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김대식

존재는 왜 존재하는가

rainbow3 2019. 9. 17. 12:08

현대물리학이 답하길…無는 불안정하니까!

 

김대식의 'Big Questions' ① 존재는 왜 존재하는가

 

 

 

 

1 137억년 전의 빅뱅(우주탄생)의 흔적을 알려 주는 WMAP 위성의 우주배경 미세 온도차이 지도.

2 고대 인도인들은 거대한 코끼리 거북 뱀이 세상을 받치고 있다고 믿었다.

 

 

눈을 뜨고 세상을 보면 수많은 것들이 보인다. 책상, 내 몸, 구름. 그런가 하면 보이지 않아도 생각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π(원주율), 힉스 입자, 완벽한 원. 그리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내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들도 있다. 자아, 기억, 사랑. 이 모든 것들에겐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무슨 이유로 존재하는 것인가? 존재는 왜 존재하는가?

우선 ‘나’부터 시작해 볼 수 있다. 나는 왜 존재하는가? 내 존재의 원인은 물론 나의 부모님일 것이다. 그리고 내 부모님은 또 그들의 부모님 덕에 태어나셨을 것이고… 이렇게 지구 모든 인간들의 과거를 추적해 보면 우리 모두 약 400만 년 전 동아프리카에 살던 오스트랄로 피테쿠스로부터 진화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다. 물론 그들 역시 약 46억년 전 탄생한 지구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나, 지구, 1000억 개가 넘는 은하들… 이 우주의 모든 것들은 약 137억 년 전 거대한 우주 폭발, 빅뱅을 통해 탄생했다는 게 현대 과학의 정설이다.

그럼 우주는 왜 탄생한 것일까? 우주 그 자체 존재의 원인은 무엇일까?

마오리인들은 우주가 원천 부모인 랑기와 파파의 사랑을 통해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그런가 하면 중아프리카에선 붐바란 신이 외로워서 세상을 토해냈다고 믿었고 잉카인들의 신 비라코카는 티티카카 호수에서 나와 바위에 바람을 불어 세상을 창조했다고 한다.

대부분 미개문명의 우주 생성론이 보여주는 공통점은 1)존재하는 모든 것들엔 원인이 있고 2)세상이 만들어지기 전 적어도 무언가 존재했으며 3)존재의 원인은 누군가 그 초기 우주의 무언가를 가지고 만들어 낸 것이라는 점이다. 이런 면에선 고대 그리스인들의 우주 생성론도 미개했다.

탈레스, 헤라클레이토스, 아낙시만드로스는 각각 우주가 ‘초기바다, 불 또는 무한’에서 시작됐다고 주장했는데 초기 요소 자체가 어디서 왔는지는 설명하지 못했다.

 

존재의 근원을 탐구한 아리스토텔레스.

 

 

모든 존재의 시작점 빅뱅, 그럼 그 전엔?

유대교 역시 오랜 시간 야훼신이 ‘형태가 없는 무질서(tohu bohu)’에서 우주를 만들었다고 믿었지만 로마제국의 지식인들 사이에도 확산되기 시작했던 기독교에선 타 종교들과 차별화된, 좀 더 혁신적인 존재 생성론이 필요해졌다. 초기 기독교 지식인들은 신플라톤주의 및 이단적인 그노시스주의와 철학적 주도권을 놓고 기원후 2~4세기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플로티누스, 포피리, 이암블리코스 같은 신플라톤주의자들은 플라톤의 저서 티마이오스에 소개된 만물의 형성자 ‘데미우르고스’가 형태 없는 빈 공간에서 우주를 창조했다고 믿었다. 그중 특히 플로티누스는 자비심 많은 데미우르고스가 바로 이데아 세상의 이성적 존재들이 인간들의 세상에서도 표현될 수 있도록 한 하나의 님(The one)이라는 이론을 제시했다.

그런가 하면 그노시스주의자들은 ‘세상은 잔인하고 불행하므로 이런 추한 세상을 만든 데미우르고스는 절대 자비로울 수 없고, 존재는 바로 사악한 신 이알다바오를 통해 창조됐다’고 주장했다. 유대-기독교의 단일신이 데미우르고스나 이알다바오보다 우월하다는 증명이 절실했던 초기 기독교 교부들은 ‘신은 절대적 권능을 가지셨으므로 우주 창조에 자비와 의지 외에 그 아무 것도 필요 없었을 것’이라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결국 존재는 ‘creatio ex nihilo’, 바로 무에서 창조되었으며 신 외에 그 아무 이유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겐 원인이 있어야 하고, 그 원인이 바로 신이라면, 신의 존재의 원인은 무엇인가? 신은 왜 존재하는가?

어린아이들은 가끔 끝없는 “왜” 라는 질문들로 어른들을 당혹하게 만들 때가 있다.

“초콜릿 먹으면 왜 안 돼?”
“이빨 상하니까.”
“이빨 상하면 왜 안 돼?”
“음식을 못 먹으니까.”
“음식 못 먹으면 왜 안 돼?”
“아파 죽을 수 있으니까.”
“ 죽으면 왜 안 돼?”
“….”

아리스토텔레스는 끝없는 질문들을 종결시킬 수 있는 논리적 방법들을 추구했다.

우선 A의 원인은 B, B의 원인은 C, C의 원인은 A라는 순환적 논리를 써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말은 결국 ‘A의 원인은 A’라는 말과 같다.

‘초콜릿을 먹으면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초콜릿을 먹으면 안 되기 때문’이라는 식의 논리는 어린아이에게도 통하기 어려울 것이다.

다음으론 "왜"라는 질문을 끝없이 해 볼 수 있다. 이런 무한 논리는 가능하긴 하지만 어딘가 찜찜하다. 모든 것엔 언젠간 끝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질문을 어딘가에서 무작정 끊어 볼 수도 있다. “엄마 아빠는 너를 사랑하니까 너는 아프면 안 돼. 끝.” 이런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무작정 ‘끝’ 같은 식의 제멋대로는 논리적 이유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만물의 존재를 두 부류로 나누었다.

 

1)조건적이어서 존재를 위해 꼭 다른 원인이 필요한 존재들과 2)비존재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존재의 최종 원인이 될 수 있는 단 하나의 존재.

하지만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존재는 우리가 증명할 수 있지만 (예: 네모난 원), 거꾸로 비존재가 불가능한 존재의 증명은 데이비드 흄과 이마누엘 칸트가 지적했듯 불가능해 보인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 식의 기본 논리만으론 ‘creatio ex nihilo’ 증명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이 내려지고, 대부분 철학자와 물리학자들은 ‘우주는 영원하고 변하지 않으며 시작점이 있을 수 없다’는 가설을 선호하게 된다. 심지어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일반 상대성 이론이 ‘중력 때문에 우주가 줄어들 수도 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느끼고 급히 자기 방정식에 불필요한 상수 하나를 추가해 자신이 믿는 영원한 우주 모델을 구하려고 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영원한 우주는 환상일 뿐이었다. 일반상대성 이론이 완성된 지 불과 몇 년 후 에드윈 허블이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우주가 풍선같이 팽창하고 있다는 것은 거꾸로 우주가 과거에는 지금보다 더 작았음을 의미한다.

그럼 우주는 어느 정도까지 작았을까?

현대 빅뱅 이론에 따르면 우주의 모든 존재들은 약137억 년 전 ‘무한히 작은 점(singularity)’에서 시작됐다. 이 이론은 1951년 교황 피우스 12세가 ‘신의 존재의 과학적 증거’라고까지 해석했지만 우리는 다시 한번 어린아이 같은 질문들을 해 볼 수 있다.

“모든 존재의 시작점이 빅뱅이었다면 그 전엔 무엇이 있었을까? 빅뱅은 왜 일어난 것일까? ”

일반상대성 이론은 ‘중력을 통한 거시적간격’의 현상을, 양자역학은 ‘플랑크 간격(원자나 전자 간격)’에서 일어나는 미시적인 현상들을 설명한다. 그런데 만약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단 하나의 점에서 시작했다면, 양자역학적 원리들은 당시의 작은 우주 전체에도 적용됐고 이럴 경우 수학적으론 증명할수 있지만, 개념적으론 받아들이기 어려운 반직관적인 현상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중 가장 반직관적인 결과는 우주가 무(無)에서 아무 이유 없이 랜덤(멋대로)으로 만들어 졌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공간이 랜덤으로 창조됨을 보인 호킹

여기서 우리는 무의 의미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선 ‘무’를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이라고 정의해 보자. 로마의 시인이자 철학자인 루크레티우스는 ‘Derum rerum natura(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ex nihilo nihil fit’, 고로 무에선 아무것도 창조될 수 없다고 했지만, 물리학자 알란 거스는 ‘양자역학이 적용되는 플랑크 크기의 작은 빈 공간에선 양자파동을 통해 충분히 우주의 모든 존재들이 창조될 수 있다’는 이론을 제시한다.

하지만 아무리 작은 플랑크 크기의 빈 공간적 ‘무’에도 여전히 공간은 존재한다. 스티븐호킹은 그래서 한 단계 더 나가 양자우주론과 양자 중력학을 이용하면 공간 그 자체가 양자 파동적으로, 다시 말해 아무 이유 없이 랜덤으로 창조될 수도 있다는 걸 보여준다.

‘존재는 왜 존재하는가? 왜 무가 아니고 유(有)인가?’

현대 물리학의 답은 단순하다. 물체와 공간이 존재하지 않는 ‘무’는 양자역학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는 오래갈 수 없기 때문에 ‘유’가 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존재하는 이유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무’는 어떻게든 무작위적으로 변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오래 전 MIT에서 진행하고 있던 실험을 중단할 수 없다는 터무니 없는 이유로 귀국을 미루다 결국 어머니가 의식을 거의 잃은 뒤에야 한국에 도착해 주무시고 있는 어머니를 봤다. 어른이 된 뒤 어머니와 거의 대화를 나누지 않았던 나. 그 나의 존재가 바로 눈앞에 보이는 저 분의 몸 안에서 시작됐다는 믿어지지 않는 사실을 생각하며, 진정한 ‘무’는 양자 파동이 퍼지는 무한으로 작은 점 크기의 양자 우주가 아니라 아마도 언젠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미래의 ‘나’일지 모른다고 상상해본다.

 

 

 

 

 

내 맘껏 얼마든 바꿀 수 있다면 환상, 아니면 현실

 

김대식의 'Big Questions' ② 무엇이 환상이고 무엇이 현실인가

 

 

르네 마그리트, ‘이미지들의 배신’(1928). [위키피디아]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는 ‘이미지들의 배신(La trahison des images)’이라는 작품에서 큰 파이프 그림 바로 아래에 ‘Ceci nest pas une pipe(이건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써 놓았다.

분명히 파이프 같이 생겼는데 왜 아니라고 할까? 물론 그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화판 위에 적절히 퍼져 있는 유화 물감들을 우리 눈과 뇌가 ‘파이프’라고 해석할 뿐이다. 마그리트는 물질적 현실과 우리의 지각적 해석을 혼돈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를 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현실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우선 단순하게 ‘현실=물질’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성공회 주교이자 철학자였던 조지 버클리가 이미 지적했듯 우리의 모든 경험은 항상 지각을 통해 이루어진다. 물질적 파이프는 결국 그 파이프에서 반사된 광자들이 망막과 시각 피질의 신경세포들을 자극해 이루어지는 뇌의 해석일 뿐이다. 버클리는 극단적으로 ‘지각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라고까지 주장했지만 어차피 모든 현실이 지각의 결과물일 경우 적어도 물질적 파이프만 현실로 인정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비슷한 예로 영화 매트릭스의 유명한 한 장면을 기억해 보자. 모피우스는 주인공 니오에게 파란 약과 빨간 약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한다. 파란 약을 먹으면 지금같이 편한 세상에서 맛있는 것을 먹으며 평범한 회사원으로 살다 늙어갈 수 있다. 하지만 빨간 약을 택하면 지금까지 알고 있던 모든 것들이 거짓이고, 무엇이 진정한 현실인지 알게 될 거라며….

 

 

힌두교도들은 현실이 마하비시누 신의 꿈이라고 믿는다.

 

 

파란 약이냐, 빨간 약이냐매트릭스 딜레마

매트릭스 영화를 끝까지 본 대부분의 사람은 진정한 현실이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는 걸 잘 알기 때문에 ‘현실이 아니면 어때. 아무리 허위라도 가짜 스테이크의 육질을 내 혀가 느끼면 되는 게 아닐까’라는 버클리식 생각으로 파란 약을 선택할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 다시 말해 ‘현실은 나의 오감으로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라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현실=나의 지각’이라는 가설을 조금 더 깊게 생각해보자.

만약 내가 느끼는 모든 것들이 바로 현실이라면, 다른 누구도 지각할 수 없는 나만의 꿈과 환상들마저 현실로 인정해야 할까? 그러면 정신분열증 환자들의 망상은? 아무래도 현실에 대해 약간 다른 정의를 해야 할 것 같다.

현실로 인정되려면 대부분의 정상인들이 비슷한 상황에서 공통적으로 느끼거나 지각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검정 의자는 다른 모든 사람도 지각할 수 있어서 현실이지만, 만약 내 눈에만 그 검정 의자 위에서 멋지게 강남스타일 춤을 추는 침팬지가 보인다면 정신과 의사와 상담해 보는 게 적절할 것이다. 고로 ‘현실=대부분 사람들의 공통적 지각’이라는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그러나 공통적 지각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에드문트 후설과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객관적이고 자주적인 지각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모든 지각은 목적과 목표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같은 도끼라도 ‘선녀와 나무꾼’의 주인공과 ‘죄와 벌’의 라스콜니코프에겐 각각 다르게 보인다는 것이다.

버클리와 후설을 따르자면 결국 현실은 개개인의 독특한 지각과 의도에 따라 매번 달라질 수 있는 주관적 현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온 김에 한발 더 나가 유아론(solipsism) 같은 막장 드라마식 현실론까지 가 볼 수도 있다. 이 이론은 ‘내게 지각되지 않는 것들에 실체가 없는 게 아니다. 우주의 유일한 현실은 나의 상상뿐’이라는 이론이다. 그렇게 되면 버락 오바마, 중앙SUNDAY, 은하수, 레미제라블, 4대 강 이 모든 것들은 내 머리 안에만 존재하는 환상이며 ‘현실=나’다. 유아론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긴 불가능하다. 그 아무리 치명적인 논리적 모순을 제시하는 사람도 어차피 유아론자의 상상 중 하나일 테니….

비슷하게 우리는 ‘배꼽주의’ 식의 현실론과는 이성적 토론을 할 수 없다.

필립 헨리 고스(Philip Henry Gosse)는 『1857 Omphalos(그리스어로 ‘배꼽’)』라는 책에서 ‘왜 아담이 배꼽을 가졌을까’라고 묻는다.

아담은 엄마의 배에서 태어나지 않았는데도 배꼽이 있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배꼽이 없는 비정상적 해부학 구조를 가졌다는 말은 히브리어 타낙(Tanakh성경)에 없다. 그 의미는 야훼신은 아담을 마치 ‘엄마라는 존재의 과거를 의미하는’ 탯줄과 배꼽을 포함한 완벽한 상태로 창조했다는 것이다.

비슷하게 우주는 기원전 4004년 10월 23일, 수천만 년 과거의 역사를 담은 듯한 지질학적 증거와 공룡의 화석을 포함한 ‘완성된’ 상태로 만들어졌다는 이론이다. 그런데 왜 하필 6000년 전일까?

어차피 우주가 위조된 과거의 기록을 포함한 ‘완성품’으로 만들어졌다면 6000년 전이 아니라 지난주 목요일에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 아니 물리학적으로 가장 짧은 플랑크 시간인 5.3910610-44초 전에 이미 지금 우리가 지각하고 기억할 수 있는 바로 이 현실 그 자체로 만들어졌을 수도 있다. 마치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위조된 기억이 심어진 상태로 제작된 로봇들이 자신들이 과거가 있는 인간들이라고 착각하고 살 듯이 말이다.

결국 지각과 기억만으로 현실을 정의하다 보면 논리적 모순과 이성적 토론이 불가능한 패러독스들에 빠지게 된다. 그럼 현실을 지각에서 분리시켜 볼 수는 없을까?

환상과 현실의 가장 핵심적인 논리적 차이는 무엇일까?

 

이제 데카르트가 등장할 때다. 오후까지 늦잠 자기로 유명했던 데카르트는 스웨덴 여왕의 개인 교사가 된 후 매일 새벽 5시에 철학 수업을 하다 결국 폐렴으로 죽었다는-게으른 나로서 꼭 믿고 싶은-전설이 있다.

그는 1619년 11월 11일 ‘우리가 진정 믿을 수 있는 게 도대체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한다. 물질적 파이프, 파이프의 그림, 검정 의자, 춤추는 원숭이, 아담의 배꼽, 공룡의 화석….

이 모든 것들은 아주 교활한 악마가 만들어 낸 환상일 수 있다. 적어도 절대로 환상이 아니라는 논리적 증거를 찾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아무리 우주의 모든 것이 환상이라 해도, 적어도 단 하나의 무언가는 현실이다. 바로 ‘이 모든 것이 환상이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나’는 확실히 현실일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한 프랑스의 철학자 르네 데카르트(1596~1650).

서양 근대 철학을 출발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위키피디아]

 

 

현실은 '나' 없는 우주, 즉 '현실=우주-나'

데카르트는 ‘cogito ergo sum’ 즉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를 기반으로 외부현실을 증명하려 했지만 미안하게도 그건 좀 무리였던 것 같다. 우리가 증명할 수 있는 건 생각 그 자체가 존재한다는 것이지, 그게 반드시 나의 생각일 필요는 없다.

힌두교도들은 현실이 마하비시누 신의 꿈이라고 믿는다. 그 꿈엔 만물의 모든 물체·정신·기억·지각들이 포함되어 있고, ‘나의 생각’ 역시 그 꿈에 속해 있다. 결국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가 아니고 ‘생각난다. 고로 현실엔 무언가가 생각한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비슷하게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보르헤스의 ‘원형의 폐허들(Las Ruinas Circulares)’이란 단편에서 주인공은 불에 타 죽는 순간 뜻밖에 아픔을 느끼지 못하며 자신이 결국 누군가 다른 이의 꿈 또는 시뮬레이션이라는 걸 알게 된다.

무엇이 환상이고 무엇이 현실인가? 누가 꿈속의 나비고 누가 현실의 장자일까?

어떻게 보면 현실과 환상의 가장 큰 차이는 현실은 나에게 저항한다는 점이다. 현실의 의자는 내 엉덩이 무게에 저항하기 때문에 내가 편하게 앉아 있을 수 있지만, 환각적 의자에 앉기란 불가능하다.

환상은 내 마음대로 변경할 수 있지만 현실은 내가 원하는 변화에 저항한다. 그래서 현실을 변경하려면 항상 시간과 에너지가 소모된다:현실엔 공짜가 없다. 그리고 환상과 착각은 내가 더 이상 믿지 않으면 사라지지만 현실은 나의 믿음과 관계없이 현실이다. 내가 없어도 현실은 계속 존재하지만 나의 환상은 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고로 ‘현실=나 없이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는 가설 아래 우리는 현실을 ‘내가 없는 우주, 바로 현실=우주-나’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개개인의 지각과 의도로부터 독립시키는 순간 우리는 드디어 현실을 객관적으로 설명하고 응용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이성과 과학 위주의 현실은 결코 아름답거나 포근하지 않다. 아니, 매우 차갑고 비인간적이다. 신의 꿈으로 만들어진 현실! 얼마나 웅장하고 미적인가! 모든 현실이 결국 나의 상상이라면 얼마나 신날까! 내가 바라보고 있어야만 그 아름다운 장미가 존재한다면 이 또 얼마나 시적인가! 하지만 이런 아름답고 시적인 현실은 우리의 동경은 만족시킬 수 있더라도, 현실 그 자체를 예측하거나 바꾸어 놓기에는 너무 주관적이다.

그래서 모피우스가 니오에게 파란 약과 빨간 약을 권했던 것처럼 나는 회색 비행기와 무지개색 비행기를 권해보고 싶다.

 

무지개색 비행기는 시적, 종교적, 예술적, 막장 드라마식 현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멋진 비행기다. 그 비행기의 파일럿들은 카리스마가 있으며 무지개 비행기의 원리를 누구나 다 이해하기 쉽고 설득력 있게 설명해 준다.

반면 회색 비행기는 못생기고 우울하다. 그리고 아직 여기저기 수리 중인 흔적까지 보인다. 거기다 파일럿들은 그다지 친절해 보이지도 않고, 자꾸 수식과 확률을 가지고 이해하기 어려운 무언가를 설명하려 한다.

단, 그 회색 비행기는 철저히 항공역학 이론과 전기전자기술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만약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당신은 어느 비행기를 타고 데카르트가 살던 프랑스로 떠나실까요? 당신이 사랑하는 가족들의 목숨을 어느 비행기에 맡기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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