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철학/셸리 케이건

8/9강 : 플라톤(3부): 영혼의 불멸에 대한 논의

rainbow3 2019. 9. 18. 00:27

8강 : 플라톤(3부): 영혼의 불멸에 대한 논의(계속) - 죽음 : 케이건 교수 예일대학

 

이 강의는 플라톤의 <대화> 중 "패도(Phaedo)"편에서 등장하는, 말 그대로 "단순성으로부터의 논의"에서 비롯한, 영혼의 불멸성에 관한 논의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플라톤은 파괴될 어떤 부분에 대해서 논의 하기 위해서 "구분"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언급합니다.

부분으로 구분될 수 없이 단순한 영혼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플라톤은 영혼의 분해가 불가능함을 위의 논리를 따라서 설명합니다.

 

 

교수 Shelly Kagan =

우리는 플라톤의 영혼의 불멸에 대한 논의를 보아왔고, 지금까지 그 논의가 별로 억지스러운 논의라는 것을 찾지는 못했습니다. 잠시 후에 저는 꽤 흥미 있는 논의에 대해 이야기 할 것입니다. 어디가 다른 지는 정의하기 좀 어렵습니다. 하지만 시작하기 전에, 저번 수업 끝에 이야기했던 논의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논의는 회상에 대한 논의였습니다. 현실세계의 물체들이 완전히 공정하고 둥글지는 않지만, 우리에게는 완전히 공정하고 둥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플라톤이 “어떻게 그렇게 될 수가 있지?”라고 자신에게 물을 때, 답은 “음, 이번 생 이전의 the forms를 사전에 기억하고 있었다” 입니다.

그것이 회상(recollection)에 대한 논의입니다. 마지막 수업 끝부분에서, 저는 공정성과 순환성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 형태(the forms)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과 이 세상의 아무것도 완벽히 둥글지도 공정하지도 않다는 것들을 플라톤에게 이해시켜야 한다 해도, “What's going on(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한 오직 가능한 설명은 현실세계의 것들이 우리에게 형태(the forms)에 대한 사전지식을 상기시켜준다”는 것을 굳이 고쳐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건 이렇게 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부분적으로 정의롭거나 아름답거나, 혹은 불완전한 곡선들과 둥근 것들에 부딪힐 때, 뭐가 발생하느냐면, 그것들은 우리의 마음의 바로 처음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는 계기가 됩니다. 정의와 둥근 것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 우리는 형태(the forms)를 이해하고 파악해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의 삶 속에서 형태들(the forms)를 이해만 하게 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 처음을 위해서 말입니다. 그런 것들을 형태들에 속하게 해서 우리의 마음에 또는 우리의 영혼에 조금씩 노출시키는 방법으로 –그런 노출을 통해서- 우리는 그런 형태들을 파악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건 마치 평범한 지구의 물체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들에 부딪히기도 하고, 그것들이 우리에게 부딪힐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우리가 신성한 정신적인 분야도 바라보게 합니다. 막연히 바라보는 것만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숫자3같은 것들은 아닙니다. 하지만, 은유법을 사용해도 된다면, 현실세계에서 부딪히는 것들이 정신적인 형태와 아이디어들의 신성한 분야에 대해 생각하게 합니다.

 

그건 현재 삶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현실의 평범한 물체들이 우리가 사전지식을 상기시키게 하는 것이라는 가장 가능한 대안설명이 될 것입니다. 아마도, 이 평범한 물체들은 the forms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도와주는 소개장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일 겁니다. 그게 사실이라면, 당연히 “영혼이 출생보다 먼저 존재했다는 경우일 수밖에 없다”라고 말하는 Plato를 딱히 따를 타당한 이유는 없습니다.

 

이제 제가 제기한 반론은 Plato가 Phaedo에게 제기한 반론은 아니지만, 그는 다른 반론을 제기합니다. 엄밀히 말해서 우리의 관심은 “영혼은 출생 전에 존재했을까?, 우리의 몸보다 먼저 존재했을까"라는 질문보다, “영혼은 불멸일까?”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회상에 대한논의를 가지고서, Plato는 “출생보다 영혼이 먼저 존재했다 해도, 죽음 후에도 존재할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결국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죽음을 면할지, 영혼은 불멸일지, 당신은 그것을 아직 증명하지 못했습니다, 소크라테스”라고 말하며 반론하는 소크라테스의 두 제자, Simmias와 Cebes에게 합니다. 영혼은 생전에는 존재할 수도 있지만, 사후에는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매우 친절하게도, - 이 시점에서는 꽤 멋진 구성입니다. - 소크라테스는 우리가 방금 되풀이한 두 개의 논의들을 종합합니다. -연상과 그 전에 재활용에 대한 두 논의들. 재활용에 대한 논의에서, 무엇인가를 조립할 때, 부분(혹은 부품)들을 가지고 조립하고, 분해될 때는, 부분(혹은 부품)들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앞선 부분(혹은 부품)들은 재사용됩니다. 연상에 대한 논의에서 영혼은 앞선 부분(혹은 부품)중의 하나입니다. 영혼은 우리가 혹은 우리의 몸이 만들어지기 전에 미리 존재했습니다.

연상에 대한 논의를 종합하고 결합 전에 존재 했던 부분(혹은 부품)들이 분해 후에도 존재할 것이라고 말한다면, 영혼이 전에 존재했다면, 후에도 존재할 것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는 결국 영혼의 불멸을 증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방금 제가 설명한대로, 저는 연상에 대한 논의가 별로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는 사실들을 뒷받침해 줍니다. Plato가 우리의 주의시선을 이끌려고 하던 것들을 기반하여, 우리는 생전에 영혼이 존재했다고 믿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비록 우리가 그의 의견을 받아들인다 해도, 우리는 성급한 결론을 내면 안됩니다, 연상에 대한 논의와 재활용에 대한 논의를 합치는 것을 기초로 해서, 영혼은 우리의 육체의 죽음 뒤에도 계속해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좀 더 친근하고 평범한 예를 들어봅시다. 자동차는 자동차가 아닌 것들로 만들어집니다. 그렇죠?자동차들은 엔진, 바퀴, 핸들 등으로 만들어 집니다. 엔진은 자동차가 아닙니다; 핸들도 자동차는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들을 가지고 자동차를 만듭니다. 엔진은 미리 존재하던 부품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런 사실들로부터 - Recycling에 대한 논의: 부분(혹은 부품)들은 재사용되고, 재조립되고, 자동차가 폐차될 때, 부분(혹은 부품)들은 계속 남아있습니다 - Recycling에 대한 논의와 엔진이 자동차보다 먼저 존재했다는 말로부터 엔진이 페차 후에도 존재할거라고 결론지을 수 있습니까? 당연히 그렇게 결론지을 수 없습니다. 엔진도 언젠가는 분해되어 원자로 돌아갈 것입니다. 그래서 엔진이 자동차보다 먼저 존재했다는 단순사실에서, 그리고 폐차시 자동차는 부분(혹은 부품)들로 돌아간다는 사실에서, 자동차보다 먼저 존재했던 부분(혹은 부품)들이 폐차 후에도 모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없습니다. 그건 그저 알맞지 않습니다.

 

우리가 영혼이 우리보다, 몸보다 먼저 존재했다는 가설을 소크라테스에게 알려줘도, 영혼이 사후에도 존재할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영혼도 엔진이 그렇듯 언젠가는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영혼의 불멸을 납득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영혼이 생전에 존재 했을 것이라는 단순제안이 아닙니다. 영혼은 엔진과는 다르게, 스스로 파괴되지도, 부서지지도, 분해되지도 못 한다는 것을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영혼의 불멸을 이해하려면, 그것이 우리가 믿어야 할 것입니다.

 

제가 사전에 인지했듯이, 놀라운 것들 중 하나는 - 놀라운 것은 아니고 Plato의 대화에 대해 매우 매력적인 것은, 반론을 제기하고 Plato가 감응할 것에 대해 이야기 할 것이기 때문에, 반론의 내용이 명확했건 아니건, 당신이 반론을 제기하고, 그는 반론이 무엇이었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여기도 번역내용이 좀 이상하다) 그리고 이 대화내용들을 당신의 철학적 연구를 교육적으로 도와주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말이 됩니다. Plato가 참조할 바로 다음 논의가 보여질 수 있고, 제 생각에는 명시하지 않은 반론에 답하면서 - 저는 명시했습니다. 하지만 Plato는 대화에서 명시하지 않습니다. - 영혼이 한 부분(혹은 부품)일지라도, 생전에 먼저 존재 했을지라도, 분리되지 않는다고, 사라지지 않는다고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저희가 알고 싶은 것이 영혼의 불멸의 유무인 이상, 그것이 붕괴되지 않는 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Plato의 다음 논의는 이 고민거리를 바로 다룹니다. 그리고 꽤나 흥미 있는 논의입니다. Simplicity에 대한 논의를 여러분께 새로이 알려드리겠습니다. 소크라테스는 무엇이 부서지고, 부서지지 않는 것인지를 토의할 것입니다; 무엇이 파괴되는 것과 파괴되지 않는 것도 말입니다.

그는 예를 들것에 대해 생각합니다; 보기들을 찾아보고, 그것들로부터 추상적 원리들을 추론하려 합니다. 그리고 나서 영혼이 불멸하는 것과 파괴되지 않는다는 것을 납득시키기 위해 이 원리를 사용할 것입니다.

 

많은 것들은 파괴될 수 있습니다. 여기 종이 한 장이 있습니다. 종이는 사라질 수 있습니다[종이 찢기는 소리~]그렇죠? 이 종이는 왜 파괴될 수 있는 것 중에 하나입니까? 답은 간단합니다.

종이도 부분(혹은 부품)들로 이루어져있기 때문입니다. 종이를 찢는 것에서, 제가 한 것은 한 부분(혹은 부품)에서 다른 한 부분(혹은 부품)을 떼어낸 것입니다. 종이를 분해하기 위해서, 저는 그 부분(혹은 부품)들을 띄어냅니다. 여기 하나의 분필이 있습니다. 분필은 파괴될 수 있습니다. 혼합된 것들은 파괴될 수 있습니다. 부분(혹은 부품)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들은 파괴될 수 있습니다.

 

이제 무엇들이 파괴될 수 없습니까? Plato가 영원하고 파괴되지 않을 예를 찾을 때, 정신적인 the forms를 생각했다는 것을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숫자3을 생각해 봅시다. 3은 파괴될 수 없습니다. 그렇죠? 핵폭발이 일어나서 지구상의 모든 것들이 원자화 되고 엄청난 물리화학작용에 의해 파괴되더라도, 숫자3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숫자3은 겁먹지도 않을 것입니다. 3 더하기 1은 4라는 사실도 변함은 없습니다. 숫자3을 다치게 할 수도 없습니다. 완벽한 순환성을 개조하거나 파괴할 수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부분(혹은 부품)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게 개념입니다.

정신적인 the forms같은 것들은 영원합니다. 그리고 변화하지도 않고, 파괴되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simple하기 때문입니다. - 여기서 “simple"은 추상적인 개념으로 아무것으로도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부분(혹은 부품)들로 이루어진 것들은, 원칙적으로, 부서질 것에 대해 걱정해야 하고, 따라서 파괴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simple"한 것들은 파괴될 수 없습니다. 분해할 부분(혹은 부품)이 아예 없기 때문입니다.

 

파괴될 수 있는 것들은 부분(혹은 부품)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들이고 그런 것들은 변화하는 것들이기도 합니다. 그렇죠? 비록 파괴되지 않는다 해도, 혼합된 것들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변한다는 것입니다. 제가 철 몽둥이를 가지고 휘었다고 합시다. 분해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변화시키기는 했습니다. 여러 부분들 같이 관계를 재조절하는 방법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저희의 몸은 팔과 머리 등등으로 이루어져있고, 근육들은 움직이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바뀐다고 할 수 있습니다. 부분(혹은 부품)들을 재배열하면, 그 물체는 변화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말은 부분(혹은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파괴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기 괜찮은 개념론이 있습니다.

변화하는 것들은 부분(혹은 부품)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부분(혹은 부품)들로 이루어져 있는 것들은 파괴될 수 있습니다. 변화시키고 파괴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이 있습니까? 우리가 볼 수 있는 평범한 물체들로는 종이, 몸, 분필, 그리고 철이 있습니다.

 

반대로, 완전히 반대에서, 숫자3같은 invisible한 것들도 있습니다 - 아무도 숫자3을 볼 수는 없습니다 - invisible한 것들은 변화하지도 않습니다. 숫자3은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그렇죠? 숫자3은 홀수입니다. 3은 오늘은 홀수지만 내일은 짝수가 될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영원히 홀수일 뿐입니다. 3 더하기 1은 4입니다, 오늘도 어제도 그리고 앞으로 영원히 말입니다. 숫자3에 대한 사실들은 절대 바뀌지 않습니다. 3은 불변한 것입니다. The forms는 영원한 것입니다; invisible하고 불변한 것들입니다. 그들은 simple합니다, 그리고 simple한 것들은 파괴될 수 없습니다.; the forms도 파괴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소크라테스가 종합하려던 생각들이고, 기본 생각을 칠판 위에 적어두었습니다. [Figure8.1]

숫자1을 ‘오직 혼합적인 것들만 파괴될 수 있다’라고 가정하고, 숫자2는 ‘오직 변화하는 것들만이 혼합적인 것이다’라고 합시다.

가정1과 가정2를 종합하면, ‘오직 변화할 수 있는 것들만 파괴될 수 있다’라는 가정이 나옵니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들은 변화하지 않는다’라는 가정3을 더합니다. 혼합되기 위해 바뀌는 것과 파괴되기 위해 혼합되는 것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들은 바뀌지 않는 것은 가정4 ‘보이지 않는 것들은 파괴될 수 없다’라는 가정을 만듭니다. 이것이 소크라테스가 이 경우들을 가지고 생각해서 만든 추상적인 논제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영혼의 불멸에 대한 중요한 가정입니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가 우리가 영혼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게 인도해주기 때문입니다.

영혼은 visible합니까? invisible합니까?

그는 invisible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invisible한 것들이 파괴될 수 없다면, 영혼은 파괴될 수 없습니다.

 가정1,2,3,은 ‘invisible한 것들은 파괴될 수 없다’라는 가정4를 만들어 냈지만, 가정5 ‘영혼은 보이지 않는다’와 가정6 ‘영혼은 파괴될 수 없다’는 만들어내지 못 했습니다. 이것이 제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재구성한 최고의 시도입니다. 이건 Plato가 그런 가정들과 결론들을 가지고 구분하고 설명하려는 것처럼은 아니지만, 저는 이것들이 그가 내세우는 논의들에 공평하게 충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잠시 후, 저는 그 논의들이 좋은 논의인지에 대해 이야기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건 꽤 흥미 있는 논의가 될 것 같습니다; 꽤 심각하게 다룰 가치가 있는 논의입니다. 그전에 재가 결론 내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결론은 아니라는 것을 미리 말씀 드리겠습니다. 저는 그 논의가 가정6‘영혼은 파괴될 수 없다’를 결론지었습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사실 - 그의 실제결론은 - “영혼은 파괴될 수 없거나 혹은 거의 그거에 가깝다”라고 말합니다. 그건 오히려 이상한 결론이었습니다. “거의 가깝다”라.. 소크라테스가 변화, invisibility등등의 그의 실험 들과 단순성과 대비한(versus) 혼합성에서 도달한 결론은 “영혼은 파괴될 수 없거나 혹은 거의 그렇다”라는 것입니다.

 

이제, 그런 자격을 덧붙임으로써 걱정으로 문을 엽니다. 그 근심거리는 영혼이 거의 파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해도, 우리를 불멸로 이끌어 주기에는 부족하다고 말하는 Cebes에 의해 제기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매우 좋은 유추법을 내놓았습니다. - 소유자보다 오래 지속되지만, 불멸이지는 않은 코트. 혹은 소유자가 여러 코트를 거쳤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사라지기 전가지 6, 12, 혹은 몇 백번 여러 몸에 환생할 수도 있습니다. 영혼의 불멸을 증명하기에는 아직 부족합니다. 그것이 Cebes가 제기한 반론입니다.

이상한 것 중 하나는, 제가보기에, 소크라테스는 단한 번도 그 반론에 답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반론이 제기되면 - 말하자면, Plato가 Cebes의 견해에서 반론합니다 - 하지만 Plato의 편에서, 소크라테스는 반론에 단 한 번도 답하지 않았습니다.

 

무엇이 정확히 일어나는지 말하기는 힘듭니다. Plato는 영혼이 그 후에도 불멸이라는 것을 제대로 입증하지 못한 것에 걱정을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아마도 simplicity에 대한 논의는 필요보다 덜 좋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왜 Plato가 여전히 또 다른 논의를 제시하는지 설명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 논의가 정말 영혼의 불멸을 입증했다면, 그가 왜 더 많은 논읜 - 우리가 나중에 이야기할 필수적인 소유물에 대한 논의 -를 제시해야 했습니까? Plato는 아마도 Cebes의 반론에 좋은 답이 없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Plato의 편에서 혹은 적어도 그 논의의 견해에서, 소크라테스는 영혼은 불멸이거나 거의 그것에 가깝다는 이상한 문구로 그 논의를 결론 내리지 말았어야 했다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그는 영혼은 불멸이라고 종지부를 찍었어야 합니다.

 

가정1,2,3 - 오직 혼합된 것들만 파괴될 수 있다, 오직 변화 가능한 것들만 혼합될 수 있다. invisible한 것들은 변화하지 않는다 -를 종합하면, invisible한 것들은 파괴될 수 없다는 가정4가 나옵니다. “invisible한 것들은 파괴될 수 없거나 파괴시키기에는 너무 힘들다”같은 더 자세한 결론은 얻을 수 없습니다.

가정1,2,3이 있다면, 우리는 좀 더 두드러진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invisible한 것들은 파괴될 수 없다. 결론”종지부. 그리고 영혼이 정말 invisible하다는 가정5가 사실이라면, 우리는 가정6“영혼은 파괴될 수 없다”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 ‘영혼은 파괴될 수 없다’가 아니거나, 영혼이 파괴될 수 있다면,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더 뚜렷하고 두드러진 결론 ‘영혼은 파괴될 수 없다. 종지부, 끝. 토의종결.’에 도달 할 수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이런 약한 결론을 그림에도 불구하고, 그가 우리에게 제시한 논의는, 납득이 된다면, 우리가 더 뚜렷하고, 뻔뻔스러운 결론에 도달할 수 있게 해주는 것처럼 보입니다.

‘영혼이 불멸이거나 거의 그런 것이다’는 아니지만, ‘영혼은 불멸이다’라는 것입니다. Plato는 아마도 소크라테스가 Cebes에게 답하지 않은 이유일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건 대담속의 인물들도 알만한 논의보다 나은 논의가 있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깨닫게 해줄 안내일 수도 있습니다. - Plato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알 수가 없습니다.

 

하여튼, 질문은 “Plato가 무슨 생각을 할까?”가 되어서는 안되고, “이 논의가 좋은 것인가?”라는 질문이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영혼의 불멸에 대한논의가 있습니까?

결국, 영혼이 파괴될 수 없다면, 불멸인 것입니다. 이것이 좋은 논의가 될 것입니까? 아닙니까?

 

Simmias는 또 다른 이의를 제기합니다. Simmias는 가정4 “Invisible한 것들은 파괴될 수 없다”를 믿어서는 안되기 때문에 우리는 영혼이 불멸이라는 것을 결론지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당연히 더 이상 불멸 혹은 불멸에 가까운 것에 대한 논의를 계속 할 필요가 없습니다.

영혼이 invisible하다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크라테스의 생각에 반해서, invisible한 것들이 파괴될 수 있다고 하면, 그렇다면, 아마도 invisible한 영혼은 파괴될 수 있습니다.

 

Simmias는 단순하고 뻔뻔스럽게 invisible한 것들이 파괴될 수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Invisible한 것들이 파괴될 수 있다는 것들의 예를 들어보았습니다 - 하모니. 그는 현악기에 의해 만들어지는 하모니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사실은, 그가 말하길, 이건 우리가 생각해보기에 좋은 예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하모니 같다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몸의 하모니 같은 것입니다. 유추법을 충분히 설명하기 위해, 그리고 잠시 후에 더 이야기 할 것입니다,

마음에 몸이라면 하모니에는 하프입니다. 이런 견해를 제안하는 사람들도 있고 하모니는 어떤 상황에서든 파괴될 수 있습니다. 하모니를 볼 수는 없습니다. 그렇죠? 하모니는 invisible합니다.

하지만, 하모니도 부술 수는 있습니다.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하프가 여기 있다고 하고, 당신이 도기로 하프를 치고 치고 또 쳐서 부신다고 합시다.; 이제 하모니도 파괴된 것입니다. Invisible한다 해도, 그 소리를 만드는 악기를 부숨으로써 그 소리도 파괴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고민거리가 있습니다. 그렇죠? 만약 마음이 몸의 하모니 같다면, 아마도 마음이 의존하는 몸을 부숨으로써 마음, 영혼을 파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invisible한 것들은 파괴될 수 없다는 개념에 대한 반등에 하모니에 대한 생각이 제시된 것입니다. 하모니는 invisible합니다.

하모니는 파괴될 수 없다고 말한 소크라테스 당신은 틀렸습니다. 영혼이 invisible한 것은 이해한다 해도, 영혼은 역시 파괴될 수 있는 invisible한 것일 것입니다.

 

이건 좋은 반론입니다. 심각하게 생각해 볼 가치가 있는 반론입니다. 이상한 건, 소크라테스가 해야 했던, 필요했던 방법으로 반론에 대해 응답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소크라테스는 “영혼이 정말 하모니 같은 것일까? 아닌 것일까?”라는 질문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이건 은유법입니다. - 마음과 육체 간의 관계를 하모니와 하프간의 관계와 비슷하게 생각해 봐야 합니다. - 소크라테스는 그 유추법을 비평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잠시 후에, 그 유추법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비평은 어떻습니까? 라는 질문에 대해 이야기 할 것입니다. 그 비평들은 좋은가? 아닌가? 하지만 그 비평들이 좋다 해도, 소크라테스 당신의 논의에는 충분히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렇다고 말하려 해도, 그거 아십니까?,

마음이라는 것은 전혀 하모니 같이 않습니다. 그 유추법은 정말 별로입니다. Simmias가 소크라테스의 논의에 꼬투리를 잡을 것은 하모니가 invisible하고 파괴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것이 사실인 이상, invisible한 것들은 파괴될 수 없다는 것을계속 믿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해야 할 것은 조화는 파괴될 수 없다는 것, 하지만 파괴될 수 있습니다, 또는, 악기로부터 나는 듣기 좋은 소리가 파괴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는 아마도 조화는 정말 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라는 것을 납득시키거나 보여줄 수 있다면, 우리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을 파괴될 수 없다는 것에 대해 반증하지 않을 것이고, 그 논의는 예전처럼 계속 될 것입니다.

 

그것이 소크라테스가 해야 했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거 아십니까? 하모니는 정말 invisible한 것이 아닙니다.” 혹은 “조화는 파괴될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저희가 알고 있는 대화에서는 그런 말은 조금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소크라테스는 “Simmias, 여기 너의 반론이 틀렸다는 것이 있다. 하모니는 정말 invisibl한 것도 아니고, 파괴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반증할 것은 없다” 대신, 그는 “이게 정말 좋은 유추법인가? 마음을 생각하는 좋은 방식인가? 아닌가?”라는 질문에 매달렸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해도, 논의를 지키지는 못 했을 것입니다.

 

이제, 저는 하모니가 정말 좋은 유추법인지 아닌지에 대해 생각해 볼 것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것이 정말 좋은 유추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모니에 대해 이러나고 있는 일들은 - 마음이 몸의 하모니라는 것처럼, 마음을 하모니 같이 생각하기로 한 것 - 물리학자의 관점을 보여주기 위한 early 시도입니다.

물리학자가 말하기를, 마음에 대한 이야기는 그저 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혹은 좀 더 자세하게는, 몸이 최고의 상태일 때 할 수 있는 몇 가지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법입니다. 독같이, 하모니, 듣기 좋은 소리 혹은 하프에서 얻을 수 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 이것들이 하프가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것입니다. 하프는 튠이 잘 되어있고 정상적인상태일 대, 듣기 좋고 아름다운 소리를 냅니다. 하모니analogy(유추법?)은, 제 생각에, ‘물리학자는 마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질문에 대해 괜찮은 답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당신들이 물리학자가 마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해시키려 할 대, 컴퓨터나 로봇 같은 예를 들 것입니다. Plato가 당연히 그런 예를 사용하지 못했다는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닙니 다. 그는 컴퓨터와 로봇을 보지 못했으니까 말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역할을 대신할 다른 예들이 있었습니다.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능력은 그 물체의 정확한 역할 및 행동에 의존됩니다. 그리고 그의 이원론에 대한 대안이 있다는 것을 그가 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당신이 물리학자가 되어 마음은 몸에 의존한다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은 그저 몸이 잘 움직일 때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것 중 하나입니다.

하모니가 악기에 의존하는 것처럼, 마음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가 영혼은 몸의 하모니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납득시킨다면, 그건 물리학자에게 문제가 될 것입니다. 잠시 후에, 이 주제는 다시 돌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Plato의 이원론에 대한 물리학자의 대안이 좋은 시도였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왜 우리자신에게 Plato의 반론은 어떠한가? 라는 질문을 해야 할 가치가 있는지 알려줍니다.

 

그전에 먼저, 전에 제가 강조했었던 점에 대해 이야기 합시다. 다시 말하자면, 영혼이 하모니와 비슷하지 않다해도 그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하모니가 정말 invisible하고 파괴될 수 있다면, 그 대는 invisible한 것들도 파괴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영혼이 전혀 그렇지 않다해도 - 물리학자의 위치에 대해 생각하기 위해서는 그다지 좋은 analogy(유추법?)은 아닙니다. - 그게 무관한 일 아닙니까? 만약 invisible한 것이 파괴될 수 있고, 하모니가 좋은 에라면, 영혼의 invisibility로부터는 영혼이 파괴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릴 수 없게 됩니다. 소크라테스가 그 반론에 답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는 소크라테스 편에게 “그 반론에 답변이 가능하기는 합니까?”라고 물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적어도 하나의 시작입니다.

 

“invisible한 것들은 파괴될 수 없다”라고 말할 때, 우리가 뜻하는 ‘invisible'은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3가지의 해석을 주장하고 싶습니다.

[Figure8.2]

첫 번째는 ’보이지 않는‘이고, 두 번째는 ’관찰, 감시할 수 없는‘, 다섯 가지의 감각으로, 입니다. 세 번째는 ’찾아내거나 감지할 수 없는‘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소크라테스가 그의 논의들을 주장할 때, 어떤 의미의 invisible을 생각했습니까? 라고 질문해야 합니다.

첫 번째로, 이 뜻들이 어떻게 다른지 명확하게 구분지어야 합니다. 어떤 것들은 볼 수는 없지만, 다른 방법으로 느낄 수는 있습니다.

색들은 볼 수는 있습니다; 냄새는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연히 - 커피냄새 - 오감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소리는 볼 수 없습니다. 보여지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느낄 수는 있습니다. 귀를 통해 들을 수는 있습니다. 너무 영어단어 ‘Invisible’의 뜻에 매달리지 말고, “눈으로 볼 수 없는”과 “오감으로 관찰, 감시할 수 없는”이 다라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리고 숫자3은 전혀 다른 그리고 더 강한 개념입니다. 3은 오감으로도 느낄 수도 감지할 수도 찾을 수도 없습니다. 숫자3은 -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맛 볼 수도, 들을 수도, 냄새를 맡을 수도, 만질 수도 없습니다. 그렇죠? 숫자3은 더 큰 의미로 invisible합니다. 아예 다섯 가지 감각으로도 찾을 수 없습니다. - 그것의 의미로 감지하거나 찾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 3은 흔적을 남기지도 않습니다. 그렇죠? 공룡을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화석이라는 흔적을 남깁니다.

 

다시 말해, 영어단어 ‘invisible'의 뜻에 너무 매달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자신에게 물어봐야 합니다. invisibility의 어떤 개념 - 우리가 세 가지의 뜻 중 하나를 사용할 것이라면 - 소크라테스의 논의에는 어떤 개념이 사용되었을까? 그를 판단하기 가장 자연스러운 방법은 가정1입니다. 그가 'invisible한 것은 변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때, 그가 뜻하는 것은 우리가 볼 수 없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 invisible은 가정4 - invisible한 것들은 파괴될 수 없습니다 - 의 방법으로 판단합니다.

첫 번째 해석에서, 그가 말했을 것은 “눈으로 볼 수 없으면, 그것은 파괴될 수 없다”입니다. 지금 문제는 하모니가 그렇지 않다고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하모니는 가정1에 대해서는 정말 invisible합니다. 당신들은 당신들의 눈을 통해 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하모니는 파괴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가 invisibility로 무엇인가 의미하려 하는 것이 첫 번째 개념이라면, 눈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 논의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하모니는 꽤 위압적인 반증입니다.

 

하지만, 아마도 그건 소크라테스가 invisible로 의미하려던 것은 아닐 것입니다. 가정1 대신, 아마 가정2로 이야기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가 invisible한 영혼과 파괴되지 않는 invisible한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아마도 소크라테스는 다섯 가지 감각에 의해 관찰, 느낄 수 없는 것들을 뜻 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의 핵심은 그것입니다. 그게 소크라테스가 말하려던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빠른 인용을 드리겠습니다. 저희 책에서 29쪽입니다. 각 책마다 페이지를 매기는 방법이 약간 다를 수도 있습니다. 학교 책에는 79쪽입니다; 그는 가끔 visible한 것과 invisible한 것들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 합시다. 의자 vs. the forms. 그는 “이 의자, 나무, 돌맹이들은 당신이 만지거나 보거나 다른 감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항상 똑같은 것들은, the forms, 마음의 논리적인 힘에 납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들은 보이지 않은 채로 볼 수 없죠. 그래서 저는 소크라테스가 visible과 invisible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시각에만 중점을 둔 것이 아니라는 것이 꽤 명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오감을 전부 이야기하는 것일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 그가 - ‘invisible한 것들은 파괴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할 때, 그는 만지거나, 보거나 듣거나, 느낄 수 없는 것을 뜻 합니다. - 무엇이던 - 시각, 촉각, 후각, 미각. 이것들은 파괴될 수 없습니다.

 

이제, 그의 논의를 이해하는 법이 그렇다면, 하모니는 더 이상 반증으로 쓸 수 없게 됩니다. 하모니는 가정1, 볼 수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invisibl이었습니다. 하지만 가정2, 느껴지지, 관찰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invisible한 것이 아닙니다. 하모니는 귀로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럴 때는 반증이 될 수 없습니다. 가정4에도 반증은 될 수 없습니다. 가정4는 ‘invisible한 것들은 파괴될 수 없다’입니다. 소크라테스는 하모니는 느껴질 수 없으므로 invisible이란 의미에서, invisible하지 않다고 이야기했어야 합니다. 하지만 - 이건 꽤 중대한 요점입니다. - 주의해야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영혼은 그런 면에서 invisible하다고 계속 밀고 나갔어야 합니다. 영혼을 보거나, 맛보거나, 만지건, 들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두 번째의 해석으로 이 논의를 이해한다면, 이논의는 계속되지 않았을가 합니다. Simmias의 반증은 실패한 것입니다. 하모니는 그런 면에서는 invisible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invisible한 것들이 파괴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영혼이 그런 면에서 invisible하면, 영혼은 파괴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Simmias의 반론, 특별한 반증, 하모니,가 실패한다 해도, 또 다른 반증이 있을 수 있기에 그 논의를 받아들일 것 까지는 없습니다.

여기 저의 제안이 있습니다. 하모니말고 전자파를 생각해봅시다. 전자파는 느낄 수 없습니다. 관찰 될 수도 없습니다. 볼 수도 없습니다. 만질 수도 없습니다. 냄새 또한 맡을 수 없습니다. 들을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파괴될 수는 있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만약 두 번째 해석을 가지고 이야기 했다면 Simmias와 같이 우리는 “가정4는 사실이 아닙니다. 어떤 invisible한 것들은 파괴될 수도 있습니다”라고 여전히 말해야 합니다. 전자파는 그런 면에서 invisible해도 파괴될 수는 있습니다. 그렇죠? 질문있습니까?

학생 - 조용

교수 - 그 제안은, 전자파도 the forms와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학생 - 조용

교수 - 그것들이 the forms는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면에서는 완벽합니다. 그것이 thought(사고)였습니까?

학생 - 조용

교수 - 예! 잘못 이해했습니다. 오히려 대답이 “예, 그게 정확한 문제입니다”가 될 질문 “전자파는 the forms같지 않습니다.”이었어야 합니다.

전자파는 the forms처럼 invisible하지만, the forms처럼 파괴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가 정확히 영혼에 대해 고민해야 되는 이유입니다.

 

영혼은 파괴될 수 없는 the forms처럼 invisible한 것입니까? 아니면, 파괴될 수 있는 전자파처럼 invisible합니까? 다시, 저의요즘은 “이 바보 Plato야, 전자파는 왜 생각하지 못했던거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질문도 Plato가 생각했어야 했던 것을 그냥 넘긴 것이가?도 아닙니다. 그저 “그의 논의가 성립되는가? 안되는가?” 그리고 “Invisible한 것들은 파괴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인가?”입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전자파처럼, 어떤 면에서는 invisible한 것들이 파괴될 수 있습니다. 영혼이 invisible하다해도, 저런 면에서는 파괴될 수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소크라테스나 Plato가 줄 수 있는 답은 “두 번째와 세 번Work 아닌 또 다른 invisible의정의가 필요합니다. 우리가 무엇을느낄 수 있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감지하거나 찾아낼 수 있는지에 대해 이야기 합시다” 전자파는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렇죠? 라디오들이 그렇습니다. 전원을 켜면 지나가는 전자파를 붐!하고 검파합니다. 그것을 들을 수 있는 소리로 바꿉니다. 전자파를 라디오 혹은 다른 것들 사이에서 검파할 수 있습니다. 아마 그는 좀 더 강하고 대담한 정의의 invisible을 사용했어야 합니다. 볼 수도, 관찰 할 수도, 감지되거나 찾을 수도 없는 것을 invisible이라고 부릅시다. The forms는 결국 감지되거나 찾아져지지도 않습니다. 숫자3을 알려줄 라디오는 없습니다. - 숫자3이 근처에 있다고 알려줄 방사능 측정기도 없습니다. Plato는 감지할 수 없다는 면에서, invisible한 것들은 파괴될 수 없다는 것을 계속 강조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전자파는 감지가 가능합니다. 그래서 반증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제 우리는 invisibility의 개념을 ‘감지당하지 않는 능력’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래서 Plato는 ‘감지당하지 않는’을 뜻하는 완전한 invisible한 것들은 파괴될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할 수는 없었습니다. 전자파는 반증이 아닙니다. 아마 Plato는 그렇게 말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invisible을 완전히 ‘감지 당하지 않을’로 이해하는 가정4를 그에게 허락한다면, 가정5를 줄 수는 없습니다. 영혼은 invisible합니까? 음.. 그랬습니다, invisibility가 “보이지 않는”이라는 뜻을, 맛보거나, 만지거나, 듣거나, 냄새를 맡을 수도 없다는 뜻으로 통할 때 말입니다.

하지만 뜻이 “감지가 되지 않는”이라도 invisible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영혼을 감지할 수 없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더 이상 그렇지 않다고 말해야 합니다. 우리가 invisibility를 그렇게 해석한 이상, 그런 뜻에서 영혼은 감지가 가능합니다. - 말 그대로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거와 비슷한 것으로 - 전자파는 감지가 가능합니다. 전자파와 라디오를 엮는다면, 라디오가 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전자파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결과물로 존재합니다. 영혼과 몸을 엮는다면, 몸의 행동, 당신과 철학을 토론하는 것을 통해 영혼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친구의 영혼을 당신친구의 몸을 통해 감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영혼은 실제로 감지할 수 없지 않다는 말입니다. 하지만 영혼이 정말 감지할 수 없지 않다면, 영혼은 그런 면에서 invisible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invisible의 개념이 있다하더라고, invisible하지 않다면, invisible한 것들이 파괴될 수 없을 만큼, 영혼은 invisible하지 않습니다.

 

제가 이 논의에 대해 너무 오래 이야기 했습니다. 왜냐하면 꽤 흥미있는 논의였기 때문입니다. Simplicity에 대한논의는 매혹적입니다. 영혼은 부분(혹은 부품)이 없다면 부술 수 없다는 아이디어와 영혼이 부분(혹은 부품)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영혼이 invisible하고, invisible한 것들은 부분(혹은 부품)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건 정의하기 꽤 어려운 논의입니다. 성립이 되던 안되던 간에 말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생각한 것으로 보아, 성립되지 않는다고 결론지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9. Plato, Part IV: Arguments for the immortality of the soul (cont.)

 

Death (PHIL 176)

 

Professor Kagan elaborates on the "argument from simplicity" and discusses in detail Plato's claims that the soul is simple, changeless and therefore indestructible. The final Platonic argument under discussion is the "argument from essential properties" in which the essential properties of the soul are addressed. At the end of the lecture the question of whether one needs to argue for physicalism is posed.

00:00 - Chapter 1. Assumptions Made in the Argument from Simplicity
05:56 - Chapter 2. Plato's Defense against the Harmony Analogy
19:42 - Chapter 3. Essential and Contingent Properties and the Argument from Essential Properties
37:06 - Chapter 4. Kagan: "There is No Good Reason to Believe in Souls"
47:53 - Chapter 5. Qualifications and Conclusion

Complete course materials are available at the Open Yale Courses website: http://open.yale.edu/courses

This course was recorded in Spring 2007.

 

 

 

9강 : 플라톤(3부): 영혼의 불멸에 대한 논의(계속) - 죽음 : 케이건 교수 예일대학

 

이 강의에서 Kagan 교수는 "단순성으로부터의 주장"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영혼이란 변함이없고 그렇기 때문에 파괴할 수 없다는 내용의'영혼이 단순하다'고 주장한 플라톤의 주장의 세부사항에 대해 설명합니다. 플라톤 주장의 마지막은 "근본적인 성질에 대한 주장"인데 이는 영혼의 가장 근본적인 특징 혹은 성질에 관한 것입니다. 이 강의의 마지막에서는 물리주의를 주장할 수 있을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던져집니다.

 

 

셜리 케이건 교수:

우리는 플라톤의 영혼의 불멸에 대한 논의를 통해서 우리의 방법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시간에 저는 약간의 시간을 할애하여, 우리가 보고 있는 마지막 논의보다는, 끝에서 두 번째의 논의가, 플라톤이 영혼의 단순함에 대한 논의를 시도하려는 것에 반대의견을 제시해 보았습니다.

 

이것과 연결된 생각들은, 당신이 회상하려는 것, 그런 것들입니다: 플라톤이 제시하길 원한 것은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의 부분들을 부수기 위한 것입니다.; 무언가를 부수는 것은 기본적으로 그것을 나누는 것이죠. 만일 그가 오직 우리에게 영혼이 단순하단 것만을 주장하기 위해서라면, 그것은 부수어지지 않는 것이 뒤따르고, 그리고, 불멸하는 것이겠죠. 그는 묻습니다, 그런 것들이 부수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증거가 무엇이죠? 어떤 종류의 것이 단순합니까? 그럼, 이것들 – 그가 주장하려고 하는 것—보이지 않는 것들, 그런 것들은 변하지 않습니다. 결국엔, 변하는 것들은

 

부분들의 재조합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또, 만일 무언가가 변한다면, 그것은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아마도 그것은 부수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영혼이 조합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만일 그것이 변화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이 단순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아마도 그러면 그것은 부서질 수 없는 것 입니다. 그리고 그럼 그는 영혼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변할 수 없는 것의 증명이라고 제시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면 단순함, 그리고 부서지지 않는 것도 그 증명이라고 제시할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지난 시간을 통해서 한 논의입니다. 그리고 저는 약간의 시간을 들여서 만일 당신이 정확하게 플라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의한 의미에 대한 것을 단정짓는 다면, 실제로 그 논의는 계속 될 수는 없습니다.

 

그 논의를 그만두기 전에, 제가 확실히 짚어두고 가고 싶은 추가로 강조할 몇 가지 것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로, 우리는 아마도 너무 빨리는 영혼이 변하지 않는다는 제안을 받아들일 수는 없을 것입니다. 결국 만일 당신이 그것에 대해 생각한다면, 그것은 적어도 그 영혼의 얼굴이 실제로 변하는 것에 대한 것이겠죠. 예를 들어, 어느 날 당신이 덥다고 믿는다면: 어느 날은 당신은 춥다고 믿습니다. 어느 날은 또 그렇게 믿고 또 어느 날은 그렇게 좋은 사람이죠; 그리고 다음날 당신은 그렇게 믿었다가도 나쁜 사람으로 믿기도 하는 것 입니다. 당신은 피아노를 배우기를 원하고, 다음날은 그 열망을 포기합니다. 당신의 믿음, 당신의 목표들, 당신의 관심들, 당신의 욕망들—이것들은 계속해서 변합니다. 그리고 다음, 적어도 그것에 직면했을 때에, 그것은 비록 우리가 영혼에 대하여 말하고자 하기 위함이지만- 만일 당신이 영혼을 믿는다면 – 그 영혼은 또한 변합니다, 그 생각에 대한 관점에서 말하자면 믿음은 그런 것에 깃들어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논의에 대해서 말하고자 하는 때에 그것에 대해서 의심했었어야 했다, 영혼의 보이지 않음에 기초하여, 우리는 그것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에 결론을 지을 수가 있다. 변하지 않는 것은 사실인 것처럼 보이지 않아요. 더욱이, 우리는 그래야만 해요, 또는 적어도 우리는 그럴 겁니다, 영혼이 단순하다는 주장에 대한 의심이 있을 것 입니다.

사실, 플라톤 자신도, 다른 대화들 속에서, 영혼의 단순성의 반대하는 논의를 했습니다. 이제, 그의 다른 대화들 속에서 그가 맞았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제시하는 바가 우리가 그런 부분에서 맞았는가 확신할 수 있는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합니다. 공화국 안에서, 유명하게도, 플라톤은 영혼은 적어도 세 가지 부분을 가지고 있다는 논의를 이끌었습니다.

그것은 이성적 부분과 그것은 추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고; 거기에는 영혼의 부분과 의지 같은 것이 있습니다; 거기에는 취향 같은 것의 부분이 있고, 취하는 것, 섹스, 음식, 당신이 가지는 것의 열망입니다. 플라톤은 영혼은 단순하지만은 않다라는 다른 방향으로 논의했습니다. 그리고 아마 그가 여기서 영혼은 변하지 않는 것에 기초해 있으면서 단순하다는 것에 윤곽선을 그린 논의는 우리를 충격에 빠뜨리지는 않습니다, 영혼의 보이지 않는 본성- 아마도 그것에 대한 논의가 결국 성공하진 못했기에 우리를 충격에 빠뜨리진 않습니다. 결국, 비록 제가 플라톤을 정확하게 그 추측이 만일 우리가 영혼의 단순함에 대한 것을 구축했더라면, 그것은 영혼은 부수어 질 수 없다는 것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결국, 당신은 만일 그것이 부분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만일 그것이 조각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당신은 영혼을 그것의 조각들로 찢어서 영혼을 부수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더라도, 저는 그 생각을 다시 새롭게 해서 그것이 실제로 명확하게 단순한 것들은 부수어질 수 없다고 하고 싶습니다.

 

그럼, 그들은 명백하게 특별한 부수는 방법으로는 부술 수 없고, 떨어져 있는 것들을 포함할 수는 없습니다. 만일 그들이 부분을 가지지 않는다면, 당신은 나눌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들을 위해, 그것은 여전히 단순함이 뒤따르는 지각에 의해서 구상적으로는 가능성을 가진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계속해서 존재한다. 결국, 어떤 첫 번째 장소로부터 단순함이 온 것이냐? 그건, 적어도 논리적 관점에서 본다면, 단순함이 시작되는 부분에 대한 상상, 그리고 그것의 존재가 생겨나는 다음 부분이 비록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고 해도, 그것이 그럼 어떻게 일어났습니까? 아마도 신이 말했겠죠- 신은 말하셔서 창세기가 시작됩니다. “빛이 있으라.” 그래서 그는 아마도 말하셨습니다. “단순함이 있으나.” 그 내림의 순간에 그들이 거기 없었다가; 다음 순간 그들이 생깁니다. 그럼, 잠시 후 아마도 신은 말하겠죠. “단순함은 더 이상 존재하지 말아라.” 내림의 순간 그들은 있었다가; 다음 순간; 그것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그 생각이 마치 일리가 있어 보입니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영혼이 단순하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해도, 비록 우리가 플라톤의 논의에서 이 부분에 대해 말 한 모든 것”영혼은 단순하다.”는 것을 받아들인다고 한다 해도, 그것에 영혼이 불멸한다는 것이 뒤따르진 않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영혼 자체가 단순히 천부적으로 나타나 존재한다는 부분에 대한 가능성에 대하여 고려해야만 합니다, 아마도 그 부분은 육체가 부서지는 부분일 것 입니다. 그래서 저는 플라톤의 가장 최근의 논의-단순함에 대한 논의-에 대해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논의를 떠나기 전에, 거기에는 제가 논의하고 싶은 다른 부분의 영역도 있습니다. 그건 각주로 제가 따로 적어놓은 것 입니다, 그 부분은 전에 제가 따로 분리해 놓았습니다. 당신은 우리가 걱정하는 것에 대해 – 그 반대가 올바른 방향으로 발생하여 영혼을 마치 하프의 조화처럼 생각하기 위해 회상해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기본적으로 제공된 보이지 않는 것들은 부서질 수 없다는 생각에 대한 반증사례입니다.

그러나 조화는 파괴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은 파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인식했습니다, 제가 말했듯이, 보는 것이, 논쟁에 대한 문제이건 아니던, 그것은 그 자체로써도 흥미로운 제안입니다. 왜냐하면 그 제안은 마음은 육체로부터 오며, 영혼은 육체를 향하며, 마치 현악기의 조화처럼 말입니다, 저에게는 초기에 했던 접근에서 물리학자의 마음에 대한 견해와 같아 보입니다.

 

조화 같은 것은 잘 조율된 악기로부터 만들어져서 얻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영혼 또는 마음은 잘 조율된 육체로부터 얻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플라톤은 우리가 육체의 조화로써 생각하는 마음에 대해서 어떤 반박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또 저는 잠시 동안 이런 반박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물론, 만일 물리학자의 의심에 대한 관점의 우리에게 주는 억지스런 주장일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플라톤의 불멸의 영혼의 적용에 대한 논의가 아니든 맞든, 그는 분명히 물리학자의 관점에서 반대하는 여전히 어떤 좋은 논의를 줍니다. 그러나 이런 반박들에 대해서 생각한다면, 그것이 오직– 조화라는 유추에서 오는 유일한 의미라고 해도- 마음 속에 담아놓는 것은 중요합니다, 유추로써 말입니다. 맞죠? 주장은 그렇지 않습니다, 또는 적어도 그렇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를 믿는다면, “마음은 조화다.” 그것은 더욱이, 마음은 마치 조화와도 같습니다; 조화는 몸에게 있어서 마치 하프의 조화와 같습니다, 어떤 것은 잘-조율되고, 기능되는 물리적인 물체에 의해서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잘 조율된 악기는 멜로디와 조화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잘 조율된 것은, 적절하게 몸에 기능하여 정신적 활동을 형성해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제시입니다. 그리고 또 만일 그것이 어떤 방법으로 마음이 조화와 완벽하게 같지는 않다고 밝혀지더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물리학자의 관점이 잘못되었다고 보이지는 않을 것 입니다. 음,

그래서 플라톤의 논의가 무엇인지 빨리 보기로 하죠, 첫 번째로 – 그것은, 제가 생각하기로, 흥미로운 논의죠 – 플라톤이 말하길, 조화는 분명히 하프 그 자체가 있기 전에는 존재할 수 없죠. 맞죠? 그 하프의 음악 같은 것은 물리적인 하프의 구성적 요소가 있기 전에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만일 마음이 물리적인 육체의 적절한 기능에 의해서 형성되는 어떤 것이라면, 그리고 분명히 진짜로 마음이 물리적인 육체의 창조 전에 존재할 수 없는 것이죠. 그러나, 플라톤은 이미 대화의 초기에 영혼은 육체가 존재하기 전에 존재한다고 논의했습니다. 그것이 회상으로부터 오는 논의였습니다.

만일 영혼이 육체보다 전에 존재한다면, 그건 조화와는 같지 않습니다, 물리적으로 그것은 분명 거짓입니다. 그러나 저는 그 논의를 찾지 못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왜 제가 회상의 설득으로부터의 논의를 찾지 못했는가를 설명하길 시도했습니다.

저는 만일 우리가 영혼이 육체의 존재 전에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에 대해서 할 수 있기를 분명하게 동의하길 원합니다, 우리는 분명 영혼은 조화와는 같지는 않다는 것에 대해서 동의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저는 회상에 대한 논의가 성공하는 것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플라톤의 두 번째 반박은 조화는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프의 음을 내는 것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럼, 조화로움은 다른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더욱이, 다른 정도로 말입니다. 어떤- 악기-는 적어도 조화롭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연주하느냐에 따라 조화는 크고도 적게 차이가 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혼이 차이가 있는 것과는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당신은 영혼을 가지고 또는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것이 논의이고, 그것이 반박입니다. 당신은 마음을 가지고 있거나,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우리는 영혼이나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물론 만약 그것이 옳다면 다시 우리는 결론을 내야 합니다, 그럼, 마음이 어쨌건, 몸에 있어서 조화와는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가 마음이 어떤 정도를 가지고 있다는 것에 확신하지 않습니다. 그건 적어도 – 영적인 면에서 정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능의 다양한 정도, 창조력에 다양한 정도, 이성적인 면에 있어서 다양한 정도, 의사 소통 면에 있어서 다양한 정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건, 우리는 말할 수 있습니다, 하프의 역할을 하는 것 같은 것은 다양한 정도를 가져올 수 있다고 말입니다- 적어도 조화- 육체가 기능하는 것에 있어서 마음의 관점에서 보면 그건 여러 단위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두 번 째 반박은 저에겐 별로 강력해 보이지 않습니다.

 

세 번째 반박은, 플라톤은 지적하길 - 소크라테스는 지적하길 – 영혼은 악마적이거나, 못되거나 선할 수 있고, 착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당신은 누군가가 둘이서 다투고 있을 때에, 우리는 그들에게 조화로운 영혼을 가지라고 말해야 합니다. 만일 영혼이 육체에 있어서 마치 악기의 조화와도 같거나 영혼이 조화로울 수 있다면, 그건 우리가 조화에 대하여 조화로울 수 있다고 말 할 수 있어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혼의 조화에 대해서 말하는 것과 같이, 우리는 –만일 영혼이 육체에 조화로울 수 있다면- 우리는 조화의 조화로움에 대하여 말해야 할 것이고 그럴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반박이 만들어 내는 것에 대해 꽤 확신하지 않습니다. 요점은 사실 우리 자신들에게 떠오르는 것과 같이 영혼은 단지 말 그대로 조화라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제시라는 겁니다. 그건 단지 조화와도 같아 보입니다, 물리학자가 말하듯, 육체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악기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조화와 같은 방법으로 말입니다. 그것은 같은 방법입니다, 육체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마음이나 정신적인 활동 말이죠. 우리는 마음이 진실한 조화거나 모든 것이라고, 진실된 조화가 육체의 진실한 것이거나 진실한 마음의 것이라고 말하지 않아도 됩니다.

 

여전히, 저는 이 반박에 조금 더 말해야 하는 어떤 책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우리가 영혼이나 마음이 선하거나 못되거나 한 것이 진실이고, 우리는 조화의 다른 종류에 대해서 말하는 것과 같아 보입니다. 그것들은 – 어떤 조화로움 들은 다른 것보다는 달콤합니다; 그것들 중 어떤 것은 더 부조화스럽고, 무조성을 가지고 있거나 불협화음을 이룹니다. 비록 우리가 일반적으로 조화가 얼마나 조화스러운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아도, 비록 조화로운 것들이 다른 종류나, 다른 것들과 같이 보인다고 해도. 그리고 그건, 우리가 정말 서로 다른 종류와 다른 종류에서 올 수 있는 마음에 대한 비유를 한 것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세 번째 반박이 별로 매력적이지는 않아 보인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플라톤은 하나 이상의 반대를 가집니다. 그는 말합니다.”보세요, 영혼은 육체에 대한 지시를 할 수 있고, 육체를 쥐고 흔들고, 그리고 정말 육체에 반대할 수도 있습니다. ” 당신도 알다시피, 당신의 육체는 초콜릿 케이크의 한 조각을 원한다면 , 당신의 영혼은 말합니다. “아니야, 안되. 넌 지금 다이어트 중이잖아. 먹지마.” 맞죠? 당신의 영혼은 육체에 반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영혼이 단지 육체의 조화라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결국, 하프의 조화로움에 하프 그 자체는 영향은 줄 수 없습니다. 모든 보통 의사소통은 한 방법입니다, 마치 우리가 하듯 말이죠. 하프의 경우를 보면, 그리고 음악적인 것과 듣기 좋은 것과 조화는, 하프의 물리적인 상태가 듣기 좋아지는 것에 대한 방법에 영향을 줍니다. 그러나 하프의 조화로움은 절대로 변하지 않거나 또는 변하거나, 하프가 물리적인 것과 같은 방법으로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육체가 영혼에 영향을 주는 것 뿐만 아니라, 영혼이 육체에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제시는 결국 하프와 조화와는 정말 같지는 않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는 그건 정말 흥미로운 반박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생각하게 되고, 적어도 이 시간을 통해서 그와 같은 종류의 부분을 다루어 보게 되었습니다, 영혼은 육체에 영향을 줍니다, 우리는 질문해야만 합니다, 어떻게 그것이- 물리적인 관점에서 옳고-그렇게 할 수 있는가? 만일 마음에 대해서 말할 때 단지 육체가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방법이라면, 어떻게 육체의 능력이 육체 자체에 영향을 줄 수 있는가?

 

저는 반박의 답변은 아마도 이런 것과 같다고 봅니다, 우리가 영혼이 육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에 대해 말할 때 정말 어떤 일이 있어나는 것인지 – 우리가 어떤 육체가 육체에게 영향을 주는 작용에 대해서 말할 때- 그런 어떤 정신적인 작용은 육체에 영향을 줍니다. – 어떻게 그것인 보통 일어나는 것입니까? 그럼, 육체가 담당하는 물리적인 부분같은 것이, 적절한 작용아래 있다고 한다면, 육체에 대한 적절한 정신적인 작용은, 육체의 다른 부분에 바뀔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 봅시다. 육체에 의해서 지금 저는 말하고 있습니다. “손가락을 움직여봐.” 저의 영혼은 저의 몸을 도구로 가집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합니까? 그것이 저의 마음이 저의 몸을 도구로 가진 것입니다. 어떻게 물리적인 관점에서 그게 발생할 수 있나요? 그럼 저의 마음은 육체를 도구로 가졌습니다, “손가락을 움직여봐” 이것은 단지 제 육체의 한 부분입니다, 제 두뇌, 제 손가락들의 근육들은 육체의 또 다른 부분의 기관입니다. 그래서, 비록 우리가 육체에 영향을 주는 마음에 대해서 말 할 때에도, 직접적으로 여기에서 일어나는 일은, 물리학자가 말한다면, 그것은 육체의 다른 부분에 의한 육체의 다른 부분이 영향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프와 같은 것이 될 수 있습니까? 그런, 아마도 아닙니다. 맞죠? 아마도 하프는 다른 부분이 다른 부분에게 영향을 주는 너무 단순한 기계일 것 입니다. 심지어 그것이 사실이라도, 그것은 우리에게 물리학자의 관점에 반대할 수 있는 좋은 이유를 주지 못합니다. 그건 단지 우리에게 하프는 마음이나 육체와는 많이 닮지 않았다는 생각에 대한 이유를 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그림의 시작일 뿐입니다, 물리학자의 그림에서 말입니다. 여전히, 비록 우리가 하프와 음악성에 대한 생각을 했음에도, 저는 우리가 유사한 것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저의 하프의 현을 퉁겼다고 가정해봅시다, 어떤 음을 만들어냈습니다. 우리가 알 듯이, 그 현의 진동은 다른 현의 진동에도 영향을 줍니다. 그리고 또, 갑자기, 하프에 어떤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하프의 다른 부분에도 영향을 줍니다. 제가 연주하는 어떤 하프의 현은 아마도 하프 안에서 어떤 종류의 배음을 일으킬 것 입니다, 하프의 진동은 다른 여러 가지 방법들 안에서 조정됩니다. 그럼, 그것은 유추가 됩니다- 아마도 전의 비유와는 같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제 육체가 마음에 영향을 주는 것에 있어서는 미흡한 비유지만-만일 저의 육체의 부분에 영향을 주는 것이 다른 육체의 부분에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그럼, 반대로, 저는 플라톤에게 약간의 신용을 주기 위해서 물리학자의 관점을 사용해서 충분히 심각하게 비판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가 집필할 당시 우리가 지금 가지고 있는 기계와 같은 구체적인 것이 없었기에, 플라톤은 단순한 기계나 음악적인 기구와 같은 것을 사용해서 물리학자의 상황을 보는 것과 같은 비판은 없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신용을 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또한 반대의견도 주고 싶습니다. 그가 단지 물리학자의 관점에서 본다면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좋아요.

 

이제, 우리의 대화에서 제가 고려해보고 싶은 또 다른 논의입니다. 그리고 영혼의 단순성이 주는 것에 뒤따라서,

 

거기에는 적절한 설명을 구성하는 것에 대한 아주 길고 복잡한 논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건 또한 소크라테스가 그의 생애의 어떤 부분에서도 말하고 있고 그가 사물에서 적절한 설명을 찾으려는 노력을 보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목들은 우리의 목적들을 위해 아주, 아주 어렵지만 행복하게도 거기에 정말로 갈 필요는 없습니다.

 

대화가 종료되기 전을 통해서, 거기에는 또 하나의 다른 논의가 있습니다. 제가 대신 말하겠습니다. “그 필수적인 요소에 대한 논의” 지금 다시 하는 것은 우리가 가지지 않았고, 가지고 있지 않은 때, 우리가 오늘날 가진 모든 개념적 기구가 없었던 그가 적었던 시기에 이해될 수 있는 단락으로 마음 속에 있을 만한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최초로 이 연극에 넣고자 시도한 어떤 본능을 타고났습니다. 그리고 또한 비록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그는 –저는 논의의 윤곽선 또는 재건축과 주장이 실제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서, 이것은 정말 플라톤이 인정되지 않는 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플라톤에게 엄청난 신용을 주고 싶습니다. 저는 비록 우리가 그가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이 볼 수 있었다고 해도, 그는 그의 방법으로 오늘날 우리가 혼동하는 문제를 문제의 난국을 통해서 자신의 방법으로 보려고 시도했습니다.

 

어떻게든, 그 방법은 우리가 마지막 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합니다. 그 방식은 필수 속성과 우발적인 속성의 차이입니다. 필수 속성은 주어진 개체가 꼭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항상 그것이 존재하는 한 있어야 합니다. 우발적인 속성은 반대되는 것을 가지고 있을 수 있고, 그것의 전체적 존재 자체에서 일어날 수도 있고, 그것 없이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제 차는 파란색입니다. 그것은 제 차의 변칙적인 요소입니다. 저는 페인트 가게에 가서 그 차를 빨간색으로 칠해버릴 수도 있어요. 그것은 더 이상 파란 색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차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제 파는 파란색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빨간 색은 아니죠; 그것은 빨간 차로 존재할 수 있죠. 그리고 심지어 저는 절대, 제 차가 존재하는 전체적인 과정 동안에, 페인트를 한 적이 없어요, 그래서 그것이 창조되던 순간에서부터 그것이 박살이 나는 순간에도 그건 언제나 파란색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차가 빨간 색이 될 수 있다는 그 생각이 완벽하게 이해됩니다. 거기에는 그 차가 빨간색으로 존재한다는 생각을 이해할 수 없게 하는 것이 없어요. 그래서 그것이 불확정적인 요소의 예입니다.

 

그리고 저는 연필을 가집니다, 그리고 그 연필은 모든 것이죠. 그리고 저는 절대 그것을 부러뜨리지 않습니다만 그것은 부수어 질 수 있습니다. 그것은 변칙적인 요소입니다, 연필이 부서진 것이든 부서지지 않은 것이든 말이죠. 저는 어떤 하나의 준 금속을 가집니다; 그것은 그것이 곧건, 구부러지든 변칙적인 요소입니다. 저는 그것을 구부립니다; 이제 그것은 구부러졌습니다. 저는 분명히 그것을 다시 펼 수 있습니다.; 이제 그것은 펴질 수 있습니다. 많은, 많은 속성들이 변칙적인 속성입니다. 당신은 행복합니다, 당신은 슬픕니다, 당신은 깨어있습니다, 당신은 잠이 듭니다.

 

그러나 어떤 속성은, 반대로, 필수 속성입니다. 특수한 것은 우리가 생각하기로, 그것은 어떤 것을 가질 수 없거나 질문조차 하지 않는 요소입니다. 플라톤은 불의 경우와 뜨거움의 경우에 대한 예를 주었습니다. 불은 뜨겁습니다. 그것은 그것 자체의 속성을 가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변칙적인 요소가 아닙니다; 그것은 필수 속성입니다. 그것은 비록 어떤 불이 뜨겁지만 어떤 불은 차갑거나 또는 “응 그래, 그것은 단지 불의 모든 기간 동안에 일어날 수 있거나 불은 뜨겁지만 우리는 그것을 차갑게 만들 수 있어” 같은 것이 아닙니다.; 차가운 불 같은 것은 가능 할 수 없습니다. 당신이 불을 가진 이상, 그것은 뜨겁습니다. 뜨거운 것을 없앤다면, 당신은 불을 없애는 것이 됩니다, 당신은 불을 파괴한 것입니다. 당신은 그러면 차가운 불을 가질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필수 속성이 예입니다.

 

그것은 말합니다, 플라톤은 보기에, 제가 우리가 적어도 대략 모두 볼 수 있도록 그런 사실, 그것이 일종의 구분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런 문제들을 명확하게 보기위해 그의 방식으로 보려고 시도했습니다.

 

오늘날 논쟁적인 질문으로 남은 것은—여전히 오늘날에도 말입니다. 우리가 거기에 도달하는 방법에 정말 필수적인 요소가 있을까?하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무엇이 필수 요소일까요? 무엇이 변칙적인 요소일까요? 물은 이상화탄소로 이루어져있습니다. – 그것은 원자의 구성요소로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물의 필수 요소 입니까? 당신은 이산화탄소가 없는-산소와 수소가 없는 물을 가질 수 있습니까? 그럼, 어떤 사람들은 옳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는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오, 그것은 필수 요소의 경우야. 물에 관해서는, 당신은 원자의 구조형태를 가지고 있어야만 해” 좋아요, 그것이 개념입니다.

 

이제, 이 방식으로 무장하고, 플라톤은 말합니다, “여기 영혼의 필수 요소가 있습니다. 어디에든 영혼이 있다면, 그것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이제 그것이 의해서 “살아있는 것”은 저는 플라톤이 의미하고자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나 또는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고 받아들입니다. 당신이 영혼을 가지고 있든, 당신은 무언가에 대한 사고를 할 수 있습니다.

 

저는 플라톤의 주장을 반대하는 시도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지만 저는 그럴만한 이치에 맞는 이유를 찾지 못합니다. 저는 마음에 대해서 생각하고, 자신에게 묻습니다. “마음은 생각이 없이 있을 수 있을까?” 아마도 아닐 겁니다. 아마도 마음에 대한 정의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일 겁니다. 당신이 불을 뜨거운 것이 없이는 가질 수 없는 것과 같이, 당신은 생각하는 것 없이는 마음도 또한 가질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가능하다는 단어를 말하려고 할 때 중요한 것입니다. 맞죠? 그것은 모든 마음이 항상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저는 저녁 시간 동안에 제 마음은 생각하지도, 꿈꾸지도 않는 다는 데에까지 가정합니다. 여전히, 심지어 생각을 하지 않는 시간에도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말합니다, “아니요, 생각할 수 없는 마음이 있습니다.”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그럼, 그건 단지 마음이 아닙니다.”

 

그럼 좋아요, 아마도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마음의 필수적인 요소가 아닐 수 있습니다. 플라톤은 마음이 영혼의 관점에서 본다면, 아마도 생각이 가능하다는 것은 영혼의 필수적인 요소라고 볼 것 입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기로는 플라톤이 의미하고자 하는 것은 그가 마음이 필수적인 것이라고 제시할 때- 영혼은 필수 적으로 살아있습니다. 그것은 필수 요소입니다, 우리는 적용할 수 있습니다, 영혼의 경우를 말이죠, 그것이 살아 있다고 말입니다. 그것이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믿기 어려운 주장이 아닙니다.” 그것을 소크라테스에게 주기로 하죠. 그러나 그것을 소크라테스에게 주고 나면, 플라톤은 지금 그가 많이 해냈다고 생각할 겁니다. 결국, 그것은 필수 요소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불의 필수 요소는 뜨겁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두 가지 가능성만을 의미합니다. 당신이 불을 가지면, 그것은 뜨겁다는 것과 불은 파괴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적용됩니다. 그것들은 오직 두 가지 가능성입니다. 당신은 –만일 뜨거운 것이 불의 필수 요소이고, 또한 당신이 불을 가졌고 그것이 뜨겁다면, 또는 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적용됩니다. 그것은 뜨겁지 않은 불, 차가운 불의 세 번째 가능성이 아닙니다. 그래서, 만일 당신이 삶을 영혼의 필수 요소로 주장한다면, 그것은 오직 두 번째 가능성들이 될 것입니다; 당신이 영혼을 가졌다면 그것은 살아있는 것입니다. –지혜, 그것은 생각할 수 있는 것 –또는 영혼이 파괴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플라톤은 우리는 다른 가능성을 배제할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그건, 이 특별한 필수 요소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에 의해서 가능합니다. 불이 우리를 덥게 만드는 필수 요소로서 생각하는 것에 대한 생각은 파괴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플라톤은 생각합니다. 그 본질적으로 살아있다는 생각에서 그것의 파괴된다는 가능성을 배제합니다.

 

사실, 당신이 바로 그 단어를 말할 때 당신은 어떤 힘을 느낍니다, 플라톤의 입장에서 뽑은 것은. 만일 영혼이 본질적으로 살아있다면, 그것이 살아있을 겁니다, 그것은 파괴되지 않습니다. 즉, 제 생각은, 적어도 플라톤이 앞으로 의미하고자 하는 주장의 종류를 앞으로 내보여야 함입니다. 그는 구문의 관점에서, “불후”라고 그는 말합니다. 저는 실제로 여기 칠판에 적은 것처럼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림 9.1]

 

첫째로- 삶은 영혼의 필수 요소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것의 의미를 생각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영혼은 불사라는 것이 따른다는 것입니다. 결국, 만일 영혼이 – 만일 필수적으로 살아있다면, 그것은 죽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불사라는 것은, 그러나 결국, 죽을 수 없는 불사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영혼은 죽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파괴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은 파괴될 수 없습니다. 이 플라톤의 논의와 같은 것을 본다면. 첫째로, 삶은 영혼의 필수적인 것이나, 우리는 영혼은 불사라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영혼이 불사하면, 그것은 죽을 수 없습니다. 만약 그것이 죽을 수 없다면, 그것은 파괴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파괴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혼은 파괴될 수 없습니다. 기억하세요, 일단 우리가 영혼이 살아있다고 한다면, 거기에는 오직 두 가지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만일 필수적으로 영혼이 살아있다면, 거기에 우리가 영혼을 가졌다고 한다면,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고, 사고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는 그것은 파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영혼이 파괴될 수 없다면, 그것은 영혼이 살아있는 동안에, 생각할 수 있는 동안만 가능할 것으로 남습니다.

 

그럼, 당신은 그 요소가 실제로 적용이 되나 안 되나를 듣고 충격 받는 다고 생각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어디에 그것이 잘못되었는가는 어떤 종류의 생각의 모호함이 불사에 대한 생각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불사란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저는 단락의 해석에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림 9.2]. 만일 그것이 불사라는 것이라면, 그렇다면 그것이 아닙니다 , 그럼 뭐죠? 한가지 가능성은, 그것은 영혼이 존재할 수 없고 그것은 죽은 것이라는 겁니다. 그것은 어떤 한가지 가능성으로 해석됩니다. 어떤 것은 불사라고 말 하기 위하여 당신은 죽었을 때 영혼이 존재하는 것과 영혼이 존재하는 시간 동안 존재할 수는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죽음에 대한 두 번째 가능성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영혼은 파괴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그것은 불사에 대한,A와B, 이 두 가지 가능성에 대해서 아주 쉽게 혼동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초적으로, 이것은 플라톤에 대한 제 생각입니다.

 

그는 앞 뒤로 두 가지의 해석 사이를 왔다 갔다 하고 있습니다. 만일 생명이 영혼의 필수 속성이라고 한다면, 불사라는 우리가 절대로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것은 , 우리 손 안에 있는 한 영혼은 존재하고 그것은 죽을 것입니다.

 

같은 방식으로 해서 당신은 불의 어떤 부분도 당신의 손안에 쥘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불이 존재하면서 차가워진다는 것은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없습니다. 당신이 영혼을 가진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사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number입니다, 이것은 A라는 경우입니다.

 

당신이 살아있는 한 영혼을 가지기 때문에, 그것은 영혼이 존재한다고 하는 경우에 그것이 죽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것은 불사의 A의 한에서 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도, 그것은 여전히 할 수 있습니다, 논리적으로 말하면, 영혼은 파괴될 수 있습니다, 불이 꺼질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무언가 파괴될 수 없는 것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의 과정은 불사의 B의 경우입니다, 불사의 가장 강력한 의미입니다. 플라톤이 필요로 하는 것, 플라톤이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증명합니다. 영혼은 B의 의미로 불사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것은 영혼의 진실입니다. 그것이 파괴될 수 없다는 것에 대해 말입니다. 그러나 그가 A의 의미에 모든 권한을 준다면: 당신은 당신이 죽었을 때에 절대로 영혼을 가질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살아있는 것은 영혼의 필수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론상의 사실은 영혼이 그 자체가 어디에서 살아있다는 것이고, 영혼이 파괴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불이 뜨겁다는 것에 대한 사실로부터 불이 파괴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말입니다.

 

그것은, 제가 생각하기로는, 이런 문제들에 대한 생각으로 혼동하기가 매우 쉽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불사에 대한 생각들을 당신의 방법으로 명확하게 볼 수 있는 방법은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 불사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하는 것 없이 필수 요소에 대한 언어를 사용해서 명확하게 보는 방법은 어렵습니다. 여전히, 저는 여기서 무슨일이 일어났는가에 대한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영혼이 살아있다는 필수 요소라는 플라톤의 생각을 받아들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영혼이 살아있으며, 그리고 또한 A의 의미로 불사한다는 것에 대한 것을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단우리가 그런 분류로 통해서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그 불사에 대한 생각의 경우는, 우리는 불사의 의미에 대해서 B의 의미, 파괴될 수 없는 것으로 다시 이해하게 되는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저는 생각하기에, 그렇게 뒤따르지 않습니다. 좋아요.

 

그럼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합니까? 플라톤은 불멸에 대한 논의의 어떤 단계를 통해서 갔어요, 그것은 영혼의 파괴될 수 없는 것에 대한 것과, 그리고 저는 그것들이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들 중 누군가는 그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왜 우리가 지난 주 동안 시간을 보냈고, 또 그것들을 다루었는가에 대한 이유입니다. 그러나 그것들 중에 아무것도, 제가 볼 수 있는 한에서, 성공한 것은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거의 당신에게 이것이 지난 주 또는 두 번째 주에서 우리가 바로 그 불멸의 영혼의 존재에 대한 다양한 다른 논의들에 대해서 했던 것을 생각나게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저는 이런 논의들도 또한 어떤 것도 적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제가 볼 수 있는 한, 그 논의는 불멸의 영혼에 대한 것을 제공해야만 합니다. 불멸의 영혼을 따로 놓는다면, 그 논의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영혼에 대한 생각은 그런 방식으로 바보 같지 않습니다.: 그것은 생각해볼 가치가 없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물어보게 합니다, “우리는 불멸의 영혼을 믿을 만한 어떤 좋은 이유가 없을까요?” 그리고 그것은 실제로 이런 이유들을 말하는 시도를 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보는 논의를 더 주의 깊게 봐야 하는 것에 대해서는 강제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영혼은 없다는 것에 대한 결론을 내릴 준비가 되었습니다. 영혼을 믿어야 하는 좋은 이유는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가 그렇게 결론 내립니다- 적어도 영혼을 믿는 것에 대한 좋은 충분한 이유는 없다는 것을- 그리고 그래서 저는 그것이 없다고 결론 내립니다. 그리고 이 관점은 이 클래스의 남은 부분에 대한 추측이 된다는 말이 됩니다. 저는 죽음에 대해서 계속해서 생각해 보도록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물리학자의 측면으로부터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 볼 것 입니다. 마음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신체활동에 대한 그 모든 것에 대한 추측은 신체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신체의 특별한 능력인 정신적 활동을 이야기 할 방법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육체를 떠난 어떤 것도 없습니다, 불멸의 영혼도 없습니다.

 

이제, 저를 고발하려는 질문의 시작의 부분은 불합리하지 않습니다. 결국, 제가 하려고 했던 생각입니다.저는 영혼의 팬에게서 부담이 될 것 같은 모든 방어가 될 것들을 넣었습니다. 저는 이원론자로써 물었습니다. “ 당신의 입장을 믿어야 하는 어떤 이유를 주시오” 그리고 저는 이원론의 입장에서의 논의에서 이원론을 지지하는 것은 별로 설득적이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평하게 말이죠, 물리학자의 견해와도 같나요?

 

물리학자의 편에 서는 것은 저는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물리학이 진실인지 믿는 어떤 이유를 줄 수 있나요?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어떤 이유를 저에게 주세요.” 그 논의는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물리학자의 편을 들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고 저는 말합니다. “영혼을 믿지 말아야 하는 어떤 이유를 주지 않겠습니까?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 어떤 증명을 해 주세요.” 그것이 그렇게 불공평합니까?

 

그래서 멈춰서 우리 자신들에게 질문을 해 봅시다, 어떻게 당신은 무엇이 존재하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또는, 그것을 가장 가벼운 더 나은 방법으로 적용할 수 있고, 언제 당신이 어떤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나요?

 

우리는 우리가 믿지 않는 것의 존재를 언제 가지게 되나요, 어떻게 우리는 그것들을 믿지 않게 정의를 내리겠다는 결정을 하게 되나요? 드래곤 같은 것의 예를 들어봅시다. 이 수업시간에, 이 방안에서, 모두가 드래곤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고 가정해봅시다. 제가 어떻게 어떤 드래곤 없다는 것을 증명할까요? 제 말은, 드래곤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나요? 그러나 그것들은 없습니다. 우리는 드래곤이 있다는 사실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당신이 계속해서 그것들이 없다고 믿기 위해서 당신은 드래곤의 존재를 믿지 않는 것을 필요로 하지 않나요? 저는 이 방의 누구도 제우스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고 상상합니다, 그리스의 신 제우스 말이죠. 제가 어떻게 제우스의 존재를 부정할까요? 우리가 제우스가 존재하지 않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을 의무적으로 하지 않아야 하나요? 그러나 어떻게 당신은 그렇게 하나요?

 

그럼, 놀랍지 않게, 저는 실제로 당신이 그러한 것들에 반대하기 위한 의무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당신이 어떤 의무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당신은 단지 아주 신중하게 여기에 온 지적 의무에 충실해야 합니다. 드래곤의 경우로 넘어갑시다. 우리가 용을 위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음, 당신이 필요로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드래곤에 대한 당신의 회의를 정당화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반박하기 위해여 모든 논의는 드래곤을 대신하여 제공되어야 합니다. 나의 아들은 굉장히 멋진 사진이 있는 드래곤에 관한 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중의 하나는 제가 저의 드래곤에 대한 회의론을 정당화시키는 데에 필요합니다 사진에 대하여, 또는 그림, 또는 당신이 가진 것에 대해 설명하기 위하여 말이죠, 비록 정말로 드래곤이 없다고 한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럼, 이것들이 단지 그림들이라도, 그리고 사람들은 그들의 상상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사진들 같은 것을 보는 것은, 오늘날 컴퓨터를 이용해서 그래픽으로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당신은 사진 같은 것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포토샵을 가지고 존재하지 않는 것을 무엇이라도 마치 사진처럼 만들 수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 어떤 유니콘도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까? 그럼, 저는 유니콘의 각종 보도 목격담을 보고 그들에게 설명하려고 시도합니다. “그것은 당신도 알 듯이, 유럽사람들이 , 코뿔소를 처음으로 본 것이야. 그것은 일종의 말이 큰 뿔을 가진 것 같이 생각나게하니깐. 그리고 아마도 어디서 또 코뿔소를 보고 와서 또는 다양한 유니콘의 레포트로부터 온 것이야. 그 다양한 유니콘의 뿔들은 다양한 수집품들 중에서 제공되는 것들이야, 자주 생물학자들에게 연구되어져서 일각고래뿔, 고래로부터 온 뿔로 판명이 나고 그리고 다른 것들로도 판명이 났어.” 당신은 각각의 증거가 제공하는 정체를 폭로하다가 유니콘의 지지자인 당신이 틀렸음을 알게 됩니다. 당신은 왜 그것이 설득력이 없는가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끝나면, 당신은 말하기 위해서 정의내리겠죠, “당신도 알듯이, 내가 말 할 수 있는 한, 어디에도 유니콘은 없어, 내가 말할 수 있는 한, 어디에도 드래곤은 없어” 비록 당신이 지구 표면에 있는 어떤 모든 동굴도 둘러 보아야 하는 의무를 가진 것은 아닐지라도 “오, 어떤 드래곤도 거기에는 없어, 어떤 드래곤도 거기에는 없어 어떤 드래곤도 거기에는 없어 어떤 드래곤도 거기에는 없어, 어떤 드래곤도 거기에는 없어” 당신은 드래곤의 존재에 대한 회의를 가지게 된 이상 당신은 드래곤의 존재에 대해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당신이 해야 할 것들이 더 많아졌습니다. 적어도 몇 가지 방식들은, 당신이 생각하는 그 바로 그 생각의 종류 같은 것들에 대해서 논의를 계속해 나아가서 우리가 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것은 단지 아닙니다 – 드래곤을 다시 들어서; 그것은 단지 드래곤을 믿는 것에 대한 좋은 이유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그 드래곤에 대한 생각은 아마도 과학적으로 이해될 수 없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과학이 주어졌을 때 말입니다, 드래곤들은 불로 숨을 쉽니다. 그래서 그들의 배꼽 안에 불을 가지고 있습니다. 산소가 부족하거나, 없이 말입니까? 그들의 배꼽 안에 불이 있다면 왜 그들의 장의 막이나 무엇이든지 파괴하거나 불태우지 않나요? 물론, 당신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가정합니다, 드래곤이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을 기도합니다. 그리고 만일 당신이 할 수 있다면, 그리고 당신은 여남은 이유로 그것들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당신이 어떤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해도 그것을 믿지 않는 다는 것을 정의 내리는 것이 불가능할 수 있습니다. 저는 유니콘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지 않습니다. 저는 어떤 유니콘도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앞이마에 뿔이 하나가 나온 말들이 존재할 수도 있겠죠. 그것은 단지 어떤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생각들로 무장하고, 영혼의 논의로 돌아옵시다. 저는 그러겠습니다,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는 물리학자로서, 불멸이라는 주장을 육체의 이전과 너머에 주는 것은, 영혼의 존재를 부정하기 위해서 입니까? “그럼, 여기에 영혼이 없다고 칩시다, 저기에도 영혼은 없습니다.” 아니오, 제가 필요한 것은 각각의 논의가 영혼의 존재에 대한 것을 제공되는 것보다 그에 반박하는 을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저는 영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주장할 필요가 없습니다. 저는 단지 영혼에 대한 사건을 부정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영혼을 믿어야 하는 좋은 이유가 있다면, 실제로 영혼이 없다고 믿는 이유가 되는 것으로 간주됩니다.

 

이제, 만일 당신이 원한다면, 당신은 계속해서 영혼이 불가능한 것을 증명하는 것을 같은 방법으로 하면 됩니다, 아마도 드래곤이 불가능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저는 불확신 합니다. 저는 그런 불가능한 주장이 특별하게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죠. 저는 영혼의 존재를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제가 불멸의 영혼 같은 것의 전제적인 것을 증명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제, 어떤 사람들은 말하겠죠, “그럼, 당신도 알듯이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에 대한 폭력이야, 그것은 불멸의 어떤 것을 가진 물리학에 대한 폭력이야” 그러나 과학은 지속적으로 그러나 과학은 끊임없이 주변의 전체적인것 또는 이전의 믿지 않는 속성을 계속해서 믿어오고 있습니다. 아마 그냥 돌아가다가 되지도 않는 영혼을 아직 믿고 있어요. 또는 현재의 과학의 규칙은 영혼의 가능성을 밖으로 보냅디다, 아마도 우리가 말을 계속해서 해야 한다면, "현재의 과학에 대한 것이 더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영혼의 존재에 대해서 우리가 부정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다. 저는 그것들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저는 영혼에 대한 생각이 어떻게든 일관성이 없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철학자들은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들 중의 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을 믿지 않는 다는 것을 정의내리기 위해서 영혼의 존재를 부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유니콘은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불가능하지만, 저는 그것이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정의내립니다. 왜냐고요? 왜냐면 유니콘에 대한 증거들은 더 이상 덧붙일 것이 없을 만큼 확인할 케이스들이 없습니다. 영혼은 불가능하지않습니다. 그러나 불가능합니다.

저는 그것이 없다고 믿는다고 정의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왜냐고요? 왜냐하면 당신이 볼 때, - 우리가 시도로 한 영혼의 존재의 증명에 대해서 볼 때, 그 논의 들은 별로 설득적이지 않습니다, 또는 저에게 그렇게 보입니다. 그래서 이 점으로부터 보았을 때, 저는 물리학자의 견해가 옳다고 추측합니다, 그리고 죽음의 문제를 생각하는 것을 통해서 그것들이 물리학자의 견해로부터 이해된다는 것을 생각하도록 하겠습니다.