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셸리 케이건

4강 : 플라톤의 파이돈 개론, 영혼의 존재에 대한 논의(2부)

rainbow3 2019. 9. 18. 00:25

4강 : 플라톤의 파이돈 개론, 영혼의 존재에 대한 논의(2부) - 죽음 : 케이건 교수 예일대학

 

플라톤의 『파이돈』에 대한 간략한 소개를 하고 나서, 형태가 없는 영혼의 존재에 대한 다른 옹호론들이 제기된다. 본 강의에서 강조하는 바는 우리가 자유 의지를 지니고 있다는 주장을 설명하기 위해서 영혼의 존재에 대해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원론자들이 물리주의자들에 대한 반대 의견으로써 취하는 주장이며, 한낱 물리적인 독립체라면 어떠한 경우에도 자유 의지를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단지 물리적인 대상이 되는 것 이상의 그 무언가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내용이다.

 

 

플라톤의 파이돈 개론, 영혼의 존재에 대한 논의

 

우리는 지난 시간에 “영혼의 존재에 대하여 어떤 이유를 들어야만 하는가?”란 질문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그리고 그것은 가장 적합한 해석이라고 알려진 추론과 추측들인 논증입니다, 우리가 처음에 생각하는 전제의 집합체죠.

 

그 생각은 무엇인가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이죠. 그것은 설명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어떤 용어, 순수하게 물리학적 용어로는 설명할 수 없어요.. 그리고 우리는 영혼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정하고 호소할 필요가 있어요. 이제 나는 그것을 잠시 동안 플라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다루어보도록 할 겁니다. 곧 그러한 논의들로 돌아오도록 하지요.

 

다음주에는 플라톤의 대화를 통해서 파이돈을 보도록 할 겁니다. 그리고 파이돈에 대해 엄청난 비중을 두어서 말하기는 하겠지만 곧 우리는 다시 돌아올 겁니다. 나는 그저 일 이분 정도가 걸리는 말이나 몇 개의 의견이 되는 개요가 되길 바랍니다. 나는 당신들 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전에 플라톤을 읽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너희 중에 어떤 사람들은 읽었으리라고 봅니다. 나는 사실 당신이 즐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플라톤은 사실 역사 속에 가장 위대한 철학자중에 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는 그의 철학을 대화의 형식으로 적었죠. 그것은 말해지고, 연극으로 되었고. 거기에 다양한 캐릭터들이 둘러앉거나 둘러서서 철학적 입장에서 논쟁했어요.

특정 대화는 우리가 앞으로 읽을 겁니다. 파이돈이죠. 그건 소크라테스가 죽는 장면입니다.

당신이 안다고 확신하고 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죄로 죽음을 선고 받았죠. 그리고 아마도 그 죄목 중에 다른 것은 그들에 대한 철학적 논쟁이겠죠. 그리고 그는 독약을 받고 그것을 마시고, 그리고 그는 죽습니다.

 

자, 이것은 역사적 사건이죠. 소크라테스는 철학적 논의를 할 친구들의 집단과 제자들을 가졌습니다. 플라톤은 그 중 한 제자죠. 플라톤은 그렇게 커서 철학을 연구하는 작품을 썼습니다. 플라톤은 자신의 대화를 전형적으로 나타내지 않았어요. 또는 그가 만약 그랬다면 그는 그저 비교적 적은 비중을 차지하는 캐릭터가 되었겠죠. 사실 만약 내가 제대로 생각해낸다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죽는 날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알던지, 만일 우리가 이 연극을 하게 된다면 어떤 위치가 플라톤의 위치일까요? 그리고 그 답은 –그 짧은 답은- 소크라테스,입니다. 그 연극 안에서 소크라테스는 플라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달관한 상태인 그 연극의 저자 말 입니다. , 이제, 사실은 이 수업이 고대 철학수업이었다면 우리는 그 서술이 매우 복잡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플라톤의 경력에서 후에 플라톤의 철학적 관점이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의 관점과는 많이 달랐기 때문이죠. 그리고 플라톤은 아직 이 대화에서 계속해서 나타나지 않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영웅처럼 계속하지요. 그리고 또 학자들은 소크라테스에 대해서 대화 중에 묘사되는 관점이 소크라테스의 실제 역사적 형태를 나타내는 데 포함을 하는가에 대해서 논쟁합니다. 그리고 대화 속에서 나타나는 관점의 소크라테스 캐릭터에 대한 견해에 대해서도 실제 역사적 소크라테스에 의해서 일어났는가 하는 것 또한 논쟁거리가 됩니다. 그렇지만 소크라테스 캐릭터의 입을 통해 역사적 플라톤에게서 대신 일어났다는 것뿐 인 거죠. 학자들은 초기 플라톤의 대화에서 소크라테스의 대화라 불리는 부분의 차이점을 구별해냈습니다. 이 생각은 실제 역사적 인물인 소크라테스의 관점 들에서 있었습니다. 그리고 후기의 대화에서. 비록 소크라테스가 나타났을지라도 대부분의 학자들은 아마도 그것들이 역사상의 소크라테스가 실제로 믿었던 관점들이 아닐 것이라고 믿습니다. 당신은 대화 중간에 누구의 관점의 누구의 것인가 고민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걱정하지 않습니다. 이 수업은 고대 철학 수업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우리의 목적은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소크라테스가 대화에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질문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것이 죽은 소크라테스가 말했었던 것이든 실은 죽은 플라톤이 단순히 소크라테스라는 캐릭터의 입을 빌리는 관점에서 말한 것이든 실제 우리의 목적은 그건 별로 상관없습니다.

나는 이제 플라톤의 관점으로 본 소크라테스에 대해 여러 가지 관점에서 볼 것입니다. 비록 내가 상징적으로 왔다 갔다 하는 불완전한 방식으로 할 지라도 말이죠. 나는 ‘플라톤은 생각한다’ 또는 ‘소크라테스는 논쟁한다’라고 말하겠어요. 왜냐하면 우리의 목적은 모두 다 똑같으니까요.

 

그렇지만 거기에는 당신이 주의해야 하는 또 다른 복잡한 요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대화와 사람들은 철학적 논쟁의 형태를 취하고 있어요. 사람들은 관점을 앞장서서 보여주고 대화의 형식을 넘어서고, 관점에 대한 그들의 마음을 바꿉니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은 소크라테스가 말했던 것이랑 비슷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국 “여기에 내가 명백하게 믿는 것이 있다”는 플라톤이 말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저 철학에 대한 극적인 연극을 썼을 뿐이죠. 그리고 때때로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런 논쟁은 소크라테스가 이미 말했던 거야 그러나 아마도 이건 그리 좋은 생각은 아닐 꺼야.”

그리고 적어도 그것은 정기적으로 중지하면서 우리 자신에게 물어봐 주어야 할 가치가 있습니다. 아마도 플라톤은 그것이 별로 좋은 논쟁거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그 대화를 보면서 종종 소크라테스가 앞서서 어떤 자리에서 생각하지 못했던 모두가 충분히 할만한 그런 생각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생각들을 수정하거나 개정할 수도, 그가 일찍이 설정했던 자신의 어떤 어려움에 대해서 다루는 새로운 방법을 소개할 수도 있습니다. 제가 말했던 대로 이제 이러한 어떤 세부적인 것에 대한 것에서도 걱정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대화를 읽은 것에 대한 요점에 대해서는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이 내가 진정으로 말 하고 싶은 것의 서론입니다.

 

당신은 파이돈을 다음주 동안 읽기 시작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파이돈을 다음주 중에 시작할 것이고 계속해서 파이돈의 대화를 적어도 조금은 할 것입니다. 아마도 한 주 후에도 말입니다. 플라톤의 경우 나는 예외로 해 두겠습니다. 보통 나는 우리의 읽기에 대해 언급합니다만 나는 사실 세부적인 것에서는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할애해서 의논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당신이 읽기에 대해 생각해서 이 강의에 대해 찬사를 보내거나 혹은 강의를 생각해서 읽기에 대해 기뻐하는 이유이죠.

나는 클리프 노트(요약물)을 주지는 않아요. 읽는 것에 관에서 말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이돈의 경우 나는 실제로 더 많은 시간을 소요합니다.

“여기 제가 첫 번째로 생각했던 논제가 있습니다. 이 결론과 전제에 대해서 재구성해보도록 합시다. 여기 저는 몇 가지 반대의견을 제시합니다. 이것은 플라톤이 제안한 다음 논쟁거립니다. 이것을 전제로 해보겠습니다.”

심지어 이것에서도 나는 파이돈으로부터 긴 단락을 크게 읽으며 시간을 소비하지 않아요. 그러나 어떤 방면에서 저는 제가 파이돈의 해설보다 다른 읽을 거리를 줄 것 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여러분은 다음주 동안 읽기를 해야 합니다.

 

파이돈의 주제에 대해서 저는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날이라고 말합니다. 대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그는 독약을 마시고 죽죠. 그리고 아마 별로 놀랍지도 않게, 그 순간까지도 그는 그의 친구들과 함께 영혼의 불멸성에 대해서 주장합니다. 매우 두드러지게도 소크라테스는 화내지 않습니다. 그는 그가 죽는다는 것에 대해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는 실제로 어떤 면에서는 그것을 반기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영혼이 불멸한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죠. 그리고 덧붙여서 철학적 논쟁에 대해서 그리고 존재의 반대 의견에 대해서 그리고 영혼의 불멸성에 대해서 우리는 매우 감동적인 죽음의 장면인 대화 끝부분에서, 서구문명에서 가장 유명한 죽음의 장면 중 하나이지요. 어쨌든 제가 말했듯이 다음 주에 모두 다루겠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질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 주장할 것인가?” 맨 처음에, 그러니까 저번 시간에 우리는 논의의 일부거나 전체인 것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 고민해봤습니다. “보세요, 우리는 물질적인 것보다 더 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어. 사람들은 그저 기계가 될 수는 없어요, 왜냐하면 기계는 사유를 할 수 없어요. 기계는 생각을 할 수 없다. “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 설득력 있는 의견이 아니다” 라고 제가 말했죠. 결국 체스 게임 컴퓨터는 사유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들은 내가 다음에 하는 것에 대해 어떤 확신이 있어요. 그들은 어떻게 하면 나를 패배하게 만들 수 있는 가에 대한 사유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적할 만한 가치가 있어요. 컴퓨터들이 어떤 것들인지 결국 체스 게임 컴퓨터들은 사실은 그것을 하지 않죠. 어떤 컴퓨터도 실제로 그렇게는 못합니다. 당신은 컴퓨터가 무엇인지 생각해야만 합니다. 체스 게임 컴퓨터가 하는 일이 단지 이것이란 것을 말이죠. 그것은 모든 가능한 지점들을, 여기에서 모든 가능성 있는 게임에 대해서 계산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되감죠. “오, 이것들은 내가 이길 수 있는 그 지점이야” 그리고 그것은 그저 20수 정도를 먼저 보고 움직일 수 있습니다. 맞아요 그리고 어떤 지점이 컴퓨터가 이길 수 있는가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컴퓨터 체스 게임이 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체스 게임이 가능한 수가 매우 크다는 이 단순한 이유에서, 컴퓨터는 계산해내지 못합니다. 그들은 수천 년 동안 바쁠 것입니다. 우리는 일곱살짜리 사촌이나 조카랑 tic-tac-toe놀이를 할 때 “음, 만약 내가 이렇게 하면 그앤 저렇게 하고 그애가 저렇게 하면 그럼 난 이길꺼야, 그래서 난 저렇게 하지 않아야지.”같은 것을 할 수 있죠. 맞죠? 하지만 우리는 체스 게임과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거기에는 너무 많은 게임들이 있어요. 그래서 체스 게임 프로그램들이, 그리고 특히 가장 뛰어난 체스 게임 프로그램이 어떻게 작용을 할까요? 음, 그것들은 당신이 체스 게임을 하는 방식과 똑같이 할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부분이 가장 중요하고, 강력하게 방어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합니다. 그들은 어떤 전술이 성공할 수 있을지에 대해 다양한 생각을 가집니다. 어떤 종류의 위험이 그들을 따라올까요? 당신이 진지한 체스 게이머라면 당신은 체스 역사의 유명한 게임들을 공부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진짜로, 그들은 그것들이 프로그램되어 있습니다. 프로그래머들은 체스 역사상 유명한 게임들과 게임들과 게임들을 계속해서 입력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다 장착하고 당신은 당신의 최선을 다 하겠지요. 그리고 당신이 게임에서 지면 당신은 일종의 정신적인 입력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정말 나를 당황하게 했어. 다음에는 좀 더 다르게 시도해보겠어.”라고 하며 그래서 당신은 그러한 이동을 피하게 될 것입니다. 또한 그것은 체스 게임 프로그램이 작동하는 방법입니다. 나아가서, 저는 이것을 주목해 보겠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무언가와 관련이 있으니까 이것에 대해 몇 분을 가질 겁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이것이 함축하고 있는 것은 만약 당신이 대단한 체스 게임 프로그램을 하고 있다면, 그 방법은 마치 그렇게 하기로 그 프로그램자체에 입력되거나 그것을 통해서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프로그램들을 디자인한 사람들은 아마도 완전히 제대로 된 체스 게이머들일 것입니다. 그들이 프로그램들을 진행할 때 그들은 그들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보자, 나는 이 컴퓨터를 프로그램했어, 그래서 내가 퀸을 앞의 장소로 움직이면 비숍이 나오겠지.” 그것은 가능성 없어요. 왜냐하면 그 프로그램은 계속해서 전술을 고쳐가기 때문이죠.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과거에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지 말입니다. 좋은 체스 플레이어는 이 프로그램들을 게임해봅니다. 그들을 이길 가장 좋은 방법은 단순히 스스로에게 묻는 법이지요. “지금 당장어떻게 움직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까? ” 컴퓨터가 가장 가능성 있는 장소로 움직이게 만드는 것은 노름과도 같습니다. 컴퓨터를 마치 대단한 체스 플레이어처럼 다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정말로 가장 좋은 프로그램들은 대단한 체스 플레이어입니다.. 하지만 비록 그것이 상당하더라도 체스게임프로그램이 최고의 인간 체스 플레이어를 패배시키는 데는 일정한 시간이 걸립니다. 그건 최고의 프로그램이 최고의 위대한 거장을 이긴 몇 년 전에 끝이 났죠. 그리고 지금은 가장 최고의 프로그램은 누구든지 이길 수 있다는 것이 사실이 되었습니다. 최근에 월드 체스 챔피언에서 나는 12월에 체스 플레이 프로그램이 Kramnik을 이긴 것이 생각납니다. 그래서 kramnik은 단순히 놀라운 적수로 간주했죠. 그리고 그것은 이러한 일들을 다루는 데에 가장 적절한 방법입니다.

 

자, 그래서 이러한 생각들을 잠시 동안 묶어보겠습니다. 우리는 그것들에 대해서 잠시 후에 돌아오고 “기계가 창의적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야기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내 손을 들여다보면, 이 체스 플레이 프로그램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 맞다는 것이 확실히 분명해집니다. 그래서 우리는 질문합니다.

”기계가, 기계가 사고할 수 있는가?” 그리고 비록 우리가 많은 주제에 대해 사고할 수 있는 기계를 가지지 못했지만 그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기계가 어떤 분야에서는 적어도 사고할 수 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암시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완전히 물리적인가, 아닌가에 대한 의견이 그럴 듯 해 보이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결국, 우리는 사고를 할 수 있고 기계는 사고를 할 수 없다는 것이죠. 아니요, 기계들은 사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조건들은 영혼의 옹호자들에게 다르게 반응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완전히 물리적 물체가 아니라 사고를 할 수 없으므로 영혼을 믿어야만 한다.” 고 논쟁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마도 “완전히 물리적 물체가 아니고 기계가 아니라서 감정을 느낄 수 있으므로 우리는 영혼을 믿어야 한다 ”라고 말할 것입니다.

 

당신도 알듯이 우리는 감정이 있어요. 우리는 사랑을 해요. 우리는 두려워해요. 우리는 걱정하죠. 우리는 의기양양해할 수 있죠. 우리는 우울해질 수도 있죠. 그래서 아마도 그 논점은 “그래그래, 기계가 그런다고 생각해봐 우리는 생각하는 기계라고 불러, 하지만 감정은 기계가 아닌 것들만이 느낄 수 있어. 그러나 순수하게 물리적 물체도 어떤 것이든 느낄 수 있습니다. 감정도 느낄 수 있죠. 또한 우리가 명백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우리에겐 물리적 물체보다 더 한 것이 있습니다.”라고 가야겠지요. 자. 이제 체스 게임 컴퓨터의 경우와는 같지않은 설득력 있는 것을 생각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아직 무언가를 느끼는 기계 같은 것을 가지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질문은 “우리가 할 수 있어?”는 아니지요. 질문은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 기계가 있을 수 있고, 감정 같은 것을 가질 수 있는 기계가 있을 수 있을까?”는 것이지요.

 

그래서 약간의 공상과학 쪽으로 가보겠습니다. 그리고 공상 과학 영화와 소설에 나온 로봇과, 컴퓨터 프로그램들을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또는 당신이 가지고 있는 공상과학에 대해서도 말이죠. 제가 어릴 적에 “우주 미아”라고 불리는 텔레비전 쇼가 있었죠. 저는 그 쇼에 나온 로봇의 이름을 안타깝게도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tv 쇼였고 그것으로 충분하죠. 그리고 매 에피소드가 있고 어떤 새로운 극적인 위험이 발생했습니다. 그리고 그 로봇은 윙윙거리고 법석대면서 소리지릅니다. “위험해요, 로빈슨 지휘관!””위험해요 윌 로빈슨!”하고 말입니다. “위험해요 윌 로빈슨!” 이라는 것은 마치 로봇이 걱정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더 최근의 예를 들겠습니다. 당신들 중 많은 사람들이 더글라스 아담스의 책인 ‘은하수로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읽었으리라고 봅니다. 그리고 속편들도 읽었겠죠. 그 책들에서 나오는 로봇들은- 그 우울한 마빈.은 내 생각은 그것에 대한 단순한 단어입니다. 그는 매우 똑똑해요. 그는 우주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삶이 목적 없고 그는 우울하게 행동했어요. 그는 다른 로봇에게 말합니다. 다른 로봇도 우울해집니다. 다른 로봇은 자살하게 됩니다. 맞아요. 로봇인 마빈에게 우울을 묘사하는 것은 자연스러워보입니다. 그가 행동하는 방식이죠.

 

또는 내가 좋아하는 예인,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대해서 들겠습니다. 이제 나는 이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 말해드릴게요. 스포일러인데 괜찮죠? 아님 귀를 막으세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우리는 다른 행성에도 생명이 살고 있다는 암시를 받게 됩니다. 그것은 매우 신비로워서 우리는 그 라디오 신호가 잡히는 장소를 조사하러 우주선을 보내게 되지요. 그것은 아주 중요한 임무이고 거기에는 할이라는 이름의 컴퓨터 프로그램이 우주선을 운영하는 것을 돕지요. 그는 우주선의 인간 우주인들이 하는 일의 부분을 맡고, 그들을 책임지죠. 할은 목적을 달성합니다. – 합리적이고 훌륭하게 그리고 계속해서 말이죠- 할은 임무 수행을 성공적으로 하기 위해서 목적을 확실히 합니다. 그러나 할은 자기 식으로 확실히 그럴듯하게 생각합니다. 인간들은 정말 모든 것을 망쳐버립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임무인데 말이죠. 그래서 인간들이 임무를 망치지 않도록 모두 죽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그중 한 우주인만이 그 줄거리를 알아내죠, 그래서 할을 멈추려고 합니다, 그리고 할에게 대항해서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합니다.

 

그것은 프로그램을 멈추는 일이지요. 기본적으로 죽이는- 만일 우리가 그 방식으로 말한다면- 할을 죽이는 것이죠. 그러는 동안에 이 일이 진행되는 공안 할과 대이브는, 그 인간 우주인말이죠, 서로 이야기합니다. 할은 일이 어떻게 되어가는지 알게됩니다. 할은 대이브를 멈추려고합니다. 그를 충분히 이해시켜서요, 그리고 할이 말할 때 대이브는 할의 전기회로망을 꺼버립니다.

“저는 무서워요, 무서워요 대이브” 그는 무엇을 무서워하는 것입니까?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묘사하는 것은 정말 할에게 완벽히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할은 당신이 그가 행동할 것 같은 행동을 합니다. 또는 그것이 행동하죠. 그것이 만일 두려워했다면 말입니다. 두려워할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행동는 적절했죠. 그것이 자신이 두렵다고 우리에게 말합니다. 할이 두렵다고 하는 것은 마치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기계회로보다 특별하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그저 프로그램들과 기계들 같은 물리적 물체들 뿐이죠. 만일 그것이 맞다면, 그것이 말하고 있는 것이 맞다면 “우리는 감정이나 느낌을 영혼이 있다는 것을 호소하기 위해 설명할 이유가 없다.” 고 말하는 것입니다.

물리적 물체들이 가진, 완전히 물리적 물체들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이나 느낌들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 가정할 수 있는 어떤 이유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저는 감정과 느낌의 두 가지 이원론적 측면에서 대답하는 것이 가장 좋은 답변이라고 생각합니다. 두려움을 느끼는 행동방식의 측면에 대하여 말해보도록 하죠. 당신에게 위험한 환경, 당신을 위협하거나 파괴하려고 하는, 속에 놓여졌을 때 당신이 인식하는 행동의 측면과 컴퓨터 프로그램이 꺼지거나 하는 상황의 경우, 당신은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위험을 없애기 위해서 다양한 행동을 나타내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체스 게임을 하는 컴퓨터가 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그저 목표나 믿음이나 반응이나 계획 같은 감정의 행동 측면 같은 것이죠. 그것은 매우 그럴싸하게 로봇도 그럴 것 같아 보입니다. 물리적 물체도 그런 것들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이죠.

 

그러나. 여기 이 반대 의견에는 매우 결정적인 부분이 있습니다. 감정과, 느낌에는 다른 면과 다른 관점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내면의 느낌에 대한, 일이 계속 진행될 동안 행동의 내용에 대한 것입니다-결국 그래서 그런 것들을 느낌이라 부르는 것이겠죠- 제가 두려울 때, 어떤 불쾌한 기분이나 심장이 쿵쾅거리는 듯한 느낌이 들죠. 당신의 혈압은 오르고. 당신이 두려울 때 배에 뭐가 가라앉는 듯한 느낌도 들 것입니다. 당신이 우울할 때, 그런 것들처럼, “경험”이라는 단어는 비록 어떤 점에서는 모호하지만 우리는 그것들을 경험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단어를 잠시 동안 사용하겠습니다. – 각각의 감정과 함께 하는 경험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당신이 두려울 때에, 당신이 걱정하거나 우울하거나 즐겁거나 사랑에 빠졌을 때 당신이 느끼는 것들 같은 것이죠. 그런 생각들 입니다. 그리고 이 생각들은 굉장히 영향력 있는 생각입니다. 비록 로봇들이 행태적인 행동에 관해서라도 그렇습니다. 그것들은 느낌의 측면을 가지지 않고, 감정 측면의 아래에 있습니다.

 

이제 일단 당신이 이런 생각들을 하게 되었으니 감정에 대해서 자신을 제한할 필요가 없습니다. 잃어버린 물건, 그 잃어버린 것들 또한 모든 익숙하고 평범한 방법으로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저는 강당에 있는 의자들을 보겠습니다. 미묘한 파란색 계통이군요. 방안에 붉은 색 커튼이 있는 부분을 보고 생각해봅시다. 무엇이 그것을 붉게 느끼게 만들고, 붉게 보이게 하는지 생각해 봅시다.

이제 또, 우리는 내가 행동적인 측면에서 붉은 색을 보라고 하는가, 경험적 측면에서 붉은 색을 보라고 하는가에 대한 차이점을 구분 지어 봅시다. 우리에게 붉은색과 파란색을 구별 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드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빛이 물체에 산란하는 파동 같은 것을 보고 체크하게 하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기계가 파란 공과 빨간 공을 구분 짓게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제 아들이 작은 로봇을 가지고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여전히 당신은 자문할 때. -기계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까? -기계가 그것을 바라볼 때 어떤 느낌을 느끼는 것인가에 대해서 로봇은 그 작은 빛 감지기로 그것을 가리킬 것입니다. 빨간 공인가? 하고 그것이 빨강 공의 느낌을 가진다고 봅니까? 당신이 말하고 싶은 것을 추측해본다면, 분명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일 겁니다. “아니요, 아니에요, 그것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어요. 그것은 기본적으로 빛의 파동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빨간 색을 보는 경험을 가지진 않아요.”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은 매우 규정하기 힘듭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로는 대부분 거의 그럴 것입니다. 당신이 그런 것들에 대해 궁금해하면서 자문 할 때, “만약 누군가 앞을 못 보게 태어났는데도, 색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을 알 수 있을까?” 그는 과학자이거나 빛이 어떻게 작용하는 가에 대한 것들을 알고 있는 사람이겠지요. 당신은 그런 것과 그런 파장이나, 물체들을 함께 사용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그에게 사과를 쥐어주면 그는 “오, 이것은 아주 붉겠군요.” 라고 하겠지요. 맞죠? 아마도 그는 그의 작은 빛 탐지하고는 그것을 읽을 것입니다. 그리고 말하겠죠. “이것은 이러저러한 파장이군. ” 그리고 그는 말하겠죠. “오 이것은 토마토보다 붉은 아주 빨간 사과이군” 또는 뭐라든지 말이죠. 그러나 모든 것에 대해서 우리는 개념만 가질 뿐입니다. 그는 뿐만 아니라 빨간색을 보지 못해요. 그는 빨간 색이 무엇인지조차 상상할 수 없어요.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죠. 그리고 당신이 일단 이런 것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인식할 수 있고 또한 우리의 삶은 그런 관점들로 가득 찰 것입니다. 그것들은 색들을 가지고요. 그것들은 소리들을 가지고, 냄새들을 가집니다. 그것들은 질적인 측면에서의 경험입니다. 그리고 그 요점은 마음에서 생기는 감정의 측면에서 시작되었어요. 그저 밖으로부터가 아닌 내부에서 말이죠.

 

우리는 우리의 몸의 내부에서 어떤 감정을 가집니다, 그 특징적인 두려움, 또는 우울함과 즐거움 같은 느낌 말입니다. 좋아요. 그래서 그 추측은 이것입니다. 물리적 물체가 아닌 것은 권리를 가집니다, 왜냐하면 물리적 물체가 아닌 것은 질적인 측면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을 가집니다. 그것이 우리가 계속해서 우리에게 자문하는 측면입니다. “무엇이 빨간색처럼 보이는가? 무엇이 커피의 향 같고, 파인애플 맛 같은가? ” 이제 이것들은 꽤 철학자들이 때때로 특질이라 부르는 것 같아요. 왜냐면 물체의 질적인 측면에서의 개념이기 때문이죠. 우리의 경험들은 질적인 특성들을 가집니다. 그리고 확실한 의견으로 물리적 물체가 아닌 것은, 완전한 기계가 아니하면 질적인 경험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경험을 가졌으므로 우리는 물리적 물체가 아니고 완전한 기계가 아닙니다.

 

좋아요. 반론이에요. 아주 좋은 반론입니다. 질문은 이거에요. “물리학자가 답변할 때는 어떻게 할 수 있나요?” 이제, 물리학자에 최선의 답변입니다,

“여기 이 센서로 의식할 수 있는 기계를 만드는 방법입니다. 그것은 질적인 경험입니다. 여기 어떻게 작동하는 방법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여기 어떻게-우리는 이렇게 유물론적 입장에서처럼 설명할 수 있습니다. 물리학적 용어로 어떻게 열망하는 것을 얻고 믿는가, 행동적인 것을 그만두는 가, 여기 어떻게 느끼는 가를 얻고, 질적인 측면의 것들을 가지고도 그렇죠.”

그것은 만약 물리학자라면 우리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이야기일 것입니다. 저는 그런 문제들의 진실을 생각합니다. 제가 지금 생각하는 가장 좋은 답변은 우리는 그런 이야기가 어떻게 주어지는 가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의식, 만약에 우리가 우리의 정신적 삶에서 질적인 측면을 생각한다면 의식은 매우 큰 의혹으로 남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물리학적 용어로 설명할 수 있는가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원론자가 “우리는 영혼을 설명하기 위해서 영혼을 믿어야 한다.”고 말하는 견해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죠. 우리는 무시할 수 없습니다만, 그것에 대해서 명확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물리학적 용어로 의식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르게 말해서 우리는 앞으로도 물리학적 용어로 의식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후자, 만약 우리가 물리적 물체가 아닌 것도 빨간 색을 보고, 꿀맛을 느낀다고 강하게 주장한다면 우리는 정말 그러므로 그렇다고 결론짓겠죠. 우리는 물리적 물체나, 완전한 물리적 조직이 아니니까요. 그러나 저는 그것을 말하고 있는 단계가 아직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단순한 문제의 요소는 우리는 의식에 대해서 아직 충분하게 알지 못하고 그것을 물리학적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나 아닌가 에 대해서도 알지 못합니다.

 

이 상황에 대해서 생각해 볼 때, 비유는 언제나 저에서 생깁니다. 우리가 어디에 있는가 상상해보죠, 말해보세요,14세 식물들의 삶을 이해한다면. 그 식물들은 살아있는 것들이죠, 그리고 우리는 자문합니다. “그런 삶이 물리적 용어들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우리에게 매우 미스터리 하게 보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그런가요? 우리가 물리적 기계들의 예를 들어서 설명했을 때와 같이, 우리는 14세기 안에서 그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제가 14세기 안에서 누군가 무엇을 하는 것을 상상해봅니다, 그 혹은 그녀가 식물이 기계와 같은가에 대한 가능성을 가지고 즐길까요? 그리고, 저는 어떤 식물이 어떤 기관을 만드는 것에 대한 이미지를 가집니다. 그리고 그 기관은 봉오리가 되기 시작하고, 점, 점, 점, 점. 그리고 그 사람은 말하길, “세상에나! 그것은 살아있을 수 없어!” 그리고 그것은 명백히 기계가 아니고 살아있는 것이죠. 물리적 물체가 아닌 것은 살아있을 수 있습니다. 삶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원자 같은 것 보다 더 호소력 있는 것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것들은 원자들이 아니고 그것들보다 더한 것들입니다. 삶은 불멸의 무언가와 물질을 넘어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더 필요합니다.

 

14세기 안에서 이해할만한 지점이죠, 그러나 그것은 잘못되었습니다. 우리는 물리적 용어들로 삶을 설명할 수 있는 법에 대한 단서를 갖지 못했어요. 그러나 그것은 끝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저는 의식과 우리에게 지금 당장 같은 것이 맞다고 생각하기로 합니다. 저는 이론들이 바깥에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제 최선은 우리가 14세기 안에 있는 것과 같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제로 어떻게 당신이 그런 것과 같은 것을 가지고 시작할 수 있는가에 대해, 세부적인 것이 작용하는 것에 대한 단서들과, 그런 단서 같은 것을 완전하게 가지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심지어 의식이 연관되는 곳에 대한 그림의 한 획의 그림조차 가질 수 없어요, 물리학적 용어들로 어떻게 그것을 말할 수 있는 가에 대해서도 말이죠.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과는 같은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만일 이원론자가 와서 “당신이 순수하게 물리적인 것이 경험을 가질 수 있다는 사실은 전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볼 수 없고, 그것이 있을 수 있다고 상상할 수도 없다면, 그게 조건이 될 수 있나요?”라고 말한다면.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아니요, 저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저는 그것이 어떻게 그렇게 되는 지 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볼 수 없습니다.”입니다.

그래서 저는 영혼이 존재한다는 가정을 설득력 있게 느낄 수 없습니다. 물론 영혼의 팬은 돌아와서 말하겠죠, “그런데 그건 불공평해요. 질문은 ‘그 설명이 불가능한가?’가 아니잖아요. 그 질문은 그저 ‘누가 더 나은 설명을 가졌는가?’잖아요. 당신들은 어떤 종류의 설명도 아직 할 수 없었어요. 저는 설명할 수 있어요. 어떻게 지각이 가능한가? 우리는 영혼들을 가지고 있어요. 영혼들은 정말로 물리적인 것들과는 매우 달라요 그래서 그들은 의식이 있어요.”

 

그러나 이 부분에서, 저는 그것이 단지 “누가 설명을 할 수 있는가?”나, “누가 더 나은 설명을 가졌는가?”라는 질문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영혼을 보는 관점에 대해 더 나은 설명을 말하기 전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질문을 해야 합니다. 단지 “나는 의식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어, 의식은 몸 안에 갇혀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 안에 있는 것이야.”나 “영혼을 의식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확실할까?” 같은 많은 설명이 얼마나 많이 있었는가에 대해 우리는 물어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영혼 이론가는 말하겠죠? “음.. 엄..음.. 그건 그냥 그래.” 그것은 그렇게 설명될 수 없습니다.

 

저는 제가 어떻게 의식이 돌아가는 지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는 것을 가졌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심지어 저는 이원론자입니다. 만약 이원론자가 우리에게 의식의 이론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이런 영혼의 체계들에 대한 것들이고 그런 영혼의 구조들에 대한 것이군, 그리고 이것들은 이 감정들을 만들어내고 그것들은 그런 감정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군, 그래서 이런 이론이구나. ”라고 말이죠. 그리고 저는 설명에 대해서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만약 모든 영혼 이론가들이 단지 “그래 그래 너네는 그것을 설명하지못해, 그런데 나는 할 수 있어, 왜냐면 그것은 그저 설명이니까.”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건 문제가 안되 그건 전혀 발전이 없으니까.”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질문이나 코멘트하실 분?

 

학생: <들리지않는다.>

 

교수: 좋아요, 그래서 질문은- 첫번째는 질문 전에 비난이죠, 저는 계속 두 가지의 기준을 가지고 갈 겁니다. 저는 방어하겠습니다. 물리주의적 입장에서 방어하겠습니다. “우리를 비난하지 마세요. 우리는 그것을 아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어요.” 왜 제가 영혼이론 에 대해 말하는 것을 따르지 않냐면 “우리를 비난하지 마세요. 우리는 그것을 아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어요.”라고요. 좋은 질문이에요. 그리고 제 답변은 – 때때로 저는 그것을 하나로 묶어서 생각합니다. 저는 영혼 이론가는 설명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리학적인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제가 제가 볼 수 있는 한, 지금은 아무도 어떻게 의식이 작용하는 가에 대한 좋은 설명은 할 수 없다고 봅니다. 그것은 어떤 미스터리로 지금 남았습니다. 그리고 이 것이 제가 해보지 않은 이것에 대해 하길 바랍니다. 이것은 그렇게 그 두 가지 기준이 필요하지 않습니다.-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묶여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것들이 둘 다 묶여있다는 것을 인식했다고 해도 그것은 우리가 찾는 것을 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찾는 것은 무엇일까요 결국, 그것은 영혼을 믿는 것에 대한 어떤 이유겠죠. 그리고 만일 어떤 영혼이론가가 우리에게 최고의 답을 준다고 하면 “당신이 못하듯이 나도 설명할 수 없어요”라고 할 것입니다. 이 측면을 믿어야 할 어떤 이유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육체가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이미 육체는 놀라운 일들을 한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질문은 우리가 계속 묻고 있는 “우리의 것들이 존재하는 것에 대한 좋은 이유가 없을까? 영혼에 대해 덧붙일 좋은 이유가 없을까?, 불멸에 대해서?” 그리고 만일 영혼 이론가가 이것에 대한 가장 좋은 이유를 가진다면 “아마도 우리는 이것에 대해 설명할 무언가가 있어야 해요 그건 저는 당신들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볼 수 없어요. 아마도 그건 도움이 될 거에요. 비록 제가 어떻게 그러는 지는 완전히 알 수는 없을 지라도 말이죠.” 이것은 그렇게 억지스러운 주장은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논쟁에 이 특별한 요소 또는 특수한 입장을 함께 다루어서 생각하게 됩니다. 심사 위원들은 여전히 빠져있죠. 아마도 우리는 우리의 마자막 우리의 최선을 주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이 물리학적 관점에서 의식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다 것을 결론짓게 될 것 입니다. 우리는 불멸의 이론에 대한 대안의 것들을 생각해내기 시작할 것입니다. 아마도 마지막 날엔 우리는 영혼을 믿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결정하겠죠. 그러나 지금 당장, 저는 그 결론을 증명할 만한 증거에 대해 생각할 수 없습니다.

 

여전히 다른 가능성들이 존재합니다. 창의성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하지요. 여기 최고의 답변에 대한 추측으로부터 온 논의의 또 다른 의견입니다. 창의성, 그것은 “사람들은 창의적일 수 있다.”는 것이죠. 우리는 새로운 하나의 음악을 쓸 수 있고, 시를 쓸 수 있고 전에는 증명될 수 없었던 수학적인 것을 증명할 수 있고, 새로운 방법으로 수학적인 법칙들을 증명할 수 있거나 당신이 가진 것,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창의적일 수 있습니다. 어떤 완전한 기계도 창의적일 수는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완전한 기계보다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음이 분명해요. 그럼, 질문은 계속 됩니다.

물리적인 것도 창의적일 수 있는 일이 있을까요?” 그리고 저는 “그렇다”고 생각하는 경향입니다. 사실, 저는 이미 체스 게임 컴퓨터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제안한 바 있습니다. 체스 게임 컴퓨터 프로그램이 움직임을 생각하는 것, 전에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던 전략을 짜는 것입니다. 그 주제의 가장 자연스럽고 직접적인 의미는, 우리는 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저는 세계챔피언을 패배시킨 Deep Fritz라 불리는 프로그램에 대해 생각합니다. 그래서 Deep Fritz는 Kramnik을 이겼을 때, 그것은 창의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Kramnik이 생각하지 못한, 아마도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게 움직였습니다. 아마도 이 전에 어떤 게임에서도 그런 이동을 없었겠죠. 컴퓨터는 이런 창의적인 것들을 다른 면에서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는 수학적 이론증명의 프로그램이 있을 것입니다. 이제 이것들 중 어떤 것은 제 머리를 뛰어넘는 수학적인 방식으로 증명을 할 수 있을 것 입니다. 그러나 피타고라스의 정리 같은 단순한 것을 들어보죠, 그것은 우리 모두가 고등학교 때 배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유클리드 이론의 피타고라스 정리를 어떻게 증명하는 지도 배웠지요, 유클리드 기하학안에서 다양한 이론을 시작해보죠, ba, ba-ba, ba-ba, ba-ba, ba bum. 이것은 피타고라스 정리를 증명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양한 피타고라스 정리를 증명할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사실, 컴퓨터 프로그램은 그것이 아는 한 그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세계 어떤 사람도 전에 나타낼 수 없었던 것을요. 그럼 편견보다, 프로그램이 창의적이라는 것으로부터 우리는 무엇을 멈출 수 있을까요? 그저 체스나 수학 같은 수학적인 종류의 것이 아니라 당신이 알듯이 프로그램은 음악도 쓸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저는 그저 어떤 무작위로 정리한 분류를 내던지는 것이 아닙니다. 프로그램은 음악을 생산합니다. 우리가 음악이라고 인식할 수 있는 것을 말이죠, 그것은 누구도 전에는 듣지 못한 음악적 구조와 발전이론, 협화음을 만드는 것, 같은 것을 가지고 있죠. 왜 우리는 기계가 창의적이라고 말 할 수 없을까요? 편견들보다도, 우리는 이것으로 말하는 것을 멈추어야 할까요? 그래서 만일 논의가 계속된다면, “우리는 창의성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 가정해야 할 필요가 있어요”, 다시 말해서 그것은 잘못되어 보입니다. 질문이나 코멘트가 있습니까?

 

학생: <들리지않는다.>

 

교수: 좋아요, 질문은 “제가 여기서 창의성에 대해서 말할 때, 제가 우리는 아마도 우리가 창의적일 때 우리는 아마도 어떤 것을 호소하기 위한 감정을 만들 것을 시도할 것이다”라고 말했나요? 대답은 “노”입니다.

당신이 알 듯이, 모든 것은 마음속에 있습니다. 그것이 그저 –창의성에 관한 주제-의 이야기일지라도 말이죠. 저는 단지 마음속에서 새롭게 나오는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에 있었던 것들 중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그리고 가장 특이하게, 그 무언가 나오는 것은 당신은 전에 마음속에 가지지 못했던 것이죠. 기억하세요, 비록 사람들이 체스 게임 프로그램을 이길 수 있도록 디자인 했지만 그 프로그램은 그 사람들이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움직였어요. 그럼, 창의성에 대한 논의는 아마도 먹히지 않는군요. 그러나 그것의 뒤를 따라서 오는 것이 있어요. 만일 우리가 프로그램을 만들었다고 해요, 만일 우리가 창의적인 프로그램을 만들었다고 해요. 그리고 그것이 전에는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을 해 냈다고 해요. 모든 프로그램이 이 프로그램의 뒤를 이을 것입니다. 그렇죠? 이것은 그저 코드 줄기의 한 종류라고 봐요. 그리고 그것은 로봇 또는 컴퓨터 또는 당신이 가진 그저 자동화된, 기계적인 코드 명령 프로그램입니다. 우리는 말하겠죠, 만일 우리가 프로그램을 만들고 그것을 해 낼 만큼 똑똑하다면, 프로그램을 기계적으로 따라갈 수 있을 만큼 말입니다.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을 하고, 여전히 모든 컴퓨터가 할 수 있는 것을요. 모든 로봇이 자동적으로, 필수적으로, 기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을 말입니다. 그것은 자유의지를 가질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영혼의 존재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있군요. 사람들은 자유의지를 가집니다. 어떤 완전한 기계도, 어떤 로봇도, 컴퓨터도 가지지 못한 것이죠, 그러나 우리가 자유의지를 가졌기 때문에 우리는 물리적인 어떤 것보다 무언가를 가졌다는 것이죠. 거기에는 추가적으로 분명 무언가가 더 있습니다. 우리에겐 불멸하는 무언가, 영혼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우리가 자유의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영혼을 믿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제, 주제는, 자유의지입니다. 그것은 매우, 매우 – 의식의 주제는 매우 복잡합니다. 의식의 문제에 대하여 철학적으로 전체 한 학기전체 동안 생각하는 데 전념해서도 진행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의 부분인 이 학기 동안, 한 수업이 의식에 대한 화제거리에 관해서 모든 학기를 전념해서 할 수도 있습니다. 자유의지에 대한 문제에서도 비슷하게 될 것입니다.

“오, 여기 당신이 문제에 대해서 알기 위해 필요한 것이 다 있군요”

저는 그저 문제에 대하여 왜 내가 자유의지가 영혼에 관해서 말하는 데에 완전하진 않은가를 당신이 볼 수 있도록 도와서 가르쳐주길 원합니다.

 

그래서 논쟁은 무엇입니까? 그 생각은 이런 것 같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둘째로- 이것에 대해 말해보도록 하죠. 컴퓨터가 그저 프로그램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어떨 까요? 그 생각은, 철학 용어로 말하면 컴퓨터는 확정적인 조직입니다. 그것은 물리적인 법칙을 따르고 물리적 법칙은 확정적입니다. 만약 당신이 이 상황에서 당신은 불가피하게, 물리적 법칙이나, 컴퓨터로 프로그램 된 것처럼 주어지고 만들어지고, 그렇게 선들이 켜지고, 꺼지고 회로들이 역시 켜지고, 꺼지면 당신은 펑, 하고 터지겠죠. 컴퓨터가 주어진 그 상태에는 어떤 법칙이 있습니다. 컴퓨터는 그런 상태에서 분명 작동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모든 상황이 작동하는 원인과 영향을 이런 방법의 관점에서 본다면, 거기에는 그런 상황이 일어나게 된 훨씬 전의 일들이 앞서서 생긴 원인들로써 있는 것임을 알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그것은 이미 확정된 그림 속의 것이라는 것을 따르게 만듭니다. 물론 이런 생각은 로봇이나 컴퓨터는 확정된 조직일 뿐이고 당신은 확정된 조직이라면 자유의지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이 되죠.

 

첫 번째로,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졌습니다. 두 번째로 결정론에 종속된 것은 자유의지를 가지지 못합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를 합치면, 결정론에 종속된 것은 자유의지를 가지지 못하지만 우리는 자유의지를 가지므로 우리는 결정론에 종속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 번째를 추가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모든 완전한 물리적 조직들은 결정론에 종속되어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는 우리가 결정론에 종속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세 번째를 따라서, 우리는 완전히 물리적 조직이 아닙니다.

그래서 결론으로 네 번째, 우리는 완전한 물리적 조직이 아닙니다.

좋아요, 이것은 자유의지의 논쟁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 논의는 타당합니다. 철학 용어로써 이것은 세 가지 근거를 가집니다. 결론은 실제로 이것들을 따릅니다. 세 가지 근거를 가집니다. 결론은 실제로 이것들을 따릅니다.

흥미로운 질문은 “이 세가지 근거들이 옳은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사실입니다. 그것들 중 각각을 따져봐도 그렇습니다. 제가 다음시간에 조금 더 시간을 들여서 시작해보도록 하죠. 그러나 다음시간에 생각해보는 것은 그저 저 세가지 전제가 정말 사실인가?와 하나 또는 여러 가지가 거짓인가?에 대한 것입니다. 좋아요 그럼 이것이 다음시간에 우리가 시작할 것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