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는가 고민 마라, 시시포스처럼 안 되려면…
김대식의 ‘Big Questions’ <5> 삶은 의미 있어야 하나
코린토스 시의 왕 시시포스는 신들을 속여넘겼다는 죄로 영원히 다시 아래로 굴러떨어질 돌을 굴려 올려야 하는 벌을 받았다. 티치아노의 그림(1548~1549). [위키피디아]
1987년 4월 11일. 북 이탈리아 도시 토리노의 한 아파트 3층 자택에서 화학자이자 소설가인 프리모 레비가 뛰어내렸다. 그는 바로 숨졌다. 유대인이었던 레비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생존자였다.
『이것이 인간인가』 『주기율표』 같은 저서로 이탈로 칼비노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탈리아 최고의 작가로 명성을 얻었다. 레비의 자살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남겼다.
지상의 지옥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그가 왜 자유와 부를 다 누리던 편한 삶을 버린 것일까?
바퀴벌레만큼도 못했던 ‘아우슈비츠의 레비’는 살아남으려 발버둥쳤지만 북 이탈리아 ‘아름다운 도시에서의 레비’는 죽음을 선택했다.
장미는 자신이 장미인지 모르며 장미꽃을 피운다. 또 끝없는 해변가를 힘들게 기어가는 거북이에게 ‘왜?’라는 질문은 무의미할 것이다. 인간의 위대함이자 비극은 지구의 모든 존재 중 유일하게 “왜”라는 질문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사는 걸까?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
어차피 죽을 걸 왜 바둥거리며 살아야 하는가?
물론 질문을 할 수 있다고 꼭 답이 있을 필요는 없다. ‘73과 79사이의 소수는 0으로 나눌 수 있을까?’라는 질문엔 ‘그런 소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게 최선이다. ‘바늘 위에선 몇 명의 천사가 춤을 출 수 있을까?’ ‘천사’ 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질문 자체가 무의미하다.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은 그래서 ‘삶의 의미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자체가 논리적으로 무의미하다고 주장했다. 조금 더 생각해 보자. “x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한마디로 ‘정해진 범위 y 안에서 x의 용도 또는 x가 y에게 줄 수 있는 결과들의 합집합’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벽과 못’이라는 범위 안에서 ‘망치’의 의미는 아마도 무언가를 두들겨 벽에 박을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결국 무언가의 의미란 다른 무언가와의 관계를 나타낸다. 그럼 우리 인생에서 가장 큰 범위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삶 그 자체다. 그렇다면 “삶의 의미는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는 순간 우리는 단지 “삶과 삶의 관계”라는 동일한 단어를 반복하는 난센스를 말할 뿐이다.
이탈리아 작가 프리모 레비(사진 위)는 아우슈비츠 수용소 생존자였다. [위키피디아]
오스트리아 최고의 재벌 2세로 태어난 비트겐슈타인은 전 재산을 기증하고 시골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일하기도 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그는 케임브리지대 교수 자리를 거절하고 군대에 지원했다. 그리고 쏟아지는 포탄들 사이에서 대표작인 『논리 철학 논고(Tractatus-Logico-Philosophicus, TLP)』를 쓰기 시작한다.
“세상은 일어나는 사건들의 총체다”로 시작한 TLP는 논리를 통해 세상을 이해하려 한다.
하지만 그는 우주의 모든 사실은 ‘생각이라는 틀 안에 갇혀 있는 논리적 그림’이라는 부정적 결론을 내리게 된다. 논리는 진정한 진실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뇌 안에 존재하는 기호들 사이의 형식적 꼬리물기라는 것이다. 고로 모든 철학은 말장난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한 진리를 어떻게 추구해야 할까? 비트겐슈타인은 진실은 논리나 말로 알아내기보다 조용히 느껴야 한다고 주장한다. 너무나 유명한 TLP의 마지막 문장에서 그는 속삭인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선 침묵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비트겐슈타인 역시 침묵을 지키진 못했다. 죽기 전 그는 친구들에게 자신은 행복했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행복한 삶이란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은 불행한 삶보다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한 인생일까?
만약 삶에 절대적 의미가 존재한다면 답은 생각보다 어렵지 않다. 의미란 결국 용도이기에 주어진 용도에 충실하기만 하면 된다. 좋은 망치란 망치의 용도에 충실하면 되기에, 벽에 못 잘 박는 망치가 바로 ‘행복한’ 망치일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래서 ‘좋은 인생’을 목표와 원인에 충실한 삶이라 정의했다.
하나의 존재는 물론 또 다른 존재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이런 원인들의 꼬리물기는 아리스토텔레스가 가설한 최종 원인 중 원인인 ‘신’에서야 끝나게 된다. 그렇다면 결국 인생의 의미는 원인들의 꼬리물기들을 잘 유지해야 한다는 정의를 내릴 수 있으며, 좋은 삶이란 나에게 주어진 꼬리물기 중 하나의 역할에 충실하면 된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항상 품위를 유지하며 점잖게 표현했다면 그의 선생 플라톤은 강경파였다. 플라톤은 우리 눈에 보이는 물체들은 이데아 세상의 이상적 존재들의 왜곡된 그림자들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인생의 목표는 결국 이상 세계의 절대지식을 탐구하는 것이라는 게 플라톤의 생각인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사람들은 다양한 능력과 지능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철학자가 돼 하루 종일 절대지식을 추구하긴 어려워 보인다. 더구나 누군가는 농사도 짓고 생각에 빠진 철학자를 위해 빵도 굽고 목욕물도 데워야 하지 않는가?
아, 그럼 이러면 어떨까?
이데아 세상을 추구하는 삶의 의미에 능력 있는 철학자들은 직접적으로 참여하고, 그 대신 능력이 없는 농부와 노예들은 철학자를 위한 노동을 통해 간접적으로 공헌한다.
그래서 철학자는 철학 하면 행복한 거고, 노예는 주인 말 잘 들으면 행복한 거다. 또 고대 그리스 텐프로의 접대부였던 ‘헤타이라’들은 접대를 잘하면 행복한 거다. 빙고에 아싸라비아다!
노령에 플라톤은 시라쿠스의 독재자 디오니지우스 1세와 2세 부자들에게 굽실거리며 아부한다:
왕이 철학자가 되거나, 철학자가 (제가 최고의 철학자인 건 아시지요, 독재자님?^^) 왕이 된 사회가 가장 행복하다고. 루브빅 마르쿠제(Ludwig Marcuse)는 그래서 『철학자와 독재자』라는 책에서 플라톤이야말로 권력에 눈 멀어 인류 최악의 계급사회를 구상한 타락한 지식인이라고 부르기까지 했다.
인생에 절대의미 자체가 존재한다는 게 그렇게도 반가운 일일까?
의미가 있다는 것은 내 삶에 목표와 용도가 있다는 뜻이다. 나에게 용도가 있으면 나는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다. 나의 인생은 나와는 상관없는 다른 무언가의 목적 달성을 위한 도구일 뿐이다.
나는 망치고, 망치이기에 벽에 못을 박아야만 한다. 의미 있는 인생이란 결국 존재의 무거움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생이다. 그렇다면 나만을 위한 인생은 인생에서 절대의미를 뺀 후부터 가능해지게 된다.
삶의 의미를 포기하는 순간에야 우리의 존재는 가벼워진다는 말이다. 그러나 가벼운 인생은 쿤데라의 유명 소설에서 표현했듯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느끼게 한다.
결국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는 (어차피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인생의 의미가 아니라, 의미 없는 인생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다.
알베르 카뮈는 그래서 의미 없는 인생을 살아야 하는 우리 인간들을 시시포스와 비교한다.
코린토스 시의 왕이었던 시시포스는 영원히 다시 아래로 굴러떨어질 돌을 매번 다시 굴려 올려야 하는 벌을 받는다. 무겁기도 무거운 돌을 죽을 고생을 해 올려놓는 순간 돌은 다시 아래로 떨어지고, 이 무의미하고 지겨운 인생은 영원히 반복된다. 도대체 시시포스가, 아니 인간이 뭘 그리 잘못했다고 이런 벌을 받아야 하는가? 시시포스의 죄는 너무 영리해 올림푸스의 신들을 속인 것이다.
인간이 시시포스와 같은 벌을 받는 이유는 장미와 거북이와는 달리 우리는 자아와 지능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능이 있기에 “왜”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왜”라며 존재하지 않는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질문을 짊어져야 하는 무거운 인생을 살기 시작하는 것이다.
명예와 부를 모두 누리게 된 레비는 아마도 “왜?”라는 질문을 멈추지 못했을 것이다.
왜 그 많은 젊은이 중에 자신만 살아남았을까?
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도착하던 날 자신은 살고 옆에 서 있던 귀여운 여자 아이는 엄마 손을 꼭 잡은 채 학살당해 한줌의 연기로 사라져버린 것일까? 왜? 왜? 왜?
레비는 1987년 4월 11일에 죽은 것이 아니다. 그는 답이 있을 수 없는 ‘왜?”라는 질문을 하기 시작한 40년 전 아우슈비츠에서 이미 죽기 시작했었던 것이다.
메소포타미아 수메르 왕국의 전설적인 왕인 길가메시(Gilgamesh, 기원전 2600년?) 는 영웅 중 영웅이었다. 괴물 훔바바를 죽이고 돌아오던 중 친구 엔키두가 죽자 상심한 그는 자신도 결국 언젠가는 죽어야 한다는 걸 느끼고 영생의 비밀을 발견하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성난 신들이 인간들을 대홍수로 없애려 할 때 방주에 동물들을 싣고 살아남은 우트나피슈팀(Utnapishtim)을 만나게 된다. 우트나피슈팀은 다시 진정한 신들로부터 인류를 보존했다는 공으로 영생을 선물받을 뿐만 아니라 먼 훗날 히브리인 이주노동자들이 길가메시 영웅전에서 표절해 간 ‘노아의 방주’ 스토리의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우트나피슈팀은 길가메시를 불쌍히 여겨 영생의 약초를 선물하나, 그는 기쁜 마음에 방심해 연못에서 목욕하다 뱀에게 약초를 도난당한다. 영생의 비밀을 손에 잡았다 놓친 길가메시는 우트나피슈팀에게 울며 물어본다: 이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냐고? 어차피 죽어야 하는데 왜 살아야 하냐고?
4600년 전 메소포타미아인 우트나피슈팀은 말한다:
길가메시야, 너무 슬퍼하지 말고 다시 집에 돌아가 원하는 일을 하며 아름다운 여자를 사랑하거라. 그리고 좋은 친구들과 종종 만나 맛있는 것 먹고 술 마시며 대화를 나누거라.
비틀스의 존 레넌(John Lennon)이라면 이렇게 얘기했을 것이다:
길가메시야, 인생이란 네가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동안 흘러 없어지는 바로 그런 것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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