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위빠사나 수행의 핵심은 깨어있는 알아차림입니다.
깨어있는 알아차림이란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물질적 현상과 정신적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현재 하고 있는 일에
마음을 집중하여 "할 때 하고 있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몸을 움직일 때는 움직임을,
말을 할 때는 말하고 있는 것을,
상대의 말을 들을 때는 상대의 말에 대하여 어떤 생각이나 의도가 올라오는지를,
음식을 먹을 때는 먹으면서 느끼는 것들을,
몸의 움직임이 없을 때는 호흡을,
무엇인가를 생각을 할 때는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아플 때는 아픔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아픈 것에 대하여 싫어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물을 보면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을 ,
미운 사람을 볼 때 미운 마음이 올라와서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을,
그리고 좋아하거나 싫어서 가슴이 두근거리면
두근거리는 느낌을 사실 그대로 아는 것입니다.
결국 알아차림은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을 객관적으로 분리해서
하나의 현상으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려는 의도를 새로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대상에 마음을 겨냥하여 대상을 ‘있는 그대로’ 직관하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직관한다는 것은
현재의 대상에 대한 어떤 선입견이나 판단 분별없이,
아주 객관적으로 대상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마치 영화를 보는 관객이 화면을 주시하듯이
현재를 그냥 알기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주자주 '지금 내 마음이 무엇을 하는가?'하고
현재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 돌아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알아차림은 수행자가 항상 지니고 다녀야할 필수품입니다.
그래서 선원에서는 어떻게 알아차림을 하며
어떻게 이어갈 수 있는지 배우고 직접 실천해보고 경험해 보는 곳입니다.
이런 실천 수행으로 알아차리는 힘이 생기면,
일상에서 만나는 대상에 대하여 휘둘리지 않고
알아차릴 대상으로 알아차림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사실 잠깐 동안이라도 알아차림을 하면
그 순간 마음에 번뇌가 없고 평온한 상태가 되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런 평온한 상태는 몸과 마음이란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게 하는 바탕이 되며,
몸과 마음이 가지고 있는 실재하는 성품을 직관할 수 있게 하는 힘이 생깁니다.
이런 직관에 의한 통찰 지혜는 몸과 마음에 실재하는 성품인,
계속 변화하고 생멸하는 것으로 무상(無常)하고,
잠시도 편안함이 유지될 수 없도록 조건지어진 것으로 괴로움이며(苦),
그 무엇도 나의 것이라고 붙잡을 만한 실체는 없다는 무아(無我)라는
세 가지 특성을 알게합니다.
수행자가 말이나 글이 아닌 자신의 경험을 통해서
직접 무상, 고, 무아를 인식하게 되면
자신(물질적인 것, 정신적인 것)에 대한 어느 것도 붙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자기에 대한 갈애나 집착을 줄일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지혜로 모든 괴로움의 원인이 되는
갈애와 집착이 줄어들면 마음에 걸릴 것이 없고,
또한 집착이 줄어든만큼 자유롭고 평온해집니다.
이처럼 알아차리는 힘은 그동안 쌓아놓은 업력으로
깊은 곳에 잠재된 탐진치가 일어날 때마다 알아차릴 수 있게 하고,
현재에 새로운 불선업을 짓지 않게해서
과거의 업장을 올라올 때마다 소멸해갑니다.
그런 행위의 결과로 궁극에 가서는
모든 괴로움이 소멸한 열반에 이르게 됩니다.
이것이 위빠사나의 알아차림으로
8정도를 닦아가는 도성제 수행입니다.
알아차림은 알아차린 만큼 지혜를 물고 다닙니다.
알아차림을 한번 할 때마다 그 바탕에 지혜의 종자를 심고 지나갑니다.
그래서 수행자의 할 일은 알아차림 뿐입니다.
언젠가는 종자가 열매를 맺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알아차림이 이어지면 그는 정도(正道)를 가고 있는 것이며,
궁극에는 깨달음으로 열반에 이를 것입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을 놓치면 괴로움을 만드는 길로 가는 것이며
몸과 마음은 평온이나 자유와는 더욱 거리가 멀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의 핵심은 알아차림이며.
이는 곧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佛敎)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12) 수행자가 알아차림을 해야 하는 이유
지금 양손을 합장하고 손바닥의 느낌을 한 번 알아차려보세요.
그냥 편안하게 마음을 손에 두고 손에서 느낄 수 있는 것들을 느껴보세요.
아마도 따뜻한 열기나 부드러움, 딱딱함, 촉촉함,
떨림 등의 느낌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손에 두고 손의 느낌을 알아차리고 있을 때
마음에는 어떤 근심걱정도 없었을 것입니다.
수행자가 마음을 현재의 몸과 마음에 붙여두고 있으면,
마음은 천지 사방으로 돌아다니지 못해 번뇌거리를 끌어들이지 못합니다.
즉 현재를 알아차리는 동안에는 욕심 성냄 자존심 등이 일어날 틈이 없어
마음이 번뇌를 쉬고 조용해지며 평온해집니다.
그래서 수행의 시작은 마음을 몸에 붙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게 됩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의 감각기관(6근 = 눈, 귀, 코, 입, 몸, 뜻 = 眼耳鼻舌身意)은
밖으로 나가서 감각대상(6경 = 형상, 소리, 냄새, 맛, 접촉, 생각)과 만나면,
들어올 때는 어김없이 좋고, 싫고, 나에게 해롭고, 이롭고 라는 판단 분별에 의해
욕심과 성냄과 어리석은 마음을 일으키고 괴로움을 만들어 냅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을 하면 그 순간에는 마음이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마음은 곧 정화되고 고요해져서 몸과 마음의 실재하는 성품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현재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알아차림이며,
이런 알아차림의 힘이 모이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위빠사나의 통찰지혜가 생기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번뇌로부터 멀어지려면
우선 자신의 몸과 마음에 항상 주의를 집중해서
알아차림을 이어가야 합니다.
알아차림이 이어지면 마음이 고요해져 걸림이 없고,
걸림이 없으면 두려움이 없고, 전도몽상으로부터 떠나
있는 그대로 보는 지혜로 구경에는 열반에 도달합니다.
이런 실천 수행법이 반야심경에서
"보리살타 의(依) 반야바라밀다
고(故), 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으로 표현된것입니다.
이처럼 알아차림은 위빠사나 수행의 시작이며,
깨달음을 향해서 가는 바른 길이며,
열반을 얻을 때까지 지속해야하는 선한 마음의 작용(淨心所)입니다.
언제나 알아차림(sati. 사띠)이라는 티켓을 들고 다니면,
불사(不死)의 문인 열반(닙바나. 니르바나)에 도착하는 열차를 타게 됩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을 놓치면
그 순간 몸과 마음은 번뇌로 물듭니다.
수행은 우리들이 습관적으로 일으키는 번뇌를 알아차려서,
현재 지금여기에서 번뇌가 없는 깨끗한 마음을
한 순간 한 순간 채워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최고의 선한 업이 됩니다.
이것이 수행자가 알아차림을 해야하는 이유입니다.
13) 실제로 알아차림을 할 때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해야 할까요?
수행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수행을 하는 수행자의 마음가짐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현재의 대상(오온. 몸과 마음)을
"있는 그대로" 좋아하거나 싫어함 없이,
선입견이나 고정 관념 없이, 청정하게,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아차려야 하는데,
이것은 알아차림을 하는 수행자의 마음이 바른 마음가짐일 때 가능해집니다.
바른 마음가짐이란
수행자의 마음이 욕망이나 성냄으로 들떠 있지 않고,
안정되고 편안한 마음을 말합니다.
마음이 들떠있으면 좋은 현상을 바라거나
싫은 현상을 없애려는 욕구가 일어납니다.
이런 욕구는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법으로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현재 나타난 현상을 법으로 수용하며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마음 작용에 의해
대상의 성품을 통찰하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이런 마음가짐은 현재를 조용히 지켜볼 수 없게 하고,
또 알아차림을 이어갈 수 없게 합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아무 것도 바라는 마음 없이 편안하게,
단지 현재 알아차릴 대상이 있어서 그 대상을 있는그대로 아는 마음만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처음부터 이런 마음가짐으로 수행을 시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바라지 않고 살아본 적이 없었고,
마음은 항상 들떠있어서 여기저기 돌아다녔지
고요한 마음을 유지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수행조차도 빨리 좋은 성과를 얻으려는 마음으로 시작하므로
마음이 들떠서 망상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망상이 많다거나 호흡이 잘 보이지 않는다고,
수행이 잘 되지 않는다고 다시 화를 내면서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리고는 수행은 매우 어려운 것이라고 낙담합니다.
누구나 처음 얼마간은 불가피 이런 들떠있는 과정들을 만나게 되고,
이런 상황을 있는 그대로 다시 알아차리고 수용하는 것으로부터
바른 마음가짐을 가지는 훈련이 시작됩니다.
이런 어려운 과정이 수행자에게는
오히려 알아차리는 힘을 키워주는 계기가 됩니다.
그러므로 어떤 상황이라도 알아차림을 하면
수행자로서 할 일을 다 한 것입니다.
즉 어떤 마음상태이든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리면
알아차림에 의해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해집니다.
그래서 수행을 시작하기 전에
항상 현재의 마음을 먼저 보아주고 시작해야하며,
수행 중에도 자주 현재 무슨 마음인지
자신의 마음상태를 보아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놓치고 들뜬 마음이었다 하더라도
그 마음을 알아차려서 바른 마음가짐을 만들고,
이 마음으로 현재의 몸과 마음을
새로 알아차림을 할 수 있어야합니다.
14) 위빠사나 수행은 최고의 선업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좌선, 경행(행선), 그리고 일상생활에서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림을 하는 수행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행위 즉, 행주좌와 어묵동정이 모두 알아차릴 대상입니다.
그래서 움직일 때는 움직임에 마음을 집중하여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움직임이 없을 때는 호흡에 마음을 집중하거나
몸의 느낌에 마음을 집중하여 있는 그대로 알아차립니다.
또한 일상생활에서 말을 하거나 어떤 행동을 할 때는
현재 자신이 하고 있는 행위에 마음을 집중하여,
어떤 마음으로 어떤 행위를 하는지 알아차리면서 행위를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알아차림을 하면
그 순간은 깨어 있는 순간으로 가장 깨끗한 마음 상태입니다.
그래서 생각이나 말이나 행위를 하는 그 마음은
탐진치가 없는 관용, 자애, 지혜의 선한 마음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선심은 선업으로 이어지며,
지금 행한 선업은 미래에 선한 과보라는 결과를 만듭니다.
이런 선업의 힘들이 모이면
점차 불선한 일은 하지 않게 되어 계율을 지키게 되고,
세간에서 부딪치는 좋고 나쁜 일에도
흔들림이 없는 마음의 평온을 유지합니다.
이 평온한 마음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을 열어줍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에서
그들의 무상하고 괴로움이며 실체가 없다는
무아의 법을 보는 통찰지가 일어납니다.
그 결과로 몸과 마음에 대한 집착을 떨쳐내어
최고의 행복인 열반을 향해 나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현재를 있는 그대로 보는 위빠사나 수행은
현재 자기가 행할 수 있는 일들 중에서 가장 최고의 선한 행위입니다.
그러나 수행자가 잠깐이라도 알아차림을 놓친다면
이미 마음은 ‘나’라는 어리석음을 바탕에 깔고
대상과 부딪치고 쉽게 욕망과 성냄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은 즉시 불선업을 일으키고 불선 과보를 예약합니다.
알아차림이 없을 때는 항상 원하는 마음에서 행위를 합니다.
그러나 원하는 것을 얻었다고 해도 괴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얻은 것이 영원하지 못하여 사라질 때는 더 큰 괴로움이 됩니다.
때로는 얻자마자 다시 더 큰 것을 원하는 욕망이 일어나 괴롭습니다.
만일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 자체가 괴롭습니다.
그러므로 원하는 마음, 바라는 마음이 있는한 항상 괴로움은 따라다닙니다.
이때 이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다시 탐진치로 반응하여 또 다시 괴롭습니다.
즉, 알아차림의 부족으로 탐진치를 행하는 현재도 괴롭고,
그 과보가 익어서 나타나는 미래도 괴롭습니다.
수행자는 이때라도 알아차림을 놓쳤다는 것을 즉시 알아차려,
다시 현재를 있는 그대로 수용하면,
불선업에서 최고의 선업으로 바꾼 것입니다.
알아차림으로 시작하는 위빠사나 수행은
알아차린 순간 바라는 마음이 없이 아는 마음만 있기 때문에 괴로움이 없고
알아차림을 한 결과로 오는 미래도 선업의 과보를 만나므로 괴로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알아차리는 마음은
그 순간에도 행복하고 미래도 행복한
최고의 선업을 심는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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