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셸리 케이건

5강 : 영혼의 존재에 대한 논의(3부): 자유 의지와 가사 상태 체험

rainbow3 2019. 9. 18. 00:26

5강 : 영혼의 존재에 대한 논의(3부): 자유 의지와 가사 상태 체험 - 죽음 : 케이건 교수 예일대학

 

케이건 교수가 비(非)물리적인 영혼의 존재에 대한 증명으로 자유 의지에 대한 논의를 자세하게 이어나간다. 이번 논의는 세 가지 전제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우리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그 어떤 것도 것이며, 세 번째는 모든 순수한 물리적 체계는 결정론(決定論)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이 전제로부터 도출할 수 있는 결론은 인간은 단지 순수한 물리적인 체계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며, 케이건 교수가 왜 이 논의가 별로 설득력이 없는지를 설명해 준다.

덧붙여서, 임사 체험 (near-death experience)과 데카르트적 논의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한다.

 

 

셸리 케이건 교수:

좋아요. 우리는 지금 우리로 하여금 비물리적인 영혼의 존재를 믿게 하는 주장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공부하고 있는 주장들의 유형은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inference to the best explanation)’의 일반적인 기준(rubric : ‘루브릭(rubric)’은 전통적으로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 붉은 잉크로 쓰여지거나 인쇄된 원문(text)의 단어 혹은 특정 부분을 말한다.

붉은색 오커(페인트・그림물감의 원료로 쓰이는 황토) 혹은 분필을 의미하는 라틴어 ‘루브리카(rubrica)’에서 유래된 단어이며, 루브릭에서의 붉은색 글자들은 (특히 찬송가에서의) 문장 처음의 대문자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우리들, 혹은 영혼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우리와 관련된 것을 설명하는데 필요한 무언가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영혼의 존재에 대해 상정합니다. 제가 그러한 일련의 주장들에 대해서 설명을 드렸었고, 우리가 지난 시간의 마무리로서 했던 내용 중 하나가 우리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존재를 믿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들 중 대다수가 우리 자신들에 관하여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에 대한 비판 혹은 물리주의자들에 대한 반대로서의 주장은 ‘한낱 물리적인 총체에 불과하다면 자유 의지를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 단순한 물리적인 대상이 아니다’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고, 따라서 우리에게는 물리적인 존재라는 것 이상의 그 무언가가 있을 것입니다. 이제, 만약 우리가 단순한 물리적인 존재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는 ‘자유 의지’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할 수 있는 이원론자들의 입장이라면, 저는 바로 우리가 지난 시간에 마지막으로 공부했던 부분을 통하여 그런 이원론자들의 주장을 자세하고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마지막으로 했던 것이 이것이었죠. ‘자유로운 것’과 ‘결정되는 것’은 일종의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것들 중 하나라는 것 말입니다. 제 말은, 결국 물리주의자들의 시각에서 보면 우리는 단순히 대부분의 공상 과학 영화에서의 로봇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일들을 할 수 있는 미화된 ‘로봇’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는 단순하게 미화된 ‘물리적인 대상’입니다. 우리는 단순한 로봇입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반대 의견이 우리는 단순한 로봇이 아니라 잘 짜인 대상이라는 것입니다. 이 로봇들은 필연적으로 그들의 ‘프로그램’을 따라야만 합니다. 좀 더 일반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아마도 그 로봇들이 결정론의 지배를 받는다고 말할 것입니다. - 그 로봇들은 물리적인 대상으로서, 그것들이 물리적인 자연의 법칙들이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들을 따라야만 합니다. 그리고 물리의 법칙들은 - 결정론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이러한 법칙들이, 혹은 물리적인, 혹은 구조적인 법칙들이 만약 우리가 특정한 방식으로 그 법칙들을 세운다면 그에 따른 원인과 결과가 주어진 초기의 상태, 바로 그 같은 효과가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 맞을 경우에는 결정론이 다소 철학적인 용어들로 설명될 수도 있습니다. 그와 함께 수반되는 자연의 법칙에 의해서 결정되는 결정론은 그 원인으로부터 또 다시 출발합니다. 그리고 만약 여러분들이 테이프를 되감고 재생을 계속해서 반복한다면 여러분은 매번 같은 방법으로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고, 그 행동들은 틀림없이 바로 그 같은 상태로 이동하거나 변형되거나 혹은 마무리될 것입니다. 글쎄요, 저는 여기까지 결정론에 대해 전부 설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직관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우리는 자유 의지를 가질 수 없으며, 따라서 결정론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것이 합당한 것처럼 보입니다. 왜냐하면 자유 의지라는 개념은 심지어 제가 바로 이 장소에 있었다고 하더라도, 바로 그 상황이 다시 일어난다고 해도 저는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저는 그러한 선택을 하기 위해 결정되었거나 ‘미리 결정지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약 좀 더 완벽성을 기하여 그 주장을 설명해 본다면, 그것은 아마도 “우리는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어요. 하지만 여러분들은 자유 의지를 지닐 수 없고, 결정론이나 결정론적인 법칙의 지배를 받게 될 거예요.”가 될 겁니다. 그리고 모든 물리적인 대상이나 ‘순수한’ 물리적인 물체들은 결정론적인 법칙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물리의 법칙이 곧 결정론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은 이러한 것들을 하나로 합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순수한 ‘물리적인 대상’은 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반드시 순수한 물리적인 물체 그 이상의 어떤 것이 있습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칠판에 판서했던 내용을 다시 한 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여기를 보도록 하십시오. [그림 5.1을 보세요]

하나, 우리는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둘, 결정론의 지배를 받지 않는 모든 것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셋째, 모든 순수한 물리적인 체계는 결정론의 지배를 받습니다.

따라서 - 결론은 - 우리는 순수한 물리적인 체계를 지니고 있는 대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은 우리가 호소해야 한다고 - 우리가 비물리적이면서 순수한 물리적인 대상 그 이상인 ‘영혼’의 존재를 상정해야만 한다고 주장합니다. 글쎄요, 이것이 반대하는 사람들의 주장입니다. 그러나 제 자신은 그들의 주장에서 흥미로운 부분을 찾아볼 수가 없군요. 이제, 처음으로 여러분께 공지할 사항은 우리에게 필요한 앞의 세 가지 모든 전제들에 대해서 결론을 내려주시길 바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내린 결론이나 “우리는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라는 전제는 잊어버리십시오. 이것들은 우리가 비물리적인 대상이라는 것을 따르지 않을 겁니다. 심지어는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도 비물리적이어야 할 것이며, 역시 우리가 비물리적이라는 것을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각각의 전제 하나하나는 옳은 내용입니다. 자, 그것들은 잊어버리도록 합시다. 결론은 아직 나지 않았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각각의 전제들이 그럴듯하게 도전받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것처럼, 자유 의지의 대상 - 혹은 자유 의지, 결정론, 요인(要因)과 책임 등 이러한 문제들은 극히 어렵고 복잡한 물리학적인 문제입니다. 그래서 그 문제들에 대해 토론하는 것에만 한 학기 전부를 소비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전체적으로 맛보기 식으로만 공부할 겁니다. 하지만 왜 우리가 자유 의지에서부터 영혼의 존재까지 이르는 주장에 반대를 제기할 수 있는지 빠르게 짚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제가 언급했던 바와 같이 그 주장은 ‘전제 1’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경우가 될 수도 있습니다. - 아니면 적어도 우리가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필요한 이 주장이 될 수도 있습니다. - 그것은 우리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경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제, 그 주장들은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틀림없이 우리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믿지만 그것은 환상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철학자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로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입니다. 정말로, 왜 우리는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일까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이유는 그 주장의 나머지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마도 “오, 글쎄요, 알다시피 우리는 물리적인 존재예요. 결정론은 맞는 말이에요. 결정론의 지배를 받는 어떠한 물리적인 대상도 자유 의지를 가질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우리도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는 거죠. 물론, 우리는 실수로 우리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환상 속에서 움직이는 물리적인 존재인 거죠. 하지만 결국에는 자유란 건 우리가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것은 아닐 거예요, 그렇죠? 여러분은 여러분의 마음속을 들여다 볼 수도 없고, 여러분이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도 볼 수 없죠. 그래요, 우리에게는 우리가 각기 다르게 행동할 수도 있다는 의식이 있어요. 하지만 아마도 그건 환상일지도 몰라요.” 라고 할 겁니다. 제가 말한 것처럼, 이러한 주장을 하는 철학자들은 우리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고 만약 우리가 사실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우리가 더 이상 위의 주장으로 영혼의 존재에 대해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부정해 왔습니다. 그것이 논쟁을 피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제 생각이지만, 여러분께 제 자신은 우리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거짓이라는 걸 믿지 않는다고 말씀드려야겠군요. 다시 말해서, 저는 ‘전제 1’에 대해서는 그것이 진실이라고 믿고, 제 자신이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비록 제가 그 주장을 좋아하지 않고, 믿지 않는다고 해도 그 ‘전제 1’을 거부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러나 다른 두 가지 핵심 전제들이 또 있습니다. “모든 순수한 물리적인 체계들은 결정론의 지배를 받는다.” 라고 하는 ‘전제 3’은 무엇에 관한 걸까요? 글쎄요, 우리는 또한 우리의 주장을 펼치기 위해서 ‘전제 3’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보세요, 여러분은 자유 의지도, 결정론도 가질 수 없어요. 그 둘을 결합시킬 수 없다는 말이죠.” 라고 생각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여러분이 자유 의지와 결정론 그 둘을 결합시킬 수 없다는 시각은 때로는 명확한 이유로 ‘비(非)호환주의(incompatibilism : 자유 의지와 결정론이 각기 논리적으로 양립할 수 없는 범주라고 보는 개념)’으로 알려지기도 합니다. 이것은 결정론과 자유 의지, 이 두 가지가 서로 조화될 수 없다고 보는 의견입니다. 여러분은 결정론과 자유 의지 모두를 가질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양립불가론과 우리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는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결정론적 법칙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는 것을 따를 것입니다. 글쎄요, 이원론자들은 “양립불가론은 우리가 우리에게 비물리적인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함을 보여줍니다. 결국에는 ‘모든 순수한 물리적인 체계는 결정론의 지배를 받는다.‘고 하는 ‘전제 3’이 있기 때문이죠. 어쨌든 물리학의 기본 법칙들이 결정론적 법칙이라는 것이 맞지 않나요?” 정답은 바로 “글쎄요, 그게 진실인지는 분명하지 않아요.”라는 겁니다. 다시 말해 ‘전제 3’ 또한 반박당할 여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께 무언가 말씀드리고자 하는데, 이전에 제가 수차례 언급했던 것처럼 '전제 3'이 경험 과학에 관한 주장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의 법칙에 관한 최선의 이론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저는 과학자도 아니고, 경험적인 문제에 관한 전문가도 아니며, 기초과학에 관한 최선의 이론인 양자역학에 관한 권위자도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들었던 - 양자역학에 관한 일반적인 해석은 우리들 중 대다수가 달리 믿었던 것은 사실 물리학에 관한 기본 법칙이 결정론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 - 여전히 그 입장을 취하고 - 이해합니다. -

 

이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가 방사성 원소를 몇 개 가지고 있는데, 그 원소들이 언젠가는 붕괴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또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알다시피 아마 다음 24시간 내에 붕괴할 것이라는 80퍼센트의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80퍼센트의 방사성 원소들은 다음 24시간 내에 붕괴하도록 만들어졌다면 나머지 20퍼센트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해석론 하에서의 양자역학에 따르면 이것이 내용의 전부입니다. 여러분이 다음 24시간 내에 붕괴하는 80퍼센트의 기회가 있는 원자를 가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한 원자들이 붕괴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우리가 왜 그것이 붕괴했는지 말할 수 있을까요? 물론입니다. 우리는 "글쎄요, 결국 '그럴 것이었던' 80퍼센트의 기회가 있었던 것뿐이예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번에는 24시간이 지난 후에도 붕괴하지 않는 원자를 가지고 있다고 해 봅시다. 우리가 그것들이 왜 붕괴하지 않았는지 말할 수 있을까요? 이것 또한 가능합니다. '그렇지 않았을 것'이었던 20퍼센트의 기회가 있었던 것뿐입니다. 우리가 왜 붕괴하는 것은 붕괴되고, 그렇지 않은 것은 왜 그런지를 설명할 수 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그럴 것'이었던 80퍼센의 기화와 그 반대인 20퍼센트의 기회가 있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심오한 내용 같지 않습니까? 이 이상 깊게 들어갈 수도 없을 것입니다. 이제 결정론적인 입장에서 스스로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틀림없이 무언가 근원적이면서 일반적인 설명이 있을 거예요. 왜 그들이 붕괴하는지, 그리고 왜 그것들이 붕괴하지 않는지 설명해 주는 '붕괴하지 않는 원자들'로부터 사라진 '붕괴한 원자들'과 관련한 어떤 현상 같은 것 말이에요. 어쨌든 그것이 결정론과 관계있다는 것이죠. 안 그래요? 만약 여러분이 바로 그 방법으로 원자를 다룬다면, 원자들은 항상 붕괴될 거예요." 하지만 결론적으로, 양자역학에 관한 일반적인 해석에 따르면 결정론은 이러한 원자 활동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오직 "어떤 원자들은 붕괴하고, 다른 것들은 그렇지 않다." 라는 것을 말해 줄 뿐입니다.

 

양자역학에 관한 일반적인 해석에 따르면 물리학의 기본 법칙들은 확률론(probabilistics : 어떤 사건이 미래에 일어날 일이거나 이미 발생한 것이라는 지식 혹은 믿음을 나타내는 방법. 역학(力學) 분야에서는 확률 이론에 관한 올바른 정의로 받아들여졌는데, 광범위하게는 통계, 금융, 기타 과학, 그리고 철학 연구에서도 잠재적인 사건의 가능성과 복잡계의 기본적인 역학 구조에 대한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사용된다.)적입니다. 결정론은 기초 물리학 수준에서는 틀린 것이죠. 그래요, 이것이 제가 말하고자 하는 바입니다. 저에게 어떤 권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물론 그것이 진실이라면 '전제 3'은 '거짓'이 되겠죠. 그것은 단순히 모든 순수한 물리적인 체계들이 결정론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 사실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말할 뿐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자유 의지와 결정론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이 밝혀진다고 해도, 이 사실이 우리가 순수한 물질적인 대상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지는 못합니다.

모든 순수한 물리적인 체계가 결정론의 지배를 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결정론이 기초적인 수준에서조차 진실이 아니라면 설령 여러분이 결정론과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가능성은 있으며, 이러한 이유로 순수한 물리적인 체계도 될 수 있습니다.

 

저는 주장들이 서로 연결되지 않는 방식으로 설명을 드리면서 또한 잠시 시간을 내어 '전제 2'가 '비평'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전제 2'는 "결정론의 지배를 받는 것들은 그 어떤 것도 자유 의지를 가질 수 없다."라는 '비(非)호환주의자'적인 주장입니다. 그 둘을 결합시킬 수는 없습니다. 그것들은 양립할 수 없습니다. '비호환주의'는 아마도 상식적인 관점에서의 그 '어떤 것'일 겁니다. 그 관점에 대해서는 아마 여러분들 중 대다수가 믿을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철학적으로 그것이 도전받을 수도 있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입니다. 한 무리의 철학자들 - 제가 정중하게 말씀드리지만 - 저처럼 그러한 주장을 믿는 철학자들이 있었고, 사실 자유 의지라고 하는 개념은 결정론과는 양립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결정론이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배제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결정론과 자유 의지를 모두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양립할 수 있는 것이죠. 이런 이유로, 이와 같은 관점이 '호환주의(compatibilism : 비호환주의(양립불가론)과는 달리 결정론과 자유 의지가 공존할 수 있다고 보는 입장)'라고 합니다.

 

만약 우리가 호환주의를 인정한다면 "보세요, 아마 우리는 결정론을 가지고 있을 거고 결정론은 우리에 대한 옳은 설명이에요. 하지만 또한 그 사실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단순히 순수한 물리적인 체계이기도 하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심지어 양자역학이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틀렸다고 해도, 거시적인 수준에서는 어쨌든 비(非)결정론(indeterminism : 상태나 결과의 인과론적 결정을 인정하지 않는 태도. 신(神) 또는 인간이 의지의 자유를 가진다고 생각하는 신학상 ·철학상의 학설이며 결정론(determinism)과 대립된다.)적인 것들은 전부 배제됩니다. 또한 거시적인 수준에서 보면 우리들은 결정론적인 체계인데, 도대체 무엇을 어쩌라는 말일까요? 만약 그렇더라도 결정론적인 체계들이 자유 의지를 가질 수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순수한 물리적인 체계인 것입니다. 명심하십시오. 저는 오늘 아직 여러분들에게 호환주의의 진실에 관해 확신을 줄 만한 그 어떤 것을 말하지도, 그렇게 하려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제 요점은 단지 우리는 무언가를 재빨리 생각할 수는 없기 때문에 우리가 자유 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존재를 믿어야만 한다고 말하려던 것뿐이었습니다. 이것은 영혼이 존재한다는 결론을 얻기 위한 주장의 전제 모두를 취합니다. 그리고 각각의 전제들은 도전에 직면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글쎄요, 논리적으로 말해서 물론 여러분들은 어떠한 주장의 어떠한 전제라도 받아들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니오, 제 말은 각각의 존재를 고려하는 '적절한' 철학과 과학의 영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주장은 많은 것을 요구하죠. 그것이 그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해주지는 않지만 만약 여러분이 영혼의 존재에 대해 토론하는 이 방법을 택한다면 아마 여러분의 수고를 덜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좋습니다. 이제 개요를 설명해 드리도록 하죠.

제가 말한 바대로, 우리는 지금까지 영혼의 존재에 관한 각기 다른 종류의 주장들을 공부했습니다. 각각의 주장들은 우리와 관련된 몇 가지 사실들 - 우리의 창조성, 무언가를 느낄 수 능력, 우리가 경험에 관한 질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추론할 수 있는 능력 - 같은 것들에 호소합니다. 우리에 관해 설명을 필요로 하는 몇 가지 사실들과 이원론자적 입장에서의 주장에 대해서는 영혼을 다루지 않고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그러한 주장들이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하는 저만의 이유를 여러분께 말씀드리고 같이 논의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제가 언급한 모든 종류의 주장들이 우리가 아마 매일 생각하는, 우리에 관한 친숙한 사실들이라는 것을 인식하셔야만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고 추론하고 느끼고, 그리고 창조적일 수 있는, 아니면 자유 의지를 가질 수 있다는 일상적인 '사건'입니다.

 

아마 영혼과 관련된 더 좋은 주장들은 일상적인 것이 아닌 평범하지 않은, 그리고 초자연적인 현상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주장들의 집합체를 가지게 될 지도 모릅니다. 다시 말씀드리자면 여전히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이라는 형식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가 유령과 초능력(ESP : Extrasensory perception), 임사 체험, 죽음과 같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 건지 설명하려면 영혼의 존재를 인정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들 중 어떤 것에 대해서도 우리는 "이것 보세요, 여기에 설명을 필요로 하는 어떤 것이 있죠? '최선의 설명'이라는 건 영혼에 호소하고 있다니까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러한 종류의 주장들에 대해 토론을 하려고 하는데, 그 전에 잠시 다른 것을 해 보죠.

'임사 체험'을 예로 들어 해 봅시다.

임사 체험에 대해서는 여러분의 책 목록에 있는 것 중(course packet)의 하나인 시크와 본(Theodore Schick & Lewis Vaughn : 철학 서적 저술가)의 책 [Schick and Vaughn 2005, 207-323]에서 조금 읽어 봤을 겁니다. 이 책의 기본 아이디어는 여러분에게도 친숙했을 겁니다. 임사 체험 다음으로 언급되는 것이 사람들의 심장마비와 같은 것들이기 때문이죠. 심장마비가 온 사람들은 수술대 위에서 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처치를 하면 살아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그 후에 질문을 던지면 매우 충격적인 경험담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들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인종이나 문화와는 상관없이 똑같은 경험담을 이야기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육체를 떠나 수술대 위에서 죽어갈 때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이죠. 어쩌면 그들은 몸 위에 떠서 그들의 육체를 바라볼지도 모릅니다.

 

결국에는 아마 그들은 그들이 했던 경험 안에서 완전히 수술실을 떠나 기쁨과 극도의 행복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들은 터널을 지날 때 그 터널의 끝에서 어떤 밝은 빛을 보는 경험을 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터널의 다른 쪽 끝에서는 이미 죽은 그들의 지인이나 혹은 그들의 종교적 전통을 가르쳐 준 훌륭한 종교인들과 대화를 나누거나 그들을 보았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들이 죽어서 천국으로 사라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되돌아와 정신을 차려보니 병실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들이 임사 체험을 했다는 이야기이죠. 아니면 더 적절한 설명은 '그들이 죽음을 경험했었지만 다시 삶으로 되돌아왔다.'가 될 겁니다.

 

이제 알겠습니까? 여러분들은 사람들에게 설문조사를 할 것이고, 사람들은 대답을 해 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신에게 되물을 겁니다. "그 이야기가 설명하는 바는 무엇인가?"

여기 그에 대한 정말 쉽고 자연스러운 대답이 있습니다. 그들이 죽었다는 겁니다. 그들의 육체가 죽어서 그 다음 세계로 갔었다는 것 말입니다. 그들은 그 다음 단계의 삶으로 넘어갔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천국'으로 갔었지만 다시 삶으로 되돌아온 것입니다. 그들의 육체가 수술대 위에 놓여져 있었지만 그것이 천국에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무언가 육체적이지 않은 것이 천국에 갔다가 되돌아온 것이죠. 이런 방식으로 설명이 이어집니다. 그 순간에 무엇이 사라졌던 것인지에 관한 자연스럽고 쉬운 설명입니다.

이런 이유로,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이 성립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육체의 죽음으로부터도 살아남고, 육체를 떠나 천상의 세계로도 올라갈 수 있는 비물리적인 그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영혼의 존재를 상정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위의 경우들에서처럼, 육체와 비물리적인 그 어떤 것의 연결고리는 절대 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정신을 되찾았고, 영혼도 어떤 이유에서든지 다시 돌아와 육체에 연결된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이 자리에서 유추의 일종을 이용하기 위해서 두 개의 공간이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와 삶을 나타내는 공간이 있습니다. 그리고 임사 체험과 같은 경험에서 일어나는 것은 여러분의 영혼이 현실의 '그 공간'을 떠나 두 번째 방으로 넘어가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다음 세계 혹은 다음 생애에 있는 '그 방'에 안주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것입니다. 영혼이 현실 세계의 방으로 되돌아온 것이죠.

 

글쎄요, 이것 또한 가능한 설명입니다. 잠시 후에 여러분께 어느 것이 가장 적절한 최선의 설명인지 물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질문으로 넘어가기 전에, 이렇게 생각하는 모든 종류의 방식에 대한 잠시 생각해볼 만한 반론이 있습니다. 그 반론은 우리가 본 과정의 초반에 살펴보았던 "제가 죽음으로부터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라고 하는 질문을 무시하는 태도와 유사한 것입니다. 글쎄요, 설마 더 이상 삶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 생명이라는 것이 있을까요? 물론 아니죠.

 

그 반론은 '두 개의 방' 이라는 개념에는 틀림없이 오류가 있다고 지적합니다.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임사 체험에서 일어나는 일이 사람들이 말한 것처럼 죽었다 살아난 것이 될 수 없는 이유가 그들이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어쨌든 임사 체험을 한 사람들은 20분 혹은 그 이후에 좋아져서 정신을 차리고 깨어납니다. 아니, 좋아진 것이 아니겠군요. 그 사람들은 아마 병원 침대에 누워있기는 하지만 분명히 살아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기 떄문에 반론자들은 그들이 실제로 죽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겁니다. 혹은 여러분이 원한다면 아마 그 사람들이 죽긴 했지만 분명하게 '완전히 죽은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현실의 삶으로 되돌아온 것인데, 어떻게 그들이 완전히 죽었다 살아난 것이냐고 주장하실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들의 경험을 사후 세계에 관한 진실성 있는 기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알고자 하는 바가 영원히 죽는다는 것이 어떤 것이냐 하는 건데, 그 사람들은 영원히 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가지고 있을 독특한 경험이 무엇이든지간에, 그것들은 사후 세계에 관한 기록이 아닌 것입니다. 반론이 이와 같은 주장을 하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잠시 시간을 내어 그에 대한 이의를 제기하고자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것들을 모두 진지하게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제가 생각했던 반론이 아닙니다. 좋습니다, 우리 모두가 동의했다고 가정하고 엄격하게 말해 그 사람들은 죽었던 것이 아닙니다. 아니면 그들이 확실히, 적어도 영원히 죽은 것은 아닙니다. 이 주장이 임사 체험자들의 경험이 사후세계가 대체 어떤 것인지에 대한 증거로 취할 수 없는 것일까요? 저는 이것이야말로 잘못된 반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이 "보세요, 전 프랑스에서 20년 정도 살았고 그 뒤에 미국으로 돌아왔어요. 그리고 프랑스에서의 삶이 어땠는지 여러분에게 이야기해 드리고 싶어요."라고 말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누군가가 "이것 보세요, 당신이 진짜 영원히 프랑스로 간 건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프랑스에서의 당신의 경험은 그게 재미있었든지 아니든지 영원히 프랑스에서 사는 게 어떤 건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는 거죠. 그럼 당신은 '잠깐만요!' 라고 말할 거예요. 안 그래요?" "물론 제가 프랑스로 영원히 간 것이 아닌 건 맞아요. 하지만 저는 프랑스에 몇 번 가본 적은 있죠. 그래서 저는 여러분께 - 20년이라는 대단한 세월을 - 프랑스에서 사는 것이 어떤지 꽤 좋은 경험담을 들려드릴 수는 있어요. 설령 제가 제 남은 여생을 프랑스에 가서 돌아오지 않고 보낸 것이 아니라고 해도요." 만약 여러분이 '돌아오기 전'에 프랑스에서 며칠간만 보낸 것이라면 이정도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여전히 여러분은 그에 대한 적당한 무언가를 말할 수 있습니다.

 

음, 글쎄요, 제가 프랑스에 전혀 가본 적이 없다고 가정해 봅시다. 또 모든 일들이 제가 프랑스 국경 바로 위에 서서 프랑스를 바라보며 프랑스 쪽의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벌어진다고 해 봅시다. 그들은 프랑스 쪽 국경에 서 있었고, 저는 반대쪽에 서 있엇지만 그들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프랑스로는 가지 않았고, 또 그렇다고는 해도 여러분께 프랑스에서의 삶이 어떤 것인지 말해줄 수는 있을 것입니다. 음, 만약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프랑스의 경우를 말해주는 바로 그것이었다면, 왜 임사 체험의 경우에는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없는 것일까요? 임사 체험자들이 '두 번째 방'에 간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들은 죽은 상태가 아니었고, 죽음에 가까운 어떤 경험을 한 것입니다.

이 경험이 죽음이 무엇인지 말하는데 충분하지 않은 것일까요? 혹은 우ㄹ가 만약 "아니에요. 엄격하게 말해서 그 사람들은 절대 죽은 게 아니에요. 그들은 단지 '두 번째 방'을 바라보는 경계선 위에 있었던 것뿐이죠. 그들은 절대, 확실히 말해서, 죽은 게 아니에요." 이것이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그들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 위에 있었습니다. 그들의 경험담은 증거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마치 제가 여러분께 지금 복도에서 어떤 재미있는 일이 일어나는지도 말하지 못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왜냐하면 어쨌든 저는 지금 복도에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 강의실 안에 있으니까요. 이 사실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저는 지금 강의실 안에 있지만 바깥쪽 복도를 볼 수 있고, 여러분께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철학 분야'라고 부르는 영역에서 임사 체험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철학적으로 좋지 않은 개념 정립이며, 저는 임사 체험을 믿지 않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임사 체험을 믿지 않는 것이 우리가 임사 체험으로부터 영혼의 존재를 이끌어내 믿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임사 체험의 경우에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에 관한 최선의 설명은 무엇일까요?"라는 질문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대로 하나의 가능성은 제가 방금 전에 말씀드린 "'두 개의 방' 이야기"입니다. 현세에서의 삶의 방이 있고, 내세에서의 삶의 방이 있으며, 임사 체험자들은 일시적으로 내세의 '두 번째 방'에 갔거나 적어도 두 번째 방을 흘끗 바라보던 중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의 가능한 설명입니다. 하지만 또 다른 가능성도 있죠. '하나의 방 이야기'입니다. 지금의 삶, 즉 현세의 삶만 존재하며, 여러분이 그 끝의 벽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첫 번째 방'의 가운데서 보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것들을 보고 느끼게 될 것입니다.

 

아마 '하나의 방'이라는 비유는 최선의 비유는 아닐 겁니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는 나오는 그 즉시 "음, 그 벽의 반대쪽에는 무엇이 있는데요?"라는 질문을 나오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물리주의자들은 그 벽 너머에는 아무 것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므로 더 좋은 방법은 간단히 말해 이것이겠죠.

삶은 생물학적인 과정이며, 우리는 그 중간지대에서 그와 같은 과정에 모두 익숙해져 있다는 것 말입니다. 끝쪽 지대에서는 무언가 꽤 독특한 생물학적인 과정이 벌어질 겁니다. 그러나 드물긴 하지만 때로 몇몇 사람들이 그러한 독특한 생물학적인 과정을 거친 뒤에 '평범한' 생물학적 단계로 돌아와 '독특한 생물학적 과정' 중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결국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가 임사 체험의 과정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한 생물학적, 물리학적 설명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직 여러분께 물리학적인 설명을 해 드릴 때는 아닌 것 같습니다. 지금은 단순한 설명을 해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두 개의 대립되는 설명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영혼과 이원론자, 우리가 '두 번째 방'이라고 하는 다른 세계에 갔었다는 설명과 물리주의자, 이들에 대한 기초적인 설명에 의하면, 우리는 흰 빛과 극도의 행복감에 대해, 그리고 물리학적인 용어로 여러분이 상당한 거리에서 여러분의 육체를 바라보게 된다는 것을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임사 체험의 양 측면에 대해 위의 대표적인 두 가지 입장에서 각각 과학적인 설명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물리학적인 설명 또한 할 수 없는 것이 됩니다. 하지만 사실 물리학적인 설명은 과학자들의 몫이죠. 여러분은 시크와 본의 저서에서 개략적인 설명을 읽으셨을 겁니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육체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마치 생물학적 과정의 끝에 도달한 것처럼 특정 엔돌핀(endorphin : 뇌에서 분비되는, 진통 작용을 하는 호르몬)이 신체 내부에서 분비된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극도의 행복감에 관한 설명을 해줄 겁니다. 육체가 스트레스를 받으면 우리의 뇌에서 시감각 부분이 색다르고 독특한 자극을 받게 되며, 이것이 흰 빛과 터널에서의 압박감을 설명해줄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어떤 종류의 과학자도 아니며, 따라서 여러분께 "보십시오, 여기 자세한 설명이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은 여러 책들에서 개괄적인 설명들을 읽으셨고, 그것이 여러분이 내린 판단입니다.

우리들이 육체와 두뇌가 거의 죽음에 다다랐을 때 받는다는 정신적 외상 스트레스에 관한 여러 실험들을 설명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해 보이지 않습니까? 아니면, "아니에요, 지금 여기서 벌어지는 일은 영혼이 육체와 연결된 부분으로부터 빠져나온 거예요."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더 적절할까요?

제 생각으로는, 제가 임사 체험으로부터 어떤 주장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하는 충분히 설득력 있고 충분히 강력한 과학적인 설명에 대한 첫머리를 - 영혼의 존재에 대한 주장으로서 - 특별하게 설득적인 부분을 찾아내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가 초자연적인 현상에 관해 접할 수 있는 다른 여러가지 설명들이 있습니다. 그렇죠? 저는 단지 우리가 그들 중 하나에 대하여 자세하게 토론했다는 것을 언급한 것뿐입니다. 하지만 시체 혹은 유령과 같은 유형의 존재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사람들에 대한 여러 가지 설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 물리주의자들이 그러한 설명들 중 필요로 하는 것 - 여러분이 "우리는 혼령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영혼의 존재를 믿어야 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혼령과 접촉할 수 있는 사람이 오직 여러분의 돌아가신 삼촌이나 알 법한 여러분의 과거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있는 걸까요?"라고 말하는 이원론자들을 상상할 수 있는 그것 말입니다. 이원론자들은 영혼과 같은 존재를 이용함으로써 그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물리주의자들은 어떻게 그들의 주장을 펼칠 수 있는 것일까요? 간략하게 말씀드리자면,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러한 것들을 물리학적이고 자연주의적이며, 물질주의적이고 과학적인 용어로 설명하려고 하는 류의 사람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사람들도 있죠. 따라서 예를 들어, 여기 마술사가 한 명 있습니다. 질문은 어떻게 제가 여러분께 혼령이 그런 놀라운 일을 해낼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것인지가 아닙니다. 그것을 저 같은 사람에게 물으신다면 여러분은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런 질문은 전문 분야가 속임수로 사람들에게 마치 그들이 마법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고 만드는 사람들인 마술사에게 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사실 정말로 시체와 같은 것들과 대화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틀렸다고 주장하는 것을 전문으로 하는 마술사들도 있습니다. 그런 마술사 중 하나가 '놀라운 랜디(제임스 랜디 : 캐나다계 미국인으로 1928년 8월 출생이며, 과학적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사실을 반박하는 것으로 유명한 마술사)'인데, 그는 "여러분은 제게 혼령이나 시체 같은 것들과의 대화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보여주셨고, 이제 저는 그것이 어떻게 일어나는 것인지 보여 드릴 겁니다. 그것이 가짜라는 걸 보여 드리죠." 미리 알려드리는 것이지만, 그는 "저는 얼마가 됐든 간에, 한 만 달러 정도를 제가 그 초자연적인 현상들을 조작을 통해 보여드릴 수 없다는 것을 제일 처음으로 증명해내신 분께 드리려고 합니다."라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그가 돈을 지불한 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실들이 이원론자들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진짜 혼령이 있는가의 여부만 증명할 수 있을 뿐이죠. 진짜 유령이 있으며, 정말로 죽은 사람과 대화할 수 있다는 것만 보여줄 뿐입니다. 이런 문제에서는 전형적으로, 어느 것이 더 좋은 설명으로서 옳은지에 대한 선택은 여러분의 몫입니다. 초자연적이면서 이원론적인 설명이 더 적합할까요? 아니면 물리주의자들의 설명이 더 옳은 것일까요?

 

보십시오, 여러분은 여러분의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되돌아와 여러분께 말을 건네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하나의 가능성인 이원론자들의 설명은 그것이 비물리적인 영혼인 어머니의 유령이라고 하며, 여러분이 잠들어 있는 동안 대화를 하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또다른 가능한 설명에서는 그것이 단순한 꿈이라고 합니다. 물론 여러분은 여러분이 무의식 속에서 여러분의 어머니를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꿈을 꾸는 것입니다. 둘 중 어느 것이 더 적절한 설명일까요? 우리는 그것을 하나하나 따져보고 자신에게 "어떻게 하나의 증거가 대립하는 다른 측면을 붕괴시킬 수 있는 것일까?"라고 물어볼 시간이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그 증거에 대해 다시 말씀드리자면, 저는 물리적인 존재를 뛰어넘을 만한 어떠한 괜찮은 이유도 없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개요를 말씀드리도록 하죠. 영혼의 존재에 대한 여러 주장들 중 한 집단은 "우리는 그것이 일상적인 것이든지 아니면 초자연적인 것이든지, 그 어떤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영혼의 존재를 상정할 필요가 있습니다."라고 합니다. 영혼의 존재는 아마 가능성 있는 설명의 출발점이 될 겁니다. 하지만 질문은 절대 "그것이 가능성 있는 설명인가요?"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이 최선의 설명인가요?"라고는 할 수 있죠. 그리고 제가 그러한 여러 가지 주장들에 대해 다시 설명할 때, 물리주의자들의 설명이 더 적합하다고 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저는 물리주의자들이 아직 매우 설득력 있는 설명을 내놓지 못한 어떤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특히 제가 이미 말씀드렸던 것처럼 저는 의식의 본질, 커피 냄새를 맡거나 파인애플을 맛보거나 '화를 낸다'라고 하는 경험의 질적인 측면에 대한 의문과 수수께끼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물리주의자들의 용어로 설명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따라서, 그 정도로 저는 우리가 그에 대한 판단을 내릴 사람들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더 적절한 설명은 이원론자들의 주장이에요."라고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영혼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은 아직 우리에게 충분한 설명을 해주지 못하기 떄문이죠. 설명의 여지를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기껏해야 연결고리가 될 뿐이고, 어쩌면 영혼의 존재를 인정할 만한 설득력 있는 이유는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가 어떠한 물리주의적인 설명도 제대로 기능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면 그것이 옳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다룰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에게 당면한 과제는 아마 '의식(consciousness)'의 존재에 관한 것 혹은 우리가 아직 설명하지 못하는 어떤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아직도 설명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임사 체험을 물리주의적인 용어로 설명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만약 우리가 몇 가지 적절한 세부사항으로 이원론적 설명을 할 수 있다면 아마 "보세요. 이원론적인 설명이 더 적절하죠?"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원론이 일반적으로 "글쎄요, 아마 우리는 뭔가 비물질적인 것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이 좋을 거예요"라고 말하는 것처럼 충분한 설명을 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저는 이것도 강력한 주장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께 질문을 드리도록 하죠. 영혼의 존재를 설명하기 위한 다른 주장은 또 무엇이 있을까요?

저는 제가 지금껏 설명해왔던 다양한 주장들이 설사 "최선의 설명으로의 추론"이라는 동일한 부분을 지닌다 하더라도 각기 분리된, 독립적인 주장들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군요. 그 주장들 중 하나는 또다른 하나가 맞지 않다고 해도 옳은 것이 될 겁니다. 이제 약간 다른 종류의 주장들에 대해서 설명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이제 설명드리려는 주장은 전적으로 철학적인 주장이지, 누가 이것을 설명할 수 있거나 다른 그 누구도 아닌 '우리'에 대한 설명의 문제는 아닙니다. 어떠한 실증적인 전제들도 지니지 못한 주장처럼 보이죠. 순전히 간접적인 철학적 설명입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이 주장을 꽤 설득력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초기의 현대 철학자였던 데카르트(Descartes : 1596-1650, 프랑스의 철학자 · 수학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주장입니다. 이 주장을 세세하게 따라가지는 않겠지만, 기본 아이디어는 데카르트로부터 유래된 것이죠. 또한 이 주장은 여러분들이 어떤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래서 저는 '첫 번째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 드리려고 합니다. 제 자신에 대해 이야기할 텐데, 알다시피 여러분들은 만약 제가 이야기를 들려드릴 때 마치 여러분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상상하신다면 어쩌면 더 설득적인 주장을 발견하게 되실 수도 있습니다.

제 이야기를 여러분들 각자의 이야기로 만들어 보십시오. 여러분의 아침을 떠올려 보십시오. 자, 이제부터 저의 아침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물론 그것이 실제로는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간단히 말해 우리가 이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났다고 상상할 수 있는 것이지, 우리가 그것이 경험에 의해 가능한, 단순히 '상상할 수 있는'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좋아요.

 

제가 아침에 일어나서, 다시 말해 어떤 특정 시점에 제가 방을 쭉 둘러보고 저의 어두운 침실을 친숙한 눈길로 바라보았다고 가정해 봅시다. 저는 집 밖의 자동차 소리나 알람 시계가 울리는 소리 등을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방을 나서 양치질을 하기 위해 욕실로 향합니다. 제가 욕실에 들어섰을 때, 밝은 빛이 비추고 저는 거울을 들여다보지만 - 여기가 가장 이상한 부분인데 -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보통은 거울을 보면 제 얼굴이 보입니다. 제 머리도 보이죠. 제 상체가 반사된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제가 거울을 보고 있지만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대신 저는 제 뒤에 있는 샤워기가 반사된 모습을 봅니다. 보통 때는 제 몸에 가려져 있죠. 하지만 지금은 제 몸이 보이지 않습니다. 약간 들뜬 상태에서 저는 손을 뻗어 머리 아니면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제가 '머리가 있기를 기대하는 부분'을 만져보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제 팔을 흘끗 내려다보지만 팔 또한 보이지 않습니다.

이제 저는 패닉 상태에 빠졌습니다. 다시 몸 이곳저곳을 만져보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느낄 수 없습니다. 저는 제 손가락 끝으로 아무것도 느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제 몸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감각조차 없습니다.

 

이야기를 계속해 드릴 수도 있지만 이 정도로도 여러분들께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소설가라면 지금 막 제가 얘기한 것보다 더 재미있게 이야기를 해 드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것은 제가 방금 이야기한 것은 '상상'에 기초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제 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한 이야기를 상상했었습니다. 아니면 제 몸이 존재하는 것을 중단했거나 적어도 제 '생각'은 존재한다는 것을 상상했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저는 "왜 제가 거울에서 제 몸을 볼 수 없을까요? 왜 제 머리를 만질 수 없는 걸까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요?"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공포에 빠진 것이죠, 안 그렇습니까? 우리는 지금 제가 온갖 종류의 생각들을 떠올리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 마음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제 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우리는 틀림없이 - 그렇게 보이는 것이겠지만 - 그 가능성을 상상해볼 수 있을 겁니다. 이 주장의 좋은 점은 제 육체와 정신에 차이점이 있다는 결론에서부터 출발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끝낸 것은 결국 제 '정신'은 존재하지만 제 육체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상상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데카르트는 그것이 정신과 육체는 틀림없이 두 개의 논리적으로 구분된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습니다. 육체와 정신은 절대 같은 것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제가 방금 했던 것이 바로 육체 없이도 제 정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상상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제가 그런 것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제 정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제 육체에 관해 이야기하는 방법이라면 육체 없이 제 정신이 있다는 것을 떠올리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요?

만약 육체와 정신이 정말로, 결론적으로, 형이상학적으로 말해서 같은 존재라면 여러분들은 아마 다른 하나 없이는 또다른 하나를 절대 가질 수 없습니다. 여기 강연대가 있습니다. 이 강연대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해 보십시오. 아마 할 수 없을 겁니다. 그렇죠? 강연대는 '그 강연대' 하나입니다. 만약 이 강연대가 딱 하나라면, 여러분은 그것이 존재한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할 수도 있죠. 그러나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겁니다.

 

만약 제가 A는 존재하지만 B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A와 B가 같은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도 됩니다. 만약 B가 단순히 '또다른' 단어였다면 A에 관해 말하는 다른 방법, A는 존재하지만 B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상상하는 것이 A가 존재하지만 - 글쎄요, B가 A일수도 있지만 -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되겠군요. 하지만 여러분들은 A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상상할 수는 없을 겁니다.

다른 방향에서 이 점을 살펴보도록 하죠. 만약 제가 B없이 A를 상상할 수 있다면 A와 B는 논리적으로 독립적인 대상이 됩니다. A와 B는 동일한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제 육체 없이도 정신에 대해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제 육체와 정신이 논리적으로 독립된 대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절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제 정신은 단순히 '이야기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제 정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제 육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법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매우 멋진 주장이지 않습니까? 철학자들은 이 주장을 굉장히 좋아합니다. 여러분께 말씀드리지만 오늘 이 주장이 옳은지 아닌지에 관한 토론을 하고자 합니다. 두 가지에 대해 분명히 하고 넘어겠습니다.

정확이 이 주장이 설명하지 못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이 주장은 "만약 어떤 것이 가능하다면, 만약 어떤 것을 상상할 수 있다면 그것이 진실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유니콘에 대해 상상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그 주장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아닙니다. 이 주장은 단지 우리가 논의하고자 하는 주제를 더 견고하게 만들어 주는 것뿐입니다.

 

제가 다른 대상 없이 어떤 하나를 상상할 수 있다면 그들은 분명히 분리된 대상일 것입니다. 물론 현실 세계에서는 다른 하나가 없이 그 하나가 존재할 수 없는 가능성이 남아있습니다. 두 대상을 긴밀히 연결지어 아마 여러분이 다른 하나 없이는 절대로 다른 하나를 얻을 수 없게 하는 형이상학적인 법칙과 같은 것들이 있을 겁니다. 질문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은 단지 만약 제가 적어도 다른 하나 없이 어떤 한 대상을 상상할 수 있다면 그 두 대상은 반드시 분리된 것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정말로 단순히 어떤 하나가 존재한다고 하면, 여러분들은 그것 없이 그 대상을 떠올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육체 없이도 제 정신에 대해 상상할 수 있기 때문에 제 정신은 제 육체와는 분리된, 어떤 구별되는 존재라는 것은 한 가지 경우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제가 육체 없이 정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상상할 수 있을까요?

제 육체와 정신이 같은 하나라면, 저는 육체 없이 육체가 존재할 수도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할 겁니다. 만약 정신이 단지 육체에 관해 말하는 방법일 뿐이라면 어떻게 제가 육체 없이 정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제가 육체 없이도 정신에 대해 떠올릴 수 있기 때문에, 육체와 정신이 분리된 것이라는 사실도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정신이 곧 육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정신은 분명 무언가 다른 것입니다. 바로 영혼이라는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