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의 사랑, 여자의 사랑 : <색,계>를 중심으로
김 석*
<국문초록>
영화 <색,계>는 라캉이 말하는 사랑과 욕망, 금지된 욕망인 주이상스의 본질을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해준다. 색과 계는 인간 삶의 근원적인 두 영역이다.
계는 색의 원인이며, 색을 통해 계가 완성되지만 계에 충실하면 할수록 색은 계를 넘어서고 계를 뒤흔든다. 마찬가지로 법에 의해 시작되는 욕망은 법에 충실하면서 주이상스로 발전한다.
영화 <색,계>는 색과 계의 어우러짐,그리고 둘의 모순적인 관계를 왕치아즈와 이의 비극적 사랑을 통해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왕치아즈와 이는 계와 사랑에 대한 남성주체와 여성주체의 입장을 대표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왕치아즈는 '네 임무를 위해 막부인이 되라'는 적극적 계에 충실함으로써 연극적 열정인 색을 금지된 사랑으로 발전시킨다. 반대로 이의 계는 나르시시즘적 자기보존 욕망에 색을 가둔다.
여성의 사랑은 계에 충실함으로써 계를 넘어서지만 그 종착점은 죽음이다. <색, 계>는 존재로 향하는 여성의 '타자적 향유'와 정념적인 남성의 사랑의 차이를 통해 둘이 하나가 되는 성관계, 즉 사랑의 불가능성을 묘사한 사랑에 대한 훌륭한 텍스트라 할 수 있다.
▶ 주제어 : 사랑, 주이상스, 색, 계, 남성, 여성
* 건국대학교
Ⅰ. 들어가는 말
"인생은 연극이다. 온 세상은 무대이고 모든 여자와 남자는 배우일 뿐이다."
세익스피어
"시니피앙은 주체들의 행위, 운명, 거부, 맹목, 성공, 파멸 속에서
또한 주체의 타고난 재능이나 사회적 관습 속에서, 성격이나 성별에 관계없이 주체들을 규정한다."
Lacan, Ecrits, p. 30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로마서 7장7절.
2008년 개봉된 리안 감독의 영화 <색,계>는 욕망과 법의 관계, 사랑의 본질을 아주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이다. 또 한편으로 <색,계>는 비대칭적 관계를 이루는 남자와 여자의 사랑이 어떻게 색과 계를 통해 복합적으로 얽히면서 결국에는 비극으로 귀착되는지를 잘 보여준다.
색(Lust)과 계(Caution)는 인간 삶의 근원적인 두 영역이다. 색과 계는 복잡하게 상호작용하면서 인간의 삶에 여러 가지 형태의 욕망, 사랑, 미움, 갈등의 무늬를 새겨 넣는다.
색과 계의 상호작용은 특히 남녀의 성애적 사랑에서 직접적으로 가시화된다. 하지만 색과 계가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에서 무엇을 가리키고, 둘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그렇게 자명하지는 않다.
Lust는 색욕, 욕망, 정욕으로 번역되기에 의지로 통제하기 어려운 육체적 본능이나 성을 연상시키고
Caution은 색에 대한 경고, 조심, 신중 등 사회적 계율로 이해되면서 둘이 대립하는 구도로 <색,계>를 이해하기 쉽다.
다시말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전쟁이라는 극적 시기에 스파이로서 계에 철저해야할 한 여성이 자신이 처단해야 적을 사랑하게 되는 역설적 운명을 그린 영화, 즉 색에 굴복하여 계를 위반하는 것으로 영화를 그냥 보는 것이 가장 쉬운 해석이다.1)
그러나 색과 계의 대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것은 색과 계를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 남자와 여자의 일반적 관계에서 생각 할 때 더 복잡해진다. 색과 계는 욕망과 금지 혹은 육체와 정신으로 단순하게 환원되지 않는다. 색과 계는 보다 근본적으로 욕망과 법의 구조적이고 모순적 관계로 둘을 함께 생각할 때만 그 성격이 더 명확해진다. 필자가 영화 <색,계>를 라캉의 이론을 적용해 해석해보려고 하는 것이 그 때문이다.
라캉은 ?정신분석의 네 가지 근본개념?에서 이미 충동에 지배되는 인간의 성을 시니피앙과 관련해서 자세히 분석했다.(Lacan, 1973: 137-157) 라캉에 의하면 인간의 성은 시니피앙에 의해 촉발된 결여에서 시작되기에 상징계가 없으면 욕망도 없다. 색과 계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문화적인 존재인 인간에게 색은 육체적 본능이 아니라 계와의 관계를 통해서만 구체화 된다. 그러면서도 색은 끊임없이 계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한다. 법은 욕망의 원인으로, 주체가 품는 정념, 즉 색을 가능하게 만들면서 다양한 색채로 색을 채색 해간다.
그러나 법에 충실하면 할수록 법과 욕망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욕망은 마침내 법을 넘어 금지된 영역인 주이상스로 넘어간다. 색과 계의 이러한 모순적 관계 때문에 욕망이 때로는 사랑으로, 때로는 미움으로, 때로는 무지의 형태로 표출된다고 할 수 있다.
이하에서 필자는 우리의 삶을 씨줄과 날줄처럼 엮고 있는 색과 계의 관계를 특히 라캉의 성차이론을 중심으로 규명하면서, 이를 통해 영화 <색,계>를 성애적 사랑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텍스트로 읽으려고 한다.
라캉이 성차에 대해 설명하면서 '성관계는 없다'고 단언했는데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영화에는 잘 나타나 있다.
이하에서 보겠지만 영화에서 주인공 왕치아즈의 희생적 사랑은 라캉이 말한 전형적인 여성적 향유, 즉 상징계의 보편성 논리를 벗어나는 타자적 주이상스의 전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남자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비련의 사랑이 아니라 상징계를 넘어 실재계의 추가적인 향유를 누리고자 하는 적극적 행동에서 나오는 숭고한 사랑이다.
반면에 자신의 존재보전에 집착하는 이의 사랑은 상징계를 지탱하는 남근적 기능에 철저하게 복종하는 제한적인 정념적 사랑에 가깝다. 이는 자신의 결여를 채워줄 대상화된 여자를 통해 스스로의 불안을 극복하고자 하면서 색에서 구원을 찾는 의존적인 남성주체의 전형이다.
색과 계에 대한 왕치아즈와 이의 태도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계에 대해 상이한 태도를 취하는 남자와 여자의 사랑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다.
필자는 영화자체에 대한 미학적 평론보다는 남성과 여성이 지향하는 사랑의 특징과 법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색,계>를 분석할 것이다. 그것을 통해 사랑이란 무엇이고 여자의 사랑은 어떻게 남자의 사랑과 다른 가에 대한 하나의 답을 내려 볼 수 있을 것이다.
1) 예를 들어 다음의 영화평을 보라.
"왕치아즈는 계를 어겨 죽었고 이는 계를 어겨 사랑하는 여인을 잃었습니다. 왕치아즈가 가지고 있는 계는 시대가 부여한 당위이자 그녀 내부에 있는 경계, 즉 '레지스탕스'임에도 변절자에게 사랑을 느끼기 때문에 본인 내부에서 생겨나는 경계이지 이가 가진 계와 대결하는 계가 아닙니다.
따라서 왕치아즈가 죽은 이유는 이와의 계 대결에서 졌기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가 가진 모순을 견디지 못하고 그를 사랑하게 됐기 때문입니다. 이가 가지고 있는 계 역시 중국인이면서 친일하고 있는 인물의 모순된 상황으로부터 이 본인에게 부여되는 경계이지 왕치아즈가 가지고 있는 계와 대결하는 경계가 아닙니다.
이도 사랑해서는 안되는 계를 어기고 한 여인을 사랑하게 됐기 때문에 즉, 본인의 계에게 졌기 때문에 사랑하는 여인을 잃게 된 것입니다."
이 글은 인터넷 토론방에서 가져온 익명의 글이기에 굳이 출처를 밝히지는 않는다.
II. 연극적 장치의 중요성
<색,계>는 1940년대 상하이 한 카페에서 막부인이 자신이 왕치아즈로 불리던 4년 전 홍콩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카페에서 저항군 아지트로 막부인이 전화를 거는 처음 장면은 영화의 끝부분에 다시 되풀이되는 역순환적 구조로 영화의 플롯2)이 짜여있다. 이것은 단선적인 시간의 흐름보다는 현재와 과거의 구조적 순환을 암시하는 일종의 영화적 트릭이라고 할 수 있다.
영화는 1938년 홍콩에서 있었던 첫 번째 에피소드와 1942년 상하이의 두 번째 에피소드로 나뉘면서 이와 왕치아즈를 중심으로 복잡하게 얽힌 '색'(Lust)과 '계'(Caution)를 펼쳐 보여준다.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왕치아즈가 어떻게 이의 암살음모에 가담하게 되었는가가 줄거리의 중심축을 이룬다.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는 색과 계의 본격적인 어우러짐과 갈등이 영화의 내용을 이룬다.
두 에피소드의 분할은 언뜻 연극의 2막 구조를 연상시키지만 영화에서는 처음과 끝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로 연결되면서 반복되는 구조적 순환이 강조된다. 다시 말해 홍콩과 상하이의 에피소드는 시간의 흐름으로 보면 구별되지만 플롯상으로는 이의 암살모의라는 동일한 사건의 얼개를 반복하고 있다.
하지만 두 에피소드의 차이도 있다.
첫 번째 에피소드가 막부인이 되지 못한 왕치아즈의 이야기라면, 두 번째 에피소드는 이제 그녀가 점점 더 왕치아즈의 정체성을 버리고 막부인이 되어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색과 계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하다.
먼저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자세히 묘사되는 영화 속 연극의 역할에 각별히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영화 <색,계>에서 연극은 단순히 인물들의 과거를 보여주기 위한 배경적 이야기가 아니다. 연극은 영화의 전개에서 중요한 모티브의 역할을 하며 단순한 영화적 장식이 아니다.
왕위민이 주도하는 대학 연극패는 실은 항일운동을 하기 위한 아마추어 조직이다. 이들에게 연극은 항일운동의 수단이며, 순수한 연극적 열정보다는 복수심, 우정, 이성적 사랑 같은 다른 사적 동기들이 더 이들의 색을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처음에는 항일운동을 위해 일종의 수단으로 연극이 활용되었지만 사건이 진행될수록 연극은 점차 현실로 변하면서 무대와 실제 삶의 경계를 허물어 뜨린다. 연극은 더 이상 놀이가 아니라 이들에게 새로운 역할과 그에 맞는 색을 강요하는 계 자체가 된다. 여기서 동료들과 달리 처음부터 연극에 대한 열정자체가 삶의 커다란 존재 이유였던 왕치아즈를 중심으로 색과 계의 모순적 관계를 생각할 필요가 있다.
<색,계>를 통속적인 남녀의 사랑이야기나 이데올로기의 비극을 고발한 전형적인 스파이영화로 보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왕치아즈가 보여주는 연극에 대한 남다른 열정이 영화의 전개에서 큰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처음에 왕치아즈는 왕위민에 대해 설익은 사랑의 감정을 품고 있었지만 수줍게 바라보기만 하는 낭만적 짝사랑을 이후 항일운동에 참가 하는 지속적 동기로 보기에는 여러 가지로 무리가 따른다.
특히 상하이에서 스파이 임무를 다시금 기꺼이 수락하는 왕치아즈의 행동은 그녀의 순수한 연극적 열정이 아니면 이해하기 힘들다.
왕치아즈가 어려운 형편 가운데 돈을 털어 극장에 가서 공연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나, 항일연극을 하고 나서 관객들의 호응에 크게 감동하는 장면은 이후 왕치아즈가 막부인으로 변신하려고 하는 실질적 동기에 대한 암시로 볼 수 있다. 모든 것은 연극에서 시작되는데 이 연극은 현실 속에서 점차 확대되고 복잡해지면서 주인공들을 압도하는 살아 있는 역사가 되어 간다.
이에 대한 암살모의를 위한 연극이 진행되면서 이들은 보다 철저하게 자신의 역할에 충실 할 것을 요구받는다. 왕치아즈가 막부인이 되기 위해 처녀성을 버리고 성적 기교를 익히기 위해 동료와 성관계를 갖는 게 대표적 장면이다. 홍콩의 암살모의가 실패한 후 왕치아즈의 연극은 일단 막을 내린다.
그러나 두 번째 에피소드에서 왕치아즈는 상하이에서 체계적으로 조직화된 저항군을 만나면서 다시금 막부인의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왕치아즈가 연기에 몰두할수록 계의 통제를 받으며 왕치아즈의 정체성을 위협하지 않았던 색, 즉 연극에 대한 그녀의 열정은 점차 이에 대한 사랑으로 발전해간다.
연극과 연기에 대한 왕치아즈의 순수한 열정이 그녀를 다른 인물들과 구별해주는 초월적인 이미지를 부여 하는데 그녀의 열정은 보다 더 철저한 계에 대한 헌신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왕치아즈가 계에 충실할수록 내적인 갈등은 커져가면서 계를 넘어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물론 <색,계>를 보면서 두 주인공의 사랑이 깊어 가는 과정에 주목하거나 왕치아즈의 연극적 열정을 그녀의 순수하고 낭만적인 성격을 보여주기 위한 배경정도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색과 계를 남녀의 사랑과 육체적 욕망을 중심으로 해석하는 통속적 이해에서 크게 벗어날 수 없다.
영화의 핵심주제인 색과 계의 복잡한 길항 관계는 삶 자체가 연극임을 암시하는 영화 속 연극적 장치를 비중 있게 고려할 때만 제대로 이해될 수 있다.
<색,계>의 첫 번째 홍콩 에피소드에서 주로 다뤄지는 연극장면은 연극과 현실의 경계가 사실상 없으며 어떻게 보면 삶 자체가 연극일 수 있다는 감독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영화적 장치로 이해해야 한다.(cf. 리안, 2007c)3)연극이 미리 짜여진 스토리 및 인물들의 역할과 성격을 지시하는 플롯에 의해 진행되면서 배우의 연기에 의해 구체화 되듯이 우리의 삶은 우리를 규정하는 상징계에 의해 규정된다.
연극적 구조를 중심에 두고 <색,계>를 본다면 라캉의 상징계 이론과 상당한 유사성이 있다.
라캉은 『<도둑맞은 편지>에 대한 세미나』(Lacan, 1966: 11-61)를 통해 포우의 단편 소설을 절대적 주권을 행사하는 상징계의 문자와 그것이 부여하는 역할에 따라 주체가 탄생하는 은유적 서사로 설명하였다.
역사란 시니피앙이 우리들 각자에게 부여한 임무와 역할을 상호주체성의 구조에서 수행하는 상징계의 산물이라는 라캉의 설명을 염두에 둔다면 삶에 대한 연극적 은유로 <색,계>를 읽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색,계>는 주체의 삶 자체가 상징계의 연출자인 대타자4)에 의해 지도를 받으며 이야기를 만들어 가는 한편의 연극일 수밖에 없다는 라캉의 주장에 대한 영화적 서사로 볼 수 있다. 라캉은 대타자를 주체상호 간의 관계를 가능하게 해주는 상징계의 담지자로 정의한다.5)
대타자는 주체들의 구체적인 역할과 위치를 지정해주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주체가 대타자의 담론에 의해 구성되고, 그것에 지배를 받듯이 <색,계>에서 모든 인물들의 색, 즉 각자의 욕망은 '계'(Caution)에 의해 규정된다. '계'는 연극적 장치에서 각자의 역할에 대한 규칙처럼 각 인물에게 주어진다. 실제로 등장인물들의 대사에는 연극적 상황에 자신들의 처지를 견주는 내용이 많이 등장한다.
"우영감 : 왕 치아즈는 막부인으로 완벽하게 변신했고, 그 덕분에 그의 신뢰를 얻는데 성공했어.
우영감 : 놈이 내 가족을 죽였지만, 난 놈 앞에서 기꺼이 웃는 연기도 할 수 있어.
왕치아즈 : 연기라면 그가 몇 수 위죠. …… 난 노예처럼 그를 받아들이고, 충실히 내 역할을 다해 그의 마음을 얻어 내죠."
이러한 대사 뿐 아니라 왕치아즈가 스파이로서 자신의 임무를 부여 받는 장면 역시 연극적 상황처럼 영화에서 그려지고 있다. <색,계>에서 최초 에피소드와 두번째 에피소드에서 연극의 무대를 둘러보는 왕치아즈를 이층의 동료들이 부르는 장면이 두 번 반복 된다. 마치 무대에 오르기 전 자신의 역할을 기다리는 배우에게 연출자가 지시하듯 '왕치아즈! 올라와'라고 부르는 동료들의 호명과 더불어 모든 사건은 시작된다.
이제 순수한 시골처녀 왕치아즈의 삶은 새롭게 부여된 계를 따르면서 더 큰 무대에서 공연 되어야 한다. 그리고 왕치아즈는 주저 없이 자신의 역할을 받아들이면서 막부인으로의 변신을 시도한다.
그렇다면 색과 계의 구체적 관계는 무엇인가? 모든 것은 법, 즉 계로부터 시작된다. 계가 없이는 절대로 색이 있을 수 없다. 색을 색으로 만들어 주고 규정하는 것이 바로 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색에 의해 구체화되지 않는 계 역시 의미가 없다. 그러나 색과 계는 궁극적으로 갈등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데 계에 충실하면 할수록 색과 계의 경계가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계에 대한 태도가 영화 속 인물들의 성격과 운명을 구별 짓는다.
예를 들어 왕치아즈의 비극은 계에 대한 지나친 헌신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이 때문에 왕치아즈는 신의 법에 충실했던 욕망의 화신 안티고네처럼 승화된 빛을 발하며, 계의 제약을 받는 색을 초월적인 주이상스적 사랑으로 승화시킨다.(Lacan, 1986: 305)6)
이하에서 보겠지만 정념이 배제된 계에 대한 순수한 복종은 육체적 욕망에 그치기 쉬운 색을 육체를 뛰어넘는 죽음, 즉 실재의 경지로 끌어올린다. 물론 이 과정은 단번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몇 번의 주요한 계기를 통해 이루어진다.
2) 원래 플롯이란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처음 사용한 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롯을 단순한 스토리의 전개가 아니라 사건의 결합을 의미한다고 정의한다. 플롯에는 인물들의 내적 관계는 물론 성격과 행동에 대한 지시, 즉 구조가 포함된다. 필자는 <색,계>를 일종의 텍스트로 읽으면서 영화적 기교나 미학보다는 영화의 극적 구조와 그 구조에 의해 배치되는 인물의 성격을 분석하는 것에 치중하기 때문에 플롯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겠다. 플롯의 자세한 정의에 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시학』제7~11장 '플롯' 편을 보라.
3) 영화를 만든 리안 감독도 이런 관점을 강조했다. "<색,계>를 향한 대부분의 관심이 섹슈얼리티에 집중되고 있지만 나 역시 이 영화는 삶에 있어서의 연기와 연극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홍콩에서 오디션을 거치고 리허설을 마친 아마추어 배우들이 더 큰 무대인 상하이로 떠나는 것이다. 왕치아즈는 자신의 연기를 극단적인 상황 속에서 실험한다."
4) 슬라보예 지젝은 라캉이 말하는 대타자는 배우 각자에게 역할을 부여하고, 연기를 지도하는 연출자의 역할에 비유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참조, 『How to read 라캉』, 17~18 쪽.
5) 라캉의 대타자와 「<도둑맞은 편지>에 대한 세미나」에 대한 쉬운 해설로는 숀 호머『라캉 읽기』가 있다. 특히 88~95쪽을 참조하라.
III. 색과 계의 어우러짐
1. 남자와 여자의 색과 계
이미 많은 사람이 주목했듯이 영화 <색,계>의 핵심주제는 씨줄 날줄처럼 얽힌 색과 계의 어우러짐과 둘의 대립적 관계이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색과 계의 관계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인물들의 욕망이다.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색과 계의 목록을 나열하면서 그것이 인물들의 행동 속에서 어떻게 구체화되는지를 살펴보자.
다시 말하지만 색을 몸의 성적 쾌락이나 욕망으로 이해하고 계를 그것에 제약을 가하고 색을 억압하는 금지로 단순화 하는 것은 지나치게 평면적인 해석이다.(주성철, 2007a)7)
색과 계는 상호 대립적인 두 항목이 아니라 상보적 관계로 서로를 필연적으로 전제한다. 연극에서는 전체 플롯이 짜이고 플롯에 따라 인물들의 역할이 부여될 때 인물에 맞는 성격이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리고 인물의 성격과 욕망이 제대로 관객에게 소통 될 때 관객은 연극의 플롯을 이해할 수 있다.
연극을 상징계의 은유로 본다면 계의 목록으로 열거할 수 있는 것은 주로 색을 규정하는 형식적인 것, 즉 배역(위치), 규칙, 경계 등이 있을 것이고, 여기에 인물들의 행동 배경을 이루는 이데올로기와 권력적 기제를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색의 목록으로는 계에 맞는 인물의 성격, 열정, 감정, 쾌락과 고통, 사랑과 증오 등을 들 수 있다.
한마디로 계는 상징계의 법이며 색은 법에 의해 부과되고 작동되는 욕망이다. '계'를 이처럼 상징계 질서 일반인 법으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금지나 경계의 좁은 의미에 국한되지 않는다.
법은 금지 뿐 아니라 적극적인 역할에 대한 명령을 포함 한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상이하게 부과 되는 색과 계는 복잡하게 충돌하기도 한다. 영화에서 색과 계의 갈등관계를 가장 극적으로 대표하는 사람은 주인공인 이와 왕치아즈이다.
먼저 왕치아즈에 부여된 계는 '철저하게 막부인이 되라'는 항일조직의 명령에 담겨있다. 그녀에게 부과된 계는 항일조직에 대한 충성심과 철저한 자기희생을 요구하는 적극적인 계다.
왕치아즈가 임무를 완수하게 위해서는 이가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완벽하게 막부인으로 변신해야 하는데 사실 이 명령은 그 자체가 모순이고 외설적이다.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적당히 막부인의 역할을 흉내 내어서는 안 되고,8)왕치아즈의 정체성을 완벽하게 버려야 가능 하다.
그것은 그녀가 이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성적으로 욕망하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을 의미 한다. 결국 왕치아즈는 항일조직의 명령에 따르기 위해 철저하게 이를 사랑하고 그에게 사랑을 받는 막부인으로 변신해야 하지만 동시에 막부인이 아닌 조직원 왕치아즈로서의 정체성도 가져야 하는 모순적 상황에 직면해 있다.
'철저하게 막부인이 되라'는 요구는 금지로서 작용하기 보다는 '너는 ~을 해야 한다'식의 적극성과 충실성의 요구이다. 이러한 적극적 계에 규정되는 왕치아즈의 색은 앞서 말한 것처럼 연기에 대한 열정이다. 이 열정은 사실상 아버지에게도 버림받고 의지할 곳 없는 그녀의 유일한 존재이유이기 때문이다.
세 번의 정사를 거치면서 연극적 열정이 점차 이에 대한 사랑으로 바뀌지만 어디까지나 왕치아즈에게 색은 처녀성까지 포기하면서 역할에 충실하려는 연극적 열정이 그 본질이다. 왕치아즈에게 애국심, 증오, 두려움 같은 여타의 감정들은 핵심 변수가 아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왕치아즈의 욕망은 법을 통해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으려는 순수욕망이지 정념이 아니다. 존재에 대한 열정은 나중에 육체의 죽음마저 냉정한 태도로 감내하게 만든다. 채석장에서 무저갱처럼 시커먼 입을 벌린 구덩이 앞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마지막 순간에 한치의 동요도 없이 태연할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존재에 대한 순수 열정이 불러일으키는 초연함이다.
왕치아즈에게 색은 계의 완수를 위해 필요한 것이고, 계와 색의 완벽한 일치가 그녀의 역할에서는 두드러진다.
다음으로 이의 계와 색을 살펴보자, 왕치아즈의 육체(色)라는 덫이 노리는 이는 자기보존의 욕구를 유일한 지상명제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에게 충성이나 헌신, 국가주의의 거대이념 따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에게 계는 단지 스스로를 보호하는 데 충실할 것을 요구하는 경계와 금지에 가깝다. 당연히 그의 계는 왕치아즈에 비해 소극적이고, 회의적이며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 그는 아무도 믿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삼기 때문에 여자와의 사랑을 당연히 육체적 쾌락에만 국한시키고자 한다.
언뜻 보면 이 대장은 항일조직의 타도대상인 친일정부의 권력과 남성적 계를 대표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김소영, 2007b)9) 사실상 그는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고 자신의 계에 갇혀있는 외로운 사람이다. 살아남기 위해 오로지 자신만을 믿고 온통 회의에 가득 차 있는 이는 실상은 살아 있으되 죽은 목숨이다.
그의 부인이 마작 판에서 친구들에게 "그 사람은 발이 너무 차서 내가 따뜻하게 해주어야 한다니까"라고 웃으며 했던 말은 이의 처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에게 계는 '~이 되라' 혹은 '~을 욕망하라'는 적극성이 아니라 '조심하고, 의심하라', ~하지 마라'는 경계적 성격의 계다. 그러므로 경계의 계에 충실한 이의 색은 두려움의 색채를 띠며 그에게 삶은 하루하루의 힘겨운 생존투쟁에 다름 아니다.
이의 색은 왕치아즈와 달리 존재에 대한 열정이 아니라 방어적이고 폐쇄적인 동물적인 생존욕구에 가깝다. 이러한 자기중심적 태도가 이로 하여금 계가 설정한 금지를 뛰어 넘지 못하게 만든다.
이가 왕치아즈의 육체에 집착하는 것은 죽음의 불안감과 두려움을 벗어나서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고 싶은 본능적 욕구 때문이다. 그것은 방어적 쾌락이자 주인자리를 놓치지 않기 위한 몸부림으로 순수향유10)나 사랑과는 거리가 멀다. 이는 라캉이 말하는 적극적인 향유에서 소외되는 남근적 주이상스(Jouissance phallique)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인물이다. 이에게 색과 계의 관계는 팽팽한 긴장의 연속이고, 색은 어떠한 경우에도 절대로 계를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 그러나 둘의 계와 색은 만남이 지속 되고 격렬한 육체적 정사를 거치면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변화를 겪는다. 이것을 영화의 정사장면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6) 배경은 다르지만 안티고네와 <색,계>의 왕치아즈는 법에 절대적으로 복종하고 다른 정념이 없이 법이 부과한 의무를 죽음을 무릅쓰고 이행하는 순수욕망을 가졌다는 면에서 유사성이 많다.
라캉은 『정신분석의 윤리』에서 안티고네를 증오보다는 사랑을 위해 신의 길을 가는 욕망의 순수한 화신이라고 부른다.
7) 예를 들어 다음 글을 보라. "욕망을 뜻하는 색(色)과 신중을 뜻하는 계(戒)가 연결된 <색,계>라는 제목은 표면적으로는 사랑과 섹스를 뜻한다. 그렇게 <색,계>는 계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의 침울한 공기 속에서 색에 탐닉했던 두 주인공의 고통을 그리고 있다."
8) 우영감 말처럼 많은 여자스파이들이 이에게 미인계를 쓰기 위해 접근했다 발각되어 죽었는데 이것은 결과적으로 자신의 역할, 즉 계에 철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9) 김소영은 남성적인 군국주의 권력을 대표하는 노련하고 새디스트적인 이의 복잡한 계에 비해 막부인의 계는 빈약하기 짝이 없다고 비판한다. "그(이)는 비밀과 의심과 고문의 세계, 그러면서 국가의 운명(일본 제국)이라는 대서사가 지배하는 세계에 거주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사실은 이의 계가 더 빈약하다. 이는 일본제국주의에 대해서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는 가하면 자신이 몸담고 있는 중경정부의 운명에 대해서도 회의를 품고 있다. 국가의 운명이라는 대서사는 이와는 거리가 멀다. 그의 계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끊임없이 경계하고, 조심하면서 사람들을 피해 다니는 방어적 계로 왕치아즈의 계에 비해 대단히 소극적이다. 왕치아즈와 관계가 깊어지면서 사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할 수 없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10) 여기서 향유는 jouissance의 번역이다. 다양한 의미를 담고 있는 프랑스어 주이상스를 그에 상응하는 정확한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필자는 향유라는 말을 주로 사용하겠지만 문맥에 따라 원어인 주이상스를 쓰기도 하겠다. 주이상스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주이상스-금지된 충동의 힘」,『현대비평과 이론』, 185~200 쪽과『라깡 정신분석 사전』'주이상스' 430~433 쪽을 참조하라.
Ⅲ. 색과 계의 어우러짐 - 세 가지 계기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색과 계에 대해 이와 왕치아즈는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그 내용도 아주 다르다. 서로 다른 '계'의 지배를 받는 두 사람의 색은 만남이 지속 되면서 점차 사랑으로 발전한다. 그것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세 번의 정사신이다. 우리는 이것을 라캉이 상호주체성의 구조와 주체화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논리적 시간과 예측된 확실성의 단언?(Lacan, 1966: 197-213)에서 예를 들은 세 죄수의 딜레마(cf. 김석, 2007: 95-98)에 견주어 설명해볼 수 있다.
세 번의 연속된 정사 장면을 라캉이 말한 세 가지 변증법적 순간을 통해 분석할 수 있다. 정사가 거듭되면서 색의 내용이 변화하는 것은 주인공들의 대사를 통해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첫 번째 정사장면은 '응시의 순간'에 해당한다. '응시의 순간'이란 주체가 자신의 정확한 위치를 상호 주체성 구조 속에서 파악하기 위해 타자의 기표를 주체의 위치에서 응시하는 순간이다.
첫 번째 순간의 응시는 아직은 고립적인 자기 동일적 시선이다. 3년 만에 재회한 왕치아즈와 이는 서로에게 끌리면서도 여전히 마음을 완전하게 열지 못하고 있다. 이는 여자스파이들을 고문하는 안가로 왕치아즈를 데려가고 왕치아즈는 자신의 성적매력을 과시하며 이를 적극적으로 유혹하려고 한다.여기서 왕치아즈는 이에게 살해당한 전형적인 여자스파이의 모습을 보여준다. 수치심을 안기는 새디즘적 폭력을 통해 일방적으로 왕치아즈를 겁탈한 이의 행동은 왕치아즈의 진심을 확인하려는 이의 회의적 응시의 표현이기도 하다.
이의 응시는 여전히 두려움과 경계심에 가득 차있지만, 한편으로는 3년 만에 다시 만난 왕치아즈에게 끌리는 강렬한 유혹에 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정사 후 홍콩으로 떠난다고 짐을 싸는 왕치아즈에게 이는 "난 오랫동안 아무도 믿지 못했어. 진심을 말해봐. 너를 믿을게"라고 경계를 풀면서 동요하는 자신의 심정을 솔직하게 고백한다.
두 번째 정사장면은 '이해의 순간'에 해당한다.
세 죄수의 딜레마에서 보면 이해의 순간은 가장 격렬한 긴장감이 흐르는 일종의 절정에 비유할 수 있다.
죄수들은 타인의 위치에 서서 자신을 포함한 또 한사람을 객체처럼 응시하면서 타인이 가진 기표의 정체를 알려고 노력한다. 나의 위치를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타인의 입장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때문에 이해의 순간은 자기분열이 심화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요가를 연상시키는 현란한 체위 때문에 화제가 되기도 했던 두 번째 정사장면에서 이와 왕치아즈는 상대의 눈빛 속에 숨겨진 진심을 확인하기 위해 팽팽한 긴장의 끈을 놓지 않은 채 침묵 속에서 육체(色)의 언어를 격렬하게 주고받는다.
타인의 기표가 확인되는 순간 그것이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때문에 긴장의 끈을 잠시도 늦출 수 없다. 두 번째 정사이후 이와 왕치아즈는 둘 다 주체할 줄 모르는 사랑의 감정에 심하게 동요한다.
이것은 육체적 쾌락으로 표출된 색이 마음의 경계를 풀고 자아의 동일성을 뒤흔들면서 정신을 굴복 시켰기 때문이 아니다. 이해의 순간에 타인의 기표가 확인되고 타인의 응시를 통해 자신이 진정으로 막부인이 되었다는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정사이후 왕치아즈는 극장에서 왕유민을 만나 이에 대한 암살계획을 빨리 실행에 옮기라고 재촉하면서 심하게 동요한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지? 이제 나도 도대체 모르겠어."
왕유민에게 내뱉은 이 말은 왕차이즈가 자신이 막부인으로 완벽하게 변신하고 있음을 고백하는 말이다.
마지막 정사장면은 '결론의 순간'이다.
이제 의식은 다시 자기 자신에게 돌아와 앞서 확인한 타인의 기표를 통해 자신의 위치를 최종적으로 선언한다. 드디어 일어서서 행동해야 할 시간이 된 것이다.
세 번째 정사장면에서 어두움을 두려워했던 이는 연인의 시선에 주저 없이 자신의 운명을 맡긴 채 육체적 쾌락의 절정에 이른다. 이 순간 왕치아즈는 이제 자신의 임무를 충분히 완수할 수 있음을 깨닫는다.
하지만 이해의 순간은 타인의 기표를 확인하는 순간이 아니라 나의 기표, 즉 나의 위치를 깨닫는 순간이다. 정사 중 이를 암살 할 수도 있었지만 왕치아즈는 자신 역시 이를 향해 급속히 흔들리는 색에 온몸을 맡기면서 흐느껴 운다. 이 눈물은 이제 왕치아즈가 완벽하게 막부인이 되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결정적 기호이다. 세 번째 정사 후 우영감을 만난 자리에서 왕치아즈는 "그는 내 반응이 가짜가 아니란 걸 알아요. … 이러다가 사로잡히는 건 내가 되고 말거예요"라고 소리친다.
하지만 이 순간은 왕치아즈를 지배하는 계가 완성되는 순간이자 동시에 계의 폭력적인 모순성이 극적으로 표출 되는 순간이기도 하다. 왕치아즈의 정체성이 사라지고, 계에 의해 본래의 목적으로 설정된 막부인이 온전하게 자리 잡는 순간 왕치아즈 의식의 자기분열은 모순된 계의 외설적 폭력에 몸을 떨게 만든다.
왕치아즈는 완벽한 막부인이면서 동시에 막부인이 되어서는 안 되는 모순된 위치에 있는데 결론의 순간이야말로 색과 계의 조화가 깨지는 순간이다. 이제 왕치아즈에게 유일하게 남은 길은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다.
Ⅳ. 남자의 사랑, 여자의 사랑
이제 색과 계의 어우러짐과 모순적 관계를 만드는 왕치아즈와 이의 사랑의 특징에 대해 분석해보자.
색과 계의 어우러짐은 종국적으로 사랑의 형태로 구체화된다.
라캉은 사랑을 정념(passion)의 세 가지 형태(Lacan, 1966: 358)11)의 하나로 본다.
정념은 다시 나르시시즘적 정념과 존재의 정념으로 나누어진다.
나르시시즘적 정념이 이상적 자아와 그것을 상징하는 잃어버린 대상에 경도되는 상상계적 작용이라면,
존재의 정념은 태타자의 중재를 통해 작동하는 상징계적 작용이자 궁극적으로 상징계의 한계를 넘어선다.
11) 나머지 둘은 미움과 무지이다.
이하에서 우리는 라캉이 『Séminaire, Encore』에서 제시한 성차공식(Lacan, 1975: 73)을 활용하여 색계에서 드러난 남자의 사랑과 여자의 사랑을 분석해보자.
성차공식은 남녀의 논리적인 성적위치를 보여주는 도표이지만 우리는 이것을 남자와 여자의 사랑에 대입시켜 설명해볼 수 있다. 성차공식은 다음과 같다.
1. 남자의 사랑 - 나르시시즘적 사랑(narcissime-amour)
성차공식 왼편 남성주체는 남근의 기능인 거세의 법에 복종하면서 상징계에서 자신을 결여된 존재로 인정 하는 위치이다. 상징적 보편성과 그것의 가능조건인 일자의 분열 속에 위치한 남성주체는 본질적으로 존재결여에 고통을 받는 소외된 주체(S/ )다.
소외를 극대화하는 것이 바로 향유 가능성의 원천적 차단이다. 오로지 남근적 주이상스만이 허락되지만 그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향유이다. 남성적 주체는 향유의 포기를 대가로 상징계의 기표적 존재성을 보장받는다.
이것을 지젝은 남성적 주체는 'Cogito ergo sum'('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에서 '나는 존재 한다'를 선택하는 위치라고 말한다.(cf. 지젝, 2005: 172)
남성주체는 기표적 질서 속에서 자신의 존재성을 획득하고자 한다. 하지만 기표에 의해 부여되는 존재는 실제 존재가 아니라 단지 사유에 의해 설정되는 기표적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늘 허약하고, 다른 대상을 통해 자신의 결여를 채우려는 대상 의존적 속성에 지배된다.
<색,계>에서 이의 위치는 성차공식 왼편에 표기된 남성주체에 해당한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생존만을 절대적 명제로 삼으면서 주체의 자리를 악착같이 지키려는 사람이다. '나는 아무도 믿지 않는다', '나는 존재하기를 원한다'가 이의 지상명제다. 그 자리에 또 다른 주체인 타자가 들어설 공간은 없다.
이가 중경정부에서 친일파 노릇을 하는 것도 오로지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다. 자신의 존재만이 유일하게 삶의 목적이고 이의 주변세계를 이루는 군국주의 이데올로기나 중경정부의 위기는 그에게는 관심꺼리가 아니다.
이를 지배하는 사랑을 우리는 나르시시즘적 사랑으로 부를 수 있다. 이의 사랑은 본질적으로 자기중심적인 사랑일 수밖에 없다. 남성주체의 위치가 그것을 규정하기 때문이다.
남자는 부분적 결여가 전혀 없는 총체적인 일자의 환상을 좇으면서 실제의 존재결여를 필사적으로 은폐하려는 위치에 있다. 앞서 우리는 이의 계가 방어적이고, 소극적인 자기보존의 계라고 정의한바 있다.
이의 계는 정확히 주체의 자리에 집착하는 남성적 위치에 상응한다.
하지만 이의 자리는 실제로는 공허한 결여의 자리이다. 남성주체는 본질적으로 계속적인 존재결여와 불안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허약한 존재이다. 그는 살아 있으나 실상은 죽은 자이다. 진정한 존재에 대한 향유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자인 여성을 자신의 욕망 대상인 환상적인 '대상 a'(objet a)로 취함으로써 자신의 존재성을 붙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게 된다.
"그는 매번 내가 피를 흘리고 고통의 비명을 질러야만 만족해요. 그 순간에만 자신이 살아 있다고 느끼죠."
왕치아즈의 절규는 이의 이러한 절망적인 시도를 잘 보여준다.
남근적 향유는 실상은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남근의 존재를 '대상 a'를 통해 실체화하려는 기만적 향유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여인을 그 자체로 사랑할 수 없고, 그녀의 몸을 온전히 향유할 수도 없는 불행한 위치이기도 하다. 이것을 브루스 핑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팔루스(남근)적 주이상스는 우리를 실망시키는 주이상스이다. 그것은 쉽게 결핍되며 근본적으로 연인을 놓치게 되어 있다."(부루스 핑크, 2007: 283)
남자의 사랑은 남근적 주이상스를 그 본질로 삼는다. 그에게 여자란 자신의 결여를 채워주는 '대상 a''에 불과하다. 남자가 원하는 것은 여자자체가 아니라 대상화된 그녀의 몸이다.
대상화된 몸에 대한 육체적 쾌락인 색에 탐닉하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사이비 남근의 존재를 확신하면서 언제나 환상대상 너머의 '또 다른 대상'을 갈망한다. 그렇기 때문에 종국에는 자신의 사랑마저 희생하게 된다.
마지막에 왕치아즈는 이를 도망가게 만들고, 자신은 체포됨으로써 이를 구하지만 이는 자신의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 왕치아즈의 처형문서에 서명을 한다.
물론 이는 막부인을 사랑했지만 그가 막부인에게 기대했던 것은 일종의 구원이었다. 그러기에 관계가 깊어질수록 이는 막부인에게 더더욱 의존적이 되어 간다.
남근적 기능에 복종함으로써 기표적 존재성을 획득하는 남자의 사랑은 자기동일성에 지배를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통해 자신이 변화되는 것을 원치 않으며, 자신의 색과 계가 크게 흔들리지 않도록 경계(Caution)한다. 이는 왕치아즈를 사랑하면서도 세상을 향한 고립적이고, 방어적인 태도를 전혀 바꾸지 않으며, 자기희생적인 태도도 취하지 않는다.
이것은 뒤에 보겠지만 왕치아즈로 대표되는 여성의 사랑과는 크게 다르다.
왕치아즈는 이를 사랑하면서 막부인으로 완벽하게 변신하고 끝내 자신의 연인을 살리기 위해 자살 대신 기꺼이 체포되는 희생을 마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자의 사랑은 계가 설정한 방어적 한계에 머무는 소극적인 색에 이끌리는 사랑이다. 그렇기 때문에 색과 계의 갈등이 남자에게는 전혀 일어나지 않거나, 심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둘은 자주 분리된다.
색과 계의 분리는 남자가 사랑의 대상과 욕망의 대상을 분리하는 것과도 관계가 있다. 남자의 사랑이 정념에 물든 색, 즉 남근의 만족을 주는 부분적인 육체적 쾌락에 치우치는 것은 이러한 분리 때문에 가능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남자의 색은 절대로 주이상스의 경지로 승화될 수 없다. 오로지 일자의 환상만이 있을 뿐이다.
2. 여자의 사랑 - 타자적 사랑(Autre-amour)
성차공식에서 여성의 위치는 도표 오른쪽에 제시되어 있는데 여성은 한마디로 '전체아님(pas-toute)'의 논리다. 여성은 남근의 거세 기능에 완전히 복속되지 않기 때문에12) 상징계의 기표적 보편성을 얻지 못하는 대신 '개별자'(une par une)로 존재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연다. 여기에 여성 특유의 추가적인 주이상스 가능성이 있다. 앞서 설명했듯이 남성주체가 보편성의 대가로 존재결여라는 상징계적 부채를 떠안을 수밖에 없다면 여성은 상징계에 온전히 들어오지 않는 추가적인 향유를 누리는 적극적 위치에 서게 된다.
라캉은 여성주체가 누리는 향유를 타자적 향유(Jouissance Autre) 혹은 추가적인 주이상스(Jouissance supplémentaire)13)라고 말하면서 남성을 지배하는 남근적 향유(Jouissance phallique)와 구별한다.
타자적 향유는 몸에 대한 온전한 향유이기도 하다. 그것은 상징계가 부과한 계의 한계에 머무르면서 육체에 대한 쾌락에 치우치는 제한적 향유와는 다르다.
타자적 향유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향유이며, 상징계의 질서에서 빠져나가는 실재와의 조우에서가능해진다. 추가적인 향유가 가능한 것은 여자가 자신을 거세의 징표인 기표가 아니라 대타자의 결여자체, 즉 실재에 위치시키기 때문이다.
여자의 성적위치는 도표에서 S(A/)로 표기된다. 쉽게 말하면 여성주체는 남근이라는 기표에 자신의 존재성을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징계에 온전히 들어오지 못하는 대타자의 결여자체에 스스로를 동일시한다.
여자의 사랑은 이러한 타자적 향유에 지배된다.
그런데 거짓된 남근적 향유 외에 추가적인 타자적 향유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먼저 희생시켜야 한다.
여자의 사랑은 타인이 아니라 이처럼 자신의 존재를 희생시키는 사랑이다. 자신의 존재를 희생시켰기 때문에 남자를 구할 수 있는 것이 여자의 사랑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이의 마음을 온통 지배하는 것은 두려움이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암살당하지 않을까 혹시 조직에 의해 배신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자 경계심이다. 이것은 나르시시즘적 정념에 속한다.
반면에 왕치아즈는 자신의 안전에 대한 두려움이 전혀 없는데 이미 유한한 상징계의 존재성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왕치아즈가 두려움을 호소한 것은 딱 한번 뿐이다. 왕치아즈는 자신과 이가 정사를 할때 저항군이 뛰어들어 이를 죽이는 것을 볼까봐 우영감에게 소리를 지른다.
"점점 두려워져요.…마침내 그가 내 심장에 들어오는 순간 내내 구경만 하고 있던 당신들이 뛰어 들어와서 그의 머리를 쏴 버릴까봐!"
자신의 안전이 아니라 암살대상인 이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이를 위한 왕치아즈의 희생은 마지막 장면에서도 되풀이된다. 이가 도망가고 거리에 홀로 나선 그녀는 독약캡슐을 만지작거리지만 그것을 끝내 사용하지 않고 동료들과 사로잡혀 고문을 받고 처형14)되는 길을 선택한다.
왕치아즈의 희생은 그녀의 숭고한 이미지를 돋보이게 하는데 그것은 그녀가 이를 사랑하라는 계에 철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리고 계에 대한 그러한 철저함이 색과 계의 대립적 경계를 허물면서 추가적인 주이상스, 다시 말해 실제적인 향유의 가능성을 열어준다. 원래 주이상스는 금지된 욕망으로 계가 설정한 금지, 즉 상징계를 넘어설 때 생기게 된다. 그것은 죽음 속에서만 가능하다.
남자의 사랑이 색과 계의 대립적 관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유한자의 사랑이라면 여자의 사랑은 계를 통해 색을 완성하면서 그 색을 적극적인 주이상스적 사랑으로 승화시키는 숭고한 사랑이다.
라캉은 "사랑이란 욕망의 승화이다"(Lacan,2004: 209)라고 말한다. 이 사랑이야말로 자기애나 쾌락에 물든 정념이 아니라 언어적 질서에서 벗어나는 순수한 존재에 대한 정념이다.
여자의 사랑에서 또 하나 지적할 것은 여자는 남자에 대해서는 물론 스스로에 대해서도 대타자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여성이 이상적인 사랑의 대상인물(Ding)의 지위로 승격될 때만 가능하다.
"여자가 남자에 대해 타자가 되듯이 그녀 자신에 대해서 대타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남자가 여기서 중재자의 역할을 한다."(Lacan, 1966: 732)
여자는 남자가 욕망하는 이상적 대상이 되기 위해 자신의 본질적인 부분을 모두 포기한다. 영화의 첫 번째 에피소드에서 왕치아즈는 이를 유혹하는 훈련을 받기 위해 주저 없이 자신의 처녀성을 포기한다.
자신의 육신적 존재와 연관된 모든 것을 포기함으로써 여성은 물질적인 대상의 지위에서 벗어나 숭고한 형상자체로 승화 된다. 숭고한 형상이란 실제의 경험적 속성들을 벗어던지고 이상화된 모습으로 남을 때만 가능하다. 색과 계의 통합이자 풀림인 숭고는 그러므로 오로지 죽음속에서만 가능하다.
<색,계>는 왕치아즈의 처형을 알리는 종소리와 더불어 끝을 맺는다.
텅 빈 왕치아즈의 침대는 이제 그녀가 더 이상 현실의 여자가 아님을, 그래서 이의 가슴 속에 영원히 욕망의 대상으로 남게 될 잃어버린 대상이 되었음을 암시한다.
마지막 장면은 상징계의 빈공간인 여자의 본질적 위치(A/ )를 지시하면서 그녀가 이제 절대 도달할 수 없는 숭고한 사랑자체가 되었음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진정한 사랑의 대상은 이처럼 상징계의 유한성을 벗어난다.
12) La femme n'existe pas. "여성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13) 여성의 향유에 대해서는 Lacan, Encore, 'VI Dieu et la jouissance de la femmme',pp.61~71을 보라.
그리고 라캉의 성구분 이론에 대한 자세한 설명으로는 홍준기,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남자의 성, 여자의 성』, 제8장 '라캉의 성구분 이론 : 남자의 성,여자의 성' 264~323 쪽을 참조하라.
14) 가정해서 만약 왕치아즈가 자살을 했다면 정황상 이는 왕치아즈가 이와 내통한 것으로 간주되어 이는 자신의 조직으로부터 숙청되었을 것이다. 이 역시 조직에 의해 감시를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치아즈가 체포되고, 이의 명령에 의해 죽게 됨으로써 이는 자신이 왕치아즈와 연인이 아님을 조직에 입증할 수 있었을 것이다.
Ⅴ. 맺는 말
<색,계>를 통해 우리가 결론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왕치아즈로 대표되는 여성주체의 숭고함과 우위성이다. 여성이야말로 추가적인 주이상스에 도달하는 성적위치이다.
여성주체는 상징계의 법, 즉 계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그 테두리 내에서 나약한 주체성을 고수하려는 나르시시즘적 정념이 아니라 순수존재의 정념에 지배를 받으며 실재계(réel)를 향한다.
이 순수존재는 영화에서 죽음에 의해 그 실체가 형상화 된다. 여성주체의 우위성은 라캉이 성차공식을 통해 설명한 것처럼 여성이 남근적 기능에 의해 보장되는 계의 절대성 대신 상징계의 결여에 스스로를 동일시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영화에서 왕치아즈는 자기보존욕망이나 맹목적인 애국심 같은 사사로운 정념에 흔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왕치아즈는 연극적 열정으로 대표되는 존재에 대한 열정에 충실하기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하면서 계를 극한까지 밀고 가는 입장이다. 이것은 성차공식에서 여성주체가 대타자의 결여에 자신을 일치시킴으로써 추가적인 향유에 도달하는 것과 유사하다. 결국 여성이야말로 “절대적 부정성이고, 그것 때문에 주체성의 힘에 대립하는 제한된 대상이 아니라 가장 탁월한 주체이다.” (지젝, 2001: 278)
또 하나 <색,계>에서 주목할 것은 '성관계란 없다'는 명제의 정당성이다. 물론 영화의 전개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세 차례의 정사장면이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그것은 남자와 여자의 어긋난 사랑과 색과 계의 어우러짐을 보여주기 위한 영화적 장치일 뿐 사랑의 본질은 아니다.
만약 이와 왕츠아즈의 사랑에서 육체적 교감과 몸의 소통이 강조되지 않았다면 <색,계>는 그 재미와 극적 긴장감을 살리지 못하고 밋밋하게 흘렀을 것이다. 그러나 육체적 차원에서 색의 소통은 있었을지 모르지만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성관계는 아니다.
플라톤이 『향연』에서 에로스의 본질에 대해 말하면서 양성인간의 신화를 통해 사랑이란 잃어버린 반쪽을 찾아 둘이 하나가 되려고 하는 욕망이라고 정의한 것처럼 성관계의 목적은 둘이 둘로 남는 게 아니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 두 사람의 완전한 합일과 육체를 통한 사랑의 실현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위에서 본것처럼 두 사람의 계는 차원과 내용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이상스로 향하는 여자의 사랑과 정념을 벗어나지 못하는 남자의 사랑은 계속해서 어긋나기 마련이다.
욕망과 마찬가지로 영원히 충족되지 않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다. 사랑이란 자신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그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사랑의 운명은 영원히 하나가 되지 못하게 만드는 둘 사이의 공백을 헛되이 채우려는 비극일 수밖에 없다.
참고문헌 - 제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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