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강 : 영혼의 존재에 대한 논의(4부), 플라톤(1부) - 죽음 : 케이건 교수 예일대학
제 6강은 플라톤이 제시한 논점들에 대해 알아보는 첫번째 시간으로, 영혼의 존재에 대한 그의 논의를 따라가 봅니다. 이 강의에서는 먼저, 데카르트의 주장과 그 취야점에 대해서 계속해서 다룹니다. 그 후에는 플라톤이 그의 저작, <패도(Phaedo)>의 문맥에서 나타내고 있는 그의 형이상학적 시각으로 화제를 옮겨갑니다. 이 강의에서 논의되는 것 중 핵심은, 우리에게 친숙하고 플라톤이 확립한 이원론적인 세계관에서는 두번째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써, 실증적인 세계 외에 존재하는 개념입니다. 이러한 플라톤적 형태들은 우리가 물리적 대상들로부터 도출해 내는 추상적 특질들, 즉 미(beauty), 정의, 선(goodness) 등을 이야기합니다.
이러한 플라톤적 형태와 개념들을 통해 인식할 수 있는 것이 영혼이기 때문에 플라톤은 영혼이 신체와는 별개로 존재할 뿐 아니라 영원히 지속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영혼은 완전하고, 비물질적이며, 파괴불가능하다는 것이 플라톤의 주장입니다.
지난 시간 끝날 때쯤, 우리는 데카르트와 데카르트 학파의 논쟁으로부터 개요를 들어갔습니다. 그것은 거의 생각의 과정으로부터 말하는 것입니다. 홀로 하는 생각을 기본으로 해서 말이죠, 그것은 마음을 보는 것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마음이 있다는 것에 동의 합니다. 논의가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이 마음이 우리 몸과 반드시 떨어져 있는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논쟁의 놀라운 점은 그것이 순전히 생각만으로 이루어진 실험을 기초로 해서 작용한다는 것입니다.
상상 실험은, 당신이 회상해서 제가 생각했던 것 중에 하나를 말해보겠습니다. 제가 했던 것 중에 하나를 말이죠. 제 꿈에서 떨어져서 존재하는 제 마음을 상상합니다. 그것은 그렇게 특별히 어려워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또 다른 철학적 전제를 덧붙입니다.
만약 제가 다른 것이 없는 한 가지 것을 상상한다면,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두 가지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제 마음은 반드시 제 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저의 마음은 반드시 제 몸과는 같은 것은 아니라는 것과 제 몸에 관하여 이야기하는 방법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제 마음이 단지 –제 마음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단지- 제 몸에 대해서 말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라면, 그리고 제 몸이 없는 제 마음을 상상한다고 제 몸이 없는 제 몸을 상상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건 명백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보세요 우리는 셜리는 존재하고 케이건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는 것을 시도해봅니다.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나요? 왜냐하면 그것은 그것들은 셜리 케이건이라는 하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만약 당신이 셜리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면 당신은 한 가지의 것, 셜리 케이건이 존재한다고 상상합니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케이건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상상한다면, 그리고 당신이 그것을 하나라고 상상한다면, 셜리 케이건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신은 셜리는 존재하지만 케이건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생각할 수가 없지요.
이제 이것을 헷갈리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쉽게 제가 성을 가지지 않는 것 또는 아마 다른 것으로 바꾼 세계를 상상할 수 있을 겁니다. 제 부모님께서 저에게 부르스란 이름을 주셨다고 가정해봅니다. 어떤 것도 쉽진 않죠. 케이건은 존재하고, 셜리는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상상해봅시다. 왜냐하면 셜리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으니까요. 질문은 “다른 이름의 저를 상상할 수 있나요?”가 아닙니다. 부르스는 셜리를 대신합니다. 충분히 쉽습니다. 그것은 “당신은 셜리란 이름을 사용하는 것을 참고해서 이것을 이름 붙이는 데에 말입니다. 그것이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 상상할 수 있지만 당신이 쓰는 케이건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보다는 어려워보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신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셜리랑 케이건은 바로 같은 것의 이름에서부터 뽑아낸 단지 다른 두 가지의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 그래서 셜리는 존재하지만 케이건은 존재하지 않거나, 케이건은 존재하지만 셜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물론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그래서 만일 당신이 반면 그것을 할 수 있다면, 대조할 수 있다면, 제가 왼손은 존재하지만 오른손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상상할 수 있을까요? 쉽습니다. 왜 그것이 쉬울까요? 왜냐하면 그것은 두 가지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것은 실제 세계에서 그들 중 하나가 존재하고 다른 한 쪽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 세계에서는 두 가지의 다른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것은 제가 다른 것이 아닌 하나의 세계를 상상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미소는 존재하지만 그들의 몸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상상해보세요. 당신은 그럴 수 없습니다. 당신은 몸이 없는 미소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당신은 물론 그것에 대한 의문도 없구요. 우리가 전에 적었던 것처럼, 미소에 대해서 말해봅시다., 그것은 단지 몸이 하는 것에 대한 것과 몸의 어떤 부분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말하는 방법입니다. 당신은 앨리스의 이상한 나라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히죽히죽 웃는 고양이가 사라지고 우리의 모든 것이 사라졌을 때 마지막으로 남는 것이 미소입니다. 그러나 물론 당신이 히죽거리는 고양이가 오직 미소만 남긴 채 있다고 상상할 때도 당신은 여전히 고양이의 입술과, 이빨과, 아마도 혀나 그런 것을 상상하겠죠, 만약 당신이 몸의 어떤 부분도 없이 미소를 상상한다고 하면 그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왜냐구요? 미소는 몸과는 떨어져서 상상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 마음을 상상해보세요” 라고 데카르트가 말했습니다. “제 몸은 제외하고요”. 쉽습니다. 그것에 따르면 몸과 마음은 하나가 아닙니다. 사실 그것은 반드시 두 가져야합니다. 그래서 다른 것이 없이 한 가지를 상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럼 이 데카르트 적 논의는 우리에게 마음은 무언가 몸과는 분리되고, 다르고, 변형할 수 없고, 그저 이야기의 수단 같은 것으로는 보여지지 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몸을 뛰어넘거나 넘어서는 무언가의 것을 더 가져야만 합니다. 그것은 영혼입니다. 그것이 데카르트의 논점입니다. 그리고 제가 말하길 오늘날 철학자들은 이 논의가 먹히는가 아닌가 하는 에 동의 하질 않습니다. 저는 그것이 적용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곧 반대의 예시를 드릴 겁니다. 그리고 또 반대의 예시를 들 겁니다. 그것은 말하길, 저는 이 논쟁과 같거나, 또는 적어도 우리가 쉽게 이 논의가 적용되지 않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는 예시를 들 겁니다. 그리고 또한 데카르트의 논의로는 잘못되는 무언가를 말입니다.
그럼, 여기 반대되는 예시가 있습니다. 당신 중에 누군가 저는 당신들 대부분이 또는 모든 사람들이 저녁별과 비슷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저녁 별은, 대략적으로 첫 번째 하늘에 어둠을 가지고 눈에 보여지는 천구에 있습니다. 적어도 약 일년이란 시간 동안 말입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이 또한 아침의 별과도 같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침의 별은 여전히 새벽이 온면서 보이고, 빛을 가지려 하는 마지막 천구에 있겠죠, 그래서 첫번째로 가서, 저녁별은 첫 번째로 보이는 별이고, 아침별은 일년 동안 정확하게 볼 수 있는 마지막 별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저녁별과 아침별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녁별은 존재하지만 아침별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상상해보세요. 명백하게 똑바로 보입니다. 그렇죠?
저는 일어나서 아침에 새벽이 오는 것을 봅니다. 저는 아침별이 없는 것을 봅니다. 아침별이 있던 자리에 별이 없거나 혹은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말하거나 합니다. 그러나 저녁별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제가 태양이 지는 것이나 황혼을 볼 때, 그곳에 저녁별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하길, 아침별과 존재하지 않고 저녁별이 존재하는 것을 상상하는 것은 사소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데카르트의 논의와 같은 것을 상상할 수 있스빈다.
“만일 내가 아침별이 없는 저녁별을 상상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녁별과 아침별은 같은 천체에 붙어있습니다. 사실 그것은 모든 별은 그렇지 않지요.”
그것은 행성이죠. 그것은 금성입니다. 만약 그것을 고쳐서 다시 부른다면요. 그래서 보면 그것은 단지 한가지 것입니다. 저녁별은 금성이고, 새벽별도 금성이죠. 그래서 거기에는 저녁별은 존재하지만, 새벽별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는 될 수 없습니다. 왜냐면 금성이 존재하는 세계와 금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니까 그것은 명백히 불가능합니다. 물론 아침에 금성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아침별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는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침별이 천체의 물체로 주어진 것이고, 그것은 이 세계에서 우리가 아침에 골라서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제가 아침별에 대해서 참고했을 때, 저는 금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것이 금성이든 뭐든 의식하든 간에 말이죠. 제가 저녁별에 대해 말할 때, 제가 금성에 대해 참고할 때, 제가 금성이 저녁별이란 것을 깨닫던 간에, 금성이 주위에 있는 한, 저녁별은 있고, 아침별도 있고, 그것은 금성입니다. 당신은 아침별은 있지만 저녁별은 없는 세계를 가질 수는 없습니다. 비록 당신이 아침에 금성이 보이지 않는 세계는 가질 수 있을 지라도 말입니다. 여전히 사실로부터 저는 제가 존재하지 않는 저녁별을, 존재하지 않는 아침별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그런 생각이 들어야만 합니다. 데카르트는 우리에게 이런 것을 보는 것에 대해 증명하지 않았습니다. – 저녁별과 아침별은 다른 것입니다. 아니오, 명백히 아닙니다. 그래서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해봅시다. 그래서 우리는 데카르트를 앞에 놓고 이 논의를 시작했습니다. 저는 제 몸이 없는 제 마음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데카르트는 그것을 볼 수 있다고 했습니다.
사실 제 몸은 마음으로부터 떨어져있습니다. 저는 아침별이 없는 저녁별을 상상합니다. 그럼 “데카르트의 아들 “Decarteson”이 말하길, “오, 그래서 아침별과 저녁별은 다른 두 가지 것이로군요”
그러나 “Decarteson”은 그가 말 할 때 틀렸습니다. 아침별과 저녁별은 다른 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들은 금성이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한 가지의 것입니다. 사실 한 문장으로 “그것들은 한 가지다”라고 하는 것이죠. 그것은 약간 잘못 이끌리게 하는 것이죠, 그렇죠? 그것은 단지 한 가지입니다.
금성, 만약 그 논의가, 만약 데카르트적 논의가 그것을 우주인의 실수로 여긴다면,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유사한 논의입니다. 우리는 분명 몸과 마음이 다르다는 것이 틀렸다는 것에 대해 논의하는 결론을 내어야 합니다. 이제 그것은 저에게 맞는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데카르트적 논의가 실패했다고 봅니다. 그리고 저는 저년별과 아침별에 대한 예시가 이것은 완전히 저에게서 나온 것은 아닙니다. 이 예시가 그것을 보여주고, 그 반대의 예시도 보여주고, 또한 데카르트 적인 본래의 논의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도 보여준다고 봅니다. 적어도, 그것은 어떻게는 저에게 보여줍니다. 비록 제가 말한대로, 거기에는 철학자들이 “아니야, 아니야, 그것은 맞지 않아, 아마도 어떤 면에서 우리는 어떻게논의가 진행되는가를 잘못 이해한 것일 거야. 그것은 분명 – 비록 이 두 논의가 유사하게 보이지만, 그것들은 그렇지 아, 사실, 일치하고 있어, 거기에는 우리가 자세히 보지 는 어떤 미세한 차이점이 있어, 우리는 그것을 간과한거야” 그러나 제가 말한 대로 논쟁은 계속됩니다. 논의가 잘못되었는지 아닌지를 분명하게 알 수 없다는 생각에 대한 것 중의 하나가 그것에 대해 교정하기 어렵다거나, 그것에 정확히 어디서 잘못되었는가? 에 대한 입니까? 보세요, 아침별과 저녁별의 예들, 행성에 대한 논의를 들면 저는 우리가 저녁별과 아침별에 대한 논의로써 데카르트적 논의는 실패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가 틀렸는지에 대한 것에 대해서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어떻게 잘못되었나? 왜 잘못되었나? 무엇이 가능성인가? 또는 우리가 말하길, 보세요, 처음의 비평에서, 처음의 전제가 있어요, 저는 저녁별이 존재하는 세계, 하지만 아침별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상상해보라고 했어요. 저는 가능성있는 답변을 추측하겠어요.
“네가 알기로, 당신은 실제로 그렇게 상상할 수 없어, 당신은 당신이 저녁별은 존재하고 저녁별이 없는 세상을 상상한다고 해, 그러나 당신은 정말 저녁별은 존재하고 아침별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상상할 수는 없어 당신은 당신이 상상하는 것을 잘못 묘사하는거야”
그것은 우주비행사가의 경우를 말하는 것이 멍청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아마도 그것은 올바른 분석입니다.
우리는 유사하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정말 제 마음은 존재하지만 제 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제가 지난 시간 말했었던 것은, 저는 제 마음은 존재하지만 제 몸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묘사할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런 것과 같이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설득적으로 들리지 않습니다. 그것은 비록 제가 상상했었던 것이라도 그렇게 보여집니다.
우주 비행사의 예를 들었던 것은 무엇이 또 잘못된 걸까요? 아마도 제가 상상하기로 아침별은 존재하지만 저녁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건, 아마도 그것이 가능하게 보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겁니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기로 만일 우리가 무언가를 상상한다면, 그것은 가능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 경험주의적 가능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 모든 우리의 의미는 논리적인 가능성입니다.
저는 유니콘이 존재하는 세계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유니콘은 논리적으로 가능하다라는 것은 따라오는 것처럼 보입니다. 상상은 가능성에 대한 인솔자로 보입니다. 그러나 언제나는 아니겠죠. 아마도 때때로 우리는 그것이 정말 가능하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상상해보세요. 당신이 할 수 있는지 아닌지? –둥근 사각형을 상상해보세요. 그것을 상상할 수 있나요? 그건 어떤 방식으로 저는 약간 그것을 상상하기 시작한다고 느낍니다. 물론 그건 그것이 가능하다고 느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능하게 안 보입니다. 그래서 아마도 상상은 가능성에 대해 인도한다는 것은 결점이 있는 것이겠죠, 그래서 아마도 우린 몸- 마음의 경우를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 나는 마음은 존재하지만 몸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상상할 수 있어 하지만 그게 정말 가능하다는 것을 볼 수는 없어" 논리적 가능성은 내 몸은 존재하지만 내 몸은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가질 수 있어 아마도 그곳에서 논의가 잘못된 것일 겁니다.
유니콘이 논리적으로 이해된다는 것에 대한 생각이 너무 쉽게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 이유가 되지 않습니까?
다른 가능성이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A와 B가 분리되어 있다는 단순한 사실을 – A는 존재하는 예를, 그것은 분명히 그것들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 그 단순한 사실은 그것들이 분리되어있다는 것이 실제 세계에서는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라는 것이 가능해보입니다. 아마도 그 논의는 그런 정체성으로 추측되는 것에 의해 잘못된 것이라 –
A가 B와 같을 때 그것은 항상 B와 같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든지, 아마도 정체성은 철학자로서 집어넣기 좋아하는 아마도 우연적이고 경험적인 것입니다. 아마도 A는 B와 논리적인 가능성인 세계에서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A와 B는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완전히 논리적으로 이해되는 세계와는 달리 이해합니다. 만약 그것이 맞는다면, 그리고 아마도 그 결론이 “그럼 네가 알듯이 그래, 데카르트는 실험이 마음이 몸과 일치하지는 않는 세계를 보여준다고 생각해. 그러나 그것이 이 세계가 마음과 내 몸이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가 아냐, 아마도 이 세계에서, 마음과 몸은 일치해, 심지어 논리적 세계에서는 그것이 분리될지라도 말야, 일치성은 필요하진 않아, 그러나 경험적으로 철학자는 그것을 집어넣었어” 둘 다 별로 명확하진 않습니다. 경험적인 일치성의 개념은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결국 만약 A가 정말 B라면 그것은 어떻게 분리가 되나요? 거기엔 오직 한 가지만 있습니다. 거기엔 두 개로 분리되는 것이 없습니다. 거긴 그저 A와 B가 똑같이 한 개입니다.
무엇이 나뉘는 건가요? 그래서 그곳에서 논의가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까? 정말 제가 그것을 상상할 수 없는 건가요? 저는 단지 제가 상상한다고만 생각하는 건가요? 상상력은 정말 가능성의 좋은 인솔자가 되지 않는 걸까요? 저는 단지- 그것은 그렇지만 언제나 그런 건 아니라 생각합니다. 동일성은 경험적입니까?
데카르트의 논의에서 재미있는 점은 아침별과 저녁별의 틀린 점을 보는 것이 매우 쉽다는 것 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가 잘못된 것인 것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이 있죠. 다른 철학자들도 이 아침별과 저녁별의 경우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에 동의하지만, 그것이 어디서 잘못되었는가에 대한 최고의 진단인가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몸과 마음의 경우가 잘못되었나?”라고 물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더 시간을 들여야 하겠지만 저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저는 데카르트의 논의는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침별과 새벽별의 논의가 그것과 같은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최소한, 가치에 직면할 수 없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더 시간을 들여야 하겠지만 저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저는 데카르트의 논의는 실패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침별과 새벽별의 논의가 그것과 같은 것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최소한, 가치에 직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건 단지 그것이 비록 우리가 그것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보이며, 어떤 사실로부터 우리가 다른 것이 없는 한 가지의 것을 상상할 수 있다는 것처럼 보여도 말이죠. 그것은 우리가 정말 두 가지 것으로 나눌 수 있어서 실제 세계에서 그것이 일치하는 것이 아니고 필수적으로 따라오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이런 토론을 당신과 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교실의 밖에서도, 제가 좋아하는 엄청난 길이의 이론이나,어디서 의논이 잘못되었나,나 왜 데카르트의 경우가 잘못되었는가에 대해서도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논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제안합니다. 그것은 옳지 않아요. 그리고 데카르트의 시도는 마음이 특별하다는 것을 확립하기는 했지만, 마음의 불멸성에 대해서요, 데카르트 학파의 사상에서의 실험에 기초한다는 것은 제가 생각하기로는 성공적이지 않습니다.
그럼 우리는 다시 돌아와서 우리가 어디 있는가 에 대한 생각을 하는 데에 시간을 쓰기로 하죠 . 우리는 지난 주 동안 그리고 한 주의 절반을 아니면 더 많이, 이 주 동안,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 논의하였습니다. 그리고 별로 놀랍진 않게, 그 때문에 저는 그 결론이 수업이 시작되기도 전에 거의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립니다.-제가 생각하기로는 그것은 어떤 논의도 적용될 수 없었어요. 저는 영혼의 존재에 대해 확립하고자 하는 시도가, 그 불멸의 존재, 의식의 집에서 떨어져 나오고 몸에서 구분되는 존재 말입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그 모든 논쟁들이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은 무언가 합리적인 인간은 이것에 대해서 반대할 것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리고 이것은, 이번 학기의 모든 과정을 통해서 많은 경우들을 가질 겁니다. 무언가 저는 당신을 반추해 볼 수 있는 것으로 계속해서 초대하도록 하지요. 만일 당신이 영혼을 믿는다면, 논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그럼, 파이돈의 이야기 안에 있는 플라톤의 논의에 대한 이슈에 대해서 돌아오기로 하지요. 제가 지난 시간에 말한 것, 소크라테스가 형벌에 따라서 독약을 마시고 죽음을 당하기 전-그는 자살한 거지만- 에 마지막 날의 논의에 대한 연설의 요지에 대해서 말이죠. 이제 논의의 과정안에서 소크라테스와 그의 문하생들의 논의는 그렇게 영혼의 존재에 관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진짜 질문은 영혼이 불멸하냐에 관한 것이죠.
결국 심지어 당신도 영혼을 믿고요, 저도 이전에 그렇다고 알렸고요, 그것은 우리에게 아직 영혼이 당신의 육체의 죽음 이후에 계속 존재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우리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습니다. 이원론의 입장의 경우에서 우리는 상호 영향을 적용하는 부분에 대해 이번 시간에 생각해볼 것입니다. 어디에서 영혼이 몸에 명령을 내리는가 말이죠. 그것은 육체가 영혼에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만약 제가 육체를 찌른다면 마음이 그것을 느끼겠죠. 그러면 제 마음, 제 영혼은 몸과 분명히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심지어 영혼이 육체와 분리되어있다고 해도- 육체가 죽을 때, 영혼도 함께 죽을 수도 있다는 것 말입니다. 그것은 파이돈 안에서 논의되고 있는 질문입니다.
우리가 육체의 죽음 뒤에 영혼이 살아있을 수 있다는 좋은 이유를 가질 수 있습니까? 그리고 여전히 더 특히, 우리는 그것이 불멸한다는 좋은 이유를 가집니까? 소크라테스는 영혼의 불멸성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상태를 지켰습니다. 누군가 그것이 사실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걱정할 때도 그의 규율을 정당화했습니다. 그것은 –당신이 대담을 읽는 동안에, 그것은 매우 명백합니다.-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것은 영혼의 믿음에 대한 어떤 방어도 없습니다. 거기에는 어떤 영혼이 존재한다는 것, 그러나 그것은 궁극적 목적이 아닙니다. 대부분 영혼의 존재는 이 대담에서 당연한 것입니다.
플라톤, 이원론자로써. 소크라테스를 묘사할 때 이원론자로써 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시여겨집니다.
철학적 논의가 중점을 두고 있는 질문은 “영혼이 존재하냐?”가 아니라 “영혼이 육체가 죽은 후에도 살아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불멸하냐?” 이겁니다.
이제 , 제가 말하기론, 이 소크라테스의 지구에서의 마지막 날, 그리고 당신이 기대하기론 그는 매우 실패자입니다. 당신은 그가 슬프다고 여깁니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거기서 매우 행복하고 있는 동안 실제로 그의 친구들은 유쾌하거나, 노여워하거나, 농담을 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음, 물론, 그것은 그가 생각하기로, 첫번째, 영혼이 있고 그것은 살아서 불멸하니까. 그러나 여전히 더 중요한 것은 – 그것들은 모두 중요하지만 그것은 또한 다른 요인이 있습니다.- 그는 그가 믿는 데 대해서 좋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죽으러 갈 때, 기본적으로 우리가 천국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는 그곳에 선한 신이 통치하는 왕국이 있고, 그곳에는 다른 철학적 유사성을 가진 영혼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만약 당신에게 그런 동료가 지금 삶에서 있을 때, 당신이 죽는다면. 그는 흥미로워하고 매우 기뻐하겠지요. 왜 그는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게 할까요? 아마, 소크라테스의 믿음대로 영혼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중요하게 이해될 것입니다.
그가 육체에 주어진 것들을 받아들이는 데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해요. 육체적인 것에 대해서 그와 비슷하게 영혼에 관해서 말입니다. 제 생각엔 그 방법은 어떤 차이가 있습니다. 오늘날의 우리는 거기에 주목해야 합니다. 제가 영혼의 존재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 이야기를 할 때, 저는 “보세요, 여기 하나의 가능한 논의가 있습니다. 저는 색깔을 봅니다. 어떤 물리적인 것은 그것을 할 수 없습니다. 순수하게 물리적 물체도 색을 볼 수 없고요. 저는 맛을 맛보고, 커피나 다른 것들의 냄새를 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 모든 육체적 느낌들을 생각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육체가 관장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무언가 불멸한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육체적 감각들에 대해서 현대의 이원론자들과는 다르게 설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아니라고 봤습니다. 아닙니다. 육체가 육체의 모든 감각들을 관장합니다. 모든 욕망, 갈망, 그리고 감정들, 느낌들, 그리고 욕구들까지, 그 모든 것들이 육체의 일입니다.
영혼이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 소크라테스가 생각하길 – 영혼은 생각합니다. 영혼은, 그 자체 안에서, 이성적입니다. 영혼은 어떤 것의 사색하는 부분을 담당합니다.
영혼은 어떤 것을 생각합니까? 음, 영혼은 모든 것들을 생각합니다. 의심의 여지가 없죠. 그러나 영혼이 할 수 있는 것들 중 하나는 가능합니다, 그것들 중 하나는 토대를 제공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영혼의 불멸에 대한 플라톤의 논의에 대해 보면 영혼이 생각할 수 있는 -; 음, 여기 제가 철학 용어의 한마디를 소개할겁니다. 때때로 그 사상, 때때로 그 용어는 “사상”이라고 불립니다. 때때로 그 용어는 “형식”이라고 불립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영혼은 어떤 순수한 개념이나 생각, 정의 그 자체나, 아름다움 자체나, 건강 자체나, 또는 선 자체 같은 것을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플라톤의 형이상학 속에서 부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명백하게 이것은 오히려 더 효율적입니다. 당신들 중 누군가는 더 알고 싶어 할 것입니다. 저는 플라톤의 대담을 더 읽거나 고대 철학강의를 들으시라고 권유하겠습니다. 그러나 여기, 기초적인 생각이 있습니다.
세상에 모든 종류의 아름다운 물건들이 있습니다. 물건들은 그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분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 세상엔 완벽하게 아름다운 것은 없다는 생각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것은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아름다움 자체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음,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말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말할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단조롭고, 일상적으로, 물리적인 개체는 다소 아름답습니다. 그들은 부분적으로 아름답습니다. 마찬가지로 때로 Platonists는 그것을 놓고, 그들이 "아름다움”에 참여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아름다움의 다양한 정도를 취합니다. 하지만, 그 중 누구는 아름다움 그 자체와 혼동합니다. 아니면, 정의를 가지고 그렇기도 합니다. 거기에 다양한 논의들, 사회적인 논의, 거기엔 다양하거나 다양하지 않은 단위, 정도들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세계 어디에서나 그저 완벽한 어떤 사회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 대해, 마음이 완벽하게 정의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일반적인 경험적 사회적 계약들이 완벽한 정의 같은 것에 속하게 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뭐든지 완벽한 정의는 그래서, 그것은 경험적 세계 이상은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경험적인 세계 속에서 참여할 수 있는 것이거나 다양한 정도의 참여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물리적인 것들과 혼동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들은 단지 한 단위나 또는 다르게 순수한 사람들과 완벽한 순수나 또는 완벽한 정의입니다. 그것은 단지 오직 마음이 생각할 수 있는 것이거나, 우리는 실제 세계, 이 경험적 세상에서는 가지지 않은 것입니다.
또는 다르게 그것을 다룬다면. 마음은 완벽한 순환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물리적인 물체도 완벽한 순환을 가질 순 없어요. 거기에는 오직 한가지의 순환 또는 덜 되거나 더 되는 정도의 순환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보면, 그런 종류의 현상들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면, 우리는 이런 완벽한 것들을 다루는 어떤 종류의 마음에 대해서 볼 수 있습니다. 음, 우리는 단어가 필요해요.
그리고 우리가 말할 때, 플라톤은 “이상”이라는 단어를 우리에게 주었습니다. 때때로 그것은 ”이상”이 “형태”로 번역 될 수 있습니다. 이것들은 우리가 본보기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는 적어도 기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는 아마 적어도 바로 그것은 평범하고 일상적으로 다양한 정도에 적용될 수 있는 것일 겁니다. : 완벽한 정의, 정의 그 자체, 아름다움 그 자체, 선 그 자체, 순환 그 자체, 건강 그 자체.
모든 것들은 요즘의 철학자들은 그것들을 플라토닉 형태라고 부릅니다. 보통 이 세계의 물질적인 재료들은 플라토닉 형태에 적용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플라토닉 형태와는 혼동되면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 심지어 우리가 이 세상에서 플라토닉 형태에 맞부딪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우리는 그것들을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런 것과 같은 일종에 있습니다.
물론 문제는, 우리가 오고 가는 것에 의해서 정신이 산란해지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세상 속에서 야단법석입니다. 그리고 역시 우리는 좋은 플라토닉 형태를 가지지도 않았죠. 우리는 그것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혼란스러워합니다. 철학자들이 시도하려 하는 것- 이것은 소크라테스의 생각입니다 또는 플라톤의 생각입니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입으로 철학자들이 시도하고자 하는 것들을 내 놓았습니다. 그것은 육체에 얽매여 – 음식에 대한 열망, 섹스에 대한 열망, 고통에 대한 걱정 같은 것에서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들지 않으며 자유롭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들은, 허기짐 후에 오는 기쁨, 모든 그런 것은 플라토닉 형태에 대해 생각하는 방법입니다.
철학자들이 시도하려고 하는 것, 그리고, 그래서 이런 이상적인 것들에 대해서 더 초점을 맞추게 되는 것은 육체에는 관련되지 않고 따로 분류되며 최대한 자신의 마음과는 멀어진 것 입니다. 그것이 소크라테스가 말하려고 시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렇기 때문에, 그는 더 나은 이런 사상적 형태를 다룰 수 있게 된 겁니다. 그리고 그는 믿었습니다. 그가 죽을 때 육체와 마음에 마지막 분리가 일어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의 마음은 위로 올라가고, 그의 영혼은 천국의 왕국에 오른다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은 오늘날 그것을 “플라톤의 천국”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이런 것들과 더 정확한 접촉을 할 수 있는, 그런 형태들이 있는 플라톤의 천국으로 갑니다.
이제 저는 충분히 말할 수 있고 명확하게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왜 플라토닉 형이상학적 관점이 더 심각하게 다루어져야 하고, 오늘날 많고, 많은 철학자들이 이것을 생각하고 있고, 적어도 이것을 기초 지식 안에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분명합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께 적어도 그런 것을 느낄 수 있는 하나의 예시는 드릴 수 있습니다.
수학을 생각해봅시다. 2+2=4같은 단순한 수학적 주장 같은 것을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 2 = 4 or 2 + 3 = 5라고 말할 때, 우리는 우리의 마음 속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숫자들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숫자가 아니라면요? 그것들은 분명히 물리적 물체들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어느 날 “결국, 탐험가들은 숫자 2를 발견했다.”고 내셔널 지오그래피에서 커버스토리로 발행되어 보여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숫자 2처럼 당신이 볼 수 있거나 들을 수 있거나 맛 볼 수 있거나 부딪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숫자 2가 무엇이건 간에, 그것은 우리의 마음속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지 실제의 물리적 세계 속에서는 아닙니다.
그것은 수학적인 것에서 플라토닉 한 것입니다. 그것들은 숫자들입니다. 마음은 그것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물건들은 그것들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가 이렇게 두 장의 종이를 집어 들었습니다. 이것들은 “두 개의 상태”라는 것에 느낌을 가집니다. 그러나 물론, 여기에는 숫자 2라는 것은 없습니다. 만약 제가 이 종이들을 찢는다면, 저는 숫자 2를 부수어버리는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숫자 2는, 숫자는, 3은,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들이 무엇이든, 이런 플라토닉 추상적인 것들은 어떤 공간이나 시간 안에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마음이 그것들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생각(the idea)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보 같은 생각이 아닙니다. 그것은 수학적인 것 안에서 진행되는 매우 강제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수학자들은 그들의 마음을 이용해서 수학적인 이런 플라토닉 생각을 합니다. 플라톤의 생각은 제외하고, 모든 것은 이것과 같아요. 이것은 수학뿐만이 아니에요, 그러나 정의 그 자체도 이와 같아요. 세상에는 그저 또는 그저 그런 것이 아닌 것이 있어요. 마음은 그런 것들을 생각할 수 있어요, 그러나 정의 그 자체는 – 단지 완벽한 이 사상은- 마음이 생각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것은 또 다른 추상적인 플라토닉 형태입니다.
그래서 그런 그림이 있습니다. 플라톤의 생각은 만약 우리가 형이상학에 대해서 충분하게 시작했다면, 우리는 이 플라토닉 사상, 플라토닉 형태의 왕국을 볼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고 그것을 마음 속에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육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육체의 영역은 오직 그 자체가 가진 것 뿐이기 때문이죠, 맞죠? 그것은 오감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플라토닉 형태에 대해서 생각하는 영혼입니다.
그리고 플라톤에 대해 계속해서 논의를 해 볼 때, 마음이 하는 것의 그림을 가지고, 그는 우리를 마음으로, 영혼으로 설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의 육체의 죽음으로부터 구원해내는 것 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영원히 말입니다. 완벽합니다. 그것은 불멸이고, 파괴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불멸합니다. 그리고 그는 결론을 위해서 몇 가지의 논의를 제공합니다. 여기 이 부분에서부터, 다음 시간에 시작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논의들을 통해서 우리의 방법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7. Plato, Part II: Arguments for the immortality of the soul
Death (PHIL 176)
The discussion of Plato's Phaedo continues, presenting more arguments for the existence and immortality of the soul. one such argument is "the argument from the nature of the forms," which states that because the forms are non-physical objects and cannot be grasped by something physical like the body, it follows that they must be grasped by the soul which must be non-physical as well. This argument is followed by the "argument from recycling" and "the argument from recollection."
00:00 - Chapter 1. Review of Plato's Heaven: Platonic Forms
04:13 - Chapter 2. Concerns and Issues Leading to the Development of Platonic Forms
14:17 - Chapter 3. The Argument from the Nature of the Forms
24:33 - Chapter 4. The Argument from Recycling
33:33 - Chapter 5. The Argument from Recollection
43:54 - Chapter 6. Do Plato's Arguments Suffice?
Complete course materials are available at the Open Yale Courses website: http://open.yale.edu/courses
This course was recorded in Spring 2007.
7강 : 플라톤(2부): 영혼의 불멸에 대한 논의 - 죽음 : 케이건 교수 예일대학
이 강의는 앞선 플라톤의 <대화>중 "패도(Phaedo)"부분에서 제시되는 영혼의 불멸성과 그 존재에 관한 논의를 이어나갑니다. 그중 하나는 몸과 같이 손에 잡히는 물리적인 것이 아닌 비물질적인 사물에 대해 언급하는 "사물의 형태의 본질에 관한 논의"와 같은 주장이며, 이러한 논의는 곧 영혼같이 손에 잡히지 않는 비물질적인 것에 대한 것으로 이어집니다. 플라톤의 이러한 주장은 "순환에 관한 논의"로 이어지며 "기억에 대한 논의"로 이어집니다.
셜리 케이건 교수:
우리는 파이돈의 플라톤의 대담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제가 시작하려는 것은 지난 시간에 플라톤의 형이상학의 기초적인 윤곽선을 그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여기서 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명확하게 전체적인 조사를 하진 못했지만.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관점의 핵심적인 윤곽선에 대해 충분하게는 제공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파이돈의 후반부분이 주는 논의에 대해서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플라톤의 형이상학적 관점에 대해서 어떤 중심적인 측면에 대해 기초적인 모든 측면, 많은 어떠한 가정을 말입니다. 그의 형이상학 뒤에 깔린 키 포인트와 사상은 그렇습니다.
덧붙여서 우리가 모든 것에 친숙한 보통의 실증주의적 물리적 세계에서 우리는 두 번째 왕국 같은 것의 존재를 가정합니다. 그것은 플라토닉하게 존재하는 – 오늘날 그들이 부르듯이 – 플라토닉적 형태, 플라토닉적 사상입니다. 그와 같은 것은 아마도 우리는 추상적인 물체 또는 추상적인 성질이라고 부르거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것을 가정하는 이유는 우리가 분명하게 이와 같은 생각에 대해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직, 우리는 평범한 물리적 세계를 인식합니다. – 비록 아마도 그것들이 다양한 정도에 속할 수 있을 지라도- 우리는 실제로 물리적 세계안에서 그것 또는 그 본질들과 마주치거나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것들에 대해 아름다움에 대해 다양한 정도를 말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름다움 그 자체와는 실제 경험적인 세계에서는 절대 마주칠 수 없습니다. 우리는 2+1이3과 같다는 사실을 말 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실제 경험적 세계에서는 어디에서도 숫자 3 그 자체나 숫자들을 마주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이 플라토닉 이상적 존재의 왕국-과 경험주의적 세계로부터 구분하는 더 나아간 요점은 실제로 그들이 – 그들에게 어떤 완벽한 곳입니다. 그것들은 변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물리적 물체들은 계속해서 변합니다. 어떤 것은 분명 어떤 점은 작고 그리고 다른 포인트에서는 커지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못생기고 아름다워지기도 합니다. 미운 오리 새끼처럼요. 그것은 못생기게 시작해서 아름다운 백조가 됩니다.
반대로, 정의 자체는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움 그 자체도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은 영원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변하는 것을 넘어섭니다. 반대로 경험주의적 세계에서는, 사실, 만일 당신이 이 관점으로부터 세계에 대해서 더 생각하기 시작했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미쳤습니다. 그것은 거의 정반대로 미쳤습니다.
플라톤은 꿈이 그렇듯이 마치 미친 것 같은 방법으로 그것을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꿈에서 깼을 때, 당신은 단지 얼마나 그 모든 것들이 미친 것 같은지 눈치채지 못합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한 발 물러서서 그것을 상기해봤을 때, “음, 보자, 나는 샌드위치를 먹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 샌드위치가 자유의 여신상이 되었어, 우리 엄마가 자유의 여신상이었다는 것을 제외하고 말이야, 그리고 그녀는 바다 위를 날아갔어 사실 그녀는 스파게티의 한 부분이었다는 것을 제외한다면 말이야.” 이것이 꿈이 얼마나 미친 것 이라는 것인지 보여주죠, 그리고 당신이 꿈을 꿀 때, 그것은 어떤 감각의 모든 부분을 만들어냅니다. 맞죠? 당신은 잠에서 깼을 때, 한 번 생각해보고는 말합니다. “그건 정말 미친 짓이야.” 음, 플라톤은 실증적 세계에서 이런 종류의 미친 짓, 이런 종류의 정반대의 것은 우리가 보통 알아차릴 수 없게 만들어 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농구 선수야, 그래서 그는 정말 정말 커, 그가 오직 6피트 정도 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그는 정말 정말 작은 농구선수야. 그것은 아기 코끼리야. 그래서 그것은 정말 정말 커, 그가 아기 코끼리라는 사실을 제외하면 그는 정말 정말 작아.”
세계는 계속해서 굴러갑니다. – 이것은 플라토닉 표현입니다.- 하나의 또 다른 것 사이에서 굴러갑니다. 그리고 그것은 이해되기가 어렵습니다. 반대로, 마음은 플라토닉 사상, 플라토닉 형태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안정됩니다. 그것들은 믿어집니다. 그들은- 그들의 법은- 비슷하고 우리는 그것들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것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은 영원합니다. 그것은 제가 말했듯, 플라토닉 이미지입니다.
이제 그 추상적 존재에 관한 플라토니즘에 반대하거나 논의하는 것을 시도하려는 것이 여기에서 저의 목적이 아닙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예로 제시했던 수학적 계산 같은 것, 그것은 멍청한 관점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가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보는 관점은 아니지만 수학에 관해서 생각해볼 경우, 대부분의 우리는 플라토니스트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2+1은 3이라는 것을 사실로 믿고 있습니다. 더욱이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숫자에 관한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플라톤은 모든 것들이 그런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음, 저는 그것에 관한 논의를 하지 않고 그 관점에 관해서 반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 그저 그것에 관해서 윤곽선을 그리고 그런 범위에서 이해하고 논의로 돌아옵시다.
그래서 우리의 목적을 위하여, 플라톤이 그것과 질문에 대하여 옳다고 가정하면, 그 다음은 무엇이 뒤따르나요? 그럼, 플라톤이 다음에 뒤따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영혼의 불멸을 믿기 위하여 우리가 어떤 이유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우린 지난 시간에 나타냈듯이, 마음-영혼-이 보여주는 이미지는 이런 영원한 플라톤의 형상- 사상-을 움켜쥘 수 있는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형식적으로 우리는 섹스나 목마름, 식욕, 당신이 가진 것, 졸음, 같이 육체에 의한 방해들에 의해 그런 것들에 대한 생각들로부터 정신이 혼란해지게 됩니다.
그러나 몸으로부터, 영혼으로부터, 마음으로부터 그런 것들에 멀어지게 된다면 형상(the form)에 대해 집중하는 것이 더 수월해집니다. 그리고 당신이 그런 것들을 잘 하게 된다면, 만일 당신이 살아있는 동안에 당신이 그런 것들을 연습한다면, 당신 자신을 육체로부터 분리하는 것을 말입니다. 그럼 당신은 당신의 육체가 죽은 뒤에, 마음은 이 플라토닉 천국 같은 왕국으로 가게 되고 신과 그리고 다른 불멸의 영혼과 함께 거주하게 되고, 형상(the forms)에 대해 함께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죠,
그러나 만약 당신이 당신의 삶 동안에 당신의 육체와 당신 자신을 분리시키지 못한다면, 만약 당신이 너무 그 생각 자체에서 빠져 나오지 못해서, 그리고 당신의 육체가 죽음에 이르렀을 때, 당신의 영혼은 다시 되돌아가듯 빨려가서, 아마도 환생하겠죠, 다른 육체로 말이죠.
만일 당신이 행운아라면, 마치 다른 사람; 만일 당신이 별로 행운을 가지지 못했다면, 당나귀나 돼지 같은 것으로 또는 개미나 당신이 가진 그대로 태어나겠죠. 그래서 당신의 목표인, 플라톤이 말하듯, 당신의 목표는 분명, 당신의 삶에서, 죽음을 위해 연습하는 — 당신의 육체로부터 당신 자신을 분리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그것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직면한 사람인, 그 측면에서 괴로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행복했죠. 그는 자신이 천국으로 가는 마지막 분리가 일어나는 것을 행복해했습니다.
물론, 대화가 끝나고, 죽음의 장면과 함께 –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인들에 의해서 죽음을 선고받고, 그리고 그가 독약을 마심으로써 그것이 끝나죠. 그러나 고통스럽거나 하는 것보다 오히려 즐겁습니다. 그리고 대화가 끝나는 부분은 서양 문화권의 죽음의 장면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 중 하나이죠, 그리고 플라톤이 말하기를 – 여기서 정확한 인용문을 사용하도록 하겠습니다. – “우리 모두가 아는 한, 그는 최고로 그리고 또한 가장 현명하고 가장 똑바른 사람이다. ”
죽음의 장면 바로 직전에, 거기에는 긴 신화가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당신의 관심을 끌긴 하겠지만 저는 어떤 세부적인 종류의 것에 대해 토론하고 싶지 않습니다.
플라톤이 그 이야기에 대해서 말합니다; 그것은 신화입니다. 그는 우리가 과학적 방법으로는 알 수 없지만 우리는 깨달을 수는 있다는 것을 가리키려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신화는 이러한 종류의 그림을 가지죠 저는 그저 우리가 실제로는 지구의 빛 속에서의 표면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더 어둡고 텅 빈 어떤 곳 안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라고 우리는 실제 자연의 세계를 오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당신 들 중의 누군가는 아마도 군중들이 깨달았듯이 플라톤이 후반의 대화를 친숙하게 여길 겁니다 아마도 저에게는 적어도 그렇게 보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해야 할 것은, 신화의 동굴을 예시하게 되는 것 입니다, 또는 그 동굴의 알레고리, 플라톤이 또한 묘사했던 것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의 고민은 논쟁으로 가서 대화의 중심으로 가서 이루어집니다. 왜냐하면 대화의 중심에서, 그가 죽기 전에, 소크라테스는 그의 친구들과 논쟁을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말하길, “보게,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네, 나는 영원히 살거라네.” 그리고 그건 그의 친구들이 걱정하든 그것이 진실이건 거짓이건 그의 신념이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소크라테스가 대화의 중점을 이루는 일련의 논의는 소크라테스가 영혼의 불멸을 믿는 다는 그의 이유를 배치하려고 하는 구성 형식을 취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고민이 됩니다.
제가 하려고 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이것을 통해서 다시 재 구축해보고자 하는 시도이며—제 시도는 이 플라톤이 우리에게 준 4~5개의 일련의 논의로부터 기초적 생각을 구성해보고자 하는 것 입니다. 저는 그것들에 대해서 비평할 것입니다. 저는 그것들이 작용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록 제가 그것들을 시도하기 전에 저는 플라톤에 대해 비판할 필요는 없다는 말을 먼저 제시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처럼, 후반의 어떤 논의들은 의도적인 목적으로 우리가 어떤 초기의 논의를 가져올 수 있게 반대의견에 대답합니다. 그리고 또 그것은 플라톤 자신이 초기의 대화에서 깨달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만큼 강하지 않은 것 입니다.
플라톤은 대화를 배움의 어떤 종류로써 썼습니다, 철학을 독자들이 배울 수 있는 데에 대화라는 더 나은 도구를 이용해서 말입니다. 그들은 플라톤이 철학의 본질을 어떤 자명하게 보여주는 데 있어서 체계적인 유행 방식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플라톤은 전의 논의들에서 의도적으로 실수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입니다.” 오, 그것은 – 여기 논의에서 잘못된 것이 있어. 이 논의에서 반대하는 것이 있어요. ” 어떤 것들은 그럽니다, 플라톤은 그리고 나중에 이것에 대해서 연설합니다. 그러나 그가 그것들에 대해서 연설하든 말던—우리는 플라톤에게 어떤 영광도 표현하지 않고, 우리는 어떤 서비스도 할 필요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단순히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우리자신을 제한시킨다면, 그것이 플라톤이 여기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동안 생각했던 것에 대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 플라톤의 관점이 있어. 그것은 흥미롭지 않니? 아리스토텔레스의 관점과는 얼마나 다른지 알아챘어. 그것은 흥미롭지 않니? ” 그리고 그것은 마치 감동스럽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철학자가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훌륭한 철학자는 우리를 그들의 진실을 설득시키기 위해서 앞으로 끌고 가기 위해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방법은 당신이 당신 자신과 그 일련의 대화들을 통해서 철학자의 측면을 보게 됩니다, 그것이 적용되었나요 아닌가요? 그래서 그러든 말든 그 관점은 소크라테스의 입 안에서 던져져서 고민되었습니다, 플라톤의 판단인지 아니 던지 간에, 우리의 목적을 위해서 우리는 비록 그들이 플라톤에 의해서 맡겨져서 던져진 논의이지만 우리 자신이 스스로에게 “그 논의들이 적용했나 아닌가?” 를 스스로 물을 수 있는 것은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일련의 논의들을 다룰 예정입니다. 저는 제가 예전에 말한 것을 할 것입니다, 좀 더 해석적이라기 보다는 일반적으로 우리의 판독에 대한 경우입니다. 저는 사실 일시적으로 멈춘 겁니다, 기한적으로 저는 제 노트를 봅니다 그리고 전 제가 어떻게 제가 플라톤을 이해하고 논의했는가 기억합니다. 물론, 실제로 논의는 실제 대화이므로, 우리는 언제나 어떤 일련의 가정과 결론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사실을 논의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또 그것은 항상 해석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이 그가 하려고 한 논쟁에 있어서의 최선의 재 구축입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 논의의 전제와 결론에 대해서 논쟁하겠습니까? 글쎄, 그게 내가 우리를 위해 노력 한 것입니다. 또한 논의의 이름을 줄 겁니다. 그것들은 플라톤이 준 이름들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다른 논의를 통해 더 거칠게도 수정하고, 고치기 쉽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다음으로 넘어갑니다.
그래서 첫 번째 논의에서, 그리고 모든 것들이 진행되고 얻어지는 데 대한 걱정은 바로 그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플라톤이 말한 “맞아요. 그래서 마음은 영원한 형태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몸으로부터 마음 자신이 해방되어야 합니다.”에서 훌륭한 플라토닉 이미지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 철학자는, 그의 몸으로부터 마음을 스스로 분리시키는 것 같은 것을 훈련한 사람은, 그의 몸이 원하고 바라는 것들을 개의치 않게 됩니다.- 철학자는 그가 진실로, 결국 몸으로부터 마지막 분리가 일어나기 때문에 죽음을 흔쾌히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명백하게 대화 속에서 일어나는 걱정의 중요한 부분은 이것입니다. : 우리가 몸이 죽을 때 영혼도 또한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알까? 그것은 자연스럽게 생길 수 있는 걱정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필요한 것은 우리 자신이 스스로 분리가 일어날 때 최대하게 가능한 한 우리의 몸에 대한 영향과는 실제로 모든 방법을 통해서 관련 없이 해야 하고 그 연관성을 없애는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고무 밴드라고 생각해 봅시다, 아마도 우리는 고무 밴드를 더 많이 할 수 있는 한 더 잡아당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고무 밴드를 너무 많이 잡아당겼다가 끊어지게 된다면, 그건 별로 좋지 않죠, 그것은 나쁘죠. 우리는 몸이 계속해서 생각하게 하기 위한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몸에게서 혼란스러움을 느끼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육체가 죽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육체가 죽었을 때, 영혼도 같이 죽으니까요. 만일 우리가 이원론자라면, 우리가 전에 표명했듯이 – 만일 영혼이 육체와는 무언가 다른 것이라면 – 이것은 여전히 가정입니다, 논리적으로 말하면, 만일 육체가 파괴된다면, 영혼 또한 파괴됩니다.
그러면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친구는 그에게 물어봅니다, 어떻게 우리가 육체가 죽음에 이르고 나서도 영혼이 살아남아서 대신에 불멸한다는 것을 아는가? 그리고 그것은 연속적으로 논쟁에 따라오는 것 입니다.
이제, 그런 첫 번째 논의에 대해서 저는 “그 논쟁은 자연스러운 형태에서 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기초적인 생각은 명백하게 간단합니다. 그 생각이나 또는 형태는 – 정의 그 자체, 아름다움 그 자체, 선 그 자체 –그 형태들은 물리적인 형태들이 아닙니다. 그렇죠?
우리는 정의 그 자체와 마주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사회와 아마도 많게는 더 적게, 또는 개인들과 아마도 많거나 더 적게, 그러나 우리는 절대 정의 그 자체와는 마주칠 수 없습니다.
숫자 3은 물리적인 물체가 아닙니다. 선 그 자체는 물리적인 물체가 아닙니다. 완벽한 둥근 것은 물리적인 물체가 아닙니다.
이제, 대략적으로 말하면, 소크라테스는 간단하게 따라오는 것으로 영혼 그 자체를 어떤 물리적이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만일 형태가 물리적인 물체가 아니라면, 소크라테스는 형태를 붙잡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어떤 형태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물리적 물체가 아니라면 그들은 육체처럼 잡을 수 있는 어떤 물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무언가 물리적이지 않은 이름, 영혼으로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비록 그렇다 할 지라도, 제가 생각하면, 소크라테스가 가고자 원하는 곳으로 그가 그린 것은, 그렇게 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습니다. 다르게 말하면, 만일 영혼은 물리적이지 않은 형태를 받아들이기 위해 분명 물리적이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육체의 죽음 뒤에서 영혼이 살아남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이 우리가 지금 남은 시간 동안에 생각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혼란스럽습니다. 우리는 놀라워해야만 합니다, 그럼, 왜 육체는 형태(the forms)를 잡을 수 없을까요?
그래서 저는 논쟁의 전체적인 생각에 대해서만 집중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대신에, 저는 그것을 칠판에 적었습니다. [참조 그림 7.1]
그래서 플라토닉 형이상학이 우리에게 주는 가설 첫 번째 – 그것은 생각, 형태들과 영원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물리적이지 않은 것입니다. 두 번째 – 그것은 영원하거나 물리적인 것이 아니고 오직 영원하거나 물리적이지 않은 것으로만 붙잡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들을 가정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세 번 째 가설을 줍니다, 우리가 원하는 결론은 – 붙잡을 수 있는 생각이나 형태는 반드시 영원하거나 또는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무엇이 생각이나 형태를 잡을 수 있나요? 음, 그것은 영혼입니다. 그건 우리가 어떤 한 가지를 가진다면, 그것은 물리적인 물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붙잡을 수 있는 것은 물리적인 것이 아닌 것이라는 겁니다, 영혼은 육체가 아닙니다. 붙잡을 수 있는 생각이나 형태는 영원하거나 또는 물리적이지 않기 때문에 – 그것은 영원하고, 그것은 불멸합니다.
좋아요. 다시 한 번 그것을 조심스럽게 봅시다. 생각이나 형태는 영원합니다; 그들은 물리적이지 않습니다. 그럼, 저는 물리적이지 않은 측면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저는 또한 그것들이 변하지 않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아마도 형태의 영원한 측면을 강조하기 위해 시간을 내어야 할 가치가 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아마도 오거나 갈 것이지만, 그러나 완벽한 정의 – 완벽한 정의의 사상 – 그것은 시간성이 없습니다. 지구에는 숫자 3을 파괴하거나 대체할 수 있는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2+1은 3과 같다는 것은 전에 있던 사람도 그러합니다; 2+1은 3과 지금도 같습니다; 2+1은 언제나 3과 같을 것입니다. 숫자 3은 영원합니다, 또한 물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플라토닉 형이상학은 꽤나 일반적입니다, 만일 우리가 사상이나 형태들을 생각한다면, 받아들일 수 있는 중심은 그들이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그것들은 물리적인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가정은—우리가 플라톤 전제 첫 번째를 주었기 때문에 – 우리의 목적을 위하여 중요한 전제는 전제 두 번째입니다. 그것이 진실이건 거짓이건 간에 영원하거나 물리적이지 않은 것들을 잡을 수 있는 것은 오직 그 자체가 영원하거나 물리적이지 않은 것이란 말입니까? 다시 말해서, 그것은 마치 그가 원하는 결론임에도 불구하고, 세 번째는, 그것이 따라오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그에게 두 번째 가설을 주었다고 하면, 그게 무엇이든지 파악하는 것이 따릅니다—우리가 영혼을 영혼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단지 플라톤이 우리의 마음을 그렇게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 만일 영원하고 물리적이지 않은 형태를 물리적이지 않고 영원한 것으로 붙잡을 수 있다면, 그것은 영혼은 물리적인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물리학자의 관점에서는 영혼이 영원하다는 것은 잘못되었습니다. 영혼은 불멸합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그것을 원합니다, 우리가 가설 두 번째를 그에게 준다면, 그것은 영원합니다, 물리적이지 않은 것은 물리적이지 않고, 영원한 것으로 잡을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한 부분에서 그것을 말했듯 “불순함은 순수함을 가질 수 없습니다” 육체는 – 부패되고, 부서질 수 있고, 넘겨질 수 있습니다 – 그것이 존재하든 말든, 그들이 짧은 기간 동안에 존재하고 그들이 멸망하고—이 불순한 것들이 가질 수 없고, 잡을 수 없고, 영원의 지식을 가질 수 없고, 물리적이지 않은 형태로 변할 수 없다면. “불순함은 순수함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것이 중요한 가정입니다, 그리고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입니다, 제가 아는 한은 두 번째 가설을 믿는 것보다 더 좋은 이유는 없습니다. 이제, 두 번째는 별로 익숙하지 못할 것입니다 – 두 번째 가정은 별로 친숙하지 못한 주장입니다. 저는 이 주장을 기본적으로, 더 친숙한 언어로 옮기자면, 그것은 하나를 알고 또 하나로 넘어가는 방식입니다. 또는 다른 방식을 이용해서, 플라톤이 사용했던 다양한 관점과는 약간 다른 언어를 사용해서, “좋은 것은 좋아하는 것에 의해서 알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하나를 알고 다른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아마 가장 익숙한 방법에 중점을 두고 있을 것입니다.
플라톤이 말하길,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무언가요? 그럼, 우리는 영원한 것입니다; 하나를 알고 다른 하나를 안다면. 그래서 우리는 우리자신이 영원한 존재여야 합니다.”
불행하게도, 이 생각은, 아마도 유명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나를 알고서 다른 하나를 안다는 건, 그저 거짓으로 보입니다. 어떤 예들을 생각해보겠습니다. 그럼, 한 번 봅시다, 고양이를, 생물학자가 연구를 할 때, 또는 동물학자가 연구를 할 때. 하나를 알고 다른 하나를 안다면, 생물학자는 고양이여야 합니다. 그럼 그건 명확하게 거짓이죠. 당신은 고양이 과를 연구해야만 하고 다른 고양이 과를 연구해야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하나를 거쳐서 다른 하나를 아는 것; 그리고, 당신은 캐나다 및 멕시코를 공부하실 수는 없습니다. 하나를 알아야 하나를 아는 것이기 때문에 말이죠. 그럼, 그건 분명 어리석은 일입니다. 물론 캐나다와 멕시코와 독일과 프랑스어를 공부할 수는 있습니다.
그건 하나를 알고 다른 하나를 알아야 하지 않습니다. ; 프랑스에 대한 진실을 알아야 해서, 당신이 프랑스어를 배울 필요는 없습니다. 또는 의사는 어떤 사실을 알기 위해 죽은 육체를 연구하기도 한다는 것도 있습니다. 아하! 그래서 연구하고 죽은 시체, 부패한 것을 파악하기 위해서, 당신이 죽은 육체가 되어야 합니다. 아니죠, 분명 그런 식으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만일 우리가 실제로 우리 자신을 예제처럼 그렇게 간다면 – 정말 하나를 알아야 다른 하나가 되는 것 입니까- 답은, 적어도 일반적인 주장은,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는 겁니다. 보통 하나를 알고 다른 하나를 아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엄밀하게 말하자면, 두 번째 가정을 증명하지 않는 것은 거짓입니다. 그건 여전히 할 수 있습니다.
비록 보통 당신이 공부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을 좋아할 필요는 없고, 비록 보통 진실이 아닙니다, 그건 물리적이지 않은 물체들의 특별한 경우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경우이고, 영원한 것의 특별한 경우 안에서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영원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리적이지 않은 것들을 공부하기 위해서요.
비록 일반적인 주장이 “하나를 알고 다른 하나를 아는 것”은 거짓입니다, 그건 특수한 주장입니다. “영원한 것, 물리적이지 않은 것은 오직 영원한 것과 비물리적인 것으로만 붙잡을 수 있다.” 라 할지라도. 아마도 그 특수한 주장은 사실이 아닐 겁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플라톤이 필요한 특이한 주장입니다. 여전히,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왜 우리가 두 번째 가설을 믿어야 하는가? 에 대한 겁니다.
왜 우리가 몇 가지를 생각해야 합니까? – 심지어, 보통, 장벽을 넘어서서 X가 X가 아닌 것을 공부할 수 있다면, 왜 우리가 플라토닉 형태 같은 것을 다루는 특정 예들 속에서 그것이 넘을 수 없는 것이 되어야 하나요? 우리에게 두 번째 전재를 믿을 수 있는 몇 가지 이유를 주세요. 저는 두 번째 전재를 믿기 위하여 다른 좋은 이유는 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제가 볼 수 있는 한, 플라톤은 이 대화 속에서 그것을 믿을 수 있는 어떤 이유도 우리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말해야만 합니다. 제가 볼 수 있는 한, 우리는 영혼에 대해서 결론지을 수 있는 적절한 어떤 것도 받지 못했습니다 – 형태들과 사상들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인정하건 데- 우리는 믿어야 할 좋은 이유가 없습니다. 영혼 그 자체가 영원하고 비물질적이라는 것을 설득하기 위해서. 첫 번째 논의가 있습니다.
그래도 전, 결국 소크라테스가 일련의 다른 논쟁을 제공함으로써, 플라톤이 아마도 논쟁의 적절함을 인식하는 것과 같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다음으로 넘어가서.
저는 두 번째 논의를 “재활용에서의 논의”라고 합시다 – 제가 추측하건 데 더 좋은 꼬리표는 없고, 더 나은 것을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기본적인 생각은 부분적으로 다시 사용됩니다. 어떤 상태로부터 다른 상태로 이동하는 것들은 다시 처음의 상태로 되돌아옵니다. 그래서 예를 들면, 플라톤이 대화 중에서 실제로 사용한 예를 들면, 우리는 지금 깨어있습니다, 그러나 전에 우리는 잠들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잠들어 있는 상태의 왕국에서 잠에서 깬 상태의 왕국으로 온 것 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잠들어 있는 상태의 왕국으로 가고 다시 깨어있는 상태의 왕국으로 오고 이것이 계속해서 그리고 반복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재활용은.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것이 실제로 플라톤의 목적을 더 잘 설명하는 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이 특수한 예를 위해서 저는 그에게 기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차라면. 차는 차 그 자체가 존재하기 전에 그 존재가 부분들로 이루어진 존재입니다. 거기에는 엔진과 핸들과 바퀴와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분들은 조립되고 조합되어서 차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차의 부분은 차 이전에 부분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 입니다. 그리고 시간은 차가 존재하는 것을 멈추게 하지만 그 부분은 여전히 있죠. 맞죠?
그것은 부분을 위해서 가집니다. 부분을 위해서 팔립니다. 거기에는 분리 뚜껑이 있을 것이고, 그리고 거기에는 바퀴가 있을 것이며, 그리고 거기에는 핸들이 있을 것이고 카 뷰레이터가 있을 겁니다. 그러므로 이름,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재활용의 논의 입니다.”
그것은 플라톤에게는 자연스러운 실제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하게 타당한 관점에서 보여집니다. 어떠한 것이 전에서부터 존재했던 부분에 의하여 존재하는 것들에 의해서 구성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건, 그들을 형성하고 있는 것들을 가지고 있는 그것들이 멈춘다면, 그 부분들은 다른 목적들에 의해서 사용됩니다. 그들은 재활용됩니다. 만일 우리가 플라톤의 말을 당연시한다면, 그는 영혼이 불멸한다는 것에 대한 논의를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왜냐면, 우리를 이루고 있는 것의 부분은 무엇인가요? 음,
물리적인 우리의 육체를 이루고 있는 것은 여러 부분이죠, 그러나 우리의 영혼 또한 거기 있습니다. 기억하세요, 제가 말하는 것은 파이돈안에서 이미 소개 된 것입니다.
플라톤은 무언가, 영혼, 같은 것이 그렇게 분리되어 존재한다고 미리 가정하고 논의하진 않았습니다. 그의 기초적인 생각은 영혼의 불멸에 대한 논의를 시도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단지 영혼이 있다는 것에 대한 증명을 하기 위해서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한 겁니다. 그건 우리의 한 부분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구성하는 것 입니다. 그건 우리를 구성하는 어떤 조각입니다.
재활용에 대한 이론을 준다면,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부서지고 나서도 계속해서 존재하는 영혼에 대한 이유를 가진다면. 심지어 우리가 죽은 이후에서, 우리의 부분은 영원히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육체는 우리의 죽음 이후에서 계속해서 존재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계속해서 존재합니다. 그럼, 재활용에 대해서 논의하는 데는 어떤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건 심지어 재활용에 대한 이론이 우리를 구성하는 무언가가 우리의 탄생이전부터 존재하여 어떤 부분의 종류가 되고 그것이 우리의 죽음 이후에도 존재한다고 할 때, 우리는 우리의 죽음 이후에도 영혼이 계속해서 어떤 부분으로써 존재한다고 결론지을 수는 없습니다.
어떤 인간의 육체를 이루는 친근한 요소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오늘날 알듯이, 인간의 육체는 원자로 이루어져있습니다. 그리고 원자가 우리의 몸을 이루기 오래 전부터 존재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저의 죽음 이후에 그 원자들은 계속 해서 존재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거기에는 어떤 – 그리고 결국 어떤 다른 구성요소가 있습니다. 그래서 플라톤은 재활용에 대한 어떤 통념적인 사실에서는 옳습니다. 그것들은 저를 이루어서 존재하게 하기 이전에, 그리고 저의 죽음 이후에도 계속해서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건 제가 태어나기 전에 저의 육체의 모든 부분이 존재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고 저의 몸의 모든 부분은 제가 죽은 후에도 계속 존재한다는 뜻도 아닙니다.
제 심장을 봅시다. 제 심장은 제 육체의 어떤 부분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에 대해, 그것은 제 육체가 존재하기 이전에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부분을 이루면서 존재합니다, 함께, 제 육체의 창조와, 그리고 그건 계속해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그리 길게는 말입니다, 제 육체의 파괴 이후 말입니다. 거기엔 짧은 기간이 있습니다, 마치 실험용 시체처럼 제가 가정한다면, 저의 심장은 계속해서 존재하겠죠. 그러나 결국 저의 육체는 분해될 것 입니다. 우리는 제 심장이 불멸하고, 영원히 존재한다는 결론에 대한 어떤 이론도 가질 수 없었습니다. 그건 잘못되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만일 어떤 종류의 재활용이 일어난다는 것이 진실이라고 해도, 우리는 모든 저의 부분이 이후에도 계속해서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없습니다. 그건 분명 무언가를 이루는 한 부분입니다, 기초적인 부분의 하나입니다, 제가 만들어진 것 같은- 심장 같은. 그리고 만일 그것이 맞는다고 한다면, 만일 지금 제가 가진 부분이 제가 만든 것으로부터 오는 부분 중에 하나가 아니라고 해도, 제가 죽은 이후에도 구성하는 부분 중에 하나가 계속해서 존재한다는 특별한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가 이런 종류의 걱정을 한다면, 우리는 영혼에 대하여 똑같은 것이 사실이 될 수 있는가 보고, 지켜보아야 합니다.
만일 불멸의 영혼이 있다면 – 미안합니다. 만일 비물리적 영혼이 우리의 구성요소라며, 우리는 어떤 덩어리를 구성하는 어떤 것이 재활용되는 것에 대한 어떤 이유도 아직 갖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제가 구성하기 전에 존재하는 어떤 것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기에 충분한 이유를 갖지 못했습니다.
그 어떤 것은 재활용되고 계속해서 제가 분리된 후에도 존재할 것입니다. 제 육체가 분해된 후에도, 계속해서 저의 육체로부터 분리될 것입니다, 또는 당신이 가진 것도 말입니다. 심지어 재활용이 일어날 때에도, 우리는 영혼이 하나의 재활용되는 부분이라는 어떤 좋은 이유도 아직 가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건 저에게 “재활용에 대한 논의”라고 봅니다, 제가 부르듯이, 그건 아직 성공하진 않았습니다.
이제, 제가 말하듯이, 당신이 많은 시간 동안 대화를 읽음으로써, 이것 또는 다른 플라톤의 대화, 그건 비록 그가 모든 것을 인식하진 못했지만 적어도 독자를 배려하여 논의의 전 단계를 보여준 것과 같아요. 왜냐하면 때때로 뒷부분의 논쟁을 이해하는 가장 최선의 방법은 전의 취약한 논의를 보고 의존하는 것이죠. 그리고 제가 생각하기론 매우 명백하게 대화 안에서 바로 다름 논의가 나오게 됩니다.
제가 방금 했던 반대말이죠, 결국, 재활용의 논의로부터, 말하길, 효과적으로, 비록 어떤 재활용 같은 것이 발생하는 것은, 제 모든 부분에서 재활용이 일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제 부분의 모든 것이 제가 형성되던 때부터 구성 요소로써 미리 존재하는 것이나 전에부터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제 심장이 미리 존재하는 부분이라는 것에 대하여 어떤 특별한 이유도 가질 수 없습니다. ; 우리는 제 영혼의 한 부분이 미리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에 대한 어떤 좋은 이유도 가질 수 없으며 그것도 증명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플라톤의 바로 다음 논의는 우리가 정말 영혼이 전부터 존재하는 한 부분이라는 것을 믿는 것에 대한 이유를 가지기 위해 우리를 설득하려고 시도합니다. 그리고 논의는 알려진 바와 같이 “기억에 대한 논의” 입니다. 그 생각은, 그가 우리에게 어떤 사실에 대해서 말하기 위해서 설명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기억에 대한 어떤 사실을 포함하는 최선의 설명은, 또한 어떤 기억이나 상기되는 것에 대한 주장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기억할 뿐 입니다. 그가 생각하길, 만일 우리가 영혼이 우리의 육체의 탄생 전, 우리의 육체의 창조 전에 존재한다고 했을 때에 관련된 방법 안에서 그는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무엇입니까? 그건, 이렇게 시작해보기로 하죠- 플라톤은 우리에게 말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무언가를 기억하기 위한 것을 우리에게 떠올리게 합니다. 또는 무언가를 닮아서 무엇인가를 상기시키는 아마 더 나은 단어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의 어떤 것을 떠올리는 것일 뿐입니다.
저는 저의 친구 루스의 사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루스의 사진을 보는 것은 그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것은 제 마음에 루스를 제공합니다. 저는 루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합니다. 저는 제가 알고 있는 루스에 대해 기억하는 다양한 것들을 떠올립니다. 사진은 그런 것들 것 할 수 있게 합니다, 그것은 이런 생각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론, 그 사진은 루스는 아닙니다. 맞죠? 아무도 – 누구나 명백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진과 내 친구를 혼동하진 않습니다. 그러나 사진은 루스를 닮았습니다. 그것은 루스를 닮았고 저에게 그녀에 대해서 상기할 수 있고, 흥미를 가질 수 있기 충분합니다, 그것은 심지어 좋은 사진도 아닐 수 있습니다. 당신은 사진을 들고 그리고 저는 말하겠죠, “Gosh, 그건 정말 Ruth와 닮지 않았니?” 비록 저는 루스의 사진을 보고 있지만; 그건 저에게 그녀를 상기시킵니다.
이제, 사진이 얼마나 제 친구를 상기시킬 수 있는지 알았죠? 그럼, 이것은 어떤 깊은 미스터리는 아니라는 겁니다. 아마도 그 방법은 그렇게 적용할 것입니다, 그건 제가 말하듯이, 여자 같이 생겼습니다. 그건 여자 같이 생길 필요는 없지만. 그건 마치 여자 같이 보입니다. 당신의 어린 동생 혹은 누나, 거의 가족 구성원과 같이 그들의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저의 조카는 그녀가 세 살 때에 저의 가족을 그려주었습니다. 그것은 거의 우리와 비슷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떤 애매한 방식으로 닮아 보이는 것입니다, 그렇죠?
그래서 그건 잃어버린 친구와도 적어도 어떤 면에서는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루스를 만난 적이 없습니다, 추측해봅시다. 저는 그녀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여자에 대한 사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진은 루스의 기억을 당신으로 하여금 떠올리게 하지 못합니다. 왜죠? 그건, 당신이 루스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부분은 오직 루스의 이미지가 아닙니다, 비록 루스의 이미지가 완벽하지는 않지만, 우리는 또한 어떤 루스를 전에 아는 어떤 것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정말 많은 일들이 있어야 합니다, 맞죠? 그래서 먼저 –시간적 순서- 첫번째로 당신이 루스를 알고, 당신이 루스를 만나고, 당신이 루스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신이 루스의 이미지를 보여준다면- 아마도 루스의 이미지가 썩 특별히 좋지는 않아도- 그러나 당신이 상기하기 충분할 것 입니다. 그리고 갑자기, 당신은 루스를 안다는 사실을 기억하겠죠. 그것이 기억이 작용하는 방법입니다. 좋아요.
이제 플라톤이 가리키는 것은 플라토닉 형상들에 관한 것들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것 입니다. 그러나 플라토닉 형상들은, 우리가 또한 알듯이, 이 세상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숫자 3은 물리적인 물체가 아닙니다. 완벽한 곡선도 물리적 물체가 아닙니다, 완벽한 선은 물리적 물체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것들에 대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그것들을 잡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세계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있는 다양한 것들은 우리에게 그런 것들을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부엌의 식탁 위에 있는 접시를 봅니다, 그것은 완벽하게 둥그렇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불완전합니다; 그러나 갑자기 저는 원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완벽하게 둥근 물체들입니다. 저는 누군가가 아름다운 것을 봅니다. 그나 그녀는 완벽하게 아름답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저는 자연적인 아름다움 그 자체를 생각합니다. 이 세계의 보통의 물체들은 플라토닉 형상의 거대하거나 적은 단위에 속해 있습니다. 그것은 플라톤의 형이상학의 그림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에 마주치는 것을 부정합니다, 우리는 봅니다, 우리는 날마다 그런 물체들과 상호작용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그들은 플라토닉 형상들 그 자체에 대하여 생각하게 합니다. 그런 일이 어떻게 일어납니까? 플라톤은 이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그것들은 플라토닉 형상들을 우리에게 불러일으키게 합니다.” 우리는 아름다움의 어떤 정도 가진 무언가를 보고, 완벽한 아름다움을 떠올리게 됩니다. 우리는 별로 그렇게 둥글지 않은 것을 보고, 완벽한 원을 상상합니다. 우리는 누군가 완벽하게 도덕적으로 고상한 것을 보고, 우리는 완벽한 정의나 완벽한 미덕을 떠올립니다. 그것은 사진과 같습니다, 아마도 별로 좋지 않은 사진이라도, 저는 제 친구인 루스를 떠올릴 것 입니다.
좋습니다. 그럼, 이런 것들이 별로 완벽하게 둥글지도 않은 것들이 어떻게 우리에게 완벽한 둥근 것을 생각하게 만들 수 있는 지에 대한 설명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플라톤이 말하듯이, “좋아요, 그러나 당신이 필요한 것은 기억하는 것이라는 것을 명심하세요, 일어난 일을 연상하는 것입니다.”
루스의 사진을 보고 연상하기 위해서 저는 루스를 이미 알아야 합니다. 저는 미리 그녀와 안면이 있어야 합니다. 저에게 둥근 것을 상기시키기 위하여 적어도 둥근 접시가 있어야 합니다, 플라톤이 말하길, 저는 이미 완벽한 둥근 것 자체를 마주했다고 합니다. 적어도 사회에서 완벽한 정의를 저에게 상기시키기 위해서, 저는 자연적 정의 그 자체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해야 합니다. 저는 이미 완벽한 정의를 어떻게든 마주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났죠? 이 삶에서는 아닙니다, 이 세계에서는 아닙니다. 이 세계에서는 완벽한 곡선과, 완벽한 아름다움은 없습니다, 완벽한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만일 제 친구의 사진을 본다면 저에게 제 친구를 연상시키겠죠, 그것은 제가 제 친구를 전에 만났기 때문일 것 입니다. 만일 저에게 어떤 형상을 연상시키는 형상을 본다면, 그것은 제가 전에 그런 형상을 직접 보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것을 마주치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직접 만나지 않았고, 당신은 이 삶에서 형상들을 마주치지 않았고, 잡을 수 없었고, 볼 수 없었습니다.
플라톤의 논쟁입니다. 플라톤은 말합니다, 우리가 형상을 잡을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은 영혼은 우리의 탄생 전부터, 플라토닉 천국의 왕국에서, 직접 만지며, 직접 이야기 나누며, 직접 형상들을 이해하며 존재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것은 이 삶에서는 일어나지 않았으며, 그래서 그것은 전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그럼, 봅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보는 것들에 대한 논의를 합니다. 초기의 반대는, 우리는 좋지 않은 이유를 가집니다. 초기의 반대는, 우리는 우리가 이루고 있는 것으로부터 그 중의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는 것에 대하여 영혼에 대한 좋은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조각중의 하나가 우리의 몸이 형성되기 전, 탄생되기 전에 존재하는 것에 대한 좋은 이유가 없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하길, “아니요, 반대로, 우리는 이유를 가질 수 있습니다. 기억으로부터 오는 기초적인 논의에 대해서,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있었던 영혼에 대해 결론을 말하기 위해서요”
맞아요, 그리고 다음 질문은, 기억으로부터 좋은 논의가 있나요? 이제 말해봅시다. 저는 플라톤의 생각이 적용되는가 아닌가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질문은 이겁니다, 우리의 생각이 적용되나 아닌가? 비록 이 논의의 형태가 플라톤이 또한 다른 논의에서도 보여주었던 것일지라도, 그래서 이것이 저에게 적어도 어떤 이유는 그가 느끼는 것이 반드시 맞았다는 논의라고 생각되는 어떤 이유일지라도. 중요한 전제는 – 다시, 우리는 단지 플라톤의 형이상학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질문은 설명해야 하는 것 입니다. 이제 우리가 얼마나 그 형태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는가, 우리는 우리가 직접적으로 알았던 전의 존재에 대해 호소할 수 있는가?
그것은 명확하게 진실은 아닙니다. 몇 가지 이유로 그것은 명백하진 않습니다.
하나의 질문은 이겁니다: 정말 완벽한 직선에 대해서 생각하기 위해서, 나는 어떻게든, 어디에서든 어떤 부분에서 마주쳤고, 완벽한 직선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을 가진 것이 진실일까?
이 세상에서 마주치지도 않은 경우에 대해서 추론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지 않습니까?
저는 구부러진 것을 마주했습니다; 저는 더 직선적인 것도 마주한 적이 있습니다, 더욱 더 곧은 것입니다. 제 마음은 거기에서 생각하는 것을 뗄 수 없고, 그 생각은 더 나아가서 완벽한 선의 생각을 합니다, 비록 제가 그것을 전에 본 적이 없지만요.
이제 생각에 대해서는 멈추겠습니다. 만일 플라톤이 맞는 다면, 우리는 플라토닉 형상들을 생각하기 위해서 그 자체들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비록 플라톤이 맞았다고 한들 이 세계 속에서는 만날 수 없습니다, 평범한 물리적 물체들과 상호작용하는 속에서, 왜 우리는 지금의 삶의 바로 처음에 플라토닉 형상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가질 수 없었을까요? 그것이 질문입니다, 또는 반박입니다, 우리는 다음 시간에 여기서 시작하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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