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강 : 영혼의 존재에 대한 논의(1부) - 죽음 : 케이건 교수 예일대학
영혼이 존재한다는 증거에 대해 토론한다.
먼저,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Inferences to the Best Explanation)"으로 알려진 일련의 논의들을 살펴본다. 즉, 눈에 보이지 않는 현상의 존재를 가정하여 일어나는 다른 현상들을 설명한다
셸리 케이건 교수:
오늘은 지난 시간에 미뤄뒀던 토론을 계속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관한 두 가지 주요 입장에 대해 이야기해 보았습니다.
한편, 우리는 이원론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원론적인 시각에 대한 개요를 설명하기 위해 상당한 시간을 할애했죠. 이원론적인 시각은 사람이 육체와 영혼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혹은 어쩌면, 엄격하게 말해서, 우리가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인간에게 필수적으로 필요한 부분은 오직 영혼뿐이지만, 영혼이라는 것은 특정한 육체와 상당히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원론적인 시각입니다. 이원론과 비교하여, 우리는 오직 육체만이 존재한다는 물리주의적 관점에 대해서도 배웠습니다.
사람은 우리들이 그러하듯이 단지 육체일 뿐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지난 시간에 마무리했던 중요한 내용은 비록 인간이 물리주의적 시각에서는 단지 육체라고 할지라도, 어떤 쇠락한 육체만이라는 건 아니라는 점입니다. 사람은 특정한 일련의 능력을 가지고 있고, 특정한 활동들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사고할 수 있고, 의사소통할 수 있고, 합리적이고, 계획할 수 있고, 무언가를 느낄 수 있고, 활동적이며, 이러저러한 일들을 할 수 있는 육체입니다.
이제 그러한 능력들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주장해 보려고 합니다. 우리의 목적을 봤을 때 저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러므로 때로는 그에 관한 실제의 고전적 목록 없이 그런 활동들에 대해 이야기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들을 단순하게 사람들이 소유할 수 있는 능력, 우리가 분필, 라디오, 자동차와 같은 다른 물리적인 물체들은 할 수 없는 일들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어떤 대상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능력’이라고 합시다. 그 용어를 알려 드리자면, 우리는 그러한 능력들을 ‘P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P는 인간을 뜻하죠. 아니면 그러한 능력들에 대한 물리주의자적인 다양한 시각들에 대해 이야기해 볼 수도 있습니다.
물리주의자들에 따르면, 인간은 다양한 ‘P 기능’ 을 만족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육체일 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P 기능을 하는 육체로서의 인간’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인간은 ‘P 기능을 하는’ 육체라고 말할 수도 있죠.
그것이 육체, 단순히 어떤 노쇠한 육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 생각이 무엇인지 살펴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정말로, 그것은 단순히 인간의 늙은 육체인 것은 아닙니다. 결국 만약 여러분이 제 심장을 향해 거침없이 총을 쏜다면 저는 피를 흘리며 죽어가겠지만, 우리 앞에 여전히 인간의 육체는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P 기능을 하는’ 육체는 가지고 있지 않죠. 우리는 생각할 수 있고, 계획할 수 있고, 의사소통을 할 수 있고, 창조적이며 목표를 가진 육체는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P 기능을 하는’ 육체를 지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시각에서는 마음이라는 것이 무엇일까요?
물리주의자적 관점에서,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 시각은 물리주의자적 관점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가장 말하기 좋은 것은 마음이 육체의 다양한 정신적 능력에 대해 말하는 방식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육체의 다양한 정신적 능력’이라는 것을 명사화해 봅시다.
우리는 명사인 ‘마음’을 사용해서 그것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마음에 대한 이야기는 단지 그것이 적절하게 기능할 때에만 (인간의) 육체가 지닌 그러한 정신적 능력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웃음’에 대한 이야기를 해 봅시다. 우리는 웃음이 있다고 믿습니다. 물리주의자들은 마음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단지 우리가 부정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는 모두 웃음이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웃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글쎄요, 웃음은 단지 그러한 것을 할 수 있는 육체의 능력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법일 뿐입니다. 이 특징은 우리가 우리의 치아를 드러내거나 하면서 우리의 입술로 하는 동작입니다. 그게 바로 웃음, 상당히 이상한 웃음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웃음’이라는 것은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신체 부위에 대한 목록을 작성한다면, 여러분은 치아, 입술, 잇몸, 혀에 대해서 언급하게 될 테지만, 웃음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원론자들처럼 웃음은 육체와 특별하고도 밀접한 관련성을 가진 이러한 가외(加外)의 비물리적인 것들이라고 결론을 내려야만 할까요? 음, 여러분은 그런 이원론적인 시각으로 상상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상당히 바보 같은 관점일 겁니다.
웃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단지 육체의 ‘웃을 수 있는 능력’에 대해 말하는 방법일 뿐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죠. 우리가 웃음이라는 명사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만약 여러분이 조심스럽지 않다면, 그것이 여러분으로 하여금 웃음이라는 것은 틀림없이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모든 형이상학적 난제(難題)들을 가지게 되는 것이죠.
웃음은 어디에 위치해 있는 걸까요? 웃음은 마치 입 부근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웃음은 입술이 아닙니다. 치아도 아닙니다. 따라서 웃음은 틀림없이 비물리적인 그 무언가일 것입니다. 아니, 그건 단지 웃음에 대해 생각하는 바보 같은 방법일 겁니다. 웃음에 대한 이야기는 단지 신체가 웃을 수 있고, 웃음을 만들 수 있다는 능력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방법일 뿐입니다. 웃음은 우리가, 우리의 신체가 지닌 능력입니다. 이와 비슷하게, 물리주의자들에 의하면 마음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가 그에 해당하는 명사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다양한 일들을 할 수 있는 육체의 능력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법일 뿐입니다.
마음은 단지 우리의 육체가 사고할 수 있고, 의사소통을 할 수 있고, 계획할 수 있고, 깊이 생각할 수 있고, 창조적일 수 있으며, 시를 쓸 수도 있고,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법일 뿐입니다. 이러한 모든 것들에 대한 이야기는 마음과 관련된 것이지만, 육체를 뛰어넘은 그 이상의 것은 없습니다. 이것이 물리주의자들의 시각이죠.
특히 물리주의자들의 시각에서 ‘마음은 뇌가 아니다’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아마도 “보세요, 물리주의자들에 의하면 마음은 단지 뇌일 뿐이에요.”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리고 그건 말하기 끔찍할 정도로 오해의 소지가 있는 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최고의 과학’에 의하면, 뇌는 우리에게 이런 다양한 능력들을 주는 ‘자리’ 혹은 ‘집’, 아니면 ‘근원적이고 기계적인 구조가 되는 육체의 일부’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P 기능’은 우리가 뇌의 장점으로써 지니고 있는 기능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여러분으로 하여금 물리주의자의 시각에서 마음은 단지 뇌일 뿐이라고 말하도록 유도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마도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겁니다. 어쨌든 여러분이 나를 쏜다면, 강단 위에는 제 시체가 누워 있게 됩니다. 글쎄요, 제 뇌는 있을 것입니다. 제 뇌는 여전 제 머릿속에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더 이상 ‘그 사람’을 보지는 못합니다. ‘그 사람’은 죽었습니다. ‘그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엄격하게 그것이 말하기에 최선의 방책이든지 아니든지 하는 것은 우리가 수 주 뒤에 주장하게 될 질문입니다. 하지만 뇌는 여전히 있을지라도 마음은 파괴되었다는 것은 상당히 분명해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적어도, 아마도 보통 그럴 필요는 없을 테지만,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 우리는 마음에 관한 이야기는 육체의 ‘P 기능’에 대해 말하는 방식이라고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최고의 과학’은 ‘잘 기능하는’ 육체는 뇌가 적절하게 기능하고 있다는 사실의 좋은 점에 따라 이러한 것들(P 기능)을 잘 수행할 수 있고, 사고하고, 계획하고, 사랑에 빠질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물리주의자적 관점입니다.
이원론적 시각에서의 죽음은 무엇일까요?
짐작컨대, 죽음은 마음과 육체와는 분리되어 있는 것, 어쩌면 육체의 파괴로 인해 영구적으로 분리되는 것일 겁니다. 그렇다면 물리주의적 시각에서의 죽음이란 무엇일까요?
글쎄요, 영혼이라는 독립체는 없습니다. 마음은 단지 육체의 고유한 ‘P 기능’일 뿐입니다. 따라서 마음은 그런 식으로 기능하는 육체의 능력이 파괴될 때 같이 사라집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죽음에 대하여는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하고, 몇 주 뒤에 우리는 하루 혹은 절반을 그(죽음)에 대해 명확하게, 그리고 좀 더 정확하게 하기 위해 시간을 쓸 겁니다. 하지만, 물리주의자적 시각에서는 죽음에 대해, 적어도 죽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한 기초적인 생각에 대해서는 의문이 없습니다.
저는 스테레오를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들을 위해 대형 휴대용 라디오 ․ CD ․ 카세트 플레이어(boombox : ghetto blaster, jambox, radio-cassette로도 알려진 boombox는 라디오 방송이 수신 가능하고, 보통 상당한 고용량의 CD나 테이프에 녹음된 음악 등을 재생할 수도 있다. 휴대용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boombox들은 배터리로 작동하고, 또한 전선을 연결해서 사용할 수도 있다.)를 들고 있고,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음악이 나온다는 건 이 boombox가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것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산산이 부숴버립니다. 글쎄요, 이것은 더 이상 올바르게 작동하지 못할 것입니다.
물리주의자적 관점에서 강조하는 다른 한 가지는 이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던 것처럼, 물리주의자들은 마음이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우리가 “우리는 단지 육체일 뿐이에요.” 라고 말하더라도 그것이 단지 우리가 어떤 노쇠한 육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그건 마치 물리주의자들의 관점이 “우리는 사고(思考)에 대한 환상을 가진 육체들이다.” 라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생각할 수 있는 육체입니다. 따라서 마음도 진짜로 있게 되는 겁니다. 물리주의자적 관점에 따르면,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영혼’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물리주의적 시각에서는 마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어떠한 위험도 없는 것처럼, 영혼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에도 제약이 없습니다. 그리고 특정한 맥락(물리주의자적 관점)에서 저는 완전히 편안하게, ‘이 사람에게는 영혼이 있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는 좋은 영혼, 혹은 나쁜 영혼을 가졌고, 어떻게 영혼이 제가 셰익스피어의 책 등을 읽을 때 드러날 수 있을까요?
심지어 물리주의자적 관점에서도 영혼에 대해 표현하는 것에 있어 나쁘거나 부적절한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이 수업에서는 제가 전에 말했던 바와 같이 우리가 혼란스러워지지 않게 방지하도록 노력할 것이고, 여러분이 다시금 제가 “영혼”이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걸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적어도 제가 이원론적 관점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는 “영혼”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말하게 될 겁니다. 중립적인 용어는 “마음”이 되겠죠.
우리는 모두 사람들이 마음이라는, 우리의 인격을 위한 ‘집’ 혹은 ‘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질문은 이것입니다. “마음은 무엇인가요?”
이원론적 입장에서의 마음은 영혼이고, 그 영혼은 비물리적인 대상입니다. 따라서 제가 “영혼”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어떤 영혼들은 비물리적인 것임에 따라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그 단어를 사용하기 위해 되도록이면 사용을 보류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와 반대로, 우리는 물리주의적 관점도 가지고 있습니다. 물리주의자들은 또한 마음에 대해서도 믿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마음이란 단지 육체의 능력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방법일 뿐입니다. 따라서 물리주의자들은 인간의 일부인 육체를 뛰어넘는 어떠한 비물리적인 대상에 대해서는 믿지 않습니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저는 물리주의자들과 유물론자들은 영혼에 대해 믿지 않는다고 말할 것입니다. 이 수업의 목적으로 봤을 때, 제가 마음에 대한 비(非) 유물론자적인 개념을 위해 “영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맥락에서는, 영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에 어떠한 위험도 없습니다.
여기 두 가지 기본 입장이 있습니다. 하나는 이원론적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물리주의적 관점입니다. 우리가 되짚어봐야 할 질문은 - 저는 단지 이원론적인 관점이 친숙한 것이기 때문에 물리주의자적 관점 또한 익숙하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이 믿든지 안 믿든지 어떤 사람들은 믿을 것이라는 사실에 익숙하고, 혹은 적어도 여러분은 (그것이) 진실인지 궁금해 할 것입니다. 과학이 우리가 물리주의적 관점에 대해 믿어야 된다고 할까요, 아니라고 할까요?
따라서 우리가 되짚어봐야 할 질문은 “이 두 가지 관점 중에서 우리가 믿어야 할 것은 이원론적인 입장일까요, 아니면 물리주의자적 입장일까요?” 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질문은, 아마도 “우리가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 믿어야 하나요?” 일 것입니다.
두 입장 모두 육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이해한 것처럼 이원론적인 입장은 오직 마음만이 있고 육체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관점이 아닙니다.
이원론자들은 육체가 있다고 믿습니다. 또한 육체와 함께 영혼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리주의자들은 육체는 있지만 영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육체가 있다’ 고 하는 공통점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 하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 각자는 여러분들 주위에 있는 일종의 ‘방해물’입니다. 역시 육체가 존재한다는 공통점이 있죠.
질문은 “육체를 넘어선 그 어떤 것이 있을까요?” 라는 겁니다.
과연 육체 그 이상의 어떤 것이 있을까요?
영혼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영혼이라는 것들이 있을까요?
이것이 우리가 몇 주간 고민해 볼 문제입니다.
만약 우리 자신에게 “우리가 영혼에 대해 믿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라고 묻는다면, 아마도 우리는 “우리가 어떤 것들에 대해서든지 믿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라고 질문하기 시작할 겁니다.
어떻게 우리가 어떤 것의 존재에 대해 증명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매일 접하는 친숙한 물건들을 놓고 볼 때, 답은 상당히 간단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오감(五感)을 사용해 그들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물건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의자가 있다는 것을 알까요? 글쎄요, 제 앞에 의자가 몇 개 있습니다. 눈을 뜨고, 의자들을 봅니다. 어떻게 제가 강의대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까요?(lecturn : ‘읽다’ 라는 뜻을 가진 라틴어 legere의 과거분사 lectus에서 유래한 단어로, 윗면이 기울어져 있으면서 그 판이 보통 기둥(stand, 臺) 위에 얹혀 있거나 다른 형태의 지지대에 고정되어 있다. 문서나 책을 큰 소리로 읽을 때, 성서 강독 시간, 강의 혹은 설교할 때 사용된다.) 음, 저는 그것을 보고, 만질 수 있고, 느낍니다. 어떻게 제가 나무들이 있는 것을 알까요? 저는 그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 새들이 있는 것을 알까요? 저는 새들을 볼 수 있고,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제가 사과들이 있는 것을 알까요? 저는 사과를 보고, 맛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죠.
이런 접근법은 분명하게 영혼에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혼은 -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어떤 비물질적인 것에 따른 형이상학적인 시각을 마음 속에 가지고 있습니다. - 우리가 볼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맛을 볼 수도, 만질 수도, 혹은 냄새를 맡거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의 오감으로는 영혼을 직접적으로 관찰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아마 궁금해 할 겁니다. 글쎄요, 제가 제 자신 안에 있는 ‘그것’을 어느 정도 직접적으로 관찰할 수는 없을까요? 제가 그런 류의 주장을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추측할지라도, 그것은 저에게 잘못된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오직 여러분 각자에게 잠시 동안 자기반성을 요구할 수 있을 뿐입니다.
여러분 마음으로 돌아가서 질문해 보십시오. 여러분 안에 있는 영혼이 보이십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제 바깥에 있는 것들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제 신체의 특정한 감각들을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이 마치 제가 영혼을 관찰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제가 영혼에 대해 믿는다고 해도, 그것을 볼 수는 없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볼 수 없거나 소리를 들을 수 없고, 맛보기 등을 할 수 없는 것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을까요? 일반적인 방법은, 아마도 이 방법밖에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이런 것일 겁니다. 때때로, 우리는 우리 모두가 발생한다고 동의하는 그 어떤 것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의 존재도 상정(上程)합니다. 왜 우리가 원자의 존재에 대해서 믿는 걸까요? 저는 각각의 원자들은 볼 수 없습니다. 왜 제가 너무 작아서 볼 수도 없는 원자의 존재에 대해서 믿을까요? 원자 이론(atom theory : 화학과 물리학에서, 원자 이론은 물질의 유형에 대한 것이다. 원자 이론은 물질이 ‘원자’라고 불리는 별개의 구성 단위로 이루어져 있다고 진술하고 있는데, 이는 물질이 임의적으로 어떤 작은 ‘양’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는 기존의 개념과는 반대된다. 또한 고대 그리스와 인도에서 철학적인 개념으로 시작된 이론이기도 하다.)이 그에 대해 설명해 주기 때문입니다. 제가 상호작용을 하고, 결합하고, 증강시키는 특정 구조들과 방법으로 원자의 존재에 대해 상정할 때, 불현듯 저는 물리적인 세계에 대한 모든 것들을 설명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저로 하여금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도록 하는 어떤 사실에 기초해 원자의 존재에 대해 추론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문제와도 같습니다.
어떻게 제가, 왜 제가 그것을 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X-레이에 대해 믿는 것일까요? 그렇게 하는 것이 제가 어떤 것을 설명할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입니다. 왜 제가 어떤 행성들은 너무 멀어서 망원경으로 직접적인 관찰이 어렵다는 것을 믿을까요? 그것들을 상정하는 것이 항성(恒星)들의 자전 혹은 중력의 변동 등과 같은 것들에 대해 설명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다른 방법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해 설명이 가능하게 해줄 때, 우리가 볼 수 없는 것들의 존재에 대해 추론합니다.
이러한 종류의 논쟁은 아주 흔하며,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리(Abductive reasoning(귀추적 추론) : 귀추(歸趨, abduction)란 찰스 샌더스 퍼스(1839.9.10-1914.4.19의 미국의 철학자 ․ 논리학자. 프래그머티즘의 창시자이다. 그에 의하면, 개념이란 그 개념으로부터 나오는 실제적인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W.제임스, J.듀이에게 계승되었다.)가 소개한 논리적 추론 방법인데, 귀납(歸納)과 연역(演繹) 이전의 방식이다.
귀추는 보통 추정(hypothesis)과 같은 의미로 쓰이지만 실제로는 추정을 만들어내는 추론 과정을 의미하며, 추정은 그 과정에 의한 결과를 나타낸다.)”라고 불립니다.
저는 이 “최선의 설명”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 강조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는 것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고, 단순하게 그것들이 우리에게 무언가 설명을 해 줄 때가 아니라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설명’을 해 줄 때입니다.
보십시오. 왜 제가 제 눈에 보이지도 않는 세균이나 박테리아 등에 대해서도 당연하게 생각할까요? 왜냐하면 그렇게 믿는 것이 저로 하여금 왜 사람들이 아픈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이것 말고도 저로 하여금 눈에 보이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고 믿게 하는 다른 것들이 있습니다.
악마는 어떤가요? 저는 악마에 대해 믿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왜 사람들이 병들어 죽습니까? 글쎄요, 아파서 죽는다는 것은 악령에 홀린 것일 수도 있습니다.”
왜 제가 악마의 존재에 대해서는 믿지 않을까요? 그것은 있을 수도 있는 설명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단지 기존의 어떤 설명이 아니라 “최선의 설명”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두 개의 서로 대립하는 설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대략, ‘세균 이론’과 ‘악마 이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만 합니다.
“이 두 가지 설명 중에서 어떤 것이 질병에 대한 설명을 하기에 더 좋은가요?”
누가 질병에 걸립니까? 질병으로 인해 누군가가 죽을 때, 어떻게 질병이 퍼지는지, 어떻게 우리가 치료받을 수 있는지와 관련이 있겠죠.
사실, ‘세균 이론’으로는 질병에 대해 설명할 수 있지만, ‘악마 이론’으로는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세균 이론’이 더 적합한 설명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세균에 대해서는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만, 악마에 대해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좋아요,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우리 자신들에게 물어봐야 할 것은 “영혼은 무엇인가?” 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혼을 관찰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영혼에 대해 주장할 수 있는 방법은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육체 이상의 것, 육체를 뛰어넘은 비물질적인 대상인 영혼의 존재를 상정한다면 우리가 설명할 수 있는, 설명이 필요한 것들이 있을까요?
만약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육체로만 한정한다면, 영혼의 존재가 우리가 가지고 있을 설명보다 더 좋은 설명이 될까요? 여러분들은 아마 우리의 목적에 맞게 이런 종류의 논쟁에 가장 쉬운 방법을 선택할 겁니다.
우리와 관련해서 물리주의자들이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을까요? 사람에 대해 물리주의자들은 어떠한 결과도 얻을 수 없지만, 만약 우리가 이원론자라면 이런 특성들을 설명할 수 있는 의문점이나 수수께끼가 있을까요?
‘특성 F’와 같은 것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보세요, 우리가 영혼을 볼 수는 없지만 영혼에 대해 믿는 이유는 있어요. 왜냐하면 영혼의 존재에 대해 상정하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특성 F’에 대해 설명할 수 있게 해 주는데, ‘특성 F’는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모두 동의한 거예요.”
여러분이 물리주의자적 관점에서 사랑에 관해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진실이라고 가정해 봅시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사람은 사랑에 빠질 수 있고, 영혼은 우리가 사랑에 대해 설명할 수 있도록 해 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영혼에 대한 주장을 했습니다. 그것은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리”의 한 예가 될 겁니다. 이제, 중요한 점은 “'특성 F'와 관련된 것은 무엇인가요?” 라는 것입니다.
물리주의자적 입장에서는 설명할 수 없어서 우리가 물질 이외의 것에 호소해야 할 필요가 있는 어떤 특성이 있을까요? 아니면 물리주의자적 입장에서는 ‘악마 이론’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설명만 할 수 있는 걸까요? 그리고 만약 우리가 비물리적인 어떤 것에 호소한다면 더 적절한 설명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정확한 F를 찾을 수 있고, 그리고 물리주의자들은 그에 대한 설명을 전혀 할 수 없거나 형편없을 것이고, 이원론자들이 더 적절한 설명을 할 수 있는 토론을 해 나간다면, 우리는 영혼에 대해 믿을 이유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철학에서의 모든 논쟁들처럼, 그것에 대한 건 잠정적인 주장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어느 정도 다음 토론이 무엇일지에 대해 살펴볼 때까지는 영혼에 대해 믿는 이유를 다소 가지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은 우리에게 영혼에 대해 믿는 몇 가지 이유를 줄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께 “‘특성 F’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라고 묻고 싶습니다. 어떤 특정한 ‘특성 F’가 있는 것일까요? 아마 우리가 정말로 하고 있는 것은 일련의 토론을 열심히 하고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일 겁니다.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리”는 영혼에 대한 단일(單一) 주장이 아닙니다. 그것은 상당히 어떤 종류의 토론을 위한 ‘이름’입니다. F가 무엇인지 여러분들이 답을 채우는 것을 바탕으로, 특별한 그 특성이 무엇인지, 혹은 우리가 영혼에 호소함으로써 설명하려고 하는 사실이 무엇인지, 우리는 다른 주장을 하게 될 겁니다.
따라서 우리들 스스로에게 질문해 봅시다.
“우리에 대한 이런 것들을 설명하기 위해서 영혼에 호소해야 하는 것이 있나요?”
여기 첫 번째 답변이 있습니다.
사실, 저는 우리가 살펴보게 될 두 가지 개괄적인 특성의 집단을 구별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하나의 접근 방법은 우리에 관해 평범하고, 친숙하고 일반적인 사실에 중점을 두고 있다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하고, 사고하고, 감정을 느낀다는 등의 사실은 우리의 일반적인 특성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러한 것들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나서, 그 다음에는 우리가 기이하며 초자연적인 것이라고 여기는, 설명이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 말할까 합니다.
아마 죽음 혹은 ‘영혼’이라는 용어로 설명이 필요한 임사(臨死) 체험(임사 체험(NDE, a near-death experience)은 임박한 죽음과 관련된 다양한 개인적인 경험과 관련이 있는데, 육체로부터의 분리 ․ 공중부양 ․ 극한의 공포 ․ 완전한 평온, 안전함 혹은 따뜻함 ․ 완전한 소멸의 경험, 그리고 빛의 존재(신(神)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음.)와 같은 있을 수 있는 다양한 감정들을 아우른다. 어떤 이들은 임사 체험을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후 세계로의 ‘정신적인 짧은 경험’으로 보기도 한다.)과 관련된 어떤 초자연적인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것들을, 아니, 우리에 대한 평범하고 일상적이며 단순한 사실들부터 시작할 겁니다. 그들이 평범하고 익숙하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가 ‘그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영혼에 호소해야 할 필요가 있을 여지는 남아 있습니다.
이건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익숙한 사실부터 시작하게 될 것인데, 그 사실에 대해서는 제가 여러분께 몇 번 강조했었고, 따라서 여러분은 ‘죽은’ 육체를 가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시체가 될 수도 있는데, 그건 분명하게 사람은 아닙니다. 살아 있는 생명체는 아니죠.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무 일도 할 수 없습니다. 단지 누워 있을 뿐입니다. 반대로 여러분들의 육체와 제 육체에는 생기가 있습니다. 저는 제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제 입은 위아래로 벌어지고, 제 몸은 강단 위 이곳저곳을 걸어 다닙니다. 아마 우리는 무엇이 육체를 생기 있게 만드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영혼에 호소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겁니다.
그 생각은, 영혼과 육체가 분리될 때, 이원론자들이 설명하듯이, 영혼은 육체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소실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육체에는 더 이상 생기가 없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생기 있는 육체와 생기가 없는 육체, 혹은 죽은 육체의 차이점에 대한 가능한 설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영혼이 육체와 알맞은 방법으로 연결되어 있을까요? 여기에도 가능한 설명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보세요, 물리주의자들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할 수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시체가 되었다고 해도 모든 물리적인 부분은 여기에 남아 있기 때문이죠. 적어도 부패가 시작되기 이전의 시체라면요.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과 제가 가진 것과 같은 육체의 생기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존재에 호소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라고 말할 것입니다.
글쎄요, 제가 일련의 주장들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 볼 것이라고 말씀은 드렸지만, 그것이 …… 불이 잠깐 꺼졌군요. 왜 그런지는 모르겠습니다. …… 제가 그 모든 주장들이 맞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수업 첫날에 저는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고 알려 드렸습니다.
따라서 제가 각각의 주장들에 대해 열심히 공부할 때 “저는 영혼의 존재에 대해 믿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말해드리죠.” 라고 말씀드린다고 하더라도 여러분들은 전혀 놀라지 않을 겁니다. 저는 제가 막 개요를 설명해 드리려는 주장을 - 그리고 제가 처음으로 막 설명을 시작한 것이 - 여러분들이 심사숙고하고 마지막에는 제 의견에 동의할 수 있었으면 하고 희망합니다. 그래요, 그런 주장들이 전부 맞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저에게 더 중요한 것은 적어도 여러분들이 각각의 주장에 대해 생각해 봤으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혼의 존재에 대한 설득력 있는 주장일까요? 만약 여러분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제 반대 의견에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이 주장이 올바르지 않다면, 여러분이 더 좋다고 생각하는 영혼의 존재에 대한 주장이 있습니까?
첫 번째 주장에서, 여러분들은 육체가 살아있음을 설명하기 위해 영혼이 필요합니다.
물리주의자적 시각에서는, 물론 그 답은 “너무 빠르다”가 될 것입니다. 살아 있는 육체를 가지기 위해서는 여러분이 ‘기능하는’ 육체를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여러분이 시체일 때는 육체의 모든 부분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적절하게 기능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시체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육체가 망가졌다는 것뿐입니다. 제가 전에 말씀드린 제 스테레오를 기억하십니까? 저는 제 스테레오를 떨어뜨렸습니다. 바닥에 떨어져서 더 이상 작동하지 않습니다. 음악 재생을 멈추죠. 제 boombox는 음악 재생을 멈췄습니다. 그것은 …… 이기 때문인 것은 아닙니다. 스테레오 안에는 음악 CD가 있었고, 배터리도 있었습니다. 스테레오 전체를 떨어뜨렸죠. 그건 마치 이전에 거기에 무언가 비물질적인 것이 있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전의 스테레오와 같은 것이 지금도 있기는 하지만 현재는 망가진 상태입니다. 올바르게 조립된 상태가 아닌 것이죠. 전기가 전선을 통해 배터리로부터 음악 CD로 흐르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리주의자적 관점에서는 물리적인 대상이 망가질 수 있다는 생각에 아무런 의문점도 없습니다. 우리가 스테레오가 올바르게 조립되어 적절한 방법으로 작동할 때 무엇이 각각의 부분을 작동시키는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필요는 있지만, 물리적 대상 그 이상의 어떤 것에도 호소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가 그 주장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우리가 “여러분들은 단지 육체가 이리저리 움직이며 팔다리를 마구 흔들기 위해서라는 것뿐만이 아니라 목적에 알맞게 움직인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영혼에 호소해야만 해요.” 라고 말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줄을 잡아당길, 우리의 육체를 이끌 어떤 것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영혼이 하는 일이고, 이원론자들이 주장하는 바입니다.
이에 호응하여, 물리주의자들은 “그래요, 육체가 아무런 목적 없이 이리저리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라고 말할 겁니다. 인간의 육체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육체를 이끌 무언가가 필요하지만, 왜 단지, 육체의 어떤 특정한 부분이 명령 모듈 기능을 할 수는 없는 걸까요? 제가 비행기를 추적하는 열 감지 미사일을 가지고 있다고 해 봅시다. 비행기가 재빨리 피하려고 할 때, 미사일은 이동 방향을 수정합니다. 마구잡이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목적을 가지고 움직입니다. 여기 설명하기 더 좋은 것이 있는데, 미사일을 조종하는 미사일의 ‘움직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사일의 움직임은 미사일이 하는 일 중 특정한 일부일 뿐입니다.
좀 더 크게, 우리는 다양한 임무를 수행하는 어떤 종류의 로봇을 만드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 로봇은 아무렇게나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로봇 내부의 CPU(Central Processing Unit, 중앙처리장치 : 명령어의 해석과 자료의 연산, 비교 등의 처리를 제어하는 컴퓨터 시스템의 핵심적인 장치. 모든 컴퓨터의 작동 과정이 중앙처리장치의 제어를 받기 때문에 컴퓨터의 두뇌에 해당한다.)의 명령에 따라 임무를 수행합니다. 물리주의자들은 우리들이 육체가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통제받는 어떤 목적적인 방법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영혼에 과장될 만큼 호소할 필요는 없다고 말합니다.
각각의 반대 의견에 대한 재반론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원론자들이 돌아와서 “보십시오. 열 감지 미사일이나 로봇과 같은 경우라면 그것들이 어떤 일을 하고 있다고 해도 단지 명령에 복종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 명령은 그들 외부의 어떤 것으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무언가가 로봇 혹은 미사일의 프로그램을 설정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도 육체를 작동시키는 육체 이외의 어떤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 어떤 것이 영혼이 될 수 있습니다.
여기 더 어려운 질문이 있습니다.
육체 밖에 육체를 통제하는 무언가가 정말로 있을까요?
하나의 가능성은 사람들은 단지 로봇과도 같으며, 우리가 외부에서 명령을 받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종교적이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관점은 하느님이 흙으로 아담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단지 특정한 종류의 로봇에 불과했습니다. 하느님이 아담에게 숨을 불어넣자, 아담이 생기를 띄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단지 하느님에 의해 외부에서 명령을 받는 로봇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로봇이 그런 것처럼 우리 이상의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한 가지 가능한 답변입니다. 다른 답변은 물론 왜 우리가 더 많은 로봇을 만들어내는 로봇을 가질 수 없냐는 겁니다. 그리고 만약 여러분이 “명령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요?” 라고 묻는다면, 그에 대한 답은 “로봇을 만들 때 그들이 수행할 특정 명령을 가지도록 하는 방법으로 만듭니다.”입니다.
사람들이 유전 암호(genetic code : 단백질을 구성하는 아미노산의 중합의 순서, 수를 지령하는 정보로 DNA상의 네 종류의 염기 A(아데닌), T(타이민), G(구아닌), C(사이토신)의 배열을 지시하는 유전적인 암호. 대부분의 유전자가 동일한 규칙을 따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유전암호를 '표준유전암호(standard genetic code)' 또는 '유전암호'라고 한다. 하지만 표준유전암호의 규칙을 벗어나는 경우도 있다.)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어쩌면 그것도 우리에게 우리가 해낼, 혹은 특정한 선천적인 심리 작용과 같은 것과 같은 다양한 지시를 내릴 겁니다.
이 주장은 곧 엉망진창이 되고 맙니다. 영혼을 믿는 사람들은 “이것 보세요, 우리는 단지 로봇이 아니에요. 우리는 우리가 수행할 뇌에 입력된 몇 가지 프로그램만을 가진 로봇이 아니라고요. 우리는 자유 의지(free will : 자신의 행동과 결정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인간이 자유 의지를 전적으로 가지는지, 부분적으로 가지는지, 전혀 가지지 못하는지에 대해 논의가 있었는데, 자유 의지에 관한 문제는 인과 관계에서 인간 자유와 자연 법칙의 비중을 얼마로 볼 것인가와 관련돼 있다. 서양 철학은 자유 의지와 관련해 크게 양립가능론(compatibilism), 양립불가론(incompatibilism)으로 나뉜다.)를 지니고 있어요. 로봇은 그렇지 못하죠. 우리에게는 로봇이 가진 것 이상의 것이 틀림없이 있을 거예요. 우리는 단지 물리적인 대상인 건 아니니까요.” 라고 말하고 싶어 하기 시작할 겁니다.
이건 흥미로운 주장이고, 저는 이것이 새로운 의견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왜 인간의 육체가 움직이는지, 왜 우리는 생기가 도는지 혹은 왜 우리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영혼에 호소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개념으로 수업을 시작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그렇게 하기 위해서 영혼에 호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꽤 확실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물리적인 육체에 호소하는 것은 생기 있는 육체와 생기가 없는 육체의 차이점, 어떻게 육체가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지에 관한 설명을 하기에 충분합니다.
만약 두뇌가 우리의 CPU라면, 우리는 로봇이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행동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초기의 주장은 그다지 설득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 새로운 주장이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 한 사실이 어떤 것인지 … 우리는 어떤 주장들의 집단이 있는데, 그 주장들은 모두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리’ 라는 기본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여러분은 ‘특성 F’를 설명하기 위해서 영혼을 필요로 한다고 말했었습니다. 이것을 다른 ‘특성 F’에 연결시키면 여러분들은 새로운 주장을 얻게 될 겁니다.
우리가 처음에 시작했던 - 여러분은 육체의 ‘생기’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는 영혼에 호소할 필요가 있습니다. - 이 주장은 제 생각에 올바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새로운 주장이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자유 의지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서는 영혼을 필요로 합니다. 이 주장에 대해서는 이후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주장이죠. 중요하게 받아들여지는 주장이지만, 나중에 공부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특성 F’를 설명하는 데 필요한 다른 몇 가지 것들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누군가가 “보세요, 우리가 왜 육체가 규칙적으로 이리저리 움직이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영혼에 호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사실이에요. 하지만 사람들은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죠.”
그리고 그 주장은 … “한낱 육체는 가질 수 없고, 물리주의자들은 설명할 수 없는 능력이죠. 사고할 수 있고, 추론할 수 있는 능력이에요. 사람들은 믿음과 욕구를 가지고 있죠. 그리고 어떻게 그들의 욕구를 만족시키는지에 관한 그들의 믿음에 따라 계획을 세워요. 사람들은 ‘전략’을 가지고 있어요. 사람들은 무엇을 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요. 이러한 것들은 우리에 관한 일련의 사실들 - 믿음, 욕구, 추론, 전략, 계획 - 여러분이 영혼에 호소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어요.”
그리고 그 주장은 … “인간이 하는 일련의 행동에 대해 설명하기 위한 것이죠. 한낱 기계들은 믿을 수도 없고, 욕구를 가질 수도, 추론할 수도 없어요.” 라고 말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여러분들이 단순한 기계에 집착할 때, 왜 그런 종류의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지 알아보는 것은 쉽습니다. 믿음 혹은 욕구, 목표, 추론으로 설명하기에는 부자연스러운 수많은 기계들이 있다는 것은 상당히 분명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가진 잔디 깎는 기계가 잔디 깎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해 봅시다. 설령 이 기계가 잔디를 깎는다고 해도, 그것이 어떤 욕구를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그 스스로 “어떻게 내가 나를 피하려는 잔디를 자를 수가 있을까?” 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왜 우리가 한낱 기계는 생각할 수도, 추론할 수도 없고, 믿음 혹은 욕구를 가질 수도 없다고 말하는 것에 끌리는지 살펴보는 것이 쉽다는 것입니다.
이 주장은 요즈음엔 제가 20년 혹은 40년 전이라고 생각하는 때보다 훨씬 주목도가 떨어집니다. 복잡한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컴퓨터 시대에는 믿음, 욕구, 추론 그리고 계획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약간이나마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따라서 제가 체스를 둘 줄 아는 컴퓨터를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집에 있는 제 컴퓨터에는 그것이 체스를 둘 수 있게 하는 프로그램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제 자신은 체스를 둘 줄 모릅니다. 이 프로그램은 저를 완전히 이길 수 있습니다. 제가 제 비숍을 움직이고, 컴퓨터는 퀸을 움직입니다.
우리가 컴퓨터에 대해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왜 컴퓨터가 퀸 혹은 가상의 퀸을 움직였던 것일까요? 왜 컴퓨터가 퀸을 움직였을까요? 자연스러운 대답은 컴퓨터가 왕이 노출되어서 제 비숍을 잡아 저를 막으려고 한다는 사실을 걱정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이것이 우리가 컴퓨터가 작동시키는 프로그램에 대해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욕구를 프로그램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컴퓨터가 게임에서 이기기 위해 궁극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부수적인 욕구는 제 킹을 잡기 위해 컴퓨터의 킹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특정한 욕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는 컴퓨터의 다른 체스 말들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컴퓨터는 특정 경로를 막거나 제 쪽의 다른 말들을 이동하기 어렵게 만듦으로써 어떻게 ‘보호’ 활동을 할 것인지에 관한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그 목표를 어떻게 달성할 것인지에 대한 믿음도 말이죠. 그러고 나서, 컴퓨터는 제 움직임에 따라 합리적인 방식으로 움직임으로써 그러한 믿음과 욕구들을 실행에 옮길 것입니다. 마치 체스를 두는 컴퓨터에 대해 그것이 믿음, 욕구, 목적, 목표, 추론과 같은 것들을 모두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이 제한된 범위에서는 합리적일 수도 있습니다. 컴퓨터는 오직 체스만을 둘 수 있죠. 하지만 또 다른 범위에서는, 컴퓨터는 그러한 모든 활동을 할 수 있지만, 아직 우리는 ‘컴퓨터가 비물리적인 부분을 가지고 있을까?’ 라고 말하는 것에 끌리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컴퓨터가 그러한 것들을 모두 행할 수 있는지 정확히 물리적인 용어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물론, 여러분이 이러한 방식으로 컴퓨터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컴퓨터가 수행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넘나들며 이야기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이원론자로서 “우리가 컴퓨터에 대해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컴퓨터를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면서 그것이 믿음과 욕구 같은 것들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다뤄도 실제로 컴퓨터가 의미 있는 믿음과 욕구를 가지고 있지는 않아요. 왜냐하면 컴퓨터는 어떠한 믿음이나 욕구도 가지고 있지 않고, 어떠한 물리적인 물체도 믿음과 욕구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에요.” 라고 말하는 것은 완전히 여러분에게 열려 있습니다. 이러한 반응에 대해, 저는 “그건 단지 편견이 아닐까요?”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물론, 만약 여러분이 어떠한 물리적인 물체도 실제로 믿음 혹은 욕구를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믿음과 욕구를 체스를 둘 수 있는 컴퓨터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데 빠지게 될 때, 컴퓨터가 그러한 것들을 따르게 된다면 우리는 환상에 빠져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한 번 어떤 물리적인 물체도 믿음이나 욕구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계속 따라붙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이 컴퓨터가 믿음이나 욕구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이유인 걸까요? 컴퓨터에 믿음이나 욕구를 부여해 주지 않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불분명합니다.
여기 가능성이 있습니다. 욕구는 얼마간이라도, 적어도 전형적인 경우에서는 일련의 감정들과 매우 가깝게 묶여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여러분은 제 퀸을 잡고 저를 깨부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체스를 둘 때 흥미진진할 겁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가진 말이 위험에 처했을 때는 걱정할 것입니다. 물론, 더 일반적으로 여러분의 여자 친구 혹은 남자 친구가 여러분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 여러분은 흥분될 것이고, 심장은 두근거릴 것입니다. 시험에서 나쁜 성적을 받았을 때, 여러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될 겁니다.
아마 실제로 벌어지는 일은 전적으로 행동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는 욕구의 한 면이 있다는 생각이고, 그것은 만약 우리가 그 목표를 가지고 있다면 이해가 되는 방향으로 그러한 조각들을 이리저리 이동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아마도 기계가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기계는 가질 수 없지만 우리는 분명히 가지고 있는 욕구의 한 측면, 바로 감정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아마 우리는 욕구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으로 그런 감정적인 부분을 만들어내고 싶어 할 겁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기계는 정신적인 삶을 살지 않고, 그러한 삶을 가질 수 없다고 말하고 싶다면, 우리가 정말로 의미하는 바는 어떤 기계도 감정적인 것을 느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확실하게 한 번 구분해 봅시다.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반응을 붙잡는 욕구와 믿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법이 있다고 말해봅시다. 아마 컴퓨터와 로봇은 이러한 일들을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분명하게 우리의 정신적인 삶, 우리가 정말로 걱정하는 감정적인 측면이 있는데, 로봇도 사랑을 느낄 수 있을까요? 그들도 어떤 것을 두려워할까요?
다시 한 번 말하자면, 우리의 질문은 “우리가 우리에 관한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해 영혼에 호소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라는 것이었습니다. 물리주의자들은 “아니오.” 라고 답할 것이고, 이원론자들은 “네.” 라고 답할 겁니다.
만약 우리가 의미하는 것이 정신적인 것이지만, 바로 그 측면, 심지어 체스를 두는 컴퓨터조차도 가지고 있을 정신의 ‘행동적인’ 측면은 매우 주목받지 못하는 주장입니다. 물리주의자들은 “보십시오, 정신적인 측면에 대한 건 상당히 분명합니다. 우리는 정신에 대해 물리적인 용어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주장을 바꿔 봅시다. 감정은 무엇입니까? 로봇도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까? 전적으로 물리적인 대상도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요? 그것들도 무언가를 두려워할 수 있습니까? 어떤 것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습니까? 우리의 주장에 대한 최신 이론은 “사람들은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여러분이 그에 대해 생각한다면, 어떠한 로봇도 감정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한낱 물리적인 대상에 불과한 것들은 감정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물리적인 그 이상의 것이 존재합니다.” 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토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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