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마음가짐
- 사무량심 -
The Four Sublime States
(Brahma Vihaara)
냐나뽀니까 스님 지음
강 대 자 행 옮김
Nyanaponika Mahathera (The Wheel Publication No.6)
차례 들어가는 말
부처님께서 설하신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은 다음과 같다.
이 네 가지 마음가짐이야말로 중생을 대하는데 있어 올바른 자세일 뿐만 아니라, 가장 이상적인 자세이기도 하기에 `훌륭하다' 또는 `거룩하다'고 일컫는 것이다. 실제로 이 네 가지 마음가짐은 사회생활에서 일어나는 온갖 상황들을 원만하게 해결해준다. 실로 이러한 마음씨들이야말로 일체의 긴장을 풀어주는 훌륭한 완화제이며, 사회적 갈등을 해소시키는 훌륭한 중재자이며, 생존경쟁에서 입은 상처를 치료해주는 훌륭한 치유자이다. 사회적 장벽을 헐어내는 평등의 구현자이며, 조화로운 공동사회의 건설자이다. 까마득히 잊혀진 채 잠자고 있는 관용정신을 긴 잠에서 일깨워내는 자이며, 오래 전에 포기해버렸던 기쁨과 희망을 소생시키는 자이다. 또 자기중심주의의 거센 힘에 맞서 인간의 우애를 증진시키는 주도이기도 하다.
이 마음씨들은 미워하는 마음씨와는 양립될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증오를 모른다는 저 `범천'과 매우 흡사하다고 하겠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반적으로 신이 성을 낸다든지, 진노한다든지, 질투한다든지, `정의로운 분노'를 나타낸다는 식의 표현을 신앙심 깊은 신도들까지도 예사로 입에 올리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성낼 줄 모르는 신'이라고 하는 저 범천의 개념은 얼마나 유익한 것인가. 행동과 명상을 통해 이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을 열심히 닦는 사람은 범천과 같은 사람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 마음가짐들이 마음의 주류를 이루게 되면 다음 생(生)에는 천상의 범천세계에 태어나게 된다. 그래서 이 마음씨들을 `신과 같다' `범천과 같다'고 하는 것이다.
또 이들을 두고 거주처[住]라 부르는 까닭은, 이 마음씨들이, 언제나 우리 마음이 거기서 편안을 누릴 수 있는 마음의 상주처가 되어야 하며 어쩌다 잠시 들렀다가 곧 잊어버리고 마는 그런 뜨내기 처소로 남아서는 안된다는 뜻에서이다. 달리 표현하자면 우리 마음은 이 거룩한 마음씨들로 충만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평생 내내 이들 마음씨는 우리의 떨어질 수 없는 동반자가 되어야 하며, 모든 일상활동 속에서도 이 네 가지 정신적 태도와 관련된 일일 때는 어떻게 해서든 그 마음가짐을 `잊지 않고 지켜'[正念]나가야 한다. 저 자애의 경(mettaa sutta) *주3 에 나오듯,
"서 있을 때나 걸을 때나 앉아있을 때나
`사랑' `동정' `환희' `평온'의 네 가지 마음가짐은 또 `가없는 마음상태[無量心, appama~n~naa]'라고도 한다. 그것은 이 마음씨들이 완성되어 그 본성을 충분히 발현하게 되면, 작용하는 범위가 어떤 대상들에 국한되는 법이 없이 모든 존재에 두루 미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마음씨들은 결코 배타적일 수 없으며, 치우칠 수 없으며, 선택적 편애나 편견 때문에 구애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저 범주처의 가없는 무량함을 성취한 마음이 어떻게 국가적, 인종적, 종교적 또는 계급적 증오를 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네 가지 훌륭한 자질을 한량없고 막힘 없이 쓸 수 있게 되려면 우리는 이러한 자질과 대단히 친숙해져 아주 자연스러운 사이로 만들지 않으면 안된다. 만일 억지로 애를 써서 일일이 이런 자질을 적용시키려 든다면 한없이 적용시켜 나가기도 힘들뿐더러 끝내는 어느 정도로든 또 어떤 형태로든 편파성을 띠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대부분 사람들의 경우, 이 네 가지 자질과 친숙해지기 위해선 이들을 단순히 행동원칙이나 숙고의 대상으로 삼는데 그치지 말고 더 나아가 체계적인 명상의 주제로 삼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와 같은 명상을 `범주처 계발(Brahmavihaara-bhaavanaa)' 즉 `거룩한 마음을 닦는 명상 수행'이라 부른다. 이 수행을 하는 실제적인 목적은 이들 네 가지 거룩한 마음씨에 힘입어 선(禪, jhaana) *주4 이라는 고도의 정신집중 단계를 성취하는 데 있다.
자애나 동정, 환희에 대해 명상을 할 경우에는 모두가 네 가지 선[四禪] *주5 가운데 제 삼선까지를 성취할 수 있는데 반해, 평온을 주된 요소로 명상을 하면 제 사선(四禪)까지 도달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끊임없는 선정수행만이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훌륭한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 첫째는, 이 네 가지 자질을 마음속 깊이까지 배이게 하여 쉽게 무너지지 않으리만큼 안정된 자연스런 태도로 정착시키는 일이다.
둘째는, 이 네 가지 마음가짐의 원 속성인 무량한 성질을 이끌어내고 확실하게 하여 일체를 포용하는 포괄성으로 작용하게끔 만드는 일인데, 특히 이 일은 선정수행만이 해낼 수 있다. 사실 불경에서 사무량심 닦는 법을 상세히 설명할 때도 그 주안점은 이들 거룩한 마음상태의 가없이 큰 성질을 점차적으로 펼쳐 나가는 데 두고 있다. 즉 이들 거룩한 마음을 선택된 특정인물이나 장소에만 적용하도록 제약을 가하는 모든 장벽을 체계적으로 무너뜨려 나가는 것이다.
선정수행을 할 때 `사랑' 등 네 가지 마음씨를 기울일 대상인물의 선택은, 쉬운 대상부터 시작해서 점차 힘이 드는 대상에로 나아간다. 예를 들어 사랑에 대해 명상할 경우, 자기 자신의 안녕을 바라는 것에서 시작하여 이를 기준점으로 삼아 점차적으로 사랑을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다. "내가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해지고 싶듯이 `저' 사람도 또는 `모든 중생'도 똑같이 행복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기를!"하는 식이다. 그리고는 그 사랑의 생각을 자기가 평소에 사랑하면서 존경하는 사람, 예를 들어 은사 같은 분에게로 향하게 한다. 그 다음에는 애지중지하는 사람에게, 다음에는 그렇고 그런 사이의 사람에게로….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적대하는 사람(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면)이나, 미워하는 사람에게까지 확장시켜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성이나 죽은 사람은 택하지 말아야 한다. 이처럼 사랑의 생각을 미운 사람에게까지 쏟아붓는 힘든 일을 잘 해낼 수 있게 되면 그 다음엔 이들 네 가지 형의 사람들 사이에 `차별의 벽을 헐어내야' 한다. 그래서 조금도 차이를 두지 않고 그들 모두에게 똑같이 자기의 사랑을 뻗쳐야 한다. 공부가 이 단계에까지 가면 수행자는 이미 높은 정신집중단계에 도달하여 있을 것이다. 즉 정신적인 상사영사(相似影像) *주6 이 나타남과 더불어 근접삼매(upacarasamaadhi) *주7 에 도달하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면 초선(初禪)이라는 `본 삼매 (appanaa-samaadhi)'에 이르게 된다. 이런 식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공간적인 확장의 경우에도 수행자는 처음엔 자기의 바로 주변(가족 등등)에서부터 시작한다. 다음엔 이웃집들, 거리전체, 시내, 지방, 나라전체 등으로 확장시켜 나간다. 또 `방향을 따라 생각을 펼쳐 나가는 방법(disaa-pharana)'을 취할 경우, 처음엔 동쪽으로, 다음엔 서쪽, 북쪽, 남쪽, 각 간방(間方), 하늘위, 땅밑의 순으로 사랑의 생각을 펼친다.
똑같은 실천방식을 `동정' `환희' `평온'을 주제로 한 명상계발에도 적용시킨다. 다만 대상인물을 고르는 순서에서만 적절한 변경을 가하면 된다. 자세한 수행법은 이 들어가는 말 끝 부분에 붙인 경을 읽으면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범주처선(梵住處禪)이 얻고자 하는 궁극적 목표는 모든 현상의 참 성품이 무상하며[無常], 괴로움으로 변하기 마련이며[苦], 실체가 없는 것[無我] *주8 임을 여실(如實)히 꿰뚫어보는 통찰력 즉 해탈을 실현시키는 `관(觀, vipassanaa)' *주9 을 위해 확고한 기반이 될 수 있는 마음상태를 이루는데 있다. 사실 `거룩한 마음가짐(無量心)'을 연(緣)으로 하여 선(禪)을 성취한 마음은 순결하고 고요하고 확고하고 침착하며, 조잡한 이기심을 벗어난 마음일 것이다. 그런 마음이 되어야만 해탈이라는 최종적 과업, 위빠싸나[觀]에 의해서만 마무리될 수 있는 그 과업을 수행할 준비를 제대로 갖추고 있는 것이다.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의 궁극목표는 이 정도로 간략히 살펴보는데 그치고 거룩한 마음씨들 자체의 의의를 살피고자 했던 본래의 의도로 되돌아가기로 하자.
앞서 한 얘기로 이미 짐작하였겠지만,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을 계발하는 데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첫째는 일상의 실제행위와 사고를 그런 방향으로 돌리도록 애쓰는 방법이고, 둘째는 선정을 목표로 체계적인 수행을 하는 방법이다. 이 두 길은 상호보완 관계에 있다는 것도 알게 될 것이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체계적으로 명상수행을 하면,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다가 사랑·동정·환희·평온을 필요로 하는 상황에 마주칠 때마다 이들이 자동적으로 발현되게끔 만들 수 있다. 또 실제로 생각과 말과 행동 속에 이들 네 가지 고귀한 자질을 관철해내기가 힘겹도록 만드는 저 수없는 인생사(人生事)의 도발을 견뎌낼 수 있게끔 우리 마음을 더욱 강하고 침착하게 만드는 데도 큰 도움이 된다.
또 거룩한 마음가짐이 주는 축복과 그 반대 성질의 마음가짐이 주는 위험에 대해서 거듭 숙고해보는 것도 선정수행의 성공적 발전에 기여할 것이다. "어떤 것을 두고 오랜 시간에 걸쳐 재삼 숙고하다보면 자연히 그 일에 마음이 기울어져 의욕도 생겨나게 마련이다." 다음 이어지는 글을 독자들에게 마련해드리는 것도 주로 이런 의도에서다. 이 글을 거듭 음미해보는 동안 독자들이 `범천의 주처'라는 숭고한 고지를 향하여 굳게 마음을 정해서 탐·진·치 삼독심으로부터 최종적으로 해탈하는 길을 나아갈 준비가 되기를 기원하여 마지않는다.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기를!
Ⅰ 비구들이여, 여기 한 수행자가 사랑에 충만한 마음으로 세상의 네 방향 중 한 방향을 가득히 채우고 있다. 또 제2, 제3, 제4의 방향을 채우고, 위와 아래 그리고 두루 주위를 채우고 있다. 그는 풍부하고 성숙한, 무량하며 적의가 없는, 그리고 근심이 가신, 사랑에 충만한 마음으로 온 세계 곳곳을 한결같이 채우고 있다. Ⅱ 비구들이여, 여기 한 수행자가 동정으로 충만한 마음으로 세상의 네 방향 중 한 방향을 가득히 채우고 있다. 또 제2, 제3, 제4의 방향 *주11 을 채우고, 위와 아래 그리고 두루 주위를 채우고 있다. 그는 풍부하고 성숙한, 무량하며 적의가 없는, 그리고 근심이 가신, 동정으로 충만한 마음으로 온 세계 곳곳을 한결같이 채우고 있다. Ⅲ 비구들이여, 여기 한 수행자가 기꺼움에 충만한 마음으로 세상의 네 방향 중 한 방향을 가득 채우고 있다. 또 제2, 제3, 제4의 방향을 채우고, 위와 아래 그리고 두루 주위를 채우고 있다. 그리고 두루 주위를 채우고 있다. 그는 풍부하고 성숙한, 무량하며 적의가 없는, 그리고 근심이 가신, 기꺼움에 충만한 마음으로 온 세계 곳곳을 한결같이 채우고 있다. Ⅳ 비구들이여, 여기 한 수행자가 평온으로 충만한 마음으로 세상의 네 방향 중 한 방향을 가득히 채우고 있다. 또 제2, 제3, 제4의 방향을 채우고, 위와 아래 그리고 두루 주위를 채우고 있다. 그는 풍부하고 성숙한, 무량하며 적의가 없는, 그리고 근심이 가신, 평온으로 충만한 마음으로 온 세계 곳곳을 한결같이 채우고 있다.
Ⅰ 사랑은
사랑은
사랑은
사랑은
사랑은
사랑은
사랑은
그러나 사랑은
오히려 사랑은
사랑,
사랑,
그렇다면 그것은 세상은 괴로움에 허덕이고 있다.
완고하고 편협해서야 어떻게 보다 높은 목표를 향해 노력해볼 수 있겠으며, 그 무거운 빗장을 벗겨내고,
남을 동정하는 마음이 있음으로 인해, 동정하다 보면
보라!
그렇다.
그러기에 지금 한때 행복할지는 몰라도
동정,
동정,
그것은
그대 마음을 열어 남의 행복을 자기 것처럼
사람들에게 참된 기쁨을 가르쳐 주자! 고상하고 거룩한 기쁨은
고상하고 거룩한 기쁨은 남의 기쁨이 거룩하고 고상한 것일수록
더불어 기뻐함, 더불어 기뻐함, 그렇다면 더불어 기뻐하는 환희심을 나타내는 최상의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관(통찰력)을 바탕으로 완전하고도 요지부동한 균형을 이룬 마음, 그것이 바로 평온함이다. 밖으로 우리 주위를 돌아보고 안으로 우리 마음을 들여다볼 때, 마음의 균형을 이루고 또 이를 유지해낸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분명히 알 수 있다.
삶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인생이란 것이 서로 상반되는 것들 사이를 끊임없이 왕래하는 변화무쌍한 성질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생기고 멸하고, 성공하고 실패하고, 잃고 얻고 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영예와 오욕을 겪기도 한다. 그럴 때, 우리 마음이 그 모든 것에 대해 일일이 행복과 슬픔, 환희와 절망, 실망과 만족, 희망과 공포로 반응하는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이러한 감정의 파도는 우리를 위로 높이 밀어올렸다가는, 아래로 내동댕이쳐 버린다. 어쩌다가 조금 안정이 되는가 하면 어느새 새로운 파도에 휘말려 들게 된다. 이 파도의 물마루 위에 우리는 과연 발판을 굳힐 수 있을 것인가? 우리의 삶이라고 하는 이 건물을 저 영원히 출렁거리는 존재의 바다 한가운데 세울 수 있겠는가. `평온이란 섬' 위에 세우는 길 말고 달리 무슨 수가 있겠는가?
세상이란, 중생들이 자신에게 배당된 그 조그만 행복조차도 수없는 실망과 좌절, 패배의 쓴맛 끝에 간신히 얻게 되는 그런 곳.
새로 시작하고, 또 시작하여, 거듭거듭 새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만이 성공을 약속해주는 곳, 이 세상. 질병, 이별, 죽음 가운데 기쁨이 어쩌다 드문드문 자라는 곳, 이 세상. 조금 전까지도 우리와 더불어 기쁨을 나누던 사람이 다음 순간엔 우리의 동정을 구하여 오게 되는 것, 이 세상.
그러나 우리가 필요로 하는 평온은 무관심한 둔감에 기인하는 태평이 아니라 또렷한 정신에 입각한 평온이어야만 한다. 그것은 스스로 자취한 고된 훈련의 결과이어야지 결코 지나가는 기분의 우연한 산물이어서는 안된다. 또 우리가 거듭 억지를 써가며 유지해내는 평온이라면 그것은 평온이라 부를 수 없다. 그런 식으로는 인생의 우여곡절을 견디어내지 못하고 결국 붕괴되고 말 것이 틀림없다. 참 평온이라면 이 모든 벅찬 시련을 감당해낼 수 있어야 하며, 소진된 힘을 스스로 내부의 원천에서 다시 채울 수 있어야 한다. 이처럼 저항력과 자체 갱생력을 지닌 평온이 되려면 그것은 관(위빠싸나)에 뿌리를 둔 평온이 아니고선 안될 것이다. 그럼 그 `관'이란 어떤 성질의 것인가? 그것은 삶의 우여곡절의 원인과 그러한 곡절을 겪는 소위 개체라는 것의 참된 성질을 분명히 파악하는 것이다.
우리는 삶이라 불리는 수많은 경험들이, 금생이나 전생에 저지른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비롯된 것임을 반드시 이해해야만 한다. 업(행동)은 현재 우리들이 겪고 있는 경험이 나온 모태이다. 우리는 자기가 저지른 행위에 대해선 좋든 싫든 책임을 지지 않으면 안되는 `주인'인 것이다. 그런데 이 행위를 행하자마자 우리는 그 행위에 대한 제어력을 대부분 상실해버리고 만다. 행위는 온 세상을 제멋대로 휩쓸고 다니다 나중에서야, 우리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간에 아랑곳없이, 당연히 받아들여야 되는 상속물로서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것이다.
우리 신상에 일어나는 어떤 일도 결코 우리를 적대시하는 `바깥' 세계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은 우리 자신의 마음과 행동의 산물인 것이다. 이렇게 아는 지혜야말로 평온에 이르는 첫 발판이니 우리는 이 지혜로 인해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닥치는 일에서 결국 만나게 되는 것은 자기자신이다. 그러니 무엇을 두려워하겠는가? 그래도 혹시 불확실성에 대한 두려움이 일어날 경우 우리는 그 두려움을 가라앉혀 줄 피난처를 알고 있다. 자신의 선행(善行)이 바로 그곳이다. 여기에 피난하면 어떤 확신이 마음속에서 자라날 것이다. 과거에 지은 선업이 우리를 방어해주는 힘을 갖고 있다는 데 대한 확신이. 그렇게 되면 새 용기가 우러나서 우리를 좌절시키려드는 현세의 고난을 이겨내고 바로 지금 이 순간 더 많은 선행을 닦도록 우리를 격려해줄 것이다.
이미 우리는 운명이 주는 격심한 타격을 막아내는 최선의 방어가 바로 고상하고 욕심이 없는 행위란 걸 알고 있으며, 또한 우리는 선한 행위를 행하는 데는 매 시간이 다 최적기이며, 어느 때도 결코 너무 늦지는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선한 일을 하고 악한 일을 피함으로써 그 피난처가 우리 마음속에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면 어느 날인가 우리는 마침내 "과거에 연유된 악과 비참은 점점 끝나가고 있다. 그리고 지금 현재의 이 생활을 결함이 없고 청정한 것이 되게끔 노력하고 있다. 미래가 가져올 것이라야 선(善)의 증장 말고 달리 무엇이 있겠는가?"하는 확신감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확신감에서부터, 현실이 초래하는 모든 역경을 감내해낼 수 있는 마음의 차분함이, 그리고 인내력과 평온이 생겨날 것이다. 그때서야 우리가 하는 일이 모두 우리의 친구가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지은 업의 결과로 인생살이에서 겪게 되는 별별 사건들도 그것이 비록 슬픔과 고뇌를 안겨주는 한이 있어도 그 모두가 역시 우리의 친구가 될 것이다. 우리의 행위가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모습이 때로는 변장을 하고 있어서 알아보기 어려운 경우도 가끔 있다. 어떤 때는 우리가 행한 행위가 타인으로부터 예상 밖의 엉뚱한 반응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또 어떤 때는 우리가 기대한 것과는 다르게, 심지어는 뜻한 바와는 정반대로 발전하여 우리 생활을 밑바탕에서부터 뒤흔들어버리는 수도 있다.
이런 경험을 통해 우리는 자신의 행위가 가져오는 바 전혀 예기치 못했던 결과를 바라보게 된다.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의외의 결과일까? 사실은 그 행위 당시에 우리가 엉뚱한 이유를 둘러대면서 자신에 대해서마저 숨기려들었던 반의식적(半意識的) 동기가 이제 더이상 감출 수 없는 결과로서 분명히 노정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런 각도에서 사물을 보는데 익숙해지면, 그리고 우리 자신의 경험이 전해주는 메시지를 읽을 줄 알게 되면, 그땐 고(苦)마저도 우리의 친구가 될 것이다. 준엄하고도 진실한, 호의적인 친구가 되어 우리를 가르쳐주고 경고해줄 것이다. 고(苦)는 우리에게 제일 어려운 과제, 즉 자기자신을 아는 지혜를 가르쳐준다.
그리고 또 우리가 무모하게 다가가고 있는 파멸의 심연에 대해서 경고해준다. 고를 스승으로, 친구로 바라보게 되면 우리는 평온하게 고를 버텨내는 일을 더 원만히 해낼 수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업에 대한 가르침(우리가 지금껏 한 얘기가 바로 업의 이론이다.)이야말로, 업 그 자체로부터 해방시켜주는, 다시 말해 우리를 거듭거듭 재생[輪廻]의 고통 속으로 밀어넣는 저들 행위로부터 벗어나도록 만들어주는 강력한 추진력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의 힘을, 우리의 저항을, 우리의 평온을 끊임없이 파괴하려드는 상황이 다름 아닌 우린 자신의 갈애와 우리 자신의 미망이 끊임없이 조성해내는 것인 줄 알았을 때, 그 갈애와 미망에 대해 어찌 넌더리를 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평온의 기반이 되는 두 번째 통찰은 바로 부처님이 설하신 무아(無我, anattaa)의 가르침이다. 이 교의는, 궁극적인 의미에서 행위는 결코 어떤 자아 또는 인격체가 행한 것이 아니며 또한 그 행위의 결과가 자아나 인격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친다. 더 나아가 결국 `자아'란 것이 없을진대 `나의 것'이라는 말도 성립되지 않는다는 가르쳐준다. 고를 만들어내는 것도 또 평온을 방해하거나 교란하는 것도 모두 자아라는 미망일 따름이다. 가령 우리의 이러저러한 자질이 비난을 받으면 그는 `내가 비난받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평온이 흔들린다. 이런저런 일이 성공을 못하면 `나의 일이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평온이 흔들린다. 재산을 잃으면 `내 것이 없어졌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평온이 흔들린다.
평온을 요지부동한 마음상태로 확립하기 위해선 일체의 `내 것'이라는 소유적 관념을 점차적으로 버려나가지 않으면 안된다. 처음엔 용이하게 떨쳐낼 수 있는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온 마음을 기울려 집착하고 있는 재산과 목표에 이르기까지. 그런 다음엔 우리는 점차적으로 `자기'라는 생각마저도 모두 버려야 한다. 처음엔 자기 `인격'의 작은 부분, 중요치 않은 자질, 스스로 쉽게 알아챌 수 있는 사소한 약점 따위에서 시작하여 마침내는 자기 `자아'의 중심이라 간주되는 정동(情動) *주14 과 혐오(aversion)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떨쳐내는 공부를 해나가야 한다.
`내 것' 또는 `자기'라는 생각을 버린 그만큼 평온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와 그 자리를 메꾸어준다. 생각해보라. 그것이 욕망에서 나온 것이든, 증오에서 또는 비탄에서 나온 것이든 간에 이미 우리와 무관할 뿐 아니라 그 자체도 자아가 없는 공허한 것인 줄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데, 어떻게 그것이 우리 마음을 휘저을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무아의 가르침은 해탈로 나아가는 길, 성스러운 평온으로 나아가는 길에서 잠시도 우리 곁을 떠나서는 안될 안내자이다.
평온은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의 절정이자 그 극치이다. 그렇다고 평온을 `사랑' `동정' `환희'를 부정한다거나 그것들을 하찮은 것이라 하여 돌아보지 않는다는 뜻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전혀 그렇지 않다. 평온은 이 세 가지를 배척하지 않고 수용하여 그것들 속에 골고루 스며들어간다. 마찬가지로 완전한 평온은 이 세 가지로 속속들이 배어있다.
그럼 이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은 어떻게 서로간에 스며들어 가득히 채우는가. 가없는 `사랑'은 `동정'이 편파적으로 흐르지 않도록 지켜주고, 취사선택하여 차별대우하는 일이 없도록 막아준다. 그럼으로써 한쪽을 동정하는 데 치우친 나머지 그 반대쪽에 대해 부당하게 편파적 태도를 취하거나 혐오감을 품는 일이 없도록 돌봐준다.
`사랑'은 `평온'에다 자신의 속성인 비이기성과 무제한성을, 심지어는 열렬함마저 불어넣어준다. 왜 열렬함이 필요한가하면 제어되어 변형된 열렬함은 완전한 평온의 한 부분이 되어, 평온에다 날카로운 통찰력과 현명한 억제력을 강화시켜 주기 때문이다.
`동정'은 `사랑'과 `환희'가 잠시 한정된 행복을 즐기거나, 이를 남들에게 나누어주는 동안에도 이 세상엔 끔찍한 고가 여전히 엄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시켜준다. `사랑'과 `환희'의 행복이 끝없는 불행과 공존한다는 사실, 어쩌면 문 밖에 나서는 순간 바로 그 불행과 마주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 `동정'은 `사랑'과 `환희'에 대해서 이 세상엔 그들이 어루만져주기엔 너무 벅찬 많은 고가 있다는 사실을 환기시켜 준다. 또 어루만져줌의 효과가 사라지면 곧 슬픔과 고통이 다시 되살아날 것이 확실하며, 이런 현상은 일체 고가 완전히 근절되는 열반의 성취까지는 내내 계속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는 역할을 한다. `동정'은 `사랑'과 `환희'가 이 세상의 좁은 부분에만 국집하여 더 넓은 세계를 외면하게끔 버려두지 않는다. `동정'은 `사랑'과 `환희'가 작고 보잘것없는 행복에 안주하여 거기에만 마음쓰면서 자기만족에 빠져드는 것을 방치하지 않는다. `동정'은 `사랑'이 그 영역을 확대하도록 각성시키고 격려해준다. `동정'은 `환희'가 새로운 자양분을 찾도록 각성시키고 격려해준다. 그럼으로써 이 둘이 진짜 무량한 마음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준다.
`동정'은 `평온'이 차가운 무관심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보호하고 또 나태하거나 이기적인 고립으로 변질하지 않도록 지켜준다. `평온'이 완성단계에 이를 때까지 `동정'은 `평온'이 사바세계의 싸움터를 외면하지 않고 거듭거듭 잘 살펴보도록, 그래서 더 단련되고 강화되어 그 시련을 견딜 수 있도록 격려한다. `환희'는 `동정'이 이 세상에 가득 찬 고의 광경에 완전히 압도되지 않도록, 또 거기에 휘말린 나머지 다른 모든 것을 돌아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지켜준다. `환희'는 마음의 긴장을 풀어주고 고통스럽게 불타는 연민심을 진정시켜준다. `환희'는 `동정'이 목적을 잃고 우울에 잠기지 않도록, 또 괜히 정진의 힘을 약화, 소모시키기만 하는 쓸데없는 감상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준다. `환희'는 `동정'을 능동적 공감으로 발전시켜준다. `환희'는 `평온'에게 그 엄숙한 모습을 풀도록 온화함을 준다. 그것은 부처님의 얼굴에 보이는 저 성스러운 미소이다. 이 세상 고를 속속들이 알면서도 여전히 변함없는 그 미소, 위안과 희망과 겁없음과 확신을 주는 그 미소, 그 미소는 말해준다. "해탈에의 문은 활짝 열려있다"고.
통찰에 근거한 `평온'은 다른 세 거룩한 마음가짐에게는 안내역할을 하며 자제를 돕는다. 그들이 가야할 방향을 지시해주고 또 그 방향이 꼭 지켜지도록 애써준다. `평온'은 `사랑'과 `동정'이 헛된 시도에 정력을 낭비하거나 무절제한 감정의 격류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해준다. `평온'은 최종목표 달성을 위한 빈틈없는 자제이다. 따라서 `환희'가 조그마한 성취에 만족하여 우리가 추구해야 할 진정한 목표를 잊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지켜준다.
`상황에 동요되지 않는 차분한 마음(evenmindedness)'을 뜻하는 `평온'은 `사랑'에 대해 한결같은, 변함없는 확고함과 충실함을 제공한다. 사랑에게 참을성이라는 위대한 덕성을 부여한다. 또 평온은 `동정'이 한결같은, 흔들림이 없는 용기와 대담성을 갖도록 해주어 무량한 `동정'이 거듭거듭 당면하게 될 비참과 절망의 무서운 심연에 맞설 수 있게끔 해준다. 또 `동정'의 활동면에 대해선, `평온'은 지혜롭게 운전하는 차분하고도 확고한 손이 되어준다. 남을 돕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기술이 아니므로 지혜가 없이는 뜻과 같이 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 여기서도 평온은 참을성을, 즉 `동정'하는 일에의 참을성 있는 헌신을 의미한다.
아무튼 여러모로 따져보아 `평온'은 다른 세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의 정점이자 극치를 이룬다고 말할 수 있다. 앞의 세 마음은 `평온'과 그 평온에 내재하는 통찰력에 결부되지 못하면 안정장치의 결여로 인해 점차 감소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어떤 덕성이든 그를 확고하게 해주거나 아니면 유연하게 해주는 다른 자질에 의해서 도움받지 못하고 고립되면, 퇴색해버리거나 그 자체의 특유한 결함 속에 빠져버리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자애는 정진력과 통찰력을 겸비하지 못할 때 한낱 나약하고 신뢰할 수 없는 감상적 착함으로 기울어져버리기 쉽다. 더욱이 이런 고립된 덕성은 사람으로 하여금 원래 가졌던 자신의 삶의 목표와 정반대방향으로, 또 타인들의 안녕에도 배치되는 방향으로 가게끔 만드는 수가 많다. 이처럼 고립되기 쉬운 덕성을 유기적이고도 조화로운 전체성으로 굳게 결합시켜 각각의 자질이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또다른 자질들의 협조를 받아 각기 특유한 약점이 만든 함정에 빠져들지 않도록 지켜주는 역할을 그 사람의 굳건하고도 균형잡힌 인격성만이 할 수 있다. 이러한 역할을 수행하고, 그래서 네 가지 거룩한 마음가짐 사이에 이상적인 관계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것, 그것이 바로 `평온'의 기능인 것이다.
`평온'은 통찰에 입각한 완전하고도 요지부동한 마음의 균형을 말한다. 그럼 `평온'은 어떤 식으로 완전하고 요지부동한가?
`평온'에선, 정체시키는 것은 무엇이나 녹아 없어져 버리고 가로막는 것은 제거되며 방해하는 것은 파괴된다. 여기에선 감정의 소용돌이도 지성의 배회도 사라진다. 순수하고 광휘에 차 의식은 고요하고도 장엄하게 거침없이 흘러간다. 여기서는 빈틈없는 정념[正念, sati]이 지혜(pa~n~naa)의 꿰뚫는 날카로움과 신심(saddha)의 따뜻함을 조화시키고 있다. 정념은 또 의지력(viriya)과 마음의 고요(samaadhi)를 균형잡아 놓는다. 그리고 이 다섯 개의 내적인 기능(indriya) *주15 은 내적 힘(bala) *주16 으로 성장했기에 다시는 잃어버릴 염려도 없다. 이 다섯 힘은 이젠 더이상 이 세상의 미로(윤회, samsaara) 속에서, 생명의 끝없는 확장(papa~nca) 과정에서 길을 잃고 헤매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잃어버리게 될 위험이 없다. 분명히 이들 내면의 힘은 마음에서 퍼져나가 세상에 대해 작용을 가하지만, 정념에 의해 지켜지기 때문에 어디에도 붙박지 않고 고스란히 되돌아온다.
다시 `사랑' `동정' 그리고 `환희'는 계속 마음에서 발산하여 세상에 작용을 가한다. 그러나 `평온'에 의해 지켜지고 있으므로 어디에도 집착하지 않고 조금도 약화되거나 때묻지 않은 채 마음으로 되돌아온다. 이래서 성자는 아무리 베풀어주어도 내면에서 무엇이 줄어드는 일이 없으며, 그의 지적(知的), 정적(情的)인 풍요를 남에게 몽땅 쏟아주어도 그 때문에 가난해지지 않는다. 마치 흠이라곤 전혀 없는 투명한 수정이 모든 광선을 완전히 흡수하여 그 집중력으로 한층 강화시켜 되돌려보내면서도 조금도 얼룩지지 않는 거소가 같다. 어떤 광선도 그 색깔로 수정을 물들일 수 없다. 광선은 수정의 견고함을 무너뜨릴 수 없고 그 조화로운 구조를 흐트러뜨릴 수도 없다. 수정은 조금도 변함없이 그 완벽한 순도와 힘을 보존하고 있다. "마치 온 세상의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고 온 하늘의 물이 비가 되어 바다로 내려도 대양은 조금도 늘거나 줄어드는 일이 없는 것과 같이" - 바로 `성스러운 평온'의 성질이 그와 같다.
`성스러운 평온', 달리 서양식으로 표현하여 `성스런 평온을 부여받은 성자'는 이 세상의 내면적인 중심이다. 하지만 이 내면적 중심은, 저 수도 없이 많은 유한한 영역들이 외견상의 중심들과는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소위 `인격'이라든가 통치법률이라든가 등등. 이 모든 것들은 단지 외견상의 중심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것들의 영역은 제행무상의 법칙에 따라 언제든 그 구조의 총체적 변천을 겪지 않을 수 없고 그 결과 물질적 또는 정신적 무게 중심(重心)이 이동하게 되면 더이상 중심의 구실을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인의 평온이라는 내면적 중심은 불변이기 때문에 요지부동이다. 그것은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불변인 것이다.
조건지워진 것에는 움직임이 존재한다. 그러나 조건지워지지 않은 것에는 움직임이 없다. 움직임이 없는 곳엔 정적(靜寂)이 있다. 정적이 있는 곳에 갈애는 없다. 갈애가 없는 곳엔 감도 옴도 없다. 감도 옴도 없는 곳엔 생김도 사라짐도 없다. 생김도 사라짐도 없는 곳엔 이 세상도 저 세상도, 그 중간 상태도 없다. 이것이 바로 고의 끝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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