순수하게 명상을 맛보고 즐길수 있다
하지만 애초 탐구가 자기개선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개선이란 보다 나은 상태를 겨냥하는것
이며 그 좋다 라는 기준도 당신의 삼라만상에 대한 어떤가치관의 잣대를 투영해서 생긴다
그러면 명상이 명상으로서 완결되지 않고 이 명상은 의미 있다 라는 당신의 사고가 개입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내 宗門에 입문하면  반드시 의심하고 끝까지 생각해야 한다 결국 놀랍고
멋진 자신의 미래에 도달하는것이 아니라 " 오히려 절대적인 허무.무의미.무의의.절망.실의에
도달할 필요가 있다

에오의 말을 빌리면 {명상을 즐기려는 것조차도 쓸데없는 사고}다

그렇다면 모든 개선에 대한 노력이 완벽하게 무의미해질 가능성은 단 두가지밖에 없다

1)세계와 자신에게 통채로 무관심해질 정도로 모든 만물의 무의미를 (통감하기) 이것이
석가와 에오에게 일어난 일이다

2)또 하나는 무의미한 수준의 특별한 체험이다 

쓸데없는것을  쓸데없다고 알더라도
논리와 성찰이 다 소용 없다는것을 알더라도
당신이 어딘가에서  마지막으로 목숨을 걸고
자신을 몰아세우는  마지막 발버둥을 치면
그 순간 깨달음은 무대밖으로 말을 하며 나타날지도  모른다

따라서 광명으로 가는 비법이란 곧 필요성이다
그 필요성의 아귀다툼에 어떤 방법이든 한번 찔러보는것이
우리들같은 바보들의 역활일뿐이다

내가 당신을 안내할수 있는것은  단지 절벽까지 뿐이다
결국  계곡 자체를 전수할수는 없다
말할 필요도 없이  마지막으로 뛰어내리는것은 어디까지나 당신이다
내가 할수 있는것은 절벽까지의 길을 안내해주는 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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