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강 : 인간의 본성: 이원론 대 유물론 - 죽음 : 케이건 교수 예일대학
케이건 교수가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두 가지 관점으로 토론한다.
첫 번째 관점은 인간이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원론이고 두 번째 관점은 인간이 육체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유물론이다. 여기서 육체는 능력의 집합체이며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다고 본다.
셸리 케이건 교수:
우리가 토론하게 될 첫 번째 질문은 죽음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는가 하는 가능성과 관계된 것입니다. 죽음 이후의 삶이 있을까요? 죽음 뒤에도 여전히 존재하거나 살아남는다는 가능성이 있는 것일까요?
언뜻 보기에는, 아니, 사실 깊숙이 들여다보면 진실이라는 것이 밝혀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아마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두 가지 근본적인 주제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할 겁니다.
제가 죽음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죽음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우리가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첫 번째 사실은 ‘우리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종류의 대상인가?' 아니면 일반화시켜 ‘사람이라는 것은 어떤 종류의 대상인가?’
‘우리는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를 이루고 있는 부분들은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먼저 “우리는 살아있습니까?”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우리는 우리 각자가 어떻게 구성되어 있는지 알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처음으로 상당한 시간을 소비하게 될 것은‘사람은 무엇인가?’ ‘사람을 구성하는 기본 구조는 무엇인가?’를 명확히 하는 작업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게 될 두 번째 질문은 ‘생존에 대한 견해, 혹은 개념은 무엇인가?’라고 하는 것들입니다.
여러분이 “우리는 살아 있나요?”라고 묻기 전에, “나는 누구인가?” “살아남는다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하는 것부터 확실하게 해야 합니다. 미래에 ‘나’로서 존재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이제 몇 가지 일반적인 용어로 이러한 철학적 논제에 대해 토론해 봅시다. 시간을 초월한 존재의 지속성이 지닌 본질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우리와 같은 사람이라는 주제에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면서, 존재에 대해 하위 전문화된 항목과도 같은 이 질문은 인간의 독자성에 대한 대화 아래서 논의되어 왔습니다. 개인의 독자성에 대한 열쇠, 본질, 혹은 기반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그렇듯이, 다음 주에 이곳에 있는 사람이 나와 같은 누군가일까요? 개별 존재의 독자적인 본질은 무엇일까요?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듯이, 언뜻 보기에 여러분은 확실한 답을 얻기 위해 “내가 내 죽음으로부터 살아남을까? 아니면 살아남을 수도 있을까, 혹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알 필요가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사람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이 인간의 형이상학적 구성 요소를 묻는 것인지도 알 필요가 있죠. 그리고 우리는 개별성 혹은 지속성의 본질, 더 정확하게는 인간의 개별성에 대해 확실히 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제가 말한 것처럼, 저는 다른 대안이 없을 때 우리가 이전에 나온 질문들을 분명히 이해할 필요가 있고,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강의의 처음 몇 주는 걸릴 것입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는 데 1~2주 정도 걸릴 것이고, 그러고 나서 몇 주 이상, 적어도 한 주나 그 정도는 인간의 개별적 독자성의 본질에 대해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질 것입니다.
하지만 수업을 시작하기 전에, 우리의 전반적인 주제와는 정말로 상반된 질문이 있습니다. 따라서 그 철학적인 질문에 대해 논의하는 시간을 막 가지려던 참이었습니다.
죽음 이후의 삶이 있을까요? 죽음 이후에 삶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을까요? 죽음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이 질문 전체에 대한 철학적인 반대 의견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반대 의견은 꽤 간단합니다. 그 반론은 조금 전에 나온 질문들이 모두 잘못된 판단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하며, ‘혼돈’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번 그 ‘혼돈’에 대해 살펴보면, 우리의 질문에 대한 답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각자의 죽음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그 답은, 반대쪽에서 말하기를, 분명하게 ‘살아남을 수 없다’여야 합니다. 좋아요, 여기 그 반론이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읽게 되는 바로 첫 번째로 읽게 되는 것이 동시대의 철학자인 제이 로젠버그(1942년 4월 18일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태어나 2008년 2월 21일 노스캐롤라이나 채플 힐에서 사망. 미국의 유명 주립대학인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채플 힐의 철학과 교수였으며, 형이상학, 인식론, 언어철학, 칸트 철학의 역사에 대한 열 권의 책과 80편 이상의 글을 썼다.)가 쓴 책의 처음 한두 장이라는 사실을 언급해야 될 것 같군요. 그가 우리에게 이전의 반론을 제기한 사람입니다. 그 반론은 기본적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누군가가 죽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는 이렇게 답하죠. “죽음 이후의 삶이 있습니까?”
누군가가 이미 죽었다는 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리고 만약 그 반론이 맞는다면 이렇게 묻겠죠.
“죽음 이후의 삶이 있습니까?” 라는 건 단지 “삶의 끝에 또 다른 삶이 있는 것입니까?”라고 묻는 것뿐입니다. 그에 대한 답은 분명해야만 합니다. 글쎄요, 분명한 사실은 답이 ‘아니요’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만약 우리가 ‘우리의 삶이 한 번 끝난 뒤에 삶이 더 이상 지속될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다면 그건 ‘제가 접시에 있는 음식을 전부 먹었는데요, 제 접시에 음식이 더 남아 있나요?’나 ‘영화가 끝난 뒤에 영화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질문들은 어리석은 것들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이 질문한 것에 대해 한 번 알고 나면, 그 답은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소한 정답이죠.
따라서 사람들이 수세기동안 “죽음 이후의 삶이 있을까?”에 대한 의문을 가진 것이 거대한 미스터리 중 하나이며, 심사숙고하는 대단한 철학적 주제들 중 하나처럼 보였을지라도 반론은 일종의 환상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여러분이 한 번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면, 그렇게 오랫동안 고민하지 않더라도 답이 ‘아니오’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죽음 이후에 삶이 있을 수는 없습니다. 또한 삶의 끝에 또 다른 삶이 있을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조금 다른 방식으로 질문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제가 과연 죽음으로부터 살아남을까요?” “살아남다”라는 단어는 무엇을 의미할까요?
글쎄요, 생존이라는 것은 우리가 누군가가 어떤 일이 일어났는데 그들이 죽지 않았다면 ‘생존자’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교통사고가 일어났을 때, 여러분은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살아남았다고 말합니다. 이 사람은 살아남았습니다. 그들이 살아남았다는 것은 단지 그들이 여전히 살아있는 것뿐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과연 죽음으로부터 살아남을까?”라는 건 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제가 여전히 …… 이후에도 살아 있을까요?”
대체 죽음이라는 것은 뭘까요? 죽음은 삶의 끝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제가 살기를 멈춘 다음에도 여전히 살아 있을까요? 제가 죽었을 때 죽지 않는 사람들 중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이런, 그에 대한 답은 다시 말하지만 ‘아니오’입니다. 여러분은 죽음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없으며, 그건 정해져 있는 것입니다.
앞서 나온 질문은 우리에게, 적어도 저에게는 아마도 여러분이 했을 우스갯소리를 떠올리게 합니다. 여러분이 일곱 살 때 했을 법한 너무나도 웃기는 질문이죠.
정확히 캐나다와 미국의 국경 위에 비행기가 추락했습니다. 정확히 ‘국경 위’입니다. 사방에 죽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생존자들을 어디에 묻을까요? 답은 ‘여러분은 생존자들을 묻지 않는다’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곱 살이라면 “저는 잘 모르겠어요. 죽은 사람들이 살아남은 사람들을 캐나다에 묻었을까요, 아니면 미국에 묻었을까요?” 그에 대한 대답은 “너는 생존자들을 묻지 않았을 거야. 왜냐하면 생존자들은 아직 죽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란다.”입니다. 따라서 “저는 죽음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라고 질문하는 것은 “제가 …… 이후에 아직 죽지 않았을 수 있을까요?”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그에 대한 답은 ‘여러분은 만약 여러분이 과거 어느 시점에 죽었다면 지금도 죽은 상태인 것이고, 지금도 죽은 상태라는 것은 살아있지 않다는 겁니다.’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순조롭게 질문할 수가 없죠. 하지만 적어도 이것이 반론이 지향하는 바입니다.
제가 그 반론에 대해 완전히 무시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처음 1 ~ 2분 정도 반론에 대해 이야기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하지만 저는 반론에 대응하는 방법은 따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단지 정확하게는 그 질문이 우리가 묻고자 하는 것이라는 걸 더 분명하게만 하면 됩니다. 이것이 로젠버그 또한 확실히 하고 싶어 했던 것이기도 합니다. 여기 질문을 좀 더 정확히 하려는 제 시도가 있고, 그 질문은 ‘열린 질문(의견의 자유로운 표명을 구하는 문제 혹은 질문)’입니다. 우리는 정당하게 질문할 수 있는 겁니다.
글쎄요, 이제 여러분이 학기 중에 듣게 될 여러 가지 이야기들에서처럼, 저는 철학자입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건 제가 엄청난 양의 전체 사실을 다 알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제가 그 사실들을 알고 싶어 한다는 이야기에 대해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그 사실’들을 알고 있지 못합니다. 만약 제가 정말로 그럴 수만 있다면 저는 문을 열고 나가 손님으로 생리학자(생리학을 연구하는 학자. 생리학(生理學) : 생물의 생리 작용 전반에 관하여 연구하는 학문. 주로 기능적인 면에서 생명 현상의 영위를 자연 과학적으로 규명한다)를 모셔 올 것인데, 아마 그분은 제가 말하려는 것이 “어쩌고저쩌고”라는 사실을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생리학자 한 분을 모실 것이고, 그분께서 실제로 우리에게 이러한 것들에 대해 말씀해 주실 겁니다. 저는 그들을 모릅니다. 사실 저는 그런 사람을 데리고 오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죽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한 번 살펴봅시다.
의심할 여지없이, 여러분들은 사람을 다양한 방법으로 죽일 수 있습니다. 독살할 수도 있고, 목을 졸라 죽일 수도 있고, 가슴에 총을 쏴 죽일 수도 있습니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일반적인 방법들은 시작이 다를 수는 있어도, 저는 그러한 방법들은 하나로 수렴(收斂)되고, 결국 여러분들이 일련의 사건들을 겪게 될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일련의 사건이라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것이 바로 제가 자세하게는 모르지만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원래의 값은 어떠할지 모르지만, 결국 우리 몸속의 피는 순환하지 않게 되고, 그로 인해 산소 또한 우리 몸 안을 돌아다닐 수 없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뇌는 산소 부족 현상을 겪게 될 것입니다. 세포들은 산소 함유량 부족으로 인해 각자의 다양한 대사(代謝) 과정을 더 이상 수행할 수 없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 때문에 세포들은 그들의 활동이 필요한 다양한 종류의 부상도 치료할 수 없으며, 아미노산(한 분자 안에 염기성 아미노기와 산성의 카르복시기를 가진 유기 화합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 천연으로는 단백질의 가수 분해로 얻을 수 있다.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은 아미노기와 카르복시기가 같은 탄소 원자에 결합한 알파 아미노산이다. 글리신 ․ 아스파라긴 ․ 글루탐산 ․ 리신 따위가 있으며, 동물체 안에 들어온 단백질은 반드시 아미노산으로 분해되어 흡수된다.)이나 단백질(아미노산이 펩티드 결합(peptide 結合 : 단백질의 대표적인 결합 방식)하여 생긴 고분자 화합물. 탄소 ․ 산소 ․ 수소 ․ 질소 따위의 원소를 함유하고 있으며, 세포의 원형질을 구성하는 주성분으로, 사람의 3대 영양소 가운데 하나이다.) 등과 같은 물질도 생성해낼 수 없습니다. 따라서 부패가 진행되기 시작하며, 세포 구조들이 무너지고, 보통 때처럼 원상회복 될 수도 없기 때문에 결국은 결정적인 세포 구조의 급속한 붕괴, 즉 인간의 ‘죽음’이라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지금 제가 정확하게 말씀드렸는지도 잘 모르겠고, 어려운 이야기를 해 드렸는데,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 아마 맞을 겁니다.
전형적인 철학 수업 방식에서, 저는 여러분들을 위해 칠판에 그림을 그립니다. [그림 2.1을 보세요.] 제가 자세하게 모르는 사건들은 그냥 B1, B2, B3, … Bn이라고 합시다.
B1을 시작하기 전에, 여러분은 육체적인 방식으로 일하고, 기능하는 신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인공호흡을 하고, 세포를 다시 만들어내는 등의 일 말입니다. 그러한 과정의 마지막인 Bn 단계에서 육체는 죽습니다.
B라는 말은 육체를 나타내기 위한 것입니다. B1부터 Bn까지가 바로 죽음인 것입니다. 적어도 육체의 죽음은 나타내는 것이죠. 제가 말했던 것처럼, 육체는 의대생이나 생물학자, 생리학자 혹은 그러한 누군가가 우리를 위해 묘사해줄 수 있는 것입니다.
여기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위에서 말씀드렸던 과정을 “신체의 죽음”이라고 부르기로 가정해 봅시다. 위에서 말씀드린 일련의 연속된 사건들의 마지막까지 발생하는 그 무언가를 “신체의 죽음”이라고 부릅시다. 여기 우리가 여전히 물을 수 있는, 적어도 그럴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혹시’ 제가, 혹은 제가, 제 신체가 죽은 다음에도 여전히 존재할 수 있을까요? 혹시 제가 신체적인 죽음 뒤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을까요? 제가 어떤 방법으로든 여러분이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알게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가 논리정연하게 언급할 수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렇게 묻는 것에 대한 분명한 반대는 없습니다. ‘과연 제가 육체가 죽은 뒤에도 여전히 존재할까요?’ 답은 ‘아니오’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분명하게 ‘아니오’가 되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만약 답이 ‘아니오’라면, 한 가지 혹은 그 이상의 방법으로 남아 있는 한결같은 질문들이 나오게 될 겁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종합해 볼 때, 답은 ‘네’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질문은 우리에게 단지 육체가 죽은 뒤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지 아닌지가 ‘내가 누구인가’에 달려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키게 할 뿐입니다. 따라서 앞으로 이에 대해 잠깐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죠.
하지만 그건 계속 묻기에는 너무 무거운 주제입니다. 과연 우리는 ‘육체의 죽음’을 맞은 뒤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만약 우리가 묻고자 하는 질문에 대해 일단 명확하게 하거나, 만약 몇 가지 용어와 구호로 요약해 본다면 어떠한 어려움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제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나 ‘제가 죽은 뒤에도 계속 존재할 수 있을까요?’라고 질문하는 대신에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아마 이런 식으로 간략하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제가 죽은 다음에 살아남을까요?’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제가 제 죽음으로부터 살아남을까요?’ 왜냐하면 우리가 이 질문에 관한 맥락에서 각자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규정하고자 하는 바가 ‘육체의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역시 어떠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이렇게 말하기만 하면 됩니다. ‘제가 죽음으로부터 살아남을까요?’아니면 ‘과연 제가 죽음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이 문제에 관해서, 우리가 만약 이렇게 말한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겁니다. ‘죽음 이후에 삶이 있을까요?’ ‘제가 죽은 다음에도 여전히 존재할까요?’
따라서 저는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질문(앞서 나왔던 질문들)이 있고, 그 질문을 이 수업에서 다루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그건 이 질문에 답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제 ‘육체’가 죽은 뒤에도 계속 존재할 수 있을까요?” “죽음 이후에도 삶이 있을까요?” “제가 죽은 다음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간단하게 말해,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이 점에 대해 더 명확하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나’가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정확하게 무엇일까요? 이 질문은 우리가 2 ~ 3주 후에 공부하게 될 내용입니다. 처음으로,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종류의 독립체인가?’ ‘나는 무엇으로 이루어졌는가?’ 에 대해 좀 더 명확히 해야만 합니다. 철학적인 용어로, 이 질문들은 ‘형이상학(形而上學 : 사물의 본질, 존재의 근본 원리를 사유나 직관에 의하여 탐구하는 학문. 명칭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물의 제목에서 유래한다. ≒ 무형학)’에서 비롯된 것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이상학적 질문에 대하여 묻게 될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것이 사람인 걸까요? 사람이 죽은 뒤에도 살아남을 수 있거나 계속 존재할 수 있는지 없는지 여부는 사람이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는지, 무엇이 사람의 일부인지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두 가지 기본 입장에 대해서 여러분들께 개요를 제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람은 무엇일까요? 제가 말씀드리려는 두 가지 기본 입장은 제가 생각하기에 상당히 유사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그 두 가지 중 어느 입장을 취할 것인지 결정하는 것입니다. 오직 이 두 가지만이 인간에 대한 형이상학적 질문에서 가능한 장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 두 가지가 제가 생각하기로는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으로 우리의 수업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가장 가치 있는 것들입니다.
처음으로 가능한 입장은 사람은 육체와 또 다른 것, 즉 정신과의 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 첫 번째 관점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것은 영혼이라는 것이 육체와는 분리되어 있고, 독립적인 ‘생각’이라는 점입니다. 일반적인 어휘를 사용해 말하자면, 그것은 ‘영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육체와 영혼’이거나, 그것들을 가지고 있거나, 혹은 그것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영혼은 제가 말씀드린 대로 육체로부터 독립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육체는 이와 유사한 존재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육체는 살덩어리와 뼈, 근육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여기서 여러분들 앞에 않아 있는 존재이기도 하며, 여러분들 각자와 함께 붙어 다니는 일종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신체는 저울에 올려놓을 수도 있고, 막대로 찌를 수도 있고, 생물학자들이 연구할 수도 있으며, 짐작컨대 다양한 종류의 분자와 원자 등으로 이루어진, 그러한 종류의 ‘어떤 것’입니다.
하지만 이 첫 번째 시각에서 볼 때, 우리는 또한 육체가 아닌 것도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물리적인 물체도 아니고, 그러므로 분자와 원자로 구성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그것이 ‘영혼’이라는 것입니다. 영혼은 의식과 사고, 그리고 아마 인간적 특성의 ‘집’이거나 자리, 혹은 기초가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관점에서 중요한 사실은 영혼에 관해 적합한 형이상학적 이해는 그것을 비물리적 그리고 비물질적 용어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내용이 제가 말한 대로 첫 번째 기본 관점입니다. 그것에 대해 다음 몇 주에 걸쳐 조금 더 설명하기로 하겠습니다. 이번에는 이와는 다른 시각을 가진 기본 관점에 대해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 말한 첫 번째 관점을 우리는 ‘이원론적 관점(二元論 : 〈철학〉정신과 물질의 두 실재를 우주의 근본 원리로 삼는 이론. 17세기에 데카르트가 정신은 의식을 그 속성으로 하고, 물질은 연장을 속성으로 한다고 규정함으로써 근세 철학의 이원론이 성립하였다.)’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이원론은 물론 인간이 두 가지 구성요소, 즉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믿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입니다. 비록 제가 때때로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지만, 저는 “영혼”이라는 단어를 계속 사용하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저는 영혼이라는 것이 비물질적이고 비물리적인 대상이라는 사실에 따르는 이 이원론적 관점을 마음속에 새기면서 “영혼”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겁니다. 육체는 물질적인 존재이고 영혼은 비물질적인 존재라고 규정하는 시각, 그것이 바로 이원론적 관점입니다.
이제 우리가 생각해보고자 하는 대안적인 시각은 이원론이 아니라 ‘일원론(一元論 : 오직 일종(一種)의 실체(물질이나 정신)를 인정하는 철학. 일원론에는 관념론적 일원론과 유물론적 일원론이 있으나 세계의 근본은 하나이며 모든 것은 거기에서 전개되므로, 결국은 대립과 다양(多樣)이 통일로 환원된다고 보는 일원론도 있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일원론에서는 오직 한 종류의 기본적인 것만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오직 한 종류의 기본적인 것’은 육체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인간은 무엇인 걸까요? 인간은 물질적인 존재 중에서 특정한 하나의 종류일 뿐입니다. 사람은 단지 육체일 뿐입니다. 이것이 이 두 번째 관점이 주장하는 바입니다.
사람은 대부분의 다른 물질적 대상들은 할 수 없는 무언가를 해내는 존재입니다. 따라서 일원론적인 시각에서는, - 앞으로는 일원론 대신에 물리주의(유물론[唯物論, materialism] : 물질을 제 1차적 ․ 근본적인 실재로 생각하고, 마음이나 정신을 부차적 ․ 파생적인 것으로 보는 철학설. ※ 물리주의와 유물론이 같은 의미로 쓰이지만, 유물론은 물질 그 자체보다 훨씬 더 복잡한 개념에서의 물질과의 통합을 꾀하는 물리학에서부터 발달한 말이기 때문에 “물리주의”라는 용어가 더 적합하다.)라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물리주의는 사람을 단지 물질적 대상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 물리주의적인 시각으로 보면 사람은 단지 … 할 수 있는 육체 … 이제 여러분이 빈 칸을 채워 보십시오. 여러분이 할 수 있는 것을 가리켜 보십시오.
우리는 말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고, 노래할 수 있으며, 시를 지을 수도, 사랑에 빠질 수도, 두려워할 수도, 계획을 세울 수도, 그리고 세계에 대해 어떤 것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물리주의자의 관점에 따르면, 사람은 바로 이전에 언급한 것들을 모두 할 수 있는 육체일 뿐입니다. 인간은 심사숙고할 수 있고, 합리적이고, 대화할 수 있고, 계획을 세울 수도 있으며, 사랑에 빠질 수도, 시를 쓸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물리주의적 관점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에 대한 두 가지 기본 입장을 배웠습니다. 인간은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이원론이 있고, 영혼은 없다고 주장하는 물리주의적 시각이 있습니다. 영혼과 같이 비물질적인 대상은 없습니다. 오직 육체만이 있을 뿐이죠. 하지만 여러분이 지금 우리의 것과 같이 기능하는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물리주의자들이 ‘이러한 육체는 상당히 놀라운 일, 우리가 사람이 할 수 있다고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을 할 수 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기본 입장을 잘 기억해 주시기 바랍니다.
논리적인 관점에서, 저는 여러분이 세 번째 가능한 관점을 알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가 육체는 있지만 영혼은 없다고 말하는 일원론자를 안다면, 영혼은 있지만 육체는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이것은 거의 마음은 있지만, 정말로 물질적인 대상은 없다는 것에 따르는 관점이 될 것입니다. 물리적인 물체는 어쩌면 우리가 빠져들게 될 지도 모르는 환상과 같은 것의 일종입니다. 아니면 그들에 대해 물리주의적 용어로 생각하는 것은 대단히 혼란스럽거나 잘못된 것이 될 겁니다. 이러한 시각은 철학에서 이상주의(理想主義 : 현실의 궁극적인 본질은 마음 혹은 생각에 기초한다고 보는 철학 이론. 심리 철학적 관점에서 보면 이상주의는 현실의 궁극적인 본질이 물리적 실체에 기반을 둔다는 물리주의와 반대되는 개념이다.) 라고 합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고 생각입니다. 물리적인 대상은 단지 생각과 마음 혹은 그와 같은 것들에 대해 말하는 하나의 방법일 뿐입니다. 이상주의는 철학에서 매우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고, 많은 수업에서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는 관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목적은 그에 도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저는 그것에 대하여는 한 쪽으로 미뤄 놓을 생각입니다. 물론 이외에도 다른 많은 가능성들이 있지만, 제가 다룰 관점은 마음과 육체가 근본적인 현실성은 물리적이지도, 정신적이지도 않은 ‘같은’ 근본적인 현실성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입니다. 그 시각은 또한 형이상학 시간에는 세심하게 다뤄지겠지만, 이 시간에는 그것까지 하지는 않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한편으로 우리가 집중하게 될 두 가지 관점은 사람은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도 가지고 있다는 이원론적 관점과 우리가 가진 모든 것, 그리고 우리 전부는 육체라는 물리주의적 관점입니다.
이원론적 관점에 대해 좀 더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원론자들에 따르면, 마음은 우리가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는 비물질적인 실체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마음’이라고 부른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겠지만, 제가 대개 ‘영혼’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이원론적 관점의 중요한 점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마음은 비물리적이고 비물질적인 그 무언가에 기초하고 있거나 단지 그 자체인 것입니다.
… 한편 영혼은 육체에게 지시할 수도 있고, 명령을 내릴 수도 있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육체는 결국 영혼에 의해 감지되고 느껴지는 입력을 발생시킵니다. 여러분이 핀을 들고 제 살을 찌른다면 저는 제 영혼, 제 마음속에서 고통을 느낄 것입니다. 따라서 쌍방향 상호작용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죠. 철학에서 항상 그렇듯이, 상호작용이 두 방향으로 모두 일어나지 않는다는 더 복잡한 견해의 이원론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전의 양방향의 상호 영향적인 이원론에 대해서만 살펴보도록 합시다. 그에 따르면 제 마음은 제 육체를 통제합니다. 제 육체는 다양한 방법으로 제 마음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분리되어 있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사이에 단단한 연결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영혼은 육체 안에 있다고 말하지만, 이 자리에서 공간적인 위치에 대해 말하는 것은 다소 형이상학적으로 확장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마치 우리가 여러분이 육체를 열어 본다면 마침내 특정 지점을 찾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 영혼이 존재하는 장소가 있습니다. 이 이원론적 측면에서는 마치 영혼이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처럼 보이지만, 저는 이곳에서 세상을 보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 각자처럼 단지 세상을 특정한 장소에서 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아마 거의 여러분의 육체 부근에 여러분의 영혼이 자리 잡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중요한 점은, 우리의 시각으로 볼 때 이원론적 관점의 매력적인 요소는 만약 영혼과 함께 육체가 있고, 영혼이 비물질적인 것이라면 육체가 죽을 때, 우리는 B1부터 Bn까지 소유하게 되고, 그러고 나서 육체의 죽음이 발생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Bn의 끝에서, 육체는 그 자신을 수정하는 것을 멈춥니다. 쭉 계속될 기세로 부패가 진행되기 시작합니다.
우리는 모두 이 슬픈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벌레들이 시체를 갉아먹습니다. 하루가 끝날 때 - 글쎄요, 사실 하루보다는 좀 더 걸리겠죠. - 시체는 완전히 부패될 것입니다. 맞아요, 모든 것들은 ‘육체의 종말’을 시사(示唆)합니다. 하지만 만약 영혼이 비물질적인 것이라면, 영혼은 육체가 파괴된 뒤에도 계속 존재할 수 있을 겁니다. 그것이 이원론적 관점에서 적어도 하나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죠. 영혼에 대한 믿음은 여러분에게 여러분의 육체가 죽은 뒤에도 계속 존재할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줄 것입니다.
그렇다면, 죽음은 무엇일까요? 글쎄요, 만약 영혼과 육체 사이에 강력한 연관성이 있다면 죽음은 아마도 그 연관성을 끊는 현상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육체는 무너지고, 더 이상 영혼에 무언가 입력을 할 수도 없습니다. 영혼은 더 이상 육체를 통제할 수 없고, 둥둥 떠다니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혼은 아마 계속 존재할 것입니다. 그리고 적어도 제가 죽음으로부터 살아남을 것이라는 가능성은 만약 우리가 이원론자들이라면 매우,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이원론적 관점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제가 마치 사람은 영혼과 육체로 만들어진 샌드위치, 즉 조합체인 것처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두 가지 기본 토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육체적인 부분과 영혼적인 부분입니다.
그러한 식으로 말하는 건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만약 우리가 적어도 죽음 뒤에 삶이 있다는 가능성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영혼에 대해 믿고 싶어 한다면, 저는 사실 엄격하게 말해 우리가 사람이 영혼에 육체가 더해진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엄격하게 말해, 저는 우리가 사람은 단지 영혼이라고 말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만약 사람이 영혼에 육체가 더해진 조합, 짝이라면 육체를 파괴하고, 한 쌍 전체를 파괴하게 될 것입니다. 만약 사람이 영혼과 육체 한 쌍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그 한 쌍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람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우리가 육체의 붕괴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다는 가능성의 여지를 열어 두기 위해 영혼을 믿고자 한다면, 육체가 우리에게 있어 필수적인 부분이 아닌 것이 나을 겁니다.
더 간단하고 직설적으로 말해서, “나는 엄격하게 말하면 영혼이다.”입니다. 영혼이 존재하는 한, ‘나’도 존재합니다. 물론 영혼과 ‘나’는 특정한 육체와 강력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여러분은 원칙적으로 자신의 파괴 없이 육체를 파괴시킬 수 있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제가 살고 있는 집과 특히 가까운 연관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은 저를 무너뜨리지 않고도 제 집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원론자들의 탓으로 돌려야만 하는 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엄격하게 말해 영혼이라고 했습니다. 영혼은 육체와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지만, 사람은 ‘영혼과 육체’가 아닙니다. 사람은 단지 영혼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 밀접한 관계가 파괴되더라도, 사람, 즉 영혼은 계속 존재할 수 있습니다.
분명히 해야 할 두 번째 것은 우리의 흥미를 끌 만한 세 가지의 각기 다른 쟁점이 있다는 겁니다.
하나는 형이상학적으로 ‘육체와 영혼은 별개의 것인가?’라는 것입니다. 마음이 곧 영혼으로 설명될 수 있을까요? 아니면 각각 두 종류가 있는 것일까요? 이것이 첫 번째 질문입니다.
영혼과 육체는 분리되어 있습니까? 두 번째 질문은 이겁니다.
영혼은 설령 그것이 존재한다고 해도, 육체가 파괴된 후에 존속할 수 있을까요? 영혼은 생존과는 별개의 것입니다. 그것이 제가 만약 영혼이 있다면 적어도 그것이 우리가 죽음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 주는 길이라고 말하려고 했던 이유입니다. 하지만 영혼이 그 자체를 보증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추가적인 논증의 부재로 인해 영혼이 육체의 죽음으로부터 살아남는다는 보장이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어 있더라도, 그들은 육체가 파괴되기 시작할 때 바로 동시에 죽을 수도 있고, 파괴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물리적 작용, B1부터 Bn까지라는 현상이 발생할 때 영혼과 육체는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 무엇보다도, 우리는 상호 작용적 이원론자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육체와 마음, 혹은 영혼과 육체, 육체와 영혼 사이에는 이러한 아주 강력하고도 일반적인 연관성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제 몸을 찌를 때처럼, 그런 육체적 과정은 제 영혼에서 일어나는 특정한 것들을 촉발시킵니다.
아마도 B1부터 Bn까지가 일어날 때, 그들은 제 영혼에 또 다른 과정들을 일어나게 할 것입니다. 그 다른 과정들을 S1부터 Sn까지라고 부릅시다. 그리고 아마 S1부터 Sn까지는 제 영혼의 파괴를 의미하게 될 겁니다. 그러므로 제 육체가 죽음과 동시에, 제 영혼도 죽게 될 것입니다.
좋습니다. 이건 어떻게 표현해 내기가 약간 어렵군요. 첫 번째 부분, S1 … 이건 쉽네요. Sn이죠. 질문은 이겁니다. 어떻게 제가 영혼을 그릴 수 있을까요?
저는 정말 잘 모르겠습니다. [후광이 비치는 듯한 웃고 있는 얼굴을 칠판에 그립니다. 그림 2.2를 보세요.] 단지 우리가 궁극적으로 비물리적이고, 육체와 분리되어 있으며, 독립적인 존재인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만으로는 우리가 물리적인 죽음에서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은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후에 다룰 다른 문제입니다.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 될 겁니다. 어떠한 영혼이라도 있을까요?
다음 질문은 이겁니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가 그런 영혼들이 육체가 죽은 뒤에도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할 어떤 좋은 이유가 있을까요?
세 번째 질문은 아마도 여러분의 흥미를 끌 것인데, 바로 이겁니다.
만약 영혼이 살아남는다면, 얼마나 오랫동안 살아남을까요?
육체가 죽은 뒤에도 영혼은 계속 존재할까요?
영원히 존재할까요?
영혼은 불멸하는 것인가요?
우리들 중 대다수는 그것이 진실이길 바랄 겁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불멸할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에 영혼이 그러하길 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질문은 이것만이 아닙니다.
영혼은 독립적인가요? 영혼은 육체적 죽음에서 살아남을까요? 영혼은 영원히 존재할까요? 이러한 질문은 -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 특히 플라톤의 흥미를 끄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약 1주 정도 후부터 플라톤의 《 파이돈(플라톤이 남긴 《 대화편 》의 4대 대화 중 하나로, 소크라테스가 죽음의 독배를 마시던 날, 친구들과 주고받은 대화로 엮어졌다. 영혼은 불멸하며, 죽음은 영혼이 순수한 본질의 세계로 되돌아가는 것임을 입증하고 있다.)》을 읽기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 철학 작품에서의 대화의 목적은 영혼의 불멸에 대해 논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다음에 공부하게 될 질문입니다.
학생: [들리지 않는다]
셸리 케이건 교수: 훌륭해요. 질문은 이겁니다.
만약 우리가 여기서 이원론적인 밑그림을 바탕으로 공부하고 있는 것이 비물질적인 실체로서의 영혼에 대한 바로 그 생각이라면 그건 평범한 원자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만약 영혼이 비물질적이라면, 영혼은 물질적인 과정에 의해 파괴될 수 없다는 사실이 자동적으로, 간단하게 따라오지 않을까요?
이전에 B1부터 Bn까지 ‘육체의 죽음’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물질적이고 물리적인 과정입니다. 비물질적인 독립체인 영혼은 물질적, 물리적인 과정에 의해 파괴될 수 없다는 사실이 따라오지 않을까요?
그건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간략하게 말씀드리면 저는 그러한 사실이 자동적으로 따라오지는 않는다고 생각한다는 겁니다. 그것은 간단하게 따라오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따라온다는 건 맞습니다. 플라톤은 실제로 우리에게 그와 비슷한 훨씬 더 복잡한 논의점들을 줄 겁니다. 그는 일단 우리가 영혼의 형이상학적 본질의 종류에 대해 이해하고, 왜 영혼이 파괴될 수 없는지 알게 된다면 그에 대해 논쟁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 논쟁은 복잡한 주장들도 몇 가지 수반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 사실(물질적인 육체가 죽은 뒤에 비물리적인 영혼이 따라서 파괴된다는 것)이 간단하게 따라오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잘 기억해 두십시오. 저는 우리가 상호 작용적 이원론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육체가 영혼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맞습니까?
육체는 다양한 파장의 빛에 반응하는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 때문에 제 영혼은 제 앞에 앉아 있는 사람과 색깔 등의 수에 관한 다양한 시각적 감각을 가지게 됩니다. 제가 여러분이 제 몸을 찌른다는 예시를 들었었죠. 몸을 찌른다는 그 행동은 제 영혼에서 발생하는 정신적 과정들 속의 몇몇 변화를 초래하는 물질적인 과정입니다. 일단 우리가 이러한 류의 이원론적 밑바탕에서 물질인 육체는 비물질적인 영혼에서 일어나는 일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면, 우리가 올바른 물리적 과정인 B1부터 Bn까지가 영혼의 파괴라는 결과를 불러오며 이런 끔찍한 정신적, 영혼의 과정인 S1부터 Sn까지를 일으킬 것이라는 가능성에 대한 여지를 없앨 어떤 이유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가능성이며, 그건 그러한 여지를 배제하기 위한 더 많은 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학생: [들리지 않는다]
셸리 케이건 교수: 여기 또 다른 엄청난 질문이 있습니다. 그 질문은 이것이었죠.
저는 제가 이곳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제 영혼이 대략 이곳에 위치한다고 말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었습니다. 하지만 아마도 그것은 옳지 않을 겁니다.
아마 우리는 영혼의 위치에 대해서는 절대 말해선 안 될 겁니다. 결국에, 만약 영혼이 비물질적인 대상이라면, 그런 비물질적인 대상이 위치를 가질 수 있을까요? 저는 모릅니다.
간략히 답하자면 ‘저는 모른다’는 겁니다. 저는 어떻게 비물질적인 대상이 작동하는지에 대해 거의 아는 게 없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화요일에 설명 드린 것처럼 이원론적인 입장에서 설명하려 한다고 해도, 제 자신이 영혼에 대해서 믿지는 않습니다.
저는 사실 이원론적 시각이 맞는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그런 문제, 영혼이 공간적으로 위치해 있는지 아닌지를 떠나서 이원론적 시각을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가르쳐야 한다고 말할 겁니다. 저는 우리의 목적에 그것이 큰 문제가 되리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영혼이 위치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싶다면, 영혼은 어디에 위치해 있습니까?
아마 대략 몸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을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의 육체가 활동하는 한은 말이죠. 아마 육체가 죽은 다음에는 영혼은 육체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더 자유로이 돌아다닐 수 있을 겁니다. 때로 사람들은, 사실 우리가 이것에 대해 읽게 될 테지만, 자신의 육체를 떠난 경험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아마도 그러한 흔치 않은 경험을 하는 동안, 영혼은 육체로부터 떠나 자유로이 움직이다가 다시 돌아올 것입니다.
아니면 다시 말해, 영혼은 어떠한 위치도 가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건 제가 제 신체에 시각적인 입력을 준다는 사실로부터 만들어진 환상일 것입니다. 제 신체는 틀림없이 위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도 옳은 방향으로요. 리모컨으로 작동하는 TV와 이런저런 물건이 있는 방에 사람이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그는 뉴헤이븐의 방에 앉아 있다고 하더라도 시카고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고 있습니다. 글쎄요, 여러분은 왜 그가 그 자신이 (시카고로부터 온) 모든 시각적인 입력과 함께 시카고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덫에 빠지게 될 것인지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아마도 그건 어떻게 육체가 영혼과 함께 작동하는지에 대한 것일 겁니다. 우리는 ‘우리’라는 것이 우리의 육체가 있는 곳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건 정말로 형이상학적인 환상입니다. 저는 그에 대해서는 정말 모릅니다. 제가 우리에게는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그것이 훌륭한 질문이라고 하더라도 더 이상 그에 대해 여러분을 설득시키려고 하지는 않을 겁니다.
좋아요. 질문을 되짚어보도록 하죠.
첫째, 영혼이 있습니까?
둘째, 영혼은 육체가 죽은 뒤에도 살아남습니까?
셋째, 만약 그렇다면, 영혼은 영원히 사는 것입니까? 영원히 존재하는 것입니까?
영혼은 불멸의 대상입니까?
우리는 처음에 첫 번째 질문에 대하여 생각할 것입니다. ‘영혼을 믿을 만한 어떤 좋은 이유가 있나요?’ 그리고는 잠시 뒤에 두 번째, 세 번째 질문으로 넘어가겠죠.
‘영혼은 살아남거나, 더 정확히 말해, 불멸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인간의 본질에 대한 첫 번째 기본 시각입니다. 사람은 영혼이라는 비물질적이며 육체가 아닌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그 관점이 친숙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 중 상당수는 영혼에 대해 믿고 있을 테니까요. 영혼에 대해 믿지 않는 사람들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을 믿으라고 설득당한 적은 있을 겁니다. 전 여러분 모두가 영혼에 대해 믿는 사람을 알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매우 친숙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계속 물어야 하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이 옳은 것일까요? 그것이 맞는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이제 사람은 단지 육체일 뿐이라는, 두 번째 기본 관점인 물리주의자적 시각으로 돌아가 봅시다.
이 시각은 유물론적 관점입니다. 사람들은 단지 물질적인 대상, 생물학자들이 이리저리 찔러 보며 연구하는 종류의 것일 뿐입니다. 저는 이것이 결정적인 점이라고 생각하는데, 우리가 사람은 단지 육체라고 말할 때, - 물리주의자들이 의도하지 않는 바로 - 사람이 단지 ‘어떤’ 쇠락한 육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마치 각기 다른 물리적 대상들 사이에 중요한 차이점이 없는 듯한 것은 아닙니다. 어떤 물리적 존재들은 다른 물리적 존재들보다 훨씬 더 흥미로운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분필 조각이 있습니다. 이것은 물리적인 물건입니다. 단지 물체일 뿐입니다. 이것이 뭘 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그렇게 많지는 않을 겁니다. 저는 분필로 칠판에 글씨를 쓸 수 있습니다. 분필을 두 조각으로 부러뜨릴 수도 있죠. 여러분이 분필을 놓으면, 아래로 떨어집니다. 그리 흥미롭지는 않은 물질적인 ‘육체’입니다. 여기 휴대전화도 있습니다. 이것도 단지 물체일 뿐이죠. 휴대전화는 세상에서 제일 흥미로운 물리적인 대상은 아니지만, 분필 조각보다는 훨씬 더 흥미롭습니다. 휴대전화는 분필 조각은 할 수 없는 모든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물리주의자들이 옳다면, 여기에 ‘셸리 케이건’이라고 하는, 여러분을 위한 또 다른 물리적인 존재가 있습니다. 저는 상당히 매력적인 물리적 대상이죠.
지금 제가 거만해진 것처럼, 저는 일부러 제가 더 이상 여러분보다 매력적이지 않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물리주의자들에 따르면, 우리들 각자는 무언가 놀라운 것을 해낼 수 있는 단지 하나의 육체일 뿐입니다. 우리는 사고할 수 있고, 계획을 세울 수 있고, 판단할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무언가를 두려워하고 창조적이며, 꿈과 포부를 가지고 있고,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할 수 있는 육체입니다.
우리는 … 한 육체 … 여기 적당한 단어가 있군요. 우리는 ‘인간’인 육체입니다.
하지만 물리주의자적 입장에서는 사람도 단지 그냥 ‘육체’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계속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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